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아버지
2014년 7월 6일 본문 말씀: 말라기 2: 10-12
(2:10) 우리는 한 아버지를 가지지 아니하였느냐 한 하나님의 지으신 바가 아니냐 어찌하여 우리 각 사람이 자기 형제에게 궤사를 행하여 우리 열조의 언약을 욕되게 하느냐
(2:11) 유다는 궤사를 행하였고 이스라엘과 예루살렘 중에서는 가증한 일을 행하였으며 유다는 여호와의 사랑하시는 그 성결을 욕되게 하여 이방 신의 딸과 결혼하였으니
(2:12) 이 일을 행하는 사람에게 속한 자는 깨는 자나 응답하는 자는 물론이요 만군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는 자도 여호와께서 야곱의 장막 가운데서 끊어 버리시리라
하나님의 말씀은 순수합니다. 문제는 이 순수한 말씀이 우리 안에 들어오게 되면 의미가 뒤틀리게 된다는 겁니다. 이는 이 세대 자체가 악하고 음란해서 그러합니다. 특정 개인을 붙잡고 족치고 닦달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될 게 아닙니다. 온 세상 전체가 다 한마음으로 악하고 음란합니다.
한 개인의 탓으로 돌릴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이 선호하는 것, 사람들이 듣기를 원하는 바는, 바로 “다 같이 죄짓자”입니다. 동조되고 동의될 수밖에 없습니다. 양심이 없어서가 아니라 인간 세상이 속성이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인간 세상이 이러함을 아시면서도 타협하거나 협상할 의사가 없으십니다.
그냥 막무가내로 순수함과 거룩함과 진실됨을 그대로 담아 인간 세계에 전달하십니다. 이렇게 해야 이 인간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하심이 정당화되는 겁니다. 봐주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모릅니다. 하나님의 화 내심의 차원과 수준을 모르기에 당연히 화내심의 강도나 이유에 대해서는 깜깜합니다.
마치 화낼만도 아닌데 화내신다고 의아해 할 판입니다. 좋게 그냥 눈감고 지나갈 만한 일인데도 너무 민감하게 대응하신다고 불편해하는 것이 인간들입니다. 쉽게 화내지 않는 하나님이 인기 있습니다. 인간이 무슨 짓을 해도 못본척 지나가 주시는 그런 하나님에 대해서 고마워할 요량입니다.
아무 일도 없이 좋게 될 결과가 곧 애초부터 좋은 상황을 만든다고 인간들은 일방적으로 우겨댑니다. 야박하지 굴지 않는 하나님만이 인간들을 질식하듯이 밀어붙이지 않는 좋으신 하나님으로 환영받을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서 이렇듯 인간들이 기대하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도리어 정반대이십니다. 하나님의 질책으로 인해 인간들의 마음에 균열이 생기게 됩니다. 자기 딴에 순수와 거룩을 표방했건만 그 거룩이 하나님의 성에 차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문제성 지적으로 인간들은 자기 한계를 벗어난 요구에 직면했습니다. 이제 멀쩡하게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처지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질책에 대해서 인간들은 고작 반응하는 것은, 그 요구를 수용하고 들어주는 정도일 것입니다.
예를 들면, 제사장이 이방딸과 혼인했다고 질책하면 여기서 대한 현명한 반응은, 여호와 믿는 자기 종족의 딸의 혼인하면 된다고 여깁니다. 그렇게 되면 왜 이방딸과 혼인하게 되었는지 그 마음가짐의 본질이 덮히게 될 뿐입니다. 이방딸과 혼인안하면 그것으로 하나님의 모든 법을 지킨 것이 되나요?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법을 만드신 당사자께서 자신의 법을 다 지키고 “이루었다!”고 외치신 취지를 알아야 합니다. 이 말은 곧 진정 하나님의 뜻을 알려면 직접 인간들이 법을 다루려고 덤벼들 것이 아니라 법 제정자를 경유해서 그 본질을 파악해야만 합니다. 법을 만드신 분이 이 땅에 ‘아들’로 오셨습니다.
