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513b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13-청교도신학 (강의:이근호 목사)
네 번째에 보면 창조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무에서 창조했고 지으신 것이 다 선하다고 했고. 어거스틴을 따라서. 지으신 것이 다 선해요? 악마가 선합니까? 이단이 선해요? 부자 청년이 예수님에게 왔을 때 선한 선생님이라고 했잖아요. 이미 찾아올 때부터 선함과 악함을 본인들이 구분하고 온 거예요. 다른 사람은 선하지 않는데 당신은 선합니다. 그리고 이야기하기를 내가 어떻게 하면 당신처럼 영생을 얻을 수 있느냐고 할 때 그런 아이디어를 갖고 찾아온 본인이 악하다고 생각을 해본 적이 없는 거예요. 모든 것이 선하다고 고백한 그것이 악이라고 생각해본 적 있습니까? 그렇게 생각해야 돼요. 지금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서 모든 게 선하다고 여기는 그 자체가 악에서 나온 생각이라는 것을 생각해보자.
하나님이 선하다. 맞잖아요. 신약성경에 하나님이 선하다, 예수님이 선하다고 말할 수 있는 자격이 안 됩니다. 왜냐 하면 우리는 그리스도 밖에 있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은 그리스도 밖에서는 어떤 소리해도 악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선하다는 것은 뭐냐 하면, 뭐가 여기 있어서 선한 것이 아니고 선이 방출돼야 되고 그냥 있음에 선함이 아니고 어떤 활동성, 기능성으로 우리에게 찾아들 때 선하다고 할 수 있어요. 그렇게 되면 우리는 그 앞에서 뭐가 됩니까? 우리가 악하구나.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보여주기 전까지는 성령 없는 상태에서 신은 선하고, 예수님은 선하고, 내가 선하다는 모든 것이 악이라는 것을 차후로 고백하게 돼있습니다. 그 고백이 선한 거예요.
누가복음 18장에서 세리가,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했거든요. 주께서는 이걸 뭉쳐서 의인이라고 한 거예요. 죄가 의라는 말이 아니고, 나는 죄인이라고 한 것이 의인이라는 거예요. 그럼 나는 죄인이라고 하면 착한 일입니까? 이건 착한 일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의가 돌출된 거예요. 하나님의 의가 그 죄인에게 퍼부어진 거란 말이죠. 뭐든 이렇게 보면 돼요. 그리스도가 하신 것, 그리스도가 십자가 능력으로 왔을 때 그것만 의가 되고 선이 되는 거예요. 존재적으로 선이다, 악이라는 그 자체가 선악과 따먹은 티를 내기 때문에 악한 것이 된다니까요.
이 말은 더 나아가서 우리 교회는 복음을 고백하기 때문에 선한 교회라고 하면 안 돼요. 왜냐하면 인간의 모든 것은 시공간의 의식은 항상 과거가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지난 것을 과거로 인식하는 현재로 보거든요. 과거를 보고 하다보니까 하나님, 예수님도 나의 과거의 산물이 돼버려요. 그리고 내일 되면 지금의 고백이 과거가 돼버리고. 과거는 없는 거예요.
따라서 하나님의 의와 선을 내 손에 소유할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러면 내가 소유 못하면 어떻게 되느냐? 내가 소유 안 해도 주께서 소유케 함으로 말미암아 내가 기껏 생각하는 것이 내 자랑밖에 안 나온다고 고백하는, 나는 죄인이라는 고백이 주의 성령에서 나올 때 그것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의가 되고 구원받은 성도가 되는 겁니다.
이 생각이 어렵지 않아요. 나로부터 출발하면 어려워요. 내 바깥에 주님이 부활해 계시고 주님이 나에게 쏘아댈 때 이렇게 보면 전혀 어렵지 않습니다. 목사가 교인들을 가르치려고 하면 교인은 힘들어요. 그런데 주께서 밀어붙여서 고백한 성도 같으면 목사는 하나도 신경 쓸 것도 없어요. 왜? 목사가 손대기 전에 먼저 주님이 손대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교회 오셨습니까? 주께서 보내주신 거예요. 삐졌습니까? 주께서 삐지게 하신 거예요. 목사가 신경 쓸 게 아니라니까요. 교인이 당신은 이단이라고 한 소리도 주님이 하셨다고 믿어버리면 목사한테 아무 문제없는데 “내가 실컷 가르쳤는데 이제 와서 나를 배신 해.” 이러면 목사 본인이 힘들다니까. 본인이 믿음 없는 거예요.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인데 지 인생 왜 지가 관리해요.
