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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라기12강-사자와 십일조(말3;2-5)이근호140810

아빠와 함께 2014. 8. 12. 08:00

사자와 십일조(말라기 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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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14-08-10 15:58 
                         사자와 십일조 

2014년 8월 10일                       본문 말씀: 말라기 3:2-5 

(3:2) 그의 임하는 날을 누가 능히 당하며 그의 나타나는 때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는 금을 연단하는 자의 불과 표백하는 자의 잿물과 같을 것이라 

(3:3) 그가 은을 연단하여 깨끗케 하는 자 같이 앉아서 레위 자손을 깨끗케 하되 금, 은 같이 그들을 연단하리니 그들이 의로운 제물을 나 여호와께 드릴 것이라 

(3:4) 그 때에 유다와 예루살렘의 헌물이 옛날과 고대와 같이 나 여호와께 기쁨이 되려니와 

(3:5) 내가 심판하러 너희에게 임할 것이라 술수하는 자에게와 간음하는 자에게와 거짓 맹세하는 자에게와 품꾼의 삯에 대하여 억울케 하며 과부와 고아를 압제하며 나그네를 억울케 하며 나를 경외치 아니하는 자들에게 속히 증거하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십일조를 언급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먼저 하나님의 사자를 보내서 심판하시는 작업을 언급하십니다. 이는 십일조를 통해서 인간들이 복받으라는 취지가 아니라 십일조라는 말씀에 참여하는 것 자체가 너무나도 영광스러운 특별한 신분자가 되는 복인 것을 말씀하시는 겁니다. 

즉 사람들은 현재 자신이 가진 재산 증식에 관심 갖지만 하나님께서는 말씀에 의해서 성사된 사람을 얻고 싶은 것입니다. 율법 준수를 하나님께서 강조하시는 것도 이런 취지 때문입니다. 말씀이나 율법은 인간이 이용할 상대물이 아닙니다. 율법을 가운데 두고 인간은 하나님의 심판 사자들이 어떤 식으로 율법을 사용하는지를 접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심판의 현실화입니다. 심판의 현실화는 오늘 본문에 의하면 연단이요 표백입니다. 연단, 곧 단련함과 표백은 궁극적으로 자기 사람만 골라내는 분류작업으로 이해하시면 됩니다. 반짝인다고 해서 다 금이 아닌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모든 이가 죄 지었다고 해서 다 버리신다는 것도 아닙니다. 

금 같은 존재로 만들고 하얗게 표백된 존재를 율법을 통해서 기어이 만들어내시겠다는 겁니다. 이러한 율법을 통한 지속된 심판 작업, 곧 분류 작업의 끝에 십일조 이야기가 나옵니다. 곧 십일조를 하게 되면 창고가 넘치도록 채워진다는 겁니다. 과연 그런가 시험해 보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되면 십일조해서 창고가 넘치도록 혜택 입는 그 결과는 인간의 행함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시행되는 그 분류작업의 결과입니다. 따라서 사적 소유권을 여기에다 행사할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창고가 넘치더라도 다 그것은 새로운 신분을 입혀주신 하나님의 것입니다. 

인간은 오직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과 율법에 의해서 다루어지는 대상이 되었다는 그 사실만으로 눈물겨운 상황입니다. 엄청난 영광입니다. 즉 율법은 그냥 무의미하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필히 연단과 표백 작용이 이루어지게 되어 있고, 그 결과로 십일조 축복을 받게 된다는 겁니다. 

우리는 이 사태 안에 본의 아니게 접어들게 되어 있습니다. 저항될 수 없는 지경입니다. 장마철에 비가 처적처적 내리게 되면 주변의 다른 소리들은 다 묻히게 됩니다. 안 들리게 됩니다. 우리가 율법이 적용되는 현실을 현실로 간주하지 않고 신과 접촉하는 다른 상황을 상상하게 됩니다. 

이 잘못된 경우가 어느 찬송가 가사에도 나옵니다. 찬송가 343장(옛 찬송가) 가사를 보면 다음과 같이 되어 있습니다. 

