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강-신 1장 41-46(경솔한 싸움)141123-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 1장 41-46절입니다. 구약성경 261페이지입니다.
“너희가 대답하여 내게 이르기를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하였사오니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하신 대로 우리가 올라가서 싸우리이다 하고 너희가 각각 병기를 띠고 경솔히 산지로 올라가려 할 때에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올라가지 말라 싸우지도 말라 내가 너희 중에 있지 아니하니 너희가 대적에게 패할까 하노라 하셨다 하라 하시기로 내가 너희에게 고하였으나 너희가 듣지 아니하고 여호와의 명을 거역하고 천자히 산지로 올라가매 그 산지에 거하는 아모리 족속이 너희를 마주 나와서 벌떼같이 너희를 쫓아 세일 산에서 쳐서 호르마까지 미친지라 너희가 돌아와서 여호와 앞에서 통곡하나 여호와께서 너희의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며 너희에게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셨으므로 너희가 가데스에 여러 날 동안 거하였었나니 곧 너희가 그곳에 거하던 날수대로니라”
천국에 올라가는 것을 실패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실패한 이유가 그들이 노력을 하지 않아서 실패한 것이 아니고 노력한 것 때문에 실패했습니다. 아멘. 약속의 땅에, 천국에 들어가려고 노력한 것 때문에 실패한 거예요. 성질이 급해서 가만히 있으면 되는데,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 나대다가 맞은 겁니다. 그들이 왜 약속의 땅, 또 천국에 못 갔냐 하면 인간은 지리적으로, 표면적 인간이라고 했잖아요? 낮에. 지리적으로 이쪽에서 저쪽으로 가게 되면 그게 약속의 땅이라고 오해한 겁니다. 근데 약속의 땅이라고 하는 것은 저쪽에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고 내 쪽에서 부터 만들어 가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던 겁니다.
땅에 들어가기만 하면 안 되고, 땅에 들어갈 사람 만들기 작업을 주께서 하시거든요. 우리는 좋은 환경만 있으면 들어가기만 하면 산다고 하는데, 그거, 좋은 환경에 살아도 그 가족들이, 주인 되시는 분이 안 받아 주게 되면 다시 쫓겨나오게 되어 있어요. “어디서 근본도 없는 것들이 우리 뼈대 있는 집안에 살아!” 이게 바로 막장드라마의 주제 아닙니까? “어딜 감히 근본도 없는 것이! 뼈대도 없는 것들이! 내다맡긴 그 주제에 어디 여기서 살아!” 이렇게 되거든요. 이 말은 뭐냐 하면은 니가 여기 있는 모든 풍요하고 잘 사는 것이, 그거는 니가 뭐 가지면 될 줄로 아는데, 니가 뭐 그걸 가질만한 자격이나 그런 입장이 못 된다는 겁니다.
에덴동산이 뭐 환경 나빠서 쫓겨났습니까? 거기에 벌칙 조항 하나 있었죠. 그게 걸린 겁니다. 10년째 살아도 11년째 걸리게 되어 있고 20년째 살아도 걸리게 되어 있습니다. 문제는 그 지뢰밭을 제거를 해줘야 되는데, 그 지뢰밭을 제거를 해버리게 돼버리면 인간은 단독적으로 살게 돼요. 누구를 의지하지 않게 됩니다. 하나님 살듯이 나는 따로 살겠다, 이래 나오거든요. 그거는 마귀 짓이거든요. 그래서 선악과라는 지뢰를 심은 것은 사실은 마귀하고 문제가 해결돼야 니가 살 수 있는 것이지. 마귀 없이, 마귀 해결 없이 니가 단독적으로 천국에 가서 산다고 해서 영원히 그 나라가 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왜 자꾸 약속의 땅을 거론하시느냐. 사람은 자기가 가지 못할 세계, 자기가 알지 못하는 세계는 자꾸 없다고 여기는 경우가 있어요. 내가 못 먹는 음식에 침 뱉어서 남도 못 먹게 하듯이. 그런 심술 같은 게 있습니다. 자기 차지 안 되면 아예 시시하게 보거든요. 바로 그런 게 세상은 예수님 중심으로 만들어 놨는데, 예수님이 내가 아니니까 나 말고 누가 줬다고 하니까 그게 심술이 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 좋은 세계라 할지라도 내가 그걸 차지하면 내가 좋은 식이라고 시도해서 이렇게 올라가지 말라고 해도 그들은 올라갔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뭘 몰랐느냐 하면, 44절에 “그 산지에 거하는 아모리 족속이 너희를 마주 나와서 벌떼같이 너희를 쫓아 세일 산에서 쳐서 호르마까지 미친지라” 이렇게 생각하면 편하거든요. 이스라엘은 아모리 족속 때문에, 너무나 강대해서 우리가 못 들어간다고, 약속의 땅을 차지하지 못한다고 생각하는데, 아모리 족속이라고 하는 것은 일종의 허수아비입니다.
