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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36강-시험(신6;16-19) 150621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5. 6. 24. 07:44

2015-06-21 14:47:14 조회 : 67         
   시험 150621 이름 : 이근호 (IP:119.18.83.69)   

시험(신명기 6: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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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15-06-21 15:39 
시험   

2015년 6월 21일                       본문 말씀: 신명기 6:16-19


(6:16) 너희가 맛사에서 시험한 것 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시험하지 말고

(6:17)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하신 명령과 증거하신 것과 규례를 삼가 지키며

(6:18) 여호와의 보시기에 정직하고 선량한 일을 행하라 그리하면 네가 복을 얻고 여호와께서 네 열조에게 맹세하사 네 대적을 몰수히 네 앞에서 쫓아내리라 하신 아름다운 땅을 들어가서 얻으리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으리라

(6:19) 여호와의 보시기에 정직하고 선량한 일을 행하라 그리하면 네가 복을 얻고 여호와께서 네 열조에게 맹세하사 네 대적을 몰수히 네 앞에서 쫓아내리라 하신 아름다운 땅을 들어가서 얻으리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으리라

맛사라는 말은 ‘시험’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시험’이 유발될 관계로서 동행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인간들이 결코 의도적으로 시험하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인간이 신을 향하여 시험하는 경우는 막다른 지경에 돌입해서 더 이상 ‘자아’라는 것이 유지되지 못하고 붕괴되는 바로 그 지점에서 신의 본질에 대해서 의문점을 드러내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궁지에 몰린 인간이 최후로 시도하는 행함이 하나님께서 “너 날 시험했지?”라는 평가로 접수가 되는 것입니다. 인간들 입장에서 참으로 억울한 평가로 인식될 수가 있습니다. 그냥 편하게 대인관계에서 얼마든지 이해하고 용납될 수 있는 내용도 하나님에게는 ‘감히 하나님을 상대로 시험하는 나쁜 짓’이 되니 바로 그러한 평가로 인하여 인간은 도리어 침범을 받아야 합니다.

일종의 ‘하나님의 폭력’입니다. ‘자연 폭력’의 양상으로 감행되는 ‘신의 폭력’입니다. 사람들이 폭력적인 대자연을 움직임을 그냥 ‘자연폭력쯤’으로 여기는 것은 대자연의 변동에 자신들의 행위가 원인 제공했다고 인정하기 싫어서 그러합니다. 실측과 측량과 관측을 통해서 자연 속에서 일정한 규칙을 찾아내어 그것을 삶에 실용적으로 활용하려는 인간들에게 있어 신은 어디까지나 후원자이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자연 개발에 유용한 멋진 아이디어나 제공해주십사 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 소박한 소망마저 ‘감히 하나님을 테스트하다니’라고 예민하게 반응해버리면 인간들은 비로소 ‘자연폭력’이 ‘자연폭력’으로 멈추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자연폭력’의 예 중의 하나는 가뭄, 곧 기근입니다.

이스라엘의 원조격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하나님께서 친히 지시하신 가나안 지역에 정착하며 살자면 기근이 찾아들면 가차없이 애굽으로 내려갔습니다. 살기 위해서입니다. 그들은 아직까지 ‘자연폭력’이라는 형식의 ‘하나님 폭력’을 이해하지는 못했습니다. 즉 하나님과 자기네들 사이에 불협화음은 없을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갈등 같은 것은 생겨나지 않을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줄곧 지기 쪽으로 순종했기에 하나님의 일을 훼방하지는 않았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그들이 애굽에 내려가서 저질은 일들은 하나님의 개입이 없으면 해결되지 못할 것들입니다. 창세기 12장에서 아브라함이 기근으로 애굽에 내려가니, 거기서 아브라함의 부인 사라를 보고 반한 애굽의 바로왕이 사라를 아내로 맞이할 뻔했습니다.

바로왕은 사라와 동침하면서 난데 없는 알지도 모르는 하나님으로 혼쭐이 났습니다. 이렇게 보면 바로왕 앞에서의 아브라함 가족은 지상에 나타난 ‘하나님 폭력의 사절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국세청 감사반을 잘못 건드린 셈입니다. 창세기 20장에서, 그날 왕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의 아내를 탐내었습니다.