그렇다면 소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우긴 모든 자들은 다 가짜가 됩니다. 아들도 아닌 자들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아들 행세를 해오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참 뜻과 실천과 실현은 ‘아들이 되셔서’ 오신 바로 그 분에 의해서 모든 것이 종결나버립니다. 느헤미야 13장에서, 그 당시 유대나라가 잘못한 것을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나뉘어 요약하게 됩니다.
1. 십일조 지키기 2. 안식일 지키기, 3. 이방 가정의 딸과 혼인하지 않기입니다. 거기에 비해서 참된 아드님이신 예수님께서 내놓으신 말씀은 십자가 위에서 행하신 “다 이루심”으로 표현하셨습니다. 인간들이 하나님이 요구하신 내용과 정반대편으로 행한다고 해서 그것이 정답이 될 수가 없습니다.
즉 십일조 낸다고 해서 십일조 지킨 것이 아니요, 안식일 지킨다고 해서 안식일 지킨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에게서 나오는 것이 도리어 인간을 더럽히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 7:15-16에 보면,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인간 속에 일종의 보일러가 깔려 있는 겁니다. 이는 모든 법이 새로운 주체를 유발시킨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알 수 있는 일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내부를 밖으로 정립하면서 필히법을 동원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법에서 “하라”라고 하는 것은 반드시 “해내었다”는 평을 받는 쪽으로 자체적으로 새로운 법을 유발합니다.
이 유발된 법에서 나름대로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주체를 조성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 입장에서의 법은 인간 내부를 쪼개는데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복음은 예수님 생애를 경과하면서 ‘비밀’의 차원을 형성하게 됩니다. 비밀은 ‘은폐’되어 있는 겁니다. 숨어있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은 자신에 대해서 알 길이 없습니다.
자신이 어떤 인간인지는 본인이 모릅니다. 단지 인간의 자아란 자기 내부에서 뿜어대는 욕망에 의해서 자체적으로 조달된 법을 뭉쳐서 자기 마음에 드는 주체상을 그때마다 만들어내는 식으로 장착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방딸과 혼인하지 말라”고 하면, 유대인들은 기이어 이방신을 믿는 집안의 딸과 혼인하지 않고 같은 유대인 집안의 딸과 혼사치르면서 하나님의 법읅 지켰노라고 우깁니다.
하지만 정작 법을 제정하시고 친히 그 법을 완전케 하신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서 결혼하시지 않았습니다. 이게 무슨 의미일까요?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내부를 쪼개어 그 안에서 배선되어 있는 죄악의 보일러 배선을 드러내시고자 하십니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 성도도 이 말씀을 접하면서 나름대로 법을 지키려고 할 것이 아니라 이 말씀의 지적을 그대로 우리를 향한 지적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즉 내부가 갈라진 채로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진정한 자아의 모습은 십자가 사건의 당위성을 향하여 펼쳐져야 합니다. 이게 말씀 자체의 거룩성과 엄위함을 증거하는 방식입니다. 이 방식에 놓여진 자만이 진정 성령받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내부가 말씀에 의해서 쪼개지기를 원합니다. 종교로 봉합되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7강-말라기 2장 10절-12절(한 아버지)140706-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말라기 2장 10절에서 12절입니다. 구약성경 1329페이지입니다.
“우리는 한 아버지를 가지지 아니하였느냐 한 하나님의 지으신 바가 아니냐 어찌하여 우리 각 사람이 자기 형제에게 궤사를 행하여 우리 열조의 언약을 욕되게 하느냐 유다는 궤사를 행하였고 이스라엘과 예루살렘 중에서는 가증한 일을 행하였으며 유다는 여호와의 사랑하시는 그 성결을 욕되게 하여 이방 신의 딸과 결혼하였으니 이 일을 행하는 사람에게 속한 자는 깨는 자나 응답하는 자는 물론이요 만군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는 자도 여호와께서 야곱의 장막 가운데서 끊어 버리시리라”
궤사라는 것은 사기 치는 것을 말하는데, 거짓을 하는 거죠. 거짓이라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원본이 있는데, 원래 게 있는데 그 원래 것이 아니고 가짜 가지고 원래 것이라고 우기는 그런 행동이 궤사, 또는 사기 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원래대로 살면 되잖아? 문제는 간단한 문제예요. 그럼 원래대로 살면 되잖아? 라고 이야기 하면 되죠.
