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대구강의] '잠언'속의 그리스도 18 - 초과
14,10,20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오늘은 교재 65페이지부터 살펴보자.
** 성경에는 두 가지 노선이 있어요. 하나는 뭐냐 하면 율법노선이고, 그리고 지혜노선입니다.
◈ 율법노선과 지혜노선 !!
이게 꽤나 중요한 주제인데, 즉 율법과 지혜가 어디에서 시작해서 갈라졌고, 어디에서 만나게 되는지 말이다. 그러니 율법과 지혜의 차이점이 무엇이냐는 것인데, 그리고 그 차이점이 십자가에서 어떻게 결합이 되느냐는, 그 문제라는 것이다.
율법과 지혜를 알기 쉽게 생각하면, 하나님께서 지옥과 천국을 이미 준비해놓으시고, 지옥에 갈 사람은 지옥에, 천국에 갈 사람은 천국에 보내신다는 것이다. 그런데 천국에 가는 사람은 애초부터 천국에 골인하는 자들이 아니라, 처음에는 지옥으로 갔다가, 누군가가 살려내어서 천국에 가게 된다는 것이다.
◈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되었는가?
왜냐하면, 천국은 하나님의 나라인데, 그러니 인간은 애초부터 살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인간은 에덴동산이 끝인데, 그게 인간들이 사는 자기 집의 전부라는 말이다. 그런데 감히 인간이 에덴동산이 아닌 하나님이 사는, 천사들이 있는 하늘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은 그야말로 주제 넘는 짓인데, 특혜도 그런 특혜가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 뭔가 하나님 스스로가 반칙과 같은 것이 있을 수밖에 없는데, 하나님이 사시니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이다. 그런데 거기에 사람이 들어간다는 것은 특단의 조치가 취해졌다는 것이고, "인간은 여기에 살아야한다" 라고 하는 에덴동산의 경계선이 이제는 허물어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인간의 시대는 끝나고 신의 시대로 들어가는데, 인간의 에이온, 즉 인간의 세대는 끝나고, 신의 에이온으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그 하나님의 세대는 둘로 나누어지는데, 하나는 지옥이고 다른 하나는 천국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지옥에 가게된 주동자가 악마라고 알고 있는데, 악마는 원래 천사라는 말이다. 즉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 악마는 사람이 아니다 !!
이 뉘앙스가 상당히 중요한데, 즉 "악마는 사람이 아니다" 라는 것이다. 그렇게 악마는 사람이 아니니, 당연히 '사람들'도 아니고, '사람이 사는 사회'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악마는 이런 사람, 사람들, 사람사회를 어떻게 했는가? 죄로서 지배를 했다는 것이다.
성경에서 이런 것이 참으로 신비하고 놀라운 것인데, 악마가 인간에게 개입을 함으로서 인간세계가 그만 날아가 버리고, 인간은 인간들의 세계에서 벗어나서 천국에 들어가게 되었다는 말이다. 악마의 작전이 완전히 실패하고 말았는데, 가만히 있으면 그냥 에덴동산에서 아이나 낳고 살텐데 말이다.
그런데 괜히 인간 세상에 개입해서, 인간들이 인간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은 끝나고, 인간들이 어디서 살게 되었다는 말인가? 하나님과 천사만이 사는 천국에, 즉 감히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악마가 호작질을(?) 해서, 괜히 쑤셔 가지고 말이다.
◈ 여자여, 따먹어도 된다 !!
물론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은 악마와 더불어서 지옥으로 가는데 말이다. 지옥에 가면 그들은 그것을 알게 되는데, 그러면 "악마 니가 우리를 이렇게 지옥에 오게 했다" 라고 하면서 따지겠지만, 그러면 악마가 뭐라고 하겠는가? "너희들이 내 말을 듣기는 왜 듣는가? 들은 너희들이 바보지" 라고 나오는데, 그것을 깔끔하게 단축해서 말하면, "여자여, 따먹어도 된다" 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따먹으면 신이 될 수 있다는 내 말에 속아넘어간 너희들이 바보다. 나는 속이는 것이 전문이야. 그런데 거기에 속아놓고는 무슨 말이 그리 많아?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너희들의 책임이지, 그러니 더 이상 나에게 뭐라고 하지마" 라고, 그렇게 마귀가 나온다는 것이다.
이런 것이 그냥 공상만화이고 소설이고 드라마라면 몰라도, 그게 아니라 제대로 된 진짜 현실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서 말이다. 이게 교회가 사람들을 끌어 모으기 위해서 만들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조작된 인간의 작품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죽었다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심으로서 실제상황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방금 지옥에서 인간과 악마가 한 이야기가, 즉 "니가 왜 나를 꼬셨노?" 라고 하니, "그렇게 당한 니가 문제지" 라고 하는 것이 실제상황이라는 것은, 달리 말하면 우리가 사는 인간사회는, 즉 사람, 사람들, 사람사회, 이것이 바로 소설이고 허상이란 말이다.
◈ 허상, 허상, 허상 !!
지금 우리 눈에 보이는 난로도 허상이고 의자도 허상이고 카메라도 허상인데, 나아가서 우리의 몸도 허상이라는 것이다. 우리 몸이 허상이라는 것은 간단히 알 수 있는데, 늙어죽으면 그만이니 말이다. 그렇게 죽고 나면 자식들은 앞에서는 "에고, 에고" 라고 하면서도 뒤에서는 무엇을 하는가? 조의금을 세고 있다는 것이다(ㅋㅋ).
엄마가 젊었을 때는 예쁘고 맛있는 것도 해주고 빨래도 해주고 해서 좋지만, 늙은 엄마는 싫다는 말이다. 물론 엄마도 그것을 알지만, 그 젊음을 그대로 유지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연예인들이 자꾸 젊어지는 것을 보고, 물론 농담이지만 "방부제를 삶아먹었나?" 라고 하는데(ㅋㅋ), 하지만 방부제를 먹는다고 해서 늙지 않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뭔가 닳아 없어지고 희미해지는데, 뚜렷하던 선이 점선이 된다는 것이다.
◈ 그놈, 참 똘망똘망하네 !!
우리도 태어날 때는 모두들 예쁘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물론 생후 6개월까지만 말이다. "아이쿠, 눈이 참 똘망똘망하네" 라고 하는데, 하지만 나이가 80이 되면 그 눈이 어떻게 되는가? 그냥 희미한 눈만 있지 말이다. 그 똘망똘망하던 것이 어디로 갔는가? 그만 사라지고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중에는 희미한 눈을 가진 늙어빠진 육체마저도 없어지고 마는데, 그러니 결국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있어도 없는 것인데, 바로 그 있음과 없음 사이에서 튀어나오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우리의 바닥재, 즉 힘이 실린 죽음인데, 그것이 우리는 살리는 죽음일 수도 있고, 지옥에 보내는 죽음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모든 힘은 죽음이 다 가지고 있는데, 살아있는 자기가 살아가는 힘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니고 말이다.
◈ 교회에 나와도 여전히 불교신자 !!
그래서 어제 낮 시간에 뭐라고 했는가? 불교신자는 자기가 자기를 살리는 것인데, 그러니 굳이 절에 가지 않고 교회에 나와도 여전히 불교신자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모든 행위가, 즉 기도, 전도, 헌금, 예배, 그 모든 것이 자기를 살린다고 생각하니, 그게 바로 전형적인 불교신자라는 것이다. "막 사세요" 라고 그렇게 이야기해도 사람들은 알아듣지를 못한다는 말이다.
우리가 구제를 하면 안 되는데, 왜냐하면 구제를 원하는 사람의 바램이 무엇인가? 자기를 도와달라는 것인데, 그러면 왜 도와달라고 하느냐는 말이다. "당신이 한 번만 도와주면 내가 이 땅에서 살겠다" 라는 것인데, 그러니 우리가 구제를 하게 되면 그 사람은 자기 목적을 달성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목적이 무엇인가? 방금 이야기했지만, 이 땅에서 죽는 것이 아니라, 사는 것이 목적이란 말이다. 이 땅에서 사는 것이 말이다.
◈ 인간은 애초부터 죽음의 바닥재를 !!
어제 낮 시간에 설교한 것처럼, 인간은 애초부터 죽음으로 바닥재를 깔아놓았다고 했는데, "선악과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라고 말이다. 그러니 에덴동산에서부터 이미 바닥재가 죽음으로 깔려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하나님께서 '구제하라' 라고 하신 그 목적이 어디를 겨냥하고 있는고 하니, "구제해서 죽여라" 라는 것이 목적이란 말이다.
진짜 제대로 된 현실은 무엇인가? 우리 인생의 바닥에는 죽음이 깔려있다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고, 그래서 그 죽음과 아울러서 드러나게 될 때 하나님의 말씀은 성취가 되고 영광을 받으신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구제를 요청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죽으려는 것이 아니라 사는 게 그만 목표가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말씀을 준 목적이 무엇인고 하니, 인간들이 왜 죽고 죽어가고 있는지 그 이유를 알라고 주셨는데, 그게 말씀을 주신 목적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살려고 하는 사람을 구제하게 되면, 그 구제 행위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훼손하게 된다는 것이다.
◈ 용서하지 마세요 !!
제가 미국에서 '주기도문' 강의를 하면서 "용서하지 마세요" 라고 했는데, 왜냐하면 용서를 하게 되면 용서를 받는 자는 용서하는 자의 종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용서를 받은 사람이 그렇게 용서를 받았다고 하는 티를 내줘야, 그 사람이 뭐라고 하는가?
