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약관련

다윗언약3(204.6.14. 대구강의)

아빠와 함께 2015. 4. 23. 18:08

대구040614교회를넘어서3다윗언약3새언약1

[04 대구강의 6] - 교회를 넘어서 3 - 다윗언약 3, 새 언약(에스겔) 1
                                                                                
                                                           04,06,14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왜 사독이 계속해서 대제사장인가?

오늘은 ‘교회를 넘어서’ 203페이지부터 하겠는데, 일단 먼저 교재를 보자.

** 다윗 이후 솔로몬 왕 시절에도 대제사장은 사독이다.

(왕상 2:35) 왕이 이에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로 요압을 대신하여 군대 장관을 삼고 또 제사장 사독으로 아비아달을 대신하게 하니라

다윗 왕 때는 대제사장이 사독이었는데, 그런데 그 이후 솔로몬 왕 때도 계속해서 대제사장이 사독이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보통 왕이 바뀌게 되면 대제사장도 함께 바뀌기 마련인데 말이다. 왜냐하면, 대제사장은 그래도 왕 밑에 있으니 말이다. 그러므로 대제사장이 이렇게 같다고 하는 것은 솔로몬은 철저하게 다윗 의존적임을 보여주는데, 즉 솔로몬은 독자적으로 무엇을 하지 않는다는 의미라는 것이다.

이러한 점이 상당히 어려운데, 보통 정권이 바뀌고 대통령이 바뀌게 되면 어떻게 하는가? 제 아무리 앞의 대통령이 일을 잘했다고 하더라도, 자기가 대통령이 되면 앞에 있던 대통령이 했던 그런 실체를 때내어 버리고 싶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수위원회와 같은 것을 설치해서, 말이 인수위원회이지 모든 것을 새롭게 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을 하시는가?

그런데도 이렇게 선대 왕의 대제사장을 그대로 이어받는다는 것은, 개인적으로 자기가 정치력을 어떻게 발휘하는 차원이 아니라, “도대체 하나님은 어떻게 일하시는가?” 라는 것에 관심이 있다는 것이다. 자기가 무엇을 어떻게 일을 하는지가 아니고 말이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 거기에 자기 모든 인생의 내용을 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이 상당히 중요한 점인데, 사람은 항상 “하나님, 제가 무엇을 해드릴까요?” 라는 것에 관심을 가지기 마련인데 말이다. 그런데 생각을 바꾸어서 “하나님이 어떻게 일을 일관되게 하시는가?” 라는 것이 자기에게 중요하게 여기지는 것은, 그야말로 완전히 달라진 사람이 아니면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새사람이 되지 않으면 도저히 나올 수 없는 의식이라는 말이다. 물론 24시간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는데, 하지만 그렇게 자기 쪽으로 생각을 하다가 정신이 어느 순간에 번쩍 들면서 주님의 일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다윗 가문과 함께 할 제사장을 바로 사독 계열로 확정을 짓는 것은, 아비아달 계통과 차별화를 나타내는 것과 동시에, 다윗 왕가에 담겨있는 하나님으로부터의 특별한 선택성의 유효함을 드러내는 일과 관련이 있다.

◈ 사독은, 아비아달 계통과는 차별을 !!

앞의 글을 설명한 부분인데, 즉 “다윗 이후 솔로몬 왕 시절에도 대제사장은 사독이다” 라고 하는 것을 말이다. 그렇게 하나님께서는 아비아달 계통과는 차별을 두겠다고 하신다는 것이다. 이것은 곧 처음에 아비아달과 함께 한 그 시절과 사독과 함께 한 시절이 확연히 서로 다르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말이다.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하나님께서 일을 하셨다는 증거가 사독에서 아비아달로 갈라짐으로 인해서,  즉 “하나님은 이런 식으로 일을 하셨다” 라는 것을 의미하는데, 즉 대제사장이 바뀌었다는 것을 이제 새로운 일이 첨부가 되었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에스겔에 의해서 예언된 바 있듯이, 다윗이 새로운 이스라엘의 왕이 됨과 동시에 제사장도 사독 계열뿐임을 부각시킨다.

(겔 37:24) 내 조상 다윗이 그들의 왕이 되리니 그들에게 다 한 목자가 있을것이라 그들이 내 규례를 준행하고 내 율례를 지켜 행하며

◈ 에스겔이 왜 다윗을 언급하는가?

이것이 참으로 이상한데, 이것은 다윗시대의 훨씬 뒤의 일인데, 그리고 그 사이에 괜찮은 왕들이 나타났는데, 히스기야나 요아스 같은 말이다. 하지만 지속적으로 다윗 왕을 고집하고, 심지어는 에스겔의 경우에는, “다윗과 같은 목자가 나타나는데, 그분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다” 라고 말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역사의 흘러감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다윗 왕에게 멈춘 듯한 느낌을 준다는 말이다.

마태복음 1장의 ‘14대, 14대, 14대’ 라는 족보가 산 정상에 올라가서 내려간다고 한다면, 그것이 “아하, 이런 것은 과거구나” 라는 것이 아니라, “아하, 우리가 지금 떨어지고 있구나” 라고 하면서도 어디를 바라보아야 하는고 하니, 밑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산 위의 그 정점을 바라보아야 하는데, 그러한 정점이 바로 다윗 왕 때이고, 그러니 ‘14대, 14대, 14대’ 라고 하면서 다시 올라간다는 말이다. 그렇게 되면서 “하나님은 다윗과 같은 분으로 오신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다윗을 기준으로 해서 이 모든 이스라엘의 역사는 타락의 역사인데, 즉 인간 왕들의 불신앙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인간 지도자의 그 한계성을 말이다. 그러니 왕은 하나님이 되어야 제대로 나라가 되는 것이니, 인간이 왕이 되는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교회도 역시 마찬가지인데, 하나님이 지도자가 되어야지, 사람이 지도자가 되는 교회는 결코 교회라고 할 수 없다는 말이다. 하나님이 직접 왕이 되어서 인도하시고 좌정하시는 모임이 교회라는 것이다. 즉 사람이 지도자가 되는 교회는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에스겔에서는 역사를 소급해서 이런 다윗에 대해서 집착(?)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 교재를 보면, 에스겔 44장의 말씀이 나오는데, 한번 찾아보자.

(겔 44:12)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들이 전에 백성을 위하여 그 우상 앞에서 수종들어서 이스라엘 족속으로 죄악에 거치게 하였으므로 내가 내 손을 들어 쳐서 그들로 그 죄악을 담당하여
(겔 44:13) 내게 가까이 나아와 제사장의 직분을 행치 못하게 하며 또 내 성물 곧 지성물에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리니 그들이 자기의 수욕과 그 행한바 가증한 일을 담당하리라
(겔 44:14) 그러나 내가 그들을 세워 전을 수직하게 하고 전에 모든 수종드는 일과 그 가운데서 행하는 모든 일을 맡기리라
(겔 44:15) 이스라엘 족속이 그릇하여 나를 떠날 때에 사독의 자손 레위 사람 제사장들은 내 성소의 직분을 지켰은즉 그들은 내게 가까이 나아와 수종을 들되 내 앞에 서서 기름과 피를 내게 드릴지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여기 15절을 보면 “이스라엘 족속이 그릇하여 나를 떠날 때에 사독의 자손 레위 사람 제사장들은 내 성소의 직분을 지켰은즉” 라고 하는데, 그러니 사독 계열을 제외하면 전부가 다 민중들의 종교적인 욕구에 맞추어서 하나님을 섬겼다는 것이다.

그것이 교재에 나오는데, 계속해서 살펴보자.

** 사독 계열의 제사장들만 빼놓고 나머지 제사장들은 민중들의 종교적이고 우상적인 구미에 맞추어 우상적인 요소로서 하나님을 섬겼기에, 하나님께서는 이에 분노하여 민중들의 죄악과 함께 그들로 하여금 더 이상 제사장 직분을 맡기지 않고 단지 성전을 수직하는 임무로 지정하겠다는 것이다. 