                        울어도 못하네 

1절 울어도 못하네 눈물 많이 흘러도 겁을 없게 못하고 죄를 씻지 못하니 울어도 못하네 
2절 힘써도 못하네 말과 뜻과 행실이 깨끗하고 착해도 다시 나게 못하니 힘써도 못하네 
3절 참아도 못하네 할 수없는 죄인이 흉한 죄에 빠져서 어찌 아니 죽을까 참아도 못하네 

이 가사들을 보면, ‘울어도, 힘써도, 참아도’ ‘못하네’로 끝맺습니다. 그런데 4절 가사를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4절 믿으면 하겠네 주 예수만 믿어서 그 은혜를 힘입고 오직 주께 나가면 영원 삶을 얻네 

과연 그러합니까? 만약이 이것이 가능하다면 다음의 후렴 가사는 쓸데없는 말이 됩니다. “십자가에 달려서 예수 고난 보셨네”  즉 인간이 할 수 있는 믿음과 은혜 입음과 주께 나가는 행위를 제쳐두고 왜 새삼스럽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셔야 할까요? 그것은 예수 믿어도 영생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죽으심으로만 비로소 영생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이 영생을 고대하는 것 자체가 영생 얻는데 기여하거나 보탬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영생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더불어 그 자체서만 나오지 결코 인간들의 예수님 곁에서나 십자가 앞에서 기다린다고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이 사실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레위지파를 완성하시려는 목적을 버리시지 않는 겁니다. 

십일조를 통해 복이 주어지는 그 계통 자체에 주목하라는 겁니다. 레위지파를 깨끗게 하시는 그 작업의 결과로 십일조에서 복이 오는 겁니다. 십일조 자체에 참여하는 자는 레위지파를 깨끗게 하시는 하나님의 취지도 겸하여 같이 경험해야 합니다. 우리는 결과만 성급하게 짐작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과정도 같이 부각하십니다. 이삭의 쌍둥이 자식은 에서와 야곱입니다. 우리는 압니다. 복이 에서가 아니라 야곱에서 다 퍼부어졌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에서도, 복이란 공짜로 주어짐을 압니다. 하지만 에서에게는 자기의 것이 아니라 누구의 것을 빼앗는 그 죄가 없었습니다. 반면에 야곱은 형의 것을 줄기차게 빼앗고자 하는 그러한 성품을 가지고 하늘의 복을 받은 것입니다. 

따라서 죄가 없는 상태에서 무엇을 더 받는다는 것은 현재 자신이 가진 것조차 자신이 가질만한 권한과 마땅한 자격이 된다고 여길 것입니다. 우리는 누가복음 7:37에 나오는 어떤 여인의 눈물과 머리털로 향수를 뿌려가면서 예수님의 발을 씻기는 장면을 생각해봐야 합니다. 그녀에게는 주변에 둘러친 사람들의 차가운 시선을 전혀 괘이치 않는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즉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는 그 현장에 같은 인간들로부터 뭇매를 받는 현장이라도 상관없을 정도로 그녀는 예수님의 사랑에 올인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으로부터 표백당하고 금으로 분류 받은 사람은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인가가 공개된다고 할지라도 그 상황마저 도리어 하나님의 용서를 빛내는 조치임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율법 개입은 그 어떤 인간도 십일조해서 복 받을 입장에 있지 않음을 먼저 언급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온전한 십일조의 인간의 몫이 아니라 예수님의 몫이며 그 혜택을 입은 자들이 오늘날 거룩한 제사장인 성도들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애초부터 우리의 것, 우리 인생이 성립되지 않음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14-08-13 18:56 
12강-말라기 3장 2절-5절 (사자와 십일조) 140810-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말라기 3장 2절에서 5절입니다. 구약성경 1329페이지입니다. 

