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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라기 1강-야곱과 에서(말1:1-5)이근호140525

아빠와 함께 2014. 7. 2. 07:55

 

2014-05-25 14:52:59 조회 : 358         
   야곱과 에서 140525 이름 : 이근호   
 
야곱과 에서(말라기 1:1-5)
음성             동영상
 

 이근호 14-05-25 15:50 
야곱과 에서 

2014년 5월 25일                       본문 말씀 :  말라기 1:1-5 

(1:1) 여호와께서 말라기로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신 경고라 

(1:2)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1:3) 에서는 미워하였으며 그의 산들을 황무케 하였고 그의 산업을 광야의 시랑에게 붙였느니라 

(1:4) 에돔은 말하기를 우리가 무너뜨림을 당하였으나 황페된 곳을 다시 쌓으리라 하거니와 나 만군의 여호와는 이르노라 그들은 쌓을지라도 나는 헐리라 사람들이 그들을 일컬어 악한 지경이라 할 것이요 여호와의 영영한 진노를 받은 백성이라 할 것이며 

(1:5) 너희는 목도하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지경 밖에서 크시다 하리라 

말라기는 구약의 제일 마지막 예언서입니다. 그 전의 예언서에서부터 줄기차게 달려왔다고 생각해보면 전의 예언서의 내용이 무엇이었던가요? 그것은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율법을 위반했기에 이 하나님이 나서서 친히 멸망시키고야 말리라입니다. 이것을 간단하게 요약하면, “망한다”입니다. 

이 사실을 전체 인간으로 확대시키면, “인간은 망하도록 만들어졌다”입니다. 인간이 되어서 안 망하겠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도중에 질 나쁜 세력이 끼어들어 인간의 정신을 흐려놓았기 때문입니다. 망할 수 밖에 없는 인간에게 새삼 무엇을 요구한다는 것은 없습니다. 

단지 모든 일을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야 일관되게 조치하겠다는 이 하나님의 의도에는 변함이 없음을 분명히 하십니다. 말라기도 그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 요구하는 바는 ‘하나님이 주신 그 사랑’입니다. 말라기에 도달해서 사랑을 언급한다는 것은 ‘사랑했음’의 차원에서 다루겠다는 겁니다. 

즉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인간과 더불어 뭘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기 위해 이스라엘에게 찾아간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미 주신 그 사랑을 사랑답게 드러내기 위한 조치가 취해진다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사랑만이 아닙니다. 미움도 있습니다. 흔히들 사랑에 정신 팔려버리면 ‘하나님의 미워하심’은 마치 부록처럼 여길 수가 있습니다. 

어쩔 수 없어서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작정하고 미워하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즉 ‘미움을 미움답게 드러내기 위해’ 하나님의 미움에 나서십니다. 조건부로 미워하는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처럼 인간하고 흥정하거나 타협하거나 협상하지 않으시는 이유는 인간이 생각하는 모든 것들이 본인의 절대적 자리를 보전하기 위해 의지의 천명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즉 나를 포기하면서까지 하나님을 섬길 마음은 애초에 들어있지 때문입니다. 말라기 오기 전에 이미 숱한 선지자들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멸망’을 언급하신 이유는, 미움과 사랑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나름대로의 원칙에 따로 준비해주신 바가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존재 의미란 본인들이 내놓은 것으로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부여된 것으로 생겨납니다. 

이 의미를 아는데 있어 이론적으로 공부한다고 알게 되는 게 아니라 역시 하나님에 조치에 의해서 모든 것이 무너지고 깨어지는 와중에서 드러나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야곱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야곱에게 있어 에서는 결코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자신의 야망을 방해하는 장애물일 뿐입니다. 

야곱은 형 에서의 자리가 탐이 나는 겁니다. 하나님의 상속권 전부를 받으니까요. 소위 실제적인 복 수여자가 된다는 것이 야곱으로 하여금 새로운 욕망을 유발하게 만든 것입니다. 결국 야곱은 현재 자신을 사랑하고 그 사랑을 키워나가려고 합니다. 야곱의 이러한 성향이 그대로 줄기차게 이스라엘 역사 속으로 흘러들어왔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여전합니다. 사람이 자신을 위해 살지 누구를 위해 산단 말입니까? 자기 빼놓고 더 귀한 존재가 어디있단 말입니까? 이러한 잘못된 삶에 대해서 하나님의 대처 방식은 미움과 사랑입니다.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듯이 하는 그 사랑을 ‘하나님의 사랑’과 연결시킬 수는 없습니다. 

