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출애굽기 8강(미지의 여분의 것-상상적 동일시와 상징적 동일시)

아빠와 함께 2014. 8. 13. 18:36

2014 여름수련회 8장

출애굽기 21장에 보면 “네가 백성 앞에 세울 율례는 이러하느라.”고 해놓고 그 뒤 22장, 23장 계속 잔소리가 이어집니다.

남자들이 결혼생활 중 제일 힘들어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요? 아내의 잔소리입니다. 잔소리하는 것은 하나님도 만만치 않아요. 제가 질문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서 거룩입니까, 어겨서 거룩입니까? 내가 말씀을 지켰기 때문에 내가 거룩한 것입니까, 내가 말씀을 못 지켰기 때문에 주님이 거룩합니까?

율법의 요지가 주님 거룩하다는 것입니까, 아니면 내가 잘났다는 것이 요지입니까? 어느 쪽입니까? 우리가 율법을 어기는 죄인이기에 거룩에 참여됩니다. 잔소리처럼 여기지는 율법을 우리는 지킬 수가 없습니다. 율법은 우리로 하여금 죽은 존재로 간주하는데 이것이 거룩의 효과입니다. 율법을 지켜 율법에 흠이 없다고 자부하며 영생 얻기 원하는 부자 청년을 향해 예수님이 말씀하신 내용의 요지는 ‘네가 영생을 얻지 못하는 이유는 스스로 돌아갈 자리를 마련해 놓았기 때문이다.’는 것이었습니다.

‘말씀을 잘 지켜 하나님의 복을 받고 부자가 되었는데, 이런 내가 천국에 가겠지요?’라고 물은 부자 청년을 향한 예수님의 답변은 ‘내가 잘랐다는 자리에는 절대 영생이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내가 거룩하지 말고 나에게 찾아오신 주님이 거룩해 지기 위해 나는 완벽한 죄인으로 확정되는 그 자리가 거룩이 만개하는 자리며, 주님이 기뻐하는 자리며, 주님이 영광 받는 자리입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총알같이 튀어나오는 질문이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주님 영광 돌리기 위해 죄를 더 지으란 말입니까?” 여기에 대한 답변은 간단합니다. “우리는 죄를 지을 수가 없습니다.” 죄가 뭔지를 모르기 때문에. 예수님만이 죄가 무엇인지 알아요. 아버지께 버림 받았기 때문에. 우리는 어설픈 죄인이에요.

여전히 우리 속에는 내가 죄를 반성했으니까 나는 착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주도 면밀함을 우리는 포기 못합니다. 스스로 죄인이라고 고백해도 내 속에 작은 부분이지만 착한 구석이 있다고 여긴다면 그것은 온전한 죄인이 안 됩니다. 잔인무도한 조직 폭력배들도 그들 나름대로의 의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 입장에서 의리를 저버린 자에 대해서는 응징을 합니다. 길에서 고등학생이 담배를 피울 때 꾸지람하고 혼내는 사람은 주로 조폭들입니다. 자기는 그보다 더 개판으로 살면서 새까만 후배가 담배를 물고 있으니까 꼴 보기 싫은 모양이에요.

거룩은 하나님이 우리를 상대로 우리가 죄 지을 수 없음을 분명히 합니다. 그러면 거룩한 자가 누구인가? 우리에게 율법을 들이대신 분이 그 율법을 온전히 이룰 때 거룩한 자가 되고 그분이 예수님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나는 율법을 2%밖에 못 지켰는데 예수님은 100%를 지켰으니 참 대단한 분이다. 나를 믿지 말고 예수 믿어야지.’ 이렇게 나온다면 이것이 제대로 된 믿음입니까?

키에르케골은 말하기를, ‘훌륭해서 예수 믿는 것보다 더 예수님을 모독하는 것은 없다.’고 했어요. 예수님이 훌륭한 분이라서 예수 믿으면 그것은 주께 영광 돌리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모독하는 것이란 말이지요. 왜냐? 예수님을 향해 “선한 선생님이여!”라고 했던 사람의 그 인식자체가 곧 ‘당신이 선한 분임을 알아본 나의 판단력은 쓸 만하지요?’라는 인식이 깔려 있어요.

