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여름수련회 7강
교안에 있는 결론을 보도록 합시다. 왜 결론부터 보려고 하는가 하면, 여러분들에 제 강의를 이해 못하는 것 같아서 미리 결론을 이야기해서 먼저 방향을 잡아놓고 진행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교안 마지막 페이지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자신의 생활 경계선 밖으로 밀어내고자 한다. 하지만 경계선이 밀려서 생긴 빈 공간만큼이나 히브리인들은 하나님 속에 더 깊숙이 들어온 셈이 된다. 이는 추가적인 반항과 불평으로 인해 ‘약속의 땅’보다 더 낯선 세계를 맛보게 되는데 그것은 죽음의 세계에 대한 경험이다. 사건은 경험을 유발하고 죽음의 힘을 뒤집어쓰게 된다. 그 힘 속에서 비로소 낯선 분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개인적 죽음이 보인다.”
왜 이렇게 결론을 말했는가 하면,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출애굽을 하면서 하나님이 바라는 문제는 애초부터 없었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은 문제되지 않고, 하나님은 예수님을 보내셔서 예수님이 인간의 생활 경계선 밖으로 얼마나 밀려났는가를 보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출애굽기를 보면서 생각하게 되는 것은, 해결해야 될 내 문제는 애초부터 없었던 거예요. 하나님의 관심사는 이 땅에 왔는데 사람에게 밀린 그분에게 있습니다. 이것이 전부입니다. 우리는 내 문제 해결하기 위해 교회 오고 기도하는데 이것은 애초에 부질없는 짓이 되고 공연불이 되는 겁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아무 상관이 없어요. “우리는 우리대로 사는데 이곳에 어떤 분이 오셨는데 그분이 사람들에게 배척받고 밀려났습니다. 성도들이여, 밀려나간 분에게 관심 가집시다.” 이게 바로 복음이에요. 우리는 내 문제를 신에게 호소해서 그것을 해결하고 내가 기대하는 인생을 살려고 했는데 주님은 우리의 기대에 관심 없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사는 사람들에게 배척받은 그분입니다.
지난 시간에 알튀세르의 주체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이것을 다시 조금 언급하면, 우리가 생각하는 상상세계에서 할당받은 자리가 있는데 그 자리는 사회에서 우리를 호명하는 거예요. “당신은 이 회사에서 중요한 분입니다. 이 자리에서 일해주세요.” 이렇게 되는 겁니다.
어떤 사람이 미용사, 혹은 간호사라면, 그것이 그 사람의 주체가 되는 겁니다. “당신의 직업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었을 때, “저는 간호사입니다.”라고 답하면, ‘이분은 우리 사회에 필요한 존재구나.’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직업이 무엇이냐고 물었는데 “귀신을 쫓아내는 일을 합니다.”라고 했다면, 이것은 아무도 인정하지 않는 주체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 사회가 보편적으로 동의했던 일이 아니거든요.
예수님 직업이 무엇입니까? 그분은 무직자입니다. 목수는 어릴 때 했고, 요단강에서 세례 받으신 후에는 백수였습니다. 따라서 주님은 이 세상에서 주체로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예수님 본인은 ‘아버지가 시켜서 일한다.’고 했지만, 사람들은 예수님이 백수로 사회 질서를 문란케 하니까 정치적 조치를 취해 처리해 버렸지요. 그들로서는 정당한 조치를 취한 것입니다. 성전에서 소란을 일으키고 법질서를 어지럽히는 자는 당연히 추방되어야겠지요.
예수님은 다니시는 곳마다 ‘날 죽여라.’는 식으로 문제를 일으켰어요. 요한복음 7장에 보면 예수님이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죽이려 하느냐?”고 하시니까, 사람들은 “당신은 귀신이 들렸도다.”라고 했어요. 요한복음 10장에는 ‘너희들이 나를 죽이는 것이 아니고 내가 스스로 죽는다.’고 하셨습니다.