또한 사람들이 미워하는 그 미움에도, ‘하나님의 미움’과 연결될 수는 없습니다. 야곱 자체가 변화되어야 합니다. 야곱에게 있어 형의 자리가 탐이 난다는 것은 곧 자신이 형 자리에 가봤자 기껏 에서로 변할 뿐입니다. 형이 동생이 되고, 동생이 형이 되어도 그 바탕은 달라질 게 없습니다. 

변화의 요소는 제 3의 인물의 주입으로만 가능합니다. 에서와 야곱, 둘 사이에 새로운 인물이 등장합니다. 그 이름은 ‘이스라엘’이며 이 인물에 의해서 새로운 미움과 사랑이 방출됩니다. 쉽게 말해서 주체의 분열이 일어나야 하며 그 와중에서 그동안 인간을 떠 바친 자리의 본질이 공개되는데 그 공개된 자리의 성격이 바로 사랑과 미움입니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예언서에서 언급한 ‘이스라엘 멸망’을 생각해봐야 합니다. 이 멸망이 미움인지 아니면 사랑인지를 다시금 생각해봐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게 사랑이라는 겁니다. 에돔, 즉 에서의 혈통에서는 주어지지 않는 복이라는 겁니다. 자신의 깨어짐이 없으면 하나님이 준비된 사랑과 미움도 나오지 않는 법입니다. 

그동안 사람들이 생각했던 복이나 저주라는 것은 이미 야곱과 에서 두 사람의 관계를 통해서 알려진 바가 있습니다. 즉 자신이 다치지 않고 곱게 계속 확장되는 것을 복이라고 여기고 그 반대를 저주라고 본 것입니다. 하지만 진정 복의 수여자인 야곱은 에서가 겪지 않을 다른 코스로 그의 인생이 인도받게 됩니다. 

그 코스에는 참된 사랑과 미움을 행사할 분이 대기해 있습니다. 그 분을 만나야 합니다. 그리고 야곱은 자기 중심성이 그 분을 만나는 순간, 다 깨어져버려야 합니다. 야곱은 ‘하나님 앞에서의 죽음’을 경험하게 됩니다. 에서는 그런 경험을 갖지를 못했습니다. 이 야곱의 경험은 줄곧 이스라엘이 국가적으로 경험해야 할 것으로 전환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멸망한 시점에서 최종적으로 사랑을 끄집어내시는 겁니다. 그리고 에서에 대한 미움도 끄집어내십니다. 즉 자신이 기대치보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사랑과 미움이 우선임을 알리려 하십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멸망당하는 그 과정 하나까지 결코 하나님의 계획에서 제외되는게 아닙니다. 

야곱이 야곱답게 철저하게 활용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최종 복과 최종 저주로 치닫게 하십니다. 창세기 27장에 나오는 에서가 받은 저주나 창세기 4장에 나오는 가인에 대한 하나님의 처벌 수준은 오늘날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일반인들의 입장에서는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일상의 삶처럼 느껴질 것입니다. 

즉 “내 인생은 내가 꾸려나간다” 식입니다. 오늘날 보편화된 자의식 강한 인간들의 일상의 삶처럼 보입니다. 따라서 세상에서의 성공은 곧 저주입니다. 왜냐하면 참된 사랑을 가려버리기 때문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됨을 아는 바로 그것은 복임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4-05-30 20:42 
1강-말라기 1장 1절-5절(야곱과 에서)140525-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말라기 1절에서 5절입니다. 구약성경 1327페이지입니다. 