"하나님이여, 저 사람을 보세요. 제가 용서를 해주어서 저 사람이 용서함을 받았습니다"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 제가 이 정도입니다" 라고 자랑질을 하고 싶어서, 그렇게 자기에게 용서받은 자들을 자기 인생을 아름답게 꾸미는 재료로서 자꾸만 인용을 해야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런 사람은 자기 의로움을 버리겠는가? 아니면 유지하겠는가? 당연히 유지하는데, 왜냐하면 자기는 사람을 용서할 정도로 잘났으니 말이다. 하지만 주님은 의인이 아닌 죄인을 부르려 오셨는데, 그런데 그런 인간은 남을 용서함으로서 점점 더 죄인이 아니라 잘난 의인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용서하면 안 된다는 말이다. 그리고 "구제하지 마세요", 그리고 "막 사세요" 라고, 이것이 복음의 3종 세트인데, 그야말로 기쁜 소식이란 말이다.
◈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
산상설교에서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시는가? "너에게 구하는 자에게 그저 주어라" 라고 하시는데, 그러면 어떤 경우에 그저 줄 수 있는가? 자기 것을 주게 되면, 그 사람은 방금 말한 용서의 경우처럼, 그 사람은 자기에게 도움을 받은 사람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마 5:42)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그러면 그 사람은 어떤 경우에라도 자기 밑에서 그만 자기의 하수인이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니가 옛날에 나에게 이천만원을 가지고 간 것 때문에 잘 되었잖아. 그게 아니면 너는 이미 거지가 되었어. 그러니 니가 어디서 까불어?" 라고 하는 생각이 계속해서 깔려있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면 어떤 경우에 그저 줄 수 있는가? 사람은 그저 주는 법이 없는데, 그저 주더라도 무엇을 챙기는가? "역시 나는 주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신앙인이 맞아" 라는 것을 증명하는, 그렇게 그것을 자기 마일리지로 계속해서 쌓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저 줘놓고는 그런 이득을 챙긴다는 말이다. "주여, 주님의 말씀대로 살았습니다. 그러니 나는 잘났지요?" 라고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인간이라는 것이다.
◈ 내가 맡겨놓은 것을 내놔라 !!
그러면 어떤 경우에 그저 주는고 하니, 자기 것을 맡겨놓고, 그 다음에 "맡겨놓은 것을 내놔라" 라고 할 때, 그때는 그저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줄 때 자기 자랑을 할 수 있는가? 맡겨놓은 주인이 달라고 하는데, 자기 것도 아닌 것이니 그저 주어야 한다는 말이다. 즉 "주신 분도 하나님이요, 가져가신 분도 하나님이다" 라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에게 맡겼다는 것 자체가 무엇인고 하니, 우리 자신이 바로 주님이 우리에게 맡긴 주님의 것이란 말이다. 즉 "내 몸이 내 몸이 아니라, 주께서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활용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맡긴 몸이다" 라는 것이다. 그러니 "죄를 지어라. 그리고 그 죄를 지은 몸을 내가 영화롭게 하겠다" 라고 하신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죄를 짓고, 그렇게 죄를 지은 것을 용납하시고, 그 죄를 용서하심으로서, 그 과정에 투입된 주님의 모든 작업과, 그런 주님의 행위로서, 그렇게 하나님께서 스스로 받아내실 때, 그러면 오직 주님에게만 영광이 된다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죄를 짓도록 허락하시고는, 그 죄를 씻어주신다는 말이다.
◈ 아버지의 사랑만이 드러나야 !!
탕자가 아버지의 재산을 다 날렸는데, 그런데 아예 재산을 나누어주지 않았으면 어떻게 되었겠는가? 탕자 자체가 생겨나지 않는데, 그러면 탕자를 용서하신 아버지의 사랑도 역시 나타날 길이 없다는 말이다. 그렇지 않은가요? 탕자로 하여금 탕자가 되게 해놓고는, 탕자가 멀리서 오니 뛰어나가서 끌어안으면서 뭐라고 하는가? "너는 탕자가 아니고 내 아들이야" 라고 하면서 아들로 반겨주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하나님은 무엇을 노리시는가? "니가 나에게 한 것이 있으니 내 백성이 아니다" 라고 하는 그 과정, 즉 탕자가 되게 하고 그 돌아오는 과정에 있어서, 일체 탕자의 공로는 없었고, 그 탕자를 받아주시는 아버지의 사랑만이 흐르고 넘쳐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에게 영광이 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맡겨놓은 것을 도로 찾는 식으로 해서 "그저 주어라"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에게 요청하는 사람은 어떤 경우인고 하니, 주님에 의해서 몽땅 다 털려서, 주님에게 자기의 모든 건강과 생명을 다 빼앗기고는, 그것을 굉장히 감사해하고 만족하게 여기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 주께서 나의 소원을 들어주시는구나 !!
다시 말해서, "이제 가는구나. 이것이 바로 죽음이구나. 드디어 주께서 나의 소원을 들어주시는구나. 나도 이제 주님을 만나서 영원히 함께 살게 되는구나" 라고 하는, 그런 사람만이 주님에게 속한 소자이며, 바로 그런 소자에게 한 것이 곧 주님에게 한 것이 된다는 말이다.
하지만 아쉬워서 교회에 와서 도와달라고 하는 사람이나, 일가친척에서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은 전혀 죽으려고 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살아남으려는 종자돈을 마련해보려고 그렇게 도움을 요청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런 사람은 도와주면 안 된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해서 도와주면 그 사람은 살게 되는데, 그러면 지옥과도 이 세상에서 고생만 실컷 더 하게 된다는 것이다. 차라리 도와주지 않으면 빨리 은퇴를 하게 될텐데 말이다. 물론 미운 놈에게 떡이나 하나 더 주겠다는 심보라면 몰라도, 그렇지 않고는 도와주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 부모는 자식을 도와줌으로서 !!
부모가 되어서 자식이 어려울 때 도와주지 않는다고 하면 말이 안 되는데, 사실은 자식에 어려울 때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자식을 늘 살펴서 어렵다고 하는 낌새만 들어도 자진해서 도와주려고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그런 부모가 없는 것 같은데(ㅋㅋ), 자식사랑이 어느 정도인고 하니, 자식이 어려워서 손을 벌리면 도와주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어려워라, 어려워라. 내가 도와줄 게" 라고 하는 것이 부모의 자식사랑이라는 것이다.
그것을 또 자식들이 알고 이용해먹는데, 여유가 있으면서도 어려운 척을 한다는 말이다. 아예 엄살을 부리는데, "엄마, 힘들어서 못살겠어요"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러면 엄마는 뭐라고 하는가? "아버지에게는 비밀로 해라. 내가 좀 도와줄게"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집에 가면 해놓은 것은 부모의 집도다 훨씬 더 비싼 것으로 꾸며놓고는 말이다. 그렇게 부모의 약점을 이용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때 "부모는 과연 그 자식을 도와주어야 하는가?" 라는 문제가 생기는데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가 불교신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내 자식, 내가 아니면 누가 살려주겠노?" 라고 말이다. 그것을 그대로 베풀어주는 것, 그게 바로 탕자의 노선에 접어든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탕자의 순환구조에 말이다.
그렇게 해서 도와주면 그 자식이 그때는 감사하지만 돌아서면 어떻게 하는가? 그야말로 입을 닦아버리는데, 자기 힘으로 인생을 살았지 결코 누구의 도움을 받은 적이 없다고 하면서 말이다. 설령 도와준 사람이 부모라고 해도, 인간은 자기 자존심을 벗어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자기가 잘나서 살았다고 한다는 말이다.
그러면 부모는 자식을 도와주고는 다시 한 번 실망을 하게 되는데, 그러면서 무슨 소망이 생기는가? 우리가 바라는 소망은 자식과 같이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늘나라에 소망을 두게 하는, 그러한 주님의 전략에 의해서, 그런 절차로서 우리는 자식을 도와주려는 마음이 생길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여러분도 주저하지 마시고 자식을 도와주면 되는데, 아주 간단하다는 말이다. 물론 그 어떤 효과도 기대하지 말고 말이다.
계속해서 도와주었기 때문에 자식은 어떻게 나오는가? "이번에는 제발 교회에 한 번 나오너라" 라고 해도, 물론 그때는 나가주지만 그 다음에는 나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다음에 부모와 거래할 때 또 그게 필요하기 때문에 말이다. 계속 교회에 나가버리면 다음에 거래할 게 없어진다는 것이다. 교회에 나가지 않아야, 그것을 핑계로 해서 또 거래가 성사된다는 말이다.
◈ 지혜는 곧 '초과' !!
성경에서 율법과 지혜를 이야기하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즉 하나님께서 지혜와 율법을 주신 것은, 이 지혜라는 것이 우리 인간의 타고 난 것을 넘어선다는 것이다. 이것을 다음과 같은 단어로 표현할 수 있는데, 즉 '초과' 라고 말이다. 이게 오늘 강의의 제목이 될 수도 있는데, 다른 말로 하면 '넘어섬' 이라고 할 수도 있고 말이다. 즉 처진 울타리를 그만 넘어선다는 것이다.
어제 오후 시간에도 약간 언급을 했는데, 요한계시록 6장 이야기를 하면서 말이다. 우리는 이 지구가 전부인 줄 알고 있는데, 특히 젊은 사람들은 말이다. 그런데 이 지구를 둘러싸고 있는 영적인 것이 있는데, 지구는 그런 영적인 것에 포위된 상황이란 말이다. 그게 바로 '초과' 라는 것인데, 우리가 밤을 새워서 공부하는 이상의 영적 세계가, 즉 초과된 세계가 영적인 세계 안에 묻혀있다는 것이다.
◈ 사건, 영적 사건, 성령의 사건 !!
그러니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이 무엇인가? 그 초과된 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물질세계를,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라고 여기는 인간세계를 찌르면서 들어온다는 것이다. 그것을 '사건' 이라고 하는데, 영적 사건, 즉 성령의 사건이란 말이다. 그렇게 찌르고 들어오면 여기서는 당연히 찢어지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서 영적인 요소가 우리 속에 스며들어오게 된다는 것이다. 물에 잉크를 타면 퍼지듯이 말이다.
