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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강의-청교도신학 140513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4. 11. 6. 09:32

2014-05-13 17:13:26 조회 : 660         
청교도 신학 140513 이름 : 이근호 (IP:119.18.9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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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윤범 (IP:14.♡.134.60) 14-05-16 13:27 
20140513a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13-청교도신학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은 청교도에 대해서 할 차례인데 여기 55번, 리처드 박스터는 영국 사람입니다. 청교도는 언제 생겼느냐 하면, 1560~1662년까지 청교도운동이라고 남들이 불러줬는데 청교도운동 후반부에 리처드 박스터라는 사람이 상당히 유명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1615~1691까지 살았다고 돼있는데 이 사람 이전에 청교도운동이 있었습니다. ‘청’이란 말은 깨끗하다는 뜻인데 영어로는 puritan, 순수한 사람인데 본인들이 붙인 게 아니고 남들이 놀리면서 붙여준 거예요.

청교도운동이 영국에서 생긴 동기가 있어요. 헨리8세란 사람이 로마교황의 지시받는 게 싫어서 독자적인 교회를 선언했어요. 그걸 영국성공회, 국교회라고 해서 그건 정치적입니다. 정치적으로 분리, 독립하겠다는 겁니다. 헨리8세가 정치적으로 독립했다는 말은, 자신이 왕답게 행세해보겠다는 겁니다. 종교에 휘둘리지 않고 왕으로써 자기 나라에서는 왕의 자존심을 세우겠다고 나온 겁니다.

그리고 난 뒤에 천주교에서 벗어나서 영국에서 독자적으로 자기 나라만의 교회를 했는데 1560년경부터 1564년에 어떤 현상이 일어났느냐 하면, 이 사람들이 영국국교회라고 로마천주교에서 독립은 했는데 형식은 천주교의 의식을 채택한 거예요. 미사라든지, 유니품을 입는다든지, 세례 받는 자들이 꿇어앉는다든지, 성만찬이나 의식이라든지, 모든 것이 천주교 식인 거예요. 정치적으로는 교황으로부터 분리됐지만 내용은 천주교와 똑같은 거예요.

그래서 어떤 운동이냐 하면, 성경대로 하자. 성경이 하지 말라는 것은 안 하고, 성경이 하라는 대로 하는 그것이 옳다고 나온 거예요. 이미 그 당시에 루터와 칼빈이 등장한 후기 때문에 루터와 칼빈의 정신을 그대로 받아서 그냥 정치적으로만 분리하지 말고 내용도 루터와 칼빈이 주장한 대로 따르는 게 옳다. 그게 뭐냐? 성경이 시키는 것만 진리고, 성경이 하지 말라는 것은 안 해야 된다는 그런 주의가 등장한 겁니다. 영국 자체 내에서. 그러니까 영국성공회에 대해서 너무 까탈스럽다, 너무 지적 사항이 많다고 놀린다고 순수한 사람, 청교도, 모든 걸 시비 거는 사람들이라고 본 겁니다.

그런데 그 운동이 점점 더 퍼지니까 헨리8세 다음에 엘리자베스1세, 제임스1세로 이어지는데 엘리자베스1세 여왕이 1593년에 나라 종교의 말을 안 듣거든 다 나가라고 추방령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네덜란드 라이덴이란 곳으로 갔습니다. 지금도 라이덴 대학교가 개혁주의의 유명한 신학교에요. 그 다음에 미국으로 가요.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동부에 뉴헤이븐이란 곳에 도착해서 정착하기 시작합니다. 그때 그들은 인간 위에 인간 없다는 민주주의 정책을 쓰면서 청교도가 안정을 취하고.

그렇게 옮겨가는 가운데서 1643년부터 크롬웰이란 사람이 혁명을 일으켜요. 1643~48년까지 청교도 정신으로 신앙고백서를 만들었어요. 청교도가 무엇인지 보려면 그 당시 청교도신학을 전부 정립한 신앙고백서가 있습니다. 1643년부터 1649년까지 작성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라는 거예요.

이 시간에 우리가 해야 될 것은 청교도가 과연 복음적인지 따져봐야 되겠지요. 한국교회 개혁주의에서는 청교도가 이상적인 모범적인 성경의 진리를 갖고 있다고 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리고 특히 장로교 같은 경우에 케임브리지 교수인 카터라이트 같은 사람은 국교회라고 하지 말고 장로 중심으로 장로교라고 하자고 나왔고, 또 침례교 쪽으로 해서 독립교회 등 여러 가지 교회 정치 형식이 나옵니다.

그래서 개혁교회와 장로교회가 좀 달라요. 지금은 같이 보지만 초창기에는 달라요. 청교도가 꿈을 펼친 것은 미국에서고. 결국 청교도는 영국국교회가 없으면 생겨날 수 없었던 사상운동입니다.

청교도에 대해서 교재 136페이지 이후에 나와 있어요. 거기에 보면, 내적 확신, 성령의 확신, 가정을 중요시 하고, 기도와 경건한 기도라 해서 노동도 강조하고, 어떤 제복도 입지 않고, 모든 의식은 다 버리고 오직 세례와 성찬만 고집하고, 그리고 초대교회로 돌아가는 거예요. 초대교회 이후에 중세 시대, 1500년 동안 모든 교회는 잘못된 길을 갔다고 거부하는 겁니다.

그리고 전에는 교회가 국가의 인가를 받아야 교회를 세울 수 있었거든요. 그런데 요즘처럼 나라 허가 없이 구청에 등록 안 해도 다 세우는 거예요. 사실 요즘은 등록해야 될 판이에요. 연말에 세금감면 때문에. 혹시 어떤 교인이, “이 교회는 세금감면 됩니까?” 할 때 안 된다고 하면 다른 교회로 가버리고. 하여튼 로버트 브라운이란 사람이 1580년에 처음으로 허가 없이 개척교회를 시작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살아가는 모습이 정말 우리가 보기에 반박이 없을 정도에요. 138페이지에 보면, [리처드 박스터는 선언하기를, ‘기독교인들은 그들의 삶이 은총 안에서 자라게 하고, 그들의 영혼 안에 그리스도의 일을 강화하고 증진시켜며 육체의 일을 정복해야 한다.’라고 했다. 은총만이 사람을 신앙과 죄에 대한 회개로 인도하며 구원의 길로 안내한다. 청교도는 거듭남의 체험, 또는 변화된 의지의 확신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이들에게 회심의 체험은 그 영성의 중심에 서있었다. 회심은 성령의 사역이며 인간의 도움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총을 향한 기도와 명상은 청교도로 하여금 인간의 내적인 마음을 강조하게 했다.] 이걸 반박할 여지가 없잖아요.

영국국교회가 없었으면 청교도운동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청교도를 만들어내기 위해서 국가 정치적으로 교회는 일률적으로 이렇게 해야 한다고 선언을 했던 것이, 청교도라는 최종 진리, 확정된 진리, 궁극적인 진리를 끄집어내기 위해서 그렇게 했을까요? 지금은 그렇게 이야기해요. 장로교에서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 전부니까. 그것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담겨 있습니다.

오늘 강의 주제가 청교도신학이 옳으냐는 것입니다. 흥미롭지 않습니까? 1643년 7월 1일부터 1647년 2월 20일까지, 사실 이때 크롬웰이 청교도혁명에 성공해서 정치적으로 장악했기 때문에 가능한 거예요. 151명의 성직자들이 모였고 30명은 평신도로 그 중에 상원의원 10명, 하원의원 20명. 웨스트민스터 교회에 모여서 작성을 한 겁니다. 신앙고백을 쉽게 훈육하기 위해서 교리문답을 만들었지요. 그것을 미국 장로교회에서 채용했고 그것이 한국교회까지 건너왔고.

무슨 말이냐 하면, 최종적이란 말이죠. 손 댈 것도 없어요. 이걸 위반하면 이단입니다. 그 정도로 완벽한 신앙고백서를 만든 겁니다. 이 신앙고백서를 만들기 전에 그들이 경험했던 것이 있지요. 그들은 천주교, 영국국교회의 비성경적인 요소를 이미 경험한 거예요. 그러니까 이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그들은 안 거예요.

제가 강의하면서 주의를 요구하는 것은 자신이 이단 소리를 듣고, 주위로부터 어려움을 당했다는 그것이 반대로 이것만이 진리라고 우길 가능성이 농후해요. 공격 받았다는 이유 때문에 공격한 쪽과 반대로 하게 되면 내가 진리가 될 수 있다는 그런 자의식이 발생될 수 있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도 그 중에 하나지요.

