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계시록24강-틈 111006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5. 11. 14. 07:26

가락교회111006요한계시록15장-(틈)-24강a-이 근호 목사
제 24강a

시작하겠습니다. 우리가 요한계시록 15장을 하면서 요한계시록에 전체적인 접근하는 해석방법에 대해서 정리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 하면 요한계시록 15장 1절에 보면 “일곱 천사가 일곱 재앙을 가졌다” 했는데 재앙이 일곱이라는 게 앞에 7자가 붙을 수 있는 문젠가 한번 생각해 봅시다. 일곱 가지의 재앙이라는 것이 무슨 뜻이냐 하는 거죠.

일곱 재앙을 여기에 뭐라 하느냐 하면 일곱 대접이다. 요한계시록의 전체적인 구조는 어떻게 되었느냐 하면 전체 핵심이 7인->7나팔 ->7대접으로 돼 있습니다. 7인이라 하는 것을 비밀을 공개와 관련돼 있고, 7나팔은 공격과 관련돼 있고, 7대접은 심판을 갖다 쏟아부어버리는 거죠. 7나팔은 적을 공격할 때 나팔을 불고 공격하잖아요. ‘공격 한다’ 하고 공격하잖아요.  7인은 딱지를 탁 뗄 때마다 비밀이 새어나오는 겁니다. 단추를 뗄 때마다 그 비밀이 공개가 되는 겁니다.

이렇게 될 때 여기서 보통 한국 사람들이, 인간들이 생각할 때 어떤 문제를 이해하고 해석할 때 어떻게 이해하느냐 하면, 일의 대상이 있어요. 어떤 사물이든 사람이든 우리가 대상을 바라볼 때 여기서 ‘흠흠흠’ 냄새도 맡을 수 있고 크기, 치수도 재볼 수 있고 무게도 알아 볼 수 있죠. 이 말은 사전에 뭐가 있다는 말입니까? 어떤 대상되는 사물이나 뭐가 있다는 말 아닙니까? 대상되는 사물이 있다 이 말이죠. 우리가 관찰한다는 거, 우리가 분석한다는 것은 반드시 대상이 있다는 말이죠. 화학에서 보통 정상 정수 분석하잖아요. 그만큼 시료나 대상이 있다 이 말이거든요.

그래서 7인, 7나팔, 7대접 할 때 7인에서 대상이 있는데 냄새도 좀 더 두 번 떼면 냄새도 더 짙어지고 세 번 떼면 냄새가 더 짙어지고 뭔가 더 짙어진다는 이러한 사고방식은 요한계시록에서는 허용이 안 되는 거예요. 대상이 있다는 것이 허용이 안 되는 거예요. 그러면 대상이 허용이 안 되면 우리는 뭔가 관찰하는 관찰자, 또는 평을 하는 판단 자, 이러한 것이 우리한테는 허용이 안 됩니다.

자, 여기 만약에 예수님이 있다면 ‘예수님이 누군지 한번 봐? 예수님을 한번 분석해?’가 허용이 안 돼요. 자, 하나님이시라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지? 천국이 어떤 곳이지? 내가 한번 조사해 봐?’ 저쪽에서 천국의 비밀을 팍팍 열어주면 비밀 정보를 수집해서 이거 저거 수집해서 천국에서 새어나온 비밀들을 모아서 ‘아! 이 정도 모았으니까 아! 이제 감이 온다. 윤곽이 잡혀.’라는 식으로 조성될 수 있는 구성할 수 있는 그러한 대상은 천국이 아닙니다. 이게 어떤 면에서는 가장 어려운 점이예요.

실제로 우리 자신이 우리 자신을 파악할 때 이게 하나의 대상이 될까요? 안 될까요? 대상이 안 됩니다. 왜냐 하면 판단하는 ‘나는 참 착해, 참 착하단 말이야.’라고 판단하는 그 판단 자가 착함보다 더 착할 수가 있거든요. 자아1이 있고 자아2, 자아가 두 개 있다 이 말이죠. 그러면 ‘나는 이런 행동하니까 참 착해.’라고 내가 나를 판단할 때, 그럼 판단 받는 나는 착한 건 맞는데 그렇게 판단하는 나는 뭡니까? 착함보다 더 월등한 초인, 착함과 나쁜 것을 판단하는, 내 밑에 내가 있는 거예요. 내가 아무리 까불어도 내 밑에 내가 있는 거예요. 그러니 이거는 저 혼자 착각하고 있는 거예요. 항상 자기 좋은 쪽으로 생각하는 거예요. 자기가 자기를 바라볼 때 항상 배려하고 항상 관용하고 관대하고 나쁜 짓해도 다독거리고 심지어 지옥에 가도 위로해 주고 ‘그래, 고생 많았어, 지옥 가, 내가 너와 함께 동행 해 줄게.’ 지옥 가도 동행할 수 있는 것은 내가 나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예수 믿는다는 것은 이것은 뭡니까? 예수 믿는 것이 아니고 예수 믿는 나를 예뻐하는 내가 나를 믿는 거예요. 자기가 자가한테 속아 넘어가는 거예요. 내가 믿고 싶은 것을 일부러 내가 만들어 놓고 내가 믿고 싶은 그것을 보고 자기가 자기한테 뻑 갑니다. 반해 버려요. ‘야! 내가 예수를 믿다니! 세상에!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다니, 나란 인간이 이렇게 대단한 존재일 줄이야. 나는 상상도 못했지.’ 자기가 자기한테 감사해서 자기한테 뿅 가는 겁니다.

화가가 그림을 그리면 남들이 평가해야 하는데 자기 그림에 자기가 반해 가지고 ‘이 그림 안 팔아. 이 그림 누구한테 안 팔 거야.’ 이래 나온다면 이건 자아도취, 나르시즘이죠. 자기가 자가한테 반하고 뿅 가는 그러한 입장에서 벗어날 위인이 있느냐 하는 겁니다. 없습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법정 스님인데 무소유를 이야기했죠. 제가 전에 이야기했잖아요. 그 사람은 뭘 소유한다고요? ‘무’를 소유하는 겁니다. 그러나 따져 보세요. 무를 무라고 이해하는 자기 자신을 평생 소유하고 있었던 겁니다. 여기서 그 사람은 못 벗어납니다. 더 쉽게 이야기해서 자기가 자기한테 뻑 가는 겁니다. ‘세상에, 도를 닦아도 이 정도까지 내가 도 닦을 줄이야 꿈에도 생각 못했다.’

이거는 스님도 마찬가지고 목사도 마찬가지고 모든 교인도 마찬가지, 여기서 어떤 인간도 벗어날 수가 없는 겁니다. 자기가 자기한테 뿅 가고 자기가 자기한테 반하는 그러한 선입감을 가지고 뭘 본다고요? 요한계시록을 들여다보면서 누굴 믿겠다고요? 예수? 뭐 하나님? 천국? 이거는 지가 조작한 거예요. 조작한 예수라니까요. 조작한 하나님이고, 자기 마음에 드는 식으로 재편집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래서 다시 이야기할게요. 요한계시록을 하나의 대상으로 삼아서 자기가 여기서 관찰하고 치수 재면 과연 그것이 요한계시록에서 하나님의 천국의 진면목이 나오겠느냐 하는 겁니다. 이것은 이미 관찰자 자체가 문제가 있어서 무엇을 어떻게 관찰하던 간에 이것은 엉터리가 되죠. 이것을 사이비라고 합니다. 철학적 용어로는 사이비 주체성입니다. 나라는 인간을 상관하면서 항상 이것은 사이비 이상 더 나아갈 수가 없는 겁니다. 항상 자기를 사이비 쪽으로 파악할 수밖에 없어요.

나이가 많다. 가을이 되었다. 그리고 약간 치매 끼가 있다. 그럴 때 사람들이 이야기하죠. ‘내가 이렇게 건망증이 있을 줄 몰랐다.’ 간단한 말이거든요. 그 사람은 지금 뭐를 미리 전제로 하느냐 하면, 건망증 없는 것이 나여야 하는데 지금 뭐다? 나는 건망증 걸렸다 이 말입니다. 그럼 ‘나‘가 몇 개예요? 지금 ’나‘가 두 개가 되는 거예요. 그러나 제 3자가 볼 때는 건망증 없는 인간이 이미 과거에 세월이 지나갔어요. 그런 존재는 없는 거예요. 없는 걸 끄집어 당겨서 현재를 탓하고 있는 겁니다. 없는 존재인데 한때는 머리가 팍팍 돌아갔겠죠. 하지만 젊을 때 그런 존재는 지금 없잖아요. 지구상에 없다니까요. 남아 있는 게 뭡니까? 만날 건망증 갖고 있는 ’나‘ 이 몸 이외는 다른 몸이 없어요. 자기에게 해당되는 몸은 이 몸 외는 다른 몸이 없다니까요. 지금 근육이 끊어져 아픈 그 몸 외는 없어요. 아! 아플 때도 그 몸 이외는 없다니까요. 현재 그 몸 밖에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런 몸을 내가 판단할 때는 현재 나 말고 과거에 누적돼 왔던 자아를 다시 상정을 해서 그것에 의해서 나를 관찰하는 식으로 나를 파악하는 방법, 그 방법 외는 인간은 관찰 방법이 없습니다. 아무리 연구를 해도 관찰 방법이 없어요. 그래서 예수 믿는다는 것은 사실은 예수 믿는 것이 아니고 예수 믿는 나를, 또 다른 내가 하나를 상정해서 임의로 허구적으로 하나를 만들어서 내가 예수 잘 믿는지 안 믿는지 관찰해서 잘 믿으면 박수 쳐주고 못 믿으면 기도해주고 봉사하고 이런 식으로 나를 이끌어가는, 이걸 물리학자들은 물에 빠졌을 때 자기 운동화 끈을 물에 빠진 자아가 본인이 운동화 끈을 잡아당겨서 물에서 빠져 나올 수 있느냐 말입니다.

그게 구원이 되겠어요? 교회에 말하는 구원! 기독교에서 말하는 구원! 자기가 자기 신발 끈 잡아당겨서 구원이 되겠습니까? 자기가 몸부림치는 거죠. 기도하고 봉사하고 열심히 하고 헌금하고 예배 참석하고, 그게 몸부림치는 거예요. 지가 그냥 해보는 거예요. 죽어서 지옥 가기 싫으니까 해볼 수 있는 것을 해보는 거예요. 다람쥐 쳇바퀴 돈다 하죠. 만날 돌아봐야 자기자리밖에 안 되는 겁니다. 칸트는 그걸 ‘자기반성’이라 하죠. 자기반성 해봐야 또 반성할 일이 생기죠. 전에 반성했는데 제대로 했는지 그 반성한 걸 또 반성해야 되죠. 골치아픈 이야깁니다.ㅎ

그래서 요한계시록은 이렇게 되는 것이 아니고 잠간 충격적이지만 제가 이 요한계시록을 전체적으로 해석할 때 7인, 7나팔, 7대접 다시 할게요. 7인은 공개하는 것이다. 7나팔은 공격한다. 7대접은 공격의 방법이 위에서 대접을 가지고 심판을 저주를 퍼붓는 식으로 퍼붓는 겁니다. 이 모든 담당자가 누구냐 하면 천사입니다. 천사인데 오늘 본문 15장 1절에 7천사가 나오죠.

