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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라기9강-경건한 자손(말2:15-16)140720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4. 7. 20. 20:36
2014-07-20 14:57:20 조회 : 14         
   경건한 자손 140720 이름 : 이근호   
 
경건한 자손(말라기 2: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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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14-07-20 16:04 
경건한 자손

   
2014년 7월 20일                            본문 말씀: 말라기 2:15-16

(2:15) 여호와는 영이 유여하실지라도 오직 하나를 짓지 아니하셨느냐 어찌하여 하나만 지으셨느냐 이는 경건한 자손을 얻고자 하심이니라 그러므로 네 심령을 삼가 지켜 어려서 취한 아내에게 궤사를 행치 말지니라

(2:16)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이르노니 나는 이혼하는 것과 학대로 옷을 가리우는 자를 미워하노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러므로 너희 심령을 삼가 지켜 궤사를 행치 말지니라

하나님은 인간을 의식하고 인간이 행동하는 것을 감안하시면서 활동하십니다. 결코 칭찬하기 위함이 아니라 지적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 앞장 세우는 언약이 이런 성질을 띠고 있습니다. 인간의 생각과 움직임에 연동되면서 언약이 실시됩니다. 특히 레위 언약의 제사 행위가 그 중심이 됩니다.

제사 행위란 죽음, 그것도 죄에 대한 대가로서의 죽음입니다. 죄를 지었으면 죽어야 한다는 원칙을 양보없이 실시하시는 것이 제사 언약이 담아내는 뜻입니다. 죄를 담아서 죽음으로 내놓으시는 겁니다. 따라서 희생양의 입장이란 인간의 죄의 짙음을 온몸으로 빨아들이는 겁니다.

그리고 엄청난 죽음의 힘을 뿜어내어줍니다. 어느 누구도 죄 짓고서는 하나님 앞에서 버틸 위인은 없다는 겁니다. 인간들 사회에서 소위 ‘존경 받음’이 피어납니다. 하지만 그 존경받는 자에게도 차등없이 율법을 들이대면 각종 죄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경악스러운 형벌의 대상자가 됩니다. 

존경스러움이 차이로 인하여 신에게 협조가 가능한 인간이 정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일체 인간의 협조가 필요치 않습니다. 단지 인간들을 향하여 율법적으로 계속 추궁해 들어갈 뿐입니다. 제사라는 핵심 요소를 시발점으로 해서 이 제사 정신은 이스라엘의 일상 생활 전반까지 확대가 됩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활동도 인간들이 시도하는 일들을 고려하면서 진행됩니다. 예를 들면, 인간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대단한 융통성과 활용도가 높다고 생각합니다. 즉 인간들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일이나, 능치 못할 일까지 하나님이니까 제대로 해낼 능력을 소지했다고 믿고 그 능력을 뽑아내어 보려고 온갖 아양과 아부를 다 떱니다.

인간들이 보기에 하나님께서 많은 여유로움이 둘러싸여 존재할 것 같지만 하나님께서는 오직 하나의 일에 집중하시고 집약적으로 일을 마감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경건한 자손’의 생산입니다. 비록 하나님께서는 유여, 즉 여유가 있어보이지만 최종적 하나된 목적은 포기하시지 않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집중성은 평소에 인간들이 나름대로 어떤 일에 집중하느냐와 대결하기 위함입니다. 인간들은 하나님의 여유 있으심을 끌어와서 자신의 소원을 해결하려고 합니다. 한 예를 들면, 누가복음 17:15-18에 보면, “그 중에 하나가 자기의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 아래 엎드리어 사례하니 저는 사마리아인이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문둥병자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하소연해서 정작 얻을 것을 얻으면 그것으로 신앙적으로 성공이라고 본 겁니다.

