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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라기10강-공의의 하나님(말2;17)140727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4. 7. 28. 07:29
공의의 하나님(말라기 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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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14-07-27 15:50 
공의의 하나님 

2014년 7월 27일                         본문 말씀: 말라기 2:17 

(2:17) 너희가 말로 여호와를 괴로우시게 하고도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여호와를 괴로우시게 하였나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말하기를 모든 행악하는 자는 여호와의 눈에 선히 보이며 그에게 기쁨이 된다 하며 또 말하기를 공의의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 함이니라  17.  Ye have wearied the LORD with your words. Yet ye say, Wherein have we wearied him? When ye say, Every one that doeth evil is good in the sight of the LORD, and he delighteth in them; or, Where is the God of judgment?

선과 악의 뒤바꿈 현상, 이 현상의 원인에는 인간들의 자기 중심주의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적 자신의 적을 향하여는 어김없이 비난을 퍼붓지만 막상 본인들이 하나님 보시기에는 과연 제대로 인가를 판정받은 근거나 기준은 갖지 못하고 있습니다. 선지자의 출현, 선지자의 등장은 인간의 한계가 드러나는 시점에서 나타납니다. 

인간들이 스스로 자기 반성으로 올바른 노선을 되찾을 수 있다면 구태여 선지자를 하나님이 보낼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래, 우리가 이 지점을 엇길로 나갔구나. 다시 제 자리를 찾아들어가자”라는 시도로 인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회복될 수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자기 종을보내지 않습니다. 

선지자는 인간의 극한지점에 출현합니다. 그래서 인간들로 하여금 ‘어쩔 수 없음’을 지적하시고자 합니다. 인간은 주어진 상황의 원조정자가 아닙니다. 단지 결과로만 존재하고 활동하고 있을 뿐입니다. 즉 인간의 자기 바탕을 자신에 의해서 변형시키거나 개선할 입장에 있지 않다는 말입니다. 

단지 인간은 자신의 그 왜곡됨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노출할 뿐입니다. 반성을 한다고 해서 회복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반성을 한만큼 더 상황을 악화시킬 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유대사회는, 자체적으로 정의와 공의로움을 유지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로 인하여 한계에 부딪혔습니다. 그 한계란 질서 유지 차원에서 어쩔 수 없이 온전한 공의로움을 적용시킬 수가 없다는 점입니다. 

선지자의 파견이 이를 말해줍니다. 왜냐하면 선지자의 끝은, 혹은 마지막 선지자는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선지자로서 자기 백성들로부터 거부당했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이는 인간들이 생각하는 공의의 범주에 부합되지 않는 더 넓은 범주를 제시하셨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의 자기 주장에 입각한 정의로움과 공의로움은 하나님을 괴롭게 하실 뿐이라는 사실을, ‘괴로움 당하시는 예수님의 생애’로 미리 표출하고 있습니다. 말라기 선지자 시절의 인간상이나 예수님 당시의 시회상이 대동소이합니다. 크게 차이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괴로움’ 차원에서 오늘 본문을 생각한다는 것은 곧 예수님의 십자가 자신 취지에서 오늘 본문을 생각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기득권이란 새로운 권력체제를 꾸리게 마련입니다. 그러면 자기 편에게는 법을 관대하게 적용시키게 되면 반면에 적에 대해서는 냉정하고도 가혹하게 법을 적용하게 마련입니다. 승자가 역사를 다시 쓰게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정의로움도 승리의 승전보를 떠받혀주는 개념이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인간 세계의 이러한 논리는 정권이 바뀌면 다시 0로 돌아가게 됩니다. 즉 반대와 반대가 만나면 0이 된다는 식이 논리가 인간 논리의 한계입니다. 악마와 천사와 만나면 0이 되는 겁니까? 아닙니다. ‘1’이 됩니다. 그 이유는 악마는 천사가 타락한 존재이지만 천사는 ‘안 타락한 존재’로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종이라는 점으로 규정되기 때문입니다. 

'x'의 반대가 ‘-x'가 아니라 ’1-x'가 됩니다. 그래서 x+(1-x)=1이 되는 겁니다. 이와 같은 원리는 남녀 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남녀가 만나 자식을 생산합니다. 즉 남자+여자=자식 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실은 그게 아니라 남자+(1-남자)=자식입니다. 남자는 자신의 차이가 곧 자식이 됨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자식을 남자의 호적에 올린다는 것은 자신의 차이를 자신의 내부 세계로 들여놓는 바가 됩니다. 그렇게 되면 자신은 최종 1이 되시는 분, 곧 세상 만사를 홀로 주관하시는 ‘주님=1’에 의해서 남자로 태어나서 그분의 ‘최종 1’됨을 자식을 통해서 확인받게 되는 처지에 있는 겁니다. 

