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년 (신명기 2:13-19)
38년
2014년 12월 7 일 본문 말씀: 신명기 2:13-19
(2:13) 이제 너희는 일어나서 세렛 시내를 건너가라 하시기로 우리가 세렛 시내를 건넜으니
(2:14) 가데스 바네아에서 떠나 세렛 시내를 건너기까지 삼십팔 년 동안이라 이 때에는 그 시대의 모든 군인들이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맹세하신 대로 진 중에서 다 멸절되었나니
(2:15) 여호와께서 손으로 그들을 치사 진 중에서 멸하신고로 필경은 다 멸절되었느니라
(2:16) 모든 군인이 사망하여 백성 중에서 진멸된 후에
(2:17) 여호와께서 내게 일러 가라사대
(2:18) 내가 오늘 모압 변경 아르를 지나리니
(2:19) 암몬 족속에게 가까이 이르거든 그들을 괴롭게 말라 그들과 다투지도 말라 암몬 족속의 땅은 내가 네게 기업으로 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을 롯 자손에게 기업으로 주었음이로라
이스라엘에 나오는 상황은 그들 보기에 참으로 실제 상황입니다. 산에 꽃이 피고 강에는 물이 흐르는 것처럼 그들 주변에 다른 민족이 상주하고 있다는 것이 실제 상황입니다. 이러한 현실을 마주하면서 이스라엘도 나름대로 그들이 그동안 익힌 노하우를 발휘하게 되는데 이것도 또한 실제 상황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그들이 미처 알지 못하는 더 현실상황을 이끌어내십니다. 그것은 그들이 들어가야 할 곳으로 이끄시는 일입니다. 사람들은 쉽게 다음과 같이 생각하게 됩니다. “어디로 가라고 목적지만 알려주시면 우리가 그곳에 들어가기 위해 노력하므로서 들어갈 수 있는데…”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성공자라고 전제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우리 자신을 성공자라고 보지 않습니다. 실패자로 보십니다. 목적지를 알려주어도 우리는 그 목적지 도착에 실패하게 되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만드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아무도 자기 힘으로 도달 될 수 없는 바로 그곳에 천국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실패자 되게 하셔서 그 목적지에 이르게 하십니다. 실패없는 구원은 없습니다. 성도는 “저의 실패를 하나님의 합당한 조치로 감사함으로 받아들이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게 됩니다. 우리는 실패를 감당해야 합니다. 실패를 딛고 성공으로 나아가라는 말이 아닙니다.
실패 뒤에 실패가 있지 성공이 있지 않다는 이 현실을 수용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이스라엘의 군사들이 38년 간 광야를 배회하면서 다 죽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인간 내부에 실패 있음’을 나타내는 작업을 성립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실패의 이유는 인간 내부에서 찾으시려는 겁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 실패가 실망스러운 결과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당연한 일이 마땅히 현실로 성사된 것을 도리어 감사해야 한다는 겁니다. 실패를 담고 사는 사람이 아니면 천국은 어림도 없습니다. 절제하고, 극기하고, 사려 깊고, 실패를 극복하고 이긴 자들이 들어가는 곳이 천국이 아닙니다.
이런 자들이 들어가는 천국은 애초부터 없었습니다. 천국은 실패의 의미에 본인이 재료로 사용되어졌음을 인정하는 자들이나 들어가는 겁니다. 즉 인간은 실패할 때, 비로소 자신의 존재 의미가 있습니다. 성도가 들어가는 천국이란 바로 그곳에서 나온 원리에 의해서 최종 실패자로 들통나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민족만이 특별히 40년 동안 모든 군사들이 다 죽습니다. 모세도 같이 죽습니다. 즉 아무도 이스라엘의 구원을 책임질 위인이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애초부터 실패자요 죄인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목적지를 이스라엘은 모릅니다. 마치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아브라함과 같은 신세입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히 11:8) ‘갈 바를 알지 못한’ 것입니다. 실패 속에서 비로서 갈 바가 나타나게 되어있습니다. 즉 본인들이 자신의 실패를 자인할 경우에만 밝혀지는 것이 목적지입니다.
