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1107a 울산강의-출애굽기 32장 : 생명책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은 출애굽기 32장 32절에 보면, 그전에 하나님이 언급한 적이 없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것은 주의 기록하신 책이야기를 모세가 먼저 끄집어내었고, 그 다음에 33절에서 “내게 범죄하면 그는 내가 내 책에서 지워버리리라” 또 책이야기를 끄집어냈지요. 지금 모세와 하나님과 의견이 통하고 있는 거예요. 그것은 시내산 위에 올라간 자만 알 수 있는 정보, 산 밑에 있는 사람은 하늘나라에 책이 있다는 상황을 그들은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건져줄 때 그냥 건져주시면 되는데 왜 책을 언급했는지 상당히 난해한 문제입니다. 왜 난해한 문제냐 하면, 그냥 하나님께서 위에서 보시고, “너, 말씀대로 살았구나. 그냥 천국 와.” “너는 말씀대로 살지 않았으니까 지옥 가.” 이러면 책이 없어도 가능하잖아요. 그렇지 않습니까? 책이 구태여 여기 등장할 이유가 없잖아요. 사실은 여기에 대한 언급을 사람들이 함부로 할 수 없을 정도로 따지고 보면 난해한 문제가 깔려있습니다.
그래서 이번 시간에는 32장 전체를 다시 한 번 봅시다. 다시 봐야 될 이유가 있어요. 우리가 생각한 짐작한 하나님과 너무 다르다는 그 점을 제가 언급하고 부각시키고 싶습니다. 지금 하나님과 인간이 만날 때 인간들이 예상한 하나님이 아니었어요. 이건 중요한 문제입니다. 우리가 지상에서 하나님은 이런 분이라고 생각했던 그 하나님은 전혀 아니었어요. 하나님과 인간, 우리가 이 땅에서 누굴 만날 때는 사전에 이렇게 해야 된다, 내가 이런 태도를 취해야지. 이런 게 있게 마련이잖아요. 그게 하나님께는 먹히지 않아요. 하나님은 이런 분이니까 우리가 이런 쪽으로 성의를 표시하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예쁘다고 사랑해줄 것이라고 우리가 짐작했던 하나님이 아니에요.
그 말은 뭘 뜻하느냐 하면, 이방나라들이 알 수 있는 하나님은 참된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만난 하나님은 참된 하나님이냐? 그분은 참된 하나님이죠. 그러면 그 다음 문제입니다. “이스라엘 사람은 참 좋겠다. 참된 하나님을 만났으니.”라는 생각을 하겠지만 그게 잘못된 생각이에요. 왜냐하면 이방인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이나 이스라엘 사람들의 하나님이나 같은 아담의 족속이기 때문에 생각하는 것이 그 정도밖에 안 돼요.
그러니까 오히려 누가 당황스러우냐 하면, 하나님을 안 만난 쪽은 자기가 생각하는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섬기니까 당황스러울 게 없는데 진짜 하나님을 만났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매우 당황스럽게 되지요. 그 당황스럽다는 정도를 제가 32장을 간단하게 설명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32장 처음에 나올 때 모세를 하나님께서 인도했잖아요. 인도하고 난 뒤에 그 다음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안 만난 상태입니다.
잘 들어보세요. 지금 하나님을 몰라요. 밑에 있는 사람은 몰라요. 몰라서 어떻게 하든 행동을 한 것에 대해서 책임을 물을 수 있느냐 하는 이 문제입니다. 제가 지금 문제를 제기하는 게. 하나님을 알고 잘못 섬기는 것은 문제 있는데 하나님을 모르는 상태에서 지금 모세도 처음 만나보는 거예요.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모세도 일방적으로 산 위로 올라오라고 해서 갔을 뿐이에요. 그렇다면 모세가 산 위로 가기 전에는 모세도 몰랐고 다 몰라요.
