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약관련

약속과 언약3- 070313

아빠와 함께 2014. 2. 21. 15:46

-03-13 14:36:06 조회 : 3298         
[언약과 약속에 대하여] 2006-10-26 이름 : 관리자 (IP:122.47.52.38)

구약신학에 대한 재질문 
정수태   2006-10-25 12:38:07, 조회 : 109, 추천 : 0

목사님의 답변을 듣고 질문을 다시드립니다.

1. 일단은 목사님의 답변은 구약을 언약신학적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보는 것 같습니다.
2. 그 언약신학이 십자가의 복음-인간의 죄성을 드러내는 십자가의 피를 발췌해야 정당한 해석이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런 부분에 있어서 저도 동의합니다.
<목사님의 답변의 근거>
" 귀하께서 문의하신 신학적 제안들은 명칭의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그 기본 바탕에 인간이 해석 능력에 대한 부정성이 깔려 있지 않기에 기각하고 싶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신학자가 말하기를 , "나는 모형론을 옹호하지만 그것으로 십자가 복음을 구약에서 발췌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고백한다면 그 분의 모형론을 저는 옹호하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목사님,
목사님께서 언약이란 것은 목사님의 말씀 그대로을 옮기면 주와 주께서 맺으신 언약의 역사적 진취성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즉 새언약을 통한 사도들의 해석이라고 했습니다.

질문
1)그렇다면 언약을 역사적 진취성과 성취성이라고 했다면 언약은 구원역사 속에 드러나는 모든 것이라는 말씀인지요?
다른 말로 하면 모형론이든 , 창조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창조행위라든지, 그 어떤 것이든지, 십자가의 복음을 말할 수 있으면 그런 의미에서 다 언약적이라고 볼 수 있다라는 말씀인가요?

1)의 답이 그렇다면  그런 해석이 가능한 이유는 예수님과 사도들이 그렇게 보기 때문이란 말씀인데
궁금한 것은 목사님은 언약의 시작은 노아언약이라고 하셨는데 앞 뒤가 맞지 않습니다. 전에 제가 창조언약에 대해서 말씀드릴 때 창조언약의 당위성을 거부하신 것 아닌가요?

저의 생각이 틀렸다면 다시 바로 잡아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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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구약신학에 대한 재질문 
이근호   2006-10-25 15:49:20, 조회 : 112, 추천 : 0

로마서에서 사도 바울은 '약속'과 '언약'을 구분하고 있습니다.

노아 언약 이 전의 것을 전부 포함해서 '약속'의 범주에 넣을 수 있고 사도 바울은 그 '약속'을 예수 그리스도로 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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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약과 약속에 관한 질문 
정수태   2006-10-26 20:35:12, 조회 : 139, 추천 : 1

언약과 약속에 관한 질문입니다.

목사님
목사님께서 노아언약 이전은 약속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질문입니다.

1. 왜 하나님은 노아 이전에는 약속으로 그리스도를 보이셨고 노아 이후에는 언약으로 보이십니까?

2. 또 민족적(이스라엘이라는 통로) 언약으로 아브라함을 통해 언약하셨다면 왜 언약적 차원을 아브라함으로
부터 하면 되지 노아때 부터 언약을 통해 그리스도를 증거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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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언약과 약속에 관한 질문 
이근호   2006-10-26 21:27:50, 조회 : 145, 추천 : 1

1. 구약에 언약이 창세기 6:18에 언약이 처음 나오니, 처음 언약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2. 인간 구원의 배경이 되는 땅의 언약 하에서 인간 언약으로 나아갑니다.
   땅을 상대로 구원의 실상을 시작 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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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를 구합니다(시간,,,) 
고관규   2006-11-01 14:59:18, 조회 : 93, 추천 : 0

이곳에  시간ㅡ 에 대한  글이 있으면
어느 목록의 어느 부분을 보아야 하는지요
참고하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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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일단은... 
이준   2006-11-01 16:27:22, 조회 : 85, 추천 : 0

일단은 아래 글들부터 우선적으로 읽어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성경연구 메뉴->성경신학의 세계1->"현대 물리학의 시간과 성경에서의 시간"
성경연구 메뉴->성경신학의 세계2->"구원에 있어 시간과의 연관성 문제(3)"
성경연구 메뉴->성경신학의 세계2->"구원에 있어 시간과의 연관성 문제(2)"
성경연구 메뉴->성경신학의 세계2->"구원에 있어 시간과의 연관성 문제(1)"
성경연구 메뉴->철학과 신학의 허상->"종말 의식과 인간적 시간"

특히, 위의 글들 중에서 "구원에 있어 시간과의 연관성 문제" 시리즈의 경우, 다 읽으신 다음에 박길현씨가 그 글들을 비판한 것, 그리고 그 비판에 대한 이근호 목사님의 반박문까지 아울러 읽어 보셔야 할 것입니다(이곳 자유게시판의 "이전자유게시판으로가기" 클릭).