그런데 이 왕은 사라와 동침하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의도를 가진 것만으로 그 집안의 여자들의 태가 닫히는 저주스러운 사태가 일어납니다. 이처럼 이 세상에서 언약이 제시되는 그 현장에서 예외없이 ‘하나님이 폭력’이 주어집니다. 일반인들은 이것을 그냥 막연한 ‘자연의 횡포’, 혹은 ‘자연의 폭력’이라고 여깁니다.

이 의식 속에서는, ‘나에게 아무런 잘못이 없어’라는 인식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연약하고 부족하고 유한한 존재로서 자신의 인간성을 인정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감히 시험하는 인간상’으로 이어지려면 언약적 인식에 입각해야 합니다. 이방인들에게 이런 인식이 없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에게만 ‘신을 시험함’이라는 범죄가 성립합니다.

광야란 애굽괴 약속의 땅 사이에 있습니다. 그래서 광야없는 약속의 땅이란 성립되지 않습니다. 이는 광야에서 인간의 마음들이 바뀌어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비록 몸은 애굽 지역에서 빠져나왔지만 마음으로 도리어 애굽정신의 확장을 불러일으키게 됩니다. 즉 애굽 정신과 하나님의 계명의 만남이 과연 원만한 타협안으로 마무리될 수 있느냐는 겁니다.

여기에 도무지 양보할 수 없는 마찰과 충돌을 보이게 됩니다. 즉 고생한다고 해서 인간의 본색과 고집이 꺾이는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인간의 고집과 본 마음을 노출시키고자 인간으로서는 도젛시 견딜 수 없는 그 한계 너머로 몰아세우십니다.

그러면 인간의 하나님과의 동행이 불가능해져 버립니다. 이런 와중에서 비로소 ‘애굽친화성’이 드러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과연 이들이 진정 ‘출-애굽’했는지를 다시금 따져봐야 합니다. 이 광야가 오늘날 신약시대에는 현재 우리가 처해있는 이 세상 자체입니다. 지금도 우리는 ‘자연의 폭력’이라는 일상을 힘겹게 하는 자연 현상과 마주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하나님의 언약적 폭력’으로 의미를 변경시키려 합니다. 사람들은 자연적인 환경 변화를 무성(無性)적, 중립적 태도로 일관하기 때문입니다. 즉 “이 일은 그냥 자연현상이야. 우리가 할 도리를 다하면 그만이야. 인격적인 신과 결부된 의미를 갖다 붙이지 말아”라고 나오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이런 태도 자체가 비-언약적입니다. 비-언약이란 우상숭배적 해결책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우상숭배란 신에게 제사하는 자의 문제점을 아무리해도 노출되지 않고 도리어 정당화되기 마련입니다. 즉 ‘시험’이라는 ‘지극 정성’으로 의미가 변모되고 마는 것입니다. 오늘날 무심코 행위하는 모든 행위들이 광야 안에서 언약적으로 하나님께 시험케 하는 자기 변명들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부러워하는 것들, 즉 많은 재물과 미모와 인기 같은 것들이 모두 ‘하나님의 폭력’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런 것들이 부러워하면서 하나님의 언약체제를 외면하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에 의해서 광야에서 애굽인으로, 비-언약인으로 들통나면서도 극구 자기 변명으로 일관합니다.

일방적으로 자기 잘남을 유지하는 쪽으로 의미를 만들어냅니다. 제가 보기에 이런 모습은 ‘현대인들이 서서히 미쳐가는 중’입니다. 산다는 것 자체가 “신아. 과연 당신이 있기는 있어? 과연 신이 정말로 있다면 나를 이런 식으로 다루면 안돼지!라는 횡포를 보이게 마련입니다.

천국이란 스스로 관리해서 가는 곳이 아닙니다. 주님이 관리책이 친히 작용하는 자만이 이 세상이 진정 광야임을 압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세상 모든 것이 미혹거리임을 인정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5-06-22 05:35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 6장 16-19절입니다. 구약성경 272페이지입니다.

