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강-말라기 3장 1절 (하나님의 사자) 140803-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말라기 3장 1절입니다. 구약성경 1329페이지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예비할 것이요 또 너희의 구하는 바 주가 홀연히 그 전에 임하리니 곧 너희의 사모하는 바 언약의 사자가 임할 것이라”
방금 읽었던 이 문장을 이해하려면 그야말로 우리가 유대인 이상으로 구약 성경에 대해서 정통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사자, 천사죠. 천사가 오는데 어디에 오느냐, 주의 성전에 온다. 주의 성전에 오는데 그 역할이 뭐냐, 언약의 사자다. 이 세 가지예요. 주의 사자 온다. 천사가 온다. 노리고 오는데 어디를 노리느냐, 성전에 임한다. 성전이 무엇이기에 임하느냐, 성전은 하나님의 이름이 계신 곳이다. 하나님이 계시는 곳과 하나님의 이름이 계시는 곳과 어떻게 차이가 나느냐. 하나님이 계시는 곳은 하늘나라고 하나님의 이름이 계시는 곳은 인간의 이름들과 섞여서 동행하기 위해서 지정된 지점에 오는데, 그 지정된 지점이 바로 성전이 있는 곳이에요.
그러면 성전은 만들면 되지 않느냐, 성전은 만드는 것이 아니고 성전은 거기서 같은 하나님의 일이 반복돼서 일어나는 곳이 성전입니다. 뭐가 반복되느냐, 죽음 사건, 그것을 제사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은 제사드림으로써 하나님과 동행함을 외부에 전달했던 민족이에요. 제사가 뭐냐, 제사는 죽음을 반복하는 겁니다. 세상일을 우리가 긍정적으로 본다면 우리가 죽음을 이야기 하지 않아야 되는데 하나님께서는 살인 사건을 인간 속에 집어넣어 놓고 하나님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스스로를 설명해요. 살인 사건을, 죽음 사건을.
대표적인 것이 이번 수련회 할 겁니다만, 바로 출애굽 할 때, 어린 양의 피를 발라라. 피라는 것은 인체의 내부에 흐르게 되어 있거든요. 바깥에 안 나오게 되어 있다 이 말이죠. 그런데 노선이, 내부 노선으로 가다가 피부가 찢어져 가지고 이게 바깥에 흘러 버리면, 이스라엘에선, 레위기 17장 같은데서 이게 뭐냐 하면, 사람 속에 들어와야 할 생명이 바깥으로 쏟아졌으니까 그걸 죽음이라고 본 겁니다. 그게 왜 중요하냐 하면은 제사 드릴 때, 양이나 소를 그냥 잡는 것이 아니고 그 내부를 잘라 버립니다. 자르면 거기서 반드시 뭐가 쏟아지게 되어 있느냐 하면, 피가 쏟아지게 되어 있거든요. 그 피와 나머지기 부분이 구분되고 그 쏟아진 피를 가지고 제단에 뿌림으로서 제단이 하나님이 거주할 만한 가치가 계속 유효한 장소가 되는 겁니다.
이것을 단출하게 말씀드려서 하나님은 죽음을 집어넣어서 세상을 다시 한 번 해석하신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제사 드리면 되겠네요? 그 제사가, 제사이지만 그 의미가 나중에 점점 더 확장이 되게 되면 평소에 하는 일상적인 생활까지 제사가 전부다 확산이 되어 버려요. 아침 설교가 어렵다 하니까 아침에 한 것을 잠깐 한 번 해보겠습니다. 떡을 줬으니까 “주님, 고맙습니다.” 하고 먹었습니다. 먹은 사람이 “떡 주세요.” 하고 오니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너가 떡을 먹고 나를 따라오는구나. 그러면 가거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러면 사람들이 “우리는 떡이 있어야 삽니다.” 이렇게 하니까 주님께서 “진짜 사는 것은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셔야 산다.”는 겁니다. 사람들은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하고 나온 거예요.
