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약관련

다윗언약(2004.5.10 대구강의)

아빠와 함께 2015. 4. 23. 18:03

[04 대구강의 2] - 교회를 넘어서 1 - 다윗언약 1
                                                                                
                                                           04,05,10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인간은 왜 기도에 친밀감을?

일단 교재 ‘교회를 넘어서’ 185페이지를 살펴보자.

** 다윗은 아이의 죽음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였다. 즉 다윗이 자식이 죽고 난 뒤에 알게 된 사실은, 자기의 애씀과 간구에도 불구하고 자식은 다시 되살아나지 못한다는 점이다. 우리아를 죽인 죄악이 자기 자식의 죽음을 통해서 밖으로 표출되었다.

다윗이 자기 자식의 죽음을 앞두고 하나님께 기도하게 되는데, 하지만 아들은 아버지 다윗의 그러한 애틋한 노력과 간구에도 불구하고 그만 죽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기도에 대해서 한국교회 민중들이 상당히 좋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왜 그런고 하니까, 이 기도라는 것이 언제나 ‘가능성’이기 때문에 말이다.

그러한 기도를 많이 하면 자기가 응답을 받았다고 생각하게 되고, 그런 응답은 바로 자기가 굉장히 노력을 많이 했기 때문이라고 여기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민중들이 이런 기도를 당연히 좋아하게 되는데, 그런 기도의 결과물에는 자신의 가능성이 고스란히 살아있기 때문에 말이다.

◈ 그것이 곧 삶의 보람 !!

다시 말씀을 드려서, 사람들이 교회에 다니면서 자기가 기도할 줄 안다고 하는데, 그런데 왜 이러한 기도를 싫어하지 않는가? 그것은 바로 그 기도의 결과물에 대해서, 그 결과물이 무엇인고 하니, 자기 행함의 성과가 고스란히 남아있다는 것이다. 즉 자기가 행했다고 하는 가능성과 노력과 자기 가치가 그 결과물 속에 들어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어유, 내가 기도하지 않았으면 큰일이 날 뻔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있어서 보람이라는 것은, 자기가 독자적으로 행해서 생기는데, 즉 남들이 도저히 생각하지 못하는 것을 말이다. 그렇게 자기가 행했기 때문에 남들과는 다른 어떤 결과물이 주어질 때, 사람은 살아가는 보람을 느낀다는 것이다.

◈ 하나님의 은혜는 싫어 ??

그런데 만약에 자기가 기도를 한다고 할지라도, 그런 자기의 기도와 상관없는 결과가 하나님의 의해 주어진다고 하면, 사람은 그 순간에 낙담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자기의 기도와는 상관없이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게 되면 말이다. 그러니 그것이 서로 조화가 되지 않는데, 자기만의 고유의 가치가 주어지지 않기에 말이다.

그런 사람들은 성경말씀을 보더라도, 어떤 관점에서 보게 되겠는가? 당연히 자기가 행한 것에 대한 가치를 되돌려 받을 수 있다고 하는, 그런 성경구절들을 찾게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조차도 그런 식으로만 보려고 한다는 말이다. 자기의 행함에 집착해서 말이다.

◈ 행한 당신에게 넉넉한 보상을 !!

아무튼 우리가 그렇게 하지 않아서 문제이지, 하기만 하면 반드시 어떠한 결과가 주어진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은 행한 당신에게, 그 행한 보상을 넉넉하게 해주십니다” 라고 말이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한국교회의 모습인데, 즉 그러한 사고방식이 바로 교회가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런 것이 머리 속에 가득하게 때문에, 예수님의 십자가와 같은 것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치 운동회 때에 과자 따먹기를 하듯이, 누가 먼저 가서 저 과자를 따먹는지, 그런 것에만 골몰하게 된다는 것이다. 즉 열심을 내기만 하면, ‘하나님의 열심’ 이라는 과자도 따먹을 수 있다는 말이다.

그렇게 주렁주렁 달려있는 과자를 먼저 따먹은 사람들이 간증집회를 많이 했는데, 목회자의 경우에는 목회성공이라는 과자가 달려있을 것이고 말이다. 그러니 자기도 달려가서 그것을 당연히 따먹고 싶다는 것이다. 즉 쟁취하면 그것이 남의 것이 아니라 유일무이하게 자기 것이 되는데, 그것이 곧 인간의 가능성인데, 바로 그러한 가능성 위에 교회가 세워졌다는 말이다. 한국교회가 바로 이러한 태생적인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 한국교회의 태생적인 문제점을 !!

우리가 지금 살펴보려고 하는 ‘교회를 넘어서’ 라는 책이 바로 그런 것을 제대로 살펴보자는 취지인데, 즉 인간들이 교회를 왜 세우는가? 그것은 바로 자기가 세운 교회에 자기 자신의 행함이 그대로 담겨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거기에서 자기가 살아가는 보람을 찾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 교재에 나오는 다윗을 바라보니, 다윗이 그렇게 열심히 기도했는데 그만 아이가 죽는다는 말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기도를 함에 있어서 그 마음가짐을 어떻게 가지는고 하니, 하나님을 마치 한 집안의 어르신처럼 계신다고 하는 존재성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은 존재하신다” 라고 말이다.

◈ 하나님은 존재하시고, 귀를 기울이시니, 이제 콜만 하면 !!

그것이 첫 번째이고, 두 번째로는 무엇인고 하니, 하나님께서는 지금 우리 인간의 기도를 들을 준비가 되어있다는 것인데, 즉 “하나님은 나와 천당에 갈 준비가 다 되어있다” 라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래 알았어. 이야기해봐” 라고 한다는 말이다.

세 번째로는 천주교에 보면 ‘고해성사’ 라는 것이 있는데, 즉 교인들이 신부에게 가서 자기의 비밀을 털어놓는다는 것이다. 그렇게 신부들이 교회에서 항상 준비를 하면서 하나님의 흉내를 내는데, 그래서 천주교 신자들은 안심을 하고 말이다.

다시 정리하면, 첫째는 먼저 하나님의 존재성을 확실히 알고 있고, 둘째는 하나님께서 귀를 기울이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셋째는 이제 전화기만 들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전화기를 들 때는 스스로 다짐을 한다는 것이다. 일목요연하게 제대로 간절하게 잘 한번 말씀을 드려보자고 말이다.

그런데 지금 자기가 전화기를 들고 전화를 하는데, 하나님의 존재성을 희미하게 안다고 하든지, 또한 자기가 전화를 해도 하나님께서 듣는다는 것에 대해서 확신이 없다고 하면, 그것은 야고보서 1장에 나오는, 마치 파도에 흔들리는 것처럼 두 마음을 품은 것과도 같다는 것이다.

(약 1:6)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약 1:7)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약 1:8)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 역시 내가 기도했기에 !!

그래서 인간들은 정신을 바짝 차리고서 “하나님은 존재하신다”, “귀를 기울이신다”, “그러니 지금부터 제가 지금 하는 이야기를 잘 들어주세요”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자기 기도에 대한 결과만을, 즉 자기 기도의 성과만을 기다리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니 어떤 성과가 주어지게 되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고 하기보다는, 자기가 기도하지 않았으면 주어지지 않았을 성과라고 여긴다는 말이다. 엄마나 목사의 기도가 아니라 자기가 기도했기 때문에 주어졌다는 말이다. 물론 엄마나 목사도 아닌데, 아까 말한 유치원 운동회처럼, 자기가 열심히 달려서 자기 입으로 따먹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무슨 복음이 필요하면 신학이 의미가 있느냐는 것이다. 조직신학이고 뭐고 아무 필요가 없고, 오직 간증 하나만 있으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대해서 “당신이 아무리 열심히 기도해도 하나님은 응답하지 않습니다” 라고 하게 되면, 그들은 복음도 싫다고 하고 신학도 싫다고 한다는 것이다.

◈ 모든 것을 강탈당하는 느낌이 있어야 !!

그렇게 자기 기도로 자기가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당신이 아무리 열심히 기도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고 구원을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라고 하게 되면, 그들에게 무슨 생각이 들겠는가? 그동안 자기가 수십 년을 그렇게 갈고 닦은 모든 것들을 다 한꺼번에 강탈당하는 느낌이 들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만약에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듣지 않고 일방적으로 하나님 자신이 다 알아서 해버린다고 하면, 자기가 그렇게 열심히 교회에 다니고 새벽마다 기도한 것이 도대체 무엇이 되겠느냐는 것이다. 아무 것도 아니고 얼마나 허전하겠느냐는 말이다. 열심히 한 놈이나 그냥 농땡이를 친 놈이나 천당에 가는데 아무런 상관도 없이 그냥 똑같이 되어버린다면 말이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이 당연히 반발을 할 것인데, 하지만 우리는 그런 이야기를 어디를 가든지 간에 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특히 목사가 되어서 헌신예배에 초청을 받아서 가게 되면 반드시 이런 내용을 담아서 설교를 해야하는데, 물론 청중들의 반응은 썰렁하겠지만 말이다. 아예 차비도 주지 않고 그냥 내쫓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물론 교인들이 졸지 않고 들었다고 하면 목사의 역할은 제대로 완수한 것이지만 말이다.

