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110114a 몸과 교회
오늘은 골로새서 1장15절 16절을 하겠습니다.
골 1:15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골 1:16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어린 아이도 그렇고 어른도 그렇고 우리가 산다는 것은 어떤 것을 가지고 산다고 하느냐 하면 산다는 것은 웃고, 울고, 일하고, 잠자고,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농사짓고 이런 모든 행동들을 모아서 산다는 거예요.
애들이 하는 일은 태어나서 우는 것이 애들 일이죠. 오늘 식당에 갔는데 한 아이가 얼마나 떠드는지 고함 꽥꽥 지르고 이랬어요. 그래서 주인이 다른 손님들 방해되니까 조용하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것을 보고 ‘저 애는 살았다. 저 애는 시체가 아니다. 살았다. 살아있으니까 저렇게 고함을 지르는 거죠.’ 그러면 ‘살았다.’ ‘죽었다.’를 우리가 지금 압니까? 모릅니까? 알고 있는 거죠. 살았다는 것은 먹고 마시고 웃고 울고 그렇게 즐기고 하는 전부다 살아있는 것에 포함이 된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성경말씀은 뭐라 하느냐 하면 그렇게 웃고 울고 즐기고 말하고 다 해도 예수님이 없으면 그것은 산 것이 아니다가 되는 거예요. 예수님이 없으면 살았다고 볼 수 없다는 겁니다. 우리가 그것을 이해해야 돼요. 이것이 얼마나 어처구니가 없는 이야기입니까? 바빠서 교회 못 나와, 돈이 없어 교회 못나와, 살기위해서 어떻게 하다 보니까 성경도 못보고, 기도도 못해 그런데 그 성경은 말하기를 예수님이 없으면 그것은 살았다고 할 수가 없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없으면 살았다고 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우리가 지금 살아있는데 무슨 도움이 되고 무슨 보탬이 되는 거예요? 예수님이 빠져버리면 살아 있는 게 아니고 예수님이 들어오면 산 것이 되고…….
여러분, 성경책하고 만화책하고 차이점이 뭘까요? 성경책이 말씀이라는 것은 죽었다고 여기는 사람이 성경책 말씀을 보고 그 안에서 예수님을 만나서 살게 되는 거지만 만화책은 살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살아있는 채로 만화를 열심히 재미있게 보는 거예요. 만화책보기 전에도 살았고 본 후에도 만화책 때문에 살아있다고 보는 겁니다.
그런데 성경을 막상 보니까 살아있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죽어있고 성경을 통해서 예수님이 있어야 살았다는 소리를 듣고 그것을 믿으니까 졸지에 성경보고 살았고 그러니까 만화책하고 성경하고 차이점은 성경은 우리를 살리는 거지만 만화책은 그대로 살리고 죽이고 뭐 가는 그대로 가게 만드는 것이 만화책이죠. 성경책과 만화책이 그렇게 차이가 난다면 우리가 일반 직업 교사라든지 회사원이라든지 하는 어떤 직업이 있다고 해서 우리가 살았다고 볼 수가 없죠. 그러면 예수님이 있어야 살았다고 할 수 있는데 만일 내가 교사라면 이 교사에다가 예수님을 어떻게 그 안에 집에 넣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교사로서는 산 게 아니고 나이 들어서 퇴직해서 90 돼서 죽어버리고 지옥가고 그런데 예수님을 믿으면 뭘 하든지 간에 계속 죽어서도 낙원에 가고 천국에 가있고 그러니까 예수님을 교수하면서도 예수님을 어떻게 교사라는 ‘살았다’에 또 집어넣느냐 이 말이죠.
집어넣는 방법이 뭐냐 이 말이죠. 그걸 집어넣어야 살았다고 할 수 있으니까 이게 얼마나 중요한 문제입니까? 그 집어넣는 이야기를 이제부터 하겠어요. 죽어있는 우리에다가 예수님을 집어넣으면 우리가 이제 산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여러분에게 물어봅시다. 아브람은 살았습니까, 죽었습니까? 아브람이라는 사람은 그대로 놔두면 어떻게 돼요? 아브람은 그냥 죽지요. ‘죽는다.’ 그런데 아브람이 아브라함이 되면 어떻게 됩니까? 아브라함이 되면 이 사람은 ‘산다.’가 되겠지요. 그러면 죽은 아브람에서 산 아브라함이 되려면 가운데 뭐가 들어와야 합니다.
뭐가 들어왔을까요? 창세기에 보면 이것을 복이라고 했죠. 복이 들어오면 죽은 자가 살잖아요. 그러면 복이라고 하는 것은 살아있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겁니까? 죽어있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겁니까? 죽어있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겁니다. 죽어 있는 사람에게 복이 오면 그 복으로 인하여 산 사람 되는 겁니다. 그렇게 살아있는 사람은 뭐만 자랑 하겠습니까? ‘나 복 받았다.’ 이것만 자랑하겠지요. 다른 말로 하면 나는 전에 복 없었을 때는 죽었는데 복 받아서 살았다는 거예요. 전에 복 없을 때는 그냥 내가 교사였고 그냥 농사꾼이었는데 복을 받고 난 뒤에는 교사, 농사꾼은 달라진 게 없는데 이제는 살아있는 교사, 살아있는 농사꾼이 되었다 이렇게 보는 겁니다.
복이 들어 와야 돼요. 복이 들어 보게 되면 지금 아브람 입장에서 ‘내가 살았다.’ 여기는 것이 결국은 복의 입장에서는 ‘너는 죽어있었다.’ 이겠지요. ‘너는 죽어있었어.’라고 하는 거예요. 죽어 있었는데 복이 들어 와서 살았다면 죽은 사람에게 복이 들어오면 죽은 사람이 가치가 있는 겁니까? 들어 온 복이 더 가치가 있는 거예요? 복이 더 가치가 있는 거죠. 그러면 그 사람은 내가 지금 교사를 하나 농사를 짓나 이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죽은 나을 살리게 했던 이 복의 내용이 더 중요합니다. 이렇게 되겠지요. 그러면 이 복의 내용 안에 뭐가 들어 있겠어요? 복의 내용 안에는 죽은 사람을 산 사람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 어떤 비법, 어떤 능력, 그게 하나의 반도체 칩처럼 부속품처럼 담겨있겠죠.
죽은 자를 산 사람 만드는 그 무엇이, 능력이 들어 있겠지요. 그러면 이 복안에는 죽은 사람도 살았다는 그런 사례, 그런 사건, 일어났던 그런 일, 그런 경우가 복안에서 들어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님을 봅시다. 예수님은 그냥 복을 주시는 분이 아니고 몸소 죽었다가 사셨지요. 죽었다가 사신분의 경우 죽었다가 사신분의 그런 사례, 죽었다가 살아난 그런 사건, 그런 일이 복을 통해서 오게 되면 죽은 사람의 복이 복사가 됩니다.
복사가 되면 좀 유식한 말로 업로드, 업로드가 뭐죠. 밑에 있는 컴퓨터 안에 있는 파일을 탁 치면 위에 그대로 복사가 되는 겁니다. 컴퓨터밖에 있는 어떤 내용이라도 업로드를 하면 밖에 있는 것이 어디로 들어오죠? 안에 들어오는 데 그것을 저장되었다. 그러면 우리는 무슨 역할이냐 하면 우리는 예수님을 저장하는 저장고가 되죠. 창고가 되죠.
여러분 집 창고가 있다면 “저는 세관원인데 밀수품이 있다고 하니 실례하지만 잠시 검문 있겠습니다. 이 창고 안에 뭐가 들어 있습니까? 창고를 잠시 열어 봐도 되겠습니까?” 창고를 딱 열어보니까 그 안에 예수님이 들어 있다면 “오~ 여기는 예수님이 들어 있군요. 그렇다면 이 창고는 살아있군요”이렇게 한다 이 말이죠.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느냐가 목적이 아니고 우리가 살 수 있는 것을 담고 있어야 그게 산 사람이 되는 겁니다. 죽은 사람도 살려내는 그 파일, 그 정보, 그 능력, 그 사례, 그 경우, 그 사건이 우리 속에 있어야 사는 거예요. 그래서 이렇게 뛰면 철렁철렁 안에 뭔가 들어 있어서 철렁철렁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이 우리 안에 내장되어 있고 저장되어 있으면 그 때 밖에서 볼 때 단 사람은 산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추운 날 밤중에 다른 집은 그냥 백색 스탠드를 하는데 어떤 애가 취미가 요상해서 벌건 저런 전기난로 같은 벌건 색의 스탠드를 키면 밖에서 보면 다른 집은 하얀데 그 집은 벌그스름하게 창가에 붉은 빛이 보이죠. ‘아하 저 집은 빨간 스탠드를 켰구나.’하고 알 수 있잖아요. 그것처럼 우리 안에 예수님이 있으면 우리는 뭐가 됩니까? 죽었다가 살아난 벌건 산 능력이 우리한테 벌겋게 나오겠지요. ‘나오겠지요.’ 라고 이야기했는데 나옵니까? 나오고 있습니까? 나옵니까? 안 나옵니까? 이게 나와야 되겠죠. 나온다 이 말이죠. 그렇게 나올 때 만약에 옆집에 벌건 것을 보고 “아이고 촌스럽다. 나는 하얀데 왜 저 집은 벌겋지?” 할 때 “어이, 옆집” “왜?” “너도 빨간 스탠드 켜줄까?” “나는 너처럼 그 벌건 색 싫어”이럽니다.
우리가 왜 평소에 예수님을 안 믿느냐 하면 예수님의 그 사고방식이 우리가 싫어하기 때문에 그래요. 예수님 중심으로 세상이 짜여 진다는 것이 내 취향도 아니고 내가 원래 원했던 바도 아니고 내가 손 모아 고대했던 바도 아니에요. “어이고 예수님 세계가 되었으면” 하고 그렇게 별로 달갑게 여기지 않은 겁니다. 왜 그러냐 하면 그동안 평생 동안 충실하게 내가 중심이 되어서 아주 짜임새 있게 짝짝 멋있게 참하게 만들어 놓은 나의 훌륭한 ‘나’라는 건물이 있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만들어 놓은 짜임새가 너무나 멋있기 때문에 이렇게 멋있는데 내가 여기다가 예수님의 건물이 들어 올수 있어요, 없어요? 들어 올수가 없는 거예요.
