가락교회111006요한계시록15장-(틈)-24강b-이 근호 목사 제 24강b
자, 두 번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7천사가 7인과 7나팔과 7대접에서 7천사가 동원됩니다. 천사는 인간들과의 관계, 인간들 사이의 문제에서는 거기에 천사가 나서질 않습니다. 천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지시를 받아서 숨어있는 비밀을 그냥 전파할 뿐이죠.
그래서 7일 동안 창조할 때 모든 틈에는 비밀이 들어가는 겁니다. 아까 제가 상상 계와 상징 계를 설명했는데 아무리 설명을 해도 사람들이 이걸 이해를 못해요. 다시 하면, 상상계라 하는 것은 뭔가 마음에 들은 것 같으면 ‘나 저거 되고 싶어. 나 저 가방 갖고 싶어. 바비똥인지 루비똥인지 가방 갖고 싶어. 나 저 차 갖고 싶어.’하고 일치 시키는 걸 상상계라 합니다. 일치 시키는 거. 그래서 인간이 상상 계에서 일치돼 있다가 새로운 분명히 내가 저 가방이 예쁘다고 사서 가방 들고 가는데 마주 오는 아줌마의 가방이 더 좋을 때, ‘저건 뭐야? 어, 이건 뭐지?’ 백화점에서 옷 사가지고 나오는데 더 좋은 옷 나올 때 삐지잖아요.ㅎ 차, 사고 난 뒤에 새 차 나올 때 삐진다니까.
그럼 어떻게 합니까? 뭐가 바뀌어요? 상상한 것 버리고 새로운 원하는 것을 상상하겠죠. 또 갖고 싶어 하겠죠. 그러한 질서를 가지고 상징 계라 합니다. 상징계라 하는 것은 어려운 말로 기표의 구조, 기표라 하는 것은 의미는 없어요. 그냥 바꿔치기, 항상 바꿔치기하는 거예요. 심지어 사람도 바꾸고 남편도 바꾸고 아내도 바꾸고 자신 빼고 전부 다 바꾸고 싶어요. 그래서 끊임없이 만족함이 없이 계속 뱅뱅 도는데 이걸 순환구조라 합니다. 교회도 옮기는 사람 보면 이 교회 갔다가 저 교회 갔다가 이 교회 갔다가 계속 옮기죠. 계속해서 바꿔치기 하는 겁니다. 그래서 대통령도 몇 년 만에 바꿉니까? 5년 만에 하잖아요. 오래 하면 지겨워요. 계속 바꿔치기 하는 거예요.
그래서 대통령을 카다피처럼 50년 하려면 어떻게 됩니까? 50년 동안 국민들을 상징 계에 놔두면 안 되고 상상계로 해야 되죠. ‘우리나라 김정일 같은 지도자 없습니다. 김일성 같은 분 없습니다.’ 라고 완전히 우상화 시켜 버립니다. 그게 바로 교회에서는 뭐냐, 목사가 오래 하는 것, 오래 하다가 늙어지면 지 아들한테 주고, 그게 뭐냐 상상 계의 세계 속에 인간은 점점 더 어린애가 돼 버려요. 퇴행한다.
여기 상상 계에서는 뭐가 없습니까? 차이나 차별을 무서워하고 차이와 차별을 뭐로 본다? 죄악시 본다. 그래서 오랫동안 교회 다닌 사람과 이야기를 해보면 이야기가 안 돼요. ‘예수만 믿어야지.’ 하거든요. 굉장히 믿음이 있어 보이잖아요. ‘그런데 그 예수가 어떤 예수입니까?’ 물어보면 답변을 안 해요. ‘그냥 예수야, 그냥 예수야.’ 가만히 보면 어릴 때 믿던 예수예요. 어릴 때 믿었더니만 암에서 나았던 예수, 어릴 때 믿었더니만 땅 값이 올라갔던 예수, 과거에 기적을 준 예수, 과거에 기적을 받았으니까 암에서 나으면 그 몸이 누구 몸입니까? 자기 몸이죠. 땅 값 올라가면 그 땅이 옆집 아저씨 땅입니까? 누구 땅입니까? 자기 것이잖아요. 그러니까 이건 뭐냐 자기 동일성, 결국 신과 예수라든가 성령이라든가 성신이라는지 모든 신은 자기 동일성을 확인해주고 후원해주는 그런 신을 믿는 거죠.
결국 누가 누굴 믿어요? 나는 믿을 것은 오직 나밖에 없는 거예요. 나에게 일어나는 변화를 가지고 신의 계시를 측정하게 되는 겁니다. 나에게 일어나는, 우리 가정에 일어나는 것 가지고 ‘나 신에게 복 받았다. 벌 받았다.’ 나에게 일어나는 현상들을 추적해서 그것으로 하나님이 이런 분이라는 것을 잡으니 성경이 보일 리가 있겠습니까? 성경 볼 필요 없어요. 그냥 간증만 몇 개 갖고 다니면 시간도 없고 한데...ㅎ
교회 장로님들 기도 하는 거 보세요. 어릴 때 10년 전에 기도해서 갑자가 교회 지으려 할 때 누가 땅을 기부했다고 전부 다 자기 자랑을 기도내용에 하잖아요. 성경 내용은 기도 내용에 안 들어갑니다. 성경을 안 보니까, 안 보고 옛날 내가 이 교회 기여했던 거, 도움 줬던 거, 목돈 바쳤던 거, 그것이 계속 장로로서 하나의 주식을 많이 갖고 있는 거예요. 그만큼 교회의 주도권을 쥐고 있다는 표시고 정치적이죠. 목사도 마찬가지로 그렇습니다.