“그의 임하는 날을 누가 능히 당하며 그의 나타나는 때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는 금을 연단하는 자의 불과 표백하는 자의 잿물과 같을 것이라 그가 은을 연단하여 깨끗케 하는 자같이 앉아서 레위 자손을 깨끗케 하되 금은같이 그들을 연단하리니 그들이 의로운 제물을 나 여호와께 드릴 것이라 그 때에 유다와 예루살렘의 헌물이 옛날과 고대와 같이 나 여호와께 기쁨이 되려니와 내가 심판하러 너희에게 임할 것이라 술수하는 자에게와 간음하는 자에게와 거짓 맹세하는 자에게와 품군의 삯에 대하여 억울케 하며 과부와 고아를 압제하며 나그네를 억울케 하며 나를 경외치 아니하는 자들에게 속히 증거하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드디어 십일조에 다가섭니다. 십일조라 하는 것은, 이것은 받아 챙기는 것이 아니고 십일조 한다는 그 자체가 축복이라는 겁니다. 십일조 하게 된 자체가 아무나 주어지는 혜택이 아니고 특별히 택한 하나님의 언약, 레위 언약 속에 있는 사람에게만 요구하는 하나님의 축복이다, 그래서 십일조를 하게 된 그 자체만 해도 보통 신분자가 아니라는 겁니다. 특권 입은 것이라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십일조를 하게 되면 '바쳐라. 복 받는다.' 하면 간단할 문제를 여기에 보면 “그의 임하는 날을 누가 능히 당하며 그의 나타나는 때에 누가 능히 서리요” 해서 십일조라는 그 계명에 접근하면서 먼저 전토작업이라고 이렇게 택지조성, 관리하는 것이 먼저 들어갑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사자가, 하나님의 천사가 개입합니다. 개입하면서 그 분은 심판을 감행하게 되는 겁니다. 이 말은 십일조를 받는 복에 참여하게 되면, 십일조 받는 축복을 누리게 되는데, 흔히 교회에서 돈 서푼 내는 것을 십일조라고 하니까 그것을 피하기 위해서 먼저 결론부터 말씀 드릴게요. 

십일조를 하게 되면 그 넘치는 복은 바로 우리에게 천국으로 제공됩니다. 그리고 십일조 하시는 분은 레위 언약을 이루는 자격으로 십일조를 하게 되는데 우리보다, 우리를 대신해서 하게 됩니다. 그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리고 십일조를 그 분이 대신 하면서 왜 너희들은 십일조를 할 수 없었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주변에 우리한테 고아와 과부를 깔아 놓아요. 일부러 처지가 어려운 사람을 깔아 놓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돌아갈 것이 십일조인데, 레위인들인데, 거기에 대해서 너희가 어떤 아무런 이익이 없다는 이유 때문에 그들을 돌아보지 않았다는 것을 또 밑에 전제 작업으로 전부다 깔아 놔요. 

그렇게 해서 십일조가 기다리고 있는 그 축복에 대해서 가담하지 않은, 십일조를 하지 않은 너희들도 십일조를 한 사람으로 간주되어 가지고 십일조 한 사람에게는 창고에 넘치도록 그 복을, 한 것도 없는 우리에게 넘치도록 주어졌다는 겁니다. 이 결론 부분을 미리 우리가 땡겨서 이야기해 버리면, 제가 땡겨서 이야기 했지만 어떤 오해를 살 수 있냐 하면 우리가 축복이라는 것은 아무것도 행한 것도 없이 받는다는 그러한 오해에 돌입 될 수가 있어요. 

에서와 야곱에게 아버지 이삭이 복을 주는데, 복은 그냥 공짜로 준다는 그 점에 대해서 야곱뿐만 아니고 에서도 그걸 알고 있었어요. 저주받은 에서도 공짜로 받는다는 것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에서가 모르는 것은 뭐냐 하면, 야곱과 달랐던 것은 내가 어떤 인간인데 공짜로 받았나, 고 관련성, 자기라는 주체와 주시는 복과의 그 관련성을 놓쳐 버린 거예요. 야곱은 무조건 뺏는 자, 야곱은 얍삽한 자, 속이는 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을 받았다. 이거하고 역시 나는 점잖으니까 이렇게 복을 받는구나! 그거하고 달라요. 

아까 불렀던 찬송가 343장의 가사 내용에 제가 좀 문제가 있는 것 같아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울어도 못하고, 힘써도 못하고, 참아도 못하고,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울어도 구원 안 되고, 힘써도 구원 안 되고, 참아도 구원 안 된다. 그 다음에 4절 가사에는 믿으면 하겠네. 제가 생각하기에는 믿어도 안 돼요. 그 이유가 나와 있는 게, 요 4절 가사에 보면 주 예수만 믿어서 그 은혜를 힘입고 오직 주께 나가면 영원 삶을 얻네. 이래 되잖아요? 천천히 하겠습니다. 울어도 안 되고, 힘써도 안 되고, 참아도 못하는데 그럼 뭐로 될 수 있느냐? 믿으면 되겠다는 거예요. 믿으면 되느냐? 주 예수를 믿고, 그 은혜를 힘입고, 오직 주께 나가면 영원 삶을 얻는다는 겁니다. 그렇게 돼버리면 후렴 부분이 죽어 버려요. 그럼 십자가 달려서 주님이 왜 죽죠? 주님이 죽을 이유가 없잖아요? 