실패의 최종 모습은 신약에 와서 예수님의 시험부터 밝혀집니다. “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하늘의 풍요를 버리시고 이 땅에서 굶주려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인간의 실패의 최종성을 보여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들은 이 땅에서 살 가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무시하십니다. 인간들은 자기 행함을 대가를 얻으려합니다. 하지만 하늘에서 내리는 비와 공기는 인간들의 그 어떤 노고와 노동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교도소 내의 죄수들이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그것을 근거로 양식이 공급되는 것이 아니듯이 말입니다. 국가 교도소 운영은 국민의 세금으로 충당되듯이 성도에게 일상의 삶은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 능력으로만 주어집니다. 그래서 은혜입니다. 선인이나 악인이나 구분없이 햇빛과 비를 내리십니다.
문제는 목적지입니다. 이 목적지를 앞두고 군사들이 다 죽었다는 말은, 전쟁이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전쟁을 한 분이 일괄적으로 해치우신다는 말입니다. 그동안 많은 이들은 악마의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했습니다. 이는 인간의 군사들에 의해서 땅을 양보할 민족들이 가나안 원주민들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원주민이 버티고 있는 이상, 목적지가 없다는 이스라엘의 불평이 일리있는 주장들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불만의 근원에는 마치 자신들이 들어갈 마땅한 권한과 자격을 지녔다고 여기는 오해가 있습니다. 사랑을 배신하면 권한도 같이 박탈당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130km를 앞두고 일주일만에 들어갈 수 있는 세넷시내 길에 도달하는 것이 38년 걸렸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죽였다고 단정지을 수가 있습니다. 즉 일부로 들어가지 못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는 이스라엘 내부에 실패를 가르치려고 하시는 겁니다. 어차피 악마가 지시한 유혹을 이겨낼 위인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차라리 실패자로 사는 것이 합당하고, 실패자라면 그 어떤 요구할 권한도 같이 사라진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합니다. 그럼에도 이스라엘이 그곳에 들어간다는 것은 그들이 꾸준히, 조금씩이라고 움직이는 겁니다. 즉 실패집단인 채로 움직입니다. 그리고 그 움직임 의 제일 앞 자리에는 유일하게 악마의 테스트를 이겨내신 분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로서 성도의 구원은 다음과 같은 공식이 정립됩니다. ‘예수님 앞에서 자신이 실패자로 인정하는 자는, 이 작업까지 예수님께서 의도적으로 하셔서 오직 예수님만이 건져낼 권한이 있음을 수용하는’ 식으로 구원이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움직여야 합니다. 실패자로 살게 된 것을 감사함으로 움직여야 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마음을 세상을 통해 늘 낮아지고 십자가 앞에서 우리의 장래까지 주님에게 맡기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8강-신 2장 13-19(38년)141207-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 2장 13-19절입니다. 구약성경 262페이지입니다.
“이제 너희는 일어나서 세렛 시내를 건너가라 하시기로 우리가 세렛 시내를 건넜으니 가데스 바네아에서 떠나 세렛 시내를 건너가기까지 삼십 팔 년 동안이라 이 때에는 그 시대의 모든 군인들이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맹세하신 대로 진중에서 다 멸절되었나니 여호와께서 손으로 그들을 치사 진중에서 멸하신 고로 필경은 다 멸절 되었느니라 모든 군인이 사망하여 백성 중에서 진멸된 후에 여호와께서 내게 일러 가라사대 네가 오늘 모압 변경 아르를 지나리니 암몬 족속에게 가까이 이르거든 그들을 괴롭게 말라 그들과 다투지도 말라 암몬 족속의 땅은 내가 네게 기업으로 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을 롯 자손에게 기업으로 주었음이로라”
하나님께서 말씀 자체가 인간에 대한 모독입니다. 인간을 아주 개무시 하고 있어요. 여기 가데스바네아라는 넓은 광야인데, 이 광야에서 세렛 시내로 가는데 130키로밖에 안 돼요. 그런데 며칠 걸렸는가. 일주일 만에 갈 수 있는데. 뭐, 좀 더 피곤한 사람이 있으면 십일 정도. 늦어도 보름 만에 갈 수 있는 것을 38년 동안 가게 하셨습니다. 이거 들어가라는 이야기가 아니에요. 다 죽이고 가겠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십계명에다 분명히 살인하지 말라고 해놓고는 본인은 걸핏하면 살인해요.
