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약관련

다윗언약2(2004.5.31 대구강의)

아빠와 함께 2015. 4. 23. 18:05

대구040531교회를넘어서2다윗언약2

[04 대구강의 4] - 교회를 넘어서 2 - 다윗언약 2
                                                                                
                                                           04,05,31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잠시 다윗언약을 리바이벌 !!

오늘은 교재 ‘교회를 넘어서’ 200페이지부터 하겠는데, 먼저 지난 시간에 한 것을 잠시 정리해면, 지난 시간에 다윗언약에 대해서 살펴보았는데, 다윗언약에 있어서 다윗은 별 볼이 없고, 오히려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결코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이 들어있을 때, 그것이 바로 다윗언약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이름은 다윗언약인데, 그런데 다윗이 그 언약을 성취하는데 있어서 하등 도움을 준 적이 없었다는 것을 들추어내는 방식으로 다윗언약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니 다윗이 주인공이라는 차원에서 다윗언약이 전혀 아니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 다윗언약이 다윗시대에서 끝이 나는가? 그것이 아니라, 다윗언약은 다윗에게 적용하기 위함이 아니라, 오히려 그 뒤에 나오는 많은 왕들과 후손들과 오늘날 우리들에게 동일하게 적용하기 위해서 다윗언약이 산출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을 그림으로 그려보면, 여기 다윗언약이 등장했다는 것은 다윗 개인을 구원하기 위해서 다윗을 죄인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이 다윗언약은 비록 다윗의 죄를 통해서, 그것을 재료로 삼아서 언약을 만들기는 했지만, 하지만 이 언약은 오고 오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그리고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공히 같이 적용이 된다는 것이다. 

◈ 마치 선악과 사건처럼 !!

마치 무엇과 같은고 하니, 우리가 선악과를 따먹은 기억이 전혀 없는데, 우리는 사실 구경도 못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아담이 따먹음으로 말미암아서 선악과와 아담 사이의 관계가 전혀 선악과를 구경도 못한 우리들에게도 공히 그 영향력이 주어졌다는 것이다. 그것이 선악과의 파워라는 말이다.

이런 점이 어려운데, 아마 분명히 여기에 대해서 따지는 사람들도 있을 것인데, “하나님, 우리는 선악과를 구경도 하지 못했는데 왜 먹었다고 하십니까?” 라고 말이다. 즉 “선악과를 먹기는커녕 구경조차도 못한 우리들에게, 왜 선악과의 결과가 해당되도록 하십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너무 오버하시는 것이 아닙니까?” 라고 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법이라는 것은, 그때 그 당시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오고 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동일하게 해당이 된다고 하는데, 도대체 그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장(場)’ 개념인데, 즉 영역개념이라는 말이다. 물론 인간은 주체의식이 있어서 자기 죄밖에 모르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이 세상을 ‘층’으로, ‘장’으로 보신다는 것이다. ‘필드’로 말이다. 더 쉽게 말하면, 어떤 하나의 공간으로 본다는 것이다.

◈ 어떤 장(場), 필드, 영역 속에 !!

예를 들어서, 여기 이렇게 점이 있다면, 우리는 그냥 점으로 보지만 하나님은 이 점 속에 엄청난 큰 세계가 있는데, 그것이 드디어 확대되어 나간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쪽 점에서도, 그런 엄청난 세계가 있어서 확대될 것을 예상하고서 실시한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여기에 이렇게 풍선이 있다면, 거기에 바람을 넣으면 점점 더 크게 부풀어오른다는 말이다. 이와 같이 ‘선악과’ 라는 것이 단순히 하나님과 아담의 사적인 문제가 아니라 선악과 자체는 어떤 장(場)을 노리고, 즉 영역과 공간에 성격과 본질을 겨냥해서 심어놓은 나무라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아담을 입구로 해서 그렇게 불어넣은 고무풍선에 들어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다윗언약도 역시 마찬가지인데, 하나님께서 비록 다윗을 통해서 언약을 만들기는 했지만, 그러나 그 적용이 다윗을 전혀 구경도 하지 못한 우리에게도 공히 똑같이 그대로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다윗언약이 결코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말이다.

◈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

마태복음 9장에서 소경 2명이 예수님을 따라오면서 뭐라고 했는가?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고 했는데, 이것을 다른 말로 하자면, “다윗언약에 의하면 오시기로 되어있는 그 고마운 메시야여,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시면 우리는 구원이 되겠습니다” 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믿음이고 말이다.

(마 9:27)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가실새 두 소경이 따라 오며 소리 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더니
(마 9:28) 예수께서 집에 들어가시매 소경들이 나아오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대답하되 주여 그러하오이다 하니

하지만 오늘날 현대인들은 누구를 애타게 찾지 않는데, 그것은 “나는 잘났다” 라는 의미이기도 한데, 그러니 인간은 매일같이 ‘자립심 타령’ 이라는 것이다. “하나님, 제가 훌륭하지요?” 혹은 “제가 너무 못났지요?” 라고 하면서, 그렇게 자기를 개별적으로 따져서 출발하려고 하는데, 하지만 그러한 것은 전혀 신앙이 아니라는 말이다.

하나님의 그 어떤 약속에 자기에게 저촉이 되고 적용이 되는지, 오늘날 현대인들은 그것을 먼저 감을 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다르게 표현하면 “우리는 어떤 필드에 놓여있는가?” 라는 것인데, 즉 어떤 영역 안에, 공간 안에 놓여있느냐는 말이다.

그것을 염두에 두어야 하는데, 그런데 자기의 개인적인 윤리와 도덕을 내세워서 “제가 이렇게 착한데, 어떻게 복을 줄 겁니까? 말 겁니까?” 라고 하고, 또한 “제가 이렇게 나쁜 놈인데, 저주를 줄 겁니까? 말 겁니까?” 라고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것은 전혀 신앙이 아니라 일종의 자기 행함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 다윗언약이 우리에게 어떻게 적용됩니까?

방금 제가 이야기한 것 중에서 조금 더 살펴보아야 하는 것은, 다윗언약이 우리에게 적용이 된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그 언약의 어떤 부분이 우리에게 적용이 되는지, 그것이 제일 궁금한 점이 아니냐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선악과가 어떻게 적용이 됩니까?” 라고 질문했을 때, 그 답변 속에 다윗언약에 관한 답변도 들어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선악과가 우리에게 어떻게 적용이 되었는가? 선과 악을 아는 지식으로 우리에게 드러나게 되었는데, 그러니 우리가 선악과를 따먹고 어떤 영역 속에 있게 되는고 하니, 우리는 선과 악의 투쟁 속에 놓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즉 “이것이 선인가? 악인가?” 라고 하는 말이다.

◈ 먼저 노아언약을 살펴보면 !!

우리가 노아언약 속에 놓여있다는 의미는, 그것은 무지개 약속 속에 놓여있다는 것이고, 또한 무지개 약속 속에 놓여있다는 것은, 우리가 그 어떤 짓을 하더라도 다시는 이 세상을 물로서 심판하지 않겠다는 무지개 은총 속에 놓여있다는 의미라는 것이다.

인간이 아무리 나쁜 짓을 하고 연쇄살인을 하더라도 봄, 여름, 가을, 겨울의 4계절은 뚜렷하게 오고, 또한 악인과 선인에게도 동일하게 햇빛을 주시고 공기를 주시는 은총 속에, 즉 그런 영역 속에 놓여있는 것이 바로 노아언약이라는 것이다. 복음을 믿던 말던 간에, 복음을 믿는 사람을 핍박하는 사람이라고 해도 그렇게 은총을 베풀어주신다는 말이다.

교회 유리창을 깨던, 예배당 안에 오줌을 싸던, 교회 화장실에다 목사 욕을 하던 간에, 아무튼 하나님께서 주시는 신선한 햇빛과 공기와 비를 받아서 숨을 쉬고, 또한 농사를 지으면서 먹고 살아간다는 것이다. 즉 그 어떤 사람이라도 노아언약의 적용을 받아서 혜택을 입으면서 살아가게 된다는 말이다.

◈ 언약은, 하나님의 은혜성을 !!

그런데 이 선악과와 노아언약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먼저 노아언약이라는 것은 아무리 악한 놈이라고 다같은 은총을 받는다는 것이다. 이 노아언약이 여러 언약들 중에서 첫째 언약인데, 이런 언약이 드디어 등장했다고 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은혜성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 선악과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은혜성이 아니라 인간의 죽음과 저주와 심판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니가 선악과를 따먹었으니 그만 흙으로 돌아가라” 라고 말이다. 그러니 그야말로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이고 징벌이란 말이다. 즉 선과 악을 알게 된 그 순간부터 인간은 에덴동산에서 추방이 되었고, 또한 이 세상도 저주를 받았다는 말이다.