제 3자가 냉정하게 예수님을 볼 때는 이런 식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는 이 세상에서 스타가 되려고 했는데 그것이 먹혀들지 않으니까 결국 반란을 일으켜서 스스로 죽음의 길로 들어서서 메시아로 칭송을 받고, 자신의 사상을 뒤늦게라도 사람들이 받아들여 새로운 세상이 펼쳐질 것을 바랐다.’
예수님을 이런 식으로 생각한 사람이 한 두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세상이라는 존재의 바다에서는 어떤 일도 시간이 흐르면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잠잠해 지고 원상 복구되는데, 예수님은 죽었는데 사흘 만에 살아나서 계속 일을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다메섹에서 사울을 만났고, 그 외에도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승천하신 후에는 성령을 보내셔서 교회가 생겼고--
우리는 출애굽기를 보면서 뭘 생각하게 됩니까? 하나님의 일이 아닌 예수님의 일을 앞당겨 특수한 민족에게 임하니까 그들은 죽음의 힘을 뒤집어쓰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어찌 옛날의 에피소드며 남의 이야기가 되겠습니까? 하나님이 찾아와서 나라자체가 엉망진창이 된 거예요.
갈 곳도 정해지지 않았는데 무작정 애굽을 나왔어요. 그래서 그들은 계속 하나님을 원망했고 하나님은 그들을 용서하지 않고 잘라냈습니다. 구원해 주신다고 해서 나왔는데 그들은 구원이 실패한 것처럼 여겼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고는 광야에서 다 죽였습니다.
죽이려고 했으면 왜 불러냈습니까? 정답은 이것입니다. “나는 너희를 구원하려고 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 그들은 구원 받지 못한 거예요. 그러면 우리를 구원하지 않는 하나님은 뭔가? 하나님은 자기 언약을 살리겠다는 것입니다. 현대건설 이명박 사장이 새벽 4시에 일어나서 정주영 회장과 함께 불도저를 타고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할 때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까? 그들이 죽어가도 일은 계속되었습니다. 왜냐? 경부고속도로를 만들어야했기 때문이지요.
할례언약을 구체화시키기 위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이용하신 겁니다. 죄가 가득한 곳에서 어떻게 거룩한 생명이 탄생하는가를 보여주시려는 하나님의 무지막지한 작업 때문에 이스라엘은 엉망이 되고 말았습니다. 꼭 우리를 모습처럼. 나는 내 문제 해결하려고 왔는데, 내 문제는 아예 문제도 되지 않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은 반드시 해결책을 기대하면서 문제를 제기합니다. 수학문제집 뒷부분에 보면 반드시 해답이 나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문제를 제기하실 때는 인간들에게 해결책을 주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문제 제기는 반드시 하나님이 해결책을 따로 가지고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성도는 자기문제 해결하려고 왔다가 주님의 문제 제기로 그 노선이 끌려 들어가서 그것을 아멘으로 수용하는 현실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러면 주님의 문제 제기가 뭔가 하면, ‘너희들은 예수님을 주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이고, ‘그렇지만 너희들만은 예수님이 심판주요 구세주인 것을 고백하게 될 것이다.”는 것입니다.
이것만이 주님께 영광이 됩니다. 아들을 영화롭게 함으로 아버지가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지요. 요한복음 17장에 나오는데 이것이 예수님의 기도 내용입니다.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요17:2-3).”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내 것은 다 어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내 것이온데 내가 저희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나이다(요17:9-10).”
이런 내용이 요한복음 17장에 나옵니다. 그동안 성경에서 뭘 봤습니까? 대중들 문제 해결해 주려고 교회 만들었습니까? 그것은 상상한 가짜 하나님이 만들 것이고 진짜 교회는 비밀입니다. 내가 원하는 교회는 가짜입니다. 할 수 없이 끌려나올 때 그게 진짜 이스라엘이고 교회입니다.
