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여름수련회 9강
출애굽기 17장 5-7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백성 앞을 지나가서 이스라엘 장로들을 데리고 하수를 치던 네 지팡이를 손에 잡고 가라 내가 거기서 호렙산 반석 위에 너를 위하여 서리니 너는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들의 목전에서 그대로 행하리라 그가 그곳 이름을 맛사라 또는 모리바라 불렀으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다투었음이요 또는 그들이 여호와를 시험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아닌가 하였음이더라.”
지금까지 강의한 내용은, 하나님과 접촉을 시작할 때 우리는 항상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타인과 접촉하는 방식을 그대로 하나님께 적용을 시키기 때문입니다. “내가 여기 있습니다. 하나님은 거기 계시지요. 하나님 저의 정성을 받아 주시고 그리고 이 땅에서 힘들지 않게 살도록 해 주옵소서.”
이 방식은 결국 자기 존재를 강화하기 위해 신의 도움을 요청하는 것밖에 안 됩니다. 이런 식이라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방식이 아니고 이방 방식을 따르는 셈이 됩니다. 애초부터 이런 하나님은 없어요. 그래서 제가 강의 중에 계속 강조했지요. 하나님이 아니고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상상할 수 있지만 그리스도는 이방인에게 오지 않고 유대인에게만 왔습니다. 유대인은 특수한 상황이고 이 특수한 상황을 주목해야 돼요. 우리가 눈을 뜨면 신을 상상하는데 그런 것은 소용없는 짓입니다. 그리스도가 옛날에 어떻게 활동했는가?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보내신 유일한 연결 통로입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고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라고 해서 하나뿐인 그 통로는 하나님이 아니고 그리스도입니다. 그냥 신이라고 한다면 일반 종교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복음의 특수성이 날아가 버려요. 그러면 성경도 필요 없습니다. 그냥 지리산에서 도를 닦다가 “오, 신이시여!” 이렇게 되면 우리나라의 대종교라든지 대순진리회와 똑같은 거예요.
복음이란 우리가 해낼 수 없는 것을 예수님이 다 이루었기에 인간들이 새삼스럽게 호들갑 떨게 없다는 거예요. 호들갑 떨지 마세요. 종교를 버리세요. 종교생활 하지 마세요. 우리가 남과 대할 때는 ‘상대방에게 잘 보이면 잘 해준다.’ 이것은 인간대 인간의 관계입니다. “내 꺼인 듯 내꺼 아닌 내꺼 같은 너. 니꺼인 듯 니꺼 아닌 니꺼 같은 나” [섬]이란 노래 가사입니다. 이런 사이가 있어요?
이 세상의 모든 문제는 너하고 나만 해결하면 된다는 겁니다. 예를 들면, 자동차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접촉 사고가 났으니까 이 문제만 해결하면 다시 원상태로 돌아올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바다에 배가 지나가면 물결이 출렁이지만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그 물결은 잠잠해 집니다. 존재의 바다가 원래 이렇게 무궁해요. ‘사는 대로 살다가 죽으면 그만이다.’ 이게 무슨 복음의 특수성입니까?
사람을 대하는 방식으로 하나님께 접근할 때 하나님은 거부합니다. 이미 에덴동산으로 가는 길이 차단된 상황에서는 하나님의 특수한 방식을 제시합니다. 그게 그리스도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복음을 주셨다할지라도 역시 우리 힘으로는 접근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가 사람의 모습으로 왔을 때 제자들은 다른 사람과 상대하듯 예수님을 상대했습니다. 제자 가룟 유다는 스승을 배반했다고 양심의 가책을 받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도 있었지요.
이것은 접근하는 방식이 아니에요. 오해한 거예요. 진리는 오해를 통해서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실패를 통해서 진리가 드러납니다. 주님은 실패할 수 없는 방식을 사용해요. 그래서 하나님의 율법을 주니까 자꾸 법을 지키면 된다고 생각하는데 법을 지킬 때 인간을 대하듯 율법을 대하니까 법을 지키면 지킬수록 자신은 점점 더 잘난 존재가 됩니다.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5:20).” 이것은 바로 우리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교회에서 목사가 시키는 대로 다 하게 되면 그 인간은 망치는 길로 갈 수밖에 없어요. 그런 방식이 아니에요. 그러니 나대지 말란 말이지요. 나대지 말고 그냥 사세요.
