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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강의-기적.현실속의 천국 140923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4. 11. 6. 09:07

2014-09-23 22:12:57 조회 : 290         
사도행전 65강(기적), 마태복음 56강( 현실 속의 천국) 140923 이름 : 이근호 (IP:119.18.8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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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140923-행26장14절(기적)65강 - 이 근호 목사

사도행전26장14절하겠습니다. 13절부터 보겠습니다. “왕이여 때가 정오나 되어 길에서 보니 하늘로서 해보다 더 밝은 빛이 나와 내 동행들을 둘러 비추는지라 우리가 다 땅에 엎드러지매 내가 소리를 들으니 히브리 방언으로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가시채를 뒤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사도바울이 경험했던 것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빛이 있었습니다. 빛이 굉장히 해보다 밝은 빛이었다. 해보다 더 밝은 빛이었다는 것은 사도바울의 망막이 날아간 거죠. 아예. 해보다 더 밝은 빛이 비취니까. 빛만 비취고 사라진 것 같으면 UFO처럼 생각하겠는데 거기서 음성이 들렸지요. 그런데 그 음성이 우우우 그런 음성도 아니고 음음음 음성도 아니고 모르는 음성도 아니고 분명히 요새 같으면 한국말로 이야기하는 거예요. 표준말로 이야기한다 말이죠. 그런 이야기하는데 그 이야기 내용이 사도바울에게 쏙 오래 동안 기억되도록 그렇게 이야기한 겁니다.

그 기억 내용이 뭐냐, 그 히브리 방언이라 하는 것은 히브리말로 이렇게 생각하면 되고요, 그 다음에 사울아, 사울아, 너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보통 우리가 핍박이 되려면 상대방을 멱살을 쥔다든지 상대방을 지금 밑으로 누르고 때릴 때 눌린 사람이 하는 말이 “오, 당신은 왜 나를 핍박하느냐” 이리 되는데 지금 핍박당한다는 그 분이 지금 빛을 비춰서 사울의 눈이 지금 완전히 장님 되었잖아요. 그러면 더 센 분이란 말이죠. 센 분이 어떻게 약한 인간한테 핍박을 받는다고 주장할 수 있느냐 하는 겁니다.

그러니 사울에게는 이게 좀 엉뚱한 이야기고 자기가 거기에 동의하기가 곤란하지요. 그러면 자기는 언제 빛 대신 주님을 핍박했습니까? 이렇게 이야기 할 게 아니고 자기가 이렇게 하는 행동들을 봐야 되지요. ‘지금 내가 뭘 하고 있지?’ 지금 사울이라는 사람이 뭘 하는 일이죠? 예수 믿는 사람을 핍박하는 중이죠. 한 번 적어볼게요. 지금 사울은 누구하고 상대하는가 하면, 같은 인간들하고 상대해요. 상대하면서 핍박을 가하게 됩니다. 이것은 핍박당하는 자는 힘이 없고 사울은 뭐가 있습니까? 핍박할 만한 힘을 갖고 있지요. 그러면 사울은 힘을 가진 자가 되고 핍박당한다는 말은 그 만한 힘한테 눌린다는 뜻이에요. 힘없음이 되지요.

그러면 갑자기 여기서 사울에게 빛이 내려온 거예요. 빛이 내려와서 빛에서 하는 이야기가 뭐냐 하면, 지금 이들을 대변하고 이들을 대표하는 발언을 하신 거예요. “사울아, 니가 지금 행동하는 행동이 곧 나를 핍박하는 행동이다.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핍박하느냐” 이렇게 된 거예요. 사울은 좀 약해보이는 사람을 공격했는데 예수님은 사울이 자기를 핍박하는 걸로 그런 체제, 시스템으로서 지금 세상이 돌아가고 있는 거예요.

자, 이 사울에게 주변사람들이 왕, 신하, 여러 유대인들이 있겠지요. “사울아, 네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느냐?” 라고 하니까 “왕이시여, 아그립바 왕이시여, 저한테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라고 지금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걸 제가 쉽게 이야기해드릴게요. 지금 번역해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왕 당신이 내 말 듣기 전에는 세상이 어떻게 굴러가는지를 당신은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왕이시여, 잘 들으소서. 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비로소 내가 알려드리겠습니다. 내가 옛날에 예수 믿는 사람을 핍박하면서 비로소 그 때에 사울은 처음으로 예수 믿는 자와 관여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자기는 그야말로 이 사람을 핍박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일이라고 생각해서 그냥 핍박한 거예요.

그래서 자기는 하나님 중심이지 모든 것이 하나님 중심으로 한 겁니다. 요게 중요하기 때문에 빨간 걸로 해볼게요. 사울은 옛날에 무슨 중심이었다? 하나님 중심이었다. 하나님 중심이라 하는 것은 이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거예요. 지금도 이슬람나라에서는 하나님 알라신 신 중심이잖아요. 힌두교도 마찬가지고. 그런데 이게 틀려먹었다는 거예요.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는 거예요. 만약에 하나님 중심으로 살게 되면 반드시 누구를 핍박하게 되어있는 구조로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 중심이다. 뭐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라고 이런 식으로 살아가게 되면 반드시 그 사람은 지금 실제로 이 세상을 운영하시는 분을 핍박하는 양상이 되고 만다는 겁니다.

예를 들면, 순복음 교단 같은 경우에는 하나님 중심이에요. 하나님 섬깁니다. 이들이 하나님 중심으로 설교하기 때문에 이들은 필히 누구를 공격하게 되어있어요? 예수님을 핍박하는 중입니다. 현재진행형이지요. 지금 핍박하는 중이에요. 핍박하는 중인데 그들은 뭐냐 하면, 사람들을 내가 믿는 하나님 중심으로 다 포섭을 하고 종속시키려고 하는 겁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예수는 어떤 예수냐 하면, 이미 그들이 차려놓은 밥상에다가 숟가락만 하나 얹어놓는 거예요. 예수라는 숟가락만 얹으면 이게 온전한 기독교가 되는 줄 알고 있어요. 숟가락만 얹으면. 그러나 예수님이 그 밥상에 들어가면 그 밥상은 완전히 엎어져버려요. 왜냐 하면, 인간들이 하나님 중심이라 하는 것은 실은 이게 실상은 하나님 중심이 아니고 나 중심이에요. 나 중심. 자기의 자존심 중심이었습니다.

하나님 중심이라면 반드시 나 중심을 인정해야 되는데 예수님 중심이라면 내 중심이 허용이 안돼요. 왜냐 하면, 예수님은 썩어빠진 나 때문에 돌아가셨기 때문에, 예수님 중심이라 하는 것은 나를 지적하는 중심이거든요. 남을 나쁘다고 하지마라, 내가 보기에는 니가 나빠, 우리 자신을 삿대질하고 손가락질하고 우리 자신을 비난하는 쪽으로 세상은 돌아가는 겁니다. 사울아, 사울아 니가 나를 왜 핍박하느냐, 이런 식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그래서 사울은 자기는 옛날에 하나님 중심이었는데, 그 하나님 중심이었던 것 때문에  도리어 예수님과 접촉될 수 있었다는 겁니다. 예수님을 만날 수가 있었다는 거예요. 하나님 중심이기 때문에 결국 예수님을 핍박하는 양상으로 예수님과 만나게 되었다. 예수님은 누구냐, 나로부터 핍박 받으신 분이고 나는 누구냐, 나는 이 세상을 운영하시는 주님을 한참 핍박하면서 살아오고 있는 그런 나. 나는 나다! 라고 하지 말고 앞에 핍박하는 나! 누구를? 예수님을 핍박하는 나로서 모든 인간은 나로서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이 사실을 어떻게 아느냐, 이 사실은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자신을 세움으로서 비로소 나도 몰랐던 이런 존재를 발견하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우리는 주님을 핍박하는데 핍박하는 자에 대한 주님의 대처는 그게 용서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걸 적어보면 핍박에 대해서 마중 나오는 것은 ‘용서해주심’ 무엇을? 그것을. 그것이라 하는 것은 바로 나 중심에 핍박하는 것을 용서하시는 분으로서 우리는 비로소 살아계신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누구냐? 병고치고 물 위를 건너시고 아닙니다. 예수님은 누구시냐, 나를 용서하시는 분이에요. 예수님이 만약에 병 고쳤다 하면 우리는 예수님을 이용할 생각을 할 겁니다. 건강할 때는 이용 안하지만 몸도 아프고 돈도 없고 이럴 때는 병원에 가기도 싫고 주사 맞기도 싫고 “주여, 기도할 테니까 내일 아침에 멀쩡하게 하옵소서.” 이렇게 항상 이용하고 싶어 하거든요.

그런데 우리 재아씨한테 물어볼까, 내일 모레 간다니까 건강하게 되면 죄를 지어요? 안 지어요? 건강해도 죄 짓지요. 건강해도 죄 짓습니다. 부자 되면 죄를 지어요? 안 지어요? 죄 짓지요. 가정이 화목하면 죄를 지어요? 안 지어요? 죄 짓지요. 그렇다면 주께서는 어떤 분이다? 용서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건강한 가운데 죄를 찾아내고 부자 된 가운데 뭘 찾아내고? 죄를 찾아내고. 가정화목가운데 죄를 찾아내서 주님께서는 접촉제로 사용해서 만나게 해주시지요. 그런데 인간은 내 중심이기 때문에 “하나님, 건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부자 되어서 감사합니다. 가정화목해서 감사합니다.” 이런 것으로 자기는 축복 받았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것은 순복음 그쪽에서 하는 짓이고 진짜 축복은 ‘아, 내가 이런 이런 것을 마치 당연한 것처럼 여기는 이것이 바로 내가 미처 몰랐던 죄였구나!’ 내가 만약에 건강하게 되면 아픈 사람을 얏 보게 되고 내가 부자 같으면 가난한 사람을 저주받았다고 이야기할 것이고 내가 가정화목하게 되면 남이 불행한 가정보고 비웃게 되고 이것이 예수님에 대한 핍박이 된다는 사실이에요. 이게 핍박이 돼요. 그러니까 사울이 만났던 예수님이 사울과 예수님의 관계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복음의 시작이라 보면 돼요.

예수님이 가셨던 그 십자가의 의미를 사람들은 몰랐어요. 몰랐는데, 그걸 처음으로 사도바울에게 건드리면서 찾아오신 거예요. 지난주일 낮 설교 들어보셨어요? 처음에 뭐라고 했습니까? 인간은 자기를 좀 안 건드렸으면 좋겠다. 이 청소년 젊은 사람들이 소망이 있습니다. 그건 뭐냐 하면, 빨리 어른이 되고 싶은 유일한 소망이 있어요. 제발 좀 간섭하지 말란 말이야. 이것 때문에 빨리 어른 되고 싶어. 부모가 자식한테 간섭하는 이유는 자식 잘되라고 하는 것도 있지만, 제일 큰 문제는 경제적인 문제 때문에 그래요. 사고 치면 돈이 나가. 남한테 피해를 입히면 돈이 나가요. 부모가 돈 벌 의사가 없으면 집구석에서 드라마 보며 그냥 잠이나 자면 되는 거예요. 그렇게 피곤한 몸을 이끌고 잠 깨워가면서 나가는 이유는 자식들 먹여 살리기 위해서 그렇게 하거든요.