더 쉬운 예로는, 고용한 연못에 돌멩이를 던지면 어떻게 되는가? 그냥 퐁당하면서 끝이 나는가? 파장이 퍼지는가? 파장이 퍼져나가는데, 그렇게 사건이 우리에게 들어오는 순간, 사건이 사건으로 남는 것이 아니라, 그게 하나의 필드, 즉 파동의 장(場)을 형성한다는 것이다. 우리 안에 말이다.
◈ WHAT? 이게 뭐야?
그러면 우리는 찌릿찌릿하게 되는데, 그러니 우리는 "뭐지? 이게 뭐야?" 라고 반응하게 되는데, 그야말로 초과라는 말이다. 자기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기이한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것을 묵시와 역사의 만남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런데 그게 당하는 사람에게는 아프다는 말이다.
왜 아픈고 하니까, 우리 인간은 자기에게 예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나게 되면 당황해서 어찌할 바를 모른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원래부터 우리가 그렇게 어찌할 바를 모르면서 당황하도록 만들기 위해서, 우리에게 그런 사건을 일으키시고 말이다.
◈ 성경에 소개된 '초과' !!
성경이 그런 것이 한 두 개가 아닌데,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군대를 피해서 도망을 갔는데 앞에 바다가 있더라는 것이다. 이것은 그야말로 완전히 죽은목숨인데, 앞에는 홍해바다 뒤에는 애굽군대, 이것은 완전히 빼도 박도 못한다는 것이다. 앞에는 검푸른 바다가 놓여있고, 뒤에는 애굽군대가 엄청난 분노를 품고 맹렬히 쫓아오고 말이다. 그러니 어떻게 여기서 빠져나갈 수가 있느냐는 것이다.
그런데 모세가 지팡이를 바다를 향해서 내미니까 어떻게 되었는가? 바다가 그만 갈라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바다가 갈라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인데, 이것이 바로 초과라는 말이다. 기쁘기도 하지만 무섭기도 하다는 것이다.
(출 14:21) 모세가 바다 위로 손을 내어민대 여호와께서 큰 동풍으로 밤새도록 바닷물을 물러가게 하시니 물이 갈라져 바다가 마른 땅이 된지라
◈ 땅을 진동시키는 주님 !!
우리가 무서워야 하는데, 어느 정도로 무서워야만 하는고 하니, 이 세상의 그 어떤 일이라도 주님이 하신 일보다 더 무서운 것이 없을 정도로 말이다. 이 세상에서 아무리 지진이 일어나고 화산이 폭발하고 환풍기가 내려앉아도, 그런 것보다 더 무섭고 두려운 마음으로 주를 섬기라고, 그것을 히브리서 12장에서 말씀하고 있다는 것이다.
(히 12:26) 그 때에는 그 소리가 땅을 진동하였거니와 이제는 약속하여 가라사대 내가 또 한 번 땅만 아니라 하늘도 진동하리라 하셨느니라
(히 12:27) 이 또 한 번이라 하심은 진동치 아니하는 것을 영존케 하기 위하여 진동할 것들 곧 만든 것들의 변동될 것을 나타내심이니라
이게 무슨 의미인고 하니, 히브리서 전체내용도 그렇지만 말이다. 왜 건물을 짓기 전에 인부들이 올라가는 계단을 만드는데, 그리고 건물을 다 짓고 나면 그것을 어떻게 하는가? 그냥 두는 것이 아니라 철거를 한다는 것이다. 바로 그렇게 철거를 해야하는 것이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히브리서의 내용이 말이다.
그렇게 철거하는 것을 여기서는 '진동한다' 라고 하는데, 그것이 히브리서 1장에 나와있다는 것이다. 주님께서 이 세상을 친히 만드시고, 또한 멸망을 시킨다는 말이다. 왜 그렇게 하시는가? 주의 나라가 영존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렇게 주님의 나라만 영원하기 위해서 영원하지 않는 이 세상을 만드셨다는 것이다. 거기에 인간들도 만들어졌고 말이다.
(히 1:10) 또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라
(히 1:11) 그것들은 멸망할 것이나 오직 주는 영존할 것이요 그것들은 다 옷과 같이 낡아지리니
◈ 이 세상은 '보충 대리물' !!
이것만 알면 우리가 이 세상 전부를 다 알았다고 할 수 있는데, 그러니 우리가 정말로 잘 만났다는 것이다(ㅋㅋ). 이 세상이 무엇이냐고 물으신다면, 어제 아주 어려운 말을 했는데, '보충 대리물' 이라고 말이다. 그게 무슨 의미인고 하니, 예수님이 하신 일을 나타내기 위해서 보충물로, 즉 임시 방편물로 갖다 붙여진 것이 바로 저와 여러분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이고, 자식들이고 친구들이고, 이웃들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주님의 세계가 오게 되면 이런 것을 다 떨어져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떨거지들이라는 말이다. 아니 근사하게 건물을 다 지어놓았는데, 거기에 인부들이 작업하면서 오르내리던 임시계단이 더 이상 필요하겠는가? 그게 그대로 있으면 건물을 다 망쳐놓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철거를 해야하는데, 사실 처음부터 철거하기 위해서 만들었다는 말이다. 건물 준공식을 할 때는, 이미 또 다음 건물을 짓기 위해서 트럭으로 창고에 다 옮겨놓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건물은 그야말로 말끔하게, 즉 "누가 만들었지? 어떻게 만들었지?" 라고 할 정도로 말이다.
◈ 너무나 깨끗하고 깔끔한 천국 !!
그렇게 전혀 표시도 나지 않게 멋있는 유리건물이 자리를 잡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요한계시록에서는 보석건물이라고 하는데, 거기에 무슨 이 세상에서 지은 간음죄와 살인죄가 더덕더덕 붙어있느냐는 말이다. 거기에 이 세상에서 핍박을 받고 고난을 받던, 그런 흔적들이 다 사라지고 없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깔끔한데, 아예 물청소를 한 것 같다는 말이다.
(계 21:18) 그 성곽은 벽옥으로 쌓였고 그 성은 정금인데 맑은 유리 같더라
(계 21:19) 그 성의 성곽의 기초석은 각색 보석으로 꾸몄는데 첫째 기초석은 벽옥이요 둘째는 남보석이요 셋째는 옥수요 넷째는 녹보석이요
(계 21:20) 다섯째는 홍마노요 여섯째는 홍보석이요 일곱째는 황옥이요 여덟째는 녹옥이요 아홉째는 담황옥이요 열째는 비취옥이요 열한째는 청옥이요 열두째는 자정이라
(계 21:21) 그 열두 문은 열두 진주니 문마다 한 진주요 성의 길은 맑은 유리 같은 정금이더라
그래서 천국은 그 전체가 깨끗하고 깔끔한데, 이 세상의 모든 고난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제가 여러분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위로의 차원에서 하는 것이 결코 아닌데, 만약에 그런 것 같으면 이것은 위로가 아니라 사기라는 말이다.
(롬 8:18)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그러면 당신은 이게 진짜라고 어떻게 확신을 하는가?" 라고 하면, "예수님께서 죽었다가 다시 사셨습니다" 라고 할 수 있는데, 예수님께서 그렇게 사흘만에 다시 부활하심으로서, 이런 이야기가 우리의 희망사항이 아니라, 이게 엄연한 실제상황이라는 것이다.
◈ 여인들이여, 무엇을 찾느뇨?
실제로 예수님의 무덤은 3명의 여인이 갔을 때, 거기에 예수님의 시체는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실제로 다시 살아났으니 당연히 없다는 말이다. 살아나셔서 바위에 걸터앉으시고는 "여인들이여, 무엇을 찾느뇨?" 라고 하시는데, 그러자 그녀들이 "예수님의 시체가 없어요. 혹시 보지 못했습니까?" 라고 하는데, 그러자 예수님은 "시체라니? 내가 여기에 있잖아. 내가 이렇게 다시 살아났잖아"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 예수님 : 여인들이여, 무엇을 찾느뇨?
* 여인들 : 이상하다. 여기에 예수님의 시체가 있었는데, 혹시 시체를 보지 못했습니까?
* 예수님 : 시체라니? 내가 이렇게 다시 살아났잖아.
* 여인들 : 레알? 예수님이라고요? 우리는 동산지기인줄 알았습니다.
* 예수님 : 동산지기? 웃기지 마라. 내가 이렇게 다시 살아났다.
* 여인들 : 정말 예수님이 맞지요? 이게 꿈이 아니지요?
* 예수님 : 그래, 내가 다시 살아났다. 왜 아침에 동이 터서 잘 보이지 않느냐?
* 여인들 : 아닙니다. 잘 보입니다.
◈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
그래서 여자들은 제자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한 숨에 달려갔는데, 그리고는 뭐라고 했는가? "예수님이 약속대로 살아나셨습니다" 라고 하는데, 물론 제자들은 믿지 못했지만 말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뒤를 따라와서 문이 닫혀있음에도 그냥 통과해서 들어오셔서 하시는 말씀이 무엇인가? "너희들은 모세와 선지자의 글들을 더디 믿는가? 내가 약속대로 이렇게 다시 살아났잖아"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눅 24:22) 또한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우리로 놀라게 하였으니 이는 저희가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눅 24:23) 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 그가 살으셨다 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 함이라
(눅 24:24) 또 우리와 함께 한 자 중에 두어 사람이 무덤에 가 과연 여자들의 말한 바와 같음을 보았으나 예수는 보지 못하였느니라 하거늘
(눅 24:25) 가라사대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눅 24:26)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눅 24:27)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그러니 우리가 학교에서 배우는 영어, 수학, 물리, 화학 등은 다 망상이고 허상인데, 즉 임시 구조물이라는 것이다. 인간들이 열심히 연구해서 하늘을 날고 달나라에 가는 것도 인정하는데, 120미터 짜리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도 인정하겠는데, 밑에서 쳐다보니 얼마나 목이 아프든지 말이다. 그렇게 인간들이 만들어낸 화려한 도시, 수많은 자동차 등등, 모든 것이 다 분명히 있는 것이 맞는데 말이다.