이렇게 되면 자신도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인데, 이것은 자기 향락입니다. 향락도 술에 취해 즐기는 향락이 아닌 극도의 선함과 고상함에서 오는 쾌락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그런 경험이 없어서 잘 모르는데 기부를 해보세요. 이것은 마약 투약하는 것보다 더 짜릿한 기쁨을 맛보게 됩니다.

우리는 율법을 2% 밖에 못 지키기에 98%의 미진함을 예수님을 통해 채울 수 있다는 아이디어는 성립이 안 됩니다. 정작 예수님을 만난 사람의 눈에 비친 예수님은 율법을 위반하는 자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율법을 지키겠다고 나선 사람들의 눈에 비친 예수님은 율법 위반자로 보였어요.

내가 선한 자라고 여길 때 주님은 악마로 보입니다. 그런데 자신이 죄인이라고 여긴 문둥병자나 세리, 창기 이런 사람들은 예수님이 메시아로 보였어요. 나와 같은 더러운 죄인도 용서해 주시는 분으로 보았지요. 이 용서가 100% 율법의 완성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물었어요. ‘몇 번까지 용서하면 율법에 합당한 용서가 됩니까? 일곱 번 용서하면 됩니까?’라고.

베드로의 입장에서 일곱 번을 거론한 것은 대단한 것입니다. 용서는 이곳저곳 다니면서 용서하는 것이 아니고 자신에게 피해를 입힌 자를 용납하는 것인데 그것을 일곱 번이나 반복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일이겠습니까? 그런데 주님의 대답은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하면 490번이라도 용서하라는 말인데, 이만큼 용서하다가는 늙어 죽습니다.

만약 예수님 말씀대로 490번을 용서한 후 ‘이제 됐습니까?’ 라고 묻으면 예수님은 뭐라고 답하실까요? ‘일흔 번씩 일곱 번에 일곱 번이라도 하라’고 하실 거예요. 결국 뭐냐 하면, 율법 지켜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겠다는 생각 자체가 잘못 된 거예요. 율법은 튕겨 나오라고 주신 것이고, 죄인 되라고 주신 것인데 그것을 지키려고 달려드니 되겠습니까?

여권에 사진을 붙이는데 자신의 X-레이 사진을 붙이는 사람이 있습니까? 만약 그랬다면 출입국 검사대에서 뭐라고 하겠어요? 얼굴과 사진을 번갈아 보면서 통과시키지 않습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사진은 우리는 갈비뼈 사진입니다. 우리 속의 죄를 드러내기 원합니다.

율법을 지키겠다는 발상부터가 잘못된 것입니다. 율법은 지키고 말고 하는 것이 아니고, ‘나는 율법을 못 지키겠습니다.’ 라고 인정할 때, 바로 그 율법 앞에서 우리는 죄인으로 확정됩니다. 이것은 주의 이름이 거주하기 위한 정지작업입니다. 주택을 짓기 위해 택지를 조성하지요. 그와 같은 것입니다.

강의 시작부터 지금까지 제가 말씀드린 내용에 따르면 “목사님, 제가 기도는 어떻게 하고, 예배는 어떻게 드리고, 헌금을 얼마나 해야 합니까?” 이런 질문은 다 바람에 날아가 버렸습니다. 왜냐하면, 나의 선한 행동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는 생각자체가 주님을 모독하는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선행 행동해서 뭣 하려고요? 내 문제 해결하려고 한 짓이잖아요. 그러니까 잘못된 거예요. 아무리 자신의 충성과 열심을 앞세워도 그것은 자신의 문제 해결해 보겠다는 얄팍한 노림수가 있었던 것이지요. 이것은 하나님이 출애굽 시키시는 취지와 맞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출애굽 되지 못한 시점에서 출애굽을 봐야 한다고 했지요.

그러면 주님의 잔소리가 어떤 내용이기에 우리는 짜증이 나고 화가 나는가? 한 마디로 이것입니다. ‘애굽에서 살던 식으로는 살지 말라.’ 그러면 애굽에서는 어떤 식으로 살았습니까? 애굽에서는 나만 챙기면서 살았어요. 그러면 약속의 땅에서 말씀대로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나를 챙기지 않는 삶을 살면 되는 거예요.

