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출애굽기 5강(주님을 핍박하도록 되어있는 주체자-대표자와 집단의 분리-간격-죽음)

아빠와 함께 2014. 8. 13. 18:30

2014여름수련회(낯선 경계선) 출애굽기 제 5강

 

출애굽기 3장 1절을 보겠습니다. “모세가 그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무리를 치더니 그 무리를 광야 서편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매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가로되 내가 돌이켜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리라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아니하는고 하는 동시에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가라사대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나님이 모세를 만났는데 그러면 하나님 안 만나면 구원 못 받는 겁니까? 성경에서 모세는 하나님을 만났다. 우리는 하나님을 구경도 못했다. 그렇게 해서 어떻게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습니까? 그러면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하나님 만나는 것은 옛날 방식이고 요즘 방식은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아니고 성령이 오셔서 그리스도의 영이 임해서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는 방식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직접 사람을 만나지 않습니다.” 그러면 가야산 계곡에 물 내려오는 것을 찍기 위해서 카메라 들고 올라가는데 어떤 아저씨가 내려오면서 “아무개야, 여기는 신성한 곳이다.”라고 천사가 나타나면 우리가 이래야 됩니까? “천사님, 왜 자꾸 옛날 방식을 사용하십니까? 저리 가세요. 나는 당신을 안 만난 것으로 치겠습니다. 우리 요즘 방식으로 합시다. 찾아오시고 그러면 곤란합니다. 아, 되게 따라오네. 오지 마세요. 난 당신을 안 만난 것으로 치겠습니다.” 이렇게 강제로 떠밀까요? 어떻게 할까요?

 

모세가 하나님을 만났다. 따라서 모세 만난 것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인간이 접근할 수 있는 모든 방식이 아니라 처음에 이야기했듯이 하나님의 개입으로 모든 하나님의 계획은 시작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계획이 하나님의 개입으로, 하나님의 찾아오심으로 된다는 말은 인간 쪽에서 찾아가는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거부한다는 뜻이거든요. 그러면 그 찾아오심이 모세한테 왔다면 찾아오지도 않은 우리들은 그냥 방치되는 것인가, 소외되는 것인가, 우리는 배제되는 것인가, 그런 문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기도원에 하나님 보고 싶다고 매달리는 사람도 있고 아브라함처럼 자기 아들 죽이겠다고 바치고 하는데 여러분, 자기 자식 하나님께 바칠 필요 없어요. 안 바쳐도 늙어서 다 죽게 되어 있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안 바쳐도 인간은 다 늙어죽게 되어 있으니까 뇌물 쓰려고 그렇게 하지 말라는 말이지요. 이것은 결국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대표적 만남입니다. 대표적 만남. 대표적 만남이라 하는 것은 누가 우리 대신 주께서는 부르시고 우리는 빠져 있으면서 그냥 빠진 채로 있으면 안 되고 그 대표적인 만남의결과를 주시하면서 대기하고 그 정상회담에서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 그 결정을 따르려고 대기상태에 있어야 되거든요.

 

예를 들면 성경에서 탐내지 말라고 하게 되면 “하나님, 난 그 말씀 못 지킵니다.” 성경에서 지키지 못한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이 말씀을 줬다고 하면 우리는 “못 지킵니다.” 하는 동시에 “안녕히 계십시오.” 하고 못 지키니까 아예 안 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어떤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보고는 “얘야, 남편 생일인데 미역국 좀 끓여라.” 하면 “저는 미역국 끓일 줄 모릅니다.” 그 때부터 그 며느리는 그 앞에 뭐가 붙어요. 그냥 며느리가 아니고 뭐가 붙느냐 하면, “미역국 못 끓이는 며느리”라고 딱 낙인이 찍히는 겁니다. 이게 붙어주게 되면 며느리는 대표적 만남이 요청되는 대기자명단에 소속이 돼요. 주의 말씀을 줬지만 나는 미역국도 못 끓이는 며느리이기에 미역국 잘 끓여서 천당 가는 대표자가 하나님과의 어떤 회담결과가 있느냐에 따라서 미역국 못 끓여도 구원받는 혜택을 받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이것도 못 지킵니다. 이것도 못합니다.”에 멈추지 말고 그러니까 우리를 대표하는 대표자를 전적으로 의지하고 의존하고 그 분의 처리에 일임을 해줘야 되는 겁니다.

 

그래서 모세의 만남은 대표적 만남이에요. 대표적 만남이라면 여기서 문제가 뭐냐 하면, 하나님은 바쁘시다는 분이 왜 그렇게 만나는 사람이 많은지 모세도 만나야 돼, 엘리야도 만나야 돼, 아브라함도 만나야 돼, 만나는 사람이 왜 그리 많습니까? 대표자가 한두 명이 아닌 거예요. 베드로도 만났고. 그렇다면 그중에 어느 사람을 나의 대표자로 삼을 것인가의 문제에 있어서 최종적으로 이 만남의 내막을 우리가 살펴보자는 거예요. 물론 그 논리를 따지겠습니다만 너무 난해하기 때문에 난해할 때는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제 속이 편해요.

 

마지막 주님을 만난 분이 사도바울이거든요. 사도바울이 있는데 주님께서 찾아왔습니다. 다메섹으로 내려가는 사도바울을 찾아왔는데 그 때 사도바울이 “주여, 누구십니까?”라고 했어요. “주여, 누구십니까?” 찾아오신 거거든요. “주여, 누구십니까?” 할 때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나는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라고 했어요. 나사렛 예수 앞에 뭐가 붙느냐 하면,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예수님을 핍박한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만나야 핍박을 하지요.