이게 뭐냐 하면 바로 상상 계를 계속해서 이동시키는 그러한 상상계인데 세상은 이 둘(상상 계, 상징 계)로써 설명이 다 돼 버리죠. 뭐냐 하면 만들지 못하는 것은 새롭게 바꿔치기 하면 되니까, 집도 한번 이사가 보고 옷도 한번 바꿔보고 계속 바꿔줘서 지루함을 모면하고 권태로움을 벗어나는 것, 그래서 지다가 지루하다 싶으면 바꾸면 되고 가구도 책상도 새롭게 해 봤다가 칠도 한번 해 봤다가 이것이 자기 현실로 보는 거예요.
그런데 여기에 실재계, 분명히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저것은 바로 나다.’ 할 때는 분명히 그게 실재인 줄 아는데 이게 뭡니까? 상상 이예요. 상상. 이미지, 심볼, 언제 바뀔지 모르니까, 이 둘은 환상 이예요.
실재계는 숨어있는 거예요. 그 숨어있는 게 뭐냐 하면, 내가 세상을 이렇게 보고 싶고 나는 이런 인간되고 싶은데 낯모르는 사건과 사태가 일어나면 내가 생각했던 상상과 상징과 전혀 다른 행동과 다른 모습으로 내가 눈에 띄게 되는 거예요. 이걸 충동이라 했어요.
충동이란 뭔 뜻이냐 하면 말릴 수가 없다. 이걸 한자로 말하면 뭡니까? ‘욱!’, 욱, 내가 입에서 욕을 하다니, 이런 나를 상상도 못하겠어.‘ 맞잖아요. 상상도. ’나는 이런 식으로 교육 안 받았어.‘ 뭡니까? 상징 계, 질서. 법. 언어.
그래서 이 차이가 뭐냐 하면 언어의 세계하고 몸의 세계가 달라요. 몸의 세계는 충동에 의해서 움직이는데, 언어의 세계는 뭡니까? 법과 질서와 윤리와 도덕으로 움직이는 것이 언어의 세계입니다. 자, 둘 중에 어느 것이 환상의 세계입니까? 언어가 환상이겠어요? 몸이 환상이겠어요? 언어가 환상이죠. 그런데 진리란 어디서 나와요? 언어에서 진리가 나와요. 미치죠, 이거.ㅎ
그러면 진리가 뭡니까? 진리란 곧 환각이고 환상 이예요. 그러면 진짜 진리는? 몰라요. 내가 내 몸을 모르는데, 내가 나를 모르는데 니가 나를 알겠느냐, 타타타, 나오잖아요.ㅎ 김국환 노래 있잖아요. 내가 나를 모르는데 니가 어떻게 나를 아느냐 이 말이죠. 이건 진리야, 이건 성경책이야. 이건 삼위일체는 이런 거야.‘ 다 뭡니까? 언어죠. 언어를 통해서 우리는 뭘 구축한다? 신학의 이름으로 신을 구축하죠. 그게 상징계라니까요. 그게 환상이라니까요. ’아! 그때 잘못 생각했다.‘ 몇 개월 가지 않아서 ’아! 그때 그거, 아! 아니네. 수정해, ‘ 언제 또 지 말을 바꿀지 몰라요.
하지만 속여도 속일 수 없는 것을 머리가 빠진다는 것, 계단에 넘어지면 근육이 끊어진다는 것, 그리고 나이 많으면 깜박깜박 건망증이 생긴다는 것, 이거 내가 원했던 겁니까? 암의 특징이 뭔지 알아요? 암의 특징이 암은 나를 뭐로 보느냐 하면 사람으로 보지 않습니다. 뭐로 보느냐, 막으로 봐요. 무슨 막? 암 세포가 기생하는 하나의 자기 막으로, 하나의 필름으로 본다고요. 위암이라 하는 것은 위에다가 암세포가 번지잖아요. 위는 누구 세계입니까? 분명히 나의 세계인데 암 세포는 누구 세계예요? 지 세계 아닙니까? 옆에 있는 거 다 잡아먹잖아요. 내 안에 암이 들어있는 거예요. 이거 어떻게 생긴 겁니까? ‘암아, 생겨라. 암아 생겨라.’ 했습니까? 지가 알아서 생겼죠. 유전적으로도 그렇고.
인간에게는 몸만 있지 이 몸이 ‘나’ ‘내’ 자아, 주체, 나라 하는 것은 몸에서 피어나는 부대효과예요. 표면효과, 그냥 허구적 망상에 해당되는 겁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그 허구적 망상이 있기 때문에 인간은 자기가 망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안다는 사실, 야! 어렵다, 어렵다. 내가 이야기해놓고 어렵네요.
이게 왜 그러느냐 하면 이것이 바로 예수님은 우리를 몸으로 보지 않고 망상을 품고 있는 영적 존재에서의 몸으로 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야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죄를 위해서 죽는 것이 의미가 있어요. 우리가 하나의 근육질이라면 하나의 단백질 뭉치라면, 단백질 뭉치를 위해서 내가 십자가에 못 박히고 하면 아무 의미가 없어요.
우리 인간이 육이거든요. 그냥 육체, 육체에서 자아가 발생된다는 것은 이것은 뭐냐 아까 첫 시간 처음에 이야기했어요. 뭡니까? 인간을 분명히 암각화에 붙어 있지만 그것이 뭔가 냄새를 피울 때는 이것이 어떤 경우라 했습니까? 언약적인 모양새를 드러낼 때 언약 적으로 포착이 됩니다. ‘너 그런 인간이지? 이스라엘아, 니는 우상을 섬겼지?’ 이스라엘은 우상 섬긴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근육질이 이상하게 생긴 송아지 같은, 충동이니까 아까 배운 거, 이상하게 좋아지는 거예요. 아, 사람 좋고 지가 좋은 것을 좋다는 데 이유를 왜 따져요? 좋다는데 무슨 이유가 있어요?