어차피 우리가 내미는 방식은 바리새인처럼 제 잘난 맛에 살아가는 방식, 그리고 내가 너에게 잘해주면 너도 나에게 잘 해주리라는 생각. 내가 스스로 겸손해서 ‘내꺼인 듯 내꺼 아닌 내꺼 같은 너, 니꺼인 듯 니꺼 아닌 니꺼 같은 나’ 이렇게 하면 그 썸(something)이 얼마나 가겠습니까? 결혼까지 가겠어요? 썸은 썸으로 끝납니다.
교회 10년쯤 다니다가 재미없다고 안 다니고 이건 처음부터 하나님과 썸을 한 거예요. 그 방식이 아닙니다. 그러면 어떤 방식인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고정화시킵니다. 광야는 탈출구가 없는 갇힌 상태입니다. 얼음으로 완전히 동결시키는 겁니다. 광야에서 옴짝달싹도 못하게 만듭니다. 돌아갈 수도 없고 전진할 수도 없고. 마치 상자 속에 담겨 문을 완전히 닫는 식입니다.
인간들이 그동안 살았던 방식, 물이 있어야 살고 양식이 있어야 산다는 그 방식을 완전히 강탈해 버립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방식이에요. 예수님은 머리 둘 곳도 없다고 했는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말씀 지키고 기도하고 이런 방식이 아닙니다. 주님과 썸 타는 방식이 아닙니다.
광야라는 특수한 상황에 집어넣습니다. 애굽을 떠난 그들은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에 가서 행복하게 살 꿈에 부풀어 있었는데 약속의 땅은 애초부터 없었습니다. 이제 만들 거예요. 약속의 땅이 있어서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약속의 땅은 거기에 들어갈 백성들과 더불어 만들어집니다.
그래서 광야에서는 양식과 물을 빼앗아버리죠. 그러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 하면, 어떤 공적이 이루어지는데, 사람과 (사람의)마음이 분리됩니다. 출애굽기 17장 7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어요. “그가 그곳 이름을 맛사라 또는 므리바라 불렀으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다투었음이요 또는 그들이 여호와를 시험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아닌가 하였음이더라.”
하나님도 소용없다는 말입니다. 왜냐? 그동안 내가 믿었던 하나님은 내 존재를 풍성하게 하고 내 존재의 가치를 보장해 주는 그런 분이었는데, 광야에 나타난 하나님은 전혀 그런 분이 아니었기에 소용없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내가 내 마음을 살펴서 신에게 드릴 마음과 친구에게 줄 마음을 내가 관리하겠다는 그 마음을 하나님께서 분류를 시킵니다.
분류시켜서 무엇을 생산하는가 하면, 악을 생산합니다. 불평과 원망을 따로 분류해서 떠오르게 해요. 예를 들면, 튀김을 할 때 기름위에 둥둥 떠는 것을 채로 건져내지요. 주님이 이스라엘을 광야에 집어넣은 것은 불평과 원망을 떠오르게 해서 이것들을 건져내시려는 거예요. 이렇게 해서 사람과 마음을 따로 분류해서 사람 속에 괴물이 들어 있음을 확인케 하는 겁니다.
인간은 자신이 마음을 장악했다고 여기지만 사실 그 마음은 악이 장악한 거예요. 악에서 인간을 떼어놓는 작업을 위해 광야라는 공장을 사용하시는 겁니다. 우리가 그동안 풀리지 않았던 의문점이 있어요. 사람이 죽으면 영혼도 같이 죽는가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지금도 하늘나라에 계시거든요. 그런데 아브라함이 이삭은 아니고, 이삭이 야곱은 아니란 말이지요. 각자의 개성이 있단 말이지요.