하지만 그것들은 있다가 사라지게 되는 임시 구조물인데, 왜 건물을 지을 때 외벽에 설치하는 말이다. 철파이프를 가지고, 그것을 전문용어로 '아시바' 라고 하는데(ㅋㅋ), 그것으로 구조물을 만드는 것은 건물을 제대로 잘 짓기 위함이고, 건물이 완성되면 모두 철거해야 한다는 것이다. 집사님이 동창회에 가면 동창들을 만날 텐데, 하지만 그것이 다 마네킹이란 말이다. 앞으로 10년, 20년만 더 지나면 다 허물허물해지고 흙이 되고 마는 임시 구조물이라는 것이다.
* 질문 - 그러면 우리가 왜 삽니까?
우리는 우리가 살고 싶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살려주니 사는 것인데, 주님께서 목적이 있어서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마음대로 죽지도 못하고 있는데, 지금 우리 어머니를 보시면 알 수가 있는데 말이다. 나이가 들면 죽는 것이 소원인데, 그 소원도 우리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저주를 받아서 고생하라고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것을 두 글자로 '복역' 이라고 하는데, 그러니 죽고 나면 그 복역이 끝나고, 즉 죄의 저주에서 벗어나서 영생을 누리게 되면, 그야말로 이것을 땡 잡은 것이란 말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행운은 값없이 주어진 것이 아니기에, 그런 행운을 받은 사람의 티를 내는 사람을 가려내는 작업이 곧 우리 인간의 일생이란 말이다. 그래서 인간의 일생은 가짜들이 너무 많은데, 그것을 어제 낮 시간에 삭제, 혹은 배제라고 했는데, 즉 가짜들을 골라낸다는 것이다.
많은 목사들이, 많은 교인들이 예수님을 믿는 것으로 시작했는데, 하지만 언젠가는 다시 예수가 없는 상태로 되돌아오고 만다는 것이다. 그게 주님의 승리이고 성공인데, 주께서 성령으로 믿을 주신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소위 모태신앙이라고 해서, 어릴 때부터 그야말로 기독교문화로 범벅을 해놓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하는 것들을, 즉 예배를 드리고, 기도하고, 봉사하고, 구제하고, 그렇게 온갖 것을 다 했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예수님이 아닌 자기 자신을 믿었다는 것이다.
◈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
특히 고린도전서 16장 22절에서 뭐라고 하는가?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 라고 하는데, 이 말씀에 모두가 다 걸려서 코가 깨지고 이마가 깨지고 무릎이 깨지고, 그야말로 박살이 나고 말았다는 것이다. 주님께서 일일이 다 발을 걸어서 말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모두가 자기만 사랑하지 주님을 사랑하지 않으니 말이다.
(고전 16:22)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분명히 성경말씀인데, 성경말씀은 항상 찢고 들어온다는 것이다. 어디서 어디로 말인가? 영적 세계에서 육의 세계로 말이다. 마치 연못에 돌을 던지면 파장이 퍼지는 것처럼, 그렇게 우리 속으로 들어와서 퍼져버린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 속에 들어있는 애굽적인 요소가 강력하게 반발하는데, "내가 그렇게 주님을 사랑했는데, 주님은 나에게 해준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나는 주님이 싫어요. 주님을 사랑하지 않을 겁니다" 라고 말이다. 그러면 옆 사람이 "아니, 당신은 지금 혼자서 뭐라고 중얼거리는가?" 라고 한다면, 그렇게 중얼거리면 그 사람은 성도가 맞다는 것이다. 이질적인 요소가 들어와서 한창 싸우고 있기에 말이다.
하지만 성도가 아닌 사람은 애초부터 무엇인가? 예수님을 믿는 것도 자기가 결심하고 각오해서 믿었기 때문에, 그런 인간의 결심은 마치 모기약과도 같아서, 처음에 뿌릴 때는 효과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금방 다 사라지고 없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에게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전혀 해당사항이 없는데, 그러니 예수님을 믿어도 자기를 위해서 믿는 것이지, 예수님에게는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결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할 수 없는데, 하지만 지금 교회에서 목사이고 장로이니 믿는 척을 한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의 특징이 기도도 매우 유창하게 잘 한다는 것인데, 그런 것을 얼마든지 흉내를 낼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본인은 아는데, 자기가 자기 자신 외에는 그 누구도 믿지 않는다는 것을 말이다. 믿고 싶지도 않고, 믿은 적도 없다는 것을 말이다.
◈ 성도는, 필살기가 있어야 !!
그렇다고 하면, 오용익 목사님이 지적하신 것처럼, 그것을 가려내는 필살기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번에 우리교회에서 설교할 때 했는데 말이다.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그것을 제가 어제 이야기했는데, 즉 자기 자신이 주님에 의해서 지워지고 삭제를 당하는, 우리가 하는 모든 헌금, 기도, 전도, 강의, 설교 등등, 그 모든 것을 주님께서는 무의미한 것으로 날마다 삭제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 외에는 아무 것도 일체 알지 않기를 원하게 하신다는 말이다. 예수님께서 죽으셨기 때문에, 그 죽음만이 자기를 살린다는 것 외에는, 자기가 예수님을 믿고 어쩌고 했던 그 모든 것은 그때그때 다 날아가고 삭제되고 없다는 것이다. 바로 그런 현상이 일어나게 될 때, 그 사람이 바로 진짜 성도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은 십자가 말고 다른 것은 아무 것도 남지 않기에 말이다.
◈ 목사 귀신은 물러가라 !!
그럴 때 사도바울의 소원처럼 "주여, 어서 죽여주옵소서. 그래서 십자가를 지신 주님과 얼굴을 마주보면서 감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그러니 어서 죽여주옵소서"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면 들어왔던 일곱 귀신도 다 도망가는데, 죽겠다고 하는데 무슨 재미로 붙들고 싸우겠느냐는 것이다. 자기는 죽겠다고 하는데 말이다.
우리가 살겠다고 하니, 그것도 바르게 살겠다고 하니 일곱 귀신이 다 붙어서 난리를 치는데, "아무리 피곤해도 새벽기도는 나와야지. 그게 정 힘들다 싶으면 30분은 시간을 정해서 기도하고, 그리고 성경을 적어도 하루에 5장은 봐야지. 그렇게 하면 놀라운 복을 받을 수 있어. 한 번 시도해봐" 라고 하는 일곱 귀신들, 쉽게 말해서 교회 귀신들이고 목사 귀신들이라고 보면 되는데 말이다.
그런 귀신들의 지시사항이, 그게 바로 본인이 살겠다고 하니 나타나는 현상인데, 사람이 믿음이 없으면 인생의 목적이 무엇이 되는고 하니, 자기 살겠다고 하는 것, 그렇게 사는 것 자체가 그만 목적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 외에 다른 것은, 즉 예수든 삼위일체든, 그런 것들은 다 자기를 살리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고, 이용한 것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 목사님, 시어머니가 아파서 힘들겠어요 !!
아직도 저는 그때 일이 기억에 생생한데, 처음에는 같이 이 모임에 참석을 하다가 시어머니가 아파서 그만 나오지 못하겠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분이 사는 목적이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말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원하고 자기 설계한 대로 버티기 위해서 교회에 나오고 예수님을 믿겠다는 것이 아니냐는 말이다. 그렇지 않은가요?
바로 그런 가짜를 주님께서는 걸러내는 작업을 하시는데, 그것은 바로 오직 십자가 복음 외에 다른 것은 없다는 말이다. 복음을 전하려고 하는데, 여기 이 자리에 있어야 할 분이 보이지 않고, 저기에 있어야 할 분이 보이지 않는데, 그것은 바빠서 나오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 영원한 이별을 고하는 것이란 말이다.
복음은 전하는데 왜 보이지 않는가? 복음을 전하는데 왜 듣기 싫다고 하느냐는 것이다. 그것은 결국 복음을 위해서 자기가 있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이용하겠다는 것인데, 그런데 복음을 들어보니 자기를 살리는 복음이 아니라, 죽으라고 하기 때문에, 그 소리가 듣기 싫어서 이 자리에 참석하지를 못한다는 것이다. 자기가 죽으면 자기 자존심을 어디서 찾느냐는 말이다. 그러니 그것은 결국 주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자기 사랑을 포기하지 못한 것이란 말이다.
◈ 이제 그만 하란 말이야 !!
자기 사랑을 포기하려면 외부에서 침투가 되어야하는데, 성령을 받지 않아서 침투한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침투한 것이 없으면, 성경에 있는 모든 말씀들을 흉내내고 모방하기에 급급한데, 물론 "사는 것이 목표다" 라는 말은 차마 하지를 못하지만 말이다.
드라마에도 그런 대사가 있는데, "그만 그만, 이제 그만 하란 말이야" 라고, 오 목사님은 그것을 발작이라고 표현했는데 말이다(ㅋㅋ). 그래서 사도바울이 뭐라고 하는가? "내가 지금까지 사람을 좋게 했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라고 했는데, 이게 얼마나 무서운 말인지 모른다는 것이다.
(갈 1:10)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 다시 정리해보면 !!
지금까지 한 것을 다시 정리해보면, 사람은 사람이 사는 세계에 이외에는 갈 필요가 없는데, 그런데 주께서는 마귀가 침투하는 것을 허용하셔서, 마귀가 들어온 그 째진 구멍을 통해서 다시 주님이, 즉 하나님의 아들이 오셔서, 그 째진 구멍으로 선악과를 먹음으로 말미암아서 죽어야 마땅하다는 것을 아는 자들만 데리고 가신다는 것이다.
