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대구강의] '잠언'속의 그리스도 19 - 율법의 기능 오늘은 교재 66페이지부터 살펴보자. ** 율법 아래에 놓인 인간들은 이미 저주 아래, 그리고 죄 아래에 놓여있음을 말해주는 겁니다. (롬 3:19)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율법 아래에 놓인 인간들은 이미 저주 아래에 있다" 라고 하는 것은, 이게 로마서 3장에 나오는 말씀인데, 여기에 대한 해석이 로마서 6장에 보면 나온다는 것이다. 그 해석이 상당히 난해하게 여겨지는 부분인데, 1절과 2절을 보자. (롬 6:1)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 여기 2절에 보면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라고 되어있는데, 그러면 죄에 대해서 죽었다고 하는 것이 무슨 의미이냐는 것이다. 죽은 자는 꼼짝도 할 수 없는데, 그렇게 관 속에 들어가 있으면 굳이 1절의 이야기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관 속에 있는 사람이 무슨 말을 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러니 그런 의미가 아닌데, 이렇게 죄에 대해서 꼼짝도 할 수 없다고 하면, 의에 대해서도 역시 꼼짝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미 죽었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죄에 대해서 죽었다" 라는 것이 무슨 의미인고 하니, 여기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은 "이제 죄에 대해서 상관이 없다" 라는 식으로 해석해버리는데, 하지만 죄와 상관없이 산다고 하면, 이렇게 볼펜을 돌려도 이게 의가 된다는 것이다. 죄 문제를 해결했기 때문에, 더 이상 죄에 대해서는 문제가 될 것이 없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그만 구원파가 되고 마는데, 즉 무슨 짓을 하더라도 잘한 짓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아이들을 물 속에 단체로 빠져죽게 해도 말이다. ◈ 사도바울의 복음은, 먼저 예수님과 제자들과의 관계를 !! 이것이 로마서이니 사도바울이 이야기한 것인데, 이것을 해석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은 여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셨는지, 그것을 살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제자들과 함께 계셨는데, 그래서 예수님과 제자들과의 관계를 확대시켜보면, 그게 사도바울이 전한 복음이 된다는 것이다. 예수님과 제자들과의 사이를 자세히 살펴보게 되면, 그것이 바로 사도바울을 비롯한 모든 사도들이 전한 복음이 된다는 말이다. 이것은 바꾸어 말하면, 사도가 전한 복음을 곧 바로 자기에게 직접적으로 적용시키면 된다는 말인가? 안 된다는 말인가? 안 된다는 것이다. 이런 것이 어려운 점인데, 우리가 성경말씀을 보면서 말이다. 자기가 성경말씀을 보니, "이 말씀을 내가 이용하면 되겠다. 직접 적용을 시키면 되겠다" 라고 하는데, 하지만 그것은 반칙이란 말이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되는가? 사도바울의 복음을 적용시킬 때는 반드시 그 원형이 되는 예수님과 제자들과의 관계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절차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말이다. 그렇게 되돌아가게 되면, 우리는 직접 사도바울을 이해하는 게 아니라, 우리는 제자들의 위치에 합류해야 한다는 것이다. 제자들에게 말이다. 그러면 명칭상 "우리도 예수님의 제자구나" 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러면 멋있게 들릴지 몰라도, 하지만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릴 때 제자들은 단 한 사람도 남지 않고 도망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도망간 도망자들을 주님께서 끝까지 추적하셔서 구원하셨다는 것이 복음이란 말이다. ◈ 이스라엘 집단이, 결국 예수님을 살해 !! 이 12제자들을 이렇게 확대를 시키면 신약성경이 되지만, 그 반대쪽으로 하게 되면 구약성경이 된다는 것이다. 구약성경에서 어떤 집단이 등장하는데, 그게 바로 '이스라엘' 이라는 말이다. 이들 집단이 한 것이 무엇인고 하니, 결국 예수님을 살해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이스라엘 집단이 자긍심을 느끼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그들 민족이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율법을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받았다는 것이다. 오늘 우리가 하려는 것이 바로 그 율법인데 말이다. 그 율법은 그들이 달라고 해서 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일부러 주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하게 되는데, 즉 "하나님께서 왜 우리에게 율법을 주셨는가?" 라는 것에 대해서 말이다. 그 이유에 대해서 근원적으로 따져보게 되는데, 그것이 창세기 12장에 보면 나온다는 것이다. 그게 1절에서 3절 말씀인데 말이다. (창 12: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 야, 우리가 복의 기준점이다 !! 여기에 보면 아브라함의 자손이 이 세상의 복과 저주를 결정하는 중심인물로 등장하는데, 거기에 대해서 그들은 무한한 자긍심을 느낀다는 것이다. "야, 하나님께서 우리를 복의 근원으로 세웠다" 라고 말이다. 즉 그들을 인정하면 복을 받고 인정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는 그 기준점에 아브라함이 있었고, 그 아브라함의 속성이 확대되면서 집단적인 이스라엘 민족이 되고 국가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국가 전제가 복을 받고 저주를 받는 중심에 서있게 되니, 그러니 이스라엘은 자연적으로 자기들이 복을 받는 기정사실이라고 여겼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것이 그들의 엄청난 오해이고 착각이었다는 것이다. 이것을 어렵게 말하면 "이스라엘은 자신들을 존재로 이해했다" 라고 할 수 있는데, 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존재가 아닌 기능으로 사용하셨는데, 그들은 그것을 몰랐다는 것이다. ◈ 우리는 율법을 지킬 수 있어 !! 물론 이스라엘이 말씀을 지키면 복을 받는 것은 맞는데, 하지만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실 때는 벌칙조항도 같이 따라왔는데, 즉 "율법을 지키지 못하면 저주가 주어진다" 라는 것에 대해서, 그들을 그것을 이해하면서도 차마 자기들이 율법을 지키지 못해서 저주를 받는다는 식으로, 그렇게 규정하기가 참으로 곤란했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누구에게 어떤 것을 줄 때에 그 위반사항이 같이 따라온다고 해도, 사실 그것을 나중의 문제라는 것이다. 즉 "지킬 수 있기 때문에 이것을 주었다" 라고 하는 생각이 먼저 들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누구든지 다 그렇다는 말이다. 그렇지요? ◈ 너희들은 지키지 못해, 그게 율법이야 !! 그래서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당연히 자기들이 지킬 수 있고 여겼는데, 그런데 사도바울은 무엇이라고 하는가?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것은 지킬 수 없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렇게 하셨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같은 율법인데, 서로 해석이 대립관계에 놓여있다는 말이다. 십계명은 동일한 십계명인데 말이다. 어떤 사람은 주장하기를, "나는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말씀을 지킵니다" 라고 하는데, 그러면 저는 대번에 뭐라고 하는고 하니, "항상 전기톱을 가지고 있다가 오른손이 죄를 지으면 그냥 잘라버리세요"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게 아니면 오른쪽 눈알을 빼든지 하라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이 과연 그렇게 할 수 있느냐는 말이다. ◈ 전기톱으로 오른손을 자르세요 !! 십계명에 "탐내지 말라" 라고 분명히 되어있는데, 그러면 그 탐내는 부분을 찾아야하는데, 오른손이 탐을 내면 오른손을 자르고, 그렇다면 오른손이 없는 상태에서는 탐심이 생기지 않는가? 또 생기는데, 그러면 더 잘라내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예쁜 여자가 지나가서 음욕이 생겼다고 하면, 그러면 오른 눈알을 빼고 애꾸가 되어서 살아가면 되는가? 그렇게 애꾸가 되면 예쁜 여자가 여자로 보이지를 않고 돌로 보이느냐는 말이다. 그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면 도대체 예수님이 하신 말씀에 대해서, 바리새인들이나 제자들은 어떻게 해야하느냐는 것이다. 유대인들의 생각은 무엇인고 하니, 인간은 원래 지키도록 되어있으니 일단 건전한데, 그렇게 건전한 상태에서 어떻게 더 건전하게, 도를 닦든지 해서 그렇게 나아가는지를 생각하는데, 반면에 예수님은 무엇인가? "속에서 나온 것이 더럽다" 라고 해서, 계속해서 속을 파헤치는 작업에 나서신다는 것이다. 그렇게 나서는 작업 중의 하나가 바로 사도바울이 전한 복음인데, 그러니 복음은 도를 닦으라는 게 아니라, 파헤치고 더욱 더 파헤치는데, 아예 끝장을 보자는 것이다. 그렇게 파헤치고 파헤쳐서 아예 인간에게 구멍을 내버린다는 것이다. '총 맞은 것처럼' 이라는 노래도 있지만 말이다. 