나에게 이용당할 사람을 찾아 이용하는 것이 아니고 ‘혹시 저를 이용하실 분 계십니까?’ 이렇게 살아야 돼요. 왜냐하면 율법을 완성하신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기 때문에. ‘나는 섬김을 받으려고 온 것이 아니고 너희를 위해 희생하기 위해 왔다.’고 하셨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면서 섬김의 도를 보여 주셨지요. 그런데 제자들은 주님과 함께 있으면서 ‘누가 더 높은 자냐?’고 서로 다투었지요.

출애굽기 22장의 내용이 뭔가 하면, 상대방이 왔을 때 “당신은 나로 인하여 얼마나 마음이 아팠습니까?” 이렇게 되는 거예요. 어떤 사건이 일어나면 그것은 주님이 일으킨 것이고, 그 일은 ‘나로 인하여 당신이 얼마나 힘들었습니까?’를 생각하는 그런 사태를 주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율법은 지키는 것이 아니고 만들어지는 거예요. 아파요? 아프니까 청춘이지. 이런 식이지요. 많이 아파요? 나도 많이 아픕니다. 이게 어디에 나오는가 하면 22장 21절입니다.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며 그들을 학대하지 말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이었었음이니라.”

이 말은, 주변에 있는 고아와 과부의 모습에서 진짜 너의 모습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장에서는 처음 사랑을 잊지 말라고 했지요. 나의 자리가 어떤 자리인가 하면, 나에게 도움을 요청한 그 자리가 본래 나의 자리에요. 그러니까 그가 나에게 요청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나에게 요청하는 식으로 하라는 겁니다. 왜냐? 우리는 애굽에 있을 때 나만 챙겼기 때문에.

애굽에서처럼 나만 챙겨서는 안 되고, 상대가 요구하는 것은 내가 평소에 호소했던 것으로 받아드려야 합니다. 누가복음 10장 ‘선한 이웃’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지요. 강도를 만나 피를 흘리고 있는 사람을 보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냥 다 지나갔는데 사마리아 사람은 그를 도와주었지요.

왜 도와주었지요? 여기에서 주님이 하신 말씀은, 강도 만난 사람의 가해자가 강도가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길에서 만난 상대를 때려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다면, 때린 사람이 가해자가 아니고 그 광경을 보고도 그냥 가버린 사람이 가해자가 되는 거예요. 주님은 진정한 이웃을 생산하기 위해서 그런 사태를 의도적으로 유발하셨습니다.

이런 저의 주장에 반문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처음에 목사님이 말씀하시기를 율법은 못 지킨다고 했잖아요? 못 지킨다고 해놓고 갑자기 고아와 과부 이야기가 나오니까 네가 그 입장이 되었다고 생각하고 도와주라고 한다면 앞뒤가 안 맞는 말씀을 하신 것이잖아요? 그러면 도와주라는 말입니까, 도와주지 말라는 말입니까?” 이런 식으로.

저는 이렇게 답변하고 싶어요. “나는 고아다. 나는 과부다. 그러니까 날 도와 줘!”라는 사람은 절대로 도와주지 마세요. 율법은 우리의 이용물이 아닙니다. ‘내가 어려운데 왜 사람들이 안 도와주지? 율법에는 고아와 과부를 도와주라고 했는데.’ 이것은 아닙니다. 고아와 과부에게는 그런 권리가 없습니다.

그럼 고아와 과부는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는가? ‘저를 고아(또는 과부)되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이렇게 나와야 돼요. 이런 사람은 주변 사람이 날 안 도와줘서 괘씸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나를 과부로 만들었습니다.’ 라는 믿으며 주님과의 이웃 관계가 성립된 사람입니다.

따라서 그 사람을 도와주지 않으면 그 사람을 안 도운 것이 아니고 주님이 일으킨 사태에 대해서 주님을 빼버리는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가난한 자는 도움을 요청한 권리는 없습니다. 만약 이 권리를 주장한다면 우리는 전부 성당에 가야 돼요. 성당은 오지랖이 넓어서 이사람 저사람 다 도와줘요.

