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신명기5강-갈렙과 여호수아(신1;34-38) 이근호 141116

아빠와 함께 2014. 11. 21. 08:26

갈렙과 여호수아(신명기 1:34-38)

음성 동영상

갈렙과 여호수아

2014년 11월 16일 본문 말씀: 신명기 1:34-38

(1:34) 여호와께서 너희의 말소리를 들으시고 노하사 맹세하여 가라사대

(1:35) 이 악한 세대 사람들 중에는 내가 그들의 열조에게 주기로 맹세한 좋은 땅을 볼 자가 하나도 없으리라

(1:36) 오직 여분네의 아들 갈렙은 온전히 여호와를 순종하였은즉 그는 그것을 볼 것이요 그가 밟은 땅을 내가 그와 그의 자손에게 주리라 하시고

(1:37) 여호와께서 너희의 연고로 내게도 진노하사 가라사대 너도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리라

(1:38) 너의 종자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그리로 들어갈 것이니 너는 그를 담대케 하라 그가 이스라엘에게 그 땅을 기업으로 얻게 하리라

이스라엘은 12지파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12지파 가운데 누가 과연 주도권을 쥐고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를 이끌 것인가에 대해서는 창세기 49장에서 애매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바로 유다 지파도 또 다른 지파는 요셉 지파입니다. 유다 지파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나타나 있습니다.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고 되어 있습니다. (창세기 49:10)

반면에 창세기 49:24에서는 “요셉의 활이 도리어 견강하며 그의 팔이 힘이 있으니 야곱의 전능자의 손을 힘입음이라 그로부터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가 나도다”고 되어 있습니다. 즉 유다 지파에서는 왕이요 요셉 지파에서는 목자가 나온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신명기의 처지에서는 모세가 속해 있는 레위지파가 주도권을 쥐고 있습니다.

이는 곧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레위지파→(요셉지파)→유다 지파로 주도권의 이동을 드러낸다는 의미도 됩니다. 물론 이 과정을 통해서 소위 ‘기업’이라고 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자손에게 주신 상속의 의미가 병행해서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약속의 땅이란 실은 인간 세계에서는 파악될 수 없는 세계입니다.

그런데 그 세계를 주시겠다고 하실 때, 여기에 반드시 인간들의 오기가 작렬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겁니다. 하나님께서 “네가 그런 식으로 나온다면 내가 준비한 약속에 땅에 안 넣어주는 수가 있어!”라고 하신다면 인간들은 대꾸합니다. “안 가면돼지!” 이게 인간의 오기입니다.

이 오기가 약속의 땅에 필수적인 요건이 됩니다. 인간들의 오기를 감안해서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세계, 곧 천국을 구성하십니다. 이스라엘이라고 해서 이런 오기가 없는 게 아니라 내부에 숨겨져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들이 숨겨놓은 오기와 하나님께서 숨겨놓으신 ‘약속의 땅’과의 대결과정을 지켜 보면서, 우리는 ‘레위지파→(요셉지파)→유다 지파’의 변동사항을 통해서 메시야의 흔적을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히브리서 7:11-14에 이 사실을 이렇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레위 계통의 제사 직분으로 말미암아 온전함을 얻을 수 있었으면 (백성이 그 아래서 율법을 받았으니) 어찌하여 아론의 반차를 좇지 않고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별다른 한 제사장을 세울 필요가 있느뇨 제사 직분이 변역한즉 율법도 반드시 변역하리니 이것은 한 사람도 제단 일을 받들지 않는 지파에 속한 자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 우리 주께서 유다로 좇아 나신 것이 분명하도다 이 지파에는 모세가 제사장들에 관하여 말한 것이 하나도 없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본문에서 요셉 지파의 개입이 빠져 있는 듯이 보입니다. 이 사실을 우리는 오늘 신명기 본문을 통해서 알아야 봐야 합니다. 요한복음 14:5에서 도마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도마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삽나이까” 이 말은 곧 우리 인간들이 어디에 도착하는데 미리 우리가 보고서 그 다음에 갈지 안 갈지를 결정하겠다는 겁니다.