나와 보니까 내 문제는 문젯거리도 안 돼요. 하나님이 당신의 문제 해결을 위해 우리를 강제로 끌어들였고, 우리는 거기에 말려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문제는 없습니다. 우리에게 닥치는 어떤 일도 문젯거리가 아니라는 것을 믿고 삽시다. 그러면 우리 인생은 전혀 피곤할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문제에서 손을 떼는 순간 인생은 힘든 것이 아니라 즐기면서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13장 1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 중에 사람이나 짐승이나 무론하고 초태생은 다 거룩히 구별하여 내게 돌리라 이는 내 것이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유월절에 어린양의 피를 바를 때에 사람들은 자신이 구원된다고 오인했어요. “아이고 내 큰아들, 죽지 않고 살았구나. 귀한 내 자식 잃을 뻔했구나. 어린양의 피를 바르지 않았다면 큰일 날 뻔했네. 네가 죽지 않고 살아서 하나님께 감사한다.”
이렇게 될 줄 알았지요. 그 자식 빼앗기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죽어서 빼앗기나 산체로 하나님께 빼앗기나 내 자식 아닌 것은 마찬가지에요. 맏아들은 전부 하나님의 것이 되었고, 이 맏아들은 인질이 되었습니다. 맏아들이 하나님께 인질로 잡히면 모든 복은 남은 가족에게 고스란히 주어집니다.
고려의 여인인데 몽골에 인질로 잡혀가서 결국은 왕비가 되었다는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드라마를 통해서 방영되었는데, 어쨌든 인질로 잡힌 여인 때문에 고려는 많은 혜택을 입었습니다. 장차 오실 하나님의 맏아들 때문에 우리가 영생을 얻는데 이것이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우리의 사적인 문제를 해결하시려고 하나님이 계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오직 당신의 계획, 천국 만들기에만 몰두하십니다. 그 외에는 다 지옥이 되겠지요. 이 하나님의 작업에 이스라엘은 말려든 거예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자기 맏아들을 하나님께 바치면서 여전히 애굽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맏아들이 하나님께 인질로 잡혀서 그것으로 새로운 약속의 땅 천국을 이루는 그 노선으로 가기 위해서 그들은 애굽같은 생활을 해서는 안 된다는 추가적이 요소가 필요했는데 그것이 바로 출애굽기 20장에 나오는 십계명입니다. 나중에 그 계명을 돌판에 기록해서 그것을 물체화시킵니다.
율법을 기록한 돌판은 우리 구원에 전혀 소용없는 것입니다. 돌판과 율법과 피의 만남을 위해 돌판을 만들라고 하셨고, 그 돌판은 깨어진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있는 거예요. 만약 제가 하나님이라면 그 돌판을 다이아몬드로 만들 거예요. 아무리 던져도 안 깨어지게. 그 돌판이 얼마나 귀한 것인데 깨어지게 만듭니까?
그런데 모세가 던지니까 깨어지고 말았어요. 과학자들이 현장에 있었다면 성분 분석에 들어갔을 거예요. 그 귀한 돌판이 왜 쉽게 깨어지는 재료로 만들었을까요? 쉽게 깨어지라고 만든 거예요. 스스로 깨뜨리는 거예요. 하나님이신 예수님 스스로 연약한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거예요. ‘내가 깨어져야 너희들이 더 이상 너희 문제에 매달릴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우리를 주님의 가해자로 규정하기 위해서 주님은 쉽게 깨어진 거예요. 예수님과 스킨쉽을 한 사람이 여럿 있지만 제일 요란하게 스킨쉽을 한 사람은 예수님 뺨을 때린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뺨을 때렸어요. 그런데 그 현장에서 주님은 율법을 위반했습니다. 율법에는 ‘오른뺨을 때리거든 왼뺨도 돌려대라.’고 했는데 예수님은 왼뺨을 내놓지는 않았어요.
말씀의 물체화, 형식화가 되면 말씀에 대한 오해가 계속 발생됩니다. 어떤 형체로 만들어지면 사람들은 자신만만해서 그대로 지키려 하고 그 과정 속에서 오해가 발생되는 겁니다. 철학자 라캉은 이런 주장을 했어요. ‘사람이 생각하는 모든 현실은 가짜다.’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본인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본인의 욕망대로 제 마음대로 현실을 편집해서 만들기 때문에 그 현실은 가짜라는 겁니다.