제자들이 예수님을 봤으니까 예수님을 믿고 그 다음에 그 은혜를 힘입고, 오직 주께 나가면 영생 얻는데, 졸지에 예수님은 왜 죽습니까? 예수님이 죽을 이유가 없는데요. 이렇게 훌륭한 제자 놨두고 주님은 왜 죽었습니까? 그 제자가 훌륭하지 않다는 거예요. 결국은. 예수를 믿고, 은혜를 힘입고, 오직 주께 나가는 그 행동이 그다지 훌륭하지가 않다는 겁니다. 십일조 하면 복을 받는다. 그래서 십일조 10% 냈다. 복 받는다. 이게 그다지 훌륭하지 않아요. 

그것은 하나님의 사자가 와서, 천사가 와서 심판해야 된다는 그 명분이 날아가 버려요. 십일조 해! 복 받아! 요것만 남겨 두면 되는데, 왜 표백이라는 말이 나오고 여기에 불과 잿물이 왜 나옵니까? 표백이라는 것은 직물에 있는 때를 알카리 성분으로 바꾸어서 산화 작용하는 거거든요. 여기 Cl, 염소와 과산화수소제가 쓰이고 있습니다. 뭐, 거기까지 알 필요가 없지만. 그런 게 있어요. 불과 표백은 상당히 이게 인위적인 거예요. 표백제, 하이타이 이런 게 인위적이거든요. 언젠가 그런 강의 했는데, 수련회 때 했구나! 옷이 누러면 누런 옷을 그냥 입으면 돼요. 그런데 누런 옷을 왜 못 입고 나가는가? 남들이 욕하니까 못 입고 나가는 거예요. 그럼 욕해도 입고 나가면 되잖아요? 

제가 무슨 말을 하냐 하면, 막달라 마리아가, 막달라 마리아인지 아닌지 설이 분분합니다. 하여튼 막달라 마리아가 그 동네 창녀인데 예수님한테 용서를 받아 가지고 너무 좋아서 눈물로 귀한 향수병을 깨면서, 예수님의 발 앞에서 감사의 눈물을 흘리면서, 그 향수로 예수님의 발을 자기 머리카락 적셔서 씻겨 줬습니다. 그래, 그 행위를 한 것은 좋은데, 그것을 몰래 예수님과 자기만 있는 거기서만 하면 되는데, 지금 남들이 그걸 다 보고 있는데서 그걸 했다 이 말이죠. 그리고 남들이 뭐라 하냐 하면, 저 여자가 어떤 여자인지 예수님은 모르는 모양이지? 저렇게 행실이 나쁜 여인이, 죄만 짓는 여인이 예수님에게 잘해주게 되면 결국 예수님이 죄를 옹호하는 셈이 되고 저렇게 칭찬을 하게 되면 그 동네 전부다 창녀에 대한 직업을 좋은 직업으로 인정하게 되어 죄를 유포하는 또는 유기하는 그러한 오류를 범한다 이 말이죠. 

그런데 제가 수련회 때 이야기 했지만 제가 정말 성경에서 존경하고 싶은 분은 바로 막달라 마리아였다. 왜? 남들이 따가운 시선이 보고 있는데서, 남들이 자기를 어떻게 욕하고 있는데서 그걸 했다는 거예요. 이게 정말로 얼마나 불가능한 일입니까? “너희들은 욕해라. 나는 예수님만 사랑하겠다.” 그 뜻이잖아요. 그 슈퍼스타 예수 그리스도 라는 거기서 보면 마리아가 나오는 노래 있어요. “내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당신 아시죠?” 고걸 숨어서 하지 않고 공개적으로 했다 말입니다. 공개적으로. 그거 주님의 작전입니다. 

