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이전지역강의포함)

울산강의-생명책 141107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4. 11. 12. 09:16

2014-11-07 23:34:20 조회 : 99         
생명책 141107 이름 : 이근호 (IP:119.18.98.57)

음성1                      음성2

 

동영상1                 동영상2

 한윤범 (IP:119.♡.174.28) 14-11-11 18:08 
20141107a 울산강의-출애굽기 32장 : 생명책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은 출애굽기 32장 32절에 보면, 그전에 하나님이 언급한 적이 없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것은 주의 기록하신 책이야기를 모세가 먼저 끄집어내었고, 그 다음에 33절에서 “내게 범죄하면 그는 내가 내 책에서 지워버리리라” 또 책이야기를 끄집어냈지요. 지금 모세와 하나님과 의견이 통하고 있는 거예요. 그것은 시내산 위에 올라간 자만 알 수 있는 정보, 산 밑에 있는 사람은 하늘나라에 책이 있다는 상황을 그들은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건져줄 때 그냥 건져주시면 되는데 왜 책을 언급했는지 상당히 난해한 문제입니다. 왜 난해한 문제냐 하면, 그냥 하나님께서 위에서 보시고, “너, 말씀대로 살았구나. 그냥 천국 와.” “너는 말씀대로 살지 않았으니까 지옥 가.” 이러면 책이 없어도 가능하잖아요. 그렇지 않습니까? 책이 구태여 여기 등장할 이유가 없잖아요. 사실은 여기에 대한 언급을 사람들이 함부로 할 수 없을 정도로 따지고 보면 난해한 문제가 깔려있습니다.

그래서 이번 시간에는 32장 전체를 다시 한 번 봅시다. 다시 봐야 될 이유가 있어요. 우리가 생각한 짐작한 하나님과 너무 다르다는 그 점을 제가 언급하고 부각시키고 싶습니다. 지금 하나님과 인간이 만날 때 인간들이 예상한 하나님이 아니었어요. 이건 중요한 문제입니다. 우리가 지상에서 하나님은 이런 분이라고 생각했던 그 하나님은 전혀 아니었어요. 하나님과 인간, 우리가 이 땅에서 누굴 만날 때는 사전에 이렇게 해야 된다, 내가 이런 태도를 취해야지. 이런 게 있게 마련이잖아요. 그게 하나님께는 먹히지 않아요. 하나님은 이런 분이니까 우리가 이런 쪽으로 성의를 표시하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예쁘다고 사랑해줄 것이라고 우리가 짐작했던 하나님이 아니에요.

그 말은 뭘 뜻하느냐 하면, 이방나라들이 알 수 있는 하나님은 참된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만난 하나님은 참된 하나님이냐? 그분은 참된 하나님이죠. 그러면 그 다음 문제입니다. “이스라엘 사람은 참 좋겠다. 참된 하나님을 만났으니.”라는 생각을 하겠지만 그게 잘못된 생각이에요. 왜냐하면 이방인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이나 이스라엘 사람들의 하나님이나 같은 아담의 족속이기 때문에 생각하는 것이 그 정도밖에 안 돼요.

그러니까 오히려 누가 당황스러우냐 하면, 하나님을 안 만난 쪽은 자기가 생각하는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섬기니까 당황스러울 게 없는데 진짜 하나님을 만났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매우 당황스럽게 되지요. 그 당황스럽다는 정도를 제가 32장을 간단하게 설명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32장 처음에 나올 때 모세를 하나님께서 인도했잖아요. 인도하고 난 뒤에 그 다음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안 만난 상태입니다.

잘 들어보세요. 지금 하나님을 몰라요. 밑에 있는 사람은 몰라요. 몰라서 어떻게 하든 행동을 한 것에 대해서 책임을 물을 수 있느냐 하는 이 문제입니다. 제가 지금 문제를 제기하는 게. 하나님을 알고 잘못 섬기는 것은 문제 있는데 하나님을 모르는 상태에서 지금 모세도 처음 만나보는 거예요.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모세도 일방적으로 산 위로 올라오라고 해서 갔을 뿐이에요. 그렇다면 모세가 산 위로 가기 전에는 모세도 몰랐고 다 몰라요.

물론 그전에 홍해사건 일어나고 그때그때 필요한 건 제공했지요. 아말렉 전쟁 일으키고, 지팡이 들고, 반석 주고, 만나 주고, 필요한 건 했는데 막상 하나님께서 하나님 자체에 대해서 하늘나라에 책이 있다는 걸 그전에 모세 본인도 몰랐어요. 모세가 하나님께 부름 받아 그쪽 동네에 가니까 비로소 그때 알게 된 겁니다. 그렇다면 모세를 빼놓고 나머지 사람들은, 제 생각인데요. 책임 추궁당할 하등에 이유가 없는 것 같아요. 몰라서 못했잖아요.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제가 어느 대목을 강조해서 하느냐 하면, 출애굽기 32장 27절,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각각 허리에 칼을 차고 진 이 문에서 저 문까지 왕래하며 각 사람이 그 형제를, 각 사람이 그 친구를, 각 사람이 그 이웃을 도륙하라 하셨느니라 레위 자손이 모세의 말대로 행하며 이 날에 백성 중에 삼천 명 가량이 죽인 바 된지라”

이들이 전쟁해서 죽은 사람 아니지요. 이들은 홍해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도 아니에요. 만나를 다 먹은 사람들입니다. 시내산까지 온 사람이에요. 그들이 중죄를 지었다는 이유 때문에 21절에. 중죄를 지었기 때문에 그들은 죽었던 사람입니다. 그 중죄가 이거에요. 하나님을 안 믿는다는 게 아니고,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 수 없노라”(23절) 이렇게 했고, 아론이 거기에 맞추어서 금 있는 사람은 내라고 해서 금으로 송아지를 섬겼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모르는 상태였지요. 그 송아지를 섬기려고 한 게 아니고 그 송아지를 누구라고 빗대어 섬긴 송아지입니까? 애굽의 신이 아니고 여호와 하나님. 그래서 출애굽기 32장에 여호와 하나님의 축제의 날이거든요. 여호와 잘 섬겨 보겠다고 그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은 애굽에서는 형상이 있는 신이거든요. 형상이 있는 신을 그들은 여호와라고 해서 섬긴 겁니다. 제가 지금 파고 들어가는 게 뭐냐 하면, 삼천 명이나 죽어야 될 중죄가 뭐냐? 그걸 어떻게 찾아보려고 제가 애를 쓰고 있는 겁니다. 삼천 명이나 죽어야 될 죄가 뭐냔 말이죠.

사람이 십계명을 받아놓고 십계명 못 지켜서 삼천 명 죽이는 것은 납득이 돼요. 시키는 대로 안 했으니까. 그러나 그들은, 물론 모세가 십계명을 이야기했지요.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그래서 그들은 여호와를 섬긴 거예요. 물론 여기서 송아지 형상을 만들긴 만들었지만. 사람이 뭔가 책임을 지더라도 한 번 기회를 줘서 “이래서는 안 되겠다구나.”라고 해서 그래도 안 될 때는 조져도 할 말이 없잖아요.

그리고 송아지로 애굽 형상 만들자고 제안한 사람은 아론이지요. 아론은 누구 친척이에요? 바로 모세 형님이죠. 그러면 누가 보기에도 아론과 모세는 뜻이 하나라고 생각했을 것이고 따라서 모세의 형이 먼저 주동해서 송아지 형상을 만들었다면 아론부터 쳐 죽여야 되는 겁니다. 그리고 아론은 남을 칠 자격이 돼요? 지가 주동이 됐는데. 자기 손으로 삼천 명 죽입니까? 그리고 거기에 레위 자손들이 모세 말대로 행하매 죽였다.

제가 하는 취지를 들어보세요.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서는 반드시 분명하게 언질을 주고 위반했을 때는 처벌을 가하는 것이 합리적이잖아요. 그리고 지금 아론은 산 위에 올라가지도 않았어요. 정말 이 사람들이 삼천 명 죽일 사람 같으면 모세가 일단은 내려와서 송아지 형상을 섬기면 하나님께서 화내신단다. 그러니까 내가 없을 때 했으니까 봐주는데 앞으로는 그러지 마라. 이게 순서상 합리적이고 맞지요. 아론은 산 위에 안 가서 몰랐으니까 결국 아론의 말을 따랐다는 것은, 아론 자신도 몰랐고 아론이 삼천 명 죽일 중죄라면 그렇게 했겠습니까? 안 하지요.

뒤에 차들이 오는데 고의로 브레이크 밟아서 차사고내면 이 사람에게 책임이 있는 겁니다. 아무리 자차보험 들어도 사고는 난 겁니다. 지금 모세는 가버리고 따라갈 사람은 누구밖에 없다? 아론밖에 없거든요. 그런데 아론과 모세는 형제간이다. 형제간이니까 그동안 얼마나 많은 생각이 교류가 됐겠습니까? 긍정적 방향으로. 모세 없어도 모세 대신으로 아론이 있고 아론이 뭐라고 했습니까? 모세 간지 오래됐고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르겠다고 할 때 그렇다면 금 있는 사람은 내라. 그래서 송아지 우상을 만들었잖아요. 아론이 주관해서 만들었단 말이죠.