 

예수를 믿는 사람을 핍박한 적은 있지만 예수님 당사자를 핍박한 적이 없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사도바울은 무엇을 빨리 성사시키는가 하면, ‘내가 핍박했던 사람과 예수님과의 관련성이 어떻게 엮여 있는 것일까?’ 하는 겁니다. 나는 눈에 보이는 사람을 핍박했지 예수님 만났다면 핍박을 안했을 거예요. “살아 계셨군요. 몰랐습니다.” 하고 존경해 마지않았을 거예요. 예수님이 이미 죽었다고 생각해서 마음껏 “어디서 죽은 것을 부활했다고 해?”하고 마구 핍박을 했는데 막상 죽었다고 여기는 분이 나타난다면, 그러니까 유병언씨가 다시 나타난다면 “미안합니다.” 이렇게 되는 것이지 만나지도 않은 사람을 어떻게 핍박을 해요? 만나지도 않은 사람을.

 

그런데 예수님의 논리는 뭐냐 하면, “네가 나를 직접 안 만나도 이미 핍박하고 있는 중이다.”라고 되어 있는 겁니다. 그러면 사도는 뭐냐 하면, 도대체 내가 핍박한 그 사람과 예수님은 어떤 눈에 보이지 않는 관계로 엮여졌기에 그 사람 핍박한 것이 주님 핍박으로 확장이 되고 그대로 전해져 있는지, 그 관계가 어떤 관계인지 그것이 사도바울에게는 상당히 중요한 문제이고 오늘날 우리에게도 중요한 문제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하나님 만나는 대표자, 대변자, 또는 중보자로 여기고 자기는 직접 하나님을 안 만나도 구원이 돼요, 라는 사실을 그들은 믿고 있었고 사울이라는 사람은 ‘예수는 이미 과거의 인물이고 그 엉뚱한 인물에 대해서 어설픈 희망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 마음껏 핍박하리라.’ 하고 핍박을 했는데 과연 그들 말대로 자기들이 핍박하니까 주님이 나서서 “나를 왜 핍박하느냐?”라고 나왔다는 말이지요.

 

그렇다면 여기서 신기하고 놀라운 것은 보이지 않는 주님과 보이는 인간관계가 어떻게 형성되어 있기에 이쪽 건드리면 머리가 반응을 나타내는 한 몸체가 되었는가, 그것이 상당히 신기하게 짝이 없는 이야기입니다. 흑마술, 백마술 한답시고 인형 만들어서 바늘로 찍으니까 어, 하고 이쪽 또 찍으니까 헉, 하는 그런 겁니까? 공간을 초월해서 뭔가 기(氣)로 연결되어 있는 겁니까? 그런데 여기서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의 문제에 대해서 시작은 바로 사도바울의 주체적 의식의 변화로 이어졌습니다. 사도바울은 “네가 핍박하는 예수님”이라는 이 단정적인 결과가 그대로 사도바울의 주체의 본래의 내용으로 들어와 버렸어요.

 

들어오게 되면 ‘내가 핍박했기에 주님을 핍박했다.’ 가 아니라 나 자체가 주님을 핍박하도록 되어 있는 주체자로 살아왔다는 것을 받아들였습니다. 그 말은 뭐냐, 이제 자기 주체에 대해서는 더 이상 흔들릴 필요가 없고 불안정할 필요가 없어요. 주체가 안정되었어요. 어떻게? 나는 주님을 핍박하는 존재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과 함께 있던 모든 사람들도 그들이 예수님을 섬기거나 믿은 사람들이 아니고 주님을 핍박했던 나하고 똑같은 사람이었다는 겁니다. 지금 결과가 이상하게 되어버렸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자칫 잘못생각하면 주님을 핍박했다는 그것을 근거로 구원받는 혜택을 누린 게 되어버리지요. 그것은 출발점을 내가 시작했고 결과가 주님 쪽이라면 그렇게 되는데 사도바울에게 먼저 찾아왔다는 말은 주님 쪽에서 먼저 너한테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창세전에 이미 사울이 예수 믿는 사람을 핍박하도록 결정된 그 사항이 사울에게 새로운 주체의 내용으로 이제는 들어오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아까 이야기했지만 미역국 못 끓이는 며느리는 “어머니, 저 미역국 못 끓입니다.” 하고 “여보, 이혼해. 미역국 잘 끓이는 여자 만나.” 하고 갈라서면 안 되고 “내가 다른 국은 다 할 줄 아는데, 소고기국도 끓일 줄 알고 북엇국도 끓일 줄 알고 다 할 줄 아는데 하필 빠진 게 미역국 못 끓이는 거예요.

 

미역국 못 끓이는 그것을 잡아서 너는 미역국 못 끓이는 여인이라는 것으로 말미암아 네 남편을 핍박하는 여인으로 만들어서, 이것은 말도 안 되는 억지지만 어쨌든지 그렇게 만들어놓고 미역국도 못 끓인다고 지적하시는 그 시어머니 곁을 못 떠나게 만드는 그 단단한 본드 같은 역할로서의 새로운 주체를 양도받고 부여받게 되는 겁니다. 그 주체가 어디서 나오는가? 그것은 바로 중보자, 예수님 본인의 주체에서 흘러들어온 겁니다. “아버지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그 주체가 이제는 구원받는 모든 사람들의 주체로 스며들게 됩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 버림받아도 마땅한 존재입니다.” 그게 바로 대표자와 그 대표자를 따를 수밖에 없는 구원 받기로 작정된 사람의 특징입니다. 끝.

