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출애굽기 4강(왜 피인가-차이의 고정화)

아빠와 함께 2014. 8. 13. 18:27

2014여름수련회(낯선 경계선) 출애굽기 제 4강

 

요셉이라는 인물이 우리 보기에 그냥 우리와 같은 어떤 사람인 그냥 요셉인줄 알지요. 요셉이 그냥 요셉이 아닙니다. 언약이, 주의 이름이 친히 만들어낸 작품이에요. 하나님은 산자의 하나님이라 하지요. 천국에는 아브라함도 살아 있고, 야곱도 살아 있고, 이삭도 살아 있다는 거예요. 우리는 생각하기를 ‘아, 살다 죽으면 나도 천당 가겠구나.’ 하는데 그게 아니고 갈 수 없는 요셉이 갔고, 갈 수 없는 아브라함이 갔고, 갈 수 없는 이삭이 갔고, 갈 수 없는 야곱이 갔다는 이야기입니다. 결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훌륭하고 잘나서가 아니에요.

 

아까도 했지만 그들은 카누를 저어갈 때 앞에 절벽이 있다는 것도 몰랐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각자의 절벽을 줍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잡아 죽여야 되고 이삭은 자기가 사랑하는 아들에게 저주를 내려야 돼요. 자기가 좋아하는 타입, 자기스타일의 아들은 저주를 주고 자기가 안 좋아하는 스타일인 야곱한테는 축복을 줘야 되는 그것이 자아의 분열, 세상에서 내가 되고 싶은 대로 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야곱은 사랑하는 아들을……, 얼마나 좋아했으면 명품 옷을 해 입혔어요, 야곱은 특별하게 옷을 해 입힐 만큼 사랑하는 그 아들을 죽였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을 죽였어요.

 

언약에 걸려들었습니까? 좋아하는 것을 주께서 다 죽여 버립니다. 요셉의 죽음은 요셉의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이삭에게 에서의 저주받음은 에서의 저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곧 자기 저주고 자기 죽음인 것입니다. 자기종말입니다. 강물 뒤에 사람들이 아무리 발견하려고 해도 발견할 수 없는 폭포, 나락, 지옥, 종말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던 겁니다. 아무도 몰랐지요. 왜 그동안 몰랐는가? 사람이 죽어가면서도 죽음 뒤에 있는 것을 왜 몰랐는가? 사람은 그 죽음마저 존재가 존재의 연속에서 죽음을 이해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살다 보면 죽을 때 있으면 죽으면 그만이지 뭐.” 죽음이라는 것을 죽음 저편에서 이해하지 못하고 죽기 전에 인간이 죽음을 생각하는, 내가 있다가 없어지면 그만이라는 그 생각에다가 죽음을 포함시켜서 집어넣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게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실제로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을 해서 부활한 관점에서 애초부터 주님이 죽으시기 이전부터 부활의 관점으로 너희에게 말씀과 기적과 비유들과 여러 가지 일들을 해 주신 거예요. 너희들은 생명이 아니라고, 내가 찾아오게 되면 그게 생명이라고 이야기해 준겁니다.

 

그래서 살아 있는 자에게 죽음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정말 의미 없습니다. “죽으면 죽지 뭐.” 이런 식이지요. 요셉의 밑바닥에는 가발을 지탱하는 그물이 있듯이 언약의 그물망이 있었고 그 요셉의 등장은 죽어야 될 인간도 살 수 있다는 것, 단 조건이 있어요. 언약 안에 말려들었을 때, 언약에 의해서 포착이 될 때만 그것이 가능합니다. 언약에 포착되면 존재로서의 인간, 존재의 이름을 갖고 있는 인간은 그냥 죽으면 안 되고 하나님의 언약이 내리는 심판을 경유해야 비로소 심판마저 극복된, 심판의 저주가 없는 상태로서 산 사람으로 영원한 하나님과 동행하고 살 수 있는 천국백성이 되는 겁니다.

 

그 과정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다 겪었어요. 겪은 그 언약에서 이제는 개인이 아닌 집단적으로 언약을 적용하기 위해서 히브리인을 찾아오게 됩니다. 그러면 앞으로 히브리인의 운명이라는 것은 판명 난 거예요. 죽은 거예요. 죽을 때 집단 자살을 하는 것이 아니라 죽을 때 하나님이 주신 죽음 사건에 그들은 들어가야 되는 겁니다. 들어가서 죽고 난 뒤에 하나님의 언약적인 배려, 혜택에 의해서 다시 살아나야 돼요. 그리고 다시 살아날 때는 존재로 살아나서는 안 되고 자신의 존재를 대체하는 존재, 하나님의 이름에 부합되는, 그 이름을 위한 백성으로서 그들은 광야생활을 이제 시작을 해야 되는 겁니다. 주의 이름만 높이는 겁니다.

 

이스라엘은 그렇게 시작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바로 왕이 히브리인들에게 가하는 모든 압박은 그냥 정치적인 문제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혁명이라는 것은 그 당시에는 혁명인줄을 몰라요. 혁명이 끝나고 난 뒤에 그 다음에 뒤에 가서 보면서 그것이 혁명이었다고 명칭을 붙입니다. 명칭을 붙일 때 그것이 바로 이름이죠. 어떤 이름? 사건에 관한 이름이 붙여지는 겁니다. 그러면 혁명이 일어나고 난 뒤에 그 사건이 반복해서 이루어질 때마다 그 혁명은 죽지 않고 계속해서 살아 있게 되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십자가라는 것이 있거든요. 사도바울은 십자가 본 적도 없습니다. 그는 십자가 지기 15년 후의 사람이기에 십자가 본적도 없어요. 그런데 갈라디아서 3장 1절에서는 마치 자기가 십자가를 본 것처럼 이야기합니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십자가 봤어요? 봤냐고! 안 봤다는 말이지요. 안 봤는데 왜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느냐는 말이지요. 어디에, 어느 장소에, 갈릴리 그 장소에 가면 십자가 있습니까? 없잖아요. 거기에 지금 택지개발하고 있는데 무슨 십자가가 있겠습니까? 택지개발인지 뭔지 모르겠지만 하여튼 지금 거기가 다 관광지가 되어 있는데 무슨 십자가가 있어요. 그냥 갖다 붙여놓은 십자가나 있겠지만.

