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로 갈꼬 (신명기 1:28-33)
어디로 갈꼬
2014년 11월 9일 본문 말씀: 신명기 1:28-33
(1:28) 우리가 어디로 갈꼬 우리의 형제들이 우리로 낙심케 하여 말하기를 그 백성은 우리보다 장대하며 그 성읍은 크고 성곽은 하늘에 닿았으며 우리가 또 거기서 아낙 자손을 보았노라 하는도다 하기로
(1:29)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그들을 무서워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
(1:30) 너희 앞서 행하시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 목전에서 모든 일을 행하신 것 같이 이제도 너희를 위하여 싸우실 것이며
(1:31) 광야에서도 너희가 당하였거니와 사람이 자기 아들을 안음 같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의 행로 중에 너희를 안으사 이곳까지 이르게 하셨느니라 하나
(1:32) 이 일에 너희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믿지 아니하였도다
(1:33) 그는 너희 앞서 행하시며 장막 칠 곳을 찾으시고 밤에는 불로, 낮에는 구름으로 너희의 행할 길을 지시하신 자니라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두 가지 하나님의 단정을 듣게 됩니다. 하나는 “너희는 믿음이 없다”와 또 다른 하나는 “너희보다 앞서 여호와께서 행하신다”입니다. 즉 앞서 행하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믿지 않는다면 아무 일도 성사되지 않을 것 같지만 실은 제대로 된 하나님의 일이 이 둘의 조합으로 진행됩니다.
믿어야 일이 제대로 된다는 것은 인간들 생각입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오히려 믿지 않기에 제대로 된 하나님의 일이 펼쳐집니다. 그 이유는 바로 ‘변화’ 때문입니다. 인간들은 스스로를 변화시켜 낼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목표도, 그리고 모델도 자기 쪽에서 선택하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이해된 노선의 저 끝에 자신이 기대한 목표점을 만들어놓고 거기에 도달하는 방법도 본인이 행할 수 있는 여력 안에서 끄집어내게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이해는 바로 애굽에서 살던 삶의 방식입니다. 과연 이스라엘 이들이 애굽에서 어떤 식으로, 어떤 마음가짐으로 살아왔느냐 하는 것은 일단 그 애굽 밖으로 이끌려나왔을 때 들통납니다.
그 방식은 ‘자기 자신의 생존을 위해 땅이 필요하다’는 방식입니다. 이는 창세기 1:28에 대해서 아직도 인간들이 권한을 행위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고 오해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즉 땅에 대해서는, 그 땅에 군림한 인간의 가치를 위해 존재한다고 여기서 성품이 자연스럽게 나오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세상 지배는 하나님께서 사람이라고 인정하는 분에게만 주어진 임무입니다. 죄 짓고 난 인간에게는 해당되지 아니됩니다. 도리어 인간이 죄 짓고 난 뒤에는 땅에 의해서 간섭받고 위협을 받는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땅이 인간을 살려내지 아니하면 인간은 살 수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땅의 변화를 통해서 인간 변화를 시도하시게 됩니다. 그 시도의 절차로서 기존의 인간이 생각하는 땅으로서 땅의 의미를 감당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려주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아낙자손입니다.
장대하고, 그들이 거한 성곽은 큽니다. 그러한 조건이 보다 땅을 거주할 만큼 충족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낙담합니다. 이러한 낙담이 바로 애굽적 사고방식입니다. 하지만 이들이 아직 모르는 게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땅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의 심령에 변화를 촉구하십니다.
땅에서 사는 방식, 자체가 달라져야 합니다. 자신들이 땅을 정복하는 방식이 아닌 도리어 땅을 통해서 자신이 달라져야 한다는 것을 배워야 하고 익혀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 땅에 어떤 추가적인 요인이 발생된다는 말입니까? 여기서 천국이 어떤 세상인지 미리 보겠습니다.