◈ 다윗과 사독은 한 세트가 !!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대제사장을 사독계열로 확정을 지음으로 말미암아서 왕은 다윗계열로 확정을 짓겠다는 말이다. 그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사독은 어느 시절의 제사장인가? 다윗시대인데, 그러니 다윗과 사독은 한 세트가 되는데, 그렇게 셋팅이 되어서 그 관계가 깨어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러한 것이 창세기에도 나오는데, 아브라함이 만났던 제사장이 바로 ‘멜기세댁’ 인데, 이 멜기세댁은 두 가지 직책을 함께 수행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참으로 기이한데, 하나는 제사장 직책이고, 또 하나는 예루살렘의 지역을 통치하는 왕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지상에서 보면 분명히 왕인데, 그런데 사실은 왕이 아니라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중개자라는 것이다. 지역적으로는 토속 왕이지만, 본래의 역할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이 지상의 언약을 수행하기 위한 중개자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바로 그렇게 될 때 그것이 참된 왕이 되고 메시야가 된다는 말이다. 즉 정치를 잘해서 메시야가 되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진짜 메시야는 하늘과 땅을 연결해주는 매개체의 역할을 제대로 감당할 때, 바로 그것이 제대로 된 왕이고 메시야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오! 예수여, 나의 왕이시여” 라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 지금 이 땅에서 정치를 제발 잘해 달라는 말이 아니라, 하늘과 땅을 연결시키는 일을 하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두고 멜기세댁의 반차를 쫓아서, 즉 그 반열에서 나왔다고 한다는 말이다.

◈ 목사님, 멜기세댁과 다윗 왕은 어떻게 연결이?

그런데 여기에서 “목사님, 멜기세댁과 다윗 왕은 어떻게 연결이 됩니까?” 라고 똑똑한(?) 질문을 하신다면, 그것이 바로 히브리서 7장에 나오는데, 이 멜기세댁은 특별히 어디에 소속된 지파가 따로 없다는 것이다. 분명히 멜기세덱과 같은 분이 오기는 오시는데, 그런데 이 지상에 있는 기존의 12지파에는 속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히 7:3)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

그렇게 12지파와는 접촉되지 않는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성경에서는 레위지파를 땅의 지파와는 구별을 해놓고는, 이 레위지파와 전혀 상관이 없는 유다지파를 등장시킨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이 유다지파가 마치 땅에서 12지파에서의 멜기세덱이 보여주는, 그런 연결점과 존재성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는 것이다. 

◈ 유다지파는, 레위지파를 부정하는 역할 !!

조금(?) 어렵지요? 기존 율법에 의하면 유다지파가 아닌 레위지파가 중개의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데, 그렇다고 해서 유다지파가 레위지파의 역할을 한다는 것이 아니라, 이 레위지파를 통해서 인간들은 하지 못한다는 것을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레위지파가 하지 못하면 인간들은 안 된다는 의미인데, 그런데 이 유다지파와 멜기세덱의 반차가 서로 접촉되면서, 레위지파를 그만 부정해버린다는 것이다. 즉 레위지파가 드리는 제사를 부정하는 입장에서의 일을 이 유다지파가 감당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장차 오실 메시야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쫓는다고 해놓고는 실제로 예수님은 유다지파에게서 나오고, 또한 그 이전에는 레위지파와 그들이 드리는 제사는 영원하다고 이야기하고 말이다. 그러니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 뭔가 좀 헷깔리지 않느냐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는 레위지파가 영원하다고 해놓고는, 그런데 레위지파가 아닌 유다지파에서 예수님은 막상 태어나고 말이다. 또한 그렇게 하면서도, 유다지파의 반열이 아닌 멜기세덱의 반차라고 해서, 아예 이 지상과는 접촉점이 없는 하늘의 반열에다 집어넣고 만다는 것이다.

◈ 메시야는, 인간을 부정하면서 하늘과 땅을 !!

그렇다고 하면 이런 메시야의 정체가 도대체 무엇인가? 메시야는 하늘과 땅을 관련시키기는 하지만, 그러나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일들을 부정하는 입장에서 그렇게 관련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메시야는 기존의 레위지파가 아닌 엉뚱한 유다지파에서 태어나고, 또한 전혀 기존 지파에 소속되지 않은 멜기세댁의 반차를 쫓는다는 말이다.

◈ 에스겔은 왜 다윗과 사독계열을 강조하는가?

그렇다면 왜 에스겔은 다윗을 강조하고, 사독계열을 강조하는가? 거기에 대해서 신학자들은 뭐라고 하는고 하니, 이 에스겔은 직업이 제사장인데, 그러니 에스겔은 레위지파 소속이라는 말이다. 이러한 에스겔의 레위지파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의 거룩이라는 것은 레위지파의 노동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에스겔은 자기가 레위지파임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하는가? 의도적으로 다윗을 강조함으로서, 그리고 다윗 왕이 지목한 사독계열을 이야기함으로서, 그것이 바로 레위지파의 완성이고, 또한 제사장직의 완성이라고 본다는 것이다.

그러니 기존의 레위지파에 대해서는, 그것 때문에 나라가 망하고 바벨론으로 포로가 되었으니 미련을 두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러한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에스겔의 입장에서는, 나라를 망하게 하는 단독적인 제사장은 소용이 없고, 진짜 왕은 다윗이고, 그러한 다윗과 한 세트가 되어있는 사독계열의 제사장만이 이스라엘을 회복할 수 있다고 본다는 것이다.

◈ 그러면 과연 성전은 필요가 없는가?

방금 제가 203페이지에 나오는 사독계열을 이야기했는데, 그것이 204페이지에도 나오고 말이다. 이런 사독계열의 제사장직을 에스겔에서 언급을 했다고 하면, 여기서 우리가 궁금한 것은 “그러면 성전은 필요가 없습니까?” 라고 질문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교재 207페이지에 보면 ‘7. 새 성전의 등장’이 나오는데, 에스겔에 의하면 성전은 필요 없는 것이 아니라, 완성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성전은 율법이기 때문에, 당연히 폐하는 것이 아니라, 일점 일획이라도 다 완성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에스겔에서는 사독을 다윗과 연결하면서, 즉 다윗에게도 다시 돌아가서 완성됨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곧 에스겔서의 내용이라는 말이다.

하늘과 땅을 연결시켰던 다윗, 하지만 다윗은 그러한 다윗언약과 ‘뚝’ 떨어져 있었는데, 에스겔은 다시 그것을 ‘쭉’ 당기고 연결시켜서, 즉 원래 있었던 하나님이 원했던 다윗언약으로 끌어올려서, 하나님은 그렇게 다시 다윗언약를 유지하겠다고 하는 것을 천명한 것이 바로 ‘에스겔서’ 라는 것이다. 그러니 에스겔에 있어서 죄가 무엇인고 하니까, 그것은 바로 다윗처럼 하나님과의 관계를 제대로 유지하지 않는 것이 곧 죄라는 말이다.

◈ 이 목사, 너무 죄만 강조하면 미워할 거야 !!

제가 이야기하는 이런 신학을 공격하는 사람들이 가장 무지한 점이 무엇인고 하니, “이 목사는 죄를 자꾸만 강조하고 죄인라고 하는데, 물론 그것을 우리도 인정하는데, 하지만 예수님이 우리 죄를 씻어주셨는데, 그러니 계속해서 그렇게 공격하면 곤란하지 않는가? 그리고 죄라는 것은 거룩하고 경건한 생활을 하지 않는 것인데, 즉 윤리 도덕적으로 나쁜 짓을 하고 말씀대로 살지 않는 것이니, 그런 죄는 거듭난 사람은 자기가 알아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가?” 라고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은 언약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기 때문에 그러한데, 언약에서 죄의 개념은 하나님께서 지적해놓은 언약과 거리가 멀어지는 것이라는 말이다. 즉 그러한 언약과 상관이 없이 행동하고 사고하고 살아가는 모든 것이 다 죄라는 말이다. 그러니 죄를 이야기하려면, 하나님께서 정해놓으신 언약이 무엇인지 알아야 비로소 죄가 무엇인지를 안다는 것이다.

◈ 노선이 다르면 무조건 ‘죄’ !!

이것을 한번 따져보면, 아비아달 계통의 제사장이 열심히 제사를 드리겠다고 하는데, 하나님은 뭐라고 하시는가? “그것은 죄이다” 라고 하는데, 아무리 율법대로 살고 제사를 제대로 드려도 말이다. 그러니 인간들은 하나님이 정해놓은 언약을 모르기 때문에, 그냥 최선을 다하면 그것으로 죄로부터 멀어지는 것으로 오해를 하는데, 그러나 사독계열이 아니면 아무리 열심히 제사를 드려도 다 죄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다윗언약에 있어서 다윗 왕의 위치에 놓이지 않으면 전부가 다 죄가 되는데, 그렇다고 하면 ‘의(義)’ 란 무엇인가? 다윗언약에 있어서 다윗 왕의 위치를 제대로 알면, 즉 그런 하나님의 뜻을 알면 그것이 바로 의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무엇이든지 언약적으로 설명해야 한다는 말이다. 