그러면 그 주체는 이 땅에서부터 각자 분류된 주체란 말이지요. 거지 나사로가 천국 갔을 때 이 지상에서도 나사로였고 천국에서도 나사로라면 그 나사로의 주체는 나사로의 몸에서 나왔는가 아니면 다른 데서 나왔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그 과정을 광야를 통해서 보여줍니다.
인간은 생각하기를 내 마음은 나의 것이라고 여겼어요. 내 마음은 내 것이기에 그만그만한 인간들끼리 서로 어울려 살아온 거예요. 내 마음은 내가 관리하고 네 마음은 네가 관리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서로 썸 타자는 겁니다. 썸 탄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권사님들 모르지요?
마음은 그동안 네가 다뤄온 것이 아니고 악마에 예속된 마음이었다는 겁니다. 따라서 너를 살려주기 위해서 인간의 육체는 죽입니다. 양식 없고, 물 없는 곳으로 데려가 인간을 죽입니다. 이제 몸을 잊어버려야 합니다. 껍데기는 벗겨버리고 그 속의 알맹이를 끄집어내는데, 그 알맹이의 본질을 보니까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불평과 원망의 지향성을 가지고 그동안 너라는 인간을 다루어 왔다는 겁니다.
‘힘들었지? 고생했지? 내가 따로 악은 분리해 처리해 줄게.’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솟아오르는 마음, 악, 또는 악마에 속한 그 마음을 단단한 바위에 치게 만듭니다. 17장 5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백성 앞을 지나가서 이스라엘 장로들을 데리고 하수를 치던 네 지팡이를 손에 잡고 가라.”고 했어요.
죄악 된 마음으로 반석을 치게 되면 그것은 원망의 완력이지요. 때리면 구멍이 뚫립니다. 거기서 물이 터져 나오지요. 그것은 물이 아니고 악이 악으로 충분히 노출된 상태에서 악을 노출시킨 언약적 작업 환경에 의해서 감춰놓은 새로운 생명이, 악마저도 이 작업에 동참시켜서 악의 힘으로 뚫린 구멍에서 새로운 생명이 터져 나오도록 하는 특수한 언약적 상황을 이스라엘에게만 보여준 거예요.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 마음을 자기가 주관하고 있다고 생각해서 거기서 나온 하나님 개념을 고수하다가, 진짜 생명과 접속된 자는 아무것도 소용없다는 것을 충분하게 감지하게 만듭니다. 내가 종교생활 하는 것은 아무짝에도 쓸데없고 이것은 내가 날 지키기 위한 몸부림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지팡이로 표현되었습니다. 지팡이는 두 가지 기능을 가지고 있는데, 때리는 심판의 기능과 더불어 지팡이가 도리어 얻어맞는(죄로 인하여 피해를 보는 피해자의 모습, 즉 중보자의 모습) 이 양면을 다 보여줍니다. 모세가 지팡이를 쥐고 있으니까 모세는 인간 편에 서 있고, 또 하나님 편에도 서 있잖아요. 모세가 지팡이를 쥐고 있다는 것은 지팡이를 통해서 인간의 나약성과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다 포함하고 있는 거예요.
그 지팡이로 반석을 치는데, 이것은 바로 하나님께 속한 인간의 기능이 하나님 자신을 때려서 생명수를 얻게 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이 특수하게 사용하신 거예요. 이게 고린도전서 10장 2-4절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다 같은 신령한 음식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반석이 그리스도라고 했는데, 이 말을 오해하면 반석만 그리스도로, 반석의 존재 자체를 그리스도로 생각할 수 있는데 이것은 이방인들의 사고방식이고 존재론적 사고방식입니다. 이스라엘을 기능적으로 보면 때리는 지팡이와 지팡이에 얻어맞아 물을 내는 그 두 가지의 기능 전체가 그리스도의 사역을 보여주는 겁니다.
선악과가 그리스도냐, 생명과가 그리스도냐? 둘 사이의 관계가 그리스도가 됩니다. 선악과를 아무리 자세히 관찰해도 그리스도를 발견할 수 없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내가 나를 존재로 보기 때문에 내 속에 있는 마음이 어떤 기능을 하는 것을 모르고, 내가 나를 위해서 무엇이 유익한가만 생각하기 때문에 ‘저건 이용 가치가 있을까?’ 이런 생각만 한 거예요.
