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하지 않으심
2014년 8월 17일 본문 말씀: 말라기 3:6
(3:6) 나 여호와는 변역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야곱의 자손들아 너희가 소멸되지 아니하느니라
인간들은 늘 변화하는 주변과 자신을 어떻게든 붙잡아서 불변의 존재로 확정짓고 싶어합니다. 세상 따라 안 변할 수 없기에 변하는 요소와 불변의 요소를 내부적으로 찾아내고 싶어합니다. 마치 어린아이가 나중에 어른이 되게 되면, 얼굴 형태부터, 신장, 몸무게, 운동신경, 모든 게 다 변합니다.
하지만 그 사람의 자기됨은 세월이 흘러도 역시 본인 맞습니다. 이러한 개인 고유한 본질적 동질성을 따로 챙겨서 그것을 질적으로 우수하게 보존하고 싶어합니다. 흔히 이것을 ‘자아정체성’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 사람이 남이 아닌 바로 그 사람이게 하는 그 무엇을 인간은 품고 살아가는데 그것은 변하지 않는다고 믿게 됩니다.
만약에 이것마저 변하면서 결국 모든 인간은 다중인격자로 존재하는 바가 되기 때문에 실제상황에 합하지 않는 결론이라는 겁니다. 하지만 사람은 이런 동질성을 사수하기가 하나님의 ‘변하지 않으심’을 훼손하고 방해하는 식으로 움직인다는 사실을 우리는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변하지 않으심’은 오직 하나님에게만 해당되지 인간은 해당될 수가 없습니다. 궁극적인 자아의 동일성마저 본인들이 쥐고 있을 내용이 아닙니다. 변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작업의 일부로서 다루어질 뿐입니다. 인간들의 자아동질성은, 인간의 몸체뿐만 아니라 인간이 사는 삶의 환경까지 이 원리가 확산되어 있습니다.
인간들은 불안한 것을 원치 않습니다. 인간뿐만 아니라 동식물도 마찬가지입니다. 고유한 자기만의 영역 표시를 하는데 게을리하지 않습니다. 그 속에서 변함이 없는 동질성을 유지한채, “이게 바로 나야”라는 사실을 확정한듯 하며 세월을 보낼려고 합니다. 이러한 바람은 이 세상 뿐만 아니라 사별 이후까지 연장하려 합니다.
천국이란 결국 이 세상에서의 자기 동일성을 고이 담아 불멸화가 가능한 곳으로 이해하게 됩니다. 사람들의 믿음이라는 것도 자기 확실성을 바탕으로 하게 됩니다. 그래야 ‘확실한 믿음’이 된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제시하신 모든 믿음의 내용, 약속의 내용은 그로 인해 인간의 불신앙만 노출될 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야곱의 자손은 소멸되지 않는다’ 고 나옵니다. 이는 인간이 내부적으로 기대한 그 내용이라고 단정 지어서는 아니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내부적으로 이미 인간들에게 요구하는 바가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야곱의 자손은 소멸되지 않고 영원해주기를’ 은근히 이스라엘은 바라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교류가 믿음 관계가 아니라 앎의 관계가 될 뿐입니다. 즉 본인들이 익히 아는 사항을 재삼 아는 것에는 하등의 믿음이 필요치 않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과 광야길을 동행했던 이스라엘에게는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충분히 ‘앎’의 기회를 부여했습니다.