 

그래서 사건에 이름이 붙여질 때 자기 이름은 포기되어야 되는 겁니다.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거늘, 하는 그 순간 사도바울은 자기 이름으로 그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고 주의 이름으로 그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럴 때 십자가는 죽지 않고 계속해서 주의 이름 부르는 곳에 사건이 반복해서 터져 나오는 겁니다. 조건은 뭐냐 하면, 그 이름을 부를 때 반드시 자기 존재, 자기 이름을 포기하고 거부해야 된다는 거예요. 상당히 어려운 이야기지요. 신약이기에 상당히 어렵게 이야기했습니다.

 

구약으로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혁명이 일어났다는 거지요. 모세가 애굽이 자기백성을 학대하는 것을 보고 안중근 의사처럼 이래서는 안 되겠다고 혁명을 일으킨 거예요. 혁명을 일으키는데 나중에 그냥 도망쳐서 목자가 되지요. 광야에서 양이나 키우고 있었지요. 그럴 때 혁명이 일어났습니까, 안 일어났습니까? 그게 하나의 혁명이었다고 붙일 이름이 본래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한 때 에피소드였다, 이러면 혁명은 없는 거예요.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당황하지 말고, 이런 거지요.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혁명은 누가 이름을 불러야 되느냐 하면 나중에 그 사건의 혜택을 입은 자만 그 이름을 지어주면서 그 때 그런 일이 있었다고 이야기를 해줘야 되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십자가의 혜택을 입고 있기 때문에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는데 누가 너희를 꾀느냐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말은 뭐냐? 나처럼 십자가 혜택을 입은 사람은 여기여기 모여라, 이런 뜻이에요. 그 모인 곳이 뭐냐, 교회라는 겁니다. 그래서 초대교회가 모일 때는 어떻게 모였느냐 하면, 아직 계시가 확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물체화를 통해서 모였어요. 물체화가 뭐냐 하면, 주의 떡과 잔을 나누면서 이것은 주의 흘리신 피고 주님의 찢기신 살이라고 하면서 모일 때마다 그들은 주님의 죽으심을 기념하면서 성만찬을 행했잖아요. 아직 계시가 확정되기 전이기 때문에 모든 사건들은 사물화되고 물체화되는 경향들이 있습니다. 아직도 그런 물체화와 사물화를 유지한다면 그것은 하나의 연극이 되고 말지요.

 

연극이란 것은 일어나지도 않은 사건을 마치 일어난 것처럼 위장하는 방법이 연극입니다. 그래서 저에게 인상 깊은 노래의 가사가 있어요. “연극이 끝난 후”라는 노래인데 1980년도 대학가요제 입상곡입니다.

 

【연극이 끝나고 난 뒤 혼자서 객석에 앉아

조명이 꺼진 무대를 본적이 있나요

 

음악 소리도 분주히 돌아가던 셋트도 이젠 다 멈춘채

무대위엔 정적만이 남아있죠 어둠만이 흐르고 있죠

 

배우는 무대 옷을 입고 노래 하며 춤추고

불빛은 배우를 따라서 바삐 돌아 가지만

 

끝나면 모두들 떠나 버리고 무대위엔

정적만이 남아있죠 고독만이 흐르고 있죠

 

연극이 끝나고 난 뒤 혼자서 무대에 남아

아무도 없는 객석을 본적이 있나요

 

힘찬 박수도 뜨겁던 관객의 찬사도 이젠 다 사라져

객석에는 정적만이 남아있죠 침묵만이 흐르고 있죠

 

관객은 열띤 연기를 보고 때론 울고 웃으며

자신이 주인공이 된 듯 착각도 하지만

 

끝나면 모두들 떠나 버리고 객석에는

정적만이 남아있죠 고독만이 흐르고 있죠.】

 

연극이 끝난 후에 조명도 끝나고 관객도 없을 때 그 허무와 허탈감. 한 때 했던 마약 같은 느낌이죠. 한때 존재를 즐겁게 했지만 끊고 난 뒤에 현실로 돌아오게 되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오늘날 사람들이 예배를 하나의 연극의 일종으로 봐요. 예배 참석해서 은혜는 받았는데 문만 열고 나오면 마치 아무 일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자기 존재감으로 황급히 돌아옵니다. 심지어는 예배도중에 (걸려온 전화기를 받아들고 예배당 밖으로 걸어 나가면서) “예, 예! 알았습니다. 지금 갑니다. 물건 와 있다고요? 지금 막 문 엽니다.” 그런 경우도 있어요.

 

이 세상 자체가 연극이라는 그 말은 다른 말로 해서, 세상을 어떻게 사나 전부 다 허구고 허망하다는 자기고백에 지나지 않습니다. 심각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왜, 존재의 바다에 일어났던 일은 다시 물결치게 되면 언제 그런 일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다 꿰매집니다. 꿰매면 그 자국이라도 남지만 출렁이는 물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됩니다. 이게 바로 교재에 쓴 “존재의 바다입니다.” 돌고 도는 물레방아 인생이다! 그런 식으로 해탈을 노리는 게 불교입니다. “세상은 모두 인연이다. 모든 것은 엮여있고 따라서 이 세상은 존재에서 와서 존재로 가버린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거기서 뭐가 사라집니까? 왜 있어야 되는 것이 없어지는가의 그 문제가 미궁에 빠졌지요. 왜 미궁에 빠진지 알아요? 모르면 없애면 되니까. 우리의 존재에 대해서 시비 걸면 아예 그 존재를 없애버리면 그만이거든요. 예수님 죽고 난 뒤에 로마 군인에게 보초하게 했습니다. 로마당국에게 예수는 그냥 한때의 인물이에요. 에피소드만 남기고 가버린 거예요. 아무 일 없어요. 그런데 제자들이 구라를 쳐서 시체를 따돌려 놓고 하는 말이 “유 병언은 살아있다.” 이런 식으로 시체 바꿔치기 해서 주님이 살아 있다고 구라를 치면 국가의 존재질서가 문란케 되고 그러면 국민들의 재산과 생명을 보호해야 될 치안의 책임이 상당히 난감하게 돼요.

