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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라기5강-제사장을 지목함(말2:1-4)이근호140622

아빠와 함께 2014. 6. 24. 20:01

2014-06-22 14:59:19 조회 : 60         
   제사장을 지목함 140622 이름 : 이근호   

제사장을 지목함(말라기 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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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14-06-22 15:47 
제사장을 지목함

2014년 6월 22일                        본문 말씀: 말라기 2:1-4

(2:1) 너희 제사장들아 이제 너희에게 이같이 명령하노라

(2:2)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만일 듣지 아니하며 마음에 두지 아니하여 내 이름을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에게 저주를 내려 너희의 복을 저주하리라 내가 이미 저주하였나니 이는 너희가 그것을 마음에 두지 아니하였음이라

(2:3) 보라 내가 너희의 자손을 꾸짖을 것이요 똥 곧 너희 절기의 희생의 똥을 너희 얼굴에 바를 것이라 너희가 그것과 함께 제하여 버림을 당하리라

(2:4)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이 명령을 너희에게 내린 것은 레위와 세운 나의 언약이 항상 있게 하려 함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

창세기 3장에서 하나님께서는 ‘무기물에서 무기물’로 이어진다고 단언합니다. 자살을 한다면 우리는 마치 이 말씀을 성취한 것처럼 여깁니다. 하지만 인간은 기존의 다른 생물들, 즉 참새와 들풀과 다릅니다. 그 다른 점을 가지고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말합니다. 이로서 인간은 단순히 존재하는 것 이상의 정신적 요소, 즉 가치와 의미를 보여주는 매개체가 되어버렸습니다.

예를 들면, 생명나무와 선악과 나무가 나란히 같이 동산 중앙에 있었다는 사실을 감안합시다. 우리 눈에는 생명나무 과실이 최종 목표로 다가옵니다만 선악과를 거치지 않은 한 생명나무의 진수를 알 수가 없게 되어 있습니다. 즉 인간이 “이것 가지고 저것 가지고”가 허락되지 않는 겁니다.

한 쪽을 따먹으면 다른 한 쪽을 따먹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는 무기물에 지나지 않는 인간에게 첨부된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정신적 문제에 대해서 주도적으로 관여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도리어 관여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만약에 인간이 흙에서 와서 흙에서 간다는 사실을 알고 미리 자살해버리면, 즉 이 말씀을 스스로의 실천력으로 성취하게 되면, 죽음 뒤에 주어지는 저주와 심판에 대해서 대단히 낯설게 되어 버립니다.

왜 낯선 내용이 되느냐 하면, 비록 흙으로 되돌아가더라도 그 과정에서 이미 저주와 심판에 내내 인간 인생에 삽입되어 담기게 되기 때문입니다. ‘나의 인생’이란 나라는 육체만으로 설명이 온전히 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요소를 발산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서 인간은 늘 실패하게끔 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단순히 ‘숨 끊어짐’으로 인간의 이야기가 종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준비된 저주는 어디어 근거해서 일어나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이 사실을 미리 알게 된 자들이 바로 성도요, 죽고 난 뒤에 알게 되는 자들이 불신자들입니다. 성도가 알아차린 것은 바로, 하나님은 인간 존재 위주가 아니라 약속 위주라는 사실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에 의해서 미리 죽게 됩니다. 마치 잉크에 빠진 물건을 다기 건져올리게 되면 흠뻑 잉크에 다 젖은채로 끌려지듯이, 하나님께서는, 기껏 인생들이 아는 그런 죽음말고 예수님만이 알고 계시는 그 죽음에 푹잠겨서 되살아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그 죽음 안에서 벌어진 내막을 같이 알게 됩니다.

그 사실은 바로, “죄로 인하여 죽고, 의를 위하여 되살아나아야 하는 분 예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은 모든 아담에 속한 인류가 해내지 못하는 내용입니다. 오로지 예수님 한 분이 해내신 일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이 행적이 끼어들 수가 없이 배척당합니다. 배척하시면서 그 안에서 담아두십니다.

