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이근호 목사님의 강의녹취록이 아닙니다. 이근호 목사님의 강의 중 나온 질문에 대해 제 나름대로 답변을 생각해 보고, 또 다른 문제를 제기하는 등 제 느낀 바를 정리한 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목사님의 강의녹취록과는 다른 내용이 많이 포함되어 있고 목사님의 견해와는 아주 다른 표현이나 결론이 나올 수도 있습니다. 읽으실 때 이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낯선 용어들은 비현실성을 자아내면서 현실 속 독자를 난처하게 만든다. 이 낯선 용어들은 인간들에게 해석불가라는 당황스러움을 선물한다. 이 선물은 지금 나라는 주체를 뒤흔드는 폭탄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잘못된 주체를 해부한다.
전우주의 실체들은 유일한 주체되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유동적으로 흘러가고 있는 과정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만은 자신의 실체적 몸을 실체가 아닌 주체로 간파한다. 즉, 있지도 않은 주체를 나라고 고집하다 보니 예수 그리스도께서 벌이고 계신 사건을 과정이 아닌 결과로서 주체화 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후적 사고방식은 피조물이 창조주적 주체성을 거머쥐기 위해 영원성을 추구하는 과정 속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데, 이 필연은 결국 한계가 된다.
이 때, 계시록이 한계를 넘나들면서 가짜 주체를 우롱한다. 다음과 같은 문제가 주체의 흔들림 속에서 쏟아 내려온다.
불멸을 추구하는 주체라고 하면서 왜 계시록 조차 이해하지 못하는가?
해석할 수 없다면, 지금 계시록을 해석하겠다고 나서고 있는 "나"의 본질은 무엇인가?
내가 손 쓸수 없도록, 나를 무가치하게 만들고 있는 계시록의 기록 주체는 누구인가?
나와 기록 주체와의 관계는 무엇인가?
이 물음들에 대한 적절한 대답을 찾는 것이 쉽지 않은 이유는 나라는 주체를 천국으로 밀어넣고 말겠다는 고집 때문이다. 즉, 그 문자를 지금도 한 치의 오차 없이 적용하고 계신 참 주체의 의도와는 전혀 무관하게 내 구원에만 집착해서 문자를 해석하기 때문에 용, 짐승, 666, 144,000 등의 용어에서 자꾸 자신이 미끄러져 내려오는 것을 실감케 된다. 그래서 그 당황스러움을 모면하기 위해서 이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라고 하면서 회피하고 내심 천국가는데는 아무 영향이 없다고 자위한다.
지금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다는 피조물이 있다는 것은 그 피조물에게 문제가 있다는 증거이다. 피조물에 어떤 문제가 있는가?
결국 창세기 3장의 사건으로 다시 돌아갈 수밖에 구조가 된다. 하지만 이런 구조 속에서도 여전히 문제는 남게 되는데 다음과 같은 것이다.
1차 창조→2차 창조(십자가 사건)으로 전개될 때 2차 창조는 1차 창조의 답습이 아니다. 1차 창조로의 복원이 아니다. 만일 십자가 사건이 1차 창조의 답습이요 복원이라면 1차 창조물을 불로 태우거나, 2차 창조물을 “새롭다”고 할 이유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베드로전서 3장 7절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 바 되어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베드로전서 3장 13절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불사르고 지나가기 위하여 보존되고 있는 것으로의 회귀가 아닌, 전혀 새로운 양상이 전개된다. 그렇다. 바로 이 지점이 문제가 된다. 왜 새로워야 할까? 1차 창조 때 무슨 문제가 있는가?
[1차 창조 → 예상치 못한 죄의 개입 → 하나님의 적절한 대처(십자가 사건) → 1차 창조의 회복]의 구조가 아니라, 1차 창조를 불사르고 십자가 사건으로 전우주를 다시 창조함으로써 획득되어지는 [새로움]이란 과연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은 자연스럽게 이런 질문까지 파생시킨다.
창세기에 등장하는 창조주의 속성이 왜 십자가 지신 예수라는 한 주체 속으로 매몰되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다. 욥을 예로 들면, 전 우주를 관리하는 신이 왜 욥이라는 한 실체를 괴롭게 함으로써 자신의 참 하나님다움을 증명하고자 하는가의 문제이다.
첫 창조작업이 새롭지 못하다는 것은 참 해괴망측한 발언이다. 전혀 없었던 無에서부터 有로의 창조가 새롭지 못하다니 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발언의 배경이 예수 그리스도의 성경해석에서 근거한다면 정말 이단적이지 않은가.
요한복음 5장 39절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골로새서 1장 16절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예수님과 그의 사도로 부르심을 입은 바울의 증거에 따르면 창조자체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그러니까 창세기에 기록된 (편의상 계속 1차 창조라고 부르고 있는) 창조 작업은 그냥 창조라고 하면 아니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위해 동원된 창조라고 해야 한다.