내가 애써서 평생 동안 한 것에 만족스러워서 조금만 더 여기서 노력하면 나는 남한테 멋있게 보이는데 아니 이것을 죽었다고 하고 이것이 잘못 됐다고 하고 간주해 버리면 듣는 사람 기분 되게 나쁘죠. 기분 나쁜 거예요 여기서 조금 더 나아가봅시다. 지금 성경말씀을 누가 다루냐 하면 교회에서 교회와 교인들이 다루죠. 그러면 교인들이 성경을 볼 때 자기가 죽었다고 봅니까? 살았다고 봅니까? 살았다고 보죠. 살았다고 봐요. 왜 살았다고 볼까요? ‘지금 까지 내가 이만큼 키워온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이만큼 되었습니다.’ 하는 말인데 틀린 말이 아닌데 은근히 노림수가 따로 있어요.
미국에 있는 102층 높이의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처럼 내안에 건물이 지어져있어요. 창고인데 남한테 자랑할 것이 굉장히 많은 거예요. 많아서 턱하는 말이 “하나님, 지금 이만큼 마저 올리는데 제가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왜? 나는 지금 살아있기 때문에 그것도 그냥 살아 있는 게 아니라 멋있게 살아있기 때문에 ‘끄트머리 요것만 내게 채워주시면 내가 이 몽땅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의 공로라 하겠는데 하나님의 은혜라고 자랑하고 싶은데 조금만 도와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 이 모든 중심이 마지막 심판 때 우리가 하나님의 공로를 아무리 이야기해도 하나님께서 인정을 하겠어요, 인정을 안 하겠어요? 인정을 하지 않아요.
만약에 이것을 인정한다면, 인정이 된다면 골로새서 1장 7절이 이렇게 되어야 돼요. ‘세상에 모든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들은 다 이근호 너를 위하여 만들어 졌다’ 이렇게 돼야 될 텐데 성경은 내 이름자리에 무슨 이름이 들어갑니까? 예수님의 이름이 들어가는 거예요. 예수님 이름이 들어가면서 우리는 평소에 뭐라 하느냐 하면, 이제부터 어렸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태어나게 하셨고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서 이만큼 컸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이 들어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기는 크리스마스트리처럼 모두다 하나님, 하나님, 하나님으로 도배를 해 놨어요. 하나님으로 도배를 해 놓은 이 모든 것이 얼마나 멋있습니까? 하나님, 하나님, 하나님……. 그런데 그 하나님께서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영광, 이것을 인정하지 않아요. 시체에다 색조 화장해 봐야 그것은 소용없는 겁니다. 색조 화장한다고 시체가 살아나는 일은 없어요. 죽은 인간에다가 아무리 화장발 해 봐야 소용없다 이 말이죠.
죽은 인간이 하나님을 동원시키고 아무리 해도 예수를 동원시키고 성령을 동원시켜도 소용없는 거예요. 이것은 ‘죽은 것은 이미 죽은 것입니다.’ 아브람이 하나님을 거론하고 하나님에 대해서 이야기했다고 해서 아브람이 아브라함으로 바뀌었습니까? 아브람이 아브라함이 된 것이 아브람이 제단을 쌓아서 됐습니까? 하나님을 섬기기 때문에 그렇습니까? 이삭을 바쳐서 그렇습니까? 뭐 때문에 아브람이 아브라함이 된 거예요? 약속의 땅을 떠났기 때문에 그렇습니까? 아브라함된 것은 일방적인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들어 주신 겁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하나님의 것을 채울 창고조차 현재기준에 우리 창고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 창고조차……. 우리는 창고는 우리가 제공하고 안에 있는 내용물은 하나님이 주시고 그게 안 된다는 거예요. 왜냐 하면 우리창고는 이미 육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육과 영이 만날 수가 없어요. 제가 안양강의에서도 그렇게 이야기했습니다만 언약궤를 들여다 본 사람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다 죽었어요. 거기서 뭐가 올라오죠. 하나님의 저주가 올라오죠. 서울에 눈 올 때 오르막길을 무엇으로 덮어야 하죠. 염화칼슘이나 모래로 덮으면 미끄러움이 방지되지요. 그러면 하나님의 저주를 우리가 뭐로 덮을 수 있습니까? 담요로 덮습니까? 아니면 소화기로 뿌리겠습니까? 하나님의 저주를 무엇으로 커버할 수 있겠어요. 우리 힘으로 커버가 됩니까? 안됩니까? 안되지요. 손가락 사이로 다 튀어나오죠.
‘하나님의 저주를 이 무서운 저주를 우리가 감당 못한다!’ 이게 복음이에요. 어느 인간도 직업이 농사꾼이건 교사이건 어떤 직업도 어떤 판사 의사라도 하나님의 저주를 이길 수 있는 위인은 이 세상에 없다 이 말이죠. 복음은 그것부터 시작되는 거예요. 교회를 뭐 50년 다니고 목사가 되고 해도 목사가 된 것 가지고 하나님의 저주를 막을 수가 없어요. 또 어떤 사람은 생각하기를 “우리 집은 너무 너무 억울해요. 사기를 당하고 또 당하고” “우리 애는 몸이 아프고” 사기를 당하고 집안이 엉망진창 된 그런 동정이 주님의 저주를 이길 수 없습니다. 폭설이 오면 염화칼슘 뿌리면 대충되고 또 모래뿌리면 어느 정도 미끄럼을 방지할 수 있지만 하나님의 저주를 돈으로 막을까요, 희생으로 막을까요? 심지어 베드로 같은 경우 자기 목숨을 내놓고도 하나님의 저주를 막을 수 있었겠어요, 없었겠어요? 못 막지요.
‘너 목숨을 내놓아도 너 못살아!’ 아브람이 이삭을 바치고 아브람이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서 약속의 땅 가고 애굽에서 뭐 아내를 보호하고 아무리 애를 써도 아브람은 자기의 모든 행위를 가지고 아브람이 아브라함이 될 수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로마서 4장에서는 아브람은 자기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이 아니라 자기의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받지 못했다 말이죠. 그 말은 아브람을 다루었던 것은 아브람 자신, 본인이 아니었어요. 누구였습니까?
아브람을 다루었던 것은 아브람의 하나님이 아니고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다루었지요. 아브람의 하나님은 아브람으로서는 상상을 못해요. 그래서 우리는 구약 아브람에서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아브람이 아브라함이 된 것, 다시 말해서 죽은 자에서 산자가 된 것은 살아있는 하나님께서 복의 이름으로 죽었다가 살아나신 분이 개입해야 그 사람이 죽었다가 살아날 수가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이 그전에 인간이기 때문에 아브람이 생각했던 인간으로 생각했던 이 모든 설치, 설치물들 평생을 통해서 ‘나 이런 애를 썼습니다. 이런 행함을 합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은혜주시면 이것보다 더 큰일도 내가 해 내겠습니다. ‘나’라는 것은 평생 이렇게 반듯하게 살았습니다.’또는 반대로 ‘나 이렇게 죄를 지었습니다.’ 죄를 짓던 반듯하게 서 있던 그게 문제가 아니고 나의 그런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그 형편의 조건을 우리 쪽에서 어떻게 따지든지 상관치 않고 일방적으로 오셔서 일방적으로 하나님의 자기 약속을 구현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아브람은 아브람이 아니고 아브라함이 되고 하나님은 아브람의 하나님이 아니고 아브라함의 하나님으로 이 땅에 등장하시는 거예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등장했다는 말은 이와 같은 방식은 아브람에게만 적용될 문제가 아니고 앞으로 구원받을 모든 사람에게 같이 적용될 문제에요.
그래서 모든 사람이 아브라함이 되지 못하면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볼 수 없는 겁니다. 지금 까지 한 것을 다시 한 번 정리해 보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일을 하시는 것에 대해서 우리가 환영합니까? 환영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서 우리가 환영할 수가 없어요.
자기 나름 대로에 꾸겨놓은 내 틀이, 내 장식물이 나라는 이름에 장식물이 있기 때문에 환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차고 들어오는 것은 싫고 하나님을 믿어야 되니까 기껏 하는 방식이 하나님의 명령을 그냥 지켜주는 거예요.
하나님의 명령을 지켜 준다는 말은‘나는 내 체계를 명령 지키는 것으로 이렇게 리모델링하겠다! 새롭게 예쁘게 꾸미겠다! 하지만 내 모든 것이 무시당하는 것은 내가 싫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구원이 되지 않는데 만약에 구원이 된다고 하면 '나는 이 명령도 지키고 어릴 때부터 십계명도 다 지켰나이다.' 라고 부자 청년이 하는 것처럼 자기가 했던 것들을 낱낱이 리스트를 잊지 않고 그것을 차곡차곡해서 이런 높은 탑을 세우는 거예요. 이런 탑을 세우려고 하니까 점점 더 하나님의 명령에 대해서 집중해서 열심히 지키고 교회도 충성하고 교회도 잘 다니고 그렇게 하고 싶은 겁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주로 말미암아 주께로 돌아가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에 본인이 내가 싫다는 표시에요.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우리가 주의 말씀을 지켜볼까 하는 것은 그 만큼 ‘나는 예수님이 싫습니다.’하는 뜻이에요. 싫고 주의 말씀을 지키는 내가 예수님보다 훨씬 낫고 당깁니다. 호감이 갑니다. ‘나는 나한테 호감이 가는데 예수님은 영 나한테 호감이 가지 않습니다.’라는 말을 솔직하게 차마 못하니까 ‘에이 말씀이나 지켜 주자 십자가 믿으라고 하면 믿어 줄게요. 뭐 하라 하면 할게요. 하지만 여전히 나는 내가 좋지 예수님은 나에게 영 별로입니다.’하는 그런 태도가 되는 겁니다. 이렇게 살아도 분명히 나는 살았다고 외치고 싶다는 거예요.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의 공로를 외치며 살아가는 자체로 나는 살았다고 보고 싶은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공로로, 은혜로 말을 한다고 사는 게 아니고 그것을 말하는 것조차도 그것을 너는 죽어있다고 보는 겁니다. 살아있다는 것은 너 안에 네가 어떤 말을 했느냐가 아니라 그 안에서 이 예수님이 어떤 일을 벌였느냐가 중요하다 이 말이죠.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목사님 내안에, 우리 성도 안에 예수님은 어떤 일을 벌였습니까?”라고 물으신다면 저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모든 나에게 일어난 것이 주로 말미암고 주를 위하여 생겼다고 손톱이 자라는 것, 머리카락이 자라는 것, 머리카락 자라는 것 하면 안 되고 머리카락 빠진다고 해야죠. 손톱 자라는 것, 머리카락 빠지는 것, 우리 모두 늙어가는 것, 또는 키가 커가는 것, 이것이 나와 관계없고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예수를 위하여 쑥쑥 자라난다 이 말입니다. 안경 끼는 것조차도 다 주를 위하여 하는 거예요. 주께서 그렇게 만드신 거고 주를 위하여 하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주를 위하여 주께서 하셨다는 생각을 안 하고 그것을 뭐로 바꾸나 하면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하셨다고 보는 거예요. 성경 골로새서는 분명히 ‘예수님을 위하여’ ‘예수님으로 말미암아’로 되어 있는데 우리는 그것을 뭐로 바꾸기를 좋아해 하냐 하면 ‘하나님 때문에’ ‘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이라는 용어를 쓰기를 원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 차이점이 뭘까요? ‘주를 위하여’와 ‘하나님을 위하여’가 어떤 차이점이 있느냐 하는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하면 누가 필히 있어야 됩니까? 내가 여기 살아있어야 살아있는 하나님께 제사 드리고 예배드릴 수 있는 겁니다. 창세기 4장에 보면 가인이 뭐했습니까? 가인이 제일 먼저 한 것이 뭡니까? 가인이 태어났다 그 다음에 뭐했죠. 가인이 하나님께 뭘 드렸죠. 제사를 드렸죠.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어요. 누구를 위하여? 제사를 누구에게 드립니까?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위하여 드렸죠. 그런데 그게 인간이 어떤 마음으로 드렸냐하는 것은 그 뒤에 동생이 제사 드리므로 말미암아 이게 들통 나요. 인간이 말하는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하는 것은 그것은 하나님도 좋고 제사 드리는 그로 인하여 하나님 때문에 내가 있음에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께서 나를 만드셨기에 하나님이 계심에 그 다음에 나도 있다는 것이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이고 예수님이 계심에 나는 죽어야 마땅합니다. 라고 하는 것은 주를 위하여 주로 말미암을 때나 있을 때 생기는 현상이라 이겁니다.
