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석훈

정석훈 목사님의 멋진 설교(오용익)

아빠와 함께 2013. 1. 29. 13:23
생명
요한복음1:4-5

생명의 반댓말이 무엇입니까?
안생명이 아니고 생명없음, 즉 죽음입니다.

여러분 죽음이 좋습니까? 좋지 않습니까?
죽음을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면 자살하는 사람은요?
왜 자살합니까? 살기 싫어서 자살한다고 하지요.

이 말을 좀 생각해 보면 이런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나는 너무너무 살고 싶어요 그래서 자살해요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살고 싶어서 자살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하고픈대로 살고 싶다는 뜻으로 자살을 하는 것이지요.

하기야 죽지 않고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다면 왜 자살하겠습니까?

그러나 자살조차도 너무나 살고 싶다는 반증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죽음을 너무너무 좋아합니다. 아니 죽음을 너무너무 사랑합니다.
그래서 생명은 곁눈조차 주지 않습니다.

갑자기 이상한 이야기 합니까?
이제부터 성경에서 말하는 죽음이란 생명이란 무엇인지 생각해보겠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왜 죽음을 너무너무 사랑한다는 말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이란 하나님의 은혜속에서만 살아가는,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살아간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외모, 이런 것들은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살아갈때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사단의 유혹에 넘어가게 됨으로 하나님 형상에 문제가 생깁니다.
제가 먼저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만으로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고 했죠.

그래서 골로새서 1:15절을 보면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이지요.
예수님의 모습이 어떠하길레 하나님의 형상입니까?
긴수염 아저씨라서 그렇습니까?. 그런 사람은 세상에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러면 파란 눈이라서 하나님의 형상입니까?

그렇지 않죠.

예수님은 우리와 전혀 다를바 없는 외모를 가지셨습니다.
사람의 모습을 가지셨죠.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의 형상입니까?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시어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분이기에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본래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지요.
그래서 어떻게 됩니까?
인간은 흙으로 돌아가야 할 인생이 되었습니다.

창세기6장3절에 보면 인간들이 육체가 되었다고 표현합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없는 인간은 육이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더 이상 하나님의 형상이 아닙니다.

이런 상태를 두고 죽음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죽음을 너무너무 즐깁니다.

창세기 4장에 보면 가인이 아벨을 죽입니다.
이뿐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사람을 죽여 놓고 하는 말이 자신은 너무너무 살고 싶다고 합니다.

이후 가인과 그 후손들은 너무나 찬란한 문화를 만들어 냅니다.

여러분 안시성 들어 보셨습니까?
성이지요.
가인은 성을 만들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타워펠리스입니다.
조금 있으면 인천에 53층 아파트를 짓는다고 합니다.
이것과 비슷한 것입니다.

성을 왜 만듭니까?
공격과 방어개념 아닙니까?

자신을 철저하고 보호하고 자신을 건드리는 자는 다 죽여 버리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라멕이라는 자가 나오는데, 이 사람은 아내 둘을 취하지요.
우리 청년들은 너무 부럽습니까?
두 여자를 취해도 당당하니 말입니다.

하나는 아다요 하나는 씰라입니다.
아다가 낳은 아이 중에 야발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장막에 거하며 육축치는 자의 조상이 됩니다. 여러분 사냥을 하다고 육축을 한다는 것은 굉장한 발전이죠.

맨날 돌아 다니면서 짐승을 잡아 먹어야 하는데, 더 이상 불안함이 사라졌죠.
안정권에 접어 든 것입니다.
마치 오늘날로 말하면 언제 날아 갈지 모르는 회사원이 아니라 철밥통 공무원이 되었다는 말과 같은 말이라 보아도 무방할 것입니다.

그 아우 이름은 유발인데 이 사람은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됩니다.
음악이라는 것이 누구를 위해 만들어 졌습니까?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라멕을 찬양하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그리고 씰라가 나은 아들 중 두발가인은 동철기계를 만든 자입니다.
청동기, 철기 문화를 만들어 냈다는 것은 여러분이 주몽을 보아서 잘 아실 것입니다.
나무와 쇠붙이가 전쟁을 하면 누가 이기겠습니까?
그야 쇠붙이죠.

마치 핵폭탄과 수류탄이 싸우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라멕의 노래를 보면 완전히 자기가 하고싶은 대로 합니다. 사람을 죽이고 싶으면 죽이고, 정말 지 마음대로이지요.

이것이 죽음의 모습입니다.
신기하죠.
죽음이라고 하면 그야 말로 죽는 것인데, 펄펄 살아서 자신들이 하고싶은대로 하며 살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을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 믿지 않아도 이렇게 펄펄 나는 저 꾀꼬리처럼 살아서 즐길 것 다 즐기는데 무슨 예수님을 믿고 산다 말입니까?

그래서 제가 사람들은 죽음을 즐긴다고 말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죽었음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들이 살아 있다 라고 생각합니다.

그 증거를 역사 속에 쫘 펼쳐 놓은 것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살아 있다, 생명이 있다고 하는 자들은 어떻습니까?
아벨처럼 죽습니다.
창세기 4:16-24절을 보면 가인의 후손들은 너무너무 잘삽니다.
그런데 창세기5장을 보면 낳고 죽고 낳고 죽고를 반복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믿음이 있는 자들은 자신들이 마땅히 죽어야 하는 자들임을 아는 자들입니다.
그들이 바라보아야 할 분이 누군지를 알기 때문이 이렇게 낳고 죽는 것입니다.
물론 이들의 문화가 없었다는 것은 아니겠지요.