“여호와께서 말라기로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신 경고(警告)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으며 그의 산들을 황무케 하였고 그의 산업을 광야의 시랑에게 붙였느니라 에돔은 말하기를 우리가 무너뜨림을 당하였으나 황폐된 곳을 다시 쌓으리라 하거니와 나 만군의 여호와는 이르노라 그들은 쌓을지라도 나는 헐리라 사람들이 그들을 일컬어 악한 지경이라 할 것이요 여호와의 영영한 진노를 받은 백성이라 할 것이며 너희는 목도(目睹)하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지경 밖에서 크시다 하리리라” 

말라기를 이제 하게 되는데요. 말라기 하면 구약의 제일 마지막 대목입니다. 구약의 제일 마지막 대목에 와서, 그전까지 우리가 쭉 해왔던 구약의 그전에 있던 말씀들, 여러 가지 선지자들, 예레미야, 이사야, 그들을 쭉 지켜 오면서 한마디로 내용이 뭐냐 하면 이거였습니다. 너희들이 이스라엘이라 할지라도, 유대라 할지라도, 언약이 있다 할지라도 반드시 내가 너희들을 멸망시키리라 하는 그 내용이었어요. 그 여호와의 날이 오게 되면, 심판의 날이 오게 되면 너희들도 망하고 이방도 망한다, 라는 그 내용이었습니다. 이것을 합쳐보면 다 망한다, 였습니다. 올(all)망하는 거, 다 망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신 이유가 망하라고 만드신 겁니다. 이게 복음으로 받아들이면 정말 좋겠습니다. 망하라고 인간 만든 거예요. 망하라고. 구약 전체가 그렇거든요. 신약을 설교하면서 구약을 언급을 안 해버리니까 신약에 와서 하나님이 봐주는 것처럼 그렇게 생각을 하는데,  구약을 거쳐서 신약에 와보세요. 인간은 원래 망하게 되어 있다. 원래 인간은 망하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뭔 딴생각을 하느냐 말이죠. 하나님은 거룩합니다. 우리는 거룩하지 않습니다.
거룩한 분과 거룩하지 않은 우리의 만남은 망하는 거 외에는 다른 현실이 없어요. 당연한 겁니다. 

우리는 하나님 만나는 것을 거부하니까 옹기종기 인간들끼리 모였는데, 인간들끼리 모여서 나잘났네 해봤자, 투표해봐야, 투표할지 모르겠지만, 투표해봤자 그 투표가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는 투표입니까? 인정 못 받거든요. 우리가 하나의 가장으로서 식구들한테 인정을 받더라도 그것이, 식구들한테 인정을 받는 그것을 근거로 “하나님 참 저를 가장답게 해주실 겁니다.” 라는 그런 오해는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말라기에 와서, 다시 말해서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에 와서 주님께서는 뭘 끄집어 내시는가. 사랑을 끄집어 내십니다. 망하는 거 맞는데, “너희들도 망하는 거 인정하지?” “네. 인정합니다.” “인정하지?” “인정합니다.” 그런데 망하는 거 맞는데, 너희들에게서 나올 것은 더러운 것만 나오는 거 맞는데, 더럽거든, 더러운데 사랑해줄게 이렇게 되는 거예요. 이뻐서 사랑해 주는 것이 아니고 훌륭해서가 아니라 더러운 거 맞는데, 너도 알고 나도 알고 맞는데, 더러움에도 불구하고, in spite of 숙어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말로는 not to but to 용법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니 사랑해줄게. 이렇게 되는 겁니다. 우리가 사랑이라는 말을 붙일 때 어떤 흥정하듯이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가 사랑했기 때문에 니도 사랑해야 한다 라는 이런 식으로 주고 받는 시장통에서 하는 거래성 사랑은, 그런 사랑은 부부사이에서 하시고. 부부사이에나 일어나는 일이고. 하나님한테는 그런 거래는 없습니다. 니 못난 거 알고 다 아는데, 그런데 니 사랑해줄게 라고 이야기 하십니다. 

