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카페(한북지방회)에 올려진 글입니다.
여러분 다시 반박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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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신학이 주장하는 "성화론의 허구성" 대한 판단
회복지기 09.09.17 17:32
http://cafe.daum.net/yyll88/2JxS/392
-기존 성화 론을 부정하는 십자기 신학의 비판-
성화 론에 있어 이론(異論)는, “오직 행위”의 성화와 “행위 없음”의 성화입니다.
전자(오직 행위의 성화)는, 이미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믿음으로 죄 사함 받아 이제 하나님과 다시 화목하게 되었고, 그분의 자녀로서의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게 되었음에도, 여전히 구약의 율법의 사고처럼 우리의 행위가 하나님께 드려져야만 하나님이 우리를 자녀로 인정하고, 우리를 축복하신다는 ‘신 율법’적 사고의 신앙을 말합니다.
후자(행위 없음의 성화)는, 중생(칭의)처럼 성화도 “이미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칭의를 받은 것처럼 성화도 받으십시오.” 라고 말합니다. 성경의 모든 행위는 인간의 할 수 없는 명령인 바, 하나님이 그럼에도 그것을 명령하시는 이유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게 하기 위해서라는 주장을 말합니다.
이 근호 목사가 주장하는 십자가 신학은 후자의 성화론에 해당됩니다.
십자가 신학의 우리 교회 이 근호 목사는, “성화 론의 허구성”이라는 글에서, 기존 보수정통신학의 '성화 론'이 진리를 떠난 사람들의 주장인 것처럼, 강하게 비판합니다. 저는 기존보수정통신학의 '성화 론'이 성경의 주장임을 믿는 사람으로서, 이 근호 목사의 기존 성화 론에 대한 “기존 성화는 反성격적임”의 주장을 반박하고자 합니다.
이 근호 목사는 '인간 구원을 위한 신학의 구조'에서 다음과 같은 구원론을 주장합니다.
"시간을 초월한 구원의 능력이 다시 시간의 이미지를 뒤집어쓰고 시간의 연계성 속에 자진해서 헤집고 들어갈 하등의 이유가 없다. 십자가의 능력이 이를 말해준다. 십자가는 자체적으로 능력을 갖고 발휘한다. 인간들이 손에 넘겨준 능력이 아니다. 성령께서 친히 발휘하시는 능력이다. .... 즉 구원 얻기 위해 인간이 믿을 수 있는 바탕은 그 어떤 수단도 소용없다는 것이다. 오직 십자가 자체에서 나오는 그 십자가의 능력으로만 구원받을 뿐이다.(고전 1:18)"
"그리고 십자가로 대변되는 그 하나님의 깊은 지혜는 인간의 육의 노력과 전혀 이미 무관한 채 오직 하나님 자신이 친히 제공하시는 성령의 은혜로만 주어진다는 것이 현실이며 실제이다. 이를 위해 사도 바울은 인간의 지혜와 성령의 능력을 완벽하게 구분 짓고 있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 2:4-5)"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요일4:13) - 요한 서신에 나오는 모든 인간 행함에 대한 검증이나 구별은 이런 차원에서 나온 것이다. 즉 성도는 이미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기에 인간이 하나님을 되레 소유할 그 어떤 명분도 사라졌다.....따라서 성령의 인치심은 이 십자가에 성도가 죽은 상황을 (혹은 값으로 산 상황을) 지속적으로 주님의 '예'에 합당한 차원에서 끌고 가는 것이 완성되어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하자는 것이다."
"두렵고 떨림으로 너의 구원을 이루라"는 사도의 명령은(빌 2:12), 그 명령 자체가 성령에 의한 구원 완성의 능력으로 퍼져 나가는 자가 따로 존재함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이다. 즉 ""구원받아라!"라는 차원과 같은 차원이며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행 3:6)와 같은 차원이다."
이 근호 목사는, 빌 2;12의 해석을, 기존 보수정통신학의 성화 론과 전혀 다르게 해석합니다.
기존 성화론에서 말하는 어떤 행위도 성경에는 없습니다. 성경의 행위에 대한 명령은 행위에 대한 명령이 아니라, 오직 예수를 바라봄의 명령입니다. (빌2;12에 대한 어떤 해석이 맞는지는 이후에 밝히겠습니다.)
성경에는, 중생(칭의)의 구원만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일방적인 구원하심뿐입니다. (->여기까지는 기존 보수정통교단의 구원론과 같습니다.) 그 다음이 다릅니다.
그 다음에도 행위는 없습니다. 일절 없습니다. 오직 믿음이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바라봄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모든 행위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행위의 명령이 아닙니다.
제가 먼저 밝혀 두고 싶은 것은,
칼 바르트를 공부하면서 칼 바르트가 너무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집착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성경은 "오직 주님"이 맞습니다. 성경은 "오직 예수" 입니다. 그러나 "오직 주님"의 그의 주장이 문제입니다. 오직 주님이 '오직 성경'과 연결되지 않습니다. "성경 밖까지 나가서" 오직 주님입니다!
칼 바르트는 오직 주님에 근거해,
하나님께 버림 받은 인간과 하나님에 의해 용서받은 유일한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임으로, 모든 인간은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화해했다고 주장합니다. 이것이 칼 바르트의 화해론의 요지입니다.