이 땅에서 인간은 그냥 인생뿐입니다. 시편 9:20에 보면, “여호와여 저희로 두렵게 하시며,열방으로 자기는 인생뿐인줄 알게 하소서(셀라)”(개역한글) 여호와여, 그들이 두려움에 떨게 하시고 자기들이 한낱 사람일 뿐임을 알게 하소서.(우리말성경) 여호와여 그들을 두렵게 하시며 이방 나라들이 자기는 인생일 뿐인 줄 알게 하소서 (셀라)(개정개역) 야훼여! 저 민족들을 혼내 주시고 스스로 사람임을 깨닫게 하소서. (셀라)(공동변역) 주님, 그들을 두려움에 떨게 하시며, 자신들이 한낱 사람에 지나지 않음을 스스로 알게 하여 주십시오. (셀라)(표준새번역)
20. Strike them with terror, O LORD; let the nations know they are but men. Selah(NIV) 20. Put them in fear, O LORD: that the nations may know themselves to be but men. Selah.(KJV) 20. Put them in fear, O LORD; Let the nations know that they are but men. Selah.(NASB)
즉 땅 위에서 인간이란 인생 뿐입니다. 스스로 땅을 변화한다든지 자신을 변화시킬 수없는 처지입니다. 그렇다면 천국은 어떠한 곳일까요? 이사야 43:18에,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적 일을 생각하지 말라”고 되어 있고, 또한 이사야 43:25에서는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천국이란 죄를 가지고 확정되는 곳입니다. 애굽에서나 아낙자손들이 생각한 것처럼 힘이나 권세나 높은 저항력으로 버티는 곳이 천국이 아닙니다. 죄의 유무로 확정되는 곳이 천국입니다. 천국이라는 세계의 차지는, 죄가 없는 쪽에서 죄가 있는 쪽을 밀어내고 정복해서 생겨나는 곳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으로서 죄를 알아야 하기에, 그들은 하나님이 일부로 설치해놓은 땅의 장치들에 대해서 그들의 믿음 없음이 들통나야 합니다. 오늘 분문, “그는 너희 앞서 행하시며 장막 칠 곳을 찾으시고 밤에는 불로, 낮에는 구름으로 너희의 행할 길을 지시하신 자니라”로 보면 여기에 등장하는 장치는 그들의 불신앙을 알려주는 장치입니다.
아무리 하나님께서 장치를 늘어놔 준다고 해서 그들의 신앙이 증강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들의 불신앙만 증강될 뿐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어떤 식으로 천국에 넣어주신다는 겁니까? 창세기 24장에 그 방법이 일부 소개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의 색시감을 구하지 위해 자기 고향에 늙은 종을 보내는 장면입니다.
창세기 24:4-7에 보면, “내 고향 내 족속에게로 가서 내 아들 이삭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라 종이 가로되 여자가 나를 좇아 이 땅으로 오고자 아니하거든 내가 주인의 아들을 주인의 나오신 땅으로 인도하여 돌아가리이까 아브라함이 그에게 이르되 삼가 내 아들을 그리로 데리고 돌아가지 말라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를 내 아버지의 집과 내 본토에서 떠나게 하시고 내게 말씀하시며 내게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이 땅을 네 씨에게 주리라 하셨으니 그가 그 사자를 네 앞서 보내실지라 네가 거기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할지니라“ 아브라함의 종은 본인이 이삭의 색시감을 간택한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미리 하나님의 사자를 앞서 보내기 때문입니다. 그 아가씨는 바로 아브라함의 종과 관련됨이 아니라 아브라함과 하나님과 관련된 채 등장하는 아가씨입니다. ‘천만인의 어미가 되고 원수의 성문을 열어야 될’ 아가씨입니다. 이 말은 곧 오늘날 우리 성도를 앞서 이끄시는 하나님의 사자는 우리의 소원대로 이끄시는 것이 아니라 새언약대로 이끄십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더 이상 우리 자신의 소유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믿음이란 외부 환경을 우리 힘으로 이겨나가는 것으로 정립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우리가 가진 ‘신앙이라는 이름의 불신앙’으로 인해 실패로 연속되면서 비로소 정립되는 겁니다. 천국은 앞에서 이끄시는 분에 의해서 성사되는데 그분은 우리의 죄를 가지고 다루십니다. 즉 죄 용서받았거든 세상 난제로 인해 기죽지 말라는 겁니다. 그 이유는 천국은 죄 문제가 해결된 자들에게만 용납되기 때문입니다. 땅은 바로 이 여분의 세계를 열어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죄 말고 다른 것에 신경쓰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4강-신 1장 28-33(어디로 갈꼬)141109-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 1장 28-33절입니다. 구약성경 260페이지입니다.