우리가 교회 다닌다고 툭 치면 ‘뭐 믿습니까?’ ‘하나님 믿습니다.’ 너무나 쉽게 나와요. 왜 쉬우냐 하면 하나님을 거론하면 내 것은 다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도 좋고 누이 좋고 매부 좋고 다 좋아요. 그러나 주로 말미암아 하면 그 주님이 어떤 주님입니까? 내 죄 때문에 십자가 지신분이잖아요. 그러면 우리는 예수님 앞에 뭐가 됩니까? 예수님 앞에서 항상 죄인이 되어야 돼요. 하나님 앞에서는 하나님이 거기계시면 나는 여기 있는 거예요. 왕의 남자에 보면 나오잖아요. 나, 여기 있고, 너, 거기 있고, 내가 여기 존재하는 만큼 하나님도 존재하십니다.
우리는 그것에 대해서 거부반응이 일어나지 않아요. 내가 여기 왜 있는가? 하나님이 만들어서 있겠지. 이것은 종교를 초월해서 심지어 절에 다녀도 다 아는 거예요. 내가 여기 있는 것은 조물주가 있기 때문에 내가 있다 이런 것 다 아는 겁니다. 그러나 ‘나는 뭘 해도 죄인입니다.’하는 이야기는 예수님이 십자가 피 흘린 그 앞에서 설 때에 비로소 죄인이 되지 그냥 하나님 앞에서 ‘나는 죄인이다.’라는 소리가 안 나온다니까요. 그냥 ‘하나님이 나를 만드신 분이지 내가 죄인이다.’ 라고 드러나는 것은 하나님 몫이 아니고 예수님이 우리 앞에 등장했을 때 아는 거예요. 만약에 그냥 하나님을 알아버리면 자기 양심상 아는 죄 있잖아요. ‘도적질했다, 거짓말했다 이런 것은 이건 죄입니다. 그냥 죄지만 내가 죄를 알고 반성한 다는 것이 이것이 다 하나님의 공유역속성에서 나오는 내가 신의 품성을 입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라고 여전히 자기 선한 것을 뽑아내려는 그런 시도가 굉장히 많아요.
여러분, 무당을 만나 본적이 있어요? 그 무당이 예를 들면 귀신을 섬기거든요. 자기 한 테 신이 와요. 김유신 신이 오면 김유신을 섬겨야 되고 이순신 신이 오면 이순신을 섬겨야 되고 단군신이 오면 단군신을 섬겨야 되고 선덕여왕 신이 오면 선덕여왕 신을 섬겨야 되고 옛날 귀신이 있었어요. 귀신이 떠돌다가 자기 에게 찾아오면 그신을 섬긴다 이 말이죠. 그러면 그 귀신이 뭐라고 무당에게 닦달을 하고 다그칩니까? ‘너는 뭘 해도 죄인이야, 뭘 해도 죄인이야.’ 이렇게 이야기합니까? 아니면 네가 이렇게 살림이 피지 않고 몸이 아픈 것은 나에게 제사 안 드려서 그렇다 어느 쪽입니까? 너는 뭘 해도 죄인이야 이렇게 닦달하고 나무라는 겁니까? 아니면 ‘네가 나한테, 김유신한테 바르게 하면 팔자 피는 거야, 아픈 것도 없어지는 거야’라고 하는 것과 어느 쪽이에요. 후자지요. 무당과 귀신사이에는 주고받는 게 있잖아요. 그게 성경에 나오는 우상이라는 말이죠. 그게 하나님이에요.
오늘날 교회에서 줄 것 주고, 받을 것 받아야 되는 것이 기독교라는 이름의 신 내림이고 무당이라니까요. 무당굿 하는데예요. 지붕에는 십자가 있는데 지붕 뚫고 밑에는 보세요. 십자가 없어져요. 무당이라니까요. 네가 집안이 이렇게 안 피는 것은 바치지를 않아서 하나님께 봉사를 안 해서 저주를 받으니까 봉사하면 다시 원상회복될 것이다. 이것은 성황당, 어린이 여러분 성황당 알아요? 어린이 몇 명되지도 않지만 ……. 나그네 앞길을 인도 하는 성황당 말입니다. 나그네 슬픈 여정을 위로해 주는 성황당 가면서 빌고 오면서 빌고 다시 이 고향 돌아올 때까지 우리귀신께서 지켜 달라 빌고 동전 던지고 하는 성황당 있어요.
주일날 교회에 나와서 “이번 한 주도 참 중요한 일 많습니다. 우리애가 대학에 실습시험을 치는 데 피아노를 잘 치게 해 주시기 바랍니다.” 하고 던지고 하는 이게 성황당 역할 하는 거예요. 교회라는 것이 다른 것은 포기해도 우리 애는 포기 못하겠어요. 우리애가 어떤 앤데 어릴 때 아플 때 결핵 걸렀을 때 병원 업어서 키웠고 쟤가 과외하면서 내가 파출부까지 하면서 돈 벌어서 과외 시켰는데 어떤 애인데 이번 수능에서 점수 나와서 좋은 대학 3군데 냈는데 3군데 중에 한 군데는 맞아 떨어져야 하는 데 그저 잘 되게 ……. 비나이다. 비나이다. 신령님께는 차마 못하고 예수님께 비나이다. 우리 애는 보배입니다. 제가 30년 믿었어도 이 애 하나보고 믿었는데 주께서 제 마음아시지요. 정성이 부족하면 정성을 드리겠고 이번 기회에 합격만 시켜 준다면 다이아몬드가 문제입니까? 다이아몬드는 안 되더라도 가짜 보석이라도 제가 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이름으로 비는 거 다 하나님의 주권을 믿습니다. 모든 것이 주의 뜻대로 되니까 주님께서 능력주시면 우리 애 합격하는 것 금방 될 건데 그 힘좀 써 주셔서 금방 되게 해 주시고 금방 되게 해 주시면 모든 은혜를 하나님의 은혜로 돌리겠습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 빠진 예수 그리고 흔히 하나님을 섬기는 그 오늘날 교회의 모습이고 ……. 제가 오면서 봤어요. 밑에 주유소 있는 골목 보니까 골목 저 끝까지 천국 같아요. 빨간 네온사인이 길에 쫙 굉장히 많아요. 그게 뭐냐 하면 바로 가까운 이웃에 있는 성황당들이에요. 제일 성황당, 지묘 성황당, 충현 성황당, 서울에 유명한 소망 성황당, 영락성황당 그게 빠졌네요. 순복음성황당......
골로새서 1장16절에 보면 네가 현실을 몰라도 한 참 모르는 구나 진짜 현실은 너 빼놓고 심지어 너 머리카락 하나까지 전부다 누구 겁니까? 내 것은 없고 주님 것인데 “주께서 주셨잖아요.” “주시기는 뭐줬어, 내가 너한테 언제 줬는데 안 줬어 너한테 있더라도 내꺼야 주기는 뭘 줘 처음부터 내꺼였는데 주기는 뭘 줘” 모든 만물이 나을 위하여 나로 말미암아 만들어 진거예요. 우리의 고민과 걱정과 두려움과 불안은 어디서 생깁니까?
여러분, 공포하고 불안하고 달라요. 공포라고 하는 것은 대상이 있어서 떠는 것을 공포라 하고 대상이 없는 것에 떠는 것은 불안이라고 해요. 이상하다 뭔가 이유는 모르겠는데 두려운 것을 ‘불안’이라고 해요. 그런데 불안한 것은 다 이유가 있어요. 남의 것을 탐내는데서 오는 미흡한데서 오는 불안감이에요.
공포라고 하는 것은 내가 예상치도 못한 낯선데서 왔을 때 “저리가 무서워” 이건 공포이고 아무도 없는데 “아이 참 살기 싫어 내가 왜 살지” 아무 이유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이상하게 불안한 것, 보험 하나 넣을까? 암 걸렸다는 소리 들으면 암보험 한번 넣을까? 당뇨 걸리면 당뇨용품 챙겨야 되나 기름 값 오르면 기름 사제기를 해 또 북한이 쳐들어온다는 소문 들리면 라면도 사다놓을까? 알 수 없는 그 불안, 그 불안을 결핍을 메우기 위해서 사람은 날마다 남의 것을 가지고 자기 것으로 만들려고 애를 쓰는 겁니다.