분명히 이야기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싫어요. 그리고 예수 믿지만 예수님이 싫어요. 이 세상에 누가 제일 좋은가 하면 나한테는 내가 제일 좋아요. 이건 신앙적으로 따지지 마세요. 왜냐 하면 이것은 충동에 관한 문제이니까, 그래서 모든 인간은 지금 예수님 있으면 또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죽입니다. 왜냐 하면 예수님이 나보고 죄인이라고 규정하니까, 간음한 여인이 현장에서 간음하다 바리새인들이 데려왔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간음한 여인이 밉습니다. 왜 미우냐 하면 율법을 어겼기 때문에 미운 게 아니고 자기는 간음을 안 했기 때문에 저쪽은 ‘간음을 한 것은 밉다‘ 한 것은 저쪽 여자 이전에 자기 내부에서 나는 간음한 나는 좋다? 싫다? 싫어요. 나는 간음 안 하고 말씀, 율법대로 지키는 내가 좋아요. 이미 좋다, 나쁘다. 가 내 안에서 결정된 상태에서 내가 싫어하는 그 모습이 있기 때문에 싫은 거예요.
어느 정도로 싫은가? 짱돌 들고 치고 싶을 정도로 싫은 거예요. 이것은 내 안에서 평소에 간음하고 싶은 나를 내가 짱돌로 죽이고 싶은 거예요. 이게 뭐냐, 아버지가 시킨 거예요. 이걸 성경에서 상징계라 해요. 상징 계는 법으로 돼 있어요. 법으로 돼 있어서 항상 일치 되고 싶어서 옳을까, 나쁠까, 선일까, 악일까, 따지는 것은 상징 계에 들어가요. 아! 나쁘구나, 하면 좋던 것도 버리고 또 새롭게 선한 것을 찾아가게 돼 있어요.
그래서 애가 양치질하고 난 뒤에 뭐라 합니까? ‘엄마, 엄마, 나 이 예뻐?’ 하죠. 뭔 뜻입니까? 엄마가 원하는 것이 내 안에 하나 장착돼 있는 거예요. 엄마의 법이 내 법이 됐으니까 ‘엄마하고 나하고 일치된 것 맞지?’ 라고 하는 거예요. 상상 계는 상징 계한테 허락을 받을 때 일치의 확인(도장)을 받는 겁니다. ‘참 잘했어요.’ 도장을 팍 찍죠.
그래서 인간의 모든 행동은 반드시 윤리적인 거예요. 뭐냐 하면 과정을 가진다. 이게 선한 것인지, 악한 것인지, 이건 강도도 마찬가지고 마약 중독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나쁜 인간도 교도소에 있는 어떤 나쁜 인간도 어떤 행동을 할 때는 반드시 그 행동에서 본인이 내려요. 이건 선한 것, 나쁜 것. 교도소 나쁜 인간들도 휴지 있으면 아무데나 안 버리고 휴지통에 버립니다. 남은 죽여도 휴지는 휴지통에 버립니다. 모든 행동은 선과 악에서 못 벗어나게 돼 있어요. 그게 자기한테 장착돼 있습니다.
그러니까 간음한 여인을 잡아왔을 때 돌로 치려고 했습니다. 그럴 때 예수님께서 그 사람들 보란 듯이 글씨를 썼죠. 쓰니까 그들의 틈, 주님께서 글씨를 쓰기 전까지는 그들은 완벽한 의인입니다. 그런데 새로운 언어, 새로운 글씨, 새로운 상징이 들어오게 되면 그들은 그들 손에서 돌멩이를 놓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할 때 돌을 놓고 갔다는 말은 뭡니까? ‘나 새로운 당신 앞에 나 죄 있는 거 맞습니다.’ 하고 가버리죠. 우리 같으면 어떻게 합니까? ‘예수님, 제가 죄인입니다.’ 할 텐데, 그렇지 않아요. ‘그래 나는 칠 수 없구나.’ 하고 그냥 가버리죠. 남은 것은 간음한 여인밖에 없죠. 그리고 그 여자는 이미 죽은 자가 되죠. 예수님께서 뭐라 하십니까? ‘ 내가 너를 정죄하지 않겠다.’ 했거든요. 이 말은 여자는 뭔 뜻입니까? 여자는 이미 뭐로 확정됐어요? 죄 있는 자가 되는 거예요. ‘여자여 너를 정죄하지 않겠다.’ 하니 이건 죄 있는 자가 되죠.
오늘 강의, 제일 중요한 대목입니다. 예수님의 모든 말씀이, 요한계시록의 모든 말씀이 우리로 하여금 뭐를 만들게 합니까? 죄 없는 자가 아니라 뭘 만듭니까? 새삼스럽게 죄 있는 자로 만드는 겁니다. 오늘 본문 2절에 보니까 유리바다를 건너가죠. 유리바다 건너간다는 소리를 듣는 순간 우리는 죄 없는 자가 아니고 뭡니까? 죄 있는 자가 되죠. 유리바다를 건너간다? 못 간다? 유리바다 건너서 천국 못 가는 사람으로 확인되는 겁니다. 그런데 유리바다 건너게 하는 것은 누가 온 겁니까? 하나님께서 7천사를 통해서 유리바다를 건너가게 하죠. 그러면 모든 공로가 모든 은혜가 누구 쪽입니까? 내 행위가 아니고 내 공로가 아니고 누구 공로입니까? 예수님 공로죠. 이게 성경 아닙니까?
성경을 우리가 보는 순간 우리는 죄인으로 규정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경 보기 전에 스스로 죄 있게 하면 안 돼요. 그건 지가 만든 죄라. 지가 죄 실천 한 것, 담배 꼬나물고 이런 게 죄 아닌가, 백날 인간이 지가 아무리 죄인 되고 싶어도 그건 죄인이 아니에요. 지가 연출한 겁니다. 그리고 아까 이야기했듯이 하나를 선택했다는 것은 하나를 놓친 게 되죠. 사람이 뭘 하나 선택했다는 것은 그만큼 나 때문에 피해보는 사람 발생하는 거예요. 자기는 최선을 다한 선택이지만 남들 보기에는 뭡니까? 니는 나한테 피해를 준 사람이고, 하지만 누구와 누구 사이에? 인간과 인간 사이이기 때문에 죄가 성립이 안 됩니다. 어쩔 수 없는 거예요. 우리 사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거예요.