물론 그전에 홍해사건 일어나고 그때그때 필요한 건 제공했지요. 아말렉 전쟁 일으키고, 지팡이 들고, 반석 주고, 만나 주고, 필요한 건 했는데 막상 하나님께서 하나님 자체에 대해서 하늘나라에 책이 있다는 걸 그전에 모세 본인도 몰랐어요. 모세가 하나님께 부름 받아 그쪽 동네에 가니까 비로소 그때 알게 된 겁니다. 그렇다면 모세를 빼놓고 나머지 사람들은, 제 생각인데요. 책임 추궁당할 하등에 이유가 없는 것 같아요. 몰라서 못했잖아요.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제가 어느 대목을 강조해서 하느냐 하면, 출애굽기 32장 27절,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각각 허리에 칼을 차고 진 이 문에서 저 문까지 왕래하며 각 사람이 그 형제를, 각 사람이 그 친구를, 각 사람이 그 이웃을 도륙하라 하셨느니라 레위 자손이 모세의 말대로 행하며 이 날에 백성 중에 삼천 명 가량이 죽인 바 된지라”
이들이 전쟁해서 죽은 사람 아니지요. 이들은 홍해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도 아니에요. 만나를 다 먹은 사람들입니다. 시내산까지 온 사람이에요. 그들이 중죄를 지었다는 이유 때문에 21절에. 중죄를 지었기 때문에 그들은 죽었던 사람입니다. 그 중죄가 이거에요. 하나님을 안 믿는다는 게 아니고,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 수 없노라”(23절) 이렇게 했고, 아론이 거기에 맞추어서 금 있는 사람은 내라고 해서 금으로 송아지를 섬겼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모르는 상태였지요. 그 송아지를 섬기려고 한 게 아니고 그 송아지를 누구라고 빗대어 섬긴 송아지입니까? 애굽의 신이 아니고 여호와 하나님. 그래서 출애굽기 32장에 여호와 하나님의 축제의 날이거든요. 여호와 잘 섬겨 보겠다고 그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은 애굽에서는 형상이 있는 신이거든요. 형상이 있는 신을 그들은 여호와라고 해서 섬긴 겁니다. 제가 지금 파고 들어가는 게 뭐냐 하면, 삼천 명이나 죽어야 될 중죄가 뭐냐? 그걸 어떻게 찾아보려고 제가 애를 쓰고 있는 겁니다. 삼천 명이나 죽어야 될 죄가 뭐냔 말이죠.
사람이 십계명을 받아놓고 십계명 못 지켜서 삼천 명 죽이는 것은 납득이 돼요. 시키는 대로 안 했으니까. 그러나 그들은, 물론 모세가 십계명을 이야기했지요.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그래서 그들은 여호와를 섬긴 거예요. 물론 여기서 송아지 형상을 만들긴 만들었지만. 사람이 뭔가 책임을 지더라도 한 번 기회를 줘서 “이래서는 안 되겠다구나.”라고 해서 그래도 안 될 때는 조져도 할 말이 없잖아요.
그리고 송아지로 애굽 형상 만들자고 제안한 사람은 아론이지요. 아론은 누구 친척이에요? 바로 모세 형님이죠. 그러면 누가 보기에도 아론과 모세는 뜻이 하나라고 생각했을 것이고 따라서 모세의 형이 먼저 주동해서 송아지 형상을 만들었다면 아론부터 쳐 죽여야 되는 겁니다. 그리고 아론은 남을 칠 자격이 돼요? 지가 주동이 됐는데. 자기 손으로 삼천 명 죽입니까? 그리고 거기에 레위 자손들이 모세 말대로 행하매 죽였다.
제가 하는 취지를 들어보세요.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서는 반드시 분명하게 언질을 주고 위반했을 때는 처벌을 가하는 것이 합리적이잖아요. 그리고 지금 아론은 산 위에 올라가지도 않았어요. 정말 이 사람들이 삼천 명 죽일 사람 같으면 모세가 일단은 내려와서 송아지 형상을 섬기면 하나님께서 화내신단다. 그러니까 내가 없을 때 했으니까 봐주는데 앞으로는 그러지 마라. 이게 순서상 합리적이고 맞지요. 아론은 산 위에 안 가서 몰랐으니까 결국 아론의 말을 따랐다는 것은, 아론 자신도 몰랐고 아론이 삼천 명 죽일 중죄라면 그렇게 했겠습니까? 안 하지요.
뒤에 차들이 오는데 고의로 브레이크 밟아서 차사고내면 이 사람에게 책임이 있는 겁니다. 아무리 자차보험 들어도 사고는 난 겁니다. 지금 모세는 가버리고 따라갈 사람은 누구밖에 없다? 아론밖에 없거든요. 그런데 아론과 모세는 형제간이다. 형제간이니까 그동안 얼마나 많은 생각이 교류가 됐겠습니까? 긍정적 방향으로. 모세 없어도 모세 대신으로 아론이 있고 아론이 뭐라고 했습니까? 모세 간지 오래됐고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르겠다고 할 때 그렇다면 금 있는 사람은 내라. 그래서 송아지 우상을 만들었잖아요. 아론이 주관해서 만들었단 말이죠.