그래서 “내 자식인데 왜 내 마음대로 안돼”라고 불평할 것이 아니라 “내 몸에서 태어난 주님이 주신 자식”이라는 인식을 가져서 부모가 어쩔 수 없는 요소로서 등장하신 주님의 뜻을 파악해야 하는 겁니다. 따라서 선지자가 유대사회에 등장했다는 것은, 그들이 기대하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못하는 현실을 알려주고, 그 실패마저 품고서는 언약을 성취해내시는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여야 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유대 사회의 한계는 장차 마지막 선지자이신 예수님에 의해서 어떻게 바뀌게 됩니까? 육에서 영으로 바뀌게 됩니다. 어떤 식으로 바뀌게 될까요? 바로 ‘너’와 ‘나’의 관계를 바탕으로 해서 바뀌게 됩니다. 인간들의 육은 타고난 욕구를 발휘하면서 존재합니다. 

심리학자 매슬로의 따르면, 인간이 내면에서 진정으로 추구하는 욕구가 다섯 층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 생리적 욕구 
2. 안전의 욕구 
3. 애정과 소속감의 욕구 
4. 자존심의 욕구 
5. 자아실현의 욕구 

다섯 번째의 욕구는 자기 실현 self-realization의 욕구입니다.  즉 자기가 자기 자신이 되고자 하는 욕구, 즉 어떤 대상으로부터 얻어지거나 주어져 만족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자기 자신이 곧 만족의 대상이 되는 욕구 충족인 것입니다. 즉 외적인 대상에 의존하는 욕구 실현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한 욕구로서 자기 언급적인 욕구입니다. 

자기가 자기에게 파묻혀 사는 재미에 푹 빠진 욕구이다. 이 5 단계의 욕구 이론은 결국 두 가지로 나뉠 수 있습니다. 즉 처음 4단계가 모두 같은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들은 모두 객관적인 조건에 따라 주어지거나 만들어진다는 점에서 동일합니다. 먹는 것과 입는 것과 사는 것 그리고 주위 동료들과 같은 대상 조건이 갖추어진 다음에야 만족이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같은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의 ’자기 실현‘이란 어떤 외부 대상이나 조건에 따라 충족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자기 자신을 대상으로 해서 만족되는 것이라는 점에서 앞선 네 가지와는 그 성격이 다르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인간의 그 어떤 욕구 단계에서도 결국 자기 잘못을 알지 못하는 겁니다. 참된 정의와 공의는 인간과 예수님과의 관계로 최종 확정됩니다. 모든 이는 심판받아 합당한 것, 바로 이 심판 사실이 내장되어 있는 자만이 영적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최종 선지자이신 예수님을 통해서 자신 주체파악을 하며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4-07-31 04:23 
10강-말라기 2장 17절 (공의의 하나님) 140727-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말라기 2장 17절입니다. 구약성경 1329페이지입니다. 

“너희가 말로 여호와를 괴로우시게 하고도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여호와를 괴로우시게 하였나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말하기를 모든 행악하는 자는 여호와의 눈에 선히 보이며 그에게 기쁨이 된다 하며 또 말하기를 공의의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 함이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이야기를 하는 사람을 선지자라고 이야기 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체적으로 이스라엘이 잘 진행하면 구태여 선지자를 보낼 이유가 없어요. 선지자를 보냈다는 말은 이미 생각과 의견이 이미 틀어졌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선지자를 보내는 겁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여, 그냥 계셔도 우리끼리 잘 알아서 하겠습니다.” 라고 합니다. 만약에 우리가 당회장 있고 있는데 외부에서 내가 당회장이라고 오게 되면 우리가 얼마나 자존심 상하고 기분 나쁘겠습니까? 안되지요. 선지자는 그거예요, 자존심 상하라고 오는 거예요. 