하지만 누구복음 17:5-6에 보면, “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니
주께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우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제자들은 소위 믿음이라는 가져서 그것으로 그 어떤 능력을 갖게 하려는 카드처럼 사용하고 싶어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제자들의 의도를 감안하시면서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기 위한 말씀을 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뽕나무’입니다. 즉 참으로 믿음이 있다면 뽕나무에게 자진해서 명령했으면 뽕나무는 순종할 것이라는 겁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신앙이라는 것을 ‘순종’으로 바꾸시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문둥병자들이 예수님의 능력을 이용할 생각하지 말고 자신의 몸 자체가 예수님을 증명하기 위해 순종되어야 될 몸인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돌아왔던 그 문둥병자가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활동의 풍성함은 오직 참된 경건한 한 사람의 자손을 위함입니다.

이스라엘은 이 경건한 자손을 이을 가정 환경을 율법적으로 요구받게 됩니다. 어릴 때부터 아내된 자는 그냥 아내가 아내가 아니라 ‘경건한 자손’을 위한 아내입니다. 그런데 이런 아내를 남된 자가 망챠쳐버리게 되면 이는 하나님께서 의도한 레위언약의 취지에 부합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남편을 향하여 율법적으로 지적하시는 겁니다.

남편됨이란 그저 자기를 위한 아내를 두는 것이 아니라 율법적인 취지를 살리는 혼인생활을 해야 한다는 겁니다. 남편은 아내를 위한 사랑으로, 의로움을 덮어주는 옷과 같은 기능으로 작용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께서 기대한 경건한 자손이 이스라엘을 통해서 이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신약시대에 오게 되면 이 부족한 남편의 자리에 제대로 된 남편이 등장합니다. 그래야지만 레위 언약은 완성이 됩니다. 갈라디아서 4:28-31에 보면,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계집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 계집종의 아들이 자유하는 여자의 아들로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계집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하는 여자의 자녀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기존의 모든 남편들은 레위 언약에 입각해서 합당한 남편일 수가 없는데 그 이유는 모든 인간은 율법 아래서 저주받을 만한 존재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저주의 자리에 예수님께서 솟아올라옵니다. 율법을 완성하고 올라오십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님만이 참된 남편이십니다. 이점을 근거로 해서 두 종류의 아내상이 굳어집니다. 하나는 사라형이요 다른 하나는 하갈형입니다. 아브라함에 두 아내가 이런 메시아적인 취지를 위하여 존재했던 것입니다.

사라형을 율법을 경유하되 그 율법의 저주로부터 자유함을 얻은 아내며 그로 인한 자식이야말로 하나님이 얻고자 한 그 경건한 자손들입니다. 반면에 하갈형의 자식은 율법이 주는 저주를 고스란이 받게 됩니다. 이로 인하여 경건한 자손의 생산은 이 레위 언약을 친히 완수하실 새언약의 메시아 뿐이십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언약에 준해서 우리의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9강-말라기 2장 15절-16절(경건한 자손)140720-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말라기 2장 15절에서 16절입니다. 구약성경 1329페이지입니다.

“여호와는 영이 유여(有餘)하실지라도 오직 하나를 짓지 아니하셨느냐 어찌하여 하나만 지으셨느냐 이는 경건한 자손을 얻고자 하심이니라 그러므로 네 심령을 삼가 지켜 어려서 취한 아내에게 궤사를 행치 말지니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이르노니 나는 이혼하는 것과 학대로 옷을 가리우는 자를 미워하노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러므로 너희 심령을 삼가 지켜 궤사를 행치 말지니라”15.  And did not he make one? Yet had he the residue of the spirit. And wherefore one? That he might seek a godly seed. Therefore take heed to your spirit, and let none deal treacherously against the wife of his youth.

여호와의 영이 유여하실지라도, 유여라는 말은 한자말인데요. 우리말이 아니고. 여유가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여유가 있다는 말은 무엇을 겨냥해서 하는 말이냐 하면, 우리 인간들은 처음부터 몸이 하나밖에 없기 때문에, 하나밖에 없는 나만을 위해서 하는 행동들은 결국 나 하나를 겨냥해서 되돌아오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하나님에게는 여유가 많다, 하나가 아니고 여유가 많거든요. 여유가 많은 그것을 오직 하나님의 뜻, 경건, 그 자신을 위해서 모든 것이 움직이고 있다는 겁니다.

