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락교회110915요한계시록14장-(예수님의 세계)-23강a-이 근호 목사
제 23강a
요한계시록 14장 시작하겠습니다. 요한계시록 14장을 우리가 보면서 다시 전체 요한계시록의 분위기와 어떻게 연관되는가를 파악해봐야 되거든요. 요한계시록의 전체의 분위기를 보게 되면, 개인의 어떤 행함 같은 것이 거기는 나오지를 않습니다. 인간들의 행함, 인간들이 이렇게, 이렇게 했더니만 하나님께서 어떻게 대처했다 하는 이런 것이 나오지 않고 요한계시록은 일방적으로 하나님께서 밀어붙이는 계획들만 죽 나열돼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왜 그러느냐 하면 지금 사도요한이 어떤 활동을 하고 있는 게 아니고 사도요한은 그냥 밧모 섬에 묶여진 상태, 귀양 간 상태고 활동은 누가 합니까? 사도가 활동 안하면 복음은 누가 전해요? 천사가 하죠. 그런데 천사가 복음을 전하면서 놀라운 사실은 사도요한조차도 예수님으로부터 사도요한에게 연결하는 그 계시전달 운반자가 누구죠? 천사죠. 예수님이 계시는데 섬에 사도요한에게 천사를 보내신 하나님이 사도요한에게만 천사를 보낸 것이 아니고 사도요한 빼놓고 모든 악한 자와 모든 구원받는 자와 구원받지 못하는 자에게도 천사가 폭격기처럼 그대로 작용하고 활동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누가 빠져요? 사도요한이 현재 활동 못하고 있죠? 그럼 사도요한이 활동 못하고 있는데 하나님의 일은 되던가요? 안 되던가요? 되더란 말입니다. 그걸 믿으란 말입니다.ㅎ아! 이거 보통 믿음 아니죠? 아, 사람이 노가다라고 아십니까? 집을 짓는데 노가다가 옥에 갇혀있다. 그런데 한 3년 살다 나와 보니까 집이 지어져 있다. 누가 했습니까? 자기가 안 한건 분명하죠. 바로 그걸 걸 믿느냐 하는 겁니다. 보통 믿음 아니죠? 인간이 내가 여기 있고 여기 있는 내가 어떤 행동을 해서 그 결과로 나에게 구원이 주어진다는 모든 상식적인 틀이 요한계시록에서는 오히려 불신이라고 하는 거예요. 신앙이 없는 거예요.
반대로 자기도 안 믿고 아무도 믿지 않는 걸 가지고 신앙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제가 쓴 글 ‘아, 오락’ 이라는 글에 보면, 찬양해도 자기 보고 찬양하고 경배해도 자기보고 경배하고 헌금해도 자기보고 헌금하고 헌금도 자기 의식하면서 헌금하고 이것은 결국은 누구를 믿느냐 하면, 본인이 행하는 것은 본인이 믿기 때문에 이것을 요한계시록에 의하면 신앙이 되지 않고 뭐가 됩니까? 불신앙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날 한국교회가 온 천지가 불신앙판 이예요. 불신앙이니까 불바다 받을만하죠? 완전히 온 천지가 교회마다 전부 다 입구 딱 열면 처음부터 끝까지 불신앙 이예요. 너무 신앙이 없어요. 자기 자신을 안 믿으면 되는데 자기 자신이 믿을 구석이 없다는 걸 알면 되는데 사도요한은 지금 귀양 가서 잡혀있는 실정이었어요. 사도요한은 받은 대로 그냥 글만 쓸 뿐입니다. 그 글 보고 사람들이 회개하고 그 글 보고 반성한 게 아닙니다.
천사가 작용하지 아니하면 어떤 인간도 오늘 14장 13절 말씀처럼 “성령이 가라사대” 성령이 활동해서 그 사람들이 사도요한의 말이 이것이 하나의 소설이 아니고 사도요한의 개인 의견이 아니라 이게 현실이고 이것이 하나님의 역사요 이게 현재 지구의 운명이고 온 우주의 운명이라는 것을 믿지 못하게 돼요. 성령의 역사가 있어야. 그래서 요한계시록 2장, 3장에 보면 “교회들에게 성령이 이야기한다. 성령이 이야기한다.”라고 하죠. 분명히 사도요한이 쓰는데 뭐라고 합니까? 성령이 이야기하고, 성령이 이야기하고. 여기 13절에 보면 “성령이 가라사대”라는 말이 나오잖아요.
그리고 앞서 본 요한계시록에 보면 성령께서 눈이 한 두 개가 아닙니다. 온 몸의 천사의 옷에 전부 다 눈이 박혀 있어요. 흉측할 정도로 빽빽하게 눈이 빈틈이 없어요. CCTV가 온 구석구석마다 있기 때문에 CCTV 빠져나갈 구석이 없습니다. 그것은 감시한다는 의미가 아니고 성령의 감시는 감시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모든 것은 성령께서 본인이 한 업적이란 뜻 이예요. 이런 것은 대규모 공장에 가보면 항상 모든 컨베이어 벨트가 가만히 있어도 움직이는 컨베이어 벨트 구석구석에 청조 판이 있어서 상황실에서 지금 제품이 하자 없이 그 단계, 단계마다 딱딱 접착이 되는지 조합이 되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테스트기가 있잖아요. 그래서 뭔가 하나가 빠져버리면 스톱 시켜서 다시 보완한다고요. 그것처럼 모든 구석구석에 측정기 테스트기가 어느 구석도 없는 구석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요한계시록 강의 들어가기 전에 먼저 알아야 될 것이 뭐냐 하면 인간이 갖고 있는 신앙과 불신앙이 어째서 성경에서 안 믿는 것이 오히려 신앙이냐 하는 그런 논조가 나올 수밖에 없는가를 생각해 봅시다.