하지만 인간이 그렇게 저주를 받은 상태에서도, 드디어 ‘언약’ 이라는 이름으로 은총을 베풀고자하는 하나님의 징조가 희미하게 나마 조금씩 드러나고 피어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은 은혜를 줄 자에게 은혜를 주시는 분이다” 라고 하는 것이 말이다. 
 
◈ 다윗언약도 노아언약처럼 은혜성을 !!

지금 제가 다윗언약을 설명하려고 이러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그런데 이 다윗언약은 ‘다윗’ 뒤에 ‘언약’이 붙어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다윗언약도 노아언약과 마찬가지로, 이 세상을 심판을 하고 작살을 내는 것보다도, 은혜를 줄 자에게 은혜를 주겠다고 하는, 그러한 하나님의 취지가 담겨있다고 보면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언약이 인간에게 은혜를 베풀고 구원하기 위한 조치라고 했을 때, 그런 근거가 어디 있는가? 이 언약에 관여하신 하나님이 계시는데, 그분이 곧 ‘여호와’ 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여호와’ 라는 분을 모세가 만나보니, 그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은혜를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을 베풀 자에게 긍휼을 베푼다“ 라는 것이다.

◈ 모세언약의 특징은?

모세는 그런 하나님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만났는데, 따라서 모세를 통해서 언약을 주셨는데, 그것이 바로 ‘모세언약’ 이라는 말이다. 이러한 모세언약의 목적이 무엇인고 하니, 하나님은 ‘이스라엘’ 이라는 나라를 만들기에 나서시는데, 그러니 모세언약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거룩한 백성이 되는 것인데, 인간의 행함이 아니고 말이다.

다시 말해서, 오직 은혜로서만 이 땅에서 거룩한 백성이 등장하도록 하기 위한 기초로서 모세언약이 주어진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이 주신 은혜로만 거룩한 나라가 덜커덕 등장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모세언약의 특징이라는 말이다.

◈ 노아언약과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노아언약과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노아언약은 그야말로 개나 소나 모두가 다 혜택을 받는 언약인데, 심지어 가롯유다도 말이다. 뱀의 새끼이든 악마의 새끼이든 상관없이 하나님은 은총을 베풀어주신다는 것을 보여주는데, 그런데 모세언약에 가면 그렇게 넓은 범위의 은총이 국가단위로 좁혀지면서 하나의 거룩한 나라를 만들어내는데, 그런 힘은 바로 모세언약에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모세언약은 누가 지키는가? 물론 이것은 주님이 지키는데, 모세율법이라고 해서 인간들이 지키는 것이 전혀 아니라는 말이다. 모세언약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이 완성하는 것이지, 결단코 우리 인간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이 스스로 지킨다 !!

지금 기존 교인들이 이것을 모르는데, 즉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스스로 알아서 지킨다” 라는 사실을 말이다. 이것을 전혀 믿지 않는데, 물론 믿음이 없으니까 믿지를 않지만 말이다. 자기 쪽에서 그 말씀을 지키는 경우에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그렇게 자기 스스로를 구원의 미완성자로 만들어버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의 노력여하에 따라서, 열심히 하면 구원에 가까이 갔다가 농땡이를 부리면 구원과 멀어졌다가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밀었다가 당겼다가 하는데, 가까이 가면 축복이고 멀어지면 저주이고 말이다. 그러니 하나님이 어떤 분이고 하니, “여기 있다. 지켜라” 라고 말씀을 던져놓고는 나 몰라라 하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나중에 와서는 “너희들, 잘 지켰냐?” 라고 하면서 시험이나 치는 하나님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 가능성을 지닌 종교를 끊임없이 만드는 인간들 !!

그렇다면 왜 이런 하나님이 등장하게 되는가? 그것은 바로 모세언약에서 그런 하나님의 은혜를 입지 못했기 때문인데, 그러니 남는 것은 선악체계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선과 악이 남았으니, 이것을 가지고 주물럭거리면서 시작해보는데, 즉 “선은 가까이 하고 악은 멀리하고” 라는 말이다.

그렇게 선은 키우고 악은 멀리해서 하나님께 가까이 가겠다고 하는, 그야말로 아벨이 아닌 가인적인 사고방식이 무엇을 어떻게 했는가? 자기 속에서 자기 나름대로 자기가 할 수 있다고 하는 가능성을 지닌 종교를, 그렇게 선악적인 사고방식의 인간들이 만들어내었다는 것이다.

노아언약에 의해서 하나님으로부터 그렇게 은혜를 받으면서도 그 마음가짐이 이렇게 선악적인 사고방식에 빠져 있는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군대인 이스라엘과 한바탕 붙어야 될 함 족속 계열에 속한 인간들의 모습이고, 가나안 족속과 애굽족속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에스겔, 예레미야, 이사야 등에 가면 끝까지 싸우는데, 이사야의 경우에 앞부분은 유다나라의 패역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중간부분에 가면 각 나라 하나하나씩을 조목조목 들어서 언제 언제 망하는지 이야기하는데, 즉 “너희들은 이때 이렇게, 저렇게 해서 망한다” 라는 식으로 말이다. 그렇게 언약대로 망하는데, 즉 여호와 하나님은 용사이니, 그 앞에서 거꾸러진다는 것이다. 

◈ 하나님이 자기 맹세를 스스로 홀로 이루심으로 !!

이것이 바로 무엇인고 하니, 선악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이 세계에서 진짜 모세언약대로 자기 나라를 만들기 위한 하나님 자신의 열심이라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자신의 맹세를 스스로 이루어 나가시는 그 행적, 혹은 행로의 그 과정들이 펼쳐진 곳이 바로 지금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구약성경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구약성경은 하나님의 자기 맹세를 스스로 홀로 이루어 가시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이 구약이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신약, 즉 새 언약은 무엇인고 하니까, “다 이루었다” 라는 것이고 말이다. 이렇게 되면 신구약을 떼었다고 할 수 있는데, 즉 하나님의 손에서 모두 완성시켰다는 것이다. 즉 구약은 모세언약대로 끌고 가고, 또한 신약은 새 언약대로 끌고 가서 완성을 시킨다는 말이다.

이렇게 모세언약은 새 언약에서 완성된다는 것은 로벗슨의 ‘계약신학과 그리스도’ 라는 책에 잘 나와있는데, 그러한 점에 대해서는 이 책이 괜찮다는 것이다. 많은 신학교에서 이 책을 교과서로 사용하고 있다고 하는데 말이다. 물론 다른 부분은 엉망이지만 말이다. 

◈ 언약공부를 왜 해야 하는가?

그렇다면 우리가 이러한 언약공부를 왜 해야 하는가? 그것은 바로 지금 사람들이 선악에 얽매여서, 다른 말로 하면 율법에 얽매인 것인데, 어떤 법 조항이나 규범에 말이다. 인간은 자꾸만 선악체제에 의해서 규범을 만들고, 그런 자기가 만든 규범에 스스로 얽매여서 자기가 자기를 심판한다는 것이다. 즉 “나는 이것은 지키는데, 저것은 못 지킨다” 라는 식으로 말이다.

그렇게 인간은 죽기가 무서워서 일평생을 악마에게 매이고 율법에 얽매이게 되는데, 그러한 실체에 대해서 언약을 아는 사람들이 왕창 뒤집어놓을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가 있고 그저 주시는 선물이 있는데, 왜 굳이 자기가 나서서 관리하고 조절하고 절제하려고 하느냐는 것이다. 즉 자기의 힘으로 자기를 구원하려고, 그렇게 헛된 짓을 하느냐는 말이다.

◈ 이놈들아, 자빠져라 !!
 
어제 낮에 이런 설교를 했는데, 예수님이 이 땅에서 하신 것은 인간들에게는 일종의 스캔들인데, 즉 인간들을 넘어지게 하는 일을 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이다. 로마서 9장에서는 이것을 두고 ‘걸림돌’ 이라고 하는데, 소위 자기가 잘났다고 하는 의인들을 전부가 다 예수님 앞에 걸려서 꼬꾸라지게 한다는 말이다.

(롬 9:33) 기록된바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이것을 돌뿌리에 걸려서 넘어진다는 의미도 되지만, 다른 성경에 보면, 하늘에서 다른 돌이 내려와서 정통으로 머리를 때리는 방식으로도 기록이 되어있는데, 그런데 저는 이것을 뒤통수를 치는 것으로 보고 싶다는 것이다. “이게, 니가 뭐가 잘났노? 뭐, 성화가 되었다구?” 라고 하면서 뒤통수를 ‘탁’ 하고 친다는 말이다. 그러면 바로 앞으로 자빠진다는 것이다.