이는 인간의 오기, 곧 인간의 자유의지성과 이성에 의한 선택권을 그 경우라도 포기 못하겠다는 다짐 같은 겁니다. 즉 길이란 일단 인간의 가능성을 전제해야 하야 한다는 것이 도마의 생각입니다. 길만 있고 그 길을 못 간다면 그 길은 소용없는 길일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요구합니다. 하나님이 제시한 천국이 과연 내가 가고 싶은 곳인가 하는 점이냐를 먼저 파악하고, 그 다음으로는 그 천국에 통하는 길을 가는데 있어 인간들의 자기 가능성으로 한발자국 두 발자국 걸어 갈만한 가능성으로 이어져야 하는 조건에 충족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나 도마나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스라엘 지파에 속한 사람들은 모르는 게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런 인간들의 오기로 봐서 약속의 땅은 없다는 사실입니다. 약속의 땅이란 인간 세계 너머 저쪽에 미리 자리잡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죄와 오기 속에서 새로이 만들어지는 세계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예를 들면 모세의 경우, 민수기 20:11-12에 보면, “그 손을 들어 그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치매 물이 많이 솟아 나오므로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마시니라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고로 너희는 이 총회를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 여파로 오늘 본문 37절에도 같은 취지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호와께서 너희의 연고로 내게도 진노하사 가라사대 너도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면 결국에 누가 그 땅에 들어간단 말입니까? 39절에 보면 “또 너희가 사로잡히리라 하던 너희의 아이들과 당일에 선악을 분변치 못하던 너희 자녀들 그들은 그리로 들어갈 것이라 내가 그 땅을 그들에게 주어 산업이 되게 하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이미 성인이 선과 악을 아는 이상, 인간은 자기 측정과 판단에 의존해서 약속의 땅을 미리 내다보기 때문에 아무도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렇다면 들어가지도 못할 땅을 왜 언급하시는 겁니까? 여기에 예외로 등장하는 두 인물의 의미가 나타납니다.

갈렙은 유다 지파에 속한 인물이요, 여호수아는 요셉지파, 곧 에브라임 지파에 속한 인물입니다. 둘 다 모세가 속한 레위 지파에 속한 인물이 아닙니다. 즉 과연 약속의 땅에서 12지파를 대표하고 관장한 주도적 지파가 어느 지파이며 이것이 창세기 49장에서 야곱이 약속한대로 진행되느냐를 보이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에 낯선 변화들이 유발됩니다. 이 변화는 인간의 모든 예상을 빗나가게 하면서 예언이 성취에 있어 인간의 죄성 폭로가 필수적으로 뒤따른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모세에서의 변화에서 사람들이 쉽게 인정하는 바는 지도자적 위치가 모세에서 여호수아로 바꿨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이는 모세지파에서 요셉 지파로 바뀐 바가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여호수아는 실은 모세 영향력의 그늘 안에 속한 자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약속의 땅 정복에 있어 여호수아는 지속적으로 죽은 모세가 받은 그 언약의 목격자 노릇을 하기 때문입니다.

정작 중요한 땅은 갈렙이 속한 유다지파로 돌아갑니다. 결국 여호수아가 해야 할 일은 유다 지파로 하여금 모세 이후의 이스라엘 역사의 주도권자로 전이되는 과정에 임시적으로 개입된 위치에 있을 뿐입니다. 이것이 바로 히브리서 7장에서 말씀하는 바입니다. 약속의 땅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오기 발췌의 계의 계기로 삼았고, 그로 통해 레위지파에서 유다지파로 주도권이 바뀌게 하시는데 이는 곧 ‘약속의 땅’이 ‘온 이스라엘을 위한 땅’이 아니라 유다 지파에 나온 어떤 분의 세계인 것을 미리 알려주고 계신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들의 오기로 갈 수 없는 곳으로 유다의 뿌리에서 나신 주님으로 인하여 죄가 발각되면서 참여된 것을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5강-신 1장 34-38(갈렙과 여호수아)141116-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 1장 34-38절입니다. 구약성경 261페이지입니다.