안식일 어겼다고 살인하고, 무당, 뭐 점 쳤다고, 결혼식 할 때 사주 봤다고 죽여 버리고 무당 죽여 버리고, 부모한테 대들면, 때리고 욕하면 죽여 버리고. 심지어 참 현대인들은 가슴 아픈 이야기겠지만, 아들이 말 안 듣거든 다른 사람 손에 죽여 버리고. 딸이 말 안 듣거든 죽여 버리고. 이거 뭐, 다 죽여 버려요. 오로라 공주 같애. 등장인물 다 죽여 버리고. 임성한 작가거든. 뭐 걸핏하면 다 죽여 버리고. 옛날에 제가 오로라 공주 보면서 얼마나 감사했는지. 야 저런 드라마가, 복음적인 드라마가 있구나. 걸핏하면 좀 나오면 죽여 버리고 죽여 버리고. 죽음의 현실화. 죽음의 구체화. 죽음을 밑바닥에 보일러로 깔아 놓는 하나님의 작전. 우리는 이런 성경이 싫지요. 왜냐하면 개무시 당하기 싫어서 그렇습니다. 이왕 살아있는 거 좀 봐주소 하는 식이에요.
그냥 농사짓는, 농작물 수거하거나 정리하는 분, 심지어 붕어빵 파는 사람들도, 보게 되면 배추도 상품 아닌 거 갖다 버립니다. 버려진 배추, 얼마나 기분 나쁘겠어요? 왜 나를 개무시하나. 왜 자기가 키워놓고 “이거 상품가치가 없네.” 하고 집어던져 버려요. 감도, 삐죽삐죽 나온 감도 갖다 버려 버려요. 상품가치가 없다고. 하늘나라에 가치 없는 것은 주께서 버려 버립니다. 그럴 자격이 있고 그럴 권한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처음부터 하나님을 배신했어요. 배신했다는 말은 그에 상응하는 모든 권한도 박탈당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박탈하는 거예요. 남편이 바람을 피웠다. 피운 거 들켜놓고 하는 말이 “밥도!” 이건 말이 안 되는 거예요. 배신을 했으면 밥 얻어먹을 자격도 없는 겁니다. 밥 얻어먹을 자격도 없는 거예요. 여자가 화투 쳐가지고 돈 다 날렸다. “여보, 옷 하나 사도!” “미쳤나! 옷 사주게.” 도박으로 다 날려놓고. 그걸 아내 대접할 필요가 없죠. “나가라!” 이래 되겠죠.
하나님께서 인간을 생명나무와 에덴동산에서 같이 살게 하려면 조건이 필요한데, 그 조건을 인간이 배신했습니다. 그 배신했다는 그 상황을 주님께서는 사랑이라고 이야기한 거예요. 사랑이라고. 그래서 성경 전체를 두고 보면 이렇습니다. 사랑과 사랑의 반대말의 갈등과 투쟁이라고 이래 보면 돼요. ‘사랑’의 반대말은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사랑 안 함’이 아니고 음행이라고 하는 겁니다. ‘음행’ 바람피운 것을 성경에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음행이라는 뜻은 그런 뜻이 아니에요. 음행이라고 하는 것은 사랑 없이 같이 사는 것도 음행이에요.