◈ 선악의 필드가 아닌, 천국의 영역으로 !!

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뒤통수를 치고 벽돌로 내리찍는고 자빠뜨리는고 하니, 지금 있는 선악자체의 필드, 즉 선악의 영역을 진짜 예수님의 은혜만으로 통일이 되는 천국의 영역으로, 그렇게 제한된 공간만이라도 장(場)을 바꾸기 위해서, 즉 “너는 배운 가락이 선악의 가락이지만, 그러나 그것은 허상이다. 진짜 니가 살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잠실 체육관 속에 놓여있다” 라는 것을 우리에게 새삼스럽게 알려주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은혜 속에는 새로운 규범이 있는데, 예수님은 그것을 ‘새계명’ 이라고 했고, 그것을 두 글자로 ‘사랑’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 사랑의 특징은 행함이 아니라 은혜 받음인데, 즉 그냥 은혜를 누린다는 말이다. 이 사랑은 우리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기에, 이미 있는 사랑을 사랑으로 눈치를 채라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자기가 사랑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있는 사랑 속에 같은 형제들이 놓여있음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 이미 사랑의 영역 속에 있기에 !!

그래서 형제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한데, 왜냐하면 예수님이 자기 목숨을 바쳐서 우리를 사랑했기에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죽어도 그런 사랑의 영역 속에 있는데, 그래서 형제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것이다. 그것이 요한일서 3장 16절의 말씀인데, 이미 사랑의 영역 속에 있다는 말이다.

(요일 3:16)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여러분은 두려운가요? 하지만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다는 것이다. 마치 햇빛과 공기를 그냥 받듯이 그렇게 날아오는 것이 사랑인데, 우리가 햇빛을 받고 공기를 받기 위해서 무슨 노력을 하고 있는가? 우리는 결코 노력하지 않는데, 그냥 주어지는 것이라는 말이다. 이와 같이 사랑도 그저 받았는데, 그것도 결코 끊어지지 않는 사랑을 말이다. 그래서 우리도 형제를 위해서 자기 목숨을 바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목사님, 형제를 위해 목숨을 바치지 않으면 지옥에 갑니까?” 라고 할지도 모르겠는데, 지금 제가 하는 말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는 것이 아니라, 이미 천국에 왔기에 얼마든지 할 수가 있는 문제라는 것이다. 성령의 역사로 그렇게 할 수 있는데, 즉 사랑 안에 있으면 두려움이 없다는 말이다. 이미 심판대를 통과했기 때문에 말이다.

◈ 이미 계산대를 통과했기에 !!

예를 들어서, 우리가 대형마트에 가서 물건을 아무리 카트에 많이 담았다고 해도, 만약에 지갑을 소매치기를 당했다면 그 물건을 그냥 두고 와야 하는데,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로 물건도 필요한 것들을 알뜰하게 제대로 구입하고, 또한 지갑도 도난을 당하지 않았다고 하면, 그래서 지갑을 열어서 계산을 하고 그 계산대를 통과했다고 하면, 그때는 물건값을 치러야한다는 두려움이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계산을 다 했으니 말이다.

바로 그러한 값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이미 다 치렀는데, 우리의 죄 값을 우리를 대신해서 말이다. 그런데 왜 우리가 착한 일을 하든지 무엇을 해서 그 값을 계산하려고 하느냐는 것이다. 사실은 전혀 계산할 돈도 없으면서 말이다. 그러니 말도 안 된다는 것이다.

소경이 예수님에게 뭐라고 했는가? “다윗의 자손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라고 했는데, 아마 다른 사람들 같으면 “니가 무엇을 했다고 주님을 찾는가? 어릴 때부터 십계명을 다 지켰는가? 주제파악도 하지 못하고 말이야” 라고 했을 텐데, 하지만 예수님은 그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은 무엇인가?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서 그냥 낫도록 해주려고 왔다” 라고 말이다. 즉 “그래, 오너라. 내가 눈을 뜨도록 해줄게. 문둥병도 고쳐줄게. 너 같은 사람은 천국에 가지만, 그러나 잘난 사람은 지옥에 간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 예수님은 새 언약을 포기하는 법이 없어 !!

그러니 예수님은 새 언약을 결코 포기하지 못하겠다는 것인데, 즉 새 언약의 효력과 새 언약의 무조건적인 구원하심에 대해서, 예수님 쪽에서 일체 마귀에게 양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양보할 게 따로 있지, 이미 십자가를 지고 다 이루었는데 어떻게 양보를 할 수 있느냐는 말이다. 그래서 교회는 두려움이 없어야 하는데, 3명이 모이든 4명이 모이든 말이다. 왜냐하면, 사랑이 가득한 곳이기에 말이다.

이제 다윗언약에 들어가겠는데, 다시 정리를 해보면, 노아언약은 무엇인고 하니, 하나님께서는 햇빛과 공기를 그냥 주신다고 했는데, 그러므로 4계절이 뚜렷한 것도 역시 은혜라는 말이다. 비록 인간들은 선악체제에 사로잡혀있는 죄인들이지만 말이다.

그리고 모세언약이라는 것도,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은혜로서, 이상하게도 ‘이스라엘’ 이라는 나라 자체가 거룩하다는 것이다. 그들이 잘나서 그런 것이 결코 아닌데, 오히려 그들은 목이 곧은 자들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그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것은 그들의 잘남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이다. 그들의 행함이 아니고 말이다.

그러면 새 언약은 무엇인가? 값없이 주신 은혜로 우리의 죄 값을 다 치렀기 때문에 이제는 영광스런 부활만 남아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사이에 무엇이 끼어있는가? 그것이 바로 다윗언약인데, 그러므로 다윗언약은 거기에 반드시 하나님의 은혜성이 가득가득 들어있다는 것이다. 

◈ 굳이 왜 다윗언약이 필요한가?

여기서 어려운 점이 무엇인고 하니, 노아언약은 그냥 골고루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것이고, 모세언약은 국가를 만드는 것이고, 그리고 새 언약은 피를 흘려서 죄를 다 용서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굳이 왜 다윗언약이란 것이 필요하냐는 것이다. 그런 난해한 질문이 있을 수가 있다는 말이다. 노아언약에서 모세언약으로, 또 새 언약으로 그렇게 붕붕 날아버리면 되는데, 그런데 그 중간에 왜 다윗언약이 필요하냐는 것이다.

성경을 가르치다가보면 학생들이 예리한 질문을 할 수가 있는데, 그때 “아마추어가 어디서 까부노?” 라고 하지 말고 한번 살펴보자는 것이다. 지금 제가 질문하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까, “모세언약에서 새 언약으로 바로 가면 되는데, 굳이 다윗언약이 왜 필요한가?” 라는 것인데, 즉 “다윗언약이 반드시 왜 있어야만 하는가?” 라는 말이다.

◈ 모세언약은 결과물은 있지만, 실체가 없어 !!

그런데 우리가 모세언약을 살펴보면, 이러한 것이 구속사의 어려운 점인데, 이 모세언약은 ‘이스라엘’ 이라는 결과물이 있다는 것이다. 즉 “누가 왕이며, 이러한 죄악된 놈들이 어떻게 거룩한 백성이 되었는가?” 라는 것인데, 그런데 그 중간에 누가 희생을 했는지, 그런 실체가 없다는 것이다. 실체는 없고 다만 모형만 있는데, 즉 “양을 잡고, 염소를 잡고, 소를 잡으면, 그렇게 하면 그 피로 거룩한 나라가 되어서 다른 나라를 이긴다” 라고 말이다.

그러니 모세언약에서는 무엇이 빠져있는고 하니, 모세언약에 속해있는 사람은 “아이쿠, 고맙기는 참 고마운데, 은혜로서 거룩한 나라가 되니 여리고 성도 도니까 그냥 무너지고, 요단강도 그냥 갈라지고, 참 대단하다. 그런데 우리 쪽에서 도대체 누가 잘나서 이렇게 거룩한 나라가 되었지? 알다시피 니나 나나 다 죄인인데, 그런데 누구 덕분에 이렇게 된 거야?” 라고 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야, 이것은 여기 제물로 드린 양 덕분이야. 그래 맞아. 염소 덕분이야. 그렇지. 소 덕분이야” 라고 이야기하는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자기들이 키우던 가축에 불과하니 말이다. 즉 모형이라는 것이다.

◈ 뭔가 대신 희생을 해야만 !!