청교도와 기존에 영국국교회나 천주교와의 차이점이 뭐냐? 딱 하나만 이야기하라면 설교 중심입니다. 저쪽은 의식, 의례, 형식적인 제도 중심이라면 설교 중심이에요. 그러면 여러분은 뭘 생각하겠습니까? 전에는 교회에서 신부가 중요했는데 이제는 설교자가 중요한 거예요. 이런 것을 염두에 두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살펴보세요.

우리가 장로교 출신이기 때문에 마땅히 배운 그것이 천주교와 다르고, 영국국교회와 다른데 그냥 다른 정도가 아니고 훨씬 더 성경에 부합된다는 그런 생각이 들겠지요. 장로 중심의 제도, 그리고 예정론을 비롯한 모든 교리, 예배형식, 신앙적인 성도의 삶 등 모든 것이 저쪽과 다르기 때문에 따져볼 것도 없이 우리는 합당하다고 생각이 들겠지요. 다른 대안이 없으니까.

저쪽 천주교에서 학대받고, 엘리자베스 여왕이 나가라고 해서 나온 거예요. 그것도 하나님의 뜻이라면. 그들을 반대했다는 웨스트민스터에 가득 담겨있다면 이 신앙고백서가 순수하게 성경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상당히 정치적인 의향이 들어있겠지요. 어느 누구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펼쳐놓고 따지는 데는 없습니다. 왜 따질 수 없느냐 하면, 그들 보기에 다 맞는 말이기 때문에. 일부러 꽁한 마음으로 캐보자는 나쁜 의도로 해봐도 다 맞는 말이에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 다 맞는다는 말이 뭘 의미하느냐 하면, 결국 이런 식으로 나가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하지 않는 목사는 하나님이 택한 목사가 아니고 성령을 받은 성도가 아닌 게 됩니다.

자, 보세요. 성경중심이지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1장이 성경에 관한 것이지요. 모든 것이 성경 중심이라고 이야기했다는 이유 때문에 성경 중심이 아니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중심으로 진리가 확정이 될 때 누가 거기에 대해서 반박할 수 있겠습니까? 반박해보세요. 뭐가 문제지요? 우리가 강의하면서 여러 번 이야기했어요. 지난 대전강의에서도 했어요. 창세기 1장 1절에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그것을 내가 입으로 고백하면 맞는 거예요?

성경에 이 말이 있지요. 성경은 무조건 옳습니다. 궁극적 진리는 성경입니다. 그걸 내가 고백하게 되면 고백한 이유 때문에 내가 절대적인 진리가 될 수도 있잖아요. 그게 아니라면 아닌 이유를 대라니까. 내가 성경대로 입술로 이야기했는데 그게 틀렸다면, 틀린 이유가 뭐지요?

-성경을 대상으로 두고 인간이 주체가 되어 성경을 해석한 게 문제라는 거지요.

그렇지요. 그거라니까. 성경은 예수님에 대한 책이잖아요. 그런데 인간이 예수님을 바라볼 때 예수님을 하나의 대상으로 간주하는 겁니다. 내가 먼저 있고 내가 바라본다는 거예요. 내가 바라본 예수가 돼버려요. 그러면 사람이 둘 있으면 예수가 달라요. 진리가 한둘이 아니에요. 교회가, 설교자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건데요? 다 옳다고 할까요?

칸트할 때 보다 세밀한 논리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데카르트는 말하기를 내가 존재한다는 것은 무조건 진리가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모든 걸 의심해도 의심할 수 없는 게 진리거든요. 모든 걸 의심하고 의심해도 안 되는 것은, 내가 여기 있다는 그걸 진리의 출발로 삼자는 겁니다. 데카르트가 그렇게 이야기할 때 다른 사람들이 거기에 대해서 반박할 수 없는 거예요. 아무리 들어도 그 말이 맞는 이야기거든요. 그 말에 동의된다는 말은 결국 데카르트도 몰랐고 그 뒤에 사람들도 몰라요.

예수님이 나는 진리라고 했지 네가 진리라고 한 적이 없지요.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님의 그 말을 기억은 하면서도 실제 생활에서는 누가 진리입니까? 내가 여기 있음에 세상은 내 중심으로. 이게 진리로 활용되기를 원하고 있단 말이지요. 신앙생활하라고 그렇게 이야기해도 신앙생활을 못 하는 이유가 어디에서 못 벗어나요? 내가 있다는 게 진리의 첫걸음이기 때문에 신앙생활 하고 싶어도 본인만 믿지 본인 외에는 믿을 수가 없어요. 그게 무슨 신앙생활입니까?

‘천국’ 하니까 내가 간다는 거예요. 지가 가는 것이 무슨 천국이에요. 탈락될 수 있다는 것도 모르고. 주님 계신 곳이 천국이지요. 출발을 나부터 출발하지 말고 주님에서 출발해야 돼요. 왜냐하면 성경은 예수님에 대해서 증거하는 거예요. 그러면 나로부터 출발하지 말아야 되거든요. 나로 하여금 진리에서 떨어뜨려낼 능력이 우리한테 있습니까? 우리한테 이게 있을 수가 없는 거예요. “나, 포기할게.”라고 포기해놓고 은근히 노리고 있다고. 자기 자신을 진리가 아님에도 불구하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무조건 진리여야 된다는 욕구와 욕망은 도대체 어디서 나온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내가 진리라는 것을 평생 두고두고 포기 못합니다.

포기 못한 상태에서 구원받으려면 결국 자기 부인은 안 돼요. 자기 부인 해봐야 자기 부인한 자기를 긍정하기 때문에 안 된단 말이죠. 그럼 어떻게 하느냐? 누가 지적질 해줘야 돼요. 그것이 주님 십자가에 근거해서 성령이 와서 우리에 대해서 책망을 할 때 우리는 포기하는 것이 아니고 책망 받으면서 책망 받은 주체가, 나를 책망하신 그분이 주체가 되면서 우리는 구원받습니다. 로마서 8장 10절, 네 안에 성령이 있으면 너는 그리스도 영이라.

주체가 바뀌었기 때문에 전에는 내가 존재한다, 내가 먹는다, 내가 물 마신다고 했는데 그 다음부터 어떻게 되느냐 하면, 주께서 물마시게 하셨다, 주께서 밥을 먹게 하셨다, 주께서 강의하게 하셨다고 하면서 우리는 수동적으로 변하고 주체는 우리 안에 따로 있는 겁니다. 그것을 십자가의 반복이라고 할 수 있는데,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나니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고, 누가 산다? 그리스도가 산다고 했지요. 산다는 것은 누구한테만 배당해야 돼요? 나한테 살아있다고 하면 안 돼요. 그러면 나한테 배당되는 것은 죽어 있다가 되고, 죽은 것은 숨이 끊어지는 게 아니고 저분과 같이 살아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저분이 살아있음과 대립 개념으로 죽었다는 개념을 우리한테 적용시켜야 된다 이 말입니다. 주 안에서 우리는 죽어있음을 통해서 죽어있다고 지적하시는 그분이 우리한테 살아있어요. 우리는 짝, 주님과 동행이 되는 겁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으로 모든 사람이 죽은 거예요. 고린도후서 5장 14절. 하나의 사건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를 지적하면서 우리는 근원을 몰랐는데 우리의 근본 뿌리를 보여줄 사건이 터져버렸어요. 그게 십자가 사건입니다. 십자가 사건 아래서 세상과 우리 자신을 다시 볼 수 있어야 돼요.

이쯤 하면 여러분이 뭘 간파해야 되느냐 하면, 청교도운동, 청교도신학이 굉장히 수상하다는 것을 짐작해야 됩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수상하냐 하면, 어느 누구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지적할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하다는 점에서 강원도 말로 많이 수상해. 아무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성경에 위반됐다고 지적할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하기 때문에 마치 지금도 성경으로 일하시는 성령의 일을 대체할 수 있는 신앙고백서, 그러니까 제2의 계시로 활용이 가능하다고 우리에게 어떤 희망을 준다는 점에서 많이 수상해.