그러니까 부모 입장에서는 내가 이렇게 밖에 나가는 것이 경제적 활동해서 나가는데 니가 보탬은 안 될지언정 거기다가 엎친 데 덮친다고 피해까지 입혀버리면 부모로서는 힘마저 완전히 무너지게 되는 거죠. 부모가 자식을 잘 키우는 이유가 경제적 부담을 덜 지고 이제 내가 안 키워도 누가 대신 좀 데려가주면 좋은 신랑 데려가 주게 되면 경제적인 부담이 훅 빠질 수 있기 때문에 잘 키워야 돼요. 잘 못 키우면 안 데려가니까. 안 팔리니까. 노예 시장에. 인간시장에 안 팔리니까. 잘 키워놓고 예쁘게 키워놔야 서로 경매 붙어서 데려가니까 그래서 세상이라는 것은 마르크스가 그런 주장하지 않더라도 누구나 아는 거예요.

윤리고 도덕이고 그 밑바닥에는 뭐가 있는가 하면, 돈이 있어서 일단은 생존이 되어야 신앙이고 종교고 하나님이고 예수님이고 삼위일체고 찾지 돈도 안 되는데 무슨 교회를 가고 해요. 그래서 교회 오는 사람이 돈 더 벌게 해달라고 오는 거예요. 돈을 덜 버는지 아니면 내 인생의 짐을 다른 사람이 대신 좀 가져가가지고 내가 짐을 안 져도 나는 책임 다했다 소리 듣고 싶은 그런 게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병고치고 물위를 걸을 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좋아들 했습니까? 오병이어 할 때는 환호성을 불렀고 물 위를 걸을 때 제자들은 놀랬지요. “야, 진짜 우리가 대박 터트렸구나! 우리 지켜주실 분을 지금 함께 동행 하고 있으니까 우리는 세상에 부러울 게 없어라.” 이리 됐다 말이죠. 하지만 주님께서 원하는 것은 인간들이 가장 기본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생존이 아니고 용서해주심이에요. 용서해주심.

용서가 되어야 그 다음에 뭘 얻느냐 하면, 생존이 아니고 생명을 얻을 수 있게 되는 겁니다. 교회가 뭐해야 됩니까? 용서를 이야기해야 되겠어요? 생존을 이야기해야겠어요? 어느 쪽이 목적이 되어야 돼요? 용서가 목적이기 때문에 교회에서는 뭘 끄집어낼 수 있어야 돼요? 죄를 끄집어내서 예수의 피로 이미 용서받은 생명을 갖고 살아갑니다. 이렇게 해야 되는데, 사람들은 생존을 갖고 갑니다. 이리되면 이것은 믿는 사람이나 안 믿는 사람이나 다 똑같이 목숨 귀한 거 다 아니까 이런 이야기는 절에서 하는 이야기나 교회에서 하나 아무 의미도 없는 거예요.

사도바울이 주님을 만났습니다. 주님 만났는데 한 달 수입이 얼마 늘어났어요? 사도가 주님 만나고 난 뒤에 아가씨 만나서 결혼했습니까? 도대체 예수님 만나고 그가 이익 본 게 뭐가 있지요? 어떤 것을 이익 봤어요? 없지요. 사도가 예수님 만나고 난 뒤에 자기가 이익 본 것은 없지만, 변화된 건 있습니다. 뭐냐 하면, ‘나를 잊어버린다.’ 자기 자신을 잊어버렸어요. 삼층천에 올라갈 때 그 이야기하지요. 내가 삼층천에 올라갔는데 그가 누군지를 모르겠다.

내가 더 이상 나를 생각할 권한이 나한테는 없다는 거예요. 왜냐 하면, 내 인생이라는 것이 애초부터 내 인생은 없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었어요. 내 인생은 없는 거예요. 내 인생은 없다는 말이 사도의 편지 속에 이렇게 되어있어요.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로다. 이렇게 표현되어 있어요. 내가 사나 죽으나 내가 죽는 것, 사는 것에 대해서는 내가 신경 쓸 권한은 나한테는 없다. 내가 백년을 살아도 내가 백년을 살았다 할 권한은 없습니다. 내가 이십년 살면, “에게, 이십년만 살았어요.” 하고 항변할 권한도 나한테는 아예 박탈당했습니다.

이것을 나를 잊자. 하는 이 이야기, 내가 생각할 권한이 없다. 이걸 가지고 아까 다시 이야기해 봅시다. 사울이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죽일 때, 예수님은 이걸 뭐로 봤습니까? 자기에 대한 핍박으로 봤지요. 그리고 사울이 예수님 만나고 난 뒤에 달라진 게 뭐냐 하면, 바로 ‘나를 잊자.’라고 했잖아요. 이걸 갈라디아서 2장20절에서는 이것을 자신의 죽음으로 본 거예요. 자신의 죽음.

그러니까 이걸 두 개로 연결시키면 전에는 예수님을 핍박했는데 지금은 예수님한테 매일같이 죽어줘야 될 나, 생긴 나를 또 주께서 나를 죽여 버리지요. 나를 죽인 현장에 비로소 주님의 살아계심이 나타나는 겁니다. 내가 죽지 아니하면 내가 살아있는 게 되어버려요. 내가 나를 이렇게 없애버리면 주님이 살아있는 게 돼요.

그래서 중국의 마술 연극할 때 보면 옷을 여러 겹 입어가지고 한 바퀴 돌때마다 여자 무용수들이 옷이 바꿔지잖아요. 아주 신기한 재주를 부리잖아요. 옷이 열 개가 몇 초도 안 걸려서 바뀌잖아요. 내가 없어지면 주님 여기 있다. 짜잔~ 자기를 없애는 순간 주님의 삶이 자기로서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그 삶은 자기 삶이 아니기 때문에 항상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를 잊어버리게 되는 겁니다. 그런 식으로 달라지지요.

그런데 오늘 이야기요, 빛이 있었다. 그 다음에 사울아, 사울아, 하는 음성이 들렸다. 이것을 사람들은 보통 기적이라 한다 말이죠. 기적. 그러면 요 사건을 다시 한 번 조립하게 되면 무엇과 무엇으로 되어 있느냐 하면, 빛+음성 되어있지요. 빛이 있었다. 음성이 있었다. 이게 기적입니까? 뭔가 빛이 있었고 빛 속에서 음성이 들렸다. 이걸 만약에 기적이라고 본다면 사람들은 이 기적이, 이 시점에서 다시 한 번 정리해야 돼요. 요새 이상한 버릇이 되어가지고 설교하고 난 뒤에 다시 정리하게 되지요. 동영상 끊기면 다시 하듯이. 돌아서면 다 잊어버린다 하니 돌아서지 말지. 다시 하겠습니다.

제가 아까 이야기했지요. 사도바울이 기적을 설명하면서 이걸 뭐라고 했습니까? 결국 끄집어낸 것이 용서와 그리고 무엇의 만남? 죄의 만남이라 했잖아요. 그렇죠? 그런데 사람들은 기적을 할 때, 뭐로 정리하느냐 하면, 빛과 음성으로 자기 자신의 만남  이렇게 본다 말이죠. 제가 설명할 때는 죄와 용서의 만남으로 했다 말이죠. 왜냐, 핍박이라는 말을 했기 때문에. 너는 핍박하고 주는 용서하거든요. 찾아와줬다는 것은 용서인데.

사람들은 이렇게 기적을 죄와 용서로 보지 않고 이것을 하나의 윤리체제로 봐가지고 이건 생각 안하고 빛과 음성의 체제로 본다는 것은 인간의 죄와 용서를 알 수 있는 그런 세계관이 있는 게 아니고 인간에 있는 것은 무슨 세계관이다? 이걸 가지고 ‘물리적 세계관’이라 해요. 물리적 세계관이라 하는 것은 세상을 하나의 물리적 체제로 보는 겁니다. 과학 체제로. 물리적 체제로.

그러면 빛이 있었다. 하면 사람들의 궁금증이 뭐냐 하면, 그 빛의 강도가 몇 도였을까? 이리 보는 거예요. 룩스가 몇 룩스일까? 왜 그게 궁금한가 하면, 그런 빛과 똑같은 빛이 오게 되면 나는 주님을 만났다는 기적으로 간주하겠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음성이 몇 마디고 그 음성의 떨림이 어떻고 그 음성을 녹음해놨으면 어떤 남자의 음성, 그런 것이 궁금한 거예요. 그게 궁금하다는 말은 내 자신이 이미 물리적 세계만으로 세상을 보고 있다는 증거가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누가 기도해서 병이 낫다 하면, 기도할 때 손가락 지압을 어느 정도 누르면서 하면 되고 누르고 난 뒤에 시간상 몇 분 동안 기도하면 되고 기도하고 난 뒤 그 사람 머리에서 떼고 난 뒤에 몇 시간 뒤에 병의 호전이 있었으며 그 기도할 때 하나님이라는 단어는 몇 개 들어가고 주님이라는 단어는 몇 개 들어가며 단어를 쓸 때 표준말을 썼느냐, 경상도 사투리로 했느냐, 그걸 신경 쓰고 그걸 그대로 흉내 내고 모방하고 싶어 하는 거예요. 인간은.

안수 할 때 정수리에 하느냐, 앞면에 하느냐, 뒷면에 하느냐, 정수리로 할 때 소리의 톤은 어느 정도하느냐, 데시벨은 몇 데시벨로 하느냐, 이렇게 해가지고 그걸 모델로 만들고 싶어 하는 거예요. 주여! 주여! 믿씁니다! 침을 튀겨가면서 하는 게. 그러면 눌린 병자는 가만히 있는 게 아니고 미니까 흔들리잖아요. 흔들리니까 “주여! 성령이 오니까 흔들립니다. 감사합니다. 따라하세요. 따라하세요.” 이게 바로 물리적 세계에서 나오는 거예요. 기적이라는 게.  이런 물리적 방법이 왜 효과가 있는가 하면, 당하는 사람도 물리적 세계에서 나름대로의 어떤 기대하고 있는, 기적이 일어나는 현상에 사전에 짐작하고 있었던 거예요. 그걸 둘이 조율이 된 겁니다. “니 이런 거 원하잖아. 이런 거 해줄게.” 이리 된 거예요. 힘의 에너지를 가해가지고.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박수를 치게 되면 신경조직에 얇은 벽에 모이게 되니까 자꾸 쳐보세요. 열기가 온 몸에 퍼지면서 몸에 퍼지면 몸이 뜨거워지지요. 뜨거워지면 성령에 열 받았다고 보는 거예요. 불 받았다고 보는 겁니다. 박수치면서 예수 믿습니다! 이리 한다 말이에요. 지 혼자 열 받고 몇 분 안 되어 열 받았다 말이죠. 룰루랄라 말 좀 빨리 해버리면 방언이 터지고.