제사 제물이 어떻게 되는고 하니, 국가와 제사장을 위해서는 최상 등급인 소, 장로들과 방백들을 위해서는 염소, 그리고 민중들을 위해서는 양, 그것도 없는 서민들을 위해서는 새나 곱게 빻은 곡물, 그렇게 등급이 매겨져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제사를 드리니 죄가 사라지는데, 그렇다고 해서 곡물이 죄를 없앴다고 하면 그것은 말이 안 되고, 뭔가 대신 희생을 해야 되는 그 어떤 분이 오셔서 죄를 없애주셨다는 것이다.

이것이 제일 중요한 부분인데, 제가 지금 이야기하는 취지를 여러분이 잘 알아야 하는데, 선악과 문제, 노아언약, 모세언약의 이 모든 것은 다 개별적인 문제인데, 즉 하나님은 여기 계시고 자기는 여기에 있어서, 하나님이 자기에게 혜택을 주는 말이다. 그러니 개별자에게 혜택을 주는데, 자기가 누구에게 소속될 필요는 없다는 말이다.

◈ 다윗언약의 핵심은 ‘빼앗김’ !!

그것은 모세언약도 마찬가지인데, “어, 양을 잡고 소를 잡으니 우리가 거룩한 백성이 되어서 이방민족들이 우리에게 무너지는구나. 하늘의 태양도 멈추고 난리가 나더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다윗언약을 거치게 되면, 그러한 혜택을 받는 것이 아니라, 아예 우리 것도 빼앗기게 되는데, 우리 대신 희생을 당하신 그분에게 말이다. 오히려 우리가 그분에게 반납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이 다윗언약에서 제일 중요한 것인데, 다윗언약의 핵심은 왕의 등장인데, 이렇게 왕이 등장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물론 민주주의에서는 “노무현 대통령이 머슴이고 국민들이 왕이니, 대통령은 국민들을 위해서 열심히 일을 하고 섬겨라” 라고 하는데, 하지만 성경에는 그런 민주주의 제도가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주시는데, 그 은혜는 무엇을 위한 은혜인고 하니까, 골로새서 1장 16절을 보면 뭐라고 하는가? 모든 만물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서 창조되었는데, 이유가 바로 그분을 위해서 살게 하기 위해서, 그래서 창조가 되었다는 것이다. 모든 만물이 예수님을 위해서 말이다. 

(골 1:16)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그러니 다윗언약 이전까지는 배뿔락하게(?) “하나님, 좀 도와주소. 너무나 부족합니다. 또 이렇게 죄를 지었는데, 어떻게 합니까? 양을 잡으면 됩니끼? 잡겠습니다. 아이쿠, 죄를 용서받았네요. 감사합니다. 역시 하나님은 고마운 분이군요” 라고 하는 식이었는데, 즉 계속해서 하나님의 지시를 따르면 얻어서 챙기고 누리는 방식이었는데, 즉 더욱 더 많은 은혜를 소유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자기는 죽지 않고도 자기 것이 점점 더 늘어나는 쪽의 뉘앙스를 풍긴다는 것이다.

◈ 왕의 소유가 되지 않으면 구원은 없어 !!

그런데 다윗언약을 거치게 되면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 둘씩 모두 빠져나가고 빼앗기면서 결국에는 “우리는 왕의 소유가 되지 않으면 구원이란 없구나” 라는 쪽으로 결론이 난다는 것이다. 그러니 왕의 소유가 되어야만 한다는 말이다. 그렇게 왕의 소유가 된다는 조건하에서 왕의 의로움이 우리의 의로움이 되고, 왕의 나라가 우리의 나라가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4장 7절에 보면,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기존 우리의 것을 버리라는 의미인데, 그런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말이다.

(갈 4:6)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갈 4:7)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

◈ 주님의 소유로 살아가는 틀이 다윗언약에서 !!

그렇게 되니, 죽으나 사나 왕의 소유가 되어서 이제는 자기 것이 없는데, 왜냐하면 자기가 값으로 산 것이 아니니 말이다. 이제부터는 오직 주님의 소유로서 살아가는데, 그러한 모든 틀을 장만하는 것이 바로 이 다윗언약에 의해서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세언약의 시대에는 12지파가 “하나님이여, 도와주소서” 라고 하지만, 그러나 다윗언약의 시대에 들어오면, 그런 모세언약의 사고방식만 가지고 있다가 다윗언약의 사고방식을 모르는 자들은, 결국은 그 나라조차도 다 잃어버리고 포로의 신세가 되어서 뿔뿔이 흩어지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스라엘은 그만 날아가 버린다는 말이다.

그렇게 나리가 그만 없어지면서 사람들의 관심사는 무엇인고 하니, 더 이상 이스라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의 관심사는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바로 “도대체 우리의 오실 왕이 있어야 하는데, 그 왕은 도대체 우리에게 어떤 일을 하셔서 하늘나라의 참된 이스라엘을 만드는가?” 라고 하는 것에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어떤 왕을 고대하고 기다리는 일에 매진하게 되고, 성경의 예언도 그런 방향으로 전개되는데, 그것이 곧 이사야 53장의 경우라는 말이다. 물론 에스겔도 그렇고 말이다. 예언의 말씀이 그런 것들로 가득하다는 것이다. 즉 “우리의 왕이 오신다” 라고 말이다.

◈ 목사님, 선지서가 뭐예요?

누군가가 구약 선지서의 내용을 묻는다고 한다면, “내가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실 그분이 예언대로 성취해서 우리를 자기 백성으로 삼으실 것이다” 라고 대답하면 된다는 말이다. 즉 오실 메시야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바로 ‘선지서’ 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분은 어떠한 분인가? “그분은 다윗언약대로 오시는 분이고, 오셔서 이러 이러한 일을 하실 것이고, 그렇게 되면 우리는 그분의 백성으로 뽑힐 것이고, 그렇게 그 왕을 모시고 살아가는 재미로, 즉 왕을 왕답게 섬기는 재미로 영원무궁히 천국에서 살게 됩니다” 라는 것이다.

그러니 이러한 선지서를 보면서 인간의 행함을 이야기한다면, 선지서의 기본조차도 모르는 짓이라는 말이다. 즉 선지서의 바탕이 되는 다윗언약의 기초조차도 전혀 모르기에 그렇다는 말이다. 다윗언약이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누구를 이야기하고 있는지를 말이다.

◈ 다윗언약에서 왜 다윗이 뽑혀 나오는가?

그렇다면 다윗언약에서 왜 다윗은 뽑혀 나오는가? 다윗은 자칭 왕이고, 또 백성들도 왕이라고 했는데, 물론 하나님도 그를 왕이라고 해서 사무엘을 통해 기름을 붓도록 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도 다윗을 왕이라고 여겼고, 다윗본인도 그렇고, 백성들도 역시 그렇고 말이다. 그래서 다윗이 자기가 왕이라고 여서 자기 부하인 우리아의 아내를 빼앗고 했는데, 하지만 이러한 세 가지가 다 곡해된 모습이라는 것이다. (하나님도 곡해?)

그러니 이 세 가지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나온 것이 아닌데, 그런 다윗의 모습이 보여주는 것은 무엇인가? 실제적인 메시야는, 즉 하나님이 다윗언약의 왕이 된다고 하는 것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그래서 미리 앞서서 인간 다윗을 미리 앞에다 내세웠다는 것이다.

그것이 이사야 9장에 보면 잘 나오는데, 즉 “한 아기가 태어났는데,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이다” 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렇게 태어난 한 아이는 하나님의 열심으로서 그를 다윗의 위에 앉히고, 또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영원토록 보존한다는 것이다.

(사 9: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사 9:7)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자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그러므로 다윗은 미리 와서 폼을 잡는 하나의 껍데기에 불과하고, 진짜 다윗언약의 왕은 장차 오실 하나님, 즉 예수 그리스도가 곧 다윗언약의 왕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행전에 보면, 시편을 다윗이 지은 것이라고 이야기하지 않고, 장차 오실 메시야가 다윗 속에 들어가서, 다윗의 입을 통해서 자기가 장차 온다고 하는 것을 미리 예언한 것, 그것을 두고 시편이라고 한다는 말이다.

◈ 왜 밧세바가 평생 다윗 침상에 있는가?

시편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야기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시편을 잘못 해석한 것인데, 그러니 다윗을 훌륭하다고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다윗은 전혀 훌륭하지 않는데, 그 증거가 바로 솔로몬이란 말이다. 만약에 다윗이 훌륭하다면 솔로몬과 같은 인물이 태어났겠는가? 다윗이 훌륭하지 않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솔로몬이 태어났다는 것이다. 솔로몬의 엄마는 밧세바인데 말이다.