그러나 이들이 보여주는 것은 라멕과 그 자손들의 관심과는 다릅니다.
시편을 읽어 보면 우는 소리가 많죠.
참으로 희한하지 않습니까?
생명이 있다면 희희낙락해야 하는데, 왜 자꾸 우는 소리합니까?

그것은 저쪽, 즉 생명 없는 쪽에서 자신의 세력을 확장시키고, 자신의 살아 있음을 증거하려면 생명 있는 쪽을 죽여야 하니까 그런 것입니다.

이렇게 세상은 생명없는 자가 마치 더 생명 있는냥 활개치며 날뛰고 있습니다.

생명이라는 것은 이렇게 팔딱팔딱 뛰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복음 18장9-14절을 보고 마치겠습니다.
이 본문에서 세리와 바리새인이 나옵니다.
바리새인은 하나님 앞에서 무엇이라고 합니까?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얼마나 훌륭합니까?
이 정도 신앙생활하면 잘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주님께서는 너는 아니야, 너는 아니야 라고 하십니다.

한편 세리는 어떻게 기도합니까?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세리가 의롭다 하심을 받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님 앞에서 자신을 높이니 당연히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합니다.
이런 것은 죽은 자들의 공통적인 생각입니다.

산자, 의로운 자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저를 불쌍히 여기옵소서, 저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하며 나아오는 자입니다.

물론 말로 흉내내면 된다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이 진정 이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생명이요 빛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님은 없어도 살수 있다고 합니다. 오히려 자신들이 더 살아있는 자라고 우깁니다.
그들은 많은 것들을 그들 자신들로부터 내어 놓습니다.
명예와 업적, 부, 자식 등등. 종교적으로는 기도와 헌금과 봉사, 예배 참석 등등.

죽은 자들은 자꾸 외부적인 것을 꺼집어 내어 자신만의 큰 성을 쌓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참 생명을 얻은 사람은 자기의 것을 꺼집어 내 놓는 자가 아니란 주님의 것을 예수님의 것을 자꾸 꺼집어 냅니다.

요한계시록4:10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지며 가로되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이렇게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인줄 알고 주님께만 영광 돌리는 자가 생명 있는 자입니다.


 

 오용익 (IP:59.♡.201.208) 07-03-27 08:41 
이 설교는 "생명은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인줄 알게 하는, 그래서 주님께만 감사하고 영광을 돌리게 하는 하나님의 의로움"이라고 한다. 성도에게 나타나는 생명의 모습은 이 세상에서 뭔가를 더 가지고 쌓아서 높아지는 과정이 아니라, 도리어 죄인의 자리에서 긍휼만을 바라보는 모습이라고 한다. 자신에게서는 내놓을 것이 없어서 예수님의 것을 자꾸 끄집어 내는 모습이라고 한다" 그것이 예수님의 죽음으로 일구어낸 생명현상이라고 한다. 참  좋다. 아버지가 자애로움을 가지고 아들에게 인생의 도리를 가르치는 것과 같은 푸근함이 전해진다. 목사가 보이지 않는다. 불이 끓는 지옥 한가운데서 예수님이 자기 제자들에게 사랑을 베푸시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내 사랑만으로도 너무나 충분한 세상인것을 자녀들아 알지? 하는 그런 자애로움이다. 십자가의 피가 사랑으로 사랑으로 내려 앉아서 급기야 이 척박한 죽음의 땅에서조차 피워내는 꽃같다. 생명이다. 이 지상에 이렇게 푸근하게 생명이 나타날수 있다는 것이 기적이다. 한번만이라도 그 기적을 보고 싶어 하는 것이 신자의 마음일것이다. 사랑없는 세상이 아닌가? 유사사랑이 판을 치고 있는 세상이 아닌가 ? 예수님이 제자들을 앉혀 놓고 그렇게 말씀하는 것 같은 느낌이 전해진다. 내가 죽도록 너에 대한 사랑을 포기하지 않으마! 그러니 이 사랑만으로도 충분하고 넉넉한 세상을 한번 살아보지 않겠니? 나는 너희들의 발을 이렇게 씻겨준다. 온몸도 씻겨준다는 맘으로 말이다. 그러니 그 사랑으로 이 세상에서 지는 모습으로 죽는 모습으로 생명없는 세상에서 그렇게 살아서 세상이 말하는 생명이 바로 죽음이라고 하는 점을, 예수님만 왜 생명이 되는지를 알려주는 삶을 살아달라고. 아주 푸근하게 아주 든든하게 아주 아주 믿음직하게.
생명이 담긴 설교한편이 주는 의미란 놀람과 경외 그 자체이다. 기적이다. 목사의 공부란 이 기적을 생산하는 자기 애씀이나 노력의 과정이 아니다. 반대로 하늘에서 무상으로 이미 예수님의 피값으로 완성된채 제공되는 생명을 얼마나 목사 자신부터 싫어하고 반항하는지를 밝혀내시는 생명의 작용이다.이 작용을 거쳐서 목사는 자신이 죄인중에 괴수이며 오직 생명은 예수님 한분뿐이기에 그 생명에 기대어서 하늘나라 간다고 비로서 증거할수 있게 되리라. 설교할때마다 처음 설교하는 것처럼. 설교할때마다 마지막 설교인것처럼. 자신은 지금 막 생명을 알게 되었노라고 하는 경이로움으로. 그래서 지금 죽어 하늘나라 가도 좋다는 어린아이처럼. 아마도 샘이 깊은 물맛이란 목사가 파내서 교인들에게 줄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은혜로 택한 백성들에게만 제공되는 복이기에 목사조차 그 샘의 근원이 아님을 바닥에 까시는 작업. 아마도 그것이 주님께서 목사를 공부시키는 이유일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