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여름수련회(낯선 경계선) 출애굽기 제 6강
출애굽기 4장 26절에 “여호와께서 모세를 놓으시니라.” 모세가 예뻐서? 아닙니다. 모세가 자기의 동역자라서? 아니에요. 모세를 놓는데 근거가 있어요. 어떤 이유 때문에 모세를 죽이지 않고 살려두셨습니까? 그것은 아내가 아들의 양피를 베어서 할례를 행했기 때문에 여호와께서 모세를 놓아줬습니다. 그러면 할례를 행한다는 이 아이디어는 사람에게서 나올 수가 없는 거예요. 사람들이 알지도 못하는 이 할례언약 때문에 모세가 죽을 뻔 했다가 하나님 손에서 살림을 당했습니다. 이분이 진짜 하나님이라면 도대체 우리가 상상한 하나님은 뭐가 빠져 있어요? 할례언약도 빠져 있고 다 빠져 있지요. 언약자체가 빠져 있지요.
“나 여기 있으니 날 살려주세요.” 그것뿐이거든요. 나 여기 있음, 나라는 존재 여기 있음에 날 살려 달라는 거지요. 그 하나님은 도대체 어디서 온 하나님이냐 하는 겁니다. 할례언약이 피가 없는 하나님과 피가 있는 하나님, 그 두 하나님의 전쟁이 시작되는 거예요. 하나님 안 믿는 사람과 하나님 믿는 사람의 전쟁이 아닙니다. 무신론자와 유신론자간의 전쟁이 아니고 하나님 믿는 사람과 하나님의 언약에 사로잡힌 사람의 전쟁이에요. 그러니까 이 출애굽이라 하는 것이 정작 구원받는 히브리인들도 출애굽을 이해 못했으니까요. 구태여 나갈 이유가 없는데 왜 자꾸 나가느냐는 거예요. 왜 자꾸 집을 나가요. 그냥 집에 있지 왜 자꾸 나갑니까? 나가면 산에나 들어갈 뿐이에요. 어디로 갈 데가 있어야지요. 갈 데도 없으면서 나가기는 어디로 나갑니까?
이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들의 상식화된 “갈 데 없다. 죽어도 이 세상과 함께 죽자. 그것이 우리의 운명이다.”라는 이것이 우리의 보통의 삶입니다. 거기에 언약을 이야기하고 출애굽을 이야기하니까 출애굽이 얼마나 우리한테 억지스럽고 부자연스럽고 가슴에 와 닿지 않고 마치 옛날의 에피소드가 지금은 전혀 현실성이 뚝 떨어져서 전혀 비현실적인 이야기처럼 들리는 겁니다. 모세가 홍해를 갈랐다고 한다면 “그때는 그랬겠지. 지금은 그런 일이 안 일어나니 나는 성경 못 믿겠다. 믿게 하려 한다면 또 다시 홍해 한번 갈라지게 해 봐라. 지팡이를 가지고 홍해까지 갈 것 없이 요 앞의 계곡물이라도 갈라봐라. 그러면 믿겠다.”라고 나오는 겁니다.
거기에 대해서 우리가 어떻게 이야기합니까? “우리가 심판조차 모르는 상태에서 무슨 구원을 논합니까?” 우리가 심판을 몰라요. 심판은 하나님이 오셔서 실시해줘야 심판이란 게 성사됩니다. 우리 자체적으로 심판받는 거요? 우리가 알아서 다 했어요. 나쁜 짓 하는 사람 있으면 잡아가두고 될 수 있는 대로 우리에게 해로운 것이 안 오도록 알아서 조치를 다 한 거예요. 그게 무슨 나라냐? 바로왕이 지배하는 애굽 나라입니다. 애굽나라가 뭐냐 하면, 집단성이거든요. 집단에서 대표로 누굴 뽑았습니까? 바로왕을 뽑았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질서가 유지되겠지요. 이것이 바로 애굽이에요. 간단한 겁니다. 백성들의 재산과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 바로가 정치적 책무를 다할 때 그 사람은 존경받는 왕이 되고 제국은 굳건하게 번영하고 그 안에 있는 다수의 백성들은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안정감을 얻는 이것이 전부잖아요. 그런데 이것이 심판받을 상황인 것을 이 자체 내에서 그 이유를 찾아낼 수가 있느냐는 말입니다. 찾아낼 수가 없지요. 이게 최선인데요. 더 이상 하지도 못해요. 아주 완벽해요. 완벽하니까 전쟁에서도 승리하고 뭐든지 잘 되는 겁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일부가 되어서 우리나라를 찬미하고. 아, 대한민국! 노래를 부르면서 꿈은 이루어진다고. 그래서 우린 이 나라를 사랑하고 좋아합니다. 더 이상 욕심도 없어요. 우리나라만 잘되기를 바랄뿐이에요. 그저 우리나라 잘되면 그 정도로 아주 소박하게 만족하는 거예요. 이런 나라가 심판받을 어떤 죄악이나 폭행이 있다면 교도소 지어서 자체적으로 해결해 버려요. “어디서 선한 나라에서 비 문명국가에서나 있을 폭력사건이 일어나나?” 해서 교도소에 집어넣으면 되는 거예요.
어떤 여자가 남자 둘을 샌드위치처럼 포개진 것처럼 하고 있다. 희한하다. 다 그런 것은 아니거든요. 이런 여자가 있으면 체포해서 법으로 처벌하면 나머지 사람들은 건전하고 살만한 세상에서 사는 이것이 우리가 바라는 행복의 나라가 아닙니까? 그러면 되었잖아요. 종교요? 절이나 교회나 성당? 그것은 국가를 위해서 봉사하면 되는 거예요. 이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드는데 서로 사랑하며 기여하면 되는 겁니다. 우리의 24시간 관심사가 이것뿐이에요. 태극기 휘날릴 때 눈물 흘리면서 “대한민국은 영원하라!” 기도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할 일이잖아요. 교회가 할 일이고.
