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주 장치
2014년 6월 15일 본문 말씀: 말라기 1:12-14
(1:12) 그러나 너희는 말하기를 여호와의 상은 더러웠고 그 위에 있는 실과 곧 식물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하여 내 이름을 더럽히는도다
(1:13)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또 말하기를 이 일이 얼마나 번폐스러운고 하며 코웃음하고 토색한 물건과 저는 것, 병든 것을 가져왔느니라 너희가 이같이 헌물을 가져오니 내가 그것을 너희 손에서 받겠느냐 여호와의 말이니라
(1:14) 떼 가운데 수컷이 있거늘 그 서원하는 일에 흠있는 것으로 사기하여 내게 드리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니 나는 큰 임금이요 내 이름은 열방 중에서 두려워하는 것이 됨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저주’에 대한 견해를 나름대로 다 갖고 있습니다. 안 이루어졌으면 하는 극단적 상황을 미리 상상할 수가 있습니다. 있는 것이 망가지고 사라지고 소멸하는 것도 저주라고 여기지만 내가 싫어하는 인간이 내 앞에서 너무 잘된 모습을 보일 때도 우리는 귿것마저 저주라고 느끼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저주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취향에 따라 다수 의견들로 떠돌게 됩니다. 일관성있는 진리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성경에서의 저주란 이런 다수 의견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 모든 다수 의견들은 각자 자신의 의도에서 쏟아져나오는 것들입니다. 성경에서의 저주는 축복과 더불어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따로 구별하여 세우신 ‘한 분’의 삶을 통해서 증거됩니다.
즉 저주나 축복은 모두 일반인들의 의견은 무시한다는 말입니다. 저주나 축복이 나오는 구멍은 따로 있습니다. 그 구멍은 하나님에 의해서 만들어진 장치 안에서 담겨 있습니다. 그 장치가 바로 이스라엘 내부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법을 주셔서 그 법에서 저주도 나오고 축복도 나옵니다.
따라서 참으로 최종적 저주를 만나려면 이스라엘로 가야합니다. 거기서만 저주의 극단을 만나볼 수가 있습니다. 축복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민족 잘되고, 자기 나라 잘 되는 것을 축복이라고 하면 아니됩니다. 외양간에 소가 없고 포도의 소출이 떨어져도 그것마저 복이라고 이해될 수 있는 곳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만들어진 바로 이스라엘 뿐입니다.
복음이 이스라엘을 거쳐서 이방민족에게 넘겨왔음을 잊지 맙시다. 그들을 통해서 진행했던 과정들마저 그대로 우리 이방인들에게 이전됩니다. 먼저 하나님의 장치로서의 이스라엘 안에서 저주나 축복이 어떤 근거로 구별되어서 나타나는지를 살펴야 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속해있는 집단을 걱정합니다. 본인이 운명이 이 집단의 운명과 연계되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곧 내가 속해 있는 ①집단 자체가 최종적 하나님의 뜻이 아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저주받습니다. 그렇다면 집단에서 이탈해서 나 개인적인 것에 매달리면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니까? 그것도 아닙니다. ②하나님께서 개인-집단의 연결을 벗어나 따로 어떤 개인을 생각해놓으셨습니다.
③이스라엘 나라 내부에 주어진, 율법에 의한 모든 말씀 장치들은 이스라엘을 위함이 아니라 그 초월적 한 분을 증거하기 위해 미리 주어진 예형들입니다. 그런데 이 예형은 이 예형에 일치하도록 완성체로 오실 분이 오시지 아니하면 알 수 없는 예형들입니다. 그러니 이스라앨은 당연히 멸망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미 예형이 아니라 ④완성 자체로서 오신 시대인 신약시대에서 저주와 축복은 어떻게 구분됩니까? 마태복음 18:1-3에 보면, “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예수께서 한 어린 아이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어린아이 같이 되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간다’고 했으니 사람들은 어떤 자들이 어린아이같은 자인가 주목할 수 밖에 없습니다. 어린아이에 대해서 규정내릴 때는 ‘어른’ 규정을 옆에다 두어야 합니다. 어린아이는 어른의 보호 아래서 존재합니다. 즉 어린아이는 어른에게 보호받는 비-자립적 존재입니다.