십일조 안 해도 십일조 하면 받는 복을 누린다는 이것이 듣기에 결과는 기분 좋아요. 좋지만 막상 그 복을 받는 당사자는 남들로부터 욕 얻어먹는다는 거예요. “십일조 안 한 뻔뻔한 놈.” 이런 식으로. 남한테 욕을 얻어먹어요. “율법도 못 지킨 인간들.” 주님께서는 그럴 줄 알고 어떻게 했느냐 하면, 5절에 보면 “내가 심판하러 너희에게 임할 것이라 술수하는 자에게와” 술수하는, 점치는 자들이에요. 마법사들. 사주팔자, 궁합 보는 사람들. “간음하는 자에게와 거짓 맹세하는 자에게와 품군의 삯에 대하여 억울케 하며 과부와 고아를 압제하며 나그네를 억울케 하며 나를 경외치 아니하는 자들에게 심판이 임할 것이다.” 라고 먼저 깔아 놔요. 이게. 

그렇다면 하나님의 사자가 와서 뭘 하느냐, 율법에 의해서 모조리 죄인으로 되게 하고, 율법에 의해서 의롭다 할 사람 아무도 없게 해놓고 그 다음에 십일조 하게 되면 창고에 쌓이도록 복이 넘친다고 언급을 하는 겁니다. 그게 무슨 경우냐 하면 바로 이 십일조가 하나님께 바로 드려지는 것이 아니고 레위 제사장과 관련되어 있어서 그래요. 레위인에게 드리고 레위인이 제사장에게 드리고 제사장이 하나님께 드리는 겁니다. 그러면 십일조가 복이 오려면, 창고에 차려면 중간 과정에 무슨 단계 있잖아요? 레위인, 제사장 이 단계가 완성을 봐야 해요. 요 코스가 제대로 완성이 될 때 하나님께 접수 받아서 이렇게 보거든요. 

그 레위 제사장이 신약 히브리서에 보면 바로 예수님이고, 그 레위인들은 누구냐 하면, 오늘날 성도를 말합니다. 너희들은 왕 같은 제사장들이라 했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설교 다시 할게요. 우리가 이런 말씀 속에 적용을 받는다는 자체가 보통 신분자가 아니에요. 요 말씀을 말씀 그대로 드러내기 위해서는 우리는 철저하게 이 말씀을 지키지 못하는 막달라 마리아 같은, 그런 죄인으로 살아가는 것에 대해서 남의 따가운 시선을 의식하지 말고 주님만 생각하면서 우리는 이런 쪽으로 인생을 가도록 하나님에 의해서 조치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말씀의 완성에 있어서, 율법에 있어서 율법의 그 기능적인 기능이 뭐냐 하면, 심판이라 되어 있는데, 표백이라 되어 있는데, 2절에 보면 “그는 금을 연단하는 자의 불과 표백하는 자의 잿물과 같을 것이라” 요 말은 간단하게 말해서 이런 겁니다. 내가 분류하겠다는 겁니다. 연단된 자와 연단되지 않은 자. 금덩어리와 금과 비슷한데 금은 아닌 것. 구리나 뭐 이런 것을 분류시키겠다는 말이고. 표백되어 하얗게 된 자와 그렇지 않고 때가 묻은 그대로를 내가 분류하는 작업에 내가 나서겠다는 겁니다. 분류 작업에 그 기준은 바로 하나님의 율법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런 작업은 결국 우리가, 인간이 하나님 앞에 해주시는 작업에, 하게 하는 작업이 아니고, 일방적으로 하나님의 취지는 조치에 휘말려 들어간 사람들, 그런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겁니다. 한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여러분, 장마철에 비가 주룩주룩 와 보세요. 장마철에 비가 주룩주룩 쏟아지게 되면 그 비 오는 소리에 모든 소리가 다 사라져 버리죠. 죽어 버리죠. 오직 드득저적저적 오는 소리에 모든 소리가 없어져 버려요. 오직 비 오는 소리만 남아 있습니다. 바로 이 율법이 오는 소리, 율법이 오는 소리, 표현이 좀 이상한데. 율법이 적용되는 소리, 그 소리에. 그리고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지금도 하나님의 사자가, 천사들이 와서 이 율법대로 모든 것을 분류하고 가려내는 그 작업에 우리가 마음이 빼앗기고 그걸 느끼게 되면 이 장마철에 저적저적 비 오는 소리처럼, 이거는 다른 소리에 끼여들 자리가 없습니다. 