“여호와께서 너희의 말소리를 들으시고 노하사 맹세하여 가라사대 이 악한 세대 사람들 중에는 내가 그들의 열조에게 주기로 맹세한 좋은 땅을 볼 자가 하나도 없으리라 오직 여분네의 아들 갈렙은 온전히 여호와를 순종하였은즉 그는 그것을 볼 것이요 그가 밟은 땅을 내가 그와 그의 자손에게 주리라 하시고 여호와께서 너희의 연고로 내게도 진노하사 가라사대 너도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리라 너의 종자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그리로 들어갈 것이니 너는 그를 담대케 하라 그가 이스라엘에게 그 땅을 기업으로 얻게 하리라”

오늘 본문에서 기업이란 단어가 나옵니다. 기업이란 단어, 요즘 같으면 현대그룹, 삼성그룹, 그 기업을 이야기 할 건데. 상속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상속이라는 것은 유산이죠. 아버지가 노동했는데 아무런 노동도 한 적도 없는 아들이 공짜로 받는 것. 그게 상속이죠. 근데 상속가지고 형제간에 싸운다는 말은, 노동했던 주체 되신 아버지가 없으니까 싸우지. 만약에 아버지가 살아계신데 상속가지고 싸운다면 아버지가 뭐라고 이야기하겠습니까? “내가 노력해서 얻은 결과기 때문에 내 맘대로 준다.” 라고 그렇게 나오시겠죠. 그렇다면 그 앞에서 어느 자식도 군소리 없습니다. 왜, 군소리가 없는가? 자기들이 애써서 얻은 땅이 아니기 때문에. 딴소리를 못하죠.

그런데 보세요. 이 기업, 다른 말로 하면 상속, 유산. 이런 경우에 보통 일반 노인네들은 돌아기시고 난 뒤에 자식들에게 상속이라고 주는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과 동행하시면서 기업을 주시겠다고 약속을 했습니다. 그렇게 할 때, 그들은 하나님의 하신 일에 대해서 자기들이 거기에 같이 관여하고 참여했다는 이유 때문에 당연히 상속을, 유업을 우리가 받아도 된다. 그렇게 생각할 가능성이 굉장히 높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같은 경우에, 같은 이스라엘인데 하나님께서 그 약속의 땅에 못 들어간다. 그리고 모세보고 너도 못 들어간다 할 때에, 이런 말을 통해서 그들은 하나님이 생각해 놓은 그 상속이라는, 약속의 땅이라는 그 성격이 본인들이 생각한 것과 뭔가 달라도 한참 다르다는 생각을 그들이 가질 수 있는 계기가 되어야 합니다.

요새 말하면 천국이죠. 천국에 간다 할 때에, 아, 우리보고 천국에 대해서 이야기했기 때문에 마치 천국에 들어갈 권리가 우리한테도 있다고 그렇게 우리가 오해하기가 쉽거든요. 그런 오해가 우리들뿐만 아니고 신약시대에 예수님 제자들에게도 그런 오해가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14장에 보게 되면 거기 유명한 제자 한 사람이 등장하죠. 도마라는 사람인데, 그 도마라는 사람이 뭐라고 했는지 이렇게 제가 한 번 보겠습니다. 요한복음 14장 4절에서 예수님이 이런 이야기를 하셔요. “내가 가는 곳에 그 길을 너희가 알리라” 예수님께서 이런 이야기를 하실 때에, 제자들에 담겨 있는 의식을 들추어주는, 너희들이 얼마나 무지몽매 하냐, 다시 한 번 일깨워주는 그런 쪽으로 말씀하신 거예요.