왜냐하면, 이 밧세바는 다윗이 살인자임을 증거하도록 했던 우리아 장군의 아내인데, 그러니 밧세바는 다윗을 살인자로 부각시키기 위해서 옆에 항상 붙어있다는 것이다. 즉 “당신은 내 사랑하는 남편이야” 라고 하면서 붙어있는 것이 아니라, “당신은 내 남편을 죽인 살인자야” 라고 하는 증인으로서 붙어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윗은 빼도 박도 못하고 “예, 저는 살인자가 맞습니다” 라고 하면서 밧세바를 평생 데리고 살아야 했다는 말이다.

◈ 다윗이 아닌, 다윗 같은 분이 !!

하지만 다윗이 그런 태도를 유지하고 살아갈 때 그것이 다윗언약이 되는데, 왜냐하면 다윗이 아니라 장차 오실 그분이 다윗언약의 왕이기에 말이다. 즉 다윗이 왕이 아니라 다윗 같은 분이 왕인데, 왜냐하면 난데없이 승리하고, 또한 모든 것이 승리이니 말이다. 모든 이방민족을 다 쳐부수었다는 것이다. 골리앗과의 전투에서 다윗이 그것을 미리 보여주었는데, 아무리 덩치가 커도 돌 한방에 그냥 날아간다는 것이다.

◈ 이미 세상을 이기었기에 !!

그 당시에는 그 누구도 다윗을 이길 수가 없는데,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는 그 어떤 권세자라고 해도, 천사든지 악마든지 말이다. 그 누구라도 예수님을 이길 수가 없는데, 그래서 요한복음 16장 33절에서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시는가?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요 16: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또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라면 당장에 십자가에서 내릴 수도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자기가 죽는 것이 택한 백성을 위해서, 승리를 위해서 기꺼이 잠시 죽는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세상을 이긴 예수님의 모습이라는 말이다.

◈ 이 시대의 유일한 현실은?

그러니 이것은 기독교 교리가 아니라 현실성인데, 구닥다리 신화가 아니라는 말이다. 즉 노무현 정권 시대에, 이라크 전쟁이 발발한 이 시대에 진행되어지고 있는 이 시대의 유일한 현실은 무엇인고 하니, 예수님께서 다 승리하셨다는 사실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교인들은 이런 현실감이 없는데, 교회에 나와도 경제가 나아지고 또 대구의 섬유산업이 다시 발전하기를 바라는데, 그런 것을 현실로 바라보지 예수님께서 모든 것을 다 승리하셨다는 것을, 그런 현실을 교인들이라고 해도 인정하지 않고 반납해버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앞으로는 교회당에 반납함을 만들어놓아야 할 판인데, 즉 세상에서 살아갈 때는 예수님을 인정하기 싫다는 것인데, 그러니 받은 은혜도 집으로 갈 때는 다 반납하고 가라는 말이다.

◈ 유치부 연극을 해도 !!

참 기억난 김에 말하겠는데, 최복기 간사님이 주일학교를 한달 동안 사회를 보았으면 좋겠는데, 괜찮겠지요? (설교가 아니고?) 제가 이전에 여름성경학교를 인도하면서, 유치부나 1학년은 말이 통하지를 않는데, 그래서 ‘죄’ 라는 것을 종이에다 글로 써서 만들었는데, 글자공부도 되고 말이다.

죄를 이렇게 글로 쓰고 만들어서 쌓아놓고, 여기에는 십자가를 이렇게 꼽아놓고는, “천국에 갈 사람은 죄를 십자가 쪽에 집어다 넣으세요” 라고 한다는 것이다. 물론 유치한데, 유치부니 유치한 것이 말이 되기는 하지만, 그러나 천국에 가는데 유치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다. 자기 죄를 용서받고 싶은 사람은 이쪽에다 죄를 넣으라고 한다는 것이다.

사실은 이런 것이 어려운데, 알기는 알지만 그것을 쉽게 해서 가르치는 것이 말이다. 그렇게 하려면 준비를 많이 해야하는데, 평소에는 어려우니 성경학교 때나 그렇게 해본다는 것이다. 죄를 입맛대로 고를 수 있도록 여러 가지를 만들어서 놓고 말이다. 그렇게 자기가 죄를 십자가 밑에 가져다놓으면 그 죄는 없어지는 것으로 해서 말이다. 그렇게 해서 합격하면 초코파이를 하나씩 준다는 것이다.

물론 아이들이 죄가 무엇인지, 또 십자가가 무엇인지 알고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선생님이 시키니 하는 것인데, 하지만 누가 알겠는가? 그것이 구원받는 의미가 될지 말이다(?). 그런데 그냥 말로서만 가르치면 어른들처럼 아이들도 마구 졸고 있다는 것이다.

◈ 다윗언약은 일종의 이벤트 !!

아무튼 이 다윗언약에는 십자가라는 것이 없는데, 그 당시에는 우리아의 모습인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린 것이 아니라 우리아가 달려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다윗은 이 우리아를 자기 죄로 인해서 죽게 하는 흉악한 살인자의 모습으로서 십자가 밑에 서있고, 십자가에는 우리아가 달려있고, 또 밧세바는 우리아 안에 들어있고 말이다.

이것은 곧 장차 오실 예수님의 십자가 모형으로서 하나님께서 이벤트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다윗언약을 통해서 말이다. 그렇다면 제가 처음에 이야기를 꺼내면서, “예수님이 오시기 이전에도 다윗언약이 적용됩니까?” 라는 것에 대해서 언급했는데, 물론 적용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에스겔은 어떠한가? 역시 그도 마찬가지인데, 에스겔은 자기 마누라가 죽어도 울지를 못한다는 것이다. 또한 옆으로 누워서 390일을 지내야 했는데, 그렇게 한번 지내보라는 것이다. 몸을 다 버리지 말이다. 사람의 똥으로 밥을 해먹고 말이다. 그것이 도대체 무슨 엽기적인 짓이냐는 말이다.

(겔 4:8) 내가 줄로 너를 동이리니 네가 에워싸는 날이 맞도록 몸을 이리 저리 돌리지 못하리라
(겔 4:9) 너는 밀과 보리와 콩과 팥과 조와 귀리를 가져다가 한 그릇에 담고 떡을 만들어 네 모로 눕는 날수 곧 삼백 구십일에 먹되
(겔 4:10) 너는 식물을 달아서 하루 이십 세겔 중씩 때를 따라 먹고
(겔 4:11) 물도 힌 육분 일씩 되어서 때를 따라 마시라
(겔 4:12) 너는 그것을 보리떡처럼 만들어 먹되 그들의 목전에서 인분 불을 피워 구울지니라

◈ 십자가 자체가 얼마나 엽기적인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하나님은 왜 에스겔에게 그런 일을 시켰는고 하니, 사람들이 도저히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의미인데, 물론 심판을 받는 것도 그렇지만 말이다. 그러나 더욱더 엽기적이고 상상을 초월하는 것은, 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가 한꺼번에 사라진다고 하는, 바로 그것이라는 것이다. 아니, 어떻게 인간의 그 참혹한 죄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음으로 단번에 사라질 수가 있느냐는 것이다.

바로 그런 놀라운 일이 벌어지게 되는데, 그러한 인간의 상상을 완전히 뛰어넘는 일을 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는가? 우리 인간들이 생각지도 못하는 신분의 하락을 경험하시는데, 즉 그러한 영광스런 보좌를 버리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그것도 종이 되어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을 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러한 그야말로 엽기적이고 충격적인 행위를 통해서, 하나님의 은총의 극대화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계신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그렇게 된다는 것을 누가 상상이나 했느냐는 말이다. 그리고 이것은 창세 전에 이미 예정되었다는 것이다.

(빌 2: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빌 2: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빌 2: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 은총의 필드와 선악의 필드가 !!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이렇게 하시는가? 그것은 바로 인간의 행함이 아니라 영역이라는 의미인데, 즉 인간의 개별적인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이미 창세 전부터 어떤 장(場)이 형성되어있다는 것이다. 즉 예수님의 은총이라는 장이 있고, 또한 악마는 악마대로 선악을 아는 선악의 장이 있었는데, 바로 그 영역싸움에서 예수님의 은총의 영역으로 모든 것이 귀결된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말이다. 

이것이 지난 시간에 한 것인데, 즉 다윗언약 속에 있는 다윗의 위상은 범죄자의 대표자로서 우리아를 바라보는데, 즉 ‘나’ 같은 죄인을 살리신 장차 오실 메시야을 바라본다는 것이다. 이것이 이사야에도 나오는 내용인데, 이사야가 먼저 누구를 만나는가? 하나님의 성전에서 거룩한 하나님을 만나고 뭐라고 하는가?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구나” 라고 하는데, 그 다음부터는 오실 메시야만을 고대하게 된다는 것이다.