그런데 아론은 산 위에 올라가지 않았지요. 사실은 아론도 책임 없지요. 왜? 산 위의 상황을 모르는 상태에서 산 위의 상황을 알면서도 그 짓했으면 이건 못 됐어요. 이건 벌 받아도 되는데 아론도 산 위에 안 가고 백성들도 안 갔습니다. 간 사람은 모세밖에 없어요. 모세가 뒤늦게 산 위에서 내려왔으면, “여러분, 내가 산 위에 가보니까 이런 짓해서는 안 됩디다. 앞으론 주의합시다.” 좋게, 좋게 하게 되면 어렵게 건너온 가족들, 삼천 명은 안 죽어도 되잖아요. 그런데 모세가 와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무심코 안 사람보고 뒤늦게 내 편에 설래, 안 설래? 해서 모세 편에 안 섰다고 삼천 명 죽여 버렸단 말이죠.
이야기 더 길게 하면 골치 아프겠지요. 해답부터 내리겠습니다. 그 사람들이 잘못해서 죽은 게 아닙니다. 돌 판 깨졌잖아요. 깨진 취지를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죽어줘야 지상에서 돌 판이 깨진 취지가 지상에서 형성돼요. 완전히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소모품으로 만들어요. 무엇을 형성하는데? 돌 판이 갖고 있는 본래의 본질을 보여주는데 죽일 자는 죽이고 죽을 자는 죽어서 이 지상에 돌 판이 깨진 취지를 조성해내시는 겁니다. 이것 외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어요.
이 말은 뭔 뜻이냐 하면, “하나님과 더불어서 하나님 잘 믿어서 구원받아야지.”라는 생각은 진짜 하나님 만나기 전에 인간들이 속에 품었던 사적으로 조작된 하나님이십니다. 그것은 하나님 사랑도 아니고 하나님 뜻도 아니고 자기가 자기를 사랑해서 평생토록 좋게 살고 죽어서도 하나님과 합류하려는 의욕과 욕심의 산물입니다. 그게 바로 이방종교고 이방민족들이 신을 찾는 이유가 되는 겁니다.
모세가 알고 있던 것을 모름에도 불구하고 삼천 명이나 죽였다는 말은, 모세를 통한 지속적인 하나님의 작업이 절대로 백성이 죄 지었다고 해서 멈춰지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이것을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시키게 되면, 우리가 어떻게 되던, 우리 가운데 어떤 사람이 교회를 버리던, 사적으로 섭섭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만약에 섭섭해 한다면 그것은 지금 엉뚱한 구원관을 소지하고 있다는 증거가 돼버려요.
여러분, 구원은 누구 소관입니까? 하나님 소관이지요. 구원받는 내 소관 아니지요. 이걸 달리 질문하겠습니다. 구원은 내가 관리해서 구원됩니까? 안 되지요. 그러면 정말 산 위에 있는 모세와 하나님이 알고 있는 구원관을 우리가 안다면 내 구원에 대해서 내가 관리해야 돼요, 하지 말아야 돼요? 하지 말아야 돼요. 내가 내 구원에 대해서 네기 나한테 어떤 기여를 하면 안 돼요. 그건 행함으로 구원받는 잘못된 방식이 되고 맙니다. 그냥 사세요. 애는 자고 담요 덮어주고, 그냥 사시면 돼요.
믿음은 feeling느낌이에요. 느낌은 내가 집중하는 행함이 멈춰질 때 배후에서 나타나는 게 느낌, 감정, 이겁니다. 믿음은 필링이지 설쳐대면 필링이 다 죽어요. 가려지는 겁니다. 구원은 주님의 느낌에 합류되는 겁니다. 마치 아침에 눈 떠서 창문열고 보니까 안개가 자욱하게 들어오는 것처럼 이미 자욱하게 깔려있는 주님의 구원방식이 이스라엘을 덮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하늘에 있는 줄 알았지요. 모세가 만났던 시내산 그 위에 하나님 있을 줄 알았지요. 내려오면서 하나님도 같이 따라왔다는 생각을 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그게 모세와 하나님과의 대화에 나옵니다. 이스라엘은 그냥 방치해서는 도저히 안 될 족속인 것을 안다. 이제부터는 이스라엘 통한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기 위해서 내가 그들과 함께 동행하리라. 얼마나 기쁩니까. 모세는 말하기를 동행 안 해주신다면 차라리 제 이름을 책에서 명단에서 삭제해주시기 바랍니다.
비슷한 이야기가 33장에 보면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친히 가리라 내가 너로 편케 하리라 모세가 여호와께 고하되 주께서 친히 가지 아니하시려거든 우리를 이곳에서 올려 보내지 마옵소서”(14,15절) 모세의 말이 굉장히 건방지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좀 건방지지요. 하나님이 타협의 대상이 될까요? 안 되지요. 그런데 자기는 마구잡이로 타협하지요.