그러면 진짜는 무엇입니까? 사람들이 생각했던 현실이 가짜지만 가짜만이 진짜 현실을 가리는 가림막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 현실에 대해서 감사하고 이런 현실을 만들어 낸다는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인간 자신이 내가 누구인지 모르잖아요. 내가 만든 현실은 분명 가짜입니다. 그러기에 나를 감출 수 있는 현실을 만들고 이것으로 진짜를 가리게 되면 내가 아는 현실이 현실의 전부가 됩니다.
제가 왜 라캉의 이런 주장을 언급했는가 하면 하나님, 교회, 성경 이 모든 개념은 반드시 주체가 관여해서 만들어낸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신을 믿고 종교적인 어떤 몸짓을 해도 이 전체가 가짜일 뿐입니다. ‘그러면 진짜를 찾으면 될 게 아닌가?’ 라고 할 수 있지요. 진짜를 찾으면 그 사람은 정신병자입니다.
정신병자가 되지 않고 정상인으로 살려면 가짜를 진짜라고 우기면서 평생을 살면 됩니다. 정신병자가 되기 싫습니까? 그러면 가짜라도 쥐고 있어야 됩니다. 왜? 어차피 진짜는 없기 때문에 없는 것을 찾겠다고 있는 가짜마저 내버리면 그 다음은 대책이 없습니다. 대책이 없으면 피골이 상접해져 갑니다.
라캉의 주장은 간단합니다. 모든 사람이 다 정신병자이기에 우리는 안심하고 이 세상에서 정상인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거지요. 왜? 다들 정신병자이기에. 그런데 세상이 제일 무서워하는 것은 정신병자 아닌 제정신을 가진 사람인데, 이 사람을 세상은 정신병자가 내몰아 죽일 수밖에 없습니다.
가짜들 노는데 왜 진짜가 끼여드냔 말이지요. 추방되어야 하지요. 이것이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의 현실입니다. 절대로 진짜에 대해서 말하지 않기. 입 다물기. 가짜가 좋은 점은 진짜가 있을 것이라는 미진함이 남아 있기에 그것이 힘이 되는 겁니다. 산에 올라간다면 정상에 오르기 직전에 내려오는 것이 좋습니다. 정상까지 오르게 되면 새로움이 없어서 그 산은 찾지 않게 됩니다.
산을 오르되 정상까지 올라가지 말고, 학생은 공부를 열심히 하되 1등하지 말고 2등까지만 오르세요. 항상 정상은 남겨둬야 합니다. 만약 1등을 하게 되면 그 사람은 목표를 상실했기에 정신병자가 됩니다. 서울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한 사람들을 보면 이상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 자리에는 없기에 제가 마음 놓고 이야기합니다. 이 자리에 있는 학생들은 서울 법대에는 가지 마세요. 꼭 가고 싶으면 연세대 법대로 가세요.
정상인은 진짜를 만나지 않는다는 그 안심 때문에 가짜라도 만끽하며 살 수 있는 정신적 안정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성경이 진짜를 이야기했고, 세상은 가짜로 인해 즐거워하는데 이스라엘을 재수 없게 진짜 하나님을 만났어요. 그래서 인간으로써는 감당할 수 없는 일들이 계속 일어나는 거예요. 이게 출애굽기입니다.
약속의 땅으로 가자고 이끄셔서 갔는데 그 땅에는 덩치 큰 사람들이 버티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너희들이 들어가면 그들을 이길 수 있다.’고 계속 들어가라고 독촉을 합니다. 자기 백성을 그곳에 이주시키기 원하신다면 사전에 하나님이 가나안 땅에 사는 사람을 죽이든지 쫓아내신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들어가라고 하면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인데 그렇게 하지 않았어요.
이스라엘 사람들은 가나안 사람에 비하면 메뚜기 같고 그들은 장대 같다고 했지요. 이스라엘이 무슨 수로 가나안 사람을 이깁니까? 그래서 여호수아와 갈렙같은 미친 자가 필요한 거예요. 이 사람들은 정상인이 아닙니다. ‘상대는 장대같고 우리는 그들 앞에 메뚜기같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을 이긴다.’ 이건 앞뒤가 안 맞는 주장입니다.