심판? 생뚱맞은 이야기에요. 뭐가 잘못되어서 심판을 받습니까? 심판받는 이유를 여기에서는 찾아낼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당사자 모세도 당황스러웠습니다. “그냥 양이나 치고 있는데 왜 나를 불렀습니까?” 결국 심판은 우리에 대한 심판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를 이런 식으로 자족케 하는 주의 이름의 원수에 관한 전쟁의 선포가 심판이었습니다. 주의 이름의 원수, 주의 이름이라는 분이 계셔요. 그 주의 이름의 원수. 우리는 그 존재가 어떤지 우리는 모르지요. 모르는데 주의 이름이 활동을 개시하면서 주의 이름의 원수의 실체가 서서히 배후에서 등장하게 되는 겁니다.
그 첫 번째 등장한 것이 출애굽기 5장에 나옵니다. 5장에 “그 후에 모세와 아론이 가서 바로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니라 하셨나이다 바로가 가로되 여호와가 누구관대 내가 그 말을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제가 벌써 몇 번째 이야기합니다만 우리는 출애굽 할 때 누구 편에 서라고 했습니까? 모세 편에 서지 말고 어느 편에 서라? 바로 왕 편에 서서 이 바로 왕을 한 번 보세요. 바로 왕이 잘못한 게 뭐가 있습니까? 만약 여러분이 대통령이고 대통령한테 어떤 목사가 와서 “내가 제주도에 나라 하나 만드는데 전라도 사람 한 5천명, 강원도 사람 5만 명 내 줘.” 하면 “드려야죠. 왜 이제 오셨습니까? 마땅히 드려야죠.” 이렇게 합니까? 국회동의도 안 나는데 자기 마음대로? “준비 다 되어 있습니다. 내 드려야죠.” 이렇게 합니까? 뭐라고 하겠습니까?
“뭐라고? 뭐라고 했어! 여호와? 유 병언 때문에 시끄럽더니 이건 또 유 병언이 아니고 다른 게, 또 딴 게 설치네. 여호와라는 새로운 단체가 있나?” 그걸 왜 내줍니까, 우리가. 정말 너무나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하나님이 모세한테 시킨 거예요. 그래서 논리 따라가면 복잡하기에 결론부터 먼저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의 원수가 뭐냐 하면, 딴 거 아니고 강퍅입니다, 강퍅. 로마서 9장에서 11장에 언급한 거예요.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로라 하셨으니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롬 9:17,18) 하나님의 적은 뭐다? 우리 마음을 강퍅케 하는 것이다. 그런데 강퍅한 사람치고 절대로 강퍅하지 않습니다. 다 어질고 순하고 크리스마스 때 되면 크리스마스 씰도 사고 구제하고 자선냄비에 1억짜리 봉투도 넣고 그렇게 해요. 그런데 그게 강퍅이라니까요, 강퍅. 강퍅 안하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아무도 없어요. “노바디노바디!” 강퍅하지 않은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로마서 5장 10절에, 하나님의 원수 된 자를 자신의 피로 의롭게 했다고 했습니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아무도 강퍅 안할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건드리지 않으면 강퍅 안 해요. 주께서 일부러 건드립니다. 건드리는데 건드리는 그 문제 제기가 익히 잘 할 수 있는 것을 피합니다. “미역국 끓여라.” 우리가 못하는 것, 아브라함에게 그 많은 것 가운데 “네 사랑하는 아들이 있지?” “있습니다. 지금 컴퓨터 게임하면서 잘 있습니다.” “네 아들 내일 가야산에 가서 바치라.” 이런 거예요. 우리가 제일 아끼는 것, 다른 것은 다 내놓아도 이것은 못 내놓습니다, 라는 것을 유발시켜놓고 꼭 그것을 달라고 합니다.
“주여, 이것만은, 제발 이것만은. 모든 것을 다 드릴 테니 제발 그 여자만은 허락하소서.” 임 재범이 그렇게 호소했던, 노래방에서 그렇게 불러대는 그 “어찌합니까?” 모든 것을 다 할 테니 이 여자만은 허락해 달라는 바로 그것, 그것을 가지고 “드디어 강퍅하구나.” 그렇게 되는 겁니다. 손가락 가지고 우리의 주체에다 찔러봅니다. 찌르게 되면 우리는 우리의 본색을 주체하지 못하고 드러냅니다. 강퍅합니다. “주여, 안 아픈 데를 건드려 주옵소서.” 엉덩이 종기가 난다든지. 우리 힘으로 원상회복 되는 것만 경고적으로 찔러주면 정신 차린다는 게 우리 생각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가장 사랑하는 것을 달라고 합니다. 우리가 내줄 턱이 없습니다. 그래서 또 강퍅하구나, 그것이 바로 주님 원수입니다. 나는 너에게 모든 것을 줬건만 너는 모든 것을 준 자에게 아무 관심 없고 그것을 모독하는 차원에서 따로 주님이 관여하지 않은 나의 것, 내 노동의 열매를 꼭 쥐고 네가 있으면 내 자존심도 같이 있고 네가 있으면 내 자존심도 아직까지 손상되지 않고 있다는 그 마지막 최후의 증거물들을 우리는 꼭 쥐면서 우리는 우리이름을 끝까지 사수하려고 합니다. 그것이 바로 주의 원수가 우리와 함께 있는, 일곱 귀신이 우리와 함께 있는 증거입니다. 어떤 사람은 일곱이고 어떤 사람은 여덟인데 그 숫자는 확실하지 않지만. 그것은 그때그때 달라요.