그리고 이스라엘 땅에, 뭐 여호와를 좋게 생각하지 않으면서도 약속의 땅에 사는 것도 음행이 되는 겁니다. 그리고 그 음행이 나중에는 대세를 차지할 겁니다. 요한계시록 17장, 18장, 19장에 보면 전 세계를 표현하는 한 마디의 말이 뭐냐, ‘음녀’라는 겁니다. 음행한 여자다. 전체가, 인간 세계 전체가 아우성이죠. 모두가 한 목소리죠. 한 목소리로, 한 목소리 내면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그러한 분위기가 예수님 오시고 난 뒤에 세상은 그쪽 분위기로 흘러간다는 겁니다. 이런 세상에, 방금 제가 세상에서 사랑과 음행이라고 대비로 해서 세상 전체를 이야기해줬잖아요. 이 한 모든 정보가 요게 압축이 돼요. 압축이 돼서 어디에 담기는가. 이스라엘에 담깁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에 담기면 이스라엘 멸망하네요? 멸망합니다. 멸망하는데요. 그들일 38년 동안 다 죽어요. 죽는데 문제는 그들이 좋은 점이 뭐냐, 멸망하면서 무빙moving, 이게 움직인다는 사실이에요. 멸망하면서 움직여요. 여러분 개꼬리에다 불 한 번 붙여 본 적 있습니까? 물론 그러면 안 되죠. 근데, 개가 꼬리에 불붙이면 개가 등신불처럼 “그래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하면서 앉아 가지고 도 닦습니까? “아이구 뜨거워라” 하면서 뭔가 움직이죠. 어디로 튀느냐. 그 튀는 쪽이 천국입니다. 이스라엘 꼬리에다 불을 붙여 버려요. 그러면 이스라엘은 죽겠죠. 그들은 죽음을 품고서 어디로 가느냐. 약속의 땅으로 하나님께서 가게 하시는 겁니다. 아주 진짜 신기한 거예요.
제가 이런 예를 들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 이스라엘의 특징이요, 갈 바를 알지 못해요. 히브리서 11장이 말합니다. 갈 바를 알지 못해요. 토끼와 거북이 이솝이야기에서 경쟁하는 것은, 뭐 거북이가 게으름 피우는 것은 맞지만 가는 목표는 알아요. 저 산 위에 깃발 꽂혀 있는, 가는 데가 있지만. 문제는 이스라엘은 그렇게 되지를 않아요. 어디로 튈지, 어디를 갈지 몰라요. 그래서 그들은 제대로 목표점에 도달해서 자신들을 스스로 성공했던 자로 군림하기 위해서 어떤 선택을 하고 길을 떠나게 되는데 거기다가 뒤에서 불을 붙여 버립니다.
그러면 그들은 뭐가 되느냐. 실패자가 돼요. 실패자가 될 때, 그 실패자가 가는 곳이 바로 천국입니다. 약속의 땅이에요.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자기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마저도 성공자이기를 원했던 거죠. 그러나 그래가지고는 못 들어가는 겁니다. 그런 인간 안 넣어줍니다. 정말 하나님께서 인간 개무시 하시는 겁니다. “인간 니가 뭘 안다고 니가 지금 어딜 가? 니가 아나?” 그럼 이스라엘은 “그러면 모르면서 왜 가라고 하십니까?” “니가 지금 실패자이면서 자인하지 않고 니가 지금 동의하고 있지 않잖아” 실패자가 될 때, 천국 가고 안 가고 결정을 더 이상 내가 할 수 있는 권한이 없을 때.
다시 이야기할게요. 배신한 자는 뭐가 없다? 배신한 자는 어떤 권리를 획득할 모든 권리를 박탈당해요. 모든 것이 박탈당할 때, 이제는 뭐 천국이고, 기업이고, 영생이고 그거는 줘야 받지 내가 달라고 할 수 있는 입장이 못 된다는 것을 그들이 확실하게 알 때, 그 때 영생과 천국은 그들이 도달할 수 있는 겁니다. 이게 어려운 문제가 아니고 불가능한 문제에요. 이건 단순히 어려운 문제가 아닙니다. 싫으면 말고 에요. 이거는. 또 중요한 것은 그렇게 해서 많은 사람들이 죽었어요. 오늘 38년 동안에 죽었는데, 군인들이 죽었다고 되어 있는데. 여기에 14절에 군인들이 죽었잖아요. 자, 죽었으면 이스라엘은 그 자체가 없어지는 것인가. 이 문제가 생겨요.
예를 들겠습니다. 에베레스트 산을 올라가는데 등정반이 한 오십 명이 출발했다고 합시다. 그 중에 등반 대장이 깃발 들고 올라갑니다. 대한민국 에베레스트 등반팀 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올라갑니다. 올라가는데 눈사태 맞아가지고 오십 명 가는 데 사십 명 죽었다고 칩니다. 근데 두 명은 드디어 꼭대기에 올라갔습니다. 등반 실패한 겁니까? 성공한 거죠. 왜냐하면 대한민국 등반팀이 올라갔으니까. 누가 죽든 말든 상관없어요. 팀이 올라갔잖아요. 그러면 그 산에서 내려와서 “돌아가신 분의 힘이 아니었으면 우리가 못 오를 뻔 했습니다.” 라고 이렇게 이야기들 하죠. 같이 성공한 성공의, 영광의 자리에 죽은 사람도 같이 넣어주죠.