그러나 선악과와 생명나무 그 둘을 다 완성시킨 분이 바로 예수님의 사역(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예레미야 17장 9절에 보면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고 했어요. 마가복음 7장 15-16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우리를(우리의 겉을) 보는 것이 아니고 우리 안에 있는 것을 보십니다. 우리는 늘 발전과 성장, 미래의 아름다운 꿈 이런 것을 생각하니까 광야에서 꼼짝 못하도록 묶어놓고 수술로 해부를 하니 각종 더러운 것이 튀어나옵니다. ‘물 없습니다. 양식 없습니다.’ 등등 온갖 불평과 원망이 쏟아질 때, 주님은 자신의 일이 잘 진행됨을 흐뭇해하십니다.
그러니 우리의 할 일은 원망과 불평만 쏟아내면 되는 겁니다. 이게 신앙생활이에요. 원망과 불평이 있는 곳에만 감사가 나오게 되어 있어요. 바라는 것을 얻게 되면 점점 교만해져서 인간을 망칩니다. 일단 원망과 불평이 나오도록 해놓고 ‘웬 떡이지?’ 이렇게 될 때 감사가 감사답지 노렸는데 뭔가를 얻게 되면 여기에는 진정한 감사가 안 나옵니다.
마지막 시간 여러분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것은, 제발 목표나 기대나 희망을 갖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런 것은 결국 좌절과 실망으로 돌아올 뿐입니다. 여러분들이 한두 번 당한 것도 아닌데 돌아서면 또 기대를 걸고 희망을 품습니다. 자식들에게 기대하지 마세요. 수련회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면 우리가 해야 할 숙제가 밀려있습니다. 숙제 처리하는 것도 벅찬데 왜 쓸데없는 기대를 합니까?
살만큼 살고, 맡기신 일은 그때그때 처리하고, 내일 염려는 내일 하고 오늘 걱정은 오늘까지만 하고 밤에는 푹 주무시기 바랍니다. ‘나는 산 사람이니까 잘 살아야겠다.’고 하는데, 우리는 사람 아닙니다. 우리는 수레인데, 평생 동안 악을 실어 나르는 수레입니다. 그런데 평소에는 내가 이런 (악을 실은)수레인줄 몰라요. 그런데 주께서 손을 댈 때 반드시 우리에게서 원망과 불평이 터져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이 때 천사가 주님께 보고합니다. “주님, 성공입니다. 지금 막 원망이 쏟아져 나옵니다.” 마치 마법사가 피리를 불명 뱀이 고개를 들고 올라오는 것처럼 주님이 피리를 불면(손을 대면) 우리는 불평과 원망을 쏟아냅니다. 이것으로 우리의 주체는 확정되고 고정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의 특징이 뭔가 하면, 1, 2, 3, 4, 5, 6, 7이라고 했지요. 이것은 모든 것을 고정화(동결) 시켜서 우리에게 분류시킬 것을 분류시킵니다. 분류시킨 그 악마저도 하나님의 심부름꾼일 뿐입니다. 악이 나왔을 때 하나님께서 준비한 새로운 신선한 물과 전혀 경험한 적이 없는 만나를 제공합니다.
이 만나는 약속의 땅의 상황과 애굽의 상황을 과도기적으로 보여주는 거예요. 그러면 그 약속의 땅은 어디 있습니까? 이렇게 물으면 안 됩니다. “모세님, 만나는 언제 과도기가 끝납니까?” 이렇게 물어야 합니다. 약속의 땅에 도달하는 그날,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되는 그날 만나는 과도기적 자기 역할을 마감하고 서서히 무대 뒤로 사라질 겁니다.
나를 살리기 위한 만나가 아니라 영원한 안식의 때를 위하여 만나는 우리에게 일종의 내비게이션 역할을 한 것입니다. 그러면 언제 만나가 그치는가 하면, 40년 광야 생활이 끝날 때 그치지만 중간 중간 그치는 때가 있었지요. 안식일 전날에는 이틀분의 만나가 한꺼번에 주어지고 안식일에는 만나가 안 내립니다.