거기에 비해서 어른은 ‘자립적 존재’입니다. 문제는 이미 어른인 자가 도로 어린아이가 될 수가 없다는 겁니다. 나이가 많아서가 아닙니다. 이미 어린아이의 인식을 익히 알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합니다. 정작 어린아이는 어린아이가 뭔지를 모른다는 점과 대조가 됩니다. 어른이기에 ‘어린아이됨’을 논할 수 있는 위치에 있습니다.
어쨌든 어른이 되어서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니 이를 어쩌면 좋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성도가 어릴 때 경험한 삶의 방식이 아닌, 다른 방식의 ‘어린아이 삶’을 제공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⑤자립적 어른을 부정하게 하는 방법입니다. 그렇게 해서 새로운 방식의 ‘비-자립적 존재’가 되게 하십니다.
⑥그 방법이 바로 법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사랑에서 법을 따로 뽑아내는 것이 죄가 됩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그냥 하늘에게 떨어진 것이 아니라 이 지상에서 율법을 쥐고 있는 자들부터 멸시당하는 식으로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법으로부터 핍박받는 형식으로 사랑이 등장하는 겁니다.
법이 있게 되면 사람들은 졸지에 어른으로 나서게 됩니다. 자신이 살 길은 본인의 능력을 법을 지켜 내는 것밖에 없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이 자체가 철저하게 자립적입니다. 즉 법 앞에서 책임을 지고, 책임을 다하므로서 자신의 자립성에 가치를 입히려고 시도하는 것이 어른들의 행태입니다. 이렇게 되면 누구의 보호나 도움도 필요치 않을 것이고, 자신의 행한 만큼만 정직하게 노동의 보상을 받는 식이 될 것입니다.
⑦하지만 하나님께서 법을 주실 때부터, 이 방식으로 저주를 유발하는 장치로 사용하셨습니다. 저주 안받겠다고 설쳐대면서 인간은 자신이 자립적 존재로 나서려는 ‘어른적 본성’을 보이게 되고 이는 천국 갈 사람이 못됨을 폭로하는 바가 됩니다. 하나로 보이는 전선도 칼로 단면을 자르면 그 안에 무수한 동선이 들어있는 것이 보이는 것처럼, 법이라는 이름으로 유포되는 취지에는 다수의 잘남들이 한데 뭉쳐져 있는 식입니다.
한 가닥, 한 가닥 다 자기 잘났다 고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제물에 하자가 있음을 지적하십니다. 저는 것, 병든 것을 제물을 드렸기에 복을 원하는 너희에게 저주가 임할 것이라는 겁니다. 문제는 이 지적으로 통해서 새로운 내용이 들추어집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제사를 통해 결코 이스라엘이 이익을 생각해서는 아니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집단을 우선시해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제물로 표현되는 장치 오실 메시야 그 한분을 겨냥해서 이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양을 드리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드려진 양이나 제물 자체가, 제물 드린 이스라엘보다 우선된다는 겁니다.
다수보다 특별한 개인이 중요하다는 겁니다. 다수를 위한 개인이 아니라 개인 그 분 자체을 위한 개인으로 등장하신다는 말입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제물”로서의 메시야가 오시는 겁니다. 그분은 말씀에 입각해서 저주와 축복을 가름할 것입니다. 기존의 법적인 안목으로 저주와 축복을 논하는 것은 그분 앞에서 거짓으로 판정나면서 마감됩니다.
히브리서 10:5-7에 보면, “그러므로 주께서 세상에 임하실 때에 이르시되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번제와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랑은 법으로 보충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은 법 형식의 지속이 아니라 복음의 지속입니다. 따라서 법은 법으로 계속 부정당해야 합니다. “앞으로는 제대로 된 제물로 바꿔서 드리겠습니다”라고 해서 사랑으로 변하는 것이 아니라 법 속에서는 인간이 해낼 수 없는 사랑을 발견하는 어린 아이이어야 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비-자립적으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4강-말라기 1장 12절-14절(저주 장치)140615-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말라기 12절에서 14절입니다. 구약성경 1328페이지입니다.