그런데 아론은 산 위에 올라가지 않았지요. 사실은 아론도 책임 없지요. 왜? 산 위의 상황을 모르는 상태에서 산 위의 상황을 알면서도 그 짓했으면 이건 못 됐어요. 이건 벌 받아도 되는데 아론도 산 위에 안 가고 백성들도 안 갔습니다. 간 사람은 모세밖에 없어요. 모세가 뒤늦게 산 위에서 내려왔으면, “여러분, 내가 산 위에 가보니까 이런 짓해서는 안 됩디다. 앞으론 주의합시다.” 좋게, 좋게 하게 되면 어렵게 건너온 가족들, 삼천 명은 안 죽어도 되잖아요. 그런데 모세가 와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무심코 안 사람보고 뒤늦게 내 편에 설래, 안 설래? 해서 모세 편에 안 섰다고 삼천 명 죽여 버렸단 말이죠.

이야기 더 길게 하면 골치 아프겠지요. 해답부터 내리겠습니다. 그 사람들이 잘못해서 죽은 게 아닙니다. 돌 판 깨졌잖아요. 깨진 취지를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죽어줘야 지상에서 돌 판이 깨진 취지가 지상에서 형성돼요. 완전히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소모품으로 만들어요. 무엇을 형성하는데? 돌 판이 갖고 있는 본래의 본질을 보여주는데 죽일 자는 죽이고 죽을 자는 죽어서 이 지상에 돌 판이 깨진 취지를 조성해내시는 겁니다. 이것 외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어요.

이 말은 뭔 뜻이냐 하면, “하나님과 더불어서 하나님 잘 믿어서 구원받아야지.”라는 생각은 진짜 하나님 만나기 전에 인간들이 속에 품었던 사적으로 조작된 하나님이십니다. 그것은 하나님 사랑도 아니고 하나님 뜻도 아니고 자기가 자기를 사랑해서 평생토록 좋게 살고 죽어서도 하나님과 합류하려는 의욕과 욕심의 산물입니다. 그게 바로 이방종교고 이방민족들이 신을 찾는 이유가 되는 겁니다.

모세가 알고 있던 것을 모름에도 불구하고 삼천 명이나 죽였다는 말은, 모세를 통한 지속적인 하나님의 작업이 절대로 백성이 죄 지었다고 해서 멈춰지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이것을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시키게 되면, 우리가 어떻게 되던, 우리 가운데 어떤 사람이 교회를 버리던, 사적으로 섭섭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만약에 섭섭해 한다면 그것은 지금 엉뚱한 구원관을 소지하고 있다는 증거가 돼버려요.

여러분, 구원은 누구 소관입니까? 하나님 소관이지요. 구원받는 내 소관 아니지요. 이걸 달리 질문하겠습니다. 구원은 내가 관리해서 구원됩니까? 안 되지요. 그러면 정말 산 위에 있는 모세와 하나님이 알고 있는 구원관을 우리가 안다면 내 구원에 대해서 내가 관리해야 돼요, 하지 말아야 돼요? 하지 말아야 돼요. 내가 내 구원에 대해서 네기 나한테 어떤 기여를 하면 안 돼요. 그건 행함으로 구원받는 잘못된 방식이 되고 맙니다. 그냥 사세요. 애는 자고 담요 덮어주고, 그냥 사시면 돼요.

믿음은 feeling느낌이에요. 느낌은 내가 집중하는 행함이 멈춰질 때 배후에서 나타나는 게 느낌, 감정, 이겁니다. 믿음은 필링이지 설쳐대면 필링이 다 죽어요. 가려지는 겁니다. 구원은 주님의 느낌에 합류되는 겁니다. 마치 아침에 눈 떠서 창문열고 보니까 안개가 자욱하게 들어오는 것처럼 이미 자욱하게 깔려있는 주님의 구원방식이 이스라엘을 덮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하늘에 있는 줄 알았지요. 모세가 만났던 시내산 그 위에 하나님 있을 줄 알았지요. 내려오면서 하나님도 같이 따라왔다는 생각을 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그게 모세와 하나님과의 대화에 나옵니다. 이스라엘은 그냥 방치해서는 도저히 안 될 족속인 것을 안다. 이제부터는 이스라엘 통한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기 위해서 내가 그들과 함께 동행하리라. 얼마나 기쁩니까. 모세는 말하기를 동행 안 해주신다면 차라리 제 이름을 책에서 명단에서 삭제해주시기 바랍니다.

비슷한 이야기가 33장에 보면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친히 가리라 내가 너로 편케 하리라 모세가 여호와께 고하되 주께서 친히 가지 아니하시려거든 우리를 이곳에서 올려 보내지 마옵소서”(14,15절) 모세의 말이 굉장히 건방지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좀 건방지지요. 하나님이 타협의 대상이 될까요? 안 되지요. 그런데 자기는 마구잡이로 타협하지요.

아까 33장 14절도 마찬가지고 여기 32장 32절에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 뭔가 하나님 앞에 압력을 가하는 느낌이 들지요.

그리고 또 이상한 게 있어요. 삼천 명 죽였으면 이제는 죄 문제 해결된 게 아닙니까? 삼천 죽었으니까 나머지는 괜찮은 사람인 줄 아니는 그게 아니에요. 또 뭐라고 합니까? 하나님이여, 남아있는 백성의 죄를 용서해주옵소서. 전에 금 신상 만들 때 합세했잖아요. 합세한 죄가 삼천 명 죽인다고 해서 면제가 안 될까요, 안 될까요? 이게 안 되지요.

제가 강의 처음에 이야기했습니다. 이방인이 알고 있는 하나님과 막상 진짜 하나님을 만났던 이스라엘 하나님과 달라도 너무 달라요. 뒤죽박죽이에요. 하나님의 구원방식은 정리가 안 돼요. 정리가 안 된다는 말은, 능력이 없는 게 아니라 이미 우리 가운데서 우리 나름대로의 구원방식을 고수하고 있기 때문에 주님의 방식이 차고 오기가 굉장히 난해하고 힘들다는 이야기입니다.

구원방식 모른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모른다고 하면 성경공부 자체가 의미가 없어요. 구원방법을 여러분이 알고 계십니다. 하지만 그 과정 속에서 먼저 우리가 알고 있는 구원방식을 스스로 돌아볼 수는 있어야 된단 말이죠. 그 구원방식이 바로 이방인들이 알고 있던 방식입니다. 그리고 32장에서 이스라엘이 썼던 방식이에요. 하나님을 섬기면 구원받는다. 그거, 땡 탈락이에요. -100점.

하나님을 섬기면 구원이 안 돼요. 그리고 그 섬기는 과정 속에서 주께서 제거하려는 속성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내 구원은 내가 알아서 관리해야 구원되지 내가 내 구원을 관리 안 하면 나는 지옥 간다는 그 사고방식도 뽑아낼 필요가 있습니다. 그걸 뽑아내려면, 여러분이 이제까지 안다고 치고 이제부터 약간 난해한 코스에 들어갑니다.

내가 나를 관리해야 구원받는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유리하겠습니까, 불리하겠습니까? 이 문제 어렵기 때문에 질문 먼저 하겠습니다. 하나님 섬기는 것이 내 구원에 유리하겠어요, 섬기지 않는 것이 유리하겠습니까? 이방인들이 알 고 있는 하나님, 우리가 기본적으로 알고 있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그나마 낫겠지요? 그게 탈락이라는 거예요. 그게 아니라는 거죠.

왜냐하면 섬기려고 한다면 섬기는 방식을 누가 창안하고 누가 끄집어내야 돼요? 내가 끄집어내야 돼요. 내가 끄집어내는 방식에 내가 불가능한 방식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없지요. 선생님이 문제 내고 얘들 푸는 것은 틀릴 수가 있지만 학생 본인이 문제 내고 본인이 시험 치면 이건 누구나 백점이잖아요. 하나님을 섬기는 방식을 인간 본인의 아이디어에서 끄집어낸다면 결국 이 방식이 내 안에 내장돼있다는 뜻이고 이것을 고수한다는 뜻이거든요.

따라서 주님의 방식은 그냥 오는 게 아니고 내가 나를 구원하는 방식을 겨냥하면서 찾아오는 거예요. 우리가 섬기는 방식은 뭐냐 하면, 나는 귀한 것, 금이 얼마나 귀합니까. 쉽게 말해서 나에게 제일 귀한 것이 나를 대변해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뭘 바치라 했습니까? 양을 바치라 했습니까, 염소나 소 바쳤습니까? 자기 아들을 바쳤잖아요. 아들 바쳤다는 것은 사실은 귀한 다 바친 거예요.

이 본문에서 금을 바친 것은, 은도 동도 아니고 알루미늄을 바친 게 아니에요. 금을 바친 거예요. 금은 애굽에서는 최고의 고가로 귀한 보석입니다. 그걸 바쳤다는 것은 자기의 심정과 성의를 표현한 거예요. 그런 방식이 있다는 말은, 하나님이 뭘 원하는 방식을 그들은 몰랐지요. 왜? 산에 안 갔으니까. 심지어 아론, 모세 형님도 몰랐지요.

그러면 제가 건방지게 하나님이라면 어떻게 합니까? 그 방식을 그냥 긍정해주면 안 되겠지요. 그 방식 긍정해주고 하나님 구원방식 집어넣으면 돼요, 안 돼요? 이게 안 되지요. 그 방식 빼내고 주의 방식 집어넣어야 되겠지요. 그렇다면 모세가 그렇게 과격하게 돌 판 깨지 말고 자기감정 좀 억제하고, “자, 내가 왔습니다. 어? 금 신상 섬기네. 아아, 몰랐구나. 몰랐으니까 내가 이해해줄게요. 다 모여 봐. 금 신상 섬기는 그 방식 말고 주께서는 다른 방식으로 섬깁니다.”라고 이야기해놓고 그래도 금 신상 고집할 때는 삼천 명을 죽이든 삼만 명 죽이든 그건 죽일 만한데 그 방식을 모세가 사용하지 않았지요.