정탐꾼 파견이 바로 그것입니다. “너희가 다 내 앞으로 나아와 말하기를 우리가 사람을 우리 앞서 보내어 우리를 위하여 그 땅을 정탐하고 어느 길로 올라가야 할 것과 어느 성읍으로 들어가야 할 것을 우리에게 회보케 하자 하기에 내가 그 말을 선히 여겨 너희 중에서 매 지파에 한 사람씩 열둘을 택하매
그들이 앞으로 가서 산지에 올라 에스골 골짜기에 이르러 그곳을 정탐하고 그 땅의 과실을 손에 가지고 우리에게로 돌아와서 우리에게 회보하여 이르되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땅이 좋더라 하였느니라 그러나 너희가 올라가기를 즐겨 아니하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을 거역하여
장막 중에서 원망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미워하시는 고로 아모리 족속의 손에 붙여 멸하시려고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셨도다 우리가 어디로 갈꼬 우리의 형제들이 우리로 낙심케 하여 말하기를 그 백성은 우리보다 장대하며 그 성읍은 크고 성곽은 하늘에 닿았으며 우리가 또 거기서 아낙 자손을 보았노라 하는도다 하기로”(신 1:22-28)
이스라엘 백성들은 나름대로 하나님을 믿는다고 자부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명백하게 보고 온 가나안 땅의 현실은 그들의 믿음을 와해시키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들이 믿음이라는 것이 기껏 아는 것을 진실된 것으로 받아들이는 심리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즉 현실을 보고 그 보여진 것에 대한 해석을 나름대로 정리하면서 숨겨진 본인들의 믿음이 작용하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갈렙과 여호수아는 물론 다른 10명의 정탐꾼과 똑같은 상황을 접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능력으로 도저히 그 땅을 점령할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인간이 앎과 이해력을 너머서는 그 무엇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러니까 들어갈 수 있는 땅이라고 하나님께서 지정해두셨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약속은 인간의 모든 지식과 앎을 배격하면서 실시되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들이 알아보고 알아서 들어갈 땅은 약속의 땅이 아니라 참된 유일한 믿는자이신 예수님의 일하심이 훼손받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을 경우만 천국입니다. 따라서 갈렙과 여호수아의 믿음은 다른 10명의 정탐꾼과의 믿음과 동반되어야 합니다.
‘야곱의 자손은 소멸되지 않아야 한다’는 말씀에는 반드시 불신앙적인 이스라엘이 발각되는 작업이 병행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유일하게 믿는 자는 오직 예수님뿐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약속의 땅에 입성하기 전에 갈렙과 여호수아만이 믿는 자임을 부각 되는 경우와 같습니다.
‘야곱의 자손’이란 야곱이라는 한 개인이 갖고 있는 성질이나 성격이 미끄럼틀 타듯이 후손을 통해서 계속 반복해서 터져 나오게 됩니다. 야곱은 거짓말해서 축복을 따내었다고 여긴 자입니다. 즉 본인이 거짓말이 축복 따내는데 일조했다고 믿게 된 자입니다. 바로 이런 성향이 야곱의 성향입니다.
바로 그런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는 기어이 소멸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것은 인간들이 그만큼 하나님의 일에 자신들이 관여가 가능하다고 믿게 되는 그 불신앙을 껴안고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데 그 이유는 오직 예수님의 믿음만이 하나님이 인정하셔서 참 이스라엘을 성립시키는 성과를 하나님의 성과로 확정짓기 위함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의 공로만이 인정되는 그런 믿음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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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8-21 06:38 |
13강-말라기 3장 6절 (변하지 않으심) 140817-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말라기 3장 6절입니다. 구약성경 1330페이지입니다.
“나 여호와는 변역(變易)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야곱의 자손들아 너희가 소멸(消滅)되지 아니하느니라”
우리가 성경을 볼 때 믿음으로 봐야 된다고 이야기를 하죠. 그런데 믿음이라는 하는 것은 아예 인간에게는 이것이 생산되지 않습니다. 믿음은 없습니다. 그러면 그 말을 다시 바꾸어 말하면 너는 성경을 볼 때, 하나님을 믿을 때, 하나님을 생각할 때, 믿음으로 믿으라는 이 말은 너한테 믿음 없음을 인정하고 나오너라 하는 그 이야기와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말썽꾸러기가 되어 가지고 오히려 주님이 하는 모든 것에 대해서 훼방꾼 노릇을 하게 되어 있어요.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나올 때에, 그 열두 명이 가나안 땅을 정탐을 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왜 하느냐 하면 믿음이 뭔가를 설명을 하는 거예요. 제 딴에 지금 쉽게 설명하는 겁니다. 믿음이 뭐냐 하면, 열두 명이 갔는데, 열 명이 “우리는 그 땅에 못 들어갑니다.” 라고 했어요. 들어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땅에 거하는 그들은 장대 같고 우리는 메뚜기 같으니까 들어갈 수 없습니다. 이것을 열두 명 가운데 열 명은 자신의 믿음으로 본 거예요. 따지고 보니까 자기는 메뚜기 같고 저쪽은 장대 같으니까 못 들어간다 하고 땅땅 결정 낸다. 이게 믿음이에요. 인간은 믿음 없는 사람 없습니다. 나름대로 다 믿음과 확신이 있습니다.
