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계시록23강-예수님의 세계 110915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5. 11. 12. 18:24

가락교회110915요한계시록14장-(예수님의 세계)-23강a-이 근호 목사

제 23강a

요한계시록 14장 시작하겠습니다. 요한계시록 14장을 우리가 보면서 다시 전체 요한계시록의 분위기와 어떻게 연관되는가를 파악해봐야 되거든요. 요한계시록의 전체의 분위기를 보게 되면, 개인의 어떤 행함 같은 것이 거기는 나오지를 않습니다. 인간들의 행함, 인간들이 이렇게, 이렇게 했더니만 하나님께서 어떻게 대처했다 하는 이런 것이 나오지 않고 요한계시록은 일방적으로 하나님께서 밀어붙이는 계획들만 죽 나열돼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왜 그러느냐 하면 지금 사도요한이 어떤 활동을 하고 있는 게 아니고 사도요한은 그냥 밧모 섬에 묶여진 상태, 귀양 간 상태고 활동은 누가 합니까? 사도가 활동 안하면 복음은 누가 전해요? 천사가 하죠. 그런데 천사가 복음을 전하면서 놀라운 사실은 사도요한조차도 예수님으로부터 사도요한에게 연결하는 그 계시전달 운반자가 누구죠? 천사죠. 예수님이 계시는데 섬에 사도요한에게 천사를 보내신 하나님이 사도요한에게만 천사를 보낸 것이 아니고 사도요한 빼놓고 모든 악한 자와 모든 구원받는 자와 구원받지 못하는 자에게도 천사가 폭격기처럼 그대로 작용하고 활동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누가 빠져요? 사도요한이 현재 활동 못하고 있죠? 그럼 사도요한이 활동 못하고 있는데 하나님의 일은 되던가요? 안 되던가요? 되더란 말입니다. 그걸 믿으란 말입니다.ㅎ아! 이거 보통 믿음 아니죠? 아, 사람이 노가다라고 아십니까? 집을 짓는데 노가다가 옥에 갇혀있다. 그런데 한 3년 살다 나와 보니까 집이 지어져 있다. 누가 했습니까? 자기가 안 한건 분명하죠. 바로 그걸 걸 믿느냐 하는 겁니다. 보통 믿음 아니죠? 인간이 내가 여기 있고 여기 있는 내가 어떤 행동을 해서 그 결과로 나에게 구원이 주어진다는 모든 상식적인 틀이 요한계시록에서는 오히려 불신이라고 하는 거예요. 신앙이 없는 거예요.

반대로 자기도 안 믿고 아무도 믿지 않는 걸 가지고 신앙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제가 쓴 글 ‘아, 오락’ 이라는 글에 보면, 찬양해도 자기 보고 찬양하고 경배해도 자기보고 경배하고 헌금해도 자기보고 헌금하고 헌금도 자기 의식하면서 헌금하고 이것은 결국은 누구를 믿느냐 하면, 본인이 행하는 것은 본인이 믿기 때문에 이것을 요한계시록에 의하면 신앙이 되지 않고 뭐가 됩니까? 불신앙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날 한국교회가 온 천지가 불신앙판 이예요. 불신앙이니까 불바다 받을만하죠? 완전히 온 천지가 교회마다 전부 다 입구 딱 열면 처음부터 끝까지 불신앙 이예요. 너무 신앙이 없어요. 자기 자신을 안 믿으면 되는데 자기 자신이 믿을 구석이 없다는 걸 알면 되는데 사도요한은 지금 귀양 가서 잡혀있는 실정이었어요. 사도요한은 받은 대로 그냥 글만 쓸 뿐입니다. 그 글 보고 사람들이 회개하고 그 글 보고 반성한 게 아닙니다.

천사가 작용하지 아니하면 어떤 인간도 오늘 14장 13절 말씀처럼 “성령이 가라사대” 성령이 활동해서 그 사람들이 사도요한의 말이 이것이 하나의 소설이 아니고 사도요한의 개인 의견이 아니라 이게 현실이고 이것이 하나님의 역사요 이게 현재 지구의 운명이고 온 우주의 운명이라는 것을 믿지 못하게 돼요. 성령의 역사가 있어야. 그래서 요한계시록 2장, 3장에 보면 “교회들에게 성령이 이야기한다. 성령이 이야기한다.”라고 하죠. 분명히 사도요한이 쓰는데 뭐라고 합니까? 성령이 이야기하고, 성령이 이야기하고. 여기 13절에 보면 “성령이 가라사대”라는 말이 나오잖아요.

그리고 앞서 본 요한계시록에 보면 성령께서 눈이 한 두 개가 아닙니다. 온 몸의 천사의 옷에 전부 다 눈이 박혀 있어요. 흉측할 정도로 빽빽하게 눈이 빈틈이 없어요. CCTV가 온 구석구석마다 있기 때문에 CCTV 빠져나갈 구석이 없습니다. 그것은 감시한다는 의미가 아니고 성령의 감시는 감시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모든 것은 성령께서 본인이 한 업적이란 뜻 이예요. 이런 것은 대규모 공장에 가보면 항상 모든 컨베이어 벨트가 가만히 있어도 움직이는 컨베이어 벨트 구석구석에 청조 판이 있어서 상황실에서 지금 제품이 하자 없이 그 단계, 단계마다 딱딱 접착이 되는지 조합이 되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테스트기가 있잖아요. 그래서 뭔가 하나가 빠져버리면 스톱 시켜서 다시 보완한다고요. 그것처럼 모든 구석구석에 측정기 테스트기가 어느 구석도 없는 구석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요한계시록 강의 들어가기 전에 먼저 알아야 될 것이 뭐냐 하면 인간이 갖고 있는 신앙과 불신앙이 어째서 성경에서 안 믿는 것이 오히려 신앙이냐 하는 그런 논조가 나올 수밖에 없는가를 생각해 봅시다.

제가 여러분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쉽게 이야기하겠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때인가 우리 집이 학교 앞에 있었거든요. 학교에서 길 건너면 우리 집이었거든요. 수업을 마치고 급우들이 교실에서 다 가고 난 뒤에 청소도 깨끗이 되고 뭔가 교실에 놔두고 온 게 있어서 선생님한테 열쇠를 받아서, 옛날에는 교실에 열쇠가 있었어요. 다시 교실을 방문했을 때 오후 4시쯤에 갔을 때 책상마다 햇빛이 배급 받은 것처럼 쫙 비칠 때 그 아침에 왁자지껄하던 급우들이 다 어디에 갔습니까? 그 현장에는 아무도 없었어요. 여기서 한번 생각해 봅시다. 나는 그때 생각한 게 아니고 지금 와서 그때를 되돌아 생각해 보니까 정리되는 게 뭐냐 하면 급우가 그 시점 오후 4시에 반 친구들이 아무도 없었어요. 없다면 내가 물건 가지러 온 내가 문 잠그고 집에 간다면 그 학급에 누가 있습니까? 나도 없고 아무도 없죠.

그렇다면 그 교실에는 아무도 없는 공간이 되죠. 그러면 교실에 아무도 없으면 교실은 판자 조각들입니다. 교실이 교실 되는 것은 다음날 아침에 왁자지껄한 초등학생 급우들이 소란스럽게 모일 때 교실이 되는 거예요. 이게 쉽게 한다고 한 건데 이게 굉장히 어려운 말을 하고 있는 거예요.

어떤 공간에 있어서 세상이라든지 우주라든지 거기서 그동안 우리가 의미를 어디서 찾았습니까? 남들이 내 눈에 띄기 때문에 남들이 나를 뭐라고 하느냐, ‘너는 같은 반 급우다.’라고 해주는 경우에만 그들과 같은 반 친구고 학생이고 초등학생이다 이 말이죠. 그때는 급우가 50명도 넘었어요. 그런데 그들이 하나, 둘씩 다 죽어버리면, 죽어가면서 나보고 뭐라 합니까? ‘지금 내가 죽지만 이 근호 너도 나처럼 죽는 거야.’이런다고요.

그렇다면 그 애들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그 애들을 보고 ‘아, 나는 저 애가 학생이니까 나도 학생이고 그래서 우리는 같은 반 친구다.’가 되는데 걔들이 하나, 둘씩 다 죽어가면서 ‘나 죽는 것처럼 너도 죽는 거야.‘가 돼 버리면 그럼 나도 없는 게 되잖아요. 그럼 나도 없어져 버리면 교실은 뭐가 돼요? 교실은 아무도 없죠.

결국 내가 내리는 것은 뭐냐,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는 것이 요한계시록의 주제입니다. 적어 볼게요. 이걸 성경에서는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 지금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죠? 안개 지우고, 잠간 없어지는 지우면, ‘너희는 없다’가 돼요. 너희가 없어지니까 결국 없어지기 위해서 뭐가 있다? 우리가 여기 있다. 없어지기 위해서. ‘너 있어?’ ‘없어지거든’ ‘왜요?’ ‘없어, 없음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니가 있는 거야.’

인간들이 ‘믿습니다. 안 믿습니다.’ 하는 것은 뭘 기준으로 합니까? 나는 없어지지 않고 나는 계속 있을 것이라고 짐작하고 ‘예수도 믿습니다. 성령도 믿습니다. 복음도 믿습니다. 십자가 믿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 믿습니다.’ 그 자체가 거짓말 이예요. 너도 없어지면 너의 십자가도 없고, 십자가는 있지만 너의 십자가는 없는 거예요. 너가 없으면 너의 십자가도 없고 너의 믿음도 없고 소망도 없고 니가 이웃 사랑하는 그 사랑도 없어지죠.

내가 없으면 필통도 없고 공책도 없고 주인을 잃어버려요. 오후 4시에 청소가 깨끗하게 된 아무도 없는 교실에 딱 들어선 순간, 그걸 제가 회상해서 생각한 거예요. 그 순간에는 몰랐는데, 그 순간 나는 거기서 빨리 벗어나야 돼요. 빨리 도망치고 싶었어요. 무서워서가 아닙니다. 분명히 급우들과 함께 있어야 내가 있는 건데 이것은 친구들은 다 가버리고 나만 있으니까, ‘아냐, 아니야 이건 내 자리가 아니야, 내 있을 곳이 아니야, 나는 친구들을 찾아가야 돼.’ 왜, 평소에 버릇이 뭐냐 하면, 남들이 너가 이렇다고 이야기해 주는 그 공동체 안에서만 나는 존재하는 겁니다.

집사님 보고 ‘사장님’ 할 경우에만 그게 내 자리가 되고 딴 데 가면 그 자리는 내 자리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뭐라 합니까? ‘사장님’이라 하는 그 자리가 내 자리라고 하는데 그건 거짓말 이예요. 그건 잘못된 생각 이예요. 내 자리라 하는 것은 그 사람들이 다 죽어버리면 한 명 죽고 다 죽어버리면 누가 나보고 사장이라 부를 사람은 다방 마담밖에 없어요.ㅎ 아무도 없는 거예요.