제가 분명히 말합니다. 기적이라 하는 것은 죄 모르고 용서 모르고 나는 핍박하는 자고 주님은 핍박한 자를 용서하시고 이거 모르면 기적 들어오지도 않은 사람이에요. 전부 다 사기꾼이라 보면 됩니다. 전부 다. 목사 자체가 사기꾼들이라 보면 돼요. 당신들 원하는 걸 해 줄 수 있다는 게 목사들의 시작이거든요. 그리고 목사가 이렇게 하게 되면 집사나 권사들도 지도 인간, 나도 인간, 나도 저 정도는 하겠다고 따라 하게 되면 똑같은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러면 목사가 믿음 있으니까 나도 믿음 있다. 목사가 구원 받았다. 그럼 나도 구원 받았다. 그럼 나처럼 못하는 사람은 그건 믿음 없는 사람이고 지옥 간다. 내가 불쌍히 여겨야지.” 이렇게 되는 거예요. 교회에서. 교회에서 갑자기 계급이 생겨버리지요. 뭐가 기적이냐, 기적을 말씀드립니다. 기적이란 나의 핍박과 주님의 일에 대한 훼방을 극복되는 현상이 기적입니다. 주님의 세계관, 주님의 홀로 하는 이 세계관에 대한 나의 반항과 나의 불평과 나의 항거, 항거를 누가 극복하십니까?

주님이 일을 하시면서 주님께서 나의 주님에 대한 훼방과 주님의 일에 대한 방해를 주께서 극복하셔서 찾아오신 현상이 바로 기적입니다. 뭐가 기적이냐, 선풍기 시원한 바람 나오는 것도 감사한 게 기적이죠. 왜? 선풍기는 에너지로 돌아간다. 이게 물리적 세계에요. 선풍기는 전기를 꽂으면 전기에너지가 있어서 돌아가게 되어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더워서 쩌죽어도 되는데 선풍기 마련해 주셔서 시원한 바람해주시니까 이것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특별한 배려요, 혜택이라고 보는 겁니다. 그게 감사될 때, 이게 바로 진정한 기적입니다.

왜냐 하면, 우리는 충분히 선풍기는 주님과 상관없이 ‘선풍기는 내가 전기 꽂아서 돌아간다.’ 라고 생각하는 이 세상이 인간이라고 여기는 나의 세계관을 주님께서 친히 극복하시고 그것이 바로 주의 일에 대한 훼방인 것을 깨닫게 하시면서 찾아오시는 그 현상이 바로 기적이다 이 말입니다. 문장은 길었지만 이해되시겠습니까?

세상만사는 사람들에 의해서 만들어졌고 사람들에 의해서 운영된다. 이것은 기적이 아니지요. 이것은 흔히 다 느끼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이 세상이라는 어느 것도 사람들에 의해서 움직인다고 하는 그 생각에 나도 동조하고 나도 동의하는데 ‘그게 아니야, 그게 바로 나를 핍박하는 것이야.’라는 그런 느낌을 가지고 용서하시기 위해서 찾아와 주시는 것을 느낄 때, 이게 바로  기적입니다.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사도바울이 예수님 만났는데 한 달 월급 얼마 올라갔습니까? 없지요. 뭐 달라진 게 있습니까? 결혼했습니까? 없지요. 주님의 기적을 받았지만 사도바울이 달라진 게 뭐가 있습니까? 나는 죄인이고 오직 주님은 나를 용서하시는 분이라는 것. 창세전에 이미 예정되어 있다는 그 사실을 알 뿐이죠.

세상적인 관점에서 뭐를 더 부자 되고 더 건강하게 되고 그런 거 없잖아요. 주의 복음 전하는 거 피곤하기만 하지 도움 되는 거 뭐가 있어요? 그러면서도 사도는 나는 하나님의 성령의 은혜 안에 기적 속에서 떠나지 않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본인이 알고 믿게 된 거죠. 내가 뭘 해도 내가 하는 일에 대해서 내가 평가내리거나 힘들다고 내가 뭔가 요구할 수 있는 입장이 못 된다는 것을 아는 겁니다.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돌아서면 다 잊어버렸지요? 사도바울은 예수 만나고 난 뒤에 달라진 게 뭐가 있습니까? 자기가 자기한테 요구할 권한이 있다? 없다? 없어졌다? 왜? 자기 인생이 아니고 누구 인생이기 때문에? 주님의 인생이기 때문에.

제가 어릴 때, 우리 어머니나 할머니들이 반짇고리 하는 게 있어요. 반짇고리 알아요? 실하고 가위하고 단추하고 담는 통 이걸 반짇고리라고 해요. 바지 뜯어지거나 이불 호청 할 때 요거 할머니들이 어머니들이 열어가지고 거기에 세트로 다 들어있는 게 이걸 반짇고리라고 해요. 고 반짇고리 안에 뭐가 들어있는가 하면, 옛날 우리 어머니가 옷 가게를 하고 그랬는데, 뭐가 들었느냐 하면, 고슴도치 같은 비슷한 게 있었어요. 바늘이 촘촘히 꽂혀있어요. 바늘 크기가 다 다르니까. 호청 꿰맬 것이냐, 와이셔츠 단추 달 것이냐, 양말 구멍 꿰맬 것이냐에 따라 바늘이 다 달라요. 이것이 예수 믿고 난 뒤에 달라진 거예요. 예수 믿고 난 뒤에 우리가 이런 모습이에요. 주님의 지적과 그리고 용서가 우리가 반짇고리에 있는 것처럼 바늘 꼽는 꽂이에 있는 것처럼 항상 주님 앞에 쑤시고 있다는 것을 느껴지는 것, 이게 기적입니다. 바늘=말씀이 되는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해서 보게 되면 우리는 늘 이렇게 주님 앞에 당해야 되고, 당해야 되는데 피가 묻어있는 피의 바늘로 피가 우리 속에 용서로 작용할 수 있도록 이렇게 늘 쑤셔주시는 겁니다. 이런 점에서 성도는 예수님의 증인이 되지요. 나 잘남의 증인이 아니고 예수님의 증인 되는 겁니다. 아까 재아한테 물어봤거든요. 연주회 마음에 드느냐고 물어보니까 좀 아쉽다고 했지요. 주님께서는 우리의 인생을 아무리 잘해도 늘 아쉽게 만들어요. 아쉽게 만들음으로서 우리로 하여금 세상이 내 뜻대로 안 된다는 것. 내 뜻대로 되고자 하는 생각조차도 이것은 잘못됐다는 겁니다. 내 뜻대로 되어야 된다는 그 생각자체가 아직도 자기를 잊지 못하고 있고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살겠다는 옛 품성이라는 것을 바늘로 콕 찍어서 이야기해주시는 겁니다. 이미 그 뒤에는 용서가 따라오는 거예요.

사람이 자기를 잊지 못하면요, 사람은 스트레스 받아요. 사람이 왜 잠이 안 오고 왜 불면증 걸리고 우울증 걸리느냐 하면, 자기 문제를 자기가 해결하려고 시도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제가 주일 오후 설교 때 그런 내용을 했거든요. 주님으로부터 “너, 아무것도 아니야.” 그 한소리만 들어도 다 고쳐질 병이에요. “너, 아무것도 아니거든.” 너 아무것도 아니라는 그 음성만 딱 들려오고 그런 내면의 소리만 들려온다면 그 자체로서 세상의 모든 문제는 순간 다 해결되어버렸어요.

사람이 어떤 문제를 갖고 있다는 것은 “내가 지금 이 정도로 무너질 인간이 아니지.” 이것 때문에 문제가 생기는 거예요. 주님께서 답변은 간단해요. “니가 뭔데?”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박 태환 자기가 체전에서 금메달 딴다고 하다가 3등, 얼마 전에 사격 대표 선수권에서 금메달 딴 권총의 사격의 신은 7등, 지금 국민들이 박 태환! 박 태환! 이러고 있으니까 자기도 뭐 된 줄 아는 기라, 아무도 주목하지 않을 때, 17살 먹은 고등학생이 금메달 두 개 땄잖아요. 사격에서. 항상 “니가 뭔데? 니는 나를 핍박하는 존재에 불과해. 내가 용서하지 않으면 니는 아무것도 아니야. 용서해 주니까 니가 지금 거머리처럼 살아가고 있지 용서 없으면 너는 진작 죽었어. 밥 먹고 숨 쉬는 게 어디 니 공로인 줄 아나? 용서의 공로지. 용서한다는 것은 니는 죄인이야.”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그런 뜻으로 살아라 이 말이죠. 시편51편에서 다윗이 이야기하기를 주께서 원하는 것은 상한 심령이라는 겁니다.

“뭐지? 뭔데? 내가? 아무것도 아닌데.” 내가 아무것도 아니다. 이렇게 되어버리면, 만약에 밤에 잠이 안 온다. 잠 잘 이유 없어요. 밤새도록 눈 뜨면 되지요. 나는 아무것도 아니니까. 양 한 마리, 양 두 마리, 이렇게 헤아리지 말고요, 나는 잠을 자서는 안 된다, 잠 잘 자격도 없다, 나는 잠을 자서는 안 된다 하고 벌써 5분 뒤에 자고 있어요. 나는 절대로 잠자서는 안 돼! 나는 잠 잘 자격도 없어! 하면 벌써 잠자고 있다고요. 하지만, 우리가 이렇게 살지 못하는 것은 주변이 가만히 두지 않아서 그래요. “니가 이 정도는 되어야지. 니가 이 정도는 되어야 너를 보는 사람들의 기대감을 충족시켜 준다.” 이런 것 때문에 굉장히 우리가 힘듭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세상은, 한 번 정리하게 되면, 이 세상은 누구 중심이다? 하나님 중심 아니지요. 나 중심 아니지요. 모든 인간이 다 싫어하는, 모든 인간이 다 싫어하신 분의 세상, 이게 세상입니다. 그 분 앞에서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아니라 하는 것을 사도바울은 빌립보서 4장11절에서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궁핍 한다 할지라도 이것은 내가 만든 궁핍이 아니기에 나는 그것조차도 받아들인다는 거예요. 왜? 나는 아무것도 아니니까.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이것은 뭐냐, 나는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만 살수 있다는 사실을 나는 알게 되었다.