제가 여러분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쉽게 이야기하겠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때인가 우리 집이 학교 앞에 있었거든요. 학교에서 길 건너면 우리 집이었거든요. 수업을 마치고 급우들이 교실에서 다 가고 난 뒤에 청소도 깨끗이 되고 뭔가 교실에 놔두고 온 게 있어서 선생님한테 열쇠를 받아서, 옛날에는 교실에 열쇠가 있었어요. 다시 교실을 방문했을 때 오후 4시쯤에 갔을 때 책상마다 햇빛이 배급 받은 것처럼 쫙 비칠 때 그 아침에 왁자지껄하던 급우들이 다 어디에 갔습니까? 그 현장에는 아무도 없었어요. 여기서 한번 생각해 봅시다. 나는 그때 생각한 게 아니고 지금 와서 그때를 되돌아 생각해 보니까 정리되는 게 뭐냐 하면 급우가 그 시점 오후 4시에 반 친구들이 아무도 없었어요. 없다면 내가 물건 가지러 온 내가 문 잠그고 집에 간다면 그 학급에 누가 있습니까? 나도 없고 아무도 없죠.
그렇다면 그 교실에는 아무도 없는 공간이 되죠. 그러면 교실에 아무도 없으면 교실은 판자 조각들입니다. 교실이 교실 되는 것은 다음날 아침에 왁자지껄한 초등학생 급우들이 소란스럽게 모일 때 교실이 되는 거예요. 이게 쉽게 한다고 한 건데 이게 굉장히 어려운 말을 하고 있는 거예요.
어떤 공간에 있어서 세상이라든지 우주라든지 거기서 그동안 우리가 의미를 어디서 찾았습니까? 남들이 내 눈에 띄기 때문에 남들이 나를 뭐라고 하느냐, ‘너는 같은 반 급우다.’라고 해주는 경우에만 그들과 같은 반 친구고 학생이고 초등학생이다 이 말이죠. 그때는 급우가 50명도 넘었어요. 그런데 그들이 하나, 둘씩 다 죽어버리면, 죽어가면서 나보고 뭐라 합니까? ‘지금 내가 죽지만 이 근호 너도 나처럼 죽는 거야.’이런다고요.
그렇다면 그 애들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그 애들을 보고 ‘아, 나는 저 애가 학생이니까 나도 학생이고 그래서 우리는 같은 반 친구다.’가 되는데 걔들이 하나, 둘씩 다 죽어가면서 ‘나 죽는 것처럼 너도 죽는 거야.‘가 돼 버리면 그럼 나도 없는 게 되잖아요. 그럼 나도 없어져 버리면 교실은 뭐가 돼요? 교실은 아무도 없죠.
결국 내가 내리는 것은 뭐냐,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는 것이 요한계시록의 주제입니다. 적어 볼게요. 이걸 성경에서는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 지금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죠? 안개 지우고, 잠간 없어지는 지우면, ‘너희는 없다’가 돼요. 너희가 없어지니까 결국 없어지기 위해서 뭐가 있다? 우리가 여기 있다. 없어지기 위해서. ‘너 있어?’ ‘없어지거든’ ‘왜요?’ ‘없어, 없음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니가 있는 거야.’
인간들이 ‘믿습니다. 안 믿습니다.’ 하는 것은 뭘 기준으로 합니까? 나는 없어지지 않고 나는 계속 있을 것이라고 짐작하고 ‘예수도 믿습니다. 성령도 믿습니다. 복음도 믿습니다. 십자가 믿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 믿습니다.’ 그 자체가 거짓말 이예요. 너도 없어지면 너의 십자가도 없고, 십자가는 있지만 너의 십자가는 없는 거예요. 너가 없으면 너의 십자가도 없고 너의 믿음도 없고 소망도 없고 니가 이웃 사랑하는 그 사랑도 없어지죠.
내가 없으면 필통도 없고 공책도 없고 주인을 잃어버려요. 오후 4시에 청소가 깨끗하게 된 아무도 없는 교실에 딱 들어선 순간, 그걸 제가 회상해서 생각한 거예요. 그 순간에는 몰랐는데, 그 순간 나는 거기서 빨리 벗어나야 돼요. 빨리 도망치고 싶었어요. 무서워서가 아닙니다. 분명히 급우들과 함께 있어야 내가 있는 건데 이것은 친구들은 다 가버리고 나만 있으니까, ‘아냐, 아니야 이건 내 자리가 아니야, 내 있을 곳이 아니야, 나는 친구들을 찾아가야 돼.’ 왜, 평소에 버릇이 뭐냐 하면, 남들이 너가 이렇다고 이야기해 주는 그 공동체 안에서만 나는 존재하는 겁니다.
집사님 보고 ‘사장님’ 할 경우에만 그게 내 자리가 되고 딴 데 가면 그 자리는 내 자리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뭐라 합니까? ‘사장님’이라 하는 그 자리가 내 자리라고 하는데 그건 거짓말 이예요. 그건 잘못된 생각 이예요. 내 자리라 하는 것은 그 사람들이 다 죽어버리면 한 명 죽고 다 죽어버리면 누가 나보고 사장이라 부를 사람은 다방 마담밖에 없어요.ㅎ 아무도 없는 거예요.
아버지요? 자식 안 낳았다면 누가 아버지라 합니까? 여보라고 남편(아내)이 없다면 누가 여보라고 합니까? 그런데 사라지게 하는 그들은 없어지거든요. 없어지는 그들이 나보고 ‘있다’ 하는 것도 우리가 믿어서는 안 되는 거예요. ‘걱정하지 마, 나도 없어져.’ 이렇게 이야기해야 ‘딩동댕’ 정답이라 말이죠. 너도 없고 나도 없고 남는 것은 우리가 없어지는 것을 있게 하신 주님만 계시는 거예요. 그 이야기가 성경은 오직 예수님만 증거가 돼요. 요한계시록이고 뭐고 요한복음이고 창세기고 출애굽기고 레위기고 모든 것은 오직 예수님만 증거 하는 거예요.