천사가 담당한다는 것은 여기서 누가 빠진다? ‘인간은 빠져줘. 인간은 빠져라.’ 이 말 이예요. 그러면 여러분, 감 잡았죠. 7인, 7나팔, 7대접은 결국은 담당자가 누굽니까? 사람이 아니고 누구란 말이죠? 사람이 아니고 천사죠. 그러면 7인, 7나팔, 7대접을 충실히 수행하는 것은 이건 사람의 믿음이 아니고 천사와 예수님과의 관계죠. 그쪽 하늘나라 그분들 담당이지 우리 담당이 아닌 거예요.

그래서 요한계시록을 지킨다는 것은 말이 안 돼요. 자기가 지킬 것도 아닌데 그걸 왜 지킵니까? 일기예보 통보관이 일기를 좌지우지 할 수 있습니까? 야구 해설자가 야구경기에 개입할 수 있어요? 그냥 해설하잖아요. 야구 해설자가 ‘대호야 쳐라. 대호야 쳐라’ 이래서 대호가 홈런 칩니까? 아니라 말이죠. 해석한다고 해서 거기에 주도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입장이 못 돼요. 우리 인간은 그냥 얻어먹는 주제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일은 누가 합니까? 천사와 하늘나라 쪽에서 다 해요. 우리는 뭡니까? 그냥 얻어먹는 쪽 이예요. 주워 얻어먹는 거예요.

그럼 그렇게 결국 흔히들 신앙생활 하는 것은 사실은 신앙생활이 아니었다는 거예요. 신앙생활이 아니고 종교생활, 종교 취미생활, 오락이죠. 제 글에 아! 오락이란 글이 있죠. 교회라는 곳이 노닥거리는 장소예요. 오락! 그저 노인네들 와서 죽치고 하나님 빙자해서 그냥 노는 데예요. 좀 사는 사람은 노는 데고, 없는 사람은 한 푸는 데고, 없는 사람이 한 풀다가 한 풀리면 노닥거리는 데가 돼요. 시설 좋게 해서 그냥 노는 데예요. 친목단체가 되죠. 성당도 마찬가지고, 거기 들여다봐야 별 의미 없어요.

다시 이야기합니다. 인간이 지킬 것은 없습니다. 인간은 어떻게 하나님 일에, 야구장에 야구 해설자가 나이 많은 지가 유니폼 입고 들어가면 안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 하시는 일에 끼어들 입장이 못 됩니다. 이걸 믿으십니까? 이게 믿음 이예요. 기도고 전도고 헌금이고 봉사고 아무짝에도 소용없는 거예요. 그냥 주는 대로 얻어 챙기면 되는 거예요. 저절로, 네추럴하게.

성경 자체가 현실이란 말은 이게 낯선 현실이지만 그 현실에서 우리에게 무엇이 공급되는가, 어떤 식으로 자꾸 공급되는 거예요. 뷔페에서 손님들은 먹기만 하는데 자꾸 음식은 안 줄더란 말이죠. 그게 뭐냐 뒤에서 더운데서 요리사들이 만들어서 공급하잖아요. 우리는 계속 먹는데 그것이 어떤 경로로 해서 어떤 이유 때문에 뭣 때문에 공급 되는가 그런 입장에 놓여있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요한계시록 15장을 하면서 요한계시록을 어떻게 해석하는가, 그걸 이야기하고 있는데 거기서 인간은 어떤 입장인가를 먼저 생각해 볼게요.

돌부처가 두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인공적으로 조각품처럼 만들어 낸 좌상, 요렇게 앉아있는 좌상인 석굴암에 있는 것처럼 돌부처가 있고, 안동에 가면 제비원이라는 곳에 돌부처가 암각화처럼 돌에 부조로 새겨진 것인데 전체 절벽에 새겨진 돌부처는 일부죠. 이게 뭐냐 하면 성경에서 이게 인간 이예요. 인간이 벽에 딱 붙어 있어요. 인간이 밥 하고 설거지 하고 직장에 나오고 또는 여행 다니고 맘껏 그림 그리고 노래 부르고, 우리 보기에는 굉장히 활동을 무진장하게 하는 것 같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그 어떤 활동도 그냥 꼼지락거리는 것밖에 안 돼요. 그냥 이렇게 붙어 가지고 꼼지락거리는 거밖에 안 돼요.

그런데 여기서 뭔가 이것이 활동으로 인정되는 뭔가 풍겨 나오는 때가 있어요. 그것이 뭐냐 하면, 복음에 반대할 때, 이게 바로 인간을 영적으로 분석할 때 나오는 거예요. 육적으로 봐서는 인간이 활동하는 것 같지만 영적으로 보면 인간은 절벽에 붙어 있어서, 부처를 떼서 돌아다닐 수가 없어요. 그냥 세상의 일부가 돼서 그가 아무리 설쳐대고 골프치고 등산가고 해도 하나님 보시기에 그냥 가만히 있는 거예요. 요 바위를 가지고 성경에서는 ‘아담’ 또는 ‘아담 안‘이라고 해요. 아담은 아무리 자식 낳고 손자 낳고 또 손자 낳고 하더라고 전부 다 암각화, 한 바위에 그냥 그림 하나 더 그린 거예요. 바위에 둔덕이 일어난 것 뿐 이예요. 그냥 박혀 있어요. 뭔가 독자적으로 빠져 나와서 활동한다는 것은 애초에 인간한테는 성립이 안 됩니다. 그냥 인간은 흙이고 돌이예요.

그런데 그 인간이 영적으로 쓸모 있을 때가 언제냐 하면 그 인간이 폴~폴 냄새를 풍길 때가 있어요. 무슨 냄새?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반항하고 반발하고 저항할 때, 그때는 이 인간은 바로 악한 신의 지배를 받아서 제대로 인간 노릇을 그때 한번 해보는 겁니다. ‘인간아, 니 애비는 악마다.’라고 제대로 할 수 있는 거예요.

그렇다면 설거지하고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것이 결국 총체적으로 뭘 노립니까? 하나님의 약속과 언약에 대해서 반발하는 그러한 모습을 드러내면서 비로소 하나님께서 인간 다루는 의미가 비로소 발생되기 시작합니다. 그러한 이러한 그림을 쉽게 말해서 하나님이 인간을 언약 적으로 보신다. 이거 간단한 문장 이예요. ‘하나님은 인간을 언약 적으로 보신다.’ 이 말은 인간이 그저 먹고 마시고 그냥 등산가고 놀고 그림 그리고 놀고 뛸 때는 그걸 하나님께서는 활동으로 보질 않는 거예요. 무슨 짓을 해도 그건 바위에 그림이 하나 늘어난 것밖에 안 돼요. 담쟁이처럼 그냥 붙어 있는 거예요.

하지만 요 인간이 인간답게 언약 적으로 뭔가 쓸모 있다 싶을 때는 언젠가 하면, 선지자를 죽일 때, 그리고 메시야를 죽일 때, 하나님에 대해서 대들 때, 비로소 인간으로서의 값어치가 발휘되는 거예요. 그래서 불신자들 사귈 때는 그냥 좋게, 좋게 사귀어요. 그게 별 의미 없으니까, 돈 뭐 5천 떼고 만원 떼고 그건 별 문제 아닙니다. 그거, 자기도 그렇게 돈 안 갚을 때도 많고 벌금 안 낼 때도 많고 같이 살아있는 시체들이예요.

정신 분석학에서는 그걸 좀비라 하는데, 그냥 움직이는데 그게 별 의미 없는, 그래서 인간들이 이 사실을 모르게 되면 내가 하는 일이 나를 결정한다고 보는 겁니다. 나의 행동이 나를 결정한다고 보는 겁니다. 부지런히 돈 벌고 부지런히 설치는 이유가 내가 나의 원인이 되고 그 결과가 내가 된다고 보는 겁니다. 요걸 언약 적으로 안 보게 되면 ‘내가 나 된 것은 나 때문이다‘ 가 돼요. 내가 얼마나 공부를 열심히 했는가, 내가 성실하게 하나님 말씀대로 바르게 살면 그 복이 나한테 오는 거예요.

그런데 그건 계속해서 암각화에 빠져나오지도 못하면서 자기를 ’나‘라고 보는 거예요. ’나‘가 없는데 ’나‘라고 보는 겁니다. 그런데 ’나‘라고 딱 나오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하나님께서 그걸 영적으로 해석을 해버려요. ’나 이리 와, 나 이리 와. 넌 언약에 반대하고 있어.‘ 언약 적으로서는 ’나‘가 없고 아담인데 평소에 살아가는 것은 우리는 마귀나 악마는 염두에 안 둬도 평소에 우리가 살아가는 것이 항상 주어가 ’나‘가 붙은 거예요. ’나‘가 붙는다는 말은 그만큼 나밖에 없고 나는 내 중심으로 세상을 보고 내 중심으로 예수, 천국과 하나님을 내 중심으로 판단하겠다는 뜻이거든요. 나의 판단을 집어넣겠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암각화를 돌부처에서 뚝 떼서 떨어진 상태에서 자기 돌부처를 보겠다는 건데 이런 현실은 없어요. 이런 것은 언약도 허용이 안 되는 겁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의 해석은 어떻게 하느냐, 하나님의 언약으로 해석을 해야 된다는 겁니다. 그 예가 15장 2절에 나옵니다. “또 내가 보니 불이 섞인 유리 바다 같은 것이 있고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유리바다 가에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얼른 보기에는 이거 무슨 대목 같습니까? 옛날 출애굽할 때 홍해 건너는 대목이죠? 출애굽기 14장 그때 건널 때를 보게 되면 실감나잖아요. 그때 물을 건너는 주인공이 누굽니까? 그들이 직접 바닷물을 건너면 설명이 되는데 같은 홍해 건너온 출애굽기 14장을 보니까 건너는 건지 뭔지 모르겠죠? 용어 자체가 어떻게 됩니까? “불이 섞인 유리바다 같은 것이 있고” 그냥 바다도 아니고 유리바다, 그리고 왜 불이 섞입니까?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라는 이런 단어들이 들어가 있잖아요. 출애굽기 14장에는 안 그렇다니까요. 실감나게 이야기한다니까요. 물이 벽이 되고, 우리에게 팍팍 와 닿죠. 왜, 나는 암각화가 아니고 내가 행동하는 주체기 때문에. 바다고 내가 건너고 물이 벽이 되는 것도 내가 바라보고 뒤에 애굽 군사 따라오는 것도 귀로 내가 듣고 뭐든지 내가, 내가 보고 내가 듣고 내가 걸어가는데.