그래서 선지자는 자존심 상하라고 왔고, 따라서 당연히 기존에 있는 백성들은 선지자를 배척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지적한다는 말은, 곧 무엇을 병행한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심판하겠다는 것을 감안하는 내용이 들어 있어요. 심판하겠다, 벌하겠다는 겁니다. 왜 벌해야 하는가. 틀렸으니까. 잘못되게 했으니까. 만약에 선지자가 없다고 칩시다. 선지자가 없다고 친다면 사는 게 굉장히 편해요. 아무도 나를 간섭하는 사람이 없으니까. 그래서 하나님이 어떻고 저떻고 하나님이 이런 말씀을 했다고 말라기가 선지자로서 이런 계시를 주는데, 말라기 선지자를 아예 삭제해 버리고 그런 사람 우리 가운데 없다고 말씀해 버립시다. 

그러면 자기들이 사는 것이 극히 정상적이에요. 굉장히 아무 탈도 없고 문제될 것도 없습니다. 다시 한 번 말씀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선지자가 없으면 모든 게 정상적이고 잘 돌아갑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알아서 우리 잘못을 알 것 같으면 선지자가 추가될 이유가 없거든요.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보낸다는 말은 내 쪽에서 내 잘못을 안다는 것이 이미 한계에 이르렀다는 이야기예요. 팥빙수를 담을 때 보면 꼭 이렇게 넘치도록 담아요. 빙수를 가는데 빙수가 너무 많이 나왔다 싶으면 다른 그릇을 옆에 준비했다 넘치는 것은 다른 그릇이 받아내야 되잖아요. 현재 이스라엘 자신들은 뭐냐 하면 팥빙수 요걸로 충분하다고 본 거예요. 

주님께서는 선지자를 보내어서 빈 그릇 하나 옆에서 더 보충합니다. 너희들이 담아낼 수 없는 한계를, 넘치는 범죄나 그러한 죄악이 쏟아지니까. 선지자는 빈 그릇에 그것을 담아서 그들에게 보이는 역할을 하는 겁니다. 그게 바로 복음 전파고 전도입니다. 그럴 때 선지자가 “이렇게 해서 잘못입니다.” 라고 이야기를 해요. 그러면 그 말을 받는 쪽에서 수긍을 하느냐? 수긍을 할 정도 같으면 선지자 안 보내도 돼요. 자체 반성으로 가능합니다. 그런데 반드시 선지자를 배척하게 마련이에요. 핍박하게 마련이에요. 그것은 뭐냐 하면 문제 삼지 않아도 될 것을 가지고 당신은 문제 삼고 지적 한다고 이러한 이유를 대면서 선지자를 배척하죠. 따라서 문제 삼지 않아도 될 일인데 문제 삼았다는 것.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은 이런 의견, 저런 의견 내세울 수 있습니다. 하는데, 말라기 선지자가 문제 삼고 들어 왔고 백성들은 평소에 자기의 생활 태도를 그대로 여기서 보여 주는 겁니다. 뭐냐 하면, 악한 일이, 악을 저질러도 그거는 문제 될 게 없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리고 공의의 하나님은 이미 하나님이 정당하게 바르게 이 사회를 공의로 통치하는 그런 하나님의 일은 이미 우리가 찾아보기 힘들다는 그런 식으로 평소에 생각을 해왔던 거예요. 쉽게 말해서 우리가 바르게 살려고 하면 뭔가 거기에 대한 하나님의 보상과 하나님의 축복이 타이밍 맞춰서 그때마다 쫙쫙 복으로, 복으로 반응을 나타내 줘야 하나님 신앙생활 하는 무슨 재미가 나는데 전에는 기도해도 곧잘 응답되고 전에는 헌금을 해도 30배까지는 안 되지만 적어도 1.5배 정도는 헌금한 액수만큼은 착착 다시 은행 통장에 채워졌는데 이게 자꾸 하다 보니까 이제는 그런 신기한 일이 안 벌어지는 거예요. 그리고 그 다음 하는 말이 뭐냐 하면 “하나님은 이젠 지쳤다. 하나님의 공의는 하나님 선에서 이루어지지 않으니까 할 수 없이 우리 선에서 우리 사회의 정의로움을 실현하자.” 그런 쪽으로 불평을 하는 겁니다. 