이 말은 결국 누가 수상하다는 말입니까? 우리가 수상해. 예수 믿는 나 자신이 신앙이라고 우기는데 따지고 보면 신앙생활 안 하면서 안 하는 걸 감추기 위해서 성경에 동의하는 걸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은 충동이 우리 속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성경이 가르치지 않는 것은 다 반대합니다. 청교도의 주장입니다. 그러면 당신들이 이야기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청교도신학이 우리가 이걸 평가할 때 평가할 방법은 간단하지요. 청교도가 말하기를 성경이 가르치지 않는 것은 다 반대한다고 하잖아요. 만약에 성경에 가르치지 않는 것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있다면 우리는 반대해야만 하지요. 그들의 논리나 우리의 논리나 성경에 반대하는 게 있다면 우리는 반대해야 되겠지요. 그러면 이 안에 성경이 가르치는 것이 들어있을까요, 없을까요?

순서를 봅시다. 1장부터 35장까지 있는데, 31장에 대회와 회의에 대해서 나오지요. 이게 성경에서 가르치는 겁니까? 정치적이지요. 과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속에 성경이 가르치지 않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 단지 일부만 들어있는지, 아니면 전부 다 성경이 가르치지 않는 것인지 보잔 말이죠. 그런데 일부가 아니고 전부 다라면 어떻게 할 거예요?

제가 만약에 결론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내용이 전체 다가 성경적이 아니라면 우리가 성경적인 것에 근거해서 따로 만들면 되겠다고 하잖아요. 그게 만들 수 있을까요? 만들 수 없는 게 성령, 주님의 영 자체가 성경만 하기 때문에 아무리 만들어도 성령께서 사용하지 않는다는 말은 하나님 보시기에 그게 옳지 않기 때문에 사용하지 않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말은 만들 필요가 없는 것을 만들었어요. 왜 만들었는가? 이것이 복음적이 아니고 결국 정치적이다. 다시 말해서 정치적이라는 말은, 우리들끼리는 이상적인 교회다. 만약에 “십자가마을에서 등록한 사람은 이러한 규칙을 지키세요.” 하면 그 자체가 비성경적이고 비 복음적이에요. 왜냐하면 십자가마을은 죽은 것이고 없는 거거든요.

다시 이야기할게요. 아까 있다는 말은 누구한테 붙일 수 있다? 주님한테만 붙일 수 있어요.  사흘 만에 부활했기 때문에.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함께 하리라고 했잖아요. 그 있음이란 말이죠. 저도 있잖아 하지만 아니에요. 주님이 있음으로 우리가 있는 거예요. 주님이 만약에 두 시간 뒤에 죽여 버리면 우린 없는 거예요. 그래서 계속 있어야 있음이 되지 있다가 없는 것은 없는 거예요. 왜냐하면 결국 마지막에는 없어지기 때문에 최종적으로 없는 게 된다면 지금 있는 것도 없다는 말이 합당하다는 말이죠. 그럼 누구만 있으면 돼요? 주님만 돼요. 그게 신앙인이고 성령 받은 사람의 고백이란 말이죠. 배가 뒤집혀서 물에 빠져도 괜찮아요. 주님만 있으면 돼요.

사람들이 평소에 신앙생활을 제대로 못하는 이유가, 주님 있음은 느껴지지도 않고 나만 무조건 있어야 돼. 하여튼 제일 먼저 최종 순위가 나는 무조건 있어야 돼. 세상이 어떻게 되든 배가 뒤집어지든 나는 무조건 있어야 돼. 나는 어디까지 있어야 되느냐 하면, 죽어서 천국에 가면 내가 있어야 돼. 너는 있든 말든 내가 무조건 천국 가야 돼. 이건 신앙이 아닙니다. 그건 선악과 따먹은 티를 팍팍 낸 거예요. 그것은 마귀가 우리 마음을 계속해서 농락하고 있는 겁니다. 우리는 농락당하고 있고.

지금까지 한 걸 정리해봅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청교도신학이 담겨있다. 이걸 왜 만들었느냐? 정치적이다. 왜 정치적이냐? 심사하겠다는 거예요. 자기들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근거해서 심사해서 여기에 합격하면 성도로, 그걸 가견적 교회라고 합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이런 이야기 나와요. 가견적 교회에 오지 아니하면 구원받지 못한다는 겁니다. 천주교와 다른 게 뭐가 있어요? 천주교는 교회 없이는 구원 없지요. 칼빈도 마찬가지에요. 교회 없으면 구원 없다고 했거든요.

그러니까 칼빈과 청교도가 구원을 이해 못해요. 사람을 건져주는 게 구원이 아닙니다. 구원은 주님이 하는 프로젝트가 완성된 상황이에요.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의 구원만이 구원이고 우리 구원은 구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모든 계획은 예수님을 구원하기 위함이지 우리 구원이 아니에요. 세상에 어떤 인간도 구원된 자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본인의 이름으로 구원이 안 되기 때문에. 구원되는 사람은 아브라함이든, 엘리야든 반드시 본인은 사라지고 주의 이름으로 구원돼요. 야곱은 이스라엘로, 아브람은 아브라함으로, 사래는 사라로,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 이름 말고.

사람들이 이런 데 관심이 없기 때문에. 왜 그러냐 하면 자기 신상이 편안하거든요. 아무 일이 없어요. 만약에 여기 몇 명 모였는데 경찰이 와서 “여기서 무슨 공부합니까? 등록했습니까? 안 했어요? 허가도 안 받은 게 교회입니까?” 이래서 만약에 체포한다면 그제야 반항하면서 “목사님, 우리도 신앙고백 만듭시다.” 해서 이것은 우리가 순교를 근거로 해서 순교한 우리만이 참된 신자라는 표시라고 만들어낼 거예요. 그렇게 해서 백교도라고 할까요?

“십자가마을, 너만 잘났나?” 하는 소리가 십자가마을 공격하는 게 아닙니다. 공격하는 본인의 소속을 지키고 싶어서 그렇게 하는 거예요. 자신들의 조직을 얼마나 지키고 싶었으면 너만 잘났나하는 소리를 하는 거예요.

1장 성경에 대해서 봅시다. 이런 말 있어요. [하나님께서는 자연의 빛과 창조의 섭리로서 구원 얻기에 충분치 못함으로] 벌써 비 복음적이라. 이 말은 예수님 오시기 전에 구약 때 주님께서 일하지 않았다는 거거든요. 여러분 구약 때 주님이 일 안 했습니까? 베드로전서 1장 10절에 보세요. 이미 선지자 속에 예수님의 영이 미리 가 있지요. 충분치 않아요? 구원받기에 충분치 않다는 말은 결국 어떤 뉘앙스입니까? “주님이여, 우릴 구원하소서.” 내가 중요하니까. 그럼 하나님 쪽에서 “내가 해와 달을 만들어줬잖아요.” “충분치 않습니다.” “가만있어 봐. 성질 급하기는. 그럴 줄 알았어. 충분하도록 마지막 때에 예수님 보낼게.”

그게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처음에 나온다니까. 그게 맞는 말이에요? 열불 난다. 총신에서 다 그렇게 가르쳤잖아요. 그게 맞는 말이에요? 하나님께서 구원을 못해서 환장을 했어. 창세기 3장에서 인간을 쫓아낼 때 무슨 마음으로 그랬는데 이제 와서 구원 못해서 안타까워하십니까? 애초부터 “사람이 따먹을 수도 있지. 내가 나무 하나 더 심지 뭐.” 이렇게 될 문제를 왜 그것 따먹었다고 인간을 추방해놓고 이제 와서 “미안하다. 내가 미리 조치해야 되는데.” 그래서 신학교 교수한데 물어보라고 한 거예요. 예수님 먼저 오면 될 걸 왜 아브라함을 보냈는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일부 잘못된 게 들어있는 게 아니고 초반부터 정신, 사고방식 뿌리 자체가 이미 복음과 상관없는 정치적인 그러니까 여러분 구원받고 싶지요. 우리 단체에 오세요. 새로 청교도 만들었으니까 오세요. 여러분이 납득이 되는 정보를 제공할 테니까. 그 정보가 뭐냐? 하나님께서 처음에는 창조의 섭리가 희미해서 몰랐는데 마지막에 예수님 보내서 이제는 예수님도 믿고, 그리고 어떤 문제가 있느냐 하면, 예수님을 마지막으로 보냈잖아요. 예수님만 믿었는데 천지창조가 하나님 뜻이 아니라고 믿으면 어떻게 돼요? 그럼 탈락이에요? 둘 다 믿어야 됩니까? 하나는 안 돼요? 둘 중에 하나만 대충하면 안 되겠어요?