성당에서 신부가 입는 복장한 하나의 권력입니다. 하나의 주체지요. 주체는 권력에 의해서 할당받은 자리지요. 그래서 그 자리는 주체기 때문에 그 주체는 곧 자기의 자존심입니다. 이 자존심은 어떤 경우에도 결코 포기할 의사가 없다는 말이 됩니다. 중들이 머리를 깎고, 신부가 유니폼을 입는 것은 ‘나는 권력에 속했다. 이 권력에 손대지 마라.’는 권력의 표현입니다.

율법을 주신 것은 출애굽 사건이 유월절로 끝나지 않고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법으로 반복시키는데 왜 그렇게 하는가 하면, 법을 통해서 주체가 드러나는데, 그 주체가 거룩한 율법과 만나게 되면 우리가 애굽적인 속성을 유지하고 있음이 발각됩니다. 만약 우리가 율법을 지켜낸다면 주님은 추가적으로 더 난해한 율법을 주십니다. 기어이 주님이 건져주지 않으면 구원될 수 없다는 추가적인 법들이 계속 나옵니다.

구약의 법이 지키기 쉽겠어요, 신약의 법이 쉽겠어요? 겉으로 보기에 구약이 훨씬 쉬워 보여요. 그래서 구약의 유대인들은 마음만 독하게 먹으면 율법을 다 지킬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한국 기독교에서는 고신측에서 율법을 다 지키려 하고 특히 안식일과 십일조는 반드시 지킵니다. 이렇게 되면 출애굽은 없어요.

출애굽이 뭔가 하면 ‘너는 그 때 고아와 나그네였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후견자가 도와주지 않으면 보호받을 길이 없어요. 일부러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들었어요.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들을 구원하면서 주님의 언약의 내막이 장체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되어 있음을 미리 보여주기 위해 그렇게 한 것입니다.

구원 받았다는 것 자체로 구원되는 것이 아니고, 누군가가 너를 구원했는데 그 구원자를 증거하기 위해서 추가적으로 계속 법을 주셔서 한번 고아와 과부가 아니라 계속해서 우리는 주님 없이는 못산다는 것이 반복해어 주어져야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법을 통해서 우리가 애굽적인 것이 들통 나야 되고, 그 들통 난 것과 제사법이 관련되면서 7월 10일(대 속죄일)날 일괄적으로 용서를 받습니다.

원래 죄는 회개하고 난 뒤에 회개한 사람에게만 용서가 주어집니다. 여러분이 아무나 용서해버리면 그것은 용서가 아니고 굴종입니다. 실컷 얻어맞고 울면서 “나는 너를 용서한다.” 이게 말이 됩니까? 얻어맞는 것이 너무 수치스러우니까 힘이 모자라서 얻어맞았지만 정신적으로는 너보다 뛰어나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서 용서한다는 식이 됩니다. 이게 무슨 용서입니까, 항복이지.

우리는 항복하면서 용서한다는 핑계를 댑니다. 특히 직장에서 상사에게 항복해놓고 상사를 용서했다고 합니다. “주여, 주님의 사랑으로 과장님을 용서합니다.” 이건 밥 먹고 살려고 굴복하는 것이지 이게 어찌 용서입니까. 용서가 너무 남발되다 보니까 어떤 분이 제게 이런 질문을 해요. “목사님, 내가 남을 용서하지 않으면 주님께 용서받지 못합니까?”라고.

우리는 애초에 용서의 대상이 아닙니다. 왜 그런가 하면, 우리는 남을 용서한 적이 없어요. 내 잘남을 위해서 타인을 이용하는 거예요. “나는 너를 용서했다.” 이것은 자신의 마음이 넉넉함을 자랑하기 위해서 나보다 더 개판을 사는 자들이 필요했던 거예요. 남편이 때릴 때 아내는 묵묵히 맞으면서 천사가 되는 겁니다. “주여, 오늘도 남편을 용서합니다.” 이것은 정신병 수준입니다. 그러지 말고 가까운 지구대에 신고해서 경찰을 불러야 합니다.