이게 집단구원입니다. 이게 집단구원이에요. 인간을 피라미드 쌓아가지고, 쌓아올리는데 무수한 실패자가 있기에 하나의 성공자가 나오도록 그런 조치를 하시는 겁니다. 예수님이 누구냐 하면 이스라엘의 왕이에요. 다른 사람은, 신하, 국무총리 다 실패해도 괜찮아요. 하지만 왕이 실패하면 안 돼요. 왕이 실패해서는 안 되거든요. 그 하나님의 왕으로 오신 분이, 다윗의 자손. 왕가에 속한 분이 오셔가지고 왕이 되셔서 올라갔다 하면 그 왕을 왕으로 인정하는 백성들은 당연히 실패자에요. 실패자지만 구원에 성공시키는 그런 능력을 왕으로부터 추가적으로 제공받게 되는 겁니다.
십자가 질 때, 예수님만 성공했습니다. 열 두 제자 아무도 못 따라 갔습니다. 처소가 마련되지 않았기 때문에 베드로도 못 가요. 못 가는데 다시 예수님의 영이 와가지고 베드로로 하여금 실패자이면서도 천국의 백성 되게 하시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점을 기뻐해야 돼요. 주여, 우리가 주님 십자가 앞에서, 내가 잘난 존재로 봤는데 제가 못난 존재며 주님 은혜 아니면 못 들어갈 그 정도로 못난 존재인 것을 파악할 수 있는 것, 있게 된 것, 그보다 인생의 더한 성공은 없습니다. 그보다 더 큰 성공은 없어요.
신명기를 생각하면서, 우리는 신명기를 해석하면서 크게 두 가지로 해석을 해야 돼요. 첫 번째는 그 시대 현장에서 그들은 어떤 제한을 받았는가. 그거는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았습니다. 여기 오늘 두 개다 나옵니다. 38년, 시간적 개념이죠. 시간적 한계죠. 13절을 보면, “이제 너희는 일어나서 세렛 시내를 건너가라 하시기로 우리가 세렛 시내를 건넜으니” 세렛 시내, 이거는 지리적으로 실제로 있는 장소죠. 사해 바다가 있으면 사해 바다 맨 밑에 남쪽에 거기에 흐르는 강이 세렛 시내에요. 성경에서 신명기 2장 같은 경우 읽어보면 짜증납니다. 이 동네가 아는 동네가 아니잖아요. 지명이 아는 지명이 아니니까. 지명이 왜 그리 아는 지명도 아닌데 이렇게 해놓으면, 여기 민족들도 우리가 만났던 민족들도 아니고. 여기 뭐 호리 사람이 뭐 어떻고 암몬 사람이 어떻고 모압이 어떻고 이리 나오면 우리가 마음이 와 닿지를 않아요. 북한이 어떻고 일본이 어떻고 중국이 어떻고 하면 우리가 마음에 와 닿는데. 이게 옛날 사람들이기 때문에. 옛날 사람들이 있던 이스라엘에 그 당시 민족들이거든요.