그러니까 과연 도마가 말하기를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삽나이까” 이렇게 했어요. 우리가 보기에 도마가 정말 정직한 반응을 나타냈습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우리가 죽어서 가는 그 곳, 이 땅에서는 고생했지만 죽어서는 호강하겠다는 마음으로, 죽어서 가겠다는 그 곳이 어떤 곳인지 먼저 제시를 해주게 되면, 그 다음에 동원되는 것이 뭐냐 하면, 저 나라에 내가 가버릴까? 아니면 갈까? 말까? 를 우리 쪽에서 일단 결정을 할 수 있다는 권한이 있다는 거예요. 아무리 뭔가 이런 나라다 이렇게 제시해도 에이, 그 나라가 별로 맘에 안 들면 저 안 가겠습니다는 결정도 우리가 내릴 수 있다고 하는 거죠. 먼저 도마가 이야기하기를 이래 이야기하는 거예요. 예수님 그 나라부터 먼저 보여주시고, 그 다음에 갈까 말까의 결정은 우리 쪽에 맡겨주시고, 그 다음에 그 쪽을 간다면 그 다음에 예수님이여 그 쪽으로 가는 길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묻게 될 것이고, 묻게 되면 주께서 그 길에 대해서 이렇게 언급을 하면서 이리 오너라 하게 되면 우리는 한발자국, 두발자국 그 길을 갈 수가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가는 곳이 어딘가 명확하게 되면 동시에 뭐도 명확하게 되냐면 가는 길도 명확해질 수 있고, 그 길을 예수님 쪽에서 제시하고 우리 인간들이 결정했기 때문에 그 길을 갈 수 있는 가능성이 우리 안에 내장되어 있다 이렇게 보는 겁니다. 그거, 그게 도마의 오해입니다. 도마가 뭘 생각 하냐면 일종의 자기한테 오기가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본문에서 약속의 땅을 언급하면서 아무도 들어가지 못한다는 말은, 너희들이 약속의 땅에 대해서는 그렇게 많이 생각하고 먼저 거기에 대해서 기대가 크지만 무엇을 모르느냐 하면, 하나님이 기업으로, 상속으로 주신다는 그 약속의 땅을 들어갈 수 없는 요소가 이미 인간들 속에 오기라는 이름으로 들어있는 거예요.

약속의 땅에 못 들어간다 하면, “안 가면 그만이지. 그만한 권한이 우리한테 없겠어? 있지.” 라는 생각이 먼저 우리한테 장착되어 있는 겁니다. 주님께서는 놀랍게도 우리한테 그런 오기가, 자존심이 있다는 것을, 내가 천국가고, 내 미래는, 내 운명은 내가 결정한다는 그런 생각이 오기라는 이름으로 우리 안에 장착되어 있다는 사실을 주께서 미리 아셔요. 이런 약속의 땅에 부합되지 않는, 있기만 하면 우리가 갈 수 있다는 터무니없는 생각, 이런 사실들이 우리 속에 있다는 것을 알고 그 다음에 그 사실을 근거로 해서 그걸 재료로 해서 하나님께서는 숨겨놓은 약속의 땅을 구성해내 가시는 겁니다. 구성하시는 겁니다. 저기 어디 있는데, 우리가 거기에 인내하고 참고 해서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그 약속의 땅이라는 성격 구성에 있어서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내가 알아서 내가 보고 믿을만하면 믿고 가려면 가겠다는 마지막 남은 우리의 자존심, 그러한 죄를 고려해서 약속의 땅을 주께서는 숨겨 놓았고 약속의 땅으로 이끌어 가시는 거예요.

그러면 여기에 탈락이라는 의미가, 탈락이라는 요소가 굉장히 많이 등장하겠죠. 간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못 갈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들이 이스라엘 역사 안에서 계속해서 벌어지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단도직입적으로 우리가 물을 수 있어요. “그러면 약속의 땅은 누가 들어갑니까?” 그 말을 달리 이야기하면 “누굴 위해서 약속의 땅을 만들어 놓았습니까?”는 것과 같은 질문이거든요. “누가 들어갑니까?” 거기에 대해서 저의 답변은 간단합니다. 하나님의 예언된 대로, 약속된 사람만 가고, 그 나라는 예언된 대로 생겨나는 땅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생각하기를 그 예언된 성격은 어떤 성격을 예언했으며, 약속의 땅에 갈 수 있는 사람은 누구며, 약속의 땅은 어떤 성격으로 되어 있는가가 어떤 내용으로 예언되어 있습니까? 라고 묻게 될 것이고 거기에 대해서 제가 언급하는 것이 바로 창세기 49장에 야곱이 임종 직전에 자기 아들들 모아놓고 한 그 예언을 저는 거론하겠습니다.