요즘 사람들의 제가 듣기에 거슬리고 기분 나쁜 소리가 뭐냐 하면, “아직 저에게 열 두 척의 배가 있습니다.” 이 소리에요. 아이고, 이 소리에 미치겠어요. “짐에게는 아직도 열 두 척의 배가 있습니다.” 이거 이순신 장군이 이야기 한 소리거든요. 명량 대첩에서. 거기 열 두 척 배 있으면 안 돼요. 지가 알아서 불태워버려야 해요. 열 두 척 배가 있으면요, 이거는 자기 소리가 더 강렬해요. 저적저적 내리는 장마 소리보다도 지 소리가, 소프라노 소리가 툭 튀어 나와요. 지금 명량이라는 영화가 구백만을 넘어 천만까지 간다는데, 그 영화가 왜그리 유명한가 보니까 지금 강력한 리더쉽 지도자가 필요하다, 뭐 박근혜는 하야하라, 이런 소리가 들리는데. 뭐, 갑자기 이순신 장군이 박근혜 하야하라로 됐는데. 

성경을 볼 때에, 바로 짐에게 열 두 척이 있습니다, 하는 그 소리가 우리는 율법에 적용하는, 심판하는 소리에 묻혀 버려야 해요. 예를 들어서 막달라 마리아가 향수를 뿌려서 주님의 발을 씻길 때, 뒤에 바리새인들이 있거든요. 성경에 보면 바리새인들이 “아이고, 저 여자가 얼마나 행실이 나쁜 여자인데 주님은 저런 여자와 상대하느냐. 좀 고상한 우리하고 상대 안 하고 어디서 저런 지옥 갈 여자와 상대하느냐.” 할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그 소리 듣고 “그래도 저 아직까지는 열 두 척의 양심이 남아 있습니다.” 이런 소리하면 안 된다니까요. “그래도 저 아직까지는 이런 성의는 있습니다.” 이런 소리하고 저쪽 바리새인들하고 상대하면 안 돼요. 그러면 주님께서는 꿀밤 주면서 “니는 니 할 일이나 해라. 저 신경 니가 왜 쓰냐 내가 쓰는데.” 할거라 이 말이죠. 

연단한다든지, 표백한다든지 이런 표현은 사실은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모독입니다. 오죽했으면 하나님의 천사가 와서 우리를 표백하겠습니까? 표백한다는 말은 우리의 찌든 때를 우리 눈앞에 공개하고 드러내는 거거든요. 찌든 때를 공개하면서 이렇게 더러운 죄가 니 속에 들어 있었다, 그걸 펼쳐주는 게, 이게 표백 작용이잖아요. 근데 그 표백 작용을 해대서 우리는 사실은 그렇게 인정해요. “주님이 그렇게 해주신다면, 우리 죄를 끄집어 내주신다면 고맙습니다. 하지만 남들 보는 앞에서는 안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하는 것이 아직까지 우리에게 있다면 우리는 아직 열 두 척의 배가 남아 있는 자존심을 유지하는 이순신 장군밖에 안 돼요. 그걸 윤리적 영웅이라고 합니다. 윤리적 영웅. 윤리적 영웅은 수련회 때 이야기 했지만, 이거는 하나의 최고의 쾌감이에요. “너희들은 이정도 어려운 가운데 주를 버렸지? 하지만 나는 이렇게 어려워도 주를 버리지 않았다.” 이거는 인간이 끄집어 낼 수 있는 최고의 악마적인 거예요. 가장 십자가를 모독하는 거예요. 키에르케고르의 말처럼 예수님이 훌륭해서 믿는다면 그거는 십자가에 대한 최고의, 극도의 모독이라고 했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 지신 것은 어느 누구도 그걸 따라 오려는 마음이 아예 삭제되고 전혀 따라 올 사람이 아무도 없음을 분명히 해두는 거예요. 예수님의 죽음은 사실은 우리의 죄의 결과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보면서 “우리가 저토록 지독한 죄인이었습니다.” 라는 것을 보여주는, 우리 쓰레기를 받아 내어서 죽었잖아요. 우리 죄를 대신 가져갔기 때문에 주님의 십자가에는 우리 죄가 잔뜩 거기 들어있다 이 말이죠. 들어있거든요. 따라서 그 십자가를 쳐다보게 되면 주위의 바리새인들이 무슨 소리하고 어떤 시선 보내도 우리는 거기에 말려들면 안 돼요. 거기에 기죽거나, “나도 아직 열 두 척 배가 아직 있어. 가만있어. 조금만 기다려봐. 일본 야마모토 머리를 확 밀어 버릴 참이야. 기다려봐.” 이런 식으로 우리가 허풍이나 허세를 부릴 이유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다시 이야기 합니다. 십일조라 하는 것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십일조라 하는 것 자체가, 십일조 하게 된 자체가 축복이고 이거는 보통 신분이 아니에요. 아무나 할 수가 없습니다. 십일조 하기 전에, 우리는 그 십일조를 제대로 하기 전에 어설프게 하는 자들을 마음속에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고 거짓 맹세하고 품군하고 간음하고 이런 요소들이 우리 안에 있는 겁니다. 이런 인간에게 하나님께서는 기어이 복 주기 위해서, 십일조를 시키기 위해서 하나님의 사자가 먼저 와서 이러한 우리의 죄를 완전히 다 보여주죠. 그러면 우리는 막달라 마리아가 되가지고 모든 율법 완성을 우리가 지키는 것이 아니고 누구한테 미뤄야 되느냐 하면은 바로 주님한테 미루고 그걸 가져가시는 주님에게 우리의 모든 운명과 팔자도 같이 다 거기다 짐 맡기는 듯이 그냥 맡겨 버려야 돼요. 

