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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라기6강-생명의 언약(말2:5-8)이근호140629

아빠와 함께 2014. 6. 29. 19:07
2014-06-29 15:02:50 조회 : 12         
   생명의 언약 140629 이름 : 이근호   
 
생명의 언약(말라기 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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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14-06-29 15:45 
얼른
생명의 언약

2014년 6월 29일                       본문 말씀: 말라기 2:5-8

(2:5) 레위와 세운 나의 언약은 생명과 평강의 언약이라 내가 이것을 그에게 준 것은 그로 경외하게 하려 함이라 그가 나를 경외하고 내 이름을 두려워하였으며

(2:6) 그의 입에는 진리의 법이 있었고 그의 입술에는 불의함이 없었으며 그가 화평함과 정직함으로 나와 동행하며 많은 사람을 돌이켜 죄악에서 떠나게 하였느니라

(2:7) 대저 제사장의 입술은 지식을 지켜야 하겠고 사람들이 그 입에서 율법을 구하게 되어야 할 것이니 제사장은 만군의 여호와의 사자가 됨이어늘

(2:8) 너희는 정도에서 떠나 많은 사람으로 율법에 거치게 하도다 나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니 너희가 레위의 언약을 파하였느니라

레위인들에게만 특별히 하나님께서 상대하여 약속을 맺은 언약이 ‘레위 언약’입니다. 그런데 이 언약에게만 생명과 평강이 주어진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레위 언약을 비켜나가서 생명과 평강을 얻을 도리는 없다는 말이 됩니다. 모든 것이 이 레위 언약 속으로 일원화 시켜놓은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이러한 조치가 레위인 말고 다른 사람들에게 소외감을 줄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예를 들면, “하나님, 저에게 이런저런 어려움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든 직접 해결해주세요”라고 하면, 하나님께서 “너의 그 문제는 나에게 직접 나올 게 아니라 레위인들에게 물으라”고 하시면 뭔가 차별대우 받은 느낌으로 인하여 섭섭해질 것입니다.

레위인들만 특권을 누리고, 상대적으로 그 외 다른 사람들은 아랫 사람처럼 취급당하는 기분이 들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레위인들의 일이 ‘섬김’에 기초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보통 법이란 위에서 아래로 일방적으로 짓누르는 뉘앙스를 금할 게 없습니다.

그리고 그 법을 만든 최고직에 있는 자는, 자기가 만든 법에서 자기는 빠져 있게 마련입니다. 왜 그래야 하느냐 하면 법을 만든 최고권위자마저 법에 저촉을 받게 되면 법의 가치를 최종 확정짓는 권위 자체가 불안정해지고 도전받는 입장에 있기 때문입니다. 즉 주어진 법에 대해 최종 해석자는 항상 타인이 해석하는 그 해석에서 벗어나 있어주어야 궁극적 권위를 부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법에 의해서 질서 잡힌 세상에서, 법의 전문가들은 서민들을 강압하는 위치에서 살게 마련입니다. 법을 초월한 공백의 공간을 만들어 그 안에 거주합니다. 그리고 서민들은 그들 지도자들을 바라보면서 본인들의 법적 무지성으로 인하여 어쩔 수 없이 그들로부터 법적인 훈수를 들어야 될 수동적 위치에 있음을 수용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레위 지파의 어떤 변천을 말씀하십니다. 처음에는 법을 아는 레위인들이 법을 통해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두려워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어느날 부터 그들은 법의 정신에게 이탈되기 시작한 겁니다. 그들은 결코 제사를 금지하거나 그만두지 아니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법 위반자로 점차 떠오르는 이유는, 법 자체가 인간들이 미처 모르는 낯선 내용을 자꾸만 토해내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들은 법을 가지고 그것을 지켜 낸다고 여깁니다. 반면에 법을 만드신 하나님께서 법 속에 들어가셔서 그 숨겨진 진정한 의미를 밖으로 자꾸만 발산시키고 현실화하십니다.