그러면 어디로 데리고 가시는가? 천국으로 데리고 가신다는 말이다. 굳이 데리고 가지 않아도 되는데, 영원히 하나님만이 누리시는 그 궁전에 우리를 집어넣으신다는 것이다. 그 궁전을 구약에서는 성전이라고 하는데, 성전에는 주님의 이름이 계신다는 것이다. 그 주의 이름은 무엇인고 하니, 이 땅에서 자기 백성을 건져내 주시는 분이 주님이고 주의 이름이라는 것이다.
바로 그 주님이 계신 곳에 성전이기 때문에, 그 성전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먼저 너희들이 죄인이었다" 라는 것을 분명히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인이 되었다" 라는 것도 분명히 하고, 그리고 "그 과정에는 일일이 주님이 개입하셨다" 라는 증거물이 가득한, 그런 기념물이 있는, 기념되는 장소, 그것이 바로 성전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성전은 그냥 단순히 하나님이 존재하는 곳이 아니라는 말이다. 먼저 구원받은 죄인들을 포진시켜놓고, 그렇게 포진된 죄인들로부터 면류관을 반납을 받으면서, "너희들이 구원을 받은 것은 나의 피로서, 나의 죽음으로 말미암아서 너희들이 여기에 오게 되었다" 라는 것을 알려주는, 그곳이 바로 성전이라는 것이다.
◈ 성전에는 기념물들이 가득해야, 그런데 !!
그런데 구약의 백성들은 이 성전을 부동산으로 보았는데, 하지만 그들을 보고 잘못이라고 지적할 수 없는데, 왜냐하면 오늘날 교회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예배당을 뭐라고 하는가? 성전이라고 하는데, 천주교도 역시 성당을 성전이라고 하고 말이다. 그 하던 행세가 달리 어디로 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렇게 구약에 머물러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결국 구약을 따로 완성시킨 분이 있다는 것을, 그 완성시킨 분을 모독하는 것이란 말이다. 그러니 십자가를 모독하는 것은 매우 간단하다는 것이다. 그리스도 외에 다른 것을 생각하는 것, 그 자체가 곧 세상 신이 추구하는 것으로, 악마의 활동목적이 바로 그것이란 말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전부가 아니다" 라고 요약할 수 있는데, 그것이 곧 악마의 최후의 외침이라는 것이다. 이번에 '육과 영과 혼' 이라는 글을 통해서 그런 이야기했는데, 결론부분에 보면 그렇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악마의 소리가 듣고 싶다면, "십자가가 전부가 아니다" 라고 하는 것보다 더 악마적인 외침은 없다는 말이다.
◈ 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몰라 !!
사도바울이 분명하게 "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그분의 죽음 외에 다른 것은 일체 알지 않기로 했다" 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사도가 전한 주님의 복음임에도 불구하고, 인간들도 역시 그 고집이 만만치 않다는 것이다. 따먹지 말라는 선악과를 따먹는 그 고집과 동일한 고집인데 말이다.
주님의 성령을 받은 사도가 "십자가 외에는 알지 않기로 했다" 라고 분명히 선언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라고 하면서 나서는 것은, 그것은 마귀의 악령이 임했다고 하는 것 외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는 것이다. 세상 신에 의해서 그런 속내를 드러내게 되었다고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고전 2: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 목사들의 그 따위 소리 !!
그러니 오직 십자가뿐인데, 하지만 제가 이러한 이야기를 하면 많은 목사님들이 무엇이라고 하는가? 다음과 같이 변명을 하는데, 제가 그것을 또 친절하게 가르쳐 드리겠는데 말이다. 그들이 무엇이라고 하는고 하니, 그게 다음과 같다는 것이다.
"목사님의 말씀이 맞는데, 그것은 결론부분이고, 하지만 그 시작은 일단 사람들을 교회에 모아야하니, 모여야 복음을 들을 수가 있는데, 그런데 목사님처럼 그렇게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아무도 교회에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니 일단은 사람들을 꼬드겨야 하는데, 그러니 '예수님을 믿으면 건강을 얻습니다. 복을 받습니다' 라고 하면서 교회에 불러모아서, 그래서 복음을 전하면 그들이 구원을 얻을 것이 아닙니까?"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만약 여러분의 친구나 친척들이 그런 이야기를 하면, 여러분은 뭐라고 하겠느냐는 말이다. 막상 되받아서 말하려고 하면 답변이 궁한데 말이다. 인간이 이렇게 있고, 그 앞에 세상이 그 대상으로서 있는 것이 아니라, 즉 하나님을 상대하라고 우리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율법으로 문제를 내면 우리가 시험을 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곧 시험문제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런 주장을 하게 하셔서, 그 하신 자에 의해서 나온 것이 바로 예수님의 희생이라는 말이다. 사람들을 꼬드겨서 복음을 전해서 구원을 하겠다고 하는, 그 잘못된 구원방법으로 인해서 돌아가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당신이 그런 소리를 한다는 것 자체가, 예수님의 피가 바로 당신의 그런 죄 때문에 흘려졌다" 라고 할 수 있는 말이다.
◈ 하지만, 전도는 누구의 소관인가?
왜냐하면, 전도는 누구의 소관인가? 노아가 그야말로 거창하게 방주를 만들어서 전도를 했는데, 그런데 그 당시 전도의 주체가 누구인가? 노아인가? 하나님인가? 그게 모두 하나님의 은혜인데, 왜냐하면 노아가 하나님의 은혜로 둘둘 감겨있었으니 말이다. 포대기로 감기듯이 말이다. 그렇게 은혜로 감기게 되니, 은혜를 주신 분이 주체가 되어서 노아를 수단으로 삼아서 복음을 전했다는 것이다. "방주에 들어오지 않으면 물심판으로 다 죽게 된다" 라고 말이다.
따라서 오늘날 목사가 사람을 꼬드겨서 전도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전도의 주체가 여전히 누구라는 말인가? 당연히 주님인데, 그것이 바로 사도행전이라는 것이다. 사도행전에서 빌립이 왔다갔다하는 것은, 그러면서 내시를 만나고 하는데, 그렇게 하시는 주체가 누구란 말인가?
(행 8:29) 성령이 빌립더러 이르시되 이 병거로 가까이 나아가라 하시거늘
(행 8:30) 빌립이 달려가서 선지자 이사야의 글 읽는 것을 듣고 말하되 읽는 것을 깨닫느뇨
(행 8:31) 대답하되 지도하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뇨 하고 빌립을 청하여 병거에 올라 같이 앉으라 하니라 …
(행 8:35) 빌립이 입을 열어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니
그리고 사도바울을 풍랑이 일게 하는 바다로 해서 로마로 가게 하신 분이 누구란 말인가? 사도바울이 자기가 알아서 그렇게 갔는가? 모든 것을 주님이 그렇게 하신다는 것이다. 또한 고넬료와 베드로를 만나게 하신 분이 누구인가? 그들이 채팅을 하다가 만났는가? 물론 그렇게 만나도 마찬가지이지만, 주님께서 만나게 하셨다는 것이다. 그렇게 지금도 주님께서는 놀지 않고 여전히 일하신다는 말이다.
우리는 우리가 놀고 있으니 주님도 논다고 생각하는데, 하지만 주님은 노시는 분이 결코 아니라는 말이다. 즉 "내 아버지께서 일을 하시니 나도 일을 한다" 라는 것인데, 그렇게 주님이 놀지 않기 때문에 목사의 입에서 그 따위 소리가 나온다는 말이다.
(요 5:17)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 우리 곧 문제집 그 자체 !!
우리가 문제를 푸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체가 곧 문제집인데, 예를 들어서, "7번, 다음 중에서 정답이 아닌 것은 몇 번인가?" 라고 하면, "가, 나, 다, 라" 라고, 그렇게 보기가 나오는데, 거기에 우리가 다 들어있다는 것이다. 즉 "당신이 이야기한 것은 '다'에 들어있고, 또한 내가 이야기한 것은 '나'에 들어있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다.
그리고 "일단 복을 받는다고 해놓고, 그래서 교회가 커지면 그 교회를 몽땅 주님께 드리면 되지 않겠는가?" 라고 하면, 그것은 '라'에 해당이 되고, "일단 꼬드겨서 교회에 데리고 와서는 복음을 전하면 된다" 라고 하는 것은 다'에 해당하고 말이다. 그리고 "전도의 주체는 주님이다" 라는 것은 '가'에 해당하는데, 그게 정답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주님을 믿었는데, 나중에 보니 교회는 커지지가 않더라" 라고 하는 것은 '나'이고 말이다.
이렇게 이 세상에서 나오는 모든 것들이 객관식 문항에 다 들어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주님이 푸시고, 우리는 각각의 문제지 문항에 모두 들어있다는 말이다. 그런 용도로서 우리가 다양한 경험을 하면서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아이들 장난감인 '레고'의 벽돌 하나하나가 바로 우리라는 말이다. 그것들을 조립하게 되면, 그리스도의 하신 일을 드러내게 된다는 것이다.
◈ 주님의 일은, 완벽하게 차질이 없어 !!
그래서 사도바울은 빌립보서 4장 13절에서 뭐라고 하는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라고 한다는 말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내 안에 계신 예수님께서 나를 데리고, 예수님 자신에게 합당한 모든 일을 하신다" 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빌 4: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이렇게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 라는 것은, 사도바울이 "제가 남자인데 여자가 좀 되게 해주소서" 라고 하는 게 아니고, 주님의 하시고자 하는 계획에 차질이 없도록, 주님의 뜻에 합당하도록, 자기가 아니면 다른 사람이라도 데리고서, 그렇게 주님의 일은 전혀 차질이 없이 진행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누가 자기를 협박해도 겁을 낼 이유가 없는데, 물론 자살할 이유도 없고 말이다.
◈ 죽음의 세계가 궁금해요. '쾍' !!
그러니 목사가 되어서 자살할 이유가 전혀 없는데, 물론 목사가 아니라도 마찬가지지만 말이다. 그런데도 목사가 자살을 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자기의 일은 없고 모든 것을 주님의 일로 여긴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님의 일을 자기 일로 착각한 것이란 말이다. 모든 일에 주님께서 주체가 되어야하는데 말이다.