그러니 "죄에 대해서 죽었다" 라는 말을 예수님과 제자들과의 관계에서 끄집어내게 되면, 그것을 달리 이야기하게 되면, 우리가 이해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그러면 "십자가에 대해서 모든 인간은 죽었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게 같은 말인데, 그러니 사도바울의 모든 복음은 반드시 십자가를 경유해서 해석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면 십자가 앞에서 인간은 어떻게 되는가? 예수님의 피 흘림 앞에서 그 어떤 인간도, 자기를 도를 닦는다든지 하는 것이 얼마나 위선적인지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이미 주님께서는 우리의 모습을 미래 종결적으로 앞서서 "너는 죄인이야" 라고 규정하시면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셨는데, 그런데 우리는 아직 미래에 도달하지 않고 가능성을 내다보면서 "주님, 제가 도를 닦는데 있어서 어떤 말씀이 도움이 됩니까?" 라고 나온다면, 그것은 십자가 자체를 모독한 것이 된다는 것이다. ◈ 저 차는 왜 저렇게 지저분해 !! 예를 들어서, 팔공산에 비가 촉촉이 오고 낙엽이 떨어지는데, 그런데 여기 지묘동은 아직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면 여기서 차를 몰고 팔공산으로 가게 되면 낙엽이 있는 차를 만나게 되는데, 그러면 그 차를 보고 "저 차를 모는 사람은 게을러서 세차도 하지 않는 모양이다" 라고 생각한다는 말이다. 이미 팔공산에서 오는 차들은 떨어지는 낙엽을 덮어쓰고 오는데, 그런데 자기는 집에서 출발하면서, 자기 차는 깨끗하게 세차를 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고 팔공산으로 놀러 간다는 말이다. 자기는 아직 팔공산에 도착하지도 못해놓고, 이미 거기에서 있다가 오는 차들을 보고 지저분하고 한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다른 사람들은 이미 하나님을 만나고 오는데, 자기는 하나님을 만나지도 못해놓고, 자기는 도를 닦고 해서 깨끗하니 하나님에게 칭찬을 받을 것이라고 여긴다는 것이다. 미처 자기 주제파악도 하지 못하고 말이다. 물론 팔공산의 갓바위에는 부처가 버티고 있지만 말이다(ㅋㅋ). ◈ 벗기고, 또 벗기고 !! 하나님을 만나면 십자가로 만나고 중보자로 만나는데, 그래서 구원을 받은 사람은 온 몸에 구멍이 다 나고 피부가 벗겨진 상처투성이인데, 그런데 아직도 자기는 화장을 해서 코팅한 피부를 여러 겹으로 걸치고 가는 입장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십자가 앞에서 그 피부를 벗겨내는, 그런 가식을 다 벗겨내는 작업을 주님은 성령을 통해서 하신다는 말이다. 주님이 왜 그렇게 하시는가? 그것은 바로 "너는 이미 죄에 대해서 죽었다" 라는 것이다. 그러면 그렇게 죽었다고 하면, 조금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우리는 죽은 채로 꼼짝도 하지 않고 있어야만 하는가? 지금 신해철이 살아서 돌아다니는 것이 아닌데, 죽었으니 꼼짝도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부검을 기다리면서, 화장도 하지 못하고 말이다. 그러니 우리가 죽었다고 하는 것은 뻣뻣한 상태를 두고 말하는데, 세포가 해체되는, 즉 활기가 떨어진 상태라는 말이다. 그런 것이 바로 죽은 것인데, 그런데 그러한 개념을 우리가 왜 오해하는고 하니까, 사도바울의 말을 다이렉트로 받으니 오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우리 인간들의 세계가 이렇게 있으면, 인간들은 자기를 산 자로 보는데, 죽은 자와 비교해서 말이다. 종교와 상관없이, 통일교를 믿던 무엇을 믿든 간에, 아무 것도 믿지 않아도, 아무튼 자기가 살았다는 것은, 지금 이렇게 생글생글 웃으면서 까불고 있고 움직이고 있는 것을 살아있다고 보고, 반면에 죽은 자라는 것은 며칠 전에 돌아가신 어르신이 있다든지 하면, 그런 자를 죽은 자로 본다는 것이다. 그런 산 자와 죽은 자의 개념은 우리가 만들어낸 것인데, 이러한 개념을 가지고 사도바울이 말하는 죽은 자를 이해하려고 하니, 해석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러니 제대로 된 해석을 하려고 한다면, 사도바울에게 직접 가면 안 되고, 반드시 제자들에게 먼저 가야한다는 것이다. ◈ 죽음이란, '처소 없음' !! 제자들에게 있어서 죽었다는 것은, 육적인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관계가 끊어진 것을 두고 말하는데, 그게 죽음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요한복음 14장에서는 '처소 없음' 이라고 하는데, 즉 처소가 마련되지 않은 상태가 곧 죽은 상태라는 것이다. 베드로는 운동도 하고 움직일 수 있는데, 예수님에게 음식을 대접할 수도 있지만, 그러나 그리스도와의 관계는 끊어졌다는 것이다. 이것을 좀 더 자세히 말하면, 그리스도의 세계와의 관계가 끊어진 상태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도 어렵다고 하면, 그러면 그리스도의 세계가 무엇인고 하니, 아버지와 하나가 된 세계로부터 관계가 끊어진 상태라는 말이다. 이게 더 어려운가요? (ㅋㅋ) 예수님은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라고 하셨는데, 그 하나에 참여하지 못하면 죽은 상태라는 것이다. 이것을 종합적으로 말하면, 예수님은 자신을 두고 "나는 길이요, 진리요" 라고 하시고, 그 다음에 무엇이라고 하셨는가? "나는 생명이다" 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요 17:22)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이게 바로 산 것인데, 즉 예수님만이 살았다는 말이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라고 하시는 것은, "너희들은 생명이 없기에 죽었다" 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즉 인간은 생명나무의 실과를 따먹을 수 없으니 죽었다는 말이다. 그러니 창세기 3장의 말씀이 여기 예수님의 세계로 다이렉트로 연결이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들은 창세기 3장을 이렇게 곧 바로 연결하지 못하고, 역사라는 것을 가지고, 그런 인간의 역사는 죄의 역사이고 저주의 역사인데, 그런 역사를 거쳐서 제자들에게 합류가 되었다는 것이다. 구약의 이스라엘을 거쳐서 말이다. 아까 이스라엘 이야기를 했는데, 자기들은 기능적으로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야하는 집단임을 모르고, 마치 자기들의 존재는 당연히 복을 받아야 된다고 우겼던 이스라엘이, 그들이 어떻게 되는가? 언약도 없는 이방나라에게 멸망을 당하고 만다는 것이다. ◈ 잠시 '분기(branch)'에 대해서 !! 그리고 나서 새끼를 친 것이 무엇인고 하니, 그것을 어려운 말로 '분기(branch)' 라고 하는데, 가지를 치는 것, 즉 갈라지는 것인데 말이다. 그러면 이 분기에 대해서 좀 설명을 해보자는 것이다. 왜 이런 용어를 여기서 사용하는고 하니, 구약 말라기 이후부터 세례요한 사이가 어떻게 되는가? 그만 단절이 되어있다는 것이다. 말라기 제일 마지막에 보면 엘리야가 온다고 되어있는데, 이 엘리야를 세례요한이라고 바로 연결해버리면 안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여기에서 말하는 엘리야는 역사 속의 엘리야가 아니라는 말이다. 말라기 이전에, 이미 600년 전에 엘리야가 왔는데, 그 엘리야가 오는 것으로 오해를 한다면, 이것을 엘리야가 두 번 태어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말 4:5)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니고데모도 역시 오해를 했는데, 예수님께서 다시 태어난다고 하니, 역사라는 환경 속에서 두 번 태어나는 것으로 알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여기서 말하는 단절은 무엇인고 하니, 역사가 끝나고 역사를 초월한 묵시의 세계, 즉 시간의 흐름이 멈추어진 세계와 연결된 엘리야가 온다는 것이다. 이것이 단절인데, 많이 어렵지요? ◈ 단절 - '시간의 흐름이 멈추어진 세계에서 엘리아가 온다' !! 그러니 단절이라는 것은, "인간들아, 너희들이 할 도리를 다 해봤지? - 예, 우리가 모두 해봤습니다" 라고 되는데, 사실 이스라엘이 모두 다 해봤다는 것이다. 성전을 세우고 다 했지만, 그러나 그것들이 결국 자기들이 멸망을 당할 이유가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그 속에서 나오는 것이 더럽기에 말이다. ◈ 유치찬란한 제사장 복장, 그리고 교황 !! 겉으로 아무리 형식을 갖추고 해도, 천주교가 그런 것을 많이 하는데, 하지만 그런 것은 백날을 해도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제가 중국에서 레위기 강의를 하면서, 제사장의 복장이 참으로 유치하다고 했는데, 보석을 달고 하는 것이 말이다. 그런데 그런 유치한 모양새를 지금 교황이 그대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고깔모자도 쓰고 말이다. 성령을 받은 사람이 그것을 보게 되면 정말로 유치하기가 짝이 없는데, 무슨 그런 짓을 다 하느냐는 것이다. 그런 유치함을 다른 말로 하면 '유아적 퇴행' 이라고 할 수 있는데, 다시 어린아이 시절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동화 속으로 말이다. 나이가 좀 드신 분들이, 물론 우리 권사님은 지금 50대 중반으로 밖에는 보지 않는데(ㅋㅋ), 그런데 그런 분들이 아이들이 입는 원피스를 피고 볼록소매를 하고 시장에 나가면 그야말로 민패인데, 저는 정말로 돌을 던지고 싶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유아기적 퇴행인데, 지금 신부와 교황이 그런 짓을 하고 있다는 말이다. 지팡이까지 들고 말이다. 무슨 배트맨도 아니고, 팬티는 왜 입지 않는지 모르겠는데, 도대체 그게 무슨 짓이냐는 것이다. 