아까 33장 14절도 마찬가지고 여기 32장 32절에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 뭔가 하나님 앞에 압력을 가하는 느낌이 들지요.
그리고 또 이상한 게 있어요. 삼천 명 죽였으면 이제는 죄 문제 해결된 게 아닙니까? 삼천 죽었으니까 나머지는 괜찮은 사람인 줄 아니는 그게 아니에요. 또 뭐라고 합니까? 하나님이여, 남아있는 백성의 죄를 용서해주옵소서. 전에 금 신상 만들 때 합세했잖아요. 합세한 죄가 삼천 명 죽인다고 해서 면제가 안 될까요, 안 될까요? 이게 안 되지요.
제가 강의 처음에 이야기했습니다. 이방인이 알고 있는 하나님과 막상 진짜 하나님을 만났던 이스라엘 하나님과 달라도 너무 달라요. 뒤죽박죽이에요. 하나님의 구원방식은 정리가 안 돼요. 정리가 안 된다는 말은, 능력이 없는 게 아니라 이미 우리 가운데서 우리 나름대로의 구원방식을 고수하고 있기 때문에 주님의 방식이 차고 오기가 굉장히 난해하고 힘들다는 이야기입니다.
구원방식 모른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모른다고 하면 성경공부 자체가 의미가 없어요. 구원방법을 여러분이 알고 계십니다. 하지만 그 과정 속에서 먼저 우리가 알고 있는 구원방식을 스스로 돌아볼 수는 있어야 된단 말이죠. 그 구원방식이 바로 이방인들이 알고 있던 방식입니다. 그리고 32장에서 이스라엘이 썼던 방식이에요. 하나님을 섬기면 구원받는다. 그거, 땡 탈락이에요. -100점.
하나님을 섬기면 구원이 안 돼요. 그리고 그 섬기는 과정 속에서 주께서 제거하려는 속성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내 구원은 내가 알아서 관리해야 구원되지 내가 내 구원을 관리 안 하면 나는 지옥 간다는 그 사고방식도 뽑아낼 필요가 있습니다. 그걸 뽑아내려면, 여러분이 이제까지 안다고 치고 이제부터 약간 난해한 코스에 들어갑니다.
내가 나를 관리해야 구원받는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유리하겠습니까, 불리하겠습니까? 이 문제 어렵기 때문에 질문 먼저 하겠습니다. 하나님 섬기는 것이 내 구원에 유리하겠어요, 섬기지 않는 것이 유리하겠습니까? 이방인들이 알 고 있는 하나님, 우리가 기본적으로 알고 있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그나마 낫겠지요? 그게 탈락이라는 거예요. 그게 아니라는 거죠.
왜냐하면 섬기려고 한다면 섬기는 방식을 누가 창안하고 누가 끄집어내야 돼요? 내가 끄집어내야 돼요. 내가 끄집어내는 방식에 내가 불가능한 방식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없지요. 선생님이 문제 내고 얘들 푸는 것은 틀릴 수가 있지만 학생 본인이 문제 내고 본인이 시험 치면 이건 누구나 백점이잖아요. 하나님을 섬기는 방식을 인간 본인의 아이디어에서 끄집어낸다면 결국 이 방식이 내 안에 내장돼있다는 뜻이고 이것을 고수한다는 뜻이거든요.
따라서 주님의 방식은 그냥 오는 게 아니고 내가 나를 구원하는 방식을 겨냥하면서 찾아오는 거예요. 우리가 섬기는 방식은 뭐냐 하면, 나는 귀한 것, 금이 얼마나 귀합니까. 쉽게 말해서 나에게 제일 귀한 것이 나를 대변해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뭘 바치라 했습니까? 양을 바치라 했습니까, 염소나 소 바쳤습니까? 자기 아들을 바쳤잖아요. 아들 바쳤다는 것은 사실은 귀한 다 바친 거예요.
이 본문에서 금을 바친 것은, 은도 동도 아니고 알루미늄을 바친 게 아니에요. 금을 바친 거예요. 금은 애굽에서는 최고의 고가로 귀한 보석입니다. 그걸 바쳤다는 것은 자기의 심정과 성의를 표현한 거예요. 그런 방식이 있다는 말은, 하나님이 뭘 원하는 방식을 그들은 몰랐지요. 왜? 산에 안 갔으니까. 심지어 아론, 모세 형님도 몰랐지요.