◈ 다윗은 자기 아들의 죽음을 통해서 !!

다시 교재로 돌아와서, 아무튼 다윗은 하나님께 열심히 간구하고 열심히 노력했지만, 즉 자기 아들을 살려달라고 열심히 하나님께 수화기를 들고 그렇게 매달렸지만, 하지만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가? 아들이 그만 죽고 말았다는 것이다.

여기서 다윗은 무엇을 느끼는고 하니, “아하, 하나님은 죽이시면서 나에게 접근하는구나” 라고 하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렇게 하나님께서 자기 아이를 죽였다고 하는 것을 다윗은 무슨 의미로 받아들였는가? “아하, 하나님은 나의 기도와 나의 간구를 죽이는구나” 라고 여겼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다윗이 자기 아이를 살리겠다고 하는 것은 자기 집념이고, 거기에 모든 것을 다 바쳤기 때문에 말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다윗이 원하는 아이를 살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뜻이 아이를 죽이는 것이라고 하면, 결국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다윗을 용서는 하지만, 그러나 그 용서하시는 방식이 바로 다윗의 뜻과 요구를 꺾어 짓밟아 죽이는 가운데서 다윗에게 다가오신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로 그렇게 다가오시고 말이다.

◈ 내가 왜 이라크에 갔을까?

이번 이라크에서 미군들이 포로학대 때문에 곤욕을 겪고 있는데, 마트에서 일하던 평범한 아가씨가 해병대에 입대해서 이라크에 가서 그렇게 하다가 자기 얼굴이 그만 공개되면서 전 세계로부터 지탄의 대상이 되어있고 말이다. 그런데 입장을 바꾸어서 생각해보면, 즉 자기 자신이 포로를 웃으면서 학대하다가 사진이 그만 찍혀서 얼굴이 공개되었다고 하면 말이다. 그때 하나님의 의(義)는 과연 무엇이겠느냐는 것이다.

그야말로 정상적인 하나님인데, 왜냐하면 자기의 모든 포부를 짓밟아버리고 그것을 타넘어서 자기에게로 다가오시는 제대로 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절호의 찬스이기에 말이다. 놀랍게도 바로 그런 기회를 그 미군 아가씨는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온 세상 사람들에게 다 지탄을 받고, 돌에 맞아죽어도 누구 하나 동정심을 발휘하지 않는 21세기 최고의 악녀가 되었는데 말이다(??).

그런데 만약에 그 아가씨가 이러한 사건을 통해서 구원을 받는다고 하면, 그 미군 아가씨가 이해한 하나님은 도대체 어떤 하나님이겠느냐는 것이다. 자기를 성녀로 만든 하나님이 아니라, 너무나도 철저하게 악녀로 만든 하나님이라는 말이다. 즉 자기를 악녀로 만들면서 구원해내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 그들은 다윗언약을 몰라 !!

바로 이런 사실을 다윗이 알았는데, 그래서 다윗의 본부인이 밧세바가 되고, 그 밧세바가 낳은 아들이 곧 솔로몬이라는 것이다. 이 솔로몬이 다윗언약에 의한 차기 왕으로 등극하고 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솔로몬이 성장하는 가운데, 미리 낳았던 다윗의 아들들은 아무도 이런 사실을 모르고 오직 다윗만이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들은 하나님은 모르는데, 그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인가? 민중들인데, 오직 백성들에게 인기를 얻을 생각만 하는데, 그래서 압살롬의 경우에 얼마나 백성들에게 인기가 많은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은 염두도 두지 않고, 자기가 백성들에게 얼마나 인기를 얻고 있는지, 그것에만 신경을 쓴다는 말이다. 윤리이고 도덕이고 간에, 그런 것을 다 깨부수고 다가오시는 사랑의 하나님인데, 그들은 그런 하나님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아까도 이야기를 했지만, 민중들의 특징은 자기 행함의 성과를 기대하는 보람과 재미로 살아가는데, 그것이 곧 기도하는 재미이고 말이다. 그런 재미로 교회에 다니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남들은 하지 않았지만 내가 했으니” 라고 하는데, 즉 남들은 하지 않았지만 자기가 했기에, 바로 그런 결과들을 보면서 보람으로 여기고 살아가는 것이 인간이라는 말이다.
 
◈ 그러나 하나님은, 다윗의 하나님이기에 !!

그런데 다윗의 경우에는 그것이 아니었는데,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인간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더라는 말이다. 즉 인간의 기도에 응답해주지 않는 하나님을 좋으신 하나님으로 여기고 믿을 수 있을 정도로, 그렇게 눈을 떤 사람이 과연 누구냐는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가 “목사님, 만약에 그렇게 눈을 뜨지 못한다면 구원을 받지 못합니까?” 라고 한다면, 저는 감히 “예, 그렇습니다.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라고 대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오로지 다윗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말이다.

그러니 ‘다윗의 하나님’ 이라는 말의 의미는, 다윗과 같은 신앙을 가지고 있어야만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이 말은 우리가 그런 생각을 하도록 노력을 하자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준 동일한 신앙을 신약시대에 성령을 통해서 동일하게 참된 성도에게 부어주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참된 주님의 백성은 아는데, 매일같이 자기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하심 그 자체로서 다가오시고 인도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제 교재 186페이지를 살펴보자.

** 다윗언약 중심의 세계는, 다윗가문의 영원성을 잘못 이해한 자들끼리의 야욕과 탐욕에 물든 전쟁에 휩싸이고 있었다.

◈ 그들은 왜 싸우는가?

여기 전쟁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그런데 전쟁을 왜 하는가? 이것을 우리가 어릴 때부터 경험을 많이 하는데, 부모와 자식간에도 싸우고, 형제간에도 싸우고, 또한 친구와도 싸우고 말이다. 그리고 민족과 민족끼리도 서로 싸우고 말이다. 그런데 정작 “왜 싸우는가?” 라는 점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본 적이 있느냐는 것이다.

이것이 결코 쉬운 것이 아닌데, 창세기 14장에 보면 소돔과 고모라 땅에서 전쟁이 일어나는데, 그런데 이 소돔과 고모라가 마치 에덴동산과 같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기름진 땅이 좋다고 여긴 사람들이 한두 명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들 보는 눈이 있으니 말이다. 무려 9족속이 이 에덴동산과 같은 소돔과 고모라 땅을 노렸는데, 그런데 이것을 자기 좋으면 자기 힘으로 알아서 차지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복음은 무엇인고 하니, 진짜 에덴동산은 천국을 우리가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것은 간구하거나 어떻게 요구한다고 되는 문제가 아닌데, 그냥 일방적으로 그 좋은 천국은 우리에게 주신다는 말이다. 물론 우리는 그런 자격이 없는데, 그분이 긍휼을 베풀어서 주신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지상에서의 싸움은 자기가 빼앗고 차지하는 싸움인데, 그러니 전쟁을 하지 않는다고 하면 전혀 가지지 못한다는 것이다.

◈ 내가 바로 38년 된 병자 !!

요한복음 5장에 보면 베데스다 연못가가 나오는데, 그런데 거기 있던 38년 된 병자가 그만 나았다는 것이다. 물론 한달 된 병자도 있고, 일년이 된 병자로 있었을 텐데 말이다. 그 입구에 줄줄이 늘어서 있는데, 그런데 38년 된 병자가 그만 병이 나아서 연못에서 나오더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병자를 보고, “아이쿠 어르신, 어떻게 그렇게 병이 나았습니까? 연습을 많이 했습니까?” 라고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호수에 물이 움직인다는 것을 하도 많이 보았기 때문에, 이제는 움직이기도 전에 미리 알고 가서 준비해서 남들보다 빨리 들어가서 병이 낫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그러니 누가 먼저 혜택을 보는지, 즉 연못에 빨리 들어가서 차지하는 전쟁이니 말이다. 하지만 38년 된 병자는 뭐라고 하는가? “그게 아닌데. 누가 아까 나에게 그냥 일어나서 걸으라고 했는데, 저 사람인가?” 라고 한다는 것이다.