성경에서 이렇게 해석이 어려운 이유가 이런 것이 있어요. 하나님의 뜻을 그냥 펼치면 어렵지 않은데 하나님의 뜻은 항상 무엇을 의식하느냐 하면 우리들이 우리밖에 모르는 이 세상의 형편을 고려해서, 감안해서, 같이 동반해서 이야기를 해줘요. 인간들이 이렇게 움직이면 주님도 이렇게 움직이고, 인간들이 이렇게 움직이면 주님도 저렇게 움직여서 항상 인간 자체에서 문제가 있다는 것을 지적하는 쪽으로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겁니다. “이만하면 제가 신앙입니다.” 라고 한다면 “왜 그게 신앙이 아닌가를 비로소 이야기 해줄게.” 라고 거기에 반응을 보이면서 다른 가능성을 자꾸 열어주는 거예요. 다른 가능성을.

우리는 우리만 만족하면 그만인데, 주님께서는 다른 가능성을 열어 주거든요. “아하, 그런 뜻이 있었습니까? 아, 그런 경우도 있었네.” 이게 뭐냐 하면, 여유 있음, 또는 유여하심 그런 겁니다. 이 하나님의 여유 있다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모든 것을 다 알고 모든 것을 다 가지려고 애를 써봤자 이것은 엄청나고 무한한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모든 것을 모른다는 것은 결국 뭐냐 하면, 인간이 자기가 하는 것이 옳은 줄 알지만 사실은 인간이 미처 모르는 다른 경우, 다른 관계로 인하여 그것이 범죄로 부각이 되는 겁니다.

어떤 행동을 할 때, “나는 이런, 저런 A, B, C 행동을 고려해서 행동을 했으니까 정당합니다.” 할 때 “니는 왜 D, E, F 점을 고려를 왜 못 했냐?” “저는 인간이기 때문에 그것까지는 고려 못 했죠.” “그러니까 니가 문제가 있는 거다.” 그러니까. 하나님에 대해서 니가 기껏 아는 것이 요정도 밖에 모르기 때문에 나머지기 하나님의 일로 인해 비추어 볼 때 니는 문제성이 많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일을 내 소유화 시킨다든지, 내가 하나님을 부리려고 하는 생각은 하지 마세요. 그것은 하나님의 영은 여유가 있어요. 하나님이 어떻게 튈지를 몰라요. 항상 하나님은 인간을 대응해서 일하시기 때문에. 이만 하면 됐다고 하지만 그것이 또 하나의 교만으로 전락하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는 궁금한 것이 하나님의 여유 있는 그 많은 일이 중심이 뭡니까? 구심되는 핵심이 뭡니까? 라고 한다면 하나님 쪽에서 제시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입니다. 하나. 하나님이 여유가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초점은 오직 하나로 모아져 있다는 거죠. 그게 뭐냐, 제사입니다. 제사예요. 지금 계속해서 레위 언약을 이야기 합니다. 레위 언약은 제사법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제사 하나 잘 드리면 거기서 복을 받고 제사 하나 못 드리면 자동적으로 저주가 주어진다는 그 레위 언약, 하나님의 언약, 약속을 두고 이야기 하는 겁니다.

하나님께 축복과 저주는, 제가 이제 수십 번 이야기 했습니다만, 축복과 저주의 지점은 이미 하나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아침에도 이야기 했지만, 블랙박스 이야기 했지만, 블랙박스 있는 그곳이 성전이에요. 하나님의 성전은 언약궤라는 블랙박스가 있는 겁니다. 그 블랙박스에서 하나님과 유일하게 소통하고 통하는 겁니다. 그 블랙박스 있는 성전을 건물로 시작했지만 결국 그걸로 뭘 했느냐 하면 인격화 되는 겁니다. 건물은 해체되고 그 자리에 어떤 인물이 등장하는데 그것을 경건한 자손이라고 오늘 본문이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계획은 애초부터 아브라함을 택해서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는 자에게는 복을 받고 아브라함에게 저주하는 자에게는 저주가 온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아브라함과 사전에 의논한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선택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의사하고 의논하지 않는 겁니다. 인간과 함께 의논하지 않는다는 말은 인간과 함께 동업하지 않겠다, 협의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인간과 협의하지 않겠다는 것은, 일방적으로 일을 추진하시겠다는 것이거든요. 이 말은 인간이 어떤 짓을 해도 하나님의 일에 협조될 만한 일을 인간은 해내지를 못합니다. 협조될 일은 없습니다.