‘나 믿음 있습니다. 상담 받아 주세요.’ 이거 이야기하라고 성경이 있는 게 아니고 그런 것은 주님 믿는 척 하지만 사실은 주님을 믿는 게 아니고 니 자신의 믿음을 니가 챙기고 끝까지 나는 자기 자신의 믿음을 자기가 믿는, 남이 갖고 있는 믿음은 아니라 하고 지가 갖고 있는 믿음만 믿는 일방적인 불신앙인 거예요.
불신앙은 뭐냐 하면 ‘나는 나 외에 아무도 믿을 대상이 없다’는 거예요. 아무리 예수고 뭐고 내가 예수 믿는 내가 믿어지지, 예수 믿고 싶지 않아요. 그런 경우는 우리가 그런 사람을 욕할 필요 없어요. 왜냐하면 베드로도 그랬으니까. 예수님께서 내가 고난 ‘받고 죽는다 하니까, 베드로가 지금 고기 잡던 어부 일을 집어치우고 뭐에 다 바쳤습니까? 이제 예수님만 같이 붙어있으면 천국은 따낸 당상이다.’라고 철떡 같이 믿었는데, 아! 이게 무슨 배신감? 죽어도 지가 먼저 죽어야지 예수님이 먼저 죽는다 하니까 예수님 걱정 하는 게 아니라 누구 걱정합니까? 지 걱정하죠.ㅎ '주님 , 어디로 가시나이까.‘ 주여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제가 말리겠습니다.’ 할 때 주님께서 뭐냐, ‘바로 악마가 그 따위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 것이 악마다.’ 말이죠.
그런데 요새 한국교회 자체가 다 악마가 세운 교회라고 볼 수 있죠. 뭔가 불안한 이 세상에서 자기 단도리하고 자기 안정감을 성경 말씀, 하나님 말씀을 주어모아서 끌어 모아서 그 자리에 자기를 세우려하는데, 마치 해변 가에서 나무를 세우고 모래를 쌓아서 누가 먼저 무너뜨리나 하는 게임이 있는데 이 나무를 세우기 위해서 이것도 불안하면 여기에 덧대기 위해서 온갖 신학으로 그저 자기 하나 세우기 위해서 굳게 세우기 위해서 겉치레를 이렇게 갖다 붙이는 거예요. 주께서 얼마나 고마운지 이거 하나, 하나 떼버리면 결국 작대기는 홀라당 넘어지겠죠. 넘어질 때 뭐라 합니까? ‘너희는 잠간 있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말씀대로 됐구나. 박수 한번 치자, 짝짝짝,ㅎ
결국은 우리는 ‘말씀이 말씀이다‘라는 것을 증거 하기 위해서 동원된 하나의 도구, 재료에 불과하지 우리가 말씀을 지킨다든지 우리가 말씀을 쥔다든지 하는 것은 성립될 수 없는 그러한 입장에 있습니다. 다시 정리하면 성경은 우리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성경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있는 게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위해서 있는 겁니다.
자, 그러면 아까 강의 전에 언급했던 거, 한번 생각해 봅시다. 지금 예수님이 안 보이는 게 문제예요. 예수님이 안 보이니까 다른 예수, 다른 복음, 다른 성령을 주의하라고 사도바울이 이야기했는데, 이 문제는 다른 예수 따로 있고 예수 따로 있고 다른 복음 따로 있고 복음 따로 있고 다른 성령 따로 있고 성령이 따로 있어서 이 세상에서 같이 활동하고 있다 이 뜻 아닙니까? 활동하고 있으니까 이걸 구분해야 될 거 아닙니까? ‘이거 난 몰라 그냥 예수 믿으면 다 형제지.‘ 이러면 안 되죠. 다른 예수 다른 복음 다른 성령, 이것은 고린도후서 11장에 보면 누가 이렇게 만들어 내는 겁니까? 악마의 탈을 쓴 악마 같으면 우리가 쉽게 알겠는데, 뭘 썼습니까? 양의 탈을 썼죠. 요한계시록에 나오죠? 이 땅에서 짐승은 어린 양처럼 그렇게 행세하고 있다 말이죠.
목사들은 본인이 구원받으면 돼요. 그런데 자기 본인의 구원을 포기하고 교회를 살리기 위해서 희생 봉사하는 사람입니다. 자기는 구원에 관심 없어요. 구원을 포기해 버리고 교회를 살리기 위해서, 이 교회는 무슨 교회입니까? 당연히 가짜 교회죠. 왜냐 사람들은 뭘 보기를 원합니까? 교회가 있음이 하나님 있음으로 그런 식으로 믿음의 확신을 가지려고 하는 거예요. 절에 가서 구원받는다 하면 누가 믿겠습니까? ㅎ 아무도 안 믿죠. 에이, 그럴 리가. 교회 오시면 구원받습니다. 에이, 그건 믿죠. 둘 다 거짓말 이예요.
보이는 것을 믿는 것은 이다? 아니다? 보이는 것을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니거든요. 사람은 보이는 실적과 업적을 주지 아니하면 그건 아무것도 안 믿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게 바로 유대인들이 실수였습니다. 그게 실수인지 본성인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성전이 있으매 그들은 안심했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이 자기 이름이 계시는 하나님이 계신다는 성전이 깨질 리가 있는가, 그러니까 유대인은 뭘 생각하느냐 하면 성전아란 건축물 있잖아요. 건축물에 하나님이 진짜 계시는 줄 알았던 거예요. 입구에 들어가면서 하나님 만나고 나오면서 하나님하고 헤어지는 걸로 본 거예요. 진짜로!!
