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해석의 나쁜 예, 좋은 예, 그리고 피
고린도전서 10장을 통해서 성경 해석의 나쁜 예와 좋은 예를 한 번 제시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고전 10장
8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간음하다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죽었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간음하지 말자
9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하였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시험하지 말자
10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저희와 같이 원망하지 말라
11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
12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13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1. 나쁜 해석의 예
옛날 출애굽 시절, [이스라엘 조상]들은 간음하고, 하나님을 시험하고 원망하여 모두 죽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이라는 죄악된 세상에서 성도를 구원하셨건만 여전히 그들은 애굽의 행실을 버리지 못하고 개가 토한 것을 도로 먹듯이, 돼지가 자신의 배설물 위에 그대로 다시 눕듯이 죄를 범하고 말았고, 죄의 삯은 사망이기에 그들은 그들의 죄 값을 제대로 치루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우리 성도는 이것을 [거울]삼아서 더 이상 우리를 위해 자기의 아들까지 아끼지 않고 내어주신 하나님 앞에서 간음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 사랑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원망해서는 안 됩니다. 사도 바울은 말세를 만난 우리 성도들에게 경계를 삼기 위해 위 본문을 통해서 성도에게 절절한 심정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더욱 조심할 것은 우리가 이제 간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시험하는 일 따위는 하지 않습니다라고 생각하면서 [서 있다]고 교만할 것이 아니라, 항상 자신을 살피고 깨어서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어찌나 미쁘신 분이신요! 오늘 본문 13절을 보시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성도가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시험과 고난만 주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힘들다, 어렵다라고 한탄할 것이 아니라,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일을 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넉넉히 세상을 이긴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돌리면서 이겨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능히 감당할 수 있는 시험만 주시고, 피할 길도 함께 주시는 미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2. 위 해석을 나쁘다고 한 이유
(1) 첫 번째 아담과 두 번째 아담이 대조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위 해석이 나쁜 이유는 이스라엘 조상들의 행위와 성도들의 행위를 비교함으로써 죄의 종과 의의 종이라는 하나님의 배치를 인간의 가능성 영역으로 왜곡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해석은 듣는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은 착각을 조장합니다. 즉, 이스라엘 조상 중 가나안 땅에 들어간 사람과 광야에서 죽은 사람의 차이점이 오직 그들 행위에 달려 있는 것처럼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재 십자가로 부르심을 받아 천국가게 된 성도의 구별 여부도 나의 행위에 달려 있다고 자연스럽게 연결되며, 이러한 연결은 세상 윤리와 결합하여 성도가 마땅히 해야 할 행위를 하거나 또는 할 수 없음에서 오는 고민이나 처절한 번민들을 유발한다고 조장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사람을 딱 2명으로 나누고 있습니다. 첫 번째 아담과 두 번째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아담 안에서 죄가 왕노릇합니다. 인간은 그 죄의 종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간음, 원망, 시험이라는 것을 직접 판단하고 취급하여 그 결과대로 책임질 수 있는 처지에 있지 않습니다. 즉, 죄의 종으로 살 수 밖에 없도록 조치하신 하나님 다움이 이 해석에는 전혀 나와 있지 않는 것입니다.
첫 번째 아담이 드러나지 않기에 두 번째 아담이 하신 십자가 사역이 드러나지 않거나 드러난다 하더라도 통과의례적 일회용으로 전락합니다. 그래서 성도라는 각각의 주체가 마구 튀어나오게 되어 있는 해석입니다. 즉, 새로운 피조물을 만드신 진짜 창조주가 하신 일에 관심을 돌리게 하는 것이 아니라, 피조물의 시각 그것도 옛 피조물의 추억을 더듬게 하는 시각 정도에서 성경을 해석하고 있습니다.
(2) 자기 부인이 아닌 자기 긍정을 조장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조상들과 내가 분리되어 있기에 나의 가치를 높일 수 있는 자기 긍정을 유도하고, 자기 긍정의 최고봉이라고 할 수 있는 신의 명령을 지키는 인간이라는 목표를 심어주기 때문에 나쁜 해석입니다.
인간은 이미 십자가라는 정답을 가지고 있기에 이스라엘 조상들이 한 행동은 자연스럽게 오답처리되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고방식 자체가 오답이었음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더면 우리는 저희가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데 참예하지 아니하였으리라 하니 그러면 너희가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 됨을 스스로 증거 함이로다 (마태복음 23 : 30-31)
(3) 성경을 세상 사람들도 다 알고 있는 교훈 수준으로 전락시켰기 때문입니다.