이렇게 되면 성도는 자꾸만 이질적인 요소로 채워지게 됩니다. 여기서 말하는 ‘이질적인 요소’란 인간의 행할 수 없는 내용들을 말합니다. 그 중의 하나가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제물을 드렸는데 그 제물을 받아야 하실 하나님으로부터 도로 면박을 받는 내용입니다. 즉 ‘이질적 내용’이란 다름 아닌 우리 자신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철저하게 사람 취급받지 못하는 처우를 받는 일입니다.

왜 우리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이런 수모를 받아야 하나요? 그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운명을 최종 관심사로 여기고 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 언약입니다. 이 언약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보고 제물에 관심을 두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제물을 바치는 행위가 제물 바치는 제사장 당사자를 더 우선됩니다. 이점을 제사장이 무슨 수로 알아차길것입니까? 그래서 제사장은 늘 실패해야 합니다. 율법으로 온전해지면 아니되는 겁니다.  제물이 불실해서가 아니라 제물을 휘감고 제사장와 제사를 휘감고 있는 레위언약의 취지가 뭔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여기고 여기에 대한 참된 제사언약은 제사장의 실패의 바로 그 현장에서 드러나게 됩니다. 직책과 제물의 연결은 곧 제물과 인간의 연결을 꿔하게 됩니다. 참된 인간이신 예수님에 의해서 모든 레위 언약이 완성이 되는 그 시점에 합류되어야 합니다. 즉 인간은 언약 수행에 늘 실패한다는 사실을 본인들이 인정해야 합니다.

로마서 13:1-2에 보면,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르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름이니 거스르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진정 권세자에게 복종하게 되는 자는, 권세자의 입장에서 그 직책을 본인의 직책이라고 여기는 사람에게만 해당됩니다.

즉 자신은 그 권세를 집행하지도 못하면서 권세자들을 비난하는 자는 그 어떤 악한 권세자로부터 지배를 받아도 할 말이 없게 됩니다. 진정으로 자신이 권세자라는 입장에서 하나님이 명하는 권세를 행사하게 되면 온전한 행사가 터무니없이 성립되지 않음을 알게 됩니다. 인간의 그 어떤 노력으로도 하나님의 명에 온전히 수행할 수 없는 실패자라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합니다.

이렇게 되면 민수기 11:29에 나오는 말씀의 성취는, 언약 준수를 홀로 이루어내시는 하나님의 몫입니다. “모세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나를 두고 시기하느냐 여호와께서 그의 영을 그의 모든 백성에게 주사 다 선지자가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바로 이 사실이 실현된 시기가 신약 시대의 성도들입니다.

그들은 압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자신들보다 약속과 언약을 우선시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특히 제사장은 제물과 더불어 살게 됩니다. 왜 인간에게 제물이 꼭 있어야만 영생을 얻는지를 보이는 자들이 참 선지자요 제사장들입니다. 인간 존재에서는 늘 죄가 유발됩니다. 그 유발된 죄는 레위 언약에 의해서 늘 받아들이면서 레위 언약은 의와 영생과 구원을 생산해 냅니다.

신약의 새언약 완성에 의해 나타난 효력이 갈라디아서 3:27-29에 나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예수님은 자신의 공로를 결코 인간에게 빼앗기지 않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얼굴에 하나님이 뿌린 똥이 날아들면서 비로소 언약이 성취됨을 인정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4-06-25 19:02 
5강-말라기 2장 1절-4절(제사장을 지목함)140622-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말라기 1절에서 4절입니다. 구약성경 1328페이지입니다.

“너희 제사장들아 이제 너희에게 이같이 명령 하노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만일 듣지 아니하며 마음에 두지 아니하여 내 이름을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에게 저주를 내려 너희의 복을 저주하리라 내가 이미 저주하였나니 이는 너희가 그것을 마음에 두지 아니하였음이니라 보라 내가 너희의 종자를 견책 할 것이요 똥 곧 너희 절기의 희생의 똥을 너희 얼굴에 바를 것이라 너희가 그것과 함께 제하여 버림을 당하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이 명령을 너희에게 내린 것은 레위와 세운 나의 언약이 항상 있게 하려 함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