유대인들이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게 나답과 아비후가 성막에서 다른 제단불로 제사 드리다가 죽었잖아요. 그리고 방울 달고 일 년에 한번 제사할 때 언약궤 위에 천사 그룹이 있죠. 웃사가 언약궤 만지니까 어떻게 됐습니까? 수많은 사람이 죽었잖아요. 그러니까 그들은 ‘이거는 믿기 참 쉽다’는 거예요. 뭐만 믿으면 돼요? 요 나무상자, 아카시아 나무상자, 이것아 안치돼 있는 그 지역, 그 공간, 그 장소에 가까이 가면 거룩이고 거기서 멀어지게 되면 그건 지옥 가는 거예요.
그래서 유대인들은 성전에 가까이 가는 사람과 못 가는 사람을 계급적으로 7단계로 나눈 겁니다. 나누게 되면 백정이나 창녀, 세리 같은 사람들은 뭐를 그리워하겠습니까? ‘나도 언제 직업 바꿔서 직업 포기하고 돈 좀 벌어서 나도 언제 성전 가까이 가서 은총을 받을까.’ 이렇게 생각하겠고 여자들은 ‘하나님은 날 저주했어. 나도 남자로 태어났으면.’ 남자는 안쪽으로 들어가고 여인들이나 이방인들은 바깥쪽에 있었죠. ‘나도 들어갔으면 좋겠는데.’ 얼마나 애타느냐 말이죠. 그런 것들이 법으로 짜여 있으니까 신앙생활 하는데 참~ 쉬운 거예요. 법대로 하면 돼요. 법대로!
안식일에 담요를 들고 가면 된다? 안 된다? 안 되죠. 그런데 안식일에 담요 들고 가라고 누가 시켰습니까? 예수님이 38년 된 병자보고 들고 가라 했죠. 그때 우리 같으면 담요 들든지 관계없는데 그 당시 바리새인들은 어떻게 됐어요? 난리 났습니다. 이것은 담요 한 장이 문제가 아니고 뭐가 와르르 무너질 판입니까? 신앙의 문제, 구원 문제고 그들은 축복과 저주 문제예요. 그들은 담요 하나가 문제가 아니고 안식일을 깡그리 다 무너뜨리는 것은 이것은 하나님의 언약, 변함없는 하나님의 약속, 그리고 택한 백성과 맺은 약속 자체를 완전히 무산시켜서 이제는 믿을 게 하나도 남은 게 없게 만드는 악마의 술책으로서 예수님을 그렇게 본 겁니다.
‘예수여, 당신이 와서 해 놓은 짓을 봐라, 이건 귀신 짓이고 마귀 짓이다.’ 예수님 보고 귀신의 대장이니까 바알세불이 악마 아닙니까? ‘당신은 악마다.’ 왜, 하나님이 정해준 율법대로 말씀대로 된 이 터를 악마가 아니면 누가 이걸 다 떠밀어서 무너뜨리겠는가,‘ 라고 했어요. 그때 예수님이 뭐라 했습니까? ’무너뜨리는 그 분이 메시야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이건 소통 될 수 없는 대화입니다. 이게 어떻게 납득이 가능합니까? 저쪽에서는 예수님의 말을 못 알아들어요. 우리는 이 성전 때문에 그나마도 로마 압제에도 버텼고 살아남았다. 예수님 하시는 말씀이 ‘죽어라.’ 이게 어떻게 대화가 됩니까? ‘우리가 그동안 모세 은혜 때문에 우리 이스라엘이 이만큼 살아남았다.’ 하니까 예수님께서 ‘니는 너희들 십자가에 지고 나를 따라 오너라. 자기 십자가 지고 나를 따르라. 그러면 살리라.’ 쉽게 말해서 죽으라는 말이죠. 유대인들은 ‘우리는 하늘에서 온 만나처럼 떡을 먹기를 원하고 장차 메시야가 오면 떡을 주신다.’ 주님이 하시는 말씀이 ‘ 내 살이나 내 피나 먹어라. 내 살과 피가 영생이다.’
이것들은 기존의 그 유대인들이 그런 발언을 배태하게 만든 모든 법적인 체제, 교회법, 교회 역사, 성전 역사, 모든 것을 다 허물어 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그들은 어쨌든 저쨌든 간에 성전에 하나님은 계시다. 스데반 집사 하는 말이 ‘하나님은 사람의 손으로 지은 집에는 계시지 아니한다.’ 스데반 집사의 말이 어려운 게 뭐냐 하면, 하나님은 어느 곳에도 계시잖아요. 어느 곳에도 계시면 어디에도 계십니까? 사람이 지은 집에도 계셔야 되는데 하나님은 어느 곳에도 계신다는 말을 강조하기 위해서 뭐라 그러느냐 하면 사람으로 지어진 집에는 아니 계신다 했거든요. 결국은 하나님이 어디 계시느냐가 문제가 아니고, 하나님은 그 말 자제가 뭘 공격합니까? 인간이 손대면 다 저주다 이 말입니다.
인간이 손대면 다 저주가 되는 거예요. 그건 왜냐 하면 가만히 있어도 저주 받기 때문에. 말 재밌죠. 가만히 있어도 저주받기 때문에 인간이 뭘 만들어 내면 그것도 저주받는 거예요. 그런데 인간은 가만히 있어도 저주받는 줄 모르는데 지가 만든 하나님의 집이 하나님이 안 계시면 비로소 그걸 만들려고 꼼지락 대면 내가 저주받는 존재라는 것은 성령을 통해서 알게 돼요.