“너희가 맛사에서 시험한 것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시험하지 말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하신 명령과 증거 하신 것과 규례를 삼가 지키며 여호와의 보시기에 정직하고 선량한 일을 행하라 그리하면 네가 복을 얻고 여호와께서 네 열조에게 맹세하사 네 대적을 몰수이 네 앞에서 쫓아내리라 하신 아름다운 땅을 들어가서 얻으리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으리라”

광야라는 곳이 시험이 일어날 수밖에 없고, 원망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지경을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통과케 하십니다. 광야 없는 약속의 땅, 없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비록 지리적으로는 애굽에서 빠져나왔지만, 그들의 마음이나 모든 정신 자세는 오히려 애굽의 확장이었습니다. 애굽을 더욱더 끈적끈적하게 더 이어가는 것뿐이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애굽에서 살던 자기 백성이 나와도, 자기 백성 안에 이미 애굽이 묻어있습니다. 묻어있기 때문에, 그 애굽에서 나온 히브리인, 출애굽이 된 몸인데, 몸의 층이 두 층이 되었어요. 몸은 애굽적 정신으로 무장되어 있고, 이 애굽적 정신으로 무장되어 있는 이 사람들을 약속의 땅에 적합한 사람으로 바꾸어줘야 될 그 작업은 광야 아니면 다른 수는 없습니다.

이 세상이 광야거든요.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힘들게 살게 하신 이유가 다 있어요. 이게 정신 자세를 교체시키라고 하는 겁니다. 이 땅에서는 내 인생 내가 관리한다, 내가 관리한다는 거예요. 그런데 천국에서는 니 인생 니가 관리하면 못 들어가는 곳이에요. 주님이 친히 관리하면 되는 동네가 천국입니다. 죽으면 그냥 쏙 들어가는 곳이 아니고 관리를 지금부터 받아야 돼요. 관리 받아야 한다니까 자꾸 미용사 생각하는데, 마사지, 피부미용 그런 것 말고, 정신 관리를 받아야 됩니다.

제가 아침마다 운동하는 곳이 여기 수변공원 도는데, 거기 보면 이런 플래카드가 붙어 있어요. “차량이나 오토바이는 출입금지” 해놓고 (관리 차량은 제외) 이래 되어 있어요. 그 말을 보면서 제가 느낀 점은 뭐냐 하면, 이거 수변공원을 관리하려면 관리 차량이 들어와야 한다는 거예요. 그럼 우리 인생에 있어서 관리 차량이 누구입니까? 그거는 주님이 되어야 되죠. 관리 차량은 예외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수변 공원은 관리 차량이 손대지 않으면 우리끼리는 안 된다는 겁니다. 결국 우리 인생이라는 것은 우리 손으로 관리한다고 해서 잡초만 날 뿐이지 관리가 안 돼요. 관리 차량이 들어와서 우리 인간성 자체를 바꾸어줘야 합니다. 주님이 해야 돼요. 바꾸어주려면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본색이 들통 나야 합니다. 우리의 속셈 다 드러나야 되는 겁니다. 그 드러나야 되는 그 광야의 현장을 저는 ‘폭력의 현장’이라고 이렇게 보고 싶습니다.

이 폭력의 현장이라는 말을 왜 썼느냐 하면 그것은 우리가 광야에서, 맛사라 하는 것은 광야에서 일어난 출애굽기 17장 이야기거든요. 이 광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나오면서 그들은 난데없는 폭력을 경험했습니다. 그 폭력을 믿음 없는 사람들은 자연의 폭력이라고 그렇게 이해할 겁니다.