제가 이렇게 “언약적으로 해야 됩니다” 라고 하면, 사람들이 뭐라고 하는고 하니, “그 언약은 우리도 아는데, 그것은 약속이 아닌가? 그렇지, 약속대로 지켜야지” 라고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언약은 우리보고 지키라고 준 약속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스스로 “여기 여기 모여라” 라고 하면서, 그렇게 구원을 자리를 완전히 결정해서 내려버린 상황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이 언약을 인간이 어떻게 지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이 얼마나 죄인이며, 도대체 무엇이 의라는 말인가?” 라는 것을 보여주는, 그런 기준으로 등장한 것이 언약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언약을 무슨 인간들끼리의 약속 정도로 여겨서 지키겠다고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언약은 오직 그 언약의 주인공만이 지킬 수 있지 말이다.

◈ 새 성전을 하기에 앞서, 다시 요약하면 !!

이제 교재 207페이지의 에스겔의 ‘새 성전 등장’을 하도록 하겠는데, 그동안 우리가 너무 늘어뜨려서 왔기 때문에, 앞의 것을 한번 먼저 요약해보고 들어가야 이해가 쉽다는 말이다. 너무 길면 끊어지니 말이다. 영화도 너무 긴 영화를 보면 내용을 잊어버리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박경리는 자기 소설 ‘토지’를 너무 길게 쓰다보니, 자기가 그만 스토리를 잊어서 애를 먹었다고 하는데 말이다.

◈ 노아언약, 아브라함 언약, 모세언약, 다윗언약 !!

처음에는 아담이 있었고, 그 아담이 죄인이 되었고, 그렇게 죄인이 되었기 때문에 언약을 통해서 거주하시는데, 첫 번째 언약이 바로 노아방주를 통해서 동행하시고, 그 다음에는 어떤 집안에 거주하시겠다는 것인데, 그것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이고, 그리고 그 다음에는 집안이 아니라 국가에 거주하시겠다고 하는데, 그것이 바로 모세언약이고, 이제는 국가가 거주하시면서 그냥 거주하는 것이 아니라, 왕으로 거주하시겠다는 것인데, 그것이 바로 다윗언약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방금 제가 “저주하겠다, 거주하겠다” 라고 했는데, 모세언약에 있어서 국가가 될 때, 하나님은 어디에 거주하시는가? 성막에 거주하시다가 다윗 때에 와서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기 위해서 성막이 아닌 성전에 거주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해야만 그것이 천국이지, 우리가 알아서 독자적으로 우리가 따로 무엇을 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즉 하나님이 언약의 백성들과 함께 해야만, 그것이 곧 천국이라는 것이다. 그냥 함께 계시는 것이 아니라, 언약 안에서 말이다. 그렇게 언약 안에 있기 때문에, 거기에는 항상 언약적인 사고방식만 허용이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자기는 한국말밖에 모르는데 그런데 미국의 남부지방으로 갔다고 하면, 자기가 아무리 한국말을 사용하겠다고 해도 그 공동체가 이미 영어만 통용이 되기 때문에 한국말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언약 공동체도 역시나 마찬가지인데, 언약의 동네이기 때문에 언약적인 사고방식만 통용되고, 나머지는 죄악으로 여겨져서 전혀 용납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 위태위태하고 아슬아슬한 성전 ??

그런데 교재 207페이지에 나오는 성전은 그야말로 위태위태하고 아슬아슬한 성전인데, 왜 그러한가? 그것은 바로 성전이 가지고 있는 언약적인 법칙이 무엇인고 하니, 왕이 잘못되면 성전은 깨어진다는 것이다. 이것이 신명기에도 나오는데 말이다.

그래서 에스겔은 이 성전에 대해서 미리 예언을 했는데, 진짜로 다윗 왕과 같은 분이 오셔서, 이제는 영원토록 망하지 않는 성전, 즉 완전히 새로운 성전을 다윗왕과 계약을 맺어서, 그것이 바로 ‘새 언약’ 인데 말이다. 즉 새 언약을 맺어서 새 성전을 짓겠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새 언약은 기존의 모세언약과는 달리, 물론 여기에는 노아와 아브라함 언약도 모두 포함이 되는데 말이다. 아무튼 이제는 새 언약을 가지고 새 성전을 꾸미겠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여기에 해당되는 구원의 방식은 무엇이냐는 말이다.

제가 여기서 퀴즈를 하나 내겠는데, “과연 여기서의 구원방식은 앞에서 나온 방식과 같을까? 다를까?” 라는 것이다. 물론 다른데, 왜냐하면 그렇게 구원방식이 달라야 새 언약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만약에 그 방식이 같다고 하면, 기존언약이 그대로 유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서 ‘같다’ 라는 의미는, 기존의 같은 요소가 스며들어있다는 말이다.

* 질문 - 그러면 언약의 대상자가 다르다고 하는 주장은?

그것은 잘못된 주장인데, 예를 들어서, 여기 삼각형 빵에 앙코가 들어있다고 하면, 그런데 하나님은 네모난 빵을 가지고 새로운 빵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즉 빵이 다른데, 그런데 앙코는 같다는 것이다. 아브라함과 모세와 다윗언약을 포함하면서도, 즉 세모난 빵에 들어있는 같은 앙코가 들어있으면서도, 세모가 아닌 네모난 새로운 빵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이해하면 제일 쉽지 싶은데 말이다.

그러니 이쪽은 원형이 되고 여기는 실체가 되는데, 그러니 여기 다윗언약까지는 세모의 틀을 유지한다는 것이다. 좀 뾰족한 세모, 좀 둥근 세모, 그런 식으로 말이다. 그런데 새 언약은 세모가 아니라 완전히 네모로 바뀐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안에 앙코는 같은 것이 들어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새 언약’ 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저의 주장이 아니라 예레미야 31장에 그대로 나온다는 것이다.

(렘 31:31)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렘 31:32)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파하였음이니라
(렘 31:33)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 그러니 언약이 달라 ??

여기 32절에 보면,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파하였음이니라” 라고 하는데, 즉 전혀 모세언약과는 완전히 다르다는 것이다. 물론 노아언약과도 다르고 말이다.

* 질문 - 그러면 새 언약의 대상자로 성령을 이야기하는 것은 어떤가요?

그것은 맞는 말인데, 아까 언약의 대상자가 다르지 않느냐고 질문을 했는데, 사실은 그 말이 맞다는 것이다. 하지만 제가 왜 아니라고 했는고 하니까, 그렇게 언약의 대상자가 다르다고 하는 뉘앙스에는 뭔가 수상한 것이 자꾸만 개입한다는 것이다.

그런 주장을 하는 쪽에서는, 과거에는 언약의 대상자가 인간이었는데, 지금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다고 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은 인간이 너무나 부족해서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니 제가 하는 말은 그것이 아니라는 것인데, 즉 우리 인간이 부족해서 하나님께서 직접 하시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 새 언약은 사고방식 자체가 완전히 달라 !!

새 언약의 대상자가 성령이고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라고 한다면, 과거 기존의 언약은 우리 인간들을 대상으로 할 때는 우리가 그것을 구원중심으로 생각할 수밖에는 없었는데, 이제 새 언약에서는 우리 구원중심은 아니라는 말이다. 즉 우리가 부족했는데, 그것을 채워주고 매워주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사고방식 자체에서 완전히 벗어났는데, 그래서 새 언약이라고 한다는 말이다.

* 질문 - 그런데 출애굽기 32장에서, 모세가 양푼에 피를 담아서 말씀을 준행하겠다고 했을 때, 그때 언약의 대상자는 이스라엘이라고 할 수 있지 않습니까?

출애굽기 32장에는 그러한 내용이 없고, 24장에 보면 언약을 체결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당시에는 이스라엘이 언약의 대상자가 맞다는 것이다. 하지만 성경해석을 할 때 문제가 무엇인고 하니, 과거에서 미래로 땅겨서 가면 안 된다는 것이다. 항상 미래에서 과거를 땅겨야지 말이다.