그것보다 더 웃기는 퇴행은 무엇인고 하니, 중들이 머리를 빡빡 민다는 것인데, 정말로 저는 중들에게 물어보고 싶은데, 그런 짓을 왜 하는지 말이다. 그게 바로 하나의 권력이기 때문인데, 집단 정체성이 돈이 되기 때문에 말이다. 제 아무리 도를 닦는다고 해도, 그런 것보다도 머리를 빡빡 밀어야 돈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머리를 밀지 않는 원불교는 돈이 안 된다는 것이다. 누가 머리도 기르고 승복도 입지 않은 평범해 보이는 아저씨에게 와서 시주를 하겠느냐는 말이다. ◈ 엘리야와 세례요한 !! 아무튼 그들은 역사 속에서 말라기에서 예언한 엘리야를 기다렸는데, 그런데 정작 온 것은 누구인가? 세례요한인데, 그러니 도저히 알아볼 수가 없다는 것이다. 묵시적 존재이기 때문에 말이다. 그렇다면 세례요한은 말라기에서 이렇게 오는 것이 아니라, 말라기와 함께 점선으로 계셨던 예수님과 관련이 되어서 왔다는 것이다. 그러니 역사 속에서 말라기로 오는 것이 아니라, 말라기라는 계시를 주신 예수님 계통으로 오시기 때문에, 세례요한은 이것을 보이스, 즉 '소리' 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 소리는 존재가 아니라 기능인데, 즉 스피커라는 것이다. 그런 기능적인 역할을 한다는 말이다. ◈ 성도는 기능으로 구원을 !! 오늘날 성도는 바로 이런 기능으로 인해서 구원받은 것인데, 그러한 기능이 작용하면 성도이고, 그러니 성도 본인의 자격으로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예수 안' 이라는 것은 모든 자기 백성을 기능으로 다루기 때문에 말이다. 존재는 오직 한 분만 계시면 되는데, 그분이 곧 예수님이라는 것이다. ◈ 그러면 '죽었다' 라는 것이 무슨 뜻인가? 이제 '죽었다' 라는 것이 무슨 뜻인지 알려드리겠는데, 예수 안에서는 존재이신 예수님만이 살아계시면 되는데, 그게 갈라디아서 2장 20절 말씀이란 것이다.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라고 한다는 말이다.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그러니 두 사람이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사시는데, 그 예수님이 살아가는 삶의 기능으로 인해서 날마다 살려지게 되는 분이 바로 사도바울 본인이란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님의 생명이 자기 몸에 나타나게 함이라고 하는데, 그러니 성도는 예수님의 생명만 나오게 되면, 그것으로 기능은 끝이라는 말이다. (고후 4:10)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그러니 '나' 라는 것이 주체가 되어서 "내가 살아있다" 라는 것은 그야말로 전혀 쓸데없는 이야기인데, 자기가 살아봐야 얼마나 살겠느냐는 것이다. 그러니 자기가 산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 그리스도께서 살아있다고 하면, 나이가 80살이 되고 백 살이 되어도, 내일 당장에 죽어도, 자기는 여전히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있다는 것이다. ◈ IN CHRIST !! 그것을 두고 '그리스도 안' 이라고 하는데, 즉 주님의 살아남의 능력이 계속된다는 것이다. 그런 살아남의 능력의 절차에 필요한 것이 바로 율법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율법이 있어주어야 "니가 어떤 절차를 통과했는가?" 라는 것이, 즉 "단절을 통과했는가?" 라는 것이 점검되기 때문에 말이다. 제가 말을 빨리 해서 제대로 이해를 했는지 모르겠는데,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까? 여기서 고린도전서 1장 55절과 56절을 보자. (고전 15:55)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 죽음도 창조작업의 일환이다 !! 여기에 '사망' 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그것은 '생명'을 설명하기 위해서 대립되는 개념으로 반드시 짝을 이루어서 나온다는 것이다. 생명이라는 것은, 사망 가운데서 생명인데, 어제 오후시간에 했지 싶은데, 요즘은 어제 일도 가물가물한데 말이다. "죽음도 창조작업의 일환이다" 라고 언급했는데 말이다. 그게 오후시간인가요? 말한 사람은 몰라도 듣는 사람은 기억하는데 말이다.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하나님의 일은 죽어야 사니까, 하나님의 일은 죽음도 창조의 하나라는 것이다. 그러니 창조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죽음을, 즉 "너는 죽은 적이 있는가?" 라고 우리에게 묻는 질문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다. "너는 죽은 적이 있는가?" 라고 말이다. ◈ 나는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 !! 사도바울이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예수님을 만났는데, 그런데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는 뭐라고 하는가? "나는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만났으면 죽은 것은 아닌데, 예수님을 만나서 그 빛으로 인해서 눈이 멀었지 말이다. 우리 인간들이 생각하는 목숨이 달아나는 일은 없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이제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 라고 하는데, 이것은 다메섹 사건을 근거로 했다는 것이다. 그러면 예수님을 만났다는 것은, 예수님의 존재를 만나는 게 아니라, 그것과 더불어서 십자가의 반복되는 기능의 능력이 자기를 장악했는데, 거기에 자기는 그만 합류가 되었다는 것이다. 새로운 힘이 발휘되는 영역 속에 말이다. 그게 마지막 아담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이전까지는 옛날의 아담 영역 속에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사도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너는 너, 나는 나" 라고 개별적으로 보다가, 예수님을 만나고 난 다음부터는 "너가 아니라, 너가 속한 아우라에, 즉 아담의 죄의 능력 가운데 있었는데, 지금은 그리스도의 영역에 있다" 라고 하는데, 즉 영역과 영역의 단절과 거기에 대한 변혁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 누에고치가 부러운 인간 !! 개인적인 실존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아우라에 둘러싸여 있다는 것이다. 마치 누에고치가 어디에 둘러싸여 있듯이 말이다. 누에고치, 즉 번데기는 그 모양새가 참 징그러운데, 그런데 그 번데기를 둘러싸고 있는 그 하얀 천과 같은 것은, 무엇이 그리 귀하다고 그렇게 고귀한 실을 가지고 둘러싸고 있느냐는 것이다. 물론 인간은 그 실을 뽑아내어서 자기 몸을 감는데 사용하지만 말이다. 그게 실크인데, 그런 실크를 가지고 번데기의 몸을 감싸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분명히 죄인이 맞는데, 그러니 눈만 뜨면 탐욕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속이 더럽기 때문에 말이다. 그런데 그런 우리가 무엇이라고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관이 그렇게 영광스럽고 아름다우냐는 것이다. 누에고치를 둘러싸고 있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되게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었다가 살아난 부활의 능력이 우리의 관이 되어서, 우리는 그 안에서 죽고, 부활의 능력이 날마다 우리를 살려내는 작업을 하시면, 그 바깥에는 그리스도의 능력과 그 솜씨를 찬양하는, 오직 그리스도만 자랑할 수 있도록 우리는 활용이 된다는 것이다. (갈 6: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 오히려 인간의 실패가 !! 누에고치는 그렇게 잘 살아가는데, 그런데 우리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어서 점점 더 응축이 된다는 것이다. 자기 자신만으로 말이다. 그런 대표적인 것이 세월호 사건이고 신해철의 죽음인데, 왜 그렇게 유난을 떠는가? 인간들이 평소에 자기만을 위해서 살아가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세월호 사건은 바다에서 일어난 일종의 교통사고라고 할 수가 있데, 물론 구조를 전혀 말도 안 되게 그야말로 개판으로 한 것은 비난을 받아서 마땅하지만 말이다. 아무튼 오버를 해도 너무 했는데, 그게 바로 하나님의 원수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하신 모든 일에 대해서 덤벼드는 것인데, 그 원조가 바로 마귀라는 것이다. 마귀는 자기 자신밖에 모르는데, 마귀는 자기 정당성, 선악과의 지식에 대한 확보인데, 그것을 마귀도 알고 하나님도 아시고 예수님도 아신다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이 거기에 끼어 들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인간이 그렇게 실패를 당함으로 오히려 유리하게 되었는데, 무슨 말인고 하니, 인간이 실패를 하지 않았으면 에덴동산에만 살아야 하는데, 갈 수 없는 곳에, 가서는 안 될 동네에, 어른들이 계시는 곳에 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게 바로 천국이란 말이다. 그러니 그것을 위해서 무엇인가가 바뀌어야 하는데, 이 땅에서 자기밖에 모르는 인간이, "나는 어떤 다른 분을 위해서 존재한다" 라는 사실을 깨닫는 마음으로, 그렇게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내 것이 아니라 다른 분의 소유이다" 라고 말이다. 그렇게 바뀐 마음으로 그곳에 가야한다는 것이다. ◈ 구원론를 제거해야 !! 그런데 그냥 바뀌어진다고 하면 성경전체가 구원론에 빠지고 마는데, 그것은 잘못된 성경해석이라는 것이다. 