자연의 폭력이라고 하는 그것을 하나님의 폭력이라고 바꿀 수 있는 안목이 있어야 돼요. 지금 2년째 한국에 가뭄이거든요. 기우제 드리는 곳도 있고 그래요. 옛날부터 이것을 자연의 폭력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자연의 폭력이기 때문에 이거는 우상숭배의 식으로 기우제를 드리든지, 뭔가 착하게 산다든지, 아니면 왕이나 대통령이 대표로 나와서 뭔가 바르게 선정을 베풀든지 그래야 우리가 정작 원하는 비를 얻을 수 있다는, 뭐 그런 식으로 줄곧 인류 역사는 완전히 도배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연의 폭력이 아니고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반드시 이루어야 될 폭력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겁니다. 하나의 예를 들면 야곱이 자기 아들 요셉이 국무총리가 되어 잘 되었으니까 바로 애굽으로 내려오라고 요청해도 야곱은 자기 고향 땅을 안 버리려고 해요. 왜냐하면 약속의 땅이기 때문에. 근데 야곱이 뭔가 크게 오해한 것이 있어요. 약속의 땅이라 하는 것은 그 자리에 쥐고 버티고 있다고 그게 약속이 아닙니다.

약속이라 하는 것은 나는 괜찮고, 나는 건전한데, 외부에서 약속을 주면 저는 그냥 받기만 하겠습니다, 그게 약속이 아니에요. 지금 한국교회에서 십자가 믿고 구원받으라고 주장들을 하는데, 그 십자가, 인간의 자기 바깥에 세워진 십자가에요. 과거사. 십자가가 지금 자기한테 작용해야 됩니다. 십자가가. 십자가를 붙드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가 여기를 후벼 파야, 하나님의 폭력으로 우리의 정신세계를 파괴시켜버려야 해요.

“십자가 졌다는 사실을 내가 믿음으로 구원받는다.” 하는 것을 사람들이 이렇게 이해합니다. 1592년 임진왜란 일어났을 때, 이순신 장군이 “내 죽음을 알리지 말라” 그로 인하여 이순신 장군이 거북선 때문에 이겼다. 믿냐? 믿는다. 구원받았네. 이런 식이에요. 역사적 사실을 수용한다고 그게 믿는 게 아닙니다. 그거는 자기 교만이 한껏 드러난 것뿐이에요. 그거는 믿는 게 아니에요. 실제가, 사건이 내 허락도 없이 뼈 속 까지 들어 닥쳐야 돼요. 허락도 없이. 그냥 박차고 들어와야 돼요. “검찰에서 나왔습니다.” 이런 식으로. “검찰에서 나왔습니다. 수색영장 갖고 나왔습니다.” 온 집안을 다 헤집어야 돼요. 정리해주지 않습니다. 다 허치고 그냥 가져가는 거예요. 다 그냥 나가는 거예요. 우리의 속내를 다 드러내시면서.

화나지요? 화나라고 주신 폭력입니다. 구약에서는 약속의 땅만 광야라고 이렇게 생각하는데, 사실은 신약에 오게 되면 우리가 이 세상 살아가는 자체가 광야입니다. 모든 게 정신적인 폭력이 아닌 게 없어요. 사실은 육체적 폭력이라 하는 것은 참으면 됩니다. 하지만 이 정신적 폭력이라 하는 것은 본인이 나서서 아주 발광, 발작을 합니다.

지리산 골짜기에서 가만히 살면, 그냥 거기서 약초 캐먹고, 텃밭 가꾸면서 살면 그냥 살 수 있어요. 하루에 세끼 먹을 것을 두 끼로 줄여 먹으면서 살 수 있는데, 만약에 그렇게 초야에 묻혀서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서울에서 잘나가던 어떤 유명한 정치인이 모든 것을 버리고 초야에 묻혀서 그렇게 아주 노숙자 이상으로 더 낮아져서 살 수 있는데, 읍내에 갔다가 방송에서 자기 옛날이야기를 욕을 하면서 하는 소리를 듣게 되면, 그 초야에 묻혔던 것 다 접고 서울에 올라가 따지기 시작합니다. 이게 정신적 폭력이에요. 못 참습니다. 육체는 참을 수 있어도 정신은 못 참습니다.