그러니 평소에 목회를 하면서 누가 주체가 되어서 했다는 말인가? 자기가 열심히 준비하고 설교를 잘해서 사람들을 끌어 모아서, 그래서 주님 앞에서 "제가 이만큼 전도를 잘했습니다" 라고 하면서, 그렇게 자기 자랑을 하고 싶은 생각이 있기 때문에, 그것이 하나의 원인이 되고 협박이 되니까, 피할 곳이 없어서 그만 스스로 죽음을 택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자살을 택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죽음의 세계를 미리 앞당겨서 맛보려고 자살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이다. 즉 "다른 것은 모두 알겠는데 모르는 것이 딱 하나 있다" 라는 것이다. 그게 바로 죽음의 세계인데, 죽으면 어떻게 되는지, 죽으면 의식이 전혀 없는지 조금이라도 남아있는지, 그것이 궁금해서 죽은 사람이 있다는 말이다.
◈ 자살은 가룟 유다에게 물어봐 !!
자살의 모델은 성경에 적나라하게 나오는데, 그게 바로 가룟 유다라는 것이다. 가룟 유다가 왜 자살을 했는가? 양심의 가책을 받아서 했는데, 그러니 양심은 결국 악마가 활동하는 하나의 수단이 된다는 말이다. 성령이 오지 않으면 악마의 손 안에 있고, 악마는 끝까지 어디를 쑤시는고 하니, 양심에 호소를 해서 압력을 가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악마는 '고소하는 자'이니 말이다.
악마가 "니가 양심에 비춰봐라. 니가 그렇게 해서 되겠는가?" 라고 하면서, 그것이 자꾸만 밀려오니, 결국 갈 곳은 어디뿐인가? 자살 말고는 달리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자살하면 주님이 잘했다고 하시겠는가? "성령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라고 하면서 끝나고 만다는 것이다. 만약 가룟 유다가 악마의 협박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어떻게 하면 되겠는가? 자기 것을 자기 것이라고 하지 않으면 된다는 것이다. 즉 "내 몸은 내 몸이 아니다" 라고 하면, 그러면 된다는 말이다.
◈ 욥기가 말하는, 지혜노선과 율법노선 !!
여기 교재 65페이지에 보면 지혜노선과 율법노선이 나와있는데, 이 지혜노선과 율법노선을 언급한 게 욥기에 보면 잘 나온다는 것이다. 욥의 인간세계는, 욥기에 욥과 욥의 친구 4명이 나오는데, 그들이 인간의 양심으로 하나님의 법을 섬기는 자들인데 말이다.
그 중에서 욥의 친구 한 명은 나중에 나오니 빼고, 먼저 욥과 3명의 친구들의 경우에, 그들의 의견이 서로 같은가? 다른가? 의견이 같으면서도 다르다는 것이다. 즉 "착한 일을 하면 복을 받고 나쁜 일을 하면 벌을 받는다" 라는 점에서는 동일하다는 말이다.
다만 어떤 점에서 차이가 나는고 하니, "니가 벌을 받는 것을 봐서는 니가 나쁜 짓을 했다" 라는 것은 욥의 세 친구들이고, 반면에 욥의 주장은 무엇인가? "내가 이렇게 엄청난 고난을 받을 정도로 나쁜 짓을 하지 않았다" 라고 하는데, 이게 서로 다툼이 된다는 말이다.
다툼이 된다는 것은 서로 갈라지고 찢어진다는 말인데, 바로 그 찢어진 틈 사이에서 욥은 구원자인 하나님이 나타나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친히 재판해주기를 말이다. 그런데 욥기 1장을 보면 어떤 장면이 나오는가? 하나님과 마귀가 서로 내기를 하고 있는데, 그게 곧 지혜라는 것이다.
◈ 지혜 - '인간은 관여할 수 없어' !!
무슨 말인고 하니, 여기서 지혜의 특징이 나타나는데, 그러니 지혜의 특징은 인간이 관여할 수 있다는 것인가? 없다는 것인가? 어느 쪽인가? 인간이 관여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계획에 인간은 처음부터 배제가 되어있는데, 즉 전혀 관여되지 않은 상태라는 말이다.
아까 한 집사님이 좋은 질문을 하셨는데, "우리 인간이 인생을 왜 사는가?" 라는 것이다. 인간은 자기가 관여하지 않은 일 때문에 살게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 인간은 애초부터 관여하지 않은 일 때문에, 그래서 우리 인간은 태어났고, 또한 죽어야한다는 말이다. 물론 아파야 하고 말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입장에서는 매우 억울한데, 자기가 관여하지 않은 일 때문에, 그야말로 일방적으로 외부인이 자기에게 묻지도 않고 휘젓고 다닌다면 기분이 좋을 리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게 바로 피조물의 운명인데, 피조물의 자리가 원래 그렇다는 말이다. 즉 피조물은 스스로 자기 인생을 책임질 수 있는 자리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인생이 왜 이런고 하니, 그것이 궁금하다면 이제 알려드리겠는데 말이다. 인간은 자기 운명에 대해서 자기가 관여하지 못하는데, 그러면 어떻게 하면 되는가? 관여하지 않으면 된다는 말이다. 매우 쉽고 간단한데 말이다. 즉 "내 인생에 대해서 내가 관여하지 않으면 된다" 라는 것이다. 이것은 유치원생이라도 할 수 있다는 말이다.
여기에서 요한계시록을 17장 17절을 보겠는데, 별로 유명한 구절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냥 지나가면 안 된다는 것이다. 누가 한 번 읽어보세요.
(계 17:17) 하나님이 자기 뜻대로 할 마음을 저희에게 주사 한 뜻을 이루게 하시고 저희 나라를 그 짐승에게 주게 하시되 하나님 말씀이 응하기까지 하심이니라
◈ '세상 = 땅 + 인간' !!
지금 이 세상에는 음녀가 까불고 있는데, 그게 곧 자본주의인데 말이다. 자본주의를 한 마디로 말하면, "자본자체가 세상을 이루는 질료가 된다" 라는 것인데, 자본이 하나의 재료가 된다는 말이다. 이러한 자본주의 이전에는 이 세상을 이루는 재료가 무엇이었는고 하니, "땅 + 인간" 이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땅이라고 하는 것은 하늘도 포함하고 있는데, 그러니 영적인 하늘세계는 말고, 우리의 눈에 보이는 이 표피적인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자연세계라고 보면 되는데, 그렇게 자연세계와 인간이 전부였다는 것이다. 즉 자본주의 이전에는 자연세계와 인간이 세상을 이루는 재료라는 말이다.
그래서 인간은 창세기 3장에 의하면 땅만 갈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엉겅퀴와 가시 등을 동원해서 인간을 힘들게 하시는데, 그런데 요즘은 이 엉겅퀴가 몸에 좋다고 난리인데 말이다(ㅋㅋ). 아무튼 인간은 땅에서 땀을 흘리고 수고하는 것이 전부라는 것이다.
◈ 그런데 자본주의 사회는?
이렇게 땅을 갈던 시대를 두고 농경시대라고 하는데, 그런데 이 시대가 무엇을 바뀌었는가? 자본주의 시대로 바뀌었는데, 자본주의라고 하는 것은 땅 대신에 캐피탈, 즉 자본이 들어간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니 돈과 인간이 만나게 되는데, 그것을 '자본주의 사회' 라고 한다는 말이다.
땅에서 아무리 배추를 잘 키워봐야, 소비가 위축이 되면 그 배추를 뽑지도 못하고 모두 갈아엎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기가 분명히 땀을 흘려서 열심히 배추를 키워놓았는데, 그러면 그게 가치가 있어야하는데, 자본의 힘으로 막혀서 그 배추에서는 돈이 한 푼도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농협에 빚만 쌓이는데, 그게 바로 자본주의 사회라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그런 사회에 살고 있다는 말이다.
공장에서 제품을 만들어서 이익을 낸다고 해서 자본주의 사회가 아니고, 그 이전에도 공장이 있었고 거기서 물건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공장에서 제품을 만들어서 이익을 내는 것보다도, 환율이 높을 때와 환율이 낮을 때, 그것을 이용해서 수출과 수입을 하는 것이 더 많은 이익을 줄 때, 그게 바로 자본주의 사회라는 것이다. 여기에 해지펀드도 등장하고 하는데 말이다.
옛날에는 땅밖에 없어서 그것만 의지하면서 살았는데, 그런데 이제는 어떠한가? 물론 젊을 때는 농사를 짓든지, 그렇게 일을 하면서 살지만, 나이가 70이 되면 연금을 받고 살 수 있는데, 이게 바로 자본주의 사회라는 것이다. 과거에는 땅이 인간의 우위에 있었는데, 그런데 이제 자본주의에서는 자본이 인간 우위에 있다는 것이다. 돈에 울고 돈에 웃는 것이 자본주의 사회라는 말이다. 옛날 농경사회는 땅에 울고 땅에 웃었는데 말이다.
◈ 희망만 있으면, 자본주의도 괜찮아 !!
그 자본주의 사회가 지금 완전히 기고만장하게 되었는데, 왜냐하면 천만 명의 가난한 사람이 있어도, 10명의 잘 사는 사람이 있으면 사람들은 희망을 품을 수가 있다는 것이다. 천만이 어떻게 살던, 거기에 관심이 있는 게 아니라, 10명의 잘 사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아침에는 무엇을 먹고 저녁에는 무엇을 먹는지, 그리고 주말에는 무엇을 하는지, 그것을 궁금해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드라마에 매일 나오는 것이 그런 상류층들 이야기이고, 치맥을 먹고 골프를 치고 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것이 꿈을 준다고 하면, 비록 지금은 자기가 천만 명에 속해있지만 언젠가는 자기도 그런 10명에 속할 수 있다는 희망으로 인해서, 사람들은 이 자본주의 사회를 놓치지 않고 품으려고 하고, 받아들고 스스로 용인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희망이 없는 세계는 이미 공동묘지이기 때문에 말이다. 지금 이 세상이 제 아무리 악하고 부조리하더라도 희망만이 있다고 하면, 사람들은 일곱 번 넘어져도 여덟 번 일어나겠다는 마음가짐으로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게 바로 인간이란 말이다.