그 막달라 마리아가 가지고 있던 귀한 샤넬No5, 향수를 아낌없이 주님 발 앞에다가 던져버리고 깨버리잖아요. 자신이 주님 앞에서 와장창 깨지듯이. 십자가 앞에서 자기가 돌 위에 깨지듯이 깨어져 버린다 이 말이죠. 주님이 먼저 나를 가져갔습니다. 내가 먼저 주께 드린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먼저 가져 간 거예요. 마지막으로 다시 말씀 드립니다. 343장에 보면 울어도 못하네. 울어도 못하고, 힘써도 안 되고, 여기 2절에 보면 착해도 다시 나게 못 하고. 좋은 소리 다 해놨어요. 참아도 못 하고, 어떻게 안 되는데 믿으면 하겠네. 믿어도 안 돼요. 믿어도. 주 예수만 믿어서 그 은혜를 힘입고 오직 주께 나가면 영원한 삶을 얻네. 그거 땡이거든요. 이거 아니다 이 말이죠. 그 뒤에 말이 맞아요. 십자가에 달려서 예수 고난 받으셨네. 

따라서 가사가 제대로 되려면 주 예수만 믿어도 안 되고 힘없어도 안 되고 오직 주께 나가도 안 되고. 십자가에 달린 그 분이 자기 세계에서 이쪽 세계로 건너 와 가지고 이미 확정된 모든 일을, 이미 다 처리했다. 끝냈잖아요. “고민하지 마라. 염려하지 마라. 내가 건너왔잖아.” 니가 건너 온 것이 아니고 내가 건너와서 너에게 성령을 통해서 알려줬다는 겁니다. 이유를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너에게 어떤 책임도 묻지 않겠다는 겁니다. 단, 외부에서 너의 허물과 너의 죄에 대해서 어떤 소리를 하던 간에 너는 귀하고 고귀한 신분이기 때문에 같은 레벨로 따져서 같이 오호옹 짖고 그러지 말라 말이죠. 그들이 죄인이라고 하거든 바로 우리 속에서 아직도 마지막 열 두 척 배가 남아 있다는 그 마지막 자존심 포기하라고 하나님께서 일부러 우리를 비난하는 사람들을 병풍처럼 우리 주변에 치게 한 거예요. 

이스라엘 주변에 모든 아람 이방나라가, 쫓겨난 이방나라가 시기하듯이 둘러쳐서 이스라엘이 받는 복을 시기하듯이 이 십일조 하는 이것도 주께서 홀로 이루어 가시는 그 십일조와 그 혜택이 우리가 십일조 한 사람으로써 간주하게 되기 위해서 주께서는 지금 이 길로, 이쪽으로 이미 작용하시고 지금도 작용하고 있습니다. 십일조는 주님이 십일조고 주님의 그 혜택은 우리가 공짜로 받고 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뭔가 하고 싶어 하는 것이 인간의 본심이고 남아있는 양심인 줄 압니다. 주께서 하게 하시는 가운데서도 우리가 하는 것에 대해서도 우리가 얼마나 교만하고 위선적이고 그걸 자랑질하고 싶은 충동이 더불어 같이 일어남을 깨닫게 하셔서 왜 십자가 피로만, 용서로만 구원되는지, 영생 얻는지를 늘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