청교도운동은 정치운동이지요. 청교도운동이라는 게 없어요. 없는 걸 자꾸 들춘다는 것은 과거가 그리워서 하는 거예요. 지금의 한국교회가 과거가 그리워서. 너무 섞었으니까 청교도로 돌아가자. 가봤자 천주교한테 핍박받고 돌아가야 돼요. 핍박 안 받으면 청교도로 못 돌아가요.
네 번째 창조에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서는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줬다고 자유의지를 인정합니다. 그 의지로 하나님의 일을 성취한다고 돼있고.
그 다음에 5장에 섭리에 대해서 인간을 제2의 원인이라고 보는 거예요. 이것은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에서 나온 거지요. 제1 원인은 하나님이고, 제2 원인은 인간 또는 피조물, 인간이라고 보는 거예요. 제가 매직을 공중으로 던졌다가 받았다. 이게 왜 움직였지요? 제2 원인은 내가 자유의지로 던지고 싶어서 던졌고, 그것을 받쳐주는 제1 원인은 주께서 하도록 허락했기 때문에 했다는 말입니다.
이게 복음적입니까? 이것은 바리새인도 이렇게 하겠다. 바리새인들이 이 이야기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였다면 예수님이 그 이야기에 대해서 동의하시겠습니까? “그래 네 말이 맞아. 제2 원인이고, 하나님은 제1 원인이다.” 이렇게 이야기합니까? 회개나 하라고 하시겠지요.
제1 원인, 제2 원인을 구분하는 이유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의 일은 측량할 수 없다고 이야기하면서도 측량 가능한 일부를 자기가 확보하겠다는 거예요. 그런데 이것이 얼마나 위험한 발상인지 그림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해운대로 와야 될 차가 광안대교로 갔을 때에 운전을 피곤하게 한 것은 제2 원인이고, 하나님이 그렇게 하게 하셨기 때문에 제1 원인이고. 그럼 결과적으로 짜증낼 일이 없네. 그렇다면 범사에 감사해야 되겠지요. 그런데 이게 만약에 범사에 감사가 된다면 제1 원인과 제2 원인이 플러스 되어서 감사가 나왔잖아요. 그럼 다음 날에 올 때도 또 돌아와야 돼요. 감사 또 나오게.
사도 바울이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하니까 바리새인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러면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해서 우리가 더욱 더 죄를 지어야 되겠네.” 하는 발상이 바로 제1 원인과 제2 원인을 결합을 시킨 것이 그 발상이에요. 우리가 어떤 죄를 짓게 되면, “죄 지었어요? 용서해줄게.” 이러면 갑자기 없는 용서가 발상되면서 “하나님이여, 감사합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니까 영광이 된다는 사고방식이냐?”라고 바리새인이 사도 바울에게 물었던 거예요. 로마서 3장과 6장에서.
뭐가 문제냐 하면, 지금 운전자가 길을 잘못 간 게 운전자 잘못이 아니고 옆에서 네비했던 분의 잘못이었고, 네비했던 그분의 잘못도 아니고 그분과 결혼한 사모님도 문제가 돼요. 결혼 안 했으면 그런 잘못이 없었을 거고.
제 말은 세상의 모든 것이 서로 원인과 결과고 얽어있는데 우리는 일부만 빼서 울타리를 친 게 문제가 된 거예요. 울타리를 치면 최선을 다했으니까 나는 죄 짓지 않았다는 발상이 나오는 겁니다. “하나님이여, 제가 하는 헌금은 성령에 의해서 하는 헌금이기 때문에 이것만은 죄가 아닙니다.”라는 식의 사고방식이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헌금하면서 자기가 알고 있던 관계만 따져보니까 별 문제가 없으니까
그런데 세상의 모든 변화를 읽었다고 칩시다. 돈 한 푼 버는데 온갖 비리와 뇌물과 모든 악습과 그리고 이웃을 배제한 채 행동했던 대가가 지금 돈이 나왔고 그 돈의 일부로 헌금한다면 그것이 창기가 바친 헌금이 아니라고 주께서 할 수 있겠어요? 없지요. “네가 돈 버는데 이러저러한 것을 고려했나?” “안 했습니다.” “그러면 네가 최선을 다했다고 말하면 안 되지. 그것이 최선이 될지, 최악이 될지 네가 모르잖아.” 어떤 행동을 해도 이것만은 착하다고 할 수 없어요. 왜? 세상의 모든 변화를 다 읽을 수 없기 때문에.
산 속에서 도 닦다 와서 그냥 길 건너보세요. 벌금 오만 원 뭅니다. 자기는 법이 그렇게 바뀐지 몰랐어요. 십년 만에 산에서 내려와서 지하철에서 담배 피울 때 실내에서 담배 못 피우는 게 그 전에는 없었거든요. 몰랐거든요. 모르면 선입니까? 모르면 해도 돼요?