내가 사는 것은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함께 있기에 주님이 살아있기에 내가 사는 것이지 나는 주님한테 붙어있는 우표딱지 같은 존재에요. 본 소포는 주님인데 그 소포가 있다는 것을 여기 주님과 함께 있음을 표시하는 표시로서 그냥 우표 같은 존재로서 그냥 붙어있는 존재입니다. 우표 자체가 소포물은 아니잖아요. 소포물을 이동하기 위한 이동의 표시로서 우표가 있는 것처럼 우리는 내가 나의 주인공이 아니다 말이죠. 나의 인생의 모든 내용은 주님이 다 압수해가고 있지 내가 따로 떼 내어가지고 요거는 나만의 인생이라고 따로 보따리 챙길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빌립보서 4장3절에 보면, 놀라운 말씀이 나와요.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 한 자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부녀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 그 이름들이 어디에 있다 했습니까?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다. 제가 지난주일 낮에 설교했잖아요. 생명책이라 하는 것은 나를 살리는 책이 아니고 누구를 기념하는 책이에요. 누구를 기념합니까? 주님을 기념하는 책이 곧 생명책이에요. 주님을 기념하기 위해서 모인 명단들이 생명책의 명단들입니다.

예를 들면, 윤봉길의사 기념탑 발기 위원회라고 나올 때, 주인공은 누굽니까? 윤봉길의사잖아요. 그 밑에 비석에 있는 것은 윤봉길 의사를 빛내기 위해서 사회의 인사들이 돈으로 헌금으로 참여했다는 표시가 비석에 나와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높이는데 우리가 주님을 높이는 자로서 부름을 받았다는 식으로 주님 기념책에 이름이 있으면 그것이 생명책이고 고 관계는 계속 영원토록 이어지기 때문에 그 관계가 그대로 이어지게 되면 그것이 바로 그리운 금강산이라, 그리운 천국이죠.

그리운 금강산, 그 가사에 보면 가사가 상당히 난해해요. 그 첫째 가사가 뭐냐 하면, 누구의 주재런가, 이 세상의 진정한 테마, 주제가 뭐냐 말이죠. 누구의 주재런가, 가사가. 사람들이여, 우리 민족이 불러야 될 테마는 금강산이다. 이런 뜻이에요. 한국 사람들아, 금강산 위주로 살자 이 말입니다. 누군가 생각해야 될 주된 개념이냐 하는 겁니다.

사도행전 다시 돌아가 봅시다. “사울아, 사울아, 니가 핍박하느냐” 아주 기이한 이 기적은 마지막 최종 분석하게 되면 뭐 + 뭡니까? 빛 + 음성이 아니고 죄 + 용서에요. 따라서 꼭 빛이 안 오고 병이 안 낫고 부자 안 돼도 월급 더 오르지 않더라도 십자가 자체가 거기서 죄인과 용서를 한데 이야기하면서 다가오는 게 그게 십자가 피다. 십자가의 피는 용서의 피고 나를 죄인으로 만드는 그 사건이 십자가인 것을 받아들이면 그 사람이 사도바울과 똑같이 지적을 받은 사람이에요. 그게 성령 받은 사람의 증거입니다.

내가 뭘 해도 죄인이니까 이 죄인 된 나에 대해서 드디어 신경을 뚝 끊어버리자. 신경 끊어버리고 눈을 뜨게 되면 주여, 오늘은 뭘 할까요? 오늘은 어떤 걸 연습할까요? 이것은 누굴 보기 위함이 아니고 누구한테 기대 맞추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사는 목적은 지금 내가 농사짓는 게 목적이 아니고 장사하는 게 목적이 아니고 이것이 피아노라면 이건 주의 일로서 하는 거예요. 바이올린은 그걸로 하는 거예요. 얼마나 잘 쳤나 안 쳤나 그것은 아까 했잖아요. 항상 아쉽다. 남들이 박수를 열렬히 쳐도 아이고, 아쉽다! 항상 아쉽고 그렇지요.

예수님이 하신 말씀의 당부가 인간들아, 내일 일을 생각하지 말라. 내일 염려는 내일하고, 내일 염려는 내일하라는 말은 다른 말로 하면 푹 자라 이 말입니다. 왜냐 하면, 내일 살지 안 살지는 내 손에 맡기고 내일 살아서 내일 누굴 만나고 만나야지. 그것은 나한테 일임해야지 내 소관이지 니 소관 아니다 말이죠. 내일 동창생 만나가지고 이바고 해야지. 그런 것은 하지 말고 그냥 내일 맡기고 오늘 푹 자라 말이죠.

사람은 뭐냐, 사람은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안개다. 참, 이거 생각해 보면요, 그동안 이 인간 세상이 우리를 얼마나 핍박해왔습니까? 얼마나 우리를 힘들게 만들었습니까? 안 살아도 되는데 우리가 살고 있어요. 미치겠어요. 안 살아도 되는데 우리가 지금 살고 있다니까요. 제가 마음 같으면 사라지고 싶지만, 주께서 살려주니 또 할 일이 있으니 살아가는 거예요. 이게 허무주의일까요? 허무주의 아니에요. 이게 허무주의 아니고 이게 바로 기쁜 소식입니다.

허무라는 것은 없다는 거잖아요. 복음은 있음입니다. 주님이 지금 있어요. 주님이 살아계셔서 있다. 증거 대라. 내가 여기 있잖아요. 내가 여기 살아 있잖아요. “아이고, 밥 먹고 살겠지” “아니, 주께서 밥 먹여 주셔서 살지요.” 그래서 제가 언젠가 설교했지요. 피동성, 수동성, “주께서 해주셔서 했다.” 항상 ~~했다. 하지 말고, 앞에 ‘당’자를 붙여서 우리는 항상 당하고 삽시다. 주님 앞에 당하고 살아요. 오늘도 커피 한잔 먹음을 당했고, 오늘도 배 먹음을 당했어요. 우리는 늘 당했어요. 우리의 자랑은 주님밖에 없습니다. 사실이 그렇기 때문에. 주님 앞에 설 때, 내가 자랑한다는 것이 주님한테는 용납이 안 되기 때문에 솔직하게 이야기해서 주님만 자랑할 수밖에 없어요. 그리고 지금 칭찬 받지만, 이 일이 언제 끝날지 모릅니다. “그만 해!” 하면 끝나는 거예요.

어쨌든 이 14절의 말씀은 하나의 산위에 있는 저수지처럼 이 물이 바깥으로 퍼지지요.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핍박하느냐” 하는 복음의 저수지가 되어가지고 이걸 쪼르르 해가지고 사도바울이 가는 곳에 이 복음의 물줄기가 온 밑에 있는 마을에 퍼지게 되어 있다. 이게 로마까지 가고 스페인까지 가고 유다와 사마리아 땅까지 퍼지는 거예요. 바울만 그런 게 아니고 여기 12사도 다 내려오지요. 12사도가 내려오는 요 과정이 굳어지고 동결되고 얼음이 되어버리면 이게 바로 성경입니다. 사도가 죽으면 더 이상 성경은 없습니다. 마지막 사도가 누굽니까? 마지막 내려온 사도가 사도요한의 요한계시록입니다.

그래서 성경의 내용은 이미 확정됐지요. 어디서 나온다? 모든 성경해석은 바로 어디서 나온다? 십자가 복음에서만 나오기 때문에 이 성경을 해석하는 설교자나 모든 이해하는 교인들은 오직 십자가 경로가 어떤 식으로 구체화 되고 퍼졌는가, 결국은 십자가로 되돌아가는 설교가 되어야 됩니다. 십자가로. 교회로 들어가면 안돼요. 여기 교회가 있는 게 아닙니다. 여기는 십자가 있어요. 교회도 없어요. 십자가 있습니다. 십자가 흘러가는 그 흔적과 자국이 교회일 뿐이지, 소포가 있는데 우표가 우표 자랑하면 안 되잖아요. 실제 소포 내용을 자랑해야지요. 소포 뜯어놓으면 우표 한 장 들어있습니까? 그건 말이 안 되잖아요. 예수님이 계셔요. 우리를 뜯어보면 예수님이 있어야지 우리 뜯어보면 내가 잘났다, 내가 잘났다, 들어있으면 안돼요.

어떤 사람은 뜯어보면 아주 녹음기 달려있어요. 나는 잘났다. 나는 잘났다. 삐삐 나는 잘났다. 안되잖아요. 그러면 뜯어보면 예수님께서 “나는 잘났고 니는 못났다. 니는 못났고 나는 잘났다.” 이게 안에 녹음되어 있어요. 이게 기적입니다. 이게 기적을 품고 사는 사람입니다. 복음을 품고 사는 사람입니다.

그 다음에 17,18절 읽어보세요.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저희에게 보내어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케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 세상에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게 그것도 자신 만만하게. 마치 사실인 것처럼. 그러나 사도는 진짜 사실 맞지요. 그러나 사도를 안 믿는 사람은 마치 사실인 것처럼 그렇게 들리겠지요. 그러나 성령 받은 사람은 우리가 현재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 것을 사도가 지금 앞서 이야기한 게 되지요. 이것만 유일한 현실이라고 인정하는 거죠.

왜 사도가 이야기합니까? 돌아서면 잊어먹으니까 또 이야기해볼까요. 저수지에서 사도는 뭐라고 해요? 저수지에서 물이 흘러 내려가는 밑에 민가까지 흘러가는 그 물줄기에 해당되면서 성경이 있다 했지요. 이 성경을 우리가 보고 있습니다. 물줄기에서 뭐가 내려옵니까?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죄사함을 믿어 거룩하게 되었고, 마지막에 무엇을 얻는다? 기업을 얻는다. 기업이란 용어는 사실 현대에서는 잘 안 쓰는 용어인데, 요거 이야기하고 10분 쉽시다.

기업이라 하는 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약속을 받을 때, 약속 안에 들어있는 내용이 기업이라는 거예요. 그것은 10분 쉬고 마태복음 하면서 설명 드리겠습니다.
 공은주 (IP:175.♡.147.179) 14-10-24 15:53 
대전140923-마17장14절(현실속의 천국)56강 - 이 근호 목사

마태복음17장봅시다. 바로 앞에 16장 28절에 보면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이렇게 되어있지요. 그러면 여기 있는 사람은 12제자와 예수님이고 그런데 다냐, 다는 아니고 여기 12제자 중에서 몇 몇은 뭔가 특별한 걸 보게 된다는 겁니다. 특별한 것을. 특별한 걸 보게 되는데, 그 특별한 것을 미리 주님께서 의미를 줘버려요. 해석을 했습니다.