그러면 제가 건방지게 하나님이라면 어떻게 합니까? 그 방식을 그냥 긍정해주면 안 되겠지요. 그 방식 긍정해주고 하나님 구원방식 집어넣으면 돼요, 안 돼요? 이게 안 되지요. 그 방식 빼내고 주의 방식 집어넣어야 되겠지요. 그렇다면 모세가 그렇게 과격하게 돌 판 깨지 말고 자기감정 좀 억제하고, “자, 내가 왔습니다. 어? 금 신상 섬기네. 아아, 몰랐구나. 몰랐으니까 내가 이해해줄게요. 다 모여 봐. 금 신상 섬기는 그 방식 말고 주께서는 다른 방식으로 섬깁니다.”라고 이야기해놓고 그래도 금 신상 고집할 때는 삼천 명을 죽이든 삼만 명 죽이든 그건 죽일 만한데 그 방식을 모세가 사용하지 않았지요.
그러면 도대체 우리가 어디까지 내려가야 됩니까? 내가 날 구원하겠다는 그 의지 자체가, 뭔가 하나님이 구원하는 방식과 섞일 수 없는 요소라는 것이 드디어 밝혀지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 저 구원받고 싶습니다.”라는 이 제안 자체가, “구원받고 시퍼요~ 내가 구원 신 줄게.” 구원방식과 만남이 성사가 안 됩니다. 바로 구원받고 싶다는 의지를 삼천 명 죽이듯이 조져야 조지는 그 현장에서 비로소 그게 바로 구원방식이에요.
누구든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지지 않고서는 너희는 구원받을 수 없다. 구원 문제에서 방법의 문제나 의식의 문제가 아니고 우리가 관련된 문제, 우리가 미처 모르는 우리 배후의 어떤 세력과 관련된 서로 원수지간으로 관련된 그 문제로 구원의 방식이 주어지는 겁니다. 십계명으로 구원되지 않습니다. 십계명 때문에 조지는 자, 벌 받아 죽는 자가 발생될 때 구원됩니다. 왜냐하면 구원받고자 하는 의지 자체가 부정당하는 그 부정의 자리에 구원해주시는 하나님이 동행이라는 방식으로 갑니다. 그들은 십계명 못 지킵니다.
제가 지난주일 낮에 그런 설교했잖아요. 여러분들이 하나님 말씀을 지킨다고요? 개가 웃을 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수가 없습니다. 이제야 말합니다.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 말씀보다 시급한 문제, 더 우선되는 관심사가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것 성령 아니면 이해 못합니다. 하나님, 구원해달라는 게 뭐가 나쁩니까? 그게 나빠요. 육에 있는 사람은 이해 안 돼요. 성령 받은 사람은 이해됩니다. 성령 받은 사람은 어떻게 합니까? 우리가 구원받고자 하는 것이 죄라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방식 속에 하나의 재료로 포함시키는 방식으로 구원하신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성령 받은 사람입니다.
십자가는 구원의 방식이 아니에요. 십자가는 구원이 형성되는 방식이죠. 내가 말해도 너무 어렵게 이야기해서 죄송합니다. 그런데 말은 어려운데 이 말이 맞아요. 내가 여기 있고 십자가가 나를 구원하는 게 아니고 십자가는 언약이다. 하여튼 구원만 해주이소. 이 방식이 십자가를 이 땅에 형성시키는 죄악 된 재료로 필요했던 상황이 된 겁니다.
다시 한 번 점검하고 넘어갑시다. 아론이 주도해서 금송아지 섬겼습니다.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은 책임을 묻지 않았고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 다음에 모세가 등장하면서 돌 판을 깨뜨리고 왔거든요. 모세 편에 섰느냐, 안 섰느냐 그 문제를 따지고 모세 편에 안 섰다고 삼천 명 죽였잖아요. 그렇다면 우리가 언뜻 보기에는 그걸로 금송아지 섬겼던 죄에 대해선 이미 해결 난 것처럼 느끼잖아요. 그런데 그게 아니에요. 삼천 명 죽은 건 죽은 거고 금송아지 섬긴 죄는 그대로 남아있는 거예요. 그러면 다른 사람이 이런 소리 할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모세 선지자님. 하나님께서 잘 알 것 같으면 아론조차 데려가든지 아론한테 언질을 주던지 금송아지 섬기지 않도록 사전에 막든지 해야 되지 않겠느냐는 말을 하겠지요.
여기서 오늘 강의에서 제일 핵심부분에 도달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선악과 사건의 반복성, 이것 없이는 십자가 사건의 반복성도 없어요. 선악과나무를 심고 난 뒤에 거기에 대해서 왜 심어놨느냐고 단박 나오겠지요. 그것은 어떤 의식일까요? 하나님이 선악과를 안 심었으면 우리가 에덴동산에서 추방될 리도 없는데 원인을 따지고, 따지고 보니까 주께서 뱀을 집어넣은 그것도 잘못이고, 뱀이 오더라도 선악과나무가 죽으리라는 벌칙조항만 없어도 아무 일 없었어요.