 

주체가 안정돼야 돼요. 흔들리지 말아야 돼요. 내 쪽에서 원인을 끄집어낸다면, 그래서 내가 원하는 메시아, 내가 원하는 중보자를 내가 선택한다면 어떤 사람을 핍박할 경우에나 핍박이지 평소에 사도바울이 잠자고 있는 그것이 핍박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을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의 주체는 뭐냐 하면,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내가 누군가를 핍박하는 것은 나쁜 짓이야. 그런데 내가 아침에 밥을 먹는다? 이것은 나쁜 짓이 아니지.’ 나쁜 짓과 나쁜 짓 아닌 것을 구분지어서 이것은 나쁜 짓 아닌 것, 이것은 나쁜 짓, 이렇게 되어버리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나쁜 짓 아닌 것만 수정하고 개선해나가면 합쳐서 온전한 사람이 될 수 있어요.

 

그것은 기존의 주체를 옹호하게 되는 겁니다. 이것은 부여받은 주체가 아니고 자기가 자기를 관리하는 주체가 되기에 본인 스스로가 중보자가 되어버렸어요. 이해를 잘 못하시는 것 같아서 새로운 이야기를 해서 이해를 돕겠습니다만 기대는 안합니다. 상상하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냐 하면, 신도 인간이 필요하고 인간도 신이 필요한 그 관계가 인간들이 상상한 하나님이에요. “인간들이 영광 돌리니 좋지요? 하나님도 인간이 없으면 심심하잖아요. 그러니까 자기 피조물에게 영광 받으시니 좋고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만드신 이유가 거기에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만들었으니 우리가 영광돌리겠습니다.” 이게 신도 인간이 필요하고 인간도 신이 필요하다는 것, 인간이 이 땅에서 사는데 너무 고생스러우니까 가는 길마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시면 그게 바로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이게 인간의 상상이거든요.

 

상상을 구체화시킨 것이 상징적인 하나님관계입니다. 이것은 종교제도에요. 종교제도와 형식과 반복적인 규칙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십일조입니다. 십일조를 드리면 하나님도 만족하고. 창고를 새로 건축해 놓았는데 십일조를 드리고 그 다음날 가보니까 창고가 가득 찼어요. 의심치 말라, 시험해 보라고 했으니 창고를 지었다는 말이지요. 창고를 채우는 방법은 간단해요. 신용대출? 아닙니다. 제3금융권대출? 아닙니다. 십일조만 드리면 새벽 3시 몇 분에 이미 창고가 가득 채워져 있는 거예요. 말라기에 나옵니다.

 

윈윈, 서로 만족하는 거예요. 어떤 특정제도를 통해서 반복적으로 효과를 낼 수 있다는 겁니다. 2시 예배는 안돼요. 11시 예배에 와야지. 11시 큰 예배, 낮 예배에 와야지 뒤 늦게 오후예배, 2시에 하는 예배에 참석하면 축복의 감이 좀 떨어져서 행운이 적게 들어오는 겁니다. 이처럼 어떤 특정행동을 그대로 하게 되면 똑같은 효과를 반복적으로 얻을 수 있다는, 인간도 만족하고 하나님도 만족하는 것이 상징적인 하나님관계입니다. 상징이라는 것은 문자, 기호라는 뜻이에요. 상상한 것을 법으로 구체화시키면 이게 상징이 되는 겁니다.

 

이게 종교제도, 종교단체라 하는 것이 그 다음에는 실재, 진짜 실재의 하나님은 뭐냐 하면, 이것은 인간과 하나님이 원수관계입니다. “너 죽었어.”하지요. 그래서 인간들이 신을 찾는 것은 진짜 다가오는 하나님을 피해보려고 신을 찾는 거예요. 인간이 신을 욕망하는 것은 진짜 신이 만들어준 현실을 외면하고 내가 그리워하고 내가 원하는 신과 하나님의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열심히 혼신을 다해서 매달립니다. 그토록 매달려요. 그러나 중보자 되시는 하나님은 그런 것을 용납하지 않지요.

 

예를 들면 애가 하나 있는데 맨날 학교 가서 사고치고 부모가 학교에 불려가고, 사고 치면 또 부모가 불려가곤 했다 이 말이지요. 어느 날 학교 선생님이 불러서 부모가 학교에 가요. 그런데 이 철없는 애는 “나 우리 담임 꼴 보기도 싫어. 엄마가 이야기해.” 하고 자기는 딴 짓하고 있습니다. 엄마가 면담하고 나오면서 “얘야, 오늘 너 뭐 먹고 싶니?” “나 오늘 짬짜면 먹을 거야. 자장면과 짬뽕 다 먹어야지.” “그래, 먹자.”하고 사줍니다. 애는 “야, 맛있다.” 하거든요. 그러면서 “엄마, 내일 또 사줄 거지?” 엄마가 “너, 오늘부로 퇴학당했다.”