사람에게 잘 해주는 것은 뭔가 돌아오는 것을 기대하면서 잘해 준다 했죠. 그런데 어느 날 만약에 자기 것을 만족해 버리면 그때부터 불안이 없어지는 게 아닙니다. 더 불안해 져요. 여러분들이 꼭 되고 싶은 게 있다 합시다. 그런데 그 시점이 왔다 합시다. 되고 싶은 시점에 왔을 때 그때부터 불안한 거예요. 기쁜 것이 아니고 ‘아, 이게 아닌데 내가 기대했던 것이 이게 아닌데 …….’ 걱정스러운 거예요. 꼭 보고 싶은 풍경을 현지에 가서 봤습니다. 좋아 보입니까? 돌아갈 시간만 보게 됩니다. ‘이게 아니야’ 꼭 먹고 싶은 음식을 먹었는데 먹고 난 뒤에는 ‘이 맛 아니야, 이거 아니야’ 사람이 자기가 기대하는 것이 뭔가 미흡한 것이 남아있을 때는 소망이 있지만 그 소망을 채우면 그 사람은 죽이고 싶을 거예요. ‘왜 내 소망을 없애는데?’나는 뭔가 막연하게 기다리는 그 재미로 사는데 그것을 만약에 채워져 버리면 나는 사는 재미가 없잖아요. 축구 결승하기 직전이 재미있지 결승전 끝나면 재미없어요. 사람이 기다리는 게 있어야 재미있지 기다리는 게 사라져버리면 멱살 잡고 “누구야 내 소박한 기다림을 소멸시킨 게 누구야” 이렇게 되는 겁니다.
사람이라 하는 것은 골목골목가면서 저 골목 돌면 아주 멋진 행운이 기다릴 거다. 기대하고 돌고 그 다음 가면 이것보다 더 한 방 큰 행운, 돈벼락이 떨어질 그것을 기대하고 또 돌고 돌다보면 벌써 나이가 70이 되고 80이 되는 겁니다. 만날 그런 식으로 그 만큼 인간이라 하는 것은 태어나면서부터 나는 어디 까지나 나는 나만 사랑하고 나는 내가 주인이라는 것을 하나님이 아니라 누가 와도 나는 양보할 생각이 없다. 마음 단단히 먹고 그렇게 살아가는 겁니다. 그래서 그 가운데서 우리가 예수님을 부르던, 하나님 부르던 그게 전부 다 가짜가 되는 거예요.
그럼 가짜가 되는 것을 1번 ‘진짜로 고쳐야 된다’. 2번 ‘그냥 가만히 놔둔다.’ 몇 번입니까? 이것은 고치는 그 자체가 또 하나의 결핍을 마저 채워서 고치고 난 이후의 나를 내가 가지려하는 거예요. 고치고 난 이후에 나를 또 내 것으로 삼고자 하는 겁니다. 고치지 마세요. 이렇게 하셔요. 이렇게 못 고칠 수밖에 없는 것을 누가 만들었는가를 그리고 누가 지금도 못 고치는 것을 그것을 가지고도 예수님을 증거하게 하시는 그 예수님이 어떤 분이냐를 알아 가면 돼요.
만약에 똥오줌 못 가리는 두 살 아이가 고민을 하는 거예요. “내는 왜 어른처럼 똥오줌을 못 가릴까?”이렇게 고민하면 부모가 가짠해서 웃습니다. “너는 그냥 싸라 내가 치울게” 우리는 성경을 보고 목사님 말씀대로 나는 나밖에 모릅니다. 어떻게 하면 내가 인간돼서 주님을 섬길까요? “너는 똥오줌도 못 가리는 두 살짜리야 내가 알아서 해” 이게 성경입니다.
양철북이라는 귄터 그라스 작가가 노벨문학상 받은 건데 양철북이라는 이 소설은 어떤 내용이냐 하면 3살 먹었는데 사고방식은 어른이 돼서 너무 조숙한 거예요. 그래서 일부러 크지 않기 위해서 사다리에서 떨어뜨려서 자기 몸의 성장을 멈추는 애로 만들어 놓고 양철북을 치는 거예요. 양철북을 왜, 치냐 하면 애는 벌써 어른들 인생이기 때문에 현재 어린 아이의 눈에서 어른들이 순수하지 못한 세속적이고 지저분한 것을 적발기위해서 양철북을 치는 거예요. 하나의 경고에요. 너희는 썩었다 쿵탁쿵탁하면서 썩었다 그래서 만약에 양철북을 뺏으려하면 그 근체의 유리창이 확 깨지고 이래요. 제가 옛날에 1979년도에 작품을 본 기억이 나요. 신학교 다닐 때 영화를 보면서 어린애가 어른을 고발하는 겁니다. 기성세대를 고발하는 거예요.
무슨 말이냐 하면 어른은 이미 한 패가 되기 때문에 한 패가 된 이상은 자기 문제에 대해서 눈을 감아버립니다. 남 공격하기 바쁘지 내 자신의 문제점을 보지 않습니다. 고등학생보고 “어이 너 담배 왜 피워?”하면 “이건우리아버지가 가르쳐 줬어요” "술은 왜 먹어?” “우리 아버지가 술 먹어야 남자답다 해서 술 먹으면 아, 잘했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핑계를 아버지를 댑니다. 정말 먹기 싫은 술을 먹는 겁니까? “술아, 술아 술 꼴 보기 싫다” 이렇게 되는 겁니까? 어른 핑계되면서 사실은 술 먹고 해롱해롱 취하는 그 기분에 애가 절제력을 잃어서 젊은 애들이 빠져들어 가서 그래요. 또 담배를 피우고 싶은 것이 아니고 담배 피우면 마치 어른인양 행세할 수 있는 거들먹거릴 수 있는 그것이 되기 때문에 담배피우는 겁니다.
이 핑계를 남한테 데는 거예요.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해서 그렇게 변명이 많고 구실이 많고 따지기를 좋아 하는 거예요. 그렇게 변명하고 따진다는 것은 이유야 어쨌든 내 하는 것은 옳기 때문에 저리가라 밀어내는 거예요. 자꾸 밀어내는 거예요. 다른 것은 손데도 내가 좋아하는 내가 최고로 좋아하는 마지막으로 좋아하는 내 자신에 대해서 손 데지 말라고 밀어내는 겁니다. 밀어내다 보니까 예수님마저 밀어냈죠. 밀어내고 뭐라 하느냐 하면 “이 몸은 주님의 은혜이고 하나님의 은혜인데 왜 자꾸 관섭하십니까? 주님의 은혜로 이만큼 했는데 왜 자꾸 이것을 죄라 합니까?”자꾸 밀어내는 거예요. 오늘날 개혁주의 신학자, 목사들처럼 하나님의 은혜로 됐는데 그럼 귀한 것이지 왜 자꾸 이것을 죄인이라고 보느냐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꿍꿍이가 다른 데 있죠. 평소에 습관이 하나님 안에서 좀 더 하나님처럼 우수하고 싶은데 예수님이 딱 오니까 ‘예수님을 본받으면 나는 예수님만큼만 본받아도 나는 하나님 앞에서 훌륭하게 되겠지’라고 여전히 자기 건물, 자기 우상체가 자기 안에 들어 있는 겁니다. 그러니 성경을 보던 기도를 하던 전부다 자기 꾸미는데 연연하고 그거하기 바쁘죠. 그런데 성경은 네가 그렇게 꾸미는 것도 의미 없고 안 꾸며도 의미 없고 어쨌든 너 몸뚱이 하나는 전부다 예수를 위하여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만들어 놓았다는 겁니다. 네가 그것을 믿거나 말거나 그렇게 됐다는 겁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여러분 생각하기를 ‘그러면 세상만물이 주님의 것이면 목사님 말씀에 의하면 모든 사람은 다 자동적으로 구원받게 되어 있네요. 보편 구원설, 모든 사람은 사람이라는 이유 때문에 그냥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이미 다 예수님에 의해서 다 구원받은 측이 되네요.’라고 이야기할 거예요.
그런데 그걸 아셔야 돼요. 아브람과 사라 사이에 낳은 자식의 이름이 뭐예요? 이스마엘이죠. 이스마엘이 구원받았어요?? 에서가 구원받았어요? 훌륭한 믿음의 아버지 이삭에서 나왔는데 또 누구죠? 야곱이죠. 한 아버지 밑에서 둘이 태어났잖아요. 그러면 아버지가 구원받았습니까? 안 받았습니까? 구원받았죠. 그럼 구원받은 속에, 아버지 안에 쌍둥이가 들어 있잖아요. 그러면 아버지가 구원받았으면 아들 둘은 자동적으로 구원받습니까? 안 받습니까? 우리의 논리로서 아버지 안에 들어 있으니까 구원받아야 될 것 아닙니까? 예수 안에 들어가면 다 구원받아야 하잖아요. 우리 일반적 논리의 하면 안이 뭐예요? 밖에 넓은 게 있고 그 안에 좁은 것이 있잖아요. 그러면 넓은 것에 의해서 좁은 것도 넓은 것에 지배를 받으면 자동적으로 아버지가 구원받으면 아들도 구원받게 되어 있는데 이삭에서 나온 아들이 어떻게 됩니까? 한 쪽은 어디 가요 ? 한 쪽은 지옥 가죠. 로마서 9장에 보면 에서는 지옥가게 되어 있죠. 창세전부터 미움 받게 되어 있죠. 야곱은 어디 갑니까? 야곱은 창세전부터 천국가기로 작정되어 있죠. 그가 태어나서 어떤 행동을 하던 관계없이 이미 한 쪽은 천국가게 한 쪽은 지옥가게 되어 있다 이 말이죠.
그렇다면 약속이라는 것은 약속 안에 있다는 것은 몽땅 천국 간다는 말이 아니고 필히 천국 갈 사람은 천국가고, 지옥 갈 사람은 지옥가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다 자기 손으로 다 만들었다는 겁니다. 지옥 갈 사람을 위해서 친히 지옥 갈 사람답게 만든 거예요, 천국 갈 사람은 천국 갈 사람답게 만들어 내는 거예요. 그 ‘답게’ 되는데 그 답게 하는데서 인간의 어떤 기여나 어떤 방해를 놓을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다는 거예요. 나는 지옥가고 싶은데 주님은 천국을 가라 하네. 그래서 내가 온갖 노력을 다해서 죄를 지었어. 우리가 지옥갈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못갑니까? 갈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보고 싶은데 그냥 이 세상사는 것으로 뭐 지옥 본 것으로 때 웁시다.
서울 110114b 몸과 교회
둘째 시간 해 봅시다.