자기 긍정을 조장하였기에 성경에서 말한 거울은 교훈이 되어 버립니다. 성경의 문자가 세상사람 누구나 해석 가능한 본보기가 됩니다. 그 본보기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게 하지 않습니다. 나의 행동을 바라보게 합니다. 평안을 주지 않습니다. 저렇게 되지 말아야 한다는 두려움을 줍니다. 그러나 성경은 자신을 비춰보려는 그 누구든지 가만두질 않습니다.
(히브리서 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4) 예수님의 일하심이 이제 필요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일하심의 결과로 만들어진 성도라고 하면서도 위 말씀을 근거로 서있고, 조심해야 할 부분은 이제 성도에게 남겨져 버렸습니다. 성도가 책임져야 할 부분이 생긴 것입니다. 전혀 새롭지 못한 피조물입니다.
예수님의 일하심이 정지하고 말았습니다. 서 있기 위해 끝까지 조심해야 얻을 수 있는 평안이 과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세상이 알지도 못한 평안일까요? 이러한 불안과 자기 성찰은 이미 악마도 마스터해 놓은 것들입니다. 도대체 예수님께서 왜 십자가를 지셨야만 했는지를 이 해석은 놓치고 있습니다.
(5) 인간을 위한 하나님으로 전락했기 때문입니다.
인간 구원이 되지 않을 것을 염려해서 인간을 고려하고 인간을 위해 고난과 시험의 난이도를 조정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고난과 시험을 주시되 피할 길도 함께 주심으로써 인간 구원은 반드시 이루고 마는 인간에게 종속된 하나님 상을 그대로 전달하기 때문에 위 해석은 나쁜 해석입니다.
3. 좋은 해석의 예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입니다. 그러므로 위 본문도 예수 그리스도의 일하심, 즉 십자가 사건의 증거로서 기록한 것입니다. 그 사건의 피조물로 생겨나 버린 예수 안에 있는 성도 또한 자신이 어떻게 예수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는지를 알기에 그 증거를 위 기록에서 찾게 될 것입니다.
즉, 예수 안에 있는 사도가 예수 안에 있는 성도에게 간음하지 말자, 하나님을 시험하거나 원망하지 말라고 했을 때 그것이 예수 안의 세계를 창조하신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어떻게 증거 하는 지가 위 본문의 핵심이 되는 것입니다.
일단 광야에서 죄를 범해서 죽었다고 하는 이스라엘의 조상들을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애굽을 만드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출애굽을 시킨 것도 하나님이십니다. 홍해만 건너면 바로 가나안에 도착하지 못하고 40년이라는 광야를 배치하신 것도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좋은 환경, 좋은 음식 주지 않으신 것은 하나님이신데 왜 그 하나님은 이스라엘 조상들이 원망했다고 죽이실까요?
하나님 자체가 이스라엘 조상의 구원용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그렇게 다룸으로써 보여주어야 할 진짜 하나님의 백성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 진짜 하나님의 백성을 만들어 내는 피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참 하나님이심을 비밀로써 계시하기 위함입니다.
비밀로써 계시한다는 말 자체가 사실 세상에서는 모순입니다. 계시가 무슨 뜻입니까? 밝히 깨닫게 보여주신다는 말 아닙니까? 비밀이 아니죠? 활짝 열어서 깨닫도록 도와줘야 할 것 아닙니까? 그런데 왜 비밀이 되어야 할까요?
비밀은 계시 받은 자를 계시 주신 분에게 종속시키는 장치입니다. 나 계시 받았다가 아니라, 저 분이 계시 주셨다를 유발하는 장치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예수 안에서 비밀인 십자가를 증언하고 있는 사도 바울이 이스라엘 조상들의 이야기를 거론하는 것은 그렇게 하신 분이 바로 하나님 자체라는 말이고 결국 간음하지 말라,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원망하지 말라라는 명령은 그렇게 유발하고 있는 하나님을 전제한 명령이기에 인간이 개인적이 차원에서 자기 행동 조심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닌 것이 됩니다.
11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들이 거울이 되는 이유는 그런 일들이 이제 정지되고 취소된 것이 아니라, 날마다 성도에게 벌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간음할 수 밖에 없고 여전히 하나님에 대한 원망을 그칠 수 없는 나이기에 “~하지 말라”라는 사도의 명령은 나를 죽이는 칼로서 작용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그들을 당하게 하셨다면, 나도 똑같이 당할 처지에 있다는 것입니다. 나와 그들이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 아담일 수밖에 없다는 거울이 만들어 지는 것입니다.