출애굽에서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바로를 건드리면 바로만 화를 내는 것이 아니고 누가 같이 화를 내고 있느냐 하면, 막상 건짐을 당해야 할 히브리인들도 같이 화를 내고 있다는 겁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의 제자들을 어떤 인물들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예수님의 제자들이 훌륭합니까? 예수님의 제자들은 주님이 얼마나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 먼 당신인지를 다 보여준 사람들이에요. 주님이 가까이 했다고 해서 거리를 좁힐 수 있는 분이 아니라는 예수입니다. 온 방안에 예수 얼굴로 도배를 하고 성경책으로 도배를 하고……, <오멘>이라는 영화에 보면 침대에 앉아서 모가지가 홱홱 돌아가는 장면이 있어요.
그걸 방지하겠다고 퇴마사 신부가 성경책으로 도배를 하고 마늘 동원해서 “사탄아 물러가라!” 하는데 그 사탄아 물러가라, 그걸 누가 전문으로 하느냐 하면 사탄이 전문으로 해요. 사탄아 물러가라, 한 그 배후에 정말 무엇을 지키기 위해 그 짓 하고 있느냐를 보란 말이지요. 무엇을 지키기 위함입니까? 내 나라 내가 지킨다는 것 아닙니까? 향토 예비군 정신이에요. 내 것은 내가 지킨다. 내 것이니까 내가 지킨다는 겁니다. 그게 마귀라니까요. 그게 마귀에요. 제자들이 예수님을 떠난 이유가 있습니다. 제자들도 많이 참았어요. 제자들의 본색을 가장 대표적으로 보여준 사람이 누구냐 하면, 가룟유다입니다.
가룟유다가 가장 용감한 사람이고 가장 인간적인 면을 보여줬습니다. 무슨 뜻이냐, 이 스승은 이 시대에 안 맞는 스승이라는 겁니다. 3년 동안 모든 것을 버리고 따랐지만 그 보상은 부도날 입장이에요. 완전히 인생을 잘못 투자하고 잘못 바친 것 같아요. 처음에 병 고쳐주고 할 때는 뭔가 형편이 피는 줄 알았습니다. 얼마나 좋았던지 주님 안 계실 때 “야, 하늘나라 가면 누가 더 높겠는가?” 선거 끝나고 난 뒤에 자리다툼을 미리 한 거예요. 승리할 것이 분명하니까. 그랬던 사람들입니다. 자기 쓴잔 마실 생각은 전혀 안하고 쓴잔을 피할 생각만 하고. 그것은 출애굽이 아니고 애굽의 확장이었어요. 애굽의 리모델링, 애굽의 번성을 원했던 겁니다.
제자들은 바로 우리들의 대표자였어요. 이스라엘도 마찬가지고. 어느 누구도 그들은 주님의 일에 합세할 수가 없었습니다. 원래 그래야 됩니다. “목자를 치니 양떼가 흩어지리라.”(마 26:31) 하는 말씀이 이루어져야 돼요. 목자 치는데 양떼가 끝까지 붙어 있으면 하나님이 “입력이 잘못됐나? 다시 찍어 넣자. ‘기록된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어? 그런데 저기 저 붙어 있는 저건 뭐야?” 주님이 “컴퓨터가 고장 났어? 큰일이네.” 이렇게 된다 이 말이지요. 목자를 치면 양떼가 다 흩어져야 드디어 또 다시 성공을 한 겁니다.
그래서 주님이 하는 이 지금 주어진 현실은 그 말대로 주님이 함께 있음을 보여준 유일한 증거가 여러분이 살고 있는 그 상황입니다. 다른 욕심 내지 마세요. 다른 꿈의 세계, “I have a dream.” 이런 것 하지 마시고 또 “You raise me up.” 제발 그런 것 좀 말리세요. 나를 높은 산에 올린다고? 올리면 또 내려올 건데 뭐하려고 올립니까? 왜 자꾸 지금 상황이 주님의 상황이 아니고 다른 상황이 될 때 주님의 은혜라고 왜 자꾸 상상을 하고 상정을 하는 거예요? 그만큼, 나한테 모자라는 그 만큼 우리한테서 강퍅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바로 왕이 터져 나올 수밖에 없지요.
그래서 지금 모세는 궁지에 몰렸습니다. 덩달아 아론도 궁지에 몰려서 “난 안하련다. 이렇게 환영 못 받을 줄 몰랐다. 나 안할래. 내가 왜 합니까?” 한두 번 이야기한 것이 아닙니다. 예레미야도 마찬가지고. “내가 무슨 소리 하면 욕한다고 해서 나 더 이상 못하겠습니다.” 이렇게 나오거든요. 에스겔도 마찬가지고. 하나님께서 자기 마누라까지 죽여가면서 이용할 줄이야 꿈에도 생각 못했습니다. “아내가 죽을 테니 너는 울지도 마라.”(겔 24:17,18) 이게 무슨 시츄에이션입니까? 그것 안 지키면 원수라고 취급해버리고. 도대체 하나님은 그냥 막가시는 하나님이에요. 인간들의 소박한 정돈된 마음까지라도 완전히 흐트려 버립니다. 혼란과 혼돈 속에 빠트려 버립니다. 그래야 사람들이 정신을 못 차리거든요. 정신을 못 차릴 그 때가 성령의 열매가 나올 때에요. “도대체 정신을 못 차리겠어.” 일 잘 되고 있습니다.