이게 뭔가 하면, 안식의 세계에 들어가거든 이제 먹는 문제에서 해방되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살기 위한 하나님이 아니고 안식일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들에게 물과 양식을 제공한 것입니다. 주님이 생각하시는 안식의 완성상태가 이스라엘 백성의 존재보다 더 중요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이 이 모든 일을 다 하셔서 하나님의 아들, 주로 영광 받는 것이 나의 존재보다 더 중요한 거예요. 피조물보다 창조주가 더 중요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고정된 상황이 신약에 오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우주 전체가 고정된 상황이 됩니다. 달력이 하루하루 넘어가는 것이 의미가 없습니다. (인간을 포함한)우주 전체가 악에 예속되어 있어서 악한 마음이 없는 사람은 없다는 것이 폭로된 상황입니다.
그래서 신약 때에는 이 땅에서 얼마나 잘 먹고 잘 사는가 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외양간에 소가 없어도 괜찮아요. 포도나무에 소출이 없어도 괜찮습니다. 농협에서 대출 받으면 되니까.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맺히지 않아도 괜찮아요. 이런 것이 없어도 구원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즐거워합니다.
여기에서 나와 분리된 새로운 주체, 광야에서 사람은 떨어지니까 없어요. 없고, 새로운 사람 예수님만이 새로운 주체로 등장하는 겁니다. 새로운 주체에 예속된 주체를 우리가 부여받아요. 갑자기 어려워졌는데, 이렇게 보면 됩니다. 이 이야기하기 전에 지팡이 이야기를 먼저 하겠습니다.
출애굽기 17장 8절을 보겠습니다. “때에 아멜렉이 이르러 이스라엘과 르비딤에서 싸우니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쪽에서는 고정된 공정에서 사람과 마음이 따로 분리되어 그동안 마음이 나를 악하게 지배했지 내가 마음을 지배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 들통 났습니다. 이제는 사람들을 침대에 묶어놓고 그저 원망과 불평만 계속 올라옵니다. “우리 하나님이 소용없더라.”
하나님이 소용없다는 말은 맞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소용 있다고 생각하는 인간적인 관점은 여기에서 분류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인간은 원래부터 흙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흙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주가 살리시는 인간은 그동안 내가 나를 살리는 방식이 아니고 새롭게 등장한 주체인 주님에 의해서 피동적으로 살려지는 그러한 삶을 살게 됩니다.
그렇다면 그 새로운 주체는 어떤 주체인가? 이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아말렉이라는 난데없는 적들이 등장하는 겁니다. 여기에서 또 지팡이가 등장합니다. 그러니까 세상에는 지팡이 말고는 달리 사람은 없습니다. 모세가 웬만하면 지팡이를 들고 있어야 돼요. 지팡이 하나도 못 들고 있는 것이 인간입니까? 힘이 빠져 지팡이를 잡은 손이 내려오니까 여호수아는 열심히 싸우는데 계속 적들에게 밀립니다.
모세가 팔이 아파 지팡이 잡은 손이 내려왔고, 그로 인해 여호수아는 전투에서 밀렸고, 그 때 아론과 훌이 모세의 손을 높이 드니까 다시 싸움에서 이겼어요. 여기에서 모세의 능력이 대단하다고 해석하면 안 됩니다. 모세는 지팡이 하나도 제대로 못 드는 인간입니다. 모세든 누구든 이 전쟁에서 인간은 아무짝에도 소용없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인간을 찾아오는 방식이 이런 식입니다. 지팡이를 들게 함으로 지팡이가 부각되고 인간은 껍데기에 불과하다는 것을 드러내면서 우리가 미처 생각지도 못한 특수한 방식으로 하나님이 동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끼리 만의 세계가 아니라는 사실을 예상 못한 사태를 만나면서 느끼게 하십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렇게 표현했지요. 17장 15절에 “모세가 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 닛시라 하고” 닛시는 나의 깃발이라는 뜻인데, 여호와가 나의 깃발이라는 겁니다. 이 말은 여호와만이 진정 여기 계시다는 겁니다. 우리는 있음이 아니라 사라져야 될 존재입니다. 우리의 몸과 모든 것은 다 무너져야 돼요. 하지만 우리가 주님과 함께 있다는 그 주체는 분류되어 주님 손에서 새로운 주체로써 주님의 관리 하에 들어갑니다.