그래서 말라기 끝나고 난 뒤에 “니 사랑해줄게.”를, 너 사랑해줄게. 여섯자거든요. 여섯자를 인물로 만들어 보세요. 하나의 인형같은 인물로 만들어 버리면 예수님이예요. 마지막 사랑해줄게가 사람으로, 그냥 말이 아니라 실제로 우리를 대체할 인물로서 와서 사랑 못 받는 우리가 사랑받게 하는 어떤 조치가 취해지는데 그 조치로 등장한 인물이 예수님입니다. 따라서 예수님 바라볼 때는 반드시 구약에 서서 바라봐야 합니다. 뭡니까? 우리는 못난 거 맞는데요. 이렇게 돼야 합니다. 우리는 구원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확실합니다. 분명히 그 선에 서야 합니다. 달리기 할 때 출발선에 나가지 말고 똑같이 출발선에 나란히 서서 해야 돼요. 그 선 자리가 우리는 사랑해주지 아니하면 당연히 망한다는 그 자리, 확 깨지는 자리가 그 선에 있어야 됩니다. 

그 다음에 그 선에서 내가 빨리 달리느냐, 늦게 달리느냐 소용없는 거예요. 가만있어 내가 찾아 갈거야. 찾아 가는데, 그게 뭐냐 하면 2절에 나옵니다.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했다.” 야곱은 사랑했고 에서는 미워했다. 이것은 그냥 출발선에 둘이 설쳐도 소용없고 가만히 있어. 그러나 한쪽은, 야곱은 사랑했어요. 그런데 흔히 사람들이 좋은것만, 사랑만 생각하는데, 옆에 있는 쪽은, 미워했다는 것은 자꾸 우리가 간과하고 놓치는 경향이 많은데, 하나님이 누굴 미워했다 라는 것에 대해서 사실 우리가 안타까운 마음을 갖고 있어야 돼요. 

“저 사람은 내가 교회 나오라고 해도 교회 생전 안 나오고 말이야. 같은 식구라도 교회 안 나오고 말이야.” 이렇게 되면 내가 미워하는 것이 되면 안 돼요. 그러면 그 식구가 교회 나오면 갑자기 예뻐지고 잘해주고 이러잖아요. 그러면 너무나 인간적이죠. 자기 자존심과 결부되기 때문에 그것은 옳지 않고. 누가 하나님을 믿지 않고 교회 안 나오거든 그거는 한창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중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교회 안 나오는 쪽에서도 하나님의 작업과 일하심을 발췌해 낼 수 있는 안목이 있어야 돼요. “아, 지금 주님께서 미워하시는 중이구나.” “아, 저렇게 미워하시는구나.” 하시면 됩니다. 

그러면 그 다음에 우리가 궁금한 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께 저주받으면, 저주받는 경우가 어떤 경우를 가지고 저주받는다고 하는가? 이게 또 궁금해요. 그러면 복 받는다는 것이 무슨 의미냐? 이게 궁금한데, 여러분 저주받는다는 것이 저주의 발달 역사가 있어요. 저주받는다는 것이 에서와 야곱과 관련해서 창세기 27장에 보면 에서가 저주받는데요, 그 대목을, 뭐가 저주받는지 궁금하죠? 그 저주에 대해서 제가 그 대목을 읽어드릴게요. “아, 이게 저주구나!” 라고 생각하시면서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창세기 27장 39절, 40절에 보면 “그 아비 이삭이 그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너의 주소는 땅의 기름짐에서 뜨고내리는 하늘 이슬에서 뜰 것이며 너는 칼을 믿고 생활하겠고 네 아우를 섬길 것이며 네가 매임을 벗을 때에는 그 멍에를 네 목에서 떨쳐 버리리라” 이게 하나님이 에서에게 내린 저주입니다. 별 저주같지도 않죠? 별로 저주같지도 않잖아요? 

우리가 알고 있는 저주 값이라고 한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흥부전에 나오는 놀부가 받는 저주 정도는 돼야 그게 저주지. 이거 뭡니까? 너의 주소는...뜰 것이며..이사가면 되지. 칼을 믿고...보디가드 있으니까 성공한 셈인데. 니 아우를 섬기며...직장생활 하는 사람들 다 섬기야 월급타는데. 저주네요. 저주의 발달사가 나옵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저주는 유황불 들어가는 거예요. 유황불 들어가거든요. 요한계시록 20장에. 우리는 유황불 들어가는 것에 대해 생각하기를 “아, 뜨겁겠다!” 이것만 생각하거든요. 