그러면 도대체 우리가 어디까지 내려가야 됩니까? 내가 날 구원하겠다는 그 의지 자체가, 뭔가 하나님이 구원하는 방식과 섞일 수 없는 요소라는 것이 드디어 밝혀지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 저 구원받고 싶습니다.”라는 이 제안 자체가, “구원받고 시퍼요~ 내가 구원 신 줄게.” 구원방식과 만남이 성사가 안 됩니다. 바로 구원받고 싶다는 의지를 삼천 명 죽이듯이 조져야 조지는 그 현장에서 비로소 그게 바로 구원방식이에요.

누구든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지지 않고서는 너희는 구원받을 수 없다. 구원 문제에서 방법의 문제나 의식의 문제가 아니고 우리가 관련된 문제, 우리가 미처 모르는 우리 배후의 어떤 세력과 관련된 서로 원수지간으로 관련된 그 문제로 구원의 방식이 주어지는 겁니다. 십계명으로 구원되지 않습니다. 십계명 때문에 조지는 자, 벌 받아 죽는 자가 발생될 때 구원됩니다. 왜냐하면 구원받고자 하는 의지 자체가 부정당하는 그 부정의 자리에 구원해주시는 하나님이 동행이라는 방식으로 갑니다. 그들은 십계명 못 지킵니다.

제가 지난주일 낮에 그런 설교했잖아요. 여러분들이 하나님 말씀을 지킨다고요? 개가 웃을 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수가 없습니다. 이제야 말합니다.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 말씀보다 시급한 문제, 더 우선되는 관심사가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것 성령 아니면 이해 못합니다. 하나님, 구원해달라는 게 뭐가 나쁩니까? 그게 나빠요. 육에 있는 사람은 이해 안 돼요. 성령 받은 사람은 이해됩니다. 성령 받은 사람은 어떻게 합니까? 우리가 구원받고자 하는 것이 죄라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방식 속에 하나의 재료로 포함시키는 방식으로 구원하신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성령 받은 사람입니다.

십자가는 구원의 방식이 아니에요. 십자가는 구원이 형성되는 방식이죠. 내가 말해도 너무 어렵게 이야기해서 죄송합니다. 그런데 말은 어려운데 이 말이 맞아요. 내가 여기 있고 십자가가 나를 구원하는 게 아니고 십자가는 언약이다. 하여튼 구원만 해주이소. 이 방식이 십자가를 이 땅에 형성시키는 죄악 된 재료로 필요했던 상황이 된 겁니다. 

다시 한 번 점검하고 넘어갑시다. 아론이 주도해서 금송아지 섬겼습니다.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은 책임을 묻지 않았고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 다음에 모세가 등장하면서 돌 판을 깨뜨리고 왔거든요. 모세 편에 섰느냐, 안 섰느냐 그 문제를 따지고 모세 편에 안 섰다고 삼천 명 죽였잖아요. 그렇다면 우리가 언뜻 보기에는 그걸로 금송아지 섬겼던 죄에 대해선 이미 해결 난 것처럼 느끼잖아요. 그런데 그게 아니에요. 삼천 명 죽은 건 죽은 거고 금송아지 섬긴 죄는 그대로 남아있는 거예요. 그러면 다른 사람이 이런 소리 할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모세 선지자님. 하나님께서 잘 알 것 같으면 아론조차 데려가든지 아론한테 언질을 주던지 금송아지 섬기지 않도록 사전에 막든지 해야 되지 않겠느냐는 말을 하겠지요.

여기서 오늘 강의에서 제일 핵심부분에 도달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선악과 사건의 반복성, 이것 없이는 십자가 사건의 반복성도 없어요. 선악과나무를 심고 난 뒤에 거기에 대해서 왜 심어놨느냐고 단박 나오겠지요. 그것은 어떤 의식일까요? 하나님이 선악과를 안 심었으면 우리가 에덴동산에서 추방될 리도 없는데 원인을 따지고, 따지고 보니까 주께서 뱀을 집어넣은 그것도 잘못이고, 뱀이 오더라도 선악과나무가 죽으리라는 벌칙조항만 없어도 아무 일 없었어요.

그런 문제의 원인을 따져서 하나님도 책임이 있다고 따지고 싶은 심보가 이 지상에 주님의 나라를 이루는 멋들어진 기회가 되고 재료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미국에서 강의할 때 어떤 목사님이 하신 중요한 말씀, 죄가 나를 구원한다는 것을 알았다는 거예요. 의가 나를 구원하는 게 아니고 죄가 나를 구원하는 거예요. 만약에 의가 구원한다면 나는 당연히 구원받아야 되는데 문제는 의가 모자라서 구원 못 받는데, 어디에 있을까? 의가 십자가에 있네. 그럼 내가 십자가 믿어줌으로써 내가 구원받고자 하는 나의 의욕은 타당성이 있고 하나님이 인정받는 바가 돼버렸지요. 그게 바로 종교에요. 그게 이방종교에요.

이방종교의 구원은 다른 게 아니죠. 복 받는 것, 잘 먹고 잘 사는 것. 내가 이 땅에서 잘 먹고 살고 죽어서 하늘나라 가는 거기에 대해서 내가 믿는 신은 거기에 대해서 인정해주고 중요한 것은 방법에 대해서 “네가 어느 날에 제사 드려라.” 이렇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우리가 방법 줘도 못하면 구원이 안 되니까, 방법만 주는 것이 아니고 그 방법이 인간으로 약간의 열심과 애를 쓰면 할 수 있는 그런 방식을 주시면 우리는 구원받고자 하는 의욕과 주의 방식과 손잡으면 구원이 된다는 것이 이방인들의 하나님이에요.

그걸 베드로 식으로 바꿔볼까요? 예수님 가신 곳이 천국이지요. 그럼 베드로가 할 수 있는 게 뭐냐 하면, 자기 목숨을 예수님께 바친다. 이건 인간이 할 수 있는 중에서 근본 정도가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것 다 바친 거예요. 바칠 테니까 주님 가신 곳에 가겠다고 하니까 주님이 너 같은 인간은 와야지 했습니까? 이게 미쳤나? 니 처소가 없어. 애초부터 처소가 없는 거예요. 처소가 없다는 말은, 구원의 의지는 강렬해도 선악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는 그 테두리 안에서 우리는 조금도 벗어난 적이 없습니다. 결국 그걸 한 마디로 말해서 구원 없습니다. 그럼 교회는 쓸데없는 거예요. 구원이 못 해주는 교회가 무슨 소용 있어요. 교회 없습니다.

그럼 교회 없으면 천국은 누가 갔습니까? 주께서 만들어낸 교회가 있어요. 그걸 그리스도의 몸이라 합니다. 들어본 적은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몸. 몸도 하나요, 주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교회가 몇 개라고요? 오직 교회가 하나밖에 없지요.

인간이 하나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요? 인간은 열 명 있으면 열 개고, 백 명 있으면 백 개 됩니다. 절대로 한 개가 될 수 없어요. 그래서 인간이 만든 모든 교회는 그냥 이방종교, 마귀 섬기는 마귀의 신선이라고 보면 됩니다. 교회가 필요 없다니까요. 왜? 교회가 구원에 넣어준다는 보장이 없어요. 안/못 넣어준다는데 제가 한 표 던집니다. 교회는 절대로 구원을 안 해줍니다. 애초부터 구원할 능력이 없어요. 교회는 결과적이어야지 교회로부터 시작을 하려고 한다면 그 교회는 구원과 다른 길을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참된 교회는, 결과적 교회가 되려면 교회를 전하면 안 돼요. 뭘 전해야 되느냐? 십자가 복음, 주님의 구원의 방식을 전해야 됩니다. 그러면 삐질 사람이 있을 거예요. 삐진 그 사람이 남아서 다른 사람이 가든지 안 그러면 그 사람이 나가든지 또 갈라지게 돼있습니다. 왜냐하면 성령을 받지 못하면 내가 이미 고생하니까 죽어서는 고생 안 하겠다는 숨길 수 없는 기본적인 육의 본능을 인정 안 해준다는 자체가 마귀도 삐지고 본인도 삐지고 둘 다 삐지는 거예요. 날 구원 안 해주는 그런 신은 나한테 필요 없다.

그럴 줄 알고 미국뉴저지에서 강의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거든요. 제 아내가 미국 이야기하지 말라고 경고했음에도 불구하고 이건 성령의 역사함에 따라 할 수 없어요. 로마서 9장 3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이 말하니까 앞에 있는 사람이 “아멘” 하는 거예요. 내가 놀랐어요. 방금 어느 대목을 이야기했는지 아시고 아멘 하느냔 말이죠. 뭐라고 돼있어요?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아멘. 진짜 성령 받은 건지 안 그러면 습관이었는지 둘 중에 하나에요.