맏아들을 하나님께 인질로 잡힌 상태에서 모든 축복은 남은 가족에게 주어지는 겁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후에 이삭을 통해서 복이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언약대로 인간은 일종의 파이프 역할을 하면서 낯선 경험을 계속 하게 됩니다.
출애굽기 20장을 보면 십계명이 나옵니다. 이 그림으로 십계명 설명을 끝낼 수 있습니다. 십계명을 세워두시고, 인간이 보는 십계명은 인간으로 되돌아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십계명은 다시 하나님께로 되돌아오면서 십계명은 하나님의 피를 만나고 인간은 자기의 본색을 만납니다.
그래서 신약 시대에는 자기 의와 십자가가 대척 관계에 있습니다. 그 원인을 유발하는 요인이 뭐냐? 하나님께서 법을 주신 것입니다. 법을 주신 이유는 인간의 주체를 드러내기 위함인데, 그 주체가 뭔가 하면, 향유, 즐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법을 이용해서 즐기는 겁니다. 최고로 즐기는 방법은 얻어맞는데서 오는 쾌감입니다. 수도원, 수녀원, 티벳 불교 이런 곳이 대표적 장소입니다.
철학자 칸트가 말하기를 ‘인간은 이익이 있을 때 법을 지키는데, 이것은 법을 지키는 올바른 방법이 아니다.’ 이 말은, 법은 무조건적으로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심어주신 것은 무조건적인 법이라는 것이죠. 이 법을 지키게 되면 법을 지켰다는 쾌감을 보상을 받게 되는 겁니다.
인간은 처음부터 법에는 관심이 없고 다만 어떻게 하면 극적의 쾌감을 맛볼 수 있을까 궁리했는데 마침 법이 주어져서 그 법을 이용해서 자기 주체가 추구하는 극단의 카타르시스를 찾는 거예요. 이처럼 주체는 법을 기다렸다는 겁니다. 기다린 자들에게 주님은 ‘여기 있다. 받아라.’하고 율법을 주신 겁니다.
선을 행하면 즐겁고 악을 행하면 괴로운데, 그 악은 자기학대를 통해서 물리쳤을 때 추가적인 쾌감이 주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자기 수련을 쌓는 수녀나 수도사들을 보면 항상 자기 숙제를 만들어냅니다. 자신을 채찍질하는 법을 계속 만들어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법을 볼 때는 제사법으로 봅니다. 피를 흘려 제사를 드리는 것이 법이지요.
로마서 7장에서 바울이 하는 말이, ‘나에게 법이 주어졌는데 이 법은 나는 절대 의인이 될 수 없고 내가 법을 좋아하는 것은 타고났지만 내 속에 또 다른 법이 있어서 그 법이 나로 하여금 법을 위반하도록 했는데, 이 상황에서 나는 헤쳐 나올 수 있는 방법이 없기에 참으로 난처한 지경에 놓여 있다. 그런데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감사한다.’고 주장합니다.
사도 바울이 예수님을 이용한 것입니까, 예수님이 사도 바울을 이용한 것입니까? 예수님이 사도 바울을 이용한 거예요. 어떻게? 난처함을 경험하도록. 더 이상 너의 행함에 기대 걸지 말라고. 그러면 기대 걸 수 없는 죄인인데 어떻게 구원하시는가? 하나님께 인질이 된 맏아들이 사도 바울을 대신해서 모든 문제를 해결했기에 해결 못하는 나와 맏아들 되시는 주님과의 차이를 통해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라고 하면서 주님을 증거하고 찬양하는 것이 천국 가는 원리, 원칙입니다.
그러면 장대 같은 가나안 사람들은 어떻게 합니까? 장대 같은 인간은 짚으로 만든 허수아비입니다. 허수아비는 아무리 커도 겁낼 필요 없습니다. 허수바이를 겁내는 것은 참새뿐입니다. 요즘은 참새도 영리해서 허수아비를 겁내지 않습니다. 왜 장대 같은 사람들을 인간으로 보지 않는가 하면 그들은 언약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에는 언약이 있습니다. 강의 초반에 말씀드렸지요. 하나님은 어떤 분이라고요? 하나님은 우리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고 당신의 언약만 드러내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널 때 언약궤를 앞세우고 건넜지요. 여리고 성이 무너질 때도 언약궤를 앞세우고 들어갔습니다.
