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101112골1장9절a
골로새서 1장 9절에 보면
골 1:9 이로써 우리도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
이렇게 되어 있죠. 기도 하는데, 기도 내용이 뭐냐 하면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으로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그들이 가득 채워지기를 바랍니다. 하는 그런 기도를 한 겁니다. 이 내용을 골로새서 교회의 성도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그런데 이 편지를 만약에 여러분 집에 각각 편지가 배달된다면 “혹시 여기 골로새 성도 계십니까?” 물으면 “우리는 그런 사람 없습니다.” “편지내용이 뭡니까?” “편지 내용이 신령한 것으로 채우기를 어떤 분이 기도 한답니다.” “누가요?” “사도 바울이 그렇게 기도 한답니다.”
“우리 집에 그런 사람 없습니다. 그런 편지받을 만한 사람 없습니다.” 이 편지가 만약에 택배로 보낸다면 우리가 받지요. 카드 새로 신청하면 직접 집으로 배달되잖아요. 비씨카드 이런 것은 받는 데 “신령한 지혜로 채워지기를 바란다는데 받겠습니까?” “아 우리 집에 그런 것 받을 사람 없습니다.”
골로새 편지인데 받을 사람이 없어요. 왜? 안 좋아하니까 이런 유의 편지를 안 좋아하니까, 안 좋아한 다는 말은 여기 골로새서에 나오고 있는 성경이 어떤 내용인지 우리는 거기에 관심이 없어요. 이 편지 내용대로 되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반기거나 좋아 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더 쉽게 말하면 편지받을 만한 성도가 없는 거예요. 성도가 없으니까 다른 말로 줄이면 교회자체가 없는 겁니다. 교회자체가 없는 것을 더 나아가서 성도가 없고, 교회가 없음을 아쉬워하지 않습니다.
교회가 뭐냐 하면 천국이잖아요. 천국이 없어져도 무방한 세계, 현재 우리가 좋아하는 세계가 이 세계입니다. 천국이 없어도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 이 양천구 신월동, 천국이 없어도 아무 지장 없이 오늘도 막걸리 들이키면서 짙은 담배 연기 속에서 하루의 스트레스를 풀고 있는 사람이 시장가에 있습니다. 아무 문제없는 이 골로새의 편지를 몰라도 사는 데 전혀 행복에 지장이 가지 않는 그런 분위기가 안개가 되어서 온 천지가 시커먼 어두운 세력이 자욱하게 우리주변을 내리깔고 있습니다.
차 앞에도 뒤에도 지붕위에도 세워놓은 자전거위에도 갖다버린 쓰레기 봉지 위에도 자욱하게 모든 것이 어둠이 끼워있고 가끔 거기에 툭툭 던져진 것을 보면 ‘홈뱅킹 하세요.’ 이런 전화번호, ‘화끈하게 뭐 어떻게 합니다.’ 그런 광고 쪽지, ‘태진아 26일에 옵니다.’ 하는 이런 것들, G20 이런 것은 방송에 나오죠. 방송에 골로새서 1장 9절 이런 것이 뜨지를 않죠.
이 처럼 편지는 하늘에서 보냈는데 받을 마음은 전혀 없는 것, 그것을 수취인불명이라 하죠. 수신자가 없는 편지, 받고자하는 선뜻 나서서 “나한테 왔네. 편지가 왜 이제 왔어, 벌써 한 달 늦었잖아!” 이런 식으로 반가워하지 않는, 하나님 주신 편지를 전혀 달가워하지 않는 우리도 이미 어느새 황사 낀 검은 안개에 푹 젖었습니다.
교회 없어도 괜찮고 천국 없어도 괜찮고 그것이 우리 사는데 전혀 지장이 안 된다고 얘기해요. 맞습니다. 여러분 사는데 지장이 안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 영광에는 지장이 됩니다. 하나님이 하는 일에 대해서는 철로 노선이, 하나님이 저쪽에 계시는데 우리는 점점 더 멀어지는 아스라이 무너진다 하죠. 주님이 커보였는데 날이 갈수록 점점 작았다가 나중에는 어느 새 예수님이 보이지 않는 그런 사방을 둘러봐도 복음이 없어져 버렸어요.
예를 들어서 어떤 집이 있는데 이 집 사방에 교회가 있다 합시다. 사방에 교회가 있어서 교회가 흔했고 그런 교회가면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이야기했던 그런 교회가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지금 여기만 해도 의존교회, 열방교회……. 둘러봐도 네 군데 더되는 것 같아요. 이렇게 교회가 많아도 여기서 교회 다니는 사람조차도 교회에 대해서 중요시하지 않는 그런 시대, 교회 다니는 것을 수치로 여기고 그리고 교회 다니는 것을 후회스러워 합니다. “괜히 교회 다녔어, 안 다닐걸......”