**박길현씨의 비판글 바로가기**

http://www.crossvillage.pe.kr/tspboard/board.cgi?id=ixdeos&action=view&gul=83&page=1&go_cnt=0&gubun=sub_cmt&keyword=박길현&start_num=

**이근호 목사님의 반박문 바로가기**

http://www.crossvillage.pe.kr/tspboard/board.cgi?id=ixdeos&action=view&gul=86&page=1&go_cnt=0&gubun=sub_cmt&keyword=박길현&start_n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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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일단은... 
고관규   2006-11-01 17:17:34, 조회 : 65, 추천 : 1

네,,,이준님  감사드립니다.
정말 참고가 많이 되겠습니다.
읽다가 모르고,막히면....
그래도 이해안되면 전화로라도.... 개인교습을 부탁...   ㅋㅋㅋ
아님 ㅡ 이근호 목사님에게 교습받든지...ㅎㅎㅎ

지난번 마을의 교제권의 강도사인허?나 가입건과,,공부커리큘럼의 연장선상에서와
같은 맥락에서 슬슬 공부좀 하려구요
말씀 각권의 강해와,설교와,해석을 말입니다
역시..철학적신학과,신학적철학의 공부도 같이 말입니다

이런 맘에서의 질문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참고)  십자가를 아십니까?의  주일 ㅡ부분도 참고가 되더라구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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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일단은... 
이준   2006-11-01 19:36:38, 조회 : 64, 추천 : 0

그간 이곳 십자가마을에 게재되어 있는 말씀들 가운데
감히 접해 온 것들을 더듬어 찾아서 소개해드린 것일 따름입니다.

저는 이곳에 들를 때마다
그저 주님 밥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라도 얻어먹으면
감지덕지함에도, 오히려 과한 은혜의 말씀들을
접하고 놀라게 되는 그런 자일 뿐입니다.-_-;;

...

우수한 학생은 평소에 강의도 충실하게 듣지만,
'계획성' 있고 '밀도' 있는 개인 공부를 하기 마련이지요.

지역별로 목사님께서 수준 높은 교재들을 가지고
성경 공부를 이끌어가고 계신 것으로 아는데,
적극 참여해 보심이 도움 될 줄로 압니다.
("전국성경공부안내" 메뉴에 자세한 사항이 나와 있습니다.)

아울러,
(저처럼 시골의 평범한 일반 직장 생활에 몸담고 있는 이들과는 달리,
그간 전임사역자에 대한 소명과 각오를 피력하신 것처럼)
현재 하시는 일 가운데서도 '폭넓게', '깊이깊이', 그리고 '열심히'
공부하셔야겠지요.

아, 그리고
질문답변 게시판에는 이근호 목사님께서 소개해주신
신학생들의 필독도서 목록도 게재되어 있습니다.
검색해 보시고 참고하시기 바라구요.

그리고, 늘 건강도 꼭 챙기시구요.
주님께서 당신의 말씀만을 들려주시며,
늘 자기는 부인하게 하시는 또 한명의 전임사역자분의 탄생을 기대하면서...

주님안에서 이준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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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일단은... 
고관규   2006-11-02 09:40:53, 조회 : 67, 추천 : 0

네,,조언 정말 감사드립니다.
말씀처럼 유념하여 전력할 것입니다.
이 곳에 들어올 때마다...
날마다 절망하고,,부족함에,,,,오히려 겸손의 훈련을 하게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분명 참고정도가 아니라....전환점이 될 것입니다.

언제든지...어떤 상황에로..이끄시든지...
말씀과,복음으로  무장되기를 소원하고 있습니다.

이준님의 충언과,위로가 큰 힘이 될 것을 의심치 않으며...
앞으로도 지도와,,교제를,,,바라오니
많이 도와주세요
감사합니다. 
모두에게 평안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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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약궤 안에 있는 증거판에 관하여... 
김대영   2006-11-01 23:41:15, 조회 : 88, 추천 : 0

목사님, 성경을 보다가 질문이 있어서 또 들렀습니다. 제가 알기로 언악궤 안에 있는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두 돌판과, 만나 항아리가 인간의 죄악을 담고 있고 그걸 어린

양의 피가 덮고 있는 상태가 바로 인간의 죄악을 덮어 주고 있는 하나님의 모습이라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출25:16,21에 보면 언약궤 안에 증거판을 두라고 말하고 있는

데 이때는 모세가 돌판을 깨뜨리기 전이라서 인간의 죄악이 그속에 담겨 있다고 보기 어렵지 않습니까? 물론 신10:5에서 언약궤안에 들어간 돌판은 새로 받은 것이라서

결과론 적으로보면 인간의 죄악이 담긴 돌판이 법궤 안에 들어가지만 출20에서는 금송아지 사건 이전이라서 구체적 백성들의 죄가 드러나지 않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인간의 죄악이 깃든 돌판을 증거궤에 넣으라 한것이 아니라 죄짓기 이전에 이미 돌판은 법궤에 들어가기로 되있었던것 아닙니까? 아니면 제가 뭔가 보지 못하는 부분이

있는지 가르침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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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언약궤 안에 있는 증거판에 관하여... 
이근호   2006-11-02 07:24:14, 조회 : 114, 추천 : 1

하나님은 미리 내다보고 일하십니다.

신명기 32장에 보면 마치 이스라엘이 이미 타락했음을 전제로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 같습니다.

이것은 인간이란 철저하게 하나님의 언약을 증거하기 위한 용도로 활용됨을 보여줍니다.