못 들어간다는 거예요. 아무리 하나님이지만 약속이지만 못 들어갑니다. 그런데 갈렙과 여호수아는 “우리는 메뚜기 같고 그들은 장대 같은 것, 저도 봤습니다. 맞습니다. 근데 그 땅은 그러하기에, 우리가 우리 힘으로 못 가기에, 그러니까 우리 땅 맞습니다.” 이래 되는 거예요. 우리 힘으로 들어가지 못하기에, 그러니까 그 땅은 우리에게 선물로 줄 수밖에 없다는 거예요. 이 열두 명 가운데서 두 명과 열 명을 분리시킨 그 취지를 우리가 놓치면 안 돼요.
믿음이라 하는 것은 반드시, 진짜 참된 믿음이라는 것은 믿음 아닌 것과 대조하면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믿음 아닌 거라는 그것이, 흔히 우리가 믿음이라고 우기는 그것이, 진짜 믿음인 자 앞에서는 그게 절대적으로 믿음 아닌 것으로 들통 나는 거예요. 이 세상에 믿음인 분은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생각하라는 말은 우리가 믿음 없는 자라고 들통 나게 될 때, 비로소 우리는 믿음에 포섭되는, 포함이 되는 사람으로 우리는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그 갈렙과 여호수아는 그 약속의 땅에 들어갔습니다. 들어가고 다른 사람들도 쭉 들어갔는데, 그 갈렙과 여호수아의 그 믿음의 결과에서 믿는다는 것은 인간이 벌리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들어갈 때부터 했지요. 그래서 이것을 복잡하게 할 것이 아니고 간단하게 합시다. 하나님의 일은 우리가 관여하지 않습니다. 못 합니다. 요 간단한 문장인데, 제가 이런 말을 하니까 못 알아듣는 사람들 참 많이 있는데, 성경에 나오는 모든 일은 하나님 일이지 우리 일이 아닙니다. 왜 자꾸 남의 일에 그렇게 신경 쓰는지 모르겠어요. 우리들이. 자꾸 이걸 십일조 나오니까 십일조 하라는 말인 모양이다 하는데, 이 십일조 하라, 하지마라, 하는 것도 우리 일이 아니에요. 우리가 십일조 한다고 해서 그게 십일조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은 우리가 관여하지 못해요. 왜냐하면 우리는 믿음이 없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러면 갈렙과 여호수아는 약속의 땅에 들어갔잖아요? 그거 믿음 있는 거잖아요? 이렇게 한다면 갈렙과 여호수아는 믿음 없는 것과 더불어서 그들은 믿음 있는 자로 나온 거예요. 그래서 믿음 없는 자와 믿음 있는 자가 합치해서 그게 이스라엘이 되는 겁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한 번 봅시다. “나 여호와는 변역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야곱의 자손들아 너희가 소멸되지 아니하느니라” 야곱의 자손이 이스라엘이거든요. 이스라엘은 소멸되지 아니한다는 겁니다. 이스라엘은 소멸되지 아니하니까 이스라엘은 말하기를 “아, 우리가 소멸되지 않는구나!” 라고 믿어버린 것이 이게 문제가 되는 거예요. 이게 화근이 되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소멸되지 않는다는 그 소관과 그 작업은 이스라엘이 관여할 문제가 아니에요. 그것은 하나님의 자기 숙제고 자기 의무다 그 말이죠. 왜, 자꾸 남의 의무에, 남의 사무실에 가가지고 자꾸 들락거립니까? 주님의 사무실에 주님이 일 하시도록 그냥 하세요. 우리가 거기서 개입하거나 관여하지 마세요. 이스라엘이 소멸되지 아니하면 하나님이 알아서 이스라엘을 소멸되지 않게 해주시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믿음도 없으면서 믿는 척을 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스라엘이다. 이 말씀대로 십일조 안 하는 것은 도적질 하는 것이니까 우리가 도적질 하지 말고 십일조 하자.” '하자'라는 그 순간부터 그들은 이스라엘을 망치는 자들이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십일조 함으로써 주의 일에 본인들이 관여한 바가 되기 때문에. 그거는 신앙에 불신앙이 섞인 셈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안 되는 거예요. 진짜 제가 못 미더워서 다시 언급 합니다 만은, 하나님의 모든 일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혼자 하시는 일이기 때문에 인간이 신경 쓰지 마세요. 장대가 있든, 우리가 메뚜기 같든, 장대가 있든 그 땅은 하나님의 약속된 땅이기 때문에 가게 돼 있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신경 쓰면 안 된다고요. 근데 신경 쓰는 이유가 믿음이 없기 때문에 신경 써요. 믿음이 없기 때문에. 믿음이 없기 때문에 신경 쓰는 거예요. 십일조 하고. 여러 가지 기도하고 시키는 대로 한다고. 얼마나 믿음이 없었으면 그 짓 하겠어요? 얼마나 믿음이 없었으면.