 

따라서 범국가적인 치안유지목적 때문에 예수 부활했다는 소식을 전한사람들을 체포해서 구금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해서 사도들이 구금되었는데 문제는 지진이 일어나서 옥문이 열렸다는 거예요. 사도행전에서(행 16:26). 여러분은 성경 안 봅니까? 그런 게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게 지진이라는 거예요. 그러나 성경은 지진이라고 하지 않고 천사가 와서 했다는 거예요. 어느 말이 맞습니까? 우리는 천사를 믿지 않아요. 왜냐하면 천사가 나오게 되면 그것은 하나의 사건이거든요. 존재는 뭐든지 소유가 될 때 존재에 편입이 되는데 사건은 찢어지고 째버린다는 말이지요. 째버리면 존재가 찢어지고 그걸 봉합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고 힘들거든요.

 

따라서 사건이 침입했다는 이 소식보다는 아무 일이 없는 것이 더 나아요. “아, 그때 그건 지진이었어. 한 때 운이었지.” 베드로가 갇혔는데 옥문이 열렸고 사도바울과 실라가 갇혔는데 옥문이 지진이 일어나서 열렸다. 타이밍이 그렇게 맞았겠지요. 정말 당신이 잡힐 때 천사가 왔다면 한번 실험을 해보면 되지요. 잡혔던 그 사도바울과 실라를 다시 감옥에 집어넣습니다. 그리고 그 앞에 지진계를 놓으세요. 같은 일이 벌어지는지. 절대로 같은 일이 안 일어나지요. 왜냐하면 반복이라는 것은 존재에나 통하고 인정되는 물리학이지 절대로 우연은 아닙니다.

 

우연이라 하는 것은 절대로 필연 속에 들어올 수가 없어요. 오히려 필연을 욕하고 그냥 사라져 버리는 것이 우연입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그 우연을 배경으로 해서 십자가를 언급하면서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구원이라 하는 것은 십자가의 능력으로 한다.” 이렇게 되니까 자기 존재가 구원받고 싶어서 그 좋다는 십자가고 복음이고 다 존재의 바다에 끌어당겨서 고정화시키려고 했던 모든 사람에게 십자가언약이라 하는 것은 해봐도 소용없고 지식의 교만만 더 높아지는 하나의 계기일 뿐입니다.

 

성령이 아니고서야 아무도 십자가를 모른다고 사도바울은 단서를 붙였습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2장 4절에서 하는 말이 “내가 전하는 것은 설득이나 교육도 양육도 아닙니다. 내가 전하는 것은 성령의 나타남”으로 그렇게 했다는 겁니다. 성령의 나타났다는 것은 인간의 손에 체포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인간의 범위를 넘어갔다는 말입니다. 그 말은 뭐냐, 인간이 현재 추구하는 모든 시도를 부정하고 고발하고 심판한다는 말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이삭 잡는 것이 개인적인 종말이었지만 종말은 전 세계, 전 우주에 관한 종말을 이미 선언해버린 그 시점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여름방학 되어서 애들이 봉화에 가서 은어축제에 참가할 때 그게 오만입니까? 그게 오만하고 교만한 짓이에요? 겨울방학에 외가집에 갔어요. 집 앞에 연못이 얼어붙어서 썰매를 탔어요. 일기를 씁니다. “오늘은 맑음. 집 앞 연못 빙판에서 썰매를 탔다. 재미있었다.” 이게 오만이고 교만입니까? 그런 거예요? 그러나 성경은 그걸 교만과 오만으로 봅니다. 왜? 썰매를 타면서 종말을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썰매 타는 자체가 죄라고 느껴지지 않기 때문에 그게 오만으로 보는 거예요. ‘내가 지금 무슨 시대인데 이 짓을 하고 있나?’ 이렇게 되어야 되거든요. 그런 아이가 있으면 천재이거나 아니면 바보이거나입니다. 그래서 구원이라는 것은 주님의 호명과 호출과 찾아오심으로 되는 것이지, 하나님의 개입으로 되는 것이지 신학적인 실력, 복음적인 실력이 있다고 해서 그 힘으로 구원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구원은 하나님의 자기구원이기에 우리 구원에 하나님이 배려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자기 몸을 구원해버려요.

 

우리가 몸에, 지남철에 달라붙은 쇠붙이처럼 달라붙어있는 지체이기에 주의 이름 구원할 때 딸려서 같이 구원된 거예요. 그래서 성경이 이렇게 합니다. “이미 예수님 부활할 때 너희는 구원이 되었다.”고 합니다. 구원이 되었다. “이미 하늘에 앉히시니……, 의롭게 하시고 영화롭게 하셨느니라.”(엡 2;6, 롬 8:30) 이미 과거완료, 확정된 사실입니다. 남아 있는 그 효과가 뿌리를 뻗게 되면 그 뿌리에 뻗친 현상들이 이제는 드러나기 시작하는 거지요.

 

여기 무성한 나무가 있고 뿌리가 있는데 바다에서 파도가 쳤다 이 말이지요. 처음에는 땅 속에 묻힌 뿌리가 안 보였는데 파도가 자꾸 치니까 이 뿌리부분이 자꾸 드러나지요. 주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했다고 할 때 우리는 잘나서 구원된 줄 알았어요. 그러나 주님이 찾아와서 사건을 주니까 우리가 구원된 것은 우리가 잘나서가 아니라 이 뿌리 자체가 주님과 언약적인 관계망으로 형성되었기 때문에, 그 파이프로 계속 생수를 부어주었기 때문에 우리 자신이 언약의 작품으로 이미 지금까지 소급해서 살아온 거예요.