첫째 시간에 제가 말씀 드렸잖아요. 우리가 열심히 하던지 관계없이 그런 것은 주님께서는 따지지 않고 열심히 하던 열심히 안 하던 세상의 몸은 내가 내 것이라고 넘겨준 게 없다는 겁니다. 피조물들아 어차피 다 풀 한포기도 다 내 것이고 심지어 마귀도 다 내 것이고 악마도 내거고 이 모든 것이 다 내 것인데 네가 내거 따로 있다고 우겨 봤자, 다 헛소리고 소용없는 소리다 하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것이라면 이왕이면 나를 좋은 쪽으로 나를 좀 사용해 주시옵소서. 왜, 내가 좀 편하게 내가 행복하게 나를 좀 좋은 쪽으로 사용해 주면 안 되겠습니까? 하는데 주님께서는 네가 나한테 그것을 요청할 권리가 없다는 겁니다. 죽이 되던 밥이 되던 솥에 밥을 하는데 어떤 집은 죽이 되고, 어떤 집은 밥이 되더라 말이죠. 거기에서 먹는 사람이 생각되어야지 쌀 알갱이가 “나는 왜 죽이 되었을까?” 이렇게 고민한다는 것 자체가 주제파악을 못했어요. 자기 위치를 몰라서 그래요. 주님께서는 자기 피조물 다룰 때 “우리가 열심히 하겠습니다, 안하겠습니다.”하는 그런 것을 듣지를 않아요.
처음부터 주님의 속성을 드러내기 위해서 했기 때문에 괜히 우리가 쓸데없는 그런 오해, 잘못된 생각을 가졌으면 곤란하겠죠.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피조물 가지고 뭘 하시려하는가? 여러분, 지금 두 손을 가지고 뭐하고 있지요? 귤을 까먹지요. 그렇다면 예수님은 자신을 가지고 무엇을 하시는가? 예수님은 자신을 뭐로 바꾸나 하면 주되심을 드러내요. 주가 되게 하십니다. 주가 되는데 여기에 필요한 것들이 누구냐 하면 바로 피조물들이 필요해요. 그 피조물 속에는 악마도 들어 있고, 불신자도, 지옥 갈사람 다 들어 있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주가 되시는데 피조물, 악마도 동원되어 다 들어가서 예수님께서 주가 되시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주가 되신다면 하나님이 아주 만족하세요. 하나님이 만족하시면 돼요. 그러니까 우리 피조물의 목적은 하나님이 만족하시면 돼요. 하나님께서 만족 하시면 ok입니다. 더 이상 우리가 다른 기대나 희망은 필요하지 않아요.
제가 지난 수요일에 이런 예를 들었어요. 26살 먹은 어떤 여자 분인데 서울법대를 나왔어요. 사법연수원에서 이번에 수석으로 졸업했습니다. 그게 하나님의 영광입니까? 그게 신문기사에 나왔습니다. 왜 기사에 났을까요? 남들이 다 그런 것을 보고 싶어 하거든요. 왜 보고 싶어 할까요? 사법연수생 수석이 왜 궁금할까요? 그것은 내가 얻지 못한 것을 누가 얻게 되면 내가 갖고 싶은 것을 눈에 보이는 식으로 들어난 것이 돼요.
무슨 말인가 하면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 몸에서 시작되고 예수님은 예수님의 몸에서 시작되죠. 예수님은 어떻게 몸이 주가 되느냐의 문제이고 우리는 우리의 몸이 어떻게 신이 되느냐, 완전한 자가 되느냐 그 문제입니다.
이번 수련회 마지막 열 번째 시간에 핵심에 대해서 결론적으로 이야기를 했었어요. 그 핵심은 70이레라는 성경에 나오는 그 이야기, 70이레가 뭐냐 하는 거예요. 70년이면 70년이던지 칠칠 곱하기 70이레일 것 같으면 490년 하던지 490년이 아니고 왜 70이레냐 70곱하기 왜 1이냐? 490년 하면 될 텐데 왜 70이레냐 라고 할 때 제가 설명하면서 이 70이레라고 하는 것은 70이레라는 계시를 성취하실 분은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 바로 본인이라는 것을 설명해 드렸습니다.
그런데 왜, 66은 안되고, 78은 안되고, 왜 70이레냐 하면 이스라엘백성들이 죄를 지어서 약속의 땅에서 쫓겨나니까 자기들이 “야, 우리 죄지어서 쫓겨났어.”라고 이해 한 거예요. 죄지어서 쫓겨났다는 겁니다. 맞는 이야기 같아요. 그들은 죄지어서 쫓겨나니까 70년 동안 고생하게 되면 죄가 없어 질 거니까 그럼 몇 년 뒤에 다시 본국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까? 라고 생각해 보니까 이미 예레미야에서 너는 70년만 지나면 다시 본국으로 돌아온다고 생각 한 거예요.
이스라엘이 지은 죄는 70년 동안 복역을 하면 교도소에 복역하듯이 형을 살면 다시 본국으로 돌아온다는 겁니다. 다시 돌아와 봤자 그 사람은 뭐가 되겠어요. 또 죄지을 가능성이 있어요, 없어요? 또 죄지을 가능성이 있지요? 70년이 아니고 490년 해도 돌아오면 491년 되면 또 죄짓겠지요. 지금 에덴동산 가면 죄 안 짓습니까? 또 선악과보면 먹음직하고 다 따먹는데 귤도 먹는데 그걸 못 먹어요. 또 먹지…….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70년에 돌아오는 것이 아니고 70이레가 되면 된다는 겁니다. 그럼 70년하고 70이레하고 차이는 70이레 속에는 마지막에 죄를 영원히 용서하는 그런 일이 일어나게 되면 70년은 드디어 다 이룬 게 죄를 영원히, 영원히 입니다. 두 번 다시 죄인 되는 법이 없어요.
그렇다면 70년은 기다리기만 하면 되지만 70이레는 70년은 1년 2년을 봐야 돼요. 70년은 사람이 헤아릴 수 있는 거예요. 67, 68, 69 드디어 70 사람이 헤아릴 수 있는 거예요. 하지만 70이레는 누가 쥐고 있습니까?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쥐고 있기 때문에 70이레는 하나님께서 때, 어떤 사건, 때와 사건을 일으켜줘야 70이레가 이루어 져요. 그런데 그 마지막 사건이 무슨 사건이라 고요? 바로 우리의 죄를 영원히 용서하는 사건이 일어나면 우리는 두 번 다시 죄인 되어서 지옥 가는 법은 없는 거예요. 그것을 누구에게 주겠다고? 바로 인자의 나라, 다니엘에 속한 진짜 이스라엘에게 주겠다는 약속이 70이레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 70이레를 사람들은 이레가 붙었다고 490년으로 계산해서 490년 지나면 491년 때부터 무슨 큰일이 있겠지 하고 또 기다리는 거예요. 이레라는 것은 하나님이 주체가 되서 사건을 일으키고 때를 일으키는데 사람들은 자기가 시간을 헤아릴 줄 안다고 1, 2, 3, 4,해서 490년 지나면 뭔가 행할 수 있는 게 있겠지 라고 기다린 겁니다. 그 기다린 사람이 바로 이스라엘이었죠.
그 이스라엘이 예수님 십자가 죽일 때 어떻게 했습니까? 바로 마귀노릇을 했잖아요. 그러니까 인간들의 역사해석은 결국은 해석은 마귀의 해석이죠. 그 마귀의 해석에 둘려 싸여서 예수님은 십자가 죽으심으로서 예수님은 자신의 70이레를 이기는 거예요. 마귀는 피조물이죠. 악마죠. 악마가 그렇게 악마 짓을 제대로 해 줬기 때문에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피조물에 의해서 주가 되시는데 가뿐하게 주가 되셨죠. 우리 강구만 장로님 글에 나오잖아요. 에덴동산에서 뭐가 문제였냐 말이죠. 뱀은 뱀대로 역할 다하고 인간은 인간대로 할 일을 다 했으면 따먹으면 죽으리라, 따먹으면 죽으면 되잖아요. 돌아가잖아요. 뭐가 문제입니까?
이번에 우리교회에 장례식이 있어서 제가 하관예배 드릴 때 창세기 3장의 본문을 들었어요. 흙은 흙이니 흙으로 돌아간다. 잘난 사람도 흙이고 못난 사람도 흙인데 왜 자꾸 사법고시 26세에 수석 합격한 여자, 왜 같은 흙임에도 불구하고 그게 더 때깔 좋은 흙, 이왕이면 예쁜 흙, 이왕이면 멋있는 흙, 이왕이면 신문에 팍팍 나오는 흙, 그런 흙을 왜 좋아하느냐? 그것은 내가 스스로 힘없는 흙 되기 싫어하고 이왕 흙인데 나도 쟤처럼 어디에 수석 합격했으면 좋겠다는 자기 흙, 본연의 모습을 자꾸 잃어가기 때문에 본래 위치는 예수님의 주되심을 위해서 있어야 될 이 흙이 삐뚤어져서 괜찮은 흙, 원빈 흙, 장동건 흙, 재벌 흙, 체인지 하는 흙, 번개 칠 때 체인지 하는 그런 흙, 이상하게 우리는 그런 마음이라는 거예요.
이제 그것을 규명하려하는 거예요 참 신기하죠. 주께서 너희는 흙이야 너희 피조물들은 나, 주을 위해서 있는 거야 하면 우리는 예, 예, 예하면 될 텐데 왜, 우리는 성경에 나오는 대로 피조물이면서도 주님이 주되시는 것을 그렇게 마다하고 싫어하냐 말이죠. “목사님, 누가 주되심을 싫어한단 말입니까? 교회 나오면 예수님이 주되심을 좋아하죠.” 혹시 이런 말 하는 사람들 많을 거예요. 그 사람, 100% 주가 뭔지 모르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예수 앞에서 차라리 외면하고 싶은 모습이에요. 우리는 장동건 좋아하지, 장동건과 예수님이 여기 있다면 우리는 예수님을 원하지 않습니다. 지금 예수님이 좀 유명하니까 예수, 예수하지 예수님 이름이 예수가 아니고 김말복 같으면 “나는 김말복을 믿습니다.”하는 사람은 착각하는 사람이에요.
사람은 유명하면 다 믿게 되어 있어요. 예수님이 유명하니까 믿는 다고 하지, 만약에 우리나라에 교회가 대구에 3, 4명 모이는 교회 같으면 사람들이 “뭘 믿으라고?” “예수” “예수가 누구인데?” 별로 믿고 싶지 않아요. 유명하지 않으니까 유명해야 돈도 생기고 하는데 중국에서 예수 믿는 다고 해 보세요. 왜 믿느냐 하죠. 예수 믿느니 차라리 부동산 투기해서 상하이에서 아파트 사서 살겠다 그거 왜 믿는데 합니다.