그런데 인간 자체가 문제가 있기 때문에, 인간 자체가 문제가 있는 것은요, 그 사람 잘못이 아니고 우리가 태어난 이 세상, 세상 자체가 문제가 있어요. 예수님께서는 한 사람, 한 사람 상대해가지고 똑바로 살아라! 라고 이야기 한 것이 아니고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 했어요. 그냥 우리가 속해 있는 환경 자체가 우리가 같이 한통속이 되어서 놀아나지 않을 수밖에 없게 하는 것이 세상입니다. 제가 이런 말 하면 갑자기 책임감이 확 없어지죠.
우리가 세상을 잘못 산 것은, 가까운 데는 우리가 부모 잘못 만나서, 친구 잘못 만나서 그렇지만 더 넓게 보게 되면 이 세상 자체가 함께 우리는 거짓을 행하는데 이미 한통속이 되어 있습니다. 이 성경대로 나오는 말씀은 순수하거든요. 순수함이라는 것은 원래 만들 때부터 순수하지만 제조공장에서 나올 때부터 이미 고장이 나도록 되어 있는 것처럼, 아무리 잘 굴러가는 기계라도 실제 사용하다보면 고장이 나는 것처럼 처음에 나올 때, 신품, 깨끗함이 이게 다 변질되고 틀어지게 되어 있어요.
여기 성경 자체는 순수합니다. 율법은 선한 것이라고 로마서 7장에 나온 것처럼 우리에게 주는 이 성경 말씀 정말 거룩합니다. 하지만 이 거룩한 말씀이 우리 마음에 와 닿게 되면 우리는 덥석 그 더러운 손을 가지고 깨끗한 말씀을 가지고 자기 유리한대로, 자기 맘대로 요리하고, 자기 유리한 쪽으로 변명하고 정당화 하는데 이게 마구잡이로 잘라지고 훼손됩니다.
10절에 보세요. 우리는 한 아버지를 가졌다. 참 순수하죠. 그런데 우리에게 한 아버지가 있다는데 아버지는 우리가 아는 그 아버지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 아버지라고 하니까 아버지 가지고는 좀 모자라서 어머니까지 만들어 하나님 어머니 섬기자 라고 안 산홍 그쪽이 주장하는데, 뭐 하나 아이디어 생기면 돈이나 생긴다고 실제로 그쪽도 집단을 이루었으니까 성공했다고 볼 수 있죠.
여기서 이야기하는 한 아버지는 순수하지만, 이게 인간에게 왔을 때는 그 아버지가 그 아버지가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아버지를 제대로 아시는 분은 단 한 분밖에 없어요. 아들 되시는 분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아들이 이 땅에 안 오면 누가 아느냐. 아무도 모르죠. “에이, 모세는 하나님 봤잖아요?” 하지만 본들 뭐합니까? 원망했는데, 하나님께 대들었는데요. 아들 아니에요. 히브리서 1장에 보면, 모세는 아들이 아니고 아들 집에 일하는 종이라는 거예요. 문방구 아들이 아니고 점원이라 말이죠. 그런데 아들 없으니까 아들 행세할 수도 있는 문제잖아요.
다시 말씀 드리겠습니다.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아들에게만 해당되지 유사 아들은 해당이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고집부리기를 “내가 네 아버지다.”하시고 그 다음에 줄줄이 아버지에 합당한 말을 내놓으니 아들이 아닌 자가 아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을 들으니 이게 왜곡 아니 될 수가 없지요. 하나님께서는 참 아들에게만 말씀을 주셨는데, 아들 될 잽도 못 되고 아들도 아닌 자들이 아들이고 싶어서, 아들 되어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영원히 섬겨서 구원받고 싶어서 주의 거룩한 말씀을 갖다 가질 때에 그때부터 문제가 되게 됩니다.