한나 아렌트라는 유명한 여자 철학자가 이런 이야기했어요([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오백 만의 유대인이 죽었잖아요. 이 유대인 처형의 최고책임자인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을 보면서 이 사람은 아무리 봐도 악한 일을 할 사람이 아니다. 그런데 왜 오백 만을 죽였느냐? 자기는 관료로서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다. 악해서가 아니라 그래야 나라가 되거든요. 그 사람은 착해서 구원받습니까, 어떻습니까? 한나 아렌트는 그 사람을 욕할 수 없다는 거예요. 우리는 직장에서 충실하게 시킨 대로 하잖아요. 오백 만 안 죽였다고 우리는 착한 사람 됩니까?
이게 칼빈의 [기독교강요]에서도 고민거리가 됐어요. 그래서 칼빈은 나눴어요. 악한 것과 선한 것과 악하지도 선하지도 않는 그 중간도 있다는 겁니다. 그 중간이라는 것이 시대에 따라서 상황 따라서 중간 지형이 달라지는데? 그때는 어떻게 할 건데. 북한의 중간 지형과 남쪽의 중간 지형이 달라요. 북한은 어버이 수령 안 부르면 죽습니다.
제1 원인, 제2 원인 따지는 것은 이런 뜻이에요. 세상만사가 주의 주권 아래 있지만 그래도 우리 나름대로 착한 일은 포기하지 말아야지. 그래야 청교도, 퓨리턴, 깨끗한 선한 생활이 확보가 된다는 겁니다. 모든 청교도 책들이 다 그래요. 하나님은 하나님대로 하면서도 결국 노리는 것은 나는 착해질 수 있다는 거예요. 나는 착한 일하기 때문에 성령 받은 사람 맞고 그렇기 때문에 누가 뭐래도 구원받았고 이렇게 착한 일한 사람끼리 모이면 청교도 교회만큼은 이상적인 합당한 교회다. 이게 얼마나 정치적입니까? 집단적이에요. 이게 사건이 아니고 존재를 소유하려는 존재를 믿는 거예요. 날마다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존재, 고정된 것, 절대적인 것. 선악과 따먹은 티입니다.
6번, 죄가 유전한다는 겁니다. 죄가 유전한다? 죄인이 유전하겠지요. 우리가 태어나면서 죄인이기에. 죄를 유전하지는 않잖아요. 유전이란 말은 이쪽에서 이쪽으로 전달되는 걸 말하잖아요. 그런데 최초부터 죄가 있다면 전달하고 말고 할 게 없지요. 항아리 안에 구슬 열 개 넣으면 구슬이 유전합니까? 항아리에 열 개 넣고, 다음에 다섯 개 넣고, 세 개 넣고, 다음에 스무 개 넣으면 새로 들어온 것은 유전된 거예요? 외부에서 누가 집어넣어준 거잖아요.
에서와 야곱이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하나님께서 하나는 사랑하고 하나는 미워하기로 예정돼있지요. 그러면 에서와 야곱은 왜 태어났습니까? 그것은 주께서 이미 지정된 사람으로 집어넣어준 거잖아요. 에서의 부모는 엄마는 리브가고 아빠는 이삭이거든요. 리브가가 불임여성이에요. 자식이 없다니까요. 무슨 말이냐 하면, 선조가 먼저 있고 후손이 나중에 있는 게 아니고 후손을 위하여 선조가 먼저 있다고 생각해봅시다. 어려운 말이다. 세례 요한이, 그분이 나보다 먼저 온 것은 내 뒤에 오시는 분이 먼저 있다는 이 말을 하고자 하는 겁니다.
우리는 태어났다고 해서 세상에서 나중에 존재한 것 맞아요. 하늘나라도 그러냐 이 말입니다. 아브라함이 먼저입니까? 아브라함 자손이 먼저입니까? 갈라디아서에서 아브라함 자손이 먼저 있지요. 예수님이 그 점을 바리새인에게 한 겁니다. 누가 먼저 있었느냐 이 말입니다. 자손이 선조보다 먼저 있는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사람보다 먼저 있었던 거예요.
죄가 유전되는 것이 아니고 죄인이 그냥 생산, 등장하는 겁니다. 부모 죄를 자식이 이어받는 것이 아니고 모든 사람은 죄 아래서, 아담의 죄 아래서. 아담이 먼저가 아니고 예수님이 먼저 있었거든요. 그래서 아담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다. 맞잖아요. 어떤 모형이냐? 아담 안에서 죄가 왕 노릇한다. 예수님은 의가 왕 노릇하고. 아담에서 누가 태어나든 아담과 선조에 관한 사적인 문제가 아니고 집단적인 문제입니다. 개인적으로 따질 문제가 아니에요.