결국에는 법을 지켰다는 그 인간 제사장들을 밀어내면서 말입니다. 바깥으로 죄인으로 만들어서 방출시켜버립니다. 이는 인간들이 법을 쥐게 되면 법이 쥐는 권력에 도취되기 때문입니다. 법이 힘되고 힘을 생산하는 장치임을 알게 되면서 자신들은 그 힘의 사용자로 등극하려고 하게 됩니다.

레위언약의 핵은 ‘희생 제물의 죽음’입니다. 레위인들과 제사장은 제사 자체의 가치에만 몰입하도록 우선적으로 부름을 당한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그 희생제물의 운명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섬김이요 희생적 삶입니다. 이는 ‘힘 소유’ 정신과 전혀 반대되는 성향이 됩니다.

하지만 이들은 법이 내놓은 그 결과물에 집착했습니다. 예를 들면, 대형마트에는 물건을 싣고 끌고 다니는 카트가 있어서 물건을 가득 구매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가트들은 다른 카트들과 촘촘히 묶여져 있습니다. 이 묶음을 100원 짜리 동전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돈 100원 넣고 빼면 단독 카트로 빼낼 수가 있습니다.

제사장들은 바로 그 연결매체인 100원에 주목해야 할 자들입니다. 하지만 대형 마트에 가서 그 100원 넣고 빼고 에만 정신 팔린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얼른 카트 빼내어 빨리 매장으로 들어가서 원하는 상품을 잔뜩 쌓고 밖으로 나오기에 급합니다. 이처럼 인간들은 제사가 주는 혜택을 얼른 챙기고서는 다시 본래의 자기 야망 달성하는 세상으로 성급하게 나서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조성된 힘과 힘의 체제에 제사장들도 마음 빼앗긴 것입니다. 섬기는 자가 아니라 권력자로 군림하면서 정기적으로 제사 드리게 된 것입니다. 바로 이런 왜곡된 말씀해석으로 인하여 참된 제사장께서는 이 땅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비록 레위 언약을 인간들의 제사장들은 실패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레위 언약 자체가 실패로 소멸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이 법을 자신에게 적용시켰습니다. 그렇게 되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으로 살아가시므로서 자연스레 인간의 모든 세상은 ‘레위 언약’의 저촉을 받아야 되는 환경으로 정착되어버렸습니다. 유일한 제사장의 등장은 곧 인간들이 그동안 형식적으로, 반복적으로 실시한 법 적용이 한계에 도달했다는 것을 아울러 말해주는 겁니다.

요한복음 4:22-24에 보면, “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이미 사람들은 하나님의 레위언약 법에 대한 나름대로 사용들을 하고 있었습니다. 법을 집행하기 위해 특정 시간대와 특정 공간대를 지정하고 법을 계속 준수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정작 하나님께 제대로 예배드릴 사람들이 누락이 되고 맙니다. 사마리아여인 같은 사람들이지요.

그래서 신약에서는 하나님에 의해서 사전에 구원확정난 사람들을 통한 예배에 지장이 없도록 모든 형식과 의식에 구애받지 않는 식으로 예배하는 시대에 돌입하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을 주님의 뜻에게 인계하는 겁니다. 이것인 신령과 진정한 예배입니다. 자신의 죄인됨이 생명과 평강의 노선 안에서 비로소 발견토록 하는 겁니다.

그렇게 되려면 유일한 제물과 제사장과 성전은 오직 예수님뿐임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예수님에 의해서 레위언약은 완성수준에서 작용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모든 것과 매일매일은 전부 하나님께서 맡길 수 있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4-07-03 06:13 
6강-말라기 2장 5절-8절(생명의 언약)140629-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말라기 2장 5절에서 8절입니다. 구약성경 1328페이지입니다.

