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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강의-바울의 사명(행26;23) 141028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4. 11. 21. 19:31

대전141028-행26장23절(바울의 사명)66강 - 이 근호 목사

사도행전26장 22절, 23절 할 차례인데, 앞에 것하고 관련성 있게 해봅시다. 17절부터 보겠습니다.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저희에게 보내어” 지금 예수님께서 사도바울에게 이야기한 거죠. 그런데 우리는 이미 예수님이 돌아가신 분으로 알고 있잖아요. 돌아가셨다 여기는 분이 지금 살아나셔서 저희에게 사도바울에게 이야기한다. 어떤 문제가 있느냐 하면, 상호작용을 여러분들이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자, 예수님이 돌아가셨지요. 분명히 돌아가셨잖아요. 그런데 사도바울은 돌아가신 분이 흔히 인간들이 생각하는 살아있는 사람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돌아가신 분이 평소에 보이지 않는 분이 사도에게 나타나서 “너로 사환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저희에게 보내어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케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 이 이야기가 언제 이야기에요? 이 이야기가 지금 사도가 지어낸 이야기예요? 안 그러면 예수님이 자기한테 일러준 사명을 부여한 그 이야기입니까? 이렇게 했지요. 그러면 이 사명이 사도바울이 만약에 게으르거나 능력이 없거나 하면 이게 취소될까요? 안 될까요? 취소 될 리가 없지요. 바로 그런 점에서 사도와 주님의 만남이 그 점에서 중요한 거예요.

한 번 적어보겠습니다. 상호작용하기 전에 먼저 ‘취소 안 될 그런 내용이다.’ 취소 안 될 그런 내용입니다. 그러면 한 번 물어봅시다. 사도바울 인생 자체가 실패가 있을까요? 없을까요? 없지요. 사도바울 인생 자체에 실패가 없기 때문에 사도바울의 모든 인생은 실패해야 되는 겁니다. 사도바울은 자기 인생이 어떻게 되는가를 사전에 알아요? 몰라요? 몰라요. 모르고 말만 들었지요. 니를 보내어 눈을 뜨게 하고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한다. 누구를? 이방인들을.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간다. 이건 아는데, 그 구체적 내용에서는 자기가 이 사명을 스스로 부여한 게 아니기 때문에 모르지요.

모르는 것이 주님이 보시기에 실패가 없다면 곧 그 말은 뭐냐 하면, 내가 기존에 생각한 내가 상상한 모든 것을 실패로 끝나야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이야기합니다. 여러분 인생에 마구잡이로 실패하세요. 아예 실패의 끝을 보세요. 실패의 끝판을 보라는 말이죠. 나의 존재의 모든 것이 실패로 끝날 때, 끝나면서 수시로 느끼는 것은 주님의 일에는 실패가 없다. 상당히 뭔가 역설적이잖아요. 실패를 하기에 실패가 없음이 그제사 느껴지는 인생, 그래서 사도는 자기를 증거 하는 것이 아니고 그 분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는 거예요. 그 분이 나를 이렇게 이끌고 간다는 거예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도대체 얼마나 버려야 부족함이 없어요? 한 달 수입이 얼마 되어야 부족함이 없겠습니까? 그런 차원이 아니지요.

다윗은 그렇게 이야기할 때 다윗은 사울에게 쫒기고 있습니다. 남들이 보기에 망했어요. 한 때 좋았는데 망했어요. 인기 있는 거 다 날아가고 쫒기고 있는 입장이고 수배자, 도망자 신세에서 이제 기댈 것은 오직 주님밖에 없는 그 상황, 그 상황이 어때서? 그 상황이 뭐 나쁩니까? 보통 인간적인 입장에서는 자기 것이 날아간 것에 대해서 절망을 느끼는데 성경은 바로 그 절망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바로 ‘십자가의 고난의 동참’이라고 보는 겁니다.

이건 꼭 가난하고 돈이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니고 부자 돼도 마찬가지에요. 돈이 많아도 허무하고 아는 사람들이 많아서 가족들이 사랑해줘도 그게 전부가 아닌 것 같고 이상하게 그게 내 인생이 아닌 것 같아요. 남한테 사랑받고 돈 마음껏 쓰는 것이 이상이게 이게 내가 살아야 될 이유의 전부가 아닌 것 같은 느낌이요.

그래서 하나님의 지시와 사명을 받아야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지시와 사명 그게 우선이에요. 아까 집사님하고 오면서 차에서 이야기했지만, “목사님, 말씀이 아담보다 먼저지요?” 라는 중요한 말씀을 했습니다. 분명히 말씀이 아담보다 먼저입니다. 그런데 아담이 선악과 따먹었는데 누가 먼저겠어요? 자기 자신이 먼저 됐잖아요. “아담아, 어디 있느냐?” 하니까 단번에 하는 이야기가 “부끄러워서 숨었나이다.” 갑자기 주님보다도 누구한테 관심 있어요? 아예 부끄럽다는 말은 점점 더 자기한테 관심이 쏠린다는 뜻이에요.

수치란, 기어이 자기를 포기 못하겠다는 성향을 말합니다. 그러한 속성을 말합니다. 기어이 나는 나를 포기 못하겠다. 수치를 느낀다는 것은 자기를 감싸는 행위이고 자기를 감추는 행위입니다. 감싸고 감추는 행위지요. 그러니까 이것은 처음에 만든 그 인간 아니거든요. 한 번 정리해 봅시다.

처음의 인간은 말씀이 먼저고 그 다음에 말씀에 의해서 인간이 만들어졌어요. 요한복음1장에 나오지요.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그 말씀이 빛이고 생명인데 그 말씀 우선을 놓쳐버리면 사람은 어두움이요, 죽음이 됩니다. 말씀 없으면 죽음이고 어두움이고 말씀이 있으면 생명이고 빛이고. 주께서 그렇게 모든 걸 그렇게 정해 놓은 걸 뒤늦게 우리 인간이 거기에 대해서 싫어한다, 거부한다, 그게 됩니까? 은혜 받았다고 울고불고하고 크게 느끼는 거 다 좋고 기쁘고 행복함을 느끼는 것은 좋은데 따지고 생각해 보세요. 아주 은혜는 냉철하잖아요. 나보다 말씀이 먼저, 나는 그 뒤에.