여기에서 사도 바울 본인이 저주받지요. 우리는 백 번 저주받아도 괜찮아요. 우리가 있기 때문에. 구원은 우리가 책임지고 내가 책임지는 게 아니에요. 우리를 위해서 내가 사라져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그 우리는 어디서 나온 우리냐? 1인칭 복수형이죠. 그렇다면 이 우리에 해당되는 단수가 뭡니까? 바로 ‘나’지요. 그 나가 인자되시는 분이에요. 시편 8편 4절에 뭐라고 돼있어요?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알아주시고, 그 다음에 바로 나오는 말씀이 인자가 무엇이관대 이렇게 권고하시나이까.

사람이란 건 없어요. 사람은 없고 흙밖에 없거든요. 흙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든 사람은 있어야 되고, 사람은 다 죽으니까 없고, 하나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든다는 창조의 원리가 돼야 안식은 완성이 되고, 그럼 그 사람은 누가 만드는가? 그 사람은 인자가 만드는 거예요. 그 인자가 히브리서 2장에 보면, 예수님을 인자라고 합니다. 시편8편 4절에 나오는 그 대목을 히브리서 2장에서 예수님 자신에게 적용시켰어요. 그러면 사람은 누굽니까? 내 사랑하는 자요, 기뻐하는 자는 누굽니까? 오직 예수님이죠. 예수님이 나가 되면서 예수님이 만들어낸 우리가 따로 있다니까요. 이게 교회에요.

이 우리는 자기 이름으로 살지 않아요. 죽었기 때문에. 주의 이름으로 살아요. 그래서 이들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입니다. 기도할 때도 주의 이름으로. 사도행전 2장에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얻으리라(21절). 로마서 10장 13절에 뭡니까?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바로 나에서 나온 우리를 두고 이야기한 거예요.

구약을 거쳐야 돼요. 구약 안 거치고 신약으로 바로 오게 되면 내 개인이 예수 믿어서 구원되는 걸로 오해한다니까요. 그런 식으로 자기의 구원의지를 주께서 아마 옹호했을 걸? 니 혼자 옹호해. 주께서는 우리의 구원의지를 옹호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내가 구원받고자 하는 것조차 죄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는 겁니다.

바리새인들이 율법 지킨 이유가 뭡니까? 자기의 구원을 위해서 자기 관리에 나선 거예요. 그렇게 하면 율법 지킨 만큼 의로운 마일리지가 쌓이지요. 그런 행동을 하는 게 바리새인이고 주님은, 누구든지 바리새인보다 더 의가 낫지 아니하면, 이라고 언급함으로 말미암아 바리새인을 제일 앞에 선봉장이고 그 뒤로 모든 인간을 줄 세운 거예요. 어떤 인간도 바리새인 노선에서 절대로 벗어나지 않아요. 오늘날도 마찬가지에요. 바리새인 욕할 것 없어요. 교회 다니는 모든 사람이 바리새인 같이 행동하고 있어요. “목사님, 말씀만 하시면 내가 지키겠나이다.” 그걸 왜 지키려고 하는데? 지켜야 내가 구원받지요. 그러면 본인 구원받는 게 우선입니까, 주님이 우선입니까? 내가 구원받기 위해서 예수 믿지요.

그러면 하나님의 영광은요? 하나님의 영광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영광은 끝났습니다. 예수 믿는 것이 영광이에요. 하나님의 일이 뭔 줄 알아요? 아버지가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그게 하나님의 일이에요. 우리가 예수 이름을 부르면 영광입니다. 그것+행함, 없습니다. 그 자체가 영광이에요. 예수 앞에 나갈 때는 뭘 부인하기 때문에? 내 기도, 내 헌금, 내 예배참석, 내 성경공부, 내가 산다는 자체를 십자가 앞에서 부정당하게 되는 자체,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자체가 이것보다 더 큰 영광 없습니다.

괜히 소프라노, 알토, 정해서 노래 부르고, 그것 영광 안 됩니다. 왜? 노래 부르면서 지 목소리 관리하기 때문에 그래요. 어제 술 한 잔 먹었더니 목소리가 영 안 나오네. 이럴 수도 있고. 지금 알토 하는데 몇몇 사람은 잘 나와야 할 텐데. 이럴 수도 있고. 성가대 하면서 온갖 생각 다 하거든요. 오늘 성가대 끝나고 불고기 사준다는데 미리 당겨서 할 수 있고. 오늘 성가대 녹음한다는데 잘 하자. 성가대 하면서 영광 돌린다는 자체가 자랑질의 일종이에요. 그런데 성가대 하는 것보다 더 나쁜 짓이 뭐냐 하면, 성가대하는 것 비판하는 것, 그건 더 나빠요. 남은 애써서 봉사하는데, 지는 오늘 소프라노 두 번째 박자 안 맞고.

영광은 예수님 앞에서 “주여, 저를 죽여주소서. 왜 저를 이렇게 구원해주셨습니까?” 막달라 마리아처럼 주님의 사랑이 너무 고마워서 그 귀한 향수 뿌리면서 감사할 때 그게 영광입니다. 많이 용서받은 자가 많이 사랑한다. 그렇다면 향수 뿌리면 구원받습니까? 그것 아닙니다. 향수 아끼세요. 선 볼 때나 뿌리고 누구 사귈 때나 뿌리고 다니세요. 어떤 관리를 안 해도 된다는 것을 믿는 게 영광이에요. 더 이상 내 운명에다 장식 안 해도 위장하지 않더라도 영광이 된다는 사실을 믿는 것, 이건 성령이 오실 때 하실 뜻이거든요. 아무것도 필요 없다. 그런 노래 있잖아요. 아무것도 필요 없어~. 아무것도 필요 없어요. 다 이루었기 때문에.

그런 성령 받은 사람을 가려내기 위해서 환란과 핍박과 곤고와 적신이나 위험이나 이런 사태가 자꾸 들이닥칩니다. 잘 믿는 것 같아도 그런 게 들이닥치게 되면 우리는 스스로 주님의 사랑을 부정하고 싶은 생각이 막 들어요. 주여, 내가 이만큼 잘했는데 저한테 이런 어려움이 닥칩니까? 저는 요 근래 <개그콘서트>에 나오는 유민상 장가보내기 프로젝트 코너가 자꾸 생각나요. “기도하고 헌금도 하고 열심히 다녔는데 왜 그걸 부정하십니까?” “그래, 헌금했어? 그래서 뭐? 없어. 아무것도 아니야. 너 봉사한 것 아는데 그래서 어쩌라고? 그게 뭔데?”

베드로전서 4장에 오직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거예요. 네가 무슨 일을 할 때 주께서 주신 힘으로 하고 네가 말을 할 때 주의 말씀으로 하라. 왜? 모든 것은 너로 인한 영광이 아니고 오직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영광, 이미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릴 때 예수님이 나라는 1인칭 단수형, 그 예수님 안에 1인칭 복수형이 함께 담겨 있어요.

이 명단을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어린양의 생명책이라고 하는 거예요. 어린양의 생명책은 신약 때 확장된 것이고, 구약은 지상에서 책을 만들어나가기 때문에 확장된 게 아니에요. 그래서 여기 32절에 보면,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 책에 명단이 있더라도 삭제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는 것처럼 보이지요.

33절도 마찬가지에요.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게 범죄하면 그는 내가 내 책에서 지워버리리라” 이 말은 생명책의 명단이 지상에서 만드는 공정이지요. 구약 자체가 그림자, 모형이잖아요.

이런 예를 들면 쉬운데 어떤 건축가가 아파트를 새롭게 계약해서 설립하고자 합니다. 그러면 건축가 머리 속에 아파트 모양은 하나의 이미지고 사고기 때문에 확정되었지요. 확정된 그것으로 모형 만드는 제작사 찾아가서, “사장님, 내가 지금 아파트 건축계약을 했는데 이런 모양으로 모형을 만드세요.” 해서 가져왔는데 설계자가 머리 속에 생각했던 것과 상상한 모습과 모형이 다르면, 베란다가 이런 모습이 아니지. 베란다 고쳐오니까 옥상 모양은 탑까지 올리라고 했잖아요. 다시.

이게 구약이에요. 구약은 계속해서 수정에 들어가는 겁니다. 지워버리고 다듬고. 그게 그림자고 모형이에요. 그런데 그 작업을 이스라엘 내부에서 하거든요. 이스라엘과 동행하시는 주님의 이름과 한단 말이죠. 최종적으로 어디서 완성됐습니까? 예수님께서 확정했지요. 그러면 두 번 다시 지워질 법이 있습니까? 없지요. 왜냐하면 설계자의 머리와 합치됐기 그것이기 때문에. 건축가 이야기하니까 이해되시죠. 이해됐으니까 10분 쉽시다.
 한윤범 (IP:119.♡.174.28) 14-11-11 18:09 
20141107b 울산강의-출애굽기 32장 : 생명책
(강의:이근호 목사)


첫째 시간 끝에 다소 난해한 이야기했지요. 구약에서는 생명책에서 지워질 수 있다. 그런데 그 말이 맞는 말이기도 하지만 틀린 말이기도 해요. 우선 틀린 경우부터 이야기할게요. 생명책에 기록된 자는 절대로 지워지지 않습니다. 이게 맞는 말이에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지워진다고 했잖아요. 이걸 어떻게 설명하느냐 하면, 껍데기 속에 알맹이가 들어있어요. 껍데기를 껍데기로 드러내면서 알맹이가 알맹이로 제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지워지는 생명책이 껍데기라면 지워지지 않는 생명책이 진짜입니다. 그런데 그 생명책은 그냥 생명책이 아니고 앞에 뭔가 붙어야 돼요. 어린양의 생명책. 예수님이 오셔서 생명책 명단이 확정되기 전까지는 지워지겠네요? 그게 맞는 말이 아니라니까요. 그게 틀린 말일 수도 있고 맞는 말인데 왜 틀린 말이냐 하면, 누가 구원받는지는 창세전부터 알고 있었기 때문에 틀린 말입니다. 이렇게 정리합시다. 창세전부터 이미 택정한 자는 생명책에 기록되었기 때문에 구약에서 생명책에서 명단이 지워져야 된다. 이러면 맞지요. 아까 모형이야기로서 충분히 이해됐지요.