그런 문제의 원인을 따져서 하나님도 책임이 있다고 따지고 싶은 심보가 이 지상에 주님의 나라를 이루는 멋들어진 기회가 되고 재료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미국에서 강의할 때 어떤 목사님이 하신 중요한 말씀, 죄가 나를 구원한다는 것을 알았다는 거예요. 의가 나를 구원하는 게 아니고 죄가 나를 구원하는 거예요. 만약에 의가 구원한다면 나는 당연히 구원받아야 되는데 문제는 의가 모자라서 구원 못 받는데, 어디에 있을까? 의가 십자가에 있네. 그럼 내가 십자가 믿어줌으로써 내가 구원받고자 하는 나의 의욕은 타당성이 있고 하나님이 인정받는 바가 돼버렸지요. 그게 바로 종교에요. 그게 이방종교에요.
이방종교의 구원은 다른 게 아니죠. 복 받는 것, 잘 먹고 잘 사는 것. 내가 이 땅에서 잘 먹고 살고 죽어서 하늘나라 가는 거기에 대해서 내가 믿는 신은 거기에 대해서 인정해주고 중요한 것은 방법에 대해서 “네가 어느 날에 제사 드려라.” 이렇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우리가 방법 줘도 못하면 구원이 안 되니까, 방법만 주는 것이 아니고 그 방법이 인간으로 약간의 열심과 애를 쓰면 할 수 있는 그런 방식을 주시면 우리는 구원받고자 하는 의욕과 주의 방식과 손잡으면 구원이 된다는 것이 이방인들의 하나님이에요.
그걸 베드로 식으로 바꿔볼까요? 예수님 가신 곳이 천국이지요. 그럼 베드로가 할 수 있는 게 뭐냐 하면, 자기 목숨을 예수님께 바친다. 이건 인간이 할 수 있는 중에서 근본 정도가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것 다 바친 거예요. 바칠 테니까 주님 가신 곳에 가겠다고 하니까 주님이 너 같은 인간은 와야지 했습니까? 이게 미쳤나? 니 처소가 없어. 애초부터 처소가 없는 거예요. 처소가 없다는 말은, 구원의 의지는 강렬해도 선악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는 그 테두리 안에서 우리는 조금도 벗어난 적이 없습니다. 결국 그걸 한 마디로 말해서 구원 없습니다. 그럼 교회는 쓸데없는 거예요. 구원이 못 해주는 교회가 무슨 소용 있어요. 교회 없습니다.
그럼 교회 없으면 천국은 누가 갔습니까? 주께서 만들어낸 교회가 있어요. 그걸 그리스도의 몸이라 합니다. 들어본 적은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몸. 몸도 하나요, 주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교회가 몇 개라고요? 오직 교회가 하나밖에 없지요.
인간이 하나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요? 인간은 열 명 있으면 열 개고, 백 명 있으면 백 개 됩니다. 절대로 한 개가 될 수 없어요. 그래서 인간이 만든 모든 교회는 그냥 이방종교, 마귀 섬기는 마귀의 신선이라고 보면 됩니다. 교회가 필요 없다니까요. 왜? 교회가 구원에 넣어준다는 보장이 없어요. 안/못 넣어준다는데 제가 한 표 던집니다. 교회는 절대로 구원을 안 해줍니다. 애초부터 구원할 능력이 없어요. 교회는 결과적이어야지 교회로부터 시작을 하려고 한다면 그 교회는 구원과 다른 길을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참된 교회는, 결과적 교회가 되려면 교회를 전하면 안 돼요. 뭘 전해야 되느냐? 십자가 복음, 주님의 구원의 방식을 전해야 됩니다. 그러면 삐질 사람이 있을 거예요. 삐진 그 사람이 남아서 다른 사람이 가든지 안 그러면 그 사람이 나가든지 또 갈라지게 돼있습니다. 왜냐하면 성령을 받지 못하면 내가 이미 고생하니까 죽어서는 고생 안 하겠다는 숨길 수 없는 기본적인 육의 본능을 인정 안 해준다는 자체가 마귀도 삐지고 본인도 삐지고 둘 다 삐지는 거예요. 날 구원 안 해주는 그런 신은 나한테 필요 없다.