아모리 족속이 이스라엘을 능력이 있어서 이기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일부러 아모리 족속을 통해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변화되지 않은 상태에서 약속을 차지하는 것을 못 하도록 주께서 세운 보초들이에요. 그 방식이 아니라고 알려 줄 때에 이게 말로 해서 안 되니까 강제조치를 취한 겁니다. 인간의 적은 아모리 족속이 아니고 본인이에요. 본인이 적이에요. 본인이 너무 나대고 성질 급한 거예요. “예수님만 좋으면 되냐? 나도 좋아야지.” 이런 식으로 예수님을 라이벌 의식을 가지고 예수님처럼 모방하게 되면 천국에서 살 것이라고, 그런 식으로 시도를 하는데 그거는 마귀들이 그런 짓을 하는 거죠.
그래서 우리는 이 본문을 대하기 전에 먼저 아셔야 될 것은, 아무리 구원하려고 노력을 해도 주님의 재가 없이는, 이거는 다 소용없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하나님의 재가가 나야 돼요. 허락이 나야 돼요. 아무리 노력을 많이 했더라도. 재가가 나야 되는데, 그럼 하나님의 재가가 나는 방식을 알면 되지 않습니까? 하는데, 그 재가 나는 방식은 우리의 실패의 자리에서 비로소 그게 눈에 들어오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실패했을 때. 어디 실패했느냐 하면, 우리가 자신의 구원에 실패했을 때. 거기에 하나님의 허용하는 방식은 바로 멀리 있는 게 아니고 우리 자리에 있었던 거죠. 그럼 그 실패를 안 하면 되잖아, 그 실패를 애초부터 안 하면 되잖아, 라고 하지만 인간은 처음부터 인간 자체가 이미 죄로 지었기 때문에 실패입니다. 그런데 본인은 그것을 모르고 있죠.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어떤 지방대학교 나온 사람이 서울에, 평소에 고등학교 때부터 서울로 유학가려고 했는데 엄마가 말려가지고 못 갔는데, 드디어 자기는 지방에서 벗어나서 서울시내에 있는 회사에 대우빌딩이라고, 거기 만약에 취직이 됐다고 합시다. 그러면 그 첫 출근부터 대구에서 올라온다면 뭐라고 생각하느냐 하면, 가게 되면 경부선에 노량진 다음에 한강 철도를 건너게 되어 있어요. 그럴 때 20대 젊은 기분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보라! 내가 한강을 건넜다. 이제는 촌사람 아니고 서울말 써야지. 나 서울말 쓰시겠습니다. 서울말 쓰면서, 뉴요커처럼 서울사람이 된 거죠. 근데, 가자마자 지방발령 나가지고 다시 대구로 왔다면, 그 한강 건넜다는 자기의 사적인 목표 달성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아무 의미가 없는 거죠. 그것 자체가 바로 실패가, 이게 바로 우리가 몰랐던 실패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담겨 있는 내용을 보다 쉽게 하기 위해서 한 가지 예를 들겠는데, 어떤 소설에 보면 이런 게 있어요. 임금님이 자기가 왕이 되고 난 뒤에 혹시 신하와 백성들이 반란을 일으킬까 싶어가지고 모든 정보에, 메일 주고받는 것, 그리고 통신, 전부다 감시해서 그 사람이, 소설입니다. 귀가 굉장히 발달해서 백성들이 자기 집에서 이야기하는 것까지 다 들려오는 거예요. 행여나 왕을 모함하고 왕에게 비방해서 모여서 왕을 바꿔버리자 왕을 죽여 버리자 그럴까 겁이 나서 그렇게 살폈던 겁니다. 그러니까 임금은 너무나 스트레스 받고 노이로제에 걸리겠어요. 맨날 생각하는 것이 내 자리 지키기 위해서 애를 썼다 이 말이죠. 그런데 어느 날 잠을 자는데 어디선가 아름다운 여인의 노래 소리가 들렸어요. 그 순간 그렇게 들려오던 모든 백성들의 소리는 하나도 안 들려오는 겁니다. 이제는 나라가 날라가든, 지가 쫓겨나든 상관없어요. 그 여인만 찾아낼 수 있다면 그걸로 족한 거예요. 인생은 행복한 거예요. 물론 스트레스 받을 필요도 없죠. 그렇게 예민해서, 민감해서 누가 나를 뒷담화 하지 않는가, 그렇게 하다가 뭔가 낯선 소리에 이끌리게 되면 그런 것은 문젯거리도 되지 않는 겁니다.