구슬이 열 개 있는데 우리끼리 유전시켜서 열한 번째 구슬 나온 게 아니고 바깥에서 뚜껑 열고 누가 던져 넣으면, “똑같은 구슬 또 들어왔네.” 이렇게 되는 겁니다. 똑같은 죄가 또 들어온 거예요. 유전이라는 것은 어거스틴의 한계인데 그걸 그대로 인용했어요.
일곱 번째, 사람과 맺은 하나님의 계약에서 처음에는 행위계약이라고 했어요. 계약에 무슨 행위가 들어갑니까? 하나님과 인간의 계약은 행위계약이 아니에요. 왜냐하면 그 계약의 원천은 인간을 배제한 계약입니다. 성부와 성자 사이의 계약은 행위계약이 아닙니다. 그럼 뭐냐? 그냥 계약이죠. 행위란 말을 집어넣은 이유가 뭐냐? 성부와 성자 행위 속에 인간의 행함을 집어넣어서 해석해야 해석되는 것처럼 오해해서 그런 겁니다. 구약을. 행위계약 아닌 것을 무조건계약이라고 하거든요. 무조건계약의 반대를 행위계약이라 하지 말고 조건계약이라고 해야 되지요. 그리고 행위계약의 반대말로 은혜계약이라 하고 은혜계약은 그냥 조건 없이 주는 것, 무조건 언약이 되지요.
이 모든 이해가 누구 중심입니까? 인간이 어떻게 받아 챙기느냐? 자꾸 인간을 계약 속에 집어넣어야 마땅하다는 오해 속에서 생긴 거예요. 계약에서 인간은 처음부터 배제돼있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멸망했기 때문에. 그럼 처음부터 그들은 멸망해야 되겠지요. 그렇다면 그들이 죄 짓고 멸망하는 것도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조치잖아요. 처음부터 율법은 행위계약이 아니고 무조건적으로 멸망하라고 준 거예요. 이것은 제 이야기가 아니고 로마서 3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율법이 더한 것은 그들의 입을 막고 저주 아래 있고 죄를 더하게 함이라. 무조건적이잖아요. 따질 것도 없이 무조건적이에요. 이게 무슨 행위입니까?
8번, 중보자이신 그리스도. 여기도 문제가 있어요. 그의 사람의 본체가 하나님의 본체와 결합이 되어서 성령을 주었다 하는데 결합이 된 게 맞습니까? 제가 읽어볼게요. [그리스도는 두 가지 본성에 따라서 중보사업을 하셨다. 각각 그 본성의 고유한 것만 하셨다.] 얼마나 위험한 말이에요. 다시 말해서 인간의 일을 할 때는 하나님의 일을 안 했단 말이에요.
두 가지 본성으로 했다. 그건 누가 판단하는 거지요? 예수님이 그렇게 이야기하던가요. 나, 두 가지 본성이 있다고. 그건 인간들이 인간을 모델로 삼아서 인간은 한 가지 본성밖에 없는데 예수는 두 가지 본성이 있네? 그러니까 그걸 견주는 전제로 본인을 모델로 해서 납득을 해보겠다는 거예요. 우리가 갖고 있는 본성이 있는데 추가적으로 우리에게 없는 게 하나 더 있는 게 하나님의 신적인 본성이라고 본 겁니다.
그렇다면 생각해봅시다. 인간들이 본인은 인간에 대해서 안다고 해서 인간이라고 한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것이 있다고 하잖아요. 그러면 이 하나님의 개념은, 인간이 아닌 하나님이잖아요. 인간이 아니면 하나님이십니까? 괴물이나 외계인, 천사는 될 수 없습니까? 논리 출발 자체가 인간 아닌 것이에요. 인간 아닌 것이 신입니까? 그게 바로 인간의 한계에요. 자기보다 능력이 많으면 신적이라고 하고 있어요.
뭐가 신이냐? 뭐가 하나님이냐? 인간들이 인간보다 능력이 많고 인간 아닌 것이 하나님이라는 그것 때문에 죽임을 당하신 분이 하나님이에요. 그 외에 다른 하나님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숨어있기 때문에. 숨어있는 하나님이 안 숨었다고 생각하고 분명히 우리보다 능력이 많고 전지전능하니까 우리가 못하는 걸 해준다고 여기면 그것은 인간이 늘어난 것, 하늘까지 늘여서 어떤 어르신네, 그걸 하나님이라고 생각한 거예요. 그것은 인간적인 이성에서 나온 초월적인 존재에 불과한 겁니다.