그러면 그렇게 작업하는 이유가 뭐냐? 인간은 하나님이든 누구든 간에 뭔가 개념이나 단어 의미를 줘버리면, 그것이라도 붙들고 자기를 천국에 구원받으려고 시도하기 때문에 그걸 들춰내기 위해서는 하나님도 그 방식 속에 인간의 언어로 그들 세계 속에 잠입할 수밖에 없습니다.

“네가 죄 지어놓고도 나와 동행하고 싶으냐? 그렇다면 나는 그런 자를 용서하지 않고 책에서 지워버리겠다.” 그런데 그 말씀 자체도 문제되는 게 지워버리지 않기 위해서 노력한다면 그 사람은 지워질 사람입니다. 지워버리겠다는 말은, 모든 인간은 생명책에 남아있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는 뜻이에요. 한 명도 없는데 결국은 나중에 천국 가니까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만 다 천국 오게 돼있어요. 누가 그 이름에 대해서 책임졌습니까? 어린양 되시죠. 모든 구약, 신약 전체가 예수님의 활동하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구약은 모형으로 그림자로 사용하신 겁니다.

첫째 시간에 한 것이 너무 어렵기 때문에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출애굽기 32장 자체가 이상한 거예요. 어떤 점이 이상하냐 하면, 기회도 주지 않고 벌부터 내린 셈이 되지요. 그들은 된 통으로 무지막지하게 당한 거예요. 그리고 모세가 성질을 내지 말고 돌 판 지가 부수지 말고, 돌 판을 모세가 부셨잖아요. 결국 모세 행동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자기가 성질 못 이겨서 돌 판 던져놓고 그 책임을 산 밑에 있는 사람한테 돌린 셈이 돼버려요.

그것이 인간들 사회에서는 굉장히 잘못된 거잖아요. 흔히 아버지가 자식들 생각하면 도저히 못 참겠다고 자식들 공부 못한 걸 핑계로 혼자 포장마차에서 소주 두 병 먹고 들어오자마자 티비 깨놓고 티비는 너희들 때문에 깼다고 하는 것과 똑같은 거거든요. 무슨 그런 무지막지한 억지가 어디 있어요. 지금 그 억지를 모세가 쓴 거예요. 모세가 이런 억지를 썼다는 말은 기존에 인간들이 합리적으로 생각하는 하나님에 관한 내용은 진짜 하나님한테는 조금도 들어있지 않은 거예요. 진짜 하나님에 대해서 완전히 정반대고 모르는 거예요.

그 무지몽매한 자를 주께서는 구원하겠다는 거지요. 그런데 무지몽매한 자를 구원하겠다는 말이 아니고 무지몽매한 걸 드러내서 구원하겠다는 말이거든요. 제가 말을 하면서도 장난치는 것 같아서 미안한데요.

무지몽매한 너희들을 구원함이 아니고 무지몽매함을 구원한다니까요. 신종어다, 신종어. 그 무지몽매함이 귀한 거예요. 어느 누구도 무지몽매하지 않은 채 구원받은 인간은 아무도 없어요. 베드로도 그렇고 누구나. 사도 바울도 그렇고. 사도 바울은 사도되기 전에 얼마나 똑똑했어요. 하지만 주님 보시기에 무지몽매한 자지요. 왜? 눈이 안 열렸으니까, 주님을 못 알아봤으니까.

그 죄로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십자가와 관련시켜서 바로 자기가 가져온 넘겨받은 그 죄에 대한 사람들을 구원해주시는 겁니다. 그래서 나는 의인을 부르러온 게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왔다. 그러면 죄인을 부르러왔으면 죄인은 몽땅 다 구원하셔야 하는데 그것도 아니에요. 엘리야 시대 기근 때 그렇게 과부가 많았으되 오직 한 사람만 데려간다. 많다는 말을 끄집어내지나 말지 괜히 많다고 이야기해서 다른 과부들까지 마음 설레게 만들어놓고, “과부 어디 있어?” “여기 있습니다.” “손 내려. 내가 뽑아.” 그것도 달랑 한 사람만 뽑아갈 때 그게 무슨 의미입니까? 과부라서 구원되는 게 아니라 과부임에도 구원되는 거죠.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하면 인간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죄를 구원하는 거죠. 인간을 구원하게 되면 예수님은 하나에 인간 존재로서 마주쳐야 되는데 인간이 죄의 지배를 받고 있으면 예수님은 바로 십자가 지심이란 기능으로 구원이 성사되는 겁니다. 십자가 지심은 다른 말로 희생이죠. 희생인데 앞에 뭘 붙인다면, 대신 희생하심. 대신 희생하심이 없으면 예수님이라도 주님이 아니에요.

성경에 보면 그런 게 나오지요. 아무리 아들이지만 아들이 곧 주는 아니에요. 뭘 해야 됩니까? 십자가에 돌아가셔야 주가 돼요. 그래서 하시는 말이, “주여,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지나가게 하옵소서. 하지만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할 때 예수님 존재 자체가 주가 되는 게 아니고 예수님이 해야 될 아버지의 뜻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은 주가 되는 겁니다. 따라서 어떤 인간이 구원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이 갖고 있던 죄가 예수님의 십자가의 용서와 연관이 될 때 구원되는 겁니다. 이 말은 인간은 구원되지 않습니다. 다만 구원시켜 줄 때 구원될 뿐이죠.

우리는 주체의 자리에서 물러나야 됩니다. 물러나서 아예 가시면 안 되고요. 어떤 사람은, 십일조 해서 구원 못 받는다고 하니까 아예 십일조 안 하는 사람이 있어요. 아예 물러가지 말고 저 끄트머리에, 결과에 있어야 돼요. 십일조를 해서 구원받는 게 아니고 우리 자신이 십일조가 되게 주께서 그런 조치를 했지요. 십일조하지 말라는 것보다 더 기쁜 소식이지요. 우리 자신이 십일조니까. 우리 자신이 하나님이 받으시기에 합당한 사람이 되도록 주께서 조치를 내리신 거예요. 무슨 양념을 쳤어. 닭갈비에 소스를 발랐어요. 피를 발랐어요.

그 피로 말미암아 구약에 있는 모든 말씀들, 십일조고 안식일이고 우리 자신이 주님 말씀에 합당한 사람이 된 겁니다. 이건 횡재한 것이고 이거는 특혜입니다. 진짜 이런 특혜가 없어요. 우리가 목숨을 잃는다할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맙시다. 이런 특혜 받았으면 목숨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말아야 됩니다. 그딴 것 아무것도 아니에요. 받은 기능이. 죽어도 괜찮아요. 죽은 우리를 다시 살릴 능력이 그 특혜에 있기 때문에.

생명책을 좀더 언급하면 이렇습니다. 생명책은 말라기에는 기념 책이라 해요. 생명책은 누굴 기념한 사람에게만 명단에 있게 되지요. 보통 졸업앨범에 우리 사진이 있는 것은 나를 위함입니까, 아니면 출신 그 학교를 기념하기 위해서 하는 겁니까? 제가 묻는 것은, 여러분 사진이 앨범의 사진뿐입니까, 아니면 따로 찍었던 사진도 있어요, 없어요? 우리 사진도 많지요. 그 많은 사진이 있는데 앨범에 있는 사진과 보통 사적으로 찍은 사진과 차이점이 뭡니까? 앨범에 있는 사진은 우리를 빛내기 위함이 아니고 영광된 이 고등학교 졸업생이라는 학교를 빛내기 위해서 얼굴을 빌려준 거지요.

만약에 그 앨범 속에 이영애나 김태희 나와 보세요. 학교를 얼마나 빛내겠어요. 제46회 졸업생, 이영애 나와 보세요. 얼마나 자랑하겠습니까? 지는 이영애와 싸워놓고 나중에 이영애 출세하게 되면 싸운 것 싹 빼고 그때 친하게 지냈다고 하잖아요. 이번에 미국에 처남이 이영애 부부와 찍은 사진이 있어요. 그걸 자랑질해요. 내가 앉던 소파가 이영애가 앉은 소파였어요.

누굴 기념하지 않으면 구원 없습니다. 그리고 생명책이 확정될 때는 무슨 단계를 거치는데 기념 책이 된 상태에서 생명책으로 넘어가는 거죠. 누굴 기념하겠어요? 그건 아까 학교 앨범 이야기했지요. 우리가 앨범 속에 있는 그 인간, 이영애라면, 이영애가 학교를 빛내겠지요. 그렇다면 그 이영애가 지금 와서 혹시 그 학교 나왔느냐고 물으면, 나는 죽어도 모른다고 하면 뭔가 잘못됐지요. 본인이 나온 그 고등학교를 기념하고 싶지 않습니까? 나는 절대로 그 고등학교를 저주합니다. 이러면 안 되겠지요.