결국은 골로새서의 편지내용처럼 하나님은 일을 하십니다. 여기 1장 16절 보면 유명한 말씀 있잖아요.
골 1:16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중요한 말씀인데 이러한 말씀을 모른 채 그렇게 살아가는 그런 것이 오늘날 젊은 애들 또 우리 후손들도 그렇고 사회 분위기가 그렇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골로새서를 쓰는 사도바울 입장에서는 이 편지를 받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그렇게 즐거운 거예요. 결국은 지금까지 강의 한 이야기를 한마디로 하면 ‘교회가 없다’, ‘교회는 없다’ 그러나 ‘교회가 있더라.’ 이것이 굉장히 신기한 겁니다. 교회가 있더라 이 말입니다. 교회가 있다는 것은 편지를 받아들고 편지가 하나님이 나한테 보낸 편지라고 알아먹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굉장히 신기하다 이 말입니다. 신기하게 느껴져야 되지요. 이것이 골로새서를 우리가 해석하는 하나의 길이 되는 겁니다.
교회는 없어요. 그리고 실제로 우리가 “복음에 대해서 아십니까??” 길에 나가 물어봐도 아무도 몰라요. 그럼 우리는 결론을 내려요. “아하 신월동에는 교회가 없다. 교회는 있지만 그것은 하나의 종교단체이고 노는 단체이고 진짜복음 때문에 모여든 사람이 있을 수 없는 거다.”
그리고 교회가 없는 것을 신기하게 여기지 마시고 교회가 있는 것을 신기하게 여겨야 돼요. 왜냐 하면 교회라는 것이 우리생활에 꼭 필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항상 마음가짐을 그렇게 가져야 해요. 교회라든지 성경이라든지 하나님이든지 천국은 우리생활에 꼭 필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항상 교회 같은 것이 사라진다할 지라도 “나는 전혀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교회가 있음으로서 약간의 부담은 되었습니다. 아이 교회가 없다니 속이 시원합니다. 이제부터 교회 없이 살지요. 이제는 주님 없이 살지요. 천국 없이 살지요. 천국 있으나 마나 누가 가 본 사람도 없고 그냥 남들 보통 사는 것처럼 살아갑시다.” 라는 마음이 우리의 정상적인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정상적인 마음가짐입니다.
그런데 골로새에 편지가 왔다는 것은 수신자도 없는데 편지만 덜렁 날라 온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생각한 겁니다. ‘아무도 이 편지를 이해 할 사람 없고 받아 줄 사람도 없을 거다.’ 라고 생각 했는데 오늘 9절에 보면
골 1:9 이로써 우리도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
방금 9절을 봤지만 6절에 보면 어떤 소문이 났냐 하면 골로새에 교회가 없더라는 성도가 있더라는 소문이 난거예요. 그러니까 사도 바울이 굉장히 반가워 한 겁니다. 없어야 된다니까요. 사람들은 교회를 찾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천국을 찾지 않습니다. 사람은 주님을 찾지 않습니다. 왜? 그거 없어도 고등어 잡아 구어 먹고, 콩나물 잘 사먹으니까 그거 없어도 카드로 버스 잘 타고 다니고 그거 없어도 화장실 가는데 전혀 지장 없습니다. 천국 없어도…….
그래서 교회 없는 게 정상입니다. 천국 안 믿는 게 정상이고 하나님 모르는 게 정상이고 예수 없이 사는 게 정상이에요. 그리고 하늘나라를 인정해요. 워낙 세상이 악하니까 사람이라 하는 것은 유유상종이라 합니다. 유유상종이라고 하는 것은 깃털이 같은 것끼리 모인다는 것입니다. 같은 유끼리 논다는 겁니다. 사람은 사실 따지고 보면 똑같아요.