그 낯선 소리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함께 있었어요. 그 분이 누구냐? 동행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오늘 본문 42절에 보면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내가 너희 중에 있지 아니하니” 라고 되어 있어요. “내가 너희 중에 있지 아니하니” “올라가지 마라” “왜요?” “니가 올라가는 거기에 나 빠졌잖아?” “빠지든 말든 우리끼리 가겠습니다.” ‘우리끼리’란 말은 천국에, 우리끼리란 천국은 없습니다. 우리 인간들끼리 잘 사는 천국은 없어요. 그런 천국은 있을 리가 없어요. 누구 중심이 돼야 돼요. 나 중심, 인간 행복 중심이 아니고. 누구 중심이 되어야 돼요. 그냥 하나님 중심은 안 되고 동행하시는 주님이 되어야 돼요. 이 말이 어려운데 뭔 뜻이냐 하면, 하나님한테 가면 천국 계시겠지. 하나님 계시면 조만간에 봅시다. 천국 가서 조만간에 봅시다. 이래 되는데 천국 가서 조만간에 만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지겹다고 여기는, 우리가 빨리 탈출하고 싶다는 이 세상에 진즉에 들어오신 분. 이미 오신 분을 만나지 못한다면 우리끼리 하는 게 돼요. 우리끼리 가게 되면 그곳은 환상의 세계, 있지도 않는 세계가 되는 겁니다.
마태복음 25장 보고 그 다음에 구약 한 구절 더 보겠는데, 마태복음 25장 34절에 보면, 참 이상한 말씀 나와요. 예수님께서 양과 염소를 구분하시고 마지막 심판을 행하십니다. 그럴 때 하시는 말씀이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35절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라고 되어 있거든요. 여기서 이 대목을 보면서 여러분 이상한 것을 느끼지 않습니까? 뭘 느끼느냐 하면 심판주 되신, 하나님이죠. 하나님이 언제 이 동네에 와서 사셨죠? 하나님이 언제 지묘동에 오셨고, 언제 천안에 오셨고, 언제 서울에 오셨죠? 언제 왔죠? 언제 목말랐습니까? 하나님이라면 본인이 알아서 지팡이 들고 팔공산에 아무 바위 하나 가리키면 물 나올 텐데. 왜? 주님께서 이 땅에서 없는 생활을 해야 돼요?
언제 주님께서 주리게 되었고, 언제 주님께서 목마르게 되었고, 언제 주님께서 나그네 되었고, 언제 주님께서 외톨이가 되었으며, 언제 주님께서 추운데 벌벌 떨고 있었으며, 언제 주님께서 감기 들렸습니까? 그렇게 감기 조심하라고 그렇게 CF에서 감기조심하세요~에취! 그렇게 선전을 많이 했건만 TV도 안 보신 모양이라. 언제 또 옥에 갇혔습니까? 뭐 나라 법에 복종하라고 해놓고 본인은 옥에 갇히고. 뭐 앞뒤가 모순된 행동을 보이는 거예요. 언제 오셨는데요? 하늘에서 기다리시는 하나님은 우리가 착안한, 우리가 조작한 하나님이고요. 진짜 하나님은 몰래 잠입하신 하나님이에요.