기계는 생각 없이 같은 일을 반복합니다. 때리면 또 때리고. 사람이 술에 취하면 기계가 됩니다. 다들 경험해 보셨지요? 기계를 좋은 말로 ‘개’라고 하는데, 개보다 더 못한 말이 기계입니다. 사람이 술을 먹으면 기계가 됩니다. 자기밖에 몰라요. ‘당신이 나를 이용해라.’ 그런 것 없습니다. 술을 먹으면 무조건 식구들은 나에게 굴복해야 돼요. 그게 바로 애굽입니다. 애굽의 모든 출애굽 상황이 신약에서는 하나하나 일대일 대응을 하는 거예요. 수학에서는 ‘선택 공리’라고 하는데, 하나하나 대응해서 나만의 주체를 이루는 계열을 만들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이 이스라엘의 마음속에 들어가면서 이 율법을 지켰다고 자부하는데 그것이 바로 바리새인이고, 그들이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죽은 예수님이 사흘 만에 부활해서 재판한 그들을 도리어 재판합니다. 즉 그들에 의해 피고가 된 분이 이제 재판장이 되어서 자신을 피고의 자리에 앉힌 그들을 도리어 재판하는데 그것이 주님의 심판입니다. 자리가 완전히 역전되지요. 우리는 그 역전된 사실을 받아들임으로 우리가 주님의 편임을 아는 겁니다.

율법에 대해 좀 더 깊이 들어가 봅시다. 보통 회개하면 용서가 되는데, 7월 10일은 회개 안 해도 일괄적으로 다 용서를 해 주십니다. 작년 7월 10일 이후에 지은 모든 죄는 전부 용서가 돼요. 그래서 이스라엘은 언약의 갱신으로 새롭게 이스라엘이 유지가 됩니다. 이런 말을 들으면 어떤 생각이 드는가 하면, 용서가 7월 10일에 이루어진다고 했잖아요. 그러면 7월 9일은 마음껏 죄를 짓는 거예요. 마치 청년들이 군에 입대하기 직전에 사창가를 찾는 것처럼. 이런 생각이 들잖아요.

이와 비슷한 것이 희년 제도입니다. 50년 째 희년이 돌아오면 모든 부채나 종의 신분이 원래의 것으로 되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돈을 빌리는 사람이 희년 직전, 49년 12월 31일에 왕창 돈을 빌려는 거예요. 하루만 지나면 희년이 되고 그러면 돈을 안 갚아도 되니까. 이 법은 도대체 누구를 위한 법입니까?

철저하고 법을 이용할 수 있지요.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희년이 가까울 때는 돈 이자가 굉장히 올라가요. 위험 부담이 많기 때문에. 그러나 50년 희년이 되면 빚을 다 탕감해 주라고 율법에 규정하고 있지만 이 율법이 시행된 적은 없습니다. 유대인이 이 율법을 왜 안 지켰을까요? 여러분이라면 이 법을 지키겠어요?

법이 중요합니까, 현찰이 중요합니까? 현찰은 눈에 보이지만 법은 나중 문제입니다. 십일조 제도가 제대로 시행되지 않아 굶어 죽은 레위인, 제사장이 한둘이 아닙니다. 열한 지파가 십일조를 내면 레위인은 밥 먹고 살아요. 그러나 대부분 안 했습니다. 왜? 십일조를 내려고 하면 급하게 돈 쓸 일이 생겨요.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는 겁니다. 얼마나 감사한지.

이스라엘 백성들은 십일조를 하기 원해요. 단, 아무 일 없을 경우에. 그런데 주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마음을 아시고 십일조 못하게 일을 발생시킵니다. 십일조 하고 싶어도 급한 일이 생겨 그쪽에 돈을 쓰게 됩니다. 예를 들면, 딸이 급성 맹장염에 걸려 수술을 하게 되었는데 병원비가 없어서 십일조 할 돈을 먼저 병원비로 내게 됩니다. 나중에 돈이 생기면 이번에 못 낸 십일조를 꼭 내겠다고 다짐하지만 그것이 실천되지 않습니다.