사람이 완벽을 기하는 것은 정신병자예요. 세상에 완벽한 것은 없는 거예요. 우리는 어쩔 수가 없는 거예요. 아이, 키가 안 크는데 어떻게 합니까? 그걸, 키 안 크는데 저주해요? 제가 ‘도가니’란 글 쓴 거 봤죠? 그 말 못하는 애를 성폭행하는 것을 죄라고 하는데, 저주받을 짓이라 하는데, 그럼 성폭행 안 해도 키 작은 사람은 무슨 죄를 져서 저주받은 거예요? 어떤 사람은 집안 대대로 암 걸렸어요. 그래서 30대인데 암 걸려 있어요. 얼마나 착한 사람인지 몰라요. 우리교회 나와요. 착하고 얼마나 된 사람인데, 하지만 무슨 저주를 받아서 암 걸렸습니까? 부모 죄 때문입니까? 자기 죄 때문입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그런 거예요.
이 세상에는 사람이 할 수 있다는 게 없습니다. 그냥 사시면 그냥 사는 대로 사는 거예요. 그런데 그것이 죄라고 인정하는 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을 주실 때만 그 틈새로 뚫고 들어올 때만 죄인이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일곱(7일) 날 이 모든 것은 결국은 뭡니까? 무너지게 돼 있는 창조였습니다. 그게 어디 나옵니까? 히브리서 1장 10절, 한번 찾아볼까요?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라 그것들은 멸망할 것이나 오직 주는 영존할 것이요”
그렇다면 여기서 천지 창조를 한 것은 멸망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거죠. 그럼 우리 생각과 모순되잖아요. 멸망한 걸 왜 만들었어요? 이상하잖아요. 그런데 멸망할 것을 만들면서 거기서 그냥 멸망시킨 게 아니고 거기서 뭘 뽑아내요. 뭘 뽑아내느냐, ‘주의 나라는 영원하다.’를 이 무너짐을 통해서 뽑아내는 거예요.
주유소가 폭발하는 것은 유사석유의 유전기가 문제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무너지는 것처럼, 이것이(천지 창조) 무너짐으로써 주의 나라가 원래 천국은 영원했어야 한다는 것을 미리 보여주기 위해서 모형으로 지은 거예요. 소위 성냥개비로 지은 모형건물, 그 중에 누가 포함돼 있다? 인간이 포함돼 있어요. 그래서 고린도전서 15장에 보면 우리 몸을 무슨 몸이라 합니까? 흙에 속한 몸, 그 다음에 연약한 몸, 그 다음에 뭡니까? 아프니까, 후패한 몸, 취약한 몸 이러죠.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우리 몸은 뭐가 됩니까? 하늘에 속한 몸, 그리고 육에 속한 몸이 아니고 영에 속한 몸, 땅에 속한 몸이 아니고 하늘에 속한 몸, 흙에 속한 몸이 아니고 영광에 속한 몸, 이렇게 하죠. 그 가운데 이렇게 몸이 바뀌는데 뭐라고 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있는 거예요. 우리 후패한 몸이 영광스러운 몸이 되는데 반드시 우리 몸은 후패한 몸에서 영광스러운 몸이 되면서 우리 몸은 뭐로 변해야 되느냐 하면, 죄로 변해야 됩니다.
그래서 죄로 되기 위해서는 여기 말씀, 율법이 개입돼야 돼요. 그래서 ‘율법아, 너의 쏘는 어디 있느냐’ 결국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만들고 죄인 만들고 율법을 쏴 대서 우리로 하여금 죄인으로 저주받게 했는데 여기 예수 그리스도께서 같은 율법에 속해서 예수님이 오셔서 죽음 가운데서 먼저 부활하심으로써 이 죽음 가운데서 부활하는 이 코스를 여기다 그대로 적용시켜 버리죠. 대입해 버리면 율법 준 것도 죄인 된 것도 다 누굴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영존하심을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가 하나의 재료로서 사용된 겁니다.
그러니 이 암각화가 냄새피우는데 죄를 피우니까 우리는 모른다니까, 우리는 밥 먹고 살 뿐이지, 그것이 십자가를 공격하고 예수님한테 침 뱉고 그런 의도는 없어요. 그냥 밥 먹고 애 공부 잘하게 피아노 가르치고 그냥 이렇게 살아가는데 영적으로 보면 뭡니까? 반 복음 적이고 복음에 대해서 거부하고 반발하고 누구만 사랑한다? 예수고 하나님이고 그건 다 나 좋으라고 있는 하나님이죠. 내가 제일 사랑스럽죠. 하나님이고 예수고 다 내가 죽는데 하나님이 무슨 소용이 있어. 내가 없으면 예수가 무슨 소용이 있어, 이건 너무나도 정상적이고 나무나 상식적으로 옳은 이야기 아닙니까?
이웃 사랑이요? 내 몸 아파 보세요. 이빨 아파 보세요. 무슨 이웃 사랑이 있어요? 안 되죠. 내 몸이 우선 이예요. 내 컨디션이 우선이고 너무나 이건 상식적이고 이건 일언반구 대들 수 없는 반발할 수 없는 정확한 거 아닙니까? 예수가 우선이 아니고 누가 우선이라고요? 내가 우선이고 내가 우선 밥 먹고 살아야 밥 끼니라고 먹어야 헌금이라고 하지. 내 몸부터 살아야 교회 나가지 어디 교회 가서 송장 치를 일 있습니까? 교회 가면 뭐 있다고, 내 살기 위한 예수인데, 예수는 사랑의 하나님이고, 자비로운 하나님이고 그렇죠. 나를 죽여 놓고 자비가 돼요? 안 되죠. 나를 죽이고 나를 죄인이라 하는데 무슨 자비고 사랑이겠어요? 우리는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다는데. 소문에 의하면.ㅎ 사실은 저주받기 위해 태어났거든요.