창세기 49장을 보게 되면, 거기 창세기 49장에 열 두 지파한테 축복을 하게 되는데, 창세기를 쭉 전체 읽어본 분들은 뭔가 혼돈스러운 것이 하나 나올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열 두 지파가 있는데 분명히 열 두 지파니까, 숫자가 12니까, 야곱이 죽고 난 뒤에 누구 하나 지도자적인 역할을 해줘야 하는데, 그 지도자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 지파가 이게 하나로 딱 고정되어 있으면 우리는 그 고정된 주도권을 가지고 있는 지파에 가는 길을 추적하고, 그 지파와 다른 지파와 관계성을 알게 되면 하나님의 예언대로 착착 진행된다는 것을 쉽게 우리가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을 하는데, 여기 창세기 49장에 예언에 의하면 주도권이 두 지파로 되어 있어요. 축구로 봐서는 투톱이라고 할 수 있죠. 두 지파로 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마치 유다지파를 보게 되면 유다지파가 주도권을 쥐는 것 같고, 또 요셉지파를 보게 되면 요셉지파가 열 두 지파를 대표하는 주도권을 쥐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신명기 현재 입장에서는 모세가 지금 주도권을 쥐고 있습니다. 모세는 레위지파입니다. 갈렙은 뭐냐, 여분네의 갈렙은 유다지파고, 그 다음에 여호수아는 요셉지파입니다. 자, 레위 지파가 주도권을 쥐느냐. 아니면 요셉지파에서 나온 에브라임지파인 여호수아가 주도권을 쥐고 있느냐. 아니면 유다지파인 갈렙이 주도권을 쥐느냐. 이러한 세 파로 되어 있는 신명기의 상황과 창세기 49장에 나와 있는 야곱이 자기 자식들에게 미리 예측한, 그 예측과 어떻게 부합되느냐 그 문제를 우리가 생각해봐야 되겠죠. 여기 창세기 49장 10절에 보면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분명히 왕입니다. 왕은 유다지파한테서 나온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창세기 49장 24절에 보면, “요셉의 활이 도리어 견강하며 그의 팔이 힘이 있으니 야곱의 전능자의 손을 힘입음이라 그로부터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가 나도다” 했어요. 이스라엘 기초가 되는 목자가 나온다. 이스라엘을 이스라엘 되게 하는 목자가 요셉지파에서 나온다는 겁니다. 그것이 예언인데 상당히 혼돈스럽죠. 두 파로 되는, 투톱이니까. 반석이 우선이냐, 아니면 왕이 우선이냐, 하는 그런 뭔가 정돈되지 않은 상황이 일어났죠. 그런데 신명기에 보면 제가 이야기했던 레위지파, 모세가 여기서 주도권을 쥐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계속해서 줄곧 레위지파, 모세 입장에서 이스라엘을 역사를 이끌어 가야 되느냐 하는 문제가 있는데. 이러한 혼돈스러움이 있어야 될 이유에 대해서 히브리서 7장 11절에서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레위 계통의 제사 직분으로 말미암아 온전함을 얻을 수 있었으면(백성이 그 아래서 율법을 받았으니)” 라고 되어 있어요. 굉장히 중요한 거죠. 하나님께서 율법을 가미해서 그 다음에 유다지파인지, 요셉지파인지는 그 다음 문제라는 거예요. 일단 이스라엘이 야곱의 예언대로 진행되려면 뭐가 여기에 부여되어야 하면 율법이 부여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근데, 율법에 의하면, 백성이 그 율법을 받았으니, 레위지파 제사직분 아래서 그들은 움직여야 한다는 율법을 받았으니. 이 말은 레위지파에 의해서 지도를 받아야 될 그러한 법을 받았으니. 그래야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 들어간다는 겁니다. 일단 레위지파부터 시작합시다. 근데, “어찌하여 아론의 반차를 좇지 않고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별다른 한 제사장을 세울 필요가 있느뇨” 라고 되어 있어요.