“우리가 어디로 갈꼬 우리의 형제들이 우리로 낙심케 하여 말하기를 그 백성은 우리보다 장대하며 그 성읍은 크고 성곽은 하늘에 닿았으며 우리가 또 거기서 아낙 자손을 보았노라 하는도다 하기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그들을 무서워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 앞서 행하시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 목전에서 모든 일을 행하신 것같이 이제도 너희를 위하여 싸우실 것이며 광야에서도 너희가 당하였거니와 사람이 자기 아들을 안음같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의 행로 중에 너희를 안으사 이곳까지 이르게 하셨느니라 하나 이 일에 너희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믿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너희 앞서 행하시며 장막 칠 곳을 찾으시고 밤에는 불로, 낮에는 구름으로 너희의 행할 길을 지시하신 자니라”
믿지 아니하기 위해서, 믿음이 없다는 사실이 들통 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믿을 수 있는 것은 다 치워버립니다. 우리 힘으로, 우리 능력으로 행할 수 있는 것, 우리가 하나님을 찾아가는데 있어서 우리 식으로 찾아갈 수 있는 모든 적당한 방법들은, 우리가 생각하기에 적당한 방법들은 하나님께서 허용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 내부 자체가, 우리 정신구조 자체가 죄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계속 일깨워주는 겁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지금 여기 본문에 나온 사람들은 땅에 개미처럼 기어가는 사람들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죠. 우리가 여기 땅 위에 살고 있습니다. 땅 위에 살고 있을 때, 사람들은 내가 살기 위해서 땅이 필요하다.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창세기 1장, 거기에 보면, 선교단체에서 흔히 학생들에게 이야기할 때, 많이 이야기 하는 그 대목이 창세기 1장 28절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이 대목을 사람들이 많이 언급합니다.
근데, 이 대목이 인간에게는 해당이 안 되는 이유가, 이것을 행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제대로 된 인간에게만 이게 해당이 되거든요. 그 분은 예수님 밖에 없어요. 내 사랑하는 자요, 내 기뻐하는 자는 예수님 밖에 없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분은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인간들이 구약 때, 제사장들이 그렇게 많은 제사와 예물을 드려도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것은 뭐냐 하면, 예수님 자기 아들의 화목제물만 받으시고 그것을 믿는 자에게만 의로움이 되는, 그 방식을 하나님께서 마지막에 준비하셨습니다.
인간이 제물 바치고, 예물 바치고, 십일조 할 때, 얼마나 뿌듯한 자부심을 느끼겠습니까? 그들이 바치는 모든 것이, 하나님이 안 받는다는 생각을 그들이 하게 되면, 그들은 굉장히 낙심할 거예요. 가인이 자기 제사를 하나님께 드렸는데 하나님이 안 받았죠. 그 불똥이 어디까지 튀었느냐 하면, 자기 동생을 쳐 죽이는데 까지 불똥이 튀었습니다. 그게 핍박이죠. 하나님의 개입으로 말미암아 생겨버린 핍박입니다. 동생은 가만히 있다가, 하나님이 동생의 제사를 안 받았으면 동생은 그 땅에 오래 살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제사를 받는 그 이유 때문에 형한테 맞아 죽게 되었죠.
하나님께서는 꼭 불자동차처럼 불나고 난 뒤에 와서 삐용~삐용~ 와가지고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식으로 동생 죽고 난 뒤에 뒤늦게 와서 “니가 동생을 왜 죽였느냐?” 이래 나온다 말이죠. 우리 같으면 어떻게 생각합니까? 죽기 전에 멈춰라! 든지, 어딜 감히 내 제사 받은 사람을 다치게 해? 이래 나와야 될 텐데. 다 죽고 난 뒤에, 뒤에 와 가지고 내가 사랑하는 자를 왜 죽였느냐? 이런 식으로 하시는 거예요. 그것은 이 땅이 인간 중심의 세상이 아니다, 하는 사실을 땅을 통해서 알려 줍니다. 땅을 통해서.
바꿉시다. 우리가 살기 위해서 땅이 필요하다. 이런 사고방식에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저질러놓은 그 땅을, 제대로 땅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 우리 인간을 거기에 살게 하셨다. 이런 쪽으로 생각해 주시면 되는 겁니다. 땅이 있음으로써 우리가 사는데 우리가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는 방식으로 우리가 살지는 않아요. 그것은 죄 짓지 전의 이야기고. 지금 죄 짓고 난 뒤에는 땅이 주도권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땅에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땅이 자기들이 살기에 적합지 않다는 그런 고백을 내놓습니다. “하나님이여! 우리가 들어갈 땅을 미리 정탐을 해봤는데, 그 땅이 우리가 들어가서 살 땅으로 적합지 않습니다.” 하는 이야기예요.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니가 믿음이 없다는 거죠. 그럼 믿음이 없으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 믿음을 만들면 되겠죠. 근데 믿음이 없다고 하신 하나님 말씀은, 만들어서 나올 믿음 같으면 아예 믿음이 없다고 하지를 않아요. 백날 믿음 만들어 봐야 무슨 믿음도 그건 믿음 아니다는 것을 결론적으로 그렇게 확정짓기 위해서 믿음이 없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더 쉽게 말해서 인간은 믿음을, 하나님이 원하는 믿음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존재이기 위해서 인간이 믿을만한 환경을 다 바꾸어 버렸다고 이렇게 생각하시면 옳습니다. 제가 아침에 그런 이야기 했잖아요. 여러분이 누굴 전도한다든지, 복음을 전하면 그쪽이 안 믿잖아요. 안 믿는 것을 다행스럽게 여기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그쪽이 안 믿음으로써 내가 믿게 되었거든요. 안 믿으면 안 믿을수록, 나도 똑같이 안 믿을 수밖에 없는 존재인데 왜 믿게 하셨는지 더욱더 감사가 되는 겁니다. 이게 특혜죠. 놀라운 특혜입니다.