전까지는 나의 자아를 빛내기 위한 주체로 있었는데 이제 그 주체가 주님 손으로 전환되었습니다. 육의 세계에서 영의 세계로 문턱을 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다는 말이 아니고 그들은 하나의 역할을 보여주는 겁니다. 신약시대에 오면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0장에 있는 말씀처럼 스스로 마귀로부터 공격을 자초하고 깨져서 마귀(우리)가 이겼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 깨어진 틈에서 생명이 나온 거예요.
이 모든 일에 대해 이스라엘 백성들은 혼란스럽고 당황스러웠을 겁니다. 그냥 농사지어 밥 먹고 살면 되는데 괜히 주님이 찾아오셔서 난리가 난 겁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이런 이스라엘을 보라는 겁니다. 직접 하나님과 만났던 그 나라가 우리가 사는 이 나라와 어떤 차이가 있는지 보라는 거예요. 우리는 고요한 나라에서 예배당지어 찬양하고 즐기는데, 진짜 하나님이 찾아온 나라는 온통 소란과 난리의 연속이었습니다. 어느 쪽이 하나님이 찾아 온 것이냔 말이죠.
우리가 상상한 신은 이런 모습이 아니에요. 우리의 솜씨 발휘해서 기도하고 찬양하면 기뻐하고 복주는 분은 진짜 하나님이 아닙니다. 전혀 낯선 모습의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입니다.
신명기 8장 2절을 봅시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을 기억하라.”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40일 동안 있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누구를 만났습니까? 마귀를 만났지요. 예수님 눈에는 이 땅에 사람이 없습니다. 오직 악이 다스리는 세상뿐입니다. 사람은 오직 예수님 본인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인정하는 아들은 예수님뿐입니다. 이스라엘을 아들이라고 했지만 그것은 아들 속에서 아들을 만들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다 죽잖아요. 죽는 것은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영생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흙으로 돌아갈 것은 돌아가고 영생하도록 되어 있단 말이지요.
이 모든 하나님의 숨겨진 프로잭트는 다른 민족, 다른 종교에서는 알 수 없도록 되어 있습니다. 태국, 미얀마 이런 나라에는 곳곳에 종교시설이 지어져 있어요. 캄보디아에도 알코르와트라는 유명한 유적지가 있어요. 그곳에서 뾰족한 탑들이 이곳저곳 세워져 있어요. 그렇게 해서 하나님을 만날 수 없어요.
지난 시간에 라캉의 주장을 그림으로 설명을 드렸는데, 이 그림이 말하는 것은 인간은 반드시 신화로부터 시작해서 신화 속에서 주체를 꺼집에 내는데 이 주체가 온전한 주체가 아니고 흔들리는 주체예요. 분열된 주체라고 해서 S에 빗금(/)을 긋습니다. 그러면 인간이 신화를 상징화 시키는데, 상징은 문자와 형식과 제도를 만드는데 이것은 자기가 만드는 것이 아니고 기존에 이미 만들어져있고 기존에 통용되고 있는 몇 개를 골라서 자기를 찾는다는 것이 인간의 분열된 주체입니다.
내가 누구냐는 기존의 좋은 것을 뽑아서 대충 채우는 거예요. 그래서 마음에 안 들면 바꿉니다. 인간의 주체란 몸만 있을 뿐이고, 몸에서 나오는 것은 욕구고 충동인데, 이 충동은 온순하게 다룰 필요가 있거든요. 온순하게 다루기 위해 율법을 도입하고 교회도 다녀보고 온갖 것을 하면서 누르는데, 낮에는 적당히 조절이 되는데 밤에 잠이 들면 꿈에서 다시 튀어나오지요.