그러므로 지옥도 상징입니다. 우리가 믿는 '죄의 심판'으로서의 지옥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인간이 하나님과 화해 했기 때문에, 사랑의 하나님이 인간을 심판하실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다 좋습니다!
그런데 칼 바르트의 주장이 성경 어디에 있습니까? 이 세상에 모든 인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화해되었음으로 지옥의, 죄의 심판이 없다는 주장이 성경 어디에 있습니까?
제가 두 달 이상 바르트만을 연구하면서 먼저 화해론을 공부했는데, 그가 거기서 주장한 사울과 가롯 유다의 존재론적 주장인 "그들은 단지 십자가의 왼편의 역할(심판의 역할)을 감당했을 뿐"이라는 주장은 정말 깊은 그리고 멋진 해석이지만, 문제는 성경에 그런 말씀이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중요합니다. 성경이 우리의 기준입니다. 성경 해석에 무리가 없어야 합니다.
저는 십자가 신학도 이 범주에 포함된다고 생각합니다.
"오직 예수"를 주장하다보니 "오직 예수만" (성경이 주장하는 예수만의 개념이 아니고) 이 됐습니다.
성경이 주장하는 구원의 도식, 즉 성부 하나님의 구원계획, 성자 예수님의 구원 완성, 성령 하나님의 구원적용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자기들 식의 '예수만'이고 다른 것은 없습니다.
저는 바르트나 이근호 목사에 비해 너무 짧은 신학이지만,
그들의 주장을 가지고 아무리 성경을 들여다봐도 아직까지는 인정할 수가 없습니다. 저는 바르트나 이근호 목사나 그들의 의견이 성경적이라면, 지금이라도 지체없이 제신학을 바꾸겠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으로 볼 때 무리라고 생각합니다. 자신들의 "바꿀수 없는 강조점"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우선 “성화-거룩하라는 명령과 이 세상 에서의 그것의 성취해 나감”은, 즉 보수정통신학에서 주장하는 기존 성화 론은 성경에 분명히 있습니다! 성경적 이라고생각합니다. 믿는 자는 구원 받은 결과로 그 안에 성령께서 내주하시며, 그 성령께서 하나님의 거룩함을 닮아가는 삶을 살게 하십니다. 그것을 위해 성경에는 많은 믿음의 삶의 명령(계명)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모든 계명은 성령께서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로 우리를 빚어 나가시는 지침들입니다.
아래의 순서로 제 의견을 개진하겠습니다.
1-성화론의 성경 해석
2-로이드 존스 목사의 극단적 성화론 자들에 대한 비판
3- 이근호 목사의 '성화의 허구성'에 대한 비판
1.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에게 “거룩하게 살 것”을 명령하셨고, 이것을 이루기 위한 구체적인 행동에 관한 많은 말씀들을 주셨음니다. 아래의 성경이 그 근거입니다. (기존 성화론의 성경적 근거)
성경의 행위에 대한 명령이 행위에 대한 명령이 아니라면, 성경의 기록은 아무 의미 없는 잉크의 낭비뿐입니다.
만일 그렇다면 다음과 같이 기록되었을 것입니다. “죄의 문제에 대해서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 너희는 한 번의 행동으로 성화를 이미 받았으므로, 이제 너희들이 해야 할 일은 그 성화를 유지하고 그 안에 거하는 것뿐이다.”
하지만 이것은 신약의 가르침이 결코 아닙니다. 모든 신약 서신 서에는 위대한 교리와 윤리적 호소와 권면이 들어 있습니다.
거룩하게 살기 위한 '수많은 하나님의 명령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 하나님은 구원 받은 우리를 향해 "자라가라!"고 명령하십니다.
고전 3;1.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요한은 요한 일서 2장에서 “자녀들” “청년들” “아비들”에 대해 이야기 합니다.
성경은 이런 용어들을 사용합니다. 이 말들은 태어나서 갑자기 도약하는 것이 아니라 성장한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성화입니다. 여러분은 은혜와 주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갑니다.
고린도전서 3:7. 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데살로니가후서 1:3.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할지니 이것이 당연함은 너희의 믿음이 더욱 자라고 너희가 다 각기 서로 사랑함이 풍성함이니
베드로후서 3:18.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그에게 있을지어다
에베소서 4: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게 하시는 사역이 믿는 자의 "성화"입니다.
2) 고린도후서 5장 10절
"이는 우리가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 로이드 존스의 '믿음 영생, 행위 상급 론'. 로이드 존스 목사는 그의 저서 (p245~246)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습니다: 이제 바울은 분명히 크리스천들에게 쓰고 있으며 그는 마음에 신자들만을 두고 있으므로, 바울의 말씀은 신자들 중에도 차별이 있을 것임을 의미한다.
이는 구원의 관점에서가 아니다–바울은 고린도전서 3장 15절('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에서 매우 분명하게 확립했다.
성경에 상급은 '신앙의 행위'를 기준으로 하고 있습니다. 행위가 없다면 고후 5;10절 말씀은 그 근거가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골로새서 1;28에서 그 목표를 위해 권하고 가르치는 자신의 사역을 말하고 있습니다.