성경은 결코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있는 책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 자기 구원에 대한 자의식이 그대로 남아있으면, 그런 마음으로는 결코 천국에 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 마음에서 구원론을 제거해야 하는데, 그 방법은 무엇인고 하니까, 구원론 자체가 죄가 된다는 것을 먼저 알아야한다는 말이다. 즉 모든 것은 그리스도를 위한, 성경도 그리스도를 위한 책이지, 자기 구원을 위한 책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 포로는, 포로다워야 !! 그러므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예수님이 말씀을 이루신 그 부대효과로서 주어지는데, 예수님의 업적으로 말이다. 구약에서는 이것을 '전리품' 이라고 하는데, 예수님이 전쟁을 하셔서 포로가 된 자들을 끄집어낼 때, 그 포로가 된 자는 자기를 포로에서 해방을 시켜주신 분만을 영화롭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들이 포로가 되기 위해서 하나님은 먼저 애굽이라는 나라를 장치해야하고, 그들은 애굽에서 고생하면서 애굽에서 자의적으로 빠져 나오면 안 되고, 포로라는 의미자체가 빠져 나오지 못한다는 의미라는 말이다. 애굽에서 이스라엘이 나오지 못하는데, 심지어 율법이 있어도 안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이 신약의 사도바울에게 있어서는 다음과 같이 정리가 되는데, 즉 "모든 아담의 후손들은 죄라는 노예상태에서 빠져 나올 수 없다" 라고 말이다. 그것을 구약에서는 이렇게 그림자이고 모형으로서 애굽에서 보여주게 된다는 것이다. 그들이 애굽에서 포로생활을 함으로서 말이다. 지금까지 강의한 것을 한 마디로 말하면, "인간은 홀로 있는 게 아니라, 필연적으로 어디에 갇혀있다" 라는 것인데, 그렇게 갇혀있는 모습으로 해석해야만, 그게 성경에서 말하는 제대로 된 인간론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홀로 있는 게 아니라 어디에 갇혀있다는 말이다. ◈ '워치만 니'와 '헤르만 헤세' !! '워치만 니'는 여기에서 큰 실패를 하게 되는데, 그는 구원론으로 나가고 만다는 것이다. 즉 "인간은 육과 영과 혼으로 되어있는데, 니가 알아서 노력해라" 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이 개인적인 존재론으로 되어버리면, 즉 "내가 어떤 것을 퍼부어야, 어떤 식으로 노력해야 구원을 받는가?" 라고 하게 되면, 성령은 하나의 대상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면 성령의 능력을 '기도' 라는 방법으로 가지고 와서, 자기가 자기 힘으로는 안 되니 성령의 도움으로 벗어나겠다는 것인데, 그것은 워치만 니가 불교에 대해서 공부를 하지 않아서 그렇다는 말이다. 그는 불교에 대해서 잘 모르는 것 같은데, 자기가 주장한 방식이 불교에서 하는 것임을 상상도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녹취 '구' - 제가 신학대학원 졸업논문을, '1907년 한국의 대부흥운동'을 중심으로 해서, 그런 식으로 접근을 해서 썼는데, 그때 생각이 나네요.) 여기서 굳이 불교에 대해서 강의하고 싶은 마음은 없는데, 이 불교를 잘 적용한 자가 누구인고 하니, '헤르만 헤세' 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의 책이 여러 권이 있는데, 그 중에서 '데미안' 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인간의 성장과정을, 즉 아이가 어른이 되는 과정을, 그것을 영어로 하면 '프락시스' 라고, '실천' 이라는 의미인데 말이다. 여기에서 그는 인간이 어른이 된다는 것을, 병아리가 계란을 깨어 나오는 과정으로 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지금까지 우리가 강의한 것과, 이 헤르만 헤세의 불교사상과 비교해보라는 것이다. 계란 속에 있는 자아가 그 계란을 깨고 바깥에 나오게 되면 그 사람은 자유를 얻게 되는데, 그런데 그 자유가 누구를 위한 자유인가? 본인을 위한 자유라는 것이다. 그러니 마귀가 생각한 자유를 헤르만 헤세가 대표적으로 보여주는데, 데미안을 통해서 말이다. ◈ 헤르만 헤세와 사도바울 !! 그렇게 이 세상의 모든 제도와 필연과 모든 권세로부터 벗어나게 될 때, 그게 심리학자인 '마아슬루'에 의하면 '자아실현' 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의 욕망은 어디에까지 뻗치는고 하니, "내가 곧 신이다" 라고 하는 데까지 나아간다는 말이다. 하지만 사도바울이 이야기하는 성도의 모습은 무엇인가? "주여, 저는 주님 앞에서 죽었습니다" 라는 것인데, 즉 주님만 영광을 받으셔야 하고, 자기는 전적으로 죄인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이것은 헤르만 헤세가 이야기하는 것과는 완전히 극과 극이라는 말이다. ◈ 역시, '막 사세요' !! 교회에 와서는 이렇게 불교식으로 자아실현을 시도하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은데, 그러니 "막 사세요" 라고 하면, 그것을 이런 식으로 적용시켜서 개판이 되고 마는데, 그러다가 그만 삐쳐서 가버린 사람이 한 두 명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도 제가 "막 사세요" 라는 말을 막 던지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이런 사람들을 가려내는 방법이 이것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면서 막 산다는 것은, 결국 자기 자유를 만끽하겠다는 것인데, 그것은 바로 자기 자유를 믿는 것이란 말이다. 그게 극단의 자존심인데, 최고의 자존심이라고 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자기 마음대로 살겠다는 것인데, 그 누구에게라도 구애를 받지 않고 말이다. 예의도 없이, 말도 함부로 하고, 방귀도 붕붕 뀌면서 말이다. 그것이 곧 프락시스, 즉 실천인데, 자기가 계란 속에 있는지, 거기에서 빠져 나오는지, 그것을 날마다 테스트를 해본다는 것이다. ◈ 조폭집단을 해체하라 !! 예를 들어서, 신해철의 죽음을 통해서 현 정권에 대한 반발심을 강력하게 표출한다든지, 물론 강의시간에 정치적 발언을 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지만 말이다. 그래도 한 마디만 하면, 자기가 주님에 대한 감사가 되지 않으니까, 그 핑계를 정치적인 상황으로 돌리려고 한다는 것이다. 대통령이 부정선거로 뽑혔느니 하면서, 그렇게 남의 탓으로 돌린다는 말이다. 왜 그렇게 하는고 하니까, 그런 가운데 자기의 어떤 만족감을 느끼면서 같이 묻혀서 가려는 심리가 있기 때문인데, 즉 "내가 자유롭지 못한 것은 모두가 너희들 탓이다"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을 믿는 것과 4대강이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것이다. 물론 이명박이 4대강 공사를 강행하면서 강을 완전히 개판으로 만들어서 물고기들이 떼죽음을 당하게 했지만, 그것과 "나는 이 순간 죄인이며, 나를 구원하신 분은 주님밖에 없다" 라는 게 무슨 관계가 있느냐는 말이다. 그러니 그 누가 대통령이 되어도 마찬가지인데, 자기가 대통령이 되면 몰라도 말이다. 물론 이명박이 너무 심하게 말아먹기는 했지만, 그것과 예수님의 주되심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만약 제가 대통령이 되면 군대부터 손질을 할 것인데, 완전히 조폭집단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이런 것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망상이냐는 것이다. 하지만 느낌만은 그러한데, 저도 군대에 있을 얼마나 많이 맞았는지 모른다는 말이다. 사람은 이렇게 자기를 힘들게 했던 것을, 그렇게 자기 자유를 억압했던 것에 대한 원상복귀, 즉 복수심이 계속해서 남아있다는 것이다. 바로 그러한 모든 복수가 이스라엘의 모습이고,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게 했던 원인으로서 다 응집이 되어있는데, 그렇게 모든 것이 쏠려서 다 모이게 되어있다는 말이다. ◈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 계속해서 해보겠는데, 지금 우리가 율법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데 말이다. 여기 고린도서 15장에서는 무엇인고 하니, 사망을 언급하면서 율법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56절에서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라고 하면서 말이다. (고전 15:55)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 죄를 누가 지었는가? 그러면 우리가 이것을 상식적으로 쉽게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죄를 누가 지었는가? 우리가 지었는데, 그러면 누구 탓인가? 당연히 우리 탓이라는 말이다. 천주교에서 주장하는 "내 탓이요!" 라고 하는 게 맞다는 것이다. 그런데 성경을 그렇게 자기 탓이라고 하지 않고 자꾸만 율법을 들이대느냐는 것이다. 우리가 자기 탓을 한다고 해서 그 다음부터 그런 짓을 하지 않겠는가? 자기가 반성할 수 있고, 손해를 감수할 수 있는 것은 "내 탓이요!" 라는 것이 가능하지만, 하지만 자기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일이 닥치게 되면, 그것은 자기 탓이 아니고, 이웃 탓이고 정부 탓이고 국가 탓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소소한 것에 대해서는 상대방에 "이런, 미안합니다" 라고 하면 다 되는데, 그런데 자기 아이가 바닷물에 빠져죽게 되면 그런 소리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제가 아이 관리를 잘하지 못해서 이렇게 되었습니다. 