아버지요? 자식 안 낳았다면 누가 아버지라 합니까? 여보라고 남편(아내)이 없다면 누가 여보라고 합니까? 그런데 사라지게 하는 그들은 없어지거든요. 없어지는 그들이 나보고 ‘있다’ 하는 것도 우리가 믿어서는 안 되는 거예요. ‘걱정하지 마, 나도 없어져.’ 이렇게 이야기해야 ‘딩동댕’ 정답이라 말이죠. 너도 없고 나도 없고 남는 것은 우리가 없어지는 것을 있게 하신 주님만 계시는 거예요. 그 이야기가 성경은 오직 예수님만 증거가 돼요. 요한계시록이고 뭐고 요한복음이고 창세기고 출애굽기고 레위기고 모든 것은 오직 예수님만 증거 하는 거예요.

‘나 믿음 있습니다. 상담 받아 주세요.’ 이거 이야기하라고 성경이 있는 게 아니고 그런 것은 주님 믿는 척 하지만 사실은 주님을 믿는 게 아니고 니 자신의 믿음을 니가 챙기고 끝까지 나는 자기 자신의 믿음을 자기가 믿는, 남이 갖고 있는 믿음은 아니라 하고 지가 갖고 있는 믿음만 믿는 일방적인 불신앙인 거예요.

불신앙은 뭐냐 하면 ‘나는 나 외에 아무도 믿을 대상이 없다’는 거예요. 아무리 예수고 뭐고 내가 예수 믿는 내가 믿어지지, 예수 믿고 싶지 않아요. 그런 경우는 우리가 그런 사람을 욕할 필요 없어요. 왜냐하면 베드로도 그랬으니까. 예수님께서 내가 고난 ‘받고 죽는다 하니까, 베드로가 지금 고기 잡던 어부 일을 집어치우고 뭐에 다 바쳤습니까? 이제 예수님만 같이 붙어있으면 천국은 따낸 당상이다.’라고 철떡 같이 믿었는데, 아! 이게 무슨 배신감? 죽어도 지가 먼저 죽어야지 예수님이 먼저 죽는다 하니까 예수님 걱정 하는 게 아니라 누구 걱정합니까? 지 걱정하죠.ㅎ '주님 , 어디로 가시나이까.‘ 주여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제가 말리겠습니다.’ 할 때 주님께서 뭐냐, ‘바로 악마가 그 따위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 것이 악마다.’ 말이죠.

그런데 요새 한국교회 자체가 다 악마가 세운 교회라고 볼 수 있죠. 뭔가 불안한 이 세상에서 자기 단도리하고 자기 안정감을 성경 말씀, 하나님 말씀을 주어모아서 끌어 모아서 그 자리에 자기를 세우려하는데, 마치 해변 가에서 나무를 세우고 모래를 쌓아서 누가 먼저 무너뜨리나 하는 게임이 있는데 이 나무를 세우기 위해서 이것도 불안하면 여기에 덧대기 위해서 온갖 신학으로 그저 자기 하나 세우기 위해서 굳게 세우기 위해서 겉치레를 이렇게 갖다 붙이는 거예요. 주께서 얼마나 고마운지 이거 하나, 하나 떼버리면 결국 작대기는 홀라당 넘어지겠죠. 넘어질 때 뭐라 합니까? ‘너희는 잠간 있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말씀대로 됐구나. 박수 한번 치자, 짝짝짝,ㅎ

 결국은 우리는 ‘말씀이 말씀이다‘라는 것을 증거 하기 위해서 동원된 하나의 도구, 재료에 불과하지 우리가 말씀을 지킨다든지 우리가 말씀을 쥔다든지 하는 것은 성립될 수 없는 그러한 입장에 있습니다. 다시 정리하면 성경은 우리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성경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있는 게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위해서 있는 겁니다.

자, 그러면 아까 강의 전에 언급했던 거, 한번 생각해 봅시다. 지금 예수님이 안 보이는 게 문제예요. 예수님이 안 보이니까 다른 예수, 다른 복음, 다른 성령을 주의하라고 사도바울이 이야기했는데, 이 문제는 다른 예수 따로 있고 예수 따로 있고 다른 복음 따로 있고 복음 따로 있고 다른 성령 따로 있고 성령이 따로 있어서 이 세상에서 같이 활동하고 있다 이 뜻 아닙니까? 활동하고 있으니까 이걸 구분해야 될 거 아닙니까? ‘이거 난 몰라 그냥 예수 믿으면 다 형제지.‘ 이러면 안 되죠. 다른 예수 다른 복음 다른 성령, 이것은 고린도후서 11장에 보면 누가 이렇게 만들어 내는 겁니까? 악마의 탈을 쓴 악마 같으면 우리가 쉽게 알겠는데, 뭘 썼습니까? 양의 탈을 썼죠. 요한계시록에 나오죠? 이 땅에서 짐승은 어린 양처럼 그렇게 행세하고 있다 말이죠.

목사들은 본인이 구원받으면 돼요. 그런데 자기 본인의 구원을 포기하고 교회를 살리기 위해서 희생 봉사하는 사람입니다. 자기는 구원에 관심 없어요. 구원을 포기해 버리고 교회를 살리기 위해서, 이 교회는 무슨 교회입니까? 당연히 가짜 교회죠. 왜냐 사람들은 뭘 보기를 원합니까? 교회가 있음이 하나님 있음으로 그런 식으로 믿음의 확신을 가지려고 하는 거예요. 절에 가서 구원받는다 하면 누가 믿겠습니까? ㅎ 아무도 안 믿죠. 에이, 그럴 리가. 교회 오시면 구원받습니다. 에이, 그건 믿죠. 둘 다 거짓말 이예요.

보이는 것을 믿는 것은 이다? 아니다? 보이는 것을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니거든요. 사람은 보이는 실적과 업적을 주지 아니하면 그건 아무것도 안 믿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게 바로 유대인들이 실수였습니다. 그게 실수인지 본성인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성전이 있으매 그들은 안심했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이 자기 이름이 계시는 하나님이 계신다는 성전이 깨질 리가 있는가, 그러니까 유대인은 뭘 생각하느냐 하면 성전아란 건축물 있잖아요. 건축물에 하나님이 진짜 계시는 줄 알았던 거예요. 입구에 들어가면서 하나님 만나고 나오면서 하나님하고 헤어지는 걸로 본 거예요. 진짜로!!

유대인들이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게 나답과 아비후가 성막에서 다른 제단불로 제사 드리다가 죽었잖아요. 그리고 방울 달고 일 년에 한번 제사할 때 언약궤 위에 천사 그룹이 있죠. 웃사가 언약궤 만지니까 어떻게 됐습니까? 수많은 사람이 죽었잖아요. 그러니까 그들은 ‘이거는 믿기 참 쉽다’는 거예요. 뭐만 믿으면 돼요? 요 나무상자, 아카시아 나무상자, 이것아 안치돼 있는 그 지역, 그 공간, 그 장소에 가까이 가면 거룩이고 거기서 멀어지게 되면 그건 지옥 가는 거예요.

그래서 유대인들은 성전에 가까이 가는 사람과 못 가는 사람을 계급적으로 7단계로 나눈 겁니다. 나누게 되면 백정이나 창녀, 세리 같은 사람들은 뭐를 그리워하겠습니까? ‘나도 언제 직업 바꿔서 직업 포기하고 돈 좀 벌어서 나도 언제 성전 가까이 가서 은총을 받을까.’ 이렇게 생각하겠고 여자들은 ‘하나님은 날 저주했어. 나도 남자로 태어났으면.’ 남자는 안쪽으로 들어가고 여인들이나 이방인들은 바깥쪽에 있었죠. ‘나도 들어갔으면 좋겠는데.’ 얼마나 애타느냐 말이죠. 그런 것들이 법으로 짜여 있으니까 신앙생활 하는데 참~ 쉬운 거예요. 법대로 하면 돼요. 법대로!

안식일에 담요를 들고 가면 된다? 안 된다? 안 되죠. 그런데 안식일에 담요 들고 가라고 누가 시켰습니까? 예수님이 38년 된 병자보고 들고 가라 했죠. 그때 우리 같으면 담요 들든지 관계없는데 그 당시 바리새인들은 어떻게 됐어요? 난리 났습니다. 이것은 담요 한 장이 문제가 아니고 뭐가 와르르 무너질 판입니까? 신앙의 문제, 구원 문제고 그들은 축복과 저주 문제예요. 그들은 담요 하나가 문제가 아니고 안식일을 깡그리 다 무너뜨리는 것은 이것은 하나님의 언약, 변함없는 하나님의 약속, 그리고 택한 백성과 맺은 약속 자체를 완전히 무산시켜서 이제는 믿을 게 하나도 남은 게 없게 만드는 악마의 술책으로서 예수님을 그렇게 본 겁니다.

‘예수여, 당신이 와서 해 놓은 짓을 봐라, 이건 귀신 짓이고 마귀 짓이다.’ 예수님 보고 귀신의 대장이니까 바알세불이 악마 아닙니까? ‘당신은 악마다.’ 왜, 하나님이 정해준 율법대로 말씀대로 된 이 터를 악마가 아니면 누가 이걸 다 떠밀어서 무너뜨리겠는가,‘ 라고 했어요. 그때 예수님이 뭐라 했습니까? ’무너뜨리는 그 분이 메시야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이건 소통 될 수 없는 대화입니다. 이게 어떻게 납득이 가능합니까? 저쪽에서는 예수님의 말을 못 알아들어요. 우리는 이 성전 때문에 그나마도 로마 압제에도 버텼고 살아남았다. 예수님 하시는 말씀이 ‘죽어라.’ 이게 어떻게 대화가 됩니까? ‘우리가 그동안 모세 은혜 때문에 우리 이스라엘이 이만큼 살아남았다.’ 하니까 예수님께서 ‘니는 너희들 십자가에 지고 나를 따라 오너라. 자기 십자가 지고 나를 따르라. 그러면 살리라.’ 쉽게 말해서 죽으라는 말이죠. 유대인들은 ‘우리는 하늘에서 온 만나처럼 떡을 먹기를 원하고 장차 메시야가 오면 떡을 주신다.’ 주님이 하시는 말씀이 ‘ 내 살이나 내 피나 먹어라. 내 살과 피가 영생이다.’

이것들은 기존의 그 유대인들이 그런 발언을 배태하게 만든 모든 법적인 체제, 교회법, 교회 역사, 성전 역사, 모든 것을 다 허물어 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그들은 어쨌든 저쨌든 간에 성전에 하나님은 계시다. 스데반 집사 하는 말이 ‘하나님은 사람의 손으로 지은 집에는 계시지 아니한다.’ 스데반 집사의 말이 어려운 게 뭐냐 하면, 하나님은 어느 곳에도 계시잖아요. 어느 곳에도 계시면 어디에도 계십니까? 사람이 지은 집에도 계셔야 되는데 하나님은 어느 곳에도 계신다는 말을 강조하기 위해서 뭐라 그러느냐 하면 사람으로 지어진 집에는 아니 계신다 했거든요. 결국은 하나님이 어디 계시느냐가 문제가 아니고, 하나님은 그 말 자제가 뭘 공격합니까? 인간이 손대면 다 저주다 이 말입니다.