우리도 그렇습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까? 이런 내용입니다. “너희들이 떡을 주니까 야! 떡만 있으면 행복해!” 라는 것을 죄로 만들어서 그것을 포장을 해가지고 예수님이 자기에게 적용시켜 버리면 예수님에게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예수님의 살이 찢어지고 피가 쏟아지게 되어 있어요. 죄까지 포함해서 그것을 살과 피로 만들어서 니 죄를 먹는데, 그냥 먹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언약의 완성 속에 들어 있는 죄기 때문에, 그것을 먹는 날에는 니가 더 이상 죽음 생활하지 않고, 해체되지 않고 영생을 얻는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모든 근거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의 , 생명 된 자가 죽었다는 그 죽음에 근거했기 때문에 사흘 만에 부활한, 부활의 능력이 먹는 자에게 그대로 임하는 거예요. 그 원리입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그들에게 오병이어 베풀고 그들이 따라와서 “떡 주세요.” 하는 그것도 무의미한 것이 아니고 그러한 인간의 본색도 다 필요한 거예요. 예수님의 죽으심에 다 필요한 거예요. 예수님에게 일어난 살인 사건에 다 필요한 피의자가 되는 겁니다. 가해자가 되는 겁니다. 예수님에게 계속 가해자가 되는 겁니다. 제가 아침에 실패하시고 절망하시라는 말은 뭐냐 하면, 우리도 예수님 당시의 인간의 수준에서 벗어나지를 못해요. 눈만 뜨면 뭐 먹고 사느냐? 이거거든요. 뭐 먹고 사느냐? 생각을 하세요. 그렇게 하시고 십자가는 믿으시고. 그렇게 하시고 십자가는 여기 두세요. 그래야 짝이 맞아요. 이게. 그래야 짝이 맞는다고요.
여러분, 한쪽 양말에 구멍이 나게 되면 한쪽만 버립니까? 아니면 멀쩡한 한쪽 양말과 같이 버립니까? 같이 버리거든요. 마찬가지로 우리의 죄와 주님의 구원은 이게 단짝이 되어 가지고 우리가 구원받았으면 죄인이고요. 우리가 잘난 체 하게 되면 주님을 안 믿는 것이 돼요. 그렇게 엮이게 되어 있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우리는 우리의 실패와 절망이 어느 수준이 되어야 하느냐 하면 그것을 즐기는 수준이 되어야 합니다. 오히려 자신이 돈만 챙기고 밥만 알고 그러한 못난 존재라는 것을 주님 앞에 쏟아내면서 내가 구원된 자 맞구나! 하는 즐거움을 느껴야 돼요. 세상에 누가 알겠습니까? 내가 밥 먹고 돈 번다고 이것을 죄인이라고 스스로 규정하는 자가, 이 세상에 나와 보라고 해요. 누가 그렇게 자기를 죄인으로 규정하겠어요? 십자가 앞에 있는 자만이 그게 가능한 거예요. 이게 이스라엘이니까 가능하고, 제사 앞에 있으니까 가능하고, 주께서 주신 살인 사건 앞에서만 가능한 거예요.
살인으로 모든 것을 읽고 해석하겠다는 하나님의 의지.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에게만 주어졌고 이방나라에게는 주어지지 않았던 겁니다. 그래서 말라기가 오늘날 우리에게 의미가 있는 겁니다. 지금 말라기 설명 하는데 다른 분들 어디에 가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성경 하나하나가 이게 비현실이 아니에요. 다 지금 우리 현실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토를 단다면 일상생활 자체가, 우리가 죄 짓는 마당에, 그 죄 짓는 마당이라는 말은, 일상생활 자체가 우리가 매일같이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있는 현장이라고 보시면 되는 겁니다. 그것을 성만찬이라고 물체화 시켜 버리니까 이게 미신이 된 거예요. 교회에서 일 년에 두 번씩 하는 거 있잖아요? 천주교에서는 자주하고 교회에서는 일 년에 두 번 하는 것. 이거 가운 입고 와서 이렇게 하는, 사찰집사는 못하고 라이선스 있는 목사만 해가지고 떡 나눠 주고 하는데 이걸 먹으세요. 입 벌리고. 교황 오면 또 할 거예요. 교황제도 천주교 자체가 물체화입니다. 이건 미신이에요.