(출 24:6) 모세가 피를 취하여 반은 여러 양푼에 담고 반은 단에 뿌리고
(출 24:7) 언약서를 가져 백성에게 낭독하여 들리매 그들이 가로되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출 24:8) 모세가 그 피를 취하여 백성에게 뿌려 가로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

◈ 과거에서 미래를 보게 되면, 반칙 !!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과거에서 미래를 보게 되면, 즉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셨기 때문에 앞으로도 이렇게 할 것이다” 라고 하면, 자기 마음대로 생각할 가능성이 많은데, 그렇게 되면 나중에 큰 문제가 발생하고 만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다 구원을 받은 것처럼 될 수도 있고, 물론 그 반대로 한 사람도 구원을 받지 못한 것이 될 수도 있고 말이다.

다시 말해서, 미래에 올 분의 모형으로서 이스라엘을 땅겨야 하는데, 그런데 “야, 이스라엘이 이렇게 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포기하지 않을 거야” 라고 한다면 곤란하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것은 모형이 아니라는 말이다.

만약에 그것을 모형이라고 한다면, 모델 하우스에서 살아가는 꼴이 되고 마는데, 그러니 모형에다가 자꾸만 가치를 두면 곤란하다는 말이다. 물론 미리 보여준다는 차원에서는 분명히 의미는 있겠지만, 그러나 어차피 모형은 영원한 것이 아니고 뜯어내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과거에서 미래를 해석하면 안 되는데, 그런 점을 몰라서 그렇다는 말이다.

◈ 아하, 잘못된 길로 들어섰구나 !!

아무튼 새로운 성전의 등장은, 지금 여러 가지를 이야기하면 헷깔리니 한 가지만 말하겠는데, 그러한 새 성전의 등장으로 인해서 “아하, 우리가 잘못된 길로 들어섰구나” 라고 하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야, 이제 새것이 온다. 좋구나” 라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무안으로 가야하는데 목포로 간다든지 말이다. 그렇게 해야 회복이 되는데, ‘14대, 14대, 14대’ 라고 다시 올라간다는 말이다. 

그렇지 않고 그대로 있다고 하면, “야, 우리가 잘못된 행동을 했구나” 라고 하면서 그냥 있는데, 그러면서 “하나님은 괜찮은 것으로 주겠지” 라고 한다는 것이다. 즉 자기 자신의 부족은 생각하지 않고, 자기 때문에 다른 길로 갔다는 생각은 하지 않고 말이다. 자기가 여기에 이렇게 있으니, 하나님께서 알아서 자기를 찾아와야 한다는 식으로 여기는데, 하지만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장로님들도 신학에 관심이 많아서 공부를 제법 해서 알겠지만, 신학책이 그렇게 많아도 왜 그런 이야기를 하는지, 거기에 대해서는 언급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신학책들이 방금 제가 지적한 것, 즉 “우리가 잘못했지만, 하지만 하나님은 사랑이 많으니 우리를 찾아와 주세요” 라고 하는 식이라는 것이다. 그것을 은혜라고 하면서 말이다.

◈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하시는데 !!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일을 하시는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는 전혀 관심도 없이 자기 일을 하시는데, 그런데 성령께서 우리를 데려다가 바로 이리로(?) 보내버린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요?

이것을 그림으로 그려보면, 우리가 여기로 가야만 하는데 그런데 잘못된 길로 갔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하, 우리가 잘못된 길로 왔구나. 그러니 하나님, 우리를 좀 데리고 가주세요” 라고 하는데, 하지만 그것이 새 언약의 새 성전의 사고방식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새 성전은 무엇인가? 주님은 우리가 다른 길로 가든지 말든지, 그냥 놔두고 가버린다는 것이다. 즉 우리가 구원을 받고 말고 하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단지 우리는 모형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러니 “우리는 구원받았습니까?” 라고 묻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무슨 뜻인지 알겠지요?

예를 들어서, 엄마와 함께 교회에 나갔는데, 그런데 교회를 그만 잘못 선택해서 이단교회로 갔다는 것이다. 복음도 없는 말이다. 그래서 정신을 차려서 자기는 다른 복음적인 교회로 갔는데, 그런데 문제는 엄마가 그대로 남아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기도하기를 “하나님, 우리 엄마를 어떻게 좀 해주세요” 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일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데, 그러나 그런 사고방식이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전혀 자기 입장을 고려하고 있다는 말이다.

◈ 새 성전의 사고방식은?

그런 입장에서 에스겔을 해석하고 신약을 해석하면 곤란한데, 물론 구약도 그렇고 말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새 성전’ 이라는 말인가? 바로 그렇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건져주실 것이라고 여기는, 그러한 사고방식이 깨어져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아하, 하나님은 처음부터 다른 길에 관심이 있어서, 그대로 그 길을 밀어 부치는구나” 라고 것, 그것이 바로 새 성전이라는 말이다.

그러한 차이를 우리가 알아야 207페이지부터 진도를 나가는데, 그것을 이야기하려고 지금까지 이렇게 머뭇거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새 성전을 예언한다고 해서 기존성전을 회복한다고 여기면, 그것이 잘못이라는 말인데, 그렇게 성경을 해석하면 안 된다는 말이다.

대부분의 신학자들이 그렇게 해석하는데, 그러나 기존 성전이 깨어졌다고 해서 그것을 회복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 성전이 깨어지는 것은 그대로 깨어져야만 한다는 말이다. 왜 그런가? 참된 성전은 기존 성전이 깨어진 뒤에 나타나니 말이다. 그러므로 기존 성전은 어디까지나 모형인데, 그 모형은 부수어지고 깨어지라고 만들어 놓았다는 것이다.

◈ 새 성전이 나타나야 비로소 !!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깨어진 것을 붙들고 붙이려고 하는데, “어떻게 구원을 받습니까? 제사를 드릴까요? 사독계열입니까? 무엇으로 구원을 받을까요” 라고 말이다. 그런데 그것을 모형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마지막 때에 예수님이 나타날 때, 즉 새 성전이 나타날 때 비로소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들이 믿음이 없어서 모르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그때는 “아하, 우리가 모형을 붙들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원래 계획은 우리의 구원이 아니라 다른데 있었구나” 라는 것을 비로소 안다는 말이다. 그렇게 모든 것을 자기 중심이 아니라, 오직 주님의 중심으로 이 세상이 돌아가고 있을 깨닫게 되는 사고방식의 대전환, 그것이 바로 에스겔에서 이야기하는 새 성전의 등장이라는 것이다.

제가 지금 복잡하게 이야기했는데,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이것이 참으로 민감하고 묘하게 되어있다는 말이다. 구속사, 언약, 십자가 등을 이해하다가도, 그 전체에다 철로를 깔게 되면, 그것이 제대로 서로 연결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단선이 아니라 복선이 되고 말이다. 그러면 설계도 전체를 다시 점검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박하사탕의 설경구처럼 철길 위에서 “나, 이제 돌아갈래!” 라고 할 수도 없고 말이다.

◈ 새 성전은, 기존성전의 회복이 아니라 !!

제가 미리 말씀을 드리지만, 에스겔의 새 성전은 기존성전의 회복이 아니라, 아직까지 나타나지 않은 성전을 보여주는 일종의 예고편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기존 성전과는 완전히 단절인데, 그런데 이것을 연결하려고 하니 문제가 발생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것을 억지로 잇고자 해서 생긴 성전이 헤롯성전인데, 그것이 곧 유대교 사상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유대교 신학은 과거에서 미래로 새로운 가치를 더 보태는 것으로 진행되는데, 그래서 한국의 조직신학에서도 뭐라고 하는가? 계시가 마치 꽃봉오리가 활짝 피는 것처럼, 그렇게 계시의 점진성을 주장한다는 것이다. 즉 계시가 크고 넓어진다고 말이다. 물론 미국에서 들어온 것이지만 말이다.

그렇게 계시가 점점 더 확대가 되는 연속성으로 정리할 수 있다고 배웠고, 그렇게 알고 있는데, 하지만 그것은 예수님이 오시고 난 뒤에는 다 엉터리임이 드러났는데, 왜냐하면 단절은 계속해서 단절로 유지가 되는 것이지, 어느 순간에 단절이 없어져버리면 곤란하다는 것이다.

◈ 왜 ‘교회를 넘어서’ 인가?