이제부터 좀 어렵지만 오늘 본문 해석 들어갑니다. 여호와는 변역지 아니한다, 변하지 않는다 이 말이거든요. 들어가는데 이게 너무 어렵기 때문에 쉬운 예를 들겠습니다. 제 아내가 어머니한테 반찬을 해주면 어머니가 하는 멘트가 있어요. 상투적인 멘트가. “야야 너그나 먹지 나한테 아무것도 신경 쓸 것 없다.” 이 말은 어머니는 변역지 아니한다는 뜻이거든요. 어머니는 어떤 것도 달라지지 아니하니까 나한테 신경 쓰지 말고, 너그나 신경 쓰지 나한테 신경 쓸 것 없다는 거예요. 이게 어머니의 부탁이고 주님의 부탁입니다. 우리한테. “야야 아무것도 신경 쓰지 마. 너그나 묵지 나한테 신경 쓰지 마.” 라고 하십니다. 물론 어머니도 인간인지라 더 신경 쓰라는 소리로 해석을 해야 되지요. 분명히. 하지만 주님은, 진짜 주님의 일에 신경 쓰면 안 돼요.
그런데 인간들은 주님 일에 신경 쓰는 것은, 주님의 일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주의 일을 자기 일에 끌어 땡기고 싶은, 그런 노림수 때문에 그 짓 하고 있는 거예요. 주님 힘 빌려와서 내 신상 펴질까봐. 그런 것만 노리기 때문에 자꾸 주님 관심 두고, 주님 일 도와주는 척을 하지만 사실은 그것은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겁니다. 다시 이야기합니다. 하나님께서 변역지 아니하니, 하나님은 약속은 변하지 아니하니 이스라엘은 절대로 소멸하지 않는다. 라는 점에서 이스라엘 니가 이 점에 대해서는 관여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성도야! 니 구원은, 니 천국과 영생은 이미 내가 알아서 확정해 놓고 생명책에 기록해 놓고 창세전에 이미 사랑했기에 니가 그걸 믿는다면, 안다면 니가 니 인생에 대해서 신경 쓰지 마라” 그 이야기거든요. 이게 믿어지지 아니하면 서서히 이제는 “주여! 믿습니다.” 하고 쌍시옷이 들어가는 거예요. “믿습니다” 가 아니고 “믿씁니다” 하고 들어가는 거예요. 열심히, 열심히 하는 거예요.