 

지금 애는 부모하고 선생님하고 무슨 대화를 했는지는 관심이 없어요. 자기는 그저 먹고 싶은 것이나 먹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아버지와 만났어요. 십자가에 죽어야 자기 백성의 죄가 용서받습니다. 그런데 철딱서니 없는 인간들은 짬짜면만 찾고 있다는 말이지요. 이 땅에서 고생 많은 인간들 행복하고 풍족하게 사는 것만 기대하고 있는 거예요. 정작 아버지는 아들 만나서 무슨 대화를 했는지 전혀 고려 못하고 그저 상상한 하나님, “하나님, 저 필요하지요? 제 찬양 필요하지요? 법적으로 지켜주시면 자동적으로 복 주실 거지요?” 상상과 상징에만 매달려 있어요. 실제로 하나님을 소개하니 자기가 원하는 하나님이 아니라서 도망치면서 나름대로의 하나님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나름대로의 하나님 섬기는 방법을 본인이 할 수 있는 역량대로 만들어서 자기가 스스로 법이 되어서 스스로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고 난리를 치는 거예요.

 

이번 강의의 특징이 뭐냐 하면, 모든 종교나 모든 기독교는 잊어버리자는 말이지요. 왜냐하면, 우리가 우리자신을 대변할 수가 없고 대변자가 따로 있다는 겁니다. 따로 있어서 그분이 내가 현재 쥐고 있는 주체를 완전히 바꿔버려요. 무엇의 주체로? 본인의 주체로 바꿔버립니다. 그 분 본인의 주체가 어떠냐 하면 그 분은 진짜 하나님을 만났던 분이거든요. 만났던 분이 생각하고 봤던 그 세계관을 우리의 주체에 집어넣습니다. 그렇다면 짬짜면 생각은 사라지고 우리는 미역국도 못 끓이는 며느리, 죄인으로 낙인찍히지요.

 

그렇게 낙인찍혀도 즐거운 이유는 낙인을 찍어주신 그 분이 책임지고 천국과 영생을 해결했기에 해결했다는 통지를 주기 위해서 “너는 미역국도 못 끓이는 며느리”로 낙인찍어 주시는 그 행복을 우리에게 주시는 겁니다. 그것을 가지고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리스도인.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내 몸에 십자가의 흔적이 있다고 했어요. 그 십자가, 아버지와 아들과 담판 지었던 그 십자가, 그 십자가 말고 나는 다른 자랑거리가 없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십자가 앞에 서야 나는 미역국도 못 끓이는, 미역국도 못 끓여서 지옥가야 마땅한 그런 존재로 분명히 흔들리지 않는 확고한 나의 위상과 위치가 결정 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모세가 하나님 만났다는 이 사실은 이제는 우리가 대신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오히려 감사하고 이렇게 해야 돼요. “모세야, 하나님 만나서 너나 실컷 당해봐라.”라는 식으로 우리는 이 본문을 봐야 되겠지요. 이 본문을 보게 되면, 모세가 먼저 하나님을 만났다는 의미가 무엇인가? 졸기 전에 정신 바짝 차렸을 때 후딱 해야 돼요. 다수의 집단성을 하나로 만들어요. 숫자가 많아요. 열 두 지파가 씨를 많이 퍼뜨렸거든요. 그 다수의 집단성을 하나, 숫자로 하면 1로 표기가 됩니다. 1로 표기한 그 분이 하나님과 만나게 돼요. 그러면 하나님은 하나인가? 이것은 몰라요.

 

하나님이 한 분이라고 하는 것은 유대교에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하나님은 하나시고 이방신은 다신이다. 따라서 하나의 신을 믿으면 구원 받는다.” 그러면 숫자 하나를 믿으면 구원받는 거예요. 신은 하나이시라고 하면, 유일신을 믿으면 구원 받는 겁니까? 주님께서 십자가를 질 필요도 없네요. “여러분, 하나님은 유일신입니다. 아멘.” 그러면 다 구원받는 겁니까? 숫자가 적용되는 것은 인간세계에만 적용됩니다. 하나님한테는 숫자라는 자체가 적용대상이 안 되는 겁니다. “오직 중보자가 한 분이다. 따라서 중보자로 인하여 하나님은 한 분이다.” 이것은 돼요. 그런데 “하나님은 한 분인데 중보자가 한 분이다.” 이렇게 되면 인간들은 믿음으로 구원을 따낸 것처럼 그렇게 생각해 버립니다. 그런 오해가 생겨요.

 

그런데 그런 오해가 생기는 것은 하나님 쪽에서 의도한 거예요. 왜냐하면 오인이 있는 곳에만 반드시 진리가 나오기 때문에. 반드시 진리라는 것은 실패한 장소, 우리가 시도했던 모든 실패한 것이 실패임을 들춰내면서 불쑥 올라오면서 진리가 튀어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실패하는 것이 어쩔 수 없어요. 평생 실패합시다. 그 실패를 즐깁시다. 왜냐하면, 문제해결은 우리 쪽이 아니고 중보자가 해결했기 때문에. 대단한 빽이죠.