지금 우리가 교재로 사용하는 ‘교회를 넘어서’ 라는 책을 이해했다는 사람들이 별로 없는데, 사실은 내용이 좀 어렵기도 하지만 말이다. 제가 이 책에서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고 하니까, 그림을 다시 그려보면, 이렇게 철길이 놓여있는데, 이 철길이 아브라함 때 갈라지고, 이삭 때 갈라지고, 야곱 때 갈라지고, 모세 때 갈라지고, 그리고 다윗 때도 갈라졌다는 것이다. 그런데 다윗성전은 깨어지고, 끝에는 새 성전이 들어서고 말이다.

그런데 이렇게 다윗성전과 새 성전이 끊어져 있는데, 그런데 이것을 억지로 연결하려고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 새 성전은 예수님하고 연결이 되어있는데, 그렇다면 이 다윗성전과 그 앞에 있는 것들은 소용이 없는가? 끊어졌으면 그것으로 모두가 다 끝난 것인가? 그것이 아니라, 그렇게 끊어진 자체로서 연결이 되는데, 즉 십자가와 죄로서 말이다. 그리고 이쪽은 의로서 연결이 되고 말이다. 이것을 모두 합쳐서 ‘새 성전’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 송제근 교수는 설계도에 문제가 !!

그런데 이렇게 하지 않고, 그냥 그렇게 연결시켜버리면(?), 이것은 마치 유대교 신학과 같다는 것이다. 송제근 교수가 그런 식인데 말이다. 그 양반은 계속해서 연속이 된다고 주장하는데, 그러나 연속성이 아니라 끊어짐이라는 것이다. 그분은 이것을 연결시켜주어야 계시가 연속된다고 너무 안이하고 쉽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언제 기회가 되면 한번 만나고 싶은데, “당신의 설계도가 잘못되었다” 라고 이야기를 해주어야 하니 말이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저의 주장이 아니라 사도바울이 그렇게 이야기했는데, 그래서 그는 이것을 모형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송 교수처럼 보면 이것이 모형이 아니라 실체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굳이 연속성이라고 하면 모형으로서 연속성이지 실체로서의 연속성이 아니라는 말이다. 실체는 끊어져있다는 것이다.
 
◈ 요한복음 7장 19절을 잠시 !!

하지만 계속해서 실체의 연속성을 주장하면 그것은 유대교 신학이고, 바로 그러한 신학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히게 했다는 말이다. 그래서 요한복음 7장 19절에 보면 예수님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는데, 한번 찾아보자.

(요 7:19) 모세가 너희에게 율법을 주지 아니하였느냐 너희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죽이려 하느냐

이것을 예수님의 산상설교와 연결을 시켜야 하는데, 아직도 저는 그런 사람을 보지 못했는데 말이다. 이것을 산상설교에 적용시켜보면,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키려고 하는데, 그래서 그들의 결과는 율법은 연속이 되어야 하고, 비록 자기들이 과거에 많은 죄를 지었지만, 그러나 율법이 연속됨으로서 과거와 연속성을 유지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 대해서 예수님은 뭐라고 하시는가? “너희들이 모세의 율법을 받은 것을 사실이지만, 그러나 율법을 지킨 자가 없다”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에 하신 말씀이 더 중요한데,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죽이려 하느냐”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이것이 얼마나 어렵고 난해한 말씀인지 모르는데, 지금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설명하면서 율법으로 설명을 하시는데, 즉 율법을 주었고, 그런 율법을 지킨다고 하는 자들 때문에 예수님 자신이 억울하게 죽는 십자가 사건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 율법을 받았음, 애를 씀, 메시야를 죽였음 !!

그러니 이러한 십자가 사건을 알려고 하면, 어디서 출발해야 하는가? 먼저 ‘율법을 받았음’에서 출발을 해서, 그리고 ‘율법을 지키려고 애를 씀’ 인데, 그런데 어떤 방식으로 지키려고 했는가? 과거에서 현재로의 연속성으로 지키려고 애를 쓰는데, 그런데 그것이 바로 ‘메시야를 죽이게 되었음’ 이라는 것이다. 그러한 내용이 포함이 되어야 십자가라는 말이다.

* 질문 - 송제근 교수의 주장에 대해서 조금 더 설명을?

그 양반은 구약학 교수인데, 즉 모세오경이 신약성경까지 연결이 된다고 본다는 말이다. 물론 연결이 되는데, 그러나 이 양반은 모세오경 속에 신약에 나오는 예수님의 교훈들이 다 포함이 된다고 보는데, 십자가가 포함이 되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신약의 가르침들이 모세요경 속에도 들어있다고 본다는 것이다.

왜 그렇게 주장하는고 하니, 그렇게 해야만 구약의 소위 ‘시민법’과 같은 것이 오늘날 교회 안에서도 실천이 되는 근거가 된다는 말이다. 이것이 무슨 말인고 하니, 모세오경에 나오는 교훈들, 즉 이웃을 사랑하고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 것을 무시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오늘 교회도 고아와 과부를 돌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제가 주장하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까, 예수님의 산상설교를 거치게 되면 송 교수가 하는 그러한 주장 자체가 십자가 사건을 유발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송 교수는 그러한 인식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고 나서, 물론 율법은 아니지만, 구약의 시민법과 같은 것은 지켜야 한다는 말이다. 이웃을 사랑하라고 예수님도 분명히 말씀을 하셨으니 말이다. 적어도 제가 보기에 그 양반이 주장이 여겨진다는 것이다.

◈ 예수님은 왜 이렇게 난해한 말씀을?

아무튼 이 요한복음 7장에서 예수님은, “너희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도다” 라고, 너무나도 도발적인 말씀을 하신다는 것이다. 그것도 율법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 아니고, 그렇게 율법을 지키려고 노력하고 애를 쓰는 자들에게 말이다.

그러면 당장에 그쪽에서 뭐라고 하겠는가? “당신 같으면, 어떻게 하면 율법을 제대로 지키는 것인가?”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방식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왜 제대로 지키는 사람이 없는고 하니까, “결국 너희들이 나를 죽인다” 라는 식으로 해서, 율법을 지키지 못한다는 것이 드러났다는 것이다.

지금 예수님의 말씀하시는 논리가 굉장히 복잡한데(?), 왜 그런고 하니까, 우리 인간들 속에는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 가득 들어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인간의 그런 것들을 요리 조리 다 피해버리고, 궁극적으로 인간이 죄인임을 드러내기 위해서 이런 식으로 말씀을 하신다는 것이다.

◈ 아니, 누가 당신을 죽이려 하는가?

그래서 20절에 보면 그들이 하는 말이, “당신은 귀신이 들렸도다. 누가 당신을 죽이려 하나이까” 라고 한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의 말이 맞지 않는가? 어떻게 율법을 이야기하다가, 그런 율법을 지키지 못한다고 하면서 갑자기 자기들을 살인자로 만드느냐는 것이다. 왜 말도 안 되는 그런 정신이 나간 미친 소리를 하느냐는 말이다.

(요 7:20) 무리가 대답하되 당신은 귀신이 들렸도다 누가 당신을 죽이려 하나이까

그러니 예수님은 전체를 보고 있는 유대인들은 짧게 자기들의 입장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자기들이 도대체 부모로부터 무엇을 물려받았는지를 모르고, 자기 입장만 고수하고 있다는 말이다. 사실 이번 부분이 정말 어려운데, 다음과 같이 대화가 되어야 납득이 된다는 것이다.

* 예수님 : 율법을 잘 지키고 있나?
* 인간들 : 노력은 하고 있는데, 힘이 많이 듭니다.
* 예수님 : 그렇지. 내가 한 수 가르쳐 줄 테니 이렇게 한번 해봐라.
* 인간들 : 감사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런데 막상 예수님은 뭐라고 하시는가?

* 예수님 : 율법을 잘 지키고 있나?
* 인간들 : 노력은 하고 있는데, 힘이 많이 듭니다.
* 예수님 : 그렇지. 너희들이 나를 죽이려고 하는구나.
* 인간들 : ? ? ?

이렇게 되어버리니, 도대체 어떻게 하겠느냐는 것이다. 귀신이 들려서 하는 미친 소리로 들리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다는 말이다. 이렇게 요한복음 7장으로 산상설교를 바라보게 되면, 산상설교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바르게 살아가야 되는 삶의 지침이 아니라, 그것은 그 당시 유대인들의 한계를, 즉 인간들의 한계를 드러내는 것이라는 말이다.

◈ 산상설교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증거 !!

그러므로 이 산상설교를 인간들에게 비추어보면 어떻게 되는가? 인간들은 자기들 나름대로의 율법관으로 인해서 결국은 십자가 사건이란 비극적인 사건을 야기시킬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산상설교는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증거하고 있다는 것이다. 결코 인간들의 삶의 지침이 아니고 말이다.