요한계시록 15장에서는 건너는 것은 뭡니까? ‘나’라 하는 것은 완전히, 완전히 동결, 완전히 얼음처럼 굳어져 버렸어요. 그러면서도 건너게 하신 주체는 내가 아니고 누굽니까? 다른 분이 건너게 하면서 건널 수밖에 없는 대상조차도 그분이 묘사하는 표현법에 우리가 잠기게 되는 거예요. 얼음 알죠? 딱딱한 거, 차가운 거, 동결! 얼음에 쌓여서 얼음 안에 갇히면 우리는 팔 다리도 꼼짝 못하고 눈썹도 얼어붙고, 완전히 얼어서 마네킹 같은 거, 이것은 옛날에 플라스틱에 산호 같은 거, 장난감 같은 걸 집어넣어서 동결시켜서 장식품으로 만든 거. 하도 촌스러워서 장식품을 지금은 사용 안하는데, 연세 많은 분은 다 알죠? 완전히 동결시켜서 바다 속 그림 같은 거....

 요한계시록 그 문장 자체가 모든 걸 동결시켜 버립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그걸 대상으로 관찰할 수가 없어요. 왜, 관찰할 대상이 그 안에 얼음이 돼서 갇혀 있는 꼴이기 때문에 갇혀 있는 부분이 무슨 전체를 해석합니까? 그렇잖아요? 바깥에 나와야 뭘 보든지 하는데 이건 안에 갇혀 버리니까 갇혀 있는 꼴에 그걸 판단을 하고 분석을 하고 그걸 평가를 하느냐 말이죠. 안 되죠. 그냥 동태예요.

그런데 실제로 우리는 오늘 아침에 일어나서 세수하고 했잖아요. 뭔가 움직이잖아요. 우리는 실제로 움직이는 걸 현실이라고 하잖아요. 움직이고 일요일에는 교회가고 뭔가 성경을 펴고 찬송을 목청 높여 부르고 두 손 모아 기도를 하고 주머니에서 헌금을 매미 체에 넣고 뭘 하잖아요. 이렇게 하는 것이 요한계시록에서 의미 있다? 없다? 그게 의미가 없다 이 말이죠. 니가 무슨 짓을 하고 어떤 몸부림을 쳐도 하나님을 위해서 찬양을 백날 해도 그건 의미가 없는 거예요. 아무짝에도 소용없다는 말이죠. 찬양하거나 유행가를 부르거나 별 차이가 없는 거예요. 전부 다 동결된 상태에서 움직이는 거예요. 암각화!!

붙어서 동결돼 있으면 우리가 뭘 하느냐, 바로 거기에서 영적인 의미를 하나님 쪽에서 냄새를 피우죠. 동결된 우리를 가지고 냄새를 피우는 거예요. 냄새를 피울 때 우리가 동결된 것을 인정해 줘야 모든 일의 주체와 영광을 오직 어린양의 지시를 따르는 천사, 천사에게 지시를 내리는 예수님에게만 온전한 공로가, 은혜가 돌아가게 돼 있습니다. 그렇게 돼 있어요.

그래서 내가 하는 어떤 사업이 망했다든지, 어떤 일이 잘 됐다든지 그것은 요한계시록에 의하면 내가 젊었다든지 내가 늙었다든지 요한계시록에서는 그런 말조차 시간 남아돌아가서 심심해서 하는 하나의 객소리에 지나지 않아요. 아무 의미가 없는 거예요. 사업이 잘 됐다, 못됐다, 다리 근육이 나갔다,ㅎ 이게 하나님 보시기에는 아무 의미가 없는 거예요. 그게 내 냄새예요. 내 냄새! 내가 알아서 내가 피우는 내 냄새거든요. 이건 언약이 아니에요. 내가 스스로 내가 관찰해서 ‘내가 이렇게 해야 안 되겠나? 이렇게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겠지,’ 지가 지 혼자 착각해서 내 뿜는 자기 더러운 똥 냄새 나는 거예요.ㅎ 그냥 자기 냄새에 불과해요.

기존교회서 찬양을 하는 걸 보아도 우리는 얼음으로 동결된 상태로 보고 그걸 가지고 여기에 뭐가 부딪히느냐 하면 요한계시록이 와서 부딪힙니다. 부딪혀서 튀어나온 게 뭐냐 하면 요한계시록 15장 2절 이예요. 그러니 이 설명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우리는 가만히 있는데 뭐가 한쪽에서 레이저를 쏴 버리면 그게 반사돼서 튕겨 나오면 이게 3D 입체거든요. 입체라 하는 것은 레이저를 두 군데서 쏴서 이미지를 만드는 겁니다. 같은 위치에 두 군데서 레이저를 쏴 버리면 각도가 두 개가 돼서 입체로 보인다 이 말이죠.

우리 자신이 설치는 것은 입체로 안 받아주고 주님의 말씀이 와서 쏴 대서 입체를 보여주면 나오는데 그 입체는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죄인이었고 육적인 사람이었는데 주께서 공로로 말씀대로 그렇게 실현되게 하시고 있습니다.’라는 것을 우리를 통해서 증거 되게 하는 겁니다. 그러니 여러분, 맘대로 사세요.ㅎ 하고 싶은 대로, 꼴리는 대로.

여담이지만 요새 교사들이 교사하기가 힘들답니다. 우리 제수씨는 선생님인데 학교 딱 가게 되면 ‘아! 오늘도 하루를 어떻게 보내나.’ 중학교 2학년 담임이거든요. 옛날에는 고등학생이 골치 아팠는데 점점 더 연령이 중학교 2학년이 제일 골치 아파요. 우리교회 김 재성 집사님은 한때 미술선생님이셨는데 재료로 점토 같은 게 있으면 어떤 애들은 점토를 가지고 벽에다 던지고, ‘뭐 하노, 작품 안 만들고?’ ‘내 맘인데.’ 이런 애도 있어요. 저 같으면 어떻게 했는가, 동영상 다 찍어서 퇴실 시키죠.ㅎ

그런데 선생님들에게 놀라운 것은 그렇게 나올 때 애들이 기를 알아요. 이 선생님은 기가 센 사람이고 이 선생님은 기가 약한 걸 알고 센 사람은 세게 나와도 고만 순종하는데 약한 사람은 백날 잘해줘도 조그만 일에도 그게 고발감이 되는 거예요. 애들이 안다니까요.

이게 뭐냐 하면 입체로, 다시 말해서 내가 나를 잊어버릴 때 나는 교사라는 거죠. 나는 교사를 위해서 목숨을 내 놓을 때 애들이 알아요. 그런데 교사는 내 생계 수단이 되고 그저 하루, 하루 때우려 하는 걸 누가 아느냐 하면 애들이 알아요. 그때부터는 막 가지고 노는 거예요.

그래서 성경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어떻게 하면 구원받을까, 내가 어떻게 하면 죽어서 천당 갈까,’ 이따위 식으로 생각하는 것은 이건 마귀도 알고 하나님도 알아요.ㅎ 그런 인간은 백날 해봐야 이거는 도 닦는 거고, 그건 주님 사랑한다는 하여튼 모든 것이 거짓말이고 실제는 자기가 설치는 자기한테 반하고 자기 사랑하는 거예요. 뭐가 안 되느냐 하면 자기 부인이 안 되고 자기 부인 하는 그것도 자기 긍정의 자료가 되는 거예요. 이거 뭐 대책 없죠. 그야말로 육적인 존재죠. 당연히 지옥 가죠. 자기 성질에 자기가 있고 자기가 숭배하고 있고, 자기 외에는 숭배할 자가 없는데 지가 신이고 지가 숭배자고 지가 교인이고 지가 목사 교인 지 혼자 다 해먹는데 북 치고 장구치고 지 혼자 다 해버려요. 자기가 자기 인생에 실망한다든지 이러면 안 돼요. 그래서 제가 말하잖아요. 제발 우리 행동에 대해서 내가 나서서 평가하지 마라. ‘잘했니, 못 했니, 이거는 어떻게 벌 받아.‘ 이렇게 자꾸 우리가 우리 자신을 평가할 자격이 없습니다. 그런데 자꾸 우리는 칸트 철학에 의하면 인간은 반성적인 존재기 때문에 자기 자신이 반성함으로써 반성한 폭 만큼 더 거룩해지고 더 착해지고 더 교육적으로 더 나아지고 진화하고 진보할 것이라는 그런 생각을 자꾸 하는 거예요. 그렇게 진화해봐야 결국 결과는 누굽니까? 자기가 상상한 자기가 잘못되게 상상한 자기 자신밖에 더 있어요? 안 되죠.

자, 요한계시록 15장 1절부터 시작해 봅시다. 일곱 천사가 일곱 재앙을 가졌죠? 자, 그러면 지금 여러분들이 해석하는 법을 잊어버렸으니까 설명하겠습니다. 왜 8이 아니고 왜 9가 아니고 10이 아니고 6이 아니고 7입니까? 왜 일곱이냐, 7이라는 것은 창조된 것을 다루기에 이것만 해도 충분하다는 겁니다. 창조는 어디에 매어있다? 7 속에 속해 있다. 8도 필요 없어요. 11도 필요 없어요. 7 안에서 하나 빠짐없이 다 완벽하게 그걸 관리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그러냐 하면 천지 창조할 때 몇 일만에 창조했습니까? 7일 만에 창조했죠. 7일 만에 창조할 때 이걸 그림으로 그리면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밑에서 1,2,3,4,5,6,7 그러니까 이건 뭐냐 하면 층층이 삼겹살이 아니고 칠겹살, 겹겹이 쌓여 있는 식으로 층으로 됐다 말이죠. 창조의 마지막이 뭡니까? 안식함으로써 밑을 누르고 있죠. 밑의 첫날부터 육일까지 모든 것은 결국 무엇을 위함입니까? ‘하나님이 보기에 심히 좋았더라.’ 하나님께서 대 만족하기 위해서 층층이 누적돼 있는 쌓여져 있는 재료들이죠.

이것을 인간이 관찰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관찰 못하죠. 인간도 여기에 복속되는데, 자기가 여기 6일에 복속되는데, 자기가 전체에 부분이 되면서 전체를 설명할 수 있는 그런 재주는 인간이 없어요. 복속돼 있다고요. 그래서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이 창조의 일곱 원리에 같이 움직이게 돼 있습니다. 그런데 이게 일곱 층 이예요. 이것을 공개할 때 하나씩 껍데기를 까는 거예요. 이게 뭐냐, 7인 이예요. 7인은 그 내막을 공개 하는 것, 7나팔은 공격의 대상에 대해 공격하는 것, 7대접은 그 공격대상에게 최종적으로 심판, 저주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이 하나, 하나 누적돼 있는 이 일곱 층에, 요 날과 날 사이에 어떤 요소가 끼어있기에 이것이 7인, 7나팔, 7대접으로 7개로 층층이 분리가 가능하냐 이 말입니다. 어떤 원리가 삽입돼 있기에 분리가 가능하냐 이 말입니다. 시루 대 일곱 개 해놓고 벗길 때 하나씩 벗기면 가능하죠. 완전히 기계 같아요. 일곱 개 조립해 놓고 뗄 때 하나씩 떼는 거예요.