◈ 5년에 한 번은 오겠지 !!
나이가 80이 되어도 언젠가는 자기 딸이 웃으면서 선물을 들고 찾아올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지금도 노인들은 하염없이 기다라고 있다는 것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다음에 "엄마, 걱정하지마. 내가 매일 전화할 게" 라고 하는 약속이, 일주일도 가지 못해서 사흘에 한 번으로, 그리고는 한 달에 한 번으로 줄어든다는 것이다.
직접 찾아오는 것도 한 달에 한 번은 오겠다고 해놓고, 일 년에 한 번으로, 그것으로 추석 때 몰아서 오고 말이다. 그 다음에 2년에 한 번, 3년에 한 번으로 줄어드는데, 그래도 부모는 기다린다는 것이다. "5년에 한 번은 오겠지" 라고 말이다. 그런데 그 딸이 교통사고가 나서 그만 죽었다고 하면 그 부모도 같이 죽는데, 왜냐하면 희망이 없어졌으니 말이다. 이것이 바로 인간이란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항상 의존적이다" 라고 하는데, 인간은 본인이 스스로 설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즉 결코 독자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래서 스피노자는 "인간은 속성이지 실체가 되지 못한다" 라고 하는데, 즉 인간에게 스스로 설 수 있는, 그런 본질은 인간에게 없다는 것이다.
◈ 인간은 본질은 없어 !!
제가 어제 낮 시간에도 "인간은 본질은 없다" 라고 했는데, 자꾸만 어디에 기대야한다는 말이다. 마치 강아지처럼 말이다. 자꾸만 헤매고 돌아다니고 의지하려고 하는데, 그러다가 찾으면 달려들고 말이다. 그래서 물고 놓지를 않은데, 이때는 세퍼트로 변한다는 것이다.
남자가 여자를 잘못 건드려도 이렇게 되는데, 장난 삼아서 건드렸다가 물리면 난리가 난다는 말이다. 결혼식을 하는데 와서는 "여기에 당신 아이가 있어요" 라고 하면 말이다(ㅋㅋ). 그야말로 막장 드라마인데, 물론 나중에 보니 자기 아이라는 것이다. 여자가 돈을 뜯으려고 한 짓인데, 요즘 그런 막장의 막장 드라마가 등장한다는 것이다.
옛날에는 순진 드라마였는데, 그래서 아이를 데리고 오면 남자가 "아이쿠, 내 아이구나" 라고 하는데, 요즘은 임신했다는 소식을 듣고도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유전자 검사를 하는데, 워낙 속이고 속이니 말이다. 옛날 드라마에는 시어머니가 아들 몰래 다방에 앉아서 돈을 주고 했는데, 요즘은 시어머니도 그런 것에 속지 않는다는 것이다.
◈ 자본주의를 품은 마귀 !!
이게 무엇인고 하니, 모든 가치가 돈으로 다 해결이 된다는 것인데, 이것이 바로 자본주의 사회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자본주의 사회가 등장한 것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인데, 언제까지 말인가? 주의 세계가 올 때까지 말이다. 그러면 누구에게 허락하셨는가? 물론 마귀에게 하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마귀는 무엇만 빼놓고 다 이야기하는가? 조금 전에 했는데, 마귀의 주장은 "예수만은 아니다" 라는 것인데, 즉 마귀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를 이야기하는 것 말고, 다른 모든 것은 다 허락한다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마귀의 극단은 불교의 '중' 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불교의 철학이 무엇인가? "세상도 버리고 나도 버리고" 라고, 즉 "이 세상은 아무 것도 아니다" 라는 것이다. 이것이 곧 인간의 마지막 단계인 자기 해탈의 경지라는 말이다.
◈ 그게 곧 마귀의 속삭임 !!
저는 교인들에게 그런 것을 유심히 보는데, "이 사람이 정말 기독교 신자인가? 불교 신자인가?" 라는 것을 말이다. "십자가가 전부가 아닙니다. 그 이후에 우리가 하나님이 되는 겁니다" 라고, 그 이야기를 끄집어내기 위해서 제가 일부러 그렇게 유도하는 경우도 있는데, "목사님, 십자가 말고 또 다른 것도 있지 않습니까?" 라고 나오도록 말이다.
"목사님의 말씀대로 십자가가 참 중요합니다. 하지만 복음의 세계가 어떻게 십자가에 국한될 수 있습니까? 성령의 세계가 있고, 그 성령의 세계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겁니다" 라고 하는데, 언뜻 들으면 복음적으로 들릴지 몰라도, 하지만 그게 마귀의 속삭임이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결국 그 하나님 속에 누가 있다는 말인가? 자기를 포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자기 희망사항을 성령이란 신학체제에 합체해서 같이 굴러가 보려는 시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을 제가 미리 알려드렸는데, 오직 십자가뿐이라는 말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그 십자가를 증거하는 시듦에 불과하고, 있다가 없어지는 말이다. 그렇게 십자가의 증인역할을 하다가 주님 품속으로 사라질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 자신이 바로 삭제를 당해야하는 입장에 놓여있다는 말이다.
◈ 인간이 아는 것은 '지혜'가 아닌 '법' !!
욥기에 있어서, 하나님과 마귀의 내기가 바로 지혜라고 했는데, 그래서 하나님의 지혜는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다. 인간의 지혜로서 하나님의 지혜를 알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러면 인간이 아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그게 바로 '법' 이라는 말이다.
지금부터 중요한데, 정신을 바짝 차리시고 들어야 하는데, 이 땅에 법을 깔아놓았는데, 그게 율법이라는 것이다. 물론 욥기의 경우에는, 그때는 율법이 주어지기 이전이라서 '양심' 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욥은 아브라함과 거의 동시대의 인물로 보니 말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양심은 신에 대한 의식이나 종교심을 의미하는데, 그것이 이스라엘에서는 구체화가 되어서 율법이 주었다는 것이다. 그 위에는 지혜인데, 그런데 이 지혜는 아무도 알 수가 없고, 우리 인간에게 기껏 주어진 것은 율법이라는 말이다. 이렇게 율법이 주어지게 되면 인간은 경쟁을 하는데, 누구와 하는가? 하나님과 경쟁을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율법이 '하라' 라고 하면 인간은 가만히 있을 위인이 아닌데, 그래서 어제 낮 시간에 뭐라고 했는가? 인간이 율법에 대해서 '하라' 라고 하면 그것을 하면서, 그런데 그것을 잘 지켰는지 아닌지에 대한 판정을 누가 내리는가? 자기 자신이 내리는데, 자기는 그 율법을 지킬 능력이 있을 뿐만이 아니라, '지켰다' 라는 것을 결정할 수 있는 그 결정권도 자기 자신에게 있다고 여긴다는 말이다.
◈ 칸트의 철학인가? 목사의 설교인가?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칸트의 철학인데, 즉 "인간에게는 이성이란 것이 있는데, 그 이성은 하나님이 주셨다. 그런데 이 이성들은 다 한계가 있지만, 마지막인 실천력 이성은 한계가 있는 동시에 의미가 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한계가 있다는 것은 숭고함인데, 이 숭고함에 실천력에 들어가게 되면, 이것은 '무조건 말씀대로 살기' 라는 것이다.
칸트가 주장한 것은, 제가 지금 칸트를 언급하는 것은 철학 이야기를 하자는 것이 아니라, 현재 교회에서 행해지고 있는 목사의 설교에 관한 것인데, 즉 "따지지 말고 무조건 말씀대로 살 수 있는 능력이 우리에게 있다" 라고 하는, 이게 바로 칸트의 철학이란 말이다. 들어보니 여러분도 어떻게 납득이 되는지 모르겠는데 말이다,
이것을 교회에서는 무엇으로 바꾸는가? "성령이 임한 사람은 무조건 말씀을 지킬 수 있다" 라고 하는데, 그러니 이것은 칸트의 철학과 동일하게 보면 된다는 것이다.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무조건 지킬 수 있다고 한다는 말이다. 성령을 받은 여러분은 어떻게 말씀을 지킬 수 있는지, 아니면 말씀을 전혀 지킬 수 없다는 것이 확실해졌는지, 어느 쪽이냐는 말이다.
◈ 살려고 하는 죄를 용서하소서 !!
우리는 지키지 못한다는 것이 확실해져서 누구에게 가는고 하니까, 십자가로 달려갈 수밖에 없는데, 그것이 바로 성령이 십자가에서 온 영이기 때문에 우리를 십자가로 데리고 가신다는 것이다. "너는 이제 죽었어" 라는 것인데, 우리는 거기에 대해서 "할렐루야, 감사합니다" 라고 하면 된다는 말이다. "앞으로 잘 지키겠습니다" 라고 하는 게 아니고 말이다. 그것은 말이 앞뒤가 맞지 않다는 것이다.
"너는 죽었어" 라고 하면, "살려고 하는 죄를 용서하소서" 라고 하면 되는데, "앞으로 잘 하겠습니다. 두 번 다시 이런 짓을 하지 않겠습니다" 라고 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에는 "두 번 다시 하지 않겠습니다" 라고 할, 그것을 지킬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 인간은 두 번, 세 번, 그렇게 계속해서 하게 되어있다는 말이다.
◈ 물침대에 누워보신 분?
물론 술이나 담배를 끊을 수는 있지만, 하지만 욕망은 그 형태만 바뀔 뿐이지, 다른 곳으로 그 욕망이 사라지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저는 그것을 과거부터 '물침대' 라고 표현을 하곤 했는데, 이 물침대의 특징은 울렁울렁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누르면 저기서 튀어나오고 말이다.