스데반 집사, 빌립 집사, 사도 바울의 모든 일, 사도들의 모든 일, 선지자들의 모든 일, 마치 우리 눈에 보기에는 엘리야, 엘리사가 주님 앞에 협조하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하나님 앞에 협조한 것처럼 그렇게 느껴집니까? 실제로 창세기를 제대로 본 사람 같으면 협조한 것이 아니고 방해했다는 것을 아실 겁니다. 우리는 지금 주의 일을 방해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의 모든 짐이 다 벗어집니다. 굉장히 역설적인 이야기예요. 뭘 해도 방해하기 때문에. 참, 신나지 않습니까? 지금 저 혼자 신나고 있습니까?

우리가 하는 짓이 하나님 앞에 협조가 되지 않고 뭘 해도 방해가 되는 짓이 되게 하므로 말미암아 주님의 그 중심 되는, 중심 되는 것을 새삼 우리가 다시 한 번 인식하고 바라보게 하는 그런 작용으로 우리에게 어떤 일들이 계속 일어나는 겁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언약 속에 있는 사람들만 가질 수 있는 경험이고 체험담입니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하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은 중심이 있다, 그 중심은 하나님의 제사 제도, 말라기 당시에는 제사장들입니다.

제사장들아! 제사 똑바로 지내라. 니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제사가 중요하니까. 너는 지금 겁나는, 겁날 수밖에 없는 엄청난 일을 하는 것이다. 만약에 어느 아낙네들이 마을에 하나밖에 없는 우물에서 물을 길을 때, 거기다가 어떤 사람이 독을 탄다면 그 아줌마는 아무 죄가 없죠. 그냥 그 물을 길어다가 집안 식구나 마을 사람들에게 줬을 뿐인데 그 마을 사람들이 독약 먹고 아프거나 죽거나 한다면 사람들은 그 아낙네한테 막 따질 거예요. 사실은 죄가 없죠. 문제는 거기에 독을 탄 범인이 중요하잖아요.

주님께서 이 땅에 어떤 우물을 준비했다는 말은, 그 우물에서 퍼 마셔라 라는 말이 아니라 그 우물 자체만이 경건하고 하나님의 인정하는 사람이라고 언급하시는 겁니다. 그 우물만이. 그러니까 우리 같으면 우물 있으면 물 퍼 마시기만 하면 됩니다. 사마리아 여인도 마찬가지고. 우물에서 물 마시기만 하면 되는데, 우물에서 물 마시는 행위가 바로 자기가 자기를 위한 행위일 뿐이고. 사마리아 여인이 남자 다섯 명 사귀고 여섯 번째 사귀는 모든 행위가 결국은 남자가 여섯 되고 일곱 되든 상관없이 전부다 자기를 위한 행위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 여인에게 예수님을 만나게 해서 이제는 예수님이 주시는 물을 퍼내는 일을 하게 하시는 거예요. 물론 그 다음에 여자가 여덟 번째 남자를 사귀었다는 이야기는 지금 선데이서울에 안 나왔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어쨌든 간에 여덟 명 사귀어도 괜찮고 아홉 명 사귀어도 괜찮아요. 중요한 것은 이제는 남자 사귀는 것 자체가 의미가 없고 이제는 어떤 남자를 만나든 상관이 없고 물을 퍼내는 거예요. 사기꾼을 만나서 결혼 할 뻔 했다가 검사한테 걸려가지고 다행스럽게 됐다는 그런 이야기도, 드라마 이야기입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어떤 일을 망하던 간에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을 얻는다는 그 하나님이 인정한 유일한 우물은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증거 하는 쪽으로 인생이 진행되는 거죠.