요 틈 사이에 어떤 게 끼어들었느냐, 요 틈을 언급하기 전에 먼저 인간의 자아에 대해서 설명하고 그 다음에 예수님과 연관시키고 이걸 설명해 드릴게요. 라캉이란 사람은 상상 계와 상징 계와 그리고 실재계로 인간의 자아를 세 개로 나누었어요. 세 개로 나눈 이유가 이것이 임상학적 이예요. 임상학적이라는 거 아시죠? 임상학적이라는 것은 건강한 사람이 아니고 뭔가 머리가 이상해, 정신병에 두 가지가 있는데 신경증이 있고 하나는 정신증이 있는데 하여튼 둘 다 정상은 아닙니다. 신경증은 너무 예민한 것이고, 정신 증은 너무 바보 같아요. ‘나는 나폴레옹이다.’ 이거 정신병 이예요. 지하철 타고 오면 씻고 돌아서면 씻고, 물건 만지면 또 씻고 이거 만지면 병균 2억 5천개 또 씻고 이게 뭡니까? 너무 신경적이죠.

신경증은 자기를 평가하는 초자아가 너무 강렬해, ‘그것도 나쁜 짓이잖아, 회개해, 반성하란 말이야, 다음에 헌금 천원 더 보태. 그러면 저주받아.’ 자꾸 너무 예민해. 청교도적, 너무 예민한 거예요. 청교도 사람들이 착하게 살고 하는 것은 있잖아요. 그런데 그 사람들이 모르는 게 있어요. 사람이라 하는 것은 하나를 선택하면 하나를 잃게 마련입니다. 너무나 단순한 이야기예요. 사람은 뭘 하나 선택하면 이쪽 의자를 선택하면 저쪽 의자에 파리가 붙었는지 몰라요. 인간은 전부를 얻을 수가 없어요. 반드시 선택했으니까 그때는 많은 걸 잃은 줄 아시기 바랍니다. 많은 걸 잃어버리면 잃어버린 것 때문에 자기가 선택한 것이 온전할까요? 온전하지 않을까요? 온전하지 않죠. 왜냐 하면 모든 것은 원인 결과로 짜여 있는데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이 일이 내가 선택하지 않은 일 때문에 내가 하는 일 때문에 저쪽에서 피해보고 울고 있고 내가 이거 선택했기 때문에 저쪽에서 나한테 원망하고 있고 그런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에 그래요.

자기는 최선을 다하여 바르게 하지만 나의 최선 때문에 본의 아니게 피해 입은 사람이 한둘이 아니라니까요. 나중에 차후 적으로 회상을 들어보면 ‘미안해, 미안해, 그때는 어쩔 수 없었어.’ 어쩔 수 없다 이 말이죠.

농아를 수용하기 위해서 무슨 학원? 영화에서 자애학원이지만, 광주에서 농아학교 했잖아요. 얼마나 좋은 선택입니까? 그러나 그 선택으로 말미암아 얼마나 많은 것이 잃어야 되겠어요. 농아들 집에서 죽이지도 못하고 어디 처리할 데 없나 하다가 학교 생기니까 좋다고 갖다 맡겼죠. 왜냐 골칫거리 치웠으니까, 그런데 그 골칫거리는 어디로 이동했습니까? 부모에서 교사로 이동했죠. 교사가 부모 찾아와서 뭐라 하면 부모는 노코멘트, ‘맡겼는데 나라에서 돈 나오니까 알아서 해라.’ 그래서 알아서 했잖아요. 뒤 늦게 와서 보상하라 나와요.

세상일이라 하는 것은 반드시 하나를 선택하면 둘을 잃을지 셋을 잃을지 모릅니다. 연애할 때야 시간나면 연애하죠. 막상 결혼하고 난 뒤에 남자가 현재 제가 아는 사람이 오스트리아에서 포스트 닥터, 후 박사 받아서 재료 공학 과인데 지금 연구 교수라고 왔어요. 오스트리아에서 결혼해서 한국에 와서 며칠 전에 만났거든요. 몇 시에 퇴근하느냐 하면 밤12시에 퇴근한답니다. 그것도 자진해서, 누가 시키지도 않지만, 그러면 연애할 때 어땠습니까? 둘이 시간만 끝나면 만나서 좋다고 하던 부부가 막상 결혼하고 하고 난 뒤에는 이미 결혼해 버렸으니, 결혼하고 난 뒤에는 밤 12시에 들어왔다가 아침 7시에 나가는데, 부천인가 어디에서 출퇴근해서 가버리는데,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같이 어울릴 시간이 있어요? 없어요? 일을 선택한 자체가 뭘 포기했다? 이쪽을 포기한 거예요. 인간이 뭘 완벽해, 완벽한 인간이 어디 있습니까? 뭐가 완벽해요? 지 혼자 완벽해요. 완벽한 자기를 믿고 싶지. 그것도 하나의 착각 이예요. 자기가 작품을 또 만들어요. ‘나 이만하면 완벽하다고 해줘. 해줘.’ 지가 지한테  체면 걸어서 ‘그래, 그래 나는 완벽해.’ 지가 지한테 자꾸 자꾸 ‘나는 완벽해, 나는 완벽해, 이만하면 성실해, 성실해. 보통 남자 이상이야.’ 지가 지한테 체면 걸어놓고 ‘그래 나도 완벽하다.’ 그런 착각은 아무나 다 하지.

인간에게는 임상학적으로 조사를 해보니까 인간은 자기 동일성을 유지를 못해요. 정신병자들이. 그런데 보니까 뭔가 환각상태에 놓여 있어요. 이 환각상태가 뭐냐 하면 어릴 때부터 강한 아버지, 또는 유명한 목사, 나라 같으면 대통령, 학교 같으면 교사, 특히 엄마, 아빠 부모님, 강한 부모에 의해서 계속 하니까 그 애가 부모 자리를 만들어 가요. 인간은 부모의 자리를 만들어 가요. 부성의 자리라 하는데, 뭔가 만들어 놓고 커서도 만날 그 눈치를 보는 거예요. ‘아빠, 잘했어요? 못했어요?’ 밤늦게 오면 ‘내가 밤늦게 오면 아빠가 싫어할 거야, 엄마가 싫어할 거야.’ 계속해서 뭔가 자기를 조정하고 자기를 지배하는 게 있다 말이죠. 그게 교회 가면 뭐로 바뀝니까? 교회 가면 좀 믿음 없는 사람 같으면 목사로 바뀌고 믿음이 있는 사람은 그게 하나님으로 바뀌죠. 하나님이 자기한테 계속 지시하고 명령하는 거예요. ‘그래서 다 신의 뜻이다. 그래서 신의 뜻에 따라 목사 되련다.’ 뭔가 보이지 않는 게 있다 말이죠.

부모와 하나(일치)가 될 때 누가 좋아하느냐, 부모가 칭찬을 해줘요. 그래서 그걸 자기는 선하다, 또는 착함이라고 보고 부모 말을 거슬리는 것을 보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악함이라고 보고 나쁜 짓이라 보는 거예요. 나쁜 짓에는 뭐가 따라오겠습니까? 징벌과 저주가 따라오겠죠. 그래서 자기 뜻대로 안 되면 뭐다? 저주요 징벌이기 때문에 요거는 내 행동을 빨리 내 지시하는 분으로 빨리 수정해야 된다는 거예요. 요게 보통 인간들, 그게 과도하게 망가져서 없으면 신경증, 정신병자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보통 인간은 이런 게 있는 거예요. 일치된 상상 계에서 눈치 보는 뭐로? 상징 계에서 상상하는 그 대상을 찾는데 더 조사를 해보니까 내가 되고 싶은 이것이 몇 분, 몇 시간이 안 가더라 이 말이죠. 그것은 내 속에서 끓어오르는 내가 다스릴 수 없는 충동인데 이 충동은 나에게 놀라운 기쁨을 줘요. 향유를 줘요. 나에게 뭔가 거슬림으로 오는 기쁨이 나의 이런 모든 터를 깨어버리죠.

금지함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새로운 소망이 생기는 거예요. 왜, ‘하지 마라’ 고 한 순간 그 ‘하지 마라’를 넘어선 즐거움 거리가 새롭게 발생되는 거예요. ‘도박 하지 마.’ 하면 더 도박을 하고 싶은 새로운 인생의 원동력이 생겨요. 이게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이게 바로 라캉과 지젝이 ‘틈’으로 봅니다.  현재 내가 바라보고 있는 창조에서 내가 빠져 나와서 내가 ‘세상은 어떻고 자연은 어떻고 왕은 어떻고 달은 어떻고 블랙홀은 어떻고, 태양은 어떻고...이렇게 관찰하고 천문을 하고 생물학을 하고 약을 만들고 기계를 파는 뭐든지 이렇게 내가 바라보는 나 위주의 현실 세계에 이만하면 됐다는 이것이 나의 소속으로 충동하나로 이것을 만족시킬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모든 걸 가졌는데 기쁩니까? 아니죠. 여기에 없는 새로운 기쁨을 만들어 내지 아니하면 사람은 살맛이 안  나요. 이건 나이와 상관없습니다.

등산을 가더라도 올라가고 내려오는 정상을 정복하는데 기쁨을 얻었는데 그 다음부터는 더 난(難)코스, 더 난코스도 빠른 속도로, 미쳤어. 미쳤어. 더 각도가 예리한 곳, 그것도 여름철이 아니라 겨울철에, 겨울철에 에베레스트 더 난코스, 남이 안 가는 코스, 그런 게 없으면 사람은 살 이유가 없어요. 인간은 알 수 없는 곳에 점점 미쳐갑니다.

10분 쉬고 다음시간에 합시다.

 이한례 (IP:203.♡.47.76) 11-10-20 16:01 

가락교회111006요한계시록15장-(틈)-24강b-이 근호 목사
제 24강b

자, 두 번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7천사가 7인과 7나팔과 7대접에서 7천사가 동원됩니다. 천사는 인간들과의 관계, 인간들 사이의 문제에서는 거기에 천사가 나서질 않습니다. 천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지시를 받아서 숨어있는 비밀을 그냥 전파할 뿐이죠.

그래서 7일 동안 창조할 때 모든 틈에는 비밀이 들어가는 겁니다. 아까 제가 상상 계와 상징 계를 설명했는데 아무리 설명을 해도 사람들이 이걸 이해를 못해요. 다시 하면, 상상계라 하는 것은 뭔가 마음에 들은 것 같으면 ‘나 저거 되고 싶어. 나 저 가방 갖고 싶어. 바비똥인지 루비똥인지 가방 갖고 싶어. 나 저 차 갖고 싶어.’하고 일치 시키는 걸 상상계라 합니다. 일치 시키는 거. 그래서 인간이 상상 계에서 일치돼 있다가 새로운 분명히 내가 저 가방이 예쁘다고 사서 가방 들고 가는데 마주 오는 아줌마의 가방이 더 좋을 때, ‘저건 뭐야? 어, 이건 뭐지?’ 백화점에서 옷 사가지고 나오는데 더 좋은 옷 나올 때 삐지잖아요.ㅎ 차, 사고 난 뒤에 새 차 나올 때 삐진다니까.