법보다 돈이 우선이라는 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한결같은 진리입니다. 우리는 이스라엘에게 법이 주어졌기에 그들이 법을 지켰다고 순진하게 생각하는데 안 지켰습니다. 그러면 법 안 지키는 그들을 왜 보호하는가? 제사법 때문에 그래요. 일괄적으로 용서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용서하려면 끝까지 용서하지 왜 이방 나라에 망하게 하는가? 그것은 용서 법이 점점 더 진화합니다.

용서 법이 진화하기 때문에 그들이 율법을 어겼을 때의 징벌 차원이 점점 심화됩니다. 이게 심화 학습이에요. 예전에는 언약궤를 앞장세우면 적들이 물러갔는데, 나중에 블레셋과의 전쟁 때는 언약궤를 앞장세워 나갔는데 그 언약궤를 적들에게 빼앗기는 사태가 벌어졌어요. 세상에 이런 우사(창피한 일)가 어디 있어요?

블레셋을 통해서 제사라는 것이 언제나 지켜주는 것이 아니고 점점 더 심화되어야 해요. 아직도 인간에게서 나올 죄는 많아요. 거기에 따라 그 많은 죄를 처리하다보니까 용서하는 법도 점점 난폭해지고 냉혹하고 이스라엘 내에 균열이 일어납니다. 계속 제사법을 성의 있게 지킬 것인가, 아니면 국력의 신장이 우선이냐 갈등하다가 국력을 신장하는 쪽으로 기웁니다.

그래서 그 후 이웃나라와 관계하면서 ‘너희가 우리 문화를 수용했으니까 우리도 너희 문화를 일부 수용하겠다.’고 나왔고, 그 때부터 이방 문화가 이스라엘에게 밀려오는데, 그 중 바알 신을 섬기면 부자가 된다는 미신도 들어와서 여호와는 안중에도 없고 각 지역에 산당을 세워놓고 그곳에서 기도를 하게 되고, 또 기도를 하면 효과를 보도록 하나님이 역사하셨기에 그들은 더욱 우상에게 매달리게 됩니다.

왜 하나님이 효과를 보게 하십니까? 그래야 죄가 더욱 더 심화되면서 이제는 제사장이 담당하는 제사로는 더 이상 감당이 안 되게 하시는 겁니다. 십일조도 제사도 제대로 드리지 않고, 제사장도 사기가 떨어져서 뿔뿔이 흩어집니다. 사사기에 보면 이런 내용이 나와요. 제사장 일을 해서는 못 먹고 살겠다고 해서 각자 살 길을 찾아 떠나지요.

백성들은 제사장에 대해 관심도 없고 그저 외국 문화의 번영과 사치에 현혹되어 빈부의 차이가 심해지고 그런 환경이 된 거예요. 그래서 전쟁에서 언약궤마저 빼앗기는 사태가 발생한 거예요. 그러면 주님은 왜 이렇게 하시는가? 주변에 있는 나라를 통해서 이스라엘을 길들이는 거예요.

처음에는 이스라엘이 자기 힘으로 싸우지만 그 힘이 다 소진되고 난 후에는 주님을 찾게 되지요. 움짐이 단 거예요. ‘움짐’이란 말뜻을 아십니까? 경상도 사투리죠. ‘몸이 달았다’는 의미입니다. 이스라엘을 껍데기입니다. 율법의 거룩함을 드러내기 위해서 율법과 결합된 제사법이 사람들에게 점점 더 치열하게 심적 부담으로 다가오기 시작합니다.

옛날에는 작은 죄를 지어도 양을 가지고 와서 제사 드리며 용서를 구했는데, 이제는 죄 짓는 것이 만성이 되어서 일일이 제사하는 것도 귀찮아서 여러 번 죄 짓고 나서 한 번 양을 잡아 제사를 드렸고, 제사장은 그것도 고마워서 제사하러 온 사람을 반기며 고기의 일부는 번제로 드리고 일부는 생고기를 빼돌려 구워먹고 이런 상황이었습니다.

제사장도 빈부의 차이가 생깁니다. 48개 지역에 도피성이 있었는데 그 도피성에 상주하는 제사장이 있었어요. 그래서 가난한 동네의 제사장은 생계가 아슬아슬하고, 중앙에 있는 예루살렘 제사장들은 양식이 차고 넘쳐서 감당을 못하고. 그러니까 나중에 솔로몬 이후에는 제사장이 권력 단체가 되는 겁니다.