오늘 본문 하기 전에 이렇게 정리를 해주셔야 돼요. 다시 한 번 정리하면 하나님은 일을 많이 벌려도 핵심은 딱 하나로 고정되어 있다. 그것은 바로 제사 제도에 의해서 주어진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는 이야기, 예수님 관한 이야기, 메시야는 아주 나중에 나오니까. 어쨌든 제사에 관한 완성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그러면 그 이야기를 하면 되는데 여기 갑자기 경건한 자손을 얻고자 했다 이 말이죠. 이 말은 뭐냐 하면, 제사 제도가 그냥 성전 있고, 제사장 있고, 양 잡고 하는 그 시절이 끝나고 여기 완벽한 제사 언약을 구현해 줄 어떤 특정한 인물을,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동원해서라도 기어이 그 인물 하나를 이 땅에 배출하고 마는 그 작업을 하는 겁니다.

그럼 그 작업을 하는데 누굴 통해서 하느냐, 이스라엘의 유다 지파를 통해서 합니다. 그게 바로 유대라는 나라입니다. 유대라는 나라에서 경건한, 하나님의 구심점 여기는 그 인물 하나 끄집어내기 때문에, 그렇다면 그런 자손이 나타나는 것이 미래라면 그 미래에 나타나기 이전에 줄줄이 등장하는 인물들은 경건과 같은 노선을 유지하는 경건한 남편, 경건한 아내로서의 삶을 갖추어야 된다고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오늘 본문에 “이는 경건한 자손을 얻고자 하심이라 그러므로 네 심령을 삼가 지켜 어려서 취한 아내에게 궤사를 행치 말지니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이르노니 나는 이혼하는 것과 학대로 옷을 가리우는 자를 미워하노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여기서 “어려서 취한 아내에게 궤사를 행치 말지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것은 하나님께서 일관성이 있는데 이게 뭐냐 하면, 창세기 2장에 보면 여자라는 것이 먼저 있지 않고 원래 남자가 먼저 있고 남자의 배필자로 여자가 있는 겁니다.

그 말은 여자에게서 일어난 모든 일은 누가 책임져야 하느냐 하면 남자가 책임을 져야 된다는 거예요. 남자에게 맡겨진 일을 보다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배필자를 준비했기 때문에 남자는 자기 옆구리를 차고 들어 왔던 하나님의 손길, 여자를 통해서 자신이 맡은 하나님의 사명을 제대로 감당해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여자가 차고 들어 왔다는 것은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하나님이,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 준비된 하나의 보조 인력이라, 그렇게 받아 들여야 되겠죠. 그러면 남자가 여자에게 대할 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의 뜻을 구현하는 겁니다. 그 뜻 중의 하나가 어려서 취한 아내에게 거짓을 행치 말라는 거예요.