 

제가 늘 이야기하지만 십자가 옆에 달린 강도 있잖아요. 그 사람은 강도되지 않았으면 큰일 날 뻔 했어요. 강도 되는 것이 일종의 풍선 같은 거예요. 주께서 풍선을 부니까 강도가 된 겁니다. 강도가 되었어요. 세리도 창녀도 훅 부니까 나는 창녀가 되고 세리가 되었어요. 그래서 구원받는 겁니다. 거기에 무슨 오만이 있습니까? 거기에 무슨 편견이 있어요. 편견, 오만, 없습니다. 자기 존재를 지키려고 하니까 모든 것이 꼬이기 시작하는 겁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어떤 여자 분이 있었는데 간호사를 하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 간호사가 예뻤던지 그 병원 이사장과 결혼해서 사모님이 되었어요.

 

그런데 옛날 함께 병원에 있던 후배간호사가 볼 때마다 “언니! 언니!” 하더란 말이지요. 그러니까 그게 약이 올라서 “언니라고 하지 말고 사모님이라고 해야지.” 드라마 이야기입니다. 요새 드라마 아니면 이야기할게 없어서……. 자기 과거를 자꾸 지키려고 하니까 자꾸 꼬이는 거예요. “네가 내 아들이다.” 이러면 끝날 문제 가지고 이게 막장 드라마가 되어서 되도 않는 문제로 계속 꼬여요. 임 성한 작가 같으면 벌써 다 죽였어요. 내가 작가 한다면 다 죽입니다.

 

출애굽에서 이스라엘의 운명이라는 것은 이미 언급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겪었던 그 죽음을 맛봐야 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본인들이 원한 게 아니었어요. 제가 지난시간에 이야기했듯이 주께서 사건을 일으킬 때는 그 사건을 무효화시키고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여기는 존재의 강력한 반발심이 드디어 이스라엘에서 나오기 시작합니다. “주여, 이것은 우리의 뜻이 아닙니다. 공동묘지가 없어서 이 광야에서 우리를 몰살 시키려고 했군요.”라고 모세에게 달려들고 원망을 하지요. 여러분이 다 아시지요. 성경을 읽어봤으니까.

 

“다시 존재로 돌아가자. 내 존재를 주님이 이런 식으로 인도한다는 것은 너무 힘들고 우리로서는 감당 못하겠다.” 감당 못하겠다는 거예요. 누가 자기보고 감당하라고 했어요? 감당 못하겠다는 거예요. 그저 원망, 그저 불평, 그러나 그때가 좋았습니다. 사람이 돈 없이는 살아도 심심하면 못살아요. 티격태격 할 그 때가 참 좋아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로 홍해를 건너게 했을 때 그들은 신바람이 났습니다. 미리암이 찬양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들어가야 할 곳은 바로 죽음 속이었습니다. 죽음 속.

 

표어가 액자로 되어 있어요. 죽으면 살리라. 아주 무시무시한 표어를 걸고 그들은 광야에 들어갑니다. 그들이 살 수 있는 코스는 다 피해갑니다. 물이 있잖아요. 물이 있는 코스를 피해서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내비게이션이 되어서 인도합니다. 천사와 주님이 교신합니다. “여기는 천사! 오버.” “여기는 주님! 오버.” “주님, 저들이 지금 물 있는 곳으로 갑니다.” “빨리 진로를 바꿔라. 물 없는 곳으로 가라.” 그러니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인도해서 물 없는 곳으로 가요. “주님, 저 코스로 가면 거기에 양식이 있습니다.” “안 된다. 큰일 난다. 양식을 피해서 가거라.” 양식을 피해서 가요.

 

이것은 우리가 바로 편에 섰을 때 비로소 이해가 됩니다. 이런 식은 우리가 원했던 사랑의 하나님이 아니라는 거예요. 우리가 기피하고 싶은 1순위에요. 마이너스 백점, 땡, 탈락! 정말 이런 신은 버리고 싶은 그런 신이에요. 그래서 그들은 어떻게 하느냐? 그들을 인도하는 신 말고 따로 그들이 정겹던 신을 따로 만듭니다. 이름을 지었어요. 여호와. 얼마나 재미있는 현상입니까? 요새 말로 하면, 예수 이름으로. 여호와, 우리는 여호와를 믿는 민족이라는 겁니다. 자기들이 원하고 자기들이 기대했던 신, 존재를 긍정해주고 자기의 모든 꿈을 이루어주는 신. 꿈은 이루어진다. ★은 이루어진다. 긍정적 마인드, 그것이 교회의 아이템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기에 힐링이라는 것. 지금 교회에서 템플스테이까지 나오고 있어요.

 

성령의 삶을 사시면 마음이 고요할 것입니다. 이상한 음악을 동원하면서. 꼭 전기톱 소리 같은 음악. “마음을 낮추시고…….” 천주교신부들이 예배인도 할 때 꼭 그렇게 해요.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주님의 떡입니다.” 의사들이 처방전 라틴어로 할 때 얼마나 짜증나요. 신부들도 라틴어 배웠다고 라틴어로 자기들끼리 이야기하고요. 그러면서 스트레스는 스트레스대로 받아서 술이나 퍼마시죠. 그러면서 돌아서서는 “마음을 청소하세요.” 너나 청소하세요. 미신은 형식화를 모방함으로써 유지가 되는 겁니다. 그만큼 형식이라는 것이 장애요소입니다.