말라기가 이런 소리를 했으니까 좀 살아남았지, 제가 이런 소리를 했으면 호되게 쫓겨날지  싶어요. 성경은 이렇습니다. 처음부터 우리를 무기물로 취급합니다.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가라.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가게 되면 우리는 자살하는 방법이 제일 좋은 방법이예요. 이 세상의 모든 고통과 고난을 잊는 방법은 자살입니다. 아주 간편한 방법이고, 주위에 갖가지 농약과 그리고 수면제가 구비되어 있습니다. 약국 한 백군데, 열군데만 돌아다니면 취사량이 충분이 가능합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은 하나님 없이도 고통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이미 우리는 확보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이야기 하는 것은 흙이 무기물인데, 무기물에서 무기물로 가는 우리에게 어떤 정신을 부여해 버렸어요. 흙에서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그냥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어떤 정신적인 가치와 의미를 부여 받고 그 의미에 의해서 우리가 죽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이 죽음이 무기물에서 무기물로 가는 것이 아니고 무기물에서 다른 어떤 것, 저주와 심판이 우리를 기다리게 되는 겁니다. “저주와 심판이 있다는 것을 진작 이야기하지. 왜 죽고 난 뒤에 이야기하십니까?” 라고 따지게 되면 이미 너희들이 흙으로 만들어졌을 때부터 결합된 것이 있어요. 정신적인 면이죠.

물질, 뼈라든지 구성성분 요소, 피가 몇 퍼센트고, 혈액이 어떻고, 이게 아니고, 의학적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고 정신적인 것, 사상적인 것, 의미 있는 것, 가치 있는 것이 인간 존재에 겹쳐져 있습니다. 참새나 들풀하고 달라요. 코끼리하고 다릅니다. 인간은 인간 나름대로의 딴 요소가 담겨져 있습니다. 이걸 창세기 1장에서는 간단하게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이야기하니까, 문제는 하나님의 형상을 우리가 입었다고 해서 소지할 수가 없다는 거죠. 뭔가 날라 갈 수도 있는 경우도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형상이 사라짐으로서 오히려 인간이 갖고 있는 정신성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겁니다. 제가 하나 예를 들면, 이 설교 생중계를 멀리 시집간 딸도 듣고 있기 때문에 항상 의식하지 않을 수밖에 없어요. 잔소리를 해대기 때문에. 자, 시집을 갔습니다. 옆에 있는 남자가 남편이라고 하거든요. 성경에서는 이거는 아니예요. 이거는 무기물질적인 요소고. 남편 어디 있느냐 하면, 아내 앞에 있다고 해서 남편이 아니고 예수님 안에 남편이 있어요. 예수님 안에 있는 남편의 남편 됨과 현재 자기 앞에 있는 남편과 차이를 알기 위해서 결혼시킨 겁니다.

이거는 아내도 마찬가지고. 성경에서 말하는 아내라는 그 아내와, 실제로 아내라고 우길 수밖에 없는, 무기물 될 수밖에 없는 인간들의 아내와 차이점을 찾아내는 거예요. 그래서 항상 주 안에서 라는 말이 자꾸 쓰여 지는 겁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남편은 이런데 당신은 왜 그런가?” “왜 예수님 안에 있는 아내는 늘 이렇게 요리를 해주는데...”요새 요리를 안 해줘서 음식을 잘 못 먹었다는 거예요. 우리 사위님이. 바빠서 못 하겠죠. “왜 아내는 남편을 보필해야 하는데 왜 못 하느냐?” 그러면 양쪽에서 이야기를 할 때, 공통점이 등장했어요. 뭐냐 하면, 주 안에서, 성경 안에서 남편과 아내가 등장했잖아요?

그러면 그 다음부터는 각자 돌아보는 거예요. 나는 주 안에서 어떤 존재고, 주 안에서 어떤 의미냐, 직책이 주어지는 겁니다. 그 직책을 오늘 본문에서는 제사장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다른 나라와 차이점은 이스라엘은 메시야의 품성을, 속성을 품고 있습니다. 인간이 흙에서 흙으로 돌아가는 것은, 이걸 어려운 말로 해서 존재의 본질이 존재를 부정한다는 말이거든요. 존재의 본질이 존재를 부정한다, 다시 말해서 흙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우리 인간이 “나는 대단한 몸이다.” 라는 것을 오히려 부정하는 쪽으로 고집을 부리면서, 조금도 양보나 타협이 없이 우리를 흙으로 몰아 부칩니다.