그 특별한 게 뭐냐, 인자가 왕권을 가지고 오신다. 인자가 왕으로 오신다는 것을 볼 자가 있다. 그래서 신약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마태복음을 예수님을 왕으로 묘사했다, 이렇게 이야기해요. 마가복음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묘사한 거고, 마태복음은 예수님을 왕으로 묘사한 거고, 누가복음은 예수님이 선지자적 기능을 했고 이렇게 이야기해요. 칼빈이 이야기하기를 예수님은 왕이요, 선지자요, 제사장이다. 그 기능들이 마태, 마가, 누가 이렇게 각 할당이 되어있다. 이렇게 보는 겁니다. 요한복음은 신비주의적인 요소가 있기 때문에 빼버리고 마태, 마가, 누가는 서로 관련성 있는 구절들이 함께 섞여있기 때문에 텍스트가 텍스트 속에 섞여있기 때문에 이것을 서로 관련 있다 해서 관련 있다고 해서 공관복음이라 해요. 신학자들은 그렇게 이야기해요.

그래서 신학자들은 마태, 마가, 누가복음을 이렇게 펴놓고 이 구절은 이리가고 여기 없는 건 보태고 주욱 비평을 해놨어요. 그걸 양식 비평이라고도 하고 편집비평이라고도 하는데 그런 건 수준 높은 신학교에서 가르쳐줘요. 어쨌든 마태복음에서는 왕권을 가지고 온다. 그러면 왜, 변화산 이야기가 마태, 마가, 누가 다 있는데 왜 마태복음은 왕권을 언급하느냐, 누가복음 9장27절에 보게 되면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를 볼 자들도 있느니라” 하나님의 나라로 되어있지요.

그런데 마태복음에서는 왕권이라고 해서 특히 마태복음은 왕권을 언급했다. 왜 언급을 했느냐, 마태복음은 유대인들을 보고 한 복음이라서 왕권을 이야기했다. 유대인들은 왜 왕권을 원하느냐, 유대인들은 자기가 왕의 왕조이고 다윗의 유다지파니까 다윗이 왕이잖아요. 장차 하나님의 나라를 표현할 때, 유다나라가 왕이 되는 이 세상의 왕이 되는 나라가 메시아가 완성된 종결되는 나라를 봤기 때문에 그들은 왕의 모습으로 오는 메시아를 간곡히 기다렸다.

그래서 거기에 맞추어서 예수님께서 너희들 중에 왕권을 볼 자가 있느니라, 이렇게 이야기했다 이렇게 설명을 해요. 복음하고 별 관계없는 이야기인데. 그들은 신학자로 유식한 체 한다고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그런데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이거에요. 뭐냐 하면,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인자가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도 있느니라. 이게 죽기 전에 볼 자가 있느니라. 라고 해서 제가 여기 지금 해석하는 해석의 관점을 여러분이 한 번 들어보세요. 죽기 전에 왕권을 볼 자가 있다, 이 말이죠. 제자들 다가 아니고 제자들 중에. 그렇다면 이 의미는 뭐냐 하면, 예수님께서 죽어야 될 이유를 너희들이 죽기 전에 삽입시켜 주는 양식으로 내가 너희와 함께 있다는 뜻입니다.
 
그 증거가 인자라는 게 어떤 분이냐 하면, 인자라고 표현한 것은 죽어야 될 분이라는 뜻이 포함돼 있어요. 인자. 인자가 누구의 아들입니까? 사람의 아들이죠. 사람의 한계가 어디서 끝납니까? 사람은 하나님과 달라서 죽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인자라고 표현한 것은 인간이 아니면서도 인간처럼 죽어야 될 그런 하나님으로 묘사할 때 그걸 인자라고 자기를 스스로 부르는 겁니다. 안 죽어야 될 분이 죽어야 된다는 말은 너희의 죽음을 해결할 수 있는 분으로 왔다는 이야기에요.

그러면 여기서 우리에 대한 관계는 명확히 되지요. 우리가 예수님에게 나올 때, 그냥 맨 마음으로 나와서는 안 되고 어떻게 나와야 되는가 하면, “저 죽어요.”라는 마음으로 나올 때 비로소 예수님의 의미와 가치가 뚜렷하게 우리한테 새겨지는 겁니다. “이번 일이 성사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도와주세요.”하는 게 아니고 “저, 죄 때문에 죽습니다.” 하는 경우에만 예수님이 유의미, 의미가 있다는 겁니다.

무의미가 아니고 반대로 유의미, 의미 있는 존재로서 비로소 다가오는 겁니다. 그렇게 다가오게 되면 그 사람은 예수 믿고 난 뒤에 무엇을 버리는가 하면 세상 욕심을 버리게 되겠지요. 죽었다 살아났으면 얻을 거 다 얻었는데 새삼스럽게 무슨 또 세상 욕심을 얻겠습니까? 물에 빠진 사람 건저 놓으니까 내 보따리 내놔라 식으로 그런 식으로 하면 안 되잖아요.

항상 예수님을 대할 때, ‘예수님 아니면 저 죽어요.’ 라는 그런 마음으로 다가올 때 비로소 예수님과의 의견이 소통되는 겁니다. 통하는 거예요. 여러 번 이야기했는데 또 이야기합니다만. 마르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자기는 섬겼지만 오해를 했지요. 그러다가 주님께서 진짜 유의미, 의미 있는 분으로 이제는 알릴 때가 됐는가 싶어서 오빠를 죽여 버립니다. 죽이니까 아니나 다를까 자매가 발칵 뒤집어졌지요. 요새 말로 주님 멱살 잡고 흔들었지요. “내 오빠 살려내란 말이야.” 하고 건드린 거와 똑같은 거예요.

왜 그럴만하냐 하면 오빠가 곧 죽어요, 라고 오빠가 병들었을 때에 이미 기별을 통보를 했거든요. “오빠 죽어요. 오빠 살려주세요.” 이렇게 할 때에 주님께서 “그래, 알았다. 알았어.” 이쪽에서 하는 말이 “알았으니까 언제 오실 건데요?” “죽기 전에 안 갈게.” 이리 된 겁니다. “죽기 전에는 안가” 물론 그걸 몰랐기 때문에 자매는 아주 실망했습니다. 죽기 전에 오실 줄 알았지요. 병들었을 때.

지난 낮 설교에 제가 이런 이야기했잖아요. 번지점프 할 때에 막상 절벽에 끝부분에 서기 전에는, 자신 있습니다! 하다가 마지막에 절벽에 서게 되면 주춤 뒤로 물러나잖아요. 물러나게 되면 뒤에서 모자 쓴 조교가 스윽 앞으로 밀지요. 밀게 되면 뭐가 보이지요? 나락이 보이고 절망이 보이지요. 주님께서 자꾸 엉덩이를 미는 거예요. 우리는 “아이고, 겁나라. 이런 상황은 기피하고 싶은데.” 자꾸 자꾸 밀어요. 쭉 쭉 민다고요. “봐라, 너의 절망을. 너의 마지막 모습을 보란 말이야. 니가 얼마나 아무것도 아닌 존재인가를.” 한 번 보게 하시는 거예요.

그러면 결국 우리는 뭐라고 합니까? “주여, 살려주세요.” 결국 살려달라고 하지요. 주님께서는 그런 식으로 우리의 파면의 자리를 눈으로 목격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우리를 몰아세우십니다. 그러면 우리의 파면을 우리 힘으로 그 파면을 점프해서 뛰어넘을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우리 힘으로는 안 되지요. 왜, 안 되는 것만 보여주니까. 이번 일은 절대로 니 힘으로 안 된다는 것을 다 보여주니까. 그렇게 되면 우리는 무엇을 나타냅니까? 지난 시간에 이야기한 것처럼 그러면 우리의 본색을 드러내지요. “주여, 기적을 주옵소서.” 그런데 그 기적이 뭐다? 내 뜻대로 이루어지는 기적이죠.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 우리가 알고 있던 기적인데 정작 주님이 주신 것은 뭐냐 하면, 그게 바로 너가 스스로 찾아내지 못한 너의 숨겨진 죄였다. 주님을 사랑한 게 아니고 사실 그동안 주님을 철저하게 이용해 처먹으려는 그런 심보로서의 예수를 믿었다. 그것이 들통 나게 만드는 겁니다. 하지만 그 죄는 이미 내가 예수의 피로 씻어줬다. 죄와 용서의 만남의 기적입니다. 나의 허점, 나의 한계, 나의 본색, 이런 것을 노출시켜 가지고 나로 하여금 용서받은 자의 모습은 이처럼 자기의 어떤 일이 일어나도 우리는 거기에서 반항해서는 안 되는 존재인 것을 깨닫게 하는 겁니다.
     
죽기 전에 내 왕권을 볼 자가 있다, 이렇게 이야기함으로서 앞으로 예수님은 이 제자들과 함께 죽음으로 내몰리는 겁니다. 베드로, 야곱, 요한이 뭡니까? 제자가운데 임원진, 지도자급이잖아요. 앞서 있는 사람이잖아요. 앞서있는 사람을 예수님의 왕권을 보여준다는 말은, 이렇게 설명하면 제일 쉽겠네요. 여기 산이 있고 절벽이 있고 또 절벽이 있다 말이지요. 노르웨이의 피오르드 협곡에 보면 아주 절벽이에요. 수백미터 절벽이 있답니다. 800, 900미터 절벽이 있다는 거예요. 여기는 빙하가 녹아 흘러서 찬물이 흘러서 여기서 건너갈 수가 없는 거예요. 건너갈 수 없는데 예수님께서 여기 서가지고 12제자에게 하는 말이 너희들 가운데 죽기 전에 왕권을 볼 자가 있다, 이 말은 주님께서 독수리 날개에다가 12제자를 얹고 이제는 난다는 거죠. 날게 될 때, 어떤 인간도 날아본 적 있습니까? 베드로가 물에서 걸어본 적은 있지만, 날아 본 적은 없지요.

이제는 죽음의 계곡을 나는 거예요. 날면서 우리는 분명히 떨어져야 되잖아요. 땅이 없으니까. 떨어져야 되는데 예수님의 왕권이란 날개에 실려서 죽음을 그냥 타넘을 수 있는 경험을 그들은 미리 하게 될 자가 있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 이 이야기가 결과로 들으면 기분 좋은 이야기인데 과정적으로 들으면 어떤 이야기입니까? 니가 감당 못할 죽음을 너희는 나 때문에 맛보게 될 것이다.

인간들은 이렇게 물에 빠져 죽어서 사라져야 되는데 주님은 제자들과 함께 갔다가 빠져 죽고 사흘 만에 살아나서 왕이 되는 이 세계에 도달하게 될 때, 그걸 미리 당겨서 이야기하게 되면 여기서 너희들 중에 왕권을 가지고 이쪽에서 이쪽으로 건너뛰는 것을 미리 체험할 자가 있으리라, 이렇게 한 겁니다. 사도바울은 어떻습니까? 요런 이야기를 하면서 아까 사도바울이 이야기했던 글에서 제가 전 시간에 마저 이야기하지 못하고 남겨 둔 게 있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유업’이라고 했지요. 유업에 대해서 이야기하겠습니다.