탕자가 아버지로부터 좋은 옷을 입었잖아요. 그러면 동네방네 나가야 돼요. 나가서 “이렇게 좋은 옷 입어봤냐?” 이렇게 자랑질을 해줘야 돼요. 그러면 아무도 그 좋은 옷 입은 사람 없잖아요. 그러니 더욱더 빛이 나죠. 우리가 무상으로 받은 은혜를 더욱더 감사해야 됩니다. 그 감사하는 방법이 뭐냐 하면, 예수님이 주셨다는 이 복음을 전하면 되죠. 전하면 저쪽에서는 약이 오르죠. 받은 적이 없기 때문에 안 믿죠. 안 믿으면 안 믿을수록 왜 그렇게 감사가 되는지. “아이, 고소해. 아이, 고소해.” 이래 되는 겁니다.
그런데 요새 교회 전도는 반대가 되어 가지고 안 믿으면 씩씩 화를 내고 있는데 그거는 보험회사 한구찌 올리려는 그것밖에 안 돼요. 보험 들어놓으시지, 뭐 그거는 정수기 파는 그런 것밖에 안 되거든요. 그건 뭐 생각자체가 잘못되었으니까. 그리 복음 전하다가 안 믿어야 되는데 믿잖아요. 그러면 다시 한 번 점검해야 돼요. 믿을 리가 없는데. 다짐에 다짐을 해야 합니다. “절대로 믿을 리가 없어. 너 믿은 사람 아니야. 아니야. 절대 믿는 사람 아니야.” “교회 올게.” “아니, 교회 오는 것은 자유지만 한 주 댕기다가 그만둘 거야. 절대 안 올 거야.” 이렇게 생각들 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한 두 주 나오고 안 올 거야. 분명히. 나올 확률 5퍼센트, 3퍼센트 막 줄이시기 바랍니다.
땅을 정복할 수가 없어요. 땅을 정복할 수 없는데 인간은 땅을 정복하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땅 자체가 뭔지 모르고 자기 자신이 살기 위해서 땅을 정복하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의도를 충분히 반영하죠. 여기서 중요한 것은 땅의 닫힘과 열림이라는 표현을 제가 사용하겠습니다. 땅은, 인간들이 생각한 그 땅은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애굽에서 늘어진 땅이거든요. 애굽 이야기 하고 땅 이야기 해드리겠는데. 애굽의 흙을 파보세요. 애굽의 흙하고 지금 광야 길에 있는 그들의 흙 파보세요. 똑같은 흙이에요. 똑같은 흙입니다. 거기서는 어떤 여분의 어떤 의미가 나오지를 않아요.