오늘 주일학교 설교가 기생 라합 이야기잖아요. 스파이가 왔다 이 말이죠. 스파이가 왔을 때, 기생 라합은 그 스파이를 영접했었습니다. 스파이가 놀랬어요. “왜 남의 나라 스파인데 왜 영접합니까?” 기생 라합이 하는 말이 “곧 나라 바뀔 건데요.” 뭐 나라 바뀔 거니까 알아서 기겠다는 거예요. “이렇게 먼저 와주셨으니 나는 여리고 백성이 아니고 오실 나라 백성입니다.” 라고 고백을 하는 거예요. 심지어 자기 조국을 배신하면서까지 거짓말을 하는 거예요. 평소에 동해물가 잘 불렀다. 동해물과 부를 수 없어요. 주의 나라가 왔을 때, 주의 나라 백성이 되고 싶습니다, 하고 영접을 했다 이 말이죠. 이것은 곧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자기 자리의 파기를 전제로 깔고 하는 이야기에요. “지금까지 살아온 이 자리를 파괴시켜 주고 이걸 주님의 자리에 합류시켜 주시옵소서.” 라는 뜻이에요. “주님이 깔아 놓으신 자리가 제 자리가 되어야지 이 자리는 저는 싫습니다.” 하는 고백입니다.
그래서 이 본문을 보게 되면서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걸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실 것을 주었다고 했을 때, 이런 하나님이 이렇게 아주 천한 모습으로 온다는 아이디어는 어느 누구도 알아 챌 수 없는 방식입니다. 어느 누구도 알아 챌 수 없는 방식이에요. 그러면 이 본문을 다시 접고 다른 본문을 한 번 생각해 봐야 합니다. 다른 본문은 뭘 의미하느냐 하면 가장 인간적인 본문, 그야말로 인간의 본색과 본질과 더러운 본심을 드러내는 본문이 있어요. 그게 뭐냐, 창세기 34장의 이야기입니다. 창세기 보지 마세요. 보면 길어서 시간 갑니다고 하시는데, 창세기 34장에 보면 야곱의 아들들이 열 한 아들이 있는데, 그 아들들이 누이동생이 하나 있는 모양이라. 아들 열한 명에 딸 하나. 얼마나 이쁨 받겠습니까? 그런데 공주 같은 ‘디나’라는 그 딸이 어느 동네에 나갔다가 그 땅, 세겜 추장이 강간을 해버렸어요.
강간을 해놓고, 그 디나가 너무 마음에 들어서 “우리 결혼합시다.” 프로포즈 치고는 상당히 요란스러운데, 그런 식으로 그만 프로포즈를 했어요. 그러면 누가 봐도 세겜의 추장은 신사입니다. 요즘 남자, 이런 남자 있는 것도 감사해야 돼요. 책임지겠다는 거예요. 그런데 오빠들은 뭐냐 하면, 누구나 다 이뻐하는 그 자기 누이동생이 예상치도 못한 엉뚱한 사내한테 걸려가지고 완전히 저 집 여자로 바뀔 판이 되었어요. 그래서 이 오빠들이 술수를 써가지고, 어딜 감히 하나님 믿는 백성을 하나님도 믿지 않는 더러운 너그들이 욕을 보이냐 해서 복수에 나섭니다. 이게 창세기 34장이 왜 나와 있느냐 하면, 은혜 받은 야곱의 아들이라 할지라도 그 야곱의 아들은 처음에 야곱의 모습, 빼앗기 좋아하고 속이기 좋아하고 자기밖에 모르는 그 절차를 밟아 나가는 가운데서 그들은 사람이 변화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우리 아버지 이렇게 은혜 받았다.” 백날 이야기해도 그 인생은 아버지 인생이고 자기 인생 아니에요. 아버지 변화가, 아버지 나라가 자기 나라 되려면 아버지가 당했던 그대로 자기들도 당해야 됩니다. 그걸 가지고 신약에서는 사랑이라고 하고 그게 뭐냐 아파야 사랑이에요. 아파야 사랑입니다. 뭐 아파야 청춘이라는 말도 있지만. 이게 사랑은 아픈 거예요. 누가 사랑한다, 표시 안 나죠. 근데 남편이 누구한테 맞았다, 그때 내가 아플 때 평소에 남편을 사랑하고 있는 중입니다. 사랑은 아픔으로 연결되어 있어요. 고난과 죽음으로 연결되어 있는 겁니다.