이 본문에서 어려운 것이 뭐냐 하면, 경건한 자손을 얻겠다는 것과 어려서 취한 아내에게 잘못을 저지른 것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 이 점만 풀리면 오늘 본문은 다 풀리는 거예요. 이것을 어떻게 풉니까? 어려서 취한 아내에게 잘 대해주게 되면 경건한 자손이 생긴다, 이걸 실척이라고 하죠. 실제로 그런 경우가 있는가를 수집하러 나서보게 되면 만만치 않습니다. 그런 증거가 별로 없어요. 뭐, 아버지가 목사고 아내가 사모인데 딸과 자식들도 훌륭하게 살더라, 그런 경우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거든요. 그리고 목사 가정이기 때문에 다른 가정보다 신앙생활을 잘한다고 이렇게 하려면 통계치를 내야 해요. 목사 아닌 가정에서 신앙생활 하는 자녀의 비율과 목사 가정에서 신앙생활 잘하는 자녀의 비율을 통계치를 낼 때, 목사 가정이 월등하게 많아야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통계는 낼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교회 다니는 것 하고 마음에 무슨 생각을 갖고 있느냐는 완전히 딴판이거든요. 그리고 목사가 경건한 목사라는 보장이 없고 사모가 경건한 사모라는 보장은 그거는 어디 기준해서 그런 기준을 낼 수 있습니까? 그래서 거기에 대한 해답은 성경에서 간단하게 이야기 되어 있습니다. 아무도 없다 이 말입니다. 이 말은 사람 안에 사람 없고 하나님 안에 하나님 없다 이 말이에요. 경건한 사람 속에 경건 없고 하나님 안에는 진정 그 참된 하나님이 없는 거예요. 왜냐하면 마지막 때는 모든 것을 싹쓸이하기 때문에 거기에 새로움이라는 것은 여기서 없는 겁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누가복음 17장 11절에서 19절 내용인데 뭐, 그냥 말로 할게요. 예수님께서 문둥병 열 명을 고쳐 주었습니다. 고쳐 줬는데 돌아온 사람은, 딱 한 사람은 왔어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17절에 보면,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아홉은 어디 있느냐 하는 거예요. 왜 이런 말씀을 하시느냐 하면은요, 이 대목이 상당히 어려운 대목인데 어떤 점에서 어려운가 하면 ‘믿습니다’ 하는 그것을 부정해 버리고 주님께서는 믿음을 무엇으로 바꾸느냐 하면 17장에서 ‘순종’으로 바꿉니다. 5절에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니까, 제자들이 먼저 요청했어요. 6절에 “주께서 가라사대 겨자씨 한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우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우리에게 믿음을 달라는 것은, 모든 인간들은 자기로부터 나와서 자기에게 소유화 시키려는 거예요. 하지만 뽕나무 뽑혀서 하는 것은, 이 믿음은 인간에게 소속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 속한 문제입니다. 예수님께 속한 문제에서 예수님은 믿음이 있기 때문에, 예수님이 하는 “어이 뽕나무! 뽑혀서 바다에 빠져.” 그 뽕나무는 바다에 빠져서 순종하는 거예요. 이게 어떤 경우에만 믿어지느냐 하면 이런 경우에는 믿어져요. “주여! 저를 뽕나무로 사용해서 바다에 빠지라고 해도 순종하겠나이다.” 하는 제자들에게만 예수님이 원하시는 믿음과 동일한 믿음이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문둥병 걸렸다면 문둥병 걸리고 낫고 하는 이 과정이 내가 문둥병 걸렸다고 하는 것도 아니고 내가 문둥병 나았다고 하는 경우도 아니에요. 왜냐하면 이것은 ‘내가’ 라는 것이 들어가니까. “내가 걸렸다.” “내가 나았다.” 그것을 다른 차원으로 바꾸어야 되는데 뭐냐 하면, “주께서 문둥병 걸리게 하셨다.” “주께서 문둥병 낫게 하셨다.” 하는 그 사태에 내가 순종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그것을 순종한 사람은 단 한 사람밖에 없었어요. 나머지기 아홉 명은 얼씨구나! 하고 “아! 주님 덕분에 병 나았네.” 하고 도로 본인의 세계로 되돌아가고 말았어요. 주님께서는 본인의 세계가 있는 한, 믿음이라든지, 믿음을 더하소서 라는 말은 헛짓이 되고 헛말이 되는 겁니다.

자, 그렇게 해놓고 오늘 본문 돌아와 봅시다. 어려운데요, 이게 아마 굉장히 어려웠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16절에 보면 설명이 나와 있습니다. 어려서 취한 아내에게 궤사를 행하지 말라는 뜻이 무슨 뜻인지 16절에 보면 아주 쉽게 되어 있어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이르노니 나는 이혼하는 것과 학대로 옷을 가리우는 자를 미워하노라” 옷을 가리우는 자를 미워한다, 이게 무슨 뜻이냐 이 말이죠. 아주 쉽다고 했는데...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이런 겁니다. 남편이 코트를 살 때, 자기만 입기 위한 코트를 사게 되면 이것은 아내한테 거짓을 행하는 겁니다. 코트를 살 때, XL를 사는 거예요. 코트가 푸짐하겠죠. 그 푸짐한 코트를 살 때, 옆에 사람이 “아저씨는 왜 이렇게 코트를 큰 것을 삽니까?” 이렇게 하면 이 코트는 나만 입는 것이 아니고 바로 사랑하는 아내를 내 코트에 같이 품어서 이것을 옷으로 가려줌으로써 우리는 한 몸이라는 것을 보여 주는 겁니다. 이게 사랑이야. 이게 참 사랑이에요. 옷으로 하나로 감싸주는 거예요.