니가 좋아하는 것 같이 좋아하는 겁니다. 저는 개고기 안 좋아 하지만 개고기 좋아하면 좋아하게 되고 사람은 전염이 돼요. 서로 싸우다가 나중에 서로 좋아하지 않던 것을 같이 좋아하게 됩니다. 처음에 부부가 싸우다가 나중에는 같이 살다보면 같이 좋아하지 않던 것도 좋아하게 됩니다. 영화 볼 때 “나는 취미에 안 맞는데” 했다가 잔소리 듣고 난 뒤에 “알았다 앞으로 취미 바꿀게”하고 좋아하게 돼요. 똑같아 져요. 섞이다 보면 어느새 하나가 되어 굴러간다 이 말이죠. 이것을 적응이라 하지 않습니까! 학생들도 처음에 학교 갔을 때 서먹서먹하다가 나중에는 친구 되어서 빼빼로데이에 빼빼로 보내고 합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사람은 사람 말 듣게 되어 있지 사람은 절대로 사람 말 외에 다른 말은 안 듣습니다. 사람은 눈에 보이는 사람이 최고 좋고 위로가 되고 의지가 다시 돼요. 사람이 아무리 하나님을 섬겨도 사람 없는 곳에 가면 쓸쓸하고 외로움을 탑니다. 사람이 왜 처녀로 못 사느냐 하면 얼마나 외롭습니까? 그런데 성경은 뭐라 합니까? 처녀로 그냥 살아라. 괜히 남편 있으면 남편을 위해서 어떻게 기쁘게 할까 하다가 점점 주님과 멀어진다. 그러니까 그냥 처녀로 살아라. 처녀들한테 이야기해봐야 소용없습니다. 좋은 사람 생기면 그만 가버립니다.
제가 언제 그런 설교했죠. 사람이라 하는 것은 간단해요. 남들 하는 것 다하고 그냥 평범하게 살고 싶어요. 남들 하는 것 다하고 남들은 뭐했는데 자기 안하면 자기가 손해 보는 것 같고 인간 아닌 것 같고 하는 그런 느낌 들잖아요. 그래서 지금은 어떤 시대? 지금은 천국이 필요 없는 시대, 지금은 교회가 필요 없는 시대, 지금은 사도의 편지를 수취인불명, 편지를 받을 사람이 없는 시대에요. 그런 시대가 골로새 시대뿐 아니라 오늘 이 시대도 편지를 받을 사람이 없다니까요. 천국의 편지를 받고 싶은 사람도 없고 받으면 찢어버리고 ……. 그렇게 내 쫓는 시대입니다.
그런데 그런 시대에 한 귀퉁이에서 소문이 나기를 예수 믿는 사람이 있데요. 그 뭐가 좋다고 예수 믿는지는 모르겠지만 좋지도 않은 예수, 생활에 도움도 안 되는 예수를 믿는 사람이 생겼는데 그것을 가지고 8절 보니까 성령 안에서……. 참 성경이 이래서 어려워요. 사람들은 절대로 예수를, 하나님을 필요치 않습니다. 그런데 그게 우리가 알고 있는 기본상식이고 의례 그런 것으로 알고 있어요. 우리는 아예 마음을 그렇게 먹습니다. 은혜도 없고 성도도 없다. 왜? 너나 나나 똑같은 인간이니까 사람, 세상 좋은 것 너도 좋아? 나도 좋아 한다. 좋은 거 좋고 나쁜 거 나쁘고 이게 똑같은 거예요.
똑같은데 예수 믿을 이유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는 판에 어떤 지구 한 구석에서 예수 믿는다는 소문을 들었을 때 사도는 분명히 이것은 성령이 찾아갔다. 성령이 찾아갔기 때문에 생긴 아주 희한한 현상이다. 이럴 수는 없어. 예수를 믿다니 인간으로서는 그럴 수 없는 거야. 쓸모없는 예수를 왜 믿어요. 바로 골로새 편지는 그때부터 시작되는 겁니다. 안 믿어도 되는 예수, 그리고 그리워하지 않아도 되는 천국, 그런 것 생각하지 않아도 능히 살아갈 수 있는 시대에서 어떤 부류가 예수님을 믿고 천국의 소망을 갖고 “하나님의 뜻이 무슨 뜻입니까?” 하고 궁금해 하는 그런 일단의 무리들이 발생했다는 겁니다. 말라리아, 콜레라, 전염병 퍼지는 거예요. 법정 전염병 퍼지는 것처럼 지금 희한한 현상이 나타나는 겁니다.
그것을 가지고 성령이 임했다고 이야기합니다. 성령 안에서 성령이 임한 것으로 봐요. 그러면 1장8절인데요. 그 성령 안에서가 무슨 의미인지를 이제부터 정리해 보겠습니다. ‘성령 안에서’라는 이 말은 우리의 필요에 의해서 예수를 믿는 것은 성령 안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 사람이 예수 믿다가 한 6개월 만에 그만둘 사람이고 1년 만에 예수 믿는 거 때려치울 사람, 교회 안 다닐 사람입니다. 믿는 척하다 안 믿는 것은 우리가 신경 쓸 필요가 없어요. 어차피 자기 갈 길로 힘들어 못 믿겠다고 때려치울 사람이니까 문제는 성령에 의해서 믿는 사람이 있느냐 하는 겁니다.