부모가 딸 시집가라고, 아들 장가가라고 그렇게도 성화를 부리면서 선보라고 해도 싫다, 싫다, 했는데 “에이 모르겠다. 네 마음대로 해라.” 해서 나중에 보니까 여자 친구라고 하면서 데려오더라는 말입니다. 일 잘 되고 있어요. 괜히 개입했다가는 실망만 더 크지요. 그러면 하나님의 원수가 뭐냐? 그것은 모세를 통해서 일어나는 기적에 의해서 원수가 드러나는 겁니다. 출애굽기 4장에 원수이야기가 나옵니다. 4장에 보니 모세보고 지팡이를 던지라고 했습니다. 던지니까 그게 뱀이 되었습니다. 지팡이가 악마의 존재라는 뜻은 아니고요 뱀과 관련한 기능을 한다는 뜻입니다. 존재가 아니고 기능이라고 봐야 돼요. 3절에,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그것을 땅에 던지라 곧 땅에 던지니 그것이 뱀이 된지라 모세가 뱀 앞에서 피하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어 그 꼬리를 잡으라.” 이 절차, 이 과정이 사실은 주의 이름이 하는 일이에요.
그런데 아직 주의 일은 실체가 없고 몸체가 없어요. 몸체가 있는 것은 팔다리 달린 모세니까 모세의 배후에서 주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겁니다. 여기서부터 좀 어렵습니다. 이해하세요. 어렵기 때문에 쉽게 질문식으로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모세가 만난 사람이 1. 애굽백성이다. 2. 바로다. 몇 번입니까? 정말 쉬운 문제입니다. 누굴 만납니까? 바로를 만나지요. 그러면 벌은 1. 바로만 받는다. 2. 애굽전체가 받는다. 이것은 몇 번입니까? 애굽 전체가 벌을 받지요. 결국 이 말은 뭐냐 하면, 애굽이라는 백성에 의해서 바로가 나왔다는 것은 이들 사이에 뭐가 있느냐 하면, 일자(一者) 또는 신, 또는 유일자(唯一者), 최고자가 있는 겁니다.
이것이 어떻게 나오느냐 하면, 자기가 자기에게 되먹임 할 때, 자기가 스스로 되먹임하게 되면 자기를 포함해서 더 큰 범주를 인간이 상상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국가요, 신이요, 그게 인간을 초월해서 집대성한 일자, 최고신이 되는 거예요. 그런 현상이 어디에 있느냐 하면, 가정에 식구가 세 식구라면 가정은 어디에 있습니까? 가정은 각자 자기를 대장질하지 않고 자기를 부분집합으로 만들어서 자기를 속하게 만드는 또 하나의 추상적인 이미지인 그것이 바로 가정이 되는 겁니다. 대학교, 대학교는 없어요. 대학교에는 캠퍼스가 있고 교수가 있고 직원이 있고 건물이 있지 대학교는 없잖아요.
하지만 대학은 있습니다. 왜냐하면 직원, 학생, 건물, 이걸 다 모아서 그걸 초월한 총 집합적인 이미지로 대학이라는 것이 있는 거예요. 그래서 그걸 추상화라고 하는데 그 추상화에 의해서 어떤 자리를 지정해주면 그것이 우리의 주체가 되는 겁니다. 알튀세르가 한 이야기거든요. 주체라는 것은 국가가 어떤 자리를 할당을 해주면 그 할당 속에서 비로소 인간은 자기가 주체라는 것을 발견한다는 말입니다. 경찰이 “어이!”하고 부르면 어떻게 합니까? 경찰이 “아저씨” 하고 부르면 어떻게 돼요? 경찰이 부르면 “저요? 제가 무슨 잘못을 했나요?” 이렇게 되거든요.
그런데 할아버지가 “어이!” 하면 ‘할아버지가 노망했나?’ 하고 가버려요. 왜 경찰이 부르면 서고 할아버지가 부르면 안서는 이유가 뭡니까? 자신의 그 자리는 국가의 공익에 따라야 손해가 없다는 이미 짜인 법칙의 체제속의 한 지점을 할당받고 있기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갇혀 있는 거예요. 어디에 갇혀 있는가? 내가 상상한 구조에 갇혀 있는 겁니다. 내가 상상한 구조에. 왕과 대통령의 차이점이 거기에 있잖아요. 대통령은 주권이 국민한테 있지만 왕은 주권이 왕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민주주의 국가는 왕이 있는 국가보다 더 나은가? 그것은 아니에요. 왜 아닌가? 대통령을 뽑아놓았다는 것은 사실은 우리가 노리는 것이 왕인데 그 노리는 것이 왕이라는 것을 감추기 위해서 우리는 근사하게 모든 권리는 국민에게 골고루 있다고 하는데 이것은 너무나 비현실적입니다. 실제로 모든 권력이 국민한테 있습니까? 얼마씩 받았어요? 너무나 비현실적인 것을 가지고 사실은 왕을 원하는데 그 빈 공백을 그냥 메우는 거예요. 제대로 솔직하게 하면 히틀러가 괜찮고요, 전두환이 괜찮아요. 그냥 패버려야 돼요. 군대는 그냥 패면 돼요. 그건 왕이거든요. 민주국가에서는 용납이 안 되는 독재국가잖아요.
독재국가는 우리가 싫어하면서. 왜? 우리의 권리를 앗아가니까. 독재국가는 싫어하면서도 우리는 내 권리를 제발 앗아가 주기를 고대하는 이 이중성이 모든 인간에게 다 있습니다. “우리 목사님은 너무나 민주적이고 참 어진 목사님이다.” 그건 그 교회 규모가 작다는 뜻이에요. “우리 목사님은 독재다.” 교회 규모가 좀 크다는 뜻입니다. 독재 안하고 커질 수가 없어요. 전부 다 밟아야 일이 돼요. 법으로 말 안 들으면 패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그냥 패는 거예요.