 

그러면서도 형식 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우리교회도 전부 다 형식으로 도배가 되어 있습니다. 왜 11시에 시간 맞춰서 딱 하느냐는 말이지요. 4절 찬송가를 시간 맞춘다고 3절로 줄여서 한다고요. 무슨 강박관념입니까? 이것은 히스테리 같아요. 예배할 때 일어서고. 이것이 형식이 아니에요? 형식을 안 한다는 자체는 자기가 죄인 아니라고 우기기 때문에 안 되는 거예요. 형식을 함으로써 하되 이것이 의로움이 없음을 인지하면서 그 형식을 할 수밖에 없어요. 차 폐차할 때 수리해서 넘깁니까? 그런 것 봤어요? 병원에 가면서 병고치고 병원에 갑니까? 그런 것이 없잖아요.

 

이번에 제가 십년 넘게 타던 차 폐차장에 넘겼습니다. 15만원 받았습니다. 리오. 황금차인데 없앴습니다. 가다가 연기 나서 없앴습니다. 무슨 생각이 났느냐 하면 뉴스에서 보니까 고속도로에서 차 엔진에서 불이 붙어서 자칫 잘못하면 신고당해서 벌금이 더 많이 나올 가능성이 있어요.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폐차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왔는가? 주께서 오게 하셨지요.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좋아하지도 않고 도리어 원망했습니다. 그게 오늘날 우리 모습입니다. 원망하면서 질질 끌려가듯이 그렇게 주께서 인도하십니다.

 

주님에게 구원받으면서 주님은 전혀 좋아하지도 않고 그것도 세월 가면 되겠지 하는데 세월 가도 안돼요. 점점 더 난처해집니다. 그럴 때 그들에게 말씀을 주신 것은 마음을 낮추기 위해서입니다. 교체해야 되거든요. “나는 폐차다, 나는 폐차다. 내가 다쳐도 이것은 마땅한 조치다.” 늘 그런 마음을 유지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게 마음을 유지할 때마다 잠시 사료 주듯이 맛있는 초콜릿 하나 툭 던져주는 방식. 초콜릿이 맛있거든요. 맛있으니까 다시 존재로 돌아올 때 또 초콜릿 말고 다른 것을 줘서 그야말로 당근과 채찍으로 강력하게 당기십니다.

 

“이런 식으로는 네가 약속의 땅의 장대 같은 거인족을 이길 수가 없다.”는 그 말이에요. 약속의 땅은 비어있는 땅이 아닙니다. 기존에 있는 집 주인 쫓아내고, 그러니까 박힌 돌 빼고 외부의 돌이 거기에 들어가는 반칙성, 그야말로 반칙성으로 주님께서 입주하는 거예요. 완전히 도둑이에요. 그래서 주님은 도둑입니다. 그리고 그 도둑을 믿으신다면 그 도둑과 한패가 되시는 거예요. 마태복음 12장 28절의 말씀입니다. 도둑이 담을 타고 넘어가서 집 주인을 묶어놓고 난 뒤에 그 다음에 그 집의 가재도구를 들춰내는, 전리품으로 가져가는 그것이 바로 하늘나라라는 겁니다. 바리새인들이 믿을 리가 있습니까? 그 말을 믿는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말을 믿는다는 것은 자기의 존재에서 나오는 모든 선함과 경건함을 모독하는 행위이기에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원통을 다시 그리겠습니다. 원통 이스라엘인데 바깥에 원통이 또 있어서 이중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이 이중구조는 언약에 의해서 되어야할 언약적 이스라엘입니다. 이 안의 작은 원통인 이스라엘은 애굽적이스라엘, 육신적 이스라엘이에요. 이스라엘은 알아서 버리고 이쪽으로 나오라는 그런 것은 절대로 없어요. 그들은 존재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존재를 버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죽자고 이것을 강력하게 쥐고 있습니다. 쥐고 있을 때 바깥에서 이걸 언약으로 작용하게 되면 발차기에 들어갑니다. “우리는 싫습니다. 이것은 아니되옵니다.” 계속해서 발로 차면서 “나는 이런 식으로는 예수 안 믿겠습니다.” 계속 나오는 거예요.

 

주께서는 이 애굽적 이스라엘에서 나오는 이 모든 원망과 불평을 모아서 새로운 이스라엘 세우는 에너지원으로 사용하는 겁니다. 재활용이지요. 버릴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꼭 돼지 같아요. 족발이고 뭐고 다 먹어요. 우리에게서 마음껏 나오는 그 죄를 하나도 버리지 않고 그 분비물을 다 모아서 예수님 자신의 것으로 집어넣습니다. 집어넣고 난 뒤에 그 죄를 다 가지고 아버지 앞에 “이 죄를 위해서 죄 없는 제가 죽겠나이다.” 하고 아버지의 약속에 따라서 죽으십니다. 죽게 되면 그 죄를 퍼부었던 사람들은 주님께서 그 죄를 흡수했다는 그 이유 때문에 난데없이 졸지에 우발적으로 우연히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입이 백 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묻습니다. “명단 잘못된 것 아니에요? 제가보기에도 제가 구원받을 입장이 못 되는데 왜 제가 구원되었지요? 명단 다시 살펴봐 주세요. 이름이 이 군호 아닙니까? 아니라고요? 그러면 제가 아니고 축구선수 이근호지요? 그 애 아니에요? 아니라고요? 그러면 제가 왜 구원받지요?” 오히려 의아해 하는 그 모습이 화평과 자비와 양선과 형제우애입니다. 그 모든 모습들을 성령의 열매라고 합니다. 반면에 “나는 구원받았다.”라고 주장할 때 그것이 육신의 열매에요. 시기와 질투와 형제다툼과 온갖 비난, 이게 다 쏟아집니다. 그걸 종합하게 되면 이 말입니다. “구원받지 마세요. 구원받지 마시고 구원된 상태로 계세요.” 구원 받지 않은 상태인 그 자체가 구원받았다는 상태임을 다른 쪽에서 우리에게 언급을 해줍니다. 그것은 본인들이 알아요.