이 그림은 하나교회에서 한 건데 그림을 여러분들이 못 보신분이 있을 거예요. 한번 그려보겠습니다. 사람들이 세례요한 때 세례 받겠다고 우르르 몰려왔습니다. 세례요한이 협박을 많이 해 놓으니 겁이 났던 모양이죠. 도끼 이야기, ‘도끼가 나무뿌리를 작살낸다.’ ‘보라 하나님 나라가 임했다.’ 하고 시한부 종말론 비슷하게 하고 겁을 확 주니까 가까이 왔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가까이 왔다.’ 하는 것은 보통 몇 개월 이야기하는 건가요? ‘가까이 왔다.’ 하는 것은 올해 넘기기 힘들 것 같다. 이런 뜻이잖아요. 연세 많은 시부모가 아플 때 의사에게 “우리 아버님 어떻습니까?” “가까이 왔네요.” 하면 ‘가까이 왔네.’ 하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10년 후를 말하는 거예요? 아니잖아요. “올 겨울 넘기기 힘들겠습니다.” 그런 뜻이잖아요.
‘심판 날이 가까이 왔다.’ ‘천국이 가까이 왔다.’ 요엘서에서 예언한 대로 그대로 마지막 하늘에서 무서운 심판 날이 온다. 하늘에서 유황불이 떨어진다. 타작마당 불 싸지른다. 험한 용어를 다 끄집어내면서 도끼 이야기했거든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겁이 났는지 우르르 와서 물세례 받았다 말이죠. 결국 이것은 세례요한이 어떻게 이야기했던 간에 그 듣는 사람은 그냥 종교죠. 다른 말로 하면 그냥 종교라고 하면 평범한 거거든요.
사람이 바쁜 일상 쪼개서 교회 가는 것은 평범한 겁니다. 이것은 성령 받은 게 아니고 그냥 죽고 난 뒤를 위해서 보험 하나들어 놨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죽고 난 뒤에 혹시나 안 믿는데 혹시나 천국 있으면 곤란하잖아요. 그러니까 보험 안들은 것보다 보험 들어 놓은 게 낫다 이 말 이죠. 교회 다니는 게 낫다 이 말이죠. 행여나, 혹시나 있을지 모르기 때문에 그것은 아주 평범한 일이에요. 그런데 이 평범한 일 가운데서 예수님께서 세례 받는데 평범한 일인 것이 아니고 여기 하늘에서 비둘기같이 뭐가 떨어졌습니까? 성령이 주어졌고 음성이 들렸죠.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내 기뻐하는 자라’ 이렇게 성령이 내려왔습니다. 평범 속에 특이한 현상이 일어났어요. 특이한 현상이 예수님 때 일어났거든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렇게 올라가 버린 거예요. 승천해서 올라가 버리니까 예수님 위에 성령이 임했으니까 예수님이 올라간 높이만큼 성령이 성령세례를 주게 되어 있다 이 말이죠.
성령세례를 이렇게 주게 되니까 예수님이 이렇게 승천했다는 이 말은 성령이 안 오래야 안 올 수 없어요. 성령이 죽죽 내려오게 되어 있다 이 말이죠. 문제는 성령을 주신다는 것이 예수님 뜻인데 받은 사람이 없는데 그럼 거짓말이잖아요. 성령이 왔다는데 “너 받았나?” “응? 안 받았어." 성령을 안 받은 거예요. 성령을 안 받으면 여러분, 그냥 평범하게 사시면 되는 겁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어떤 사람이 교회오라 했는데 안 나왔습니다. 목사님, 어떻게 합니까? 교회 안 나오면 돼요. 그리고 예수님 안 믿으면 됩니다.
지금 예수님이 안 믿어지는데 믿었다 하게 되면 진짜 믿는 사람이 손해를 보게 되어 있어요. 왜, 그쪽이 가짜거든요. 그런데 가짜가 진짜 영역에 자꾸 들어오게 되면 진짜도 뭐로 판단이 되느냐 하면 자꾸 가짜인 것처럼 오해를 받는다 이 말입니다. 진짜는, 성령 받은 사람은 안 믿으려야 안 믿을 수가 없는데 가짜는 성령 받은 척을 하니까…….