그런 쪽으로, 인간 쪽으로 나가다 보니까 그들에게 어떤 한계에 부딪히느냐 하면 과연 정의가 우선이냐? 사회 질서가 우선이냐? 하는 그런 딜레마에 빠진 거예요. 그 딜레마의 예를 들게 되면 뭐냐 하면 그 옆에 어떤 동네 청소년이 담배 피울 때 그건 지적을 해야 되죠. “이놈! 어디 학생이 담배 피워? 못된 놈!” 하는데 그 학생이 말하기를 “아저씨 아들이 이 동네 애들한테 담배 유행시켜 놨습니다.” 할 때, 내 새끼를 내가 그렇게 단호하게 지적질 할 수 있느냐 하는 그런 딜레마에 빠지는 거예요. 이 정의라고 하는 것은 가진 자가 결정하는 것이고 역사라고 하는 것은 가진 자에 의해서 쓰여 지는 겁니다. 권력만 쥐면 얼마든지 충성자도 배반자가 되고 역적도, 역적이 새로운 권력을 쥐게 되면 천하에 충성한 공로자가 되는 거예요. 역사에서. 

따라서 이 땅에서의 정의로움이라고 하는 것은 본인이 정의를 내리는 한, 그것은 남하고는 안 맞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해결되지 않는 문제를 주님께서는 어떻게 해결하는가. 그 해결을 제가 제시해 드리겠습니다. 제시해 드리면서 그 논리가 좀 난해하기 때문에 오후시간이지만 좀 참고 견뎌 주시기 바랍니다. 뭐냐 하면은 악마의 반대가 뭐냐? 천사죠. 왜냐하면 악마는 천사가 타락했기 때문에. 그러면 악마하고 천사하고 더하기 하게 되면 이게 제로, 0이냐 하는 문제가 생깁니다. 1에다 마이너스 1을 더하면 0이 되죠. 그런데 이 세상에서는 0이라는 것이 숫자상에는 있지만 사실은 0이라는 것이 없거든요. 착한 것의 반대말이 나쁜 것이다. 그러면 착한 것과 나쁜 것이 만나면 어떻게 되느냐. 이게 0이 되버려요. 이게 인간 세계에서 딜레마가 한계에 부딪히는 겁니다. 

내가 나쁜 짓을 했다. 그 나쁜 짓 한 것을 그러면 어떻게 해결하죠? 나쁜 짓 한만큼 착한 짓을 하게 되면 나쁜 짓 더하기 착한 짓은 제로가 되는 겁니다. 이거는 퉁 친 게 되죠. 이것을 수학상으로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x'의 반대말은 '-x'냐? 그게 맞느냐. 'x'의 반대말이 '-x'같으면 둘이 더해버리면 마이너스 플러스 돼서 0이 되버립니다. 그런데 'x'의 반대말이 '-x'가 아니고 '1-x'라면 둘이 합해버리면 남는 게 뭐냐 하면 1이 남아요. “x+(1-x)=1” 이게 굉장히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x'의 반대말이 '1-x'가 돼버리면 이것은 뭐냐 하면 둘이 합치니까 제로가 아니고 1이 등장하는 거예요. 천사와 악마가 합쳐 버리면 거기서 예수 그리스도라는 통일된 최고의 자리, 하나의 자리가 등장하는 겁니다. 

이것은 고린도 전서 12장에서 교회가 무엇이냐 할 때, 교회에서 너와 나의 만남이 교회가 아니고 반드시 예수님을 경유해야 교회가 되는 겁니다. 너도 아무것도 아니고 나도 아무것도 아니게 되면 교회는 제로가 되어 버려요. 그러면 너가 아무것도 아닌 이유는 예수님이 유일한 한분이기 때문에 내가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나의 반대말은 너가 아니고 나의 반대말은 예수님이 되는 거예요. 예수님이 반대되는 나를 쥐고 있음으로써 예수님이 예수님의 주되심을 드러내고자 반대되는 나를 쥐고 있다고 고백할 수 있는 겁니다. 제가 아침에 설교 할 때 뭐라고 했느냐 하면 교회에 미꾸라지 한 마리가 있어서 미꾸라지 한 마리가 온 진흙탕을 흐리게 한다고 했죠. 그러면 남아 있는 우리는 미꾸라지 아니냐? 미꾸라지 맞아요. 미꾸라지 맞는데 왜 그게 성도가 되고 교회가 되고 영생을 얻는 자가 되느냐 하면 바로 하나, 주님을 증거 할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나의 자존심을 증거 하는 것이 아니고 “니만 잘났나? 나도 잘났다.” 이거는요, 퉁 치는 거예요. “그래, 우리 둘 다 못났다 하자.” 이걸로 끝나면 되는 게 아니에요. 