경건한 자손이라고 하는 것은, 이것은 자손 본인에게 경건을 요구할 수 없습니다. “어이, 아들아! 딸아! 똑바로 해!” 이렇게 요구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경건한 자손은 아빠, 엄마 하기 나름이기 때문입니다. 아빠, 엄마가 어떤 관계냐에 따라서 그 관계에서 경건한 자손이 나오고, 그 자손의 사슬, 연쇄 고리에 의해서 장차 진짜 경건한 자손, 예수그리스도에게 이어지게 하는 것이 바로 제사 언약, 레위 언약에 이어짐에 부합되는 구체화가 이렇게 되는 겁니다. 구체적, 역사적 정황으로 보겠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여기에 옷을 가리운다 할 때에, 그러면 그들은 무엇으로 옷을 가리웠느냐 하면은 바로 이혼한 것과 학대로, 학대하는 것으로 옷을 가렸어요. 이 말은 뭐냐 하면, 남자가 뭐, 푸짐한 옷을 산 정도가 아니고 남녀가 폭력으로, 또는 죄악으로 자기 아내를 보듬어 주듯이 이제는 두들겨 패는 것으로 보듬어 주어서 등허리, 어깨 할 것 없이 멍 자국으로 감싸주시는 남편. 폭력으로 감싸주시는 남편. 이게 학대죠. 학대로 옷을 삼아서 그 학대 속에 아내를 거기다 집어넣고 마구 패는 것. 이런 짓 하지 말라는 거죠. 그러면 그것은 경건의 자손이 잉태될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방금 이 본문만 보게 되면, 가정생활 똑바로 하라는 갑자기 이 말씀이 되죠. 그런데 지금 우리가 얻고자 하는 것은 뭐냐, 제사 언약과 그것이 일반생활과 어떻게 연결이 되느냐 하는 그것이 궁금한 거예요. 또 제사 제도가 무엇이기에 남편들아 아내 보듬어 주고 위해주고 똑바로 살아! 지 살기 싫으면 이혼해 버리고. “아이구, 나 귀찮아 죽겠다. 나, 지금 새 여자 만났으니까 나가. 집 나가버려.” 이런 식으로 이혼하는 것이나 학대로 옷을 가리우는 그런 짓을 하지 말라고 했다 이 말이죠. 도대체 제사 언약이 무엇이기에 이것과 경건한 자손과 가정 폭력과 관련지어서 이야기하느냐. 그것은 바로 갈라디아서 4장에 보면, 28절과 29절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하여튼 이것을 보면 구약보다 신약이 더 어려워요. 진짜 어려운 성경 말씀을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셩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계집 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 계집 종의 아들이 자유하는 여자의 아들로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여기서 신약에서는 남자 이야기가 빠지고 여자 이야기로 결정됩니다. 경건한 자손은 엄마 잘 만나서 된다고 하는 겁니다. 엄마가 약속이냐, 아니면 율법이냐를 따집니다. 말라기에서는 남편들아 아내한테 학대하지 말고, 자기 출세 방해된다고 이혼하지 말라. 그러면 경건한 자손이 안 나온다고 되어 있죠. 그러면 여기 말라기에서는 뭐냐 하면, 남편들보고 모든 책임을 묻는데, 이게 신약 갈라디아서 4장에서는 아예 남편은 빠져 버려요. 남편 없어요. 이 말은 뭐냐 하면, 결국은 남편 자리에 누가 들어간다 말입니까? 남편 자리에서 모든 남편들은 다 빠져 버리라 이렇게 됩니다. 경건한 자손은 너희들 힘으로 절대로 생겨난 법이 없다는 선언을 하는 겁니다.