식당에 가게 되면, 거기 그 식당에서 나오는 음식들을 이렇게 사진으로 찍은 것이 있어요. 밖에서 보면 정말 맛있게 보입니다. 그리고 여러분 라면 끓일 때, 라면 포장지 나오는 라면그림 보신 적 있지요? 내가 끓여도 그리 나올 것 같은 착각이 들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라면 보면 소고기도 얹어져 있고 맛있는 거...뭐 이건 라면 값 보다 더 많이 부수적인 것이 얹어져 있지만 실제로 라면 봉지에는 그냥 면하고 스프밖에는 없어요. 파도 마른 파, 그것도 진라면 주지 다른 라면은...레시피 그 사진대로 안 됩니다. 식당에 나오는 사진대로 안 됩니다. 먹고 싶어 기대하고 막상 시키면 그림에서 나오는 것처럼 나오지 않습니다.
거룩한 말씀도 일단 내 품에 들어오게 되면 이미 그거는 순수성을 잃어버립니다. 잃어버리죠. 그래서 우리가 성경을 볼 때에 그것을 각오하고 보면 성경 보는 것이 그렇게 양심에 가책되지 않습니다. 그걸 인정하고 보자 이 말이죠. 쉽게 말해서 나는 이 말씀을 이렇게 이해했는데, 그걸 다른 말로 하면 나는 이렇게 곡해하고 있는데 실제로 내 인생 속에서 나를 다루시면서 우리 주님께서는 어떤 새로움으로, 그게 아니다 라는 식으로 어떻게 언급을 하셨는가. 그런 식으로 보시면 되는 겁니다.
다시 말씀 드립니다. 아버지라 할 때, 그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분은 이 세상에 예수님밖에, 아들밖에 없다는 겁니다. 아들밖에 없으면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마치 아들 다루듯이 그렇게 다루니까 고 서로 차이가 나는 점 있죠? 고 차이가 나서 갈라진 고 틈에 오늘날 우리는 그것에다 주목해야 합니다. “아이구, 이 사람들 말이야. 하나님 섬기더니, 하나님을 섬기려면 제대로 섬겨야지.” 이렇게 남의 욕 할 입장이 안 됩니다. 진짜 하나님 말씀과 그 틈 사이, 진짜 아들은 예수님이고 아들도 아니면서 아들 행세를 한 가짜 아들은 유대인이고. 우리는 어느 편에 서야 되지요? 가짜 편에 서서 그들이 아버지로부터 질책 당한 그 질책을, 바로 우리를 향한 사랑의 질책으로 받아 주시면 됩니다. 마음을 그렇게 먹으면 돼요. 이왕 구원받았는데 무슨 소리를 들어도 괜찮아요.
자식이기 때문에 잔소리하지 남의 자식 같으면 잔소리 안 해요. 자식이라 생각하고 잔소리 줄 때, 이 잘못된 것을 대신 처리하신 분이 예수님이니까 율법 지켜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 믿는 믿음 자체가 하나님의 의가됨을 다시 한 번 우리가 느끼면서 살면 그게 신앙생활입니다. “목사님, 어떻게 살면 됩니까? 예수 믿고 어떻게 살면 됩니까?” 참, 질문도 많이 받았는데 그것은 저한테 물을 것이 아니고 실지로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의는 율법 외에 한 의, 예수님의 십자가에 주신 의로써 값없이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되새기면서 감사하며 사시면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질책하는 지점을, 갈라지는 지점을 보자는 거예요. 뭐라고 유대인보고 질책을 했느냐 하면 이렇게 했습니다. 11절에 보면 “유다는 여호와의 사랑하시는 그 성결을 욕되게 하여 이방 신의 딸과 결혼하였으니”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허, 이거 질책을 해도, “그릇 똑바로 닦아” 이정도 질책을 하면 우리가 해낼 수 있는데, 이게 뭐냐 하면 결혼 문제까지 깊숙이 개입을 해서 말씀대로 아들답지 못한 행동을 했다고 질책을 하는 겁니다. 이방 신의 딸과 결혼했다는 겁니다. 이방 신의 딸과.