미신이라는 말은 다른 말로 하면 기계라는 뜻이에요. 반복하면 동일한 효과가 나올 것 같은 기계. 반복되는 기계. 그것마저 죄가 됨을 아는 사람이 성도입니다. 그것마저. 물론 우리 예배가 전부다 기계적인 요소죠. 10시 30분에 와서 11시 예배. 이것도 기계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거기에 구애받을 필요가 없다 이 말이죠. 십일조를 내라고 한다고 해서 십분의 일 내는 것은 그건 기계입니다. 그건 트랜스포머도 할 수 있어요. 그런 기계도 할 수 있어요. 자동이체 할 수도 있는 문제입니다. 자동이체는 기계에 필요하잖아요. 전부다 기계잖아요. 한의학 기계입니다. 누적된 치료법을 외우는 그냥 기계예요. 한의사라는 것이 어디 아플 땐 어디 써먹고 그것을 달달 외우는, 기계에 불과한 거죠. 생명이 아닙니다. 해체를 지연시키는 역할 밖에는 못해요.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 내용이 뭐냐 하면은, 하나님의 사자가 성전에 임하여 온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온다니까 뭐, 하늘에서 선물 보따리라도 올 줄 알지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오실 때, 죽음 사건을 유발시킵니다. 미국 버지니아에서, 한국 지방 신문에서 제 광고를 보내 달라고 해서, 글을 실어달라고 해서 세 가지 글을 제가 보낸 드렸어요. 그 중의 보낸 글이 하나 뭐냐 하면 <독생자의 영광> 이라는 글을 보내 주었습니다. 글 내용이 뭐냐 하면, 보통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해서 추상적인, 허연 수염 난 어르신들 생각하는데 실제로 하나님 영광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상상하는 그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고 독생자의 영광이라는 그걸 강조해서 글을 쓴 겁니다. 누추하고 초라하고. 하지만 그게 우리 현실 속에 있거든요. 이미 현실 속에 사람이 되어서 들어 왔잖아요.
왜, 사람은 들어 온 현실은 안 보고 아주 상상의 나래를 펴가지고 점잖은 분이 계시다 이렇게 생각합니까? 실제로 우리 앞에 등장한 진짜 주님은 얼마나 수난과 고난과 모멸과 미움 받은 것은 생각 안 하고, 그걸 비켜서 다른 걸로 상상을 하는 겁니다. 그걸 숭고의 미라고 하는 데, 칸트의 철학에 보면 나와요. 숭고의 미, 인간의 도덕보다 초월적인 도덕은 숭고. 아! 멋있다! 는 것. 미학적인 미. 그걸 예수를 최고로 쳐주거든요. 도덕적인 것 보다 예수를 더 쳐준다 이 말이죠. 하지만 주님은 그 반대편에 있어요. 대척적인 점이라고 하는데. 정반대편에 초라하게 쭈그리고 있다 말이죠. 우리가 기피하고 우리가 그렇게 될까봐 겁나는 저주스러운 자리를 주께서는 점유하고 계시는 겁니다.
주님의 사자가 왔을 때는 반드시 거기에 살인 사건, 심판 사건을 유발시킵니다. 이제 그 증거를 두 가지만 들고 마치겠습니다. 한 가지는 창세기 18장에 보면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의 천사가 찾아옵니다. 항상 우리가 천사가 찾아온다고 하면 천사는 예쁘다. 참하다. 곱다. 그래서 천사가 찾아올 때는 항상 우리에게 행운을 준다. 자꾸 이렇게 생각하는데 마리아가 어디 임신하고 싶어서 환장 했습니까? 마리아에게 천사가 왔을 때는 마리아는요, 당황하고 난처해했어요. 보통 천사가 찾아 올 때는 뭔가 사람이 묘하게 찾아오긴 하는데, 막상 진짜 천사가 올 때는 예수님 사건을 그 안에서 유발시키기 위해서 왔기 때문에 난처해요. 아브라함에게 천사가 와서 하는 말이 “소돔과 고모라에 누가 가 있느냐?” “예. 조카가 가 있습니다.” “조카 죽었다. 왜? 소돔과 고모라가 죄를 많이 지어서 하나님께서 멸망시키려고 왔다.” 천사가 아브라함에게 소개하는 것이 절망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조카가, 소돔 고모라에 거기 부동산 값 올랐거든요. 분당인지 모르겠어. 하여튼 모든 사람이 소돔 고모라 가면 땅 부자 된다는 소문 듣고 자기가 선택을 거길 했어요.