결국 주께서 우리를 그냥 존재로 봐주는 게 아니고 쓰일 기능인으로 줄곧 사용하는 거예요. 누구를 기념하는 것? 바로 너를 대신해서 희생하신 어린양을 기념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기념 책에 명단을 집어넣는 겁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으로 돌아와 봅시다. 오늘 본문에서 죄를 지었을 경우에는 명단에서 지워진다는 이야기 나오지요. 그러면 그 죄가 우리가 생각하는 죄, 흔히 말하는 남한테 피해준 죄, 사적으로 망상한 죄, 내가 도둑질한 죄, 그 죄가 죄일까요? 아닙니다. 인간은 평생을 살아도 자기 죄에 대해서 몰라요. 그리고 성도는 미처 알지 못했던 죄를 매일같이 내일 되면 또 만나야 되고 만나야 돼요. 평생 우리는 죄를 대하고 만나줘야 우리는 계속 누구를 기념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만약에 내가 지금까지는 죄 지었는데 성령께서 오셔서 용서받았다면 그때부터 누굴 기념하겠어요? 잘나기 짝이 없는 자신을 기념하겠지요. 그럼 그 학교 이사장 돼. 그것이 마귀의 나라지요. 자기가 선악과 따먹은 티를 톡톡히 내잖아요. 나도 신이다. 너만 신이냐? 나도 신이다.

마귀가 하나님을 신이라고 인정하지 않는 게 아니에요. 야고보서 2장에 보면 뭐라고 합니까? 하나님이 한 분인 줄 아느냐? 귀신들도 믿고 떤다고 돼있지요. 귀신들도 알지요. 문제는 마귀는 뭐냐 하면, 너만 신이 아니고 나도 신이라는 거예요. 신으로 인정해달라는 겁니다. 종교가 없는 게 마귀가 아니고 종교가 있는 게 마귀에요. 왜? 종교를 통해서 신이시여, 내가 신을 섬기니까 나도 신으로 인정해달라는 거죠.

어떻습니까? 힌두교가 그런 게 발달하고 불교도 그쪽에서 발달했는데 천주교도 그런 게 발달돼있어요. 로마서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사람은 신이라 하였거늘, 그 대목을 완전히 반대로 해석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면 신이다. 은근히 뭔가 노림수가 있었어요. 아버지와 내가 하나인 것처럼 그 날에는 너희가 나와 하나가 된다고 할 때 그 하나가 이 지상에서 볼 때 신성을 갖는 건 맞습니다만 신은 나이에요. 왜냐하면 신이란 의미가 우리가 생각하는 신은, 인간보다 우월하고 절대적인 존재잖아요.

그러나 성경에서 신은 이미 기준이 정해져있습니다. 신이 아니고 주님을 주님으로 인정하느냐가 문제에요. 우리는 내가 어떻게 신이 되느냐가 관심사인데 그 관심사 자체가 주님 앞에서는 죄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성령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을 소개하는 게 아니에요. 중보자부터 먼저 소개합니다. 내가 있는 곳에 아버지가 있게 하는 방식입니다. 아버지 먼저 알고 덤으로 숟가락 하나 놓는 것처럼, 덤으로 밥 하나 추가하듯이 예수님 하나 추가하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이 오게 되면 기존의 밥상 다 엎어버립니다. 밥이 살아서 밥이 횡포를 부려서 기존에 있던 밥상 다 쪼개버립니다. 그래서 오직 예수만 보이더라. 변화산에서 제자들이 들었던 음성, 너희는 저의 말만 들어라. 예수 그리스도만 보게 돼있어요. 상당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하나님을 잊자는 말입니다. 그 하나님은 내가 지어낸 하나님이기 때문에 자꾸 하나님으로 예수님 십자가 앞을 얼쩡거려서 예수님을 하나의 존재로 보는 겁니다. 하나님도 있고, 예수도 있고, 성령도 있고, 나도 있고. 있다, 있다는 존재함으로 계산하는 겁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그게 아니고 너는 죄인의 기능을 하고, 주님은 용서하시는 기능을 하시고, 그 기능과 기능의 만남이에요. 따라서 그 기능에 의해서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몰랐던 죄를 내일 아침 되면 죄다 죄가 된 걸 알게 돼요. 내일 되면 내일치의 죄를 또 만나게 되고 그런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또 용서하셨다는 걸 깨닫고 그 다음에 또 다음 날 되면 또 새로운 죄가 밝혀집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비타500이 있으면 처음에는 이렇게 맛있으면서도 피로회복 해준다니, 그야말로 힘내세요. 힘낼게요. 이렇게 보던 것이 비타500을 늘 주니까 또 주나. 벌써 죄잖아요. 마음에 교만해졌다고. 찬송가 405장 부르는데 그렇게 은혜 됐는데 나중에 한 달 뒤에 부르니까 3절만 하지 4절까지? 미치겠어. 4절까지 누가 지었나? 4절이 지겨워. 제발 1절만 있으면 좋겠어.

그걸 감안해서 목사는 긴 것 하면 짜증낼까봐 짧은 걸 골라서 하고. 그것도 일년 돌다보니까 짧은 것도 다했어. 그 다음부터 긴 것 하려니까 벌벌 떠네. 3절하고 주무실까 싶어서 노인들 여름에 4절하다 졸기 때문에. 그게 바로 죄거든요. 왜냐하면 예배 안 드려도 구원받는데 뭔가 예배를 잘 드림으로 구원에 기여하려는 그게 바로 죄가 되는 겁니다. 깜빡깜빡 자꾸 잊어버려.

또 죄가 뭐냐 하면, 은혜 받으면 얘 공부 못해도 구원받는데 지장 없는데 갑자기 은혜 받고 돌아서니까 아이가 아프다니까 공부 못한다고 패고. 이왕 예수도 믿고 공부도 잘하고 했으면 좋겠어요. 그게 바로 예수 믿는 나를 기념하는 식으로 되돌아오는 이게 바로 육이에요. 육은 영을 위해서 항상 큰 틀을 이루어서 계속 가줘야 돼요. 육은 계속 육의 티를 내줘야 돼요.

사도 바울도 우리가 예수 믿는 순간 육이 탈락하지 않잖아요. 우리의 옛사람은 있어요. 다만 새사람을 옛사람을 통해서 그 속에서 새사람이 나오면서 새사람과 옛사람이 구분되면 영적 사람이에요. 구분 안 되면 영적 사람 아니고 육적 사람 돼버립니다. 구분할 것 없네. 이래도 육적 사람 돼요. 영과 육이 갈라져 나와야 돼요.

지난 대구공부에서 이런 이야기했거든요. 이명박 전대통령의 4대강사업이 실패했다. 그것과 주께 우리가 영광 돌리는 것과 무슨 관계있느냐고 했어요. 관계없지요. 그런데 돌아서니까 4대강 좀 잘했으면 하는 생각이 든단 말이죠. 항상 짝을 이뤄야 우리가 얼마나 육적이라는 사실, 그러면서도 문득문득 그것과 상관없이 십자가로 영광 돌린다는 걸 안다는 자체가 그 사람이 영에 속한 사람입니다.

십자가는 내가 다룰 대상이 아니고 기껏 우리가 뭘 설쳐봐야 내 육을 꾸미고 육을 기념하는 일밖에 안 하지 예수님을 기념한다는 것은 내 소관이 아니고 성령이 와야 마지막 때 다 이루었다는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 우리 안에 장착된 그 십자가 영이 와야 비로소 예수님 십자가만이 구원의 능력이고 영광이라는 고백이 우리 입에서 감히 나올 수 있지요. 우리가 실력으로 나오는 게 아니고 감히 이런 게 나오다니, 놀라버리죠.

따라서 생명책의 구조는 이처럼 죄라는 것은 주님의 동행하심의 의미를 모를 때는 그 사람은 삭제됩니다. 그러면 주의 이름의 동행의 의미는 뭐냐? 우리는 뭘 해도 죄가 되기 때문에 동행하시는 겁니다. 그러면 차라리 그렇게 하지 말고 동행하는 것도 주님도 귀찮으니까 우리한테 시켜서 시킨 대로 잘 살게 되면 동행하지 말고 못 지킬 때는 투입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하는데 어느 말씀도 우리가 지킬 수가 없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율법을 줬기 때문에 동행이 필요하지 않는 순간은 한 순간도 우리에게 없습니다. 심지어 우리가 잠을 잘 때도 동행이 필요해요.

한 가지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전쟁할 때 제사를 드리는 것이 율법이죠. 그래서 사울 왕이 블레셋과 전쟁하기 전에 제사를 드리죠. 그 다음에 율법에 제사는 선지자나 제사장이 드려야 되겠죠. 그런데 적들은 코앞까지 쳐들어왔고 백성들은 동요하고 있고 제사 드리려고 하니까 누가 빠졌어요? 사무엘이 오지 않는 거예요. 약속 위반을 사무엘이 했지요. 약속을 안 지켰잖아요. 10시에 한다고 해놓고 12시 넘어도 안 왔으니까. 그래서 답답하니까 율법대로 사울 왕이 제사를 드리고 나니까 그 다음에 무대 뒤에서(일부러 안 나오고 가만있다가) 누가 등장했습니까? 제사 왜 드렸어? 그런 억지가 어디 있습니까.