그럴 때, 이왕 흙이 될 것, 내가 자살해버리면 되지. 이렇게 되거든요. 무기물에서 무기물로 가는데 자살해 버리면 될 것이 아니냐 할 때, 그렇게 너는 흙이면서도 어떤 의미가, 하나님의 형상이면서 의미가 있다는 자체가 이게 삐걱거리며 안 맞아 가면서 제사장이 왜 존재해야만 하는가 하는 그 제사장에, 제사장이 있어야만 한다는 그 가치를 새롭게 우리에게 부각시키고 다가오게 하는 겁니다. “제사장이 나를 살리는구나” 그래, 제사장이 없으면 자살해도 괜찮아요.

그런데 제사장을 느끼도록 우리 인생을, 그런대로 꼬이도록 우리들을 이렇게 데려간다면 이제는 제사장의 직분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도록 우리는 그 앞에 우리 몸을 하나의 제물로 드리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제사장 따로 있고 우리는 그 앞에 드려지는 제물이라는 구성, 그 구성. 이 구성으로 이스라엘이 만들어지는 거예요. 유지되는 겁니다. 아주 특별한 거죠. 그래서 이스라엘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제사장나라 라고 하는 겁니다. 하나의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사도행전 18장 9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이랬어요.

이게 뭐냐 하면, 사도 바울이 고린도에 가가지고 한바탕 싸울 때 유대인들 때문에 상당히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1년 6개월 동안 고린도에 있을 때, 힘들고 괴로웠을 때, 밤에 주께서 나타났습니다. 나타나가지고 두려워하지 말고 잠잠하지 말고 내가 전하라고 한 말을 외치라고 한 거예요. 이게 바로 제가 오늘 낮에 이야기하는 우리가 원인을 모른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사도 바울이 “이쯤 돼서 우리 예수님이 나타날 때가 되었는데.” 이것이 전혀 안 된다는 겁니다. 주님이 나타나시니까 나타나신 것이지. “이쯤 돼서 주님이 나타나가지고 뭔가 용기를 부여해야 되는데.” 이런 것이 우리는 결과물이기 때문에 전혀 없는 거예요.

주께서 먼저 원인을 던지고 그 원인대로 결과가 진행되게 되면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서 1년 6개월 동안 복음 전한 것도 그 자체가 결과인 거예요.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한 것입니다. 바로 이 작업을 이미 구약 이스라엘 때부터 실시를 한 것입니다. 제가 거짓말 하는 것이 아니예요. 민수기 11장 29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어요. 여호수아가 다른 장로들이 하나님께 예언을 하니까 여호수아가 삐져서 모세에게 고자질을 한 거예요. 그러니까 모세가 하는 말이 “모세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나를 위하여 시기하느냐 여호와께서 그 신을 그 모든 백성에게 주사 다 선지자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이게 바로 마지막 때, 오늘 신약시대 때 모든 성도들이 바로 선지자의 직책을 맡은 겁니다.

직책을 소유했다고요? 아니예요. 직책을 맡은 겁니다. 직책을 맡은 거하고 직책을 소유한 거하고는 이거는 정반대의 의미입니다. 아침에 제가 뵈뵈 이야기 했잖아요? 뵈뵈가 사도 바울의 추천서가 있죠. 그런데 만약에 뵈뵈가 하는 말이 “나, 사도 바울의 추천서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때부터 문제가 발생됩니다. 갑자기 그 여자는 우상화 되고 다른 사람은 뵈뵈를 신앙 모델로 삼아 버리고, 완전히 선교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 아니고 뵈뵈를 증거하는 이런 난리가 전개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뵈뵈란 없다고 이야기한 겁니다. 없는 가운데 계속 직책이 만들어지는 거예요.

그러면 지금까지 제가 한 것을 여러분들이 듣고서 “그러면 목사님 간단해요. 우리가 제사장 역할을 하면 되네요. 그게 뭐 어렵습니까? 하면 되지.” 여러분, 성경에 나오는 모든 직책은 반드시 “아니요” 가 선행됩니다. 니가 나를 사랑한 것이 아니요, 그 다음에 내가 너를 사랑했다. 반드시 성경에 나오는 모든 것이 아니요가 선행됩니다. 주 안에서의 아내가 되기 위해서 아내 된 자는 자기의 본색을 다 발휘를 해줘야 돼요. 아, 내가 아내가 아니구나! 내가 저 남자의 아내가 아니고 아내가 아닌데 왜 결혼했는가. 주 안에 아내가 되기 위해서 저 남자와 만나게 했구나! 이렇게 되는 겁니다.