말씀에 의해서 만들어짐을 놓쳐버리면 나는 지옥, 어쩌라고? 그게 정해진 건데. 지금 말씀이 앞서지 않고 자기가 앞선 사람은요, 모든 게 지부터 우선이거든요. 천국은 말씀위주로 된 사람만 갈 수 있지 저 강아지는 천국 가기가 힘들지요. 그래서 성경공부란 어떤 의미에서는 아주 냉철한 공부에요. 비정하고 차가운 그러한 공부입니다. 말씀위주에요. 끝. 당황하지 말고 말씀위주로 탁! 끝! 끝난 거예요.

사도는 주님에 의해서 그걸 알게 된 거예요. 주의 사명이 먼저고 자기는 아무것도 아니지요. 그래서 자기 인생은 실패가 없는 거죠. 어떤 지경에 있던지 환란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위협이나 어떤 게 있더라도 자기는 실패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진짜 성도를 가르는 방법으로 환란과 곤고와 핍박과 기근과 위협으로 수시로 이게 들이닥치게 되어있어요. 들이 닥쳐가지고 소위 흔들기를 해 보는 겁니다. 흔들기를 해가지고 뭔가 다시 주님, 주님하다가 자기 위주로 나오면 ‘아이고, 이건 아니었구나!’ 아니었구나는 미리 알지요. 환난 핍박 흔드는데도 불구하고 “이것은 나로 인함이 아니고 주의 뜻에 의함이다.” 하고 오히려 그럴수록 주님이 먼저 된다면 그건 원래 창조한 그 인간입니다. 원래 창조한 그 인간.

그러면 일단은 사도가 실패가 없다니까 사도와 성령 받은 우리도 실패가 없지요. 그럼 실패 없습니다. 이거 하나 아시고 취소되지 않는 우리의 운명, 사명을 줬는데 사명 자체가 실패나 취소가 될 리가 없지요. 심지어 우리로 하여금 어떤 극한에 있다할지라도 그 극한 속에서 취소가 안 됩니다.

자기에 대한 수치심 같은 것은 아직도 자기한테 기대를 갖고 있으니까 수치심이 있는데 내가 나를 보호할 어떤 것도 없다면 수치심도 없는 겁니다. 그러면 그 다음 문제요, 그러면 실패가 없다면 그럼 내용이 뭐냐, 그걸 저는 상호작용이라 했는데 평소에 잘 안 쓰는 것이지만, 오늘 한 번 이야기해 봅시다.

상호작용이라는 것은 뭐냐, 사명 주는 자와 받는 사이에 어떤 상호작용이 있느냐, ①일단 사명 받은 인간의 의사와 의도, 기대, 욕심, 소망 이런 건 다 절단됩니다. 일체 거부당합니다. 백날 화살 쏴봐야 중간에 화살 분질러 버립니다. 기도해봐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잡아당깁니다. 기도내용을 우지직 분질러 버립니다.

“주의 뜻은 어디에 있습니까?” 하는 것은 내 뜻을 가지고 마중을 나가면서 뭔가 다른 뜻에 의해서 내 뜻이 사정없이 우지직 꺾일 때, 그게 주의 뜻이에요. 그게 주의 뜻입니다. 주의 뜻은 뭐냐 하면, 현재 주어진 이 상황에 대해서 자기 나름대로의 납득이 안 되니까 내가 납득되는 대로 일을 시켜달라고 기도하거든요. 기도가 뭡니까? “주여, 이런 일이 왜 일어났습니까? 납득이 안 됩니다. 납득되게 해주옵소서” 주께서 응답은 “납득 안 되는 이유가 니가 욕심이 많아서 니 뜻을 고집하다보니 납득이 안 되는 거야.” 라고 하는 거죠.

하나의 예를 들면, “하나님, 탄수화물도 줄이고 운동 좀 해서 뱃살 빼려고 그렇게 애를 쓰는데 왜 주님께서는 저에게 뱃살이 안 들어가는 저주를 주십니까?” 라고 한다면 주께서는 “내가 언제 니 뱃살 빼라고 창세기 줬고 요한계시록 줬느냐” 말이죠. 관심사 빼서 뭐하는데. 빼면 남보다 이쁘다 하거든요. 이뻐서 뭐할 건데? 이쁘다고 소고기나 사먹겠지. 이뻐서 뭐할 건데. 그건 우리 만족이잖아요. 이쁘다 하는 것은 안 이쁘다는 수치를 감추기 위한 하나의 또한 작전이 된다 말이죠.

사람이 이쁘게 되면 이쁜 자체를 사수하려고 얼마나 애를 썼습니까? 하여튼 이쁜 사람들은 한 짐을 져요. 이쁨을 유지하기 위해서. 그런데 잠 잘 주무시면 이뻐요. 저절로 이뻐요. 자기한테 생각을 안 하면 저절로 이뻐요. 남들이 보기에 참 편해 보이고. 사람이 자기가 이쁠 때는요, 남한테 나보고 이쁘게 해달라는 의도가 눈빛으로 발사가 되거든요. 그러면 상대가 부담스러워요. 만나기 힘들어요. 공주과들 만나기 참 힘들어요. 그런데 그냥 편하게 살게 되면 만나는 사람이 편해요. 자기도 편하고요.