그 이야기가 어디 나오나 하면 <유나의 거리>에 나와요. 모르는 이야기 하지 맙시다. 이것은 보편성이 떨어지니까요. 케이블방송에서 하는 드라마인데 말로 해서 안 들으면 패야 된다는 거예요. 요새 드라마 거의 안 보는데. 월화드라마죠. 9시 50분에 하는 거. 세상에서 빠져나온다고요? 혼자서 지리산 속에서 살고 싶다고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지리산에서 가끔 내려와서 시장에 가보면 물가가 산속에 있을 때는 상상도 못할 정도로 올랐어요. 양파 값도 올랐어요. 지리산에서 기대했습니까? 양파 값 오르라고.
세상은 내 맘대로가 아니고 세상 자기 맘대로 시장이 돌아가고 자기는 어쩔 수 없이 거기에 종속돼야 됩니다. 그래서 뭐냐 하면, 개인의 권리를 주장해도 그것은 이론상 그렇고 실제는 우리, 너 나가 모이는 어떤 보이지 않는 유령에게 다 같이 고개 숙이면서 사는, 그리고 그 유령의 실체는 전혀 모르는 거예요. 바로 그 유령을 건드릴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소속되지 않고 자유를 얻은 사람만이 그 유령에 대해서 언급할 수가 있습니다. 그 분이 바로 예수님이고 그 분이 바로 예수님에 속한 성도입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 8:32)
자유하니까 돈 벌지 말까요? 그렇게 살까요? 그 자유는 전쟁을 위한 자유인데 나의 전쟁을 위한 자유가 아니고, 내가 맘대로 살기 위한 자유가 아니고 주님을 위한 전쟁을 위한 자유가 되는 겁니다. 그것은 철저하게 주님과 우리 사이가 먼저 정립되어야 하는 겁니다. 그 정립이 뭐냐 하면, 너와 나 사이에서는 확정된 거리, 관계로 엮여져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네가 하는 모든 것은 이제부터는 네 눈에 너의 원수 말고 주님이 원수가 네 앞에 목도되는 쪽으로 너희를 활용하겠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 다음에 4장 4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또 가라사대 네 손을 품에 넣으라 하시매 손을 품에 넣었다가 내어보니 그 손에 문둥병이 발하여 눈 같이 흰지라 가라사대 네 손을 다시 품에 넣으라 하시매 그가 다시 손을 품에 넣었다가 내어보니 손이 여상하더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손을 두 번 넣었습니다. 첫 번째 넣어보니 문둥병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주님의 지시 없이, 주님과 함께 하는 것이 없이 자기 품속에 백날 손 넣어도 손 아무렇지도 않아요. 이것은 내 영역, 내가 생각한 현실, 내가 주인공인 현실에서 내 맘대로 하니까 ‘나는 옳다. 나는 정당하다. 나는 바르다. 나는 저주받을 필요 없다. 나는 심판의 대상이 아니다.’ 항상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막상 명령에 의해서 “네 손을 품에 넣으라.” 하는 명령에 의해서 넣고 보니까 졸지에 그 명령에 대한 결과는 내가 문둥병, 저주받은 자로 달라져 있습니다. 그 말은 주님의 지시를 받을 때는 반드시 주님의 언약적인 명령에 따르는 것과 너 자신이 스스로 결정한 것과 이런 차이가 나는 겁니다. 어떤 차이인가? 문둥병은 주의 전쟁에 참여될 수가 없어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요. 할 수 없기 때문에 이게 비로소 하나님의 군사가 가능한 겁니다. 내 힘으로 아무것도 못합니다.
그래서 아무것도 못하는 것을 둘로 구분해요. “아무것도 못한다.”에서 주님이 시킬 때 아무것도 못하는 것과 내가 알아서 아무것도 못하는 것. 내가 알아서 아무것도 못하는 것은 진짜 아무것도 못해요. 진짜 아무것도 안합니다. 전에 우리교회 교인들 보니 이런 분들이 가끔, 가끔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정말 아무것도 안 해요. 기도하라고 해도 안하고 아무것도 안 해요. 못한다고. 주님께서 시켜서 아무것도 안 하면 뭘 자꾸 해요. 자꾸 뭘 해놓고 “주여, 저는 아무것도 안했습니다. 저는 무익한 종입니다. 그냥 할 바를 했을 뿐이지 제가 나서서 아무것도 한 것은 없습니다.” 자꾸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 쪽으로 모든 결과를 경험하게 돼요.
그래서 주님께서 나에게 일을 시키는 그 현실 말고 다른 주님이 만든 현실은 없다는 것을 느끼고 감사하게 되지요. <개그콘서트>라는 프로가 있는데 거기 보게 되면 반칙하는 사람이 있어요. 어떤 사람이 가게를 냈는데 거기 와서 “누구 허락 받고 가게를 냈는가? 가게 하려면 자릿세를 내야지.” 하고 탁, 탁, 탁, 탁, 몸 여기저기를 친다는 그 말이지요. 그런데 거기서 누가 반칙을 하느냐 하면, 그 가게 주인입니다. “유단잔(有段者)가?” 하는 그 사람 말고 같이 붙는 그 주인이 반칙을 해요. 한쪽은 천천히 흉내를 내면서 말로만 탁, 이런 식으로 하는데 실제로 때리는 쪽은 가게 주인이라고요.