(요 5:5) 거기 삼십 팔년 된 병자가 있더라
(요 5:6)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랜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요 5:7)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요 5:8) 예수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이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의 모습이 되어야 하는데, 즉 누군가가 “어떻게 구원을 쟁취했습니까?” 라고 묻는다면, “물론 예수님입니다. 그분이 저를 찾아오셔서 구원했습니다” 라고 해야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요한복음 5장의 38년 된 병자가 남의 이야기가 되면 안 되는데, 요한복은 9장의 소경도 남의 이야기가 되면 안 되고 말이다.

사실 육체의 눈보다 마음의 소경이 눈을 뜨는 것이 더 어려운데, 물론 38년 된 병보다도 마음의 병을 고치는 것이 더 어려운데, 아니 우리의 힘으로는 고칠 수가 없다는 말이다. 마치 다윗의 경우에, 그야말로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다윗을 지목하고 찾아오셔서 왕이 되게 하듯이, 그렇게 주님이 베푸시는 일방적인 은혜가 있어야만 한다는 말이다. 그렇게 주님이 찾아오셔서 “너는 내 제자가 되고, 백성이 되어라” 라는 사람만 구원받을 수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오늘날 목사들이 “야, 고기가 많구나. 내가 낚는 대로 우리 교인을 만들겠다” 라고 하는, 일종의 전쟁처럼 여기고 있는데, 마치 자기가 차지할 수 있는 것으로 말이다. 즉 노력해서 설득하고 포섭하면 자기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여기는, 그런 모든 사고방식을 거부한다는 것이다.

◈ 성도의 전쟁은, 증거하는 전쟁 !!

물론 성도에게는 영적전쟁이 있지만, 그러나 그것은 더욱 차지하기 위한 전쟁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복음의 가치를 지키며, 증거하며, 영광을 돌리는 전쟁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새삼스럽게 자기 쪽에서 쟁취하는 전쟁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데도 여전히 자기가 무엇을 해야 한다고 한다면, 그런 사람은 다윗언약에 해당되는 사람이 아니고, 또한 새언약에 해당되는 사람도 아니고, 그렇게 되면 지옥으로 가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다윗에게 우연히 우리아의 아내가 목욕하는 것이 눈에 들어온 것도 따지고 보면, 다윗언약을 구체화하기 위한 하나님의 예정된 섭리에 해당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를 범함으로서 자기가 모친의 죄 중에서 태어난 것을 알게 되고, 그리고 하나님은 제사와 번제를 받지 않음도 알게 되고, 자기가 상한심령이었음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자기가 처음부터 상한심령이었고, 지금도 여전히 상한심령임을, 또한 끝까지 상한심령이 될 것임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 박옥수 - 인간구원을 위한 예수 !!

박옥수 집단에서 조선일보나 중앙일보에 광고를 내는데, 소위 ‘기쁜소식 선교회’ 라고 말이다. 체육관에서 집회를 한다고 광고를 하는데, 그렇게 광고를 하면서 또 뭐라고 하는고 하니까, 한국교회는 대형교회부터 시골의 밭고랑 교회까지 다 썩었다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전면광고를 하는데, 비용이 약 1억 정도는 들지 싶은데 말이다.

그 양반의 신학이 무엇인고 하니,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의인이니까 결코 죄를 짓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느 글에서 그는 뭐라고 주장했는고 하니,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믿어도 죄인이라고 하는데, 그런 사람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죄인이 아닌데, 즉 죄를 지을 수가 없다고 하는, 그런 신학이 밑바탕에 깔려있다는 말이다.

그것이 곧 구원파의 특징인데, 그렇다면 이 집단의 문제점이 무엇인가? 다윗언약을 위한 자기 자신이 아니라, 언약이든 하나님이든 간에 그것은 누구를 위한 것인고 하니까, 모든 것이 다 자기의 구원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즉 주님을 위한 자기 자신이 아니라, 자기의 구원을 위한 주님이라는 말이다.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와 동침하기 전까지는 몰랐는데, 그리고 그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이 죽지 전까지는 몰랐는데, 자기가 아무리 하나님께 기도해도 죽고 말았다는 것이다. 만약 박옥수의 주장대로라면, 다윗이 죄 용서를 받고 난 뒤에는 자기 가정에는 어떤 어려움도 없어야 하는데, 왜냐하면 다윗은 더 이상 죄를 지을 줄 모르기에 말이다. 다윗은 우리아의 사건 이외는 온전하다고까지 했는데 말이다.

◈ 다윗은, 다윗언약의 부속품 !!

하지만 그 사건 뒤에 어떤 일들이 있는고 하니, 이스라엘 백성들의 인구조사는 누가 했는가? 요압이 했는가? 오히려 그는 말렸는데, 그러면 누가 했는가? 바로 다윗이 했다는 것이다. 그러한 인구조사의 결과로서 사흘만에 7만 명이나 죽었는데 말이다.

그래서 다윗은 아는데, 자기의 구원을 위해서 언약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바로 언약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부속품으로서 하나님은 자기를 끼워 넣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쉽게 말해서, “다윗언약은 크지만, 다윗은 작다” 라고 할 수가 있는데, 즉 다윗언약이 중요한 것이지 다윗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말이다.

저기 경북 구미에 가면 아직도 박정희 전 대통령을 그리워하는 자들이 많이 있는데, 그래서 국회의원 선거와 같은 것을 하면 후보자들이 박정희를 사랑하는 것처럼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박정희가 아직도 중요해서라기보다는 그들의 표를 의식해서 그런 이야기를 한다는 말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다윗언약에서 다윗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다윗으로 하여금 마음을 낮추게 하신 분이 계신다는 것이다. 그분이 누구인고 하니, 다윗의 자손이고, 우리를 불쌍히 여기신 우리의 메시야, 곧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 다윗을 바라보면서 메시야를 발견해야 !!

그러니 우리가 구약의 다윗을 바라보면서 메시야를 발견해야 하는데, 그렇게 발견한 사람이 있는가? 물론 있는데, 그가 곧 베드로라는 것이다.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성령을 받은 베드로의 설교를 보면, 뭐라고 하는가? 베드로가 이 시편 16편을 언급하면서, 무덤에서 죽지 않는 것은 다윗의 입을 통해서 이야기했지만, 그분은 바로 예수님을 이야기한다고 분명하게 구체적으로 지적을 했다는 것이다.

(행 2:25) 다윗이 저를 가리켜 가로되 내가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를 뵈웠음이여 나로 요동치 않게 하기 위하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도다
(행 2:26) 이러므로 내 마음이 기뻐하였고 내 입술도 즐거워하였으며 육체는 희망에 거하리니
(행 2:27)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치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
(행 2:28)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셨으니 주의 앞에서 나로 기쁨이 충만하게 하시리로다 하였으니

그러니 성령을 받은 성도라고 하면, 구약의 이러한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나를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을 위한 부속품으로 들어가 있구나” 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것은 천사도 흠모할 만한 놀라운 특권임을 놓치면 안 된다는 것이다.

만약에 그런 것을 놓치게 되면 사명감이 떨어지고, 그렇게 사명감이 떨어지게 되면 우울증이 생긴다는 말이다. 또한 그렇게 우울증이 생기게 되면, 자기 자신과 남을 비교하면서 “도대체 내 꼴이 이게 뭐꼬?” 라고 하면서 그만 하나님을 원망하게 된다는 것이다. 감사가 아니라 말이다.

◈ 다윗의 인생을 망쳐놓은 분은 과연 누구인가?

그러니 우리가 이런 다윗언약을 살펴보면서, 다윗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렇게 다윗의 인생을 망쳐놓은(?) 그분이 누구인가?” 라는 것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는 것이다. 그분이 다윗언약 속에서 활동을 하시는데, 즉 다윗언약이기 때문에 다윗을 망쳐놓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다윗을 그렇게 망쳐가면서 다윗언약을 이루어 가는 그분이 누구인가? 그분이 바로 다윗언약의 진정한 주인공이라는 말이다. 다윗이 주인공이 아니고 말이다. 즉 다윗언약의 실체는 다윗이 아니고, 이 다윗언약은 모형이고, 그 모형의 실체는 바로 장차 오실 예수님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구약을 살펴보면 되는데, 구약을 보면서도 의미를 모르겠다고 불평하지 말고 말이다.

이제 교재 187페이지를 살펴보자.