이렇게 산상설교는 인간들이 예수님을 밀쳐서 죽일 수밖에 없음을 증거하는 것이니 분명하게 ‘단절’ 인데, 이러한 단절은 영원히 계속해서 이어지는데, 천국과 지옥이 단절되어있듯이 말이다. 그러므로 쓸데없이 이런 단절을 연결하려고 하지 말라는 것이다.

◈ 성경은 확인시키는 책 !!

그러니 성경은 납득하라고 준 책이 아니라, “니가 성령을 받은 사람이 맞아? 니가 정말로 예수님을 사랑하기는 하는가?” 라는 것을 확인시키는 책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우리가 이 성경말씀을 지키려고 하거나, 혹은 다른 사람을 설득시키려고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더욱이 이 사회나 교회를 개혁시키는 책도 아니고 말이다.

그래서 제가 송제근 교수의 책을 살펴보면서 그래도 안타까운 것은, 한국교회의 문제점들을 낱낱이 지적하면서도 결국 그 양반에게서 나오는 것은 ‘괜찮은 교회 만들기’ 라는 것이다. 그러니 아주 부드럽고 점잖은 말로 표현해서 철이 없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데, 차마 믿음이 없다고는 말하기에는 좀 그렇고 말이다.

하지만 이 양반이 다른 교수와의 차이점은 무엇인고 하니, 만약에 ‘아니다’ 싶으면 단호하게 ‘노’ 라고 이야기하고, 그쪽과 타협할 생각은 하지 않는다는 것, 그런 점은 정말 마음에 든다는 것이다. 그러니 성격이 다른데, 즉 타협을 할 줄 모른다는 말이다. 하지만 성경말씀을 바라보는 시각은 아직도 한참 멀었다는 것이다.

◈ 에스겔의 새 성전은, 다윗인가? 예수님인가?

지금 교재 207페이지를 하기 위해서 이렇게 엄청 뜸을 들이면서 준비운동을 하고 있는데, 여기에서 제목인 ‘새 성전의 등장’은 다른 말로 하면 에스겔의 해석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데, 즉 “에스겔서를 어떻게 볼 것인가?” 라는 말이다.

이것을 하기 전에 아까 빠트린 것이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기존의 성전은 다윗이고, 새 성전은 에스겔인데, 그리고 예언대로 장차 예수님에 의한 새로운 성전이 있고 말이다. 그렇다면 이 에스겔에서 말하는 새 성전은 “기존의 다윗성전과 관련이 있는가? 아니면 다가올 예수님의 새 성전과 관련이 있는가?” 라는 것이다. 

그런데 둘 다 관련이 되어버리면 예수님이 나올 수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기존의 다윗 성전은 건축물인데, 하지만 예수님에 의한 성전은 건축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그러한 건축물을 헐어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돌 위에 돌 하나가 남지 않도록 말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슨 변화가 일어나야 그렇게 된다는 말인가?

◈ 어떻게 건물이 몸으로?

건물인 성전이 졸지에 “건물은 안 돼” 라고 하는 내용이 포함이 되어야, 비로소 “아하, 건물이 아니고 예수님의 몸이구나” 라고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 에스겔서에서 무슨 이야기가 있었기에 그렇게 되었느냐는 말이다. 그것은 바로 기존의 성전건물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가 반드시 포함되어야 하는데, 즉 “애초에 그런 건물은 성전이 아니었어” 라고 하는 것이 들어있는 채로 신약으로 넘어와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새로운 건축물이 가지고 있는 존재의 가치와 의미를 모두 다 때려부수어야 하는데, 그렇게 부수는 근거가 도대체 무엇이냐는 말이다. 그냥 망치나 해머를 들고 설치면 되는가? 무조건 “야, 건물이 너무 보기 싫다. 왕창 부수어라” 라고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 유대인들은 왜 헤롯성전을 건축했을까?

여기서 우리는 그런 근거가 무엇인지, 그것을 묻기 이전에 유대인들이 이 에스겔서를 달달 외우는데, 그렇게 외우면서 건축 구조물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유대인들에게는 에스겔에 나오는 건축물에 대한 부정이 어떻게 발견이 되었다는 말인가? 발견이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헤롯성전을 40년 동안 짓다가 안 되어서 다시 짓고, 그렇게 열심히 짓고 또 지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목사님, 에스겔을 보면 성전의 건축 구조물이 달라지고 몸이 된다고 하는데, 도대체 어느 대목이 그렇습니까?” 라고 한다면, 하지만 그 구절을 이야기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성경에 도사인 유대인들도 이 에스겔을 달달 외우면서도 결국 튀어나온 것이 건축 구조물인 헤롯의 성전이니 말이다.

그래서 요한복음 7장에 보면, 유대인들이 초막절에 성전에서 물을 붓고 하는데, 그것이 다 에스겔의 새 성전을 염두에 두고서 하는 행동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아무리 에스겔을 객관적으로 선입관이 없이 있는 그대로 본다고 해도, 기껏해야 유대인들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말이다.

왜 그런가? “초막절을 준수하라, 레위지파를 주지하라, 다윗과 언약을 맺을 것이다” 라는 것들을 문자 그대로 보게 된다면, 거기에는 건축 구조물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니 예수님이 욕을 얻어먹었는데, 아까 요한복음 7장에서 예수님은 유대인들을 보고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다고 했는데, 그런데 그들은 뭐라고 했는가? 율법에 의하면 오히려 예수님이 이단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 유대인들과 예수님의 상이한 성경해석 !!

이렇게 동일한 ‘에스겔서’ 라는 성경책을 놓고서 전혀 서로 다른 태도를 취하는데, 문자적으로 성경을 해석하는데 귀신인 유대인들은 그 성경말씀을 보고는 그대로 성전을 완성하기 위해서 예루살렘에다 성전을 건축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떻게 했는가? 동일한 에스겔서를 보고도 “에라이, 헐어버려라” 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건방지게도 우리가 에스겔을 안다고 깝죽거릴 수가 있는가? 에스겔을 접근해나가면서, 우리는 이런 두 가지의 내용을 다 알고 있어야 제대로 에스겔에서 예수님의 생각을 뽑아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어라, 유대인들이 맞네. 참, 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였는데 맞다고 하면 안 되지. 그러면 예수님이 맞네. 그러면 도대체 뭐야? 아이쿠, 머리야” 라고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에는 신학자들이나 한국교회가 이 에스겔서에 대해서는 설교시간에 거의 언급을 하지 않는데, 모든 것이 너무나 부정적이니 말이다. 긍정적인 자기들의 목회생활에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물론 비겁하고 졸렬한 짓이지만 말이다.

그러니 우리의 과제가 무엇인고 하니, 이 에스겔서 속에서 유대인들이 보는 관점도 알아야 하고, 또한 동일한 에스겔서를 보면서, 그 말씀을 다 이루었다고 하는 예수님의 관점도 알아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두 관점은 서로 섞이지 않고 강하게 밀치고 배척하는데, 그러한 사고방식을 이 에스겔을 공부하면서 다 끄집어내어서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 핵심 키워드는 바로 ‘人子’ !!

이것이 참으로 힘든 작업인데, 그렇게 끄집어내는 힘든 작업의 핵심은 바로 ‘인자(人子)’ 라는 것이다. 이 인자개념 속에 이 두 가지의 사고방식이 모두 다 들어있다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보고는 ‘인자야!’ 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바로 장차 오실 인자가 되시는 분에 대한 모형이란 것이다. 에스겔이 그렇다는 말이다.

어제 아침에 그런 설교를 했는데, 하나님께서 주시는 용어 속에는 장차 하나님이 하실 일의 기능이 담겨있다고 말이다. 그러니 이렇게 하나님께서 ‘인자야!’ 라고 했을 때는, 장차 오실 인자가 되는 분이 이 에스겔서의 내용을 다 완성시키는 임무를 띠고 이 땅에 오신다는 것이다. ‘인자’ 라는 분의 역할이 그렇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 인자가 어떻게 성전과 관련이 되는가? 바로 그러한 점을 에스겔에서 찾아보자는 것이다.

드디어 교재 207페이지를 보자.

** [7. 새 성전의 등장] - 에스겔에 있는 새 성전에서 옛 솔로몬의 성전을 다시 만난다는 것은 참으로 의미심장한 일이다. 전에 살았던 인물인 다윗 왕을 거기서 다시 만난다는 것이다.

◈ 왜 다윗을 다시 만나는가?