“그러나 너희는 말하기를 여호와의 상은 더러웠고 그 위에 있는 실과 곧 식물(食物)은 경멸(輕蔑)히 여길 것이라 하여 내 이름을 더럽히는도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또 말하기를 이 일이 얼마나 번폐(煩弊)스러운고 하며 코웃음하고 토색(討索)한 물건과 저는 것, 병든 것을 가져 왔느니라 너희가 이같이 헌물(獻物)을 가져 오니 내가 그것을 너희 손에서 받겠느냐 여호와의 말이니라 떼 가운데 수컷이 있거늘 그 서원(誓願)하는 일에 흠(欠) 있는 것으로 사기(詐欺)하여 내게 드리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니 나는 큰 임금이요 내 이름은 열방 중에서 두려워하는 것이 됨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저주가 어디 숨어 있어요. 우리가 생각하는 저주라는 것은 인간의 생존이 위협받는 것을 저주라고 하는데, 그것은 이방 민족들이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저주고, 저주가 나오는 구멍이 따로 있어요. 그거는 이스라엘 내부에서 저주도 비로소 밝혀지고, 축복이라는 것도 이스라엘이 존재하고 이스라엘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이방 민족들이 상식적으로 알 수 없는, 진짜 축복관을 그들이 갖고 있습니다. 무화과나무에 소출이 없다 할지라도 복이 되고, 외양간에 소가 다 죽어도 복이 되는 그 복된 비밀을, 하박국에 보면 있거든요. 축복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저주도 있어요. 그런데 누가 저주 받았다고 하면 믿지 마세요. 진짜 저주는 말라기서에 나오는 내용에서 저주가 나오는 겁니다.
그러면 이 저주와 축복을 인간들이 미처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이 창세 전에 계획한 것을 창세 후에 인간들이 알 수가 없잖아요? 창세 전에 이미 예비한 저주와 축복을 조금씩 보여주기 위해서 이스라엘 나라가 있었고. 이스라엘을 통해서 조금씩 그 저주가 보여지는데, 저주가 보여지기 위해서 저주를 보여주는 장치도 하나님에 의해서 만들어낸 겁니다. 그 장치가 뭐냐 하면, 거룩한 제물, 거룩한 제사를 드리면서 저주가 무엇인가도 아울러서 비로소 나오는 겁니다.
이방 민족은 제사를 드리지 않아요. 이런 율법에 의한 제사를 드리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저주라고 지목당하는 일은 없는 동시에 그냥 그대로 저주로 가는 거예요. “우리가 왜 저주받지?” “그 원천이 어디지?” 원천을 알려면 이스라엘 내에 가가지고 거기서 하나님의 약속으로, 율법으로 저주 나오는 장치를 봐서 거기서 자기들보다, 우리들보다 먼저 저주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째서 저주받았는가를 확인하고 난 뒤에, 그 다음에 “아하, 저주라는 것이 저렇게 숨어있구나!” 를 알 수가 있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스라엘 나라를 지나간 나라라고 무시하지 마세요. 이스라엘 나라라고 만든 그 나라 자체가 장치예요. 하나님께서 이것이 축복이고 이것이 저주다, 해서 이스라엘을 만들었습니다. 그 나라는 처음부터 집단이 아니고 한 개인을 불러서 만들었습니다. 그 불러진 개인이 아브라함이예요.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또 개인이예요. 이삭과, 또 개인입니다. 야곱입니다. 개인, 개인, 개인에서 나중에 뭐가 나오느냐면 집단이 나오거든요. 이스라엘 나라가 나온다 말이죠.