주님의 관심사는 언약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언약궤 앞에서 여리고 성을 어떻게 점령하는가, 십계명은 몇 개나 지켰는가, 내 인생을 어떻게 완벽하게 가꾸어 나갈 것인가? 이런 문제는 걷어치워야 합니다. 십계명은 십계명을 주신 분이 도리어 십계명을 가져가서 ‘미역국도 못 끓이는 며느리’라고 확인하는 것으로 끝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그 말씀을 가져가서 말씀대로 피를 흘리는데, 맏아들의 위상을 가지고 희생하신 것입니다. 이번 수련회 강의를 처음부터 다 들었다면 주님이 자기 일을 스스로 해결하고 원하는 결과를 도출하는데 우리를 하나의 부속품으로 끌어들인 거예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가는 거예요(롬12:21).
그 가운데 주님께서는 죄인으로부터 영광받기 위해서 일부러 죄인 되게 하셔서 예수님의 자기희생을 극대화 시켜서 천국에 온 모든 자들이 받은 면류관을 주님 앞에 돌려드리도록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향유, 즐김은 주님의 주 되심으로 바뀌어야 하고 우리는 그 앞에 죄인으로 드러남을 즐거워하고 감사해야 됩니다.
그런데 만약 율법을 주신 취지에 대해서 감감 무소식이라면 그 사람은 상상을 합니다. 상상계의 하나님, 상징계의 하나님, 실재계의 하나님에 대해 말씀드렸지요.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그것이 하나님의 법이라면 이제 이 사람은 이 법으로 확고한 의를 확보해야 구원 받을 수 있겠지요. 이렇게 되면 구원은 누구 책임인가 하면 본인의 하기 다름입니다.
그러면 십계명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 계명이 추가되는데 마지막 법은 예수 믿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것이 법이 되고 말았어요. 예수 믿는 것이 법입니까? “믿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안 믿어집니다.”라는 소리로 들으시면 됩니다. 자식이 아버지를 만날 때마나 “아버지는 나의 아버지십니다.”라고 말한다면, 주위 사람들이 ‘저 사람 아버지는 친 아버지가 아닌가보다.’라고 생각할 거예요. ‘왜 자꾸 자기 아버지라고 말을 하지?’ 부부간에도 ‘사랑해, 사랑해!’를 반복하면 수상합니다. ‘아내에게 뭔가 잘못한 일이 있나?’ 이런 의심을 합니다. 갑자가 목걸이 사오고, 화장품 사오고, 아부를 떨고 하면 아내는 의심을 합니다. ‘내 남편이 나 몰래 은행 대출 받은 것이 있나?’
사람들이 ‘예수 믿습니다.’라는 말을 반복함으로 자기 즐거움으로 되돌아오는 겁니다. ‘내가 이만큼 잘났구나.’를 만끽하고 싶어서 법을 활용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법을 주시면서 어기는 자에 대한 처벌 규정도 말씀하셨는데, 예를 들면 ‘안식일에 나무하는 사람을 돌려 쳐 죽이라.’ 이런 말씀이 있어요.
평소에 미워하는 사람이 안식일을 어겨 끌려왔다면 잘됐다고 생각하면서 돌을 기쁜 마음으로 던졌을 거예요. 그러나 안식일 위반한 사람이 자기 아들이라면 돌 던지는 일에 기권할 거예요. 왜 이렇게 될까요? ‘법은 나의 즐거움을 위해서 있지 그 외에는 소용없다.’고 생각하는 자기 주체를 발각 당하게 되지요.