남편 자리에 예수님이 임하게 되면, 이제는 예수님에 의해서 경건한 자손이 나타나는데 경건한 자손이냐, 아니냐는 예수님 보시기에 여자를 둘로 나누는 겁니다. 경건한 자손을 낳을 여자와 그렇지 않을 여자를 나누는데 갈라디아서에서는 그 여자 종류를 아브라함에게서 따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여자 종류가 한 명이 아니고 두 명이예요. 하나는 하갈이고 하나는 사라입니다. 하갈은 종의 여자고 사라는 정실 여자죠. 아브라함에게 미리 여자 두 명이 배치된 것은 장차 예수님이 아브라함이 여자 둘을 이용하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하는 일은, 아무리 하나님의 일이 유여할지라도, 여유가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일은 항상 하나를 핵심으로 해서, 그것을 초점으로 해서 달려가면서 그쪽에 꿰맞추면서 일하시는 거예요. 그게 뭐냐, 레위 언약의 완성인 새 언약에 해당되는 겁니다. 새로운 언약. 마지막 최종적인 언약을 하나로 굳혀 버립니다.

그 하나로 굳히기 위해서 모든 남성들이여! 모든 여성들이여! 다 빠지세요. 이 말라기 말씀 듣고 다 빠지세요. 이런 남편, 아내한테 학대하지 않고 아내한테 잘해주는 그런 남편은 없습니다. 저라도 제 아내한테 못합니다. 늘 못합니다. 율법은 늘 해야 돼요. 그리고 한 구절도 빠트리면 안 돼요. 늘 해야 되고 항상 해야 되고 빠트리면 안 되는데 그런 남편 없습니다. 그래서 경건한 자손, 경건한 아들, 경건한 딸, 없습니다. 자식한테 기대하지 마세요. 자식 지맘대로입니다. 왜? 아버지, 엄마가 지맘대로니까. 재편성합시다. 남편은 예수님, 거기서 예수님이 구분하는 여자 둘로 나눕시다. 하나는 하갈이냐, 하나는 사라냐.

사라보고 약속의 자녀라 하고, 자유 하는 약속의 자녀. 하갈은 자유가 없는 율법에 속한 자녀라 하고. 그러면 정리해 봅시다. 경건한 자손이라는 것은 율법을 한 번 경유했다가 나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제 튀김옷 한 번 적셨다가 나오는 거예요. 새우가 한 번 튀김 솥에 들어갔다 나와야 새우튀김이 되고 닭도 한 번 튀겨야 되잖아요. 십자가에 한 번 튀길 때, 기존의 모든 인간관계나 부부관계는 의미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레위 언약이 아니고 새 언약 시대에는 의미 없습니다. 율법에서 벗어났으면 그냥 벗어나면 안 돼요. 율법을 경유해서 벗어나야 돼요. 왜, 경유해야 하느냐 하면 율법을 경유해야 우리가 죄인 중에 괴수라는 것을 알고 난 뒤에 남편의 좋은 점을 알잖아요. 우리는 어떤 말씀도 항상 못 지키고, 늘 못 지키고, 모두를 못 지켜요. 몇 개 지킨 것 소용없고 돌아서면 율법이고 생각 없습니다. 이게 경건한 자손입니다.

이 말라기의 모든 책임자는 장차 오실 메시야가 담당할 거예요. 율법에 적셔서, 율법으로 그냥 들어온 사람은 지옥 갈 사람. 율법에 적시고 예수님의 피로 모든 죄를, 율법에서 드러난 죄를 피로 용서한 자는, 자손은 약속의 자녀, 정실, 하늘나라에 갈 수 있는 자녀로 이렇게 나누어지는 겁니다. 결국 인간은 하나님의 약속을 보여 주기 위한 하나의 재료에 해당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막상 말씀을 보니 제대로 된 남편과 아내와 자식이 없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합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스물 네 시간 걱정하고 생각하고 몸부림치는 것은 그저 내 가정, 내 새끼밖에 모르는 우리의 모습, 주여! 자유하지 못한 우리에게 다시 한 번 자유를 허락해 주셔서 우리의 영원한 남편이 주님인 것을 증거 하는 사람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