아, 복잡해요. 저 남편은 남편이 아니었구나! 그걸 진작 알아야지. 저 남편은 남편이 아니었어요. 진짜 주 안에 남편은 어떤 남편인지 차이점을 발견하라는 겁니다. 그게 바로 성도가 이 땅에서 해야 할 책무입니다. 하늘나라와 이 땅의 차이점을 바로 그런 식으로 보이게 하는 겁니다. 그 속에서 우리 자신을 빼지 마세요. 우리를 그 속에 집어넣으세요. 그러면 제사장이란 뭐냐, 우리가 어느 누구도 제사장 역할을 해낼 수 있는 자질이나 능력은 우리한테는 없습니다. 없는 것을 인정하겠습니다. 이러면 안 돼요. 없는 정도가 아니고 우리는 반대로 나가요. 반대로 나갑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로마서 13장 1~2절인데요.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리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림이니”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선교 단체에서 이 대목을 이렇게 가르칩니다. 선교 단체에서 젊은 사람들에게 우리는 두 종류의 시민이다. 한 시민은 하늘나라 시민이고 또 하나는 눈에 보이는 이 나라의 시민이다. 백성이다. 따라서 성도는 둘 다 충성을 해야 된다. 이게 어거스틴이 가르친 신학입니다. 두 도성이라는. 어거스틴이란 사람이 있어요. AD 5세기경에 사람인데, 그 사람이 로마가 망하기 직전에 있던 사람이거든요. 로마가 망하기 직전에 있으면서 인간은 로마 시민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시민 이라고 썼는데, 진짜 쓴 취지는요, 사실은 한쪽을 포기하자는 취지로 썼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이해 못하고 둘 다 충성하자 이렇게 나온 거예요.

여기 로마서 13장에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자들에게 복종하라 라고 해서 권세자에게 복종하는 그것이 꼭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모시는 것처럼 해석을 하는 겁니다. 이게 이렇게 되어 버리면 뭐냐 하면, 자기 책임에 대해서 떠맡기는, 책임을 저 사람에게 맡기고 제대로 똑바로 해 하면서 욕이나 하고 뒷담화나 하고 그러면 되는 줄로 이렇게 생각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모든 각 사람은 권세자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 나지 않음이 없나니. 라는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려고 한다면 본인이 그 권세자의 위치에 있을 때는 본인은 어떻게 하겠다는 자기 생각이 분명히 있어진 사람에게만 이 말씀이 적용이 돼요.

대통령 너 똑바로 하란 말이야 할 때는 내가 대통령이라면 이렇게 하겠습니다. 라는 자기의 의견이 충분히 갖추어져 있어야 돼요. 자기는 못 하면서 그냥 비판하는 것으로, 어떤 쾌감을 느끼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내가 그 세월호에 배 탔으면 어린애들 구하겠다고? 왜? 나는 해군 장교 출신이니까. 위대하신 문창근님께서 그렇게 장담을 했잖아요. 위대하신, 또 오해하지 마시고, 정치적인 발언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그 사람은 안 탄 상태에서 말로만 하죠. 실제로 주께서 침몰하는 배에 타게 하시는, 좋으신 하나님이 바로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방금 말 끄집어냈잖아요. 내가 배에 타면 애들 끄집어낸다 하잖아요? 그걸 그대로 현실화 시키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각 사람은 권세자에게 굴복하라 할 때, 이것을 성도에게는 현실화 시킵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 순간 선지자가 돼요. 선지자의 특징이 뭐냐 하면, “나는 주의 말씀 지키는 것이 아니고 나는 주의 말씀 하나라도 못 지킵니다.” 라는 것을 체험으로 보여주는 거예요. “나는 성경에 있는 아내가 그 아내답지를 못합니다.”를 결혼을 함으로써 체험으로 보여주고. 성경에 있는 남편은 그 남편이 아니고, 아주 꼴값을 떨고 있는, 성경에 있는 남편하고 전혀 상관이 없음을 체험을 통해서 깨닫게 하는 겁니다. 우리로 하여금. 그럴 때 우리가 뭐가 되느냐, 제사장이 되는 거예요.