상호작용에 있어서 ②일방적인 지시와 명령을 줍니다. 그게 뭐냐 하면 바로 적어볼게요. 18절에, 어두움에서 그 다음에 뭐로 옮기지요? 빛으로. 야, 사도가 무서운 이야기하네.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자, 이 일을 하기 위해서는 참 어려운 게 뭐냐 하면, 이 세상이 어둡고 이 세상은 사단의 권세에 있다는 것을 증명해야 될 필요가 있어요. 이거 증명하는 방법은 추가적으로 계속해서 주님으로부터 복음과 말씀이 주어지는 겁니다.

사도에게 복음과 말씀이 계속해서 주어지는 것은 이 세상이 어두움이고 이 세상은 사단의 권세에 있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한 말씀이 계속해서 주어지는 겁니다. 그렇다면 사도가 설교자라면 계속해서 아버지로부터 계시를 받으면 뭐라고 하겠습니까? “여러분, 이 교회가 어두움이고 이 교회가 사탄의 권세입니다.” 라고 이야기하겠지요. 이거 듣고 자리에 앉아있을 사람 같으면 대단한 사람입니다. 그 소리 듣고 튀어나갑니다. 튀어나가지요.

왜 튀어나갈까요? 사단의 권세 아니고 어두움이 아니라고 우기기 때문에 자기를 사수하기 위해 튀어나가겠지요. 그리고 난 뒤에 뭐냐 하면, 그것을 가지고 여기에 18절에 보면, “그 눈을 뜨게 하여” 이러지요. 사도의 일은 뭐냐 하면, ‘눈을 뜬 사람 찾기’ 눈 뜬 사람 찾기 게임을 하는 거예요.

사도가 전하는 모든 복음은 “혹시 여기에서 눈 뜬 사람 계세요?”라고 “손을 한 번 들어보세요.” 라고 이야기하면서 복음과 주어진 말씀을 사용하시는 겁니다. “눈 뜨세요.” 가 아니고 “눈 뜬 사람 혹시 계십니까?” 눈 뜨세요, 가 아니고 눈 뜬 사람 혹시 계십니까? 그러니 눈 뜨세요, 도 괜찮아요. “여러분, 눈을 뜨세요.” 라고 한다고 눈을 뜨는 게 아니고 눈 뜨세요, 할 때 이미 눈 뜬 사람만이 눈 뜨세요, 라는 의미를 아는 거예요.

그러면 눈 뜨지도 않으면서 “나, 눈 떴습니다.” 라고 한다면 물어보겠지요. “눈 떴으니까 세상이 어떻게 보입니까?” “세상은 사탄의 권세에 있고 어두움입니다.” “OK, 땡큐!” 이렇게 되지요. 바로 그겁니다. 그러면 사단의 권세에서 어두움에 있다면 본인은 어디에 속합니까? 본인도 이 어두움 사단의 권세에 속해 있어야 되지요. 속해 있어야 상호작용이 되는 거거든요. 아이고, 중요한 말이다.

나는 이미 성령 받아서 어두움에서 사탄에서 벗어났다고 한다면 그 다음부터는 뭐가 끊어져요? 주님으로부터 상호작용이 끊어져버려요. “그래, 니 잘났다 그래. 아이고, 성령 받았어요? 아이고, 그럼 이제 니 맘대로 이제부터 성화의 활동으로 거룩해 보세요. 혼자서.” 제가 그래서 상호작용이 그만큼 중요한 거예요. 한 번 내가 성령 받았기 때문에 벗어났다고 한다면 상호작용이 끊어져버립니다. 사도의 인생이 그랬습니까? 사도가 한 10년 믿고 지가 알아서 성령관리해서 잘 했습니까? 아닙니다. 끝까지 상호작용이 멈추지 않았지요.

상호작용이 주어져야 계속해서 여기서 사명이 주어지게 되고 그래야 사도는 자기 인생에 실패가 없어요. 10년 동안 실패를 했다가 그 다음부터는 예수 믿고 난 뒤에 한 10년 동안 잘 믿어서 그 다음부터는 너무나 자신감이 있어서 상호작용이 끊어버렸더니만 그 다음부터도 역시 잘되더라, 이런 건 없어요.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해서 주님의 도우심, 은혜 그거 없이는 주와 함께하지 아니하면 안 됩니다.

주와 함께 간다는 말은 계속 주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말이고 도움이 필요하다는 말은 이 세상의 사탄의 권세나 어두움의 권세가 계속 사도를 향하여 쥐어박고 있고 공격하고 있고 계속해서 방해공작하고 있다는 거예요. 영적 전쟁을 하고 있는 거예요. 지금. 사도는. 나의 전쟁은 혈과 육이 아니고 바로 공중권세 잡은 자들과 전쟁하고 있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여기서 좀 더 나가보겠습니다. 여러분들이 다 아는 이야기지만. 사단의 권세에서 뭐가 생기느냐 하면, 필드라 하는데 영역, 장(場), 필드 영역이에요. 어떤 영역에 속해요. 영역. 영역이니까 요 지점만 있는 게 아니지요. 전체를 뒤덮는 거예요. 눈이 왔다. 우리 집만 왔다. 이런 거 없어요. 보통 눈이 오면 대전바닥 다 오잖아요. 좁게 보면 대전정도는 다 와요. 우리 집만 눈 왔다! 이건 이상한 거예요. 그건 눈이 아니고 누군가 소금 뿌렸겠지. 사단의 권세가 장을 형성합니다. 한국이 싫다. 나는 미국 갈란다. 미국가면 사탄의 권세 없습니까? 한국서 새는 바가지 미국가면 안 새요? 사단의 권세가 “엄마, 나 취직하면 바르게 살게.” 그 직장에서는 사단의 권세 없어요? 있잖아요. “군에 가면 신앙생활 잘할게.” 군에 가면 없습니까? 더 심하면 심했지.