그래서 천주교에서는 예수님을 몰랐던 소크라테스나 플라톤, 예수님이 십자가 지기 전에 있었던 사람들은 어디 가 있느냐 하면, 결국 천국 간다는 겁니다. 왜? 그 사람들이 글을 너무 잘 썼거든. 뛰어나다는 것은 하나님 주신 일이니까 하나님이 자기가 일을 시켜놓고 버릴 리가 있겠느냐는 겁니다. 그러나 그것은 야고보서 2장에 어긋납니다. 야고보서에 하나님을 한분인 줄 믿는 존재가 나와요. 마귀지요. 마귀를 구원해야 돼요.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니까. 플라톤은 신의 존재를 인정하잖아요. 그를 구원한다면 마귀도 연옥 보내서 결국 구원해야 돼요.

출발점이 잘못됐어요. 출발점이 그리스도 중심이 아니고 구원 중심이에요. 청교도도 이야기해요. 모든 것은 그리스도 중심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런 이야기하는 배경에 무엇이 깔려있습니까? 그리스도 중심이라고 이야기하는 자는 결국은 자기가 중요하기 때문에 구원받는다. 자기 구원을 획득하기 위한 하나의 경과로서 예수 그리스도가 주라고 고백하면 된다고 결국 자기의 존재의 영원성, 불멸성을 노리고 있는 겁니다.

두 번째 삼위일체에 대해서.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 하나님이 한 분이십니까? 한 분 맞아요? 하나님은 하나에요. 하나님은 하나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이 아버지와 나는 하나지요. 그 말을 왜 합니까? 한 분인데 한 분이라고 하지 않고 하나님 아버지는 따로 계시고 나도 따로 있는데 합쳐서 하나라고 하잖아요.

그런데 여기 삼위일체에 보면, 살아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은 한 분뿐이라고 돼있어요. 이것은 바로 인간이 언어를 사용한다는 자체가 인간이 한계가 있다는 말입니다. 한계 있는 언어로 하나님을 묘사하는 데도 역시 한계가 있는 겁니다. 하나님을 하나라고 고백한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두 분이라고 해서 지옥 가는 것도 아니고. 구원은 십자가의 능력으로 구원받습니다. 제가 분명히 언급했습니다. 십자가의 능력은 살아있는 내가 그걸 믿는 게 아니고 살아있다는 것은 예수님만 적용돼요. 살아계신 주님이 죽어있는 우리에게 십자가의 능력이라는 살아있는 말씀으로 우리를 깨울 때 성령이 들어가게 되고 관계성이 맺어지면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구원받는 겁니다.

세 번째 하나님의 경륜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미래를 전부 다 예견했다는 겁니다. 예견했지만 그것이 정해진 건 아니라고 했습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예견했지만 일정한 상태로 일어날 것이라고 예견했다고 해서 그것이 정해진 건 아니라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이 예견은 했지만 안 정해졌다는 말이거든요. 그러면 하나님은 안 정해진 채로 예견했다는 말이에요.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요? 우리는 자식을 낳아도 예견할 수 있습니까? 예견 못하지요. 만약에 자식에 대해서 예견했다면 어떻게 합니까? 장애자로 태어날까봐 미리 dna 조작해서 장애로 안 태어나게 하겠지요. 우리는 몰라요. 낳고 보니까 문제가 있다면 결국 뭡니까? 예견 안 됐다는 자체가 내가 원대로 정한 권리에서 배제된다는 말이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이 모든 것을 예견했다는 말은 뭔 뜻입니까? 예정된 대로 진척되는 거지요. 그러니까 미리 정해진 거잖아요. 그게 주께서 미리 예정하신 것 맞아요.

왜 정해지지 않았다고 하지요? 뭐 때문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취지를 제가 나름대로 추정한 것은, 하나님이 인간을 미리 정해놓고 예정했다고 우기면 안 된다고 그런 뜻 같아요. 나쁜 짓해놓고 이것도 예정 됐다고 해버리면 윤리, 도덕적으로 무책임한 게 되잖아요. 그래서 예견됐지만 우리 쪽에서 정했다고 못 박을 수 없다고 하는데 그런데 뒤에 보면 그런 뜻도 아니에요. 그렇게 좋게 생각해주려고 해도.

그렇게 해석되지 않는 다른 게 있습니다. 청교도신학에 칼빈의 예정론이 들어가거든요. 미리 하나님께 선택 되었다. 여기도 문제 되는 것은, 선택 전 예정 이야기인데 그건 여기서 하지 말고. 어쨌든 미리 예견했지만 정해진 건 아니라고 마치 인간의 역사는 자기 책임과 나름대로 열심히 하는 것도 하나님께서 뒤늦게 인정한다는 뉘앙스가 강해요. 일부 사람의 자기 보람, 자기 성취감 같은 것을 마치 허용한 것처럼 느껴진단 말이죠.

네 번째가 창조지요. 무에서 창조했다는 겁니다. 무에서 창조했습니까, 혼돈에서 창조했습니까? 창세기 1장에 보면, 혼돈 가운데 있었잖아요. 흑암 가운데 있었잖아요. 왜 아무것도 없다고 합니까? 뭔가 있었는데. 청교도신학이 뭘 모르냐 하면, 창조할 때는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의 하시는 작업이 포함된 걸 창조라 하거든요. 그런데 이 사람들은 있는 걸 창조라고 보는 거예요. 혼돈이라는 있음에 대해서는 대처가 안 되는 거예요. 혼돈이 있잖아요. 혼돈은 누가 만들었는데? 혼돈까지도 창조돼야 되겠네. 그러면 창세기 1장의 창조 이전에 창조   더 나아가서 예수 그리스도 있음, 천사 있음, 그리고 하나님 있음, 그 창조는 어떻게 되는가?

복음적으로 말해서 창조는, 그리스도와 관계된 창조라고 했을 때 그게 창조지 그리스도와 무관한 창조는 창조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 십자가의 복음을 증거하지 않는 창조는 창조라고 할 수 없어요. 주님께서 그렇게 규정하신 겁니다.


10분 쉽시다.
 한윤범 (IP:14.♡.134.60) 14-05-16 13:30 
20140513b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13-청교도신학
(강의:이근호 목사)


네 번째에 보면 창조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무에서 창조했고 지으신 것이 다 선하다고 했고. 어거스틴을 따라서. 지으신 것이 다 선해요? 악마가 선합니까? 이단이 선해요? 부자 청년이 예수님에게 왔을 때 선한 선생님이라고 했잖아요. 이미 찾아올 때부터 선함과 악함을 본인들이 구분하고 온 거예요. 다른 사람은 선하지 않는데 당신은 선합니다. 그리고 이야기하기를 내가 어떻게 하면 당신처럼 영생을 얻을 수 있느냐고 할 때 그런 아이디어를 갖고 찾아온 본인이 악하다고 생각을 해본 적이 없는 거예요. 모든 것이 선하다고 고백한 그것이 악이라고 생각해본 적 있습니까? 그렇게 생각해야 돼요. 지금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서 모든 게 선하다고 여기는 그 자체가 악에서 나온 생각이라는 것을 생각해보자.

하나님이 선하다. 맞잖아요. 신약성경에 하나님이 선하다, 예수님이 선하다고 말할 수 있는 자격이 안 됩니다. 왜냐 하면 우리는 그리스도 밖에 있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은 그리스도 밖에서는 어떤 소리해도 악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선하다는 것은 뭐냐 하면, 뭐가 여기 있어서 선한 것이 아니고 선이 방출돼야 되고 그냥 있음에 선함이 아니고 어떤 활동성, 기능성으로 우리에게 찾아들 때 선하다고 할 수 있어요. 그렇게 되면 우리는 그 앞에서 뭐가 됩니까? 우리가 악하구나.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보여주기 전까지는 성령 없는 상태에서 신은 선하고, 예수님은 선하고, 내가 선하다는 모든 것이 악이라는 것을 차후로 고백하게 돼있습니다. 그 고백이 선한 거예요.

누가복음 18장에서 세리가,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했거든요. 주께서는 이걸 뭉쳐서 의인이라고 한 거예요. 죄가 의라는 말이 아니고, 나는 죄인이라고 한 것이 의인이라는 거예요. 그럼 나는 죄인이라고 하면 착한 일입니까? 이건 착한 일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의가 돌출된 거예요. 하나님의 의가 그 죄인에게 퍼부어진 거란 말이죠. 뭐든 이렇게 보면 돼요. 그리스도가 하신 것, 그리스도가 십자가 능력으로 왔을 때 그것만 의가 되고 선이 되는 거예요. 존재적으로 선이다, 악이라는 그 자체가 선악과 따먹은 티를 내기 때문에 악한 것이 된다니까요.