그러니까 전쟁은 누가 이기느냐 하면, 이미 가게 주인이 이기도록 되어 있는 거예요. 제발 흉내만 내세요. 치는 것은 주님에게 맡기고 내 노동의 결과를 찾지 마세요. 우리는 뭘 해도 구원받은 것으로 얻을 것은 더 이상 아무것도 없습니다. 자, 이렇게 해서 주님께서는 전쟁준비를 다 했습니다. 주께서 잡고자 하는 것은 주의 원수를 드디어 서서히 나오게 하는데 제가 아까 주의 원수를 뭐라고 했습니까? 강퍅한 거예요. 그 강퍅이 바로부터 시작이 되는 겁니다. 왜 바로부터 시작이 된다고 했습니까? 바로는 추상적인 존재라고 했지요. 바로의 존재 안에 뭐가 들어 있습니까? 애굽 나라의 모든 강퍅이 대표로 다 포괄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가 죽 나가서 진도가 훌쩍 진행이 돼요. 문제를 다시 살펴봅시다. 아까 했던 4장이 중요해서 다시 봅시다. 4장에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를 놓아주었습니다. 무엇 때문에 놓아주었지요? 할례언약의 피 때문에 놓아주었잖아요. 그러니 피 언약을 실시할 수 있는 분은 하나님밖에 없지요. 그러면 그 외에는 전부 다 하나님의 언약을 이해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원수가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작업은 뭐냐? 애굽을 치면서 또 누굴 쳐야 돼요? 언약을 모르는 자기백성도 같이 쳐야 되겠지요.
왜 같이 쳐야 되느냐 하면, 하나님이 이스라엘 편이라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서 “야, 너희들은 다 저 산위에 올라가. 올라가서 애굽나라 멸망 받는 것을 보면서 박수나 쳐,” 하고 아예 그들을 떼어놓고 일을 할 텐데 하나님께서 유월절 피 바르는 그 일을 누구에게 시킵니까? 구원받아야 된다는 이스라엘 사람에게도 양을 잡아서 피를 바르게 했지요. 그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이스라엘이라고 해서 결코 주님의 심판에서 이스라엘이라는 그 신분 자체로서 면제되지는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그 때 그 때 마다 주어지는 언약에 동참할 경우에만 그들은 구원이 되는 거예요.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존재 자체는 구원의 대상이 안 됩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우리 존재자체는 구원의 대상이 안돼요. 감자를 그냥 먹지를 못하고 채를 썰지요. 채를 썰면 가볍게 썰리잖아요. 그래야 감자를 맛있게 볶아서 먹는다는 말이지요. 주님께서는 애굽 나라를 치면서 덩달아 이스라엘도 같이 쳐버립니다. 첫째부터 열 가지 재앙 중에서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는 이스라엘과 같이 받도록 해요. 네 번째 재앙부터 이미 지역이 갈라지면서 4, 5, 6, 7, 8, 9까지 멀쩡하다가 열 번째는 이스라엘 사람에게나 그들에게나 죽음의 천사가 찾아와서 다 심판을 공히 해버립니다.
그렇게 해서 남는 것은 뭐냐, 할례언약만 도드라지게 남게 하는 것이거든요. 왜 그런가 하면, 마지막 열 가지 재앙 때 양의 피를 바르라고 하면서 그 전에 먼저 주어진 요건이 뭐냐 하면, “너와 너에 속한 이방민족이라고 반드시 할례를 행하고 난 뒤에 그 다음에 양을 잡아서 문에다 발라라.”라고 한 거예요. 그러면 모세가 살게 된 것은 할례언약, 그리고 모세에게 일어난 상황을 같이 적용시킨 이스라엘도 같이 할례언약으로 살아나면서 결국 이 승리는 이스라엘 승리가 아니고 언약을 실시하신 주님의 승리로 돌아가게 하는 겁니다.
이걸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시키면 항상 어떤 일이 되었을 때 “주여, 제가 승리했습니다.” 하는 말은 못 나오고 그 와중에서 오직 승리는 주님만의 몫입니다, 하는 것을 깨닫게 하는 사태를 우리에게 자꾸 일으키시는 거예요. 이 점에 있어서 좀 더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재앙이 내릴 때 자연을 동원시켰습니다. 애굽에 있는 대자연과 사람들 이 모든 것은 다 재앙의 대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되는 데는 뭐도 동원된다? 대자연도 같이 동원되는 겁니다.
창조과학회라는 것이 있지요. 창조과학회가 복음적입니까? 창조과학회의 주장은 이겁니다. 신이, 하나님이 자연을 만들었다는 거예요. 상상계입니다. 신이 자연을 만든게 아니에요. 누가 만들었느냐 하면, 예수님이 만들었어요. 서른세 살 먹은 나사렛 청년이 만들었어요. 왜 그런 말을 하는가? 예수님도 신인데 같은 이야기가 아닌가? 같은 이야기가 아닌 이야기가 뭐냐 하면, 신이 만들었다는 것과 예수님이 만들었다는 것의 전쟁 때문에 그래요. 신이 만든 것을 인정하니까 우리는 정당하다고 본 것을 주님은 뭐로 봤는가 하면, 하나님의 원수로 간주했습니다.
뭐가 빠졌기에? 하나님의 언약. 어떤 언약? 피 언약이 빠져 있거든요. 피 언약이 없이 존재론적으로 모든 것을 신이 만들었다고 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전쟁대상이 돼요. 주님의 전쟁에서 적군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결국 뭐냐, 신으로부터의 해방이에요. 신으로부터 해방되어서 주의 이름으로 나가는 겁니다. 그런데 신은 우리의 존재와 관련되어 있고 주의 이름은 사건과 관련되어 있어요. 할례를 행하면 구원 받을까요, 안 받을까요? 할례를 행하면 할례를 행하는 그 자체로 구원이 될까요, 안될까요? 구원이 안 되지요.