그러나 유황불 들어가는 저주는 저주의 최종상태고. 그 앞서서 저주가, 저주가 어떤 것이라는 것이 계속해서 나옵니다. 그런데 그 나오는 저주가요, 저주의 모양새가 이상스럽게 우리가 이 땅에서 추구하는 생의 목표와 너무나 닮아 있습니다. 창세기 4장에서 가인이 아벨을 죽이고 저주를 받아요. 그런데 저주받는 그 결과가 뭐냐, 가인이 요새말로 하면 재벌된 거예요. 저줍니다. 재벌되면 뭐합니까? 지금 10일째 눈도 못 뜨고 있는데. 우리나라 최고의 병원 삼성병원에서. 우리나라 최고의 부자가 지금 눈을 못 뜨고 있어요. 원래 5일되면 눈 뜨게 되어 있는데 이건 죽은 것도 아니고 산 것도 아니고. 벌써 며칠째 지금 눈을 못 뜨고 있습니다. 일반병동으로 옯겼다고 하는데 그것이 일반병동이 아니고 중환자가 가는 병동이예요. 대체 재산이 수조나 되는데, 자기가 재산이 수조원이 되는 것이 저주인지 그동안 몰랐던 거예요. 이게 수조원 재산이 저주인줄 몰랐어요. 

예수님이 이야기 했거든요. 부자는 저주받는 자다. 왜? 부자가 아무리 노력해도 천국에 못 가니까요. 부자 청년이 예수님한테 와서 천국가려고 얼쩡거렸는데, “너가 복이라고 여긴 것을 다 버려라 그리고 날 따르라” 하니까 또 그 말에 자기가 복이라고 여겼는데 주님 보시기에는 영생에 방해되는 방해물로 본 거예요. 차라리 탕자가 나았을걸. 차라리 탕자시절이 좋았는데. 탕자는 자기 것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 것으로 살 잖아요. 요새 같으면 자립심도 없고 그래요. 아버지 것으로 산다니까. 요새 아버지 같으면 기겁을 하겠어요. 뭐, 탕자입니다 하면서 들어가서 살면 기겁을 할 것 아닙니까? 

이게 부자가 되어 놓으니까 주님의 마지막 제안에 넘어서지를 못하는 겁니다. 물이 넘치지 않도록 봉화있죠? 댐을 쌓는 거예요. 이명박 전 대통령이 업적이죠. 4대강 개발. 하나님께서 걸림돌을 주신 거예요. 왜냐하면 내가 알아서 축복받고 저주 안 받을께 라는 결정을 못하도록 걸림돌을, 울타리를 만든 거예요. 아무리 구원받고 싶어도 막상 주님이 제시하는 울타리를 넘어 설 수가 없습니다. 에서가 장남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죠? 에서가 장남이죠. 

여러분 장남할래? 차남할래? 라고 단박에 물으면 우리는 차남할래 라고 합니다. 왜? 한국은 제사드리고 책임져야 하고 동생들 학비댄다고. 옛날 영화에 보면 누나가 자기는 대학도 못 가면서, 자기는 술집에서 일하면서 그 돈 가지고 동생들 대학 보낸다고 하는 그런 눈물겨운 사연이 얼마나 많습니까? 아침에 TV소설 보면 60년대 고생한 것이 쭉 나온다 말이죠. 이렇게 장남은 부담이 되는데. 만약에요, 유산을 장남에게 다 몰아준다면, 이거는 둘 가는게 아니고요, 한쪽으로 올인하는 거예요. 뭐, 전부가 아니면 아무 것도 없이. 한쪽으로 몰아주는데, 장남에게 몰아주면, 장남할래? 차남할래? 라고 하면 다 장남한다고 합니다. 이 에서는 자기의 장남됨을 자랑스러워 했습니다. 그게 저주라는 생각을 감히 상상도 못 했죠. 