제가 말씀드립니다. 예수님이 어떤 일을 할 때 인성, 신성 따져서 일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일했는가? 예수님은 인자로서 일했습니다. 풀이하면 사람의 아들, 참된 사람, 유일한 사람. 다른 사람은 사람 아니에요. 유일하게 하나님인 인정하시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기뻐하는 자라. 복음적으로 이야기하면 하나님의 언약을 듬뿍 안은 채 활동하시는 인간, 그분의 자격으로 일하셨지 사람+신 이런 결합체로 일하지 않았습니다.
9번, 자유의지. 인간에게 자유를 준 것은 자연의 멍에로부터 해방하기 위해서다. 왜 자연의 멍에로부터 해방시켜야 됩니까?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준 것은 죄 아래 있던 자연의 멍에에서 해방시킨다. 자연의 멍에에서 해방되면 뭐가 되지요? 인간 자체가 자연이 아니었던가요? 저는 그렇게 알고 있는데. 인간과 자연을 분리하면 안 돼요. 인간이 자연의 일부란 말이죠. 자연에게 주어진 상황이 인간에게 그대로 주어져요. 로마서 8장에.
세상의 모든 피조물이 후패해가지요. 모든 자연물이 다 그래요. 해바라기, 코스모스, 코끼리, 돌고래, 인간도 마찬가지고. 같이 썩어가고 있어요. 특히 아담 같은 경우에 이마에 땀을 줄줄 흘리다가 나중에 흙으로 돌아가지요. 흙이 뭐지요? 자연으로 돌아가잖아요. 그러니까 인간이 자연의 일부 맞잖아요. 자연의 멍에라니? 거기서 왜 벗어나는데. 자연으로 돌아가야지요.
왜 이런 소리를 하느냐 하면, 인간에게 과학과 문화와 문명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인정해주겠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노동도 기도니까. 그래서 청교도에선 기도만 하고 노는 놈들 싫어해요. 당신이 진정한 성도라면 노동하라는 겁니다. 노동하면 결국 문화와 문명이 발달되겠지요. 문화와 문명이 발달되면 국가가 되겠지요. 결국 국가의 발전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총에 부합된 가현체지요. 그러면 그 나라는 긍정적인 나라가 되겠어요.
그런데 다니엘서에서 모든 나라는 짐승이라고 돼있는데 그건 어떻게 되지요? 다니엘 2장에서 마지막 짐승은 금, 은, 동, 놋, 철, 철 다음에 철과 진흙이 섞여있단 말이죠. 철과 진흙이 섞여있는 로마제국은 같은 민족이 아니고 다른 민족이 섞인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 인간 제국은 없어요. 그 전체가 하나의 짐승 속에 예속되지요. 그러니까 이 세상 모든 나라는 결국 짐승이잖아요.
아까의 논리에 의하면 나라는 짐승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신 축복의 터전으로서 하나님의 은총이 있다는 말인데 하나님 이 나라를 멸망시키면, 하나님이 주신 은총을 자기가 저주해버리는 그런 모순에 빠진단 말이지요.
10번, 실제적 부르심. 성령의 역사가 있더라도 바로 그리스도에게로 오지 못한다. 이런 발언이 나와 있어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서 이런 이야기하는 것은 바로 히브리서 6장에 보면, 성령의 비춤을 얻고 회개치 아니하면 영원히 저주받는다는 뜻이거든요. 그 말이 그 뜻일까요? 성령의 역사가 있더라도 그리스도에게로 오지 못한다는 말은, 성령은 오고 안 오고를 이야기하기 위해서 한 게 아니고 성령은 그리스도를 증거해요. 그러면 오고 안 오고는 성령 차원에서 논하면 안 되고 주님 권한에 맡겨야 돼요.
중풍병자가 왔을 때 예수님이 뭐라고 했습니까? 네 죄가 사해졌다고 했지요. 그때 유대인들이, 네가 뭔데 죄를 사하느냐? 이것은 하나님만 할 수 있다고 할 때 죄 사함의 권세가 오직 주님한테 있다는 거죠. 그게 성령이 오게 되면 그 이야기를 우리한테 하는 거예요. 성령 차원에서 오고 가고 하는 질문 자체가 성립 안 되는 겁니다. 주께서 오라고 하면 어떤 이도 오고, 주께서 애초부터 찾아가지 아니하면 어떤 누구도 구원 못 받는 겁니다. 주님이 행할 차원을 성령이 해버리면 골치 아픈 일이 일어나요.