애굽에 있었을 때도 어떻게 살았는지는 애굽에 있을 때는 몰랐는데, 애굽을 벗어나서 일단 광야로 나오니까 전에 애굽에서 어떻게 살았는가를, 살기 힘든 환경 속에서 비로소 발각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냐면은 “니가 땅을 정복할 입장이 아니고, 땅에서 일어나는 어떤 사건이 있을 건데, 그 사건으로 인하여, 니가 하나님이 만든 땅에서는 살 수 없는데, 약속의 땅에서는 살 수 없는 너희를 살게 하신 어떤 요소로서 땅이 변화될 것이라는 것을 하나님께서 알려주죠. 변화라는 말을 방금 했거든요. 변화라는 말이 성립이 되려면 우리가 익히 아는 그 땅이 아니고, 전혀 우리가 예상 못한 다른 땅으로 변화될 때, 제가 변화라는 말을 썼던 이유가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생각했던 땅은, 여기 오늘 본문 같은 땅은 28절에 나옵니다. “우리가 어디로 갈꼬 우리 형제들이 우리로 낙심케 하여 말하기를 그 백성은 우리보다 장대하며 그 성읍이 크고 성곽은 하늘에 닿았으며” 장대하고 성곽이 하늘에 닿았으며. 그러니 완전히 기죽죠. 그들이 아는 현재 모습이 그 땅입니다. 그 땅의 모습이에요. 그런데 나중에 보게 되면, 그 장대하고 성곽이 높은 그 백성이 어떻게 됩니까? 여리고 성이 어떻게 되죠? 일시에 허물어지죠. 그걸 저는 변화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변화’
내가 알던 땅에서는 힘센 쪽이, 장대한 쪽이, 그리고 성곽이 높은 쪽이, 승리하고 주인 노릇하는 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땅의 전부인데. 애굽에서 살던, 알고 있던 땅인데. 하나님께서 어디로 데려가느냐 하면, 동일한 땅이라고 여겼던 그곳인데, 그들이 이상하게 이스라엘 앞에서 허물어진 거예요. 장거리에 들어가서 토끼가 사자 앞에 딱 지나가니까 모든 짐승들이 토끼한테 절을 하는 거예요. 토끼한테 절 한 것이 아니겠죠. 뒤에 사자가 따라오니까 사자한테 절을 하는 건데, 토끼는 자기보고 절하는 걸로 알고 굉장히 신나하는 겁니다. 마치 앰블런스 앞에 차가 전부다 비켜주니까 지보고 길 비켜준 걸로 착각한 것처럼요. 마찬가지잖아요.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 땅의 생리를, 이 땅이 갖고 있는 약속의 땅의 생리에 변화를 주기입니다. 이 변화가 우리 자신의 마음의 변화로 이렇게 엮어지게 되어 있어요. 우리는 땅이 변하지 않으면 절대로 우리 마음이 변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 마음을 고집할 사람이에요. 그런데 우리보다 앞서가신 분이 뭔가 택지 조사한 것처럼, 뭔가 앞에 정리정돈을 해주시는 겁니다. 홍해 갈라질 때도 마찬가지잖아요. 그런 변화가 우리의 변화로 이어져야 우리가 약속의 땅에, 천국에 합류하는 백성이 되는 겁니다.
그 변화, 그 변화를 위해서 우리 힘으로는 도저히 극복할 수 없고, 이겨낼 수 없는 그런 조건과 요건들이 자꾸 우리에게 다가오는 거예요. 로마서 8장에 보면,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환난, 곤고, 핍박, 기근, 적신, 위험, 칼, 몇 가지입니까? 일곱 가지쯤 되지요. 그 중에 하나라도 다가오면 우리는 깜짝깜짝하고 놀랩니다. 제발 이런 것, 깜짝깜짝 놀라지 않고 그냥 곱게 갔으면 좋겠는데. 주께서는 우리 앞에 돌멩이 같은 이런 환난, 곤고, 핍박이 마구 날라 오죠. 마구 날라 오는 것은 뭐냐 하면, 지금 우리 내부를 보고 공격하는 거예요. 우리 내부가 달라지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일부러 그런 것들을 동원시킨 겁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가 사는 이 땅이 나를 살린다는 것. 내가 땅을 정복해서 내가 나를 살리는 것이 아니고 땅이 우리를 살린다는 사실을 약속의 땅에서 그들은 몸소 느끼게 하는 겁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그들이 어떤 소산물과 어떤 곡물을 낼 때에, 그들은 반드시 십일조를 내야 할 이유가 그 곡식이 그렇게 나오기까지 거기에 제사장들이 제사를 지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러분, 제사하고 텃밭 가꾸는 것하고 아무 상관없어 보이죠. 우리는 상관없어요. 한 쪽은 제사 드리고, 우리는 실제로 호미 갈고, 제초제 뿌리고, 뭐 잡초 제거하는 것, 전혀 관계없어 보이지만 하늘나라에서는 관계있어요.
하늘나라에서는 예수님이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몽땅 드려서 합당하게 되게 되면 우리는 하늘나라 어느 자리, 저 구석진 자리에 가게 된다 할지라도 그 예수님의 제사의 효과를 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 관계예요. 희한한 땅이잖아요. 복을 받되 내가 행한 것도 없이 복 받는 그러한 상황. 아무것도 경건한 것도 의로울 것도 없는데 하나님께서 의로 쳐주시는 그런 상황 속에서 우리는 영원히 살게 되는 겁니다. 그런 관계, 그런 변화를 유도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니 힘으로 되는지 안 되는지를 자꾸 측정하는 식으로 자꾸 우리에게 이런 난관을 주시는 겁니다. 그럴 때, 우리는 그 난관만 쳐다보면서 내 마음이 천국 갈 마음인지는 우리는 돌아볼 생각을 못하죠. 자기 마음은 정당하기 때문에.