그 전에 무슨 이야기가 있느냐 하면 조카하고 삼촌 되는 아브라함이 조카 불러다가 “야, 재산도 많고 가축도 많은데 니 어느 땅 갈래? 한 번 봐라.” 하니까 소돔과 고모라가 얼마나 좋은 땅인지 성경에 보니까 에덴동산 같다고. 에덴동산 같으면 부동산 값이 얼마나 높겠습니까? 그러니까 에덴동산을 선택했는데 자기만 좋아할 것 같으면 괜찮지요. 그런데 좋다는 소문은요, 자기뿐만 아니고 모든 힘 있는 종족들이 다 노리고 달려드니까 그 좋은 요지 땅이 전쟁터가 된 겁니다. 니 땅이다. 내 땅이다. 오늘 되면 네 땅. 내일 되면 내 땅. 그래서 좋다는 것은 그만큼 노리는 사람이 많다는 뜻입니다. “그래, 니 좌하면 나 우하고 니 우하면 나 좌할게.” 이렇게 해서 갈라섰거든요. 분가한 거예요. 분가한 동네가 얼마나 경쟁을 했다는 말은 그만큼 죄를 많이 지어야만 했다는 겁니다.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은, 오래 살았다는 것은 그만큼 죄를 많이 지었다는 말이에요. 왜냐하면 내가 존재하기 위해서 남을 밀쳐야 하기 때문에 이건 할 수 없어요. 공급은 적고 수요가 많을 때는 경쟁이라는 것이 있을 수밖에 없는 겁니다. 취직자리는 비좁은데 20대는 많고. 그러니까 자연적으로 미워하지 않을 수밖에 없고 질투하지 않을 수밖에 없는 겁니다. 속으로 미워하는 것은 살인죄잖아요. 결국 이 세상은 안 건드려서 그렇지 건드리기만 하면 살인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거예요. 자기 살인을 외부에 터트리면 그게 살인행위가 되는 겁니다. 요새 딸 가진 엄마가 얼마나 걱정스럽습니까? 밤늦게 택시 타면 택시 위험해가지고 친구 집에 자고 새벽에 버스타고 오라고 했더니만 버스정류소에서 20대가 지맘대로 칼 휘둘러서 울산에서 여대생 하나 죽었잖아요. 새벽에 버스타려고 기다리다가. 버스타도 위험해? 택시타도 위험해? 그럼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바로 그런 범죄가 그냥 날아가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고 그것이 소돔과 고모라화 되는, 이 세상이 심판받아 합당한 것을 증명해 줄 요소들이 무럭무럭 거기서 숙성되고 있었던 겁니다. 이 땅은 하나의 성주의 비닐하우스처럼 하나의 비닐하우스에요. 죄를 더욱더 숙성시켜서 나중에 주님께 심판받을 때 변명치 못하게 하는 그러한 세상 속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이 세상이 지옥입니다. 오직 했으면 사도 바울이 떠나고 싶어 했겠습니까? “나 떠나야 해. 너희들 때문에 나 못 떠나고 있어. 나 떠나야 해.” 자꾸만 떠나야 된다는 겁니다. 여러분 입에서 복음 나올 때가 언제냐 하면 본인이 이 땅을 떠나고 싶을 때는 복음이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천사가 와서 한다고 하니까 걱정 될 수밖에 없죠. 아브라함이 바짝 마음이 급했습니다. 기도를 해대는데 “하나님이여, 죄 있는 곳에 심판한다는 것에 저 동의합니다. 그런데 만약에 그렇게 심판해버리면 억울한 의인이 마치 죄인처럼 취급받아서 심판받는 불합리가 성립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하나님이여, 소돔과 고모라에 의인 있거들랑은 심판을 보류하거나 취소해 주시기 바랍니다.” 라고 기도했어요.