유업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구약 전체를 이해하는데 핵심요소가 된다는 것을 생각하셔야 됩니다. 쉬운 말로 유산이라고 해요. 유산보다 더 좋은 노골적인 말이 상속입니다. 상속이라는 말이 제일 마음에 와 닿지요. 상속을 준다는 겁니다. 상속은 누구는 안줘요. 절대로 종한테는 주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하갈에서 나온 이스마엘은 죄송한 이야기지만 하늘나라 못 갑니다.  왜냐 하면, 종이라는 이유 때문이 아니라 아들이 아니라는 이유 때문에. 아들이라도 종한테 주면 되지 않느냐, 절대로 줄 수가 없어요. 왜냐 하면, 그 상속 자체가 하나님 아버지가 아들에게만 주는 상속이기 때문에. 아들이 아니면 어느 누구도 그걸 받을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종이 된 자를 무엇으로 바꾸는 작업이 먼저 되지 아니하면 상속이 없어요. 종에서 아들로 바꾸는 작업이 일어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이 주신 상속, 천국을 이어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종에서 아들 될 때, 너가 현재 아들인 이유는 어떤 신분이었는데 지금은 이런 신분이라는 것을 그 경로를 밝히 보여주기 위해서 집어 들어가는 그런 방식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율법에 속하다가 지금은 율법에 속하지 않고 성령에 속하면 그것이 바로 요 경로를 말해줍니다. 나는 어디에 속했다가 지금 뭐다. 율법은 죄의 종으로 만들어요. 하나님의 법은 인간을 저주와 죄의 종으로 만들어버려요.

그런데 성령을 받아버리면 성령이 누구의 영인가 하면 예수님의 영이거든요. 예수님이 아들이잖아요. 성령을 받아버리면 누구도 아버지를 예수님만 불렀던 예수님만 부를 만한 자격이 있는 예수님만 불렀던 아버지가 그 아버지가 이제는 예수님의 아버지가 아니고 나의 아버지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아버지, 아버지 한다고 다 하나님의 아들로 간주하는 것이 아니고 종과 아들의 그 경로를 유지하고 있어야 그게 진짜 아들인 겁니다. 전에는 우리가 이러 이러한 자인데 지금은 성령 받아가지고 율법에서 벗어났습니다. 이럴 때 아들인 거예요. 전에는 십일조 하라, 주일 안식일 지키라는 그런 율법의 종이었는데 지금은 십일조건 안식일이건 어떤 법에 얽매이지 않는 사람 되었습니다. 하는 자만이 아들인 거예요.

그래서 교회가 십일조, 안식일, 주일 성수하는 이것은 배나 지옥백성 만들기 위해서 마귀로부터 그런 사주를 받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배나 지옥백성 만들기 위해서. 지옥 가는 사람에게 더욱더 속도 가미하기 위해서. 지옥 가는 엔진에 엔진을 더 하나 다는 거예요. 그게 십일조고 주일 성수하라 하는 거예요. 거기다가 모자라가지고 4대 절기, 부활절, 맥추절, 추수감사절, 크리스마스, 고 때 특별 감사 헌금하라고 봉투 돌리고 하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배가 아니고 곱빼기 4배나 더 지옥백성 만드는 거예요.

아들은 태어났다고 하나님이 나를 만들었다고 아들이 아니에요. 아들이 아니고 어디를 거쳐서 와야 돼요. 어디를 거쳐서 온다? 악마의 종을 거쳐 와야 돼요. 거쳐서 온 사람만이 뭐가 악마인 줄 알아요. 악마의 소식이 뭔 줄 알고. 이걸 거치지 않으면 누가 악마인 줄 몰라요. 자기가 천당 가는 줄 알고 있다고요. 이걸 미국 버지니아에서 해야 되는데.

다시 이야기해봅시다. 유업이라 하는 것은 아들만 주는 거예요. 그래서 아브라함에게는 이 유업이라는 말이 처음 주어졌거든요. 니 아들이 하나님의 유업을 받을 것이라 할 때, 아들만 이삭만 달랑 주는 게 아니고 먼저 뭘 해라? 종으로부터 아들을 태어나게 해요. 그가 누구냐 하면, 이스마엘을 태어나게 합니다. 이스마엘 태어나고 이스마엘과 이삭의 차이점을 보게 만들어요. 이스마엘은 종의 아들이고 이삭은 약속의 아들이에요. 약속의 아들은 아버지가 이 땅에 있다? 없다? 이 땅에는 아버지가 없어요. 약속의 아들이기 때문에. 한 쪽은 그 아버지의 엄마는 하늘에 있고 이쪽은 지상에 있는 아버지, 엄마가 있어요. 이 종의 자녀는.

그래서 사람은 육에서 태어난 것은 육이고 영으로 태어나야 하늘나라 가는 겁니다. 아버지 나를 낳으시고 어머니 나를 기르시고 그 말은 좋은데 유업이 없어요. 하늘나라 천국을 못 가요. 이 땅에 살다가 죽어버려요. 자, 그러면 그 다음 문제입니다. 종은 안 주고 아들만 준다. 그런데 아들인데 왜 주느냐, 이 상속이라는 게 하나님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아들에게 일임했습니다. 일임하면서 상속하면서 일임하는 거예요. 그래서 천국을 받는 우리는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상속하는 그 방식이 그대로 그 사람에게 재현될 때만 그 사람은 상속 받는 자가 되는 겁니다. 그걸 아주 법칙화 시킵시다.

“예수님과 우리 사이는 어떤 사이입니까?”라고 저 보고 물으면 “아버지와 예수님 사이가 그대로 우리한테 재현되고 반복되는 사이입니다.” 라고 하면 돼요. 그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유대인들은 그들은 전혀 하나님을 모르고 예수님을 몰라요. 왜냐 하면, 그들은 하나님과 자기와 그대로 다이렉트로 직접 연결했기 때문에 그래요. 하나님이 나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자비하시니까 내 자비가 있고 하나님이 고상하시니까 나도 고상하고 하나님을 믿어요. 아까 처음에 했지요. 하나님 중심이라고. 하나님 믿고 하나님 믿는 내가 있으면 하나님하고 좋은 관계니까 죽으면 하늘나라 간다. 이렇게 생각한 것이 바로 유대인들입니다. 그러니 뭐가 빠졌지요? 하나님이 따로 아들에게 줬다는 아들 관계가 거기에 모르지요. 누락되어 있지요.

그러면 우리 생각에는 하나님과 나하고 직접 하나님 나라를 만드시니까 하나님을 믿고 뒤늦게 예수님 이야기했으니까 거기에 뒤늦게 밥상에 숟가락 하나 얹는 것처럼 예수님 이야기를 넣으면 되지 않겠느냐, 이렇게 생각하는데 이것은 더하기가 되지요. 하나님 + 예수님 되잖아요. 그런데 실제로는 그 예수님이 이 땅에 와서 누구한테 죽었어요? 하나님 믿는 사람한테 죽었지요. 아까 사도바울이 뭐라고 했습니까? 사도바울이 하는 말이 니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예수님이 했다 했지요. 그러니까 뭐냐 하면, 여기에 플러스 첨가될 이야기가 아니다 말이죠.

인간이 알고 있던 하나님은 애초부터 하나님이 아니고 마귀였어요. 악마였어요. 악마에게 사람들은 하나님이라고 신이시여, 여호와라고 불렀던 겁니다. 인간은 자기를 만든 사람이 누군 줄 몰라요. 모르지만, 그들은 하나님이란, 하나님, 하느님, 알라, 부처, 공부 지 맘대로 용어를 최고 절대적 존재, 지 맘대로 만들어가지고 집어넣은 거예요.

그러나 실제 하나님은 이 땅에 방문했습니다. 그 분이 누구지요? 예수님이 하나님이에요. 그 분이 하나님에 대해서 모든 걸 독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외에는 누구도 아버지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거예요. 요한복음1장18절에 보면, 아버지께서 자기 안에 품속에 있는 독생자만 독생자를 드러냈지만 세상은 어두움이기 때문에 그 빛으로 오신 분을 알아봤다? 못 알아봤다? 그 누구도 못 알아봤어요. 우리도 못 알아볼 뻔 했는데 예수님의 영이 와가지고 이제 그 숨겨진 비밀이 우리한테는 공개가 되니까 “내가 바로 그 하나님의 아들이다. 내가 중보자다. 아버지가 나한테 약속한 모든 것은 내가 이제 성령이 오게 되면 너에게 상속시켜 줄게.” 이리 되는 거예요.

그동안 유대인들은 성경을 열심히 연구했습니다만, 그들은 율법을 연구했지요. 율법을 연구하니까 그들은 율법의 종이 된 겁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우리를 종 되게 만든 율법요소를 주님께서는 그것을 공개하지요. 고린도전서15장55~57절에 보게 되면,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들어보니까 많이 어렵지요? 대충 감이 안 잡히지요. 지금 사도가 무슨 이야기하느냐, 이런 대목 할 때마다 우리가 느끼는 것은 사도가 우리를 꾀려면 알고 쉬운 말로 꾀어야 되는데 사도는 주님이 시키는 대로 말하기 때문에 누구 꾀고 말고 할 것 없이 자기 권한이 아니에요. 그냥 외칠 수밖에 없는 걸 합니다.

그게 뭐냐 하면, 모든 인간은 사망이 표적이 됩니다. 사망은 마귀지요. 사망을 죽이는 권세가 마귀니까. 마귀가 양궁선수에요. 양궁선수고 또는 트랩 사격선수가 돼가지고 쥐고 있다가 공중에 뭔가 진흙으로 만든 게 떠요. 뜨면 진흙이 탁 깨지지요. 이거 우리나라가 세계대회에서 동메달 땄는가 그래요. 아시안 게임에서 단체전에서 은메달 땄는데. 갑자기 접시 같은 점토가 날아오면 쏘는 거 있잖아요. 마귀가 우리가 보면 탁 쏘는 거예요. “니 그러다가 굶어 죽는데이.” 쏘는 거예요. “니 그러다가 수치스러워 하다가 죽는데이.” “니는 협박당하니까 자살해서 죽어야 돼!” 이런 식으로. 매일같이 우리는 시달리고 불면증에 걸리고 하는 것이 뭐냐, “이러다 내가 죽지.” “이러다가 내가 우사스럽게 죽지.” 항상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떠나지를 못하는 거예요. 세상은 악마가 즐기는 사격장이에요. 트랩 사격장이에요.