** 그것은 부도덕에 근거한 권력이 결국에는 다윗이 현재 쥐고 있는 권력까지 부도덕에 준한 권력인 것처럼 해석해서, 그 권력을 지향할 수 있는 여지를 주었다는데 있다. 이것이 현재 다윗왕가 권력의 한계였다.

◈ 압살롬은 어떻게 다윗가문을 비방하는가?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압살롬이 다윗과 그 가문의 속성을 비방하는데 있어서, 다윗가문이 비도덕적이라는 것 때문에 비방을 한다는 것이다. 즉 “다윗가문은 이렇게 비도덕적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살아계신다고 하면 도덕적인 이 압살롬의 편을 들어주실 것이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압살롬이 다윗 가문을 비도덕적이라고 공격하는 것은, 바로 사무엘하 13장에 나오는 다윗의 딸인 다말 공부를 그 이복오빠인 암몬이 그만 강제로 범한 사건 때문에 그러한데, 바로 그것 때문에 압살롬이 아버지 다윗을 공격하는 빌미를 제공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 다윗가문의 비도덕적 행위 때문에 피해자가 발생하게 되는데, 압살롬의 여동생인 다말이 피해자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시겠는가? 정말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하면, 이런 비도덕적인 분위기 속에서도 유난히 도덕적이고 정의로운 압살롬의 편에 당연히 서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민중들도 압살롬의 편에 서고 말이다. 그런 생각을 압살롬이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삼하 13:1) 그 후에 이 일이 있으니라 다윗의 아들 압살롬에게 아름다운 누이가 있으니 이름은 다말이라 다윗의 아들 암논이 저를 연애하나
(삼하 13:2) 저는 처녀이므로 어찌할 수 없는 줄을 알고 암논이 그 누이 다말을 인하여 심화로 병이 되니라 …
(삼하 13:14) 암논이 그 말을 듣지 아니하고 다말보다 힘이 세므로 억지로 동침하니라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다말공주에 대한 이복오빠 암논의 범죄가 다윗의 분노는 샀지만, 결코 다윗으로부터 왕자 지위가 박탈되지는 않았다는 점에서 피해자의 입장에 있는 압살롬에게 아버지에 대한 불만과 싸잡아 공격하고자 하는 기회를 제공한 셈이다(삼하 13:21-22)

(삼하 13:21) 다윗 왕이 이 모든 일을 듣고 심히 노하니라
(삼하 13:22) 압살롬이 그 누이 다말을 암논이 욕되게 하였으므로 저를 미워하여 시비간에 말하지 아니하니라

◈ 비도덕적인 사고가 다윗언약을 공격할 수 있는가?

지금 이 표현이 무슨 뜻인지 알아야 하는데, 먼저 여기에서 제가 질문을 하나 하겠는데, “과연 비도덕적인 사고가 다윗언약 자체를 공격할 수 있는 권리가 있는가?” 라는 것이다. 즉 다윗가문에 비도덕적인 것이 들어오게 되었다고 했을 때, 그렇게 해서 피해를 본 도덕적인 사람이, 물론 피해를 보았다고 해서 도덕적인 사람이라고 하기는 곤란하지만 말이다. 마치 교통사고가 났다고 해서, 들이박힌 차가 반드시 훌륭한 사람의 차는 아니듯이 말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점을 혼동하는데, 즉 피해를 입었기에 가해자는 나쁜 놈이지만 피해자는 착한 사람이라고 말이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할 가능성이 굉장히 많은데, 그것은 피해를 입인 것을 그 어떤 식으로든 신에게 위로와 보상을 받으려고 기대를 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라는 말이다.

아무튼 다윗언약에 있어서, 도덕적으로 피해를 입었다고 해서 그 사람이 다윗언약을 공격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물론 없는데, 그렇다면 없는 그 이유는 무엇인가? ‘피해자’ 라고 하면 당연히 고발할 수 있고, 그렇게 해야 정의로운 것인데, 왜 그것이 되지 않느냐는 말이다.

◈ 다윗언약의 주인공은 다윗이 아닌 예수님 !!

그것은 바로 다윗언약의 주인공이 예수님이기 때문인데, 그런 예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착하게 살라는 것이 아니고, 죄를 대신해서 짊어지는 분이 따로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전혀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다.

흔히 목사들이 뭐라고 하는가? “이제 예수님을 믿었으니 착하고 바르게 삽시다.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읍시다” 라고 하는데, 하지만 예수님을 믿고 바르게 살지 않는 사람을 향해서 바르게 산다고 하는 사람이 과연 공격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느냐는 것이다.

물론 없는데, 왜냐하면 자기가 그 사람의 죄를 대신해서 진 것이 아니기에 말이다.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압살롬이나 다윗이나 둘 다 대신해서 죄를 진 사람이 전혀 아닌데, 대신해서 졌다고 할 수 있는 우리아는 억울하게 죽어서 이미 없어졌고 말이다. 그러니 이 다윗언약에서는 누가 누구를 공격할 수 있는 권리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 ‘용서’는 ‘대신 지심’의 고유권한 !!

바리새인들이 간음한 여인을 돌로 치려고 할 때 예수님이 뭐라고 하셨는가?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셨는데, 즉 “돌을 던져도 너희들이 던지면 안 되고, 다윗언약의 주인공인 내가 던져야 한다” 라는 것이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떤 기준에 의해서 돌을 던지는가? 그냥 용서해주면 되는가? 그것이 아니라, 그냥 용서를 다 해준다면 지옥이 왜 필요하겠느냐는 것이다. 그런데 이 다윗언약에서 ‘용서’ 라는 것은 ‘대신 지심’이 있는 자의 고유권한이라는 말이다. 

이번에 크로스빌리지에 글을 올린 자들을 보면 나쁜 놈들이 얼마나 많은지, 하나님께서 자기의 죄를 용서해주시는 것을 너무나도 당연하게 여기는데, 그렇게 자기를 용서해주어야 하나님답다는 것이다. 그러니 얼마나 이단적 사고방식인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의 용서는 인간이 요구한다고 해서 되는 문제가 아니라, 물론 인간은 전혀 그럴 자격도 없고 말이다. 하나님은 오직 대신 지심을 이해하는 자에게만 사랑을 베푸는데, 그것을 두고 용서라고 한다는 것이다. 대신 지심을 이해하는 자에게만 말이다. 즉 예수님은 결코 손해를 보는 분이 아닌데, 즉 자기의 십자가를 헛되게 하는 방식으로 이끌고 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 예수님이 바로 다윗언약의 피해자 !!

강의를 조금 어렵게 한 것 같은데, 이것을 간단하게 말하자면, 도덕적인 것에 준한 피해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은혜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 다윗언약에 준한 피해자는 누구인고 하니, 사실상 다윗의 죄를 대신해서 지고 가신 눈에 보이지 않는 예수님이 진정한 다윗언약의 피해자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말이다.

따라서 아무리 시시비비를 걸어도 오직 예수님만이 그런 것을 거론할 자격이 있다는 것이다. 즉 모든 심판은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지, 우리가 알아서 처리할 문제는 하나도 없다는 말이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다 용서하시는가? 그것이 아니라, 지옥에 보낼 자는 반드시 보내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자만 구원을 하시는가? 주님의 대신 지심을 이해하는 자만 말이다. 그렇지 않은 자는 일일이 다 찾아내어서 지옥으로 보낸다는 것이다. 그러니 지옥의 하나님인데, 하지만 지옥으로 보내는 하나님이 바로 자비로운 하나님이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인간중심이 아니라, 자기의 언약중심이니 말이다.

다시 말해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기 때문에,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그만 모두가 죽은 자들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 누구라도 자기를 구원해달라는 자격은 처음부터 아예 그러한 자격이 다 박탈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말이다.

그렇다면 오늘 교회에서 복음을 이야기하면 사람들이 싫어하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인가? 왜 민중들이 복음을 싫어하느냐는 말이다. 그것은 바로 자기는 그래도 기도도 열심히 하면서, 나름대로 도덕적으로 살아간다고 여기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질문을 던져야 하는데, “당신이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를 졌습니까?” 라고 말이다. 그것은 아닌데, 그렇다면 자기의 기도나 도덕을 이야기하지 말라는 것이다. 인간은 전혀 그럴 자격이 없으니 말이다.

◈ 출발을, 인간이 아닌 예수님으로부터 !!

그러니 반드시 인간이 아닌 예수님 쪽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예수님은 “너희가 나의 대신 지심을 믿는가? 믿지 않는가?” 라는 것을 가지고 심판을 하지, “너희들이 도덕적인가? 비도덕적인가?” 라는 것을 가지고서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 흔히 상대방에서 뭐라고 하는고 하니, “이근호 당신이 그렇게 가르치니, 당신에게서 배운 사람들이 마음을 놓고 죄를 짓고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것이 아닌가? 전혀 죄책감도 느끼지 않고 죄를 짓는 분위기로 말이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복음을 아는 사람들이 죄를 더 많이 짓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아는 사람은 자기가 하는 짓이 죄임을 알고 죄를 짓는 것이고, 반면에 복음을 모르고 죄를 짓는 놈들은 그것을 감추기에 급급한데, 그러니 그런 자기의 모습을 숨기려고 하는 것 자체가 더 나쁘고 교만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어차피 인간들이란 단 한 순간이라도 죄를 짓지 않는 순간이 없는데, 하지만 자기 자신이 죄인임을 아는 자가 바로 예수님의 대신 지심을 아는, 즉 다윗언약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제대로 파악하는 모습이라는 말이다. 자기가 매일같이 죄만 짓는 놈이라는 것을 깨닫는 자가 말이다.