그럼 어떻게 합니까? 뭐가 바뀌어요? 상상한 것 버리고 새로운 원하는 것을 상상하겠죠. 또 갖고 싶어 하겠죠. 그러한 질서를 가지고 상징 계라 합니다. 상징계라 하는 것은 어려운 말로 기표의 구조, 기표라 하는 것은 의미는 없어요. 그냥 바꿔치기, 항상 바꿔치기하는 거예요. 심지어 사람도 바꾸고 남편도 바꾸고 아내도 바꾸고 자신 빼고 전부 다 바꾸고 싶어요. 그래서 끊임없이 만족함이 없이 계속 뱅뱅 도는데 이걸 순환구조라 합니다. 교회도 옮기는 사람 보면 이 교회 갔다가 저 교회 갔다가 이 교회 갔다가 계속 옮기죠. 계속해서 바꿔치기 하는 겁니다. 그래서 대통령도 몇 년 만에 바꿉니까? 5년 만에 하잖아요. 오래 하면 지겨워요. 계속 바꿔치기 하는 거예요.

그래서 대통령을 카다피처럼 50년 하려면 어떻게 됩니까? 50년 동안 국민들을 상징 계에 놔두면 안 되고 상상계로 해야 되죠. ‘우리나라 김정일 같은 지도자 없습니다. 김일성 같은 분 없습니다.’ 라고 완전히 우상화 시켜 버립니다. 그게 바로 교회에서는 뭐냐, 목사가 오래 하는 것, 오래 하다가 늙어지면 지 아들한테 주고, 그게 뭐냐 상상 계의 세계 속에 인간은 점점 더 어린애가 돼 버려요. 퇴행한다.

여기 상상 계에서는 뭐가 없습니까? 차이나 차별을 무서워하고 차이와 차별을 뭐로 본다? 죄악시 본다. 그래서 오랫동안 교회 다닌 사람과 이야기를 해보면 이야기가 안 돼요. ‘예수만 믿어야지.’ 하거든요. 굉장히 믿음이 있어 보이잖아요. ‘그런데 그 예수가 어떤 예수입니까?’ 물어보면 답변을 안 해요. ‘그냥 예수야, 그냥 예수야.’ 가만히 보면 어릴 때 믿던 예수예요. 어릴 때 믿었더니만 암에서 나았던 예수, 어릴 때 믿었더니만 땅 값이 올라갔던 예수, 과거에 기적을 준 예수, 과거에 기적을 받았으니까 암에서 나으면 그 몸이 누구 몸입니까? 자기 몸이죠. 땅 값 올라가면 그 땅이 옆집 아저씨 땅입니까? 누구 땅입니까? 자기 것이잖아요. 그러니까 이건 뭐냐 자기 동일성, 결국 신과 예수라든가 성령이라든가 성신이라는지 모든 신은 자기 동일성을 확인해주고 후원해주는 그런 신을 믿는 거죠.

결국 누가 누굴 믿어요? 나는 믿을 것은 오직 나밖에 없는 거예요. 나에게 일어나는 변화를 가지고 신의 계시를 측정하게 되는 겁니다. 나에게 일어나는, 우리 가정에 일어나는 것 가지고 ‘나 신에게 복 받았다. 벌 받았다.’ 나에게 일어나는 현상들을 추적해서 그것으로 하나님이 이런 분이라는 것을 잡으니 성경이 보일 리가 있겠습니까? 성경 볼 필요 없어요. 그냥 간증만 몇 개 갖고 다니면 시간도 없고 한데...ㅎ

교회 장로님들 기도 하는 거 보세요. 어릴 때 10년 전에 기도해서 갑자가 교회 지으려 할 때 누가 땅을 기부했다고 전부 다 자기 자랑을 기도내용에 하잖아요. 성경 내용은 기도 내용에 안 들어갑니다. 성경을 안 보니까, 안 보고 옛날 내가 이 교회 기여했던 거, 도움 줬던 거, 목돈 바쳤던 거, 그것이 계속 장로로서 하나의 주식을 많이 갖고 있는 거예요. 그만큼 교회의 주도권을 쥐고 있다는 표시고 정치적이죠. 목사도 마찬가지로 그렇습니다.

이게 뭐냐 하면 바로 상상 계를 계속해서 이동시키는 그러한 상상계인데 세상은 이 둘(상상 계, 상징 계)로써 설명이 다 돼 버리죠. 뭐냐 하면 만들지 못하는 것은 새롭게 바꿔치기 하면 되니까, 집도 한번 이사가 보고 옷도 한번 바꿔보고 계속 바꿔줘서 지루함을 모면하고 권태로움을 벗어나는 것, 그래서 지다가 지루하다 싶으면 바꾸면 되고 가구도 책상도 새롭게 해 봤다가 칠도 한번 해 봤다가 이것이 자기 현실로 보는 거예요.

그런데 여기에 실재계, 분명히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저것은 바로 나다.’ 할 때는 분명히 그게 실재인 줄 아는데 이게 뭡니까? 상상 이예요. 상상. 이미지, 심볼, 언제 바뀔지 모르니까, 이 둘은 환상 이예요.

실재계는 숨어있는 거예요. 그 숨어있는 게 뭐냐 하면, 내가 세상을 이렇게 보고 싶고 나는 이런 인간되고 싶은데 낯모르는 사건과 사태가 일어나면 내가 생각했던 상상과 상징과 전혀 다른 행동과 다른 모습으로 내가 눈에 띄게 되는 거예요. 이걸 충동이라 했어요.

충동이란 뭔 뜻이냐 하면 말릴 수가 없다. 이걸 한자로 말하면 뭡니까? ‘욱!’, 욱, 내가 입에서 욕을 하다니, 이런 나를 상상도 못하겠어.‘ 맞잖아요. 상상도. ’나는 이런 식으로 교육 안 받았어.‘ 뭡니까? 상징 계, 질서. 법. 언어.

그래서 이 차이가 뭐냐 하면 언어의 세계하고 몸의 세계가 달라요. 몸의 세계는 충동에 의해서 움직이는데, 언어의 세계는 뭡니까? 법과 질서와 윤리와 도덕으로 움직이는 것이 언어의 세계입니다. 자, 둘 중에 어느 것이 환상의 세계입니까? 언어가 환상이겠어요? 몸이 환상이겠어요? 언어가 환상이죠. 그런데 진리란 어디서 나와요? 언어에서 진리가 나와요. 미치죠, 이거.ㅎ

그러면 진리가 뭡니까? 진리란 곧 환각이고 환상 이예요. 그러면 진짜 진리는? 몰라요. 내가 내 몸을 모르는데, 내가 나를 모르는데 니가 나를 알겠느냐, 타타타, 나오잖아요.ㅎ 김국환 노래 있잖아요. 내가 나를 모르는데 니가 어떻게 나를 아느냐 이 말이죠. 이건 진리야, 이건 성경책이야. 이건 삼위일체는 이런 거야.‘ 다 뭡니까? 언어죠. 언어를 통해서 우리는 뭘 구축한다? 신학의 이름으로 신을 구축하죠. 그게 상징계라니까요. 그게 환상이라니까요. ’아! 그때 잘못 생각했다.‘ 몇 개월 가지 않아서 ’아! 그때 그거, 아! 아니네. 수정해, ‘ 언제  또 지 말을 바꿀지 몰라요.

하지만 속여도 속일 수 없는 것을 머리가 빠진다는 것, 계단에 넘어지면 근육이 끊어진다는 것, 그리고 나이 많으면 깜박깜박 건망증이 생긴다는 것, 이거 내가 원했던 겁니까? 암의 특징이 뭔지 알아요? 암의 특징이 암은 나를 뭐로 보느냐 하면 사람으로 보지 않습니다. 뭐로 보느냐, 막으로 봐요. 무슨 막? 암 세포가 기생하는 하나의 자기 막으로, 하나의 필름으로 본다고요. 위암이라 하는 것은 위에다가 암세포가 번지잖아요. 위는 누구 세계입니까? 분명히 나의 세계인데 암 세포는 누구 세계예요? 지 세계 아닙니까? 옆에 있는 거 다 잡아먹잖아요. 내 안에 암이 들어있는 거예요. 이거 어떻게 생긴 겁니까? ‘암아, 생겨라. 암아 생겨라.’ 했습니까? 지가 알아서 생겼죠. 유전적으로도 그렇고.

인간에게는 몸만 있지 이 몸이 ‘나’ ‘내’ 자아, 주체, 나라 하는 것은 몸에서 피어나는 부대효과예요. 표면효과, 그냥 허구적 망상에 해당되는 겁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그 허구적 망상이 있기 때문에 인간은 자기가 망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안다는 사실, 야! 어렵다, 어렵다. 내가 이야기해놓고 어렵네요.

이게 왜 그러느냐 하면 이것이 바로 예수님은 우리를 몸으로 보지 않고 망상을 품고 있는 영적 존재에서의 몸으로 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야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죄를 위해서 죽는 것이 의미가 있어요. 우리가 하나의 근육질이라면 하나의 단백질 뭉치라면, 단백질 뭉치를 위해서 내가 십자가에 못 박히고 하면 아무 의미가 없어요.

우리 인간이 육이거든요. 그냥 육체, 육체에서 자아가 발생된다는 것은 이것은 뭐냐 아까 첫 시간 처음에 이야기했어요. 뭡니까? 인간을 분명히 암각화에 붙어 있지만 그것이 뭔가 냄새를 피울 때는 이것이 어떤 경우라 했습니까? 언약적인 모양새를 드러낼 때 언약 적으로 포착이 됩니다. ‘너 그런 인간이지? 이스라엘아, 니는 우상을 섬겼지?’ 이스라엘은 우상 섬긴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근육질이 이상하게 생긴 송아지 같은, 충동이니까 아까 배운 거, 이상하게 좋아지는 거예요. 아, 사람 좋고 지가 좋은 것을 좋다는 데 이유를 왜 따져요? 좋다는데 무슨 이유가 있어요?

분명히 이야기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싫어요. 그리고 예수 믿지만 예수님이 싫어요. 이 세상에 누가 제일 좋은가 하면 나한테는 내가 제일 좋아요. 이건 신앙적으로 따지지 마세요. 왜냐 하면 이것은 충동에 관한 문제이니까, 그래서 모든 인간은 지금 예수님 있으면 또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죽입니다. 왜냐 하면 예수님이 나보고 죄인이라고 규정하니까, 간음한 여인이 현장에서 간음하다 바리새인들이 데려왔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간음한 여인이 밉습니다. 왜 미우냐 하면 율법을 어겼기 때문에 미운 게 아니고 자기는 간음을 안 했기 때문에 저쪽은 ‘간음을 한 것은 밉다‘ 한 것은 저쪽 여자 이전에 자기 내부에서 나는 간음한 나는 좋다? 싫다? 싫어요. 나는 간음 안 하고 말씀, 율법대로 지키는 내가 좋아요. 이미 좋다, 나쁘다. 가 내 안에서 결정된 상태에서 내가 싫어하는 그 모습이 있기 때문에 싫은 거예요.

어느 정도로 싫은가? 짱돌 들고 치고 싶을 정도로 싫은 거예요. 이것은 내 안에서 평소에 간음하고 싶은 나를 내가 짱돌로 죽이고 싶은 거예요. 이게 뭐냐, 아버지가 시킨 거예요. 이걸 성경에서 상징계라 해요. 상징 계는 법으로 돼 있어요. 법으로 돼 있어서 항상 일치 되고 싶어서 옳을까, 나쁠까, 선일까, 악일까, 따지는 것은 상징 계에 들어가요. 아! 나쁘구나, 하면 좋던 것도 버리고 또 새롭게 선한 것을 찾아가게 돼 있어요.