 

다수의 집단성을 하나로 하게 되면 간단하네요. 투표하면 되겠네요. 투표를 하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나느냐 하면, 만약 투표하는 인구가 40만 표라면 그 40만 표 중에서 20만 1표가 나오면 모세가 당선되어서 대표자가 되지 않습니까? 그러면 되겠네요. 이 방법 어떻습니까? 여러분 눈치가 이 방법은 안 된다는 눈치인데 이 방법은 왜 안 되는 거지요? 하나님을 대표로 만나기 위해서 한 분 뽑는다는데 이게 뭐가 잘못된 거예요? 여러분이 그걸 아셔야 해요. 투표해서 모세를 뽑게 되면 그 모세는 40만에 휘둘리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은 한 표를 행사했다면 절대로 자기가 투표한 그 사람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내가 찍어준 그 사람이 나에게 이용당하기를 원하고 있어요. 인간은 표 던진다고 자기 권리를 누구에 양도한 적이 없습니다. 인간은 도대체 누구에게 양도한다는 것을 몰라요. 이용이 있을 뿐이지, 상대방을 이용하려고 덤벼들지 양도한 것은 아니에요. 예수 믿는 것도 예수를 이용하려고 하지 권리를 양도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 주체가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존재에서 나왔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하나지만 하나 깨보면 무려 40만이 들어 있기에 이 하나는 사실은 40만이라고 볼 수밖에 없어요.

 

이 다수의 집단성이 하나로 된다는 말은 이 전체 존재 자체를 끊어버려야 돼요. 누구와? 이 모세와 40만을 끊어버려야 됩니다. 그 끊어진 상태, 40만이 아무것도, 어떤 상황도 모르는 상태에서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찾아와 버리지요. 그 다음에 이 하나의 하나 됨, 모세가 하나님께서 보내신 유일한 일이라는 것을 알기 위해서 이 다수의 40만 히브리인들과 하나 사이에 뭔가 끊어진 사건을 주입합니다. 이게 뭐냐 하면, 살인사건이에요. 살인사건, 또는 죽음사건을 여기에 집어넣습니다.

 

제가 이야기했지요. 하나님은 죽음사건을 집어넣어서 이스라엘전체를 해석한다고 했지요. 여러분이 이 죽음사건이라고 하니까 어떤 점에서 오해를 하느냐 하면, 죽음에 두 가지 정의가 있어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죽음이란 1. 죽음은 사라지는 것이다. 2. 죽음은 공포스럽다. 여러분, 어느쪽이 맞습니까? 죽음은 사라진다. 존재론적으로 보면 이게 맞아요. 있다가 없어지는 것이 죽음이니까. 한 권사님이 “목사님, 죽는 것이 무섭습니다.” 하면 “인생 한 번 살다 누구나 죽기 마련입니다.” “아, 그렇군요.” “늙으면 죽기 마련이니까 그냥 차분하고 안정된 마음으로 죽음을 맞이하시면 됩니다.”

 

그렇게 할 때 뭐가 해소가 안됐어요? 두려운 것, 이 두려움은 해소가 안 되지요. 조용히 죽음을 맞이하면 되는데 왜 두렵지요? 불교 승려는 말합니다. “죽음이란 것은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그냥 자연에서 자연으로 돌아감이다.” 그러면 그 중한테 성질내면서 “에이 씨!” 하면 “엄마야!” 한다고요. 방금 죽는 것을 초연하게 맞이했다면서요? 그렇게 죽음을 맞이했다면서 누가 성질내고 달려들면 당장 초연할 수가 없지요. 이론상 죽음은 사라짐, 혹은 없어짐이라고 하지만 아무리 없어져도 없어지지 않는 것이 있어요. 그 뭔가, 그 뭔가 세상 살면서 두려움과 불안과 공포가 애를 아무리 써도 사라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비록 내가 죽어 없어진다는 그 점을 인정하고 믿는다 할지라도.

 

그러니까 자살한다고 물 깊은 곳을 내려다보면서 “아, 무서워라.” 하고 피하잖아요. 다리 밑으로 뛰어내린다고 내려다보다가 물살이 너무 세서 다음 날 와야겠다고 도로 간답니다. 그건 뭐냐 하면, 죽음은 이겨도 죽음이 주는 공포는 못 이기게 되어 있어요. 이게 죽는 순간뿐만이 아니고 평소에 조용하게 자기 방에 있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방에 있을 때도 갑자기 전기 나가면 무섭잖아요. 그렇게 말 안 듣고 뺀질거리는 애도 번개 치면 방문 활짝 열어 제치고 달려 나와서 엄마 침대에 개구리처럼 뛰어오릅니다.

 

<사운드오브뮤직> 이라는 영화 초반부에 보세요. 마리아선생님이 나오는데 갑자기 번개가 치니까 애들이 침대로 다 모여들어서 침대에서 뛰면서 노래 부르잖아요. 나중에 커튼 다 찢어서 애들 옷 만들어 입히고. 이 공포라는 것은 꼭 죽는 때만 엄습하는 것이 아니고 평소에 예상 못한 일이 일어나면 인간은 공포 속에 있습니다. 인간은 죽음 속에 있는 거예요. 도저히 해결되지 않는 죽음 속에. 이것은 물리학으로 아무리 박사학위를 따도 이 공포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인간은 죽음과 함께 더불어 사는 거예요.