괜히 아이를 배에 태워서 국민들에게 심려를 끼쳐서 죄송합니다" 라고 하는 소리가 나올 수가 없다는 말이다. 그때는 "너희들 때문에 내 아이가 죽었다"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하지만 평소에 그 사람이 그런 사람인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남에게 핑계를 대는 사람이 아니고, 예의가 바르고, 교회도 열심히 다니고, 주님께 감사도 했던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건드리지 말아야될 뇌관을 그만 건드리게 되니까, "니는 뭐야?" 라고 하면서 폭발하게 된다는 말이다. 이것은 그 어느 누구라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 이 법에 의하면 나는 정당해 !! 그래서 율법이라는 것은 반드시 계속해서 우리와 함께 있어야하는데, 결국 "내가 이 정도까지 손해를 볼 사람은 아니고, 비난받을 사람은 아니다" 라는 근거를 대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자기가 버렸다고 여기는, 자기는 율법과 상관이 없다고 여겼는데, 그런데 그 법을 우리는 반드시 몇 개씩은 자기 깊숙한 곳에 감추어서 장착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이 법에 의하면 나는 정당해" 라고 하는 것을 반드시 가지고 오게 되어있다는 말이다. 그런 율법이 있는 이상, 우리는 "나는 단독으로도 살 가치가 있다" 라고 우기는 존재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단독으로도 말이다. 왜냐하면 "주님, 저를 건드리면 안 됩니다. 제가 다른 것은 몰라도 이것만은 지키지 않았습니까?" 라고 하는, 그런 자기 정당성은 법이 없이는 성립되지 않으니 말이다. ◈ 법을 주시고, 빼버리시고 !! 하지만 주님은 바로 그 율법을 공격하시는데, 우리가 마지막으로 딛는 그 디딤돌을 말이다. 그만 그 디딤돌을 빼버리게 되면 우리는 허공으로 낙하하게 되는데, 떨어지고 만다는 것이다. 이렇게 자기를 정당화할 그 어떤 법도 없을 경우에, 우리는 그야말로 자유낙하를 마음껏 누리게 되는데, 그러다가 결국에는 제일 밑바닥에 처박히고 만다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곳에 십자가가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주님은 날마다 우리에게 법을 주시고는, 그 법을 빼버린다는 것이다. 즉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이다" 라는 법을 주셨을 때, "주여, 저는 돈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라고 할 때, 그 법을 빼게 되면, 우리는 자기 정당화의 근거가 그만 빠지고 없기 때문에, "나는 살아야만 돼.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살아남아야 돼" 라고 큰 소리를 칠 근거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그냥 나락으로 빠지게 되는데, 즉 "지금 죽여주셔도 저는 할 말이 없습니다. 연기처럼 흩어져도 괜찮습니다" 라고 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욥이라는 것이다. 욥은 자식이 잘 되고 돈이 많은 것이 자기 의로움의 근거라고 보았는데, 하지만 주님은 그 발판을 빼버렸다는 말이다. 왜 미키 마우스가 등장하는 만화에 보면 그런 것이 있는데, 고양이기를 생쥐를 쫓는데, 그런데 절벽까지 가서는 그 생쥐는 옆으로 비키고 고양이는 절벽으로 가서는 순간적으로 붕 뜨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느끼는 순간 고양이는 어떻게 되는가? 그만 절벽아래도 떨어지고 만다는 것이다. 베드로의 경우에, 그가 주님을 바라볼 때는 분명히 물 위를 걸었는데, 그게 물 위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주님만 인식할 때는 물 위를 걸었는데, 그런데 "내가 지금 어디를 걷고 있지? 내가 미쳤어" 라고 하는 순간 그만 물 속으로 빠지고 만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 안에 있는 현상이라는 말이다. 즉 예수 안에서는 근거 없이 살 게 되는데, 그런데 예수 안에서 자기가 살 게 되는 근거를 율법을 동원해서 찾게 된다면, 또 다시 죄인으로 빠지고 만다는 것이다. 그래서 율법은 반드시 필요하다는 말이다. ◈ 개미야, 안 돼. 피해라 !! 예수님의 십자가가 자기를 직접 대하지 않고, "니가 죄인이다. - 맞습니다. 저는 죄인입니다. - 죄인이 맞지? - 예, 맞습니다" 라고 아무리 해도 그것은 불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 나는 부족해. 개미도 죽이면 안 돼" 라고 하면서, 마당을 빗자루로 쓸지도 못하고 아무리 개미를 들어내도 개미는 계속해서 나온다는 것이다. 나중에 나이가 많아서 다리에 힘이 없어서 미처 개미 두 마리를 피하지 못하고 밟으면 어떻게 하겠느냐는 말이다. 자기 문제를 결코 자기 자신이 해결할 수 없음을 우리는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는데, 왜냐하면 평소에 가지고 있는 습관이 "내 문제는 내가 해결해야 나중에 책임질 수 있다" 라는 것이기에, 거기에서 나온 유명한 용어가 '자유의지' 라는 것인데, 그 자유의지는 선택인데, 즉 "나의 자유의지로 선택해서, 그래야 나중에 심판대에서 내가 책임지는 존재가 된다" 라는 사고방식인데, 철학자체가 그렇다는 말이다. ◈ 인간이 왜 심판을 받는가? 그렇다면 심판을 받는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인가? 왜 심판을 받는가? 책임자이기 때문에 심판을 받는다는 말인데, 그런데 만약에 책임을 질 수 없는 위치에 있는 자라고 하면 어떻게 심판을 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렇게 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공장에서 불량재료를 싸게 구입해서 했더니만 그만 공장에서 불이 났다고 하면, 그러면 경찰이 와서 그 책임을 누구에게 묻겠는가? 관리책임자를 불러서 묻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의 아들에게 물으면 되는가? 아들은 학교에서 공부하고 있었는데 말이다. "대균아, 니가 아버지가 책임자로 있는 공장에 불이 난 것을 책임져라" 라고 하면, 그것은 말이 안 된다는 것이다.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이 세상에는 그 효과가 퍼져있는데, 그래서 자유의지를 가지고 그 책임을 계속해서 묻는 율법적인 규정이 통한다는 것이다. 그 방면에서 최고의 전문가들이 누구인가?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이었는데, 즉 "어떻게 하면 나로 인해서 남들에게 생기는 피해를 줄일 수가 있는가?" 라고 한다는 말이다. ◈ 인간들이 상상하는 하나님은 없어 !! 그게 그들이 말하는 이웃사랑인데, 그런데 거기에 대해서 예수님은 뭐라고 하셨는가? "너희들 아비가 마귀다" 라고 하셨는데, 그게 바로 마귀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그런 이야기를 하려면 그들은 계속해서 율법을 연구해야 하는데, 율법에 근접해서, 물론 온전하지는 않지만 90프로, 95프로, 그렇게 점점 더 율법을 지켜나가는 면모를, 그렇게 노력하는 가상한 모습을, 그것을 주님은 얼마나 대견하게 보시겠느냐는 것이 그들의 사상이란 말이다. 그들이 지어낸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정당화하고 미화시키는, 자기들이 조작한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그런 하나님은 없는데, 하지만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인위적으로 끌어올 수 있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인가? 자기들의 가상한 노력에 대해서 내신점수를 매겨주는, 그러한 하나님을 좋으신 하나님으로 품고 같이 교제에 나서고 있다는 것이다. 성령을 받아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게 성령을 받은 것이라고 일방적으로 우기면서 말이다. 하지만 주님은 그 율법을 빼버리시는데, 그래서 우리가 의롭다고 할 근거조차도, 즉 "나는 무엇 무엇을 지켰습니다. 혹은 지키려고 애를 썼습니다" 라고 하는 것조차도 와장창 빼버리심으로 말미암아서, "너희들의 운명은 너희들이 하기에 따라서 결정되는 게 아니다" 라고 하신다는 말이다. 즉 "너희들의 운명은 너희들과 상관이 없다" 라는 것이다. ◈ 다시,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 아까 보았던 고린도전서 15장의 말씀을 다시 보면, 이 말씀을 보면 사도바울이 사람들을 이해시키기 위해서 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 15절에 보면 분명히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라고 되어있는데 말이다. (고전 15:55)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하지만 우리의 상식은 무엇인가? 우리는 죄는 어디서 나온다고 보는가? 우리 몸에서 죄가 나온다고 보는데 말이다. 그렇다면 율법이 악한가? 그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로마서 7장에 보면 분명히 율법은 선한데, 그런데 거기서 죄의 권능이 나온다고 한다는 말이다. (롬 7:16)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내가 이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 인간은, 죄에게 예속된 존재 !! 그러면 이것을 어떻게 해석하면 되는가? 그것은 바로 율법에 의해서 죽은 자가 되어야, 즉 "율법이 있어줘야만 너는 죽은 자가 된다" 라는 것이다. 이것은 역사적 관계가 아니라 묵시적 관계인데, 마치 엘리야가 묵시적 관계에 의해서 세례요한과 연결이 되듯이 말이다. 그런 묵시적 관계에서의 율법은 우리로 하여금, 즉 우리가 무슨 짓을 해도 죄의 권능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그렇게 죄에게 예속된 존재로서 파악한다는 것이다. 