“레위와 세운 나의 언약은 생명과 평강의 언약이라 내가 이것으로 그에게 준 것은 그로 경외하게 하려 함이라 그가 나를 경외하고 내 이름을 두려워하였으며 그 입에는 진리의 법이 있었고 그 입술에는 불의함이 없었으며 그가 화평과 정직한 중에서 나와 동행하며 많은 사람을 돌이켜 죄악에서 떠나게 하였느니라 대저 제사장의 입술은 지식을 지켜야 하겠고 사람들이 그 입에서 율법을 구하게 되어야 할 것이니 제사장은 만군의 여호와의 사자가 됨이어늘 너희는 정도에서 떠나 많은 사람으로 율법에 거치게 하도다 나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니 너희가 레위의 언약을 파하였느니라”

하나님께서 제사장과 더불어, 레위인과 더불어 영원한 언약을 세웠다는 그 내용입니다. 이 언약을 줄 때마다 우리는, 우리가 거기에 가담되어지지 않은 것에 대해서 뭔가 섭섭하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왜 저 빼놓고 레위인들과 합니까? 제가 오전에 이야기했지만, 나부터 출발하지 않고, 나 말고 다른 쪽에서 일을 다 마무리 지으십니까? 그러면 우리는 어쩌라고? 이렇게 나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죠. 하나님은 레위인과 계약을 하고, 언약을 하고 그 언약이 그냥 아무소용 없는 언약이 아니라 생명과 평강의 언약이라. 그쪽의 언약이 생명과 평강에 대해서 어쨌든 노선이, 그쪽 노선밖에는 없는 겁니다.

그러면 그쪽 노선에 있다면 이쪽 노선은 뭐가 되는가. 저쪽 노선에, 생명과 언약에 합류된 자만이 이쪽 노선, 현재 있는 우리 노선을 말해요. 우리 노선이 뭐냐 하면, 바로 죄와 사망의 노선에서 머물러 있었음이 우리가, 저쪽 노선에, 생명과 언약에 노선에 가서 쳐다보게 되면 비로소 그것이 밝혀지게 되어 있습니다. 왜 저쪽만이 생명과 언약의 노선이고, 왜 이쪽만이 사망과 죽음의 노선이었는가를 비로소 분명히 알게 되죠. 그러면 하나님께서 왜 우리하고 상관하지 않고 레위인과 언약을 맺었는가. 쉽게 하면 이렇습니다. 원래 우리 몸이, 육신이 하나님을 위하여 만들어진 육신인데, 이것이 자아가 발생돼서 그 자아가 그 다음부터는 우리 육신을 이용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몸이 뚱뚱한데, 들어가지도 않는 청바지를 그냥 날씬해 보이니까 무턱대고 퉁퉁한 허벅지를 밀어붙이는, 재봉선이 두두둑 다 떨어져요. 인간은 이미 자아라는 것은 이미 선악과 따먹고, 세상만사가 내 뜻대로 돼야 한다고 우기는 그런 자아에다가, 몸은 이미 하나님의 창세기 3장에 의해서 저주받아서 육으로 시작한 거 마감되고 흙으로 사라져야 될 몸인데, 몸하고 자아하고 불합리하고 맞지를 않는 거예요.

그래서 성경에, 고린도후서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겉사람은 후패하나 속사람은 날로 새롭도다.” 라는 말씀이 있어요. 나이가 이렇게 50을 넘고 60을 넘고, 보통 6학년 몇 반 하는데, 이게 남의 이야기가 아니예요. 6학년 2반이 남의 이야기가 아니예요. 이렇게 벌써 넘어가게 되면, 젊은 사람들의 능력을 따라 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늙으면 죽어야 됩니까? 그러면 늙으면 죽어야지. 제가 말해놓고도 바른말 했네요. 아니, 늙으면 죽어야죠. 오늘 아멘하신 분이 참석을 안 하셨네요.