그래서 애가 양치질하고 난 뒤에 뭐라 합니까? ‘엄마, 엄마, 나 이 예뻐?’ 하죠. 뭔 뜻입니까? 엄마가 원하는 것이 내 안에 하나 장착돼 있는 거예요. 엄마의 법이 내 법이 됐으니까 ‘엄마하고 나하고 일치된 것 맞지?’ 라고 하는 거예요. 상상 계는 상징 계한테 허락을 받을 때 일치의 확인(도장)을 받는 겁니다. ‘참 잘했어요.’ 도장을 팍 찍죠.

그래서 인간의 모든 행동은 반드시 윤리적인 거예요. 뭐냐 하면 과정을 가진다. 이게 선한 것인지, 악한 것인지, 이건 강도도 마찬가지고 마약 중독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나쁜 인간도 교도소에 있는 어떤 나쁜 인간도 어떤 행동을 할 때는 반드시 그 행동에서 본인이 내려요. 이건 선한 것, 나쁜 것. 교도소 나쁜 인간들도 휴지 있으면 아무데나 안 버리고 휴지통에 버립니다. 남은 죽여도 휴지는 휴지통에 버립니다. 모든 행동은 선과 악에서 못 벗어나게 돼 있어요. 그게 자기한테 장착돼 있습니다.

그러니까 간음한 여인을 잡아왔을 때 돌로 치려고 했습니다. 그럴 때 예수님께서 그 사람들 보란 듯이 글씨를 썼죠. 쓰니까 그들의 틈, 주님께서 글씨를 쓰기 전까지는 그들은 완벽한 의인입니다. 그런데 새로운 언어, 새로운 글씨, 새로운 상징이 들어오게 되면 그들은 그들 손에서 돌멩이를 놓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할 때 돌을 놓고 갔다는 말은 뭡니까? ‘나 새로운 당신 앞에 나 죄 있는 거 맞습니다.’ 하고 가버리죠. 우리 같으면 어떻게 합니까? ‘예수님, 제가 죄인입니다.’ 할 텐데, 그렇지 않아요. ‘그래 나는 칠 수 없구나.’ 하고 그냥 가버리죠. 남은 것은 간음한 여인밖에 없죠. 그리고 그 여자는 이미 죽은 자가 되죠. 예수님께서 뭐라 하십니까? ‘ 내가 너를 정죄하지 않겠다.’ 했거든요. 이 말은 여자는 뭔 뜻입니까? 여자는 이미 뭐로 확정됐어요? 죄 있는 자가 되는 거예요. ‘여자여 너를 정죄하지 않겠다.’ 하니 이건 죄 있는 자가 되죠.

오늘 강의, 제일 중요한 대목입니다. 예수님의 모든 말씀이, 요한계시록의 모든 말씀이 우리로 하여금 뭐를 만들게 합니까? 죄 없는 자가 아니라 뭘 만듭니까? 새삼스럽게 죄 있는 자로 만드는 겁니다. 오늘 본문 2절에 보니까 유리바다를 건너가죠. 유리바다 건너간다는 소리를 듣는 순간 우리는 죄 없는 자가 아니고 뭡니까? 죄 있는 자가 되죠. 유리바다를 건너간다? 못 간다? 유리바다 건너서 천국 못 가는 사람으로 확인되는 겁니다. 그런데 유리바다 건너게 하는 것은 누가 온 겁니까? 하나님께서 7천사를 통해서 유리바다를 건너가게 하죠. 그러면 모든 공로가 모든 은혜가 누구 쪽입니까? 내 행위가 아니고 내 공로가 아니고 누구 공로입니까? 예수님 공로죠. 이게 성경 아닙니까?

성경을 우리가 보는 순간 우리는 죄인으로 규정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경 보기 전에 스스로 죄 있게 하면 안 돼요. 그건 지가 만든 죄라. 지가 죄 실천 한 것, 담배 꼬나물고 이런 게 죄 아닌가, 백날 인간이 지가 아무리 죄인 되고 싶어도 그건 죄인이 아니에요. 지가 연출한 겁니다. 그리고 아까 이야기했듯이 하나를 선택했다는 것은 하나를 놓친 게 되죠. 사람이 뭘 하나 선택했다는 것은 그만큼 나 때문에 피해보는 사람 발생하는 거예요. 자기는 최선을 다한 선택이지만 남들 보기에는 뭡니까? 니는 나한테 피해를 준 사람이고, 하지만 누구와 누구 사이에? 인간과 인간 사이이기 때문에  죄가 성립이 안 됩니다. 어쩔 수 없는 거예요. 우리 사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거예요.

사람이 완벽을 기하는 것은 정신병자예요. 세상에 완벽한 것은 없는 거예요. 우리는 어쩔 수가 없는 거예요. 아이, 키가 안 크는데 어떻게 합니까? 그걸, 키 안 크는데 저주해요? 제가 ‘도가니’란 글 쓴 거 봤죠? 그 말 못하는 애를 성폭행하는 것을 죄라고 하는데, 저주받을 짓이라 하는데, 그럼 성폭행 안 해도 키 작은 사람은 무슨 죄를 져서 저주받은 거예요? 어떤 사람은 집안 대대로 암 걸렸어요. 그래서 30대인데 암 걸려 있어요. 얼마나 착한 사람인지 몰라요. 우리교회 나와요. 착하고 얼마나 된 사람인데, 하지만 무슨 저주를 받아서 암 걸렸습니까? 부모 죄 때문입니까? 자기 죄 때문입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그런 거예요.

이 세상에는 사람이 할 수 있다는 게 없습니다. 그냥 사시면 그냥 사는 대로 사는 거예요. 그런데 그것이 죄라고 인정하는 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을 주실 때만 그 틈새로 뚫고 들어올 때만 죄인이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일곱(7일) 날 이 모든 것은 결국은 뭡니까? 무너지게 돼 있는 창조였습니다. 그게 어디 나옵니까? 히브리서 1장 10절, 한번 찾아볼까요?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라 그것들은 멸망할 것이나 오직 주는 영존할 것이요”

그렇다면 여기서 천지 창조를 한 것은 멸망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거죠. 그럼 우리 생각과 모순되잖아요. 멸망한 걸 왜 만들었어요? 이상하잖아요. 그런데 멸망할 것을 만들면서 거기서 그냥 멸망시킨 게 아니고 거기서 뭘 뽑아내요. 뭘 뽑아내느냐, ‘주의 나라는 영원하다.’를 이 무너짐을 통해서 뽑아내는 거예요.

주유소가 폭발하는 것은 유사석유의 유전기가 문제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무너지는 것처럼, 이것이(천지 창조) 무너짐으로써 주의 나라가 원래 천국은 영원했어야 한다는 것을 미리 보여주기 위해서 모형으로 지은 거예요. 소위 성냥개비로 지은 모형건물, 그 중에 누가 포함돼 있다? 인간이 포함돼 있어요. 그래서 고린도전서 15장에 보면 우리 몸을 무슨 몸이라 합니까? 흙에 속한 몸, 그 다음에 연약한 몸, 그 다음에 뭡니까? 아프니까, 후패한 몸, 취약한 몸 이러죠.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우리 몸은 뭐가 됩니까? 하늘에 속한 몸, 그리고 육에 속한 몸이 아니고 영에 속한 몸, 땅에 속한 몸이 아니고 하늘에 속한 몸, 흙에 속한 몸이 아니고 영광에 속한 몸, 이렇게 하죠. 그 가운데 이렇게 몸이 바뀌는데 뭐라고 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있는 거예요. 우리 후패한 몸이 영광스러운 몸이 되는데 반드시 우리 몸은 후패한 몸에서 영광스러운 몸이 되면서 우리 몸은 뭐로 변해야 되느냐 하면, 죄로 변해야 됩니다.

그래서 죄로 되기 위해서는 여기 말씀, 율법이 개입돼야 돼요. 그래서 ‘율법아, 너의 쏘는 어디 있느냐’ 결국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만들고 죄인 만들고 율법을 쏴 대서 우리로 하여금 죄인으로 저주받게 했는데 여기 예수 그리스도께서 같은 율법에 속해서 예수님이 오셔서 죽음 가운데서 먼저 부활하심으로써 이 죽음 가운데서 부활하는 이 코스를 여기다 그대로 적용시켜 버리죠. 대입해 버리면 율법 준 것도 죄인 된 것도 다 누굴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영존하심을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가 하나의 재료로서 사용된 겁니다.

그러니 이 암각화가 냄새피우는데 죄를 피우니까 우리는 모른다니까, 우리는 밥 먹고 살 뿐이지, 그것이 십자가를 공격하고 예수님한테 침 뱉고 그런 의도는 없어요. 그냥 밥 먹고 애 공부 잘하게 피아노 가르치고 그냥 이렇게 살아가는데 영적으로 보면 뭡니까? 반 복음 적이고 복음에 대해서 거부하고 반발하고 누구만 사랑한다? 예수고 하나님이고 그건 다 나 좋으라고 있는 하나님이죠. 내가 제일 사랑스럽죠. 하나님이고 예수고 다 내가 죽는데 하나님이 무슨 소용이 있어. 내가 없으면 예수가 무슨 소용이 있어, 이건 너무나도 정상적이고 나무나 상식적으로 옳은 이야기 아닙니까?

이웃 사랑이요? 내 몸 아파 보세요. 이빨 아파 보세요. 무슨 이웃 사랑이 있어요? 안 되죠. 내 몸이 우선 이예요. 내 컨디션이 우선이고 너무나 이건 상식적이고 이건 일언반구 대들 수 없는 반발할 수 없는 정확한 거 아닙니까? 예수가 우선이 아니고 누가 우선이라고요? 내가 우선이고 내가 우선 밥 먹고 살아야 밥 끼니라고 먹어야 헌금이라고 하지. 내 몸부터 살아야 교회 나가지 어디 교회 가서 송장 치를 일 있습니까? 교회 가면 뭐 있다고, 내 살기 위한 예수인데, 예수는 사랑의 하나님이고, 자비로운 하나님이고 그렇죠. 나를 죽여 놓고 자비가 돼요? 안 되죠. 나를 죽이고 나를 죄인이라 하는데 무슨 자비고 사랑이겠어요? 우리는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다는데. 소문에 의하면.ㅎ 사실은 저주받기 위해 태어났거든요.

우리가 저주받아 줘야 예수님의 주되심이 돼요.

그게 우리가 사랑받기 원하는 사람 때문에 피해 입은 사람이 예수님이고,

그 피해 입은 사람이 우리에게 찾아와서 ‘니는 사실은 저주받아 마땅해.’하고 일러줌으로써

하나님이 새롭게 창조하시는 창조에 기여하게 되는 겁니다.

본의 아니게. 예수 그리스도의 영존함을 위해서 무너지면서

‘그리스도는 최곱니다. 주님은 살아 마땅한 주님 맞습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는 여건을

주님께서는 말씀으로 찾아오시면서 하는 거예요.