그래서 저는 이것을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시편 9편 20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어요. “여호와여 저희로 두렵게 하시며 열방으로 자기는 인생뿐인줄 알게 하소서” 자기는 인생뿐인줄 알게 하소서. 이거 참, 이거 기독교 가정에 액자를 만들어서 꼭 달아야 된다면 저는 추천해드리겠습니다. 자기는 인생뿐이다. 아무것도 아니다. 인생뿐이다. 태어날 때부터 자기는 자기밖에 모르고 지 잘돼야 복인줄 아는, 기껏 모든 생각이 자기에게 되돌아오는. 결국 죽을 때도 자기는 인생뿐인 것을, 아무것도 아닌 것을, 알게 하소서. 주여, 하나님 일을 모르게 하시고 나는 아무리 하나님 믿더라도 나는 내가 우선이지 내가 우선이 아닌 것을 깨닫게 하옵소서. 이러한 모습은 땅이 있어서 바로 이러한 상황으로 우리를 몰고 갑니다.
이사야 43장 18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새 땅에 갔을 때 이렇게 알려 줍니다. 그걸 제가 미리 알려드릴 테니까 여러분 잊지 마시고. 아, 천국은 살기 좋아서만 천국이 아니고 이런 이야기가 통용되기 때문에 좋은 세상인줄 아시기 바랍니다.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적 일을 생각하지 말라” 세상에 모든 것은 다 꿈에 본 듯 다 잊어버리죠. 25절에 보면,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제가 아침에 뻔뻔해야 한다고 했죠? 주께서 기억하지 않는다는데 내가 기억하면 이건 내가 주님에 대해서 욕하는 것밖에 안됩니다. 잘난척하는 것밖에 안 돼요. 주께서 죄를 기억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죄가 없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죄인 아닌 겁니까? 내일 되면 또 새로운 죄가 있기 때문에 걱정하지 마세요. 내일 되면 내가 미처 몰랐던 새로운 죄가 또 시작됩니다. 하지만 지난 죄는 잊어주세요. 네, 잊어주세요. 배우자의 과거는 묻는 법이 아닙니다. 니, 내 결혼하기 전에 누구 만났나? 그거는 묻지 마세요. 네, 다 지나간 거예요. 다 지나갔습니다.
주님께서 니 죄를 도말해서 기억하지 않는다면 우리도 같이 기억하지 맙시다. 우리가 주님보다 더 예민할 필요는 없거든요. 주님이 하는 그 조치는 이 땅에서 우리의 죄를 생산하고 생산해낸 죄를 기억치 아니하므로 말미암아 저 아낙 자손, 우리보다 더 힘센 사람을 힘으로 밀어붙이는 것이 아니고 죄 없는 자가 죄 있는 자를 이긴다는, 그 하나님의 일관된 원칙을 우리로 하여금 실행케 하는 그 작업에 우리를 투입시킨 겁니다. 죄 없이 만들어서, 죄 있는 자를 죄 없는 자가 차지하게 만들어서, 그래서 하나님은 너를 용서했음을 드러내는 그 세계가 바로 천국입니다. 천국은 죄를 판정받는 곳이지 돈이나 권력으로 판정받는 동네가 아니에요.
여러분! 천국 갈랍니까? 말랍니까? 확실히 합시다. 여러분, 천국 갈려면 죄 문제 가지고 세상을 다시 봐야 하죠. 돈 없어 가지고 이런 것 가지고 자기 자신을 낮춘다든지, 남 앞에서 기죽지 마시고 죄 있으면 기죽지 맙시다. 죄 없거든 그 죄 없는 것을 자랑합시다. 이게 바로 변화에요. 그 변화를 위해서 하나님이 준비한 것이 뭐냐? 우리가 벌벌 떠는 땅을 준비했습니다. 그럼 땅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 창세기 24장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성경에 나오는 이 창세기 이야기가 무심한 이야기가 아니거든요. 무의미한 의미가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자기 이삭의 색시감을 찾기 위해서 늙은 종을 자기 고향에다 보냅니다. “니는 가나안 땅에서 딸을 취하지 말고 고향 땅에서 내 아들 이삭을 위하여 아내를 택해라” 라고 이야기하죠.