자, 그 다음에 생각해 봅시다. 야곱은 형이 탐나는 것이 아니고 형의 자리가 탐나는 거예요. 장남이 탐나는 거예요. 하늘의 복을 탐내는 거예요. 복을 가진 자도 복이라고 우기는 그것도 문제지만, 그 복을 복이라고 그것을 탐내고 노리는 그 자도 역시 똑같은 인간이예요. 무슨 말이냐 하면은, 장남이 에서인데, 에서가 저주받고 야곱이 나중에 장남의 복을 받았다. 그래서 야곱은 장남 복을 받아 가지고 지가 기분이 좋았다. 이렇게 해버리면 그 장남 에서나, 차남 야곱이나 그렇고 그런 인간, 똑같은 인간이예요. 

그러니까 오늘 본문 설교 할 때 주의해야 합니다. 차마 이런 설교에 대해서 여러분 아멘 할 수가 있어요. “여러분 에서가 장남이라고 까불다가 그 장남 동생한테 뺏겼잖아요? 동생이 아버지한테 별미 만들어 드려 가지고 뺏겼잖아요? 여러분들은 이 땅에서 힘들지만 참으세요. 언젠가는 여러분들이 부러워하는 세상 모든 것을 여러분들이 차지할 수 있습니다.” 라고 설교 할 때, 지금 아멘! 아멘! 아멘! 하고 싶어서 입이 근질거리는데, 그거 아멘 하면 안 돼요. 그래 가지고 장남 돼봐야 그 놈이 또 에서예요. 그 놈이 에서라구요. 하나님 힘 이용해 가지고 지가 못 가진 한을 풀려고 교회에 온 거예요. 

건강이라든지, 가정 화평, 또는 돈 이것이 축복이 아니란 말이죠. 그것이 하나님이 계시는 하나님의 흔적이 될 수가 없는 겁니다. 그것 가지고 들이대봐야 하나님이 천국 안 넣어 줍니다. 천국 못 가면 인생 끝난 거죠. 그것은 미움받은 거예요. 그래서 예수 모르는 사람은, 이건희고 뭐고 간에 “미움 받아서 부자되세요.” 부자되세요. 저는 이사 갈 때에, 휴지 상표 보면 가슴이 아픕니다. 잘 되는 집. 두루마리 휴지에 있거든요. 옛날에 성냥에도 있었거든요. 얼마나 가슴이 아픈지. 그게 저주인데. 그게 저주거든요.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에서가 야곱을 모방한다. 또는 야곱이 잘 되니까 에서가 야곱을 부러워한다. 1과 1은 아무 의미 없어요. 서로 서로, 여러분 수건돌리기는 둘이서 못합니다. 그렇잖아요? 초등학교 소풍가서 수건돌리기 두명이서 합니까? 게임이 되겠어요? 제 3의 인물이 등장해야 합니다. 너도 아니고 나도 아니고. 출발선에 너도 아니고 나도 아니야. 하나님은 야곱을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야곱을 사랑하라고 확정지워준 그 확정자를 주님은 사랑하십니다. 에서는 미워하고 야곱을 구원하기로 창세전에 확정 지어진 그 상대를 하나님은 사랑합니다. 그 분이 누구냐 하면 예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바로 에서를 사랑하기 전에 예수님이 먼저 야곱의 자리에 들어 와요. 야곱의 자리에 오게 되면 야곱이 뭘 발견해야만 하냐면 내가 복 받은 자가 아니고 나의 자리가 복 받은 자리예요. 나의 자리가. 나의 뿔이. 아까 우리가 에서가 저주받은 내용을 보았죠. 창세기 27장. 그것을 딱 보니까 뭐가 생각이 납니까? 특징이 뭐냐 하면은, 이게 떠돌이가 된다는 거예요. 저주가. 가인이 받았던 그것도 떠돌이예요. 자리가 없어요. 확정된 자리가 없어요. 만약에 삼성그룹의 이건희 회장이다. 재산은 많다. 그게 자기의 영원한 생명을 바칠 자리가 보장이 됩니까? 나중에 주님이 심판하러 오셨을 때 돈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 돈으로 구원 못 받는다고 성경에 나와 있거든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온다 할지라도 건드리지 못하는 자리. 그 자리가 발견되면 여러분, 이미 복 속에서 복덩어리로 사는 거예요. 진짜 복 하니까 생각이 나는데, 제가 초등학교 때, 음력 1월 15일이 되게 되면 우리 집이 비산동에서 좀 사는 집이었거든요. 건물 건평만 72평인가? 어머니 그렇지요? 비산동 144번지. 좀 사는 집이니까 맨날 정월 초하루 되면 복조리가 던져져 있어요. 그 다음에 아르바이트 학생들 교복입고 와 가지고 복조리 값 내놓으라고 했는데. 그만큼 인간들은 복을 원하고 있거든요. 