성경에 보니까 늙음도 의미가 있어요. 뭐냐 하면, 젊은 사람들이 미처 알지 못하는 새로움이 나오면 됩니다. 새로움이. 그저 공차기 이런 것 가지고 젊은 사람들하고 경쟁하지 말고, 뭐 잘빠지기, 몸매 가지고 이런 것 가지고 경쟁하지 말고. 젊은 사람들이 아무리 애써도 나오지 못하는, 녹녹치 않은 경험에서 아, 세상이 왜 죄고, 우리가 왜 죄인이고, 세상이 왜 지옥을 닮을 수밖에 없는가를, 그런 것을 깊은 물에서 퍼내서 보여주게 되면 그것이 인생이 끝날 때까지 계속해서 새로움이, 새로움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 새로움에 대해서 본인이 화들짝 놀라는 거예요. “이건 나의 지식이 아니다. 이거는 뭔가 지금까지 살게 하신 하나님의 권한이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여기 제가 방금 이야기한 제사장들에게, 또는 레위인들에게 언약을 줬다 할 때, 우리는 굉장히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부러워 할 것입니다. “아, 참 좋겠다. 그들에게 줬으니까.” 그런데 마냥 부러워 할 것이 못 됩니다. 왜냐 하면은 세상에 있는 법은요, 법을 만든 사람은 그 법에 자기가 빠져있게 되어 있어요. 대통령이, 독재자가 만일 법을 만든다, 하면 그 법에 대해선 독재자는 빠져 버립니다. 옛날에, 모든 고대 민족들이 다 그랬어요. 절대로, 근친상간이라 하죠. 친척끼리 결혼해서는 안 된다는 법을 왕이 내리면요, 왕만이 사촌끼리 결혼이 허용이 되어 있어요. 고대 왕국의 특징이 그겁니다. 심지어 다윗도 마찬가지죠.

법을 만드는 사람이 만약에 본인이 법에 저촉이 돼버리면 이건 군중들이 항상 쿠데타를 일으켜 버립니다. “당신 법대로 똑바로 했어? 똑바로 했느냐 말이야?” 이렇게 돼버리면 왕의 권위가 법의 권위에 눌려서, 그러면 왕 자신도 법에 저촉을 받게 돼버리면 이거는 계속해서 독재를 할 수가 없어요. 그때 마지막 이렇게 되거든요. “왕은 왜 그렇게 삽니까?” “왜? 내 맘 대로다.” 북한의 김 정은처럼. 법을 자기가 만들면 자기는 그 법에 대해서 자꾸 벗어나야 돼요. 백성들보고는 검소하게 살라고 하고 자기는 호화롭게 요트 돌리고. 이렇게 고급차 타고 하는 이것은, 유 병언도 마찬가지고 북한의 김 정은도 마찬가지고. 자기가 법을 만들면 자기는 항상 빠지게 되어 있습니다. “까불지 마라. 니는 법만 지키고 나는 거기서 빠지는 거야.” 치외법권 상태, 초월한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그러면 레위인들은 어떻습니까? 제사장들은 어떻습니까? 아, 하나님은 어떻습니까? 아, 이게 어려운 문제죠. 법을 하나님이 만들어 놓고 하나님은 거기서 빠지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만든 법에서 절대로 빠지지 않고 본인이 본인에게 그것을 적용을 시켜 버립니다. 그 증거가 뭐냐, 죽는 겁니다. 죽음이에요. 어린 양을 잡으면 용서가 된다고 했으면, 그 법을 자기가 만들었으면, 자진해서 어린 양이 되셔서, 흠 없는 어린 양으로 자진해서 그 법속으로 들어가 버립니다. 그러면 우리 성도 입장은 뭐냐 하면, 예수님을 그냥 믿는 것이 아니고 법에 의한 예수님, 법을 완성한 예수님을 받아드리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그 법속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우리보고 댔다 잔소리하고 자기는 안 지키시는 분이 아니라 스스로 그 법에 최종적인 거, 흠 없는 어린 양을 자진해서 그걸 자기 인생에다 수용해서 그걸 완성해버린 겁니다. 그러면 구원 받는 사람은 어디에 들어가느냐 하면 예수님이 다 이루신 완전한 의의 세계에, 하나님의 의에 우리가 들어가게 되면 그 의로 인하여 우리에게는 영생이 주어지는 방법을 사용해서 그렇게 해서 구원이 이루어지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게 되면, 지금 그렇게 이야기했으니까 여러분이 이해되리라 생각되는데, 따지고 보면 여기서 이해되지 못할게 줄줄이 나오게 되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이게 참 어려운데요, 제사장들이 제사지낼 때, 목숨 걸고 지키는 겁니다. 이걸 쉽게 하기 위해서 제가 한 예를 들겠습니다. 여러분 대형마트에 가게 되면 뭐가 있느냐 하면, 카트가 있죠. 물건 담는, 밀고 당기고, 애들도 거기다 싣고 다니는 거 있죠. 그 카트가 이렇게 묶여져 있을 때에, 그것을 강제로 떼어내면 절대로 떼어지지 않습니다. 이거 쇼핑하는 사람은 다 알죠. 뭐만 넣으면 딱 떨어지게 되어 있어요? 백 원만 넣으면 돼요.