내가 헌금을 이만큼 하면 아마 다음 달에 있을 큰 계약 건이 성취 될 것이고 하나님께 영광 돌릴 거라 생각했는데 헌금 해봤자 국물도 없고 '했나?‘ 할 정도로 계약이 파기됐다면 얼마나 화딱지 나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는 왜 그렇게 하는데요? 하나님께서는 헌금했으면 주는 것이 있으면 주고받는 재미가 있어야지, 실컷 헌금했는데 복은 안 오고 하나님께서 왜 인간을 그런 쪽으로 상대하지 않는 겁니까? 그것은 지가 헌금을 할 때부터 지가 기대한 것이 있었고 기대한대로 안 될 때 하나님께 잡아버릴 듯이 달려드는 그 모습이 이미 헌금하기 이전부터 너는 저주 받아야 될 인간이었다는 것을 헌금을 통해서 깨닫게 하는 축복을 받는 거예요.ㅎ
어제 수요설교를 했는데 외계인의 침공이라 했죠. 하나님이 인간 세계에 왔다는 자체가 이 세상은 작살 난 거예요. 뭐 거기서도 잘나고 못나고 직업 목사 장로 그런 것이 아무 상관없이 작살나는 거예요. 마치 출애굽 때에 죽음의 사자들이 와서 옥에 있는 죄인의 맏아들에서 왕궁에 있는 바로왕의 맏아들까지 온 천하에 장자란 장자, 맏이란 맏이는 다 죽여 버렸어요. 그때 장례업자 아마 대호황을 누렸을 겁니다. 집집마다 안 죽은 집안이 없었으니까.ㅎ
그게 무슨 뜻입니까? 그런 짓을 하시는 하나님의 의도가 뭐예요? 니가 무슨 짓을 해도 이 하나님 보기에는 다 뭉개버린다. 니가 어떤 애교를 부리고 재롱을 부려도 내 앞에서는 전부 다 뭉개버리는 거예요. 이 말은 ‘잘 믿으면 될 게 아닙니까? 헌신하면 될 게 아닙니까? 충성하면 될 게 아닙니까?’ 우리는 자꾸 반발하는데 그 첫 번째 출애굽의 죽음의 사자가 애굽의 장자들을 죽이는 이유가 뭡니까? 그러한 충성과 헌신과 이러한 것이 아무짝도 소용이 없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선악과 따먹고 이미 추방된 존재거든요. 이미 추방된 존재 같으면 무슨 짓을 해도 추방될 수밖에 없는 이유만 나올 뿐이지 그런 재롱부린다고 해서 도로 에덴동산으로 귀향할 수 있는 요소는 없어요. 오직 있다면 그것은 어린양의 피가 문지방과 문설주에 발라야 되죠. 어린양의 피로 우리는 생명나무 있는 천국에 갈 수 있는 겁니다. 아유, 이 간단한 이야기를 왜 간단히 못 알아듣고 왜 한국교회는 재롱을 강조하고 그걸 교육 시키는지 모르겠어요. 박수는 요래 쳐야 되고 이래 치면 안 되고, 왜 자꾸 재롱부리는 것을 가르치는지, 꼭 침팬지한테 ‘사탕하나 줄까 요렇게 뛰어보렴’ 하는 것처럼 왜 그런 짓하느냐 말이죠. ‘하나님 요거 하면 축복 주십니까?‘ ’해봐라, 해봐라 축복 주지,‘ㅎ
이것은 바로 인간의 불신앙이 뭘 낳았습니까? 종교를 낳았죠. 기독교를 낳았고 기독교에서 교회를 만들었어요. 인간의 불신앙이. 그래서 목사는 교회를 포기하면 구원이 보이는 거예요. 교회가 만약에 없다면 믿을 분이 누구밖에 없습니까? 뭘 믿어야 되요? 예수님만 믿죠. 그런데 교회에서는 누굴 믿어요? 내 교회 어떻게 해보려고 시도하겠죠. 이것이 바로 불신앙이라. 관심사가 여기에 다 뺏겨요. 목사는 외톨입니다. 그야말로 빈 교실에 혼자 있는 겁니다. 이것은 목사뿐 아니라 모든 교인들도 마찬가지예요.
명절에 서울서 바라바리 싸가지고 ‘어무이요. 아버지 보일러 놔 드릴까요?’ 하고 왔다가 썰렁하게 싸악 빠져 나가면 남아있는 건 뭡니까? 허전하고 멍하게 웅~ 울리는....
여기서 우리가 아직까지 제가 설명을 안 하고 있어요. 뭐냐 하면 어떻게 보이지 않는 분을 어떻게 구분하느냐, 일단 보이는 것은 이다? 아니다? 보이는 것은 아니죠. 그래서 적그리스도의 특징은 항상 보이는 식으로 와요. 그렇죠? 항상 보이는 식으로 와요.
그러면 보이지 않는 분을 어떤 식으로 믿어야 된다는 말인가, 이걸 한번 생각해 봅시다. 법이란 게 있잖아요. 여기서 우주의 구조와 세상의 구조와 같은데 세상의 구조는 세상의 정치 구조와 같아요. 세상의 구조를 보면 세상 정치 제일 높은 자리에 옛날에는 왕이 있었고 요새는 대통령이 있고, 요한계시록에는 왕이 있으니까 왕으로 보고 왕은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도 있고 땅에 있는 짐승도 있는데, 왕이 이 세상을 만들 때 법을 만들죠. 묻습니다. 법을 만든 사람은 법에서 초월합니까? 법에 예속됩니까? 초월해요. 법이 추월하지 않으면 법이 돌아가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만약에 세상 왕이 우리나라에서는 ‘도둑질하지 마라.’는 법을 지었다면 그 정답은 도둑질하지 마라‘의 본래 뜻은 ’도둑질을 안 했다‘가 아니라 도둑질을 해도 누구만 한다? 나만 한다는 것이 법 안에 있는 실체입니다.