무엇이 말세를 몰고 옵니까? 하나님의 죽음이 조성하신 시간이 바로 말세입니다. 그렇다면 말세에 성도가 경계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죽음을 무시하는 것이겠지요. 하나님이 조성하신 말세에서 조차 살아남겠다는 인간의 본성이겠지요.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이 말씀은 말씀을 지켰다, 지키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주체가 성도일 수 없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미 다 이루심 안에 있는 성도에게는 자신이 섰다거나 넘어졌다거나를 별도로 평가받아야 하는 이유가 없고, 성도와 한 몸을 이루고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일하심만 감사하게 된다는 점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도라면 자기 행위를 조심할 것이 아니라, 조심해야 한다며 마음을 졸이고 있는 자기 자신을 아예 십자가에 못 박게 하신 하나님의 지혜에 매일 놀라고 신기해 할 따름입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일하심만을 강조하고 예수 안의 세계만 고집할 때만 나올 수 있는 하나님이 바로 아래의 하나님이십니다.
13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즉, 여기의 너희는 어떤 개별적 죄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한 몸된 성도입니다. 다 이루심 안에 놓여져 있기에 이제 이를 능히 감당케 하신 하나님이 바로 십자가 지신 예수님으로 밝혀지는 것입니다. 내 몸만 놓고 볼 때에는 여전히 죄를 유발하고 계신 하나님의 조치를 피할 수 없습니다. 그 사례가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하지만 지금 접하고 있는 단어들, [감당, 피할 길]이 적용되는 것이 과연 누구 때문에 가능하게 되었지가 선명해 지는 것입니다.
간음하지 말라라는 명령을 예수 안에서 적용할 때는 이미 이를 감당하신 분, 이미 피할 길을 제공하고 계신 분을 증거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 사이에 성도가 죄인 중의 괴수라는 역할을 하면서 십자가지신 예수님만이 온 우주의 주되심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이런 명령을 만날 때 마다 자기 자신을 점검할 수밖에 없는 나를 책망하시면서 십자가 안에서 다 이루어진 죄와 의와 심판으로 성령이 지금도 성도 속에서 교통하는 것입니다.
4. 이 좋은 해석도 죄가 되는 이유
그럼 이 좋은 해석은 왜 죄가 될까요? 그것은 위 해석이 좋다, 나쁘다고 판단하고 있는 주체가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제가 어떻게 글을 쓰던지 이미 [다 이루심]과 비교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이 글을 제가 좋다고 하던지 나쁘다고 하던지 그 다 이루심에 의해 [모두 죄]라는 평가를 피할 수 없는 처지입니다. 저는 십자가를 질 생각도 없고, 질 수도 없으며, 십자가를 져 봐야 아무 소용도 없는 죄인 중의 괴수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밥을 먹으면 금이나 은이 배설되지 않고, 그냥 똥, 오줌만 나옵니다. 인간이 무엇인가 하면 죄만 드러납니다. 그렇다면, 똥을 참아야 할까요? 죄는 참아야 할 문제가 아닙니다. 용서를 받아야 할 문제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요한일서 1장 10절)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여기서 우리는 용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 용서하신 분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들 수 없습니다.
(요한일서 3장 9절)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성도는 죄를 짓지 아니하고, 범죄치 못하는 것으로 여겨주시는 그 씨와 잉태하심을 입은 자, 즉 십자가에서 새롭게 태어난 자들이 바로 성도이기에 내가 정한 좋은 것도 내가 정한 나쁜 것도 모두 죄로 여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글을 통해 자신들의 구원 욕구를 분출하는데 있습니다. 저는 분명 똥이라고 했는데 자기들 임의로 뜯고 맛보고 씹더니 [똥이잖아] 한다는 말입니다. [십자가만 증거하셨네요]라는 반응은 제가 어떻게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지요.
고전 2장 9절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하나님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에서 비밀스럽게 준비되어 있는데, 제가 어떻게 그것을 꺼내어 와서 조작하고 위장할 수 있겠습니까? 제가 글로 뿜어낸 죄가 예수 안을 구멍낼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예수 안]이라는 표현을 고집하는 이유 중 하나는 [A의 안]을 이야기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A의 파괴가 전제되기 때문입니다. 성도를 이야기 할 때, 그냥 성도라고 하지 않고, [예수 안에 있는] 자로 표현하는 것은 바울이 바로 예수 몸의 무너짐, 즉 십자가 사건을 양보할 의사가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A, 즉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면 문제가 달라집니다. 안에 위치해 있는 자들이 스스로 A를 이기고 들어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내어 줌으로만, 불쌍히 여겨줌으로만 들어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이길 수 있는 인간은 없기에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 안은 바로 십자가 안이며 그 안의 성도는 바로 십자가를 유발한 죄인중의 괴수인 것입니다.
따라서 죄인 중의 괴수인 제 글도, 그에 대한 그 어떤 형태의 반응도 모두 죄라는 단어 속으로 밀려들어가도록 조치하신 십자가의 능력과 지혜만 [홀로] 영광받기에 합당합니다.
고전 2장 2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