인간이 손대면 다 저주가 되는 거예요. 그건 왜냐 하면 가만히 있어도 저주 받기 때문에. 말 재밌죠. 가만히 있어도 저주받기 때문에 인간이 뭘 만들어 내면 그것도 저주받는 거예요. 그런데 인간은 가만히 있어도 저주받는 줄 모르는데 지가 만든 하나님의 집이 하나님이 안 계시면 비로소 그걸 만들려고 꼼지락 대면 내가 저주받는 존재라는 것은 성령을 통해서 알게 돼요.

내가 헌금을 이만큼 하면 아마 다음 달에 있을 큰 계약 건이 성취 될 것이고 하나님께 영광 돌릴 거라 생각했는데 헌금 해봤자 국물도 없고 '했나?‘ 할 정도로 계약이 파기됐다면 얼마나 화딱지 나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는 왜 그렇게 하는데요? 하나님께서는 헌금했으면 주는 것이 있으면 주고받는 재미가 있어야지, 실컷 헌금했는데 복은 안 오고 하나님께서 왜 인간을 그런 쪽으로 상대하지 않는 겁니까? 그것은 지가 헌금을 할 때부터 지가 기대한 것이 있었고 기대한대로 안 될 때 하나님께 잡아버릴 듯이 달려드는 그 모습이 이미 헌금하기 이전부터 너는 저주 받아야 될 인간이었다는 것을 헌금을 통해서 깨닫게 하는 축복을 받는 거예요.ㅎ

어제 수요설교를 했는데 외계인의 침공이라 했죠. 하나님이 인간 세계에 왔다는 자체가 이 세상은 작살 난 거예요. 뭐 거기서도 잘나고 못나고 직업 목사 장로 그런 것이 아무 상관없이 작살나는 거예요. 마치 출애굽 때에 죽음의 사자들이 와서 옥에 있는 죄인의 맏아들에서 왕궁에 있는 바로왕의 맏아들까지 온 천하에 장자란 장자, 맏이란 맏이는 다 죽여 버렸어요. 그때 장례업자 아마 대호황을 누렸을 겁니다. 집집마다 안 죽은 집안이 없었으니까.ㅎ

그게 무슨 뜻입니까? 그런 짓을 하시는 하나님의 의도가 뭐예요? 니가 무슨 짓을 해도 이 하나님 보기에는 다 뭉개버린다. 니가 어떤 애교를 부리고 재롱을 부려도 내 앞에서는 전부 다 뭉개버리는 거예요. 이 말은 ‘잘 믿으면 될 게 아닙니까? 헌신하면 될 게 아닙니까? 충성하면 될 게 아닙니까?’ 우리는 자꾸 반발하는데 그 첫 번째 출애굽의 죽음의 사자가 애굽의 장자들을 죽이는 이유가 뭡니까? 그러한 충성과 헌신과 이러한 것이 아무짝도 소용이 없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선악과 따먹고 이미 추방된 존재거든요. 이미 추방된 존재 같으면 무슨 짓을 해도 추방될 수밖에 없는 이유만 나올 뿐이지 그런 재롱부린다고 해서 도로 에덴동산으로 귀향할 수 있는 요소는 없어요. 오직 있다면 그것은 어린양의 피가 문지방과 문설주에 발라야 되죠. 어린양의 피로 우리는 생명나무 있는 천국에 갈 수 있는 겁니다. 아유, 이 간단한 이야기를 왜 간단히 못 알아듣고 왜 한국교회는 재롱을 강조하고 그걸 교육 시키는지 모르겠어요. 박수는 요래 쳐야 되고 이래 치면 안 되고, 왜 자꾸 재롱부리는 것을 가르치는지, 꼭 침팬지한테 ‘사탕하나 줄까 요렇게 뛰어보렴’ 하는 것처럼 왜 그런 짓하느냐 말이죠. ‘하나님 요거 하면 축복 주십니까?‘ ’해봐라, 해봐라 축복 주지,‘ㅎ

이것은 바로 인간의 불신앙이 뭘 낳았습니까? 종교를 낳았죠. 기독교를 낳았고 기독교에서 교회를 만들었어요. 인간의 불신앙이. 그래서 목사는 교회를 포기하면 구원이 보이는 거예요. 교회가 만약에 없다면 믿을 분이 누구밖에 없습니까? 뭘 믿어야 되요? 예수님만 믿죠. 그런데 교회에서는 누굴 믿어요? 내 교회 어떻게 해보려고 시도하겠죠. 이것이 바로 불신앙이라. 관심사가 여기에 다 뺏겨요. 목사는 외톨입니다. 그야말로 빈 교실에 혼자 있는 겁니다. 이것은 목사뿐 아니라 모든 교인들도 마찬가지예요.

명절에 서울서 바라바리 싸가지고 ‘어무이요. 아버지 보일러 놔 드릴까요?’ 하고 왔다가 썰렁하게 싸악 빠져 나가면 남아있는 건 뭡니까? 허전하고 멍하게 웅~ 울리는....

여기서 우리가 아직까지 제가 설명을 안 하고 있어요. 뭐냐 하면 어떻게 보이지 않는 분을 어떻게 구분하느냐, 일단 보이는 것은 이다? 아니다? 보이는 것은 아니죠. 그래서 적그리스도의 특징은 항상 보이는 식으로 와요. 그렇죠? 항상 보이는 식으로 와요.

그러면 보이지 않는 분을 어떤 식으로 믿어야 된다는 말인가, 이걸 한번 생각해 봅시다. 법이란 게 있잖아요. 여기서 우주의 구조와 세상의 구조와 같은데 세상의 구조는 세상의 정치 구조와 같아요. 세상의 구조를 보면 세상 정치 제일 높은 자리에 옛날에는 왕이 있었고 요새는 대통령이 있고, 요한계시록에는 왕이 있으니까 왕으로 보고 왕은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도 있고 땅에 있는 짐승도 있는데, 왕이 이 세상을 만들 때 법을 만들죠. 묻습니다. 법을 만든 사람은 법에서 초월합니까? 법에 예속됩니까? 초월해요. 법이 추월하지 않으면 법이 돌아가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만약에 세상 왕이 우리나라에서는 ‘도둑질하지 마라.’는 법을 지었다면 그 정답은 도둑질하지 마라‘의 본래 뜻은 ’도둑질을 안 했다‘가 아니라 도둑질을 해도 누구만 한다? 나만 한다는 것이 법 안에 있는 실체입니다.

법이란 법을 제정하신 분으로 모든 게 다 쏠리게 돼 있는 속성을 갖고 있어요. 법을 만드신 분을 찾아가게 돼 있어요. 법을 만드신 분을 추적해서 더듬어서 찾아가는 그 노선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런데 만약에 왕이 ‘도둑질하지 마라’ 했는데 저 시골에 있는 선비가 진짜 도둑질을 안 해버리면 이 선비는 왕 앞에서 즉결처단 돼야 됩니다. 왜냐, 나만 도둑질해야 되는데 건방지게 니가 왜 도둑질 안하느냐 이렇게 되는 거예요. 만약에 이 선비가 도둑질을 안 해버리면 이 나라의 왕이 있으나마나해 버리죠. 도둑질을 안 하면 이미 법을 준수했죠. 법을 지켜버리면 더 이상 법이 필요 있습니까? 없습니까? 법이 필요 없죠. 그러면 법을 제정하신 분이 필요 있습니까? 없습니까? 필요 없다. 그러면 누가 신이 되요? 선비가 신이 되는 거예요.

인간들은 하나님의 법을 지킴으로써 결국 노리는 게 뭐예요? 나도 가수다. 나도 신이다. 나도 신이다. 이걸 한국교회에서는 성화론 가지고 다시 개혁주의에서는 인간을 신 되게 만드는 거예요. 나도 신이다. 니만 신이냐? 나도 신이다.ㅎ 이제 다른 예수, 다른 복음, 다른 성령을 알겠죠? 이게 어떤 행동을 해도 믿는 게 예수 믿는 게 아니고 누구를 믿어요? 예수 말씀대로 다 준수하고 믿었던 누굴 믿어요? 자아를 믿는 이것이 악마가 원래 예수에게 대들었던 악마에게 숨어있던 본래의 모습이었고 그걸 누가 그대로 본받았느냐 하면 악마의 지배를 받는 인간들이 그 악마의 모습을 그대로 따르고 있는 겁니다. 왜냐하면 악마의 세상적인 지배를 받기 때문에.

믿지 마세요. 여러분 자신을 믿지 마세요. 믿지 말라는 말은 두 가지지만 판단과 기억인데 다른 말로 추억인데 판단과 추억에 말려들지 마세요. 사람이 자기가 자기를 볼 때 그냥 보는 게 아닙니다. 반드시 판단하면서 봅니다. ‘이것은 잘했을까? 이건 못했을까? 이건 실수가 아닐까? 이건 오류가 아닐까? 이건 참 잘한 거다.’ 그렇게 자기를 판단하죠. 판단에서 자기를 봐버리면 자아가 두 개가 돼 버려요. 판단하는 자아와 판단 받는 자아 두 개가 돼 버립니다. 이 둘을 융합하려는, 화합하려고 시도하는 자아가 생겨요. 자아가 몇 개입니까? 세 개예요. 그걸 삼위일체라 합니다.ㅎ 인간이 신을 세 개 만드는 방법일 수밖에 없는 게 지가 세 개예요. 다시 말하면 판단하는 자아와 판단 받는 자아와 그리고 두 개를 합쳐서 온전한 자아, 자아가 세 개입니다.

이거 마귀한테 배운 거예요. 마귀가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이 속성을 집어넣어서 우리는 여기서 평생 벗어날 수가 없어요. 이게 로마서 7장 이야기에 나오잖아요. ①내 속에 악이 있고 ②나는 선을 원하지만 또 ③하나 회수할 수 없으니까, 그게 로마서 7장 끝이거든요. 그런데 8장에 보면 주님께서 죄 있는 육신의 몸으로 왔죠. 바로 그러한 균열상태, 갈라진 상태, 대가리가 3개인 뱀, 몸체는 분명히 하나인데 신체는 발톱 손톱 몸체는 하난데 생각은 세 개로 갈라지는 대가리 세 개 나오는 이게 죄 있는 육신의 몸 이예요. 예수님이 죄 있는 육신의 몸으로 오셔서 이걸 십자가에서 콱 죽여 버렸어요. 이제는 니 안에 성령 계신다. 그래서 이제는 니 속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죽은 너희 몸이 살리라. 아예 인간을 죽을 몸으로 간주해 버려요. 성령이 임했다하는 말은 성령으로 잘해보라는 말이 아니고 너는 죽을 몸이지만 니 안의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 말미암아 죽을 너희 몸도 살리라. 아예 우리 몸을 죽을 몸으로 했어요. 이 근호가 아니고 세 자로 죽을 몸이라 했어요. 죽을 놈이라고 간주해 버려요.