이 말은 더 나아가서 우리 교회는 복음을 고백하기 때문에 선한 교회라고 하면 안 돼요. 왜냐하면 인간의 모든 것은 시공간의 의식은 항상 과거가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지난 것을 과거로 인식하는 현재로 보거든요. 과거를 보고 하다보니까 하나님, 예수님도 나의 과거의 산물이 돼버려요. 그리고 내일 되면 지금의 고백이 과거가 돼버리고. 과거는 없는 거예요.

따라서 하나님의 의와 선을 내 손에 소유할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러면 내가 소유 못하면 어떻게 되느냐? 내가 소유 안 해도 주께서 소유케 함으로 말미암아 내가 기껏 생각하는 것이 내 자랑밖에 안 나온다고 고백하는, 나는 죄인이라는 고백이 주의 성령에서 나올 때 그것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의가 되고 구원받은 성도가 되는 겁니다.

이 생각이 어렵지 않아요. 나로부터 출발하면 어려워요. 내 바깥에 주님이 부활해 계시고 주님이 나에게 쏘아댈 때 이렇게 보면 전혀 어렵지 않습니다. 목사가 교인들을 가르치려고 하면 교인은 힘들어요. 그런데 주께서 밀어붙여서 고백한 성도 같으면 목사는 하나도 신경 쓸 것도 없어요. 왜? 목사가 손대기 전에 먼저 주님이 손대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교회 오셨습니까? 주께서 보내주신 거예요. 삐졌습니까? 주께서 삐지게 하신 거예요. 목사가 신경 쓸 게 아니라니까요. 교인이 당신은 이단이라고 한 소리도 주님이 하셨다고 믿어버리면 목사한테 아무 문제없는데 “내가 실컷 가르쳤는데 이제 와서 나를 배신 해.” 이러면 목사 본인이 힘들다니까. 본인이 믿음 없는 거예요.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인데 지 인생 왜 지가 관리해요.

청교도운동은 정치운동이지요. 청교도운동이라는 게 없어요. 없는 걸 자꾸 들춘다는 것은 과거가 그리워서 하는 거예요. 지금의 한국교회가 과거가 그리워서. 너무 섞었으니까 청교도로 돌아가자. 가봤자 천주교한테 핍박받고 돌아가야 돼요. 핍박 안 받으면 청교도로 못 돌아가요.

네 번째 창조에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서는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줬다고 자유의지를 인정합니다. 그 의지로 하나님의 일을 성취한다고 돼있고.

그 다음에 5장에 섭리에 대해서 인간을 제2의 원인이라고 보는 거예요. 이것은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에서 나온 거지요. 제1 원인은 하나님이고, 제2 원인은 인간 또는 피조물, 인간이라고 보는 거예요. 제가 매직을 공중으로 던졌다가 받았다. 이게 왜 움직였지요? 제2 원인은 내가 자유의지로 던지고 싶어서 던졌고, 그것을 받쳐주는 제1 원인은 주께서 하도록 허락했기 때문에 했다는 말입니다.

이게 복음적입니까? 이것은 바리새인도 이렇게 하겠다. 바리새인들이 이 이야기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였다면 예수님이 그 이야기에 대해서 동의하시겠습니까? “그래 네 말이 맞아. 제2 원인이고, 하나님은 제1 원인이다.” 이렇게 이야기합니까? 회개나 하라고 하시겠지요.

제1 원인, 제2 원인을 구분하는 이유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의 일은 측량할 수 없다고 이야기하면서도 측량 가능한 일부를 자기가 확보하겠다는 거예요. 그런데 이것이 얼마나 위험한 발상인지 그림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해운대로 와야 될 차가 광안대교로 갔을 때에 운전을 피곤하게 한 것은 제2 원인이고, 하나님이 그렇게 하게 하셨기 때문에 제1 원인이고. 그럼 결과적으로 짜증낼 일이 없네. 그렇다면 범사에 감사해야 되겠지요. 그런데 이게 만약에 범사에 감사가 된다면 제1 원인과 제2 원인이 플러스 되어서 감사가 나왔잖아요. 그럼 다음 날에 올 때도 또 돌아와야 돼요. 감사 또 나오게.

사도 바울이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하니까 바리새인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러면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해서 우리가 더욱 더 죄를 지어야 되겠네.” 하는 발상이 바로 제1 원인과 제2 원인을 결합을 시킨 것이 그 발상이에요. 우리가 어떤 죄를 짓게 되면, “죄 지었어요? 용서해줄게.” 이러면 갑자기 없는 용서가 발상되면서 “하나님이여, 감사합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니까 영광이 된다는 사고방식이냐?”라고 바리새인이 사도 바울에게 물었던 거예요. 로마서 3장과 6장에서.

뭐가 문제냐 하면, 지금 운전자가 길을 잘못 간 게 운전자 잘못이 아니고 옆에서 네비했던 분의 잘못이었고, 네비했던 그분의 잘못도 아니고 그분과 결혼한 사모님도 문제가 돼요. 결혼 안 했으면 그런 잘못이 없었을 거고.

제 말은 세상의 모든 것이 서로 원인과 결과고 얽어있는데 우리는 일부만 빼서 울타리를 친 게 문제가 된 거예요. 울타리를 치면 최선을 다했으니까 나는 죄 짓지 않았다는 발상이 나오는 겁니다. “하나님이여, 제가 하는 헌금은 성령에 의해서 하는 헌금이기 때문에 이것만은 죄가 아닙니다.”라는 식의 사고방식이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헌금하면서 자기가 알고 있던 관계만 따져보니까 별 문제가 없으니까

그런데 세상의 모든 변화를 읽었다고 칩시다. 돈 한 푼 버는데 온갖 비리와 뇌물과 모든 악습과 그리고 이웃을 배제한 채 행동했던 대가가 지금 돈이 나왔고 그 돈의 일부로 헌금한다면 그것이 창기가 바친 헌금이 아니라고 주께서 할 수 있겠어요? 없지요. “네가 돈 버는데 이러저러한 것을 고려했나?” “안 했습니다.” “그러면 네가 최선을 다했다고 말하면 안 되지. 그것이 최선이 될지, 최악이 될지 네가 모르잖아.” 어떤 행동을 해도 이것만은 착하다고 할 수 없어요. 왜? 세상의 모든 변화를 다 읽을 수 없기 때문에.

산 속에서 도 닦다 와서 그냥 길 건너보세요. 벌금 오만 원 뭅니다. 자기는 법이 그렇게 바뀐지 몰랐어요. 십년 만에 산에서 내려와서 지하철에서 담배 피울 때 실내에서 담배 못 피우는 게 그 전에는 없었거든요. 몰랐거든요. 모르면 선입니까? 모르면 해도 돼요?

한나 아렌트라는 유명한 여자 철학자가 이런 이야기했어요([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오백 만의 유대인이 죽었잖아요. 이 유대인 처형의 최고책임자인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을 보면서 이 사람은 아무리 봐도 악한 일을 할 사람이 아니다. 그런데 왜 오백 만을 죽였느냐? 자기는 관료로서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다. 악해서가 아니라 그래야 나라가 되거든요. 그 사람은 착해서 구원받습니까, 어떻습니까? 한나 아렌트는 그 사람을 욕할 수 없다는 거예요. 우리는 직장에서 충실하게 시킨 대로 하잖아요. 오백 만 안 죽였다고 우리는 착한 사람 됩니까?

이게 칼빈의 [기독교강요]에서도 고민거리가 됐어요. 그래서 칼빈은 나눴어요. 악한 것과 선한 것과 악하지도 선하지도 않는 그 중간도 있다는 겁니다. 그 중간이라는 것이 시대에 따라서 상황 따라서 중간 지형이 달라지는데? 그때는 어떻게 할 건데. 북한의 중간 지형과 남쪽의 중간 지형이 달라요. 북한은 어버이 수령 안 부르면 죽습니다.

제1 원인, 제2 원인 따지는 것은 이런 뜻이에요. 세상만사가 주의 주권 아래 있지만 그래도 우리 나름대로 착한 일은 포기하지 말아야지. 그래야 청교도, 퓨리턴, 깨끗한 선한 생활이 확보가 된다는 겁니다. 모든 청교도 책들이 다 그래요. 하나님은 하나님대로 하면서도 결국 노리는 것은 나는 착해질 수 있다는 거예요. 나는 착한 일하기 때문에 성령 받은 사람 맞고 그렇기 때문에 누가 뭐래도 구원받았고 이렇게 착한 일한 사람끼리 모이면 청교도 교회만큼은 이상적인 합당한 교회다. 이게 얼마나 정치적입니까? 집단적이에요. 이게 사건이 아니고 존재를 소유하려는 존재를 믿는 거예요. 날마다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존재, 고정된 것, 절대적인 것. 선악과 따먹은 티입니다.