우리가 저주받아 줘야 예수님의 주되심이 돼요.
그게 우리가 사랑받기 원하는 사람 때문에 피해 입은 사람이 예수님이고,
그 피해 입은 사람이 우리에게 찾아와서 ‘니는 사실은 저주받아 마땅해.’하고 일러줌으로써
하나님이 새롭게 창조하시는 창조에 기여하게 되는 겁니다.
본의 아니게. 예수 그리스도의 영존함을 위해서 무너지면서
‘그리스도는 최곱니다. 주님은 살아 마땅한 주님 맞습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는 여건을
주님께서는 말씀으로 찾아오시면서 하는 거예요.
아까 이야기 다시 해보겠습니다. 유리바다를 건너간다는 이야기를 듣는 순간, 우리는 평소에 유리바다 같은 건 구경도 못했어요. 우리는 구경도 못하고 아침에 애들 밥이나 해주고 손자 보내주고 그것밖에 못했어요. 우리는 지금 어디 건너가지를 않습니다. 아침에 수돗물 틀어놓고 청소하기 바쁘고 어디 유리바다를 건너가요?
여기 나오는 모든 용어들이 우리가 판단하는 우리의 세상 관, 상상 계와 상징 계, 내 중심으로 판단할 때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단어들이고 용어들이예요. 내 중심으로서는 성경 해석이 안 됩니다. 그런데 우리를 바위에 박아놓고 우리는 무슨 짓을 해도 우리는 동결 상태, 완전히 얼어붙은 상태를 만들어 놓을 때 내 바깥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우리로 하여금 유리바다 건너가서 천국에 이르는 모든 작업은 내 차원이 아니고 주님께서 일으킨 차원인데 다만 그 차원에서 우리는 영적으로 죄인이라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이 말입니다.
진짜 그런지 한번 봅시다. 3절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를 불러 가로되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기이하시도다” 무슨 뜻입니까? 지 교회 다닌 게 여기 포함됩니까? 헌금한 게 여기 포함됩니까? 전도 왕 냉장고 타는 것 포함됩니까? 교회 청소 한 것 포함 돼요? 안돼요? 자기가 새벽마다 기도한 것 포함돼요? 안 돼요? 아무것도 포함 안 돼요. 만약에 그걸 포함시키면 누가 귀하고 누가 위대합니까? 신앙생활 잘 한 본인이 위대하죠. 아이, 이게 이해 안 되시나?? 되죠.
지금 건너가면서 하는 소리가 뭡니까? ‘주님이여, 주님은 위대하십니다.’ 왜?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데 지금 천국을 가고 있잖아요. 그러니 얼마나 위대합니까? 그런데 만약에 어떤 사람이 찬양을 했다든지, 헌금, 기도를 하게 되면 이건 온전하게 누가 위대해요? 주님도 위대하지만 역시 주님 말씀 듣고 잘 지킨 나도 위대하잖아요. 또 다시 자기 자신에게 영광이 돌아온다 이 말이죠. 그러면 그건 오락이죠. 그건 교회에서 노닥거림, 교회에서 예수 이름 걸고 노닥거리고 장난치는 거예요.
우리가 열심히 한 것은 내가 사랑하는 것, 내가 사랑하는 것은 나도 사랑하고 내 자식도 사랑하고 내 아내, 주변 사람들 다잖아요. 내 딸이 공부 잘하는 것, 공부 잘하면 좋죠?ㅎ 내가 승진하는 것, 월급 많이 받는 것, 나를 남들이 알아주는 것, 우리는 24시간 온통 정신이 어디 팔려있습니까? 거기에 팔려있는 거예요. 짝짝, 거기에 팔려 있으세요. 아시겠습니까?ㅎ 심지어 교회 가도 기도하는 내용이 뭐예요? 달뜨면 기도하는 내용이나 저 동해안에 해 뜨는 곳이 어딥니까? 정동진에서 해 뜰 때 기도하는 내용이나 교회서 새벽 기도할 때 하는 거나 기도 내용이 똑같잖아요. 누구 중심 이예요? 세상의 리얼리티가 누구 중심이다? 내 중심의 리얼리티가 세상 아닙니까? 그걸 우리는 상상계이고 상징계인데, 그것도 모르고 뭐로 본다? 그게 바로 내 중심인데 내 중심의 상징계인데 실제로 보잖아요.
실제는 우리의 알 수 없는 충동인데, 나는 무조건 나만 사랑해, 무조건 나밖에 없어, 신이고 예수고 나밖에 없어, 이게 실재계거든요. 이게 충동 아닙니까? 개도 밥그릇 차면 주인도 물잖아요. 아무리 주인이 잘 해줘도 주인이 밥그릇 차면 물듯이 우리는 예수님이 뭐라고 하면 예수님 내 밥그릇 찬다고 예수님 물어버립니다. 우리는 개거든요. 개!!
우리교회 개띠가 많습니다. 개 천지라 하는데, 58년생 개띠, 인간이나 개나 생물학적으로 DNA차이가 얼마 안 돼요. 원숭이하고 97~98%, 거의 동일해요. 0.3% 차이밖에 안 난답니다. 미토콘드리아 DNA가. 그런 창조, 같은 6일이거든요. 6일에서 7일로 갈 때 요것은 바로 안식일, 우리 보고 다시 창조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셨던 것 때문에 안식하신 거예요. 여기에 틈이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가 ‘주‘ 되시지는 않았어요. 창조에 관여했어요. 창조에 관여한 그 말씀 그 지혜를 하나님께서 뭐로 바꿉니까? ’주‘로 바꾸려 합니다. 어디서 이루어집니까? 바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십자가에서 다 이룬 거예요.