백 원만 넣으면 카트와 카트 사이는 딱 떨어지게 되어 있어요. 그 말은, 백 원만 넣으면 떨어진다는 말은, 백 원으로 서로가 이어져 있다는 말과 같은 말이에요. 하나님의 제사장 언약이라는 것이 뭐냐 하면, 제사장이 행해서 얻어진 그 어린 양의 피를 백성들에게 전달할 때는, 그 백 원짜리 동전처럼 제사장이 내었던 그 피로, 피를 전부다 연결시키면 그게 바로 용서가 전달, 전달되는 그 방식을 사용하는 겁니다. 참, 이해하기 쉽죠. 이해하기 쉬운데, 이걸 사람들이 얼른 믿고자 할 때, 얼른 믿고자 할 수가 없어요. 이게 분명히 옳은 진리고 참된 구원의 유일한 방법인데, 그것을 지식으로는 아는데 얼른 기쁨으로 받아드릴 수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가 뭐냐 하며, 다시 마트 예를 들게요. 아주 정박아 같은 애 같으면요, 엄마가 백 원짜리 넣고 카트와 카트끼리 연결된 그것이, 안 떨어지던 것이 뚝 떨어지니까, 그것이 신기하니까 걔는 두 시간, 세 시간이든 그 밑에 매장에 내려가지도 않고 맨 카트 옆에 붙어 가지고 백 원 넣고 카트 떼고 또 백 원 넣고 카트 떼고, 아, 재밌다, 하면서 또 하고. 그런데 애들은 그렇게 하지만 어른들은 그렇게 하는 법이 없죠. 그러면 관심이 어디에 있느냐 하면, 빨리 떼고 카트에다가 집에 가져 갈 물건 담는 거, 밑에 식품매장에 내려가서 소시지 담고, 이거 담고, 저거 담고, 거기에 정신이 있잖아요. 사람들은요, 그 연결고리에 관심이 없어요.

예수 믿어서 영생 얻고 그 다음은 내 맘대로 살고, 내 원대로 살고 싶고, 출세하고 싶고, 성공하고 싶고, 관심이 여기에 있다 보니까 제사장 언약에 대해서 관심이 없는 거예요. 분명히 성경대로 맞기는 맞는데, 맞기는 맞는데 관심은 멀어지는 겁니다. “그게 뭐 중요한데? 그 동전 신기하지? 하지만 그거는 시작이고 본격적으로 담아야지. 내 인생 내가 살아야지.” 여기에다 몰두하고 여기에다 온 신경을 다 쓰게 되는 겁니다. 제가 들었던 이야기인데요. 그냥 들었던 이야기입니다. 유자식상팔자 라는 프로그램에 나왔던, 진짜 안 봤습니다. 성형외과 의사 권 장덕하고 탤런트 김 민희 라는 부부가 나오는데, 그 딸이 어느 날 쌍꺼풀 수술을 해서 나왔답니다. 어른들은요, 걔가 쌍꺼풀 수술을 하나, 그 아이 아버지가 성형외과 유명한 의사니까 쌍꺼풀 수술 해줄 수도 있잖아요? “에이, 애들은 고3이니까 공부만 잘해라.” 어른들의 관심은 거긴데, 그걸 봤던 여고생들이 쌍꺼풀 수술을 하고 나온 그 프로를 보고 너도 나도 쟤처럼 쌍꺼풀 수술 해달라고 부모보고 졸라댔던 모양이에요. 글쎄, 그 프로에 걔가 나오지 못한다는 이야기도 얼핏 들었어요.