골 1;28.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자로 세우려 함이니
--> 골로새서 1;28에서 바울 사도는, 성도들을 권면하고 가르친다고 말하고,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을 완전한 자로 세우기 위함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구원이 필요한 사람들이 아닌, 이미 구원받은 성도들을 권면하고 가르쳐 완전한 자로 세운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십자가 신학의 주장으로 볼때, 이미 완전하게 된 성도를, 바울 사도가 "또다시 완전하게 하려는" 쓸데 없는 사역을 하고 있는 것이 되고 맙니다.
사도의 전도에 의하여 그리스도를 믿게 된 것으로(27절) 모든 것이 완성된 것은 아닙니다.
계속해서 사도의 가르침을 듣고 따라서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22절) 설 수 있도록 "신앙의 진보"가 있어야 합니다. 바울이 골로새 교인들을 위하여 수행하는 직무는, 궁극적으로 성도의 완전함을 지향하는 것입니다.
3) 시편 18;23
"또한 나는 그의 앞에 완전하여 나의 죄악에서 스스로 자신을 지켰나니 "
--> 다윗은 자신의 행위가 완전하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 완전하다는 뜻의 단어 '타밈'은, 창세기 17;1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완전하라고 말한 '타밈'과 동일한 단어입니다. 무엇을 말해 줍니까?
하나님의 “완전 하라”는 명령은...
a. 인간의 완전한 행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죄로 타락한 인간에게 하나님은 그렇게 요구하시지 않습니다)
또 하나님의 완전 하라는 명령이 ‘말 그대로 행위의 완전함의 의미’라면, 다윗 등이 그렇게 자신의 삶을 완전하다고 결코 말할 수 없으며(그들의 중대한 죄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 스스로도 “늘 하나님 앞에 부족함을 구했던 자들”로서 하나님 앞에 그렇게 당당하게 완전했음을 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b. 십자가를 바라보라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이라면 다윗은 심각한 문제가 있는, 십자가 신학으로 말하자면 행위중심의 구원받지 못한 신앙입니다)
c. 하나님의 말씀으로 완전하게 살려는 신앙적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완전하라"는 성경의 명령은, 성도로서 "하나님의 거룩을 닮아가려는 신앙적 노력"을 말합니다.
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갈라디아서 6:14)
십자가 신학에서 '오직 십자가'의 신학을 주장하면서 내세우는 그리고 주장하는, ‘오직 십자가만’ 을 강조하는 바울사도가 그의 자식 같은 제자 디모데에게, 그리고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낸 서신 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딤전 4;6-7. 네가 이것으로 형제를 깨우치면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일꾼이 되어 믿음의 말씀과 네가 따르는 좋은 교훈으로 양육을 받으리라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
딤전 5;7,10 . 네가 또한 이것을 명하여 그들로 책망 받을 것이 없게 하라.... 선한 행실의 증거가 있어 혹은 자녀를 양육하며 혹은 나그네를 대접하며 혹은 성도들의 발을 씻으며 혹은 환난 당한 자들을 구제하며 혹은 모든 선한 일을 행한 자라야 할 것이요
살전 4;3-8.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 각각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기의 아내 대할 줄을 알고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과 같이 색욕을 따르지 말고 이 일에 분수를 넘어서 형제를 해하지 말라 이는 우리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고 증언한 것과 같이 이 모든 일에 주께서 신원하여 주심이라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부정하게 하심이 아니요 거룩하게 하심이니 그러므로 저버리는 자는 사람을 저버림이 아니요 너희에게 그의 성령을 주신 하나님을 저버림이니라
거룩하게 살기위한 구체적인 행동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선한 행실을 강조합니다.
5) 갈라디아서 제 5장 해석
1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2 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 3 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언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 4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5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6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 바울 사도는, 구약의 할례(행위)를 받아야만 구원 받을 수 있다는 갈라디아교회의 율법주의자들의 가르침을 향해, 율법이 아닌, ‘은혜의 믿음’을 강조합니다. 즉, 갈라디아 교회에 할례를 통한 구원(행위 구원)을 말하는 사람들에 대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다음의 말씀이 중요합니다.
바울 사도가 할례(행위의 구원, 행위중심의 신앙)를 금하고 오직 은혜의 믿음을 강조함으로, 바울 사도는 이 후에 어떤 신앙적 행위도 금할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으나, 다음 말씀은 그렇지 않습니다.
13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 14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 15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18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
-> '성령을 따르는 행위'를 말하고 있습니다.
율법의 행위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성령을 따라 율법의 완성된 계명인 “사랑하라”는 주의 명령을 행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분명히 육체를 거스르는 방법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성령을 따라 육체를 거스르는 엄청난 방법(계명)이 이어집니다.
19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20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21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 십자가 신학은, "위의 육체의 일을 하나라도 하지 말아야 우리가 천국에 갈수 있음으로, 그 말씀은 곧 우리의 할 수 없음이요, 십자가를 바라보라는 것이다" 라고 해석할 것이지만, 바른 해석이 아닙니다.