제사장은 자기의 죄를 위하여 죽어가는 제물과 더불어 존재하는 삶이 제사장 삶입니다. 홀로 있는 삶이 아니예요. 나를 위해서 꼭 죽으셔야 되고 대신 죽으셔야 될, 내 대신 희생해야 될 희생하신 분과 동행하는 삶이 제사장 삶입니다. 그것을 어렵게 하면 이렇습니다. 모든 아담은 죽고 모든 아담은 예수 안에서 다시 산다.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아담이란 사람은 전부 다 죽습니다. 죽으면 어디에 가느냐 하면, 하나의 예를 듭시다. 스펀지가 있고요 그 밑에 잉크가 가득 담겨있다면 스펀지에 던져 놓은 모든 것은 스펀지를 통과해서 잉크에 빠지죠. 빠지고 난 뒤에 다시 스펀지에 들어 있는 물건을 끄집어낸다면 이거는 잉크 물에 푹 젖어 나오는 겁니다. 자기가 잘났다고 여기는 것, 나는 말씀대로 산다는 것, 나는 제사장이며 선지자며, 나는 바르게 산다는 것, 그 우기는 것을 주께서는 일부러 죽여 버려요.

죽고 난 뒤에 죽음을 코팅하고, 땅콩에다가 그 튀김을 잔뜩 묻혀서 끄집어내는 과자 있잖아요. 땅콩으로 버무린 튀김과자. 해태맛동산. 죽음을 충분하게 적시고 끄집어낼 때, 그게 제사장이예요. 이렇게 이야기하니까 너무 쉽죠.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제사장나라 라고 하는 것은 그냥 제사장이 아니고 말로 “하겠습니다!!” 이게 아니라 죽음을 적시고 하는데 그러면 우리는 자살해야 하는가 할 필요가 없어요. 왜냐하면 예수님이 죽고 난 뒤에 주신 성령님이 있어요. 그 성령님으로 하여금 우리에 대해서,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이미 심판을 가해버립니다. 구원받을 사람에게 먼저 심판을 가해버려요. 성령을 받지 못한 사람은 나중에 죽을 때, 죽고 난 뒤에 심판 받아요.

그런데 성령이 왔다는 것은 성도한테는 그 마지막 심판을 우리에게 먼저 십자가 심판을 줘버리면, 우리는 죽고 난 뒤에 십자가와 더불어서 부활의 영이기 때문에 죽은 우리가 다시 예수님의 죽음을 코팅한 채, 그리스도의 죽음을 품은 채, 다시 우리 이 땅에서 살아나게 됩니다. 내가 십자가로 말미암아 내가 세상에 대해서 죽었고 세상은 나에 대해서 죽었다 이렇게 이야기 하거든요. 갈라디아서 6장에서. 그걸 가지고 성령의 열매라고 합니다. 이미 우리 육신을 십자가에 못박은 데에서 나온 어떤 모습들, 품성들이 성령의 열매라 이 말입니다. 죽고 산다고 하니까 너무 심각해지죠.