어떤 일이 일어나느냐 하면, “목사님, 이번에 병이 나았는데 성령께서 하셨는데 병 나았으니까 구원받은 것 맞지요?”라고 했을 때 뭔가 공부 좀 했다면, “이때 정신 차려야 돼.” 히브리서 6장에 보니까 “성령으로 병 나았지요?” “나았습니다.” “그런데 그걸로 구원받는 건 아닙니다.” 그러면 그쪽에서 기다리는 답변은 뭡니까? “그러면 성령으로 하되 병 고치는 것 말고 뭘 해야 구원받습니까?”라고 한다 말이에요. 그러면 “성령의 비춤을 얻고 그 다음에 회개할 줄 아는 사람으로 바뀌어져야 구원받습니다.” 성경대로 한다면 이렇게 되잖아요. 그러면 결국 그 사람이 병 고침 받고 회개 따로 하게 되면 구원받습니까? 지금 그 사람은 성령과 상대하면서 뱅뱅 돌지요. 그러니까 결국 그 사람은 자기 구원에 집착하다보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연결이 안 되지요.
히브리서에서 그런 이야기하는 것은 성령에서 머물지 말고 어디까지 가라? 십자가, 언약의 피와 연계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단번에 죽으심에 연계하기 위해서 한 거예요. 성령에 머물지 말고 왜 성령에 비춤을 얻고도 구원 못 받는가? 그리스도가 결정할 문제지 성령 차원에서 결정할 문제가 아님을 알 때 그 사람은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살지 성령의 증인으로 사는 건 아니란 말입니다.
그리고 [택함을 받은 영아는 어려서 죽는다 할지라도 성령을 통해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중생하고 구원을 받는다.] 문제없는 것 같은데요? 어린 아이가 믿고 안 믿고 의식 없을 때도 그냥 태어나자마자 죽을 때도 지옥 가는 게 아니고 성령을 통해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중생하고 구원을 받는다.
이게 논란거리가 돼요. 구원을 주님이 주시잖아요. 어린아이든 어른이든 상관없이 주십니다. 그러면 중생이란 뭡니까? 주께서 구원을 주실 때 일어나는 결과지요. 내 쪽에서 뭘 가질 필요가 없지요. 어른 같으면 거듭났다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어린애는 중생의 고백할 수 없잖아요. 그렇다면 어린애는 중생이란 말이 빠져야 마땅하잖아요. 그냥 구원해주면 구원하는 거예요. 중생이란 절차가 필요 없단 말입니다.
그 뒤에 11장, 의에 대해서. 그 다음에 양자에 대해서, 성화에 대해서, 믿음에 대해서, 회개에 대해서, 그 다음에 선행에 대해서 나오잖아요. 지금 여기서 어린애는 다 빠져야 되겠지요. 그러면 의에 대해서, 양자에 대해서, 성화에 대해서, 구원의 믿음에 대해서, 생명의 회개에 대해서, 선행에 대해서, 그리고 17장에 성도의 궁극적인 구원에 대해서, 18장에 은혜와 구원의 확실성에 대해서, 이 전체 내용에 대해서.
성경에 거듭남이라든지 의라든지, 거룩됨, 성화 이것이 인간 하나를 두고 구분될 수 있는 개념들입니까? 하나의 개인에 대해서 순서 지을 수 있는 개념으로 사용하라고 주신 것들이에요? 아니지요. 예수님 본인이 하시는 일들을 나열한 거지요. 무슨 말이냐 하면, 인간이 죄에 대해서 할 때는 칭의로 이야기하는 거예요. 인간이 개인으로 죄 짓는 게 아니고 인간이 죄 속에 있을 때는 하나님의 의로우심으로 오시는 거예요.
그러면 인간은 개인으로 마중하지 못하면 아담의 자격으로 가는 거예요. 아담 안에 있는 자는 죄 아래 있잖아요. 그리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의 안에 있단 말이죠. 의란 개인적으로 자기 서랍에서 뭘 하나 집어들 문제가 아니고, 내가 뽑아서 나열할 문제가 아니고 내가 속해 있는 아담의 세계 전체에 대해서 주님이 갖고 있는 주님이 하실 일을 일괄적으로 보고 내리시는 작업이잖아요. 거룩함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거룩함 속에 있지요. 주 안에 있기 때문에. 그리고 영화, 영광스러움도 마찬가지에요. 주 안에서는 다 영광스럽지요.