그렇다면 요 모든 틈새에 6일에서 7일 틈 사이에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요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안식일의 주인이 누구예요? 예수님, 신약 때 와서 발견됐어요. 인간이 아무리 법 지켜도 안식을 이룰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나라를 그동안 은혜로 보호한 것은 그 이스라엘 속에 누가 함께 한 것 때문에? 안식일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의 이름, 주님이 그들과 함께 동행했기 때문에 주님(중보자)보고 은혜를 베풀어 준 거예요. 그리고 용서를 해 주시고, 그리고 매일 아침마다 죽는 양 있잖아요. 그 양이 결국 누굴 이야기하는 겁니까? 유월절 어린양, 예수님이 어린양 이예요.
오늘 본문에 나오죠. 3절에 보면 “하나님이 종 모세의 노래“ 그 다음에 무슨 노래입니까? 어린양의 노래. 왜 예수님이라 하지 않고 어린양이라 했을까요? 어린양이 어디 동원되는 양입니까? 그것은 제사 지낼 때 어린양이 동원되잖아요. 다시 말해서 뭘 흘린다? 거룩한 피를 흘린다. 목숨을 바치는 거예요.
이것은 예수님의 목숨이 아니면 결국 이 세상은 창조되지 않았다는 뜻 이예요. 예수님의 피가 아니면. 그래서 어제 수요일 날 그런 설교 했잖아요. 하나님과 인간의 만나는 장소는 우리가 정하는 것이 아니라 했잖아요. 하나님이 정하는데 그게 뭐냐 하면, 예수님의 피가 전파되는 현장과 사건을 만들 때 그때 유일하게 인간과 하나님의 만남 이예요. 하나님의 피, 예수님이 피, 거기서만 만나요. 내 살과 내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뭐가 없다? 영생이 없느니라. 예수님 위해서 내 피를 흘려봐야 소용없어요. 백날 순교해봐야 구원 못 받습니다. 우리 피는 흘리는 게 아니고 우리 피는 흘려봐야 개피 밖에 안 돼요. 개피 백날 흘려봐야 구원도 안 돼요.
처음에 창조 때 쓰여 졌던 피, 창조 때 창조를 완성했던 그 예수님의 생명이 없이는 새로이 건설되는 새로운 새 하늘과 새 땅에 참여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피로, 어린양의 피로, 그래서 용어가 어린양입니다. 모세의 노래, 어린양의 노래.
출애굽에 들어가면 유월절 어린양 때문에 홍해가 갈라졌다. 지금은 유리바다지만 그때는 무슨 바다? 그냥 바닷물이죠.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유리바다에 뭐가 섞였습니까? 2절에 보면 “내가 보니 불이 섞인 유리바다” 불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가 섞여 있죠. 그러니까 출애굽기 14장에서 홍해바다를 건널 때 결국은 홍해바다 땅위를 건넜지만 그때는 몰랐죠. 그것이 밑에서 뭐가 올라온다? 하나님의 진노(심판)이 올라오는 줄 몰랐죠. 그런데 그 뒤따라오던 애굽 군대가 어떻게 됐습니까? 와서 다리로 밟다가 진노와 심판받아서 다 몰살당했잖아요.
지금 제가 여러분한테 묻고 싶은 게 있어요. 하루 일과 가운데서 이런 유월절이나 유리바다 건너가는 것을 경험합니까? 경험 못합니까? 경험 못하죠. 상상계고 상징계인데요. 아침에 눈만 뜨면 TV에 광고 나오죠. 광고는 뭡니까? ‘빨리 나를 사라’ 이 말 아닙니까? 빨리 컴퓨터 바꾸고 TV바꾸고 특히 홈쇼핑 보세요. 이번 구성은 멋진 구성입니다. 홈쇼핑 나온 건 뭐예요? 우리로 하여금 설거지도 못하게 만들어요. 모든 걸 다 사고 싶어요. 만두고 사고 싶고 곶감도 사고 싶고 간장게장 그것도 사고 싶고, 가구도 사고 싶고 다 사고 싶어요. 그 생각하는데 뭘 건너가? 홍해를 건너가? 애굽 군대가 쫓아오고, 만화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애굽 군대 따라오는 건 옛날이야긴데. BC 400년경인데 지금 그런 게 어디 있어요?
그러니까 이렇게 돼요. 요한계시록 해석을 다루는 문제니까, 옛날에 이스라엘은 이집트(애굽)이 있고 광야가 있는데 광야와 이집트 사이에 뭐가 있습니까? 홍해가 있죠. 옛날에는 연극이 수평적 무대가 돼서 직접 물을 건너고 직접 바다를 건너고 이렇게 실습을 한 겁니다. 왜냐 하면 그때 배경, 환경이라는 것이 하나님이 주신 율법적 차원에서 주셨기 때문에 배경도 율법적 연출이 가능한 그러한 환경을 조성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아들을 칼로 죽이는 것도 아브라함이 힘이 세서 아들을 죽이면 되잖아요. 이건 쉬운데, 이것은 옛 언약 시대잖아요.
그런데 새 언약 시대는 뭐냐 하면 십자가라 말이죠. 십자가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너는 이미 죽었다는 거예요. 이쪽(구약)은 뭐냐 하면 행하려 하잖아요. 그런데 이쪽(신약)은 이미 죽은 거죠. 죽은 인간이 아브라함처럼 자식 바쳐봐야 소용없고 그것도 무슨 행위다? 죽는 행위고 뭐 지금 바다 건너 가봐야 그것도 죽는 행위고, 정말 이게 죽는 행위 아니라면 차라리 옛날식으로 표현하자면, 산이 들려서 바다에 빠지면 돼요. 벌건 산을 번쩍 들어서, 서울의 관악산을 번쩍 들어서 빠지면 옛날식의 믿음이 되는 거예요. 그것도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으면.ㅎ
지금은 죽은 자한테는 ‘니가 살았다고 생각하거든 겨자씨만한 믿음 내 봐라. 그런 믿음도 없으니까 그럼 니 죽은 거 맞잖아.’ 그럼 죽었다는 말은 무슨 짓을 해도 죽은 거고 아무것도 안 해도 죽은 거고 설쳐도 죽은 거고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고 그만 죽어 있어라 그 말입니다. 그만 죽었다고 치자 그 말입니다.