이런 식으로는 욕망을 제어할 수도 없고 충족시킬 방법도 없습니다. 충족이 안 되니까 정신병이 되는데, 정신병에서는 간단하게 대처합니다. ‘그냥 충족되었다고 여겨라.’ 그러면 치유가 된 거예요. 임시 땜빵이죠. “사람은 살다가 누구나 죽기 마련입니다.” “예, 그런데 죽고 난 뒤에는 어떻게 됩니까?” “그런 것은 묻는 게 아니야. 그것은 누구도 몰라. 아무도 가본 사람도 없고, 실험을 할 수도 없어. 그런 것 궁금해 하다가 정신병 걸려. 관심 끊어.”
이것이 땜빵으로 살아가는 인간이 답할 수 있는 전부입니다. 진리는 말하지 말기. 왜냐? 아무도 모르니까. 그런데 이스라엘은 진리요, 길이요, 생명이신 분이 직접 찾아오신 거예요. 이것은 반칙입니다. 인간들끼리 사는 세상에 하나님이 튀어내려 오셔서 인간과 마음을 분류시킵니다. 그 마음이 주체가 되는 거죠. 하늘나라에서도 영원히 살아있는 나만의 고유한 주체가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고린도후서 5장 말씀처럼 이 몸을 빨리 벗어야지요. 어서 이 파자마를 벗고 새로운 명품 옷으로 갈아입어야지요. 이것이 사도 바울의 소망이었습니다.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고후5:1-2)” 라고 했어요.
신명기 8장의 말을 예수님이 이루십니다. 주님 눈에는 사람은 안중에도 없어요. 사람은 마귀에게 속했기 때문에 마귀가 대표자지 인간은 대표자가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마귀가 진검 승부에 돌입한 겁니다. 마귀가 먼저 공격합니다. “네가 배고픈데 일단 먹어야 살잖아. 돌이 떡이 되게 해서 먹어라.” 여하간 마귀는 살아야 하지 않느냐고 예수님을 공격합니다.
예수님은 산다는 개념을 바꿉니다. 떡으로 사는 것 따로 있고 말씀으로 사는 것 따로 있다는 겁니다. 모든 인간은 떡으로 살았기 때문에 악마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는 겁니다. 인간들은 늘 하는 소리가 ‘양식 없다. 물 없다.’ 이렇게 나오니까 주님은 그 사람에서 마음을 떼어놓고, 그것이 바로 네가 마귀에게 속한 증표라는 거예요.
그런데 주께서 물을 주시되 그들이 원했던 물이 아니고 물 없는 곳에서 물이 나옴으로 말미암아 생명을 주십니다. 이 물은 원망과 불평의 대가로 주어진 것입니다. 몸과 마음이 분류된 대가로 준 거예요. 나와 마음을 떼놓고 보니까 내 마음이 착하고 순수하지 않다는 것이 폭로되게 되었는데 그로 인하여 주신 것입니다.
“초코파이 드릴까요, 영화 관람권 드릴까요?” 이건 헌혈한 사람에게 간호사가 묻는 질문입니다. 저는 뭘 선택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습니다만. 내가 원망과 불평을 하지 않으면 내 주체가 이렇게 허접스럽다는 것을 밝혀지지 않고, 밝혀지지 않으면 새로운 생명을 만날 길이 없습니다.
우리가 찾지 않아도 주께서 우리의 원망과 불평을 유도하면서 다가오시는데, 이것이 바로 구원자인 주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증거입니다. “나는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럴 경우에 낸 마음은 악마의 마음으로 들통 났기 때문에 옛날처럼 사람이라고 여겨 남의 시선을 의식하는 그런 삶은 살지 않습니다.
만약 제게 성경에 나오는 인물 중 위대한 사람을 꼽으라면 주저 없이 막달라 마리아를 꼽습니다. 사람들이 보지 않는 골방에 숨어서 몰래 향유를 주님 발에 부었으니까? 아닙니다. 지금 자기를 비난하고 조롱하는 사람들이 포진해 있어요. 자신이 행실 더러운 여자라는 것은 온 동네에 다 소문이 난 상태입니다. 조소와 비아냥거리는 소리가 자신에게까지 들려옵니다.