그렇다면 이제 문제는 앞서 그림으로 설명하였던 것과 같이, 1차 창조 안에 담겨 있는 속성들이 왜 고난을 통해서만 십자가 창조사건으로 명확하게 새롭게 되느냐에 집중되어 진다. 그냥 예수면 안 될까? 십자가지지 않은 예수는 왜 안 될까?
고린도전서 2장 2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응축된 참 하나님의 기능은 어째서 십자가라는 못질에 의해서만 밖으로 터져 나오는가?
1차 창조 과정을 몇 마디로 정리한 적이 있는데 그대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가라사대 → 그대로 되니라(실체) →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가라사대라는 말씀이 그대로 어떤 실체(해, 달, 하늘, 바다, 각종 동식물 등)가 되었을 때, 각 실체를 하나의 주체에서 파생되어 나온 [한 몸]으로 인식하지 않는다. 창조주도 피조물도 각각 하나의 주체로서 나름의 세계와 나름의 언어를 독자적으로 소유하면서, 그것들이 충돌하고 의사교환을 하면서 통합되어 나간다고 생각한다. 헤겔의 변증법(정→반→합)의 구조는 창조작업 도 넉넉히 파악할 수 있는 훌륭한 해석의 도구라고 자부한다.
그러나, 십자가 지신 예수라는 창조주는 피조물과의 분리를 거부하신다. 분리되어 나름 주체가 되고 타자는 객체가 되어버리고 마는 구조는 처음부터 창조의 질서가 아니었다. 무슨 근거로 그런 주장을 하는가? 바로 다음 성경 구절이다.
창세기 1장 27절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조작업이 하나님과의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한 몸]의 표현이 [하나님의 형상]이다. 하나님의 형상의 역할이 바로 창조주와 피조물의 통일이다. 그 하나님의 형상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그는 자신의 몸 안에서 우주의 통일을 이루셨다.
골로새서 1장 15절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에베소서 1장 10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마치 말씀의 능력의 일부가 떨어져 나와 피조물을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던져넣는 방식으로 통일되는 창조를 함축하고 있는 창조인 것이다. 피조물 전부가 그리스도 예수 안으로 불려 들어감과 들어가지 못함으로 양분되기 위한 목적으로 [분리]됨이 조성되는 것이다.
문제는 분리됨이다. 피조물의 자발적인 분리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피조물은 분리됨을 만들어 낼 수 없기 때문이다. 분리됨을 위한 하나님의 분리작업을 [잃어버림]이라고 한다. 잃어버림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분 또한 창조주뿐이라는 사실이 문제 해결의 핵심이다. 즉, 하나님의 형상이 형상으로서의 기능 - 연결됨과 통일성의 한 몸 기능 - 을 발휘하기 위한 떨어져 나감은 [하나님에 의한 잃어버림]을 통해서만 실현된다. 그러나 하나님이 무엇을 잃어버릴 수 있을까? 그것은 의도적인 버려짐이다.
마태복음 27장 46절
제 구 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그러나, 이 세상에서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버림을 받을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이다. 왜냐하면 예수님 말고 아버지와 일체된 분이 없기 때문이다. 버려졌다는 것은 분명히 일체였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말씀인데, 인간 중 그 어느 누구도 하나님과 일체였던 적이 없기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려진다는 것조차 불가능한 존재이다.
예수님께서 육체를 입으시고 십자가 위에서 보여주신 버려짐은 인간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인데, 그 이유는 하나님으로부터 버려지는 하나님이 있을 수 없다는 잘못된 하나님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버려짐은 예수님 자체가 본래 하나님이 아니다라는 것을 논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버려지는 하나님의 모습을 통해 인간은 철저히 하나님에 대해 무지함을 증거하는 것이다.
하나님에 의한 버려짐을 통해서만 창조도 구원도 모두 다 이루어짐을 알고 있는 분만 하나님으로부터 온 분이다. 왜냐하면, 자신의 버려짐조차 하나님께 의존되어 있을 정도로 존재에 대한 자신의 주도권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자기 생명조차 자신의 의지대로 할 수 없고 자신과 일치된 어떤 분에 의해 좌우될 수밖에 없는 철저한 자기부인이 벌어지는 장소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다.
곧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잃어버림, 곧 버려짐만이 창조의 근본된 힘이 [사랑]인 것을 보여준다. 그 사랑은 너와 내가 분리된 채 쏟아놓은 욕망이 아니다. 창조주와 피조물의 구별과 분리를 전제로 한 복종이나 지배가 아니다.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 바로 사랑이시다. 다 이루심이다.
요한일서 4장 16절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
하나님이 빚어내는 잃어버림은 이토록 처절한 고난의 양상을 띠게 된다.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음이 과연 어떻게 인간에게 뿜어져 나올까? 저주이다. 이 저주와 고난은 인간에게 떨어진 선악과 사건을 고발한다. 창조질서를 힘의 질서로 인식하고 하나님과 나의 동등됨을 추구하기 위한 경쟁의 장으로 변질시킨 죄의 실체를 고발하는 역할 역시 창조주되신 분이 저주받음으로써만 가능하기에 하나님 자신이 버림받고 저주받고 잃어버린 자 되신다. 버림이 표석이 되고 저주가 축복이 되며 잃어버린 자가 구원하는 자가 되어 양쪽 모두가 실상인 [한 몸]에서 [한 영]을 이루는 상태로 만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새로움이다!