 

그런데 그 공포를 하나님께서 죽어서 죽는 것이 아니고 산채로 죽여 버립니다. 어떤 죽음이 주어지느냐 하면, 자기가 경험했던 예상 밖의 체험을 만듭니다. 그게 떨기나무가 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떨기나무가 타지는 않는데 불이 붙었다. 그러면 불 따로 떨기나무 따로 입니다. 남포교회 박영선 목사는 『하나님의 열심』이라는 책에서 이걸 오해하고 있어요. “여러분, 떨기나무에 불이 붙어서 모세가 종이 되었으니 모세는 불붙은 떨기나무처럼 지치지 않고 열심히 일했다.” 하는 겁니다. 네가 그렇게 해보세요. 그게 되는가? 주의 성령이 함께 있으면 교회 일도 지치지 않고 할 수 있다는 거예요. 그게 진정한 주의 종이라는 겁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에요.

 

지금 이야기합니다. 지치지 않더라도 그 가운데 공포가 있다고. 지치지 않는 가운데서도 공포가 있는 거예요. 열심히 주의 일에 봉사하고 열심히 찬양하고 열심히 성경보고 하는 그 가운데서도 공포가 있어요. 새벽제단, 참 이 말 오랜만에 쓰는데 새벽제단에 앉아가지고 캄캄한데 기도해 보세요. 아무도 없을 때는 공포를 이기면서 기도하지요. 그런데 아무도 오지 않는 시간에 누가 문을 열고 드르륵, 하고 들어오면 “아이고!” 하고 기도고 뭐고 다 없어요. 그렇게 기도한 게 무슨 소용이 있어요. 사는 것 자체가 공포스러운데.

 

심지어 어떤 노인네는 자기 얼굴보고 놀라요. 제가 전에 이야기했잖아요. 할머니 치고 셀카 찍는 경우는 없다고요. 얼마나 혐오스럽겠습니까? “내가 어쩌다 이렇게 되었나!” 유명한 명언입니다. “내가 우에 하다 이렇게 되었노!” 떨기나무는 분리를 이야기합니다. 떨기나무 따로 불 따로 입니다. 왜, 불에 안탔으니까. 떨기나무를 재료로 해서 태우지를 않았으니까. 따라서 이 말은 뭐냐 하면, “모세야, 네 일을 하라고 내가 찾아온 것이 아니고 바로 내 일을 하기 위해서 너를 불렀다.” 하는 겁니다.

 

주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 불렀다면 무엇이 유지되어야 하느냐 하면, 그 간격이 유지되어야 하지요. 아까 차이와 간격이야기 했지요. 간격이 유지되어야 할 이유가 뭐냐 하면, 바로 이겁니다. 다수의 집단성, 다수의 집단성에서 하나가 될 때 이게 핵분열처럼 이 하나가 다시 점선으로 하나가 이렇게 됩니다. 모세가 하나냐, 아니면 모세와 함께 있는 그분의 이름이 하나인가, 이게 분리가 되는 겁니다. 원통 두 개가 겹쳐져 있는 이 그림 또 안 그려도 되겠지요? 이것은 다 아신다 치고 다수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모릅니다.

 

따라서 하나님 쪽에서 관계할 수 있는 새로운 주체를 만드는데 그 주체를 만들면서 모세 따로, 모세와 더불어서 함께 계신 주님의 이름 따로, 이렇게 만듭니다. 그래서 모세를 추종하다가 주의 이름으로 나올 수 있는 경로를 모세 본인이 제공하는 겁니다. 죄인으로 왔다가 의인으로 구원받는 경로를 주님께서 우리에게 마련한 것처럼 모세도 모세만 믿다가 주님을 믿게 된 그 경로를 그들에게 제시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그들이 모세 믿는 것은 아주 간편합니다. 어떻게 간편한가?

 

투표를 한 적이 없지만 그들이 투표를 했다고 칩시다. 그러면 모세는 자기에게 표 찍어준 사람들인 이스라엘, 현재 히브리인들의 말을 들어야 되겠지요. “우리가 표를 찍어서 당신을 대표자로 만들었기 때문에 우리가 시키는 대로 하세요.”라고 하는 겁니다. 모세가 찾아왔는데요? 아까 제가 여러 번 이야기했잖아요. 모세가 찾아왔든 말든 이미 모세를 하나님이 보냈다 하는 순간 그들에게 그 하나님은 무슨 하나님이냐 하면 상상적 하나님이고 상징적 하나님이에요. 왜, 이들은 상상과 상징밖에 모르는 주체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보냈다고 하면 으레 그런 하나님인줄 알고 있다니까요.

 

이러한 모세와 하나님의 분리는 모세에게 찾아온 것같이 하나님이 찾아와 언약을 주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도 꼭 마찬가지에요. 아브람 따로 있고 아브라함 따로 있고, 이삭도 마찬가지고요. 은혜 받은 이삭과 실수한, 엉터리로 밀어붙인, 야곱보다 에서를 더 좋아한 그 잘못된 것, 아까 이야기했듯이 자기가 싫어하는 타입에 복을 주고 자기가 좋아하는 타입을 오히려 저주케 하는 그 현장에서 본인이 그렇게 결정을 내렸습니다. 그러한 이삭, 그리고 야곱, 야곱 따로 있고 나중에 이름이 바뀐 이스라엘이 또 따로 있고.

 

언약 속에는 두 가지 속성을 다 같이 함유하는 대표자로서 미리 선택한 겁니다. 예수님도 속죄하는 기능만 있는 분이 아니고 아울러서 심판자잖아요. 공의와 자비의 두 가지 속성이 다 들어 있는 겁니다. 이걸 모세가 미리 앞당겨서 만나게 되는 거예요. 그리고 이 사실에 대해서 사람들은 몰라요. 모세가 찾아와서 구원한다고 하니까 그 용어, 그 언어와 기호와 문자는 백성들이 당시 사용하던 문자이기 때문에 그 문자와 언어, 기호의 이해와 분석은 그들의 존재적인 주체에서 다 이미 접수를 하고 점령을 하고 말았어요.