하나님이 인간보시는 것은 간편해요. 아~주 간편하고 속 시원하고, 그리고 목사가 교회 생각하지 말고 지 구원 생각해야 되죠. 이게 시급한 문제라니까. 교회 생각할 필요 없어요. 교회 생각 백날해도 지 지옥가면 소용없으니까.ㅎ ‘나 이런 식으로 교회 생각 안하고 주님 생각합니다.‘라고 설교단에서 외쳐야 돼요. ’이런 식으로 하면 교회가 잘됩니다.‘라는 말은 할 필요 없어요. 니 신앙생활 하는 이야기하면 돼요.

다시 이야기해 봅시다. 왕은 법을 지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법은 이 왕과 법을 지켜야 될 너희들과 차원이 다른 것을 구분하기 위해서 법이라는 게 있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 세상의 왕은 어떻게 만드느냐 하면 자기들끼리 안에서 인간들 속에서 왕을 뽑다 보니까 이 왕이 왕이 되고 난 뒤에는 분명히 법에서 나온 왕인데 자기도 법에서 나온 왕인데 왕이 되고 난 뒤에는 지는 도둑질하고 뭐가 되는 것처럼 했죠? 아, 우리야 장군은 싸우고 있는데 다윗은 뭐합니까? ‘에이, 잘 빠졌다.’ 하고 밧세바를 탐하고 있죠. 왜 그렇습니까? 왕이니까.

그렇다면 나단이 뭐라 합니까? ‘우리나라에 자기한테는 양이 많이 있는데 종은 양이 한 마리밖에 없는데 그 양을 뺏어서 죽였습니다.‘ 하니까 다윗 왕이 화를 내면서 ’그놈 당장 죽여라‘ 했잖아요. 뭐냐, 법은 자기를 위한 법이 아니고 자기 밑에 통치 받는 일반 백성들을 다스리는 용도로 법을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나단이 뭐랍니까? ’니가 그 인간이다.‘ 다시 말해서 ’니는 하나님의 백성 이냐? 아니냐?‘ 묻는 거예요. ’너, 백성이야? 백성 아니야?‘ 그래서 다윗이 생각하기를 ’나는 왕이기 때문에 내 밑에 백성과 다르다는 의미에서 왕이라‘ 생각했는데 나중에 ’니가 바로 하나님의 백성이냐‘ 할 때 뭘 느꼈느냐 하면 내가 바로 죽어야 될 여호와 빼놓고 백성 중에서 죽어야 될 한 사람으로 자각하게 된 겁니다.

그러면 누가 왕 이예요? 원래부터 여호와가 왕 이예요. 자기는 왕이 아니죠. 그러면 자기가 보여줄 진정한 백성은 뭐냐, 바로 왕인 자기에게 죄를 깨닫게 하신 것은 장차 오실 메시야가 바로 하나님이 이 세상에 죄인의 육신의 몸으로 온다는 것을 미리 앞당겨 보여주기 위해서 다윗에게 그런 사태를 발생시킨 거예요.

그럼 왕은 어디 있습니까? 왕은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들 죄인 속에 왕이 끼어들었죠. 죄인 속에 왕이 끼어들어서 같은 죄인들한테 막 발로 밟혀가면서 수난당하는 모습의 왕! 그 분 외에 다른 하나님은 없습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이 인간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이라는 것은 자기들이 법을 지킨다고 간주하고 나머지 자기들 위주의 계시의 연장으로서의 왕, 신을 만들어 가기 때문에 이 신은 무엇에서 만든 겁니까? 자기들이 만들었기 때문에 자기가 납득이 되고 이해가 되죠. ‘아하! 전능하시고 자비하시고 사랑이 넘~치시고 긍휼이 넘치시고 하나님이 이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시고 온갖 성경 구절을 동원해서 멋있게 이야기하는데 정작 성경구절 하나, 하나마다 예수님 의견하고 누구 의견이 달라요? 예수님 의견하고 모세에게 율법 받았다는 유대인 의견하고 어떻게 그렇게 의견이 다른지, 오죽했으면 예수님이 ’너희 아비는 마귀‘라 했겠어요.ㅎ

어느 대목도 같은 해석이 안 나오고 같은 구석이 없어요. 심지어 예수님을 따르는 마리아 마르다도 마찬가지입니다. ’너희 오빠 산다.‘ 하니까 마르다가 뭐라 합니까? ’예, 주님 다시 오실 때 재림하실 때는 살죠.‘ 또 엉뚱한 해석을 하는 거예요. 해석 잘해서 천당 간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님이 구원해주시는 겁니다. 지가 해석 잘하는 자기 자신을 자기가 믿음으로 구원받은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님이 구원해 주는 것을 믿는 믿음으로 구원받는 거예요.ㅎ 이렇게 지밖에 모르는 인간들을 하나님께서 건져주십니다. 건지고 보니까 물에 푹 젖어서 보니까 죄에 쩔어서 황태, 동태, 소금에 쩔은 고등어처럼 죄에 쩔어서 아무소리 못하고 그냥 구원받아서 끌려나오는 이 존재, 이 존재를 귀한 존재라고 합니다.ㅎ지가 훌륭해서 귀한 게 아니고 주께서 성령으로 건져준다는 점에서 귀한 존재가 되죠.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 13절에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 말은 뭡니까? ‘고생했다’가 아니라 니가 나로 인하여 애 많이 썼다.‘ 예수님으로 인하여 예수님 때문에 예수님의 도장을 맞았기 때문에 그들은 본인의 인생을 살지 못하고 누구 인생을 살아야 됩니까? 예수를 보여주는 죄인 된 인생을 살았는데 이제는 니 역할 다 했으니까 이제는 ’푹 쉬세요.‘라고 성령께서 이렇게 하시는 겁니다.

자, 그리스도인이 있는 성도에게 이렇게 쉬라고 했다면 그럼 나머지 일은 뭐가 있겠습니까? 세상의 구조에서 왕이 있고 백성이 있는 것처럼 유사하게 우주의 구조에서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왕 대신 계시고 우주가 있는데 여기 인간이 우주에 하나님 계신 것을 알 수가 있습니까? 인간은 이걸 알지를 못해요. 내가 오후 4시에 갔단 5학년 2반 교실, 그런데 그 교실이 왜 있는지 나는 몰라요. 왜, 나는 잠간 있다가 없어지기 때문에. 그 교실이 왜 있는지 몰라요. 성경에 보니까 그 교실이 누구 때문에 있습니까? 주님을 위해서 있죠.

그럼 제가 말 어렵게 하지 않고 쉽게 가겠어요. 결국 이 우주는 누구를 하나의 배양기고 누구를 위한 포대기고 누구를 보여주기 위한 계란 같은 거예요? 예수님이죠. 그런데 우리는 그 예수님 자리에 누가 끼어들었습니까? 자꾸 내가 끼어들면서 우주를 해석한 거예요. ‘하나님, 하늘에 계시죠? 저는 땅에 있습니다.’ 주께서 ‘놀고 있네, 씨 ㅎ 니는 잠간 있는 안개니라.’ 왜 자꾸 ‘하나님, 저 이 땅에서 고생 많은데 구원해 주세요. 7나팔 불고 7대접 와도 피해서 일어나서 예수 믿는다 해서...’ ‘놀고 있다 정말.’

이 우주는 계란 안에 누구만 잉태합니까? 하나님이 ‘주’로 잉태, 하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주가 되신, 어린양이 주가  되시는 그것을 배란하는, 그것을 잉태해 내는 그러한 공간입니다.

그렇다면 우주의 구조라는 것은 ‘세상에 왕이 있고 백성이 있다’ 이런 구조는 여기서는 통합니까? 안 통합니까? 통하지 않죠. 뭐가 있어요? 왕은 있는데 백성은 없습니다. 없는 백성을 어떻게 만듭니까? 이제는 왕 되시는 분이 이 땅에서 고난과 수모를 당하면서 툭툭 뭐가 나오느냐 하면, 바로 주의 백성이 등장해 버려요. 반드시 거기서는 어린양의 피로,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하면 어떤 인간도 예수님의 피를 믿을 사람이 있다? 없다? 자기 능력으로 믿은 사람은 없는 거예요. 없으니까 아무도 백성이 아니고 아무도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가 없는 겁니다. 종려나무 흔들 인간 아무도 없고 144.000 가담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다시 이야기할게요. 밧모 섬에 잡혀있는 사도요한, 지가 뭐 활동하고 전도하고 할 그것도 안 되는 입장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이 만들어 지느냐, 그건 누가 개입합니까? 천사가 개입하죠. 그 천사는 누구의 지시를 받아요? 예수님의 지시를 받죠. 예수님의 지시를 받아서 7인, 7나팔, 7대접을 수행하는 천사들의 활동과 성령님의 활동으로 인하여 현재 있는 이 자료를 가지고, 악마가 설치는 이 자료, 마귀로 요동치는 이 종교단체 이 교회 여기 안에서 기어이 144.000 그리고 예수의 피가 믿게 되는 놀~라운 기적, 예수의 피가 모든 죄를 하얗게 씻어준다는 것이 믿어지는 그 어떤 훼방과 그 어떤 악마의 방해와 심지어 더 심한 게 뭐냐, 큰 성 바벨론의 유혹과 비비똥인가, 바비똥인가 하는 명품 유혹, 온갖 세상 것에 대해서 기죽지 않고 성공하려고 애쓰는 그 모든 유혹 속에도 기어이 그러한 것에 구애받지 않고 예수님의 피를 만들기 위한 우주다 이 세상이. 내가 피를 믿는다는 기적이 아니고 나라는 인간도 기적이고 그 인간이 예수님의 피를 믿게 된 것도 누구 솜씨란 말입니까? 현재 지시받은 천사들과 성령님과 예수님의 활동의 결과로써 놀랍게도 어린양의 피를 믿는 백성들이 출몰하는 거예요. 그 출몰하는 과정은 예수님 십자가 지는 그 고난의 길을 되풀이하면서 출몰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이건 뭐냐, 가장 기본적은 것은 나는 있다? 없다? 나란 인간은 없어요. 항상 없고 뭐로? 예수님의 것으로 나, 예수님 것으로 나, 예수님 때문에 생긴 나기 때문에 나가 앞에 붙이면 안 돼요. 나는 예수님의 것이라고 붙이면 안 되고 예수님의 것으로 나가 되는 겁니다. 요거 어렵지만 생각해 봐야 돼요. 요거 생각하면서 복잡하기 때문에 10분 쉬고 계속해 봅시다.