에레미야 31장 31~33절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파하였음이니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누가복음 22장 20절
저녁 먹은 후에 잔도 이와 같이 하여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고린도전서 11장 25절
식후에 또한 이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히브리서 12장 24절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니라
성경의 새로움은 창조주와 피조물 간의 막힌 담을 부수는 것이다. 이 막힌 담은 창조주로부터의 독립을 갈망했던 피조물에게 진정한 버려짐과 저주받음을 통하여 피를 뿌림으로써 사랑으로 새로움을 잉태하게 된다.
새로움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법이며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과 분리되지 않는다. 그 백성 자체가 이미 그 법 자체이며 기록의 증거이다. 그 법과 기록은 약속된 하나님의 형상이신 예수그리스도의 피의 생산물이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자신의 아들의 피에 의해 생산된 새로움을 포기하실 리 만무하다. 그 놀라운 사랑의 능력과 지혜를 누구를 구원하기 위해 소비하거나, 그 효력을 중단시킬 이유가 전혀 없다.
히브리서 9장 12절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그 피의 새로움은 하나님 형상의 주되심으로 표출된다. 모든 것을 그 속에 매몰시킨다. 바울은 그 세계를 [예수 안]이라고 한다.
로마서 11장 36절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십자가에 의한 새로운 창조에 의하면 예수 안의 세계만 세상이다. 예수 안의 피조물만이 누구든지에 해당한다.
요한복음 3장 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사도행전 2장 21절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하였느니라
안과 밖을 나누는 기준은 오직 십자가 지신 예수 뿐이다. 이 모습을 주되심이라고 한다. 결국 십자가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드러내기 위한 사건이며, 이로써 만들어진 주되심의 증거자들을 성도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왜 십자가 지신 예수님만이 유일한 주인으로 남게 되는지 늘 예수의 흔적으로 간직하게 된다. 그 흔적이란 결국 나 때문에 흘린 예수님의 피 자국이다. 이 흔적이 바로 예수님만이 주인이며 나는 그의 주되심의 증인으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낙인이다. 이 낙인이 괴로움 속에서도 위로와 평안이 된다.
갈라디아서 6장 17절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그렇다면, 성도는 십자가라는 예수의 주되심의 증인으로 사는 탓에 하나님 죽음의 그늘이 늘 드리어지는 땅위에 위치한다. 주되심의 증인. 십자가의 증인. 이것이 성도이다. 성도는 십자가 그늘이 에덴동산이요, 천국이다. 그 곳에서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는 것은 성도 아니다. 천국 속에 자신을 흘려보내신 분의 피를 찬양하는 것이 성도다. 왜 그럴까? 자신은 천국에 가당치도 않은 죄인의 괴수이기 때문이다.
디모데전서 1장 15절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결국 성도는 내가 천국에 있다는 사실에 감사한 것이 아니라, 나를 천국에 보내고야 마신 예수님의 사랑에 자신이 부인되는 사람이다. 자기부인이라는 지고지순의 해탈의 경지를 밟는 정복자가 아니라, 사랑 때문에 자신의 이름을 망각하게 된 자이다. 내가 쥐고 있는 사랑은 저주요 고난이었으나, 주님의 사랑은 내가 없어져도 두려울 것이 없는 사랑이다.
요한일서 4장 18절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그러나 창세전 예정도 나를 위한 구원 작업의 일환이었다고 한다면, 그래서 구원받은 성도로서의 삶을 통해 좋은 윤리 성적을 내야 한다면, 내가 그대로 남아 있기에 두렵다. 미진한 것이 많다. 지켜야 할 것들이 아직도 산적해 있다. 그러면서 꿈꾼다. 세상도 이해할 수 있는 경건한 삶을 말이다. 세상 사람들과 유통될 수 있는 가치로 내 몸을 치장하고 싶어한다. 십자가 죽음으로 결코 소통하지 않는다. 이미 정답을 손에 넣은 이상, 죽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런데 사도 바울이 과연 그랬을까?
갈라디아서 6장 14절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 니라
열심히 전도한 사도 바울, 구원은 이미 따 놓은 단상으로 여유만만 했을까?
고린도전서 9장 27절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
성도의 기쁨은 나 챙기기에 있지 않다. 십자가 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에 있다. 그 일에 창세 전부터 불려나오게 된 것이 얼마나 큰 은혜요 기적인지 성령이 아니라면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는다. 괜한 말로 성도의 세상적 모습 갖추기에 급급한 자들이 아무리 읽고 생각해도 너무나 미련하고 어리석어 보일 뿐이다. 그들의 최종 목적은 자기 의 쌓기이고, 자기 사랑에 있기 때문이다.
로마서 10장 3절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디모데후서 3장 2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이미 주체로 나선 이상, 나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돈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세상과 거래하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