에덴동산은 이 땅에 없어요. 더 이상 없어요. 쫓겨난 입장에서. 에덴동산 아니면 다 사탄의 권세 아래 있다고 보시면 OK입니다. 청와대 어디 가도 마찬가지고. 소위 국정원 들어가도 마찬가지고. 어디 안전한데 가도 마찬가지고. 사단의 권세는 어떤 지경에도 다 작용합니다. 그것도 모르고 북한에서 남한에 넘어오면 사단의 권세가 없는 줄 알고 있어요. 북한 사람들은 아주 기를 쓰고 중국 브로커한테 돈을 줘가지고 남한으로 오는데 신앙의 자유를 위해서. 한국에 신앙의 자유가 있습니까? 이 세상 어디에도 신앙의 자유는 없습니다. 종교의 자유는 있어요. 그러나 신앙의 자유는 없어요.

왜냐 하면, 신앙 자체가 자유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자유가 없는 곳에 자유가 생기는 것이 그게 신앙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남들은 자유 못할 때, 혼자 자유 할 때 그게 신앙이거든요. 왜 사람은 자유를 못 하는지 알아요? 그것은 사람이 실패를 하면 어쩌노? 하는 것 때문에 오히려 그게 실패가 된다 이 말입니다. 그걸 가지고 뭐라고 하는가 하면, ‘미생’이라고 합니다. 미생이라 하는 것은 바둑에서, 제가 바둑 좀 알거든요. 바둑에서 죽는 것도 아니고 산 것도 아니고 요런 걸 미생이라 해요.

바둑은 돌을 상대방이 하나 놓고 내 하나 놓고 상대방 놓고 내 하나 놓기 때문에 집이 두 개가 있으면 절대로 안 죽어요. 번갈아 하기 때문에 안 죽거든요. 미생이라 하는 것은 인간이 아직도 확실히 믿는 게 없어요. 내가 죽으면 천당 갈지, 지옥 갈지 이렇게 미생적인 존재기 때문에 항상 이것은 실패를 염두에 두고 살아갑니다. 그 인생 자체가 아직 실패 안 봐도 그 자체가 실패에요. 결국 이 실패는 바로 누구의 노예다? 사탄의 권세에 있는 겁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사탄의 권세에서 벗어나게 하지를 않습니다. 사탄의 권세 속에서 자유를 누리게 하지요. 좋은 직장 없습니다. 좋은 가정 없습니다. 팔자 고치기 없습니다. 어떤 환경 속에서도 거기서 잠잘 잘 수 있고 하루에 몇 번씩 웃을 수 있는가, 그게 바로 사탄의 권세를 이긴 주님의 권세입니다. 우리 예수 믿은 사람에게 따로 공동체 만듭시다. 그것은 진짜 마귀가 하는 소리에요. 공동체에 가도 사탄의 권세에요. 없습니다.

사탄의 권세에서 아무도 실패를 두려워하며 죽는 걸 두려워하면서 자유를 누릴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벗어나고 싶어 하는 거예요. 못 벗어나면서 사탄의 권세에서 벗어나고 싶은 상상을 하는 것,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타타타’라고 해요. 이게 불교용어거든요. 김 국한이 부른 노래인데 불교용어입니다. 타타타하는 것은 해탈의 상태입니다. 아무것도 아닌 인생은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니다, 이 말입니다. 아무것도 아님을 알아라.

그러나 사도바울은 아무것도 아니고 싶어도 저 분이 찾아왔는데 왜 아무것도 아니에요? 본인이 도 닦으면 이래요. ‘그래, 모든 것이 사탄의 어두움이야. 세상의 욕심 없이는 안 돼! 차라리 어떻게 할까, 그래 나는 아무것도 아니야. 그러면 해결 됐어!’ 이게 해결된 겁니까? 지가 혼자 입을 통해서 꿈꾸고 있는 꿈의 세계지. 몽상의 세계지. 이게 타타타 몽상의 세계지. 그런 식으로 되는 겁니까? 가사를 한 번 보세요. 타타타. “네가 나를 모르는데 난들 너를 알겠느냐 한 치 앞도 모두 몰라 다 안다면 재미없지 바람이 부는 날은 바람으로 비 오면 비에 젖어 사는 거지 그런 거지” 그 자체가 불교적 성향이 많아요.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돌아가는 그런 거 있어요. 하여튼 불교에는 뭣도 모르면서 자꾸 아는 체 해 싸서.

이 사탄의 세계에서 너무 힘드니까 상상을 하는 거예요. 이게 무슨 세계인가 하면 상상의 세계에요. 상상의 세계. 이게 상상을 해서 종교를 만들거든요. 교회 대부분이 상상의 세계에요. 해탈, 천국, 예수의 나라, 전부다 상상의 세계에요. 실제로 주님이 사명을 준 적이 없으면서 예수를 상상해서 만들어서 주님에게 사랑 받았다고 착각하는 거예요. 그럼 착각인지 어떻게 아느냐, 세상은 나는 사탄의 권세에서 지금도 헤매고 있고 나는 어두움이라는 걸 알면 되는 거예요. 왜? 그렇게 될 때, 그렇게 알려준 그것이 눈뜬 사람에게 이게 보이는 거예요. 지금 제 이야기가 아니고 지금 사도의 고백입니다. 주님 만나고.

지금 주님께서 사도한테 이야기한 거예요. 사도 니한테만 한 게 아니고 사도 너같이 성령 받은 사람은 너와 같은 공통 특징을 갖고 있다는 거예요. 공통적인 의견소통이 되게 했다는 거예요. 주님께서. 그렇게. 현재까지 만날 때, 뭐로 소통 하느냐 하면 바로 이 세상은 어두움이고 사탄의 권세에 있으며 우리를 구원할 것은 누구밖에 없다? 예수님의 십자가 능력밖에 없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2장 2절에 보면,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니가 아무것도 알지 않기를 원하노라, 거기서 동의를 하고 아멘하고 그게 바로 내 이야기네. 이렇게 되게 되면 그것은 바울이나 우리나 같은 형제가 되는 겁니다.