분명히 백조와 오리의 동화를 보면 오리가 노는데 백조가 들어왔을 때 그 오리들이 백조를 오리라고 쳐 주겠습니까? 안 쳐주지요. “너, 왜 자꾸 오냐? 나가라” “너는 성령 안 받았으니 나가라” 이것이 바로 골로새서의 편지 위력입니다. 이 편지 내용대로 하게 되면 “성령 안 받은 사람 나가 주세요.” 그 이야기라는 말이죠. “성령 안 받아놓고도 성령 받은 채 몰래 들어온 사람들 제발 좀 나가주세요.” 어차피 못 갈 천국, 같이 교회 다닌다고 섞여서 그냥 들어가는 법이 없거든요.
예수 안 믿어지면 안 믿으시면 되는 겁니다. 안 믿으시고 나가서 예수 욕하고 돌아다니면 돼요. “예수쟁이들은 천국 있다고 하는데 누가 가 본 사람 있나? 그 사람들 참 너무 불쌍해요. 보이지도 않는데 왜 믿는지 몰라” 라고 이야기 할 때 우리는 할 말이 있죠. “나도 당신하고 똑같은 생각이다.” “똑같은 생각이면 교회에서 나오지 왜 있느냐?” “나도 똑같은 생각인데 성령이 와 버렸는데 어떻게…….” “성령이 어디 있어?” “나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성령이 오니까 하나님께서 이 모든 사실을, 주님이 하신 일을 깨닫게 되었단다.” 라고 할 때부터 이 골로새서의 내용이 우리에게 의미 있게 다가오는 겁니다.
제가 길게 30분 이상 이렇게 이야기 하는 것은 제발 골로새서를 공부하지 말라는 거예요. 공부하지 말고 공부해서 이것을 흉내 내려 하지 말고 지금 성령이 이런 식으로 나에게 이것을 이야기 하려고 나에게 찾아 왔구나. 골로새서의 이런 내용들을 이야기 해주려고 왔구나! 모든 세상 만물은 예수님을 인하여 만들어졌고 예수님께서 지금도 모든 운영을 예수님의 영광을 위해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성령 받은 사람에게만 편지 수신자로 깨닫게 해서 알게 하셨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골로새서라는 것을 안다는 것이 얼마나 영광스럽습니까? 우리가 이것을 공부해서 깨달을 것 같으면 우리도 공부해라 해야겠죠. 하지만 이것은 공부해서 아는 것이 아니고 성령을 받아야 비로소 알 수 있는 내용들만 여기에 기록 되어 있습니다.
제가 정리해 보면, 교회는 없습니다. 교회는 없는데 성령께서 임하면 골로새 교회가 되지요. 그래서 골로새 교회냐 아니냐를 어떻게 아느냐 하면 엉터리 같은 인간들도 참여 할 수 있지만 결국은 그것이 나중에 발각돼서 쫓겨날 수밖에 없는 이유가 편지가 주어지기 때문에 이 편지를 보고 이 편지 내용이 깨닫게 되면 그 사람은 진짜 성령 받은 사람이고 이 편지 내용에 대해서 “이것은 몰라도 밥 먹고 사는데 지장이 없는데, 이건 뭐 별 관심이 없네.” 하고 별 관심을 보이지 않으면 그 사람은 몰래 들어온 가짜로 발각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기본은 인간의 힘으로서는 교회도 없고, 예수도 없고, 천국도 없고, 하나님도 없고, 아무것도 없고……. 이런 건 몰라도 우리가 살아가고 출세하는데 전혀 지장되는 것도 아니고 이것 없이도 우리는 얼마든지 행복해질 수 있다는 기본 마음을 갖추기 바랍니다. “주여, 이 골로새서 없어도 행복합니다. 그런데 웬 은혜입니까? 웬 기적입니까? 웬 특이성입니까? 왜 나로 하여금 이런 운명으로 왜 자꾸 몰아넣으시는 겁니까?”
이렇게 되면 이 사람은 사람으로 인하여 외롭지 않습니다. 사람이 없어서, 좋아하는 사람이 없다든지 하여튼 주위에 사람이 없고 떨어져 나간다고 해서 그것 때문에 외롭지가 않습니다. 전에 성령을 안 받았을 때는 사람 때문에 살았기 때문에 사람이 없으면 기어이 아무거나 해서라도 사람과 같이 어울려야 행복을 느끼는데 지금은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사람이 없는 것이 자기의 행복과 불행을 결정짓는 요인이 될 수가 없어요. 제가 지금 성령 받은 특징을 골로새서 하면서 하나 둘 끄집어 낼 겁니다. 끄집어내면서 성령 받은 것과 받지 않은 것이 골로새서의 내용에 따라서 이렇게 큰 차이가 있구나 하는 것을 여러분이 아시면 되는 겁니다.