이것으로 끝인데, 즉 율법이 있음으로서 우리가 죄를 짓는 짓는 자가 아니라, 아예 죄의 권능 안에서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된다는 말이다. 그것을 더욱 축약하게 되면, 우리 자신은 존재가 아니라 죄의 기능인데, 즉 "죄를 보여주는 기능인으로서 살아간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아담은 처음부터 기능인이었는데, 죄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말이다. 그래서 아담은 에덴동산에서 살아야만 한다는 것이다. ◈ 천국에는 누가 가는가? 그렇다면 그 다음에 "천국은 누가 가는가?" 라는 문제가 생기는데, 그것을 창세기 1장을 염두에 두고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왜 창세기 1장인고 하니, 보통은 창세기 2장과 3장부터 인간이 등장하니, 거기서부터 시작하는데 말이다. 그런데 저는 그 이전에 창세기 1장부터 언급을 하는데, 왜 그런고 하니, 그 이유가 "인간이 이전에 무엇이 있었기에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는가?" 라는 것이다. 그것을 따지기 위해서 그렇다는 말이다. 인간 이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이다.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어서 죄를 짓고 말았다" 라고 하게 되면, 자칫하면 "그렇게 인간이 죄를 짓을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신 하나님의 창조에 치명적 문제점이 있는 것이 아닌가?" 라고 주장하게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께서 부실공사를 하셨다는 말이다. 그렇지 않은가? 하나님께서 자기가 만든 인간에 대해서 "보기에 심히 좋았더라" 라고 하셨는데, 그런데 그것이 얼마 가지를 못해서 나쁜 것으로 드러난다면 그 책임자가 누구냐는 말이다. 하나님에게 책임추궁을 해야하는데, 그런 책임 추궁자로서 등장한 것이 누구인고 하니, 그가 바로 마귀라는 것이다. 그래서 마귀는 하나님의 원수가 된다는 말이다. ◈ 먼저, 창세기 1장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가? 그러면 인간 창조 이전에 창세기 1장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가? 1장 3절에 보면 "빛이 있어라" 라고 되어있는데, 그것이 첫째 날이고, 그리고 둘째 날에는 궁창을 만들어서 물과 물이 나뉘게 하셨는데, 그 궁창이 하늘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16절에 보면 "하나님이 두 큰 광명을 만드사" 라고 되어있는데, 그게 바로 해와 달인데, 이게 넷째 날이라는 것이다. (창 1:3)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그러니 이것이 참으로 신기하지 않은가? 무슨 말인고 하니, 지구가 먼저 있었고, 그 다음에 해와 달과 별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지금까지의 과학적 성과와는 너무나도 다르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빛은 어디서 나오는가? 태초에 빛이 있으라고 했는데, 즉 지구에 빛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빛은 지구에서부터 나온다는 말이다. 그 빛을 먼저 지구에 있는 식물에게, 나중에 동물들에게도 비추게 되는데, 아무튼 그렇게 하기 위해서, 그러한 시간을 정하기 위해서 하늘에 해와 달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창세기 1장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말이다. 물론 사람들은 이런 것을 따지기 싫어하는데, 왜냐하면 뒷감당이 되지 않으니 말이다.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되면, 그 다음에 과학적으로 어떻게 하면서 수많은 질문들이 쏟아지는데, 그것을 감당할 자신이 없다는 것이다. 147억 년의 우주가 어떻고, 호킹 박사에 의하면 지구는 47억 년이고 어쩌고 하면서, 배운 것을 다 이야기한다는 말이다. 쥬라기공원도 나오고 말이다. ◈ '빛이 있어라' 라는 것이 누구에게 집중되고 있는가? 그런 것이 감당이 안 되니 입을 다물고 있는데, 아무튼 빛이 지구로부터 나오고 해와 달에게 간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빛이 있어라" 라는 것이 지구에게 먼저 주어졌기에 말이다. 그렇다면 과연 지구에게 주어졌는지, 그것을 한 번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하나님의 모든 창조가 집중한 곳이 지구전체가 아니라 지구의 어떤 존재에 대해서 집중하고 응축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존재가 26절에 보면,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라고 하는데, 여기서 제가 인간이라는 말을 쓰지 않고 '하나님의 형상' 이라고 하겠는데, 그 하나님의 형상을 비추기 위해서 첫째 날에 빛이 필요했다는 것이다. (창 1:26)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 오직 한 분에게만 집중이 !! 이것을 간단하게 말하면, 하늘의 해와 달과 별을 비롯한 하나님의 모든 창조는 오직 예수님을 위하여, 예수님을 말미암아 만들었다고 하는 골로새서 1장 16절의 말씀을, 그것을 이 창세기 1장이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그 모든 것이 오직 한 분에게만 집중되고 있는데, 그분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이다. (골 1:15)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무엇으로 보는고 하니까, 인간으로 본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인간을 만들었다" 라고 하니, 여기서 형상을 떼버리고 "아무튼 인간을 만들었잖아요" 라고 하게 되면, 그것은 그 뒤에 창세기 2장에서 "선악과를 따먹지 마라. 따먹으면 죽는다" 라고 하는 그 죽음이 인간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형상과 관련이 되었다는 것을 사람들은 놓치게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즉 아담은 죽음이 무엇인지 모르니 말이다. (창 2:16)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무슨 말인고 하니까, 사람이 무엇을 알아야지, "하지 말라" 라는 것이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예를 들어서, 어떤 아이에게 "이것을 만지면 아야해요. 지난번에 만져서 아야했지요? 그러니 또 만지면 아야해요. 그러니 하지 마세요. 하면 아저씨가 때찌해요" 라고, 그렇게 되면 지시와 명령이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 아담은 죽어본 적이 없기에, 죽음을 몰라 !! 그런데 아담은 어떠한가? 아담은 죽어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한 아담에게 "니가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라고 하면, 그것이 무슨 의미인가? 3살 먹은 아이에게 "니가 이렇게 하면 너의 지분인 삼성전자 주식 356만주가 사라진다" 라고 하면, 그 아이가 무슨 말인지 알겠는가? 지분이 무엇이며, 또한 주식이 무엇인지를 말이다. "그게 너의 명의로 되어있어" 라고 해도, 그게 무슨 의미인지 전혀 모른다는 것이다. ◈ 니만 존재가? 나도 존재다 !! 아까 제가 뭐라고 했는가? 인간은 존재가 아니고 기능이라고 했는데, 인간이 자기를 존재로 알게 된 것은, 그것은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에 변형된 것이란 말이다. 그렇게 인간이 존재가 되게 되면 그만 하나님은 라이벌이 되고 마는데, 즉 "니만 존재가? 나도 존재다"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이렇게 "나 같은 존재를 위해서 너 같은 존재가 있었잖아" 라고 하는 것이 중세신학이라는 말이다. 즉 "나의 존재가 구원받기 위해서는 신의 존재를 믿어야한다" 라는 것인데, 그것의 극치가 곧 삼위일체라는 말이다. 예수님을 믿으면 되는데, 무슨 삼위일체를 또 믿어야 하느냐는 것이다. 부가적으로 숙제가 더 주어진다는 말이다. ◈ 삼위일체를 저에게 설명해보세요 !! 이 삼위일체가 바로 중세신학에서 나왔는데, 삼위일체의 근본은 존재로서, 기능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니 주님의 기능으로서 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나' 라는 존재가 구원받기 위해서 어떠한 신학을 추가적으로 더하려고 하는데, 즉 과외수업을 받아야 하는데, 그래서 그 삼위일체를 모르면 졸지에 이단이 된다는 것이다. 저는 그런 삼위일체를 주장하는 사람에게 다시 묻고 싶은데, "삼위일체를 저에게 설명해보세요" 라고 말이다. 이 삼위일체는 설명할 수가 없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아니오' 라는 것의 연속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입니다" 라고 단정적으로 설명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계속해서 "이것은 아니오. 또한 이것도 아니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아니오' 라고 계속해서 말한다는 것은, 삼위일체를 거론하지만 그 기본정신은 무엇인고 하니, "일단 나는 구원을 받은 자이다" 라는 것이 포함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게 얼마나 반칙이냐는 말이다. 