◈ 민중들은 왜 압살롬을 좋아하는가?

우리가 이렇게 보니, 다윗의 딸인 다말 공주에 대한 이복오빠 암몬의 범죄로 인해서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키게 되는데, 여기서 우리가 무엇을 생각해야 하는고 하니, 왜 대다수의 사람들이 압살롬을 좋아했는지 이해가 된다는 것이다. 압살롬의 인기가 얼마나 좋았든지 다윗을 따르는 사람들이 얼마 되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러니 민중들이라고 하는 것은, 다윗언약을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은 거의 희박하다는 것이다. 지금도 그렇고 물론 그 당시도 그렇지만 말이다. 대부분이 압살롬에게로 쏠리는데, 왜냐하면 민중들은 힘이 있는 쪽을 좋아하니 말이다. 그러니 다윗시대나 예수님 당시나 민중들은 그렇게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다윗언약은 복음이 된다는 말이다.

이제 교재 190페이지를 살펴보자.

** 다윗이 당하는 이 변란의 고난은 평소에 다윗왕가에 대한 불만세력이 누구였으며, 우호적인 자들이 누구인가를 명확히 구분하는 계기가 된다. 같은 사울집안에 속한 자중에서도 요나단의 아들인 므비보셋의 사환으로 있는 시바가 왕의 호의에 대한 자기 주인의 변절을 이야기해주면서 많은 양의 물자를 제공한다. 왕은 그에게 자기 주인의 것이 이제는 너의 것이 되리라고 약속한다. 주인이 바뀐 셈이다.
 
◈ 혜택은 다윗에게 받고, 사고방식은 사울의 것을 !!

그 당시 민중들 속에 여전히 깔려 들어오는 것은 사울의 사고방식인데, 비록 사울왕은 죽고 지금은 다윗왕의 혜택을 받고 있지만 말이다. 즉 혜택은 다윗에게 받고 사고방식은 사울의 것을 그대로 유지하고 말이다. 그것이 그대로 꼬여서 이 압살롬의 쿠데타를 통해서 그 결과가 그대로 드러나는 계기가 마련되는데, 마치 양파껍질을 벗기듯이 하나둘씩 말이다. 그러한 것들 중의 하나가 바로 므비보셋의 변절에 관한 것인데, 그것이 성경에 그대로 나온다는 것이다.

실제로 기존 교회에서 목회를 하다보면 이러한 경우가 굉장히 많은데, 즉 복음적인 사고방식이 전혀 되지 않은 사람이 결국은 자기의 본질을 감추지 못하고, 어떤 계기를 통해서라도 드러난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부부사이의 경우에, 한 사람은 복음을 알고 옆 사람은 모른다고 할 때, 말다툼을 했을 때 참다가 참다가 그런 것이 드러나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 인간은 결국, 자기 행함으로 대가를 원해 !!

천 목사님은 그런 경우가 없나요? 부부싸움이 무엇인지 전혀 모른다는 표정인데(ㅋㅋ), 복음을 안다고 하면서도 자기 성질이 그대로 드러난다는 것이다. 그때 드러나는 성격을 그대로 추려서 정리해보면, 그것이 바로 사울적 사고방식이라는 것이다. 즉 “내가 이만큼 했는데, 니가 나에게 해준 것이 무엇이 있노?” 라고 한다는 말이다. 결국은, 자기가 그만큼 했으니 상대방에게 그만한 대가를 요구하는 것인데, 즉 자기 행함에 대한 기대감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자기 행함을 의지하지 않는다고 그렇게 다짐을 해놓고는, 막상 어떤 계기를 만나게 되니 자기에게 감추어져있던 그 본질이 그대로 드러난다는 것이다. 그렇게 화산처럼 분출되는 것이 바로 “그래. 니는 복음을 알지만 나는 모른다. 니가 나에게 해준 것이 뭐꼬?” 라고 하면서 말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목사님, 그러니까 복음을 아는 사람끼리 결혼을 해야지요” 라고 하는데, 하지만 전혀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복음이 무엇인지 알도록 하기 위해서 전혀 복음을 모르는 사람과 결혼을 시켰으니 말이다.

만약 복음을 아는 사람과 결혼을 해버리면, 복음을 안다고 생각했던 그 당사자가 다음과 같이 하나님에게 따지는 수가 있는데, “하나님, 제가 그 좋은 혼처를 다 버리고 복음을 아는 사람하고 결혼을 한 그 행위가 있지 않습니까? 그 행위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해준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라고 말이다.

◈ 결혼은, 사랑하는 사람과 !!

그래서 제가 뭐라고 했는고 하니, 결혼은 사랑하는 사람과 한다고 말이다. 복음을 아는 사람과 하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지금 생각해도 명언인데(ㅋㅋ), 그 사랑이 욕망이 되었던, 탐욕이 되었던, 정욕이 되었던 간에 말이다. 그것은 후대 역사가들이 평가할 문제이고, 사랑하는 사람이 눈에 들어오는 순간 결혼을 하면 된다는 것이다. 특별한 조건을 따지고 말고 하는 것도 인간의 행위이고 말이다. 그렇게 주신 감정대로 끌려서 결혼하면 되는데, 그런 것이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아니기에 말이다.

그러니 우리가 이 다윗언약에서 압살롬과의 전쟁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복음을 모르는 인간이란 결국에는 자기의 본색을 드러내고야 만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중에 이 압살롬과의 전쟁이 끝이 나고 난 뒤에 정식으로 왕위가 솔로몬에게 넘어가면, 그때에는 다윗의 군대정관이었던 요압의 정체가 또 드러나고 말이다.

이제 교재 192페이지를 살펴보자.

** 따라서 압살롬이라는 존재는 다윗언약에 따라 하나님이 죽여야만 비로소 죽을 수 있는 자식이지, 그 어느 누구도 함부로 생명에 손댈 수 없는 왕의 아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에 압살롬을 단순히 기존 권세에 대항하는 모반자 정도로 생각한다면, 이것은 힘의 논리일 뿐이지 다윗언약의 사고방식이 아니다. 

◈ 다윗왕가의 죄가 마치 스펙트럼처럼 !!

이것이 무슨 의미인고 하니, 압살롬이 죽었을 때 요압은 다윗의 성격을 잘 알기 때문에, “다윗이 별로 좋아하지 않을 거야” 라고 하는데, 그런데 누군가가 달려와서 “왕이여, 드디어 적이 죽었습니다. 기뻐하소서” 라고 했는데, 그렇게 하면 왕이 자기에게 상이라도 줄줄 알고 말이다. 하지만 실망해서 돌아가고 말았는데, 오히려 다윗은 압살롬 아들의 죽음을 그렇게 통곡하고 슬퍼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다윗왕가 자체가 전부가 다 죄인이기 때문에, 다윗은 자기 자식들이 죄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일종의 스텍트럼처럼 나타나는 현실에 대해서 상당히 애석해하고, 가슴아파했다는 것이다. 물론 남들이 보기에는 “권력이 탐이 나서 아버지를 죽이려고 하는 못된 아들이 죽었으니, 그만 잘 되었다” 라고 하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다윗가문 자체가 하나님의 집이고 하나님께서 손수 다스리기 때문에, 거기에 대해서 복음적이 아니라 비복음적으로 나섰던 압살롬의 최후를 바라보면서, “아하, 사람이 죽인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손수 죽였구나” 라는 것을 알았다는 것이다. 그것도 압살롬이 자랑하던 자기의 긴 머리카락이 그만 나뭇가지에 걸려서 죽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다윗가문을 포기하지 않고, 죽일 놈은 하나씩 죽여나간다는 것도 알게 되었고 말이다. 물론 그렇게 깨닫기는 하지만, 참으로 안타깝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다윗왕가의 고유성은 단순히 죄를 지었다고 처단하는 그런 율법적인 차원이 아니라, 그것을 극복하는 다윗언약의 사랑의 증표로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남겨준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압은 이러한 사태를 자기에게 유리한 쪽으로 만들려고 했다. 다윗의 존재자체를 기존 집권세력의 정통성을 민중들에게 부각시킬 수 있는 핵심요소로 보고 수구세력을 구축하려고 했다. 즉 다윗왕 복권에 미련이 있는 세력들에게 ‘지파 대 지파’의 감정대립으로 백성들을 몰아 자신들의 힘 규합의 정당성을 주장할 수 있는 구실을 만들어준 셈이다. 특히 군대장관 요압은 그 와중에서 자기 판단에 의해서 전쟁을 수행했는데, 압살롬의 살해는 왕의 부재중에 벌어졌다는데서 다윗이 없을 경우에 요압이 취할 태도에 대해서는 장담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것은 그 내용을 이야기한 것이고, 계속해서 교재 194페이지를 보자.