이건 왜 그러냐 하면, 미래가 현재를 구원하기 위해서는 현재가 항상 죄로 전환돼야 돼요.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 어떻게 살아왔던 그게 죄가 돼야 오늘밤에 낙원에 가는 겁니다. 오늘밤에 낙원에 안 가고 죽지 않고 내일까지 살아있으면 어제까지 용서받았다는 그것이 나의 의로움이 돼버리죠. 그러니까 새로운 죄가 들이닥침으로 말미암아 죄 짓기 위해서 우리가 남은 생애를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돼요. 우리가 미처 몰랐던 새로운 죄를.

그럼 죄 짓는 것을 미리 알고 짓는 죄는 어떻습니까? 미리 알고 짓는 죄는 없어요. 똑같아 보이는 죄도 그 죄를 지면서 새로운 느낌을 받게 되는 게 인간입니다. 그것은 베르그송의 철학에 보면 나오지요. 인간의 지속이라는 게 있는데 인간은 같은 일을 두 번 다시 못해요. 한 사람이 같은 강물에 몸을 담글 수 없습니다. 파르메니데스의 유명한 철학이지요. 흘러가는 강물은 두 번 다시 올 수 없습니다. 이게 실존입니다. 인간은 늘 달라져요.

세자르란 사람이 산을 그렸는데 200번을 그렸어요. 미쳤어요. 같은 산을 같은 장소에서 200번을 그린 겁니다. 200번의 그림이 다 달라요. 왜 그럴까요? 세상의 모든 사물과 현상은 한 순간도 동일한 순간이 없어요. 이 말은 인간이란 정체성은 그때그때 달라요. 세자르(후기인상파 화가)란 사람이 같은 산을 그리면서 아니야. 이거 아니야. 또 그리고 아니야. 이거 아니야.

모네란 사람인가 프랑스 성당을 그렸는데 아침의 햇빛에 따라서 그림이 다 달라요. 그걸 인상주의. 햇빛에 반사되기 때문에 흐릿하죠. 하지만 색깔은 다 다르지요. 이 말은 결국 있는 그대로 그린다는 자체가 반칙이다. 있는 그대로가 뭔데? 제 글에 그런 게 있었지요. 야구심판 세 사람이 나는 보는 대로 심판한다는 사람이 있고, 나는 있는 그대로 심판한다는 사람이 있고, 제일 마지막에 대답한 사람은, 내가 심판하기 전에 어떤 것도 인정하지 않는다는 사람이 있었고.

어느 글입니까? [신은 죽지 않았다] 그 글에 보면 나와요. 첫 번째 사람이 뉴턴 식인데 나는 있는 그대로 심판한다. 두 번째는 나는 보는 그대로 심판한다. 뭔가 조금 다르지요. 뭐가 다릅니까? 나는 진짜 스트라이크인지 볼인지 그것만 신경 쓰겠다. 두 번째 사람은, 볼인지 스트라이크인지는 사람마다 다 다르니까 내가 스트라이크면 무조건 스트라이크야. 그런데 세 번째 사람은 뭡니까? 나는 무조건 너와 달리 한다. 나 말고 모든 것은 다 동일하지 않다는 겁니다. 왜? 나의 동일함만이 내가 채택하기 때문에. 그런데 그 순간이 지나가버리면 또 본인이 어제 순간을 나라고 할 수 있느냐? 없어요. 그게 모든 것은 물결처럼 흘러가는 겁니다.

여러분들은 너무 똑똑하시고 훌륭하시니까 이 질문 하나 내겠습니다. 바다 위에 나뭇조각이고 싶습니까, 아니면 이 나뭇조각을 움직이게 하는 파도이고 싶습니까? 인간은 파도입니다. 날마다 달라져요. 나뭇조각이라고 여겼지만 사실은 나라는 것이 물결 속에 나도 하나의 부분으로 이미 포함돼있어요. 내가 나 되는데 있어서 주께서 만들어가는 건 맞는데 그 만드는 과정 속에서 내가 나름대로 이렇게 되고 싶다는 그런 내용이 항상 교류가 되면서 만들어져요. 이런 식으로 성경을 보면 성경이 다 풀리게 돼있습니다.

선지자가 오지 않아서 내가 제사 드렸다고 할 때 자기는 나라는 인간이 제사 드리는 인간인 줄 알았지요. 하지만 진정한 제사는 뭐가 포함돼야 돼요? 선지자가 없을 때 나라도 드려야지 하는 그 개인의 의사가 포함된 그 죄가, 자기는 죄가 아니죠. 지금까지 제사 드려왔으니까. 하지만 죄는 어디서 온다? 미래에서 와서 현재를 만드는 그것을 몰랐지요. 미래를 가져오는 자는 선지자고 그래서 사무엘은 등장하지 않았고. 사울이 제사를 드린 그 순간에 별에서 온 그대처럼 미래의 사나이로 와서 지적하는 거예요. 왜 내가 오지 않았는데 제사 드렸습니까? 안 왔기 때 드렸다는 말은, 결국 나는 죄가 없습니다. 나는 의롭다는 핑계죠. 그 핑계가 바로 미래에서 볼 때 인간은 뭘 해도 죄가 된다는 사실을 몰랐던 죄가 되는 겁니다.

“나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습니다.”라는 것을 일부러 그걸 허용해요. 그렇게 하도록 만들어놓고 찾아와서 그게 바로 죄라는 거예요. 그러면 인간은 최선 말고 다른 것으로 인간은 할 수 있어요, 없어요? 못 하지요. 최선이 뭔데요? 자기가 할 수 있는 최고를 했기 때문에 기껏 그 정도밖에 안 되지요. 인간은 기껏 해봐야 죄인밖에 안 되는 거예요. 그것이 어제도 그랬고 오늘도 그렇고 내일도 분명히 그렇고 죽을 때까지 그런 거예요. 결국 우리가 마지막에 구원받는 것은 십자가의 용서로 구원받는 겁니다.

그러면 이런 이야기를 먼저 당겨서 하면 어떻습니까? “그럴 것 같으면 아무것도 안 해야지.” 하는데 ‘아무것도 안 해야지’가 움직이는 파도 속에 포함돼있어요. 아무것도 안 하게 되면 아무것도 아닌 일이 벌어지면 그 다음부터 우리는 후회하죠. 그때 좀 뭘 할걸. 난 가만있으면 주께서 채워줄 줄 알았는데 양식을 주실 줄 알았는데 아무것도 안 하니까 양식도 없어요. “뭔가 내가 움직여서 일을 해야 돈이 생기지 그냥 기도한다고 돈 생기는 게 아니구나.” 하고 나설 때 “진작 그러지 왜 아무것도 안 했어.”

사람들은 나름대로 꼼수를 부려서 내가 뭘 해도 주께서 주신다면 내가 아무것도 안 한 그것도 내 할 일이 된다면 주님 주신다는 계획된 바는 내가 하나 안 하나 줄 거니까 이 참에 회사 그만두고 아무것도 안 해봐야지. 그럼 진짜 아무것도 안 생기지요. 그런 경우가 참 많잖아요.

아브라함이 아들 바칠 때 우리는 드라마를 미리 봤기 때문에 그 옆 수풀에 대신 죽을 숫양이 있다는 걸 알지요. 아브라함은 모르지요. 그냥 아들을 죽일 척했습니까, 죽여 버리려고 작심을 했습니까? 아예 작심을 했지요. 멈추라하고 하신 것은 하나님이죠. 그래서 아브라함 인생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아들 바친 게 아니고 하나님의 개입이에요.

하나님의 개입의 찬스는 누가 만듭니까? 우리가 만듭니까, 하나님 자신이 만들어요? 하나님 자신이 개입할 기회를 스스로 만들어버려요. 만들기 위해서는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이 무지몽매한 가운데 죄 짓는 가운데가 되어야 하나님께서는 이미 다 이루었다가 개입되는 겁니다. 어설픔 속에 이루었다가 개입되면서 어설픔이 구원하는 게 아니고 이루었다함이 어설픔을 대신 희생함으로 건져주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계속해서 이 어설픔, 박 어설픔, 평생 우리가 어설픈 자로 살아가야 되는 거예요. 그래야 우리는 우리 자신을 기념하지 않고 주님을 기념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렇게 오늘 32장 끝나면서 물어봅시다. 이스라엘은 ①스스로 살아야 될 나라다. ②주님이 구원해주는 나라다. ③주님을 기념하기 위해서 데리고 다니는 나라다. 몇 번입니까? 삼번이지요. 이번과 삼번의 차이가 크지요. 이번은 내가 해서는 안 되고 주께서 살려준다고 해서 항상 무슨 낌새가 있습니까? 이러나저러나 살면 됐지, 뭐. 자기 존재에 대한 우선성이 들어있지요. 삼번은 뭡니까? 주께서 주님을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를 활용하는 거죠. 이번에서 삼번 가는데 성령이 필요합니다. 성령 없이 삼번 채택해버리면, “말은 맞는데 진짜 구원 안 해주면 나만 손해네.” 이런 생각이 들겠지요. “안 돼, 안 돼. 그러면 안 돼. 그런 건 믿음 좋을 때 해야지. 나는 이번에 멈출래. 주여, 살려주옵소서.” 이렇게 되지요.

33장 봅시다. 조금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가 애굽 떵에서 인도하여 낸 백성과 함께 여기서 떠나서” 적어볼게요. [운동이란 사물이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운동이란 사물을 휘감은 상태가 이동하는 것이다.] 이 말 이해되시죠. 운동이란 이렇게 할 때 운동으로 보잖아요. 그게 아니고 진짜 운동은 단독으로 있던 이 상태가 들어서 이리로 가는 게 진짜 운동이란 말이죠.