 

성경에 자기들이 스스로 칭찬하는 자는 칭찬이 아니라고 했어요. 주님 쪽에서 칭찬할 때는 어떤 근거마저 외부에서 도입해서 하는 거예요. 내가 만든 근거를 가지고 서류를 꾸미는 것이 아니고 다른 근거를 가지고 우리에게 들이대게 되면 내가 착실하게 경건하게 거룩하게 맨 날 다지고 다졌던 그 서류자체가 완전히 폐기처분됩니다. 지난주일 설교에서 제가 이런 말을 했거든요. 사람이 스스로 거룩해지려면 이 거룩이 둘쑥날쑥 해버려요. 늘어났다 줄어났다, 착한 일 하면 거룩해지는 것 같은데 나쁜 짓을 하면 그동안 따놓은 내신 성적 다 까먹어버리고 그동안 따놓은 거룩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느낌이 드는데 그렇다면 이게 견고한 구원이 될 수는 없습니다. 특히 치매가 걸렸다 하면 이것은 횡설수설이니 거룩한 자인지 뭔지 분간도 안 되잖아요.

 

그러면 그 경건성이 어디서 나왔는가를 설명하면서 그 견고성은 예수님의 죽으심에서 나오는 겁니다. 그런데 그 말은 예상외로 어려운 말이에요. 제가 어떤 분에게 질문을 했거든요. 왜 피 흘려야 구원받지요? 간단한 질문이었어요. 왜 피를 흘려야 구원되는 거지요? 여러분, 그거 생각해본 적이 있습니까? 그게 성경에 있다는 것을 저도 알아요. 난 알아요. 다 아는데 왜 피 흘려야 구원 받지요? 수십 년 복음 알고 신학교 졸업했다고 해도 피 없이는 구원이 안 되는 이유, 히브리서에서도 “피 없이는 사함이 없”(히 9:22)다고 하는데 왜 피냐는 말이지요.

 

주님이 운동하셔서 구원받았다, 이렇게 할 수 있잖아요. 주님께서 멱살 쥐고 흔들어서 구원하신다고 할 수 있다는 말이지요. 왜 피 흘려서 구원 받느냐, 그 말입니다. 원어? 원어 들고 나오지 마세요. 그게 뭐냐 하면, 바로 이 원통과 원통 사이에서, 이스라엘이라는 원통과 그 바깥에 있는 주님께서 이루시는 언약적 이스라엘 사이에서, 이것은 주님의 자기숙제인데 이 사이에서 죄가 쏟아지고 이 죄에 대해서 주께서 희생을 당하기 때문에 이 피가 흥건히 고이게 됩니다. 그 피가 이 죄를 용서해주는 거예요. 왜 피인가? 차이입니다. 또는 간격. 그러면 어떻게 거룩이 고정화되는가? 이 차이가 고정화 되면 우리의 거룩도 고정화 됩니다. 그리고 어떻게 간격 그 차이가 고정화되는가? 우리가 무슨 짓을 해도 죄인이고 주님은 우리가 무슨 짓을 해도 그 죄에 대해서 이미 의인으로 해결 했다면 이 죄라는 이것과 의라는 이 간격은 고정이 되어버려요. 고정이 되게 되면 이미 거룩과 구원받았음도 고정이 되는 겁니다. 이 차이에서 피가 나오지요. 그 피가 나와서 용서받았다는 말은 너는 죄인이고 그 죄에 대해서 나는 희생된 구원자라고 그 차이가 고정되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디에 주목해야 되는 겁니까? 나는 죄인이다, 여기에 주목하면 안 되겠지요. 주님은 의인이다, 여기에 주목하면 안 되겠지요? 무엇에 주목해야 됩니까? 이 차이, 이피가 내 피냐 주님의 피냐? 주님께서 흘린 그 피의 차이의 확정성을 받아들이면 우리는 그 확정성에 의해서 우리의 존재도 확정된 가치를 부여받게 됩니다. “너는 뭘 해도 죄인이다.” 이게 기쁜 소식입니다. 설교를 해도 강의를 해도 뭘 해도 죄가 되고 선교해도 죄인이고 전도해도 죄인이고, 이게 우리 거룩의 확정성입니다.

 

만약에 우리 죄인됨에 주목을 하게 되면 그 때부터 우리가 죄인이라는 이름의 존재로 전환되어버리는데 그렇게 존재로 전환되어버리면 계속해서 의문점이 나와요. ‘내가 성도인데 이런 죄를 지어도 과연 구원이 가능할까?’ 이런 의문점이 나오고 ‘내가 성도되고 난 뒤에 이렇게 착하게 사는데 저렇게 착하게 살지 않는 저 사람보다 양적으로 거룩이 더 많아지는 게 아닐까?’ 이렇게 되어버려요. 이렇게 되면 첫째 시간에 이야기했듯이, 이 세상에서 노동시간에 따라서 임금지급에 차이가 나는 식이 되어버리면 이것은 천국의 원리가 아니고 이 세상의 원리입니다.

 

예수님께서 천사에게 “천사야! 쟤들 봐라. 웃기지?” “웃기네요. 일 좀 더 했다고 월급을 더 주고, 세상에 이게 말이 안 되네요. 우리나라에는 저게 말도 안 되는데 저들은 저게 옳다고 하잖아. 참 웃기는 인간들 많습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우리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주님께는 정 반대에요. 값없이 주고 대가없이 준다는 그것이 천국이거든요. 그런데 우리가 지금 어디 가려고 합니까? 이 세상이 확장된 나라에 갑니까? 여호와의 증인처럼 골프장 같은 너른 잔디밭이 펼쳐져 있고 분수의 물줄기가 솟아오르는 그런 곳에 가려고 합니까? 그러면 여호와의 증인한테 가면 됩니다. 『깨어라』 그 책자에 잔디밭이 그려져 있고 꽃이 피고 난리 났어요.