제사장이 있어야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데, 그 제사장은 처음에는 레위지파 제사장인줄 알고 율법도 그렇게 되어 있는 줄 알고 있는데, 왜 율법대로 레위지파 제사장이 계속되지 않고 이것이 직분이 바뀌어졌다는 거예요. 바뀌어졌으니까 율법도 바뀌어졌다는 겁니다. 율법도 바뀌어져서 14절에 보면, “우리 주께서 유다로 좇아 나신 것이 분명 하도다 이 지파에는 모세가 제사장들에 관하여 말한 것이 하나도 없고” 15절에, “멜기세덱과 같은 별다른 한 제사장이 일어난 것을 보니 더욱 분명 하도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이렇습니다. 이 세상은 율법이 지배하거든요. 율법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율법대로 살아야 약속의 땅에 들어가느냐 하는 문제가 여기서 당연한 것처럼 여겨질 겁니다.

그런데 신약에 와서, 마지막 때에 와서 하나님의 모든 예언이 다 밝혀지는 입장에서의 정리정돈 하는데, 하나님께서 레위지파한테 율법을 주고 레위지파의 지배를 받는 것은, 인간들 자체 내에 말고, 율법 외에 다른 계통을 통해서 이스라엘이 구원받는데, 그 다른 계통이 와서 구원해내야 한다는 그 흔적이 오직 유다지파를 통해서만 그 흔적이 밝혀진다는 겁니다. 상당히 난해한 이야기죠. 상당히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다시 신명기 이야기를 돌아와 봅시다. 신명기 이야기에서 모든 사람은 약속의 땅에 못 갑니다. 왜냐하면, 선악을 알았고, 선악을 알았다는 것은 자동적으로 자기 내부에 장착되어 있는 선악을 아는 지식, 하나님 보시기에 죄악된 마음을 지니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선악을 아는 자는 약속의 땅에 못 갑니다.

그 증거가 39절에 보면, “또 너희가 사로잡히리라 하던 너희의 아이들과 당일에 선악을 분변치 못하던 너희 자녀들 그들은 그리로 들어갈 것이라” 약속의 땅에 들어간다는 것은 어린아이처럼 되지 않으면 못 간다는 거죠. 어린아이라 하는 것은 선악을 분별하기 이전의 아이라는 말이죠. 그러면 선악과 있는 성인들은 못 들어간다는 겁니다. 갈 수가 없어요. 갈 수가 없는데, 현재 갈 수 없는 이스라엘 백성은 누구 체제하에 있는가. 레위지파, 다시 말해서 모세지도하에 있어요. 근데, 모세도 못 들어가는 거죠. 모세가 못 들어간다는 이유는 민수기 20장 10절부터 13절에 보면 나옵니다. 그 내용이 뭐냐 하면, 11절에 보면 그 손을 들어, 모세죠. “그 손을 들어 그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치매 물이 많이 솟아나오므로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마시니라” 여기까지는 아무 탈이 없습니다.