수단에서 학교 세우고 봉사 하던 신부가 있었어요. 그 신부가 대장암으로 작년에 죽었죠. 그 사람이 다큐멘터리에 나왔거든요. 그 사람이 이야기한 것 중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 예수님 같으면 이 수단에 성당을 먼저 세우겠습니까? 학교를 먼저 세우겠습니까?”이렇게 기도 했다는 거예요. 기가 막힌 일이죠. 나는 그 사람이 왜 한국 사람이 수단에 갔느냐 그것부터 따질 거예요. 예수님은 어떤 피조물들도 인간이던 어떤 피조물로 만들어 졌으면 그것은 예수님의 주되심을 위해서 만들어진 거예요. 예수님의 뜻입니다. 성경의 뜻이에요. 주를 위하여 주로 말미암아 성경의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뭘 하냐 하면 “주여, 제가 한국에 신부로 살까요, 수단에 가서 봉사활동 할까요?” 이것을 왜 묻느냐 하는 거예요. 한국에 있어도 주님의 것이고 수단에 있어도 주님의 것인데 왜 묻느냐 이 말이죠.
그것을 분석해 보면 사람은 예수를 언급하고 하나님을 언급하지만 인간의 몸은 주님의 몸이기 때문에 자기 마음대로 되지를 않아요. 자기 마음대로 안 되는 몸을 가지고 자기는 주의 뜻대로 나는 거기에 마음이 있어서 수단에 갔다는 거예요 사람은 뭐라고 거짓말하느냐 하면 내 몸은 내 몸인데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기도 하다 보니까 “주여, 이 몸 가지고 수단에 가서 봉사 활동하라는 그 말이죠?” “예, 가겠습니다.”하고 주님의 뜻대로 자기가 수긍을 해 줘서 그래서 내 몸이 내 몸을 이끌고 김포공항에 가서 비행기 타고 수단에 갔다는 겁니다. 거짓말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싫어하는 것은 이것은 우리가 결정하는 문제가 아니고 우리 몸이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이 주되심이 우리 몸으로 하여금 그런 신호를 보낸 거예요.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있습니다.
학생, “너, 짬뽕 먹을래? 자장면 먹을래? 둘 중에 한 개 먹으라면 어느 것을 먹을래?” “자장면이요” “짬뽕 먹고 싶을 때가 없을까? 또 짬뽕 먹고 싶을 때가 혹시 있겠지?” “없어요.”계속 지켜봐요. 80세까지 자장면만 먹나…….(ㅎㅎ) 사람이 짬뽕 먹을까 자장면 먹을까 할 때는 자장면이라고 하지만 그게 본인의 이야기가 아니고 자기 몸이 자장면이 땅기니까 자장면 한 거예요. 그런데 몸이 그렇게 하게 하신 것이 예수님의 주되심이 그렇게 하신 거예요. 왜 그렇게 했느냐 하면 피조물에게 아무리 내가 시켜서 너는 자장면 먹겠다고 이야기해도 피조물의 그 모습은 내가 자장면이라고 결정했기 때문에 내가 먹는다고 우길 수밖에 없는 것이 피조물의 현 생리가 되는 거예요. 그게 속성이 되는 겁니다.
그 속성으로 인하여 예수님은 그냥 하나님이 아니고 주가 되신다는 이 말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거봐 내가 피조물의 그 되지도 않는 그 죄를, 어떻게 내가 지옥 보내는가. 그러니까 주가 되지”피조물들이 말하기를“주여, 내가 짬뽕 안 먹고 자장면 먹었다고 지옥 보냅니까?” “네가 자장면 먹었다고 해서 지옥 보내는 거 아니고 자장면 먹고 싶다고 내가 결정했다고 네가 우기기 때문에 지옥 보내는 거야”
피조물의 생리는 뭘 해도, 주를 아무리 입에 달아도 결국은 은근히 마음속으로 역시 내 몸은 내가 알아서 내가 하는 거야” 이것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 피조물이요 그렇게 피조물들이 됨으로 말미암아 그 피조물들을 지옥 보내시는 분으로서의 주님의 자기 역할과 기능을 다 하시는 거예요. 그런데 오늘날 교회들은 내 몸이 알아서‘나는 부처 안 믿고 내가 선택해서 예수를 믿어줬잖아요’하는 거예요. 주님이 하시는 말씀이 ‘그러니까 네가 지옥 가는 거야 구원되고 안 되고를 네가 결정 못해’ 그걸 듣고서도 우리는 내 구원은 내 구원이니까 남한테 맡기지 않고 나한테 맡기고 싶은 거예요. 심지어 우리는 주님한테 우리의 구원을 맡기기 싫어요. 왜? 만약에 지옥 보내면 어떻게 할래? 보통 고민하지 않아요. 알 수 없는 불안……. “내 구원은 내가 결정하겠습니다. 주님 나한테 맡기세요.” 주님께서 “그럼 잘됐다 지옥가거라” “아이 그건 싫습니다.” “거봐 아직도 너 몸은 너 몸이잖아 우기잖아”
우리가 여기서 생각해봐야 될 것은 우리가 피조물이라는 것이 깨끗한 피조물이라는 이미지를 좀 청산해 주세요. 그것을 없애세요. 피조물인데 지저분한 피조물이에요. 지저분한 피조물이고 깨끗한 것은 우리 주 예수님 밖에 없어요. 그렇다고 예수님의 피부가 고와서 깨끗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화장발이 좋아서 깨끗한 것이 아니고 우리가 목욕을 안 해서 더러운 것이 아니라 깨끗함과 더러움의 의미는 이 몸이 주님은 자기 몸이기 때문에 해 왔던 점에서 깨끗하고 우리는 주님의 몸을 가지고 우기기를 내겁니다. 내가 알아서 할 겁니다 하기 때문에 지저분하고 더러운 거예요.
안양에서 이런 강의를 했습니다. 언약궤가 있는데 언약궤에서 나온 저주를 처음에는 이스라엘에 퍼지다가 지금 마지막 때는 온 우주에 이 저주가 다 퍼져요 저주를 퍼뜨리는 분이 누구입니까? 시커먼 저주, 구제역 일으키는 분이 누구에요? ‘구제역’소리 듣고 ‘구원역’비슷하잖아요. 구제역 하니까 구원한다는 그런 느낌 들잖아요. 좋은 느낌 아닙니까? 구제역을 누가 일으켰어요? 주님께서 그렇게 하시겠죠. 그 구제역을 일으켰다는 사실에 만약에 유난히 의미를 부여해 버리면 지금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 저주가 간다는 이 사실이 심각합니까? 소, 돼지 구제역이 심각합니까? 어느 것이 더 심각합니까? 지옥 가는 것이 더 심각하죠.
그런데 사람들은 얼마나 자기 위주인지 지옥 가는 것은 유명하지 않고, ‘강원도 안동에서부터 예수 믿기 시작하다가 지금은 전국25개 지역에서 예수 믿지 않게 되었습니다.’ 하는 거기에 대해서 사람들은 별로 관심 없다가 ‘강원도 안동에서부터 시작해서 전국에 구제역 퍼졌습니다.’ 하면 아이고 어쩌나 하고 걱정하고 난리가 난거예요. 그리고 구제역을 왜 일으켰습니까? 구제역을 일으킨 이유가 진짜 문제를 네가 감추고 있다는 것을 들추어내기 위해서 구제역 일으킨 거예요. 이것이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재앙들입니다. 요한 계시록의 재앙들이 진짜 중요한 문제, 마지막의 진짜문제가 진지하게 다루어 지지 않고 사람들은 자기가 애써 그동안 구축한 나의 것에 대해서 집착을 하고 있으니까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서 그것을 하나하나 쳐나가요. 쳐 나가면 그들은 그 쳐 나갈 때 “예수님은 주되십니다.”하고 감사하면 될 텐데 ‘왜 이걸 치십니까?, 이건 너무 심합니다. 이건 해도 해도 너무 했습니다. 이것 없으면 우리는 뭐하고 살라고요?’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저항하고 반발하고 그런 식으로 요한계시록에 정리되어 있죠.
우리가 골로새서를 보면서 우리가 다시 한 번 생각해야 될 것은 예수그리스도의 주되심에 대해서 어떤 피조물도 아무도 그것을 눈치 채는 사람이 없어 줘야 제대로 예수님이 주되심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이 골로새서에서 모든 것을 예수님을 위하여 만물이 창조되었고 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라는 말을 어떤 근거로 이 말을 쓰느냐 하는 겁니다. ‘예수님을 위하여’, ‘예수님으로 말미암아’이지 여기에 하나님을 넣습니까? 넣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을 넣지를 않았죠.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으로 말미암아’라는 것은 무엇이 성립되지 않는 다고 했습니까? 하나님을 집어넣으면 여기서 인간이 하는 죄악된 행세, 인간이 예수님께 가한 린치, 살해 그것이 여기에 안 들어 가 있지요.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이렇게 되어 버리면 ‘뭐 우리가 예수를 죽이는 것도 하나님 뜻이겠네’ 이러면 분명하게 인간의 죄가 드러나지 않죠.