바울 사도가 육체의 일과 성령의 열매를 대비시키고 있다는 것은, 구원받지 못한 자들의 삶의 특징(육체의 일)과 구원받은 자들의 삶의 특징(성령의 열매)를 대비시킴으로, "성령으로행하는 삶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다음 말씀을 보십시오! 그것은 성령을 통해 성화를 이루기 위한 말씀들입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구체적으로 실천해야 할 행동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25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26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 (6장 7절)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8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 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9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10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
지금까지의 모든 성경은, 갈 6;14에서 “오직 십자가만”을 외치는 바울 사도의 주장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행위에 대한 명령’이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까? 바울 사도는 지금 성도의 거룩한 삶에 대한 명령이요, 방향을 말하고 있습니다. 행실(행위)에 대한 명령입니다. 이 말씀이 행위의 명령이 아니라는 신학적 주장은 ‘무리’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은 “의인의 행위”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창 6;9. 이것이 노아의 족보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눅 1:6. 이 두 사람(사가랴와 엘리사벳)이 하나님 앞에 의인이니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이 행하더라
이 말씀도 십자가를 바라보는 의미로서의 성경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까?
기존 성화 론의 심각한 문제인, 행위 중심의 신앙-축복을 위한 행위, 율법적 신앙-을 지적하면 됩니다.
그것으로 전체를 부정하면 안 됩니다. 거기서 빗나갑니다. 거기서 또 다른 ‘극단’이 나옵니다.
6) 마태 5장 해석
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15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16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 믿는 자의 행실의 목적을 말합니다.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행함이 있어야 합니다.
믿는 자에게는 성령을 통한 착한 행실이 있어야 하고, 그 착한 행실은 하나님의 영광을 목적으로 한다는 것입니다. 그 행위(실)를 지금 주님이 명령하시고 계십니다. 여기에서 ‘행실’은 e[rgon 엘곤으로, 노역(노력, 또는 직업으로서), 함축적으로 행위, 수고, 일을 말한다. 세상 사람들이 분명히 가시적으로 볼 수 있는 행위입니다.
7) 마태 6장 해석
십자가 신학의 이 본문에 대한 해석은, “이것은 돈에 대한 탐심을 물리치라는 말씀이 아니다. 어떻게 이 세상에서 돈의 탐심을 우리가 물리칠 수 있는가? 그 말씀은 곧 예수님을 바라보라는 말씀이다.” 라고 주장 합니다.
저는 그 해석에 반대하며, 마태 6장은 “돈의 탐심을 물리치고, 맘몬 신(돈)이 아닌 우리의 참 주인이신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는 것이며, 우리가 돈에 대해 신경 쓰는 이유인 생활의 문제를 주님께서 아시고 이에 대해 확실하게 보장을 해주시는 말씀”으로 해석합니다.
19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20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 21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22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23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더하겠느냐
->돈이 목표가 되면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돈으로 우리의 눈이 어두워지면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돈이 목표가 되면 우리 마음이 그것에 매이기 때문입니다.
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 돈과 하나님을 대비시키시면서, ‘돈에 대한 탐심의 중대함’을 경고 하십니다. 돈도, 하나님도 둘 다를 가질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25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26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27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28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29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30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 너희들의 생활을 책임지겠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돈에 매이는 기본적이고, 궁극적인 이유는 생활 때문입니다. 우리 믿는 자에게 생활에 대한 근본적인 대책을 세워주심으로 돈에 대한 물림을 방지하시려는 주님의 방어책입니다.
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34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믿는 자들이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않아야 하는 이유를 말합니다!
그것은 돈에 사로잡혀 있으면 우리의 주인이신 주님을 섬길 수 없기 때문이며, 우리 믿는 자의 삶은 이미 주님께서 그것을 보장하셨기 때문에 이방인처럼 돈이 삶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되는 이유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우리의 주인이신 하나님만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디모데전서 6:10.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디모데전서 6:17. 네가 이 세대에서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히브리서 13:5.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마가복음 10:23. 예수께서 둘러 보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 하시니
바로 이것입니다! 주님께서 지금 이것을 마태 6장에서 말씀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십자가 신학의 그런 해석이라면 이 모든 성경을 어떻게 해석할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2. 로이드 존스 목사의 비판 (로이드 존스 교리 2/ p.345-)
빌 2;12-13.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다시 한 번 우리는 칭의와 성화의 중대한 차이점과 만나게 됩니다.
앞에서 말씀 드렸던 것처럼, 칭의에서는 우리는 아무 것도 하지 않습니다.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선언적 행동입니다. 하지만 여기(성화)에서는 행동이 요구됩니다. 이 사실 역시 성화 교리에서 대단히 중요한 부분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점에서 혼란에 빠지는데, 특히 양극단에 있는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일단 사람들이 거듭나면 그들 안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활동은 멈춘다고 생각하는 듯이 보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새로운 본성을 주셨기 때문에, 이제 새 본성을 발휘하는 것 외에는 아무 할 일이 없으며, 성경을 읽고 이해하고 적용함으로써 그 일을 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한 극단을 피하려 하다가 정반대의 극단에 빠진 경우입니다.