그러니까 제 말은 뭐냐 하면, 본인의 인생으로서 안 살면 된다 그 말입니다. 본인의 인생으로서. 평소에 여러분들 막 사세요. 막 사시되 본인의 인생으로서 안 살면 되는 거예요. 제가 서울의 가락강의 할 때, 이런 이야기 했습니다. 제발, 여러분 책임감 좀 갖지 마세요. 라고 했는데 책임감 갖지 말라고 한 이야기는 정말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입니다. 자기가 실컷 나쁜 짓 해놓고 책임감 없이 밀항을 추진하면 되겠어요? 안 되잖아요. 사람은 빠져 죽여 놓고 자기는 도망가고. 책임지지 말라고 하면 그렇게 이해되기 쉬운데. 제가 말한 것은 뭐냐 하면, 질 수 있는 책임은 우리한테 없음을 알고 책임을 지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내가 이번 일에 이런 실수를 했는데, “이번 일은 내가 알아서 책임지겠습니다.” 라는 말을 할 수 있는 입장에 우리가 있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하느냐, 책임지고 싶어도 책임질 수 없는데서 오는 그 아픔이 있어야 돼요. “나 때문에 저 사람이 저렇게 고통 받았구나!” “나 때문에 저렇게 울었구나!” 라는 그 고통을 품은 채, 책임은지지 마세요. 왜? 책임질 수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제사장이 제사를 드려가면서 무엇에 유념했냐 하면, 내가 중요하냐? 제물이 중요하냐? 가 중요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제사장들은 자기가 중요해진 거예요. 뭐보다? 제물보다. 그러니까 깨끗한 제물을 바쳐도 제물이 튕겨 나옵니다. “에이, 똥 같은! 니 얼굴에다 뿌려버린다.” “니는 니밖에 모르지.” 하고 제사장 얼굴에다 똥을 바른다는 거예요. 2장 3절에 보면 “보라 내가 너희의 종자를 견책할 것이요 똥 곧 너희 절기의 희생의 똥을 너희 얼굴에 바를 것이라” 라고 하는 겁니다.

이것을 하나의 연극적인 요소를 가미해서 여기서 실험을 한다면 이렇습니다. 어떤 분이 봉투를 올려놔요. 참, 이거 옛날이야기죠. 헌금 봉투를 올려놓잖아요. 보면 “에이 똥 같은 것!” 하고 던져 버린다 말이죠. 하나님께서 거의 이렇게 행동을 하신다는 거예요. 이걸 나한테 왜 받치냐 이 말이죠. 시편 50편에 보게 되면 산에 있는 노루도 안 받쳐도 그것이 내 것인데. “니거 받쳤다고 지금 나한테 생색내냐? 도로 가져가. 어디 더러운 것을 나한테 바쳐.”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 생각은 뭐냐 하면, “그 당시 제사장들이 좀 깨끗한 거 드리지.” 지금 깨끗한 것을 안 드려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 당시 제사장들은 제사 드리면서 제사에 실패와 실패를 거듭해야 될 사명을 지고 이 사람들이 일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똥 발랐다고 해서 “에이, 치워보세요. 저라면 이것을 감당하겠습니다.” 라고 나서도 우리에게 돌아오는 것은 하나님이 던진 똥이 그대로 돌아옵니다. 그게 바로 언약이 마지막 때에 이루어지는 하나의 필수 코스가 되는 겁니다. 십일조하고 헌금을 하고, 제가 십일조 생활할 때, 항상 생각하는 것은 뭐냐 하면 십일조 십분의 일만 드리려고 하면 미안해서 못 드리겠어요. 그래서 사람이 십일조 한다고 해서 십일조만 하면 참 의리 없다. 십일조 하라니까 십일조 그것만 하고 참 더 드려야지. 더 드려야지. 구약부터 복을 받으려면 신약엔 더 드려야지. 이게 우리의 살아있는 양심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십일조 하면 그건 받겠습니까? “에이씨, 어디서 니가 감히 십일조를 지켜?” 에라 하고 던져버린다 말이죠.

실패가 있는 곳에 진리가 있다고 했잖아요? 벌써 제가 몇 번째 이야기하는지 모릅니다. 돌아서면 다 잊어버리지만. 하나님은 일부러 실패를 통해서 진리가 우리의 실패 앞에 가리워져 있다는 것을 다시 드러내게 하시는 거예요. 이런 제사장을 통해서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여기에 4절 봅시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이 명령을 너희에게 내린 것은 레위와 세운 나의 언약이 항상 있게 하려 함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 이게 무슨 뜻이죠? 레위와 세운 나의 언약을 항상 너희와 있게 하려 함이라, 아침에 제가 약속이란 말로 바꿨는데, 언약, 약속 같은 말입니다. 너희가 안다 이 말이죠.