그런데 마귀가 쏠 때 사격하는 총탄이 뭐냐, 율법이에요. 철커덕! 율법을 장지해가지고 어떤 인간도 하나님의 법에 의해서 죄인 아닌 자가 없으니까 죄 값은 사망이라, 반드시 죽어야 되는 거예요. “니가 남한테 피해를 입혀? 니는 사형이야. 너는 죽어야 돼!” 로마서 1장에 보면 사형에 해당되는 사람들의 성격 행동들이 나와 있어요. 웬만한 사람 다 걸립니다. 분내고 부모 공경 안하고 수군수군하고 전부 다 걸리는 거예요. 전부 다 마귀의 먹이 감이야. 어쨌거나 저랬거나 예~잇하고 쏘는데 이게 안 죽네. 그걸 가지고 고린도전서에서는 뭐라고 하는가 하면,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 사람은 우리 성도한테는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어요.

주님한테 이루어진 그 효과가 우리 안에 같이 있으니까 예수님이 죽음에서 살아났잖아요. 죽음에서 살아난 그 능력이 우리한테 있으니까 쏠 게 없잖아요. “율법아, 니가 쏘는 게 어디 있느냐” 쐈는데 분명히 유령인지 귀신인지 모르겠어. 쐈는데 총알이 그냥 날아가 버려. 해당사항이 없어. 우리한테는.

“십일조도 안하고” 쏘았는데 십일조 안한 사람 천국가고. 강도가 십일조를 얼마나 했어요? 얼마 내고 천국 갔습니까? 거지 나사로가 얼마내고 천국 갔습니까? 천국 가는데 율법, 십일조, 주일성수가 아무짝도 그게 쓸모가 없고 필요가 없어. 그러니 목사들이 자기 사업체 꾸리기 위해서 자기 돈벌이 해먹기 위해서 지옥 갈사람 만 쏘잖아요. 율법으로 지옥 갈 사람만. 그중에 이미 천국 간 사람한테는 “이 사람이 무슨 소리 하는데?” 이리 하고 있고 지옥 간 사람은 “예, 예, 예” “맨탈, 맨탈, 맨탈 강해질지어다.” 하면 “아멘.” 이러고 있다 말이죠. 벌벌 떨고.

어떤 장로가 감사헌금 안 해서 벌 받았다, 하니까 ‘아이고, 감사헌금 해야지.’ 그 장로가 회개하고 감사헌금 하니까 나중에 축복 받았다, 하니까 ‘아이고, 나도 해야지.’ 이렇게 되는 거예요. 이게 뭡니까? 죽음이 두려워서 종노릇 하는 모습이죠. 히브리서2장15절.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그런 모습이에요.

상속이라 하는 것은 아브라함에 있어서 상속이라 하는 것은 뭐냐, 하나님의 의입니다. 의는 행함으로 의를 받을 수 있다? 없다? 일체 모든 행함으로 의가 되지 않고 의라 하는 것은 의를 가져다 준 사람을 믿으면 되지요. 그러면 의를 가져다 준 사람은 그 당시에 이삭이지요. 이삭은 하나님이 준비한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잡을 때, 수풀에 뭐가 있습니까? 하나님이 친히 준비한 양이 있었죠. 이삭 잡을 때, 하나님이 멈춰라! 하시고 뭘 대신 잡게 했습니까? 양을 잡아서 대신해서 그래서 이삭이 살아났거든요. 창세기22장에 나와요.

그러니 이삭 자체가 뭐냐, 죽은 우리를 마귀에 의해서 죽고 율법으로 죽은 우리를 대신한 이삭이 아브라함의 상속자가 되지요. 그렇지요?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자기가 상속할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 “그냥 상속해줄게.” 가 아니라 우리를 어떻게 해요? 우리로 하여금 율법에 의해서 죽게 만들고 그 다음에 예수님의 사랑의 용서와 성령에 의해서 다시 살아나는 사람에게만 예수님의 자신의 모든 이루어 놓은 모든 영생을 그 사람에게 다 그냥 주는 참여케 해서 주시는 거예요.

유대인들은 그걸 알지 못하고 율법 지켜서 내 구원은 내가 알아서 하겠다, 이리 나온 겁니다. 그러나 세리와 창기도 천국 간다는 주님은 그게 아니고 내가 공짜로 주게 되면 그걸로 간다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상속 같아요. 꼭 상속. 상속이니까 내가 한 겁니까? 부여받은 겁니까? 부여받은 거예요. 누가 줬습니까? 아버지와 아들 관계가 우리에게 준 거예요. 아버지와 아들에게 있었던 그 완성이 우리에게 그냥 밀려온 거예요. 만약에 바닷가에 걷다가 조개를 하나 주웠지요. 이 조개는 자기가 공장에서 만든 게 아니잖아요. 조개를 무슨 공장에서 만들어요? 바닷가에 파도에 밀려온 거잖아요. 하얀 조개. 이 조개가 하나님의 상속이 되고 하나님의 성령이 되고 영생이 되고 천국이 되는 겁니다. 천국은 줍는 거예요. 거저주운 거예요. 우리의 영원한 신분도 영생도 목숨도 그냥 주운 거예요. 아무 한 것도 없이.

그렇다면 예수님의 왕권이 어떤 모습이냐 그걸 봅시다. 그래서 제가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은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은 예수님과 아버지 사이에 있었던 약속에 의해서 상속될 자에게만 그냥 공짜로 주어지는 것이지 그 외에는 주어지지 않습니다. 상속될 자에게만. 더 깊이 들어가면 다른 주제가 되기 때문에 요것은 이만큼만 하고 아브라함의 약속에 의해서, 아브라함이 이 땅에 있다는 말은 아브라함은 믿는 사람은 저렇게 믿는다는 것을 모델로 보여주기 위해서 아브라함이 있는 거예요. 그래서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는 겁니다.

아브라함은 아무것도 행함이 없이 아무것도 없이 그냥 의롭다 함을 받은 거예요. 그렇게 받은 사람입니다. 조개를 하나 주운거지요. “니 그 조개 얼마 주고 샀어?” 이 질문은 잘못 된 거예요. “당신은 그 기도를 얼마나 했기에 구원받았어?” 잘못된 거예요. 기도라는 행함, 헌금이라는 행함, 어떤 예배 참석도 없이 어떤 것도 없이 그냥 “아이고, 반짝 반짝 신기해라.” 하고 주운 겁니다. 바닷가에서 하늘의 별을 줍듯이. 그냥 주운 거예요.

그러면 마태복음17장 1절에 보면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이런 체험도 그냥  주운 거잖아요. 사전에 제자들이 연구했습니까? “아이, 예수님 보여주세요. 보여줘! 보여줘!” 그래서 예수님께서 “아이고, 씨~ 이러면 안 되는데.” “보여줘!” “에이, 그래 산에 올라가자.” 이리 보여줬습니까? 전혀 예상 못한 거예요. 심지어 거기에 수행원까지 있는 줄 몰랐지요.

거기에 누가 나타났습니까? 예수님이 나타났는데 거기에 모세와 엘리야, 모세는 BC1440년전 사람이고 엘리야는 그냥 900년경으로 이리 봅시다. 이 나이 차이가 얼마입니까? 540년이잖아요. 540년은 하늘나라에서 맞먹네. 이 성계하고 일제시대 초반에 있었던 사람 유관순하고 맞먹는 셈이 되는 거예요. 이것은 임진왜란 일어나기 전에 광해군하고 지금 우리하고 맞먹으면 되겠네요.

하늘나라에는 시간은요, 우리의 몸이 있을 때만 시간이 흐르지 몸이 없어지면 시간은 흐르지 않습니다. 시간은 의미 없어요. 지금 엘리야와 모세는 몸이 있는데 다른 몸이에요. 예수님의 왕으로 함께 있는 왕의 효과를 받을 때의 몸입니다. 모세가 시내산에 몇일 있었습니까? 40일 있었잖아요. 그런데 모세의 몸은 번들번들해. 너무나 해같이 빛났어요. 모세의 얼굴이. 주님 만나고 지상에 내려오니까 나중에 늙어죽지요. 결국 늙어 죽잖아요. 우리가 당기고 지우고 하는 이 몸은 가짜라고 생각하세요. 가짜. 가짜 또는 각질 또는 게 껍데기 이 정도로 보시기 바랍니다. 그냥 속사람 따로 있고 그저 음식쓰레기 통에 버려야 될 것을 우리가 지금 있는 거예요. 그래서 권사님이 염색을 안 하시는 거예요. 저는 복음 때문에. ㅎ

예수님뿐만이 아니라 모세 엘리야가 전부 다 해같이 빛나는 거예요. 갑자기 세분의 해가 떠버렸어요. 이걸 제가 이렇게 이야기했는데, 피오르드 협곡 다시 한 번 그려봅시다. 여기 절벽이 있고 여기 절벽이 있다. 이 밑에는 무서운 물살이 흐른다. 이건 죽었지요. 건너갈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뭔가 붕 난다 말이죠. 여기에 독수리의 날개처럼 주님께서 왕권을 쥐고 붕 날게 되면 죽음을 초월한 거예요. 율법도 없고 사망도 없어요. 예수님과 함께 있다는 단지 그 하나 이유 때문에 어떤 율법도 정죄할 수 없고 어떠한 마귀의 시험도 우리를 뺏을 자가 없어요.

요한복음10장에 보면 내 음성을 듣는 자를 어떤 권세자 어떤 악마도 내 양을 그들에게 빼앗기지 않겠다, 내 음성을 듣고 나를 따르는 자는 절대로 세상 어떤 것에 빼앗기지 않는다. 영원히. 주님이 꽉 쥐고 있다는 거예요. 이걸 믿으셔야 돼요. 쥐고 있으니까 그 대표자가 엘리야, 모세잖아요. 분명히 죽었지만, 그들에게 껍데기는 없어졌고 진짜 그들은 주님과 함께 있는 겁니다.

그런데 이 엘리야와 모세가 지금 공중을 붕 날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요. 변화 산에서. 하지만 그들의 실상은 어떠했습니까? 그야말로 비참했지요. 3년6개월 동안 비 안 오는 곳에서 고생했고 왕한테 욕 얻어먹고 밉상 받고 엘리야 체포 작전해서 걸리면 엘리야가 수배 당했어요. 모세는 해주면 원망이 들어와요. 원망. 하면 무조건 원망이라. 돌아가자. 애굽으로 돌아가자. 모세는 물러가라. 물러가라. 물러가라. 모세가 오죽 답답했으면 “하나님이여, 내 백성도 아닌데 내가 신경쓰려하니 힘들어 죽겠습니다. 하나님 백성인데 내가 왜 고생해야 됩니까? 삐졌습니다.” 이리 나오는 거예요. 얼마나 힘들었으면. 나중에 알았지만 그렇게 이야기하는 게 껍데기에요. 그게 피부 각질이에요. 발에서 무좀 떨어져 나간다고 해서 그걸 애달아하고 슬피 우는 사람 있습니까? 아이고 시원하다 하고 발에서 먼지 떨어지고 무좀 떨어지면 시원하잖아요.