그런데 그 복은 우리가 일대일, 제 3의 인물이 등장하지 않고서는 복이 눈에 보이지를 않습니다. 그러면 “너도 안 믿고 나도 안 믿고 주님 믿으면 복 오겠지.” 우리 이렇게 생각하잖아요? 그게 또 안 되거든요. 왜그리 말이 복잡합니까? 하시는데, 이런 거예요. 우리 주체가 분열 되야 돼요. “나는 이제는 이 세상 복을 원하지 않고 주님의 복만 원합니다.” 그걸 가지고 개코하거든요. 개코로! 인간은 절대 그럴 수 없어요. 여기 타이밍 맞춰서 아멘이 나와야 돼요. 인간은 절대로!! “나는 이제는 세상 복 원하지 않고 주님만 원합니다.” 인간은 절대로 안 됩니다. 그게 아직까지 돈이 별로 없어서 그래요. 돈이 없다가 누가 유산 삼아서 한 40억 주게 되면 “에이씨, 누가 가져가 버려라.” 이러지 않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주님 지키는 것이 아니고 그 돈 지키는데 평생을 이 한몸 다 바칩니다. 그 돈 지킨다고. 그 돈 부풀린다고. 포트폴리오 해가지고 펀드 얼마 넣고 새마을 금고 얼마 넣고 머리 싸매고 이것을 어떻게 해서 애들 안 주기로 하고 잘하는 애들은....온갖...또 소문내면 안 되고 또 애들 집에 다 들어온다고 하니까. 집에 못 들어오게 만들어야 되고. 

어떤 인간도 “나는 돈 보다 주님을 더 사랑합니다.” 라는 인간은 없어요. 그래서 성경에 뭐라고 하느냐면 돈을 사랑한 것이 일만 악의 뿌리라는 말씀을 죽을 때까지 우리에게 계속해서 가시로 주시는 겁니다. 우리는 돈 이외에는 아무 것도 좋아하는 것이 없어요. 이거는 뭐 어떻게 해도 돈이 중요한 거예요. 남편이고 자식이고 다 필요 없어요. 돈이 제일 중요한 거예요. 누구는 돈 보다 사랑이 낫다고 노래 부르는데 돈 많이 버니까 그런 거지요. 사실은 돈 낳고 사람 낳죠. 사람 낳고 돈 안 낳았어요. 이거는 자본주의를 몰라서 그래요. 자본주의는 돈 없으면 사람 취급이 안 됩니다. 돈이 있을 때 그 사람이 대우 받고 은행에서 신용 있다고 인정받고 주위에서 알아주고 하는 거예요. 

따라서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했다는 이 말씀은 남의 이야기예요. 사실 우리는 좋은 것이 따로 있어요. 이런 사랑 우리는 원한 적도 없고 주님이 사랑해 봐야 그거 말만 하지 말고 돈으로, 현찰로 달라고 지금 우리는 그런 입장에 있어요. 자, 그러면 이 분열이 어떻게 되는가. 여러분 한번 생각해 봅시다. 마을이나 도시나 밤이 되면 다 어두워져요. 제 말이 맞지요? 밤이 되면 다 어둡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은 모든 인간은 남 따라 가다가 결국은 스스로 모든 것이 분열되게 되어 있어요. 내가 원하는 내 모습 따로 있고. 내가 안 다치고 싶은 내 모습 따로 있고. 실제 내 주어진 진짜 모습은 또 따로 있어요. 그 간격이 항상 이렇게 간격이 생겨버려요. 간격이 생기니까 그 간격에서 욕망이라는 것이 발생됩니다. 인간은 욕망에 시달려요. 욕망에 시달리는데 그 욕망의 자리가 없는 사람이 없거든요. 