정리해 보면 사람이라 하는 것은 신을 생각하고 신을 만들어 내야 인간의 법을 초월하는 신이 있고 그 법을 초월하는 신을 내가 그걸 믿음으로써 내가 구원받는다는 것이 인간들이 만들어 낸 우주관이고 종교관이라 했습니다. 결국 이렇게 해서 이 신은 납득이 되고 이해가 되면서 동시에 그렇게 그 신을 믿게 된 나 자신에 대해서 긍정할 수 있고 자랑할 수 있고 뽐낼 수 있고 나의 능력을 과시할 수 있는 근거가 여기서 마련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러한 시도를 누가 했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만드셨죠. 누가 끼어드느냐 하면 사람, 그리고 자연을 전부다 뭐를 배태하기 위한 것이라 했습니까? 누굴 배태한다? 예수님이 주로 바뀌기 위한 환경이라 그랬죠? 그 환경에서 율법을 줘 버리니까 인간들이 이런 본성인데 여기다 게다가 율법까지 줘버리니까 신이 났어요. 법을 지킨 나는 어떤 경우라도 구원된다? 안 된다? 구원이 된다. 왜, 나는 법을 지킨 것을 내가 믿기 때문에, 내가 예수 믿는다는 것을 내가 믿기 때문에.

그런데 율법을 뒤따라서 누가 왔느냐 하면 예수님이 오셨잖아요. 역사적으로 보면 뒤따라 온 거지만 실제로는 예수님이 앞서서 먼저 계셔서 율법을 준 거죠. 오셔서 예수님이 이 모든 것을 부정할 때 사람들이 뭐라 합니까? ‘그러면 누가 구원받겠습니까?’ 그러면 누가 구원받겠습니까? 이건 12제자도 똑같은 소리 했어요. ‘그러면 누가 구원받겠습니까?’ 부자가 천국 가기는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것이 쉬우니라.‘ 그때 제자들이 ‘그러면 누가 구원받겠습니까?’ 그때 탄식하며 놀라서 그런 소리 했죠. 사람은 할 수 없다 했죠. 하나님은 하시는데 어떻게 하느냐, 10분 쉬고 합시다.

 이한례 (IP:203.♡.47.76) 11-09-23 18:20 
가락교회110915요한계시록14장-(예수님의 세계)-23강b-이 근호 목사
제 23강b

마귀가 인간보고 신이 되라고 하므로 말미암아 예수님께서 천사들보고 자기 몸을 버린 게 아니고 스스로 신이라고 행세하고 있는 우리 죄 많은 우리를 위해서 자기 귀한 생명과 살과 피를 찢어 내 놓으신 거예요. 그래서 이건 뭐냐 하면 짐승, 원숭이보고 하는 게 아니고 바로 중요한 것은 우리 육 자체가 예수님이 그걸 사용해서 주가 되신다는 겁니다. 이게 얼마나 어려운 말입니까? 그냥 예수님이 공중에서 내려 올 때 춤추고 내려오는 그게 아니고 죄 있는 육신의 몸으로 오셔야 주가 돼요.

그걸 시작해 봅시다. 인간을 ① 희생제물의 가치를 지닌 몸, 어느 쪽입니까? ②살해당해도 되는 몸, 어느 쪽입니까? ②번이죠. 이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히스기야 왕 시대에 앗수르 군대가 왔을 때 천사가 쳐서 185.000명이 한 번에 다 죽었어요. 누가 쳤어요? 천사들한테 살해당했죠. 이게 바로 인간이라는 거예요. 인간은 살해대상 이예요. 그 185.000명 중에서 자기 부모가 군밤 장사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군에 보낸다고 엿 붙인 부모도 있을 것이고 여기 젊은 애들 가운데서 막 약혼식 하고 전장에 나온 사람도 있을 것이고, 아버지가 중풍 걸려서 빨리 제대하고 가서 병간호해야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돈 벌려고 온 용병도 있을 것이고 군대의 진급을 위해 온 사람도 있을 것이고, 심지어  185.000명 죽은 앗수르 군인이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과 메일로 펜팔을 주고받던 친구도 있을 것이고 몇 다리 건너면 일가친척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한꺼번에 죽인 것은 인간은 뭐라고요? 항상 살해당할 수밖에 없는 존재다. 모든 인간은! 심지어 사사기 7장에 보면 기드온의 전쟁에서 미디안 군사 누가 죽였습니까? 그 전쟁의 특징은 뭐냐, 이스라엘은 칼이 없고 칼은 누가 쥐고 있느냐 하면 미디안 적군들만 있어요. 그런데 뭐라 하느냐 하면 여호와의 칼이죠. 여호와의 칼이니까 미디안 군사가 여호와의 칼을 가지고 자기가 자기들끼리 죽이는 거예요. 그러니까 미디안 군사는 뭡니까? 살해당해도 마땅한 몸이라는 것을 여호와가 개입하면서 인간의 존재 정체가 부각되는 거예요.

다시 이야기하면 이 세상은 뭘 잉태한 세상이라고요? 예수님의 주되심! 인간은 자기가 살기 좋은 세상으로 오인하는 겁니다. 이것은 내 세계라고 오인하는 거예요. 살기가 너무 힘드니까 부처 같으면 생, 노, 병, 사 따지면서 불교를 만들고 기독교는 기독교를 만들어서 ‘내가 어떻게 하면 구원 되지?’ 하죠. 그 생각과 바탕 자체가 그게 바로 비 복음  이예요. 우리가 구원받고자 해서 구원받는 게 아닙니다. 구원받고자 백날 해도 구원 못 받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구원해주심으로 말미암아 구원해 주시는 분이 주님이라는 걸 드러내는 방편으로 바구니 하나가 죄 많은 우리를 예수님의 피를 발라서 구원해 주신다면 우리는 그걸로 무슨 위치에 가느냐 하면 예수님을 주라고 드러내는 새로운 관계에 들어갑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과의 의의 관계예요.

본문 들어가려면 멀었어요. 본문이 중요한 게 아니에요. 자, 모든 것이 살해당해도 되는 몸이라면 하나님과 인간, 죄인과 화목케 할 희생 제물은 누구밖에 없습니까? 예수님밖에 없죠. 그럼 장차 예수님 오신다면 수많은 인간들 속에 그 중에 예수님이 포함돼 있다면 똑같아요. 죄인이고 예수님도 똑같은데 똑같은 몸인데 제거, 제거 살해당하고 예수님도 살해당했잖아요. 그리고 삼일 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부활됐다면 이분이 바로 우리가 미처 몰랐던 ‘주님’이 돼요. 이 방법을 하나님이 사용하신 겁니다.

아무리 들어도 못 알아듣는데, 그냥 착한 선생님이고 훌륭한 선생님이고 독특한 분인 줄 알았는데, 죽을 줄이야, 죽을 때 베드로가 전부 다 부인했죠. ‘나는 저분 모른다.’ 왜? ‘저렇게 맥없이 죽을 줄 몰랐지, 난 구름타고 오실 줄 알았지, 난 완전 속았어. 속았단 말이야.’ 그래서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제발 속아라.’ 모든 말씀에 대해서 해석에 대해서 제발 속아 주세요. 속았다는 말은 내가 믿은 것이 믿음이 아닌 것을 인정한단 말이죠. 내가 믿은 것이 다 엉터리인 것을 인정해 줄 때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만 부각이 되는 겁니다. 살아 활동하신 다는 것. 제발 우리가 밧모 섬에 귀양 좀 잡힙시다. 우리가 나대지도 않고 설치지도 않고 귀양 돼서 잡힐 때 그래도 일은 됩니까? 안 됩니까? 일은 잘~  되죠. 일은 멋지게 되죠. 이게 믿어져야 됩니다. 아까 집사님하고 이야기했지만 만날 실적, 실적 지가 평가하고 판단하고 여기 나오잖아요.ㅎ 이런 식대로 신앙도 하면 안 되거든요.

살해당할 몸이 희생제물 몸과 차이나죠. 하나님의 관심사는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왜냐 하면 창세전에 예수 안에서 통일되게 돼 있기 때문에, 관심사가 예수 안을 어떻게 만드느냐에 있습니다. 그러면 살해당할 몸은 살해당하고 희생제물 될 사람은 제물 됐는데 제물 앞에 뭐가 붙어 있느냐 하면 희생이 붙어있죠. 희생은 어떻게 생성됩니까? 이 희생물이 희생되기 위해서 누가 필요해요? 살해당해도 마땅한 인간들이 오히려 누굴 희생시킵니까? 왁 달려들어서 예수님을 죽여 버리죠. 요 방법을 하나님이 사용한 거예요.

그래서 이들이 살해당한 것은 살해당할 때 살해당할 만한 이유와 처벌받을 만한 합당한 이유가 뭣을 기준으로 해서? 예수님의 등장으로 확정되고 규정이 되는 겁니다. 이 사실을 예수님을 믿는 진짜 성령 받은 사람들은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거예요. ‘바로 나 때문에 주께서 돌아가셨습니다.’라고 받아들일 때 ‘내 죄 때문에 예수님은 죽으셔야 했습니다.’를 받아들일 때 그 순간 하나님이 뜻이 그 죄인과 예수님의 관계를 실제로 해서 하늘의 뜻이 거기서 발현되죠.

그렇다면 이 살해당할 몸을 뭐라 하느냐 하면 살해당할 이 몸이 자기가 살해당하면 죽은 몸이 돼요. 이걸 ‘사물’이라 해요. 사물 아시죠? 딱딱한 거, 물건, 단단한 거. 그렇다면 인간은 지가 생각하고 하나님 생각하고 복잡하죠. 그러면 사물이 아니잖아요. ‘나는 살아있다.’고 여기는 인간을 뭐로 바꾼다? 사물로 바꾸기 위해서 여기에 프레스, 압력이 필요하죠. 요 압력이 요한계시록의 표현방식의 취지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모든 표현들은 뭐라고요? 인간이 살아있다고 우기는 인간을 666, 7인, 해석도 못하고 알아먹지도 못하는 짐승도 아니고 이상한 반신반인 인간도 아니고 짐승도 아니고 괴물과 같은 도무지 해석이 안 되는 식으로 해서 ‘도저히 해석을 못하겠다.’하는 그 자체가 죽은 사물로 규정지을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되는 겁니다.

말씀에 대한 압력으로 짜브러드는, 사람이 살아있을 때는 ‘왜 죽이느냐’ 하다가 사물이 되고 난 뒤에는 그냥 공치듯이 죽여 버리면 이게 뭐가 돼요? 아까 185.000명 하룻밤에 자고 있는 사람 죽는 거예요. 185.000명이 이 숫자는 인도네시아 스마트라에 쓰나미 올 때 죽은 숫자쯤 돼요. 일본에 그렇게 지진 나도 기껏 몇 명 죽었습니까? 2만여명 죽었죠. 185.000명 하룻밤에 다 죽었습니다. 인간은 완전히 흙으로 보는 거예요.

