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11-30 14:57:39 | 조회 : 63 |
소유하지 못할 땅 141130 | 이름 : 이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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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하지 못할 땅(신명기 2:4-7) 음성 동영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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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되지 못할 땅
2014년 11월 30일 본문 말씀: 신명기 2:4-6
(2:4) 너는 또 백성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세일에 거하는 너희 동족 에서의 자손의 지경으로 지날진대 그들이 너희를 두려워하리니 너희는 깊이 스스로 삼가고
(2:5) 그들과 다투지 말라 그들의 땅은 한 발자국도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세일 산을 에서에게 기업으로 주었음이로라
(2:6) 너희는 돈으로 그들에게서 양식을 사서 먹으며 돈으로 그들에게서 물을 사서 마시라
땅은 땅 그 자체로 있지 않습니다. 그 땅에 살고 있는 나 자신에게 무슨 의미를 제공하는 조건이 붙어있으면서 있습니다. 그 조건이란 다름 아닌 ‘나를 생존케 하는 여건이 조성되어 있는’ 그런 조건입니다. 사람들은 개간이나 변조를 통해서도 주변 환경을 개선해서 자기 삶이 이어지는 조건으로 바꿔놓으려 합니다.
그냥 나와 상관없는 빈 땅은 땅이라고 간주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인간은 땅, 혹은 대자연이라는 것에 ‘나의 생존 보장’이라는 의미를 던지고서는 현실화되기를 노력하고 고대합니다. 그래서 본인이 먼저 있고 그 본인 생존에 유리하다고 여기면 그게 어떤 땅인지 상관없이 접수하려고 듭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인간들의 이런 속성을 하나님께서 가로막고 나서십니다. ‘나의 생존에 유리함’으로 땅을 평가해서는 아니된다는 겁니다. 그런 시절은 애굽에서 살던 때로 족합니다. 이제 그 애굽 땅에서 벗어나서 약속의 땅으로 나아가는 중간 노정에서 땅 자체에 대한 의미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언약 충족이 우선되는’ 조건의 땅이라는 새로운 의미입니다. 이런 땅의 중요함은 이스라엘에게서가 먼저가 아니라 이스라엘과 동행하시는 하나님에게 먼저입니다. 이스라엘은 건져내시는데도 이유가 있고 목적이 있었습니다. 단지 이스라엘 당사자들은 자꾸 이점을 오인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 오인 중의 하나가 바로, 전에 홍해 건너기 전에 ‘어린양의 피’로서 문설주 발랐다는 사건을 그저 지나한 과거의 일회성 일이라고 여기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자연에서 새로운 정신을 뽑아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백성들로 하여금 천국에 보내기 위해서 그 어린양이 죽는 죽음을 이스라엘 마음 속에서 반복되는 조건으로 이끄십니다.
자연 환경이 이런 작업에 동원됩니다. 즉 인간 마음 속에 낯선 죽음이 들어오게 하시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어린양의 죽음사건이 과거사에 불과한 게 아니라 이스라엘의 진행방향을 따라 반복되는 사태를 일으키는 역사로 전개됩니다. 기존의 땅은 단순히 생존에 우선 가치를 두고 버티지만, 새로운 의미는, 왜 우리 가운데 어린양이 매일같이 죽어나가야 하는지를 말해주면서 새로운 자연환경을 맞이하게 만듭니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에서 민족이 살고 있는 세일산을 지나갈 때입니다. 야곱의 형의 계통 민족인 에돔은 하나님의 언약에 의하면 저주받아야 될 민족으로 굳어져 있습니다. 이 말은 곧 그들이 지속적으로 언약이 품고 있는 약속 내용을 거부하는 본성을 보인다는 말입니다. 그 거부성은 곧 자기 생존 우선으로 주변의 환경과 땅에 의미를 부여한다는 말입니다.