 

그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존재가 상상한 존재의 확장으로서 나온 유토피아지 실제 하나님은 이 차이를 확정시키는 그 차이 속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거예요. 이게 새 언약, 언약의 완성으로 다가오는 겁니다. 따라서 광야에서 이스라엘백성은 율법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율법의 구심점은 뭐냐? 바로 죽음이었습니다. 제사제도였고 그 제사에는 일반인들이 범접하지 못하게 테두리를 만들었습니다. 100규빗×50규빗(약 50미터×25미터) 크기의 직사각형을 만들어놓고 성소에는 레위인이라도 못 들어가고 제사장만 들어갈 수 있고 제사장이라도 그냥은 못 들어가요. 제사장이라도 피를 뿌리고 들어가야 돼요.

 

그 피는 어디서 구하는가? 피는 백성들이 바친 흠 없는 양에서 피를 구해야 하는데 어떻게 구하는가? 피가 혈관 속에 있을 때는 피 때문에 외부의 물체가 살아 있거든요. 그런데 그 피가 혈관으로 흐르지 않고 이탈해서 외부로 쏟아져 나오면 그 양은 죽게 돼요. 그래서 레위기에서는 피는 생명(레 17:11, 14)이라고 했습니다. 생명이 혈관에 흐르는데 바깥으로 흘러나오면 거기는 생명이 없는 거예요. 그 피를 뽑아서 이쪽에다 뿌리는 거예요.

 

그 피는 어떤 특징이 있는가 하면, 흠 없는 피에요. 흠 없는 피를 뿌려서 그 차이를 분명히 하고 그리고 분명하게 고정된 차이기 때문에 확정된 개념이거든요. 이것은 내 아이디어가 아니고 주님께서 최종적으로 확정된 약속이기에 의심치 말고 그 피 믿고 그 피 뿌리고 들어가야 됩니다. 만약에 제사장이 피로 가다가 주춤주춤 하면서 ‘피 달라 해놓고 혹시 다른 것, 돈 달라고 하면 안 되는데.’ 이렇게 주춤거리게 되면 확정됨에 대한 불신 때문에 그 제사장은 죽게 됩니다. 제사장직은 이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직업입니다. 왜, 조금만 수틀리고 조금만 정신이 이상하게 되면 큰 일 나요.

 

그 때 나답과 아비후가 소주를 먹었어요. 왜 소주를 먹었는가 하면, 인간이 기계가 되어서 늘 하던 대로 하면 되는 줄로 알고 있어요. 하던 대로 하다가 소주 먹고 기분 좋아서 제단불이 아닌 다른 향로불을 들고 갔다가 졸지에 죽었습니다. 너무너무 무서운 곳이에요. 그냥 죽은 것도 아니고 완전히 바비큐가 되어서, 홀라당 다 타서 죽었잖아요. 언약적죽음의 저주를 받은 거예요. 제사장이 그렇게 죽어나가는 것도 모르고 백성들은 좋다고 있는 거예요. ‘제사장이 알아서 잘 하겠지.’ 본인들은 지금 벌벌 떠는데.

 

이제는 우리가 떨 필요는 없습니다. 담대하라, 당당하게 주님 앞에 나가라는 말은 이미 주님께서 그 차이를 확정, 그 차이를 분명히 한 겁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 확정된 그것에 대해서 협조해 드립시다. 협조한다는 말이 어폐가 있지만 협조해 드립시다. 어떻게 협조할까요? 나는 뭘 해도 죄인이고 나의 구원은 이미 다른 근거, 다른 바탕에 의해서 이미 확정되어 있다. 누구입니까? 예수님 십자가 피로 확정된 거예요. 이렇게 이야기하니까 그게 구원파 아니냐고 나오는데 구원파는 자기존재의 정당함을 위해서 피를 이용한 거예요. 구원파도 그렇고 박옥수도 마찬가지고 그쪽 계통 다 마찬가지에요.

 

자기존재의 정당성인데 이렇게 되면 존재의 정당성이 아니고 우리가 만약 구원파라면 구원파 자체도 뭐가 된다? 죄인 것을. 십자가마을도 자체가 죄인 모임인 것을. 보세요. 죄인이잖아요. 꾸벅꾸벅 졸고 죄인 맞잖아요. 이 자체가 죄인인 것을 우리는 즐거운 마음으로 수용해야 돼요. 우리가 조는 것은 지금 주님의 일에 협조하고 있는 겁니다. 말이 좀……. 차이를 분명히 하는 거예요. 이것은 우리 아이디어가 아니에요. 그런데 문제는 이런 마음이 오래 지속이 안 되지요.

 

베르그송이라는 철학자에 의하면 사람들은 계속해서 외부의 새로운 상황이 감각되고 지각되기 때문에 어떤 복음생각, 은혜 받았다 하는 그 순간이, 교회 문 열고 나가게 되면 새로운 상황이 맞닥뜨리기 때문에 지속의 원리에 의해서 곧장 사라져버립니다. 따라서 존재라는 게 그만큼 위험해요. 나는, 나는, 이게 주체지요. “나는 복음을 알았으니 이제는 구원을 얻은 사람이다.” 하는 순간 그 나 속에 그 나가 복음에는 관심 없고 새로운 상황으로 바뀝니다. “어, 그 때 그 나가 있어야 하는데 왜 그 나가 없지? 왜 나는 딴 짓 하고 있지?” 이렇게 되어버리면 갑자기 본인이 불안해져서 이 차이성 자체가 눈에 들어오지 않게 돼요.