보세요. 여고생들은 보세요. 고것, 전혀 어른들은 관심도 안 두는, 학생은 공부만 하면 되지. 그 쌍꺼풀 수술은 나중에 커서 해도 되잖아요? 그런데 왜 신경 쓰느냐 이렇게 되지만 애들은 진짜 중요한 것은 놔두고 그 쌍꺼풀 수술에 꽂힌 거예요. 여학생들이. 나도 쟤처럼 이뻐보이니까 쌍꺼풀 수술해 달라는 요청이 밀려드니까 그 프로에서 아마 그 아이가 빠졌는지 안 빠졌는지. 저는 그 프로를 잘 안 보니까. 화요일 11시에 하는 모양인데 안 보지만. 14번에서 하는 것 같아요. 도대체 하나님의 관심사가 그 쌍꺼풀에 있거든요. 우리는 뭐냐 하면, 이렇게 구원받은 내가 얼마나 잘났느냐에 관심이 있는 거예요. 심지어 제사장들도 그렇게 했습니다. 오늘 본문 내용이 그래요. 제사장들이 하나님의 피 제사 드릴 때, 처음에는 그들이 순수하게, 피가 어디서 나오는가? 왜 피를 흘려야 하는가? 거기에 관심이 있었는데, 이게 자꾸 상투적으로, 반복적으로 하다보니까 백성들이 이젠 제사장들을 존경을 하네요. 존경을 하니까 이게 긴장이 풀려버린 거예요. 어차피 자기가 법으로 지배할 사람인데 이미 권위를 알아주니까 내가 하나님 말씀 안 지켜도 백성들이 나를 환영해주니까 그 다음부터는 태만해지면서 오늘 본문에 여러분이 보시다시피 그들은 하나님의 지식을 떠났고 제사장들은 만군의 여호와의 사자가 됨이어늘 정도에서 떠나 많은 사람으로 하여금 율법을 거치게 하도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자, 그렇다면 목사님 제사장들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간단한 거예요. 제사장부터 예수님처럼 내가 죽기 위해서 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 그냥 죽음이 아니라 거룩한 죽음, 하나님의 거룩한 죽음, 어린 양이 죽었던 그런 죽음에 내가 고난으로 동참한다는 그런 마음 자세로 계속해서 살아와 주는 거예요. 아까 이야기 했잖아요. 법을 만든 사람은 그 법에 대해서 본인도 적용시켜야 된다는 것. 그러면 어린 양의 피가 그만큼 중요하다면 제사장도 “여러분 세상사는 것보다도 우리가 이 피로 말미암아 용서받은 것에 감사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그런 마음 자세를 제사장들이 유지를 해줘야 되는데 그들은 유지를 못했어요. 그 중의 하나 예가 레위기 10장에 나옵니다. 1절에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각기 향로를 가져다가 여호와의 명하시지 않은 다른 불을 담아 여호와 앞에 분향하였더니” 그만 형식이 되었고 반복되는 지루한 절차에 불과한 겁니다.