여기에 하나님의 말씀이 갖고 있는 위력입니다. 나답과 아비후가 제단에 엉뚱한 불로 제사하다가 불이 커지다가 화상입어 죽었죠. 고라의 자손은 모세에게 대들다가 갑자기 땅이 갈라져서 죽었고, 죽이는 방법도 아이디어가 대단해요.

제가 전라남도 함평에 갔는데 나비 축제를 해요. 나비의 그 모양새를 보면 그 꽃문양을 하나님께서 그렇게 예쁘게 온갖 종류를 만들어 내듯이 사람을 죽이는 방법도 하나님께서는 가지가지, 하여튼 요리 죽이고 조리 죽이고 이거는 사람이 꿈도 꾸지 못하는 방법으로 죽여 버려요. 세상에 땅이 갈라질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갈라져서 그 속으로 몰살 돼 다 죽었잖아요. 하나님이 못 죽여서... 지금 참아서 못 죽이는 게 아닙니다. 인간은 이처럼 살아있는 존재가 아니에요. 하나의 사물에 불과하니까.

여기서 오늘 강의, 제일 어려운 부분에 들어가겠습니다. 뭐냐 하면 희생제물인 어린양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 기존의 세계를 어떻게 하느냐, 여기 14장 14절에 보면 “또 내가 보니 흰구름이 있고 구름 위에 사람의 아들과 같은 이가 앉았는데” 이것도 말이 안 되죠. 왜냐, 구름 위에 사람이 앉았으면 떨어집니다. 그렇잖아요. 이 자체가 하나의 스트레스가 된다니까요. 해석을 어떻게 하란 말이냐, 과학적으로, 압력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주님께서는 ‘이걸 니가 왜 해석을 하겠다는 의도가 뭐냐, 해석해서 천당 가려고 하지? 웃기지 마.’ 그런 식이라.

이 모든 해석은 예수님이 다 이룬 해석 이예요. 예수님이 주가 되신 입장에서 해석을 해야 되지 이거 이용해서 새삼스럽게 구원받으려하는 시도하는 자체가 그건 구원 못 받은 사람이죠. 이미 구원받았기 때문에 이 해석을 우리는 예수님 쪽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이 말입니다.

여기 “금 면류관이 있고 그 손에는 이한 낫을 가졌더라” 자, 왜 심판받아야 됩니까? 심판은 같은 말로 전쟁이라 하는데 전쟁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결정 시점, 결정권, 두 진영이 밀고 당기고 밀고 당기고 황산벌 싸움하듯이 온나, 갔나, 갈까 말까 하다가 대장이 손으로 지시하면(엄지손가락을 내리면) 이렇게 하면 전쟁은 시작됩니다.

그러면 이렇게 전쟁의 시점을 결정짓는 권이 어떻게 해서 그게 나오는지 봅시다. 내가 설명하는 게 맞는지 보세요. 성도가 모인 곳이 교회다 (X) 왜 그러느냐 하면 교회란 성도가 모인 곳이 교회가 아니고,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인데 성도로 구성돼 있다. (O) 이건 맞죠. 왜 그러느냐 하면 주체가 그리스도 몸이 새삼스럽게 만들어 낸 것이 교회거든요. 그런데 구성요인(성도)이 교회가 이렇다고 말할 수 있는 자격은 없어요. 왜냐 하면 그렇게 돼 버리면 저희들 모임을 과도하게 긍정해 버리고 그걸 합법화 시킬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남성과 여성, 남성은 이야기합니다. 남성이란 여자가 아닌 모든 것이 남성이다. 맞죠? 그렇죠. 그런데 여성이란 남성이 아닌 모든 것이 여성이다. 맞아요? 이게 틀린 말 이예요. 왜냐 하면 여성이 남성이 돼 버리면 이건 여성적 남성 형이 돼요. 이 말 잘 들으세요. 오늘 제일 어려운 대목이니까. 여성을 누가 규정해요? 남성을 집어넣으면 남성이 생각하는 여성은 여성이 아닙니다. 결국 남자들이 생각하는 여성은 없어요.

그런데 사람에게는 뭐가 있느냐, 여성도 있고 남성도 있죠. 그럼 여성을 말할 때 남성, 여성 이러면 안 되고 ‘사람인데 그 중에 일부가 여성이다.’라고 출발해야 돼요. 그러면 이건 뭐를 빼느냐 하면 남성이 건방 떨면서 여성이 이렇다고 말할 자격이 있다? 없다? 없다는 겁니다.

이걸 성경에 그대로 적용시켜 봅시다. 예수님의 신부가 소위 사람들이 ‘나는 예수님의 신부가 되고 싶다’ 할 때 그게 신부냐 하는 겁니다. 사람들이 ‘나는 예수님의 신부다.’라고 말할 수 있어요? 없어요? 없는 거예요. 왜냐 하면 사람들이 생각하는 ‘나는 예수님 신부다.’할 때 이미 예수는 누구 안에 예수입니까? 인간 속에 갇혀있는 예수가 돼 버려요. 인간이 창안한 다른 예수, 다른 복음, 다른 성령이 돼 버린다고요.

지혜로운 다섯 처녀와 어리석은 다섯 처녀 이야기 아시죠? 그 기름 준비하라고 누가 이야기했던가요? 없죠. 그러면 기름 준비하라는 것은 신랑 쪽에서 이야기하죠. 그러면 어리석은 처녀가 지혜로운 다섯 처녀보고 기름 준비 했나 따질 수 없고 지혜로운 처녀가 어리석은 처녀보고 기름 준비 했어? 안 했어? 따질 이유가 없죠. 그럼 기름 있느냐 아니냐를 누가 결정합니까? 기름을 준비하라고 하신 예수님, 신랑이 결정하죠.

그럼 예수님께서 ‘너는 도둑질하지 마라.’ 했을 때 ‘도둑질 했다. 안 했다.’를 내가 결정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못하죠. 그럼 내 주위의 다른 사람들이 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못하죠. ‘도둑질 했다. 안 했다.’를 누가 결정합니까? 신랑이 오실 때 하는 거예요.

그럼 오늘 본문 14절 이제 들어갑시다. 신랑이 오실 때 뭐하냐 하면 ‘기름 준비 했어? 도둑질 했어?’ 이걸 묻는 게 아니고 신랑이 오시는 동시에 심판을 해버립니다. 심판을 할 때 그 심판의 정당성을 아는 사람은 심판 받지 아니하고 ‘어, 나는 열심히 했는데.’ 하고 심판의 정당성을 부정해 버리면 그 세계는 주님을 배태하는 우주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 구원받기 위한 어떤 의지를 드러낸 세상과 우주로서 평소에 그렇게 잘못된 해석을 해왔다는 것이 들통 나는 겁니다. 무지무지하게 어렵죠? 굉장히 어려워요.

왜냐 하면 이 본문을 가지고 ‘마지막에 주께서 면류관 쓰고 구름타고 이 세상을 심판하신답니다. 우리는 심판 받지 않기 위해서 정신 바짝 차리고 요한계시록 말씀대로 잘 합시다.’라고 하면 이미 그 사람은 지옥 가는 사람입니다. 마치 ‘우리 기름 준비해, 기름 준비하자.’ 이러면 지옥 가는 겁니다.

그 기름 준비하는 가운데서 신랑은 이미 알아요. 이미 구원받을 처녀와 받지 못할 처녀가  구원받을 처녀는 기름 준비가 확실하게 준비가 다 된 상태고 받지 말아야 될 처녀가 행여나 기름 준비를 안 해야 되는데 했을 경우에 못하도록 기다리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들이 기름 준비와 상관없이 신랑은 이미 결정 된 상태에서 자기가 내린 종들을 주께서 판단하시고 심판할 것 심판하고 찾아 올 곳을 찾아온다는 겁니다. 우리가 오시라 해서 오시는 분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알아요. ‘오시라’ 하는 ‘니는 잘렸어. 잘린 거야 어디서 건방지게 나보고 오라 가라해. 니는 이미 잘렸어.‘ 주께서 알아서 오십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택한 백성은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살리리라.’ 요한복음 6장 39절.

주님께서는 빈틈이 없어요. 실수로 ‘아이, 니는 천국 갈 놈이 아닌데 어떻게 왔나,’ 이럴 수는 없습니다. ‘아이쿠, 빠져 먹었다, 내 정신 봐라. 내가 나이가 많아서 저 애는 구원해야 될 건데 저걸 빠뜨리고 그냥 데려왔구나, 다시 올게.’ 이런 거 없습니다.ㅎ 그리고 예수님도 그런 실수 안 할뿐더러 천사들이 마귀와 싸우고 있습니다. 마귀하고 싸우는 천사들이 마귀와 질 인간과 마귀에게 이길 인간을 천사들이 알아서 관리하십니다.

지금 한 것 정리해 봅시다. 여기 뭐가 어려우냐 하면 성도가 모인 곳이 교회라 하면 안 되고 교회는 그리스도 몸인데 거기는 성도로 구성돼 있는 거예요. 성도끼리 모여서 ‘우리가 교회 맞지?’ 할 수 있는 자격이 있다? 없다? 없는 거예요. 그런데 세상에서는 쉽게 말해서 남성들이 5명이 모여서 포차 아시죠? 포장마차. 포장마차에서 5명이 앉아서 소주 마시면서 지나가는 여성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그 여성이 여성일까요? 아니면 남성에서 평가한 여성일까요? 그거 진짜 여성 아니죠? 남성들이 평가한 여성이죠. 그건 여성의 평가가 틀린 겁니다. 이미 남성적인 안목이 섞여있기 때문에 그 모든 해석은 잘못된 거예요. ‘잘 빠졌다.’ 그건 전부 다 제대로 된 여성상이 아니에요. 그러면 여성은 남성의 해석이 필요치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놀랍게도 여자의 후손, 메시야는 남자의 후손이 아니고 여자의 후손이 되는 거예요. 메시야를 남성 형 문화가 메시야를 알아볼 수가 없습니다. 어떤 인간도 메시야를 알아볼 수가 없어요. 누가 알았으리요. 이사야 53장처럼 아무도 알아 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여자의 후손에서 심지어 마리아까지 여자의 후손으로 온 예수님을 못 알아봐요. ‘예수여, 포도주가 떨어졌는데 잔칫집인데 어찌하면 좋지?’ ‘여자여, 그게  나하고 무슨 상관있습니까?’ 라고 하면서 물을 포도주로 만들어주죠. 이것은 상관없는 것을 뭐로 바꾼다? 상관있는 걸로 바꾸는데 상관의 시점이 지금 가나안 혼인 잔치가 아니고 그건 표적에 불과하고 표적의 실체는 십자가죠.