왜? 못났느냐? 하는 겁니다. 우리가 왜 못났느냐 하는 겁니다. 아침에 이야기 다시 해볼게요. 그리스도는 제사와 관련된 제사장이거든요. 제사장은 죽음과 관련되어 있다 했습니다. 그 죽음은 어떤 죽음이냐 하면은 보통 죽음이 아니고 하나님의 죽음을 의미하는 겁니다. 사람이 죽는 이유가 장차 오실 사람의 모습, 두 번째 아담으로 오실 분이 죽기 때문에 미리 죽이기 위해서 인간으로 하여금 죄 짓게 해서 죽이게 한 겁니다. 그 죽음이 죽음으로 끝나면 인간은 그냥 사라져야 돼요. 사라지게 되면 지옥도, 천국도 텅텅 비게 되는 겁니다. 천국에서 어떤 사람이 등장하는데, 새로운 피조물이죠. 그 새로운 피조물은 그냥 등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 살았다 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살려 주셨다를 드러내기 위해서 천국에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겁니다. 십사만 사천, 수많은 사람들이. 그들은 자기의 면류관을 누구한테 반납하느냐 하면 자지가 쓰고 있는 것이 아니에요. 얼른 벗어서 누구 앞에, 발 앞에 던지는 그러한 삶을 이 땅에서부터 출발하고 시작했던 사람들입니다. 던지는 것, 나의 생명의 면류관이 있어야 구원받는 것 맞는데 그 생명의 면류관은 내가 생산하거나 내 쪽에서 만들어 낸 것이 아니고 내 행위와 공로가 아니라 “이 분이잖아요.” 하고 그 쪽을 향하여, 나를 구원할 그 쪽을 향하여 발 앞에 던질 수 있는 사람을 이 땅에서부터 이미 개시를 하고 시작을 한 겁니다. 이게 천국이에요. 

그러니까 내가 구원받고자 하는 천국은 인간이 지어낸 천국이지 그런 천국은 애초에 없습니다. 애초에 그런 천국 없어요. 그리스도를 위한 나라가 천국이고 따라서 그리스도만 위하겠습니다 해서 붙잡혀서 거기에 끌려간 사람만이 천국의 백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수련회 때 출애굽기 할 내용을 미리 하면 안 되는데. 출애굽의 오해잖아요. 애굽에서 이스라엘이 나왔다고 자기들을 이스라엘로 오해한 겁니다. 제가 광주강의에서 이야기 했거든요. 원통을 두 개를 그렸어요. 원통 하나 있고 바깥에 원통 하나 있고. 둥그런 통을 두 개를 그려 가지고 안쪽의 원통은 이스라엘, 바깥에 원통은 주의 이름이에요. 모세는 자기 백성, 자기 혈족, 자기 종족을 구원하러 갔다고 생각한 거예요. 자기와 동행하신 분이 주의 이름이란 것을 계속 생각을 못한 거예요. 원통 하나만 건지만 된다는 거예요. 원통 하나만 건지는 것이 이스라엘의 취지가 아닙니다. 원통 바깥에 있는 그 분이 하나님의 아들, 주의 아들, 그 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에요. 

이스라엘은 그 차이가 있어야 돼요. 상세한 것은 수련회 때 하겠지만 마찬가지로 천사와 악마의 차이점은, 악마는 나는 나로 인하여 존재할 때 악마가 되는 겁니다. 악마가 보고 싶어요? 뭐, 쉽게 보고 있습니다. 나는 나만을 위해서 존재해야 된다는 겁니다. 매슬로 라는 심리학자가 인간의 욕망을 다섯 단계로 구분했는데 제일 먼저 단계가 생존욕구의 단계, 짐승이죠, 그냥 먹는 것, 잠자는 것(1. 생리적 욕구). 다음에 자기 보존(2. 안전의 욕구). 그 다음에 소속의 욕구. 어디 소속되는 것. 사랑받는 것(3. 애정과 소속감의 욕구). (4. 자존심의 욕구). 제일 마지막이 뭐냐 하면 나는 나로 인하여 즐거워하는 것(5. 자아실현의 욕구). 1번부터 네 번째 까지는 객관적인 것에서 소유할 수 있어요. 먹을 것, 입을 것, 돈 같은 것은 자기가 갖고 있는데 마지막에 있는 그것은요, 아무것도 소유도 필요 없어요. 오직 나 있음으로 자체가 극치에, 카타르시스라 할까요. 아주 극도의 쾌락을 맛보는 겁니다. 나 여기 있음 자체로서 맛보는 거예요.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의 경지라 할 수 있어요. 1번에서 4번까지는 객관적이에요. 외부에 뭔가 있어야, 있는 것으로 나를 지켜주는 어떤 소속이 있고 나를 보장해 주고 국가가 있고 이런 것으로 즐거워하는데 마지막 그것은 뭐냐, 국가도 필요 없고 뭐도 필요 없고 나 여기 있음 자체로 희열을 느끼는 쾌락. 그게 인간의 마지막 도착 지점인 최고의 쾌락이라는 겁니다. 