바로 마태복음 25장에서, 하나님이라 하는 것은 너무 추상적이고 너무 낭만적이라, 하지만 그것은 진정한 하나님을 이용해먹겠다는 심보이지, 진정한 그 나라에 합류할 수 있는 변화되었다는 소리를 할 수가 없어요. 변화되려면 아파야 되는데, 이 땅에 오신 주님의 아픔에 대해서 같은 동감을 나타내면서, 우리 주님이 이렇게 아파하시다니, 주님이 이렇게 배고파하시다니, 하는 마음으로 이렇게 주님을 섬겼던 사람들, 그들만 양이 되고 나머지기는 다 염소가 되는 겁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아픔을 가지고 오셨고, 그 아픔을 복음이란 이름으로 전달시킬 때에, 우리는 평소에 스물 네 시간 주여! 주여! 하면서 전도지 뿌린다고 그게 사랑이 아니고, 그 예수님의 아픔을 어떤 계기를 통해서, 자기 실패를 통해서 다시 예수님이 아파했던 것을 체험하게 되고 거기에 동참하게 되면 그것이 바로 내가 배고플 때에 먹을 것을 주었다에 해당되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시작을 누가 하느냐 하면, 시작을 항상 하나님부터 시작을 하는 거죠. 그러면 시작을 할 때 어떤 식으로 시작을 하는가. 아까 창세기 34장 어떻게 됐느냐 하면, 그래 가지고 오빠들이 점잖은 체 속이죠. 우리 집안에서는 할례를 받아야 우리 집안사람으로 넣어줍니다 하니까, 세겜 추장이 아주 신사에요. 여인을 향하여 그 어떤 것도 다 희생할 용의가 되어 있는 사람이라서 까짓것 남의 나라 부루카 쓸 용의가 되어 있을 정도로, 종교고 뭐고 저 여인을 사랑한다면 내가 뭔들 못하랴. 이래서 가지고 진짜로 하는데 나만 할례 받으면 되느냐 하니까 그래선 안 되고 니 집안의 모든 남자들은 다 할례 받아야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추장이니까 자기 사랑을 위해서 전부 다 할례 받아 가지고 사흘 째 끙끙 앓고 있을 때에, 그 참에 오빠들이 가가지고 전부 다 죽여 버렸죠. 죽일 때 그 모습을 야곱이 보면서 굉장히 박수치고 역시 니가 믿음이 있구나! 이렇게 했습니까?
아니죠. 믿음을 빙자한 자존심 회복이죠. 어디서 생채기를 내? 내가 복수 안 할 줄 알았어? 라는 거죠. 신앙을 빙자한 예수님과 하나님에 대한 간절한 기도를 빙자해서 사적인 복수심을 활용하는 이야기가 창세기 34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왜? 누구나 이런 절차를 거쳐야 하기 때문에. 누구나 이런 절차를 거치지 아니하면 그거는 하나님의 은혜 받았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이거는 또 하나의 우리가 미리 예상 못한 실패입니다. 그럼 자꾸 실패, 실패라고 하는데 왜 실패의 자리가 있어야 되느냐 하면, 하나님과 인간이 같이 동행한다는 말은, 이스라엘 경우입니다. 동행한다는 말은, 그 둘 사이에 도랑이 생기죠. 저는 그걸 복음의 통로라고 봅니다. 복음의 통로.