일차적으로 우리는 그 당시 민족들이 어떤 속성을 가지고 있는가를 파악해야 하고. 두 번째 중요한 것은 그 당시 민족들이 존재하는 이유와 오늘날 우리 성도 주변에 있는 존재와 어떤 맥락으로 연결되어 있느냐 하는 그 점을 이제는 파악을 해줘야 하는 겁니다. 그것을 둘 다 해드리겠습니다. 이 시간에. 하는 방법은 어떻게 하느냐 하면, 우리가 하는 게 아니에요. 예수님께서 이 구약 신명기를 어떻게 해석하느냐 하는 것을 보고 하면 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어떻게 해석했느냐. 그 해석에 성령을 받은 자는 따르면 되니까요. 마태복음 4장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 마태복음 4장 1절,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2절,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고생을 사서 하십니까? 괜히 하늘나라에 그냥 사시지 왜, 이 땅에 와서 굶으시는 그런 아픔을 견디시는 겁니까? 그것은 모든 실패는 인간 속에 있기 때문에 인간으로 오신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굶으신 것은, 곧 인간의 실패를 직접 체험하시는 겁니다. 인간은 굶어죽어도 마땅한 그런 벌을 받아도 싸다는 그런 죄를 지었다는 거죠. 근데, 그 실패의 기간이 뭐냐, 사십 일이에요. 그러면 사십 일만 하면 되겠네. 예수님은 사십 일로 되어 있지만 신명기 쪽으로 보면 이게 뭐냐, 사십 년이에요. 일 년을 하루씩 계산해서 처리하시는 겁니다. 예수님이 대표자이니까 그래요. 예수님이 이스라엘 왕이거든요. 예수님이 왕으로서 백성들을 대표한다면 이스라엘이 살았던, 이스라엘이 지나왔던 모든 역사. 모든 신명기의 사십 년 역사도 예수님이 대신 처리해야 될 하나의 시간과 지리적 공간의 한계가 되는 거예요. 하나의 상황이 되는 거예요.
이렇게 합시다. 사십 일은 무슨 기간이냐. 이스라엘이 실패한 기간입니다. 이스라엘이 실패했다는 것은 뭐냐, 인간 자체가 실패했다는 말이에요. 예수님께서 사십 일 동안 금식했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아버지여, 이 실패를 감당하게 하옵소서. 이 실패를 감당하게 하옵소서. 이 실패를 마땅한 실패로 내가 용인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게 바로 예수님께서 금식하면서 하신 기도의 내용이에요. 이게 오늘날 성도가 해야 할 기도 내용입니다. 하나님이여, 후딱 전에처럼 회복해 달라, 보상해달라고 기도 하지 말고 “주여, 이 실패가 합당한 실패인 것을, 인간에게 합당한 조치인 것을 제가 납득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라는 기도를 해야 돼요. 뭐, 도고? 도고기도 할 것 없어. 이게 내용이 중요해요. 애가 아프다. “주여, 아프면서 애는, 이 아픔이 나한테 하나님의 합당한, 정당한 조치인 것을 우리 애가 깨닫게 하옵소서” 하고 대신 기도하는 것을 도고라고 해요. 내용이 중요한 겁니다.
아무리 잘 먹고 잘 살아도 하늘나라보다 못 해요. 로마서 8장에 보면 지금의 모든 모습은 하늘나라에 영광과 족히 비교가 될 수 없다. 뭐, 한 가지 비교하는 간단한 예는 시장에서 애들이 사는 천 원짜리 오 백 원 하는 반지 보다가 서울의 강남에 가서 최고급 그런 귀금속 집에 가서 한 개 일억 오천짜리 하는 다이아하고 비교해 보세요. 족히 비교가 안 되지. 우리가 세상에서 좀 누렸다, 좀 맛있는 거 먹었다 하지만 하늘나라하고는 족히 비교가 안 된답니다. 그것은 왜 비교가 안 되느냐 하면, 그것은 우리를 위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위해서 배설한, 아들의 혼인 잔치를 위해서 배설한, 이게 예식장 음식이기 때문에 그래요. 모든 예식장 음식은 아들이, 신랑 되신 아들이 주 되심을 축하하기 위해서 만든 음식들이기 때문에 실패자인 우리하고는 족히 비교가 안 되는 음식들입니다.
그 음식들에 우리가 나중에 참여하게 돼요. 그 참여할 때, 맛있는 것도 맛있는 거지만 얼마나 고마워요. 한 가지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교도소에서 죄수들에게 음식이 제공되잖아요. 근데, 그 음식이 제공되는 그 이유를 교도소 내에서 아무리 이유를 찾아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교도소 내에서는 죄수가 어떤 세탁소에서 일하기도 하고, 빵도 굽기도 하고, 목각 만들기도 하는데, 그걸 만든다고 그 대가로 음식을 주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왜냐하면 죄수들이기 때문에. 국민의 세금으로 주는 것이지. “아이구 니가 목각을 잘했어요. 그럼 노동의 대가 줄게” 라고 해서 노동의 대가로 제공되는 음식은 아닙니다. 이 세상에 우리는 갇혀있어요. 우리는 지금 죄수들만 있는 교도소에 있습니다.