따라서 성경을 볼 때는 항상 인간 구원을 위한 책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인간의 죄와 그것을 덮는 주님의 은혜가 함께 보여주는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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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많은 도움 되었습니다(냉무)    김대영 2006/11/02 0 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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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님의 신학과 개혁신학과의 차이점이 무엇입니까? 
문휘웅   2006-11-06 00:31:38, 조회 : 90, 추천 : 1

아무리 생각해도 목사님의 신학과 개혁신학의 차이를 모르겠습니다. 이런 말씀드리면 굉장히 기분나빠하실지 모르겠지만, 제가 보기에는 목사님의 신학과 칼빈주의 신학이 다르단 생각이 안듭니다. 신학을 공부하기 시작한지는 얼마 안되었지만, 칼빈주의 신학에서 하는 이야기를 목사님도 똑같이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칼빈주의 신학을 못마땅하게 여기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칼빈주의가 이야기하는 것도 성경이 분명히 이야기하는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중심, 그리고 하나님중심의 입장에서 성경을 해석하고(물론 칼빈주의가 100% 옳다고는 볼 수 없다는 거 압니다. 그리고 어떤 부분들에 대해서는 칼빈주의 신학자들 끼리도 견해가 틀리고 달리하는 것도 있고, 예전의 칼빈이 기독교강요 같은데서 주장했던 것하고 칼빈사후 칼빈주의자들이 같은 부분을 다르게 이야기하는 경우도 있으니까 칼빈주의 신학이라도 틀린 부분도 있을 거고 맞는 부분도 있을 겁니다.)철저하게 성경을 자의적이고 사사로이 풀려고 하지 않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구하고, 하나님중심~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의 중심에서 성경을 이해하고 해석하려는 노력(?), 아뭏든 성경적이고 객관적이라고 생각하는 부분들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목사님의 신학도 전체적인 면에서 개혁신학과 큰 차이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로마카톨릭하고야 말할 것도 없고, 웨슬리안-알미니안 신학과도 정반대의 철저하게 하나님중심의 신학,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것에 충실하게 전달하시려고 하는 것, 아무리 생각해도 차이점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세부적인 부분에서야 칼빈주의 신학자들 끼리도 견해가 대립되는 것이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누가 완전히 잘못되었느냐의 문제라기보다는 어느 견해가 더 성경적인 객관성과 타당성을 지니고 있느냐 없느냐를 따지고 가장 객관적이라고 생각되는 부분 또한 불완전한 부분이 있으면 어떠한 부분에서 좀 더 보충되어야 된다고 이야기를 하시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목사님은  그게 아니라 칼빈주의 신학에 대해서 굉장히 공격적이니 이해가 가질 않습니다. 왜 그렇느냐하면은 전체적인 부분에서 목사님의 신학도 칼빈주의 신학도 성경적인 객관성과 타당성을 가지고 있고, 또 닮은 부분이 차이나는 부분보다 훨씬 많다고 생각합니다. 전체를 10으로 보면은 9.5가 일치하고 나머지 0.5가 개별적으로 전체성경 문맥에서 어떠한 부분이 옳다고 이야기 하기가 애매한 부분들이 차이가 나는 것들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솔직하게 이야기해서 목사님 신학이 웨슬리안-알미니안 신학과 가깝다고 절대 이야기 할 수 없지 않습니까? 이 두파는 아무리 생각해도 성경이 이야기 하는 부분들하고는 많이 동떨어졌다고 생각합니다만... 정말 죄송하지만 너무 어렵게 말고 좀 쉽게 설명해 주십시오. 목사님 답변하신거, 솔직히 나이어린 저로서는 이해할려면 한참 여러번을 읽어봐야 겨우 이해되는 부분들이 너무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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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목사님의 신학과 개혁신학과의 차이점이 무엇입니까? 
이근호   2006-11-06 06:55:52, 조회 : 92, 추천 : 0

이상스럽게 칭찬처럼 들리는 군요.

다른 사람들은 저를 이단이라고 하는데....

차이점은 간단합니다.

개혁주의 신학은 '개혁주의 신학'에서 구원의 능력이 나오지 않는다는 말은 하지 않습니다.

(만약에 주님의 십자가 복음이 중요하지 개혁주의 신학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하시면서 개혁주의 신학을 공부하시는 분이 계시다면 그야말로 저의 생각도 동일합니다.)

자유게시판에서 올라온 저를 반대하는 사람들의 글들을 보면,

"감히 네가 뭔가 개혁주의신학을 비판하느냐?"라는 식으로 '개혁주의' 자체를 증거하는 증인으로 자청하고 나섭니다.

저의 주장은 이러합니다.

성도는 개혁주의신학을 공부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에게서 나올 수 있는 이성적 논리성은, 성경에 대해서 누구나 그런 신학 체제를 소유하고 싶은 본심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잘 알고 그 다음에 자신에게 되물어 봐야 합니다.

"그렇다면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왜 피를 흘려야 하십니까? 혹시 개혁주의 신학 알고부터는 더이상 십자가 앞으로 가지않고 그 대신 개혁주의 신학을 소지하는 것으로 대신하면 안되겠습니까?"라고 말입니다.

개혁주의 신학이 십자가 복음을 증거케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께서 십자가 복음을 증거케 합니다.