그럴 줄 알고 미국뉴저지에서 강의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거든요. 제 아내가 미국 이야기하지 말라고 경고했음에도 불구하고 이건 성령의 역사함에 따라 할 수 없어요. 로마서 9장 3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이 말하니까 앞에 있는 사람이 “아멘” 하는 거예요. 내가 놀랐어요. 방금 어느 대목을 이야기했는지 아시고 아멘 하느냔 말이죠. 뭐라고 돼있어요?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아멘. 진짜 성령 받은 건지 안 그러면 습관이었는지 둘 중에 하나에요.
여기에서 사도 바울 본인이 저주받지요. 우리는 백 번 저주받아도 괜찮아요. 우리가 있기 때문에. 구원은 우리가 책임지고 내가 책임지는 게 아니에요. 우리를 위해서 내가 사라져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그 우리는 어디서 나온 우리냐? 1인칭 복수형이죠. 그렇다면 이 우리에 해당되는 단수가 뭡니까? 바로 ‘나’지요. 그 나가 인자되시는 분이에요. 시편 8편 4절에 뭐라고 돼있어요?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알아주시고, 그 다음에 바로 나오는 말씀이 인자가 무엇이관대 이렇게 권고하시나이까.
사람이란 건 없어요. 사람은 없고 흙밖에 없거든요. 흙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든 사람은 있어야 되고, 사람은 다 죽으니까 없고, 하나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든다는 창조의 원리가 돼야 안식은 완성이 되고, 그럼 그 사람은 누가 만드는가? 그 사람은 인자가 만드는 거예요. 그 인자가 히브리서 2장에 보면, 예수님을 인자라고 합니다. 시편8편 4절에 나오는 그 대목을 히브리서 2장에서 예수님 자신에게 적용시켰어요. 그러면 사람은 누굽니까? 내 사랑하는 자요, 기뻐하는 자는 누굽니까? 오직 예수님이죠. 예수님이 나가 되면서 예수님이 만들어낸 우리가 따로 있다니까요. 이게 교회에요.
이 우리는 자기 이름으로 살지 않아요. 죽었기 때문에. 주의 이름으로 살아요. 그래서 이들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입니다. 기도할 때도 주의 이름으로. 사도행전 2장에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얻으리라(21절). 로마서 10장 13절에 뭡니까?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바로 나에서 나온 우리를 두고 이야기한 거예요.
구약을 거쳐야 돼요. 구약 안 거치고 신약으로 바로 오게 되면 내 개인이 예수 믿어서 구원되는 걸로 오해한다니까요. 그런 식으로 자기의 구원의지를 주께서 아마 옹호했을 걸? 니 혼자 옹호해. 주께서는 우리의 구원의지를 옹호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내가 구원받고자 하는 것조차 죄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는 겁니다.
바리새인들이 율법 지킨 이유가 뭡니까? 자기의 구원을 위해서 자기 관리에 나선 거예요. 그렇게 하면 율법 지킨 만큼 의로운 마일리지가 쌓이지요. 그런 행동을 하는 게 바리새인이고 주님은, 누구든지 바리새인보다 더 의가 낫지 아니하면, 이라고 언급함으로 말미암아 바리새인을 제일 앞에 선봉장이고 그 뒤로 모든 인간을 줄 세운 거예요. 어떤 인간도 바리새인 노선에서 절대로 벗어나지 않아요. 오늘날도 마찬가지에요. 바리새인 욕할 것 없어요. 교회 다니는 모든 사람이 바리새인 같이 행동하고 있어요. “목사님, 말씀만 하시면 내가 지키겠나이다.” 그걸 왜 지키려고 하는데? 지켜야 내가 구원받지요. 그러면 본인 구원받는 게 우선입니까, 주님이 우선입니까? 내가 구원받기 위해서 예수 믿지요.
그러면 하나님의 영광은요? 하나님의 영광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영광은 끝났습니다. 예수 믿는 것이 영광이에요. 하나님의 일이 뭔 줄 알아요? 아버지가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그게 하나님의 일이에요. 우리가 예수 이름을 부르면 영광입니다. 그것+행함, 없습니다. 그 자체가 영광이에요. 예수 앞에 나갈 때는 뭘 부인하기 때문에? 내 기도, 내 헌금, 내 예배참석, 내 성경공부, 내가 산다는 자체를 십자가 앞에서 부정당하게 되는 자체,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자체가 이것보다 더 큰 영광 없습니다.