그러면 이렇게 질책을 받았으면, 우리의 한계가 이래요. 이방 신의 딸과 결혼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위반된다면, 여호와 믿는 딸과 결혼하면 율법을 지킨 것이 되겠네요? 우리는 이쪽이 잘못되었다고 하면 반대쪽으로 가면 정당하다고 생각되거든요. 제 질문이 어떻습니까? 이방 신의 딸과, 교회 다니는 사람이 불교 신자와 결혼했다. 그것이 잘못이라면 그러면 교회 다니는 아가씨 하고 아들하고 결혼시키면 그것은 잘한 짓이 되는 겁니까?
모든 성경 말씀은 아들이 지킵니다. 아들은 누구냐 하면 예수님이 아들입니다. 벌써 세 번째 이야기 합니다. 예수님 결혼 했습니까? 몰라, 중매 들어 왔는지 모르겠어요. 소개팅 했는지 모르겠어요. 예수님 결혼 했습니까? 아예 예수님은 결혼도 안 했어요. 그러면 이방 딸과의 결혼하기의 반대말은 결혼 안 하기가 되는 거죠. 아예 결혼 안 하기가 되는 겁니다. 더 나가 봅시다. 그러면 결혼 안 하면 잘한 짓입니까? 그것도 아니다 이렇게 됩니다. 그러면 어떡하라고! 어떡하라고! 말씀대로 살아도 문제네? 말씀대로 살려고 하는 의지를 가져도 문제가 되네요.
여기서 우리가 이걸 알아야 돼요. 스스로 지칭하는 것과 누가 지칭해주는 차이를 우리가 생각해야 합니다. 나는 이 말씀이 있다. 나는 이 말씀대로 지킨다. 그래서 나는 이 말씀대로 지켰기 때문에 착한 사람이다. 이거는 시작부터 끝까지 스스로 자기를 지칭해서 거기에 맞도록 마감재를 스스로 내려 버렸어요. 이 말은 누가 지칭하는 자가 있어야, 누가 지칭하는 자. 너 이렇다. 너 저렇다. 지칭하는 외부인을 두셔야 되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성경 보면서 외부인을 둘 생각을 안 하고 자기가 다이렉트로 이 말씀을 합당하게 지키는 존재로 스스로 그걸 정립을 하려고 하는 거예요.
제가 오늘 낮에 그런 이야기 했죠? 이름 이야기 했잖아요? 개별적 이름은 소용없다고요. 하나의 독자적인 생각을 하기 때문에.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장 21절에서 예수님의 이름이 개인적 이름인 동시에 그걸 탁 깨보면 다수의 이름이 들어가 있어요. 그 예수라는 이름에. ‘예수’ 라는 이름이 뭔 뜻이냐 하면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자’ 예요. 그러면 그 예수의 이름에 합당하려면 구원될 백성들을 이미 포함한 그 중의 구원자가 예수님이 되는 겁니다. 그리고 그 예수라는 이름은 예수님 본인이, 또 부모가 지은 것이 아니에요. 그 지칭자가 따로 있어요.
그거는 성령께서 예수라는 이름을 지으라고 했다 이 말이죠. 이거는 세례 요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버지가 지으려고 한 것 지워버리고 그냥 요한으로 지었던 거예요. 아브라함도 마찬가지고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예요. 하나님께서 제사법, 레위법이라고 하는데 레위법을 주실 때에 이 법을 그냥 다이렉트로 직접 받지 말고 어디를 경유해서 이 법을 이해해 주셔야 돼요. 이 레위법을 가지고 덥석 성급하게 쥐지 말고. 이 레위법을 가지고 십자가를 경유해서 오시기를 바랍니다. 십자가를 경유하려면 예수님의 행적을 거쳐서 주어지기 바랍니다.
그러면 거기서 나오는 것이 뭐냐 하면 바로 비밀이라는 말이 나와요. ‘비밀’ ‘은폐’ 이거 예비군 훈련받은 사람은 잘 알아요. 그냥 숨기는 것. 숨어 있는 것. 여러분 집에 온수나 보일러가 여러분 눈에 보이던가요? 은폐, 숨어 있죠. 그런데 그게 숨어 있는데 파이프가 낡았는지 모르잖아요? 그런데 어느 날 보니까 아래 집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이거는 그 속에서 썩은 거죠. 우리를 하나의 보일러 파이프가 지나가는 하나의 과정으로써 인간은 만들어졌습니다. 아! 제가 정말 어려운 말을 해서 죄송합니다.