이렇게되면 개혁주의 신학은 우리의 본성처럼 자리잡았다 하더라도, 그것은 십자가 앞에서 늘 부정해야 될 우리의 여타 본능의 일종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자기 존재에 대한 느낌이란  뭔가 소유한 그 소유물로 인하여 인식되기 때문입니다.

개혁주의신학으로 성도의 존재를 규정지을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증거할 것이 개혁주의신학이 아니라 그 자리에 십자가 복음이 들어앉아야 합니다.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는 주님에 논리에 의해서, 십자가 복음을 위하여, 개혁주의신학을, 아니 개혁주의신학을 버리지 않고 소지하려는 나 자신을 미워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을 증거하지 않게 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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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목사님의 신학과 개혁신학과의 차이점이 무엇입니까? 
문휘웅   2006-11-06 09:38:37, 조회 : 88, 추천 : 0

아직 ,좀 많이 어렵지만 대충은 무슨 이야기를 하시는지 알겠습니다. 성경을 묵상하는데 있어서 절대적인 원칙은 철저하게 주님의 십자가 은혜의 중심이고, 철저하게 하나님 중심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목사님의 신학이 이단이라고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좀 과격하다고 생각되는 부분들이 많긴 하지만... 로마카톨릭이든 웨슬리안 적인 사고방식이든 개혁신학이든, 이근호 목사님 주의(?)신학이든 위의 원칙에서 어긋나면 분명히 이단이라고 생각합니다. 개혁주의라는 타이틀 때문에 옳은것이 아니라 성경이 이야기하는 대원칙인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 중심, 철저한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의 일하심의 차원에서 말하지 않고, 인간이 칭찬받을 만하다고 이야기하고, 인간에게 가치관이 집중되어 있는, 인간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이야기하지 않고,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각 개개인은 사람들 앞에서는 가치있고 존귀하고 존엄한 존재)는 아무 쓸모없는 무가치한 인간이라는 것을 이야기 하지 않고,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무언가 가치있고, 복음에 있어서 사람에게 어떠한 공로적인 칭찬이 돌아갈 수 있음을 교묘하게 이야기하는(웨슬리안 주의처럼)것은 분명히 이단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개혁주의란 타이틀 때문에 개혁주의가 옳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칼빈이든 누구든 그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의 사상이 옳다고 생각되는 것은 그 원칙에 완벽하진 않지만, 대체로 그 이전시대의 루터나 쯔빙글리보단 훨씬더 가깝기 때문에 존경하고, 그의 생각과 사상을 지지하는 겁니다. 그게 아니면 칼빈도 이단이고, 개혁주의도 이단이라고 생각합니다. 개혁주의든 칼빈이든, 이근호 목사님이든 이걸 부정하면  더이상 그 사람하고는 말도 섞어서는 안되는 게 분명합니다. 웨슬리안 주의든 로마 카톨릭이든 철저하게 이 원칙에 의해서 성경을 묵상하고 해석하면, 그는 참 성도요, 참 주님의 제자이겠지요. 대충 목사님께서 하신 말씀은 이것이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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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목사님의 신학과 개혁신학과의 차이점이 무엇입니까? 
이근호   2006-11-06 12:20:18, 조회 : 94, 추천 : 0

그렇습니다.

주께서 쓰신다면 그 사람을 쓰시는 주님은 대단하신 분입니다.

그런데 사람이란, 항상  자신이 소유한 것을 핵으로 해서 '나는 이러이러한 인간'라는 것으로 인식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늘 십자가 앞에서 자기 부인을 해야합니다. 성령께서 늘 성도를 죽이시는 쪽으로 인도하십니다.(고전 15:31)

그렇게 되면, 십자가만 증거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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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고린도 후서 9장6절에... 
문휘웅   2006-11-06 01:03:23, 조회 : 112, 추천 : 0

9장 오절 말씀에 내가 이 형제들로 먼저 너희에게 가서 너희의 전에 약속한 연보를 미리 준비케 하도록 권면하는 것이 필요한 줄 생각하였노니 이렇게 준비하여야 참 연보답고 억지가 아니니라... 이 말씀후에 갑자기 6절 말씀에서 이것이 곧 적게 심는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자는 많이 거둔다하는 말이로다. 좀 당황스럽습니다. 9장1절말씀까지 연보에 관한 이야기를 하더니만, 갑자기 6절에서 쌩뚱맞게 이런 말을 언급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리고 6절의 말씀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 말인지요?또 한가지 누가복음 8장18절에 나오는 말씀 열라 어렵습니다. 무릇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자는 그 있는 줄로 아는 것까지 빼앗기리라.-이게 도대체 뭔 뜻입니까?도대체 뭐가 있단 말씀입니까?있는자는 도대체 뭘 가지고 있으며 또 뭘 받는단 말인지 그리고 없는자는 그 있는줄로 아는 것까지라 했는데, 없는자가 있다고 여기는 것하고(없는것)있는자가 가지고 있는 것하고는 아마 같은 거라고 생각이 됩니다만, 도대체 뭐가 있고 없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기왕 하는 김에 질문 한가지 더 드리겠습니다. 마가 복음 16장 후반부에 주님이 승천하시면서 하신 말씀 15절부터 18절까지 말씀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하시더라.라고 하셨는데, 우리는 근데 왜 이런 표적이 따르지 않습니까?믿는 자라면 당연히 이런 기적이 따라야 되는데 지금 우리는 왜 이런 기적이 안따르는 건지요?우리가 믿지 않아서 그런건가요?목사님 뱀집고 독을 마시면 멀쩡하시지는 않지 않습니까?
*혹시 위에 제가 드린 말씀중에 쌩뚱 맞단 표현을 가지고 불경스럽다고 태클 거시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는데, 하나님 말씀이 의심이 들고 불경스러운 마음이 생겨서 그런게 아니라, 의문이 들어서 그렇으니 양해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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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그리고, 고린도 후서 9장6절에... 
이근호   2006-11-06 07:02:14, 조회 : 88, 추천 : 0