1장 9절을 봅시다. 9절 중간에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 우리를 하나의 도자기로 본다면 도자기 안에 무엇으로 채우신다?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시고 그냥 지혜가 아니고 신령한 지혜로 여기를 채우고, 그 다음 하늘의 총기, 총명이라 하는데 하나님의 신령한 지혜와 신령한 총명으로서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철철 넘치는 것으로 가득 채우기를 원하는 그러한 사람, 이것이 골로새의 편지 속에 담겨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만큼은 채워져 있지요?”라고 묻는 거예요. “골로새의 교인들이여, 여러분들은 성령 받았지요?” “예!” “그러면 신령한 지혜와 총기로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가득 채워져 있지요?” “예” 이렇게 주고받기가 가능할 때 그것이 바로 성령 안에서 성령 받은 사람의 특징이다 이 말입니다. 편지수신자가 편지를 볼 때 “딱, 내 얘기이네” 딱 받아 드립니다.
그렇다면 항상 우리 속에 또 무엇이 들어있습니까? 나는 성령 없어도 산다는 그 욕구가 있잖아요. 그렇다면 신령한 지혜와 총명이라 할 때 이 신령한의 반대말은 무엇이겠습니까? 반대말은 ‘육적이다, 세속적이다,’입니다. 육적과 세속적이라는 말이 뭐냐, 육적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계시고 인간이 있다면 하나님의 뜻을 육적으로 모르잖아요. 모르는데 무슨 수로 하나님의 뜻을 압니까? 우리는 육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모른다. 모르면 계속 모르면 되지요. 계속 모르면 되는데 신령한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안다. 그러니까 신령한 사람과 육적인 사람의 차이가 뭐냐 하면 ‘똑똑하다.’ ‘똑똑하지 않다.’의 차이가 아니고 신령하다는 말은 결국은 이것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하나님 쪽에서 어떤 작업을 걸어온 거죠. 그 작업을 아까 뭐라 했습니까? 성령이죠. 그러면 신령한 것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바로 성령에 의해서만 주어진 내용이 신령한 것이 됩니다.
신령한 것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 기도원에 가서 기도한다든지 방언한다든지 하면 안 됩니다. 신령한 것은 성령이 알려준 것만 신령한 겁니다. 그러면 성령과 하나님 사이에 누가 들어가느냐 하면 예수님의 이야기가 여기 들어가죠. 결국 신령한 것은 예수님의 이야기를 말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뭘 했는가? 어떤 은혜를 주셨는가? 그것을 알면 신령한 것이 되고 예수님께서 해주신 것보다도 내가 도 닦아서 깨우치는 것, 온 우주의 신비, 이런 것은 신령의 티를 내는 신비주의 포함됩니다. 신비주의지 신령한 것은 될 수 없습니다.
신령한 것은 14절에 보면 “골 1:14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이것이 바로 신령한 겁니다. 죄 사함이 예수님 때문에 이루어 졌다는 것을 믿는 것이 신령한 거예요. 신령하니까 우리가 갑자기 혈압이 올라간다던지, 체온이 올라온다든지, 갑자기 뭔가 뭘 본거 있고……. 그런 게 필요 없지요. 예수그리스도께서 하신 모든 것이 죄 용서가 된다는 것을 아는 것 자체가 신령한 것이 되기 때문에 더 이상 어떤 신령한 것도 다 삭제가 되는 겁니다. 제가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은 뒤쪽에 나오는 겁니다. 골로새서 2장 18절에 보면
“골 2:18 누구든지 일부러 겸손함과 천사 숭배함을 인하여 너희 상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그런 것에 마음 뺏기지 마라……. 이런 것이 쭉 나온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육적인 것에서 나온 신령한 것이 있겠죠. 그것이 육, 육체가 피곤할 때, 몸이 피곤할 때는 환상을 보게 되고 내가 그동안 보지 못한 기이한, 꿈속에 도인이 나타난다든지 이런 것을 본다 이 말이죠. 그런 것들은 신령한 것들이 아니고 신비한 건데 그런 신비로운 것들은 마귀가 자꾸 만들어내요.
육이라는 것은 그냥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고 환상을 자꾸 만들어 내요. 여러분 어릴 때, 그 때, 그 시절로 한번 돌아가 보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까? 어릴 때 놀던 시절, 그 세계관, 그런 관점, 그렇게 세상을 봤던 그런 생각들로 돌아가 볼 생각이 없습니까? 그렇게 돌아가 어릴 때 놀던데 한번 가보고 싶다 할 때에 그것이 싫다고 하는 이유가 이미 죄 용서를 받은 상태에서는 그쪽 시점으로 돌아가게 되면 그 자체가 죄용서 받기 전에 죄짓던 상태이기 때문에 아무리 돌아가려고 해도 그것이 시시해 보이고 멋쩍어 보이죠. 별로 달갑지 않습니다. 진짜 죄 용서받게 되면 …….