괜히 소프라노, 알토, 정해서 노래 부르고, 그것 영광 안 됩니다. 왜? 노래 부르면서 지 목소리 관리하기 때문에 그래요. 어제 술 한 잔 먹었더니 목소리가 영 안 나오네. 이럴 수도 있고. 지금 알토 하는데 몇몇 사람은 잘 나와야 할 텐데. 이럴 수도 있고. 성가대 하면서 온갖 생각 다 하거든요. 오늘 성가대 끝나고 불고기 사준다는데 미리 당겨서 할 수 있고. 오늘 성가대 녹음한다는데 잘 하자. 성가대 하면서 영광 돌린다는 자체가 자랑질의 일종이에요. 그런데 성가대 하는 것보다 더 나쁜 짓이 뭐냐 하면, 성가대하는 것 비판하는 것, 그건 더 나빠요. 남은 애써서 봉사하는데, 지는 오늘 소프라노 두 번째 박자 안 맞고.
영광은 예수님 앞에서 “주여, 저를 죽여주소서. 왜 저를 이렇게 구원해주셨습니까?” 막달라 마리아처럼 주님의 사랑이 너무 고마워서 그 귀한 향수 뿌리면서 감사할 때 그게 영광입니다. 많이 용서받은 자가 많이 사랑한다. 그렇다면 향수 뿌리면 구원받습니까? 그것 아닙니다. 향수 아끼세요. 선 볼 때나 뿌리고 누구 사귈 때나 뿌리고 다니세요. 어떤 관리를 안 해도 된다는 것을 믿는 게 영광이에요. 더 이상 내 운명에다 장식 안 해도 위장하지 않더라도 영광이 된다는 사실을 믿는 것, 이건 성령이 오실 때 하실 뜻이거든요. 아무것도 필요 없다. 그런 노래 있잖아요. 아무것도 필요 없어~. 아무것도 필요 없어요. 다 이루었기 때문에.
그런 성령 받은 사람을 가려내기 위해서 환란과 핍박과 곤고와 적신이나 위험이나 이런 사태가 자꾸 들이닥칩니다. 잘 믿는 것 같아도 그런 게 들이닥치게 되면 우리는 스스로 주님의 사랑을 부정하고 싶은 생각이 막 들어요. 주여, 내가 이만큼 잘했는데 저한테 이런 어려움이 닥칩니까? 저는 요 근래 <개그콘서트>에 나오는 유민상 장가보내기 프로젝트 코너가 자꾸 생각나요. “기도하고 헌금도 하고 열심히 다녔는데 왜 그걸 부정하십니까?” “그래, 헌금했어? 그래서 뭐? 없어. 아무것도 아니야. 너 봉사한 것 아는데 그래서 어쩌라고? 그게 뭔데?”
베드로전서 4장에 오직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거예요. 네가 무슨 일을 할 때 주께서 주신 힘으로 하고 네가 말을 할 때 주의 말씀으로 하라. 왜? 모든 것은 너로 인한 영광이 아니고 오직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영광, 이미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릴 때 예수님이 나라는 1인칭 단수형, 그 예수님 안에 1인칭 복수형이 함께 담겨 있어요.
이 명단을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어린양의 생명책이라고 하는 거예요. 어린양의 생명책은 신약 때 확장된 것이고, 구약은 지상에서 책을 만들어나가기 때문에 확장된 게 아니에요. 그래서 여기 32절에 보면,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 책에 명단이 있더라도 삭제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는 것처럼 보이지요.
33절도 마찬가지에요.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게 범죄하면 그는 내가 내 책에서 지워버리리라” 이 말은 생명책의 명단이 지상에서 만드는 공정이지요. 구약 자체가 그림자, 모형이잖아요.
이런 예를 들면 쉬운데 어떤 건축가가 아파트를 새롭게 계약해서 설립하고자 합니다. 그러면 건축가 머리 속에 아파트 모양은 하나의 이미지고 사고기 때문에 확정되었지요. 확정된 그것으로 모형 만드는 제작사 찾아가서, “사장님, 내가 지금 아파트 건축계약을 했는데 이런 모양으로 모형을 만드세요.” 해서 가져왔는데 설계자가 머리 속에 생각했던 것과 상상한 모습과 모형이 다르면, 베란다가 이런 모습이 아니지. 베란다 고쳐오니까 옥상 모양은 탑까지 올리라고 했잖아요. 다시.
이게 구약이에요. 구약은 계속해서 수정에 들어가는 겁니다. 지워버리고 다듬고. 그게 그림자고 모형이에요. 그런데 그 작업을 이스라엘 내부에서 하거든요. 이스라엘과 동행하시는 주님의 이름과 한단 말이죠. 최종적으로 어디서 완성됐습니까? 예수님께서 확정했지요. 그러면 두 번 다시 지워질 법이 있습니까? 없지요. 왜냐하면 설계자의 머리와 합치됐기 그것이기 때문에. 건축가 이야기하니까 이해되시죠. 이해됐으니까 10분 쉽시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