목말랐는데, 목마르다고 또 원망을 하니까 모세가 짜증이 난 거죠. 불러가지고 반석 앞에 세워 놓고 물을 내겠다고 하면서 모세가 반석에서 물을 내면서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을 쳤습니다. 연거푸 두 번을 쳤습니다. 치니까 물이 많이 나왔어요. 쳐도 물이 안 나온 게 아니고 물이 나왔다 이 말이죠. 만약에 예를 들어서 반석을 두 번을 쳤는데 물이 안 나왔다 하면 모세가 아차! 반석을 가리켜야 하는데 내가 너무 오버해서 반석을 두 번 쳤구나! 아, 다시 수정해서 반석을 두 번 치는 것은 잘못됐다 하고 다시 반석을 가리키니까 그야말로 하나님의 뜻대로 반석을 가리키니까 물이 나왔다. 이러면 모세가 하나님의 영광을 안 가리는 것이 되기 때문에 계속해서 모세 체제가 되기 때문에 약속의 땅에 모세도 들어가고 백성들도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반석을 두 번 칠 때도 물을 내어버렸어요. 그래놓고 뒤늦게 하시는 소리가 12절에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총회를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잘못을 모세가 했는데, 모세뿐만 아니고 모세와 함께 물을 마신 이스라엘 사람들도 하나님의 준 땅에 들어가지를 못하도록 그렇게 조치했습니다. 물은 먹이시고 살게는 하시되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는 못하게 하시는 겁니다. 그 말은 약속의 땅이라는 것은 저기 있다고 들어가는 땅이 아니고, 지금 그들도 미처 알지 못하는 내장되어 있는 인간의 어떤 측정, 인간의 판단력, 이성, 감정, 의지, 그리고 인간의 오기, 자존심, 그러한 것들을 고려해서 약속의 땅을 새로이 구성해내시는 겁니다. 저기 있다고 훅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이쪽의 죄를 밝혀내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약속의 땅이라는 그런 뜻이에요.

왜냐하면, 민수기 20장 13절에 보면 그들 중에서 하나님의 거룩함을 모세가 들어내지 못했단 말이죠. 그럼 약속의 땅이라는 것은 거기 있는, 어디 여기 말고 저기 있는 땅이 아니고 계속해서 거룩함이 나와야 될 땅이라는 겁니다. 거룩함이 나와야 되는 그 거룩이 인간의 능력으로 보여줄 수 있는 거룩이 아니고, 인간의 실패의 자리에서 실패함으로 도리어 하나님이 숨겨놓은 거룩이 나타나는, 그런 식으로 거룩이 알려지는 거룩에 의해서 약속의 땅은 새롭게 정립이 되게 되어 있어요. 자, 그렇다면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도 못할 백성이라면 그 동안 약속의 땅이라는 것은 누굴 위한 약속의 땅인가. 누가 들어가느냐 하는 문제가 생기게 되죠.

그런데 여기서 여러분들이 꼭 아셔야 돼요. 약속의 땅은 모세한테 준 땅이 아니고 모세 언약에게 준 땅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됩니다. 모세 언약이라는 것은 모세가 죽어도 안 죽는 언약이 모세 언약입니다. 따라서 그 모세 언약을 위해서 두 사람이 그 땅을 가야 되는데 한 사람은 에브라임 지파에 있는 여호수아고, 또 한 사람은 유다지파의 갈렙입니다. 근데 장차 메시야가 오실 땅은 뭐냐, 갈렙이, 유다지파가 있는 그 땅이에요. 여호수아는 실패한 모세를 대변해주는 겁니다. 따라서 여호수아 14장 6절 같은 경우를 쭉 보게 되면 거기에 갈렙이 당당하게 여호수아를 찾아옵니다. 찾아와서 그 하나님의 약속한 땅을 우리한테 다오! 하니까 여호수아는 아무 말도 안 하고 갈렙에게 그 땅을 내어줍니다.

그러니까 여호수아라는 것은 실패한 모세를 대변하면서 비록 레위지파는 실패해도 하나님의 언약, 다윗에게, 유다지파에게서 하나님의 왕이 온다는 그 약속은 인간의 실패함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그 약속은 하나님에 의해서 추진이 되고 성취가 되는 거예요. 물론 그 과정에서 인간은 자기의 능력으로 성사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시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약속의 땅은 뭐냐, 약속의 땅은 이미 하나님이 주실 분에게 그 땅이 전적으로 돌아가도록 그동안 사람들을, 이스라엘 사람들을 이용한 거죠. 참고 인내하면 들어갈 수 있는 땅이 아닙니다. 인간이 참고 인내하면 들어간다는 그 자체도 인간에게 내장되어 있는 하나의 오기고 자존심이에요. 이것은 오기고 자존심이라면, 이거는 하나님의 아들, 유다지파에서 다윗 자손으로 오실 예수님을 위한 약속의 땅이라는 사실과는 상관이 없고 우리가 잘 살기만 하면 권한이 우리에게 있다고 하는 우리 편의 위주의 땅이 되는 것이죠.