그게 바로 마귀예요. 그게 악마입니다. 인간은 이미 악마를 지향하게 되어 있어요. 이미 악마의 지배를 받아서. 그래서 악마의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뭐냐 하면 수도원이예요. 수녀원. 모든 것을 비우고 오직 주님만 찾는 사람, 그게 악마의 모습이라니깐요. 오늘 오후에 뭐 이상한 소리한다. 그게 자기 쾌락의 절정입니다. 찬송가 가사에 그런 가사가 있어요. 악마가 기대하는 최고의 악마의 모습을 보여주는 가사가 있어요. <부름 받아 나선 이 몸> 아! 이 가사 보면 아주 섬뜩해요. 부름 받아 나선 이 몸 어디든지 가오리다 괴로우나 즐거우나 주만 따라 가오리니 어느 누가 막으리까 죽음인들 막으리까 어느 누가 막으리까 죽음인들 막으리까 소돔같은 거리에도 사랑안고 찾아가서....이것은 마치 사창가에도 복음안고 가겠다는, 이거 신학교 막 졸업한 열정 넘치는 목회자들이 빠질 수밖에 없는 아주 악마가 쳐놓은 마지막 함정이 부름 받아 나선 이 몸 이예요. 얼마나 불러 대었습니까? 우리는 안 부른지가 십년이 넘었지만. 박자도 아주 신나. 이게 바로 이슬람에 속한 탈레반, 죽는 것이 곧 영광이라는 것. 이것이 바로 또 불교, 티벳 불교에 도 닦는 사람들. 그리고 힌두교. 모든 종교의 절정은 바로 악마에서 만나는 거예요. 나는 곧 나다. 

그런데 천사는 본인이 없어요. 나는 주님이 부리는 종입니다. 주님이 부리는 종. 그리고 주님이 부리는 종인데 앞에 보면 해탈한 사람 비슷하죠. 그런데 문제는 바로 그 주인이 부리는 종이 오히려 성도를 부러워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천국은 천사를 위해서 만든 것이 아니고 주님의 백성들, 주님과 하나 된 백성을 위해서 만들었거든요. 왜 그러냐 하면 그들만은 주님 십자가 앞에서 죄인임을 알기 때문에. 왜 죄인임을 알아야 하느냐, 왜 주님이 기뻐하느냐 하면 그래야 우리가 죄인임을 고백할 때 주님이 어떤 식으로 고생하고 경유했다는 것을 우리를 통해서 계속 만끽하고 예수님의 자기 공로와 성과를 계속 보여 줄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러한 원리를 오늘 공의라는 말이 나왔으니까. 악하다, 정의롭다 하는 이런 모든 기준은 오늘 말라기에, 이스라엘 내부에, 유다 나라 사회에 공의로운 질서 체제를 위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동원시킬 때 그러한 한계에 있는 해석이 나올 수밖에 없어요.

그렇다면 이건 구약이고 신약에 와서는 이건 영적으로 바뀌어야 되거든요. 그러면 육에서 영으로 바뀔 때 어떤 절차에 의해서 바뀌어지는가. 이거 우리가 꼭 알아야 됩니다. 그것부터 설명하기 위해서 우선 남자, 여자를 설명해 봅시다. 남자와 여자를 플러스 하게 되면 자식을 낳는다. 보통 그렇게 알고 있잖아요? 남자+여자=자식. 이렇게 나온 것이 아닙니다. 남자와 여자의 차이에서 자식이 나와요. 이 말이 같은 말이면서도 터무니없이 다른 말이 되는 이유는 자식을 놓고 난 뒤에 어느 소유도 자기 소유권으로 넘길 수가 없다 이 말입니다. 왜냐하면 자기 내부에 장착되지 않은, 다른 외부의 차이에 의해서 자식이 생겨나기 때문에 그 차이까지 무시하고 묵살하면서 억지로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는 권한은 남자한테도 없고 여자한테도 없는 거예요. 아빠한테도 없고 엄마한테도 없는 거예요. 그러면 남녀의 차이를 극대화로 부각시켜서 그것을 실제화 인간으로 만들어낸 것이 누구의 소유냐 하면 주님의, 주님께서 그렇게 하셨거든요. 그래서 이스라엘에서는 자식은, 태의 열매는 주님의 축복이라고 본 겁니다. 시편에 나오거든요.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시편127:3) 