우리를 살려내는 것은 누가 살려냅니까? 그것은 예수님께서 일방적으로 살려내는 거예요. 살려낼 때 뭐로 살려냅니까? 바로 죽음으로 살려내죠. 모든 인간을 현재 연극적인 조성된 모든 환경을 뭐로 본다? 죽었다고 심판하는 식으로 우리를 살려내죠. 그러면 살려내면 우리는 살려낸 특징은 뭐냐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모든 것에 미련 두지 않고 거기 그건 다 허구에 불과하다고 거기에 집착하지 않는 상태로 빠져나오죠. 그게 매일같이 우리가 건너가는 유리바다입니다.
그래서 애들한테나 손자는 잘 돌보지만 이거 한다고 내가 구원되는 게 아니고 내 가정에 옷을 이거 고르고 저거 골라서 아무 옷을 입어도 이것 잘 골랐다고 내가 천당 가는 게 아니고 그게 바로 옛날식이 아닌 지금 이미 죽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머리카락 빠져도 이거 빠진들, 안 빠진들 머리에 약을 뿌려봐야 이거하고 주님영광하고 아무 상관도 없는 거예요.
그런데 목사들은 사기 치잖아요. 옛날식으로. 옛날, 별미를 바쳐라 하는 식으로. 하여튼 소경이 소경을 인도한다니까요. 이미 죽은 인간이 무슨 짓을 해도 소용이 없는데, 교회가 커야 교회가 하나님 만나는 장소라고 사기 치는데, 거짓말입니다. 교회에 하나님이 오시지 않습니다. 교회에는 모기하고 쥐들이나 오죠.ㅎ 낚시 동우회 사무실에 하나님 오시지 않잖아요. 똑같은 거예요. 바둑 두는 기원에 하나님 안 찾아오시잖아요. 안 찾아오시면 똑같은 거예요.
복음이 전파되는 현장에 내가 너희와 함께 하겠다. 왜냐 하면 그래야 우리는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는 것이 너무나 기쁘게 받아들여져요. ‘주여, 제가 바로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입니다. 나만 사랑하는 자입니다.’라고 나올 수 있다 말이죠. 이 성경 말씀은 결국은 창조의 일곱 재앙이 떨어진다 하는 것은 그 핀들을 하나, 하나 뽑아내는 거예요. 뽑아낼 때마다 그동안 너희들이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주되심 때문에 그동안 오랫동안 참았다는 거예요. 그 참은 것을 확 빼버리면 무너지는 거예요. 새삼스럽게 슬퍼할 것도 없어요. 주님이 빼면 ‘무너져도 마땅합니다.’라고 하면 그건 신자고, ‘안 됩니다. 이걸 내가 그동안 얼마나 가꿨는데.’ 하고 붙들면 지옥 갈 인간이고 그렇죠.
그래서 이 요한계시록의 표현 방법 이것은 우리 보고 하라 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보고 ‘얼음, 완전히 동결상태로 봐요. 우리가 어쩔 수 없는, 우리로 하여금 꽁꽁 묶어버린, ’그저 주께서 알아서 다 하시는군요.’라고 하면서 이 찬양에 동참하게 됩니다. ‘주는 위대하십니다. 내가 도저히 할 수 없는 것을 지금도 해내고 계십니다. 옆에 사람 불신자가 묻죠. ’너는 그걸 어떻게 알았느냐?‘ 묻죠. 물을 때 ’너‘라는 말을 빼 달라고 해야죠. 주께서 알게 하실 뿐이지, 그걸 꼭 ’나‘ 또는 ’너‘ 나, 너에게 국한시킬 수 없는 겁니다. 주께서 144.000, 주께서 택한 백성 알아서 가는 것이기 때문에 너, 나를 거기에 집어넣어 버리면 그 질문 자체가 너, 나를 집어넣을 수 없는 단어를 집어넣은 거예요. 성경에서 너, 나가 없는데 우리가 질문할 때 집어넣어버리니까 뭐가 들어와 버립니까? 상상 계와 상징계가 집어 들어가는 거예요. 그거 알려주면 일치시키려고 애쓸 게 분명하기 때문에.
그 다음에 3절 끝에 봅시다. “하시는 일이 크고” 그 다음에 뭡니까? 기이하죠. 비밀이죠. 비밀! 어떤 분이 질문했어요. 뭐냐 하면 ‘비밀이 비밀이지만 비밀을 이미 알았으면 비밀이 아니잖아요? 내가 여러분한테 답변을 구하겠어요. 비밀이 비밀이지만 비밀은 맞는데 그 비밀은 알 것 같으면 더 이상 비밀이 아니잖아요? 하는 질문이 왔을 때 여러분은 어떻게 답변을 해야 됩니까?
분명히 제가 이야기했잖아요. 뭐를 집어넣지 말라고? ‘나’ 내가 아는 비밀은 비밀이 아니에요. 우리는 비밀의 부분이지 비밀을 관찰할 수 있는 관찰자가 아닙니다. 내가 비밀을 쥘 수 있는 게 아니에요. 홍수가 뒤에 있잖아요. 저쪽은 홍수죠. 홍수가 나를 덮쳐버리면 그게 홍수입니까? 흙입니까? 물입니까? 맨 물 아닙니까?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밤이 이만큼 쌓여있는 창고가 있는데 그 밤 앞에 갔다. 밤이 무너졌다. 그러면 내 피부 땅기는 것이 밤입니까? 아니면 꿀입니까? 벌레입니까? 뭡니까? 역시 밤 아닙니까?