왜 구원이 안 되느냐 하면, 피 할례를 행할 때 어떻습니까? 할례를 행하면 다 피를 흘리니까. 그 피 할례를 행하면 구원이 됩니까, 안됩니까? 구원이 안돼요. 구원이 되지를 않습니다. 왜 안 되는가 하면, 상징계에서는 인간은 주께서 지시한 대로 모방해서 그대로 반복해 내기에 그런 거예요. 따라하게 되면 뭐가 생기느냐 하면, 강퍅이 생깁니다. 이것이 맞습니다. 제가 이것은 양보 못합니다. 사람이 같을 일을 반복해서 하게 되면 강퍅해지게 되어 있어요. 처음에 찬송가 405장 처음 부를 때 눈물 흘리지요. 두 번째 불러 보세요. 역시 눈물 흘립니다. 그 눈물은 강퍅의 눈물입니다. 옛날에 이 노래 부를 때 은혜 받은 것을 생각해서 눈물 흘리기 때문에 그것은 제대로 된 눈물이 아니고 자기가 만들어 낸, 감정이 욱해서 나오는 눈물입니다.
벌써 가짜가 되고 말았어요. 그러니까 상징계에서 뭔가 확정된 형식을 반복하게 되면 그것은 주의 뜻이 아닙니다. 사건은 존재에게 ‘잽히지’ 않습니다. 잡히지 않는 것이 아니고 ‘잽히지를!’ 않아요. 손에 ‘잽히지를’ 않습니다. 늘 잡았다 싶으면 내빼고 잡았다 싶으면 내빼요. 참기름을 발라 놓았는지 미꾸라지도 그런 미꾸라지가 없어요. 쏙쏙 빠져버립니다. 네가 나를 잡는 것이 아니고 내가 너를 잡고 해야 되는 겁니다. 그래야 우리의 교만과 강퍅을 지적할 수 있는 자리, 곧 우리와의 간격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 이만하면 우린 동업자죠?” “미쳤나? 내가 너하고 동업을 하게?” 절대로 주님은 우리하고 동업하지 않습니다. 빠져나갑니다. 이 언약달성에 대 자연이 합세해서 움직인다는 이 말은 요한계시록에 보면 새언약 이후에 천지의 모든 지진과 재앙과 에볼라 바이러스인지 뭔지도 포함해서 이 세상 모든 변화는 예수님의 십자가 지심을 증명하기 위해서 이 땅에 심판을 내리는 현장입니다. 에스겔에 보면 천사들이 이 땅의 동서남북 사방을 관장하는 천사들이 보좌에서 나와서 활동을 개시하게 됩니다.
그들은 바퀴안의 바퀴에서 지시를 받습니다. 그 바퀴에 누가 있는가? 사람의 모습을 하신 분이 등장합니다. 그것을 가지고 인자라, 사람의 아들이라는 분이 있어요. 이런 이야기가 얼마나 황당무계하게 들립니까? 현실성이 뚝 떨어지지요. 그런데 그것을 언약이라는 것만 생각해 버리면 다 납득이 되고 이해가 됩니다. 언약은 무엇인가? 언약은 하나님의 전쟁을 하는 주테마이다. 언약에 의해서 주님께서는 주의 전쟁을 찾아내시고 밝혀내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주의 원수가 누군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모르고 있는데 주께서 우리에게 찾아오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로 하여금 주의 원수를 파악할 수 있도록 하시면서 우리에게 이 거룩한 전쟁에 참전하도록 조치를 하십니다.
따라서 나의 인생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다 주님이 벌리는 주의 인생입니다. 주의 원수와 네가 어떻게 차이 나는지를 우리한테 보게 하시는 겁니다. 그 다음에 출애굽기 12장을 봅시다. 출애굽기 12장 1절에, “여호와께서 애굽 땅에서 모세와 아론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 달로 너희에게 달의 시작 곧 해의 첫 달이 되게 하고.”라는 말씀이 나오지요. 이 대목은 제가 읽지 않고 누가 읽어보세요. 시편 147편 20절을 누가 읽어보세요. “아무 나라에게도 이같이 행치 아니하셨나니 저희는 그 규례를 알지 못하였도다 할렐루야.”
하나님께서 철저하게 이스라엘과 그 외 다른 모든 나라를 구분하십니다. 철저하게 구분하셔요. 사람들이 오늘날 성경을 봤다고 하면서도 이 구분의 취지를 놓치고 있으니까 제가 보기에는 무슨 설명을 해도 할 수가 없어요. “에이, 출애굽? 그건 옛날 역사에요. 왜 자꾸 합니까?” 다른 나라는 규례를 몰라요. 오직 하나님께서 자신을 이스라엘에게만 나타내신 거예요. 그리고 오늘 본문 12장에 보니까, “여호와께서 애굽 땅에서 모세와 아론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 달로 너희에게 달의 시작 곧 해의 첫 달이 되게 하고.” 이것은 시간 자체가 이스라엘로 인하여 재정비가 되고 재 정돈이 되는 겁니다.
그 달이 4월 달인데 그 4월 달이 1월 달로 바뀌어요. 1월로 바뀌면서 시간이 직선적으로 지속된다는 그 인간의 생각을 벗어버립니다. 시간은 순환된다고 봐요. 1, 2, 3, 4, 5, 6, 7. 그리고 다시 1, 2, 3, 4, 5, 6, 7. 이렇게 순환이 되는 거예요. 이 7이 종말이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은 다른 나라와 달리 뭘 품고 있는가? 종말을 품고 살아갑니다. 남궁옥분이라는 가수의 노래 중에 “꿈을 먹는 젊은이”(1982)라는 노래가 있어요.
“타오르는 꿈을 안고 사는 젊은이여 우리모두 같이 흥겨웁게 노래해요 푸른 나래펴고 꿈을 먹는 젊은이여 성난 파도처럼 이 자리를 즐겨요 행복은 언제나 마음속에 있는 것 괴로움은 모두 저 강물에 버려요 사랑과 욕망도 모두 마셔버리고 내일을 위해서 젊음을 불태워요.”