왜 절차에, 형식에 불과했는가. 그는 어린 양의 죽음에서 새로운 것을 끄집어내지를 못하니까 제사장으로 살아가기가 지루하기 짝이 없고 권태롭기 짝이 없어요. 여기 동화사 올라가는 거기에, 백안파출소 옆에 옛날에 유명한 자장면 집이 있는데 손님이 그렇게 많이 왔어요. 그런데 몇 년 전에 그 자장면 집이 문 닫았어요. 왜 문 닫았는가. 30년 동안 자장면을 했는데 이제는 돈도 돈이지만 지겨워서 못하겠다는 거예요. 같은 직업을 반복하니까 이게 지겨운 겁니다. 교사 사표 내는 제일 큰 이유가, 여자들은 빼놓고요. 아침에 이야기 했죠. 오직 여자들은 남을 위해서 다 퍼주는... 남자들은 교사 자체가 재미가 하나도 없어요. 갈수록 골치 아파요. 사표내면 아내가 말리고 사표내면 말리고. 그렇게 해서 근근이 버텨온 거예요. 사명대로 한다? 그건 몰라요. 한 백 명 중에 한 명 있을까 말까. 대부분 이거 안 하면 할 게 없어서 하는 거예요. 심지어 농사짓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제사장도 마찬가지예요. 심지어 목사도 마찬가지예요. 로또만 당첨되면 때려치워버려. 로또만 되면 차부터 바꾸고 아파트 넓히고 그 다음에 있는 돈 가지고 스크린골프부터 방문해가지고 필드에 나가는 겁니다. 그저 남들처럼 살아보는 거. 이 제사장이 그랬던 사람이에요.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오늘 결론 딱 한가지에요. 제사장 같은 제사장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는 거예요. 목사를 믿지 말라는 그런 뜻이에요. 제사장을 믿지 마라. 제사장은 언약대로 줄곧 나이가 들으나 젊으나 계속해서 영원한 제사장은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이 말라기의 내용이 바로 히브리서의 내용입니다. 오후이기 때문에 길게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간단하게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말라기의 제사장이 이렇게 여겼다. 하지만 사람이 어겼다고 제사장 언약까지 날아가는 것은 아니다. 이게 히브리서에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러면 사람이 못 지키는 법을 누가 지킵니까? “내가 왔잖아.” 예수님이 오셔서 이 제사장 언약 지킵니다. 지키면서 그 지킨 증거를 대봐라 한다면 그게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리고 십자가가 증거가 된 이유는, 여기서 제일 중요한 거예요. 십자가가 증거가 된 그 순간, 기존의 모든 형식적이고 제도적인 거 전부 다 버려라. 요 끝에 말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어떤 분이 서울서 전화해서 하는 말이 “목사님 교회 소개해 주세요. 갈 데 없습니다.” 제가 말씀 드렸어요. 요한복음 4장, 마지막 때에 제사는 영적 예배입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특정한 장소에 모여서 드리는 그 예배는 구약때로 끝난 겁니다. 예루살렘에 드리면 됩니까? 그리심산에 드리면 됩니까? 그거는 구약때로 끝나고 신약의 예배는 특정 예배당 지어서 드리는 예배가 아니고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이게 신약시대에 드리는 예배의 특징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은, 인간이 드리는 예배는 자기로부터 개시가 되고 시작이 되는 예배인 반면에, 성경책 챙기고 차타고 교회에 오는, 모든 것이 자기로부터 시작이 되는 예배인 반면에 영적 예배는 어떻게 형식을 갖추었는가가 아니라 다시 한 번 모든 것을 맡겼느냐가 중요한 겁니다. 제가 아까 찬송가 부를 때에, 자신도 모르게 진짜 오랜만에 눈물이 났어요. 찬송가 제목이 뭐냐 하면 <내 주여 뜻대로> 431장이거든요. 가사를 생각해볼 때 울컥 했습니다. 가사를 보면 이렇습니다.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이게 예배입니다. 신약의 예배예요. 어떤 분이 강의하니까 이런 식으로 반박이 들어 왔어요. “목사님은 성찬식과 세례식을 인정하지 않습니까?” 라고 이야기해요. 천주교는 일곱 가지인데 다섯 가지 없애고 두 가지 남겨 놓았는데 이게 개혁주의적인 전통인데 이 정당한 전통을 목사님은 모독하고 무시하렵니까? 이렇게 나왔어요.