이 사람들은 수동적으로 예수를 바라보고 그의 안에 거하는 것 외에는 아무 할 일이 없으며, 그렇게 하면 모든 일이 우리 안에서, 우리를 위해 이루어진다고 말합니다.
그에 대한 대답이 ‘빌립보서 2장 12-13절’입니다.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이 사람들은 요한복음 15장의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를 예로, 우리 주님이 우리가 주님을 바라보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는 동일한 개념을 가르치고 계심이 분명하다고 말합니다. 이 비유를 가지는 열매를 보이기만 할 뿐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며, 일은 전적으로 나무가 한다는 해석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분명 우리 주님의 묘사를 크게 오해한 것입니다.
나무의 가지는 아무 활동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가지는 나무로부터 올라오는 수액을 받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이 꼭 필요합니다. 하지만 수액이 공급되면 가지는 활력과 생명으로 가득 찹니다. 가지는 공기로부터 뭔가를 끌어들이고 되돌려 보냅니다. 가지의 잎사귀 하나하나는 대단히 활동적입니다.
처음에 하나님이 여러분 안에서 일하시지 않았다면 그 일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당신이 그 일을 이룰 수 있도록 하나님은 여러분 안에서 일하십니다. 빌립보서 2장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당신의 소원을 두시고 우리를 행하게 하심으로 자신의 기쁘신 뜻을 이룬다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성경에는 똑같은 것을 말하는 수많은 구절이 있으며, 우리 모두는 이것을 분명하게 깨달아야 합니다.
롬 6;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이것은 내가 해야 할 일입니다. 아무도 나를 이렇게 여겨줄 수 없습니다. 나는 이 활동에 몰입해야 합니다. 내 안에 계시는 성령이 이렇게 인식하게 하고, 나는 그렇게 여기라는 권면을 받습니다. 이것은 나에게 호소하는, 성화의 일부입니다.
이어서 이 사실을 부정문으로 말하는 것을 들어 보십시오.
12절.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당신은 죄가 당신 안에서 왕 노릇 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이것은 당신에게 주는 권고입니다.
바울은 이어지는 구절에서 이것을 긍정문으로 표현합니다.
13절.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우리는 우리의 지체를 드려야 합니다. 그것이 적극적으로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다시 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13절.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우리는 성령을 통해 몸의 행실을 죽여야 합니다. 성령 없이는 그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성령 없이 그 일을 해보려 했던 것이 수도원 제도의 오류였으며, 모든 도덕 규범의 오류입니다. 하지만 성령을 받고, 성령이 우리 안에 일하시면, 성령을 통해 우리는 우리 몸의 행실을 죽여야 합니다.
골 3;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딤전 6;12.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하였도다
딤후 2;22. 또한 너는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따르라
그가 디모데에게 명령하는 것은 피하라는 것이지 구원받기를 기다리라는 것이 아닙니다. 디모데는 뭔가 해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디모데에게 뭔가 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딤전 6;11.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며
디모데는 의를 추구하고 얻으려 애써야 했습니다. 우리는 옛 사람을 벗고 새사람을 입으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엡 4;22-24.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하지만 저는 때로 가장 중요한 본문은 ‘고린도 후서 7장 1절’이라 생각합니다.
고후 7;1.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
이 구절을 달리 주해할 방법이 있습니까?
이 모든 용어들은 같은 방향을 가리킵니다. 제가 지금 말씀드리고 있는 것들이 사실이 아니라면 신약 서신들은 하나도 씌어질 필요가 없었습니다.
성화되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이 ‘하나님이 하시도록 내버려 두는 것’ 뿐 이라면,
우리를 굴복시키고 예수를 바라보는 일 뿐이라면, “그러므로 이제 이것을 적용하라! 이것을 행하고 저것을 하지 말라!
너희 자신을 깨끗케 하라!” 고 말하며 이 교리를 논증한 사도들은 많은 잉크와 시간과 힘을 낭비한 셈일 것입니다. 복종하고, 기다리고, 바라보고, 거하는 것만 필요했다면 사도들이 그 모든 것을 왜 말했단 말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을 왜곡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성화에서 일차적으로 가장, 극도로 중대한 것은 성령을 통한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갓난 아이”로서, “사랑하는 자로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는 거룩하게 되라는 권면을 받습니다. 우리 안에서 일하시는 분이 거룩하시기 때문이며, 그가 우리를 구속하신 목적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이름에 정말로 합당한 존재가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3. 이 근호 목사님의 (소논문) ‘성화 론의 허구성’에 대한 저의 판단입니다.
1) 보수정통신학, 기존 신학의 ‘성화 론’에 대한 오해내지 극단인 것 같습니다.
기존 교단에 대한 불신입니다. ‘부분 부정’이 아니라, ‘전부의 부정’입니다! 기존 교회와 기존 신앙에 대한 너무 골 깊은 감정이 그의 글 전체에서 드러납니다.