십자가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죠. 그게 뭐냐 하면, 물이 뭐로 변합니까? 물이 포도주대신 포도주가 뭐로 변합니까? 피로 변하는 거예요. 내 피와 내 살을 먹고 마시는 자는 영생을 얻는다. 결국은 마리아마저 누구? 예수님을 죽이기 위한 도구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마리아는 자꾸 내 아들로 생각한 거예요. 자기 안목을 집어넣는 거예요.

교실에 오후 4시에는 아무도 없는 거예요. 아무도 없으니까 주님의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들어감으로 말미암아 그 교실은 주님의 교실이 아니고 갑자기 내 교실이 되는 겁니다. 집사님들 인생이 없는데서 있게 하니까 그때부터 우리는 집사님도 나도 마찬가지지만 ‘내가 하는 일이 잘 돌아가야 하는데,’ 전부 다 위주를 내 쪽으로 ‘환율이 오르면 나을 텐데’ 모든 세상 돌아가는 경제활동을 내 유리한 쪽으로 생각하죠. 그렇잖아요. 거기서 지가 주되려는 거예요. 지가 주돼서 지가 예수 평가하고 지가 교회 나가니까 심판이 주어질 때 우리는 뭐라 합니까? ‘맞습니다. 내가 심판받아 마땅합니다. 우리는 살아있는 것이 아니고 사물이 되어 우리는 185.000처럼 당장 죽어도 할 말 없습니다.’ 고백할 수 있어야 되죠.

예수님의 피는 바로 우리가 죽여서 생긴 피고 동시에 우리를 살리는 핍니다. 이걸 양가적이라 하는데 두 가지의 서로 상반되는 의미가 함축돼 있어요. 우리는 미치는 거예요. 서로 화합이 되는 의미가 있으면 얼마나 좋아요. 아들이 다 같은 직종이면 얼마나 좋습니까? 서로 상반되는 직업, 하나는 우산 장수고 하나는 소금 장수면 부모가 얼마나 괴롭습니까? 이게 오늘날 우리 모습 이예요. 주님은 우릴 보고 의인이라 하고 내 하는 행동 보면 죄라고 하고 죄인 됐다가 의인 됐다가 그럼 이 말은 내가 내 쪽에서 그 둘을 합쳐서 내가 해석할 수 있는 권한이 우리에게 있다? 없다? 우리한테 없고 오직 계시에 의해서 계시를 들추어지는 그러한 바탕과 재료에 불과한 겁니다.

죄인이면서 의인이고 의인이면서 죄인이고 그 두 개를 융합할 수 있는 권한이 우리에게는 없는 거예요. 신학이 문제예요. 신학에서 구원받았다 하는 그게 문제라니까요. 이미 구원받았으면 신학이 필요 없어요. 주께서 구원했으면 그걸로 충분하고 전부인데 신학을 하게 되면 신학 가지고 뭔가 지 구원을 확인하려고 할 때부터 문제가 생겨요.

그 다음에 16절 봅시다. “구름 위에 앉으신 이가 낫을 땅에 휘두르매 곡식이 거두어지니라” 구름 위에서 낫을 휘두르죠? 심판하는 이유를 다시 한 번 정리하면, 이 세상은 예수님이 주되심을 드러내기 위함인데 결코 이 세상 안에 있는 인간들이 자기 구원하려고 자기 잘 살려고 자기 영원불멸을 노리기 위해서 그렇게 이해할 수 있는 세상은 아니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주께서는 조지는 겁니다.

심판을 하는데 어디서 한다고 했습니까? 구름 위에서 하죠. 왜 구름위에 앉아서 하죠? 그건 다니엘 7장에 보면 구름위에 계신 분이 오셔서 장차 자기 백성인 사람과 아닌 사람을 가려내는 작업을 하신다고 돼 있어요. 구름 위에 앉으신 이를 인자 같으신 분이 오셔서. 사람의 아들이죠.

그러면 자기 백성은 얼마나 착했기에 구원 받았습니까? 착하다는 건 성립이 안 되죠. 그러면 얼마나 훌륭하기에 구원받았습니까? 훌륭한 것도 아니죠. 얼마나 많이 알아서? 그것도 안 되죠. 그럼 인자는 어디에 있어야 돼요? 구원받을 자 속에 그가 누군지 몰라요. 똑같은 인간들이라 몰라요. 세상은 자기중심으로 생각하고 우주는 살기 위해서 존재한다고 다 그렇게 생각하는데 여기에 인자 같으신 분이 이 땅에 와버렸다 이 말이죠. 누가 자기 백성을 골라내요? 인자 되시는 분이 누굴 골라냅니까? 자기 백성을 골라내죠. 골라내면서 인자 안에 뭐가 포함됐습니까? 구름타고 오신 분이 포함됐죠.

그럼 이래 봅시다. 쉽게 예를 들면, 내가 인자라 합시다. 건방지게. 내 안에 구름이 뭉개, 뭉개 구름이 있다고 합시다. ‘집사님, 나 구름타고 심판하실 분인데 믿습니까?’ ‘믿습니다.’ 그러면 자기 백성이 되는 거예요.ㅎ 그래서 목사는 복음만 전해야 돼요. 교회를 만들어 버리면 그건 뭐냐 하면 사람이 남성이 여성을 남성적 입장에서 생각하는 거와 똑같은 거예요. 자기부터 쫙 깔고 자기부터 정당화 시키면서 예수는 이런 분이고 하나님은 이런 분이고 이래 돼 버리면 그 자체가 반칙이죠. 왜, 자기는 지가 알아서 심판에서 면제돼 버리면 그 사람은 구름 타는 인자가 소용없어요. 안 되잖아요.

나는 길이요, 나는 진리요, 나는 생명이라. 우리는 길이 아니요 우리는 진리가 아니요 우리는 생명이 아니에요. 이게 얼~마나 어려운 말인지 모르겠어요. 나는 길이요 나는 진리요 나는 생명이라. 그걸 알아먹는 사람이 ‘우리’에 해당돼요. 우리에 해당되기 때문에 우리는 어떻게 할 수가 없는 입장입니다. 항상 나로부터 시작해서 결과로 우리로 나와야지, 우리로 시작해서 나를 끄집어내면 안 된다 이 말입니다. 내 말이 더럽다.ㅎ

지하철 타고 있잖아요. 예수님께서 ‘나는 길이고 진리이고 생명이거든, 나를 믿느냐?’ ‘믿습니다.’ 그러면 ‘가자, 가자.‘ 이러는 겁니다. 그런데 지하철에 열 댓 명 모여 놓고 ’어서 오십시오. 메시야여,‘ 그러면서 북치고, 장구 치면 거기에 옵니까? 안 옵니까? 거기에 왜 갑니까? 왜 가는데? 유대인들이 그 짓 했어요. 성전에서 제사 드리면서 메시야 오신다고 기다렸잖아요. 주께서 어떻게 기다리는 그들에게 ’에라이 씨,‘하고 다 부셔버렸죠. ’다 헐어버려라.‘ 누가 놀랬는지 압니까? 바리새인도 놀랐지만 제자들도 놀라서 전부 무서워서 도망가 버렸어요.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주님께서 사업을 하는데 와서 다 엎어버리면 누가 놀랍니까? 사장님이 놀라죠. 의사하고 변호사하고 애들이 저수지에 낚시 갔다가 물에 다 빠져 죽었다. 누가 놀랍니까? 지 부모가 놀라죠.

이게 바로 나쁜 짓해서 심판받는 게 아니고 처음부터 사물(물건)이라니까요. 처음부터 세상은 자식이고 뭐고 판사고 검사고 그게 주님의 주되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주신 자도 하나님이요. 거둬 가시는 분도 하나님인데 사람들은 주신다, 주신다, 주시기만 하고 거둬가는 것은 없는 거예요. 왜냐 하면 내가 했다 하고 예수님도 내가 했다 하는 지가 했다고 하는 해석에 대해서 주께서 공격하시는 거예요.

다시 봅시다. 인자가 구름 탄다는 것은 이미 구름타고 오실 내용을 품에 딱 품고 있어요. ‘나 구름타고 온 인자인데’ 옛날 인자라 함은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는지, 구름타고 오신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메시야라는 걸 알고 있어요. ‘내가 인자인데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은 예레미야, 선지자, 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주는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할 때 ‘니가 알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고 축복이다.’ 했죠. 이 말은 이미 구름타고 오실 분이 자기 백성을 건지는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서 죽고 사흘 만에 살아나는 것만이 그것만이 인자로부터 구원받는 유일한 기준 이예요. 왜, 구름타고 오실 심판주가 그런 행위를 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어제 수요설교를 다시 해 볼게요. 명절 됐는데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많아요. 처가 식구들이. 이야기하는 걸 보니 전부 다 과거 이야기를 하는데, 이렇게 한 것도 하나님이 뜻이고 저래도 하나님의 뜻이고 반죽이 잘 된 것도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의 뜻을 성경에서 찾는 게 아니고 어디서 찾습니까? 전부 다 자기가 놀란 것, 자기에게 이익된 거, 이런 것을 하나님의 뜻이라 한다 말이죠. 이것은 양적이죠. 다시 말해서 내가 여기 있고 내가 얼마나 양적으로 불어나느냐에 있죠.

그런데 성경은 뭐를 증거 합니까? 예수님을 증거하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증거 하죠. 이것은 뭐냐, 질적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인간 자체에 무슨 문제가 있다는 걸 지적하는 질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십자가를 지고 그 다음에 그 앞에 붙는 게 뭡니까? 십자가 앞에서는 자기를 부인하고 다른 말로 하면 자기 목숨을 미워하고, 자기를 미워 하고와 십자가가 짝을 이루는 거예요. 지 좋아하고 십자가는 없는 거예요. 날 긍정하는 십자가 이런 건 없는 거예요. Boys be ambitious. 야망을 가지는 이런 십자가, 이런 건 없는 겁니다. 그건 선교사들이 거짓말 한 거예요.

십자가는 항상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십자가란 말이죠. 이것은 십자가를 들이댄다는 것은 질적으로 인간들은 문제가 있다는 겁니다. 성경이 말하는 다른 계시, 성경의 본뜻은 놔두고 자기중심으로 자기가 연구하고 기대하고 바라는 것을 하나님의 계시인양 자꾸 뭉개 뭉개 구름처럼 만들어내는 거예요.