 

“구원해 준다고요?” “고맙습니다.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 이렇게 따라왔다가 나중에 원망으로 끝나잖아요. 그만큼 그들은 처음부터 오해하고 오인하고 자기가 마치 구원받아야 될 자격자 인 것 같은 착각 속에서 인간적이고 세상적인 모세를 따라 온 겁니다. 그리고 모세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출애굽기 4장을 한 번 보겠습니다. 22절에, “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이렇게 했습니다. 집단적인 그 단체가 아들들이 아니고 하나의 아들로 규정이 되고 말지요. 그리고 난 뒤에 24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길의 숙소에서 모세를 만나사 그를 죽이려하시는지라.” 문제 나갑니다. 모세가 어떤 잘못을 저질렀습니까? 하나님이 모세를 죽이려 하는 것은 분명히 뭔가 잘못한 것이 있기 때문에 죽이려 한 것이다, 라고 생각하는 것이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고 그 당시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이라는 존재가 다 그렇습니다.

 

‘저 사람이 소경되고 못난 것은 반드시 죄를 지어서 그렇다. 망대가 무너져서 18명이 죽은 것은 그만큼 우리보다 더 죄를 많이 졌을 것이다. 이것이 우리에게 통용되고 있는 상식화된 우리의 주체의 바다에서 나온 오인이고 오해고 곡해입니다. 모세가 잘못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모세를 죽이려고 했을 것이다. 반대로 하면 모세가 제대로 굴었으면 절대로 하나님이 죽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죽이지 아니하면 이것은 애당초 구원의 출애굽은 성사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왜 당장 벼락 맞게 해서 죽일 수 없겠습니까? 당장 죽일 수 있는데 그냥 주께서 발로 차면 죽을 수도 있는 문제인데 모세를 죽이면서 그 뒤에 따라오는 부속반응들이 있어요. 그 부속반응들을 통해서 모세는 모세 이름으로 가는 것이 아니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을 드러내는 사명을 띠고, 언약을 둘둘 감고 가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모세는 모세 이름이 아니고 피남편이라는 이름으로 모세가 가야만 했습니다.

 

그게 무슨 이야기냐 하면, “여호와께서 길의 숙소에서 모세를 만나사 그를 죽이려하시는지라 십보라가 차돌을 취하여 그 아들의 양피를 베어 모세의 발 앞에 던지며 가로되 당신은 참으로 내게 피 남편이로다 하니.” 여러분 부인이 여러분 보고 “피남편”이라 하면 기분 좋겠습니까? “당신은 피남편이다. 당신은 피하고 살아라.” 그렇게 되면 이상하잖아요. “여호와께서 모세를 놓으시니라 그 때에 십보라가 피 남편이라 함은 할례를 인함이었더라.”(출 4:26) 지금 애굽에 가서 구원하기 바쁜데 자기편끼리 토닥거려서야 되겠습니까? 모세하고 지금 하나님하고 동업자 아닙니까? 가는 와중에 자기들끼리 숙소에서부터 싸워서야 뭐가 되겠어요?

 

전쟁보다 더 무서운 것은 병사들 간의 내부폭력이 더 문제입니다. 합참의장이 그런 이야기 했답니다. 자기도 젊었을 때 사람들 많이 팼으면서 그런 소리 하면 정말 싫어요. 1974년도에 제가 군 입대해서 매일 같이 맞았습니다. 그걸 알고 저는 매일같이 안 때렸어요. 왜? 내 선에서 한 번 끊어보자 해서 결국 우리 부대는 완전히 폭력이 사라진, 폭력 없이도 잘 돌아간 군대가 되었습니다. 제가 군에 가서 하나 기여한 것은 그겁니다. “맞자. 그러나 때리지 말자.” 지금 내부적으로 자기 동업자끼리 때리면 되겠습니까? 죽이면 되겠어요?

 

예를 들어서 “주님, 선교하겠습니다.” 하고 필리핀 갔는데 가기도 전에 김포공항에서 하나님이 다짜고짜 죽여 버리려고 하면 어떻게 하겠어요? 들어가지도 못하게 집으로 와야 되지 않습니까? 집으로 다시 돌아오는 정도도 아니지요. 아예 죽이려고 했으니까. 모세는 죽고 피남편으로 다시 태어난 그것은 개인의 구원문제가 아니고 네가 해야 될 본래취지가 언약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할례언약이 뭐냐 하면, 피입니다. 피라는 것은 근본적인 심판을 의미하는 겁니다. 심판이 한창 벌어지는 그 장소에 비로소 그동안 보이지 않던 영생, 구원이 그 현장에만 보인다는 겁니다.

 

심판 없는 곳에는 영생도 없고 심판 있는 그 장소에만 영생이 있는 겁니다. 부활, 그것은 바로 십자가라는 사건 속에서만 그 다음에 부활이 있는 거예요. 그래서 십자가를 경유하지 않는 삶은 소생이지 부활이 아닙니다. 예수님 이전에도 안 죽은 사람이 많아요. 엘리야도 그렇고 에녹도 그렇지만 그걸 부활이라 하지는 않습니다. 부활이라는 것은 언약에 의해서 살아나야 그것이 확고하고 고정된 영원한 운명으로 장착이 되고 고착이 되어버려요. 내 몸 살았다. 살아봤자 늙어서 또 죽는데 그게 무슨 소용이 있어요. 안되잖아요.