이 세상에 고생 안하고 사는 방법은 없느냐, 그런 것은 없어요. 없고 어디 있더라도 충분히 내 입장에서 허약성을 인정하자 말이죠. 어떻게 구원하는가, 어떻게 구원하는 것은 주께서 알아서 할 문제이고 내가 생각할 것은 나는 사탄의 권세에 눌려있고 짓밟히고 있고 지금도 어두움이 욕하는 욕설을 듣고 있고 내 힘으로는 거기서 백날 기어올라 가봐야 못 올라가요. 어떤 매끈한 표면의 그릇에 개미가 이만큼 올라갔다가 쭐떡 내려오고. 올라갔다가 쭐떡 내려오고 이런 식이에요. 성화했다가 죄 한 번 지으면 쭐떡 내려가고. 선교활동 내려가다가 사기 당하고. 부흥회하고 난 뒤에는 강제 퇴직 당하고. 도대체 이렇게 타넘을 수 있는 능력이 우리한테는 아예 안 주어졌다는 것에 표 한 표, 투표합시다. 우리.

아무리 몸부림쳐도 기도원에서 기도해도 이걸 넘어설 수가 없어요. 그냥 있으세요. 주께서 구원하십니다. “베드로야, 니 목숨 바치고 나한테 따라오지 마! 니가 있으면 내가 가서 건져줄게.” 그게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지난 낮에 이야기했잖아요. 많이 멈춘 상태에서 비로소 보이는 상태가 뭐냐, 그게 믿음의 상태입니다. 말을 멈췄을 때.

말한다는 것은 일종의 몸부림이고 뭐든 애쓰거든요. 그런데 그 힘이 나중에 쪽 빠져가지고 ‘아이고, 이놈의 팔자, 이래도 안 되고 저래도 안 되고 나는 포기했어. 그런데 이런 인간을 주께서 건져내신다.’ 어떻게? 그건 몰라요. 주의 능력은 우리의 손에 잡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그건 모르는데 어쨌든 그 피가 내 죄를 용서한다는 겁니다. 그게 믿어진다는 거예요. 그게 성령의 역사입니다.

믿는 사람한테는 전혀 어렵지 않아요. 말로 설명 안 되는데 참, 사람한테 참 좋은 건데, 말로 설명할 수가 없네. 진짜 좋은 건데. 사람한테 참 좋은 건데 말로 설명 안 되잖아요. 그래서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두렵고 떨리노라, 말로 될까봐 겁난다. 이건 말로 되는 것이 아니고 성령의 나타남으로 되는 건데, 이걸 어떻게 말로 때우느냐 말이죠. 말로 때울 문제가 아니다 말이죠. 그러니까 그 말은 뭡니까? “너희 중에 눈 뜬 사람 누구세요?” 그거 이야기합니다.

제가 가끔 그런 일이 있는데, 전화번호를 누르다 보면 엉뚱한 데가 걸려요. “여보세요. 거기 최 집사님 댁입니까?” “전화 잘못 걸었습니다.” 이러잖아요. 그러면 끊으면 되는 거예요. “이 세상은 사탄의 권세고 예수님을 보낸 것은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하면 “아, 전화 잘못 했습니다.” 하면 끊으면 되는 거예요. 전도한다고 설치지 말고. “예, 예, 제가 못 알아보고 사탄의 지옥 가는 사람인 줄 모르고 잘못 걸었습니다.” 끊으면 된다 말이죠. 그게 강단에서 설교해도 마찬가지에요. 그 사람들을 설득할 이유가 없어요. 다만, 목사님 본인이 “설교가 복음적으로 아닙니다.” 이런 건 지적 받아야 되지만, “성경적으로 맞고 복음적으로 맞습니다. 그런데 노골적으로 그런 이야기해서는 안 되지요.” 라는 말에 대해서는 우리가 공격 받을 필요가 없어요.

다시 할게요. 자, 여기에 있는 우리가 갇혀있지요. 자유가 없지요. 자유가 없는데, 이상하게 자유로워요. 이건 누구 능력입니까? 이미 이곳에서 벗어난 분이 나를 찾아왔다는 증거입니다. 그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바로 23절입니다. “곧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실 것과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다시 살아나사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빛을 선전하시리라 함이니이다 하니라” 되어있지요. 주님께서 우리가 사는 이 땅에 이 대전 밑바닥에 이미 오셨어요. 이미 오셨다고요.

오셔놓고 뭘 경험했습니까? 사단의 권세를 이미 경험했지요. 그리고 예수님 빼놓고 어느 누구도 여기서 벗어난 자 있습니까? 없습니까? 아무도 없지요. 앞으로도 없어요. 아담의 후손이기 때문에 앞으로도 아무도 자력으로 이 사탄의 권세를 예수님 빼놓고 이겨낼 사람 없습니다. 누구도 마찬가지에요. 마르다 마리아 오빠가 지가 알아서 나흘 만에 걸어서 나왔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이 불러줬잖아요.