아까 이야기 다시 해보겠습니다. 유리바다를 건너간다는 이야기를 듣는 순간, 우리는 평소에 유리바다 같은 건 구경도 못했어요. 우리는 구경도 못하고 아침에 애들 밥이나 해주고 손자 보내주고 그것밖에 못했어요. 우리는 지금 어디 건너가지를 않습니다. 아침에 수돗물 틀어놓고 청소하기 바쁘고 어디 유리바다를 건너가요?

여기 나오는 모든 용어들이 우리가 판단하는 우리의 세상 관, 상상 계와 상징 계, 내 중심으로 판단할 때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단어들이고 용어들이예요. 내 중심으로서는 성경 해석이 안 됩니다. 그런데 우리를 바위에 박아놓고 우리는 무슨 짓을 해도 우리는 동결 상태, 완전히 얼어붙은 상태를 만들어 놓을 때 내 바깥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우리로 하여금 유리바다 건너가서 천국에 이르는 모든 작업은 내 차원이 아니고 주님께서 일으킨 차원인데 다만 그 차원에서 우리는 영적으로 죄인이라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이 말입니다.

진짜 그런지 한번 봅시다. 3절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를 불러 가로되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기이하시도다” 무슨 뜻입니까? 지 교회 다닌 게 여기 포함됩니까? 헌금한 게 여기 포함됩니까? 전도 왕 냉장고 타는 것 포함됩니까? 교회 청소 한 것 포함 돼요? 안돼요? 자기가 새벽마다 기도한 것 포함돼요? 안 돼요? 아무것도 포함 안 돼요. 만약에 그걸 포함시키면 누가 귀하고 누가 위대합니까? 신앙생활 잘 한 본인이 위대하죠. 아이, 이게 이해 안 되시나?? 되죠.

지금 건너가면서 하는 소리가 뭡니까? ‘주님이여, 주님은 위대하십니다.’ 왜?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데 지금 천국을 가고 있잖아요. 그러니 얼마나 위대합니까? 그런데 만약에 어떤 사람이 찬양을 했다든지, 헌금, 기도를 하게 되면 이건 온전하게 누가 위대해요? 주님도 위대하지만 역시 주님 말씀 듣고 잘 지킨 나도 위대하잖아요. 또 다시 자기 자신에게 영광이 돌아온다 이 말이죠. 그러면 그건 오락이죠. 그건 교회에서 노닥거림, 교회에서 예수 이름 걸고 노닥거리고 장난치는 거예요.

우리가 열심히 한 것은 내가 사랑하는 것, 내가 사랑하는 것은 나도 사랑하고 내 자식도 사랑하고 내 아내, 주변 사람들 다잖아요. 내 딸이 공부 잘하는 것, 공부 잘하면 좋죠?ㅎ 내가 승진하는 것, 월급 많이 받는 것, 나를 남들이 알아주는 것, 우리는 24시간 온통 정신이 어디 팔려있습니까? 거기에 팔려있는 거예요. 짝짝, 거기에 팔려 있으세요. 아시겠습니까?ㅎ 심지어 교회 가도 기도하는 내용이 뭐예요? 달뜨면 기도하는 내용이나 저 동해안에 해 뜨는 곳이 어딥니까? 정동진에서 해 뜰 때 기도하는 내용이나 교회서 새벽 기도할 때 하는 거나 기도 내용이 똑같잖아요. 누구 중심 이예요? 세상의 리얼리티가 누구 중심이다? 내 중심의 리얼리티가 세상 아닙니까? 그걸 우리는 상상계이고 상징계인데, 그것도 모르고 뭐로 본다? 그게 바로 내 중심인데 내 중심의 상징계인데 실제로 보잖아요.

실제는 우리의 알 수 없는 충동인데, 나는 무조건 나만 사랑해, 무조건 나밖에 없어, 신이고 예수고 나밖에 없어, 이게 실재계거든요. 이게 충동 아닙니까? 개도 밥그릇 차면 주인도 물잖아요. 아무리 주인이 잘 해줘도 주인이 밥그릇 차면 물듯이 우리는 예수님이 뭐라고 하면 예수님 내 밥그릇 찬다고 예수님 물어버립니다. 우리는 개거든요. 개!!

우리교회 개띠가 많습니다. 개 천지라 하는데, 58년생 개띠, 인간이나 개나 생물학적으로 DNA차이가 얼마 안 돼요. 원숭이하고 97~98%, 거의 동일해요. 0.3% 차이밖에 안 난답니다. 미토콘드리아 DNA가. 그런 창조, 같은 6일이거든요. 6일에서 7일로 갈 때 요것은 바로 안식일, 우리 보고 다시 창조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셨던 것 때문에 안식하신 거예요. 여기에 틈이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가 ‘주‘ 되시지는 않았어요. 창조에 관여했어요. 창조에 관여한 그 말씀 그 지혜를 하나님께서 뭐로 바꿉니까? ’주‘로 바꾸려 합니다. 어디서 이루어집니까? 바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십자가에서 다 이룬 거예요.

그렇다면 요 모든 틈새에 6일에서 7일 틈 사이에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요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안식일의 주인이 누구예요? 예수님, 신약 때 와서 발견됐어요. 인간이 아무리 법 지켜도 안식을 이룰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나라를 그동안 은혜로 보호한 것은 그 이스라엘 속에 누가 함께 한 것 때문에? 안식일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의 이름, 주님이 그들과 함께 동행했기 때문에 주님(중보자)보고 은혜를 베풀어 준 거예요. 그리고 용서를 해 주시고, 그리고 매일 아침마다 죽는 양 있잖아요. 그 양이 결국 누굴 이야기하는 겁니까? 유월절 어린양, 예수님이 어린양 이예요.

오늘 본문에 나오죠. 3절에 보면 “하나님이 종 모세의 노래“ 그 다음에 무슨 노래입니까? 어린양의 노래. 왜 예수님이라 하지 않고 어린양이라 했을까요? 어린양이 어디 동원되는 양입니까? 그것은 제사 지낼 때 어린양이 동원되잖아요. 다시 말해서 뭘 흘린다? 거룩한 피를 흘린다. 목숨을 바치는 거예요.

이것은 예수님의 목숨이 아니면 결국 이 세상은 창조되지 않았다는 뜻 이예요. 예수님의 피가 아니면. 그래서 어제 수요일 날 그런 설교 했잖아요. 하나님과 인간의 만나는 장소는 우리가 정하는 것이 아니라 했잖아요. 하나님이 정하는데 그게 뭐냐 하면, 예수님의 피가 전파되는 현장과 사건을 만들 때 그때 유일하게 인간과 하나님의 만남 이예요. 하나님의 피, 예수님이 피, 거기서만 만나요. 내 살과 내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뭐가 없다? 영생이 없느니라. 예수님 위해서 내 피를 흘려봐야 소용없어요. 백날 순교해봐야 구원 못 받습니다. 우리 피는 흘리는 게 아니고 우리 피는 흘려봐야 개피 밖에 안 돼요. 개피 백날 흘려봐야 구원도 안 돼요.

처음에 창조 때 쓰여 졌던 피, 창조 때 창조를 완성했던 그 예수님의 생명이 없이는 새로이 건설되는 새로운 새 하늘과  새 땅에 참여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피로, 어린양의 피로, 그래서 용어가 어린양입니다. 모세의 노래, 어린양의 노래.

출애굽에 들어가면 유월절 어린양 때문에 홍해가 갈라졌다. 지금은 유리바다지만 그때는 무슨 바다? 그냥 바닷물이죠.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유리바다에 뭐가 섞였습니까? 2절에 보면 “내가 보니 불이 섞인 유리바다” 불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가 섞여 있죠. 그러니까 출애굽기 14장에서 홍해바다를 건널 때 결국은 홍해바다 땅위를 건넜지만 그때는 몰랐죠. 그것이 밑에서 뭐가 올라온다? 하나님의 진노(심판)이 올라오는 줄 몰랐죠. 그런데 그 뒤따라오던 애굽 군대가 어떻게 됐습니까? 와서 다리로 밟다가 진노와 심판받아서 다 몰살당했잖아요.

지금 제가 여러분한테 묻고 싶은 게 있어요. 하루 일과 가운데서 이런 유월절이나 유리바다 건너가는 것을 경험합니까? 경험 못합니까? 경험 못하죠. 상상계고 상징계인데요. 아침에 눈만 뜨면 TV에 광고 나오죠. 광고는 뭡니까? ‘빨리 나를 사라’ 이 말 아닙니까? 빨리 컴퓨터 바꾸고 TV바꾸고 특히 홈쇼핑 보세요. 이번 구성은 멋진 구성입니다. 홈쇼핑 나온 건 뭐예요? 우리로 하여금 설거지도 못하게 만들어요. 모든 걸 다 사고 싶어요. 만두고 사고 싶고 곶감도 사고 싶고 간장게장 그것도 사고 싶고, 가구도 사고 싶고 다 사고 싶어요. 그 생각하는데 뭘 건너가? 홍해를 건너가? 애굽 군대가 쫓아오고, 만화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애굽 군대 따라오는 건 옛날이야긴데. BC 400년경인데 지금 그런 게 어디 있어요?

그러니까 이렇게 돼요. 요한계시록 해석을 다루는 문제니까, 옛날에 이스라엘은 이집트(애굽)이 있고 광야가 있는데 광야와 이집트 사이에 뭐가 있습니까? 홍해가 있죠. 옛날에는 연극이 수평적 무대가 돼서 직접 물을 건너고 직접 바다를 건너고 이렇게 실습을 한 겁니다. 왜냐 하면 그때 배경, 환경이라는 것이 하나님이 주신 율법적 차원에서 주셨기 때문에 배경도 율법적 연출이 가능한 그러한 환경을 조성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아들을 칼로 죽이는 것도 아브라함이 힘이 세서 아들을 죽이면 되잖아요. 이건 쉬운데, 이것은 옛 언약 시대잖아요.

그런데 새 언약 시대는 뭐냐 하면 십자가라 말이죠. 십자가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너는 이미 죽었다는 거예요. 이쪽(구약)은 뭐냐 하면 행하려 하잖아요. 그런데 이쪽(신약)은 이미 죽은 거죠. 죽은 인간이 아브라함처럼 자식 바쳐봐야 소용없고 그것도 무슨 행위다? 죽는 행위고 뭐 지금 바다 건너 가봐야 그것도 죽는 행위고, 정말 이게 죽는 행위 아니라면 차라리 옛날식으로 표현하자면, 산이 들려서 바다에 빠지면 돼요. 벌건 산을 번쩍 들어서, 서울의 관악산을 번쩍 들어서 빠지면 옛날식의 믿음이 되는 거예요. 그것도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으면.ㅎ

지금은 죽은 자한테는 ‘니가 살았다고 생각하거든 겨자씨만한 믿음 내 봐라. 그런 믿음도 없으니까 그럼 니 죽은 거 맞잖아.’ 그럼 죽었다는 말은 무슨 짓을 해도 죽은 거고 아무것도 안 해도 죽은 거고 설쳐도 죽은 거고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고 그만 죽어 있어라 그 말입니다. 그만 죽었다고 치자 그 말입니다.