그러면 그거는 천국이 아니고 약속의 땅이 아닙니다. 우리는 실패자가 되어야 해요. 그리고 성공자는 주님의 약속된 대로 그 분만 성공자가 되어서 우리는 실패해도 성공하신 그 분에 의해서 준비된 세계가 바로 천국이고 약속의 땅이 되어야 된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그 약속의 땅에 들어갈 때에, 그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하신 그 작용이 오늘날 우리에게 덮치면, 우리는 이스라엘 역사에 나타난 그 실패를 그냥 밟아나가되, 그냥 이방인처럼 밟아나가는 것이 아니고. 그냥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의 실패 과정이 아니라, 이미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앞서서 성공하신 그 분의 그림자로서, 그 분의 성공하신 취지를 우리한테 덮쳐지게 되면 우리는 이미 성공한 입장에서, 왜 우리 힘으로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느냐, 왜 우리 노력으로, 행함으로는 그 땅에 못 들어가느냐를 늘 되새겨주는 하나의 살아있는 이스라엘로 이 땅에서 살게 되는 겁니다.

갈렙과 여호수아, 이 두 사람은 단순히 개인적인 두 사람만 살아남아서 성공했다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 전체, 이스라엘 전체의 실패를 품고 모세가 아니라 모세 언약에 준해서 그들은 모세 언약을 보여주는 취지로써 그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된 사람, 두 사람입니다. 갈렙이 여호와께 온전히 순종했다는 말은 주께서 그렇게 갈렙 이외의 모든 사람의 불순종을 지적하기 위해서 갈렙에게 순종케 하신 능력을 주신 것이죠. 갈렙이 메시야가 아니라는 점을 항상 잊지 말아야 됩니다. 갈렙이 메시야가 아니에요. 이스라엘 역사는 갈렙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다음 갈렙 이후에 예수님 오실 때까지 계속되어야 해요. 그러면 갈렙은 뭐냐, 갈렙은 유다지파에 속한자로서, 정탐을 했던 대표자로서, 레위지파에서 유다지파로 주도권이 옮겨가는 그 증거. 또 레위지파에서 요셉지파로, 요셉지파에서 유다지파로 옮겨가는 그 여정을 보여주므로 말미암아 약속의 땅이라는 것은 인간이 미리 예측한다고 해서, 예측해서 만들어지는 그 땅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자, 여기서 마지막으로 요한복음 14장 5절의 말씀을 다시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도마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삽나이까” 참, 도마가 우리 하고 싶은 이야기를 대신 다 해버렸어요. 천국은 내가 좋아해야 하는 곳이어야 한다는 것과 그 다음에 가는 길은 우리가 한발자국 갈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는 길이어야 의미가 있다는 겁니다. 그 둘 다 땡입니다. 둘 다 아닙니다. 천국은 예수님이 미리 가셨고, 우리 인간은 갈 수 없는 곳이고, 그리고 그 길이라는 것은 예수님 쪽에서 뻗어나가야지 우리 쪽에서 뻗어나간 길은 길이 아닙니다. 할 수 없는데 주께서 하셨다. 이게 바로 길입니다. 매일같이 우리가 할 수 없는데, 율법에 의해서 우리는 죄인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인만 가는 천국에 가고 있는 그 노선에서 우리는 실패자로 들어나고 그 실패함이 재료가 되어서 주님의 의로우심이, 주님의 용서가 들어날 때, 그 사람은 누가 뭐래도 지금 천국으로 가고 있는, 아니 이미 구원받은 사람의 모습을 주께서 우리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새 언약의 위력, 모든 언약의 성취성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약속의 땅이 우리가 생각한 땅이 아니고 우리가 기피하고 우리가 생각한 땅은 오히려 엉뚱한 땅이라는 것을 깨우치는 그런 힘이 작용하는 약속의 땅이라는 것을 알았사오니 주여, 날마다 우리 뜻대로 살게 하지 마옵시고 주의 뜻대로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