** 왕의 의사와 반하는 승리는 다윗언약 체제에 아무런 의미가 없이 일방적이다. 다윗언약에 의한 승리는 사사의 속성의 연장으로 힘과 다수에 의한 승리로 귀결될 수 없다. 인간들의 지략의 승리로 이끄는 방식이 아니라 오히려 전쟁의 승리를 통해서 자기 세력을 증가시키려는 자는 정죄하는 방식이 여호와 전쟁이다.

여호와 전쟁은 하나님이 붙여주는 전쟁인데, 그래서 ‘붙이시매 전쟁’ 이라고도 하는데, 그러니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윗언약에 있어서 외부와의 전쟁은 끝났지만, 그러나 이때부터는 다윗왕가 내부의 전쟁으로 계속해서 이어졌다는 것이다. 그것은 곧 요압의 이야기인데, 다윗은 귀순한 아마사를 요압을 대신하여 군대장관으로 삼는데, 그러나 그도 다윗이 없을 때 요압에게 죽고 만다는 것이다.

이제 195페이지를 살펴보자.

** 우리아 장군이 지닌 하나님 언약에 대한 견해는 왕이 행한 형식적인 율법관과는 달랐다. 언약에 대한 자신의 포기 내지는 헌신이었지, 결코 자기 자신의 안녕과 번영과 유지를 위한 하나님의 언약은 아니었던 것이다.

◈ 우리아 - 다윗을 왕 되게 하신 하나님의 종으로서 !!

우리아 장군의 경우에는 왕의 말이라도 듣지 않았는데, 그러니 이러한 우리아 장군의 태도는 단순히 다윗왕을 위한 자기 자신이 아니라, 그 다윗을 왕 되게 하신 하나님의 종으로서 여호와 전쟁에 참여했다는 것이다. 암몬과의 전쟁에 말이다. 이러한 우리아의 태도는 당연히 성도가 갖추어야 할 모습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살아가면서 어떤 사람이 자기에게 아무리 못되게 굴어도, 못된 것을 그냥 못된 것이란 말이다. 즉 그런 사람을 죽이고 살리고 하는 것은 우리 소관을 떠난 것인데, 다만 하나님께서 알아서 할 일이라는 것이다. 저주를 하든지 축복을 하든지 말이다.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 자체에 대해서 복종하든지 말든지, 그렇게 사람에게 끌릴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 사람이 괜찮은 사람일 수도 있지만,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통해서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그것이 더 중요하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 사람이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소리를 하면 당연히 거부해야 한다는 것이다.

◈ 목사님, 상사가 불교신자입니다 !!

우리가 직장생활을 하게 되면 이러한 경험들을 종종 하게 되는데, “목사님, 제 상사가 불교신자인데 어떻게 해야 합니까?” 라고 하면서 상담을 원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가 무엇이라고 답변을 해주는고 하니, “불신자(불교신자?)라고 해서 무시하면 안 됩니다” 라고 하는데, 그렇다고 복종하는 것도 물론 말이 안 되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하는가? 비록 불신자이지만, 하나님께서 자기 자녀인 우리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서 얼마든지 불신자를 사용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불신자라고 해서 우리가 어떻게 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주님에게 맡겨야지 말이다.

예를 들어서, 구두수선을 받으려면 어디로 가는가? 얼마든지 불신자인 구두 수선공이 고쳐줄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고맙게 여기면 되고 말이다. 버스를 타도 누가 모는가? 얼마든지 불신자인 기사가 운전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목적지까지 잘 도착만 시켜주면 우리는 고맙게 여기면 된다는 것이다. 굳이 불신자가 아닌 같은 신자가 운전하는 버스를 탈 이유가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우리를 우리가 알게 모르게 얼마나 도와주는지 모르는데, “예수님을 믿지 않으니 다 죽어라” 라고 하면 김일성이나 하는 짓이지(?), 그것은 말이 안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에게 끔벅하고 넘어갈 필요까지는 없다는 것이다.

◈ 우리는, 세상 친구가 너무 많아 !!

귻런데 굳이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고 하니, 우리교회도 그렇고 다른 교회도 마찬가지인데, 세상 친구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소위 ‘의리’ 라는 것인데, 즉 “니가 나에게 잘 해주니, 나도 너에게 잘 해주겠다” 라는 것이다. 즉 불신 친구가 엉뚱한 것을 요구해도, 이전에 혜택을 입은 것이 많이 있어서,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줄 알면서도 동조를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는 것이다.

이런 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참으로 많이 일어나는데, 즉 자기가 의리를 지키지 않으면 “봐라.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저렇게 한다” 라고, 남들에게 손가락질을 받을까 싶어서 할 수 없이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따지게 된다고 하면, 결코 교회에도 나오지 못하고, 또한 예수님도 믿지 못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그러한 것은 하나님의 뜻도 아니고 자기 자존심에 불과한데, 즉 “남들이 얼마나 나를 욕할까?” 라고 하는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야, 이 불신자야 죽어라” 라고 할 수도 없는데, 그러니 모든 것이 하나님께 속했다는 것이다.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라 말이다.

◈ 왕도 내 전쟁에 개입하지 말라 !!

그러니 우리아의 입장이 무엇인고 하니, 물론 형식적으로는 다윗왕에게 지시를 받아서 전쟁을 하지만, 그러나 실제로는 무엇인가? “왕은 꺼져라. 이것은 내 전쟁이다” 라는 것이다. 즉 “나의 전쟁이니 왕도 함부로 개입하지 말라” 라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교회에서 목사가 복음을 이야기해주면 참 고마운데, 그렇다고 해서 그 목사가 “이래라, 저래라” 라는 것은 말이 안 된다는 것이다. 십자가도 지지 않은 인간이, 복음을 알면 아는 것이지 왜 남의 일에 간섭을 하느냐는 말이다. 교인이 어디 목사의 부하인가? 즉 “이것은 내 전쟁인데, 그러니 목사 당신은 당신의 전쟁을 하고, 나는 내 전쟁을 한다” 라는 것이다. 어디까지나 자기가 알아서 할 문제라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교회에 헌금을 해도 본인이 알아서 하면 되는데, 그런데 왜 목사가 간섭하느냐는 것이다. 이것을 기존 목사들은 왜 모르는지 궁금한데(?), 물론 교회에 에어컨이 필요하다고 목사가 얼마든지 말할 수 있는데, 하지만 설치하고 말고는 교인들이 알아서 할 문제라는 것이다. 즉 하나님이 알아서 하는데, 그런데 목사가 “왜 내가 시키는 대로 안 했지? 라고 한다면, 그것은 말도 안 된다는 것이다.

◈ 이것이 바로 ‘헌신’ !!

그러니 우리아의 이러한 자세는 정말이지 우리가 본받을 만한데, 그것이 바로 ‘헌신’ 이라는 말이다. 이렇게 살펴보니, 다윗은 오히려 여호와 전쟁을 방해한 인물이 되고, 우리아는 그 전쟁에 동참한 셈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이제 교재 196페이지를 보자.

** 이스라엘에서 범죄는 우리아의 죽음에서 그 주체가 밝혀진다(시51:8, 시34:2). 다윗의 범죄에도 불구하고 다윗이 계속 왕으로 존속되고 언약이 유지되는 것은 바로 우리아와 같은 의인이 이스라엘의 죄악을 대표하는 왕, 즉 죄인에 의해서 죽었기 때문이고, 그 우리아의 아내로부터 하나님의 사랑이(여디디아) 새롭게 창조, 혹은 회복된 것으로 확인될 수 있는 것이다.

(시 51:5)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시 51:6) 중심에 진실함을 주께서 원하시오니 내 속에 지혜를 알게 하시리이다
(시 51:7)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를 씻기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시 51:8) 나로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듣게 하사 주께서 꺾으신 뼈로 즐거워하게 하소서

◈ 그런데, 왜 다윗의 왕 지위는 박탈되지 않는가?

그러니 소위 이스라엘의 왕이라는 작자가 우리아를 죽였다는 말인데, 그러니 다윗은 이스라엘이 안고 있는 죄의 대표자가 된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아는 그런 죄로 인해서 희생을 당하는 대표자가 되고 말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여기에서 우리가 궁금한 것은, 다윗이 이렇게 엉망인데, “그런데 왜 다윗의 왕 지위는 박탈되지 않는가?” 라는 점이라는 말이다. 