권력을 가진 제사장은 축적된 자본이 많기 때문에 그 자본으로 값 싼 노동자를 고용하고, 노동자에게 줄 임금의 잉여분은 챙기기에 점점 자본이 축적되어 국가도 무시하지 못할 정도의 힘을 가지게 됩니다. 그래서 자크 엘룰이라는 사회학자는 말하기를 ‘서구 역사에서 교회가 안정됨으로 교회는 교회가 아니었다.’고 했어요.

교회가 자본이 축적되어 안정되면 권력단체가 되고, 권력단체는 쉬운 말로 ‘지역 유지’라고 합니다. 운동회 때 귀빈석에 큰 교회 목사는 앞자리에 좌석이 배치됩니다. 물론 찬조금을 듬뿍 냈기에 앞자리에 앉게 된 것입니다.

율법은 있어요. 그런데 이게 건성으로 다 넘겨 버립니다. 그리고 제사장들은 생계가 안 되니까 부잣집에 복 빌어주고 점치는 사람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개인 가정의 제사장이 된 거지요. 오늘날로 말하면 한 학교의 교목, 한 병원의 원목. 이런 식으로 각자 살 길을 찾아가서 월급 받고 사는 거예요. 이렇게 되면 결국 말씀에 의한 희생자가 없어진 거예요.

율법은 인간의 주체를 드러내는 것이고, 그 주체는 발각되는 것이고, 따라서 하나님의 이름이 계시다는 그 제사에 모든 것을 걸어서, ‘다른 나라는 왕이 있고 권력이 있지만 우리는 반복되는 제사가 있기에 다른 나라를 이길 수 있다. 이것이 우리나라를 유지하는 유일한 언약적 방법이다.’ 이런 이론은 세월이 가면서 아무 힘도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막상 이웃나라와 접하고 보니까 하나님보다 더 중요한 것이 돈이었고, 하나님보다 더 중요한 것이 나였음을 알았습니다. 즉 서서히 감추어진 본색이 드러나면서 우리는 출애굽 된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느끼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사야에서 제 2의 출애굽이 대두됩니다.

제 2의 출애굽은 일단 그들을 약속의 땅에서 추방하고 난 뒤(바벨론에 잡히고 난 뒤)에 바벨론에서 다시 본국으로 잡아당기면서 제 2 출애굽을 언급합니다. 그렇다면 제 2 출애굽을 할 때 추방된 자들이 돌아오는가? 그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왜 추방될 수밖에 없었는지 그 이유를 아는 사람만 다시 본국에 돌아오는데 그들이 바로 에스라, 느헤미야와 함께 왔던 사람들입니다.

고국에 돌아와서 그들은 감격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모든 것이 주의 약속대로 된 것 때문에 기뻤고, 너무도 초라한 성전을 보면서 그들은 울었습니다. 어떤 분은 성경에 보니까 이들이 우는 것인지 웃는 것인지 잘 분간할 수 없다는 거예요. 아쉬우면서 감격적이었다는 겁니다. 하지만 이것도 몇 년 못 갑니다. 이게 바로 인간입니다.

언약은 유지되지만 인간은 그 언약을 지킬 수 없는 허약한 자임을 드러내는 겁니다.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좋겠어요? 제사법에는 인간이 어떤 잘못을 저질러도 한결같이 구원이 되는 장치가 제사법 안에 들어 있어요. ‘내가 그럴 줄 알았어!’ 그러면 제사법에 어떤 것이 들어있습니까? 세 가지 요건으로 이것이 보장됩니다. 첫째, 제사장이 있거든 안심해라. 제사장이 입은 복장에 이스라엘 12지파의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둘째, 성전이 있거든 안심해라. 하나님은 성전을 버리지 않을 테니까. 셋째, 안식일 있거든 안심해라. 첫째는 사람, 둘째는 장소, 셋째는 시간입니다.