▼ 그의 주장
“성화 론의 초점은 이것이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살 수 있는가?’이다. 여기서 ‘우리가’에 해당되는 항목은 강렬한 ‘주체의식’으로 대변된다. ‘내가’, 혹은 ‘우리가’ 혹은 ‘자아가’ 라는 의식으로부터 출발하겠다는 것은, ‘우리’를 살리지 못할 진리는 애초에 거부하겠다는 의사를 드러내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인간을 살려내지 못하는 거룩은 거룩으로 간주하지 않고, 인간을 살려내지 못할 진리는 진리가 복음이 아니다. 이렇게 되면 인간은 “그 사람의 행동에 따라” 거룩해 질 수도 있고 안 거룩해질 수도 있다. 이런 입장에 서서 ‘거룩하게 사는’ 이론을 제시한 것이 성화 론이다.”
--> 기존 보수정통 신학의 성화론이 이런 것입니까? 그의 주장처럼 우리가 살려고 하는 성화입니까?
우리는 이미 살았습니다. 이미 거룩해졌습니다. 신학의 깊이가 대단하신 분이 왜 이런 판단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제가 그분의 정신을 좋아하면서도 그의 이런 극단적 논리를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겟습니다. 같이 공감하며 출발할 수가 없습니다.
“만약 성령님이 주도적으로 나서면 이것은 ‘인간 성화’가 아니라 ‘성령 성화’가 되기 때문에 따라서 철저하게 성화에 있어 인간의 의지나 능력이 주도권이 쥐고 진행되는 과정이지 성령님이 주도권을 쥘 수는 없음. 그러니까 하나님이라는 주체 자는 인간이라는 주체자의 그 주체 영역까지는 침범하지 못하는 입장에 놓여 있는 형편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과연 신앙이 없는지 있는지를 본인이 납득이 가는 윤리성으로 측정을 통해서 그 때 그 때마다 확인해 보겠노라는 의도에서 비롯된다. 구원에 합당한 열매를 ‘윤리적으로 측정’해서 비로소 안심하겠다. 그리고 이것은 ‘신앙 있음’으로 삼겠다는 처사이다.”
--> 이 주장은, 일부 '성화 론의 폐해'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잘못된 행위중심의 구원만, 신앙만 비판해야 합니다. 행위로서의 축복신앙, 보상 신앙만을 비판해야 합니다. 인간의 행위가 주체가 되어 버린, 그리고 그 행위의 중압감속에서 신앙의 자유, 기쁨, 쉼을 잃어버린 ‘신 율법’이라 불리는 기존의 성화 론의 심각한 폐해에 대한 지적을, 기존 성화 론의 모든 것이 틀린 것처럼 비판합니다.
보수정통신학이 주장하는 성화 론은, 살려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하나님의 자녀의 모습으로 살아가게 하는 성도의 삶입니다. '성령의 성화'가 기존의 성화 론의 핵심입니다. ‘성령 성화’입니다. 이 근호 목사가 주장하는 “애초부터 살리지 못하는 것은 그 어떤 것도 거부하겠다”는 자세는 도대체 누구에게서 본 것이고, 누구의 주장입니까?
행위를 강조하다 보니, 성화의 본질에서 벗어난 '일부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강한 심어줌을 위한 강한 화법은 좋지만, 거기에서 벗어난 전체를 부정하면 인된다고생각합니다. 성화 론의 잘못된 부분적인 것(율법적 성화론)을 ‘전체로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 그의 주장
“하나님께서 따로 ‘택한 자들이 있다’는 말은, 이 지상의 인간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창세전의 기획된 대로 움직이는 피조세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영광과 찬양을 받으시겠다는 것이다. 즉 ‘인간 긍정’에 기초해서 구원이 성사되는 그런 죄악 된 신학을 의로움과 거룩함으로 위장되어 배태하게 되어 있다. 여기서 기존의 인간 세계의 죄악 구조와 하나님이 주신 언약 구조와 정면충돌을 빚게 된다.”
“하나님은 이 희생자를 근간으로 ‘대신 죽으심’ 형태의 ‘언약 완성’으로 약속하셨다. 이렇게 되면 장차 ‘메시야 안’ 즉 ‘예수님 안’에 놓여 있게 되는 자들은 거룩이든, 의로움이든, 구원이든 그 어떤 경우라도 자신을 긍정적으로 거론할 수 없는 입장이 된다. 바로 이런 자들의 안목에만 “나 외에 다른 신”라는 의미를 제대로 알게 된다. 즉 참 신과 거짓 신의 차이점은, 인간을 긍정하는 신이냐? 아니면 인간을 부정하면서 다가오시는 신이냐?로 구분되는 것이다.”
--> 죄로 인간은 부정되었고, 그러나 "다시 죄사함으로 긍정"되었습니다.
성경이 분명히 말하는 바, 하나님 창조의 핵심, 하이라이트는 ‘인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구원하심의 초점도 인간입니다. 같이 타락했지만 악한 천사(마귀)는 구원하지 않습니다. 타락한 인간만을 구원하십니다. 그래서 복음의 대상은 오직 인간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다시 살려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성화 론은 ‘인간 긍정’에 기초하는 신학이 아닙니다! 십자가 신학에서 주장하는 바와 동일하게, 인간의 철저한 부정에서 십자가를 바라보고, 십자가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고, 구원 얻었으므로 감사하고, 찬양하고, 헌신하고, 기뻐하는 신앙입니다. 기존 성화 론도 ‘오직 예수’ 입니다! ‘오직 예수 뿐’ 입니다! 오직 주님께 의지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 그의 주장
“성화론, 이것은 인간이 살아있다고 여기는 한 영원히 버리지 못하는 악마의 그림자이다. 이 사람은 실은 악마와 함께 있기에 그런 그림자를 내비치게 마련이다. 십자가에서 정말 예수님과 이미 죽어버린 자에게만 ‘성화론’이라는 그림자는 사라진다.”