여러분, 세례식, 성만찬 하려면 아무나 못해요. 사찰집사도 못합니다. 목사가 해야 돼요. 목사가 하려면 가운 하나 걸치고 해야 하고 뭐 해야 돼요. 자, 이렇게 되면 이건 어디로 가느냐 하면 신령과 진정의 예배와 상관없이 형식을 갖추어야 됩니다. 갖추게 되면 그 시작하는 시간이 있어요. 오전 몇 시가 있어요. 끝나는 시간이 있어요. 오후 몇 시가 돼버려요. 그러면 시간도 저촉을 받고 공간도 저촉을 받아요. 문제는, 그거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닌데 그걸 해놓고 특별한 예배를 드렸다고 여기는 그 감(感), 느낌이 주님의 신령과 진정한 예배를 훼손하고 방해하고 있습니다.

왜 십일조가 없다고 하고 십일조를 하지 말라고 하는 이유가 이게 십일조를 하게 되면 십일조를 한 느낌이 오기 때문에 그래요. 여러분 음식을 먹을 때 뭘 느낍니까? 식감이 있어야 된대요. 식감! 사람들이 예배하는 건 예배 감각을 느끼려고 하는 겁니다. “오늘 예배 드렸다.” 감각을 느끼려고 하는 거예요. 그러나 제가 설교 처음에 이야기 했죠. 이쪽 육적 노선에서 영적 노선으로 갈 때는 특징이 뭐냐 하면 바로 죄를 깨닫는 겁니다. 십일조 하세요. 아, 이거 유혹이 되는데. 헌금 하세요. 전도 하세요. 하면서 죄를 느끼면 그것이 바로 영적 노선에 이미 포함됐다는 뜻입니다.

말라기 보세요. 보시고 이거 하세요. 말라기 보시면 이걸 하면서 왜 예수님만 제사장인지, 목사는 제사장이 아니고. 왜 우리는 제사장이 될 수 없는지 다시 한 번 느끼는 감이, 식감이, 감이 잡혀야 돼요. 성경 말씀은 벌거벗은 채로 노출시키거든요. 어떤 성경 말씀을 보시면서 그것이 죄, 우리를 죄라고 깨닫게 하시고 주께서는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구약적 방식이 아니고 신약적 방식입니다. 옛 술은 옛 부대에 담으세요. 하지만 새 술은 절대로 형식과 절차에 의해서 담길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어디에 담기는가. 우리를 죄인 되게 만드는 우리 자체에 담기게 돼요. 그럴 때, 로마서 12장에 영적 예배는 너 모든 것을 그냥, 너 자신을 내놓아라. 죄 좋아. 이리와. 가져와. 이리 가져와. 그 죄를 드리세요. 그러면 죄가 어떻게 하나님의 의로 변하는지, 그 백 원짜리 동전이 중요하거든요.

설교 다시 해볼까요? 카트에다 물건 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존재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 주님의 존재와 내 존재가 이어지는, 예수님과 제사장이 이어지는 그 피, 그 피에 다시 한 번 정박아처럼 진짜 거기에 몰두하시기 바랍니다. 하루하루 사시면서 아! 이것이 왜 죄냐? 여러분, 저녁 때 걱정 되죠? 보세요. 또 틀렸잖아요. 내일 염려는 언제 하라? 내일 하라고 분명히 언급을 했는데 아침에 딸랑딸랑 진짜 말씀 들고 왔지만 우리는 저녁 되면 “아, 내일 아침에 공사하는데 저 책 우에 다 치우지?” 진짜 내일 아침에 공사해요. 우리 집에. 이게 잠이 옵니까? 성경에 분명히 내일 염려는 내일 하라고 하는데 그 말씀은 왜 못 지켜요? 원래 못 지키는 육신을, 선악과 육체를 받았기 때문에 못 지키는 겁니다. 맞지도 않는 청바지 껴입지 마시고. 두두둑 다 터지게 되어 있어요. 늘 터지세요. 터지시고 피로써 봉합하세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레위 언약의 중심에 피가 있었는데 우리는 그것이 어디에 쓸데 있는지를 깨닫지 못하고 그저 구원 챙기고 도망치기 바빴습니다. 이제는 매일같이 우리가 제사장 언약이 살아 있는 제사장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