여기 에스겔의 새 성전에서 굳이 다윗 왕을 다시 만나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지나가면 그만인데 말이다. 그리고 만나려고 하면 그 유명한 솔로몬 왕을 만나지 말이다. 왜냐하면, 다윗은 성전을 지어드렸던 인물이기에 그렇다는 말이다. 즉 에스겔서는 새 성전을 앞당겨 보여주기 때문에, 그런 성전에 관여한 자가 누구인지, 그것을 먼저 찾고 있다는 것이다. 그가 바로 다윗이라는 말이다.

성전은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의미의 공간이고 그 증거인데, 그러니 성전이 깨어졌다면 하나님이 떠났다는 의미라는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이 다시 오시려고 하면 성전이 먼저 생기고, 그 성전 안에 하나님이 함께 계신다는 말이다. 즉 “내 안에 아버지가, 아버지 안에 내가 있는 것처럼, 너희들도 내 안에 있을 것이다” 라는 것이다.

◈ 에스겔은, 백성들과 하나님을 만나도록 !!

그러니 예수님이 인자가 되어서, 자기 백성과 하나님을 만나도록 주선하는 역할을 감당한다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제 인자가 된 에스겔 선지자는 옛 성전 안에서, 즉 회복된 성전 안에서 백성들과 하나님을 만나도록 주선을 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런 일을 시키는 것은 하나님이지만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살펴보자.

** 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건축 조형물로서의 성전이 무너질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영원성을 보장받는 것은 다윗가문이 바로 유일한 ‘하나님의 집’이기 때문이다.

◈ 다윗가문이 바로 유일한 하나님의 집 !!

여기에 보면 “다윗가문이 바로 유일한 하나님의 집이기 때문이다” 라는 대목이 나오는데, 이것이 바로 에스겔서를 해석하는 힌트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건축 구조물에서 인격체로 어떻게 연결되는가?” 라는 것인데, 즉 어떻게 성전 건축물이 하나의 몸으로 바뀌게 되느냐는 것인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 그 중간에 무엇이 들어가는고 하니, 바로 ‘가문’이 들어간다는 것이다. 가문이 말이다.

아무튼 성전 건축물을 지은 것은 분명 다윗이지만, 하지만 다윗에게 하나님은 뭐라고 말씀하셨는가? “내가 거할 곳은 구조물이 아니라 너의 가문이다” 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니 가문은 분명히 구조물은 아님이 분명한데, 그렇다고 손에 잡히는 것도 아니라는 말이다.

이 가문은 분명히 핏줄인데, 그리고 단절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단절은 무엇을 심판하는데 있는고 하니, 마지막에 등장하는 약속된 그 가문의 주인공, 즉 그 가문을 부정하는 참된 주인공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그분은 원래 숨어 있었는데 마지막에 노출이 된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약속의 가문을 그동안 지탱해왔던 숨어있던 분이 마지막에 자기의 정체를 드러내면서 등장하는데, 그분이 곧 그 가문의 자손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분이 누구인가? 진짜 하나님과 함께 있다고 하는 ‘몸’이고, 바로 ‘성전’ 이라는 것이다.

◈ 일단, 다윗가문은 아닌데 !!

그렇다면 그 가문은 어느 가문인가? 그게 다윗가문이라고 하면, 아마 사람들은 자기도 안다고 하면서, 즉 “솔로몬도 다윗가문, 느헤미야도 다윗가문, 그 못된 아하스 왕도 다윗가문, 히스기야 왕도 역시나 다윗가문, 아하 바로 그 가문이구나” 라고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가문이 아닌데, 왜 아닌고 하니, 하나님이 손수 지으신 가문인데, 멜기세댁의 반차를 좇아서 말이다. 앞에서 말한 가문은 육에 속한 가문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지으신 가문은 무엇인고 하니, 다윗 왕이 등장하고 난 다음에 다윗가문이 등장하듯이, 장차 오실 분도 마찬가지인데, 먼저 왕이 등장하고 가문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 왕은 예수님이고, 그 가문은 성도들 !!

그렇다면 이 왕이 누구인가? 바로 예수님인데, 가문은 그의 기업이고, 그의 백성들이고, 또한 상속된 자녀들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예수님의 형제들이고 말이다. 그것이 바로 참된 이스라엘 백성들이고, 오늘날 교회이고, 성도들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보니 하나님의 약속대로 모든 것이 빈틈없이 이루어지는데, 그러니 하나님은 약속에 위반이 되는 것은 결코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도 다른 것에 신경을 쓰지 말고 “손수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시는가?” 라는 것에 관심을 두자는 것이다.

교재 209페이지를 보겠는데, 먼저 히브리서 9장 11절과 12절을 보자.

(히 9:11)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히 9: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 이 본문에서 ‘손으로 짓지 아니한’ 이라는 대목이 나온다. 참된 성전은 사람의 의지나 요망사항과는 무관하다는 것이다. 다윗이 성전을 짓겠다고 제안했을 경우에도 이 원칙은 여전히 관여된다. 즉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주어진 기업과 또한 다윗가문 그 자체를 오직 유일한 왕이신 하나님 쪽에서 친히 만드시는 성전으로 삼겠다는 것이다. 

◈ 손으로 짓지 아니했다 ??

그러니 혈통적인 다윗가문은 다윗가문이 아닌데, 인간이 손이 아닌 하나님이 손수 만들어내시는 다윗가문이 곧 성전이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손으로 짓지 아니했다” 라는 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인가? 이 부분이 제일 어려운데, 제가 알기로는 이것을 답변할 사람이 거의 없지 싶은데 말이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사람의 손으로 짓지 아니한 가문을 어떻게 손수 짓느냐고 한다면, 그것은 바로 자기 손으로 가문을 유지하겠다고 하는 자에 의해서 죽임을 당한 분, 그분이 곧 인간의 손으로 짓지 아니한 가문이 된다는 것이다. 그 사람이 누구인가? 바로 ‘우리아’ 라는 말이다.

신약이 어려운 이유도 이런 것인데, 십자가가 왜 인간의 지혜를 초월하는고 하니, 십자가가 계속해서 인간들이 할 수 있는 일들과 충돌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들은 뭐라고 하는가? “하나님, 제가 전혀 할 수가 없으니 어떻게 좀 해주세요” 라고 하면서, 하나님에게 보충해달라고 부탁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문제는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런 태도가, 즉 “하나님, 저는 하지 못합니다” 라는 것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께서 하고 있는 일들을 방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인간 자신들은 깨닫지 못하고 있지만 말이다. 물론 그렇다고 하나님이 방해를 받지는 않지만 말이다.

◈ 목사님, 그것은 아니잖아 !!

예를 들어서, 어떤 목사가 자기가 복음을 안다고 하면서 설교도 그렇게 복음적으로 잘한다고 자부를 하는데, 그렇게 해서 교회가 부흥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다는 말이 “봐라. 내가 우리나라에서 복음도 알고 목회도 제일 잘했다” 라고 하면서 자기는 훌륭한 목사이고, 선지자적 소임을 감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보고 새로 나온 교인이 뭐라고 하는고 하니, “목사님은 설교시간에는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과 영광을 이야기하면서, 그런데 교회가 조금 컸다고 해서 다른 교회 목사와 비교하면서 자신의 우월성을 강조하시는데, 그렇게 하시면 됩니까?” 라고 시비를 걸었다는 것이다. 그러자 목사가 “제가 과거에도 복음을 전했고, 지금도 전하고 있는데, 그래서 교회가 부흥했으면 잘난 것은 맞지 않는가?” 라고 했을 때, 그 교인은 엄청나게 배신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즉 자기는 주님을 만나려고 왔는데, 그런데 목사가 그 앞으로 가로막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인간이라는 것은, 자기가 복음을 알고 뭔가 좀 된다 싶으니, 그것이 그냥 그대로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만나보고 싶어하는 참된 성도를 괴롭히고 가로막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소위 복음을 안다는 목사가 그런 짓거리를 하고 있더라는 것이다. 이근호도 마찬가지이고 말이다.

바로 그러한 관점에서 신약성경을 설교하게 되면 모두 되는데, 물론 구약도 그렇지만 말이다. 비로소 성경해석이 된다는 말이다. 즉 자기는 언제나 주님의 일을 방해만 하는 죄인 중의 괴수이라는 사실을 알고, 그런 관점으로 성경말씀을 보게 되면, 뚫리지 않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 성전은 불타고 없어져야 !!