--> 보수정통신학이 주장하는 성화 론은, 창조된 피조 적 존재성을 기초로 해서 신을 규명하겠다는 시도하지 않습니다.
철저히 십자가를 기초로 해서만 신을 규명합니다. 성령께서 끌어가시는 성화의 삶이 '악마적'이라면, 그리고 기존의 성화 론을 부정하는 자, 그 만이 십자가에서 정말 죽은 자(구원 받은 자)라면, 이것은 성화의 차이에서 더나아가 ‘구원론의 심각한 문제’를 말해 주는 것입니다. 이런 극단론이 십자가 신학에 있습니다.
▼ 그의 주장
“이 거룩이 개인적인 거룩으로 전환될 소지는 전혀 없다. 왜냐하면 더 이상 ‘그리스도 안’와 무관한 ‘성도 안’이라는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도를 증거 하기 위한 성화 론이란 ‘그리스도 밖’에서는 인정받을 이론이다. 성도는 오로지 십자가 죽음을 통해서 주님의 거룩케 하심을 증거할 따름이다.”
--> 기존의 성화 론은, 성도를 증거 하기 위한 성화 론이 아닙니다. 믿는 자의 모든 것을 통해 오직 예수님만 증거합니다.
2) 삼위 하나님의 '구속 사역의 연결'을 강조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성령의 역할이 상대적으로 약합니다. 성령이 하시는 일이 오직 예수인데, 십자가 신학에서 성령을 말하면 오직 예수가 아닌 것처럼 되는 우려가 있습니다. 복음의 확증은 성령님이 행하시는 것이고, 그러므로 성령님은 십자가 신학의 주장처럼 “오직 예수”를 말씀하십니다.
▼ 그의 주장
“이것은 십자가 안에서 인간이 어떻게 다루어지느냐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한 채 어서 속히 자아가 긍정적인 존재로 재탄생(새로운 피조물) 되기에 희망하는 성급한 마음에서 나온 판단이다. 어떻게 부정당한 자가 어느 새 다시금 긍정적인 인물로 다시 시작되는가? 여기에 대한 논리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있다.”
“십자가에서 나오는 능력은 거룩한 분에 의한 거룩하지 못한 피조물에 대한 심판이요 저주이다.
왜냐하면 성도에게 있어 세상이란 이미 죽은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갈라디아서 6:14)”
--> 죄로 부정당한 자가 십자가의 예수 보혈의 피로 긍정적 인물, 새로운 피조물로 창조 되었습니다.
이미 구원을 얻었고(중생, 성화, 영화),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새로운 피조물로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고 있습니다. 부정당한 자가 어느 새 다시금 긍정적인 인물로 다시 시작되는 것은 “성령의 거룩케 하심으로” 가능합니다.
십자가는 끝이 아닙니다. 죽음이 끝이 아닙니다. 그 다음이 또 있습니다!
생명입니다. 죄 사함 받은 ‘저주 없는 삶’입니다. 이 생명의 축복이 왜 이 세상에서는 나타나면 안 됩니까?
에베소서 1:7.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갈라디아서 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로마서 7:6.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율법 조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고후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빌립보서 4:4.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은 위에 갈라디아서 6:14을 말한 사도 바울이 명령한 말씀입니다.
주님의 죽으심으로 인한 우리가 다시 살아났음으로, 그것으로 우리 안에 성령 하나님이 내주하시고 인도하시고 말씀하심으로, 그래서 천국의 소망을 바라봄으로, 항상 기쁜 삶이 신앙의 삶입니다.
3) 부활 신학이 필요합니다. 십자가의 목표는 ‘부활’입니다. 부활을 위해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십자가의 결과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부활입니다. 죄 사함입니다. 다시 살아남입니다.
기존 축복 론이 주장하는 물질 적, 세상 적 축복 구원의 결과는 문제이지만, 부활의 기쁨과 소망이 믿는 자들의 삶을 끌어가는 것은 성경적입니다. 십자가 신학은 죽은 자신의 죽음만을 명상하는 신학이 아니라, 오히려 십자가의 결과를 강조하는. 십자가가 바라보고 있는 부활을 강조하는 신학이 되어야 한다는 개인적인 생각을 합니다.
바울 사도는, 자신의 서신 서에 “수도 없는 엄청난 성화에 관한 말씀”을 했습니다.
십자가 신학에서 주장하는 “그 모든 행위의 명령은 죄 된 우리가 지킬 수 없는 불가능한 것이므로 그것은 곧 십자가를 바라보라는 말씀이다.”라는 것은 성서 해석의 무리라고 생각합니다. 신약 성경의 모든 명령은 구원 받은 성도에게 그 구원받음을 나타내시는 하나님의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믿는 자의 삶의 명령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그 십자가를 우리 믿는 자에게 적용시키시는 성령님의 사역입니다.