◈ 다윗언약은 아직도 멈추지 않고 !!

요나도 그렇고, 예레미야도 그렇고, 선지자들이 모두가 다 그렇다는 말이다. “저는 그 일을 하지 못합니다. 다른 사람을 시키세요” 라고 하는데, 하지만 하나님께서 일을 시키니, 본인들을 비참하게 망가지는데, 그러나 그런 망가진 자기로 인해서 다른 사람이 구원을 받고 말이다. 그것이 계속해서 반복이 되는데, 사도바울도 역시나 그렇고, 또한 오늘날 우리들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그래서 다윗언약은 아직도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우리에게 적용이 된다는 것이다.

교재 200페이지를 보면 예레미야 7장의 말씀이 나오는데, 살펴보자.

(렘 7:1) 여호와께로서 예레미야에게 말씀이 임하니라 가라사대
(렘 7:2) 너는 여호와의 집 문에 서서 이 말을 선포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 경배하러 이 문으로 들어가는 유다인아 다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렘 7:3)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로 이곳에 거하게 하리라
(렘 7:4)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
(렘 7:5) 너희가 만일 길과 행위를 참으로 바르게 하여 이웃들 사이에 공의를 행하며
(렘 7:6)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지 말며 무죄한 자의 피를 이곳에서 흘리지 아니하며 다른 신들을 좇아 스스로 해하지 아니하면
(렘 7:7) 내가 너희를 이곳에 거하게 하리니 곧 너희 조상에게 영원 무궁히 준 이 땅에니라
(렘 7:8) 너희가 무익한 거짓말을 의뢰하는도다

◈ 여기는 성전이 아닙니다 !!

여기에 보면, 예레미야가 성전에 가서는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 라고 하면서, 성전이 아니라고 세 번씩이나 강조를 하는 내용인데, 오늘날 같으면 교회에서 설교시간에 “여러분, 여기는 교회가 아닙니다” 라는 것과도 같다는 것이다. 그것도 당회장과 장로들이 있는 자리에서 감히 부교역자가 말이다.

이것을 보고 “야, 우리도 그렇게 하자” 라고 나오지 말고, 예레미야가 그렇게 한 이유를 먼저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도대체 예레미야가 왜 그런 과격한 몸짓을 하는지 말이다. 사실 요즘은 “여기는 교회가 아닙니다” 라고 하면 다른 교회에 가면 되는데, 그러나 그 당시에는 성전이 예루살렘에만 있는데, 그것을 가로막고 아니라고 하면 이 땅에는 성전자체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구원받을 길이 없어진다는 것이다.

◈ 잠시, 산당제도에 대해서 !!

조금은 어려운 이야기가 되겠지만, 그 당시에 ‘산당(山堂)’ 이라는 것이 있는데,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산당제도와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제도는 상당히 중요하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 산당은 어디에 있는고 하니까, 언약궤가 통과했던 경로에 있었던 유명한 장소에 세워졌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언약궤가 있는 곳에 복을 내리시는데, 그런데 사람들의 심리가 무엇인고 하니, 그러한 언약궤가 지나가고 없으면 복도 없는데, 하지만 사람들은 그것이 아니라 “옛날에 거기서 그렇게 복을 받았데” 라고 한다는 것이다. 성령은 바람과 같이 이동하는데, 그런데 옛날에 그렇게 해서 병이 나았다고 해서 지금도 계속해서 자꾸만 우려먹는다는 것이다.

그렇게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을 자꾸만 의존하기 때문에, 언약궤가 이동한 그 경로에 있던 유명한 높은 산에는 전부가 다 산당이 세워져있다는 것이다. 천주교에서는 지금도 자기들의 역사적으로 유명한 장소에다 성당을 짓고 하는데 말이다. 서울의 명동성당도 그런 장소이고 말이다.

◈ 금송아지의 행태가 계속해서 !!

하지만 이러한 습성은 어디에서 나오는고 하니,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애굽에서 탈출해서 나오고 난 뒤에 모세가 시내산으로 올라갔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밑에서 무슨 짓을 했는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축제를 벌리고 금송아지를 만들어서 섬겼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행태가 출애굽기뿐만이 아니라 이사야서에도 계속해서 지적하는 내용인데, 즉 “그런 것들은 아무리 여호와 이름으로 만들어도 우상들이니 그렇게 하지 말라” 라고 말이다. 즉 산당에서 음란하게 여기면서 하나님을 섬기고 있으니, 그렇데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니 백성들이 하는 말이 “그렇다면 우리가 음란하게 섬기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라고 물으니 이사야가 뭐라고 하는가? “나는 애굽에서 너희들을 건져낸 여호와 하나님이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백성들이 하는 말이 “그러한 하나님은 우리가 아는데, 그러니 어떻게 해야 합니까?” 라고 하는데, 그러자 이사야 선지자의 입을 통해서 예언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 그분이 오신다 !!

그 예언의 풀이해보면, 기존의 현재 왕은 왕도 아니고, 기존 제사장은 제사장도 아니고, 그리고 방금 읽은 예레미야 7장에서 처럼 기존의 성전은 성전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게 모든 것이 다 깨어지고, 마지막에 이새의 줄기에서 성령을 받은 메시야가 나타나는데, 그 메시야는 처녀의 몸에서 태어날 것이고, 그분은 이사야 53장에 나오듯이, 우리의 허물을 인하여 채찍에 맞고, 죄를 대신해서 짊어지고 죽으심으로서, 우리를 죄를 용서하신다는 것이다.

(사 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사 53: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바로 그분이 오신다는 것인데, 즉 그분을 기다리고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예루살렘 성전이라고 해서 제사를 드리고, 그렇게 해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오실 메시야를 고대하는 그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오늘 우리도 당연히 어떻게 하면 되는가? 이미 오신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것이다. 일주일에 예배를 몇 번이나 드리고, 새벽기도회를 얼마나 열심히 잘 나오는지, 그리고 헌금을 얼마나 제대로 하고 있는지, 그런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말이다. 그것이 바로 동일한 언약 안에서의 원칙이라는 것이다.

◈ 다시 정리하면, ‘다윗언약의 주인공은 메시야’ !!

여기서 다시 정리하면, 다윗언약 안에는 무엇이 들어있는가? 인간들은 눈에 보이는 것을 우상시하고 섬긴다고 하는 것이 이미 내포가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이것을 잊으면 안 되는데, 우리도 얼마든지 그런 짓을 할 수 있으니 말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도 얼마든지 며칠 전에 은혜를 받았다고 하면서 교인들에게 자기 카리스마를 내세우면서 까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미 지나간 것인데 말이다. 지금이 중요한 것이지, 이미 지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과거에 받은 은혜를 가지고 주의 종이라고 권위를 내세운다면, “한번 목사는 영원한 목사다” 라고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그런 것들을 수시로 제거해야 하는데, 바로 여기서 다윗의 계통이 무엇인고 하니, 이전에 이야기를 했는데, 물론 잊었겠지만 말이다. “다윗언약의 주인공은 메시야이다” 라고 했는데, 그런데 그런 다윗언약이 이미 지상에 와있는데, ‘이스라엘’ 이라는 국가로서 말이다. 그래서 다윗언약대로 혈통에 따라 왕이 있는데, 그런데 그것이 엉터리라는 것이다.

다윗언약은 왕이 없는 것이 아니라 분명히 있는데, 여호와가 왕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히스기야 왕이 랍사게와 전쟁을 할 때 하나님을 믿고서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왕이 아니라 그에 앞서서 선지자를 보내는데, 그러니 그 선자자의 말을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즉 기존의 왕은 믿지 말고 말이다.

그 당시 이스라엘에서는 선지자를 양성했는데, 그것을 두고서 ‘선지학교’ 라고 한다는 것이다. 선지자라고 하면 선지국을 떠올리는 분이 있는데(ㅋㅋ), 그것이 아니고 말이다. 그 선지자들의 월급은 왕이 주는데, 그놈들들은 전부가 다 가짜였다는 것이다.

물론 이사야의 경우에 선지학교 출신일 가능성은 있지만, 호세아나 아모스는 분명히 아니지만 말이다. 미가의 경우에는 기존 선지자와 ‘400:1’로 싸우는데, 그리고 엘리야는 ‘800:1’이었고 말이다. 물론 출신학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일을 하느냐가 핵심이라는 것이다.

◈ 누가 진짜 선지자인가?