양쪽의 하나님과 인간이 서로 맞지 않는, 서로 어긋나는 의견들을 가지고 나란히 가면서 그 속에서 아픔과 피, 희생, 이런 것이 그 도랑에 모이듯이 복도가 생기고 통로가 생기는 겁니다. 그 통로에 비로소 숨겨진 하나님의 재가 받는 원리원칙, 복음이죠. 복음이 거기에 이제 나타나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제가 하는 말은 간단합니다. 실패하세요. 실패하시면 됩니다. 실패하시면 돼요. 실패를 유도해서 내가 도랑을 만드는 하나의 기여자가 되게 만드시는 거예요. “나 아니고 예수님입니다.” 라고 할 수 있도록. 진정으로 그렇게 살 수 있도록 나로 인하여, 내가 뭔가 어설픈 행동으로 말미암아 뭔가 미끌어져 나가서 내 곁에 뭔가 도랑처럼 흐르고 있는 그 속에서 그리스도의 피를 바라보게 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도 하나의 과정인데요. 그렇게 실패하게 되면 아프잖아요? 하잖아요. 근데 아픈 정도가 아니에요. 오늘 본문에 45절에 보면, “너희가 돌아와서 여호와 앞에서 통곡하나 여호와께서 너희의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며 너희에게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셨으므로” 라고 되어 있어요. 1976년도 인가? 제가 속초 위에 간성에서 군대생활 했는데, 참 저 때문에 국방부가 애 많이 먹었죠. 전혀 군대생활 할 타입도 아닌데 그냥 밥 먹고 산다고. 거기에 감리교가 하나 있어요. 감리교가 금요일만 되게 되면 철야를 해요. 언제부터 시작하느냐 하면 밤 8시에 시작해서 새벽 4시까지 철야를 해요. 와! 빡세게 하는 거예요. 감리교가 예배당이 굉장히 크고요. 평수만 해도 내가 보기에는 한 이 백 평이 넘고, 교인수가 오백 명이 넘어요. 저 간성감리교회인데.
그래서 저는 어떤 것이 궁금했는가 하면, 그 행사 진행을 어떤 식으로 하는지 굉장히 궁금했었어요. 어떻게 사람을 밤 8시부터 새벽 4시까지 붙들어 매면서 기도를 그렇게 시키는지. 보니까 짬짬이 쉬면서 해요. 쉬면서 하면서, 인도자가 교체되면서, 그때 그런데 전도사들이 애 먹죠. 앞에 파트 뒤에 파트 나눠가지고 강대상 두드리면서 찬양하면서 유도하는데, 근데 제가 여기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그들이 울어요. 울다가 쉬는 시간에 재미나게 커피마시면서 웃다가 이야기하다가 다시 시작 하면 또 울어요. 그러니까 제가 보기에는 자꾸 하다보면 하나의 요령 같아요. 회개하라고 자꾸 하니까, 만약에 그 분의 나이가 한 오십 같으면 회개를 한꺼번에 다 못하니까 1부는 7세부터 17세까지 하고 20살에서 40살까지는 그 다음 타임에 하고. 40살에서 60살까지는 그 다음 타임에 하고. 그 가운데 또 가만있으면 회개 안 된다고 또 울어요. 저는 그걸 가지고 징징댄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세요. 울면 회개고 울면 반성입니까? 여호와 앞에서 통곡하나 여호와께서 듣지 아니하시죠. 통곡한다고 구원받는 게 아니라 말이죠. 그러나 통곡케 하시면서, 통곡케 해놓고 돌아서서 주여 괜히 했죠? 그죠? 라고 깨닫게 하시는 그게 회개예요. 회개 없이는 구원은 없습니다. 그러나 회개는 통곡이 아니고 통곡이후에 5분이에요. 그 어설픈 몸짓과 그 부자연스러운 자기의 태도를 보면서 이게 지금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지? 라고 스스로 자기 자신의 그 어줍잖은 그 연기력에 본인이 실망할 고거, 고거 회갭니다. 아! 주여, 제가 사기꾼 이외는 아무 할 게 없군요. 하지만 사기꾼도 동행하시는 이유는 복음의 통로와 골을 만들어내시기 위해서 그렇게 하시는 겁니다.
실패하시되 어디까지 실패하느냐, 내가 바로 신앙적 사기꾼임을 아시게 하시는 그 능력이 이미 십자가의 피에서 동행하시는 분, 때로는 헐벗고 때로는 아프고 하시면서 높으신 하나님이 아니고 우리보다 더 낮추어서 우리의 발바닥을 하나의 기초가 되시고 반석이 되어 주시기 위해서 우리가 가지 못할, 가기 싫어하는 그 자리에 먼저 가 계셔서 수난 받으시고 고생하신 주님을 발견하는 그러한 세월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징징대는 것이 신앙인 줄 알았습니다. 평생을 징징대고 있습니다. 징징댈 거리만 찾아서 원망함으로써 알아서 회개했다고 자처한 우리의 이 어설픈 연기력이 날마다 들키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