자, 그러면 제가 처음에 이야기했죠. 갈렙과 여호수아의 믿음이라 하는 것은, 그냥 자체적으로 이게 진짜 믿음인지, 거짓 믿음인지 모르는데 갈렙과 여호수아가 정 반대되는, 대조되는 열 명의 정탐꾼과 딱 비교하면서 그 틈 사이에서 갈렙과 여호수아는 믿음이다 하고 판정이 난 거예요.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나는, 내 계획은 변함이 없다. 따라서 니는 내 일에 신경 쓰지 말고 너나 잘해라. 니나 잘해. 내 일엔 신경 쓰지 마!” 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자기 구원, 자기 영생에 신경 써 가지고 “하나님 뭐 하면 됩니까? 뭘 믿으면 됩니까? 어떻게 예수 믿을까요?” 이렇게 설칠 때에, 이러한 모양새를 결코 하나님께서는 버리지 않는다는 사실이에요. 열 명의 정탐꾼을 “에이, 믿음도 없는 것이 어디서? 저거 버려 버리자.” 하지 않고, 갈렙과 여호수아의 믿음을 증명해 주기 위해서 그들이 반대되는 역할을 맡아야 되듯이, 어떤 인간도 자기 구원에 신경 뚝 끊은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주님이 이스라엘을 이루거든요. 그러니까 주님의 믿음이 뭔가를 드러내기 위해서 신경 쓰지 마라고 그렇게 당부를 해도 계속 신경 쓰는, 그런 불신앙적인 인간들을 주께서 함께 대독하사 그들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품에 안으사 그들이 니들의 믿음이 아니고 주님의 믿음에 의해서 구원받았다는 것을 계속 드러내기 위해서 불평하고 불만만 하는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시는 겁니다. 그 테두리, 그 울타리까지 합쳐서 이스라엘은 소멸되지 않는 겁니다. 그러니까 제 말은 결국 이스라엘 속에 뭐가 들어있냐면 이스라엘 속에 반 이스라엘이 필히 필수적으로 포함이 돼 있어야 된다 이 말입니다. 이걸 오늘 날 식으로 한다면 신앙인이십니까? 성도이십니까? 그러면 반드시 당신 속에 불신앙적이고 성도 아닌 요소들이 날마다 터져 나와야 된다는 거예요. 그게. 이걸 빼낼 생각 하지 마세요. 요거는 하나님이 싫어하는 것이니까 빼내고 하나님이 좋아하는 것만 모으겠다. 그거 좋아하는 것이 없어요. 하나님이 좋아하는 것이 없다 말이죠. 전부다 다 빼버리면 남는 게, 하나하나 다 빼버리면 남는 게 하나도 없어요.
날마다 우리는 불신앙적으로 살 수밖에 없다는 이 사실은 정작 예수님이 함께 계시기 때문에 비로소 밝혀지는 사실이기 때문에 주와 동행하는 사람입니다. 주와 동행하지 않는다면 자기 잘난 맛으로 그걸로 끝나요. 만날 나는 훌륭해! 나는 저 사람보다 나아! 이렇게 되지만 주님과 동행하기 때문에 품어주고 불신앙적인 것까지 버리지 아니하고 다 안아 주되,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것이, 구원의 모든 것은 홀로, 예수님 혼자 다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우리를 버리지 않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서론적인 것들을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야곱의 자손들아 너희가 소멸되지 아니하느니라” 고 되어 있거든요. 야곱의 자손이라는 이 말은 쉽게 하면 이렇습니다. 야곱이라는 본디 엿 덩어리가 있다면 그것을 온도에 녹여서 길게 잡아 당겨 봅시다. 그러면 엿가락이 죽 늘어나죠. 고 늘어난 그 부분이 야곱의 자손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이 말은, 야곱은 죽어도 야곱의 자손 속에 야곱은 살아 있는 겁니다. 야곱의 DNA가 살아 있는 것이 아니고 야곱 언약이 살아 있는 거예요. 야곱 언약이. 야곱 언약이 살아 있으면서 이것은 마치 애들이 미끄럼틀 타듯이, 애들이 미끄럼틀 타려고 올라갔는데 미끄럼틀 매끈한 금속판이 없어 버리면 미끄럼틀 못 타잖아요? 툭 떨어지잖아요? 미끄럼틀 타려고 올라가면 딱 눈앞에 뭐가 있느냐면 경사진 매끈한 금속 틀이 나와 가지고 쭐떡 미끄러지듯이 야곱에 들어가면 야곱만 보지 마시고 야곱에서 줄기차게 소멸되지 아니한 야곱의 후손까지 이어지는 그 매끄러운 틀도 우리가 같이 볼 수 있어야 돼요. 그야말로 미끄럼틀 타는 거예요. 미끄럼틀 어린애들 다 탈 수 있잖아요?
인생이라 하는 것은 늘상 쭐떡쭐떡 미끄러지면서 천국 가는 거예요. 성도라 하는 것은. 지가 나대고 지가 설치는 것은, 부질없는 짓입니다. 지금 제가 몇 번째 이야기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구원과 영생에 대해서 이미 하나님께서 변하지 않기 때문에 확정지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절대로 구원 받는다. 영생 얻는다. 확정지었다 이 말이죠. 확정지었지만 이 확정을 듣는 순간, 우리 속에서 뭣이 발작하느냐 하면 불신앙이 발작해가지고 “주님이여, 어떻게 하면 이스라엘에, 그 변하지 않은 이스라엘에 내가 그 안에 유지될 수 있습니까?” 라고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이제 그 점에 대해서 설명해 드리는 겁니다.