마치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탈출하기 전에 애굽과 한 통속이 된채 살아가던 그 성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같은 땅을 딛고는 있지만 그 땅에서 뿜어나오는 정신에 대해서는 상반된 성격을 보여주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사실 땅에서, 자기 생존 이외의 것이 나온다는 것 자체가 신기한 일입니다.
어느 장례식장에서 순진한 아이가 엄마에게 다음과 같이 묻습니다. “엄마, 오늘 왜 많은 사람들이 우리 집에 오는데?” 엄마가 대답하기를, “그것은 할머니가 천국 가셨기 때문이란다”고 했습니다. 바로 이 엄마의 질문에 대해서 아이는 기존의 땅 개념 안에서 이해하기 마련입니다.
아이는 할머니의 시신이 누워져 있는 병풍 뒤로 가서 할머니를 보고서는 엄마보다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엄마, 이 병풍 뒤쪽이 천국이야?”라고 말입니다. 이러한 이해의 난맥은 어린아이 뿐만 아니라 어른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땅에서 살던 식으로 살다가 천국가면 애로사항으로 곧장 그 천국 생활을 할 것처럼 여깁니다.
아무리 천국이 좋아도 그 좋음을 바라보는 인간이 기존의 의미를 부여한다면 그곳은 천국이 아니라 지옥이 될 뿐입니다. 아담은 아담으로서 해결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인간에 의해서 새로운 의미를 만들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인간들이 인간들끼리 의논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따로 중보자를 세워서 인간과 비교시키십니다.
이는 어린양의 죽음 이외에 그 어떤 최종적 의미를 땅에다 부여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땅에다 자기 생존과 결부하기에 자신이 만약에 늙는다면 거기에 합당한 땅의 환경 조성을 위해 전원주택 같은 것을 생각합니다. 그러니 땅 자체의 의미에 대해서 무지몽매하다는 말입니다.
사람이 늙으나 젊으니 땅은 다른 이유와 목적을 위하여 변화가 일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언약입니다. 즉 인간의 살고자 하는 성질을 죄로 규정하고 저주스러운 벌로서 처벌하기 위한 환경으로서 움직이는 것이 땅입니다. 그 대표적 예가 바로 에서민족입니다. 그들에 있어 땅은 그들이 늙어 죽을 때까지만 의미 있습니다.
이 말은 자기 정신내부의 낯선 죽음이 들어오고 있지 않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성도에게는 성령을 통해 예수님이 죽음이 선취(先取)되어 들어와 있습니다. 먼저 들어앉아서 작용한다는 말입니다. 그 예수님의 죽음은 인간의 아담적 본성과 싸우게됩니다. 사람들 속에는 이상(理想)이 늘 싹트고 있습니다.
즉 “나는 이러하게 살아서 이런 좋은 낙을 누리겠다”는 그런 꿈 같은 것을 말합니다. 하지만 중보자되시는 예수님께서는 그 ‘이상(理想)의 부당함’을 지적하십니다. 왜냐하면 아담이 나름대로 신을 만나는 방식이 바로 그런 ‘건전해 보이는 이상(理想)’을 빌미로 해서 하나님과 관계를 수립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 저에게 이런 고상해보이는 계획을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에 유리하고 하나님께 영광이 될만한 순결하고 고귀한 꿈입니다. 이 꿈이 하자없이 완벽에 가까운 꿈이니 필히 이루어주실 줄 믿습니다”고 나옵니다. 그 꿈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대견해보이시기에 그 이상을 제안한 인간도 같이 천국으로 끌려올리게 해주실 것이라는 기대를 하게 마련입니다.
이게 바로 악마가 만든 ‘종교’라는 겁니다. 물에 빠진 자신을 자기 손으로 자기 머리를 잡아당기를 물 밖으로 끌어올리겠습니까? 그럴리 없을 겁니다. 하나님께서 올무를 놓아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자신의 이상과 꿈의 더러운 속성을 고발하십니다. 그렇게 하신다는 것 자체가 그들 속에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중보자의 피흘림 앞에서 자신의 건전함을 자랑하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