그 자식을 통해서 뭐가 침입하느냐 하면 주님의 주도권이 침입하는 겁니다. 그럴 때, 부모는 그 주도권을 인정하지 않고 만날 “주님이여! 주님이여! 왜 내 자식인데 맘대로 안 됩니까?” 이런 식으로 자꾸 기도를 해요. 사실은 말은 그렇게 험하게 하지 않죠. 빙빙 둘러서 이야기 하죠. “주님이여! 주님이여! 주님의 자식이니까 국가와 교회와 민족을 위해서 큰 일군 되게 하옵소서.” 그러면 주님이 “안 해주면 어떻게 할 건데?” 이렇게 나오면 할 말이 없는 거예요. 항상 그렇게 자식을 볼 때, 이것은 내가 다룰 수 없는 내 바깥에서 발생된 차이에서 난 자식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내가 난 이건 내 새끼고 내 자식이라고 보는 겁니다. 자꾸 그렇게 생각을 해요. 그렇게 생각을 하니까 정들여 키우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자, 이것이 무슨 뜻인지를 안 받아들이는 눈친데 할 수 없고. 남녀의 차이에서 자식이 나왔다는 말씀을 제가 분명히 드립니다. 남자, 여자가 아니고. 남녀의 차이에서. 이게 솔로몬의 지혜에도 나와요. 창기 둘이 있는데 진짜 엄마를 찾기 위해서 아이를 둘로 쪼개라 하는 것도 같은 취지거든요(왕상3:16~28). 하나님의 지혜를 보여주기 위해서 그러한 사건이 일어난 것을 이렇게 말해주는 겁니다. 하여튼 그건 그렇고요. 자, 지금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육적에서 영적으로 어떻게 넘어왔느냐 하는 것을 본격적으로 그 이야기할 참이에요. 지금 오늘 본문 같은 경우에서 다시 말씀 드리면 그 유대 나라의 질서 문제가 곧 하나님의 질서 문제로 그들은 그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자기가 다루다 보니까 뭐냐 하면 공의의 하나님은 없다는 거예요. 즉, 본인이 생각하는 정의로움과 질서 잡힘이 뭔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혜택을 주지 않았다고 그렇게 주장하는데 선지자가 하는 말이 지적했죠. “너희가 그런 생각 자체가 하나님을 괴롭게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육을 통해서 영을 보여주고 하는데 그들은 육에서 그냥 제자리 뛰기 하는 거예요. 

그러면 육에서 영으로 어떻게 넘어 가는가. 바로 너와 나의 만남은 아무 소용없습니다. 한 예를 들면 사람은 누굴 만나도 그 상대방을 자기가 소유화 해놓고 그 사람을 대상으로 평가하게 되어 있어요. 이거 참, 여러분들이 부인하고 싶어도 여러분들이 부인해도 이 말이 진리가 되겠습니다. 인간은 누굴 만나도 저 사람이 내 편이고 내가 다룰 수 있는 대상이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생각합니다. 우리가 뭐 인간성이 나빠서가 아니라 인간의 두뇌 자체가요, 대상을 우리가 두뇌에서 자체적으로 만들어 내요. 과학적으로. 외부에서 뭔가 들어오게 되면 이미 기존에 있는 두뇌에서 형성된 내 세계관에 저것이 필요 하냐 결정해서 필요한 것 같으면 내가 내 원대로 내 대상을 만들어내서 일방적으로 내 주장을 그들에게 요구하게 되어 있다니까요. 

예를 들어서 내 맘에 안 들면 아예 상대도 안 하고. 그러니까 뭐냐 하면 내 주관이 그 대상을 주관화시키는, 늘 나한테 필요 하냐, 필요 없냐를 일방적으로 그렇게 만들게 되어 있다니까요. 상대방으로. 나만 그런 게 아니고 상대도 저쪽이거든요. 그러니까 너와 나의 만남 가지고는 이건 싸움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왜 자꾸 남들을 만나고 싶어 하느냐. 인간의 행복이라고 하는 것은 이렇습니다. 내가 알고 지낸 사이에서 비로소 인간은 행복을 찾습니다. 내가 알고 지낸 사이에서. 만약에 어떤 재벌인데 갑자기 부도가 나서 망했다. 우리 같으면 불행하다고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세월이 한 십년 지나 보세요. 가난하지만 여전히 아버지를 경외하고 자식을 사랑하는 가족이 있다면 그 가정은 행복에 넘치는 가정이 돼있어요. 비록 옛날 그 돈 잘 쓰던 것은 날아갔지만. 골프 치고 했던 그런 좋은 시절은 다 지나갔지만. 골프 안 쳐도, 탁구도 안 쳐도, 그냥 단칸방에 살아도 니가 있음에 난 행복하고 난 아빠 있음에 행복합니다. 그게 인간인 거예요. 인간. 인간은 돈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알고 지낸 사이에서만 인간은 행복을 찾게 되어 있습니다. 