예수님께서 나사로 죽었다고 하니까 죽어서 우니까 주님이 그걸 보고 울었어요. “나사로는 살았느니라. 왜 자꾸 우냐, 이 믿음이 없는 것들아! 울지 마라. 뭐 잃어버렸나? 오빠가 죽었어? 지금 오빠는 살아있는 거야.”  “못 믿겠습니다. 못 믿겠습니다.” “예이, 씨~ 나사로야, 잠깐 나와 봐라.” 잠간 나오라니까 나사로가 벗은 껍데기 또 짊어지고 나오는 거예요. 살다가 늙어서 껍데기 벗고 지 본 자리에 또 돌아가고. 세상에 오빠만 군대생활 두 번 했어요.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편히 쉬고 있는데. 편히 쉬는 것을 깨워가지고 다시 와가지고 실컷 고생하고 세금 바치고 농사짓고 아이고! 세끼 챙긴다고 그 힘든 일을. 산다는 자체가 부질없는 짓이에요. 그래서 저는 서울 방실이 노래를 좋아해요. 부질없는 것. 그냥 다 잊고 술이나 한 잔 하면서 세상시련 잊으시구려.

지금은 엘리야, 모세에게 함께 있을 때는 잊고 자시고 할 것 없이 베드로가 완전히 반했어요. 뿅 갔어요. 제가 아까 시간에 이야기했지만 뭘 잊어버렸습니까? 자기를 나를 잊어버렸어요. 예수님의 왕권 앞에서 천국 앞에서 하나님의 나라 앞에서 자기를 잊어버렸습니다. “주님, 저 어때요?” 이게 안 나와요. 꼭 천국을 모르는 인간들이 천국 가서 내가 뭐하고 사나? 당구 칠까? 골프 칠까? 천국을 몰라서 그래요. 몰라서. 여호와증인이 천국을 모르기 때문에 천국이라는 푸른 잔디밭 있고 하는데 그 잔디밭 누가 가꾸겠어요? 심부름꾼 일꾼들 따로 있는가? 물이 나오고. 그렇지 않아요. 천국은 물이고 불이고 없어요. 무조건 물, 불 찾을 게 아니고 주님만 쳐다보면서 모든 걸 잊어버려요.

“여기가 좋사오니 제가 초막 셋을 지어드리겠습니다. 빌라 3채 지어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얼마나 잊었느냐 하면, 이게 6채가 아니고 3채에요. 3채니까 누구 빌라는 없다? 자기들 빌라, 제자들의 빌라는 없는 거예요. 없어도 좋습니다. 하는 거예요. 이것은 조용필 팬클럽이라. 제국의 아이들 팬클럽. 완전히 비가 오면 더 즐거워. 자학적인 쾌감을 느끼니까. 오빠들 보세요. 비 맞고 있잖아요. 일본에서는 돈 들여서 오고. 완전히 팬 다 됐어요.

그래서 베드로가 여기에 있는 게 좋사오니, 여기 있기는 뭘 있어. 여기는 니가 올 때가 아닌데. 엘리야도 고생했고 모세도 고생했는데 너희들 아직도 고생 멀었어요. 시간도 안됐는데 벌써 들어오고 난리야. 빨리 우리 할 일 해야지. 졸지에 잠깐 보여주고 사라져버렸어요. 사라지니까 계곡과 계곡 사이에 사라져버리니까 실감나는 현실로 돌아오지요. 풍덩! 유대인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두개인들이 죽이려고 덤벼드는 이 냉혹한 현실. 이 엄연한 현실. 제자들은 이 둘 중에 어느 것이 현실이냐를 이제는 갈등을 유발하게 되었습니다. 꿈이었나? 착각이었나? 분명히 예수님은 예수님이었는데.

그러나 실제 예수님은 잠깐, 잠시였고 실제로 지금 느껴지는 것은 이 피부에 느껴지는 것은 주님이 체포된다는 소식. 그러니까 베드로가 어떻게 했습니까? 3번씩 모른다고 부인하죠. 나는 살고 봐야겠다. 이 껍데기는 일단 움직이는 것은 살려야겠다. 그래서 제가 아까 처음에 이야기했잖아요. 뭔가 신기함을 보는 게 기적이 아니라 무엇과 무엇이 연결되어야 기적이다? 그 보는 것을 기적이라고 여기고 싶어 하는, 신기함을 봤으면 나는 믿음 생기겠다는 그 자세 자체가 죄고 그 죄 때문에 주님이 핍박을 받는 관계에서 핍박받는 자로서 용서를 해 줄 때, 우리는 유구무언 할 말이 없어요.

그래서 “주여, 여기에 있는 것이 좋사오니 주께서 만일 원하시면 제가 초막 셋을 지어서 주를 위해서 하나는 모세를 위해서 엘리야를 위해서 하겠습니다.” 라고 할 때, 갑자기 홀연히 빛난 구름이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났지요. 자, 이것을 연극무대라고 봅시다. 지금 여기 관중들이 있어요. 무대가 있는데 이 무대에 세분이 등장했어요. 세분이 등장하면서 갑자기 수증기 같은 게 피어오르면서 쫙 지나가더니만 뭐가 없어졌습니까? 무대자체가 없어졌지요. 무대 자체가. 따라서 이 세분 사이에서 일어난 이야기가 누가복음9장에 나오는데 예수님의 별세에 대해서 이야기해요. 별세. 예수님의 죽으심에 대해서 이야기해요. 죽으심 자체가 모세가 엘리야가 생각했던 예수님의 왕권의 무대는 예수님의 죽으심, 별세하심, 죽으심이 무대지요.

그렇다면 제자들은 이 무대를 압니까? 모릅니까? 모르고 그들은 이 무대를 뒤로 하고 이 무대를 주님과 함께 만들어야 될 그 길을 이제부터는 가야 하는 겁니다. 천국을 만들 수 있는 바탕을 이제는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만들어가는 겁니다. 그게 바로 십자가 죽음이에요. 이미 이 일이 벌어졌으니까 이 모세, 엘리야 자리에 이 십자가 자리에 우리를 세우게 되면 꽂게 되면 아까 했던 반짇고리에 있는 바늘이 우리는 여기 있고 주님께서 십자가로 푹 쑤시게 되면 이게 바로 무대입니다. 죄 + 용서. 죄인과 의인이 용서해 주시는 분과의 만남입니다.

여러분에게 한 번 물어봅시다. 십자가 피 흘린 것이 기적의 완성입니까? 변화산 모습 보여준 게 완성입니까? 피 흘린 거죠. 그런데 사람들은 뭐를 보기를 원해요? 예수님의 십자가는 관심도 없고 나도 좀 한 번 봤으면 좋겠다. 왜, 나는 오늘 새벽 2시 반쯤 나타났으면 좋겠다. 좍 꿈에 나타나가지고 모세, 엘리야하고 하나의 밴드처럼 드럼 치는 사람, 기타 치는 사람하든지 아니면 바이올린, 피아노 성악해가지고 부르던지 세 명이 연주회 했으면 그런 모습 한 번 보고 싶지요. 우리는 보고 믿고 싶지요.

그러나 도마에게 보여준 것은 제자들에게 보여준 것은 뭐냐, “자, 봐라 내 못 자국. 내 창 자국 자, 봐라.” 보란 말이죠. 손에 뭐가 있습니까? 못 자국. 이게 바로 너를 영생으로 인도하고 책임질 유일한 구세주가 최종적으로 남긴 것은 바로 이 십자가다.

그 못 자국과 창 자국 앞에서 ‘우리는 아무것도 내 힘으로 갈 수 없는 천국이구나!’ ‘오직 나는 죄만 짓는데 그 죄를 용서해 주면 그게 의가 되는구나!’ 그것을 우리들은 성령을 통해서만 알아요. 그건 우리의 능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성령을 통해서 아는 겁니다.

마지막으로 진도는 더 나갈 것 없고요, 이것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이렇게 제가 복음을 이야기하니까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받아들여요.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하면, 예수님의 복음을 나라는 인간이 있는데 그동안 복음이 없었는데 ‘이제 성령을 통해서 복음을 받았으니까 나는 복음 아는 사람이 된다.’ 이렇게 생각하거든요. 그렇게 되면 뭐가 빠졌어요? 제가 분명히 복음을 이야기할 때 뭐라고 했습니까? 죄+용서가 있어야 되는데 이게 날아가 버리고 뭐만 있어요? 용서만 남아가지고 용서만 걸치면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면 자기는 예수 복음을 아는 잘난 사람이 되는 겁니다. 이게 바로 성령 못 받은 사람의 공통점이에요. 십자가마을에서 예수만 전하니까 다른 사람이 하는 말이 “니만 잘났나?” “니만 잘났나?” 우리가 지금 잘났다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우리도 잘났다고 해 달라, 이 말입니다. 우리 십자가마을 공격할 때, 너희가 이단이라고 공격하는 게 아니고 왜 너희만 잘난 사람이냐, 우리도 같이 잘난 사람으로 인정해 달라고 요청하는 거예요. 그들이 십자가마을 비판하는 것은. 너희들이 이단이라는 말이 아니고 우리도 같이 복음 아는 사람으로 간주해 달라는 거예요.

그것은요, 죽은 사람 놔두고 부주 돈 계산하는 거와 똑같은 거예요. 예수님의 죽으심에는 관심 없고 예수님의 죽으심은 팔아먹고 자기 교회, 자기 집단, 자기 공동체 잘났다. 그거 과시하는 재미로 교회를 운영하려하는 거예요. 그들에게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관심 아니에요. 관심이 뭐냐, 괜찮은 교회, 복음 아는 교회, 눈에 보이는 단체, 그것을 가짐으로서 뭔가 심적인 안정을 얻겠다는 그거 그것이 목적이 되는 겁니다.

어떤 차이가 있는지, 여러분, 두고, 두고 마지막 이야기하는 것을 생각해 보시고 한 번 죽 생각해 보세요. 우리도 우리 자신을 보세요. 이상적인 교회, 멋있는 교회, 그 교회 등록만 하면 구원받는 교회, 그런 교회는 마귀가 만들어냅니다. 오직 우리의 관심사는 그만 살아도 돼요. 이 껍데기 같은 거. 교회 있으나 없으나 그냥 사는 것도 은혜입니다.

그냥 복음 안 것도 감사히 여기면서 살아가면, 그 사람이 바로 살아있는 교회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변화산 생각했습니다. 모세, 엘리야가 부럽습니다. 하지만, 그들도 주님과 함께 고생했고 우리들도 주와 함께 주님 복음만을 위해서 주와 함께 고난의 길을 가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볼 때, 같은 입장인 것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