도대체 얼마나 자신과 마음이 분류가 되었으면 자신을 향한 비난도 전혀 문젯거리가 되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살면서 힘든 이유는 따가운 외부의 시선을 본인이 의식하기 때문에 힘든 거예요. 다른 사람은 나에게 큰 관심도 없는데 본인이 괜히 상상해서 자기를 욕한다고 분노하고 있어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말씀은, 분류 좀 해라. 이 세상은 네가 10년 후에 잘 된다고 해서 상황이 바뀌는 것이 아니다. 이 땅은 광야적 상황임을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광야에 보내 마귀와 만나서, 이 세상 자체가 예수님이 투입한, 언약이 투입한, 언약에 의해서 고정된 광야같은 상황이 이미 예수님으로 인하여 개시되었음을 신약은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여기에서 필요한 것은 뭐냐? 만나지요. 40년 동안 만나를 주는데, 요한복음 6장에 나오는 철없는 유대인들처럼 “주여, 지금도 우리에게 만나를 주옵소서. 그러면 얼마든지 주님을 믿겠습니다.” 이런 요청에 대해 주님은 이런 답변을 주십니다. “네 마음이 낮아지는 것이 만나다.” 네 마음이 낮춰진다면, 다시 말해서 네 마음이 원망과 불평으로 가득 차 있어서, 내 마음은 원래 내 소속이 아니고 마귀에게 속한 것을 네가 안다면 그게 바로 과도기적인, 나중에 마귀도 없고 사기꾼도 없는 악한 자가 들어오지 못하는 그 나라가 너의 나라라는 사실을 미리 앞당겨 밑에서 예고편으로 우리에게 도장을 팍팍 찍어주는 그런 차원의 증거들을 우리에게 주시는 겁니다.
그래서 이제부터 여러분들이 집으로 돌아가시면 여러분 주변에 전부가 광야의 언약적 상황이니까 온 세상에 만나가 깔려 있어요. 옛날에는 아침에만 만나가 있었지만 지금은 발에 차이는 것이 만나입니다. 전부가 우리의 마음을 낮추기 위한 조치들입니다. 아볼로바이러스로 서남아프리카에서 1,000명 가까이 죽었다는 뉴스를 들었을 때 “우리나라에는 아직 그 바이러스가 들어오지 않아 다행이다.” 이 생각에 원망과 불평이 담겨 있는 거예요. 만약 내 친척이 그곳에 여행을 갔다고 그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죽었다면 “하나님, 왜 이런 일이 생깁니까?”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진작 내 안에 괴물이 들어있다는 사실을 알아야했어요. 주님이 건드리니까 불평이 튀어나오는 거예요. 주변에 있는 모든 상황들은 출렁이는 바다처럼, 존재의 바다처럼 파도가 쳐서 우리를 아프게 하면 기다렸다는 듯이 우리에게서 불평과 원망이 나오는데, 그것이 바로 우리의 위상, 우리의 본질, 우리의 주체, 우리의 현실을 똑바로 깨닫게 하는 준비된 하나님의 만나 덩어리입니다.
골로새서 3장에 보면, 이 세상에서 우리는 이미 죽은 자입니다. 우리는 이미 죽었고 우리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다고 했습니다. 그때까지 세상 것을 탐한다면 그것이 우상 숭배입니다. 그 만나가 주어질 때 ‘제가 바로, 제 마음이 바로 우상 숭배자의 마음이었습니다.’라고 고백하게 되면 그 사람은 이미 주님과 동행하는 하나님의 성도입니다. 그 사람은 지금 출애굽 되고 있는 중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눈에 보이는 이 땅이 가장 직감적이고 현실적이고 정이가고 이것만이 우리가 아는 세상의 전부라고 지금도 철썩같이 인정하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웬 은혠지 웬 사랑인지 우리가 죽는다는 사실을, 십자가에서 죽는다는 사실 앞에서, 살아 있으면서 십자가가 웬 사건인지 관심을 두는 기회를 주심을 감사합니다. 주님이 죽으심으로 우리가 예상치 못한 다른 현실에 놓여 있음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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