그러면 우리 집단, 우리 집단 해가지고 서로를 단합대회 할 것이 아니고. 우리 집단에 공통적으로 너, 나 할 것이 없이. 너, 나, 그 할 것 없이. 동일한 방식으로 불림을 받았을 때, 호출 당했을 때, 그 호출 당하는 방식은 꼭 한 가지 방식으로만 호출하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 방법입니다. 개성대로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나 주특기 살리고, 너는 너 주특기 살리고 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잘 할 수 있는 그것을 살리기 위해서 부르신 것이 아니고. 그런 개성이나 주특기 다 묵살하시고, 우리의 개성과 우리의 주특기 상관없이, 주께서는 한 분을 통해서 그것을 확산시켜서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이스라엘 되게 하고 천국 가는 십사만 사천 되게 하시는 겁니다.
제가 방금 이런 이야기를 할 때, 여러분들이 그저 눈치 빠른 사람들은 뭘 생각했겠습니까? 달란트 비유 있잖아요? 그게 문제가 되는 거예요. 달란트 있다고 부르시는 것이 아니다 이 말이죠. 달란트가 열 개이든, 다섯 개든, 일곱 개든 상관없어요. 왜 그것이 상관없느냐. 우리가 있는 위치가 잘못된 위치에 있기 때문에 그 달란트 비유에서 오해가 나오는 겁니다. 충성하면 더 받는다는 그런 오해가 우리의, 자기의 위치를 점검을 안 해서 그래요. 어떤 분이 저한테 질문을 하게 되면, 그 질문 자체가 하나님이 주시는 계시처럼 느껴져요. 잊어버렸던 그 말씀을 질문은 받는 동시에 나도 다시 되새기게 되는 겁니다. 어떤 분은 너무 겸손해가지고 질문을 지우시는 분도 계신데, 그건 두고두고 그 질문 자체가 가치가 있는 질문이예요.
어떤 질문을 했느냐 하면, 바로 마태복음 18장에 나오는 질문을 했어요. 어린아이같이 되지 아니하면 하늘나라 못 간다고 하는데 어린아이가 뭐냐는 질문이예요. 어린아이같이 되지 아니하면 하늘나라에 못 가거든요. 그러면 어린아이같이 되지 아니하면 하늘나라 못 간다면, 내가 하늘나라 갈지 안 갈지는 내가 어린아이냐, 아니냐 하는 판정이 나온 후에 이야기예요. “가고 싶습니다.” 라고 해서 가는 것이 아니예요. 주께서는 “가고 싶으냐? 다 보내 줄게.” 이것이 아니고, 어린아이같이 되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 간다는 조건을 걸어 버렸다 이 말이죠.
그러면 그 조건을 그냥 피해갈 수는 없는 겁니다. 그 속에 들어와야 돼요. 그 조건이 뭐냐 하면 어린아이같이 되라는데, 도대체 그게 뭔지 모르겠다는 겁니다. 어린아이같이 된다는 이것이 뭐냐 하면, 어린아이가 비-자립적 존재예요. 어른과 어린아이의 차이를 두면 아는데, 어린아이의 특징은 비자립적 존재라서 누가 키워줘야 되고, 길러줘야 되고, 누가 보호해줘야 돼요. 그리고 어린아이는 놀랍게도 그것을 감수합니다. 누가 자기한테 잔소리하는 것을 본인이 감수를 해요. 왜? 자기는 아빠 없이는 못 살고, 엄마 없이는 못 살기 때문에. 아무리 생떼를 쓰고 해도 아빠나 엄마 없으면 울어 버리잖아요? 그런데 어른들은 아빠나 엄마가 없으면 웁니까?