6번, 죄가 유전한다는 겁니다. 죄가 유전한다? 죄인이 유전하겠지요. 우리가 태어나면서 죄인이기에. 죄를 유전하지는 않잖아요. 유전이란 말은 이쪽에서 이쪽으로 전달되는 걸 말하잖아요. 그런데 최초부터 죄가 있다면 전달하고 말고 할 게 없지요. 항아리 안에 구슬 열 개 넣으면 구슬이 유전합니까? 항아리에 열 개 넣고, 다음에 다섯 개 넣고, 세 개 넣고, 다음에 스무 개 넣으면 새로 들어온 것은 유전된 거예요? 외부에서 누가 집어넣어준 거잖아요.

에서와 야곱이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하나님께서 하나는 사랑하고 하나는 미워하기로 예정돼있지요. 그러면 에서와 야곱은 왜 태어났습니까? 그것은 주께서 이미 지정된 사람으로 집어넣어준 거잖아요. 에서의 부모는 엄마는 리브가고 아빠는 이삭이거든요. 리브가가 불임여성이에요. 자식이 없다니까요. 무슨 말이냐 하면, 선조가 먼저 있고 후손이 나중에 있는 게 아니고 후손을 위하여 선조가 먼저 있다고 생각해봅시다. 어려운 말이다. 세례 요한이, 그분이 나보다 먼저 온 것은 내 뒤에 오시는 분이 먼저 있다는 이 말을 하고자 하는 겁니다.

우리는 태어났다고 해서 세상에서 나중에 존재한 것 맞아요. 하늘나라도 그러냐 이 말입니다. 아브라함이 먼저입니까? 아브라함 자손이 먼저입니까? 갈라디아서에서 아브라함 자손이 먼저 있지요. 예수님이 그 점을 바리새인에게 한 겁니다. 누가 먼저 있었느냐 이 말입니다. 자손이 선조보다 먼저 있는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사람보다 먼저 있었던 거예요.

죄가 유전되는 것이 아니고 죄인이 그냥 생산, 등장하는 겁니다. 부모 죄를 자식이 이어받는 것이 아니고 모든 사람은 죄 아래서, 아담의 죄 아래서. 아담이 먼저가 아니고 예수님이 먼저 있었거든요. 그래서 아담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다. 맞잖아요. 어떤 모형이냐? 아담 안에서 죄가 왕 노릇한다. 예수님은 의가 왕 노릇하고. 아담에서 누가 태어나든 아담과 선조에 관한 사적인 문제가 아니고 집단적인 문제입니다. 개인적으로 따질 문제가 아니에요.

구슬이 열 개 있는데 우리끼리 유전시켜서 열한 번째 구슬 나온 게 아니고 바깥에서 뚜껑 열고 누가 던져 넣으면, “똑같은 구슬 또 들어왔네.” 이렇게 되는 겁니다. 똑같은 죄가 또 들어온 거예요. 유전이라는 것은 어거스틴의 한계인데 그걸 그대로 인용했어요.

일곱 번째, 사람과 맺은 하나님의 계약에서 처음에는 행위계약이라고 했어요. 계약에 무슨 행위가 들어갑니까? 하나님과 인간의 계약은 행위계약이 아니에요. 왜냐하면 그 계약의 원천은 인간을 배제한 계약입니다. 성부와 성자 사이의 계약은 행위계약이 아닙니다. 그럼 뭐냐? 그냥 계약이죠. 행위란 말을 집어넣은 이유가 뭐냐? 성부와 성자 행위 속에 인간의 행함을 집어넣어서 해석해야 해석되는 것처럼 오해해서 그런 겁니다. 구약을. 행위계약 아닌 것을 무조건계약이라고 하거든요. 무조건계약의 반대를 행위계약이라 하지 말고 조건계약이라고 해야 되지요. 그리고 행위계약의 반대말로 은혜계약이라 하고 은혜계약은 그냥 조건 없이 주는 것, 무조건 언약이 되지요.

이 모든 이해가 누구 중심입니까? 인간이 어떻게 받아 챙기느냐? 자꾸 인간을 계약 속에 집어넣어야 마땅하다는 오해 속에서 생긴 거예요. 계약에서 인간은 처음부터 배제돼있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멸망했기 때문에. 그럼 처음부터 그들은 멸망해야 되겠지요. 그렇다면 그들이 죄 짓고 멸망하는 것도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조치잖아요. 처음부터 율법은 행위계약이 아니고 무조건적으로 멸망하라고 준 거예요. 이것은 제 이야기가 아니고 로마서 3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율법이 더한 것은 그들의 입을 막고 저주 아래 있고 죄를 더하게 함이라. 무조건적이잖아요. 따질 것도 없이 무조건적이에요. 이게 무슨 행위입니까?

8번, 중보자이신 그리스도.
여기도 문제가 있어요. 그의 사람의 본체가 하나님의 본체와 결합이 되어서 성령을 주었다 하는데 결합이 된 게 맞습니까? 제가 읽어볼게요. [그리스도는 두 가지 본성에 따라서 중보사업을 하셨다. 각각 그 본성의 고유한 것만 하셨다.] 얼마나 위험한 말이에요. 다시 말해서 인간의 일을 할 때는 하나님의 일을 안 했단 말이에요.

두 가지 본성으로 했다. 그건 누가 판단하는 거지요? 예수님이 그렇게 이야기하던가요. 나, 두 가지 본성이 있다고. 그건 인간들이 인간을 모델로 삼아서 인간은 한 가지 본성밖에 없는데 예수는 두 가지 본성이 있네? 그러니까 그걸 견주는 전제로 본인을 모델로 해서 납득을 해보겠다는 거예요. 우리가 갖고 있는 본성이 있는데 추가적으로 우리에게 없는 게 하나 더 있는 게 하나님의 신적인 본성이라고 본 겁니다.

그렇다면 생각해봅시다. 인간들이 본인은 인간에 대해서 안다고 해서 인간이라고 한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것이 있다고 하잖아요. 그러면 이 하나님의 개념은, 인간이 아닌 하나님이잖아요. 인간이 아니면 하나님이십니까? 괴물이나 외계인, 천사는 될 수 없습니까? 논리 출발 자체가 인간 아닌 것이에요. 인간 아닌 것이 신입니까? 그게 바로 인간의 한계에요. 자기보다 능력이 많으면 신적이라고 하고 있어요.

뭐가 신이냐? 뭐가 하나님이냐? 인간들이 인간보다 능력이 많고 인간 아닌 것이 하나님이라는 그것 때문에 죽임을 당하신 분이 하나님이에요. 그 외에 다른 하나님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숨어있기 때문에. 숨어있는 하나님이 안 숨었다고 생각하고 분명히 우리보다 능력이 많고 전지전능하니까 우리가 못하는 걸 해준다고 여기면 그것은 인간이 늘어난 것, 하늘까지 늘여서 어떤 어르신네, 그걸 하나님이라고 생각한 거예요. 그것은 인간적인 이성에서 나온 초월적인 존재에 불과한 겁니다.

제가 말씀드립니다. 예수님이 어떤 일을 할 때 인성, 신성 따져서 일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일했는가? 예수님은 인자로서 일했습니다. 풀이하면 사람의 아들, 참된 사람, 유일한 사람. 다른 사람은 사람 아니에요. 유일하게 하나님인 인정하시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기뻐하는 자라. 복음적으로 이야기하면 하나님의 언약을 듬뿍 안은 채 활동하시는 인간, 그분의 자격으로 일하셨지 사람+신 이런 결합체로 일하지 않았습니다.

9번, 자유의지.
인간에게 자유를 준 것은 자연의 멍에로부터 해방하기 위해서다. 왜 자연의 멍에로부터 해방시켜야 됩니까?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준 것은 죄 아래 있던 자연의 멍에에서 해방시킨다. 자연의 멍에에서 해방되면 뭐가 되지요? 인간 자체가 자연이 아니었던가요? 저는 그렇게 알고 있는데. 인간과 자연을 분리하면 안 돼요. 인간이 자연의 일부란 말이죠. 자연에게 주어진 상황이 인간에게 그대로 주어져요. 로마서 8장에.