아무도 자기 힘으로 살아날 수 없습니다. 아무도 없는데 우리는 빛 가운데 있다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등장했다. 이건 어떤 상호작용 때문에 그래요? 자기 힘으로 어두움에서 못 벗어나고 어두움 속에 있어야 당연한데 그게 논리상 맞는 이야기인데 나는 빛이라고 외치는 어떤 성도가 등장한다면 이 사태를 어떻게 설명할 것이냐 말이죠. 이것은 바로 예수님이 그 사람에게 찾아왔다는 그 외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내가 기도로 그렇게 됐다든지 헌금해서 그렇게 됐다면 이건 사기꾼이에요. 그런데 나도 몰라. 내가 어두움에 있다는 것도 사실이고 어두움에서 못 벗어나는 것도 사실인데 내가 빛의 자녀가 됐다는 그것도 또한 사실이다. 이걸 어떻게 설명을 해요.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나의 성이 이씨잖아요. “당신말대로 나는 최씨는 아니야.” “그리고 당신 말대로 나는 김씨는 아닌데 내가 이씨됐다.”는 것은 나로서는 설명할 수가 없어요. 너희들이 원하는 게 있는데 “맞아, 너희들이 원하는 대로 나도 김씨되고 최씨 되는 게 맞는데, 나도 그런 줄 아는데 누가 나로 하여금 이씨되게 했다면 내가 설명할 수 없고 다만 주께서 그렇게 하셨다는 외에는 주님을 증언하는 외에는 달리 어떻게 설명할 길이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믿음은 말로 설명이 안 되는 거예요. 말로 안 되려면 말하는 자체가 믿음을 줄 수가 없는 겁니다. 백날 설교 듣고 강의 들어도 믿음이 생기는 게 아니에요. 이게. 기도한다는 상호작용으로 믿음이 생기는 게 아닙니다. 상호작용은 오직 성경에서는 뭐냐, 성령 곧 예수님의 영이 찾아오는 것 외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어요.

주님의 영이 찾아왔다는 말은 우리 힘으로 된다? 안 된다? 우리 힘으로 때려죽여도 안 된다는 거예요. 안 되니까 손을 떼라고 한 거예요. 인간들아, 손을 떼라, 그것 때문에 한 거예요. 인생에서 손을 뗍시다. 우리가. 앞으로 결혼식 할 때 비가 오고 갑자기 폭설이 내려가지고 다 끊기고 주례사도 오다가 다 끊기고..., 다 맡깁시다. 그냥.

주께서 성령을 줬다는 것은요, 너를 통해서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에서 하나님께로 누굴 전도하기 위해서 우리를 그렇게 사명을 줬잖아요. 그 전도를 내가 못한다고 제가 이 말을 하고 있는 거예요. 우리는 전도도 못하고 헌금도 못하고 아무것도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니까 우리는 뭐다? 우리는 자유롭다 이 말입니다. 나 스스로 주의 말씀 못 지키지요. 못 지키니까 자유로운 거예요. 자유로우니까 이걸 세자로 뭡니까? 막산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어쨌든 이래나 저래나 내가 나를 못 고치는데 뭐 될 리가 있습니까? 지금 사도바울은 자유를 외치고 있는 겁니다. “나? 나 왜 이런지 나 몰라. 다만 그 때 주님께서 오셔가지고 너희들이 생각하는 이미 돌아가신 그 분이야. 돌아가신 그 분이 살아나셔서 나에게 이런 소식을 전하는 걸 전달 받았을 뿐인데 어쩌라고? 그걸 어쩌라고? 그 분은 죽었다가 살아나셔가지고 이렇게 빛을 선전하라고 시키시는데.” 시키니까 “아그립바 왕이여, 내가 당신 앞에 서서 나한테 일어났던 그 이야기를 지금 듣습니다.”

그런데 여기 21절에 보면, 나는 그냥 전할 뿐인데, 유대인들이 나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 때 22절에 하는 말이 “내가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오늘날 까지 이렇게 높고 낮은 사람들 (이 높고 낮은 사람들을 합쳐서 모든 사람들이라고 하는 거예요. 직책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을 얻으리라, 이 말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는다는 뜻이 아니고 어떤 직책에 있던 상관없이 구원이 주어진다, 이런 뜻입니다. 디모데전서 모든 사람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는 것도 그런 뜻이에요.) 앞에서 증거 하는 것은 선지자들과 모세가 반드시 되리라고 말한 것 밖에 없다.

다시 강의 처음으로 돌아가서 말씀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우리가 있습니다. 그게 창조의 순서에요. 말씀이 먼저 있고. 예수님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우리가 있는 거예요. 그러니 얼마나 편합니까? 이 집의 강아지도 혼자 있으면 불안할 거예요. 그런데 주인이 먼저 있고 내가 그 집 주인의 복을 받는 내 강아지가 있으니까 강아지는 편안하게 꼬리를 빌빌 꼬면서 오뉴월의 개처럼 자고 있는 거예요. 편안하니까.

그래서 나를 이렇게 만든 분이 따로 있기에 이악한 세상에서, 이 어두움의 권세 속에서도 편안하게 지낼 수가 있는 겁니다. 아무것도 내가 나한테 나를 변화시킬 능력이 나한테 없으니까 차라리 그냥 되는 대로 맡기면 되는 거예요. 제가 광주에서 3종 세트 이야기했지요. 복음의 3종 세트. 용서하지 말고 구제하지 말고 막살고.

자, 그렇게 할 때 그들이 사도의 말을 제대로 알아들었어요? 못 알아들었어요? 제대로 알아들었어요. 왜냐 하면, 24절에 “니가 미쳤다. 크레이지 보이! 니가 미쳤구나!” 그러니까 그들이 사도의 말을 제대로 알아들은 거예요. 그들이 사도보고 어디서 미쳤다는 소리를 하겠어요?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요 소리 듣고 미쳤다고 했지요. 왜냐 하면,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에요? 안 믿는 사람이에요? 지금 믿고 있지요. 믿고 있는데 사도는 하나님을 믿고 있는 그 교회를 뭐로 봤다? 하나님을 믿는 단체가 아니고 사탄을 섬기는 단체로 본 거예요. 본의 아니게 사단을 신으로 섬기는 거예요. 사단을 뭐로 본다? 여호와의 이름으로 사단을 섬기고 있는 집단으로 본 겁니다.

그러니 이 소리를 듣고 그들이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요. 니가 미쳤구나. 그런데 그들이 미쳤다고 한다면 뭘 해명해야 돼요? 사도가 정말 미쳤고 자기들이 옳다면 어떤 요인을 공격해야 되느냐 하면, 바로 진짜로 예수란 자가 죽었다가 사흘 만에 진짜로 부활했느냐, 그 문제가 걸리지요.