어른들의 특징은 자립적이예요. 자립적입니다. 어떤 사람이 TV에 나와서 대담을 하는데, 자기는 스물네 시간 남편이 붙어 있어서 너무 좋다는 겁니다. 너무 좋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옆에 있던 사람이 나는 스물네 시간 남편과 떨어져 있어서 너무 좋다는 겁니다. 남편과 떨어져 있으니 이렇게 좋은 것을 가지고. 여러분은 어느 쪽 입니까? 어린아이의 특징은 비자립적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 어느 사람도 어린아이로 남겨진 사람은 없어요. 저는 그것을 바나나킥으로 보겠습니다. 공을 차면 바나나처럼 휘어져 들어가거든요. 인간은 점점 더 나이가 먹으면서 어린아이에서 벗어나서 어른이 되는 거예요. 점점 더 하늘나라하고 관계없습니다. 자립적 존재가 되는 거예요. 존재가 되기 때문에 다시 옛날 어린아이로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이미 우리는 어린아이를 거쳐서 어른이 되었기 때문에. “나 어린아이 안 될거야. 빨리 독립할거야.” 독립할거라는 그 의지가 차곡차곡 쌓여있기 때문에, 그 의지를 뺄 수는 없는 거고요.
주님께서는, 방법이 뭐냐, 바나나킥이니까. 한번 어린아이의 노선에서 이탈했다, 어른됐다, 다시 어린아이로 돌아가는 방법은 그 어른 자체를 부정하고 그걸 지적하는 방식으로 다시 새로운 어린아이로, 옛날의 어린아이 말고, 되돌아가는 방식을 사용하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바로 어린아이들은 자기가 잘못한 것은 생각 안 하고 나무라면 아~앙~~하고 울어버려요. 지가 잘못한 것은 모르고 자꾸 나무라면 울어버리고 그런다 말이죠. 그러니까 법보다 사랑이 우선인데, 어른은 자기가 자립할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자꾸 법을 땡겨요.
그러니까 이게 뭐냐, 사랑에서 법 땡겨 버리면 그게 죄가 되는 겁니다. 죄가 궁금해요? 뭔지를? 사랑을 법으로 바꾸어서 잡아 땡기면 그게 죄가 되는 거예요. 왜 법이 죄가 되느냐 하면, 법은 나를 더욱더 자립적인 존재로 확인시켜 주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주님 나, 이거 지켰는데 저 사람은 못 지켰습니다. 주님 이거 지켰습니다. 나 잘났죠?” 항상 독자적이고 자립적인 존재로 잡아 주기 때문에 이거는 어린아이하고 거리가 먼 겁니다.
그런데 나중에 다시 하나님의 사랑에 들어가 버리면 내가 무슨 짓을 하고 막 살아도 주께서는 그것마저 받아준다는 것을 알 때, “나는 그 사랑 없이는 못 살아!” 어린아이로 돌아가 버리면 아버지 품에 안기는 어린아이로 되돌아가버려요. 바로 바나나킥이거든요. 이 바나나킥이라는 노선을 주님께서 바로 앞당겨서 그것을 자신의 인생을 통해서 그 노선을 우리에게 밝혀줬습니다. 어른이 되더라도 다시 어린아이같이 되지 아니하면 하늘나라 갈 수 없다는 겁니다.
자, 신약에서 예수님이 하신 그 말씀은 오늘 본문 말라기에 나오는 이 본문과 무관한 게 아니예요. 관련성이 있습니다. 어떻게 관련성이 있느냐 하면, 이렇게 간단하게 결론부터 추려드리고 내용에 대해서 논리를 펴 나겠습니다. 우선 결론부터 추려드리면 하나님께서 제사법의 제물이 잘못됐다고 지적하니까 듣는 이스라엘이 뭐로 듣느냐면 이걸 사랑으로 듣지 않고 법으로 들어 버려요. 법으로. 이미 이 사람들은, 멸망되기 위한 이스라엘이기 때문에 뭐든지 자기가 잘났기 때문에 법적으로 철저하고 완벽을 기하려고 자꾸 애를 쓰게 됩니다. 법적으로.