17장, 18장은 결국 한 마디만 하면 돼요. 주 안에서 주님에 의해서 일어나는 주님의 결과들 우리는 그걸 가져오면 될 것 아니냐 하는데 주 안에는 우리가 죽어서 들어가야 돼요. 우리가 살아서는 못 들어가요. 아예 죽은 자로 들어간다니까요. 펄펄 심장이 뛰어도 주 안에서는 죽은 자로 받는 거예요. 죽은 자인데 의롭게 되었고, 죽은 자인데 거룩하게 되었고, 죽은 자인데 영광스럽게 되는 거예요. 죽은 자인데 회개 안에 있는 거예요. 전에 십자가마을에서 구원파 이야기할 때 회개 안에 있다고 했잖아요.
구원의 확실성이라는 자체가 얼마나 위험한 말이에요. 확실성이란 말은 결국 과거로 쓰일 개념에 불과합니다. 확실해. 언제, 언제에. 보세요. 묻잖아요. 언제냐고. 인간 자체가 시간과 공간적 의식 속에 있기 때문에 항상 시간을 물어요. 지금은? 몰라. 확실성 자체가 인간이 주 안에 있지 않고 자기가 펄펄 살아있는 내 안에서 주님을 모시려하니까 좋은 건 다 끌어 모으는 겁니다. 선행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양자에 대해서. 이것도 복음적이 아닙니다.
19번, 하나님의 율법에 대해서. 율법을 여기서 도덕법이라고 하잖아요. 도덕법이 성립됩니까? 답변해보세요. 주 안에서 도덕법이 없어요. 왜냐하면 도덕을 하려면 살아야 되거든요. 죽은 인간이 무슨 도덕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모든 선행은 주님 하시는 게 선행이에요.
예수님이 이 땅에서 선행했습니까? 인간들의 선행은 오병이어할 때 선행이라고 본 거예요. 주님은 선행한 게 아니고 인간이 제일 싫어한 걸 했어요. 내 살과 내 피를 마셔라. 지난주일 낮에 했잖아요. 자기 살과 피를 남한테 줍니까? 그게 선행이에요? 무슨 선행이 야쿠자도 아니고 살벌해요? 주님의 선행은 이해 못할 선행이에요. 인간이 이미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선악과 범주 안에서 납득도 이해도 안 되는 바깥의 일을 하실 때 무조건 진리고 무조건 선한 일이 되는 겁니다. 도덕법은 없습니다.
신자의 자유와 양심에 대해서 왜 그냥 넘어갑니까? 자유가 마음대로 하는 걸 자유라고 하지 않거든요. 어디에 갇혔다가 빠져나온 그걸 자유라고 합니다. 그런데 인간의 자유는 자기 갖고 있는 자율성을 두고 자유라 하거든요. 성경과 말이 안 맞아요.
21번, 예배와 안식일에 대해서. 지금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결정적으로 바리새인이에요. 왜냐하면 특정 날을 지키라는 거예요. 특정 날을 경건하게 지키라는 거예요. [보통 시간의 일부분을 구별하여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이 자연의 법칙에 합당하다.] 특히 이레 중에 하루를 안식일로 정하라고 했거든요. 그러면 제가 묻고 싶어요. 그럼 왜 화요일은 안 되지요? 이발소나 미용실처럼. 여기 보면 특정 날인데.
그러니까 이 사람들은 초대교회를 흉내 내고 있는 거예요. 초대교회가 진리입니까, 예수님이 진리입니까? 초대교회, 과거를 회상하면 안 돼요. 현재 주께서 어떻게 일하십니까? 우리를 죄인으로 만드는 이 모양, 이 꼴로 되게 일하지요. 그러니까 지킨다는 게 있으면 안 돼요. 골로새서 2장에 안식일을 지키지 말라고 했어요. 정면으로 어긋나요.
왜 청교도는 이렇게 지키고 싶어 할까요? 티를 내야 되니까. 너희와 우린 달라. 사람들에게 보여줌으로서 그동안 당했던 것을 보상받고 싶었던 심리가 있었던 겁니다. 당한 만큼 우리는 천사 됐다는 걸 뽐내고 자랑질하고 싶은 거예요.
22번, 합당한 맹세와 서원에 대해서. 가관입니다. 하나님이 맹세를 허락했다고 돼있어요? 하나님은 맹세를 허락한 적 없습니다. 여러분 다 아시지요. 마태복음 6장에 맹세치 말라고 했지요. 그런데 맹세했다는 겁니다. 서원을 허락했다는 겁니다. 맹세할 때는 진리라고 확신하고 하라는 거예요. 바보가 아닌 이상 진리라고 확신하고 맹세하지 농담 삼아 합니까. 이건 말하나마나 아닙니까. “주님이여, 아들 낳으면 신학교 보내겠습니다. 농담입니다.” 그렇게 맹세한 부모 봤어요? 이건 정치적이에요. “우리 집단을 봐라. 너희들 집단과 얼마나 다른지.” 뽐내기 위해서 자체적인 규칙을 진리라고 우기고 있는 겁니다.