우리를 살려내는 것은 누가 살려냅니까? 그것은 예수님께서 일방적으로 살려내는 거예요. 살려낼 때 뭐로 살려냅니까? 바로 죽음으로 살려내죠. 모든 인간을 현재 연극적인 조성된 모든 환경을 뭐로 본다? 죽었다고 심판하는 식으로 우리를 살려내죠. 그러면 살려내면 우리는 살려낸 특징은 뭐냐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모든 것에 미련 두지 않고 거기 그건 다 허구에 불과하다고 거기에 집착하지 않는 상태로 빠져나오죠. 그게 매일같이 우리가 건너가는 유리바다입니다.

그래서 애들한테나 손자는 잘 돌보지만 이거 한다고 내가 구원되는 게 아니고 내 가정에 옷을 이거 고르고 저거 골라서 아무 옷을 입어도 이것 잘 골랐다고 내가 천당 가는 게 아니고 그게 바로 옛날식이 아닌 지금 이미 죽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머리카락 빠져도 이거 빠진들, 안 빠진들 머리에 약을 뿌려봐야 이거하고 주님영광하고 아무 상관도 없는 거예요.

그런데 목사들은 사기 치잖아요. 옛날식으로. 옛날, 별미를 바쳐라 하는 식으로. 하여튼 소경이 소경을 인도한다니까요. 이미 죽은 인간이 무슨 짓을 해도 소용이 없는데, 교회가 커야 교회가 하나님 만나는 장소라고 사기 치는데, 거짓말입니다. 교회에 하나님이 오시지 않습니다. 교회에는 모기하고 쥐들이나 오죠.ㅎ 낚시 동우회 사무실에 하나님 오시지 않잖아요. 똑같은 거예요. 바둑 두는 기원에 하나님 안 찾아오시잖아요. 안 찾아오시면 똑같은 거예요.

복음이 전파되는 현장에 내가 너희와 함께 하겠다. 왜냐 하면 그래야 우리는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는 것이 너무나 기쁘게 받아들여져요. ‘주여, 제가 바로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입니다. 나만 사랑하는 자입니다.’라고 나올 수 있다 말이죠. 이 성경 말씀은 결국은 창조의 일곱 재앙이 떨어진다 하는 것은 그 핀들을 하나, 하나 뽑아내는 거예요. 뽑아낼 때마다 그동안 너희들이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주되심 때문에 그동안 오랫동안 참았다는 거예요. 그 참은 것을 확 빼버리면 무너지는 거예요. 새삼스럽게 슬퍼할 것도 없어요. 주님이 빼면 ‘무너져도 마땅합니다.’라고 하면 그건 신자고, ‘안 됩니다. 이걸 내가 그동안 얼마나 가꿨는데.’ 하고 붙들면 지옥 갈 인간이고 그렇죠.

그래서 이 요한계시록의 표현 방법 이것은 우리 보고 하라 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보고 ‘얼음, 완전히 동결상태로 봐요. 우리가 어쩔 수 없는, 우리로 하여금 꽁꽁 묶어버린, ’그저 주께서 알아서 다 하시는군요.’라고 하면서 이 찬양에 동참하게 됩니다. ‘주는 위대하십니다. 내가 도저히 할 수 없는 것을 지금도 해내고 계십니다. 옆에 사람 불신자가 묻죠. ’너는 그걸 어떻게 알았느냐?‘ 묻죠. 물을 때 ’너‘라는 말을 빼 달라고 해야죠. 주께서 알게 하실 뿐이지, 그걸 꼭 ’나‘ 또는 ’너‘ 나, 너에게 국한시킬 수 없는 겁니다. 주께서 144.000, 주께서 택한 백성 알아서 가는 것이기 때문에 너, 나를 거기에 집어넣어 버리면 그 질문 자체가 너, 나를 집어넣을 수 없는 단어를 집어넣은 거예요. 성경에서 너, 나가 없는데 우리가 질문할 때 집어넣어버리니까 뭐가 들어와 버립니까? 상상 계와 상징계가 집어 들어가는 거예요. 그거 알려주면 일치시키려고 애쓸 게 분명하기 때문에.

그 다음에 3절 끝에 봅시다. “하시는 일이 크고” 그 다음에 뭡니까? 기이하죠. 비밀이죠. 비밀! 어떤 분이 질문했어요. 뭐냐 하면 ‘비밀이 비밀이지만 비밀을 이미 알았으면 비밀이 아니잖아요? 내가 여러분한테 답변을 구하겠어요. 비밀이 비밀이지만 비밀은 맞는데 그 비밀은 알 것 같으면 더 이상 비밀이 아니잖아요? 하는 질문이 왔을 때 여러분은 어떻게 답변을 해야 됩니까?

분명히 제가 이야기했잖아요. 뭐를 집어넣지 말라고? ‘나’ 내가 아는 비밀은 비밀이 아니에요. 우리는 비밀의 부분이지 비밀을 관찰할 수 있는 관찰자가 아닙니다. 내가 비밀을 쥘 수 있는 게 아니에요. 홍수가 뒤에 있잖아요. 저쪽은 홍수죠. 홍수가 나를 덮쳐버리면 그게 홍수입니까? 흙입니까? 물입니까? 맨 물 아닙니까?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밤이 이만큼 쌓여있는 창고가 있는데 그 밤 앞에 갔다. 밤이 무너졌다. 그러면 내 피부 땅기는 것이 밤입니까? 아니면 꿀입니까? 벌레입니까? 뭡니까? 역시 밤 아닙니까?

비밀이 나한테 덮치게 되면 나는 그게 뭐가 돼요? 확실한 비밀이잖아요. 그런데 그 질문하신 분은 그 비밀이 ‘아니다, 이다.’를 누가 결정한다? 나를 집어넣은 거예요. 나를 집어넣으면 관찰자가 돼 버려요. 우리는 비밀에 휩싸여야지, 내가 비밀을 골라잡으면 안 돼요.

십자가가 비밀 이예요. 그러면 십자가 옆에 서면 우리는 계속해서 비밀이 되는 겁니다. 농부가 밭을 가는데 뭐가 팅하고 이상한 금속성 소리가 났어요. 혼자 가만히 파보니까 보물단지예요. 그러면 그 농부한테 보물 이예요? 보물이 아니에요? 계속 보물이죠. 그리고 그 농부는 더 나아가서 이제는 다른 것보다 뭘 좋아하느냐 하면 비밀스럽게 묻혀있는 그 보물을 다른 것보다 더 좋아하잖아요. 천국을 들어간 사람은 천국을 그렇게 이해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이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3장에서 한 이야기예요. 천국을 그 정도로 사랑해야 된다는 거예요. 딴 거 이렇게 날라 가고 지 몸이 아프고 재산이 다 날라 가도 그런 것은 관심 없어요. 자기가 있는 보물이 보물로 계속 남아 있어야 돼요. 그런데 딴 거 신경 써서 보물이 시시하다면 그건 애초부터 보물이 아니었어요.

그래서 십자가가 비밀 된다는 것은 10년을 믿든 20년을 믿든 항상 이건 내 힘과 내 능력과 내 행함으로 절대로 알 수 없는 것이었었다. 그것이 계속해서 우리에게 똑같이 주어지는 겁니다. 이 성경 말씀은 지키는 게 아니죠. 지키면 이것이 나의 지킨 요소가 돼 버려요. 그럼 안 돼요. 나는 계속해서 이 성경 말씀은 지키지를 못합니다. 지키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는 누굴 사랑하기 때문에? 나부터 사랑하기 때문에, 나를 포기하지 못하기 때문에, 왜, 충동이니까, 그 충동 어디서 나왔다고? 내 몸이 있는 이상 충동이 있어요. 몸이 있는 이상 충동이 있고 충동이 있는 이상 나는 내 몸을 사랑하게 돼 있어요.

따라서 이 무너져야 될, 마땅히 저주받아야 될, 우리를 집어넣어서 예수님께서는 자기의 주되심을 드러내는데 재료로 우리를 사용하신 거예요. 영적으로 언약 적으로 사용한다는 것이 그러한 의미입니다.

조금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4절에 “주여 누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오리이까” 여기 주 다음에 뭐가 붙어있습니까? 주의 이름이죠. 주의 이름이라 하는 것은 우리의 이름은 하늘나라에서는 이름으로 취급을 하지 않습니다. 이 근호라든지, 김 중우라든지, 이런 이름은 우리의 혈육이 붙인 이름이기 때문에 주께서 안 알아줘요. 왜냐 하면 우리의 이름은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죄인, 이름이라는 것은 반드시 기능이 돼야 돼요. 우리가 붙여준 이름 말고 주님이 우리 보고 붙여준 이름은 뭘 갖고 있어야 돼요? 주의 이름으로 하면 우리 이름은 뭡니까? 그냥 죄인 이예요. 주 안에서 우리는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 되는 거죠.

그래서 주님과 함께 있음으로써 우리는 뭐가 됩니까? 의인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주님을 버리면 우리는 죄인 되고 주님과 함께 있으면 의인되고 그렇습니다. 그러면 만약에 주님을 떠나 버리면 우리는 죄인 되느냐, 주와 함께 있으면 우리는 주님 곁을 떠날 수가 없습니다. 왜냐 하면 ‘주의 의’가 만든 생산물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그냥 ‘예수님, 나, 의다.’ ‘알았다.’ 이게 아니라 주님의 의로움이 우리가 만들어짐으로 주님이 의인되는 거예요. 무슨 말이냐, 죄인이 용서받는 기능을 통해서 누가 의인된다? 주님이 의인으로 드러나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용서받은 의인돼 버리고 거기에 한 세트가 돼서 의인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거예요. 그래서 단독이란 성립이 안 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버리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죄인 되고 싶어도 죄인 될 수가 없어요. 그래서 그 안에서 누구 이름? 자기 이름 안 부르고 누구 이름 부른다? 주의이름, 주님 때문에, 주님이 하신 일 때문에, 주님의 기능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구원받았습니다.‘라는 고백을 하는 사람, 이 사람들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은 주의이름을 이야기하죠. 그래서 구약에 보면 우리는 내가 갖고 있는 활, 칼이나 말을 의지하지 않고 우리는 누굴 의지한다 했습니까? 주의이름을 의지합니다.

자, 그렇다면 문제 나갑니다. 우리가 주의이름을 부른 것은 주의이름을 의지한 거예요? 아니에요? 아니죠. 그건 그냥 지 목소리 외치는 거죠.ㅎ 주의이름이라 하는 것은 주께서 친히 하신다는 뜻이지, 내가 주의이름을 부른다고 해서 쫓아오고 그런 건 아니에요. 기도할 때 주의이름 삼창하고 가관 이예요. 하여튼 해프닝을 벌려요. 얼마나 믿음 없으면 그 짓하겠어요. 그냥 사시는 것이 주의이름으로 살아가는 거예요. 살다보면 우리는 나밖에 모르는, 나는 예수고 뭐고 나밖에 모르는 인간으로 발각시키는 그 작업, 누가 하십니까? 주의이름께서 하시는 작업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감사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죽었다는 것이 한 인간의 개인의 죽음인 줄 알았는데 그것이 우리 죄 때문에 죽었다는 소식이 저한테 믿어지니 그것이 바로 구원문제가 아니라 온 우주에 관한 하나님의 거대하신 주되심과 연관돼 있는 서로 연결돼 있는 일 중에 하나의 부분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주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