그러니까 늙은 종의 입장에서는 상당히 난감합니다. 왜냐하면 자기하고 살 여자가 아니잖아요. 이삭하고 살 여자고. 또 그 여자를 아브라함이 그렇게 재촉을 했기 때문에 나중에 자기가 실컷 예쁘다고 데리고 왔는데, 데려 왔는데 아버지가 마음에 안 들면 어떻게 할 거예요? 어디서 CEO해가지고 데리고 왔는데 막상 아니야, 아니야 그게 아니야! 하면 곤란하잖아요. 그래서 종으로서는 자기 믿음에 대한 테스트같이 되어 버린 거예요. 괜히 아브라함 곁에 있다가 아브라함처럼 된통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내가 하나님! 하나님! 믿습니다. 하는 것이 다 헛말이에요. 하나님께서는 그 믿음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입술로 나불거리는 믿음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난감한 상황 속에 집어넣어서 하나님이 어떻게 순적하게 어떤 준비한 일을 나한테 덮치게 하는가를 실제로 체험케 하는 겁니다. 이런 믿음은 도저히 삭제할 수가 없죠. 잊을 수가 없죠. 그래서 아브라함 종은 그냥 무모하기 짝이 없는 길을 갑니다. 그런데 그 전에 아브라함이 먼저 종에게 이런 일을 합니다. 그것이 24장 7절인데,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를 내 아버지의 집과 내 본토에서 떠나게 하시고 내게 말씀하시며 내게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이 땅을 네 씨에게 주리라 하셨으니 그가 그 사자를 네 앞서 보내실지라” 니가 지금 혼자 가고 있지? 아니야. 동행이다. 동행. 너는 지금 앞에서 누가 길을 닦아 주고 있고, 닦여진 그 길을 뒤따라가는데, 중요한 것은 그 길을 닦는 그 사자가 니하고 상관하는 것이 아니고 이 아브라함, 집에 있는 아브라함과 관련되어 있는, 하나님의 사자가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을 이루기 위해서 길을 간다는 것이죠. 참 어렵죠?
이걸 쉽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찾아 왔는데 우린 찾아 왔는지 안 왔는지를 어떻게 압니까? 저한테 물으시면 우리가 원하는, 우리가 기대한 그 길을 가지 않아요. 그걸 전부다 철거합니다. 그걸 인정하지 않고. 아버지와 예수님이 있었던 그 상황, 이 땅에 오셔서 독생자가 가신 길 있잖아요. 그 상황 그대로 우리를 가게 하시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땅에서 나그네 길을 갈 수밖에 없어요. 우리의, 모든 제자들의 행함은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전부다 도망쳤잖아요. 결국 우리로 하여금 막상 예수님 믿습니다. 믿습니다. 해놓고. 믿음 좋은 척 지 혼자 다 했는데. 하늘나라 가면 누가 높으냐, 김칫국부터 마시고 했는데. 막상 주님 십자가 질 때는 다 도망가고 말았죠. 다 떠나고 말았습니다. 바로 그런 쪽으로 우리를 몰아가고 있는 그 길.
그래서 우리의 자존심과 존엄한 인격성, 이런 것은 주님 앞에 어처구니없는 망상인 것을 들추어내는 식으로 우리를 이끌어 갑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여! 저 같은 인간을 왜 구원하십니까? 라는 소리가 나올 수 있도록. 저보다 똑똑한 사람 많고 저보다 신앙생활 잘하는 사람 많은데 왜 하필이면 지저분한 저한테 까지 구원을 다 챙겨주십니까? 라는 그 고마움. 그 고마움이 고백이 될 때, 저 안 믿는 사람 때문에 니를 믿게 하셨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거예요. 저 안 믿는 사람 때문에. 그 사자들이 가는 그 길에 아브라함 종이 착각하지 말아야 될 것은, 자기가 보기에 이쁘다든지, 자기가 보기에 참하다든지, 이런 것은 그건 고려 대상이 아닙니다. 고려 대상이 아니고 그럼 뭐냐, 창세기 24장 60절에 보면, “리브가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우리 누이여 너는 천만인의 어미가 될지어다 네 씨로 그 원수의 성문을 얻게 할지어다”
종이 간택해야 될 그 여성은 잔다르크입니다. 그냥 살림살이 하고 그냥 요리 잘하는 사람은 아니고. 어떤 인간을 즐겁게 하는 것이 아니고 천만인의 어미가 되고 네 씨로 원수의 성문을 여는. 하나님의 지옥과 마귀의 성문을 열어제칠 그 씨를 남길 여성입니다. 그러니까 그 숙제는 아브라함의 종의 숙제가 아닙니다. 내 인생요? 여러분 인생요? 여러분이 관리할 숙제가 아닙니다. 여러분이 앞서 가신 그런 주님에 속한 몸을 갖고 저와 여러분이 지금 여기에 앉아 있는 거예요. 내 인생은 내가 관리하고 내가 헤쳐 가는 것이 아닙니다. 일곱 번 넘어져도 여덟 번 일어나라. 여덟 번 일어나면 또 짓밟을 거예요. 내가 일어난 것이 아니고 주께서 일으켜 세울 거예요. 일으켜 세울 때마다 이거는 내 몸이 내 몸이 아니고 주님의 자기 숙제를 자기가 지금 하고 있는 거예요.