우리 머리부터 발끝까지 뭔가 이렇게 보일러 파이프가 지나가고 있어요. 그리고 우리가 죄를 짓는 것은 파이프가 이물질에 썩어서 외부로써 죄가 나오는 겁니다. 예수님의 행적을 보게 되면 우리 속에 설치돼 있는, 배열되어 있는 파이프에서 어떤 죄가 나오느냐 하는 죄가 나와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바로 우리 나름대로의 법이 나와요. 이왕 어렵게 하는 거 할 수 없다. 어렵게 하나 안 하나 잠이 오기는 마찬가지니까.
법에서 주체가 나옵니다. 어떤 법을 우리가 동원시키고 내가 많은 법을 동원시키는 것은 그 법을 가지고 자기의 주체를 확립하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나 이정도야. 이정도 법을 지켰어.” 그래서 법을 주게 되면 사람들이 좋아하는 이유가, 목사가 “이렇게 하시오. 이게 법이요.” 하게 되면 굉장히 좋아하는 이유가 그걸 지켜냄으로써 “목사님 저 신자 맞지요?” 라고 우길 수 있는 근거를 본인이 확보하는 거예요. 이게 보일러가 썩어서 그래요. 내부 보일러가 썩었기 때문에 그런 게 나왔다 이 말이죠.
하나님의 말씀을 주니까, 그 순수한 말씀이 자기한테 안에 순수하게 설치되어 있다고 착각을 하는 것입니다. 근데 순수하게 설치된 나오는 법 지킴이, 법을 지켰다는 그 법의 모든 것이 막상 예수님과 딱 대조를 해보니까, 예수님은 누구냐 하면 법을 만드신 분이예요. 본인이 만들어 놓고 그 법을 본인이 지키신 분이예요. 예수님 본인이 만든 그 법과 딱 비교를 해보니까 이게 격차가 나는데 이거는 서로 대적관계, 원수관계가 되어 버린 겁니다. 그게 왜냐하면 그걸 가지고 주체가 서로 달라졌다 이렇게 증명할 수 있는 겁니다.
왜 제사장이 이방 신의 딸과 결혼을 했는가. 이유가 있어요. 지금 말라기를 하지만 여러분들이 느헤미야를 보게 되면, 다 안 보겠습니다. 느헤미야는 정말 지루해요. 에스라 느헤미야는 누가 봐도 정말 지루해요. 사람 명단 나오는데 정말 환장합니다. 아나운서 테스트 하는 것 같아요. 남의 이름 죽 나오는데 이거는 정말 별 내용도 없어 보이고 지루하기만 한데, 느헤미야 제일 마지막에 세 가지 법을 어겼다는 겁니다. 하나는 십일조를 하지 않았고 하나는 안식일 지키지 않았고 하나는 이방 딸과 혼인을 했던 것이 문제라는 겁니다.
그런데 한번 보세요. 느헤미야가 백 년 전에 그렇게 해놓고 이백년 후인가 백년 후인가 한 오십년 후인가 확실치 않습니다. 말라기가 그쯤에 나오는데 이 말라기에 보면 똑같은 것으로 질책하는 겁니다. 이것이 뭐냐 하면은요, 인간은 자기가 주체기 때문에 아무리 법이 주의 법이라 해도 자기가 땡기는대로 자기 욕구에 땡기는대로 실천에 옮기기 마련입니다. 이방 여인하고 결혼할 때 일부러 이방 여인하고 결혼하지 않아요. 남자가 여자하고 결혼하는 이유는 딱 하나밖에 없어요. 이뻐서 그런 거예요. 첫째도 이쁘고 두 번째도 이쁘고 세 번째도 이뻐서 그런 거예요. 근데 남들 보기에는 안 이쁜데? 지 눈에 보기에 이뻐요. 여자는 이런 것을 몰라요. 남자는 자기보다 분수에 너무 넘치게 이쁜것도 부담돼요. 고거는 결혼대상자에서 빼버려요. 황신혜라든지..지수준에 맞는 이쁘면, 이정도 같으면 내가 관리대상이 되는 이쁨이 되겠다 이래 생각하는 겁니다.