심지어 이 폭력은 어느 정도 만연되어 있느냐 하면, 자기 아내가 예쁜 것도 폭력이에요. 왜? 아깝잖아요. 나만 두고 보기에 아깝잖아요. 미남, 미녀 두고 보기에 아까워요. 그런 아름다운 아내의 폭력이 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만. 그런 교인들 가운데 예쁜 사람들, 예쁜 집사들도 이게 폭력이에요. 주님보다도 그 사람한테 더 마음이....., 제가 지금 이상한 소리하고 있습니다만. 돈 많은 것도 폭력이고, 부자 되는 것도 폭력이고, 남한테 인기 있는 것도, 이놈의 인기, 감당을 못하겠어요. 이 인기도 폭력이고. 이 세상이 우리를 가만 놔두지 않는다는 거예요.

이 폭력에 대처하는 방법은 자기를 변명하는 쪽으로 이어져 갑니다. 이게 바로 깨어지지 않는 자아입니다. 이솝 우화에 이런 게 있어요. 여우가 굉장히 배고프고 목마른데 포도가 있는 거예요. 이 포도를 먹으려고 올라갔는데 너무 높은 곳에 있어서 못 먹는 거예요. 그래서 큰 실망을 하고 지나가면서 하는 소리가 뭐냐, “저 포도는 너무 시기 때문에 아마 못 먹는 포도일거야.” 이솝이 그런 이야기를 하는데요, 어쩌면 오늘날 우리 모습을, 매일같이 우리 머리에 떠오르는 우리 모습을 한꺼번에 대변한 것이 그거에요. 지가 못 먹으면서 결국은 남 탓으로, “저건 분명히 써서 못 먹을 거야.”

이게 우리 대인관계나, 전부 모든 관계에서 그런 식으로 자아가, 아직도 내 자아는 건전하고, 그래도 쓸만하다는 쪽으로, 과시하는 조로 이 광야 같은 세상을 그냥 버티는 겁니다. 저는 이것을 뭐라 하느냐 하면 서서히 미쳐가고 있다고 표현합니다. 현대인들 보세요. 서서히 미쳐가고 있어요. 야구 없이는 못 살죠, 유럽 사람들은 축구가 종교입니다. 축구 없이는 못 살죠, 밤중에 불 켜진 집은 전부 다 유럽 축구 보는 젊은 애들이에요. 명품 가방 없이는 못 살지, 자기 건강 체크 안 하면 못 사는 거예요. 케이블 방송이 전부 다 건강 체크. 완전히 시청자들이 도사들 다 되었어요. 전부 다 뭐냐 하면 나름대로의 현실에 대한 대처 방법.

왜 그렇게 해야 되냐? 그나마 자신들이 아직도 버틸만한 여력이 있다고 그렇게 자기가 자기를 지키고 싶은 거예요. 저는 그것을 참 어설프다고 이야기하고 싶어요. 참 어설퍼요. 그래서 사랑하는 것도, 우연히 봤는데, 사랑하는 것도 참 어설픈 사랑이 있다는 것을 보고 ‘참, 이 노래 가사가 참 멋지구나!’ 하고 제가 노래 가사를 적어왔습니다. 도대체 어떤 게 어설픈지, 노래 가사를 들으시고 노래 제목을 맞혀주시기 바랍니다.

<못되게 눈 돌리며 외면한 니 모습 모른 척 할래> 이 가사 내용이 너무 좋아요. 실제로는 여자가 못되게 눈 돌렸는데, 그러면서도 헤어지는 마당에 남자가 ‘그래. 니 지금 나 일부러 모른척하는 거라고 이해해줄게.’ 이거는 아까 이야기한 이솝 이야기 여우하고 똑같은 거예요. <한 번 쯤은 날 뒤돌아보며 아파했다 믿을래> 헤어졌는데, ‘그래도 그동안 사귄 게 있는데, 언젠가는 너랑 헤어져서 내가 아프다고 하고 싶어 미치겠지. 내가 믿어줄게.’ 하고 자기 혼자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그래놓고 하는 말이 <바보인가 봐 한마디도 못해. 잘 지낸다는 그 쉬운 인사도> 못한다는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윤도현 밴드가 불렀다는 ‘사랑했나봐’ 가사에요. 어설픈 사랑이라고 본인도 자백해요. 자, 이게 왜 어설픈 사랑일까요? 어설픈 사랑이라는 전제, 그 바닥에는 뭐가 깔려 있을까요? 이래서라도 그동안 내가 했던 모든 것이 나의 정당함으로 되돌아오는 거예요. 그게 깔려있는 겁니다.