죄용서 받고 난 뒤에는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려면 돌아가려야 갈수가 없어요. 예수 믿고 난 뒤에 죄 짓고 싶어도 죄지을 수 없는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죄가 나온다는 것은 죄가 뭔지 알고 나온다는 것은 죽을 때까지 나오지만 일부러 죄지을 수 없는 것이 죄라고 하는 것은 내가 만든 환상에 내가 뿅 하고 가는 것이 죄거든요. 어릴 때는 생각의 문이 좁기 때문에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자꾸 환상을 만들어내요.
저기 뒤에 엎드리고 있는 두 학생, 두 사람 지금 무슨 환상을 생각하고 있어요. 무슨 생각하고 있지요? 어쨌든 생각하고 있지요? 나중에 나이 70이 된 할머니 되어서 한번 엎드려 볼래요? 시시하겠지요? 시시하다 이 말입니다. 저 학생이 만약 여기 앞에 어린 학생처럼 앉아서 해 보면 시시해서 못해요. 왜요? 그 때 환상은 지금 보니까 굉장히 우습게 보이거든요.
그래서 사람은 10살 때 생각이 20세 때 보면 “그건 환상이야, 내가 상상한 거야” 라고 한다면 그렇게 생각한 그것도 30대 되어서 다시 20대를 돌아보면 그것도 “그 때 왜 그런 고민을 했나, 낙엽 떨어진다고 울었는데, 그 때 왜 울었지?” 이렇게 생각한다 이 말이죠. 그때 아무리 자기가 심각하고 진지해도 나중에 뒤돌아보면 내가 커서 보면 내가 꾸며낸 내 상상에 스스로 속아 넘어간 겁니다. 자아도취된 겁니다. 육이라는 것은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자아를 도취하게 만듭니다.
그런데 성령은 “너, 상상 많이 했어, 환상 많이 했어? 실컷 해봐. 어떤 상상이라도 해봐. 하지만 그 전체가 죄고, 나는 그 죄를 이미 용서했거든” 이렇게 나온단 말입니다. 우리가 어떤 상상 속에서 어떻게 울고불고 싸우고 찢고 좌절하고 낙담하고 몸부림치더라도 시간이 약이라고 조금만 시간이 6개월만, 7개월만 지나가 버리면 다 잊어버려요.
10월 달에 김현식이란 가수가 죽은 지 24주년 되어서 24주년 기념 발매하고 후배가수들이 노래하는데 처음에는 많이 참석할 거예요. 나중 되면 그것도 귀찮아요. 왜? 김현식에 완전히 매료 되었던 그때 그 시절의 감이 안와요. 그때는 어릴 때거든요. 어릴 때 김현식에게 매료 되었고 또 김광식이란 가수에게 매료되어서 죽을 때 같이 죽겠다고 하고 이성재란 가수가 죽었을 때, 따라 죽겠다고 하는 아가씨도 있었거든요. 나이 60 되어서 따라 죽겠습니까? 다 6개월, 몇 년 만 지나고 나면 그때 내가 만들어낸 세계관, 내가 만들어낸 환상에 내가 스스로 넘어가서 그게 세상의 전부가 아닌데 마치 그게 전부인양 그렇게 그것 아니면 안 되는 것처럼 그렇게 느꼈다 이 말이죠.