 

그래서 주께서는 그 사람을 난처한 지경에 이르게 해서 자기가 스스로 자기 존재를 지키는 일이 다 무용지물로 되는 사태를 줘서 다시 한 번 “너에게 그런 일이 일어났다 할지라도 그것은 고무풍선에 훅 바람을 불어넣은 것이다. 너는 그래야만 했던 것이다. 너는 그 자리에 있어야만 했던 거야.” 차를 박았다. “주여, 제가 기도하고 운전했는데 왜 차가 박힙니까?” “그게 너의 힐링이야. 너의 치료야. 치료하기 위해서 박았어.” 지금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금 주께서 치유 잘 하고 있는데 자꾸 치유해달라고 하면 안돼요. 너는 그래야만 하는 거예요. 자꾸 남 흉내 내지 말고 너는 너만의 그래야만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스라엘은 집단적 개념에서 깨지고 개별적 개념으로 흩어지기 시작하는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집단이라 하는 것은 자신의 책임을 메타조직, 자기보다 상위조직에 떠넘기는 겁니다. 국가라는 것은 없는데 개인이 모여서 국가 되었다는 상위조직을 일부러 만들어놓고 거기에 모든 책임을 다 넣는 거예요. 그 상위조직에 자기책임을 다 맡기는 식으로 가짜 이스라엘은 나중에 뭐로 바뀌는가? 이것이 국가형태로 바뀌면서 왕을 달라고 하는 겁니다. 제가 조금 진도를 더 나갈 수 있는데 이런 상태로 나가버리면 여러분이 내용을 감당을 못합니다. 그래서 약간은 다른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이스라엘이 국가체제가 되면서 그 안에서 피가 발생돼요. “임금님, 아니되옵니다. 통촉하옵소서.”라는 선지자가 등장해요. 선지자는 사건입니다. 본인이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 아니에요. 선지자가 이실직고를 하면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 뜻이 아닙니다.” 할 때 그걸 방지하기 위해서 국가 왕이 유사선지자를 양성합니다. 이것은 가짜 선지자에요. “너 아니라도 선지자 많다.” 그래서 무려 850대 1로 엘리야하고 바알선지자 850명이 붙습니다. 뭘 로 할까요? 고스톱 칠까요? 아니면 가위 바위 보로 할까요? 무슨 게임을 해서 판정이 나겠습니까?

 

엘리야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을 거론하지요. 따라서 이 바깥 통, 이 보이지 않는 이스라엘에게 여러분들의 죄를 뽑아내서 주님께서 여러분들을 아직도 잊지 않고 있다는 그 희생을 부각하기 위해서 이렇게 이야기한 겁니다. 그래서 여기서 돌을 열두 개 쌓음으로서 옛날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들어오기 전의 요단강 건널 때의 상황을 연출합니다. 그렇게 해놓고 물통 넷을 세 번, 4곱하기 3은 열두 통입니다. 곱하기의 의미는 뭐냐 하면, 양에서 질로 바뀌는 의미의 곱하기를 합니다. 그냥 들어놓으세요. 그런 게 있습니다.

 

곱하기를 함으로써 열두 통의 물을 길어다 그 쌓은 단에다 붓습니다. 물 천지죠. 여러분, 물 천지가 되었을 때 과연 이 제물을 하나님께서 불로서 응답하겠느냐, 하는 그 문제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 부분에 피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피가 있어요, 없어요? 피가 안 나오지요? 그게 중요한 점이에요. 왜냐하면 갈수록 형식적인 피의 반복에서 피 자체가 양의 제물에서 희생자가 짐승이 아니고 차츰차츰 어떤 인격, 인간으로, 희생의 대상이 인간으로 바뀌는 과도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 신약에 와서는 직접 예수님 자신이 제물이 되는 올 인 하게 될 때까지의 철로, 그 궤도가 중간부분에서 인격자로 바뀌게 되어 있어요.

 

소돔과 고모라에서 롯이라는 사람이 천사를 대접할 때 불량배들이 천사하고 동침하겠다고 왔을 그 때에 롯의 대처가 뭡니까? “아저씨들, 제가 맛있는 것 대접할 테니 돌아가세요. 돈 드릴까요?” 이렇게 했습니까? 뭘 내놓았습니까? 뭘 내놓았지요? 주님의 심판이 그냥 심판되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희생, 주님 때문에 발생하는 희생물이 동반해서 같이 드러나는 거예요. 뭐라고 했습니까? “여기 시집갔다가 이혼해서 친정에 와 있는 40대 고물 딸이 있는데 드릴까요?” 그런 식으로 했어요? 어떻게 했습니까? “아직 시집도 안간, 물 좋은, 그야말로 처자 두 딸이 있는데 대신 이 딸들을 겁탈하고 저 사람은 손대지 말아주세요.”

 

그렇게 이야기한 롯이 신이 났어요? 기분 좋았겠습니까? 아프지요. 이게 희생입니다. 하나님은 심판해서 좋겠다만 그 심판을 증거 하는 본인은 자기존재가 잘려야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건의 개입의 현장에서 일어나는 그 모습입니다. 주님께서 언약사건을 일으키게 되면 우리에게 희생이 일어난다. “그런데 목사님이 아까 말한 대로 우리가 죄인이라면서요?” 죄인이기 때문에 희생도 아무소리 하지 않고 감당할 수 있지 않습니까? 왜? 죄인이기 때문에. 말만 “죄인입니다. 죄인입니다. 주의 피 때문에 구원받았습니다.” 그러면 구원파 돼요.

 

“죄인이기에 나에게 어떤 희생을 강요해도 저는 아무소리 하지 않겠습니다.”라고 할 때 “진정 네가 죄인인 것을 아는구나.” 그렇게 되는 겁니다. 여기에 무슨 힐링이 필요하고 무슨 원상복귀가 필요합니까? 죄인이 무슨 더 이상 욕심을 내요. 주어진 상황 자체를 주의 피사건의 개입으로 받아들이면 우리는 졸지에 죄인으로 드러나고 그걸로 우리는 감사하면 그만이잖아요. 우리가 다 전부 죄인이잖아요. 우리 십자가마을 지금 강의 끝날 시간이 넘었는데도 아무소리 안하잖아요. 마치겠습니다.

 첨부파일 : 2014여름수련회(낯선 경계선) 출애굽기 제 4강.hwp (72.5K), Down: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