어른들의 특징이 이런데 하나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어떤 상이용사인데, 군에 가서 두 눈을 잃어 장님이 되고 말았습니다. 완전 장님은 아니고 장님이 될 지경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기는 자살하려고 했는데, 그 군대 병원에서 어떤 간호 장교를 만났는데, 그 사람이 늘 희망적으로 이야기를 해주고, 가까이 와서 위로를 해주고, 용기를 부어 주니까 자기가 장님돼서 살아 뭐해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고 했던 것이 그 여자 간호사의 지극한 헌신으로 말미암아 그 사람은 용기를 얻고 약과 치료를 받아드렸어요. 그리고 약속을 했어요. “나를 두 번 살게 한 당신과 결혼하겠습니다.” 라고 생각을 했다가, “나 당신을 사랑합니다.” 눈 감긴 채, 그런데 나중에 진짜 치료 받으니까 눈이 다시 떠졌어요. 눈을 떠 보니까 그 간호사가 못 생겨도 너무 못 생겼어요.
그런데 자기가 한 말이 뭐냐 하면 사랑하고 결혼한다고 약속을 했기 때문에 결국 그 눈 뜬 병사가 할 수 있는 것은 도로 자기가 눈을 찔러서 장님이 되어 가지고 그래서 결혼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게 바로 어른입니다. 자기 일에 책임을 질 줄 아는 어른이거든요. 자기 말에 책임을 지는 거예요. 그거 그 사람 하늘나라 가면 아마 예수님 앞장세워서 영광 받을 거예요. 들어 갈 수가 없어요. 이런 사람은. 책임지고 싶어도 책임질 수 없는 높은 쪽에서 법이 주어질 때에, 우리는 주님의 법을 대체하고자 미리 만반의 준비된 법 지키겠다는 책임성마저 하나님의 그 초월적인 법 앞에서 무색해지고 무용지물이라는 것이, 그게 드러나야 됩니다. 내가 열심히 충성하고 봉사하겠다는 것이 주님 앞에는 전혀 통하지 않는 부질없는 짓인 것을, 평생을 통해서 부질없는 짓인 것을 우리는 알아야 돼요.
그 이유가 있어요. 오늘 본문에서 이겁니다. 제물에 대해서 뭐 이런 거, 이런 거 하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말에 대해서 오해해 가지고 앞으로는 병든 거, 저는 거 안 드릴께요.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이게 바로 어른들이 하는 행세예요. 하나님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에 집중해요. 어른들이 열 명 있으면 어른 열 명이지 대표자 열 명은 아니예요. 이 말이 어려운데, 사람이 잘 난 사람 열 명 있으면 잘 난 사람 열 명 그대로 가요. 전선이 하나처럼 보이지만 짤라보면 여러가닥이, 구리선이 수십 개 있잖아요. 그처럼 어떤 것을 짤라 버리면 각각 개인으로, 어떤 때는 단결! 단결! 의리! 의리! 이러지만 무슨 일 터져 버리면 각자 가닥으로 갈라져 버려요.
하나님은 이걸 아십니다. 개인의 자질과 능력과 달란트와 개성으로 구원받지 못 한다는 것이 이스라엘에게 처음부터 주신 원리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호출할 때, 개인에서 집단으로 번져야지 집단이 모여서 개인을 대표로 선출한다고 그 선출된 대표, 왕 주께서는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이 남의 나라처럼 왕 뽑겠다고 사울 왕을 뽑았지만, 결국은 사울 왕은 망해야만 하는 왕이예요. 왜냐하면,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먼저 결재 올린 왕이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들의 대표자로 올렸기 때문에 왕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전체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이스라엘은 존재하는 것을 지속하는 것이 이스라엘이 아니고 날마다 생성돼야 돼요. 이스라엘은 날마다 만들어지는 겁니다. 그런데 어른들은 법을 좋아하는 이유가 법은 반드시 지킬만한 부칙같은 것이 들어붙게 되어 있어요. 이스라엘이 그런 짓 했어요. 안식일을 지키라 하니까 그것만, 달랑 안식일만 지키면 너무 관념적이잖아요. 모호하잖아요. 그래서 안식일을 지키는 방법, 안식일에는 달걀을 삶지 않는다. 달걀 안 삶으면 안식일을 지키게 된 거예요. 고신측에서 하는 것처럼 안식일에 버스타지 않는다. 버스 안 타고 교회 오면 지키는 거예요. 법이라 하는 것은 내가 어른됨을 확인해 주는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법이 이야기 하면 내가 어떤 식으로 저걸 지켜서 내가 진짜 제대로 된 인간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을까? 자꾸 그것을 살피도록 되어 있어요.