우리가 부모님이 엄하신 줄을 언제 압니까? 우리가 성적 조작하고 참고서 산다고 해놓고 돈 받아서 떡볶이 사먹고 할 때, 그걸 안 들키면 엄한 줄을 모르는데, 들켜서 부모님이 화를 낼 때, 그때 엄한 줄을 알잖아요? “아, 아버지, 어머니의 원칙은 내가 사는 원칙과 확실하게 따로 마련되어 있구나!”를 안다 이 말이죠.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우리에게 주신 것은, “너 오늘날 신약시대에 너가 제사장이야.” “고맙습니다.” “너가 선지자야.” “고맙습니다.” 하지만 원칙은 너 자신이 아니고 너를 통해서 세우겠다는 원칙은 따로 있다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나님의 영원한 약속, 바로 새 언약 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예요.

새 언약이 뭔지 잠시만 설명 드리면 이렇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27~28절.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입었느니라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이게 인위적으로 성립이 되지를 못해요. 하나이니라 할 때, 하나되겠습니다 라는 말로 곡해하는 것이 우리의 실수요, 우리의 잘못입니다. 진짜 신앙 간단합니다. 참, 이 소리 하려고 제가 몇 십 년 별렀는지 모르겠어요. 하나입니다 할 때는요, 하나입니다 수긍하면 그게 믿음이고 그 믿음으로 구원받습니다. 영생얻습니다.

더 쉬운 거 이야기할게요. 선악과 있잖아요. 그 다음에 생명나무 있죠. 선악과는 선악과고 생명나무는 생명나무다고 우리가 알면 구원받아요. 선악과를 따 먹을까? 말까? 이런 되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세요. 모든 생명나무는 선악과 없는 생명나무 없습니다. 우리가 선악과를 거쳤잖아요? 그러면 생명나무는 이제 우리 것이 되도록 우리는 못하지만 주께서 하나되게 하신 가운데서 “너 선악과 따 먹었지?” “따 먹었습니다.” “따 먹었지?” “네, 따 먹었습니다.” “그러면 생명나무 줄게.” 이게 되는 거예요.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겁니다. 학생이 시험지를 받아 봤잖아요. 받아쓰기를 했는데, 두 개 틀려서 80점입니다.

그러면 그 아이의 믿음은 간단한 거예요. “아, 내가 80점이구나!” 알아주면 돼요. “어디서 틀렸을까?” 이러지 마세요. “앞으로는 잘해야지.” 이러지 마세요. 그냥 그거는 그 다음 일이고. 지금 80점이면 하나님의 뜻인 줄 알고 받아들이면 됩니다. 니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이니라 할 때 하나인 것을 믿고 믿으면 되는 거예요. 믿고 받아들이면, 또 받아들이면 골치 아파요. 그냥 인정하면 된다니까요. 하나인 것을 인정하면 돼요. 언제 인정이 안 되는가? “이제 인정받았으니까 설설 한번 설쳐봐.” 하고 독자적인 행동에 나서게 되면 6월20일 오후 두시 반에 받았던 그것, 문 열고 나가면 다 잊어버립니다. “자, 오늘 뭐하지? 어떤 것을 책임지지? 내가 성도처럼 살아야지.” 이러면 하나인 것, 또 날아가 버려요.

그런데 그것도 하나의 절차입니다. 그렇게 해놓고 나중에 일이 안 되어가지고 울고불고. 또 정 권사님은 차 기다리는데 방금 버스가 가버려서 15분 기다리고. 땀 냄새 나면서 기다리고. 모든 세상이 짜증나요. 에이, 이럴 것 같으면 무기물로 돌아가 버리고 싶고. 갑자기 우리로 하여금 주신 정신적인 요소, 의미, 실패하는 가운데서 이미 하나되게 했던 복음이, 진짜 복음 그대로 이 준비된 것을. 우리는 준비된 것을 모르고 계속 꼼지락꼼지락. 어떻게 하면 그걸 따내는가? 하늘의 별을 따내는가. 어떻게 이렇게 하는데. 하늘의 별 따지 마시고요. 이미 주셨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도 하나입니다. 그 작업이 새 언약이고, 그 언약을 위해서 오늘 본문에 그 당시 제사장들은 얼굴에 똥칠을 해야 되는 겁니다. 오늘날 우리처럼 말이죠.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내 힘으로 한번 해보겠다는 순간, 이미 우리는 오류에 빠져드는 순간이고, 오류에 빠져드는 그 순간이 우리가 구원받았음이 확인되는 순간이요. 성령 받았음을 기뻐하는 순간임을 저희들이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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