그것은 바로 그런 과정을 통해서 자기가 그야말로 죄인임을 깨닫게 되는데, 그런 자가 바로 하나님의 왕 되심을 보여주는 아주 적합한 자라는 말이다. 즉 “저는 죄인입니다” 라고 하는 자만큼 더 적당한 예수의 증인은 없다는 것이다. 이 땅에서 말이다. 그래서 우리아의 아내에게서 나온 자식이 ‘여디디아’ 인데, 그가 다윗 다음의 왕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마태복음 1장의 족보가 정리된다는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즉 마태복음 1장 6절에서, 솔로몬을 ‘다윗의 아내에게서’ 라고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아의 아내에게서’ 라고 출생했다고 묘사하고 있다. 솔로몬을 다윗의 아들로 보지 않고, 우리아의 아들로 보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14대-15대-14대’로 전개된 족보의 대수가 ‘14대-14대’로 조정된다.

무슨 의미인지 알겠지요? 계속 교재를 보자.

** 이로써 다윗은 국내 분쟁의 와중 속에서도 이스라엘에 대한 진정한 언약정신을 구현하고자 했던 것이고, 모든 변란과 반란을 이 정신이 보여주는 하나님의 섭리로 간주한 것이다. 잃어버렸던 자를 의인의 죽음을 대가로 하여 다시 찾아 나서시는 그 언약적 속성이 그 소용돌이 속에서도 피어나고 있음을 다윗은 증명해보고 싶었다. 이스라엘 민족의 진정한 사명은 이 약속의 땅에서 하나님의 언약을 성취하는 것이다.

교재 197페이지에 보면 중요한 것이 나오는데, 한번 살펴보자.

** 왕과 기업, 이 두 가지의 요소가 다 이스라엘에서 존속이 되어야 한다. 기업이란, 하나님의 고유한 것이기에 그 누구의 소유도 될 수 없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기업이기에 왕은 이러한 하나님의 입장을 지탱하는 임무를 떠맡게 된다. 그것은 다윗언약으로 인해서 굳혀진 상황이다. 따라서 다윗가문에 의한 왕 등극을 의미하거나 인정하지 않는 자도 용서받지 못한다. 베냐민 사람 세바의 반란은 이로써 정당성을 얻을 수 없다.

◈ 왜 세바의 반란은 용서되지 않는가?

여기서 베냐민 사람인 세바의 반란이 왜 용서가 되지 않는가? 그 반란이 사무엘하 20장에 보면 나오는데, 이 다윗언약은 이미 유다지파의 우월권을 하나님이 인정해주는 입장인데, 그러니 다른 지파는 유다지파의 명령계통을 따라야만 한다는 것이다. 결코 이러한 하나님의 언약을 뒤로 다시 돌릴 수는 없으니 말이다.

(삼하 20:1) 마침 거기 난류 하나가 있으니 베냐민 사람 비그리의 아들 세바라 하는 자라 저가 나팔을 불며 가로되 우리는 다윗과 함께할 분의가 없으며 이새의 아들과 함께할 업이 없도다 이스라엘아 각각 장막으로 돌아가라 하매
(삼하 20:2) 이에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윗 좇기를 그치고 올라가 비그리의 아들 세바를 좇으나 유다 사람들은 왕에게 합하여 요단에서 예루살렘까지 좇으니라

이것은 왕에게 죄를 씻어주는 제사장의 권한이 결합이 되어있음을 보여주는데, 즉 ‘왕=제사장’ 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다른 지파들이 유다지파와 그냥 막 먹으려고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물론 오늘날에는 제사장은 예수님밖에 없기 때문에, 즉 목사들은 아니라는 말이다.

◈ 이미 다윗언약에 의해서 확정된 사항들 !!

사람들이 그렇게 저를 욕을 해도 제가 담대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이 ‘십자가’ 라는 것이 제사장을 보여주는 것인데, 즉 제사장의 용서가 없이는 구원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도 아니고 하나님도 아니고 삼위일체도 아니고, 오로지 예수님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십자가뿐이라는 것을 자신 있기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다윗언약에 의해서 이미 확정된 것이니, 전혀 변동될 사항이 아니라는 말이다.

우리가 목회를 하면서 실망이 되고 좌절이 될 때가 많이 있는데, 다음과 같이 말이다. “왜 사람들이 이 복음을 이해하지 못할까? 혹시 내가 이렇게 예수님만을 강조하는 것이 나의 독선은 아닌가? 내가 사람들을 설득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아서 사람들이 기분 나빠서 믿지 않는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을 얼마든지 할 수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지금 돌아가는 상황을 한번 바라보라는 것이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지를 말이다. 이근호의 말을 듣지 않는 것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데, 이근호의 말을 듣든지 말든지 간에 이미 다 확정이 되었다는 말이다. 그러니 그것이 중요한 것이지, 누구의 말을 누가 듣고 안 듣고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 왜 인간은 ‘자기’ 문제를 중요하게 여기는가?

그렇게 전혀 중요한 문제가 아닌데, 그런데 정작 자기는 그것을 중요하게 여긴다는 자체가 바로 자기 자신에게 문제가 있음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지 알겠지요? 남들에게는 “곰은 재주가 부리고, 돈을 다른 놈이 번다” 라고 하면서 욕을 해놓고는, 그런데 왜 자기 말을 믿어주지 않느냐고 하면서 짜증을 내는데, 그러나 자기 말을 믿어주지 않는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큰 문제가 되느냐는 것이다. 전혀 아무 것도 아닌데, 모든 것이 십자가로 이미 확정이 되었는데 말이다.

◈ 오잉, 엉뚱한 다윗과 엉뚱한 유다가문을 ??

우리가 이러한 것을 알고 있어야만, 그래도 다윗언약에 대해서 조금은 안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다윗언약이라는 것은, 전혀 엉뚱한 다윗을 뽑아놓고, 또 엉뚱한 유다가문을 뽑아놓고, 그러한 것을 중심으로 온갖 이야기들이 난무하면서, 그런 모든 작당들이 전부가 다 일방적으로 다윗을 지목했고 왕이 되게 했다는 그 다윗언약을 무효화시키려고 한다는 것이다. 심지어 다윗 본인도 그렇고 말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뭐라고 하는가? “다윗, 이리와 봐. 어디서 우리야를 죽인 이런 나쁜 놈이 우리 왕이 되려고 하는가? 저리 가” 라고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런 일들이 벌어지는 판국이 되어도 결국은 아무 흔들림이나 변동이 없이 꾸준하게 이어져오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내가 다윗을 왕으로 찍었다. 왜?” 라는 것인데, 즉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다윗 본인이 왕에서 쫓겨나도 아무런 할 말이 없을 정도로 극단적인 죄를 지었다고 할지라도, 그 하나님의 선택에는 전혀 지장을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런 것에는 콧방귀도 끼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런 바람에는 창호지도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다윗이 죄를 지었다고? 그래, 알았어” 라고 하면서 끝내버린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선택’ 이라고 하는 하늘나라의 규정, 즉 변하지 않는 법칙이라는 말이다.

사람들은 이것을 모르는데, 물론 우리교회의 장로님은 예배시간마다 선택을 강조하는데, 그런 선택의 두께가 점점 더 두꺼워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선택을 흔들 놈은 전혀 없는데, 우리가 나쁜 짓을 한다고 그 선택이 흔들리는가? 천만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치명적인 범죄를 저지른 다윗에게도 흔들리지 않는다는 말이다.

◈ 선택의 두께가 점점 더 두꺼워져야 !!

오히려 그러한 것을 통해서, 즉 “다윗, 당신도 인간이야? 당신 아들이 자기 누이동생을 간음해도 잔소리도 하지 않아” 라고, 사람들이 백날 그렇게 이야기해도, 하나님께서 “내가 선택을 했어” 라고 하면, 그것으로 그냥 끝이라는 말이다. 그 누구라도 끽 소리도 못한다는 것이다. 

요한복음 6장 39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라고 했는데, 지금도 예수님께서는 그런 취지에서 우리를 떠나지 않고 인도하고 계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주님은 우리를 어떻게 인도하신다는 말인가? 우리의 간구와 우리의 기도를 전혀 들어주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때려부수는 망치소리를 내면서 저벅 저벅 우리 쪽으로 더욱 더 가까이 걸어오신다는 것이다. (고장난 로보캅인가?)

(요 6:38)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요 6: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이제 하나만 더 하고 마치겠는데, 교재 198페이지를 보자.