그러니 내가 아무소리 안 했죠. 말만 하면 꼭 성경말씀대로 ‘저거는 항상 불길한 이야기만 한다.’고 미가야처럼. 만날 불길한 이야기만 하고 부정적으로 본다고 해서 말을 안 끄집어내죠. 하지만 그런 이야기 들은 것은 어제 수요설교로서는 멋지다 싶었어요. 그런 계기를 준 것도 기회다 싶어서 수요설교에 써먹었죠.ㅎ

하나님의 계시라 하는 것은 인자 중심이죠. 인자가 구원하는 그 기준은 인자만이 할 수 있고 인자만이 알고 있는 겁니다. 십자가! 말은 쉽게 하지만 십자가 의미를 알게 한 것은 천 번 외운다고 되는 게 아니고 성령이 와서 십자가 영을 부어줄 때, 아! 다 이루었다는 뜻이 우리가 하나의 도구에 불과하다는 사실! 그러니 이용당하는 거예요. 누구한테? 아직도 이용당할 세월 많이 남아있습니다. 철저하게 태어나기 전부터 죽고 난 뒤까지 우리는 철저하게 농락당한 겁니다. 누구한테? 주님, 예수님한테 농락당한 겁니다.ㅎ

실제로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 나옵니다. ‘베드로야 나귀 하나 끌고 오거라.’ ‘주인이 안 준다 하면 어떡합니까?’ ‘다~ 주인과 이야기가 다 돼 있다.’ ‘베드로야, 성전 세내야지?’ ‘돈이 어디 있다고요?’ ‘물고기 잡아봐라.’ 아가리 벌리니까 동전 나오죠. ‘주여, 풍랑이 일어서 무섭습니다.’ ‘어이, 풍랑아 조용하라니까.’ ‘예’

전부다 주변에 있는 환경, 이 우주가 누구를 배태하기 위해서? 예수님의 주되심을 만들어 내기 위한 환경임을 모르고 그걸 반대로 생각해서 내가 기어이 살아남기 위한 조성된 환경이라고 과학적으로도 그렇게 생각하고 물리학, 천문학, 생물학적으로도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이건 주님의 뜻이 아닙니다. 그건 양적으로 번창해서 도달될지는 모르지만 양은 통하지 않습니다.

뭐가 중요합니까? 질적으로 니가 심판에서 면제될 사람인지, 아니면 심판, 저주 받아야 될 사람인지 질적으로 규정한 기준은 오직 예수님의 하신 일뿐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보시면 돼요.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그 기준은 우리를 심판하는 그 기준 이예요. 뭔 뜻인지 다시 이야기할게요.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는 그 기준은 우리를 저주하는 그 기준으로 우리를 구원하십니다.ㅎ 그래서 어떤 인간도 저주에서 면제될 만한 인간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저주에서 사흘 만에 부활했습니다. 저주에서 살아나야 돼요. 그래서 우리 죄로 인하여 예수님이 죽고 우리는 의로 인하여 살아나는 거예요. 로마서 4장 25절 말씀, 예수님 십자가에서 그렇게 되는 거예요.

아브라함이 아기를 낳을 수 없게 만들고 아이를 도저히 낳을 수 없는 상태에서 아기가 태어나게 함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이 뭘 믿게 하신 겁니까? ‘내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하신 일로 인하여 내가 구원되는구나.’ 하는 것을 장차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다 아브라함이 만나서 기뻐하게 되었죠.

여기에 “또 다른 천사가 하늘에 있는 성전에서 나오는데” 왜 성전이 심판을 시도하는 세트가 되는 이유가 뭡니까? 나답과 아비후가 죽은 것이 어디서 죽었습니까? 성전(성막)에서 죽었죠. 성전에는 뭐가 있느냐 하면 유일하게 희생제물이 되는 몸이 타죽은 장소가 아닙니까?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타죽은 장소에다 성전의 확대를 노리는 거예요. 하나님의 의도가, 죽고 사는 것을 확장시키는 것이 하나님께서 생각하는 천국이 되는 겁니다. 어린양의 성전, 언약궤가 있는 곳,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곳, 그곳이 유일하게 희생제물이 되시는 분이 어린양으로 제사지냈던 것이 완성이 되는 걸 보여주는 그래서 거기서  생명나무로 모든 죄는 용서가 되는 천국!

천국이라 하는 곳은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곳, 그 성전이 있는 곳이 천국이죠. 그럼 천국이 있다는 말은 무엇이 만들어져야 된다? 천국의 반대말이 뭡니까? 지옥이 만들어 져야 돼요. 지옥은 영원한 심판! 천국은 영원한 용서! 축복이죠. 그래서 지옥 만들기 위해서 뭐를 해야 합니까? 성전에서 천국에서 반대되는 양상 세계를 만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 대상이 여기 20절에 보면 “성 밖에서 그 틀이 밟히니 틀에서 피가 나서 말굴레까지 닿았고 일천 육백 스타디온에 퍼졌더라”

370~380제곱키로 쯤 돼요. 이건 엄청난 넓이죠. 온 천지 온 천하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온 천하에 뭐가 일어난다? 하나님의 심판이 지금도 일어나고 계속 일어나고 계속 이어지는 거죠.

자, 그러면 끝으로 해 봅시다. 심판이 있다는 증거를 지금 우리는 어디서 찾을 수 있습니까? 여기 보니까 심판의 모습을 보니까 이한 낫이니까 예리한 낫을 휘둘러서 포도송이를 거두고 발로 밟으니까 거기서 뭐가 나옵니까? 그 틀에서 뭐가 나왔습니까? 피가 나오죠.

제가 지금 질문을 뭐했습니까? 심판한다는 흔적을 어디서 찾을 수 있느냐 했죠? 온 구석구석에서 나오죠. 구석구석에서 일어나고 있는 심판의 증거들을 어떻게 일반화 시킬 수 있느냐, 어떻게 정리할 수 있느냐, 물으신다면.

모든 인간을 일단 사물로 본다 했죠. 포도나무 송이로 바뀌어야 되겠죠. 인간 같으면 주체가 되지만 포도송이는 뭐가 됩니까? 이건 객체가 되죠. 또는 실체가 되죠. ‘포도야, 포도야 니는 왜 예뻐?’ 그러면 포도가 웃습니까? 아니잖아요. 인간은 화나고 걱정되고 지 주장하고 선택권이 있다 나에게 자유를 달라 까불어 대고 내가 뭐가 잘못 됐나, 대들고 하잖아요. 이렇게 대드는 사람을 뭐로 전환시킨다? 포도종이로 전환시키는 요게 뭐냐 하면 심판의 권한, 이것은 인격? 존엄성? 웃기고 있네. 동정심? 자비? 없어요. 인간이 동정을 원하고 자비를 원하고 인격을 원하는 것은 자기가 포도송이로서 원하는 것이 아니고 뭐로 원한다? 나는 때려 죽어도 나는 포도송이가 아니고 나는 인간이다.

나는 인간이 아니죠. 사실은 나는 신이다 이 말이죠. 다시 해 봅시다. 이게 어려워요. 인간은 살해당해도 되는 몸, 존재라 했죠. 이게 185.000명, 사실 성경에 185.000명 뿐 아니고 노아 홍수 때 얼마나 죽었습니까? 이건 노아식구 빼놓고 다 죽었어요. 또 헤롯왕이 죽였던 예루살렘에 2살밑의 애들, 걔들이 무슨 죄가 있습니까? 요한계시록에 가뭄과 홍수에 죽은 사람들, 그 사람들이 무슨 죄가 있어요? 그 사람들이 특별하게 죽을죄가 있다는 말이 아니고 인간을 뭐로 바꾼다? 인간을 요한계시록 용어로 바꾸는 거예요. 심판 안 받겠다는 인간을 ‘심판 받아 마땅해‘라는 인간을 표현을 바꾸는 작업을 하는 거예요. 누가 와서? 천사가 와서 하는 거예요.

인간은 나름대로 신이 있어요. 인간은 신을 만들고부터 신과 거래합니다. 이렇게 신을 섬기고 있는 인간에게 예수님께서 신 쪽에서 왔습니까? 인간 쪽에서 왔습니까? 인간 쪽으로 와서 죄인의 모습으로 왔죠. 벌써 죄인의 모습 몇 번 했습니다. 그러면 인간들은 이 예수를 죽이면서 누구 이름으로 죽입니까? 자기들이 믿던 신의 이름으로 죽임으로써 예수님이 죽었잖아요. 그렇죠? 예수님의 죽음을 예수님이 어떻게 해석합니까? 너희들이 죽인 것이 아니고 아버지로부터 내가 저주(버림)받았다고 했죠. 그러면 예수님이 속했던 인간이 버림받았다는 것은 인간이 만들었던 신도 뭐했다? 사실은 저주받아 마땅한 신이 되는 거예요. 통째로 저주받아 마땅한 겁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써 결국은 신을 믿는다는 것, 여호와 믿는 것조차 여호와까지 우상으로서 심판받아야 될 신이 되는 거예요. 얼마나 어렵습니까? 여호와도 심판받아야 돼요. 누구한테? 여호와한테, 예수님한테 다른 예수가 심판받아야 되는 거예요. 이 작업을 하게 되면 인간이 신을 섬길 때 뭐를 끄집어내기 위해서 뭘 남기기 위해서 뭘 유지하기 위해서 인격을 보존하기 위해서 뭘 유지하기 위해서? 자기 존엄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또 뭘 하기 위해서? 자기 자존심과 동정심, 하나님에 대한 자비하심, 모든 인간의 술책이 예수님이 십자가 죽고 부활하심으로 이것은 전부 다 인간으로서의 이런 걸 내는 자체가 저주받을 짓이다.

제발 인간들아 뭐가 되어다오? 요한계시록이 표현한 포도송이가 되어다오. 원래 포도송이를 밟으면 포도즙이 나오게 돼 있지, 피는 안 나오죠. 피는 살아있는 생물체에서 피 나오지, 포도 밟으면 벌겋긴 하지만 즙이 나오잖아요. 그런데 여기에 뭐가 나온다 했습니까? 피가 나온다는 말은 뭔 뜻입니까? 포도송이를 어떻게 하면 피가 나옵니까? 쥐 밟아버릴 때 피가 나오잖아요. 그렇죠?

그러면 하나님께서 일 하실 때 어떻게? 하나님 뜻이 뭐라고요? 인격을 쥐 밟아버리고 동정심을 짓밟아버리고 자비도 짓밟아버리는 그런 식으로 주께서는 오시는데 성도는 ‘맞습니다. 그것이 말씀대로 합당합니다.’라고 순응할 때 그런 사람이 어느 교회 한 사람, 어느 시장 바닥에 한 사람, 어디 이 동네에서 한 사람, 그것이 심판이 벌어지고 있다는 흔적이고 징조요 징후입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은 우리 성도들은 딴 거 생각하지 말고 성도로서 꾸준히 외톨이로 살아가면 그것이 천사께서 그렇게 관리해서 살아가게 하시는 거예요.

그것이 요한계시록 14장이 지금 현재 상황인 것을 알려주는 모습이 이렇게 말씀대로 심판하는 것도 ‘마땅하고 당연합니다.’라는 고백을 내놓는, 말씀을 내놓는 자가 있다는 것이 성도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를 알았습니다. 그저 우리는 주님한테 이용당했습니다. 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주께 이용 안 당했으면 우리가 얼마나 잘난 체 했겠습니까? 예수님만 증거 하는 재미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