야곱이 애굽에 내려가야 해요. 애굽에 내려가서 애굽 사람처럼 다 해야 합니다. 그리고 거기서 자기 백성들, 사대나, 수많은 백성들, 남자 같으면 무려 오십만 되는, 그 후손들이 나와야 해요. 그리고 그들은 거기서 완전히 애굽 사람화 되어야 합니다. 그들이 말하는 여호와라는 것은 기껏 해서 그냥 굿하는 식으로 여호와에요. 자기 신세타령하는 조로, 한풀이 조로, 그렇게 내뱉는, 신세타령하는 조로 내뱉는 여호와입니다. 전혀 그 인간들 천국 못갑니다. 못가야 합니다. 못가야만, 못 갔던 그들을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일관된 하나님의 그 위력이 그들을 통해서 비로소 만개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말은 우리가 이 세상 사람으로 푹 젖어야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나 된 모든 것은 그저 윤도현 밴드가 불렀던, ‘나 그렇게 일방적으로 믿을래’ 라는 어설픈 몸짓. 그럼으로써 서서히 이제 미쳐가는 거예요. 왜? 처음에는, 젊을 때는 핑계할 게 많았는데 점점 나이 들수록 지가 핑계거리로 잡아 땡길 것도 별로 없어요. 지가 봐도 참 허접해. ‘내가 참 이런 핑계대고 꼭 살아야 되나?’ 본인이 본인에 대해서 참 실망스러울 정도로 인생이 뭐, 이제는 건질 것도 없어요. 손가락 사이로 다 새버렸어요.

이렇게 노인들이 모여서 이야기하는 것, 아까도 저희 어머니도 그렇게 이야기하셨지만, 입만 떼면 지 자랑이에요. 우리는 딸도 없어요. 아들 셋 밖에 없어요. 아들 이름도 모르면서, 서울에 있고, 아들 셋 잘 키웠고. 그거 밖에 없어요. 근데 막상 아들은 엄마한테 관심 없어요. 이게 얼마나....., 보세요. “내 때문에 많이 아팠지? 믿을래.” 아파했다 믿을래~ 짠짠 사랑했나봐~~ 어설프기 짝이 없어요. 몸짓이. 자기 정당화에 그냥 정신이 빠져있는 것. 이거 자연의 폭력에 얻어터져야 합니다.

우리는 내가 내 몸이라는 폭력에 시달려야 해요. 의지하고, 나는 뭐 건강하고, 뭐 어떻다, 뭐 어떻다, 하는 것, 하여튼 간증집회하면서 건강이야기 하는데, “내가 아프기 전에는 운동 열심히 하고 혈압도 정상인데 어떻게 아팠는지 모르겠다.” 이게 뭐냐 자연의 폭력인데, 그 자연의 폭력을 언약의 폭력으로 바꾸세요.

반드시 그래야 한다고요. 반드시 그리해야 돼요. 반드시 아파야 되고, 반드시 죽어야 되고, 반드시 그리해야 돼요왜? 주님이 죽었으니까. 주님의 십자가의 죽음에 동참하지 않으면 우리는 천국도 보이지 않습니다. 어디 천국을 넘봐요. 내가 망가지고 내가 더 이상 변명할 거리조차 없을 때, 믿을 분은 오직 주님밖에 없습니다. 다니엘 세 친구가, 전에 수요일에도 이야기했지만 다니엘 세 친구가 갔던 곳이 어디냐? 제가 물었습니다. 어딥니까? 다니엘 세 친구가? 없어요. 다니엘 세 친구가 갔던 곳이 불 속인데 어디 감히 불 속을 들어갑니까? 평소에 불 속에 들어가려고 기도했습니까? 아닙니다. 그 사람도 평소에 자기변명하고 싶어요.