주체의 자리에 우리가 들어가면 안 되는데, 거기에는 예수님이 들어가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우리는 '나' 라는 존재로 그 자리에, 즉 '나' 라는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이렇게 신학을 동원시킨다는 것이다. ◈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 다시 창세기 1장으로 돌아가서, 여기서 인간이란 것은 사실은 표면이고 그 안에는 하나님의 형상이 들어있다는 것이다. 그런 인간은 기능인데, 그러면 처음에도 말했지만 "죽음도 창조에 포함된다" 라고 했는데, 죽음도 하나님의 창조작업의 하나라는 것이다. 인간도 죽어야하니 말이다. 그렇다면 아담이 죽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고 하니, "장차 오실 메시야가 죽어야, 모든 창조의 목적인 안식에 이를 수 있다" 라는 것이다. 그러니 인간은 앞서서 폼을 낸 것이란 말이다. 칠판에서 제일 먼저 지웠던 것이 무엇인고 하니, 오늘 우리가 율법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말이다. 예수님과 제자들의 관계에 있어서, 이것이 과거로 퍼지게 되면 구약이 되고, 앞으로 퍼지게 되면 신약으로서, 특히 사도들의 시대가 되는데, 그게 사도들의 복음이라는 것이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하기 위해서, 마치 기차가 기적을 울리면서 계속해서 달리듯이 그렇게 줄기차게 달려왔는데, 그리스도에게까지 말이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는 역사적 존재가 아니라 무슨 존재인가? 묵시적 존재라는 것이다. ◈ 예수 그리스도는, 묵시적 존재 !! 하지만 이 묵시는 있는 그대로 표현하지 못하고, "무엇이 아니다" 라고 할 수밖에 없는데, 즉 "역사가 아니다" 라고 말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언어와 단어가 역사 안에서 소통되는 것이기에 말이다. 그러니 역사 안에 있는 단어를 역사 바깥으로 표현할 때는, "무엇 무엇이 아니다" 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역사가 아니다" 라고, 즉 "시간의 흐름에 구애받지 않는다" 라고 하게 되는데, 그것을 성경에서 무엇이라고 하는가? "알파와 오메가다" 라고, 혹은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하루가 천년 같고" 라고 하면, 아마 "3일이면 3천년이네" 라고 할 사람이 있지 싶은데, 그것을 반대하기 위해서 "천년이 하루 같다" 라고 하신다는 말이다. 5만년을 지나고, 10만년을 지나도 여전히 하루라는 것이다. (벧후 3:8)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 '차이남'을 통해서 !! 여기서 '하루'는 24시간이 아니고 하나의 '때'를 의미하는데, 그래서 창세기 1장의 '첫째 날', '둘째 날' 이라고 하는 것은 24시간의 날이 아니고 때로서 구분한다는 것이다. 아침이 되고 저녁이 되는데, 그 자체가 무엇인고 하니, 묵시가 역사 속에 개입할 때는, 24시간의 시간개념이 아니라, 갈라짐을 통해서 묵시를 표현한다는 것이다. 즉 갈라짐이 묵시를 표현하는 방법이라는 말이다. 갈라짐, 혹은 차이남이 말이다. 그래서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여기서 중요한 것은 몇째 날이냐는 것이 아니라, 저녁과 아침이 구분되는 틈, 그렇게 갈라진 틈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묵시적인 작업을 하고 있음을 알라는 것이다. 지금도 저녁이 있고, 또한 아침이 있는데, 그러니 지금도 역사에 묵시가, 즉 주님이 개입하신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날 염려는 언제 하라고 하시는가? 그날에 족하다고 하시는데, 즉 "내일 염려는 내일에 하고, 오늘 염려는 오늘로서 족하다" 라는 것이다. 이 세상의 역사는 인간이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위에서 묵시세계가 주도하는데, 그러면 역사는 왜 있는가? 묵시만 있으면 되지 않느냐는 말이다. ◈ 그러면 역사는 왜 있는가? 그것은 바로 뱀, 즉 악마의 정체를 드러내기 위해서 역사가 있다는 것이다. 역사에서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한 바탕 전쟁을 벌리게 되는데, 물론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은 둘 다 묵시에 속한 것이지 역사에 속한 것은 아닌데, 그러니 역사는 묵시가 보여주는 하나의 그림자라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하늘에 구름이 떠 있으면 땅에는 무엇이 지나가는가? 자기 그림자가 아닌 뭔가 커다란 시커먼 것이 지나가면, 위를 쳐다보면 구름이 지나가고 있다는 것이다. 하늘에 구름이 지나가면 아주 넓은 영역에서 그림자가 생기면서 빠르게 이동하는 것을 느낄 수 있다는 말이다. 그것을 그냥 느끼지는 못해도 카메라를 가지고 한 지점에서 14시간을 노출시켜서 찍게 되면, 옥상이 시커멓게 되었다가 밝았다가 한다는 것이다. 그게 구름이 위해서 지나간 것인데, 그렇게 위에서 묵시가 지나가니, 그 묵시를 따라서 이스라엘의 역사에 그런 현상들이 일어난다는 말이다. ◈ 이벤트로 인한, 새롭게 달라진 이스라엘의 위상 !! 그런데 가끔 번개가 치는데, 그 번개를 성경에서는 언약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번개는 묵시와 역사가 만나는 순간인데, '번쩍' 하면서 나무가 하나 부러지고, 또 '번쩍' 하면서 불이 나고 말이다. 그 번개를 역사적 용어로서 영어로는 '이벤트' 라고 하고, 우리말로는 '사건'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 사건들 중에서 유명한 것이 '다메섹 사건'이고, '홍해 사건', '여리고 사건' 등등, 그렇다는 것이다. 즉 언약은 사건이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번개는 치면 그만인데, 그런데 그 번개로 인해서 나무가 불에 탔다고 하면, 그 나무는 어떻게 되는가? 불에 탄 채로 우리 눈에 목격이 되는데, 그것이 바로 언약과 언약 사이에서 새롭게 달라진 이스라엘의 위상이라는 것이다. 모세언약에 있어서는 십계명을 준 것이 사건인데, 모세가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그 내려오는 모세에게 묻기를, "모세 할아버지, 이 돌판을 어디서 구했습니까?" 라고 하면, 모세가 뭐라고 하겠는가? "하나님께서 친히 돌판에 새겨주셨어" 라고 하는데,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 말고, 하나님은 빼고 이야기합시다. 어디서 구했습니까?" 라고 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역사적 인식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하나님은 빼고 이야기합시다. 돌판을 어디서 구했습니까?" 라고 하는데, 그게 무슨 의미인가? "모세 당신만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우리도 하나님을 믿습니다. 제가 다시금 묻습니다. 돌판은 어디서 구했습니까?" 라고 나온다는 말이다. 그러니 일상적으로 하나님께서 관여한 것 말고, 번개를 치든지 해서 뭔가 위상을 변화시키는, 궤도를 바뀌게 하는 사건이 있다는 것이다. 특이한 사건인데, 그것은 그때까지 일어난 일상적인 것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평소에 우리도 하나님의 은혜로 일도 하고 밥도 먹습니다" 라고 하는데, 하지만 특이한 사건이 벌어지게 되면 지상에 있는 것으로 설명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 엘리야와 세례요한은 서로 공통점이 없어 !! 오는 엘리야가 그 엘리야가 아니고 세례요한이 왔을 때, 여기서 세례요한과 엘리야를 비교해보라는 말이다. 서로 공통점이 없다는 것이다. 엘리야의 사진을 찍어도, 그것이 세례요한이 아니라는 말이다. 세례요한의 아버지는 사가랴이지, 엘리야의 아버지가 아니라는 말이다. 역사로서는 이게 연결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성령을 받았는데, 그런데 그 사람을 보고 "당신은 성령을 받기 위해서 무엇을 했습니까?" 라고 한다면, 그렇게 묻는 것 자체가 실례라는 말이다. 만약에 "성령을 받기 위해서 기도를 했습니다" 라고 한다면, 그 자체가 잘못된 답변이라는 것이다. 성령은 바람과 같이 오기 때문에, 물론 높은 산에 가면 바람이 불기도 하는데, 하지만 우리 마음대로 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니 그것이 사건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기존에 이 세상을 바라보던 것과는 전혀 다른 시선으로 이 세상을 바라보게 된다는 말이다. 이전에는 자기 중심이었는데, 그런데 성령을 받고 난 다음부터는 아우라 중심이라는 것이다. 자기를 포함해서 이 세상전체가 죄 속에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데, 굳이 산 위에 올라가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산밑에 가도, 술집에 가도 괜찮다는 말이다. ◈ 아줌마, 여기 소주 한 병요 !! 성령을 받기 이전에는 술집에 가서 "아주머니, 여기에 소주 한 병이요" 라고 해서 술을 먹든 사람이, 성령을 받고 난 다음에는 어떻게 되겠는가? 물론 그럴 가능성이 별로 없겠지만, 아무튼 술집에 가서 소주를 한 병 달라고 한다면, 그것은 주께서 소주를 주문하라고 자기 마음에 집어서 그렇게 되었음을, 즉 주체가 자기에게서 주님으로 옮겨졌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데, 그렇게 모든 일에 생활의 층이, 즉 안목이 달라지게 된다는 것이다.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 라는 것이 그런 의미인데 말이다. (롬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그러면 그 사람은 왜 그렇게 소주를 주문해야 하는가? 그것은 어제도 말했지만 '배제의 원리' 라는 것인데, 천국에서 배제하고자 하는 주님의 일관되고 끈질긴 작업으로서 "너는 술이나 먹고 지옥이 가라" 라는 것이다. 