한국교회가 오늘날 사람들을 망하게 하는 이유가 잘 나와있네요.

기존 교회들의 행태와 거기서 들어왔던 선입견들이 십자가 새언약으로 해석해야 될 모든 성경귀절을 혼잡케 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죄인이라는 생각만 들면 문의하신 모든 성경 구절은 단번에 이해됩니다.

우리는 우리의 것으로 헌금할 수 있는 자가 아니라 주님께서 쓰시는대로 쓰임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은혜입은 자는 더이상 자기 소유, 혹은 '자기 것'이라는 것이 성립될 수 없고, 그저 '주님의 것'의 이동 밖에 없습니다. 여기있는 돈이 저기에 옮겨가도 그 모든 이전과 이동을 가능케 하는 것은, "네가 예수님이 주신 은혜가 아직도 그대로 남아있어?"라는 물음 가운데 이루어집니다.

헌금이란 이런 겁니다. "저가 가진 것이 은혜가 아니라 저 자체가 주님이 주신 은혜입니다"라는 것을 고백하는 행위 중의 하나가 헌금입니다.

그렇다면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지 않겠다면 이것은 '자기 것'을 따로 고집하기 마련인데 이런 자는 심판을 받게 되면 그 있는 것도 빼앗기게 됩니다.

그러나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한다면, 자기 것이 아닌 것이 자기에게 들어와 있음을 압니다. 그렇다면 구원날에 더욱더 더 밖에 될 것이 뻔합니다.

표적이란, 그 시대상에서 요구하는 표적의 의미를 비켜가게 되어 있습니다. 

믿음의 표적 가운데 제일 놀라운 표적이, 믿는 자에게는 모든 것이 구원해주신 표적으로 이해된다는 점입니다.

믿는 자에게 표적이 없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생긴 것 자체가 표적이며, 그 믿음으로 보이는 세상 변화 전체가 다른 믿는 자에게는 서로 마음이 통하고 주님에게도 마음이 통하는 표적입니다.
그 표적의 끝에는 늘 주님을 위해서 기꺼이 죽을 수도 있는 정도로 지금도 매일 죽기를 원하는 심정을 살아간다는 표적입니다.

기존의 한국교회에서 나열하는 표적이 참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표적을 가로막고 있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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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호교수님께, 손무성의 성도론과 이근호의 성도론에 관한 질문 
이가노   2006-11-06 13:39:06, 조회 : 165, 추천 : 4

손무성의 성도론 중 발췌,

성도는 예수 안에 있는 산 자다. 산자로서 타락하여 죽은 인간과 달리 부르심의 목적이 있는 자이다.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골로새서 1:22)

그러므로 인간은 죄만 짓는다는 말은 맞지만 성도는 죄 지을 수밖에 없는 자인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새 사람이 된 것이 아니라,(육체의 소욕을 따라가다 죄를 짓기도 하지만) 성령을 좇아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하나님 아버지) 앞에 세우고자하는 것.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게 된 존재로서의 목적’으로 성도 만드신 것이다.

불신자인 인간 속에서는 죄만 나온다. 그러나 천사도 깜짝 놀라고, 세상도 깜짝 놀라고, 마귀마저도 시기하여 넘어뜨리고 싶은 존재, 하나님마저도 기쁨을 이기지 못하는 존재를 만들어 놓았으니 이것이 바로 성도이다.

그 누가 이 세상에 이런 존재를 만들었단 말인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다. 이런 차원에서 십자가 외에 자랑할 것이 없다고 해야 한다. 그렇다면 이제 인간에서 ->새 사람을 입은 자로  만드신 목적을 따라 주 안에서 성령을 좇아 행하는 자로서, 부활의 삶을 살아갈 이유가 있지 않겠는가?

에 대해

이근호의 비판 글 중 발췌,

이로서 제가 보기에 손목사님은 다음 두가지를 증거하시는 분입니다.

1. 나는 예수님 덕분에 이미 구원받았다.

2. 나는 성령의 도움으로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 지키려고 하고 있다, 그 결과 나는 말씀 지킨 효과로 인해 이러이러한 하나님의 형상을 드러내고 있는 사람이다. 나의 이름을 죽이고 주님의 이름을 높이고 있다.
......
그러니까

성도 안에는 성도 자아만 달랑 있습니다
......

이 '성도론'에 의하면

성도는 복음을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복음은 성도 되기 전 여전히 '인간'으로 있는 '인간들'에게만 적용되는 사항이기에  일단 인간에서 성도로 변한 자에게는 복음이니 '피'라는 말은 생각하지 말고 오로지 '하나님의 형상을 덧입기 위한 명령지키기에 진력을 다해야 한다는 겁니다. 스스로 자신의 이름을 낮추고 그렇게해서 스스로 하나님의 이름만을 드러내어야 한다는 겁니다.