항상 법이 있으면 집단이고 그 집단 자체를 유지하려고 합니다. 왜? 그 안에서 자기가 어른다웁기 때문에. 어른으로 유지되기 때문에. 그래서 아침에 이야기했지만 성령의 공동체가 속임수라는 그 이야기를 한 이유가 거기 있어요. 뭐냐 하면, 제도와 법을 반복해서 하나님께 복 받은 것을 계속해서 유지시키려는 경향이 많이 있습니다. 복음을 유지해야 할 것을, 복음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고 형식을 계속해서 반복해서 유지한 것처럼 서로서로 그렇게 동의하면 된다는, 우리끼리 동의하면 된다는 거예요.
그렇다면 하나님의 방법이 뭐냐, 집단이 아닙니다. 개인입니다. 집단에 고정하는 것이 아니고 어떤 개인에 집중해요. 그 앞당긴 개인을 제물이라고 하는 겁니다. 히브리서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장차 오실 분은, 요한복음에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 요한복음에서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제물로 봤고, 히브리서에서는 한 분이 제물이 됐고 제사장 되고 제사 자체가 되어서 죽음으로, 그 분이 단번에 드리심으로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도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야기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최후에 내놓은 카드였고 언약이었다는 겁니다.
최후의 카드 말고, 미리 앞선 카드 거기에 매달리지 말고, 그건 법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사랑마저 법으로 뽑아내면 이미 죄가 되거든요. 사랑마저 사랑으로 받아드리지 않고 사랑마저 법으로 빼지 않고 사랑으로 받아드리려면 법 좋아하는 나 자신부터가 주께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해야 돼요. 내가 스스로. “하나님 이거 지켰습니다. 저거 지켰습니다. 하나님께서 전에 제물 저는 거, 병든 거 드린다고 짜증냈죠? 이제 한번 보세요. 우리는 반성할 줄 아는 인간입니다. 전에 한번 지적이 들어온 다음부터 우리는 깨끗한 거 드렸습니다. 이제는 됐죠? 이러면 우리 관계는 유지되죠?” 라고 나오면 안 된다니까요. 그러면 안 되는 거예요.
말라기에서 1장, 2장은 별로 중요하지 않고 3장이 중요해요. 왜냐하면, 3장에 보면 십일조가 나오기 때문에. 십일조이야기 하기 전에 제물 먼저 이야기 하는 겁니다. 십일조든, 제물이든 한 분, 우리 중에 없는 한 분. 하나님이 모든 말씀을 혼자 다 완성하실 한 분에 집중하는 겁니다. 한 분에 집중한다는 것은 다수를 외면한다는 거예요. 다수로 직접 찾아가지 않고 한 분을 경유해서 다수를 새롭게 만들어내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취지입니다.
제단 위에 제물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야말로 제물에 집중합니다. “제물 하나 똑바로 못 바쳤어?” 지금 닦달내시는 겁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제물 바쳐서 뭔가 이득을 얻고자 하는 우리한테는 관심이 없고 제물 자체에 관심이 있는 그 하나님에 대해서 자연적으로 우리는 섭섭해 할 수밖에 없는 거죠. 왜 섭섭하느냐 하면, 제물 바친 당사자가 누구냐 하면 우리가 드린 양이고 우리가 드린 소고 우리가 드린 염소거든요. 그러면 우리 것을 드렸는데 주님께서는 “아이구, 착하다.” 하지 않고 “아이구, 너가 법대로 지켰어요. 착하다 복 줄게.” 이렇게 돼야 우리가 아는 정상적인 것인데, 양을 바쳤는데 “양을 똑바로 바쳐야지!” 이렇게 함으로 말미암아 “도대체 하나님의 관심사가 어딨지? 어딨지?” 난해한 거예요.