아브라함의 기도가 바로 찾아 온 천사에게 합당한 기도입니다. 왜냐하면 천사는 조지려고 오고 아브라함은 버티려고 오는 거예요. 그 소돔과 고모라가 인구가 너무 많으니까 아브라함이 최소한도로 줄였습니다. 만약에 “저, 하나님이여! 한 이천 명 의인 되거든 멸망하지 마옵소서.” 라고 하다가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이천 명 될 턱이 없거든요. 자기가 생각해도. 그래서 최소한으로 줄인 것이 뭐냐 기껏 오십 명입니다. 오십 명. “오십 명만 있어도 그 쓰레기 같은 수 만 명 죽어도 내가 보기에는 오십 명이 아까우니까, 하나님도 아까울 거니까 오십 명 위해서 심판 보류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 말은 아브라함이 평소에 기도했던 자기 조카 롯이 염연히 살아 있다는 것을 감안한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오십 명 없다.” 했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드디어 흥정에 들어갑니다. 45명. 줄었습니다. 보세요. 주고받고 하는 기도, 이게 진짜 기도 아닙니까?
참된 기도는 뭔가 당황스러울 때, 절망적일 때, 하지 말래도 할 수밖에 없어요. “사십 다섯 명.” “없다.” 그러면 십 단위로 디스카운트 됩니다. “사십 명.” “없다.” “삼십 명.” “없다.” “스물 명.” “없다.” 스물 명 다음에 십 단위로 끊어 버리면 “하나님이여 아무도 없으니까 심판하지 마옵소서.” 이건 말이 안 되거든요. 그래서 더 이상 기도는, “아하 심판은 기정사실이구나” 그러면 이 심판에 대한 하나님의 의인 되는 그 문제, 그것은 아브라함이 그냥 하나님께 맡기는 거예요. 그러면 아브라함 기도 왜 한 거예요? 결국 아브라함이 기도해서 얻어낸 것 전혀 없습니다. 왜 한 겁니까? 심판은 기정사실인데, 심판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살려낼 자를 살려낸다는 하나님의 언약 지속성은 아마 내식이 아니고 다른 식으로 보장 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드디어 심판은 감행되었는데, 그것을 조카 롯이 알 턱이 없습니다. 그냥 일상생활 했습니다.
그런데 난데없이 하나님의 심판의 사자가 찾아 와요. 그야말로 천사가 찾아 왔어요. 이거는 자기 눈에만 보통 사람이 아니고, 기계가 아니고, 이건 보통 사람이 아닌데,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그냥 보통사람이었어요. 여기서 형식이 갖는 장애 요소를 우리가 주의해야 합니다. 특정이 잘 생겼다고 해서 천사 쪽이라고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특히 목사가 잘 생겼다, 선량하다서울대학 나왔다, 노래 잘한다, 작곡도 좀 했다, 대상 받았다, 이거 주의해야 됩니다. 전임자가 서울대학 나온 목사가 있다면 연고대 나온 후임자를 한다면 교인 스스로가 자괴감을 느낍니다. 그런데 전임자가 서울대인데 후임자가 MIT나 하버드 대학 나왔다 면은 본의 아니게 다시 한 번 발전했다는 것을 느낄 거예요. 누나가 공부 전교에서 5등 하는데 동생은 끝에서 5등 하더라 이러면 참 실망스러운데 누나가 전교에서 5등인데 동생은 3등이다 하면 부모는 애 키우는 보람을 느낍니다.
그래서 어떤 형식이 있다는 것, 천사가 잘 생겼다, 예쁘다, 뭐 그런 것 있는데, 롯은 뭔가 징조가 불길한 징조를 했죠. 그래서 그 나그네를 대접을 했습니다. 아시다시피 주변 사람들이 보기엔 천사들이 너무 잘 생긴 거예요. 너무 잘 생겨서 마치 나를 향해서 팔로우미 할 정도로. 아주 잘생겼다 해서 그 사람들이 팔로우미해서 따라 가가지고 그 사람과 동성애를 하기 위해서, 여자들하고 하면 재미가 없고 더 자극적인 것, 남자 대 남자로 성관계를 하기 위해서 요청을 했죠. 그러니까 롯이 보세요. 그걸 방비하기 위해서 자기 두 딸을, 이 사람을 범하지 말고 결혼하지 않은 내 두 딸이 있으니까 너희들이 대신 겁탈하고 이 사람은 살려 주라고 했습니다.