결국 성경 전체의 내용에 가장 유일한 증거가 있다면 그건 뭐냐 하면, 죽었다가 부활했다는 겁니다. 죽었다가 부활한 거. 그래서 사도는 그걸 복음이라 하잖아요. 죽었다가 부활했다 말이죠. 모든 하나님의 의, 모든 완성, 마지막의 천국, 지옥의 모든 근거는 하나밖에 없다. 주님이 죽었다가 살아남으로서 그것이 확실한 현실로 확증이 된다고 보지요.

그럼 마귀 편에서 뭐만 공격하면 돼요? 예수님은 죽은 것은 맞는데, 뭐는 아니다? 살아난 건 아니다. 그것만 증명해 내면 사단의 권세가 이기는 셈이 되지요. 그렇지요? 그러면 예수님이 안 살아나게 되면 죽게 되면 모든 인간 가운데 특출한 인간 없지요? 왜? 모든 인간은 다 죽으면 죽음으로 끝나기 때문에. 그러면 그런 인간에서 특출하다는 것은 없고 서로 머리 맞대서 좋은 의견 있으면 좋은 의견과 종합해보면 하나의 대체 진리가 되겠지요. 지금 그렇게 살고 싶은 거예요. 그렇게.

그러면 그 지혜를 끄집어내면 지혜를 끄집어낸 사람은 다 자기 잘난 존재가 되겠지요. 결국은 사도가 죽었다가 부활했다는 그 한 소리 때문에 잘난 존재가 어떻게 돼요? 졸지에. 마귀 존재에 속하지요.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자기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 누구를 떠밀어야 돼요? 사도를 떠밀겠지요. 그게 사도를 떠미는 것이 아니고 사도와 함께 있는 예수님을 또다시 떠민 게 돼요. 그게 뭐냐, 십자가의 사건의 반복입니다. 성도의 가는 길이 이겁니다.

본인이 순교한다고 설치지 마세요. 그건 순교가 아니고 하나의 연출이고 연기에 불과하니까. 자기 기분이고. 실제로는 성도 같으면 또 다시 십자가에 뭔가 미쳤다라든지 안 그러면 그렇게 과격하지는 않겠지만, 자기 나름대로의 복음을 안 들은 걸로 쳐가지고 복음에서 귀나 눈을 비켜서 내가 살아야 될 자기 가치거리를 따로 장만할 때, 그게 바로 복음을 떠미는 거고 예수님을 떠미는 행위입니다.

예를 들면, “나는 비록 예수는 안 믿지만, 나는 경찰 공무원으로서의 나는 지금 이 지역에서 서장님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쩌라고?” “경찰 서장 노력하고 그동안 출세했네. 어쩌라고? 그게 어쩌라고?” 경찰서장되면 안 죽습니까? 부처는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았다. 우리는 어쩌라고? 그래서 뭘 어쩌라고? 딱 한 가지,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한 거예요. 12제자도 마찬가지에요. 12제자가 예수님의 돌아가시기 까지는 자기는 믿는다고 여겼습니다. 막상 주께서 죽고 나니까 자기 본색 다 드러났지요. 언제 사도들이 눈을 떴습니까? 성령이 왔지요. 성령이 왔을 때는 예수님의 부활의 영이 찾아왔을 때, 그게 오순절 날 왔을 때, 그들은 나는 지금까지 살다가 죽는 것에서 끝났는데 이제는 죽었다가 사흘 만에 살아난 것부터 다시 이야기가 내 인생의 이야기가 다시 쓰여진다는 사실을 그들은 알게 된 겁니다.

예수님이 죽었다가 부활했기에 나는 이제부터 산사람으로서 죽어야 될 세계에서 죽어가고 있는 겁니다. 이미 산 사람으로서 다 같이 죽는 세계에 아주 죽어가고 있으면서 가볍게 자유롭게 막 살면서 살 수 있는 거예요. 막 살아도 펄펄펄 주님의 은혜만 막 튀어나오지요. 막 살아도. 그리스도의 능력이 십자가의 구원의 능력이 막 나오는 거예요.

언제 그게 막히느냐 하면, 따로 내 자랑하고 싶고 내가 살 이유를 따로 챙기게 되면 그게 퍽퍽 숨이 막힙니다. 우리 엉덩이로 그 구멍을 막는 셈이 돼요. 원천을. 엉덩이를 비켜주세요. 십자가 구멍에서 막 나오도록. 나 같은 인간도 이렇게 영생 얻고 천국 간다고. “니 경찰서장 돼도 못 가!” “나는 경찰서장 안 되어도 나는 갈수 있다.” 고. 그게 바로 사도의 자유함입니다. 아시겠지요? 진도 나갑시다.

결국 사도가 그렇게 성령에 의해서 설교해도 듣는 소리는 무슨 소리였습니까? “어이구, 회개합니다. 어이구, 우리가 잘못 되었습니다. 성령께서 하셨네.” 그렇게 나올 줄 알았지요? 나오는 답변은 뭐였습니까? 간단하지요. 유 아 크레이지. 유 크레이지. 니가 미쳤구나! 이건 누가 듣던 이야기입니까? 예수님도 들었던 이야기이죠. 니가 미쳤도다. 니가 사탄의 고수구나! 그 이야기를 방금 누가 듣습니까? 세상에 사도바울이 들을 줄이야. 이제 또 누가 들어요? 우리들이 또 듣고 있습니다. 십자가 밑에서 저희끼리 뒷다마하면서.