우리에게 날마다 생명과 햇빛과 공기를 주는데, 우리가 얼마나 일해야 햇빛을 공짜로 받겠습니까? 얼마나 성실해야 공기를, 이 산소를 공짜로 받겠습니까? 이거는 예수님의 희생으로 주는 겁니다. 교도소는 국민의 세금으로 주지만 이 세상이 우리에게 주는 것은 예수님의 희생 덕분에 그것을 우리에게 주는 거예요. 참새도 마찬가지고 들풀도 마찬가지고. 좀 주제 파악도 해야 돼요. 그런데 우리가 누리기만 하면 우리는 약속의 땅에 못 들어가요. 왜 실패자한테 은혜를 주시지? 라는 그 체험을 해야 돼요. 그 체험을 하기 위해서 이스라엘이 있었던 겁니다. 이스라엘은 자기가 뭔가 당당하고 들어갈 만하다고 자기가 착각했죠. 사실은 애굽 사람하고 똑같아요. 다를 바 없어요. 그런데 모세를 통해서 일부러 실패케 합니다. 실패케 해서, 모세 하나가 실패했다면 다른 사람도 다 실패한 겁니다.
실패한 자들을 뭐라고 하느냐, 여기 14절에 보면 “세렛 시내를 건너기까지 삼십 팔 년 동안이라..그 시대의 모든 군인들이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맹세하신 대로” 이래 되어 있죠. 여기 그 지리적으로 우선 요거부터 먼저 설명해드리겠습니다. 가데스바네아에서 세렛 시내를 건너기까지 이렇게 되어 있는데, 이게 얼른 와 닿지 않아서 제가 생각하다가, 어떻게 하면 오늘날 현실에 맞춰서 설명을 해볼까 생각하다가 이렇게 하면 돼요. 지금 우리가 대구에 있습니다. 대구에 있는데 세렛 시내가 어디에 있느냐 하면 강릉에 있어요. 한 130키로 되니까 강릉에. 강릉 가는 길이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하나는 뭐냐, 포항으로, 강구로, 영도로 해서 울진으로 해서 그 다음에 삼척을 지나서 동해 지나서 정동진 가는 강릉. 뭐 가봤어야 알지. 하여튼 거기 그렇게 있어요. 중간에 배가 멈출 때가 있습니다. 그리 가는 길이 있는데 이게 돌아가는 길이에요. 사실 돌아가는 길인지 모르는데, 요즘 고속도로 뚫려가지고.
질러가는 길은 뭐냐, 대구에서 군의, 의성, 안동, 봉화, 봉화 거쳐서 태백으로 건너가서 강릉 가는 길이 나옵니다. 가봐야 알지. 이래 가시는 길이 정통길이에요. 이게 빠른 길이에요. 지금 우리가 강릉 가는 길이 빠르다는 것이 아니라 성경상으로 하게 되면. 가는데 왜 못 가게 하느냐 하면, 암몬 족속들이 군의 가는 데부터 막아요. 통과를 못하게 되어 있어요. 통과를 못하게 해서 돌아가는데 삼십 팔 년에 다 걸립니다. 일주일 만에 갈 수 있는 거리인데 삼심 팔 년 걸렸다는 말은, 막아 놓고 돌아가게 해놓고 군인들 다 죽여 버리고. 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는가. 제가 아까 설명했습니다. 실패하게 만드는 겁니다. 정탐꾼 보내서 뭔가 성공해보려고 했는데, 이게 실패자 되지 아니하면 성공자로서 의기양양하게 천국에 갈 수는 없습니다.