그래서 십계명의 모든 계명을 맛만 보여주고 철수합니다. 십계명을 피와 연결시키기 위해서 돌판으로 만들어요. 그러면 십계명 이후에 나오는 이야기는 뭐냐? 돌판과 하나님의 피 흘림의 만남을 주선하기 위해서 필요한 여러 가지 제사 드리는 장치와 거기에 참여하는 사람들 등의 이야기가 출애굽기 후반에 쭉 나옵니다. 이렇게 대충 살펴보니 출애굽기 종착 지점에 온 느낌이 들지요?
출애굽기가 방대하고 어렵기 때문에 어렴풋이 라도 윤곽을 잡아줘야 그 다음 강의가 진행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큰 밑그림을 제가 말씀드렸고 이제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출애굽기 20장 22-24절을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라 내가 하늘에서부터 너희에게 말하는 것을 너희가 친히 보았으니 너희는 나를 비겨서 은으로 신상이나 금으로 신상을 너희를 위하여 만들지 말고 내게 토단을 쌓고 그 위에 너의 양과 소로 너의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라 내가 무릇 내 이름을 기념하게 하는 곳에서 네게 강림하여 복을 주리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무엇에 주목해야 하는가 하면, 23절에 “너희는 나를 비겨서 은으로 신상이나 금으로 신상을 너희를 위하여 만들지 말고”에서 ‘너희를 위하여’ 이 부분이 중요합니다. ‘너희를 위하여’ 하나님이 허락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너희를 위한 헌금, 너희를 위한 전도, 너희를 위한 교회 세우기 등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이 허락하신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을 위한 하나님은 없고, 인간은 하나님이 앉으시는 방석이라고 여기면 됩니다. 그런데 방석이 살아나서 깔고 앉은 엉덩이를 치우려 한다면 이건 안 될 일이지요. ‘너희를 위하여’가 빠지면 그 빈자리에 주님은 ‘나를 위하여’로 채워 넣겠다는 것입니다. 어쨌든 ‘너희를 위하여’가 이 세상에 존재해서는 아니 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이보다 더 무서운 말이 어디 있습니까?
‘살인하지 말라.’는 말씀의 반대말은 ‘살인하지 않았습니다.’가 아니라 ‘사랑하라.’입니다. 부부간에 사랑한다는 말은 어떤 행동으로도 대체할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데 어떤 행동을 한단 말입니까? 오히려 행동이 사랑을 훼손시켜요. 정말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당신 때문에 나는 나를 사랑하지 않습니다.”라고.
말은 안 해도 이런 시절이 있습니다. 결혼 2주일 전에 남자들은 결혼할 상대에게 이런 마음을 가집니다. 제가 아는 어떤 분은 결혼 전날까지 “오빠, 나 사랑해?”라고 문자 보낸 후 결혼식이 깨졌다는 말을 들었어요. 계속 속을 썩이니까 결혼식 날짜가 다가오는데 ‘결혼할까, 말까?’ 고민을 하는 거지요.
결혼식이 누구를 위한 것입니까? 상대를 위한 결혼식이 아니고 자신을 위한 결혼식이란 말이죠. 자기 결혼식을 축복해 달라고요? ‘나를 위하여’하는 결혼식에 주님이 무엇 때문에 축복하시겠습니까? 주님의 자리에 내가 앉아있는데.
20장 24절에 “내게 토단을 쌓고 ---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라.”고 했는데, 이 제단이 나중에는 인물로 바뀝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걸어다니는 제단이 되고, 이것을 성전이라고 하고, 고린도전서 6장 15절에서 “너희 몸은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기의 지체를 만들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고 했고, 19절에는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고 했고, 20절에는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하셨어요.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고전3:21).” 이 얼마나 비현실적인 이야기입니까? 22-23절에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요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
무슨 말입니까? 포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나를 위하는 것은 주님의 계획이 아예 들어있지 않다는 거예요.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으로 끝났고 그것으로 만족해야지 나만을 위한 것을 따로 뽑아낸다면 그것은 주님이 애초에 약속하신 바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를 위한 것을 구태여 만들 필요가 없습니다.