십자가의 나 자신(아)의 죽음의 사실, 그것에 대한 묵상은, 우리 자신을 바라봄이 아닌 천국을 바라보게 함이요, 예수 안에서의 생명력이 주는 부활의 소망을 바라봄이요, 오직 예수의 바라봄입니다.
로마서 6;1-4.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
10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 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4) 보수정통신학은 ‘의인관’은 잘못된 의인관이 아닙니다.
▼ 그의 주장
“십자가는 죄 때문에 발생시킨 하나님의 사건이다. 그렇다면 이 십자가 사건을 중심으로 인간의 죄는 본질이 발각된다.
인간은 자신의 지니고 있는 죄 관념으로서는 도저히 하나님이 보시는 죄 관념을 이해할 수 없다. 이 ‘이해할 수 없음’을 분명히 하기에 터져버린 사건이 바로 십자가 사건이다.
따라서 인간은 자신의 잘못된 죄 관념에 준해서 십자가 사건과 연결시켜 ‘죄를 상쇄’시키려고 시도하게 되면 결국 남게 되는 것은, 자신을 ‘용서받은 의인’, ‘구원받은 의인’, ‘영생 얻은 새로운 피조물’로 착각하는 자아뿐이다. 이 잘못된 의인관 속에서 더 이상 십자가가 계속 머물 이유를 갖지 못한다. 십자가는 새로운 피조물을 위하여 자리를 내어주고 추방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자리에 신약에 나오는 사도들의 말씀과 명령들을 그대로 지킬 수 있다고 자부하는 능력이 차지하게 된다.”
--> 구원 받은 자 대부분이 십자가 사건과 연결시켜 ‘죄를 상쇄’시키려고 하지 않습니다.
성령 충만하지 못해 자기에서 나오는 행위의 부담감을 가지고 힘든 신앙생활을 할 수는 있지만, 자기 행위로 구원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오히려 ‘용서받은 의인’, ‘구원받은 의인’, ‘영생 얻은 새로운 피조물’의 확신을 가지지 못합니다. 구원받은 자로서의 확신은, 십자가에서 구원 받고, 성령으로 인해 그 십자가를 깨닫는 자에게 주어지는 믿음의 확증입니다.
십자가가 바로 이런 의인을 만들었습니다.
주님이 죽으신 것은 우리를 의인으로 만드시기 위한 것입니다. 행위로 완전해 지는 의인이 아닌 ‘믿음으로 완전해 지는’ 의인 말입니다. 사도들의 말씀과 명령들을 지킬 수 있습니다. 성령으로요. 우리가 지키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지키게 하십니다. 바울 사도는 성령으로 말씀을 지키라고 말합니다.
▼ 그의 주장
“하나님은 아담에 속한 모든 자를 이미 모두 죽은 자로 보신다. 이제부터 ‘산 자’라고 불리우는 자는 ‘그리스도에게 붙은 자’ 뿐이다. 그것은 그리스도만이 죄라는 죽음의 권세에서 살아나셨음을 근거로 한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에게 있어 ‘살았다’하는 규정은, 자신의 피조성에다 더 이상 근거를 둘 수가 없는 노릇이다. 즉 ‘그리스도의 구속하심 안(in)’ 외에는 그 어떤 경우에도 ‘살았다’라고 규정지을 수가 없는 형편에 놓인 것이다.”
--> 보수정통의 성화 론의 주장과 동일합니다. 우리 자신의 자아에 근거해 살아 보려고 하는 것이 성화 론이 아닙니다. 보수정통의 성화 론이 주장하는 바가, ‘그리스도에게 붙은 자’ 로서의 산자입니다. 그리스도의 구속함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주장하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이 근호 목사가 주장하는 ‘성화의 허구성’에 대해 제 나름대로의 성경적인 판단을 했습니다.
혹시 잘못된 것이 있다면 성경을 근거로 반박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다시 한 번 부연하지만,
저는 어느 신학이든 그것이 성경(적)이라면 바로 제신학을 접고 그 신학을 받아들일 용의가 있음을 말씀 드립니다.
이제 지금까지의 저의 소고를 정리하려 합니다.
성화는 과정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화를 이루라고 명령하셨고, 지금도 성령님을 통해 그명령을 이루어 가십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한 순간에 이룰수 있는 성화를 오랜 시간에 점진적으로 이루어 가시는 걸까요?
하나님은 원하신다면 우리를 한 순간에 완전히 죄 없고 완벽한 존재로 만드실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 스스로 그렇게 하시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왜 주님이 무덤에서 살아나신 후 곧 바로 사탄을 멸망시키지 않았을까요? 그리고 왜 하나님은 죽음을 곧바로 폐하여 버리지 않으셨을까요? 만약 죽음을 폐하셨다면 우리는 육체적으로 죽지도 않고, 그리고 죽음을 통한 이별에 울지 않아도 되었을텐데 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것에 대한 대답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지 않기로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유일한 대답이고, 정확한 대답입니다. 성화의 과정은 하나님의 결정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기로 하신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다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전에 알지 못할 때에 따르던 너희 사욕을 본받지 말고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벧전 1;3)
샬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