과연 이러한 주장이 참으로 거듭난 분, 그리고 마귀까지도 사도라고 인정해주신 분(행 19:15) 인 사도 바울이 이런 식으로 살아온 분일까요? 

그리고 스데반 집사님이 이렇게 살아왔나요?

사도 바울이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말씀이 과연 예수님 믿기 전까지만 해당되고 이미 예수믿는 사도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는 말씀일까요?

이상 두 불완전한 죄인들의 견해에 대해

이광호 교수의 비평을 듣고 싶습니다.


추신 - 손무성은 '인간과 성도'라는 글을 올릴 때,

이근호와 그의 일당들에게 대단한 뜯김(?)을 각오하고 서라도

이근호식 성경해석에 대한 편향적 기준을 드러내기 위해 올린 용기의 글인지?

아니면,

본인의 실수(이근호식 성경해석이 자신의 기준보다 진리라고 믿는 전제하에서)를

인정하는 것인지?

여하튼, 손무성의 취지에 대한 이근호의 비판이 너무 비약적인 매도는 아닌지?

손무성목사님에게도 답변을 부탁드립니다.

일단,

몇 몇 사람들이 손무성에게 '인간과 성도'라는 글을 취지에 안맞는 글이라고 삭제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비겁한 행위다. 오바 육바 칠바다.

이 마을에는 이정도 표현의 자유도 없나?  천박스런 협박을 중지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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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이광호교수님께, 손무성의 성도론과 이근호의 성도론에 관한 질문 
김영길   2006-11-06 14:09:26, 조회 : 156, 추천 : 1

이광호 목사님께 이러한 질문을 하는 것은 어리석습니다.

왜냐하면 이근호 목사님과 신학사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근호 목사님은 철저히 십자가 신학이고

이광호 목사님은 역사적 개혁주의(일명 칼빈주의)에 입각한 십자가를 이야기 하기 때문입니다.

이근호 목사님의 주장은 칼빈의 신학사상을 철저히 때려부수는 입장이고

이광호 목사님은 칼빈의 신학사상을 가지고 접근을 하기 때문에

이러한 질문에 응해주시질 않으리라 봅니다.

여기는 홈그라운드의 잇점이 있기 때문에

십자가 마을에 합당한 내용이 아니면 언제든지 삭제될 수 있다는 사실 속에서 명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십자가 마을의 정체성이기도 하니까요/

그것은 오직 십자가만을 지키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일임을 왜 모르시는지요?

원래 손무성 목사님은 이근호 목사님의 수족과도 같으신 분입니다.

그런데 그동안 자신만이 간직한 신학이 무의식중에 나타난 결과라고 보여집니다.

손무성 목사님은 자신의 입장은 한번쯤 짚고 넘어가야 될터인데

아직까지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으니 괴롭긴 한가 봅니다/

아무튼 손무성 목사님은 이번 사건을 계기로 십자가 신학이 올바로 정립될 수 있는

좋은 시간들이 되어지리라 봅니다.

그렇치 않으면 십자가 마을을 떠나야하는 고육지책을 써야되겠지요/

그러나 그것도 쉽지 않으리라 봅니다.

그동안의 인간관계가 예수님과의 관계보다 더 무섭기 때문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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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이광호교수님께, 손무성의 성도론과 이근호의 성도론에 관한 질문 
이가노   2006-11-06 15:05:29, 조회 : 148, 추천 : 2

이근호목사님의 십자가 신학이

칼빈의 신학사상을 철저히 때려 부수는 입장(전면 부정이라는 뉘앙스를 줌)이라면,

이 또한 지나친 비약이 아닐까요?

이근호목사님의 십자가 신학은 전혀 무흠하다는 입장이신지?

우리 인간은 죄인이기에

자가당착의 오류에 빠질 위험성이 늘 상존한다는 전제성의 입장에서

십자가 신학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반대되는 견해나 질문 등을 마음껏 삭제할 수 있는 권리를 내세우시니

어쩐지 좀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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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이광호교수님께, 손무성의 성도론과 이근호의 성도론에 관한 질문 
김영길   2006-11-06 16:18:12, 조회 : 181, 추천 : 4

이근호 목사님의 십자가 신학이 완벽하다기 보다는

진리에 보다 더 가깝다는 이야기죠

국내에 있는 어떤 신학자들도 이근호 목사님 만큼 철저한 십자가 신학을 주장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다른 신학자들은 어떤 십자가를 내세운다고 해도 변질된 십자가가 나올 수 있는

확율이 높은 것입니다.

그동안 이근호 목사님과 토론한 많은 목사님들 그리고 신학자들

한결 같이 물타기 신학을 늘어놓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이곳은 진짜 십자가만 외치는 곳입니다.

때문에 이곳의 정체성을 흐리는 어떠한 글도

여기에서 말하는 십자가신학을 반하는 내용도

삭제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래야 이곳의 정체성이 지켜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삭제 당하는 쪽에서는 괴롭겠지만 말입니다.