세상의 모든 피조물이 후패해가지요. 모든 자연물이 다 그래요. 해바라기, 코스모스, 코끼리, 돌고래, 인간도 마찬가지고. 같이 썩어가고 있어요. 특히 아담 같은 경우에 이마에 땀을 줄줄 흘리다가 나중에 흙으로 돌아가지요. 흙이 뭐지요? 자연으로 돌아가잖아요. 그러니까 인간이 자연의 일부 맞잖아요. 자연의 멍에라니? 거기서 왜 벗어나는데. 자연으로 돌아가야지요.

왜 이런 소리를 하느냐 하면, 인간에게 과학과  문화와 문명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인정해주겠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노동도 기도니까. 그래서 청교도에선 기도만 하고 노는 놈들 싫어해요. 당신이 진정한 성도라면 노동하라는 겁니다. 노동하면 결국 문화와 문명이 발달되겠지요. 문화와 문명이 발달되면 국가가 되겠지요. 결국 국가의 발전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총에 부합된 가현체지요. 그러면 그 나라는 긍정적인 나라가 되겠어요.

그런데 다니엘서에서 모든 나라는 짐승이라고 돼있는데 그건 어떻게 되지요? 다니엘 2장에서 마지막 짐승은 금, 은, 동, 놋, 철, 철 다음에 철과 진흙이 섞여있단 말이죠. 철과 진흙이 섞여있는 로마제국은 같은 민족이 아니고 다른 민족이 섞인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 인간 제국은 없어요. 그 전체가 하나의 짐승 속에 예속되지요. 그러니까 이 세상 모든 나라는 결국 짐승이잖아요.

아까의 논리에 의하면 나라는 짐승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신 축복의 터전으로서 하나님의 은총이 있다는 말인데 하나님 이 나라를 멸망시키면, 하나님이 주신 은총을 자기가 저주해버리는 그런 모순에 빠진단 말이지요.

10번, 실제적 부르심.
성령의 역사가 있더라도 바로 그리스도에게로 오지 못한다. 이런 발언이 나와 있어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서 이런 이야기하는 것은 바로 히브리서 6장에 보면, 성령의 비춤을 얻고 회개치 아니하면 영원히 저주받는다는 뜻이거든요. 그 말이 그 뜻일까요? 성령의 역사가 있더라도 그리스도에게로 오지 못한다는 말은, 성령은 오고 안 오고를 이야기하기 위해서 한 게 아니고 성령은 그리스도를 증거해요. 그러면 오고 안 오고는 성령 차원에서 논하면 안 되고 주님 권한에 맡겨야 돼요.

중풍병자가 왔을 때 예수님이 뭐라고 했습니까? 네 죄가 사해졌다고 했지요. 그때 유대인들이, 네가 뭔데 죄를 사하느냐? 이것은 하나님만 할 수 있다고 할 때 죄 사함의 권세가 오직 주님한테 있다는 거죠. 그게 성령이 오게 되면 그 이야기를 우리한테 하는 거예요. 성령 차원에서 오고 가고 하는 질문 자체가 성립 안 되는 겁니다. 주께서 오라고 하면 어떤 이도 오고, 주께서 애초부터 찾아가지 아니하면 어떤 누구도 구원 못 받는 겁니다. 주님이 행할 차원을 성령이 해버리면 골치 아픈 일이 일어나요.

어떤 일이 일어나느냐 하면, “목사님, 이번에 병이 나았는데 성령께서 하셨는데 병 나았으니까 구원받은 것 맞지요?”라고 했을 때 뭔가 공부 좀 했다면, “이때 정신 차려야 돼.” 히브리서 6장에 보니까 “성령으로 병 나았지요?” “나았습니다.” “그런데 그걸로 구원받는 건 아닙니다.” 그러면 그쪽에서 기다리는 답변은 뭡니까? “그러면 성령으로 하되 병 고치는 것 말고 뭘 해야 구원받습니까?”라고 한다 말이에요. 그러면 “성령의 비춤을 얻고 그 다음에 회개할 줄 아는 사람으로 바뀌어져야 구원받습니다.” 성경대로 한다면 이렇게 되잖아요. 그러면 결국 그 사람이 병 고침 받고 회개 따로 하게 되면 구원받습니까? 지금 그 사람은 성령과 상대하면서 뱅뱅 돌지요. 그러니까 결국 그 사람은 자기 구원에 집착하다보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연결이 안 되지요.

히브리서에서 그런 이야기하는 것은 성령에서 머물지 말고 어디까지 가라? 십자가, 언약의 피와 연계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단번에 죽으심에 연계하기 위해서 한 거예요. 성령에 머물지 말고 왜 성령에 비춤을 얻고도 구원 못 받는가? 그리스도가 결정할 문제지 성령 차원에서 결정할 문제가 아님을 알 때 그 사람은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살지 성령의 증인으로 사는 건 아니란 말입니다.

그리고 [택함을 받은 영아는 어려서 죽는다 할지라도 성령을 통해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중생하고 구원을 받는다.] 문제없는 것 같은데요? 어린 아이가 믿고 안 믿고 의식 없을 때도 그냥 태어나자마자 죽을 때도 지옥 가는 게 아니고 성령을 통해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중생하고 구원을 받는다.

이게 논란거리가 돼요. 구원을 주님이 주시잖아요. 어린아이든 어른이든 상관없이 주십니다. 그러면 중생이란 뭡니까? 주께서 구원을 주실 때 일어나는 결과지요. 내 쪽에서 뭘 가질 필요가 없지요. 어른 같으면 거듭났다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어린애는 중생의 고백할 수 없잖아요. 그렇다면 어린애는 중생이란 말이 빠져야 마땅하잖아요. 그냥 구원해주면 구원하는 거예요. 중생이란 절차가 필요 없단 말입니다.

그 뒤에 11장, 의에 대해서. 그 다음에 양자에 대해서, 성화에 대해서, 믿음에 대해서, 회개에 대해서, 그 다음에 선행에 대해서 나오잖아요. 지금 여기서 어린애는 다 빠져야 되겠지요. 그러면 의에 대해서, 양자에 대해서, 성화에 대해서, 구원의 믿음에 대해서, 생명의 회개에 대해서, 선행에 대해서, 그리고 17장에 성도의 궁극적인 구원에 대해서, 18장에 은혜와 구원의 확실성에 대해서, 이 전체 내용에 대해서.

성경에 거듭남이라든지 의라든지, 거룩됨, 성화 이것이 인간 하나를 두고 구분될 수 있는 개념들입니까? 하나의 개인에 대해서 순서 지을 수 있는 개념으로 사용하라고 주신 것들이에요? 아니지요. 예수님 본인이 하시는 일들을 나열한 거지요. 무슨 말이냐 하면, 인간이 죄에 대해서 할 때는 칭의로 이야기하는 거예요. 인간이 개인으로 죄 짓는 게 아니고 인간이 죄 속에 있을 때는 하나님의 의로우심으로 오시는 거예요.

그러면 인간은 개인으로 마중하지 못하면 아담의 자격으로 가는 거예요. 아담 안에 있는 자는 죄 아래 있잖아요. 그리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의 안에 있단 말이죠. 의란 개인적으로 자기 서랍에서 뭘 하나 집어들 문제가 아니고, 내가 뽑아서 나열할 문제가 아니고 내가 속해 있는 아담의 세계 전체에 대해서 주님이 갖고 있는 주님이 하실 일을 일괄적으로 보고 내리시는 작업이잖아요. 거룩함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거룩함 속에 있지요. 주 안에 있기 때문에. 그리고 영화, 영광스러움도 마찬가지에요. 주 안에서는 다 영광스럽지요.

17장, 18장은 결국 한 마디만 하면 돼요. 주 안에서 주님에 의해서 일어나는 주님의 결과들   우리는 그걸 가져오면 될 것 아니냐 하는데 주 안에는 우리가 죽어서 들어가야 돼요. 우리가 살아서는 못 들어가요. 아예 죽은 자로 들어간다니까요. 펄펄 심장이 뛰어도 주 안에서는 죽은 자로 받는 거예요. 죽은 자인데 의롭게 되었고, 죽은 자인데 거룩하게 되었고, 죽은 자인데 영광스럽게 되는 거예요. 죽은 자인데 회개 안에 있는 거예요. 전에 십자가마을에서 구원파 이야기할 때 회개 안에 있다고 했잖아요.