그렇다면 진짜 선지자와 가짜 선지자는 어떻게 구별하는고 하니, 장차 오실 메시야의 고난과 영광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진짜이고, 아니라면 가짜라는 것이다. 베드로전서 1장 11절에 보면, 선지자 속에 그리스도의 영이 들어가서 고난과 영광에 대해서 미리 증거했다고 하니, 지금은 우리가 그것을 분명하게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벧전 1:10)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벧전 1:11)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하여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 선지자는, 그분의 고난과 영광만을 !!

그러므로 참된 선지자는 바로 주님의 고난과 영광을 증거하는 사람이라는 말이다. 그것은 오늘날에도 역시 동일한데, 참된 성도는 오로지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과 영광만을 증거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 복음이 증거되니 말이다.

미가 선지자가 있을 당시에는, 선지자들이 백성들의 정서를 고려해서 축복을 남발했는데, 심지어 돈을 주면 축복을 많이 해주는 전문가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즉 돈을 많이 내면 입에서 좋은 소리가 나오고, 적게 내면 쌍소리가 나오고 말이다. 그것이 바로 짜가의 모습인데, 요한계시록의 일곱 교회도 역시 마찬가지이고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목회를 하지만 “항상 내가 주의 종이다” 라는 생각을 버리고, 주님이 은혜를 주셔서 우리의 입에 복음을 담을 때만 주의 종이라는 것이다. 자기 입장만 생각하지 말고, 자기의 말을 듣는 교인들의 입장도 좀 생각을 해주라는 말이다.

◈ 산당이, 다윗에 의해서 하나의 성전으로 !!

아까 산당을 이야기하다가 말았는데, 산당은 단수인가? 복수인가? 당연히 여러 개인데, 그런데 다윗은 여러 개의 산당을 하나의 성전으로 세웠다는 것이다. 그러니 성전의 의미는 무엇인고 하니, 하나님은 비록 여러 군데에서 이적과 기사를 베풀었지만, 그러나 그러한 기사와 이적의 종착점은 다윗의 손에 의해서 모든 것을 다 끝장내버렸다는 말이다. 그래서 다윗언약과 더불어 생긴 것이 다윗의 성전인데, 이 다윗성전은 그 장소가 한 군데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것을 강조한 것이 바로 누구인고 하니, 다윗과 같은 지파가 유다지파이고, 또한 이 유다지파가 만든 나라가 유대나라이고, 거기에 속한 족속들이 유대인이라는 말이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제사를 드리는데, 그런데 사마리아인들은 그리심산에서 제사를 드린다는 것이다.

이 그리심산은 과거 여호수아 때 한가닥 이름을 날리던 산인데, 혹시 기억이 나지 않나요? 에발산과 같이 축복산과 저주산이라 해서 말이다. 즉 축복산인 이 에발산에서 축복을 하면, 반대편의 저주산인 그리심산에서는 그 축복을 모두 자기들이 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축복산이 저주를 받고, 저주산이 축복을 받는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다른 민족들은 왜 이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서 예배를 드렸는가? 그리심산이나 벧엘과 같은 곳에서 말이다. 그것은 바로 유대인들은 자기들 영토에 이 예루살렘이 있기에, 그냥 그곳을 꽉 잡는다는 것이다. 즉 “다른 것은 다 가짜이고, 진짜 정통성은 여기 예루살렘이다” 라고 하면서 말이다. 즉 하나님께서 다윗을 통해서 역사를 하셨던 이 예루살렘이 그야말로 ‘왔다’ 라는 것이다.
 
◈ 예루살렘마저도 과거지사, 오직 성령으로 !!

하지만 진짜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오셔서 보니, 그러한 예루살렘마저도 과거지사라는 것이다. 즉 다윗에게 성전을 짓게 하고 역사하신 것마저도 말이다. 왜냐하면, 예배는 오직 성령으로 드리는 것이지, 장소를 하나 제대로 잘 잡았다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은혜를 베푸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즉 자동적으로 은혜를 받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 성령은 예수님을 믿는 자의 배에서 ??

요한복음 7장에 보면, 성령은 예수님을 믿는 자의 배에서 나오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예수님에게서 나온다는 의미이지, 어떤 특정장소에서 성령이 줄줄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는 자는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와서 영원히 목마르지 않도록 우리를 인도하신다는 것이다. (아무도 아멘 소리가 없는데, 아멘 !!)

(요 7:37) 명절 끝날 곧 큰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요 7:38)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요 7:39)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榮光)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 내가 하늘에 처소를 마련해야 !!

바로 그 성령 이야기가 요한복음 14장에 보면 나오는데, 거기에서 예수님이 뭐라고 하시는가? “내가 하늘에 가서 처소를 마련해놓고 올 텐데, 그때는 성령이 와서 너희와 거처를 함께 할 것이다. 그래서 그 성령 안에서 내 아버지가 너희들의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그의 아들들이 된다”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조금 어려운 이야기지만 말이다.

(요 14: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요 14: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 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요 14:3)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기 때문에, 어느 교회, 어느 공간, 어느 시간인지, 그런 것은 전혀 이야기할 필요조차도 없다는 것이다. 한 성령 안에 있는 사람은 말이다. 전혀 무가치한 일들인데, 즉 어느 교회출신이고, 몇 년을 믿었고 하는 것들이 말이다.

마찬가지로 자기가 사고를 얼마나 줄줄이 치고 교도소를 하루에 몇 번씩이나 드나들었던지, 그러한 것도 역시 전혀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오직 성령만이 의미가 있는 것이지 말이다. 즉 한 성령 안에 있으면 아무리 흉악한 연쇄 살인범이라고 해도 넉넉히 구원을 받는 것이다. 그런 것이 모두 다윗언약에서 나온다는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 201페이지를 보자.

** 여기서 ‘무익한 거짓말’의 내용은 무엇일까? 그것은 다윗 언약에 대한 왕과 제사장들의 오해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다. 즉 혈통적인 다윗가문과 형식적인 예배가 계속된다면 성전은 계속 성전일 것이라고 여기는 사실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무익한 거짓말이 된다. 

◈ 무익한 거짓말 ??

여기 ‘무익한 거짓말’ 이라는 말이 있는데, 그것이 예레미야 7장 8절에 보면 “너희가 무익한 거짓말을 의뢰하는도다”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그 거짓말 내용이 4절에 나오는데, 즉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 라고, 즉 거짓말이라는 말이다.

이러한 것을 신학자들이 참 힘들어하는 부분인데, 지금 예레미야 그 당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웃사랑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레미야가 “백성들아, 이웃사랑을 좀 해봐라. 고와와 과부를 돌보아야지.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벌을 내릴 거야” 라고 이야기하면 되는데, 그런데 예레미야는 그렇게 하지 않고 어떻게 했는가? 왜 그냥 가만히 있는 예루살렘 성전에 가서, 그것을 가로막고는 “여기는 성전이 아니다” 라고 하느냐는 것이다.

◈ 성전의 제사가 이미 언약과 상관이 없어 !!

다시 말해서, “여기는 성전이 아니다” 라는 것과 이웃사랑과는 도대체 무슨 관계가 있느냐는 것이다. 일단 성전에서 예배를 잘 드리고 나서, “그러면 이제 고아와 과부를 잘 돌보자” 라고 하면 되는데 말이다. 그런데 왜 성전을 가로막고 그런 이야기를 하느냐는 것이다. 성전이 아니라고 말이다.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는 것 자체가 이미 언약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언약을 달성함에 있어서, 착실하게 성전에서 예배를 잘 드리는 것과 상관이 없는데, 그런데 인간들이 고아와 과부를 잘 돌보는 것을 대신해서 기존의 있는 성전에서 있는 제물로 제사를 잘 드리면, 그것으로 벌충이 되고 대체가 된다고 여겼다는 것이다.

◈ 어,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약속을 했는데 ??

그런데 그것도 그럴 것이, 열왕기하에 보면(?) “우리가 죄를 지었을 때 이 성전에 와서 제사를 드리면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용서해주신다” 라고 하는 솔로몬에 주신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데, 그 약속을 그들은 있는 문자 그대로 해석했다는 것이다.

(대하 7:14)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지라
(대하 7:15) 이곳에서 하는 기도에 내가 눈을 들고 귀를 기울이리니
(대하 7:16) 이는 내가 이미 이 전을 택하고 거룩하게하여 내 이름으로 여기 영영히 있게 하였음이라 내 눈과 내 마음이 항상 여기 있으리라

그래서 그들은 어떻게 생각했는고 하니, “비록 우리가 제대로 말씀을 지키지 못하지만, 고아와 과부도 돌보지 못하고 말이다. 그래서 이렇게 성전에 제사를 드리면 그런 것들이 해결이 되지 싶은데, 그런데 예레미야는 왜 그렇게 설치는가?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이렇게 성경말씀을 따져보면 어려운 곳이 한 두 군데가 아니라는 말이다.