하루는 아내가 잠을 자는데 옆에서 고함을 질러요. 고함을 지르기에 뭐 피곤해서 잠꼬대 하는 모양이라 하고 이렇게 생각을 하고 있는데 좀 잠잠해지고 아내가 잠을 깼습니다. 깨고 따지기 시작하는 거예요. 내가 왜 고함지를 때 안 깨웠냐? 하는 거예요. 무슨 내용이냐? 하니까 귀신이 나를 잡아 땡겨 가는데 왜 옆에 있으면서도 안 도와 주냐는 겁니다. 그 때, 그 순간 제가 궁금한 게 귀신이 어떻게 생겼냐? 하니까 아내 말이 만화에 나오는 귀신이라는 거예요. 생전 아내가 만화 본 적이 없는데 어릴 때 봤는지. 가위에 눌렸다 이래 하잖아요. 그런데 거기서 진리가 나옵니다. 뭐냐 하면, 귀신이 나와도 그것마저 복음적 환경이라는 겁니다. 복음을 설명하기 위해서 귀신에게 잡혀가는 상황을 하나님께서 연출해 주신 거예요. 이 말은 뭐냐, 잡혀가도 상관없게 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데에는 귀신이 날 잡아가도 구원될 자는, 하나님의 일은 차질이 없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을 믿느냐? 이 말입니다. 그 사실을. 얼마나 놀랐겠어요. 꿈이지만. 꿈속에서는 꿈인 줄 모르잖아요. 깨고 나니까 꿈인 줄 알죠.
세상이라 하는 것은 전부다 복음 중심입니다. 복음 중심이기 때문에 우리는 복음 앞에서 예수님이 정상이기 때문에 우리는 비정상이 돼야 돼요. 그런데 인간은 자기를 정상인으로 생각을 하는 겁니다. 제가 누구하고 이야기 할 때 그런 이야기 했습니다만, 인간들이 자기가 정상이라는 말은 정신과에서 뭐로 보느냐 하면 거짓말 할 수 있으면 정상인이고 거짓말 못하면 비정상인이 돼요. 정신병자예요. 정신병자 특징이 거짓말 못한다는 거예요. 이게 속이지를 못하는 거예요. 그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은, 정상인이십니까? 그러면 매일같이 남을 속여가면서 살아가는 사람. 이게 이 세상의 정상인입니다. 누구냐? 야곱이에요.
야곱이 왜 중요하냐면, 야곱이 미끄럼틀에 왜 있어야 되느냐 하면, 야곱은 눈에 뵈는 게 없는 인간입니다. 자기의 야망과 욕망을 추스릴 줄을 모르는 사람이에요. 자기가 얻고자 한다면 수단과 방법을 통하지 않고 반드시 얻어내야 할 사람이에요. 그야말로 경쟁 자체를 즐거워하는 사람. 경쟁 자체가 있음에 사는 재미를 느끼는 사람이 야곱입니다. 그 야곱의 모습은 인간으로선 말종이죠. 인간으로서는 최하위에 있는, 인간들이 보여줄 수 있는 모든 탐욕을 다 그대로 보여준 사람이에요. 근데 바로 그 야곱이 뭐냐, 이스라엘이에요.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구원하시는 겁니다. 어떤 요소? 거짓말 하는 요소를 생생하게 그대로 살려내면서 구원해요. 살려내면서.
그리고 왜 살려내느냐 하면, 그 자체가 복음적 환경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우리가 예수님 당시에 라고 한다면, 사람들의 특징이 뭐냐 하면, 그리스도만 이렇게 주목하는 경향이 있어요. 너 누구? 하면, 너 어떤 사람이냐? 하면, 자기만 주목하듯이 예수님 하면 예수님만 주목하는데, 예수님이 어떤 분이냐 할 때는 반드시 주변에다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을 배치를 해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하는 일은요, 본인 말하는 것이 아니고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주장을 없는 식으로 본인의 말을 드러내요. 산상설교가 그런 겁니다. “너희들은 이렇게 가르치지만 아니다. 나는 이렇게 가르친다. 너희들은 뭘 해야 된다고 가르치지만 나는 아니다.” 이미 모래 위에 지은 집과 반석 위에 지은 집이 확정된 것처럼 나는 확정된 사실을 공포하고 선언할 뿐인 거예요.