구원의 확실성이라는 자체가 얼마나 위험한 말이에요. 확실성이란 말은 결국 과거로 쓰일 개념에 불과합니다. 확실해. 언제, 언제에. 보세요. 묻잖아요. 언제냐고. 인간 자체가 시간과 공간적 의식 속에 있기 때문에 항상 시간을 물어요. 지금은? 몰라. 확실성 자체가 인간이 주 안에 있지 않고 자기가 펄펄 살아있는 내 안에서 주님을 모시려하니까 좋은 건 다 끌어 모으는 겁니다. 선행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양자에 대해서. 이것도 복음적이 아닙니다.

19번, 하나님의 율법에 대해서.
율법을 여기서 도덕법이라고 하잖아요. 도덕법이 성립됩니까? 답변해보세요. 주 안에서 도덕법이 없어요. 왜냐하면 도덕을 하려면 살아야 되거든요. 죽은 인간이 무슨 도덕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모든 선행은 주님 하시는 게 선행이에요.

예수님이 이 땅에서 선행했습니까? 인간들의 선행은 오병이어할 때 선행이라고 본 거예요. 주님은 선행한 게 아니고 인간이 제일 싫어한 걸 했어요. 내 살과 내 피를 마셔라. 지난주일 낮에 했잖아요. 자기 살과 피를 남한테 줍니까? 그게 선행이에요? 무슨 선행이 야쿠자도 아니고 살벌해요? 주님의 선행은 이해 못할 선행이에요. 인간이 이미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선악과 범주 안에서 납득도 이해도 안 되는 바깥의 일을 하실 때 무조건 진리고 무조건 선한 일이 되는 겁니다. 도덕법은 없습니다.

신자의 자유와 양심에 대해서 왜 그냥 넘어갑니까? 자유가 마음대로 하는 걸 자유라고 하지 않거든요. 어디에 갇혔다가 빠져나온 그걸 자유라고 합니다. 그런데 인간의 자유는 자기 갖고 있는 자율성을 두고 자유라 하거든요. 성경과 말이 안 맞아요.

21번, 예배와 안식일에 대해서.
지금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결정적으로 바리새인이에요. 왜냐하면 특정 날을 지키라는 거예요. 특정 날을 경건하게 지키라는 거예요. [보통 시간의 일부분을 구별하여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이 자연의 법칙에 합당하다.] 특히 이레 중에 하루를 안식일로 정하라고 했거든요. 그러면 제가 묻고 싶어요. 그럼 왜 화요일은 안 되지요? 이발소나 미용실처럼. 여기 보면 특정 날인데.

그러니까 이 사람들은 초대교회를 흉내 내고 있는 거예요. 초대교회가 진리입니까, 예수님이 진리입니까? 초대교회, 과거를 회상하면 안 돼요. 현재 주께서 어떻게 일하십니까? 우리를 죄인으로 만드는 이 모양, 이 꼴로 되게 일하지요. 그러니까 지킨다는 게 있으면 안 돼요. 골로새서 2장에 안식일을 지키지 말라고 했어요. 정면으로 어긋나요.

왜 청교도는 이렇게 지키고 싶어 할까요? 티를 내야 되니까. 너희와 우린 달라. 사람들에게 보여줌으로서 그동안 당했던 것을 보상받고 싶었던 심리가 있었던 겁니다. 당한 만큼 우리는 천사 됐다는 걸 뽐내고 자랑질하고 싶은 거예요.

22번, 합당한 맹세와 서원에 대해서.
가관입니다. 하나님이 맹세를 허락했다고 돼있어요? 하나님은 맹세를 허락한 적 없습니다. 여러분 다 아시지요. 마태복음 6장에 맹세치 말라고 했지요. 그런데 맹세했다는 겁니다. 서원을 허락했다는 겁니다. 맹세할 때는 진리라고 확신하고 하라는 거예요. 바보가 아닌 이상 진리라고 확신하고 맹세하지 농담 삼아 합니까. 이건 말하나마나 아닙니까. “주님이여, 아들 낳으면 신학교 보내겠습니다. 농담입니다.” 그렇게 맹세한 부모 봤어요? 이건 정치적이에요. “우리 집단을 봐라. 너희들 집단과 얼마나 다른지.” 뽐내기 위해서 자체적인 규칙을 진리라고 우기고 있는 겁니다.

23번, 관공직에 대하여.
이건 이번에 해경 보면 알아요. 그 해경에 기독교신자가 있다고 생각해봅시다. 아까 이야기한 유대인 오백 만 죽인 아이히만은 관공서 직원이에요. 자기 조직에 충성했던 사람입니다. 얼마나 인간이 자기 정당성입니까.

24번째, 결혼과 이혼에 대해서.
[참다운 개혁교회를 신봉하는 사람은 이방인이나 천주교신자나 우상숭배자와 결혼할 수 없다.] 이 말은 달리 말하면 결혼하되 같은 교인들끼리만 결혼하라는 거예요. 그 교회에 총각 없으면 처녀로 늙어야지요. 처녀 없으면 총각으로 늙어야지. 아니면 데려오든지. 데려온다면 부작용이 있겠지요. 성령 받지도 않았고 거듭나지도 않았는데 교회에 와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외우고 결혼하면 경건한 청교도인 되는 겁니까?

그 다음에 교회에 대해서. 아까 이야기했듯이 가견적인 교회 없이는 구원 못 받는다고 했고.

26번, 성도의 교제에 대해서.
성도의 교제가 문제가 있어요. 고린도전서 6장에 보면, 교회에서 사기 당하더라도 형제를 고소하지 말라고 했지요. 그렇다면 평소에 사기꾼과 교제할 수 있겠어요? 못하겠지요. 사기꾼인지 뻔히 아는데. 그러면 자기가 알아서 교제를 분별하겠지요. 그렇게 되면 교제의 취지가 주님의 교제가 아니고 자기로부터 출발하지요.

로마서 14장에서 채소만 먹는 사람과 안 논다고 할 때 사도 바울이 놀지 말라고 했습니까? 형제를 넘어지게 하면 안 된다고 했지요. 교제란 것이 어디서 와야 돼요? 내가 자유의지를 발휘한 교제가 될 가능성이 있음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고려하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심지어 치매 걸린 할머니도 인물 안 좋은 요양사는 미워하거든요. 그렇다면 교회 와서도 못 생긴 사람은 사람 취급도 안 된다면 그게 무슨 교제겠어요.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는, 그렇게 하려면 십자가 복음 안에서는 교제할 것도 없이 그 자체가 교제가 되도록 하시는 겁니다.

마지막으로 합시다.
세례, 성례, 주의 만찬, 한꺼번에 넘어가면 이것은 바로 하나님이 설교자에게만 맡겼고 하나님이 설교자를 택하여 세웠다는 겁니다. 택하여 세워진 설교자와 설교자를 택하여 세웠다는 것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구분하지 않습니다. 무조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대로 설교하면 택하신 설교자가 돼요. 목사들 듣기에 얼마나 기분 좋습니까. 따지지도 말라. 무조건 설교했다는 자체가 주의 역사, 기적이라는 거예요. 그 사람만 성만찬 할 수 있다는 거예요. 다른 사람은 안 된다는 겁니다.

사람의 사후상태의 부활과 최후의 심판, 성령 안에서 복음전파에 대해서 뒤에 나오는데 이것은 뭐냐 하면, 지금 죽으면 완전한 구속은 안 되고 마지막 예수님 재림할 때까지 대기상태에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최후의 심판은 하나님을 모르고 그리스도 복음에 복종치 사악한 사람들은 영원한 심판

여기에 제가 최후의 심판이나 사후의 상태에 시비 거는 것은 이런 이야기에 주님의 예정하심이 포함이 안 됐다는 거예요. 네가 대들었기 때문에 심판받는다고 되는 겁니다. 어떤 인간치고 본성상 대들지 않는 인간이 없어요. 베드로도 대들었잖아요. 그런데 구원받았잖아요. 그러면 심판과 하나님의 구원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주께서 사랑으로 다가왔고 찾아왔잖아요. 찾아온 사람의 특징이 뭐겠어요? 내가 나 된 것은 주님의 은혜입니다. 그 정도로 나는 부실하기 때문에 그 정도로 나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기 때문에. 이게 복음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청교도를 보면서 하나의 역사에서 이런 현상이 있음을 알면서 또다시 오늘 이 시대가 마찬가지인 것을 저희들이 깨닫습니다. 어느 시대든 간에 주께서 살아계시고 일으킨 일이오니 그 가운데서 우리 자신의 본모습을 발견하고 우리도 마찬가지임을 자백하면서 십자가 피로만 용서받게 된 것을 주 앞에 감사드릴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