혹시 여러분들 중에서 물침대에 누워본 사람이 있는지 모르겠는데, 침대 안에 실제로 물이 가득 들어있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물로 가득한 침대인데, 그러면 그 물이 어디로 가는 것이 아니라, 이쪽에서 눌리면 저쪽으로, 저쪽에서 눌리면 이쪽으로 이동할 뿐이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술이나 담배를 끊더라도 그 욕망이 달리 어디로 사라지는 게 아니라, 스포츠를 좋아해서 매일 프로야구를 보러간다든지, 골프를 친다든지, 아니면 사탕을 먹는다든지, 그렇게 욕망이 바뀔 뿐이지, 마치 매트리스에 갇혀있는 물처럼, 그렇게 욕망이 우리 안에서 울렁울렁한다는 것이다. 형태만 바꾸어가면서 말이다.
그래서 등산을 하다가 실증이 나면 교회에 오고, 그게 또 실증이 나면 다시 등산을 하고, 그것마저도 싫으면 집에서 잠이나 자고, 그렇게 달라질 뿐이라는 것이다. 인간의 욕망은 달리 어디로 새는 것이 아니라, 마냥 그 안에서 뱅뱅 돈다는 말이다.
◈ 션 부부와 구제중독 !!
사람이 구제하고 착한 일을 하는 것이 취미인데, 심하게 말하면 정신병이고 말이다. 즉 중독이라는 것이다. 자기가 다른 사람을 도와주면, 그 사람이 고마워하고 또한 주위에서 박수까지 쳐주는데, 그것은 일종의 마약과도 같다는 말이다. 그 쾌락은 도저히 끊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상대방이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당신 때문에 제가 살았습니다" 라고 하면, 그게 하나의 힘이 되기 때문에, 계속해서 구제에 나설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구제의 강도가 어떻게 되겠는가? 점점 더 세어지는데, 그러니 중독이란 것이다. 즉 '구제중독' 인데, 그런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는 것이다.
그러니 해외여행을 갔다와서도, 갔다오면 참 힘이 드는데, 피곤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두 번 다시 가지 않는다고 하지만, 이제 맛을 들여놓았다는 것이다. 몸이 피곤한 것은 분명히 맞지만, 비행기의 이코노믹 좌석에 열 몇 시간씩 앉아있으니 힘이 드는 것은 맞지만, 하지만 그 피곤함과 힘드는 것이 주는 쾌락을 잊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또 나가고 싶다는 말이다.
직장생활을 하는 사람들 중에서, 외근을 많이 하는 사람은 내근을 잘 하지 못하는데, 하루종일 책상에 앉아있으면 힘이 들어서 사표를 던지고 싶다는 것이다. 그런데 바깥에 나가서 영업을 하든지 하라고 하면, 활개를 치면서 돌아다닌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을 즐기기에 말이다.
◈ 병든 시어머니로 인해서 자기 존재감을 !!
병든 시어머니를 며느리가 돌본다는 것이 분명 힘든 일임에는 틀림이 없는데, 자기 일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온 종일 거기에 매달려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 시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면 그 누구보다도 많이 우는 사람이 누구인가? 바로 그렇게 고생한 며느리라는 것이다.
그것을 두고 '의존적' 이라고 하는데, 그 병든 시어머니로 인해서 며느리는 그동안 자기의 존재감을 느꼈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 시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니 어떻게 되는가? "나는 뭐지? 왜 살지?" 라고 나오게 된다는 말이다. 즉 자기가 살아가는 이유가 그만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에게 율법이 주어진 것은, 자기 잘남을, 자기를 과시하기 위한 욕망으로, 즉 "내가 이렇게 있다" 라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서 살아왔기에, 그런 가운데 율법이 주어짐으로 우리 인간은 그 율법을 엉터리로 지킬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나는 율법을 지켰습니다. 왜? 내 잘남을 증명하기 위해서 지켰습니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다.
◈ 욥 - 'Why me?'
이것이 바로 욥의 친구들이었고, 사실 욥도 그랬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런 욥을 째고 외부에서 무엇인가가 들어왔는데, 즉 고난이 들어왔다는 것이다. 그렇게 욥은 친구들이 모르는 것을 받고 난 뒤에는, 고난이 마치 연못에 무엇이 퍼지듯이 그렇게 퍼지면서 주님을 향하여 부르짖는다는 것이다. "왜 저에게 이런 고난을 주십니까? 그 이유가 뭡니까?" 라고 하면서 말이다.
바로 여기에 하나님의 낭비, 즉 황무지에 비가 내리는 낭비인데 말이다. 인간들은 낭비를 모르고 제대로 쓰는 것이 율법에 합당하다고 생각하는데, 그런데 세상에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상대로 해서 마귀와 내기를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은 힘든 우리의 입장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당신만 마귀와 내기해서 이기면 그만입니까?" 라고, 그렇게 우리는 따지고 싶다는 것이다.
그것을 두고서 '초과' 라고 하는데, 즉 우리가 알 수 없는 세계가 따로 존재했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우리는 피조물이기에 선악적인 지식이 있어서, 모든 것을 선과 악으로 나누어서, 그것을 양적으로 계산해서, 착한 것이 더 많으면 천국에 간다고 여겼는데, 하지만 그것은 전혀 지혜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율법을 이용해서 자기 잘난 척을, 즉 자기를 정당화하는 수단에 지나지 않았다는 말이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지혜를 예상도 못하고 상상도 하지 못했는데, 그래서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 인간을 가지고 놀다니, 도대체 이럴 수가 있습니까?" 라고 나오는데, 하지만 얼마든지 가지고 놀아도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를 만드셨기 때문에 말이다.
◈ 경계선에 초대된 이스라엘 백성들 !!
하나님께서는 지혜로 넘어가는 그 과정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마주치게 했는데, 그게 바로 죽음이었는데 말이다. 홍해, 요단강, 여리고 성, 그리고 물도 없고 양식도 없는 광야, 바로 그것이란 말이다. 그 잘난 존재들, 인간이라고 까부는 존재들, 하지만 막상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절망의 코스로 빠지게 하시는데, 그것이 곧 율법의 세계에서 지혜의 세계로, 즉 십자가의 세계로, 복음의 세계로 넘어가는 경계선에 이스라엘 사람들을 초대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한 번 봐라. 너희들의 힘으로 저 장대와 같은 네피림들을 물리치고 과연 약속의 땅을 물리칠 수 있는지, 한 번 해봐라"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이제 오후설교시간에 곧 신명기를 하면서 그게 나오지 싶은데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한 번 들어가 봐라" 라고 하시는데, 하지만 들어갈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만 울어버리는데, 운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일종의 절망인데, 그러면 절망은 무엇인가? 초과세계를 모르기 때문에 절망을 한다는 것이다. 즉 지금의 자기 세계가 전부인 줄로 알기 때문에 절망하고 운다는 말이다.
◈ 울지마, 울기는 왜 울어 !!
사도바울이 울었는가? 아니면 주님을 바라보았는가? 주님을 바라보면서 즐거워했다는 것이다. 남들 같으면 12번도 더 울고 절망했을 상황인데도 말이다. 사도바울은 환란 가운데 기뻐하고 즐거워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주님의 세계를 바라보고 즐거워한 것인데, 자기 세계를 본 것이 아니고 말이다.
(롬 5:3)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롬 5:4)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그러면 왜 사도바울은 자기 세계에 집착하지 않았는가? 깨어져야하는 세계이고, 주님에 의해서 장악된 세계이기 때문에, 이래도 괜찮고 저래도 괜찮은 세계라는 말이다. 따로 준비된 다른 세계가 있었기 때문에 그럴 수 있었다는 말이다.
◈ 죽었던 분의 영이 오게 되면 !!
그렇다면 이 초과된 세계, 죽음의 세계를 어떻게 아는고 하니까, 죽지 않으면 모르는가? 굳이 자살을 하지 않아도 죽음의 세계를 아는 방법이 무엇인고 하니, 이미 죽었던 분의 영이 우리에게 오게 되면, 그분의 세계가 곧 죽음 이후의 세계라는 것이다. 즉 "천국인가? 지옥인가?" 라는 것이 죽음의 세계라는 말이다. 그러니 이 세상 바깥에는 천국과 지옥, 그 두 가지의 세계밖에 없다는 말이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린 강도의 경우에, 한 쪽 강도는 눈에 보이는 세계가 전부였는데, 그런데 다른 한 쪽의 강도는 뭐라고 했는가?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초과인데, 어떻게 강도가 그런 믿음이 있었는지, 강도 짓만 하는 줄 알았는데 말이다. 인간이 감히 넘볼 수 없는 초과세계를 알았다는 것이다.
◈ 주님과 함께 패러다이스에서 !!
물론 주님이 믿음을 주신 것인데, 그래서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패러다이스, 즉 낙원에 말이다. 그런 초과세계가 있는 자는, 이미 외부에서, 즉 초과세계에서 성령으로 찔러서 우리를 찢어버리고 그 안에 마치 박하사탕처럼 퍼지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눅 23:42) 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니
(눅 23: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그러니 무슨 종교가 더 필요하냐는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것 자체가 주님의 작품인데 말이다. 달리 무슨 종교생활이 더 필요하냐는 말이다. 교회생활을 하려고 하지 말고 그냥 막 살면 된다는 것이다. 그게 바로 신앙생활이고 성령을 받은 자의 삶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이제는 종교라는 굴레에서 벗어나서, 막 살면서도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지혜의 세계가 곧 초과의 세계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땅에서 절망하고 낙담하게 된 것도 주께서 초과세계가 있음을 알리는 신호탄인 줄 알고, 도리어 감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4,10,24 오후 8시에 마침.
세금, 벌금, 과태료, 더러워서 장사 못하겠네.
말씀을 보면 낙원인데, 나가기만 하면 지옥이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