예수님의 특징이 뭐냐 하면, 이미 되어진 사실을 알려 주는 것이고, 예수님 주변에 포진된 사람들은 뭘 해야 된다는 거예요. 해야 성과가 나오고 아무것도 안 하면 어떤 결과가 안 나온다고. 하늘나라 가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라고 그들은 그렇게 가르친 거예요. 그들 속에서 예수님은 이상한 분이에요. 정말 납득이 안 되는 분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이미 확정이 되었다고 한다면, 그럼 확정이 된 그것을 어떻게 내 것으로 가져오느냐 하는 그 문제에 대해서 주님께서는 일체 언급을 안 했거든요. 무슨 말이냐 하면, 다른 사람들은 열심히 하면 조금씩 얻을 수 있다고 이야기 하고, 예수님은 그럴 필요 없다 내가 다 했다고 이야기 했다 말이죠. 그럼 내가 다 했다고 한다면 우리는 수긍을 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다 한 것을 내 것 만들기 위해서 이걸 가져와야 되잖아요. 그런데 가져오는 방법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어요. 왜냐하면, 니가 가져오는 방식으로, 니 것이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주께서 주셔야 갖게 되기 때문에 어떤 가져오는 방법에 대해서 언급을 안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차라리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는 그것을 믿기 보다는 차라리 조금씩이라도 내가 저축해 나가는 것, 착한 일을 좀 더 쌓는 것, 이것이 천국 가기에 더 가능성이 있다고 그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예수님은 왜 그렇게 이야기 했을 까요? 왜 우리 쪽에서 가져오는 식으로 이야기하지 않았을 까요? 예수님 주변에 있는 마리아 마르다, 그리고 주변에 있는 모든 제자들, 그들은 전부다 예수님을 오해했습니다. 야곱 같아요. 어떻게 하면 예수님의 완성된 저 것을 내 것으로 만드는가? 하지만 주님께서 어떻게 했냐 하면, 그것을 틀어지게 만들어요. 마치 야곱과 같이 만들어요. 야곱이 얻으려고 하면 일이, 자기의 나쁜 버릇이, 자꾸 틀어지는 일을 통해서 나쁜 버릇이 오히려 더 만개하고 더 노출되는 그런 경우를 자꾸 당하거든요.
이것은 뭐냐 하면, 이겁니다. 부분 전체가 부분에 잠길 때는 그 부분은 전체를 담을 여지를, 공간을, 확보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전체에 대해서, 이미 복음적 환경에 의해서, 전체에 소속이 되고 포함이 된 그 자체로 누리고 믿으면 되는 거예요. 그게 믿음이에요. 우리는 자꾸 믿음이라는 것을, 내가 좋은 걸로 가지고 내 것 만들 때, 어떤 믿음의 성과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반대입니다. 부분은 전체를 내 것 가지면 이것은 전체가 아니고 부분으로 이게 왜곡되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본인이 전체에 이미 포함된 상태에서 같이 굴러가면 되는 겁니다. 굴러가면서 굴러가면 되는데, 굴러가면서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은, 나의 거짓말함과 그리고 거짓말 하면서 그것을 거짓말 아니 척으로 그걸 곱게 포장하려는 모든 부질없는 시도들이 바로 야곱, 야곱이 했던 행세를 꼭 닮았다는 사실을 날마다 그것을 뽑아내고 느껴질 때, 우리는 이스라엘의 자손이 되는 겁니다. 못된 것, 그리고 불신앙적인 요소까지도 전부다 포함시켜 주시면서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그래도 니가 그런 짓해도 변하지 않는 것은 여전히 변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변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자, 이쯤해서 설교 처음으로 돌아가 봅시다. 