비밀이 나한테 덮치게 되면 나는 그게 뭐가 돼요? 확실한 비밀이잖아요. 그런데 그 질문하신 분은 그 비밀이 ‘아니다, 이다.’를 누가 결정한다? 나를 집어넣은 거예요. 나를 집어넣으면 관찰자가 돼 버려요. 우리는 비밀에 휩싸여야지, 내가 비밀을 골라잡으면 안 돼요.
십자가가 비밀 이예요. 그러면 십자가 옆에 서면 우리는 계속해서 비밀이 되는 겁니다. 농부가 밭을 가는데 뭐가 팅하고 이상한 금속성 소리가 났어요. 혼자 가만히 파보니까 보물단지예요. 그러면 그 농부한테 보물 이예요? 보물이 아니에요? 계속 보물이죠. 그리고 그 농부는 더 나아가서 이제는 다른 것보다 뭘 좋아하느냐 하면 비밀스럽게 묻혀있는 그 보물을 다른 것보다 더 좋아하잖아요. 천국을 들어간 사람은 천국을 그렇게 이해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이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3장에서 한 이야기예요. 천국을 그 정도로 사랑해야 된다는 거예요. 딴 거 이렇게 날라 가고 지 몸이 아프고 재산이 다 날라 가도 그런 것은 관심 없어요. 자기가 있는 보물이 보물로 계속 남아 있어야 돼요. 그런데 딴 거 신경 써서 보물이 시시하다면 그건 애초부터 보물이 아니었어요.
그래서 십자가가 비밀 된다는 것은 10년을 믿든 20년을 믿든 항상 이건 내 힘과 내 능력과 내 행함으로 절대로 알 수 없는 것이었었다. 그것이 계속해서 우리에게 똑같이 주어지는 겁니다. 이 성경 말씀은 지키는 게 아니죠. 지키면 이것이 나의 지킨 요소가 돼 버려요. 그럼 안 돼요. 나는 계속해서 이 성경 말씀은 지키지를 못합니다. 지키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는 누굴 사랑하기 때문에? 나부터 사랑하기 때문에, 나를 포기하지 못하기 때문에, 왜, 충동이니까, 그 충동 어디서 나왔다고? 내 몸이 있는 이상 충동이 있어요. 몸이 있는 이상 충동이 있고 충동이 있는 이상 나는 내 몸을 사랑하게 돼 있어요.
따라서 이 무너져야 될, 마땅히 저주받아야 될, 우리를 집어넣어서 예수님께서는 자기의 주되심을 드러내는데 재료로 우리를 사용하신 거예요. 영적으로 언약 적으로 사용한다는 것이 그러한 의미입니다.
조금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4절에 “주여 누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오리이까” 여기 주 다음에 뭐가 붙어있습니까? 주의 이름이죠. 주의 이름이라 하는 것은 우리의 이름은 하늘나라에서는 이름으로 취급을 하지 않습니다. 이 근호라든지, 김 중우라든지, 이런 이름은 우리의 혈육이 붙인 이름이기 때문에 주께서 안 알아줘요. 왜냐 하면 우리의 이름은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죄인, 이름이라는 것은 반드시 기능이 돼야 돼요. 우리가 붙여준 이름 말고 주님이 우리 보고 붙여준 이름은 뭘 갖고 있어야 돼요? 주의 이름으로 하면 우리 이름은 뭡니까? 그냥 죄인 이예요. 주 안에서 우리는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 되는 거죠.
그래서 주님과 함께 있음으로써 우리는 뭐가 됩니까? 의인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주님을 버리면 우리는 죄인 되고 주님과 함께 있으면 의인되고 그렇습니다. 그러면 만약에 주님을 떠나 버리면 우리는 죄인 되느냐, 주와 함께 있으면 우리는 주님 곁을 떠날 수가 없습니다. 왜냐 하면 ‘주의 의’가 만든 생산물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그냥 ‘예수님, 나, 의다.’ ‘알았다.’ 이게 아니라 주님의 의로움이 우리가 만들어짐으로 주님이 의인되는 거예요. 무슨 말이냐, 죄인이 용서받는 기능을 통해서 누가 의인된다? 주님이 의인으로 드러나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용서받은 의인돼 버리고 거기에 한 세트가 돼서 의인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거예요. 그래서 단독이란 성립이 안 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버리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죄인 되고 싶어도 죄인 될 수가 없어요. 그래서 그 안에서 누구 이름? 자기 이름 안 부르고 누구 이름 부른다? 주의이름, 주님 때문에, 주님이 하신 일 때문에, 주님의 기능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구원받았습니다.‘라는 고백을 하는 사람, 이 사람들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은 주의이름을 이야기하죠. 그래서 구약에 보면 우리는 내가 갖고 있는 활, 칼이나 말을 의지하지 않고 우리는 누굴 의지한다 했습니까? 주의이름을 의지합니다.
자, 그렇다면 문제 나갑니다. 우리가 주의이름을 부른 것은 주의이름을 의지한 거예요? 아니에요? 아니죠. 그건 그냥 지 목소리 외치는 거죠.ㅎ 주의이름이라 하는 것은 주께서 친히 하신다는 뜻이지, 내가 주의이름을 부른다고 해서 쫓아오고 그런 건 아니에요. 기도할 때 주의이름 삼창하고 가관 이예요. 하여튼 해프닝을 벌려요. 얼마나 믿음 없으면 그 짓하겠어요. 그냥 사시는 것이 주의이름으로 살아가는 거예요. 살다보면 우리는 나밖에 모르는, 나는 예수고 뭐고 나밖에 모르는 인간으로 발각시키는 그 작업, 누가 하십니까? 주의이름께서 하시는 작업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감사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죽었다는 것이 한 인간의 개인의 죽음인 줄 알았는데 그것이 우리 죄 때문에 죽었다는 소식이 저한테 믿어지니 그것이 바로 구원문제가 아니라 온 우주에 관한 하나님의 거대하신 주되심과 연관돼 있는 서로 연결돼 있는 일 중에 하나의 부분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주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