아브라함은 아브라함 언약이지만 우리 몸은 새 언약에 소속된 거예요. 예수의 피와 예수의 살이 우리를 용서한다는 그걸 증명하기 위해서 우리 인생이 얼마 전에 태어난 거예요. 몇 년도, 1956년도에 태어난 거예요. 우리는. 그건 제 나이고. 여러분 나이가 또 있겠죠. 왜? 자꾸 내 인생에 대해서 걱정합니까? 그거는 하나님의 사자가 내 축복과 관련된 사자 아닙니다. 예수님과 관련된 하나님의 사자가, 천사가 우리 앞에 먼저 길을 열고, 성령께서 길을 열어 제치는 거예요. 우린 착각하죠. 내가 이 정도 하면 천당 가겠느냐? 맨날 천당 가겠느냐? 우리 천당 안 보내줘요. 안 보내주고 주께서 우리의 천국을 제거하고 주님의 천국을 우리에게 덮어주는 식으로. 내 천국 사라지고 주님의 천국이 다가오면서 우리는 천국가게 되는 겁니다.
그 천국은 나의 자존심과 위신을 챙겨주는 천국 아니에요. 예수님만 영광 돌리고 예수님만 감사하는 그 낯선 나라에 우리를 집어넣어 줍니다. 따라서 그 작업 가운데서 제거돼야 할 것은 우리의 떡과 우리의 비젼과 우리의 희망과 우리의 소망이죠. 그건 낱낱이 전부다 제거됩니다. 그 제거되는 방법이 바로 우리가 부러워하는 엉뚱한 길, 난관이 자꾸 생겨서 우리로 하여금 절망하고 낙심하게 만듭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내가 그럴 줄 알았어. 난, 니 믿음 인정 안 했어.” 절대로 우리 믿음 인정 하지 않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우리가 구원받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의 기도는 내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는 거예요. “주여! 주님 소유죠?” 라는 뜻에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나는 내 소유 아니죠? 주님 소유라면 합당하게 쓰여 지기를 원합니다. 라는 식으로 기도하라고 마지막에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라고 붙이라는 겁니다. 실컷 지 욕망 다 해놓고 빨리 주의 이름 갖다 붙이는, 지 마음대로 붙일 수 없는 게 붙이는 것, 그렇게 하지 말고.
이 땅은 아주 적절한 땅입니다. 내 뜻을 꺾는 땅이에요. 나보다 잘난 사람 많은 땅. 그래서 우리는 믿음으로 그걸 얻으려고 시도하게 만드는 땅. 그러면서 그걸 실패로 끝나게 해주시는 그런 땅. 그 실패한 현장에서 비로소 내가 가는 길은 주님 가신 길이지 내가 원하는 길이 아님을 다시 한 번 일깨워주기 위한 그런 사건이 벌어지는 그 땅. 그 땅에서 우리는 아직도 뭔가 내가 원하는 곳으로 가고 있는 존재입니다. 그럴 때, 주의 사자께서 보내셔서 우리로 하여금 실패를 통해서 성공을 보게 하는, 구원 성공을 미리 챙겨주시는 그런 친절함을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은 친절한데, 왜 사는 건 이렇게 불친절한지. 우리의 욕심이 개재되어 있고 착각이 개재되었습니다. 내 몸이, 내 인생이 내 것 인줄 알았습니다. 남한테 보여주고자 하는 가상적인, 위선적인 인생으로서 휘둘리고 시달리면서 어리석게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주여, 이제는 그것을 찢어버려 주시고 껍데기는 사라지고 주님의 사자가 우리를 반기고 성령께서 이끄시는 곳이 바로 천국인 것을 오히려 감사케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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