그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미안한 이야기지만 손무성목사님께서도

본인 올리신 "인간과 성도"라는 글은 속히 삭제하는 것이

십자가 마을의 정체성을 살리는 것이 될 것입니다.

아직까지도 삭제하는 않는 것은 나름대로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는 모습이라 생각되어 집니다.

이근호 목사님을 위해서라도 속히 삭제하면 어떨런지 묻고 싶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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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여!" 삼창 이란? 
최진경   2006-11-07 07:21:03, 조회 : 132, 추천 : 0

저희 교회 목사님께서는 통성기도 하기전에 모두 '주여'를 3번 크게 외치자고 하는데, 저는 왠지 거북합니다...
어디에서 유래된것인지요?  이것이 성경적인가요?  목사님의 답변을 기다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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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주여!" 삼창 이란? 
김영길   2006-11-07 09:39:53, 조회 : 166, 추천 : 1


그것은 성부, 성자, 성령께 드리는 예의 쯤으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들의 주장이 그러니까요

그러나  주여 삼창은 아무런 이미가 없습니다.

그저 복달라고 부르기 전에

주무시는 하나님을 깨우시기 위한 준비 운동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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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주여!" 삼창 이란? 
문휘웅   2006-11-07 18:53:26, 조회 : 136, 추천 : 0


>제생각엔 한다고 해서 해로울 것도, 정죄받을 일도 아니고, 안한다고 해서 해로울 것도 없고  정죄받을 일도 아니구, 그냥 그렇게 하든 안하든 기도하는 사람 마음이잖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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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그렇지 않습니다. 
이근호   2006-11-07 20:12:52, 조회 : 184, 추천 : 4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오락이나 장난이나 여흥거리나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것이 악마의 작전입니다.

자신의 죽음을 가지고 예수님과 결부시키지 않는 모든 시도는 다 악마가 조성한 분위기에 놀아나는 모습입니다

즉 살고자 하는 모든 시도가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볼 때 예수님을 모독하는 행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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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그렇지 않습니다. 
최진경   2006-11-08 02:51:28, 조회 : 133, 추천 : 0

목사님의 시원한 답변 감사드립니다.
십자가 마을로 인도하신 주님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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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주여 삼창 
곽상섭  (Homepage)  2006-11-09 13:08:49, 조회 : 51, 추천 : 1


"주여 들으소서
주여 용서하소서
주여 들으시고 행하소서
지체치 마옵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주 자신을 위하여 하시옵소서
이는 주의 성과 주의 백성이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바 됨이니이다"  (다니엘 9 : 19)

주여 삼창은 다니엘도 했습니다.
주여 삼창을  성부,성자,성령에 대한 예의 쯤으로 했다는 말을 다니엘에게도 할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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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주여 삼창 
이근호   2006-11-09 15:51:21, 조회 : 35, 추천 : 1

다니엘은 주를 위해 죽기 위해 주님을 불렀습니다.

교회라는 업소의  영업 활성화를 위해 주님을 부르지 않을 것입니다.

'십자가의 쓴 잔'을 마시겠다는 의도없이 주님을 부르면, 주님을 망령되이 만드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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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새인의 완벽한 신학에 
김대식  (Homepage)  2006-11-08 10:34:21, 조회 : 131, 추천 : 1

부산 강의 듣고 질문 드립니다.

http://crossvillage.net/~woorich/study/busan/busan061107.mp3


바리새인의 완벽한 그런 신학에 도저히 해석불가능 한것이

날때부터 소경된자에 대한 해석일텐데요


그들이 정말로 그들이 구축한 신학에서는 소경의 죄 문제까지도 깔끔하게 해석이 되어야

그들의 완벽성도 더 돈독하게 될텐데

실제로 그들에게 난제이기 때문에 예수님에게 요청하지 않았나 봅니다.


즉 문제는 태어날때 부터 입니다. 즉 율법 지킴에 있어서 이미 불리한 가운데서 태어났다는 자체가
아니 불리한게 아니라 이미 불가능성입니다. 율법지킴이 불가능한 전무상태인 저주받고 태어남입니다.

그러나 이미 유리한 고지를 차지한 자신들에게까지 이 문제는 자신들의 신학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난제도 해결해야 할텐데요

 

문제는 예수님 입니다.

이 해석을 차라리 소경이 되었다면 볼텐데 라고

그들이 버릴수 밖에 없는(소경 소외) 그 건축자가 버린 돌을 통해 그들의 완벽한 신학에 
율법으로부터 이미 저주받고 태어난 소경을 통해 도리어 저주 속으로 몰고가는데요

즉 율법의 참 제대로된 저주로 몰아가는 (죄를 더하기 위한 가입된)


이런 의미로 볼때에 소경된 자 뿐 아니라 날때부터 이미 저주 속에 있는 태생이 비유대인이다는 것도
어차피 율법지킴이 불가능한데요

결국 바리새인의 완벽을 추구하는 신학에서는 이 부분에 대해 완벽성을 추구하면 추구할 수록
오히려 한 쪽면은 더 어설프게 억지성으로 덮어버릴 수 밖에 없는 모습을 그들도 눈치 채지 않았나 하는 겁니다.