그러나 이스라엘은 꿈을 품은 것이 아니고 뭘 품었습니까? 종말을 품은 이스라엘이에요. 다른 나라는 자신의 미래, 종말을 몰라요. 그러나 유독 이스라엘한테는 반복적으로 종말을 품게 하는 겁니다. 종말을 품은 쪽과 종말을 품지 않는 쪽, 여기서 누가 승리하는가? 종말을 품은 쪽은 하나님편이고 품지 않은 쪽은 종말도 모르는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거예요. 이 전쟁입니다. 그래서 강의 내내 계속해서 전쟁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이스라엘은 전리품이 되고. 이 종말이라는 것은 아브라함이 카누를 타다가 절벽으로 미끄러지는 것처럼 아브라함도 이삭도 야곱도 전부 다 종말을 품었다는 뜻에서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그래서 합쳐서 언약의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언약 속에는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사람들은 끝을 싫어하고 모르니까, 그 모르는 종말을 이스라엘에게 미리 담아서 이스라엘역사를 만들어버렸습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망하겠어요, 안 망하겠어요? 늘 망하면서 따라서 늘 새롭게 창조되는 겁니다. 왜 1,2,3,4,5,6,7인가? 안식일이 왜 1,2,3,4,5,6,7이고 왜 희년이 7×7+1이냐? 천지창조하신 하나님께서 7일 만에 천지를 창조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따라서 7이라는 숫자, 이 숫자는 인간세계에만 통용된다고 했지요. 하늘나라는 그런 것이 없어요. 인간 세상에 인간만 통하는 숫자를 가지고 하늘나라를 묘사하는 방법은 늘 7마다 돌아오는 순환구조 외에는 다른 구조가 없습니다. 7×7=49도 그렇지요. 70이레도 그렇지요. 안식일 날의 7도 그렇지요.
그래서 아브라함하셀이라는 사람은 유대인인데 그 사람이 말하기를, 시간으로 만들어낸 것이 성전이라면 하나님은 시간 속에 계신다는 유명한 책을 지었습니다. 제목『안식』이라는 책입니다. 상당히 잘 쓴 책이에요. 그러나 뭐가 빠졌습니까? 피가 빠졌어요. 십자가 피가 빠지니까 그것은 유대인을 옹호하는 강퍅한, 주의 원수가 쓴 책이 되어버렸는데 그 안의 내용들은 유대인의 사고구조에 대해서 알 수 있어서 그 책이 상당히 중요한 책입니다. 순환에 대해서 이야기한 거예요. 직선이 아니고 순환이라는 것.
늘 종말을 맞이합니다. 그 종말을 맞이하면서 그들은 오직 7일만 보장되는 날입니다. 그 보장되는 7일이란 뭐냐 하면, 주께서 종말에도 살아남게 하는 민족은 너희민족밖에 없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십계명중 제 4계명에서 뭘 지키라고 했습니까? 안식일을 지키라고 한 거예요. 그렇다면 안식일의 이 내용은 역사가 흘러가면서 계속해서 추가됩니다. 처음에는 창조를 기념하라고 했다가 그 다음에는 애굽에서 종 되었다가 해방된 것을 기념하여 안식일 지키라고 합니다. 이러한 내용의 추가가 예수님이 오게 되면 이미 하나님은 제사를 원치 않고 번제를 원치 않고 오직 자비를 원한다고 합니다.
자비를 베푼, 물에 빠진 사람을 건져내는 것도 안식일 날 주님이 하셨거든요. 죽은 자를 건져내는 날을 기념해서 안식일이 완성이 되어버려요. 그래서 지금 안식일을 지키는 사람은 예수님에 대한 모독입니다. 안식일을 지키지 마세요. “목사님은 새삼스럽게 그걸 강조합니까? 전부터도 지킨 적도 없습니다. 마트나 다니고 세일 한다고 하면 거기로 달려갔지 안식일 지킨 적도 없잖아요.” 그것은 안식일 안 지킨 것도 아니고 지킨 것도 아니고 그것은 아니에요. 안식일을 지키지 말라는 말은 여러분 인생 자체에다 종말을 집어넣으라는 이야기에요. 주일날에도 맘 놓고 물건사라는 이야기가 아니고 주일날 교회 오나 안 오나 관계없다는 그런 이야기가 아니고 매일매일의 여러분의 인생에다 종말을 집어넣어서 살라는 거예요. 말귀를 한 번에 좀 알아들으세요.
간음하지 말라고 하니 간음을 안 하면 된다는 거예요. 간음을 안 하면 그게 그 계명 지키는 겁니까? “간음을 하지 말라.”를 지키는 것은 사랑하면 되는 거예요. 진짜 속 터진다, 속 터져. 탐내지 말라는 것을 지키는 것은 탐을 안내는 것이 아니고 사랑하면 되는 거예요.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로마서 13장 8절에 나오는 말씀 아닙니까?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 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찌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롬 13:9-10) 얼마나 사랑이 안 되었으면 안식일을 지키려고 하겠어요.
사랑 안에는 뭐가 없다고 했습니까?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요일 4:18) 왜, 사랑은 이미 여러분을 죄인으로 간주하는 혜택이 주어지기 때문에. “너 죄인이었어.” 라는 지적질속에, 그 손가락질 속에 이미 피가 묻었기에 우리는 어떤 잘못과 상관없이 자체로 죄인으로 고정되었다는 그 즐거움, 그 즐거움이 언약 완성에 이미 우리가 가담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저녁 먹고 다음 시간에 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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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파일 : 2014여름수련회(낯선 경계선) 출애굽기 제 6강.hwp (71.5K), Down: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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