제가 왜 그런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33장에서 애굽 땅에서 인도해낸 백성이지요. 그러면 이 백성이 애굽 땅에선 왔지만 애굽에서 살던 사람이죠. 애굽의 삶에 찌든 정신과 사고방식과 세상관이 나올 때 다 떨어졌습니까? 상태로 포함돼있는 거예요.

또 한 예를 들겠습니다. 모르드개가 에스더 사촌오빠거든요. 에스더가 삼촌 딸이기 때문에. 모르드개가 하는 말이, 네가 왕궁에 있다고 이 난리를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거예요. 그 말을 왜 했느냐 하면, 에스더 그럴 사람은 아닌데 혹시 에스더가 아무리 난리쳐도 나는 왕궁에 있기 때문에 특혜 받을 것이다. 여자가 아니고 왕비잖아요. 왕비는 왕이 지켜주잖아요.

내일 대전에서 주례하는데 주례 포인트는 이겁니다. 여자는 보호받아야 된다. 여자는 무조건 보호받아야 돼. 보호받아야 된다는 말은, 여자의 행동에 대해서 남자가 책임추궁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책임추궁해서 제대로 할 것 같으면 보호라는 자체가 날아가기 때문에. 여자가 괜찮을 것 같으면 보호가 안 되잖아요. 왜? 잘났기 때문에. 여자가 보호받아야 된다는 말은, 그의 잘잘못을 남자가 따져서는 안 되는 거예요. 무조건, 무조건 보호해야 돼. 여자가 나이트에 가면 무조건 나이트에 따라가서 자기가 춤을 춰야 돼. 여자한테 어떤 책임(추궁하는) 자체가 그건 남편 아닙니다.

에스더는 아하수에로 왕이 보호하잖아요. 에스더가 내 남편이 왕이기 때문에 자기는 괜찮을 것이라고 보는 거예요. 왕궁에 있으니까. 그런데 모르드개가 하는 말이, 너를 보호하는 자체가 바뀌었다는 겁니다. 지금 이 시국은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이 보호하지 않으면 너는 여호와에 의해서 날아가게 돼있다. 따라서 우리 백성들은 울면서 통곡하는 그 기도에 너도 동참해라. 동참해서 주여, 내 남편이 결코 나를 살려낼 능력이 없습니다. 고백하라. 이게 에스더입니다. 페르시아 나라가 아무리 세다 해도 하나님보다 세지 않고 우리는 거기서 새로운 구원의 의미를 깨달아야 된다는 거죠. 그러면 그 페르시아가 애굽의 반복이죠.

자, 오늘 33장 봅시다. 애굽에서 나왔지요. 그동안 그들의 삶의 태도, 방식이 뭐예요? 애굽 안에서 상태가 같이 이동하니까 애굽이 좋아했던 짜장면, 애굽이 좋아했던 짬뽕, 애굽이 좋아했던 월남 샤브샤브, 그런 것 좋아한다고요. 아까 식사하면서 서 목사님이 아주 중요한 말을 했어요. “요새 프로야구 관심이 없어서 오늘 누구와 붙노?” 누구와 붙는지 진짜 몰라서 물어요. 삼성과 넥센과 붙는 것 모르면 간첩인데 진짜 목사님은 몰라요.

우리나라 젊은 얘들 종교가 야구거든요. 서양에서는 축구고. 이런 것이 나를 더 이상 둘러줄 필요가 없다 이 말이죠. 우리가 사는 이것이 내가 사는 이유, 내가 사는 기쁨, 보람은 어떤 것도 채워줄 수 없다는 겁니다. 이제 그 세계로 너희들을 인도하겠다는 거예요. 결국 이 말은 뭡니까? 먼지 털이로 막 털어내는 거예요. 얼마나 그게 찢어지고 아플까요? 그동안 정들었는데.

딸 시집가는데 안 운다고 하지만 물론 아버지가 울진 않았지만 인상 그리고 있었지요. 사진 찍을 때도. 제 사진 보니까 다 인상 그리고 있어요. 섭섭해서. 뭐에 섭섭한지 모르겠는데 무조건 섭섭해요. 이제는 어느 누구도 나를 보호할 수, 쉽게 말해서 이 세상은 내가 살만한 곳이 못 된다. 그러나 그것이 온 몸으로 느껴지기까지 얼마나 주께서 뜯어내는 작업을 할까요? 부산 항만에 가면 고된 일이 있답니다. 녹슨 배에 도료 칠하기 위해서 녹을 긁어낸다는 거예요. 그 힘든 작업을 주께서는 때밀이가 되어 우리는 맨날 눕혀놓고 뒤에서 애굽 벗겨낸다고 등어리 벌겋게 피부 다 벗겨졌어.

분명히 내가 삼성을 응원했는데 7:0으로 지고. 분명히 엘지를 응원했는데 넥센한테 지고. 아아, 대한민국 했는데 일본한테 지고. 월드컵 16강은 고사하고 예선탈락하고. 하여튼 모든 범사가 주의 뜻대로, 내 뜻대로 마옵시고 내가 원해서가 아니라 자동적으로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다 되어버렸어요. 띠 띠고 원치 않는 길로 가게 하시고. 이게 뭐냐? 때 벗기는 작업이었어요. 샌드페이퍼로 미는 작업을 울산바닥에서 하든지 또 다른 곳에서 하든지 어딜 가도 세상이 날 기쁘게 한다는 것은 성도에겐 없습니다. 그게 전부 애굽이기 때문에. 주의 사자가 동행해주기 때문에.

이동할 때 천국 갈 때 새로운 상황에 둘러싸여서 가기 위해서는 새로운 상황이 주어져야 돼요. 그 상황이 뭐냐? 궁금하지요. 내 바깥에 있는 말씀이 내 속으로 스펀지처럼 내 속에 스며드는 상황이 그게 바로 새로운 상황이에요. 바깥에 있어서 내가 지켜야 될 말씀인데 그게 지켜야 될 말씀이 아니고 내가 하는 그것이 말씀으로 전환된 상황으로 바로 이미 내 몸을 흠뻑 적신 상황이에요. 이젠 내 몸이 내 몸이 아니에요. 여러분 몸이 아니고 말씀이 말씀대로 확실하다는 것을 말씀이 곧 현실이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서 다뤄지는 몸으로 바꿔진 거예요. 그게 새로운 상황이에요.

우리가 놀랄 것은 내 뜻대로 되서 놀라는 게 아니고 내 몸은 내 영광은 아무것도 아니고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말씀은 영원하구나. 이것을 매일같이 1초, 2초 짧은 순간이지만 그걸 느끼도록 하는 그런 인생을 살아가게 되는 겁니다.

33장 2절을 이것하고 마치겠습니다. “내가 사자를 네 앞서 보내어 가나안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헷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을 쫓아내고 너희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이르게 하거니와” 이 열 민족이 어디에 위치해 있느냐 하면, 여기 밑에는 사해가 있고 위에 요단강이 있고 갈릴리 바다가 있잖아요. 이쪽 편에. 이건 지중해고. 어디쯤인지 알겠습니까? 요새 같으면 사우디아라비아. 이쪽 편에 열 족속이 살아요. 이쪽을 뚫고 들어가야 되는 거예요. 물어봅시다.

“내가 사자를 네 앞서 보내어” 앞서 보낸다는 말은, 너희들이 스스로 관리해서 구원된다, 안 된다? 안 된다.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거예요. 그럴 필요 없어도 우리는 매일같이 내 관리는 내가 알아서 하거든요. 하세요. 육이니까. 하시되 돌아서서 이게 육이고 이게 불신앙인 줄 아는 그것이 신앙이에요. 내 죄를 보여주고 내 죄를 고백하고 내 불신앙을 보여주는 그것이 신앙이라니까요. 자기 신앙을 말하는 것은 그게 불신앙이에요. 얼마나 믿지를 못했으면 자꾸 신앙이야기를 언급해야 됩니까. 자꾸 신앙이야기하면 일곱 귀신 다시 들어와요. 어디 거할 곳이 없다가 “여기 좋으네. 신앙생활 하려고 애쓰네. 여기 들어가자.” 해서 신앙생활하는 사람에게 일곱 귀신 다 들어갑니다.

그런데 내가 뭘 해도 이건 불신앙일 수밖에 없다는 사람한테는 이미 주님께서 그런 조치를 했기 때문에 오직 예수 믿는 것을 내가 신앙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나를 붙들고 있다는 것을 결과적으로 우리가 받아들이면 그것이 신앙이거든요. 주님이 주체가 되셔서 나를 구원한다는 것이 결과물이 우리 자신인 것을 소급해서 파악하게 되면 그것이 바로 외부에서 볼 때 주님에 의해서 살기 때문에 그걸 신앙이라고 합니다. 자기 신앙으로 자기가 사는 것은 신앙이 아니고 자기를 신앙하는 사람밖에 안 돼요. 그래서 33장 1절, 2절에서 내 사자를 앞서 보낸다는 말은 내가 알아서 다 할게라는 뜻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그동안 살아온 것을 뒤돌아 볼 때에 하나님 말씀 지키는 게 우선이 아니고 내가 살아남는 게 우선이었습니다.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것이 죄인 걸 깨닫게 하신 것은 성령을 보내주셔서 신자 되게 하셔서 깨닫게 되었사오니 이런 일에 대해서 늘 주께 감사드리고 영광 돌리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