왜냐 하면 사도바울도 이 부분에 대해서 롬 7장에서 오호라 곤고한 자로다 라고 사실상 비겁하게(?) 나중에 밝힐 뿐이지
실제로는 바리새인들이 이 해결못할 이 문제를 어떻게 가리우고 다녔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자 질문은 이겁니다. 이미 그들도 소경문제 다시말해서 태어날때부터 저주 속에서 나온 자는 율법 아무리 지킬려고 해도 이미 단절 속에서 나왔는데. 거기에 예외 없이 자신들도 아무리 완벽한 신학을 추구하여 자기들에게 덮어도 그 갈등은 여전히 있었지 않았나 하는 점입니다. ?

감춘 겁니까? 감출 수 밖에 없는 겁니까 ? 아니면 그들도 마치 날때부터 소경으로 태어났기에 예수님은 마귀 속에서 태어났다고 보시는 겁니까?

 

율법은 결국 지키는 것을 요구하는 것 더 이상으로 창조자가 누구인가를 보여주는 몽학선생인
소경 된 자에게 빛을 창조하는 수준까지 요구하는 것 아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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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바리새인의 완벽한 신학에 
이근호   2006-11-08 13:39:25, 조회 : 120, 추천 : 1

바리새인들은, 율법 해석은 역사와 전통을 품고 있는 해석입니다. 그 시대 학자들이 그 시대에 적합하자고 지혜를 모아 구성한 것이 아닙니다. 계속해서 대대로 내려온 율법 해석이 모아져 주석이 되어, 그 주석에 신성한 권위를 허락한 신학으로 정립되어 내려온 것입니다.

그들의 기본 정신은 이러합니다. '모세법보다 더 권위있는 것은 없다'입니다.

이것은 곧 '모세법을 그동안 해석해 온 선배들의 주석보다 더 권위있는 율법 해석은 없다'입니다.

이것은 곧, 시대와 시간을 초월해서 모세 율법에 대한 동일한 견해 안에서만 선배들의 운명에 동참할 수 있다'입니다.

물론 그 선배들 중에서는 아브라함이 대표적인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거지 나사로 아브라함의 품에 안긴 것을 고려하면 그 권위가 어떠하든 것을 짐작하실 것입니다.

즉 모세 율법은, 아브라함의 자손이 왜 유일한 하나님의 백성인가를 확인해주는 것이 모세의 율법이라고 보는 겁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자손을 위하여 모세를 통해서 친히 자신이 세운 법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예수님께서 여기에 시비걸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김대식 성도님의 질의처럼 개인 안에서 율법은 어떤 위상와 역할을 기능을 하느냐에 유대인들이 관심 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시비걸고 나오신 것은, 아브라함 자손은 나, 곧 예수님께서 새로 지정한다는 겁니다.

즉 예수님의 입장에서 보면, 모세 율법을 통해서 예수님을 도출할 안목이 없다면 결코 아브라함의 자손일 수 없고, 천국 백성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겁니다.

이런 자들을 심판하시는데 모세 율법이 동원된다는 겁니다.

모세 율법을 하나님이 준 취지는, '거기서 예수님을 알아내지 못하는 자는 저주받는다'는 겁니다.

"너희를 고소하는 자가 있으니 곧 너희가 바라는 자 모세니라"(요 5:45)

이로서 그 어떤 인간도 율법에서 예수님을 도출할 수 없기에, 모든 인간은 율법으로부터 고소당해 저주받아야 하는 겁니다.

그러면 왜 인간들을 율법에서 예수님을 도출할 수 없을까요?

그것은 그 어떤 인간도 예수님 본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 본인이 아니기에 남의 사정을 알 리가 없는 겁니다.

결국 율법은, 우리 자신들이 예수님의 입장에 놓여 있지 않고 우리 자신들의 입장에서 모든 것을 보기에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받는 것이 합당하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입장을 이해한 자만, 자신이 저주받아 마땅한 자였음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길 가에 심겨준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실 때, 누가 봐도 아직 결실기가 아니기에 열매가 없음을 뻔히 알면서도 예수님께서는 이 점을 이해안해주고, 자신이 시장한데 제 때에 열매 제공 안했다고 저주하는 것을 그 어떤 인간들도 이해못합니다.

왜냐하면 자기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심정을 이해한 자들은 비로소 주님의 조치를 이해하게 찬동하기 됩나다. 즉 "무화과 나무야, 너는 왜 예수님의 요구를 이해못했느냐"라는 것으로 저주받아 마땅한 것을 말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율법에 매인 자들은 이렇게 대꾸할 것입니다.

'무화과 나무는 무화가 나무라서 예수님의 심정을 이해 못한 것이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만약 이해했다는 그 나무는 무화과 나무가 아니라 예수님 그 자체였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이것이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보고서 율법을 어긴 저주받은 집단이라고 한 이유입니다.(요 7:49)

여기에 대해 예수님은 유대인들을 보고, "너희들 애비는 하나님이 아니라 마귀라고" 말입니다. (요 8:44)

따라서 율법은 우리보고 개선이나 메시야를 믿으라고 요구하는 위한 용도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실제 사실을 나타내기 위해 주어진 것입니다. 

 

 관리자 (IP:122.♡.52.38) 07-03-13 14:37 
앞글과 이글 사이에 글은 에러가 나서 올려지질 않습니다. 십자가마을질문답변33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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