이게 보일러를 놓았는데 이 보일러가 이미 썩어 버리면 보일러가 논 시멘트하고 관이 한덩어리가 되어 가지고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도 욕심과 욕망의 덩어리로 그대로 덩어리 채로 나오게 마련이에요. 왜 십일조를 하지 않았는가. 돈 좋아서 십일조를 하지 않은 거예요. 왜 이방 여자하고 결혼하는가. 마음에 드니까. 사랑하니까 결혼한 거예요. 왜 안식일을 안 지켰는가. 안식일에 손님이 오니까 가게 문을 여는 거예요. 문제는 이것을 정당화 했다는 겁니다. 어쩔수 없는 것이 아니고 이것을 정당화 했다는 겁니다. 이것을 가르쳤다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해도 괜찮아요.” 이렇게 했다는 겁니다.
아들도 아니면서 하나님의 거룩한 자도, 의인도 아니면서 의인 행세를 한 거예요. 일부러 하나님께서 그걸 방치하시고 질책하시는 겁니다. 그리고 너희들 아버지는 아버지가 아니다. 아들 같으면 절대로 이러지를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뭐라 합니까? 아들 보내주세요. 아들 보내주세요. 그래서 사백년 후에 예수님이 오신 거예요. 왜 하나님의 아들로만, 다른 이름도 아니고, 내 행함이 아니라 아들로만 구원받느냐 하면 너무나 터무니없이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것을 우리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거예요.
이야기 처음부터 다시 가봅시다. 우리를 질책하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를 질책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우리 멱살을 잡고 똑바로 살아라 하고 흔드는 것이 아니고 이 세대 자체가 악하고 음란한 세대예요. 너나 할 것 없이 정답은 없습니다. 진리 없습니다. 누구보고 실수 했다고 다그치는 것이 아니고 전부다 실수하고 있는 거예요. 누구 빼놓고는요? 예수님 빼놓고는요. 그렇다면 진작 그렇게 이야기하지 말라기에서 왜 이런 이야기를 했느냐. 주님께서 예수님 보내기 전에 얼마나 주님께서 화내고 있음을 이스라엘 멸망을 통해서 우리가 같이 공감하라는 겁니다. “아이구, 우리 힘으로 안 됩니다. 예수님 보내주세요.” “그럼 보내줄게.” 이렇게 하면 아무 느낌이 없잖아요.
너희들이 참 아들 같으면 이런 짓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주 혹독하게 고생시키고 인생 험하게 만들어놓고 예수님 보내줌으로 말미암아 예수그리스도의 사랑, 그것이 우리가 잘난체하는 것보다 월등함을 이러한 파괴적인 실제상황을 통해서 다시 한 번 깨닫게 되는 겁니다. 세 가지입니다. 이방 여자하고 결혼했다. 왜 했느냐. 좋아서 결혼한 거예요. 좋아서 결혼하겠다는데 이게 뭐가 문젭니까? 법에 이방 여자하고 결혼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그럼 교회 다니는 여자는 이방 여자 아닙니까? 마찬가지거든요. 교회 다닌다고 해서 다 구원받는다는 뜻은 아니잖아요. 교회 다니다가 언제 또 안 나올지 어떻게 알아요.
그러니까 이 세상은, 우리는 뭔가 하라고 하면 반대로 안 하면 된다고 생각을 하는데, 유대인들은 이방 여자하고 결혼 안 했어요. 그래도 그들은 지옥의 자식이었습니다. 왜? 보일러 배선이 원래 썩어서, 속에서 썩어 나오는 것이 입에 들어가는 것 보다 더 더럽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들만 문제가 아니라 이 세대 자체가 그렇다는 사실을, 그리고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분노하고 화내고 있음을 감안할 때 주님이 주신 사랑이 얼마나 감사한지 다시 한 번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법을 통해서 자기 잘난 맛으로 자기 주체를 확립하면서 나는 정당했습니다로 버티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예수님의 참 모습이 아님을 깨닫게 하시옵소서. 주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그 진정한 의미를 살아가면서 더욱 깊이 파헤쳐지는 그러한 은혜를 받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