문제는 자기가 알고 있는 사이라는 거예요. 주님이 알고 있는 사이가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 온 가족이 교회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라고 하는데 왜 그런 생각을 하죠? 알고 지낸 사이가 나와 동일한 신앙생활하면 얼마나 행복하겠느냐는 겁니다. 그거는 평소에 나의 행복체계가 이미 내가 주관적으로 조립을 해놓고 그 조립된 그대로 상황이 돌아가기를 원하는 거예요. 아침에 이야기 했잖아요. 복음 믿지 말고 하나님 믿지 말라고 전도 하라고. 저도 우리 동네 십년 째 전도하고 있습니다. 누구 하나 교회 나오라고 이야기 한 적 없습니다. 전도하기 힘들어요. 목사라는 것을 다 알고 있거든요. 그렇지만 입 밖에 안 뗍니다. 개한테 진주 던질 일 없잖아요. 참는 거예요. 왜 전도 한다고. 난 전도 하느라 바빠요. 궁금해 하면서 물을 때 교회가 어떻습니까? 그때는 그 틈을 노려서 우리 교회는 이렇고 하면서 소개하겠지만 나서서 할 이유는 없습니다. 내가 나선다고 천국 가는 것도 아니고. 

주님이 아는 사이는 내가 아는 사이를 전부다 칼로 끊고 난 뒤에 그 다음 상황이에요. 니가 알던 사이사이가 그 속에 너에 대한 정의감, 너에 대한 사랑, 너에 대한 질서 잡힌 하나님, 온갖 오류들이 거기 다 포함이 되어 있거든요. 예수님은 마지막 선지자예요. 설교 다시 할까요? 선지자가 왜 투입 되었죠? 지적질 하기 위해서 왔죠. 예수님은 어떤 분입니까? 마지막 선지자거든요. 마지막 선지자가 우리에게 찾아왔다는 말은 우리가 내가 아는 사람들끼리 행복하게 하겠다는 나의 이 욕심, 나의 욕구를 끊어 놓고 만나더라도 그 다음부터는 주님이 알아서 붙여준 사람으로서 주님이 아는 사람으로 새롭게 형성되는 겁니다.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 하나님 아버지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고 내 모친이다”라고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2장 마지막 절에 그렇게 이야기 하셨거든요.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내 모친이니라 하시더라”(마12:50) 

그게 바로 육에서 영으로 갈 때에 육을 그냥 버리고 영으로 가는 것이 아니고 육의 자체 내에서 없는 차이를 우리가 없애버리는 차이를 주께서 다시 만들어 내는 겁니다. “자식이라고 키워놔야 아무 소용없습니다.” “아멘” “아이고, 남편이라고 지 먼저 가고 아무 소용없습니다.” “아멘” “특히 목사라고 아무 소용없습니다.” “아멘” “장로라고 아무 소용없습니다.” “아멘” 그런데 아무 소용없는 분이 떠나지 않고 있을 때는 주님의, 내가 시작한 사랑이 아니고 주께서 살려 주시기 위해서 또 주신 사랑인 줄 알고 “아멘” 결국 있어도 “아멘” 없어도 “아멘” 이래도 “아멘” 저래도 “아멘” 아멘이란 반대 일치를 지난 낮 설교에 했잖아요. 아멘이란 주 안에서 모두가 하나가 되는 것. 악마가 있어도 좋고 없으면 없어도 좋고 지옥과 천국이 있어도 좋고. 다 그것은 주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내 주여 뜻대로 하시옵소서. 그게 우리 안에서 일어날 때 이미 영적인 사람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우리 위주였습니다. 복음 위주라고 아무리 이론적으로 머리에 담아 놓아도 그게 실제로 우리 몸에 퍼져서 행하여 퍼진다는 사실을 이제는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