아, 참 이거 미쳤다하는 소리 들을 때, 로또 당첨되신 줄 아시기 바랍니다. 이게 아무나 들을 소리가 아닙니다. 그래서 베드로전서에 보면 니가 고난을 받되 다른 것으로 고난을 받지 말고 오직 복음으로 고난 받아라. 그게 바로 니가 영생으로 통하는 길 중에 가고 있다는 증거다. 주님이 당했던 소리를 우리가 듣게 되는 겁니다. 그럴 때 이 세상은 사탄의 권세에 속했다는 것이 더욱더 분명하고 어두움이라는 것이 분명하지요. 우리가 빛이라는 것이 확연하게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자, 25절 보세요. “바울이 가로되 베스도 각하여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정신 차린 말을 하나이다. 왕께서는 이 일을 아시기로 내가 왕께 담대히 말하노니 이 일에 하나라도 아시지 못함이 없는 줄 믿나이다.” 왜냐 하면 이 일은 십자가에 예수님이 죽었던 사건이 얼마 전에 있었기 때문에 다 아는 이야기잖아. 라고 한 거예요. 지금 아그립바왕하고 베스도가 같이 있는 거예요. 아그립바왕은 유대인의 왕이고 베스도는 총독이고 총독하고 같이 재판받는 겁니다.

이걸 봐서 사도바울도 지금 예수님이 당했던 그러한 것이 반복되는 거예요. 그래서 성령은 예수님의 일대기를 성도 안에서 반복하는 겁니다. 반복을 해줘야 예수님의 믿음과 예수님의 소망과 예수님의 사랑이 그대로 우리에게 계속해서 상호작용에 의해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거예요. 자, 조금만 더 해봅시다.

27,28절, “아그립바왕이여 선지자를 믿으시나이까 믿으시는 줄 아나이다 아그립바가 바울더러 이르되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 여기 그리스도인이지요. 그리스도인. 그러면 그리스도인은 여기 헬라인입니까? 유대인입니까? 이방인입니까? 제3의 종족이죠. 그리스도인이라 하는 것은 이것은 기존에 있는 어떤 혈통에 관한 아버지의 어떤 혈통에 관한 것이 아니고 육이 아니고 영에 의해서 그리스도가 죽었다가 부활했던 그 일로 인하여 주변에서 그렇게 조성해준 새로운 종족이 그리스도인이라 등장하는 겁니다.

그리스도 때문에 사는 존재들 29절, “바울이 가로되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 뿐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노이다 하니라” 자, 그러면 아그립바왕이 믿었어요? 안 믿었어요? 지금 아그립바왕의 자리가 무슨 자리인가 하면, 예수님 당시에 본디오 빌라도 자리이죠. 그 본디오 빌라도 자기 아내는 어땠습니까? 꿈자리가 사납다 했지요. 그리고 본디오 빌라도는 그 말을 무시하지 않고 귀담아 듣고 세숫대야에 손을 넣으면서 어떻게든 예수를 살려내려고 누구를 대체했습니까? 바나바라는 사람을 대체해가지고 설마 착한 일 많이 한 예수는 풀어주겠지, 라고 꼼수를 썼는데 그게 다 실패로 끝났지요.

그러면 묻습니다. 이 아그립바왕이나 베스도나 빌라도는 결국은 본인이 어떻게 결정할 문제가 아니고 본인의 자리와 예수님의 살아계신 그 자리와 대칭이 되고 대립이 되는 자리에 그들이 놓여있지요. 그러니까 이게 뭐냐 하면, 권세가 되는 거예요. 권세. 이들이 개인적으로 믿고 싶어도 “믿습니다.” 못 해요. 왜? 자기 권세라는 자리가 자기 발목을 잡아요. 그러니 인간이 참 재수 있으려면 창기나 세리로 되어있으면 참 좋겠어요. 권세 있다는 그 자체가 점점 더 난처하게 만들어버리는 거예요. 난처하게.

평신도는 복음을 받아들이는데 목사는 안 되는 거예요. 이유가 뭡니까? 정통 개혁주의라고 한 목사이기 때문에. 그래서 항상 자아는 찢어져야 되고 이걸로 마치겠습니다. 처음 태어난 것처럼 이 세상에 처음 태어난 것처럼. 신생아죠. 처음 태어났을 때 전부 다 하나님 은혜가 있지요.

그럼 처음 태어났을 때 어떻게 처음 태어나느냐 하면, 이 세상 사람이 처음 태어나는 게 아니고 제 3의 존재, 그리스도인으로 날마다 새롭게 처음 태어나고 그걸 제가 안양에서 예를 들었는데, 여기 못이 있고 못을 A 란 지점에서 B란 지점으로 옮길 때에 A란 지점은 어떻게 하면 A에서 B로 가고 싶어 하는데 못이기 때문에 안 옮겨지는 거예요. 그럴 때 지남철이 있어가지고 S극 N극해서 딱 붙어가지고 옮길 때, 못이 A에서 B로 옮겨가는 걸 원하겠어요? 아니면 더 이상 B는 잊어버리고 지남철과 붙어있는 걸 원하겠어요? 붙어있는 걸 원하지요.

어디에 가도 전에는 A에 있을 때는 B가 좋았는데 이제는 붙어보니까 주와 함께 있는 것이 미국가나 브라질가나 어디에 가도 주와 함께 있으면 신생아입니다. 늘 처음 태어나는 겁니다. 주께서 그리스도인으로 매일같이 태어나게 하시는 거예요.

인터넷에 보면 저를 욕하는 데가 있어요. 욕하는 곳이 있어요. 욕할 때 뭐라고 욕하느냐 하면, 이 근호 목사는 날마다 태어난다고 이야기했다. 날마다 태어난다는 거예요. 성경 본문에 보면 날마다 죽고 다시 태어난다는 그 대목을 보고 한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 사람은 고린도후서4장을 몰라요.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이걸 안 믿는 겁니다. 성경 본문이 그런 게 있는 줄 모르고. 자기는 못 들어봤으니까 무조건 내 말을 미쳤다고 하는 거예요. 쉽게 말해서 이 근호 미쳤다, 그 이야기죠.

그 사람은 A라는 나를 B로 옮기고 싶은 거예요. 그러면 그것은 망상이고 주와 함께 있으면 어디를 가도 이미 사도바울처럼 주님의 백성이 되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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