** 솔로몬이 차기 왕으로 등극함으로 비(非)우리아적인 존재들은 하나 둘씩 그의 면전에서 사라져야 한다. 다윗에게 대들어 반란을 일으켰던 압살롬의 정신을 재현하는 인물이 솔로몬에게 반기를 든다. 요압과 아비아달 제사장과 그리고 새로운 왕으로 등극되고자 하는 아들은 다윗의 넷째 아들 아도니야이다. 맏아들 암논은 이미 죽었기 때문이다(삼하13:39, 3:4).

(삼하 3:4) 네째는 아도니야라 학깃의 아들이요 다섯째는 스바댜라 아비달의 아들이요
(삼하 3:5) 여섯째는 이드르암이라 다윗의 아내 에글라의 소생이니 이는 다윗이 헤브론에서 낳은 자들이더라 …
(삼하 13:39) 다윗 왕의 마음이 압살롬에게 향하여 간절하니 암논은 이미 죽었으므로 왕이 위로를 받았음이더라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이 세 사람은 모두 다윗언약에 대들은 다윗의 죄악된 뿌리들이다. 특히 다윗과 늘 함께 하면서 지금까지 다윗 집안에서 일어난 일련의 사태를 지켜본 아비아달 제사장은, 솔로몬에 담긴 다윗언약의 선택적 은혜성을 보지 못하고 아도니야 편에 붙어서 다윗 왕의 곁을 떠난다.

(왕상 1:7) 아도니야가 스루야의 아들 요압과 제사장 아비아달과 모의하니 저희가 좇아 도우나
(왕상 1:8) 제사장 사독과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와 선지자 나단과 시므이와 레이와 다윗에게 속한 용사들은 아도니야와 같이 하지 아니하였더라

◈ 아도니야, 요압, 아비아달 !!

여기 나오는 제사장 아비아달은 이전에 다윗이 사울을 피해서 도망을 다닐 때 다윗을 도와준 사람의 아들인데, 그러니 원래 여기에 나오는 사람들은 모두 다윗의 협조자였다는 것이다. 물론 넷째 아들인 아도니야는 빼고 말이다(?). 이 아도니야는 어떤 인물인고 하니, 아버지 다윗이 보기에도 참으로 모범적인 아들인데, 전혀 문제도 일으키지 않고 말이다.

그런데 제가 조금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이 다윗언약은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다윗을 선택한 것인데, 그렇다고 하면 다윗이 죽고 난 다음에는 하나님께서 누구를 선택하게 되는가? 그러니 그 이야기가 또 그 이야기인데(?), 즉 비(非)우리아가 아닌 우리아 계통에서 나온 사람이 하나님의 선택 속에 들어간다는 말이다.

◈ 솔로몬은, 우리아와 다윗가문을 통과하면서 !!

이 부분이 오늘 강의에서 제일로 어려운 대목인데, 다윗은 살아있으니 실선으로 보고, 죽은 우리아는 점선으로 볼 수 있는데, 그러나 사실은 그렇게 보면 안 된다는 것이다. 오히려 다윗은 죽고 우리아는 살아있는 것으로 봐야 한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아는 이미 죽었지만 실선이고, 다윗은 아직 뭔가가 뭔지 정리가 되지 않은 상태로 본다고 하면, 우리아에게서 나온 바세바의 자식인 솔로몬이 비우리야와 혼합이 된 다윗가문 전체를 통과해서 마지막으로 이스라엘의 차기 왕이 된다는 것이다. 조금 어렵지요? (많이 어려워요. ㅋㅋ)

그렇다면 어느 것이 실제 권력인가? 죽은 우리아가 바로 실세라는 것이다. 솔로몬에게 있어서 말이다. 우리가 보기에는 하나님께서는 다윗언약에 있어서 다윗을 선택한 것 같은데, 그런데 실제로는 다윗이 아니라 우리아를 선택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우리아가 바로 예수님인데, 물론 그 당시의 예수님이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우리아는 다윗의 죄 때문에 죽었으니 말이다.

이것은 나중에 유다가문이 남쪽 유대나라가 되는데, 그래서 그들을 유대인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 유대인들 속에서 다윗을 비난하고 배반하는 것,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희생을 당하고 배반을 당하는 논리로서 계속해서 이어져 나온다는 말이다.  

◈ 우리아는 의인으로 죽고, 다윗은 죄인으로 살도록 !!

솔로몬 때에 와서 우리아의 이런 원칙은, 하나님께서 다윗언약의 구성부로서 우리아와 다윗을 같이 둘이 그렇게 붙여서 우리아는 죽게 하고 다윗은 살게 한다는 것이다. 즉 우리아는 의인으로서 죽고 다윗은 죄인으로 살게 한다는 말이다.

바로 그런 두 가지 요소가 결합된 것이 다윗언약이라고 한다면, 즉 우리아는 의인으로서 죽고 다윗은 죄인으로 살게 한다는 것이 말이다. 그렇다고 하면, 이스라엘의 그 다음 차기 왕을 세울 때도 여전히 그러한 원칙이 그대로 적용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요압과 아비아달과 아도니야는 그런 원칙을 전혀 모르고 있었는데, 모른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들이 하는 말이 “실세가 다윗이고, 그런 다윗에 우리가 충성했는데, 그러니 다윗에 도움이 되었잖아” 라고 한다는 것이다. 물론 말은 맞는데, 그러나 다윗언약에 있어서 그 주인공은 다윗이 아니라 ‘우리아’ 라는 말이다. 다윗언약을 공부하면서 이런 점을 놓치면 안 된다는 것이다.

◈ 당회장은 당연히 부교역자에게 !!

예를 들어서, 우리교회에 ‘김대식’ 이라는 부교역자가 왔는데, 그분이 설교하는 것이 당회장보다도 더 복음적이고 낫다는 것이다. 그런데 교인들은 그 사람보다는 당회장을 더 좋아하는데, 왜냐하면 그래도 우리교회를 개척한 사람이고 기여를 많이 했다고 여기기 때문에 말이다. 하지만 그것이 바로 요압과 아비아달과 아도니야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이것이 얼마나 비복음적 사고방식인지 모르는데, 물론 회사나 가정생활에서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그 어떤 조직을 가더라도 이런 사고방식이 항상 살아있다는 말이다. “저는 주님을 믿습니다. 주님이 제 인생의 주인입니다” 라고 말은 그렇게 하는데, 하지만 입에만 발려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습관처럼 말은 그렇게 하지만, 그러나 그런 사람을 살펴보면, 자기가 곧 주인이고, 자기가 곧 공로자이고 말이다. 그러니 여전히 자기 행함의 가능성을 붙잡고 놓치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피해자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 아니, 나로 인해서 누가 고통을 당하지?

그러니 성도라고 한다면, 자기의 그런 모습으로 인해서 누가 가슴앓이를 하고 있는지를 한번 살펴야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분이 곧 예수님인데, 그리고 그 주님이 자기 곁에 세워준 참된 종이 고통을 받고 있음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다윗으로 인해서 우리아가 고통을 받고 죽음에 넘겨졌듯이 말이다.

그러니 부교역자가 새로 와서 복음적으로 설교한다면, 당회장은 제 아무리 그 교회에서 개척멤버로 있었다고 하더라도 가볍게(?) 손을 털고 나간다고 하면 정말로 괜찮은 목사라는 것이다. 그런데 교인들은 누구를 좋아하겠는가? 당연히 자기 교회의 당회장을 좋아하고 따르는데, 새로운 신참이 아니고 말이다. 물론 일부 야당기질을 가진 사람은 그렇지 않겠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튼 당회장이 “이제 당신이 당회장을 하세요. 제가 부교역자로서 도와드리겠습니다” 라고 한다면, 그렇게 자리를 서로 바꾸자고 한다면 그야말로 꿈같은 이야기인데 말이다. 설령 목사가 그렇게 해도 교인들이 가만히 있지 않는다는 것이다.

◈ 아하, 다윗이 바로 내 모습이구나 !!

그러니 우리가 이렇게 다윗언약을 공부하면서, 비록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아의 모습을 제대로 안다고 하더라도, 우리에게 여전히 비(非)우리아적인 요소가 들어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아가 아닌 다윗의 본질을 가지고 있음을 말이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다시 한번 다윗언약을 생각해보았습니다. 다윗이란 인물은 허상에 불과하고, 하나님의 뜻은 다른 곳에 있음을 알았습니다. 우리가 살아있기에 자기 중심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는 이 죄를 불쌍히 여겨주시고, 우리 주위에 누가 복음적인지를 항상 기억하면서, 우리 자신을 살피는 저희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09,04,18 오후 10시에 마침.

                                                                아니, 다윗언약에 이런 비밀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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