이것을 만약에 하나님을 집어넣어버리면 예수님이 어떤 예수님이에요? 사람 손에 죽었다가 살아난 새파란 청년이잖아요. 33살 먹은 청년 아닙니까? 요새 33살 같으면 뭐할 때에요? 방금 취직해서 열심히 일할 때잖아요. 어떤 중소기업의 청년이 우리의 구세주다 우리가 예수란 이름이 유명하기 때문에 믿지만 만약에 김철수다 누가 믿겠습니까? ‘뭐 하는 사람인데?’ ‘목동서 보르네오 가구 수습사원이란다.’ ‘그거 내가 왜 믿어야 되는데’ ‘네가 사원 같으면 나는 사장이다.’ 그러니 예수님을 동등 되게 보는데 하나님은 예수님을 어떻게 본다고요? ‘동등 되게 봤지?’ ‘예’ ‘충분하게 봤지?’ ‘예’ ‘예수님 어떻게 보느냐?’ ‘우리하고 똑같은 인간이에요.’ ‘그래 똑같이 봤지?’ ‘예’ 그래 놓고 올려 버립니다. 올려버리면 모든 것이 예수님을 위하여,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올려버리면 어떤 피조물도 자신의 아이디어로 하나님을 믿는 다고 우기는 중에도 예수를 자기 힘으로 믿을 수 있다고 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할 수가 없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이봉주 선수하고 달리기를 해 보세요. 30미터 달리기 같으면 이봉주선수를 뒤에 따라 갈 수 있어요. 100미터 달리기해도 얼추 10미터정도는 뒤를 볼 거예요. 그러면 한 5키로 달리기만 해도 이봉주 선수는 벌써 시야에서 안보이죠. 그리고 42.195킬로미터 달려버리면 이봉주 선수는 집에서 샤워하고 자고 있는데 지는 아직도 달리고 있어요. 그 격차를 압축을 시켜 놔요. 바짝 압축을 시켜 놓고 그 다음에 같은 사람의 모양새로 와서 같이 이야기시켜 보는 거예요. 그 많은 격차를 압축시켜 놓고 이야기해 볼 때 사람들은 그 예수님을 중소기업의 가구공장, 자기 아버지가 목수니까 탁자 만드는 목수의 아들로 취급할 수밖에 없죠. 그런데 그것이 예수님 당시의 사람만 그렇습니까?
오늘날 우리의 사람도 그래요. 우리도 마찬가지겠지요. 그런데 우리는 왜 예수를 주로 믿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지금 만들어 낸 예수이기 때문에 주로 믿는 거예요. 아 오늘 너무 심한 말을 합니다. 우리가 마치 예수님을 무시했던 그 사람이 여호와를 무시했어요? 무시 안했어요? 무시 안했죠. 바리새인이 예수는 무시했지만 여호와는 무시 안했죠. 오늘날 우리는 우리가 상상한 하나님의 예수는 존중하지만 막상 진짜 예수님이 33살 먹은 청년으로 우리 가까이 오게 되면 이름도 예수가 아니고 김말복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봅니까? ‘까불고 놀고 있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이 말죠. 그런데 그 김말복이가 죽고 난 뒤에 사흘 만에 부활했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1번 ‘아, 주시구나.’라고 이야기한다. 2번 ‘그 시체를 누가 훔쳐갔다고 이야기한다.’ 몇 번입니까? 2번이죠. 말복이 내가 아는데 고향 사람들이 누가 믿어요? 예수님 고향사람들이 예수 믿었습니까? 안 믿었습니까? 안 믿었죠.
인간이라는 것은 과거의 누적 인데 과거의 들었던 경험이 누적으로 쌓여서 그 사람을 평가 하는데 ‘말복이 그 아이 다 안다 코 찔찔 흘리고 아이고 내가 다 안다니까 걔가 무슨 주야 주는 아직 안 왔어' 그 당시 사람들이 예수님을 이렇게 무시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처럼 오늘날 우리가 예수님을 섬기고 어떻게 성경 나온 대로 한 다고 할 지라도 진짜 우리의 오류, 진짜 잘못이 무엇인가를 모르고 있는 상태이거든요. 역시 우리도 가짜 예수를 진짜 예수인양 섬기고 있는 거예요. 마치 여호와를 섬기는 사울이라는 사람이 예수 믿는 잘 믿는 사람을 무시하며 핍박하는 것같이 결국은 예수님 핍박한 것처럼 오늘날 우리가 예수에 대해서 크게 오해 하면서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았다고 우길 가능성이 많은 겁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진짜 예수님이 어떤 식으로 우리에게 옛날 그때 예수님처럼 실제로 어떻게 작용하는가를 제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그 한 가지 예가 17절에 나오죠.
골 1:17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골 1:18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 그가 근본이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여기에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 했죠. 예수님의 몸이 교회 맞죠. 그러면 교회는 예수의 몸입니까? 제가 묻기를 그리스도의 몸은 교회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 몸은 교회에요. 그의 몸은 교회라고 할 때 이 몸은 보이는 몸이죠. 그 당시 33살 먹은 예수님은 33살 먹어도 그 몸이 그 몸이에요. 부활할 때 그 몸이 부활하니까 보이는 몸이 보이죠. 그런데 보이는 몸이 교회라고 할 때 이 교회가 보입니까? 안보입니까? 안 보인다는 말이죠. 천하 만물에 그런데 지금 교회는 몸입니까? 라고 물었어요. 교회는 보이죠. 몸은 안 보인다 이 말이죠. 교회가 몸입니까? 할 때 교회는 교회로 이해돼요. 왜냐 하면 교회라고 하는 것은 눈에 보이잖아요.
인간은 몸은 몸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그 당시 사람들이 예수를 안 믿은 거예요. 예수님 당시에 예수를 안 믿는 것은 ‘어이 내가 누구요?’하면 ‘너는 예수, 목수의 아들이잖아’ ‘그 다음 몇 년 뒤에는?’ ‘몇 년 뒤에도 목수의 아들이지 뭐’ ‘그럼 죽으면?’ ‘까불다죽은 그 목수의 아들이지 그 몸이지’ 사람은 보이는 데서는 보이지 않는 곳으로 나갈 수 있는 것이 없어요. 보이는 데서는 계속보이는 것으로 그것을 연장시켜 간다 이 말이죠.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모든 몸이 죽었다가 살아나죠. 죽었다가 살아나서 교회를 만들었기 때문에 죽었다가 살아난 것에 여기에 동참되지 않는 사람은 예수님의 33살 새파란 그 청년, 맨 그 청년이에요.
그런데 어떤 사람은 몸이 교회당에 나왔냐 하면 그 예수님의 죽었다가 살아난 사건에 참여된 사람은 예수님 몸이 보이지 않는 교회가 되는 겁니다. 예수님의 몸이 교회가 되어 버리면 기존에 보이는 교회는 교회입니까? 교회 아닙니까? 이것은 교회가 아니죠. 이것은 교회가 아니에요. 여기에 엄연히 있는데 교회가 엄연히 있잖아요. 몸이란 교회가 있는데 왜 이게 교회가 되어야 됩니까? 여기 귤이 있죠. 귤은 아름답습니까? 아름답지 않습니까? 귤이 아름답죠. 귤은 아름다운 거예요. 그러면 어떤 사람이 ‘귤 주세요.’하면 귤을 주면 되는데 ‘아름다움 주세요.’ 이러면 말이 안 되는 거예요. 왜, ‘귤은 아름답다.’ 할 때 아름답다는 귤이 따라가는 거예요.
예수님의 몸, 하면 동시에 교회가 따라가는 거예요. 지금 이것을 설명해 줘야 그 다음에 예수님은 교회의 머리다가 설명이 돼요. 몸이 곧 교회이기 때문에 몸이 없는 곳에 교회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몸이 교회이기 때문에 교회는 없는 거예요. 그런데 교회가 몸이 될 수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이것은 없어요. 교회는 교회일 뿐이에요. 교회가 몸 되는 데는 죽었다가 살아난 그런 경험도 필요 없습니다. 교회는 돈만 되면 돼요. 부동산 가서 건물사서 간판 걸면 되는 겁니다. 사람들은 교회가 당길까요? 보이지 않는 몸이 당길까요? ‘야, 교회가자!’ 이렇게 이야기하죠. ‘야, 보이지 않는 몸에 가자!’ 이렇게 이야기합니까? 안하잖아요.
사실은 보이지 않는 몸으로 살아야 그게 교회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자기 몸 따로 있고 자기 몸이 생각하는 교회 따로 있어서 아무리 교회가도 거기는 그리스도 몸이 되는 것이 아니고 그 교회는 누가 주인공이에요? 현재 내가 있으니까 내 몸이 예수님 몸보다 더 소중하게 되는 겁니다. 내 몸이 더 소중하면 더 이상 내 몸에 대해서 머리라는 것이 있어요, 없어요? 없습니다. 왜 없느냐 하면 내 몸이 지체가 될 경우에는 머리가 필요 한데 내 몸 그 자체에서 완료가 되었는데 무슨 머리가 필요합니까? 내가 여기 머리가 있는데 ‘나는 너의 머리잖아’ ‘저 머리 있거든요. 만져보세요.’ ‘제가 목 없는 미녀도 아니고 저도 머리 있는데 머리가 왜 필요합니까?’ 도대체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
그러면 머리, 대가리죠 대가리가 둘이면 싸우잖아요. ‘주여, 짬뽕 먹을까요? 자장면 먹을까요?’ 또 싸운다니까요 그러니까 신학자도 이 해석을 포기해 버렸어요. 포기 하고 기껏 주석 다는 것이 지상의 교회, 또는 유형교회 무형교회 따져서 지상의 교회는 하늘나라의 분점이기 때문에 많이 갖다 바쳐라 하고 지상의 교회가 커지면 하늘나라 주님이 기뻐하고 지상의 교회가 작아지면 하늘나라가 싫어한다는 거예요. 그러면 지상의 교회가 부흥해서 본점에서, 체인점에서 다 받아갑니까? 권리금으로 교촌치킨이에요? 비비큐에요?
어떤 사람이 물었어요. ‘고린도 교회도 못나도 교회라고…….’ 제가 이야기했죠. 고린도교회가 교회가 아니라고 해 줘야 고린도교회에 숨어있는 교회가 나왔다고……. 교회가 아니라고 해 줘야 이 교회, 보이지 않는 교회는, 교회가 누구입니까? 몸이죠. 보이지 않는 교회는 보이는 교회를 부정하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교회가 나타나지 않는 법입니다.
왜냐 하면 보이고 보이지 않는 그 사이에 보면 죄 많은 우리는 죽어야 되고 주님께서 살려낼 때만 우리는 비로소 보이지 않는 몸, 보이지 않는 교회를 아는 것이 되거든요. 그러면 내가 죽고 살아나지 않는 상태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모든 것이 다 거짓이 되는 겁니다. ‘이것은 귤이다.’할 때 이것이 정답입니까? 이 귤한테 이게 정답이다. 하늘나라라고 이렇게 할 수 있습니까? ‘이것이 귤이다.’가 왜 정답이 안 되냐 하면 이것이 귤이다. 라고 내가 외쳤죠. 그러면 나는 이것이 귤인 것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이 땅에 태어났습니까? 아니면 그리스도를 위하여 태어났습니까? 그리스도를 위하여 태어났죠. 그러면 귤보고 이것이 귤이다. 라고 하는 것에도 그리스도를 위한 요소가 삽입돼야 되겠죠. 그러면 여러분에게 여러분, 이게 귤이라고 하면 은혜 받아서 여러분이 아멘 합니까? ‘목사님 또 복음을 전하네. 난 귤이라고 했는데’ 귤이라고 했는데 ‘오늘도 십자가 알게 하시네.’ 미쳤나 왜 그래요. 나는 귤이라고 했을 뿐인데…….