술을 마시면서 "오늘도 감사합니다. 할렐루야" 라고 하는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하는 사람이 있다면 구원을 받은 사람이고 말이다. 그게 고린도전서 5장에 나오는데, 아버지의 첩과 연애한 사람의 경우에, 몸은 내어주고 영은 구원을 받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다는 것이다. 물론 술을 마시는 것을 그것과 비교한다는 것은 좀 그렇지만 말이다. 아무튼 술집에 가서 술을 마시면서 "주님을 찬양합니다" 라고 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교회에는 술집에 가서 기도하는 분이 있는데, 그것은 아주 특이한 경우인데, 남들이 따라하기가 곤란하지 않겠느냐는 말이다(ㅋㅋ). ◈ '다윗언약' 이라는 이벤트 !! 다윗언약의 경우에, 모세언약을 주고 다윗언약과의 그 사이에서는 계속해서 '율법으로 말미암아' 라고 되는데, 그런데 다윗언약에 오게 되면, 한 사람이 의로우면 백성들도 덩달아서 그 왕 때문에 의롭게 되는데, 즉 왕과 백성의 관계가 새롭게 정립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다윗언약이라는 하나의 이벤트가 된다는 말이다. 그 이벤트 안에서 다윗은 하나의 죄인이 되어버리고, 그런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여디디아, 즉 솔로몬을 낳게 하심으로서, 인간이 죄를 지음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죄를 짓게 하셔서 사랑을 주신다는 것을 보여주신다는 말이다. 그래서 "죄가 나를 구원한다" 라는 것이다. 의가 자기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죄가 자기를 구원한다는 말이다. ◈ 죄가 갈수록 디테일하게 !! 죄를 짓게 하셔서, 물론 이 죄는 날이면 날마다 살아가면서 더욱 세밀해지는 죄인데, 과거에는 물을 마시는 것은 죄가 아닌 줄 알았는데, 그런데 이제는 그것마저도 죄임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죄의 폭을 넓혀가면서, 그동안 자기의 잘남을 바쳐왔던 그 받침대 역할을 했던 것을, 그런 온갖 법을, 교회법을 비롯해서 율법을 지켜왔다고 우겼던 것들이, 그런 것들이 공중에서 분해가 되면서 다 떨어져나간다는 말이다. 그렇게 흩어져버리는데, "안 돼. 가지마" 라고 붙잡아도 떠나고 만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자기는 평소에 부모님을 공경한다고 여겼는데, 아침마다 전화를 드리고 용돈도 드리고 말이다. 그런데 어떤 교회의 집사님의 말을 들어보니, 그분은 치매에 걸린 시어머니를 그렇게 모셨다고 하는데, 거기에 비하면 자기는 태만이고 자기 정당화였음이 드러나고 만다는 것이다. 그렇게 자기보다 더 부모를 공경한 사람을 보니 자기는 그야말로 아무 것도 아니었다는 것이다. 옛날에는 부모를 공경한다는 소리를 듣고, 그것으로 인해서 자기 자신에 대해서 당당하게 여겼는데, 그런데 이제는 그것마저도 떠나가고 마는데, 그러니 그것이 너무 아쉽다는 것이다. 이전에는 그것 때문에 버텼는데 말이다. 우리 권사님의 경우에 자식을 잘 키우셨는데, 그런데 이제 와서 보면 그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 그것도 역시 떠나고 만다는 것이다. "저만치 떠나가네" 라는 노래도 있지만, 그렇게 다 떠나버린다는 말이다. 그렇게 "나는 무조건 살아야 돼" 라고 할 수 있는 자기 정당성이 그만 다 공중으로 흩어지고 만다는 것이다. ◈ 니가 없어도 왕이 있잖아 !! 그렇게 됨으로서 무엇을 바라보게 하는가? "니가 없어도 왕이 있잖아!" 라고, 즉 오직 그리스도만을 바라보게 하신다는 말이다. 다윗의 자손인 그분을 말이다. 마치 독수리 5형제가 완전히 변형되는 것처럼, 우리의 모든 것이 그리스도의 왕 됨에 있어서 종으로서 맞추어진, 그런 백성으로서의 자세를 갖추라고 이것저것들이 다 떨어져나가고 만다는 것이다. 그런 떨어나감을 위해서 율법은 지금도 율법의 기능을 다하기 위해서, 그래서 성경말씀은 우리에게 여전히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 다시, '죄에 대해서 죽었다" 라는 것은? 다시 로마서 6장으로 돌아가서, "죄에 대해서 죽었다" 라는 것은, 2절에서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라고 하는데, 이게 바로 묵시적 용어라는 것이다. 이것이 오늘강의의 해답인데, 이것을 우리가 지킬 수가 없다는 말이다. 주님께서 그렇게 선언을 하시는데, 즉 "너희들은 율법에 대해서 죽은 자이다" 라고 말이다. 이것은 "율법에 대해서 죽었으니 앞으로 바르게 살아라"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너희들은 율법에 대해서 죽었으니, 너희들이 앞으로 어떻게 살더라도, 그것이 티가 나게 되고 그것을 보여주게 될 것이다" 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롬 6:1)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 기능인으로서의 제자들 !! 그러니 제자들과 예수님의 사이에서 있어서, 제자들이 새삼스럽게 예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입장이 아니라, 이미 자기들은 죄인으로서 주님이 십자가에 달릴 때 전혀 기여한 바가 없다는 것을, 그것을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그 묵시적 성과를 받아내어서 표출해주는 기능인으로서 멈출 뿐이라는 것이다. 제자들이 말이다. 그리고 바로 그것을 성령을 받는 우리가 하고 있다는 말이다. 우리는 성경을 율법적 기능으로 보는데, 그래서 누구든지 로마서 6장을 보게 되면, 여기 1절과 2절의 말씀을 읽고 나면, "그래 맞아. 우리는 죄에 대해서 죽은 자이기 때문에, 죄가 아닌 의를 행해야 돼" 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오류를 범함으로서, 그런 것이 바로 십자가 앞에서 잘못된 해석임이 드러나도록, 성령께서 그렇게 하신다는 말이다. 그렇게 된 다음에 다시 보게 되면, "이 말씀은 주님이 이미 다 이루었구나" 라고 하게 되는데, 그렇게 주님이 이루어놓았는데 우리에게는 갭이 있으니, 우리는 "내가 지킨다" 라고 생각하는 그 갭을 일종의 아우라처럼, 즉 하나의 영역으로 우리를 덮치게 될 때, "주여, 풀은 사라지고 말씀만이 영영토록 하게 하옵소서" 라고 하게 된다는 것이다. 자기는 그것에 하나의 기능으로서 역할을 담당하고 말이다. ◈ 우리가 장사된 적이 있는가? 그리고 여기 3절과 4절에 보면, 특히 4절에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라고 하는데, 물론 이것은 우리가 앞으로 경험할 일은 분명하지만, 그러나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이야기는 아니라는 것이다. (롬 6: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왜냐하면, 우리가 언제 장사된 적이 있는가? 우리는 결코 죽은 적이 없다는 것이다. 주님이 돌아가실 때는 혼자였는데, 그때는 막달라 마리아도 없었고, 물론 그 근처 어디에 있었겠지만 말이다. 양쪽에 강도만 달려있었지, 장사가 되신 분은 주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안에 어떻게 되는고 하니, 우리는 우리 자신을 생각할 때 개인적인 개별적 존재로 생각한 것처럼, 주님도 그런 개별적 존재로 죽었다고 오해를 했는데 말이다. 하지만 주님은 개별적인 존재가 아닌 묵시적 존재이기 때문에, 그 안에 어떤 영역이 있고, 그 영역을 로마서 6장에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내가 죽을 때 너희도 있었다" 라는 것인데, 거기에 대해서 우리는 무엇이라고 하는가? "예수님, 언제 말입니까? 무슨 소리를 하십니까?" 라고 하는데, 그러면 예수님은 "너희들이 살아나면 알게 된다"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성령이 오시게 오면, 우리는 이미 죽었고, 이제 사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사시는데, 이것이 맞는 이야기임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 이게 바로 영적인 사람 !! 물론 이것이 역사적인 관점에서 맞지 않지만, 하지만 묵시적 관점에서 보면, 말씀이 소통되는 말씀의 세계 안에서는 이것이 실제 현실이라는 것이 믿어지는 사람이 바로 영적인 사람의 특징이란 말이다. 즉 묵시적 영을 받은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라는 것이다. 그러니 율법은 있어야 하는데, 지적을 당해야 되고, 하지만 우리는 그런 지적을 당하기 싫어서 다른 의를 이루기 위해서 또 다른 율법을 동원시키는데, "주여, 이 말씀은 제가 지키지 않았습니까?" 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까불고 나설 때 갈라짐이 생기면서 십자가를 다시 바라보게 되는데, 그러면 "아하, 주께서 다 이루셨구나" 라는 것을 또 다시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율법의 기능이라는 말이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께서 다 이루신 일을 건방지게도 우리가 흉내를 내고 모방을 했습니다. 우리 자신도 얼추 비슷하게 예수님처럼 살아갈 수 있다고 자부를 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바로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들을 존재로 여긴 오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도 그러한 오류를 만들어내는 것 자체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표현으로서 나타나게 해주시고, 오직 모든 것을 다 이루신 주님의 용서하심만 자랑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소주도 마실 줄 모르고, 믿음도 없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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