그리고 우리가 에스겔서를 보면서도 다음과 같이 하나님께 따질 수도 있는데, 도대체 우리가 뭐라고 하는지 하나님과의 대회를 잠시 들어보자.

* 우리들 : 하나님, 제가 이 에스겔서를 보면서 할 말이 많습니다.
* 하나님 : 그래? 한번 해봐라.
* 우리들 : 하나님이 성전을 지으라고 해서, 그렇게 좋은 재료로 지었는데 왜 부수어 버립니까?
* 하나님 : 그것은 내가 에스겔에서 말했는데, 너희 백성들이 엉터리라서 그렇게 했다고 말이다.
* 우리들 : 하지만 그것은 너무한 것 아닙니까? 우리가 잘못되었으면, 다시 가르치고 훈계해서 바로 잡으면 되지, 아니 자기 백성들이 잘못했다고 그렇게 성전을 때려부수고 불태우면 됩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오기를 부리는 것밖에 되지 않습니다. 노동자들이 데모를 해도 서로 설득하고 타협을 하는데, 그런데 일방적으로 직장폐쇄를 해버리면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이 무슨 악덕 기업주입니까? 그것이 무슨 사랑입니까?
* 하나님 : 그래서?
* 우리들 : 정말로 우리를 사랑한다고 하면, 그래도 일단 성전은 유지하면서 선지자를 보내든지 해서 잘못을 지적하고 고치게 하면 되지 않습니까? 그렇게 개선하고 잘못을 수정하도록 하면 되지, 말을 듣지 않는다고 성전을 부수고 쫓아내고 하면 어떻게 합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너무 자기 성질을 부리는 것이 아닙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제가 하나님의 마음을 곡해했습니까?
* 하나님 : 이제 하고 싶은 말을 다 했냐? 이 바보야, 성전이 불타고 없어져야 너희들이 얼마나 엉터리임을 드러난다는 것을 왜 모르는가? 너희들의 근본적인 본성이 무엇인고 하니, “성전은 없어져야 돼. 그냥 박살이 나야 돼. 하나님은 죽어야 돼. 하나님은 없어져야 돼” 라는 것인데, 그런데 근본적인 너희들의 죄악 된 본성이 성전이 불에 타고 없어져야 너희들 속에 이미 자리잡고 있음을 알 것이 아니냐는 말이다. 너희들에게 그런 못된 마음이 있는 줄 너희들은 상상도 못했지? 그러니 이것보다도 더 큰사랑이 어디에 있는가? 이 엉터리 바보들아!

◈ 제일 큰사랑은, 자기가 죄인임을 깨닫는 것 !!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이다. 지금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가지고 이야기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렇게 십자가를 가지고 이야기를 해야만, 십자가에 예수님을 죽이는 일에 가담한 우리들에게 아직도 그 성전이 우리 속에 있음을 알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도대체 그것보다도 더 큰사랑이 어디에 있느냐는 것이다.

자기 죄를 깨닫는 것이 제일 큰 은혜이고 사랑인데, 그렇게 자기를 죄를 아는 것이 제일 기쁜데, 속이 다 후련하고 날아갈 것 같다는 말이다. 평생 자기를 괴롭혀 온 것이 그냥 한꺼번에 사라지는 기분이라는 말이다. 인간이 자기 죄를 모르면 고민에 빠지고 번민하게 되는데, 하지만 죄를 알게 되면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이기에, 항상 감사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보다 더 시원한 게 어디 있느냐는 말이다.

그러니 교회에 인상을 쓰면서 오는 사람들은 좀 수상한데, 그래서 어제 오전설교를 하면서 제발 좀 찡얼대지 말라고 했다는 것이다. 교회에서는 감사하기도 바쁜데, 그런데 찡얼댈 시간이 어디 있느냐는 것이다. 그만큼 욕심이 많으니 그렇게 짜증을 내고 찡얼거리고 하는데 말이다.

◈ 에라이, 죽어라 이놈아 !!

아무튼 이 에스겔서의 해석이 어려운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하나님의 사랑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고 하니, 하나님께서 성전을 불태우면서 성질을 부리면서 “에라이, 나가 죽어라. 이놈들아!” 라는 것으로 보자는 것이다. 즉 이러한 것 전체가 바로 사랑이고 은혜라는 느낌을 가지고 이 에스겔서를 해석하고 살펴보자는 말이다. 사실 그렇게 해야만 제대로 해석이 되고 말이다. 그런 자체가 우리의 실체를 드러내게 하는 사랑인 것을 말이다.

마지막으로 교재 209페이지에 있는 열왕기상 5장 3절에서 5절을 살펴보자.

(왕상 5:3) 당신도 알거니와 내 부친 다윗이 사방의 전쟁으로 인하여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전을 건축하지 못하고 여호와께서 그 원수들을 그 발바닥 밑에 두시기를 기다렸나이다
(왕상 5:4) 이제 내 하나님 여호와께서 내게 사방의 태평을 주시매 대적도 없고 재앙도 없도다
(왕상 5:5) 여호와께서 내 부친 다윗에게 하신 말씀에 내가 너를 이어 네 위에 오르게 할 네 아들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전을 건축하리라 하신대로 내가 내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전을 건축하려 하오니

** 이 본문에서 다윗가문(다윗 집)의 기념비적인 결실은, 이스라엘의 모든 정치적 상황이 다윗언약에 준해서 평정되어 있는가에 달려있다.

◈ 하나님은 일관되게 ‘언약대로’ !!

그러니 다윗 이후에 돌아가는 모든 일들이 이미 어디에 근거해있는고 하니, 다윗에게 주어진 일에, 즉 다윗언약에 근거해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미 기준이 서있다는 것인데, 그러한 기준에 의해서 모든 일들이 요동을 친다는 것이다.

그 기준이 무엇인가? 성전을 성전답게 하는 것인데,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하나님의 은혜성을 은혜성답게 그렇게 여기지 않는 놈들은 다 작살내겠다는 말이다. 그것이 히스기야든, 요시아든 간에 말이다. 그 어떤 왕이든지 간에 그 왕을 작살내는데 있어서, 그 기준이 바로 친히 하나님이 다윗가문을 만든 그 정신에 어긋나는 놈들은 일관되게 박살을 내는데, 그러한 일관성이 곧 사랑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지금 우리가 만약에 복음에 대해서 불만이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은 주저 없이 우리 따귀를 때리고, 집안을 망하게 하고, 교회를 거덜나게 하고, 그냥 박살을 내어버린다는 것이다. 바로 그것을 저주가 아니라 사랑으로 받아들여야, 그런 자가 바로 성도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야, 하나님은 참으로 일관되게 다윗언약대로 일을 하는데, 그런 사랑으로 구원하시는데 빈틈이 없구나” 라고 것이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그것을 기쁘게 받아들일 때, 그것이 성도의 모습이라는 말이다. 하나님은 자기 약속밖에 모른다는 사실에 대해서, 그것을 기쁨으로 박수를 치면서 고마워하면서 환호를 하는 것이 참된 성도라는 것이다.

◈ 하나님의 열심이 성전을 불태웠음을 잊지 말아야 !!

그런 조시로(뜻으로?) 다윗이후에 모든 왕들은 다 망해야 하는데, 그래서 결국은 이스라엘은 망했고, 그래서 성전도 부서지고 건축물도 불에 탔다는 것이다. 그렇게 건축물이 불에 탈 때, 진짜 다윗가문을 세우고 참된 성전을 세우려고 하는 하나님의 열심, 바로 그 하나님의 열심이 건축물을 불 태웠다는 것을 비로소 깨닫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그렇게 성전이 불타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다고, 즉 자기는 맞아도 싸다고 여기고, 그것을 기쁨으로 받아들일 때, 나중에 그것이 신약시대에 예수님이 성전을 부수는 그 취지를 제대로 알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니 주님이 하시는 모든 일에 대해서 ‘예!’가 된다는 것이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뜻이 한결같은데 왜 우리 인간들은 마음이 매일같이 바뀌고 있습니까? 요동치는 우리의 마음을 불쌍히 여겨주시고, 일관되게 자기의 사랑으로 자기의 백성을 만드시는 주님의 일에 감사하는 저희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09, 04, 25 오후 9시 50분에 마침.

                                                                       그런데 숭례문은 왜 불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