참 얼마나 어려워요. 나는 아무 생각 없이 귤을 귤이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주님하고 관계는 죄가 되는 거예요. ‘주님 이것이 귤이다. 라고 하는 것이 죄가 됩니다.’라고 하면 이것이 죄가 안 됩니까? 진리가 트릭 쓴다고 해서 그렇지 그게 죄가 되는 거예요. 무엇을 했던지 간지에 우리는 죄가 되는 거예요.
다시 봅시다. 우리는 보입니다. 지금 거울 보면 보이잖아요. 보이는 것에는 항상 보이는 것으로 끝이 나요. 보이는 것 가지고 아무리 때를 쓰고 기도를 해도 보이지 않는 것이 우리게 나타나지 않습니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사이에는 우리가 죄로 죽고 다시 사는 그런 단계 그런 경과가 있어야 돼요. 왜 있어야 되냐 하면 예수님께서 보이는 몸이 그 당시 33살 먹은 청년이 보였죠. 보이는 몸이 뭐로 변한다? 죽고 나서 부활하면 교회로 달라지잖아요. 그 당시에 예수님이 목수의 아들로 보이죠. 보이지 않는데 예수님께서 교회의 반석이다, 나는 교회의 권세가 된다고 하면 사람들이 믿겠어요, 안 믿겠어요? 안 믿었죠. 제자들도 안 믿었죠. 왜 안 믿었습니까? 보이는 데서는 보이는 것만 보입니다.
저사람 목수의 아들 아니냐! 이렇게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경우에는 인간의 힘으로서는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베드로가 예수님보고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 이다.’라는 그 이야기할 때 바요나 시몬아 네가 뭐가 있다 했습니까? 복이 있다 첫 강의에서 했죠. 복, 네가 복이 있다 외부에서 뭔가 개입했구나. 이것은 네가 알도록 한 것은 혈육이 아니죠. 그러면 혈육이면 보이는 것에 머물죠. 우리가 예수님을 ‘주되십니다.’하고 믿는 것은 우리 힘입니까? 아니면 우리를 죽였다가 살려내시는 예수님의 힘입니까? 예수님의 힘이잖아요. 그것을 자꾸 예수 믿는 것도 내가 선택해서 믿었다고 소리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죠.
그게 인간의 본성이기는 하지만 보이는 것에서 보이는 것으로 예수 믿는 것도 내가 믿고 내가 훌륭해서 내가 구원받고 하는 것은 이것이 보이는 것에서 보이는 것에 머무를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런 인간들이 모여서 보이는 교회를 만든 거예요. 보이는 교회는 진짜교회에 비해서 악한 거죠. 악한 것이 있으면 주께서 그것을 부정하죠. 말씀으로 부정하면서 고린도교회를 부정하면 그 뒤에서 교회가 나와요.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말하기를 고린도 교회도 부족하지만 그래도 주님께서는 교회라고 했잖아 존재론적으로 교회 있으면 나중에 차차 가르치면 잘 되겠지 그때를 내다보면서 지금 일단 교회라고 하고 시작하자 교회 아닌 게 아니잖아 라고 시작하는 것은 그 자체가 예수님 십자가 복음을 모독하는 거예요.
다시 해 봅시다. 이 귤은 귤이다 하는 것은 내가 이야기했다 할지라도 이 귤이라는 속에는 예수님의 주되심을 표현할 수가 없어요. 왜, 보이는 것을 부여했으니까 그렇다면 귤이라 하는 것도 의로운 것이 아니에요. 정답이 아니에요. 주님은 너희가 귤이라 했던 안했던 간에 나는 너를 위해서 대신 죽음으로 너는 내가 너희에게 주가 되었다. 사법고시 합격했다. 합격하던 안하던 간에 나는 너를 위해서 대신죽음으로 나는 너의 주가 된다 그러한 생각들이 모여서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는 겁니다. 지체가 되면 머리는 아니죠. 머리는 주님 되죠. 그러면 여기서 머리와 지체를 설명하고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몸에서 중요한 것이 뭐냐 하면 머리가 된다는 거예요. 그의 몸인 교회의 머리라 머리가 된다는 말은 머리는 특징이 숫자로 하면 1이 돼요. 그러면 문어발이 몇 개입니까? 8개죠. 머리가 하나면 여기는 다양하죠. 그러면 노아방주에서 몇 명 들어갔습니까? 8명이 들어갔죠. 그러면 우리들이 한번 생각해 보세요. 그 방주를 한 채 만들지 말고 8채 만들어 8방주를 띄우면 그 아이디어는 어떻습니까? 12제자의 발을 예수님이 씻기지 말고 각자 발을 씻기면 어땠을까요?? 떡을 뗄 때 떡을 다 떼어놓지 않고 나눠서 떡을 드릴까요? 이것은 고린도전서 12장보면 나옵니다. 머리에서 올라온 것은 반드시 머리로 회수하게, 거두게 됩니다.
‘오병이어’할 때 그 떡을 걷어서 누구를 줬습니까? 떡을 거둬서 처음에 어린 아이 도시락이 보리떡5개 물고기 2마리잖아요. 그러면 나머지 떡을 누구에게 줘야 됩니까? 어린 아이한테 줘야 하죠. 그렇잖아요. 왜, 처음에 그 떡과 고기를 제공한 당사자가 누구입니까? 어린 아이의 도시락이죠. 그러면 그 사람에게 다 줘야 될 텐데 누구한테 갖다 주라 합니까? 예수님이죠.
그러면 오병이어 먹었던 그 모든 많은 떡은 결국은 한 분에게 나왔죠. 몇 명 먹었죠? 5천명이 먹었잖아요. 그러면 5천명이 먹었던 것은 각자 노동해서 얻은 겁니까? 주님께서 주신 떡입니까? 주님께서 주신 떡이죠. 그러면 우리가 교사를 하던지 농사꾼 하던지 그 교사, 농사할 때 교사가 농사꾼대신 땅을 갈지 않죠. 하지만 진짜 하나님 앞에 살고 죽는 것은 자기 노동으로 얻은 것 말고 다 누구한테 주어진 겁니까? 예수님의 하나의 노동으로 그 효과를 농사꾼이 되던 교사가 되던 백수가 되던 전부다 골고루 다 받게 되어 있죠. 그러면 어떤 사람은 농사꾼 되고 어떤 사람은 교사 되었습니까? 1번 게을렀다 2번 고등학교 때 농땡이 쳤다 3번 집안 가정이 어려워서 다 아니죠. 누가 그렇게 했습니까? 주님께서 그렇게 하신 겁니다. 어떤 사람은 눈이고 어떤 사람은 발이고 ……. 왜 그렇게 합니까?
주님께서 그렇게 하신 거예요 그러면 어떤 사람은 삐져서 ‘나는 더러운 무좀 걸린발 안할래.’ ‘난 눈 될래.’라고 나서는 순간 그 사람은 뭘 놓쳐버렸어요. 머리만 하나인데 갑자기 자기에게도 뭐가 있다? 나도 내가 내 몸 챙길 대가리가지고 있습니다. 내 대가리 왜 무시합니까?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그러면 지체 아닌 것 하나 발견됐습니다. 여기 천사 잡아내 드디어 지체 아닌 것 발견됐어. 애초부터 지체가 아니고 본드로 붙인거야. 본드가 말라비틀어지니까 떨어져 나간 거예요. 그리스도 몸과 하나가 된 거예요. 그것을 골로새서 1장 27절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왜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왜 계십니까?
골 1:27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어떻게 풍성한 것을 알게 하려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그것은 머리되시는 분이 지체 안에 들어오게 돼요. 머리되시는 분이 들어가면 우리는 그 자체로서 이미 교회죠. 이미 교회이고 그리스도가 다른 성도에게 있으면 거기도 교회이고 그런데 우리는 눈으로 보이는 것을 세기 때문에 교인10명이면 교회가 10개다 라고 세죠. 이게 우리가 기껏 보이는 데서 보이는 것으로 숫자를 헤아리는 육적인 방법 때문에 10명 모이면 교회10군데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것으로 보지 말고 머리가 각자 들어 있더라도 결국은 머리는 하나다 몸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전부다 하나라는 거예요. 이 하나 됨을 지키라는 겁니다. 어렵죠. 하나 됨을 지키려면 나 하나, 나 하나 이것을 포기해야 되는 겁니다. 둘이 모이는 교회 교인 수는 둘 맞아요. 교회는 교인이 두 명이던 교회는 하나, 의존교회 있고 어떤 교회 있다 하면 교회 수는 둘 맞아요. 하지만 그리스도 몸은 하나, 이 하나라는 말은 평소에 나 하나, 너 하나, 그 사람 셋, 그 사람 넷……. 이런 식으로 헤아리면서 살아가는 우리의 버릇이 바로 주님으로 하여금 죄인일 수밖에 없는 우리 몸적인 태도라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런 죄를 위해서 돌아가신 거예요. 결국 우리는 이 버릇을 평생 고칩니까? 못 고칩니까? 평생가도 우리는 고칠 재간이 없어요. 고칠 수가 없어요. 그래서 말씀이 불이 되어서 우리는 이렇게 나밖에 모르지만 말씀 보니까 말씀세계가 또 하나의 세계에요. 이 말씀세계가 우리가 육적이라서 미처 몰랐던 진짜 보이지 않는 진짜 교회의 세계, 진짜 몸의 세계가 여기 펼쳐져있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바쁘고 피곤한 가운데서도 잠을 세 시간밖에 못 잤지만 다시 한 번 나 하나, 너 하나 이처럼 나로부터 세어야 되고 나 하나, 너 하나, 그리고 너 셋, 너 넷 항상 나부터 출발하는 이 모습, 이 모습가지고 주안에서 주께서 일을 하시고 이미 십자가 피로 그 죄를 용서함으로 말미암아 내가 죄인입니다. 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겁니다.
기도 합시다.
하나도 아버지 저희들이 주님 몸 앞에서 얼마나 내 몸만 챙기는 사람인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놀랍게도 이런 죄인에게 성령을 통해서 진실을 알려주시고 진리를 보여주시니 정말 예수님이 주가 되시고 머리되시는 것을 푸근하게 여기고 안심 놓고 여기고 마음껏 하나님께 영광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