갈렙과 여호수아가 약속의 땅에 정탐을 했어요. 분명히 그들은 장대 같고 우리는 메뚜기 같아서 우리는 못 갑니다. 천국이고 뭐고 아무리 좋아도 포도송이가 얼마나 무거운지 두 사람이 들어도 못 가는 것은 못 가는 겁니다. 이미 그 주인이 있으니까 안 되는 겁니다. 갈렙과 여호수아도 충분히 인정합니다. 이해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주시고마 약속했기 때문에 들어간다는 거예요. 그럴 때 우리는 갈렙과 여호수아한테 묻고 싶어요. 도대체 당신은 아이큐가 얼마기에 그것이 어떻게 믿어지십니까? 그러면 갈렙과 여호수아가 뭐라고 이야기 합니까? 안 믿어지는 당신의 모습이 그게 내 모습입니다. 안 믿어지는 당신이나 믿는 나나 사실은 같은 속성과 성질입니다. 그런데 변하지 않는 주님의 일에 말려들어 가니까 그 주님의 일이 나한테 믿음으로 덮쳐진 거죠. 그러니까 내 불신앙 따로 있고 그 불신앙을 듣는 주님의 일이 따로 있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설교 처음에 이야기 했습니다. 우리는 절대 주의 일에 관여하지 마세요. 섞이지 말고 따로 떼놓으란 말이죠. 우리는 뭐든지 안 됩니다. 안 되기 때문에 구원 받은 거예요. 이미 구원 받은 사람의 고백입니다. 안 되기 때문에. 마지막 이 말씀 하고 마치겠습니다. 로마서 4장에서 표현하기를 아브라함은 아내가 임신이 안 되고 자식이 없다는 것을 알았어요. 이게 알았다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절대로 임신이 안 됩니다. 알았어요. 그리고 자기 아내가 우리 아기가 없다는 것을 알고 아내 태는 이미 죽은 것을 알았다 말이죠. 알게 하신 것이 하나님의 분명한 작전이었어요. 분명히 우리는 알 걸 알아야 돼요. 절대로 우리 힘으로 천국 못 가고 우리 힘으로 영생 얻어낼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하시고 그 다음에 주의 일에 여파로 인하여, 말라기 3장 6절의 말씀에 의해서 하나님은 변함이 없고 이스라엘은 반드시 구원한다는 그 말씀이 아브라함에게 미리 땡겨서, 아브라함 식으로 미리 땡겨 주어지게 되면 아브라함은 믿지 않을 수밖에 없었던 거예요. 왜? 내가 안 된다는 것을 내가 아니까. 내가 아니까. 그리 세상 어떤 일이 나는 부분이고 주님이 전체 일을 관장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참새가 난다. 주께서 날게 하신 거죠. 마치 십자가 피가 내 죄를 용서 한 것처럼. 그런데 우리는 십자가 피가 용서했다고 우기면서 참새가 나는 것은 참새 날개의 에너지 때문에 난다고 물리학적으로 생물학적으로 설명하는데, 십자가 피가 내 죄를 용서했다고 믿는다면 참새를 날게 하는 나는 것도 주께서 날게 하시는 겁니다. 해바라기 피는 것도 주께서 하신 거예요. 세월호 아이들 죽은 것도 주께서 하신 겁니다. 내가 오늘 숨 쉬는 것도 내 운동 때문이 아니라 주께서 그렇게 하신 거예요. 모든 게, 전체가 따로 떼지 마세요. 모든 돌아가는 것이 한 통속으로 주님은 변함이 없고 주의 약속은 변함이 없다. 이 말씀으로 요약됩니다.
요한복음 17장 2절에 나한테 세상 모든 권세를 주신 것은, 그들로 하여금 내가 구세주인 것을 믿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모든 적당한 배치였고, 적절한 그러한 자리 배치였고 활동이었다는 겁니다. 십자가 피만 달랑 믿지 말고 이제부터는 주머니에 용돈 떨어진 것도 주의 일이라고 믿으시고. 나는 그저 하나의 일부, 부분으로써 전체 돌아가는 하나님의 일임을 믿읍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새삼 관여할 필요가 없는 일을 관여하다 보니까 요것은 신앙적인 일이고 요것은 세속적인 일이고 우리가 구분했습니다. 내가 여기 있음 자체가 주님의 활동 자체임을 믿게 되는 그런 믿음이 있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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