하지만 하나님께서 강제로 불 속에 집어넣었습니다. 이제 믿을 것은 예수님 밖에 없어요. 제 네 번째 사나이 밖에 없어요. 그게 바로 우리 몸을 가지고 주께서는 지금 만들어내십니다. “저 사람 봐라. ‘아파했다 믿을래’ 라고, 그거 어설프다고, 허접한 것이라고 본인이 자백하잖아? 봐라.” 그런데 저 사람이 웃으면서 사는 것은 바로 네 번째 분, 바로 예수님 때문에, 동행하시는 분. 이 동행하시는 분이 ‘맛사’라는, 맛사는 오늘 본문에 ‘시험’이라는 뜻이거든요.

이 시험이라는 이것을, 시험이라는 것은 장소이름이지만 사실은 따지고 보면 동행하시는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나도 같이 시험받는데, 니도 궁시렁궁시렁 그러지마. 나도 당하잖아? 나도 당했어. 니는 못나서 당하지만 나는 잘났어도 당했어.” 그게 바로 우리 아버지께서 준비해놓은 길이거든요. 이게 구원의 길입니다.

이게 넓은 길이 아니고 좁은 길이고. 그 좁은 길? 딴 데 없습니다. 그 구원의 길? 없어요. 주께서는 시험 당하신 주님을 우리 속에 집어넣어서, 우리 안, 우리 속이 이미 구원의 자리로 지금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이게 바로 주님의 관리입니다. 이게 관리차량이에요. 주께서 친히 관리하시는 거예요.

끝으로 한 말씀 드리고 마치겠습니다. KTX타고 가다보면 직원들이 지나갈 때 무슨 소리가 들리느냐 하면 무전기에서 자기들끼리 대화하는 소리가 들려요. 그 무전기 속에서만 나오는 겁니다. 쓱 지나가면 안 들리고 다시 지나가면 또 무전기 속에서 들리죠. 지금 성도와 성도가 만나는 것은 일반 사람들은 모르는 겁니다. 일반 사람들은 그저 자기 위장하는데 바빠요. “아파했다 믿을래” 어설프기 짝이 없는 인생을 살면서 서서히 미쳐가고 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인데, 이상하게 우리 속에서 성경 말씀이 들려나옵니다. 무전기 속에서 나오는 대화처럼. 속닥속닥 들려와요.

욥이 아프기 전에는 주의 말씀을 외부에서 들었습니다. 아프고 난 뒤에는 자기 내부에서 들었습니다. 자기 내부에서. “욥아, 니가 북두칠성 만들 때 니가 관여했나?” “아닙니다.” “니가 판 자체를 다시 봐라.” 이게 광야라는 거죠. 쉽게 말하면 광야고. 이게 우리가 바뀌어져야 하기 때문에. 왜 바뀌어져야 하냐고 물으면 우리가 부모로부터 받은 몸 자체가 이게 어설프기 짝이 없어요. 이게 아담의 죄의 지배를 받습니다.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해요. 주께서 바꿔주는 거예요. 지금. 맛사지 관리 받습니다. 정신적 관리 받아요.

그래서 우리는 원망할 때는 원망하세요. 아닌 척 하지 마시고. 원망 하시면서 이게 바로 어설픈 사랑인 것을, 되도 않은 내 잘남의 몸짓인 것을, 십자가 앞에서 고백하시면 그 안목이 성령이 주는 안목입니다. 니가 니 쪽에서 주님 바라 본 것이 아니고 십자가 쪽에서 나를 다시 바라볼 때, 나뿐만 아니고 이 세상 전체가 광야라면 반드시 같이 시험 당하신 예수님 덕분에 우리는 약속의 땅에 입성하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모든 작업이, 이 세상 작업이 마치 내가 주인공인 것처럼 착각했던 것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살고 죽는 것, 아프고 병들고 낫는 것, 광야이기에, 주께서 시험이 뭔가를 알려주기에, 우리의 진짜 원수가 어디에 있음을 알려주기에, 주께 감사할 수 있고 고마워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