 

그러니 연세와 죽음과 아예 상관없이 다른 관계에 있어서 영생을 얻어야 그 다음에는 죽어도 괜찮은 거예요.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보면 “목 베인 영혼”이 나와요. 목 베인 영혼이 산자에요. 그리고 “죽도록 충성하라 그러면 생명을 얻는다.” 이 모든 것이 언약에 의해서 죽어야지 그냥 살려고 애쓰다가 죽는 그런 것 말고. 그래서 영생 얻게 된, 이미 하나님에 의해서 산 사람은 진짜 연탄불 갈아도 순교입니다. 연탄불 갈아도 순교요, 차 운전해도 전도요. 저도 이쪽으로 이사 와서 십년 째 전도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일체 말을 하지 않는 인내성이 있는 전도에요.

 

왜냐하면, 개 같은 자들에게는 진주를 던지지 말아야 되기에 절대로 던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항상 대비되어 있어요. 언젠가 “교회가 어떻습니까?” 하고 물으면 그 때는 기다렸다는 듯이 이야기하겠지만 “교회 좀 나가 보시지요. 영생을 얻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하는 그런 이야기는 절대로 하지 않습니다. 말을 아낍니다. 보통 인내가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고 싶은데 ‘아니야. 전도해야 돼.’ 도를 전해야 되기 때문에 그들의 마음이 열릴 때까지 그냥 계속 대기하고 있는 겁니다.

 

저는 우리 십자가마을만큼 전도를 많이 하는 단체는 없다고 봅니다. 아무 말을 안 해요. 그렇게 새벽 2시 3시까지 말을 많이 해도 “복음이 무엇입니까?” 해도 아무소리 없어요. “예수님이 죽어야 구원받지요?” “그래서 뭐가 좋은데?” 누구한테 이야기한다는 것은 가르침이 아니고 내가 나한테 가르칠 용의가 되어 있을 경우에만 입이 열리게 되어 있어요. 나는 기껏 이것밖에 모른다고 상대방에게 자기 헛점을 공개할 용의가 되어 있는 이상 그것은 전도가 되고 자기 잘남은 전도가 아니고 자기자랑입니다.

 

“내가 예수 믿다가 이정도로 실패하고 이정도로 모르겠어.” 그게 전도에요. “그런데 나 같은 인간도 구원했다.” 이렇게 되어야지 “나는 완벽하다.” 이렇게 되면 그것은 전도가 아니고 남 약 올리는 것 밖에 안 됩니다. 약 올린다는 것은 그만큼 아직까지 열등의식이 있다는 뜻이거든요. 그래서 여기서 모세보다 언약이 주도적입니다. 그렇다면 모세가 이제부터는 자기 자신은 진즉에 죽어야 될 입장이기에 백성 앞에 나올 때나 바로 앞에 나올 때는 반드시 그 점을 고려해서 나오게 되는 거예요.

 

이 말은 뭐냐 하면, 모세는 자기 말을 믿지 않는 바로 자기 말을 믿지 않는 히브리 백성들의 마음을 충분하게 이해를 하게 됩니다. 왜냐, 내가 그랬었으니까. 예수님께서도 말씀 전할 때 충분히 인간들의 마음을 이해합니다. 그게 바로 인간들이니까. 그래서 모세가 바로 앞에 설 때는 바로가 어떻게 나온다는 것에 대해서 이미 충분히 이해를 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 전쟁, 모세의 전쟁을 하지 않습니다. 뭘 하는가? 주님의 전쟁을 할 수밖에 없어요. 주님의 전쟁에서는 누가 빠지는가? 모세 본인이 뒤로 물러나 빠집니다. 빠진다는 말은 자기가 그 사람을 전도한다든지 그 사람을 내 사람 만든다는 것이 없이 “그 다음조치는 주님께서 알아서 조치해주세요. 다만 제가 필요하다면 그 현장에 제가 나서겠습니다.”라는 식으로 나서게 되지요.

 

그런데 모세가 초반에 이렇게 했어요. 초반에는 그랬는데 나중에는 그렇게 못했습니다. 나중에 왜 그렇게 못했는가 하면 모세는 하나님의 집의 종이지 아들이 아니거든요. 결국 인간적인 한계를 드러냅니다. “에이, 씨! 저렇게도 말을 안 듣고 주님께서 주신 은혜를 몰라.” 하니까 갑자기 주님이 와가지고 모세한테 “네가 왜 성질내나, 네가? 네가 왜 성질을 내?” “말을 안 듣잖아요.” “너는 내 말 들었나?” 갑자기 사람들을 자기백성인줄 알고 착각을 해버린 겁니다. 그래서 모세는 결국 주의 이름 쪽에 있는 것이 아니고 모세도 결국 백성들 편에 있는 거예요.

 

결국 구원은 모세 더하기 주님이 아니고 오로지 끝까지 주님만이 우리를 구원할 구세주가 되는 겁니다. 십분 쉽시다.

 첨부파일 : 2014여름수련회(낯선 경계선) 출애굽기 제 5강.hwp (37.0K), Down: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