유대인들은 제사장, 성전, 안식일 이것으로 자신들이 택한 백성이라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유대인의 이러한 요소는 성경의 문제 그대로 따온 것이죠. 그런데 여기서 무엇이 문제인가 하면, 상상적 동일시와 상징적 동일시를 구분해야 됩니다. 상상적 동일시는 ‘이상적 자아’라 하고, 상징적 동일시를 ‘자아 이성’이라고 합니다. 정말 용어가 어렵지요?

‘이성적 자아’와 ‘자아 이성’의 차이점이 뭡니까? 왜 이런 어려운 용어를 거론하는가 하면 사람들은 이 둘 사이를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래요. 쉽게 예를 들어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여자와 남자가 사귀는데 요즘 여자들은 욕심이 없어요. 남자가 세 가지 정도만 갖추면 만족합니다. 키 크고, 돈 잘 벌고, 성격 좋고. 딱 이 세 가지입니다. 신앙이니 뭐니 이런 다른 욕심은 없습니다. 여자가 이런 남자를 마음에 들어 할 때 이것이 ‘상상적 동일시’입니다. 남자대신 신을 대입해 봅시다. 성경 말씀 중에 내 마음에 쏙 드는 구절을 보고 “역시 예수님은 참 훌륭하신 분입니다.”라고 할 때 이걸 ‘상상적 동일시’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면 ‘상징적 동일시’는 뭐냐? 여자는 남자가 별로 마음에 안 드는데, 남자가 자꾸 들이대요. 이 사람은 키 작고, 성격도 안 좋고, 직장도 시원찮아요. 그래서 여자가 남자에게 “아저씨 왜 자꾸 들이댑니까?”라고 할 때, 나는 당신이 마음이 든다는 거예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자기가 마음에 들어서 자기 권력 속에 여자를 집어넣으려 하는 거예요. 상징이란 법, 규칙, 제도를 의미하는 겁니다.

나는 그 직장이 마음에 들지 않지만 내가 살기 위해 취직을 해야 될 때는 나는 어쩔 수 없이 그 상황을 억지로라도 나와 동일시해야 내가 밥 먹고 사는 거예요. 이것이 ‘상징적 동일시’입니다. 이해되지요?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부터입니다. ‘상상적 동일시’는 자기 착각이지만 ‘상징적 동일시’는 현실 문제입니다. 이 직장이 아니면 직장이 없으니까 억지로 다니는 거예요. 다니면서 그 직장의 사람이 되지 않으면 나는 직장에서 왕따 당하고 나중에 어려운 문제가 생겨도 협조해 주는 사람이 없게 되고, 그러면 무능력자로 찍혀 후배들에게 추월당하고 결국 직장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될 것이기에 어쩔 수 없이 동일시하는 거예요.

당신은 어째서 나를 좋아합니까? 내가 왜 당신이 좋아하는 사람이어야 합니까? 라고 묻는 거죠. 신은 나를 선택했다. 상상적 동일시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나를 선택했다. 어떻게 됩니까? 주님이여 저를 뭘 보고 선택하셨습니까? 라고 할 때 미지의 여분의 것이 남아있지요.

내가 그분을 원하는 것이 아니고 그분이 나를 원할 때, 대표적인 것이 마리아입니다. “처녀인 제가 왜 임신을 해야 합니까? 수많은 여자 중 왜 하필 제게 이런 일을 주십니까?” 이것이 바로 임신한 이유란 말이지요. “수많은 여자 중에 네가 선택되었기에 임신이 된 것이다.” 이건 말장난이 아닙니다. “허다하게 많은 사람 중에 왜 제가 암에 걸려야 합니까?” “그 많은 사람 가운데 하나가 너이기에 네가 암에 걸리게 되었다.” 이것이 예수님의 답변입니다.

이것은 내가 원해서 된 것이 아니라 저쪽에서 원해서 된 동일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뭔가 남아있어요. “내가 원하지 않았는데 주가 원해서 되었구나. 주께서 무엇이 필요해서 나를 이끌고 가시지?” 바로 이런 관계. 유대인들은 상상적 동일시에 빠져서 “주님이 날 선택했어. 날 무시하지 마.” 이렇게 나오지만 참된 선택은 항상 선택한 이유에 대해서 평생을 살면서 체험 속에서 되새겨 보는 그런 형편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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