법이란 법을 제정하신 분으로 모든 게 다 쏠리게 돼 있는 속성을 갖고 있어요. 법을 만드신 분을 찾아가게 돼 있어요. 법을 만드신 분을 추적해서 더듬어서 찾아가는 그 노선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런데 만약에 왕이 ‘도둑질하지 마라’ 했는데 저 시골에 있는 선비가 진짜 도둑질을 안 해버리면 이 선비는 왕 앞에서 즉결처단 돼야 됩니다. 왜냐, 나만 도둑질해야 되는데 건방지게 니가 왜 도둑질 안하느냐 이렇게 되는 거예요. 만약에 이 선비가 도둑질을 안 해버리면 이 나라의 왕이 있으나마나해 버리죠. 도둑질을 안 하면 이미 법을 준수했죠. 법을 지켜버리면 더 이상 법이 필요 있습니까? 없습니까? 법이 필요 없죠. 그러면 법을 제정하신 분이 필요 있습니까? 없습니까? 필요 없다. 그러면 누가 신이 되요? 선비가 신이 되는 거예요.
인간들은 하나님의 법을 지킴으로써 결국 노리는 게 뭐예요? 나도 가수다. 나도 신이다. 나도 신이다. 이걸 한국교회에서는 성화론 가지고 다시 개혁주의에서는 인간을 신 되게 만드는 거예요. 나도 신이다. 니만 신이냐? 나도 신이다.ㅎ 이제 다른 예수, 다른 복음, 다른 성령을 알겠죠? 이게 어떤 행동을 해도 믿는 게 예수 믿는 게 아니고 누구를 믿어요? 예수 말씀대로 다 준수하고 믿었던 누굴 믿어요? 자아를 믿는 이것이 악마가 원래 예수에게 대들었던 악마에게 숨어있던 본래의 모습이었고 그걸 누가 그대로 본받았느냐 하면 악마의 지배를 받는 인간들이 그 악마의 모습을 그대로 따르고 있는 겁니다. 왜냐하면 악마의 세상적인 지배를 받기 때문에.
믿지 마세요. 여러분 자신을 믿지 마세요. 믿지 말라는 말은 두 가지지만 판단과 기억인데 다른 말로 추억인데 판단과 추억에 말려들지 마세요. 사람이 자기가 자기를 볼 때 그냥 보는 게 아닙니다. 반드시 판단하면서 봅니다. ‘이것은 잘했을까? 이건 못했을까? 이건 실수가 아닐까? 이건 오류가 아닐까? 이건 참 잘한 거다.’ 그렇게 자기를 판단하죠. 판단에서 자기를 봐버리면 자아가 두 개가 돼 버려요. 판단하는 자아와 판단 받는 자아 두 개가 돼 버립니다. 이 둘을 융합하려는, 화합하려고 시도하는 자아가 생겨요. 자아가 몇 개입니까? 세 개예요. 그걸 삼위일체라 합니다.ㅎ 인간이 신을 세 개 만드는 방법일 수밖에 없는 게 지가 세 개예요. 다시 말하면 판단하는 자아와 판단 받는 자아와 그리고 두 개를 합쳐서 온전한 자아, 자아가 세 개입니다.
이거 마귀한테 배운 거예요. 마귀가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이 속성을 집어넣어서 우리는 여기서 평생 벗어날 수가 없어요. 이게 로마서 7장 이야기에 나오잖아요. ①내 속에 악이 있고 ②나는 선을 원하지만 또 ③하나 회수할 수 없으니까, 그게 로마서 7장 끝이거든요. 그런데 8장에 보면 주님께서 죄 있는 육신의 몸으로 왔죠. 바로 그러한 균열상태, 갈라진 상태, 대가리가 3개인 뱀, 몸체는 분명히 하나인데 신체는 발톱 손톱 몸체는 하난데 생각은 세 개로 갈라지는 대가리 세 개 나오는 이게 죄 있는 육신의 몸 이예요. 예수님이 죄 있는 육신의 몸으로 오셔서 이걸 십자가에서 콱 죽여 버렸어요. 이제는 니 안에 성령 계신다. 그래서 이제는 니 속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죽은 너희 몸이 살리라. 아예 인간을 죽을 몸으로 간주해 버려요. 성령이 임했다하는 말은 성령으로 잘해보라는 말이 아니고 너는 죽을 몸이지만 니 안의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 말미암아 죽을 너희 몸도 살리라. 아예 우리 몸을 죽을 몸으로 했어요. 이 근호가 아니고 세 자로 죽을 몸이라 했어요. 죽을 놈이라고 간주해 버려요.
하나님이 인간보시는 것은 간편해요. 아~주 간편하고 속 시원하고, 그리고 목사가 교회 생각하지 말고 지 구원 생각해야 되죠. 이게 시급한 문제라니까. 교회 생각할 필요 없어요. 교회 생각 백날해도 지 지옥가면 소용없으니까.ㅎ ‘나 이런 식으로 교회 생각 안하고 주님 생각합니다.‘라고 설교단에서 외쳐야 돼요. ’이런 식으로 하면 교회가 잘됩니다.‘라는 말은 할 필요 없어요. 니 신앙생활 하는 이야기하면 돼요.
다시 이야기해 봅시다. 왕은 법을 지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법은 이 왕과 법을 지켜야 될 너희들과 차원이 다른 것을 구분하기 위해서 법이라는 게 있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 세상의 왕은 어떻게 만드느냐 하면 자기들끼리 안에서 인간들 속에서 왕을 뽑다 보니까 이 왕이 왕이 되고 난 뒤에는 분명히 법에서 나온 왕인데 자기도 법에서 나온 왕인데 왕이 되고 난 뒤에는 지는 도둑질하고 뭐가 되는 것처럼 했죠? 아, 우리야 장군은 싸우고 있는데 다윗은 뭐합니까? ‘에이, 잘 빠졌다.’ 하고 밧세바를 탐하고 있죠. 왜 그렇습니까? 왕이니까.