근데, 왜 군인들이 죽는가 하는 문제죠. 군인들이. 이 이스라엘 자체가 전부다 전우들입니다. 전우.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전쟁을 했는데 아주 특이한 전쟁을 했습니다. 어떤 전쟁이냐, 전쟁을 한 게 아니고 전쟁을 목격했다는 이유만으로 이것이 군인이 돼버려요. 전쟁을 하는 사람이 아니고 전쟁을 목격한 사람도 이게 전우가 되고 군인이 되게 하시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사십 일 동안 금식을 하시고 하실 때, 그때 예수님 혼자만 금식했습니까? 그럼 마귀하고 누가 싸웠느냐. 예수님 홀로 싸웠죠. 예수님께서 홀로 물리쳤습니다. 이스라엘 뜻은 하나님과 다투다. 또는 적과 인간과 싸우다는 뜻인데, 하여튼 전쟁에 의뢰해서 이스라엘 자체가. 그럼 누구만 진정한 이스라엘이냐, 예수님만이 진정한 이스라엘이에요. 그 이스라엘, 누가 했든 승리했으면 왕의 자격으로 승리했기 때문에 백성 만들기 작업은 누구 권한이냐 하면, 왕의 고유권한입니다.
“니 내 백성 해!” 라고 지명할 수 있는 권한이 왕에게만 있어요. 이게 요한복음 5장에 나옵니다. 아버지가 살리심과 같이 아들에게도 살릴 수 있는 권한을 줬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나로 인하여 내가 사는 것이 아닙니다.” 라는 뜻이에요. 내가 교회 가서 열심히 봉사하고 성경공부해서 그것이 나에게 구원의 힘이 되었습니다는 게 절대, 결코 그게 아닙니다. 내가 제일 착한 일 해도 아니고 나쁜 일 했다고 해도 구원 안 되는 것도 아니고. 다만 나에게는 다른 분이 계십니다. 그 분은 이미 성사를 이루신 분이고 성공하신 분이고 우리한테 올 때에는 “ 이미 야야, 성공했다. 내가 성공했다.” “내가 누구십니까?” “내가 니 주님이잖아” “주님이십니까? 저는 주님 덕분에 제가 구원받았군요.” 라는 그런 은밀한 관계에 있을 때 그것은 바로 진짜 성도입니다.
군인들이 죽었습니다. 그럼 군인 없어요. 군인들이 죽었으면 군인 없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군인들이 죽은 이스라엘에 누가 용사고 누가 군인입니까? 바로 동행하시는 하나님만이 군인이 되고 용사가 되시는 겁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서 나중에 보겠습니다만 도저히 들어갈 수 없는 여리고 성도 심지어 요단강도 주께서는 가게 하십니다. 제가 방금 하나님만이 군인이라고 했는데, 이걸 신명기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하나님의 언약궤를 요단강에 세우면 요단강이 갈라지고 그 언약궤를 이제는 그들은 시내산 밑에서 받아 챙겨야 합니다. 이제는 내 중심이 아니고 언약궤 중심이라서 언약궤가 가게 되면 적들이 물러가고 언약궤가 멈추면 적들이 굴복하게 되고.
이거는 나무 상자 하나가 죽었던 모든 군인들의 실패를, 대신 죄 용서하시는 고 내용이 그 나무 상자에 담겨 있어요. 나중에 언약궤가 구체화, 인격화 되면 그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아침도 그랬는데 오후에도 설교를 이렇게 하니까 혹시 또 어렵다고 할 사람도 있을지 모르는데, 어려울 땐 한 번 더 들으시면 되는 겁니다. 간단한 거예요. 내가 교회 다녀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는 그것만 인정하면 되는 겁니다. 교회 다니는 거 왜 다니느냐, 실패자 되기 위해서. 그냥 교회 안 다니면 자기가 잘난 사람 되거든요. 저는 미생이라는 드라마 보면서, 제가 드라마 잘 안 보는데, 왜 그래 전부 다 잘났는지. 뭐, 빙그래고 동그래고 장그래고 간에. 왜 그리 잘났는지. 왜 그리 오차장은 멋있는지. 전부다 멋있고 잘났고. 어쩌면 우리가 되고 싶은 것을 대신해서 다 보여주는 거예요.
그거는 현실이 아닙니다. 현실은 주께서 피 흘려서 못난 우리 구원받게 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물들었습니다. 세상 잘나니까 같이 잘난 줄 알고, 그래야 되는 줄 알고, 그게 성공인 줄 알고, 이미 세상에 물들어 있는 저희들을, 잘난 척 하다가 주님 앞에 나오면 실패자로 들통 나게 하시는 이 은혜를 도리어 우리가 감사케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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