신약은 어려운데 왜 어려운가 하면 정답만 나와 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그 과정을 알기 위해서 구약을 봐야 합니다. 출애굽기 보면 제단이 나오지요. ‘너희를 위해서 제단을 만들지 말라.’ 이렇게 연결되는 겁니다. ‘너희를 위해 만들지 말라.’는 것은 ‘너희의 불행이나 행복 때문에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니라 너희는 하나님의 일이 참여된 특수한 종족이기 때문’이란 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지금 하는 일은 주께서 허락하신 자리가 됩니다. 이 자리는 나의 자리가 아니고 주의 이름이 있는 자리입니다. 출애굽기 20장 24절을 다시 봅시다.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 이러저러한 일을 하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만드는 것 아닙니까? 여기에서 이런 것은 만들지 말고 저런 것을 만들지 말라고 하면 아예 아무것도 안 만들어야지요. 이 말씀 지킨다고 이스라엘은 아무것도 안 만들고 상징화 된 문자로 신을 표현하는 거예요. 하나님은 아무것도 만들지 말라고 해서 일체 아무것도 안 만들고 일체의 형상을 배제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신상을 만들지 말라’고 하시고 ‘토단을 쌓으라’고 하시면 그 다음부터 사람들은 계속 토단을 쌓게 되면 주님께서 여기에 임하신다고 생각하겠지요? 이게 뭐냐 하면, 실재하시는 하나님께서 상징을 찾아가고, 이것을 상상으로 찾아가서 나중에는 다 부수는 거예요.
하나님은 겸손하셔서 인간이 엉터리로 만든 상징을 도리어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의 낮아짐을 증거하기 위해서 상징 속에 들어가는 겁니다. ‘~하라. ~하지 말라.’ 그 속에 들어가서, 이것이 상징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이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고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제도구나.”라고 오해하고 확정지을 때 그 껍질을 벗기고 뛰쳐나와서 실재로 되돌아가는 겁니다.
제단을 만들라고 해서 만들었는데 그 제단이 아무짝에도 소용없는 새로운 사건을 또 유발시킵니다. 예배시간에 앞자리에 앉으면 은혜 받는다고 생각하고 앞자리에 앉았습니다. 그 사람은 앞자리에 앉아 은혜 받은 적이 있을 거예요. 처음에는 ‘앞자리 앉아 은혜를 받았다.’고 했는데, 나중에는 ‘앞자리에 앉으면 은혜 받을 것이다.’고 합니다. 그러면 아직 은혜 받지도 않았는데 자기 주체가 은혜 받은 것으로 간주해 버린 겁니다. 이것은 자기가 스스로 만들 즐거움이 됩니다.
실재로 “이 자리는 내 자리입니다. 비켜주세요.”라고 하는 사람이 있어요. 은혜는 자신만 받아야 합니까? 은혜 받았으면 양보도 할 줄 알아야지요.
25절을 보면 “네가 내게 돌로 단을 쌓거든 다음은 돌로 쌓지말라 네가 정으로 그것을 쪼면 부종하게 함이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있습니다. 하늘에서 내려오면서 축복과 저주가 갈라집니다. 그런데 아브라함 본인은 축복과 저주에 대해서 관여할 수 없습니다. 자기 몸만 제공했을 뿐이에요. 아브라함 언약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할례를 통해 피를 내게 해서 이것을 거룩한 민족이라고 했단 말이지요.
그러면 아브라함이 거룩에 기여한 것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어요. 그냥 하나님이 아브라함 자리에 거룩하게 되는 모든 시스템을 일방적으로 설치한 거예요. 저주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나서서 일방적으로 저주를 주신 겁니다.
여기에서 아브라함의 선함이나 행실은 고려 대상이 아니지요. 그래서 사람 손으로 쪼개서 제단을 예쁘게 다듬어 만들지 말라는 거예요. 제단이나 제물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알아서 할 문제지 인간이 간섭하고 개입할 문제가 아니란 말이지요. 그냥 손 떼세요. 그것이 어떻게 되는가 하는 것은 주님 손에 맡기면 여러분은 거룩한 성전이 되는 겁니다.
아무 한 것도 없이 몸만 제공했는데 구원의 혜택을 입는다는 것이 복음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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