이렇게 보시면 됩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하나님은 치료제를 미리 준비하시고 그 다음에 병을 일으킵니다. 이거는 세상에서는 이런 법이 없어요. 이런 경우가 없어요. 이건 법을 초월한 경우거든요. 치료제가 먼저 있고 치료제가 얼마나 대단한 치료제인지를 증명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병을 유발시켜 버려요. 아, 미치겠어! 이런 말 하는 저도 미치겠어요. 정말. 용서가 먼저 있고 그 다음에 죄가 있다니까요. 주님께서 십자가 먼저 지시고 그 다음에 십자가를 증거하기 위해서 우리보고 죄 짓게 하기 위해서 선악과 심어놨다 이 말이죠. 십자가 지는 계획은 창세 전부터 있었고.
주님 것 뽑아내서 이용할 수 있는 어떤 차단책도 없습니다. 왜? 우리는 다수니깐. 우리는 다수거든요. 너, 나 합해서 다수가 되고. 주님은 다수부터 출발하지 않아요. 주께서 숨겨놓은 한 인물, 모든 말씀의 완성자,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하신 그 분을 숨겨놓고, 숨겨놓은 그 분을 드러내면서 앞장서서 다수를 깔아놓는 겁니다. 다수가 얼마나 오해하고 있는지를. 여러분, 영화에 보면 영화에서 총알 날아가는 그 장면이 있을 거예요. 매트릭스 영화 보면 어깨 젖혀가며 총알 다 피하는 그 장면이 있어요. 권사님들 안 보셨겠지만 그런 장면이 있어요. 총알 날아갈 때, 그 고속촬영해서 날아가게 되면 보통 눈으로 보면 총알만 보이지만 총알 앞뒤로 공기가 완전히 파동을 일으켜요. 초고속으로 촬영하게 되면. 보이지 않는 공기가, 쌩쌩한 총알은 그대로 있지만 공기가 파장을 일으키는 것이 나옵니다.
예수그리스도 한 분 보내는데 법만 좋아하는, 사탄에 빠진, 그래서 법만 좋아하는 어른들만 있는 이 세상에서 온갖 파장이, 파열이 다 생겨요. 다 생긴다 이 말이죠.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사랑을 주는데, 우리는 왜 이렇게 고생하게 하십니까?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니 고생은 후차적인 문제고, 고생 없는 세계가 먼저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고생을 시키는 겁니다. 치료제가 먼저 있고 그 치료제가 얼마나 대단한 치료제인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에게 병을 주시는 겁니다.
그리고 이야기 합니다. “나는 의인을 원한 것이 아니고 죄인을 원했고. 나는 건강한 자를 찾는 것이 아니고 병든 자를 찾는다.” 이 말이죠. 집단이 아니고 하나입니다. 그 하나를 보여주기 위해서 제물을 모아 놓은 거예요. 인간들이 그 제물을 다음부터는 저는 거, 병든 거 드리지 않고 깨끗한 거 드리겠습니다. 하는 그 자체가 주의 뜻과는 상관이 없어요. 사랑이 이 땅에 올 때는 반드시 법적인 잘난 체 하는 인간들의 잘난 체 함을 들추어내면서 찾아 오셔서 그 잘난 체를 능가해서 잘난 체를 하든 안 하든 용서로써, 위대한 사랑으로써 건지겠다는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대신 희생하심입니다. 우리가 드린 제물이 양이 아니고, 인간이 진짜 우리를 대신하는 인간이 양이 되고 소가 되고 염소가 될 줄이야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게 하나님의 치료제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어른답게 행동하려고 애썼던 그게 다 주의 원칙과 틀리다는 것을 새삼 저희들에게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내가 온 것은 제사와 번제가 아니라 내가 온 것은 사랑과 용서를 원한다는 주의 뜻대로, 이미 우리 속에 있는 주님의 용서가 우리의 잘난 체를 극복하고 어떻게 나오는지를 한 주간도 늘 기거하게 하옵소서. 체험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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