①그 욕망의 자리에서 비집고 나타나시는 것이 주님이 우리를 사랑한, 우리가 사랑한 것이 아니고 우리를 사랑한 주님이 그 욕망의 자리에서 그 욕망과 더불어서 함께 나옵니다. 나와서 우리한테 어느 쪽이냐고 묻습니다. “너 죄를 위해서 흘린 피냐? 아니면 날 이용해서 정작 너가 얻고자 하는 부자되고 싶은, 부자될려고 한 그것이었냐?” 라고 항상 우리에게 묻습니다. “너의 행복이냐? 아니면 너를 사랑한 이 사랑이 중요하냐?”를 묻습니다. ②우리는 우리의 본색대로 주님을 버리고 내가 기대했던, 내가 그리웠던, 내가 생각했던 모든 행복적인 이상향으로 우리는 그쪽으로 가버리죠.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③그쪽에 가게 되면 우리는 그쪽에서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왜냐하면 나에게 욕망을 준 그 힘이 나보다 더 세거든요. 이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내가 뭘 원하고, 주님을 믿고, 예수 믿고 싶어도 내 속에 다른 내가 있는데 그 나는 이런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옳고, 그것이 다 옳다는 것을 알면서도 더 센 내가 나를 꼼짜마라 하고 항상 그쪽으로 데려가는 현상을 우리에게 알려주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야곱이예요. 주님은 그 야곱을 이스라엘로 바꾸어 주시면서 사랑을 이야기 하는 겁니다. 사랑은 우리가 스스로에게 실망스러울 때, 실망스럽게 하시는 그 분이 사랑으로써 우리에게 실망을 반복시키는 행위를 해주시는 겁니다. 세상에 대해서 실망하지 마세요. 나 자신에 대해서, 그것들을 좋아하는, 그것들에 목메는, 그것에 실망스러운 나. 사랑을 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여러분, 야곱이 받았던 복은, 그 복에 대해서 제가 안 봤습니다. 야곱의 복의 발전사의 마지막은 천국이죠. 영생입니다. 아픈 것도 괴로운 것도 없고. 그런데 그것을 공짜로 준다고 하거든요.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거든요. 그것을 값없이 주기까지 우리는 얼마나 불의한 청지기가 되고 얼마나 탕자가 되어야 되겠어요. 탕자나 불의한 청지기가 되기 아니하면 그 세계마저 이거는 내가 노렸던, 내가 원래 원했던 거라고 덥석 가질 수가 있어요. 정말 사랑이 아무 것도 아닌 존재를 그렇게 사랑한다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닌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하는 그 선행작업이, 주체의 분열이, 갈라짐이, 그 메꿔짐이 우리 힘으로 해결이 안 됩니다. 그 사이에서, 우리가 잊어버렸던 사랑이 거기 밑바닥에서 올라옵니다.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그 세리가 했던 고백 있잖아요? 성전에서 했던 고백.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내가 죄를 알 때, 세상에 어떤 일이 일어나도 그것이 행복인 것을. 왜 그동안 너무 바쁘게 산다고 그것을 놓쳐버렸죠. 모든 것이 사랑인데. 사랑 아닌 것이 없었는데. 우리는 사랑인 것과 아닌 것을 골라잡을 위치에 있지도 않으면서 우리는 평소에 저거는 좋은 것이고 저거는 나쁜 것이라고 일방적으로 내 권한을 거기에다 행사한 것이 문제였습니다. 여러분,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했다면 바로 나 자신이 죄인인 것을 모르는 다른 사람을 보세요. 주께서 미워하셔서 자기 잘난체하고 지금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밤이 되면 온갖 마을이 다 어둡기 마련인데 우리는 어떤 곳은 밝고, 어떤 것은 대단하고, 어떤 것은 성공하고, 어떤 것은 출세했고, 어떤 것은 더 행복하다고 착각했습니다. 어둠속에서 비로소 발견되는 주님의 십자가 사랑이 우리의 자리를 받치고 있음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