그렇다면 나단이 뭐라 합니까? ‘우리나라에 자기한테는 양이 많이 있는데 종은 양이 한 마리밖에 없는데 그 양을 뺏어서 죽였습니다.‘ 하니까 다윗 왕이 화를 내면서 ’그놈 당장 죽여라‘ 했잖아요. 뭐냐, 법은 자기를 위한 법이 아니고 자기 밑에 통치 받는 일반 백성들을 다스리는 용도로 법을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나단이 뭐랍니까? ’니가 그 인간이다.‘ 다시 말해서 ’니는 하나님의 백성 이냐? 아니냐?‘ 묻는 거예요. ’너, 백성이야? 백성 아니야?‘ 그래서 다윗이 생각하기를 ’나는 왕이기 때문에 내 밑에 백성과 다르다는 의미에서 왕이라‘ 생각했는데 나중에 ’니가 바로 하나님의 백성이냐‘ 할 때 뭘 느꼈느냐 하면 내가 바로 죽어야 될 여호와 빼놓고 백성 중에서 죽어야 될 한 사람으로 자각하게 된 겁니다.
그러면 누가 왕 이예요? 원래부터 여호와가 왕 이예요. 자기는 왕이 아니죠. 그러면 자기가 보여줄 진정한 백성은 뭐냐, 바로 왕인 자기에게 죄를 깨닫게 하신 것은 장차 오실 메시야가 바로 하나님이 이 세상에 죄인의 육신의 몸으로 온다는 것을 미리 앞당겨 보여주기 위해서 다윗에게 그런 사태를 발생시킨 거예요.
그럼 왕은 어디 있습니까? 왕은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들 죄인 속에 왕이 끼어들었죠. 죄인 속에 왕이 끼어들어서 같은 죄인들한테 막 발로 밟혀가면서 수난당하는 모습의 왕! 그 분 외에 다른 하나님은 없습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이 인간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이라는 것은 자기들이 법을 지킨다고 간주하고 나머지 자기들 위주의 계시의 연장으로서의 왕, 신을 만들어 가기 때문에 이 신은 무엇에서 만든 겁니까? 자기들이 만들었기 때문에 자기가 납득이 되고 이해가 되죠. ‘아하! 전능하시고 자비하시고 사랑이 넘~치시고 긍휼이 넘치시고 하나님이 이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시고 온갖 성경 구절을 동원해서 멋있게 이야기하는데 정작 성경구절 하나, 하나마다 예수님 의견하고 누구 의견이 달라요? 예수님 의견하고 모세에게 율법 받았다는 유대인 의견하고 어떻게 그렇게 의견이 다른지, 오죽했으면 예수님이 ’너희 아비는 마귀‘라 했겠어요.ㅎ
어느 대목도 같은 해석이 안 나오고 같은 구석이 없어요. 심지어 예수님을 따르는 마리아 마르다도 마찬가지입니다. ’너희 오빠 산다.‘ 하니까 마르다가 뭐라 합니까? ’예, 주님 다시 오실 때 재림하실 때는 살죠.‘ 또 엉뚱한 해석을 하는 거예요. 해석 잘해서 천당 간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님이 구원해주시는 겁니다. 지가 해석 잘하는 자기 자신을 자기가 믿음으로 구원받은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님이 구원해 주는 것을 믿는 믿음으로 구원받는 거예요.ㅎ 이렇게 지밖에 모르는 인간들을 하나님께서 건져주십니다. 건지고 보니까 물에 푹 젖어서 보니까 죄에 쩔어서 황태, 동태, 소금에 쩔은 고등어처럼 죄에 쩔어서 아무소리 못하고 그냥 구원받아서 끌려나오는 이 존재, 이 존재를 귀한 존재라고 합니다.ㅎ지가 훌륭해서 귀한 게 아니고 주께서 성령으로 건져준다는 점에서 귀한 존재가 되죠.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 13절에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 말은 뭡니까? ‘고생했다’가 아니라 니가 나로 인하여 애 많이 썼다.‘ 예수님으로 인하여 예수님 때문에 예수님의 도장을 맞았기 때문에 그들은 본인의 인생을 살지 못하고 누구 인생을 살아야 됩니까? 예수를 보여주는 죄인 된 인생을 살았는데 이제는 니 역할 다 했으니까 이제는 ’푹 쉬세요.‘라고 성령께서 이렇게 하시는 겁니다.
자, 그리스도인이 있는 성도에게 이렇게 쉬라고 했다면 그럼 나머지 일은 뭐가 있겠습니까? 세상의 구조에서 왕이 있고 백성이 있는 것처럼 유사하게 우주의 구조에서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왕 대신 계시고 우주가 있는데 여기 인간이 우주에 하나님 계신 것을 알 수가 있습니까? 인간은 이걸 알지를 못해요. 내가 오후 4시에 갔단 5학년 2반 교실, 그런데 그 교실이 왜 있는지 나는 몰라요. 왜, 나는 잠간 있다가 없어지기 때문에. 그 교실이 왜 있는지 몰라요. 성경에 보니까 그 교실이 누구 때문에 있습니까? 주님을 위해서 있죠.
그럼 제가 말 어렵게 하지 않고 쉽게 가겠어요. 결국 이 우주는 누구를 하나의 배양기고 누구를 위한 포대기고 누구를 보여주기 위한 계란 같은 거예요? 예수님이죠. 그런데 우리는 그 예수님 자리에 누가 끼어들었습니까? 자꾸 내가 끼어들면서 우주를 해석한 거예요. ‘하나님, 하늘에 계시죠? 저는 땅에 있습니다.’ 주께서 ‘놀고 있네, 씨 ㅎ 니는 잠간 있는 안개니라.’ 왜 자꾸 ‘하나님, 저 이 땅에서 고생 많은데 구원해 주세요. 7나팔 불고 7대접 와도 피해서 일어나서 예수 믿는다 해서...’ ‘놀고 있다 정말.’