자, 여러분한테 물어 보겠습니다. 천사가 초월적인 믿음입니까? 롯이 초월적인 믿음입니까? 과연 인간으로서 가당치도 않는 행동이 나왔어요. 그게 바로 아브라함의 기도의 효과입니다.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 알아서 택해 주십시오.” 구원 문제를 하나님께 일임했더니만 천사와 더불어서 천사를 알아먹는 그야말로 보통 인간 맞는데 보통 인간이 아닌, 다른 요소가 그 롯의 내부에서 나오면서 심판이 제대로 된 심판, 진짜 의인한테는 손도 대지 않는 제대로 된 언약적 심판임을 증거 하는 증거로 주께서 사용하시는 겁니다. 그것이 고정적으로 이루어지는 곳이 하나님의 성전이에요. 흠 없는 제물이 살인 사건에 말려들기는 들었지만, 흠 없는 제물이 희생하므로 말미암아 심판 속에서도 구원이 피어나게 하는 근거를 희생제물이 도입해서 그렇게 따로 만드신 겁니다. “심판이다.” “어머나! 겁나라!” “하지만 심판 안에 가만히 봐라. 희생이 보일 것이다.” “보이네요.” “구원이다.”
여러분, 구원 어떻게 받습니까? 하나님께서 희생하는 십자가에서 구원받습니다. 십자가가 뭡니까? 바로 희생될 필요가 없는 분이 희생된 거예요. 그 희생을 찾아서 천사는 이야기 하고 그리고 이 세상의 모든 현실도 예수님의 희생에 의해서 진행된다는 것을 바로 이스라엘은 알고 말라기는 알고 다른 민족들은 이것은 생각지도 못한 거예요. 나중에 십자가 성령 받고 난 뒤에는 알게 된 겁니다. 그렇게 해서 롯 자체가 무엇을 품고 있느냐 하면, 이동하는 구원의 증표가 돼요. 이제는 살아 난 것이 “아휴, 큰일 날 뻔 했구나!” 이게 아니고 살아나되 조건이 있어요. 심판을 주께서 이런대로 심판했음을 갖고 살아나게 되면 하나님의 천사를 보낸 그 취지는 이제는 하나의 인물, 실체가 있는, 형체가 있는, 육체를 가진 인물로 그게 전환되면서 언약은 또 인간 중심으로 흘러가게 되어 있습니다.
천사와 하나님의 이름의 만남, 천사는 하나님의 이름을 겨냥해서 성전에 오신다. 하지만 거기서 작업을 하고 나온 결과는 어떤 구원받은 의인의 등장. 그래서 장차 하나님은 사람의 모습으로, 사람으로 오시는 거예요. 그러면 마지막으로 목사님 살길이 뭡니까? 하나님의 의만 있으면 심판이 천 번 만 번 일어나도 지옥가도 하나님의 의만 있으면 살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의가 어딨습니까?
로마서 1장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으니. 곧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누구 말입니까? 예수님을 믿음으로 산다. 이런 복음, 기쁜 소식 하나 위해서 모든 세상의 바닥 전부다 뭔가 인간중심, 기계중심으로, 죄 중심으로, 그냥 자기 욕심중심으로 펼쳐놓은 거예요. 콘 하나, 더워서 아이스크림 하나 빨아 먹을 때 기분 좋죠. 문제는 그게 녹는다는 겁니다. 녹으면 어떻게 되는지 아시죠? 막대 아이스크림 잡고 있다가 잠깐 다른 데 보다가 보면 온 손에 줄줄 흘러 내리잖아요. 아이스크림이 녹아서.
그처럼 이 세상에는 아벨의 살인 사건, 창세기 4장이 흘러 내려서 온 천지가 죄악으로 뒤범벅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 원인을 찾아보니까 하나님 스스로 희생하셔서, 죄를 대신 희생하셔서 죽어야 될 자리에 그 영생의 자리를 따로 마련해주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아주 집요한 언약적 성취가 있었습니다. 이제는 그것이 우리 몸으로 들어와서 우리 자신이 살아가는 모든 것이 롯처럼 그렇게 세상의 심판성을 말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변화도록 천사가 이제 우리를 도와주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내력이 그러했습니다. 하나님의 시나리오가 그러했습니다. 우리는 내 살 궁리만 했는데, 그냥 기계처럼 사는 식으로 살아 왔는데 우리한테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따로 일을 벌이시는 주님. 이제는 말라기가 예언했던 그 주님이 이미 우리 곁에 와 계심을, 그리고 십자가 피 흘렸음을, 그 고정성과 확정성을 우리 속에도 작용하는 성도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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