◈ 예레미야 시대에는 성전의 공간성을 포기했기에 !!

그러니 이미 예레미야 시대에는 성전의 공간성을 포기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성전은 이제 떠나야하는 곳인데, 즉 떠날 때가 되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예레미야가 예언하기를, “너희들은 앞으로 포로로 잡혀갈 것이니 알아서 기어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누구에게 말인가? 장차 들이닥칠 바벨론에게 말이다.

그런데 여기에 대해서 가짜 선지자들은 뭐라고 했는가? 예레미야의 따귀를 마구 때리면서 “이 나라는 하나님이 세우신 나라인데, 어떻게 하나님이 자기 나라를 자기가 망하게 한단 말인가? 정신이 있다면 한번 생각을 해봐라” 라고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예레미야는 뭐라고 하는가? “내가 받은 하나님의 뜻은 그것이 아니야. 하나님은 우리보고 이 나라에서 나가라고 하시는데, 성전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말이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 새 언약이란,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시는 분이 따로 있어 !!

그러면 저쪽에서 “그러면 하나님의 언약은 누가 이루는가? 우리가 이루어야지” 라고 하니, 예레미야가 하는 말이 “아니야.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시는 분이 따로 있어. 그것이 곧 새 언약이야” 라고 한다는 것이다. 즉 다윗의 자손에서 새 언약이, 즉 메시야가 오셔서 그분이 다 하신다는 것이다.

그것은 애굽에서 나올 때와는 달리 지킬 언약을 새롭게 주는데, 그런데 그것은 언약을 주신 본인이 다 지킨다는 말이다. 그렇게 이제는 눈에 보이는 성전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속에 성전이 만들어지는데, 즉 마음속에 하나님의 법이 새겨지는 새 언약의 시대가 도래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예레미야 31장에 나오는 새 언약의 내용이라는 말이다.

(렘 31:31)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렘 31:32)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파하였음이니라
(렘 31:33)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렘 31:34)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것이 그 얼마나 확실한 언약인지, 그것은 마치 예레미야 31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해와 달을 만드는 것처럼 확실하다는 것이다. 즉 해와 달이 없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예레미야의 새 언약은 결코 없어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것이 예레미야 31장의 내용이라는 것이다.

◈ 총신교수들도 새 언약은 중요하게 여기는데 !!

총신에서 구약의 언약을 가르치는 교수들이 엄청나게 중요하게 강조하는 구절이 3군데 있는데, 사무엘하 7장에 나오는 다윗의 후손에 대한 징계와 회복, 그리고 시편 89편의 다윗언약은 영원무궁하다는 것과, 바로 이 예레미야 31장의 새 언약이라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과거 창조 때의 언약은 깨어질지라도 이 새 언약은 영원하다는 대목이라는 말이다. 물론 언약 신학자들은 모두 그렇게 주장하는데, 그런 틀을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도 당연히 그런 점을 강조해야 하고 말이다. 

(삼하 7:14)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 저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삼하 7:15) 내가 네 앞에서 폐한 사울에게서 내 은총을 빼앗은 것같이 그에게서는 빼앗지 아니하리라
(삼하 7:16) 네 집과 네 나라가 네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셨다 하라

(시 89:3)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나의 택한 자와 언약을 맺으며 내 종 다윗에게 맹세하기를
(시 89:4) 내가 네 자손을 영원히 견고히 하며 네 위를 대대에 세우리라 하였다 하셨나이다{셀라}

◈ 하나님이 예레미야를 떠밀어서 !!

그렇다고 하면, 예레미야가 왜 이렇게 과격한 행동과 말을 하는가? 성전을 가로막고 성전이 아니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것은 바로 아까도 말했지만, 다윗언약의 진짜 왕이신 여호와께서 누구를 보내셨는고 하니, 왕이 아니라 예레미야 본인을 보냈다는 것이다. 물론 예레미야는 가기를 거부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예레미야는 모친의 태중에서 이미 선지자로 택함을 받아서, 그의 운명이 어떻게 되는고 하니, 아예 나라를 말아먹을 이야기만 골라서 한다는 것이다. 북쪽의 가마솥이 남쪽으로 부어져서 나라가 멸망한다고 하는 말이다. 그래서 백성들이 예레미야를 잡아다가 구덩이에 집어넣고 그야말로 난리를 친다는 것이다.

◈ 목사 면직은 너무나 괜찮은 고난 ??

요즘 노회에서 하는 목사 면직과도 같은 것은 거기에 비하면 엄청 점잖은 짓인데, 노회에 참석하지 않아도 되니 스트레스도 받지 않고 오히려 좋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신체적인 압박을 가하는데, 즉 형사처벌을 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요즘은 복음을 전해도 사자굴에도 집어넣지도 않고, 돌에 맞아 죽지도 않고 얼마나 좋은 시절인지 모른다는 것이다.

사실은 예수를 믿는다고 해서 사자굴에 집어넣고 하면 그래도 폼이라고 조금 나는데, 그런데 요즘은 예수를 믿고 복음을 전해도 가만히 두니, “정말로 예수를 믿어도 되는 것인가? 이것이 복음이 맞기는 맞나?” 라고 하면서 오히려 더 시험에 든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는 지금 마귀의 유혹이 더욱 더 크다고 할 수 있다는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그래서 예레미야는 성전의 입구를 막으면서 “이것은 여호와의 전이 아니다!” 라고 세 번씩이나 외치고 있다. 결국 성전은 없다는 말이다. 성전이 사라졌다는 말이다.
 
◈ 너희들은 이방나라에 살고 있는 이단들이야 !!

예레미야가 이렇게 성전이 아니라고 한다는 것은, 이스라엘은 이미 이스라엘이 아니라 이방나라라는 의미인데, 그러니 “지금 너희들은 이방나라에 살고 있고, 또 너희들도 이단이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누구 말을 듣지 않는다고 이단인가? 예레미야의 말을 듣지 않아서 이단이라는 말이다. 즉 예레미야가 말하기를, “너희들은 참석하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내가 천상회의에 참석해보니, 너희들은 이단이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제 교재 202페이지를 보자.

** ‘왕+제사장’으로 형식이 외형적으로 갖추어진다고 해서 다윗언약이 존속되는 것은 아니다.

이미 ‘왕+제사장’의 형식은 망하고 말았는데, 그렇다면 어떻게 지키는가? 우리는 전혀 하지를 못하고, 메시야가 오셔서 그 내용을 채워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볼 때 어떻게 그분을 이해해야 하는가? 다윗언약을 알고서 예수님을 영접해야 한다는 말이다.

◈ 내 모습이 곧 다윗의 모습 !!

여기에서 다윗언약을 안다는 것은, “아하, 내가 바로 다윗과 같은 인간이구나” 라는 의미라는 말이다. 그리고 그 당시 백성들의 사정을 하나 둘씩 알아나가면서 말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도 미처 모르는 우리 자신들의 모습이니 말이다.

다시 말해서, “아하, 진짜 왕이신 분은 예수님뿐이고, 진짜 제사장은 예수님밖에 없구나. 그분이 다윗언약을 다 이루어서 구원을 받지, 결코 내가 잘나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구나” 라는 것을 이 다윗언약을 통해서 구구절절이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 조금만 더하고 마치겠는데, 교재를 보자.

** 다윗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그 아들인 솔로몬의 손에 의한 성전건축이 이루어지는 것은 다윗언약의 일관성이 인간 다윗의 오류를 능가하고 극복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물이다.

그러니 인간은 죄인이고 오류투성이라도, 그러한 인간을 극복하고 그 언약을 완성시키는 분은 따로 계신다는 것인데, 그분이 바로 다윗언약을 제정하신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우리가 감사할 것은, 현재 우리가 너무나 부족하지만, 그러나 다윗언약을 이루신 그 은총대로 우리를 자기 백성으로 삼아서 예수님 자신의 의를 우리의 의로 전가시킨다는 것이다.

◈ 언약을 완성시키는 분은 따로 계심에 감사하면서 !!

다시 말해서, “그분이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다” 라는 것이다. 그러한 모든 것들이 다 예수님의 ‘다 이루심’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그러니 결코 우리의 열심이 아니라 주님의 열심으로 말미암아서 이러한 모든 것들이 진행되었음을 깨닫고, 그러한 사실을 믿게 된 것을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말이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이 세상에 나가서 이야기할 것이 너무나도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게을러서 이런 기쁜 소식을 등한시하고 무시하는 알이 없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09,04,24 오후 10시 40분에 마침.

                                                   언약이 점점 어려워질 것 같은 불길한 조짐이,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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