이 우주는 계란 안에 누구만 잉태합니까? 하나님이 ‘주’로 잉태, 하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주가 되신, 어린양이 주가 되시는 그것을 배란하는, 그것을 잉태해 내는 그러한 공간입니다.
그렇다면 우주의 구조라는 것은 ‘세상에 왕이 있고 백성이 있다’ 이런 구조는 여기서는 통합니까? 안 통합니까? 통하지 않죠. 뭐가 있어요? 왕은 있는데 백성은 없습니다. 없는 백성을 어떻게 만듭니까? 이제는 왕 되시는 분이 이 땅에서 고난과 수모를 당하면서 툭툭 뭐가 나오느냐 하면, 바로 주의 백성이 등장해 버려요. 반드시 거기서는 어린양의 피로,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하면 어떤 인간도 예수님의 피를 믿을 사람이 있다? 없다? 자기 능력으로 믿은 사람은 없는 거예요. 없으니까 아무도 백성이 아니고 아무도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가 없는 겁니다. 종려나무 흔들 인간 아무도 없고 144.000 가담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다시 이야기할게요. 밧모 섬에 잡혀있는 사도요한, 지가 뭐 활동하고 전도하고 할 그것도 안 되는 입장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이 만들어 지느냐, 그건 누가 개입합니까? 천사가 개입하죠. 그 천사는 누구의 지시를 받아요? 예수님의 지시를 받죠. 예수님의 지시를 받아서 7인, 7나팔, 7대접을 수행하는 천사들의 활동과 성령님의 활동으로 인하여 현재 있는 이 자료를 가지고, 악마가 설치는 이 자료, 마귀로 요동치는 이 종교단체 이 교회 여기 안에서 기어이 144.000 그리고 예수의 피가 믿게 되는 놀~라운 기적, 예수의 피가 모든 죄를 하얗게 씻어준다는 것이 믿어지는 그 어떤 훼방과 그 어떤 악마의 방해와 심지어 더 심한 게 뭐냐, 큰 성 바벨론의 유혹과 비비똥인가, 바비똥인가 하는 명품 유혹, 온갖 세상 것에 대해서 기죽지 않고 성공하려고 애쓰는 그 모든 유혹 속에도 기어이 그러한 것에 구애받지 않고 예수님의 피를 만들기 위한 우주다 이 세상이. 내가 피를 믿는다는 기적이 아니고 나라는 인간도 기적이고 그 인간이 예수님의 피를 믿게 된 것도 누구 솜씨란 말입니까? 현재 지시받은 천사들과 성령님과 예수님의 활동의 결과로써 놀랍게도 어린양의 피를 믿는 백성들이 출몰하는 거예요. 그 출몰하는 과정은 예수님 십자가 지는 그 고난의 길을 되풀이하면서 출몰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이건 뭐냐, 가장 기본적은 것은 나는 있다? 없다? 나란 인간은 없어요. 항상 없고 뭐로? 예수님의 것으로 나, 예수님 것으로 나, 예수님 때문에 생긴 나기 때문에 나가 앞에 붙이면 안 돼요. 나는 예수님의 것이라고 붙이면 안 되고 예수님의 것으로 나가 되는 겁니다. 요거 어렵지만 생각해 봐야 돼요. 요거 생각하면서 복잡하기 때문에 10분 쉬고 계속해 봅시다.
정리해 보면 사람이라 하는 것은 신을 생각하고 신을 만들어 내야 인간의 법을 초월하는 신이 있고 그 법을 초월하는 신을 내가 그걸 믿음으로써 내가 구원받는다는 것이 인간들이 만들어 낸 우주관이고 종교관이라 했습니다. 결국 이렇게 해서 이 신은 납득이 되고 이해가 되면서 동시에 그렇게 그 신을 믿게 된 나 자신에 대해서 긍정할 수 있고 자랑할 수 있고 뽐낼 수 있고 나의 능력을 과시할 수 있는 근거가 여기서 마련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러한 시도를 누가 했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만드셨죠. 누가 끼어드느냐 하면 사람, 그리고 자연을 전부다 뭐를 배태하기 위한 것이라 했습니까? 누굴 배태한다? 예수님이 주로 바뀌기 위한 환경이라 그랬죠? 그 환경에서 율법을 줘 버리니까 인간들이 이런 본성인데 여기다 게다가 율법까지 줘버리니까 신이 났어요. 법을 지킨 나는 어떤 경우라도 구원된다? 안 된다? 구원이 된다. 왜, 나는 법을 지킨 것을 내가 믿기 때문에, 내가 예수 믿는다는 것을 내가 믿기 때문에.
그런데 율법을 뒤따라서 누가 왔느냐 하면 예수님이 오셨잖아요. 역사적으로 보면 뒤따라 온 거지만 실제로는 예수님이 앞서서 먼저 계셔서 율법을 준 거죠. 오셔서 예수님이 이 모든 것을 부정할 때 사람들이 뭐라 합니까? ‘그러면 누가 구원받겠습니까?’ 그러면 누가 구원받겠습니까? 이건 12제자도 똑같은 소리 했어요. ‘그러면 누가 구원받겠습니까?’ 부자가 천국 가기는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것이 쉬우니라.‘ 그때 제자들이 ‘그러면 누가 구원받겠습니까?’ 그때 탄식하며 놀라서 그런 소리 했죠. 사람은 할 수 없다 했죠. 하나님은 하시는데 어떻게 하느냐, 10분 쉬고 합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