23번, 관공직에 대하여. 이건 이번에 해경 보면 알아요. 그 해경에 기독교신자가 있다고 생각해봅시다. 아까 이야기한 유대인 오백 만 죽인 아이히만은 관공서 직원이에요. 자기 조직에 충성했던 사람입니다. 얼마나 인간이 자기 정당성입니까.
24번째, 결혼과 이혼에 대해서. [참다운 개혁교회를 신봉하는 사람은 이방인이나 천주교신자나 우상숭배자와 결혼할 수 없다.] 이 말은 달리 말하면 결혼하되 같은 교인들끼리만 결혼하라는 거예요. 그 교회에 총각 없으면 처녀로 늙어야지요. 처녀 없으면 총각으로 늙어야지. 아니면 데려오든지. 데려온다면 부작용이 있겠지요. 성령 받지도 않았고 거듭나지도 않았는데 교회에 와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외우고 결혼하면 경건한 청교도인 되는 겁니까?
그 다음에 교회에 대해서. 아까 이야기했듯이 가견적인 교회 없이는 구원 못 받는다고 했고.
26번, 성도의 교제에 대해서. 성도의 교제가 문제가 있어요. 고린도전서 6장에 보면, 교회에서 사기 당하더라도 형제를 고소하지 말라고 했지요. 그렇다면 평소에 사기꾼과 교제할 수 있겠어요? 못하겠지요. 사기꾼인지 뻔히 아는데. 그러면 자기가 알아서 교제를 분별하겠지요. 그렇게 되면 교제의 취지가 주님의 교제가 아니고 자기로부터 출발하지요.
로마서 14장에서 채소만 먹는 사람과 안 논다고 할 때 사도 바울이 놀지 말라고 했습니까? 형제를 넘어지게 하면 안 된다고 했지요. 교제란 것이 어디서 와야 돼요? 내가 자유의지를 발휘한 교제가 될 가능성이 있음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고려하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심지어 치매 걸린 할머니도 인물 안 좋은 요양사는 미워하거든요. 그렇다면 교회 와서도 못 생긴 사람은 사람 취급도 안 된다면 그게 무슨 교제겠어요.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는, 그렇게 하려면 십자가 복음 안에서는 교제할 것도 없이 그 자체가 교제가 되도록 하시는 겁니다.
마지막으로 합시다. 세례, 성례, 주의 만찬, 한꺼번에 넘어가면 이것은 바로 하나님이 설교자에게만 맡겼고 하나님이 설교자를 택하여 세웠다는 겁니다. 택하여 세워진 설교자와 설교자를 택하여 세웠다는 것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구분하지 않습니다. 무조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대로 설교하면 택하신 설교자가 돼요. 목사들 듣기에 얼마나 기분 좋습니까. 따지지도 말라. 무조건 설교했다는 자체가 주의 역사, 기적이라는 거예요. 그 사람만 성만찬 할 수 있다는 거예요. 다른 사람은 안 된다는 겁니다.
사람의 사후상태의 부활과 최후의 심판, 성령 안에서 복음전파에 대해서 뒤에 나오는데 이것은 뭐냐 하면, 지금 죽으면 완전한 구속은 안 되고 마지막 예수님 재림할 때까지 대기상태에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최후의 심판은 하나님을 모르고 그리스도 복음에 복종치 사악한 사람들은 영원한 심판
여기에 제가 최후의 심판이나 사후의 상태에 시비 거는 것은 이런 이야기에 주님의 예정하심이 포함이 안 됐다는 거예요. 네가 대들었기 때문에 심판받는다고 되는 겁니다. 어떤 인간치고 본성상 대들지 않는 인간이 없어요. 베드로도 대들었잖아요. 그런데 구원받았잖아요. 그러면 심판과 하나님의 구원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주께서 사랑으로 다가왔고 찾아왔잖아요. 찾아온 사람의 특징이 뭐겠어요? 내가 나 된 것은 주님의 은혜입니다. 그 정도로 나는 부실하기 때문에 그 정도로 나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기 때문에. 이게 복음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청교도를 보면서 하나의 역사에서 이런 현상이 있음을 알면서 또다시 오늘 이 시대가 마찬가지인 것을 저희들이 깨닫습니다. 어느 시대든 간에 주께서 살아계시고 일으킨 일이오니 그 가운데서 우리 자신의 본모습을 발견하고 우리도 마찬가지임을 자백하면서 십자가 피로만 용서받게 된 것을 주 앞에 감사드릴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