그런데 세월이 지나가면 “아이고, 철도 저렇게 철이 없었나! 그게 뭐 그렇게 대단해서…….” 자매간에 어릴 때 얼마나 싸웁니까? 언니하고 동생하고 “옷 빌려줘” “새 옷인데 너 빌려주면 안 된다. 주름진다.” “내가 주름 안 지게 해 줄게” 되지도 않는 것 옷가지고 싸우고 꽃핀 가지고 싸우고 “갑자기 로션이 왜 이만큼 줄었니?” 하며 싸우고 만날 자매간에 그런 거 가지고 싸우잖아요. 많이 싸우는데 나중에 커서 뒤 돌아보면 각자 각자가 꾸며낸 환상 때문에 싸울 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싸운 겁니다. 그런데 그것을 과거를 뒤돌아보면서 “나는 반성한다. 이제는 싸우지 말아야지” 라고 생각하지만 그것 자체도 내가 꾸며낸 환상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영이 와 버리면 그런 육적인 노선을 따르는 것이 아니고 네가 환상을 천개를 만들었던 만개를 만들었던 70이 넘어서 10대를 후회하던 후회하지 않던 관계없이 일체 묻거나 따지지 않고 어쨌든 간에 너는 예수님의 공로로 이미 용서 받았다 이 말이죠. 그리고 골로새서 1장 16절에 보니까 그렇게 네가 철딱서니 없이 노는 그것도 다 예수그리스도의 공로만 높이기 위해서 그렇게 철딱서니 없게 살아 온 거예요.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가 완벽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오직 예수님의 공로로만 구원받는 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는 정말 철이 그렇게도 없을 수 없는 그런 식으로 나밖에 모르고 “언니한테 핀 하나 그냥 빌려주는 건데 안 빌려준다고 삐져서 울며 가다가 전봇대에 머리 받혀서 째져 수술하고 내가 핀만 빌려줬어도 이 상처 아니면 시집 좋은데 갈건 데…….” 그렇게 과거에 대해서 육적이라고 세속적이라고 생각하는 기준이 뭐냐 하면 바로 예수님의 신령한 공로에 근거해서 바라보는 사람이 특이현상이 되는 겁니다.
정리한다면 신령한 것은 뒤돌아보면서 모든 것이 육적이었고 세속적이었고, 내 중심이었고, 앞으로도 내 몸이 있는 한 그럴 것이고 그 모든 것이 예수님의 공로로 이미 다 용서가 된 상태에서 그게 파괴가 된다는 거, 그게 바로 아주 특이한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젊을 때는 월급이 적니 많으니 그 몇 푼 안 되는 것 가지고 노조 대모 했던 것이 나중에 나이 들면 “아이고 직장 있는 것도 고마운 걸 모르고……. 괜히 앞에 나대다가 나만 잘리고” 그런 것이 그 당시에는 마치 그것을 앞장서야 내가 대장 된 것처럼 영웅인 것처럼 여겨지는, 내가 설치지 않으면 복음도 전파 안 되고 내가 설교 안하면 사람들 구원 못 받는 것처럼 그렇게 착각했던 그 모든 그 시대에 그 나이 대에 맞는 환상 속에 우리가 헤어나지 못했던 것 그것이 다 육이고 바로 세속적이고 신령하지 않았던 그런 것들이었습니다.
또 더 나가서 내가 25살 때 기도하는데 주께서 나타나서 “근호야, 너는 목사가 되어야 한다!” 이런 거 그것조차도 돌아보니까 얼마든지 조작이 가능한 거예요. 그런 것은 기독교 영화 두세 편 보고 나면 잔상이 남아서 꿈에 많이 나타나요. 흔히 계시 받았다는 사람 이야기 들어보면 그 사람이 본 만화책 내용을 알 수 있어요. 무슨 드라마를 봤는지 다 나와요. 사람은 들었던 것이 모자이크처럼 중구남방으로 편집이 안 된 상태로 섞여 있다가 몸의 균형, 몸의 세포의 느낌 따라서 막 발작을 해서 꿈속에 툭 튀어 나오는 거거든요. 그 꿈에 사람들은 뿅하고 넘어 가는 거예요. ‘꿈에서 뭘 봤다.’ 하고 가위질해서 편집을 한 겁니다.
그래서 골로새서에서 어차피 인간들은 육의 사람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예수그리스도의 공로를 안다는 것은 특이 현상이고 놀라운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입니다. 새 언약이라고 하죠. 하나님의 뜻은 예수님의 중심으로 모든지 예수님의 공로로 구원받고 예수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는 지옥 간다는 그것이 신령한 뜻이에요. 신령한 뜻은 점점 더 압축이 되죠. 무엇으로 압축이 됩니까? 십자가로 다 이루었다. 이것으로 결국은 압축이 되는 겁니다. 성령께서 그렇게 이끌어 내십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태어날 때 무엇으로 태어났습니까? 예수님의 어머니는 마리아인데 아버지는 누구였습니까? 예수님께서 무엇으로 태어났습니까? 성령에 의해서 태어났죠. 그러면 예수님께서 십자가 가기까지 성령이 떠났습니까? 안 떠났습니까? 계속 성령이 역사했죠. 계속 성령 때문에 귀신 내 쫓고, 병고치고 심지어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는 것도 히브리서에 의하면 성령에 의해서 복종했고, 성령에 의해서 죽었으며 성령에 의해서 되살아났다고 되어 있어요. 성령께서 예수님을 떠나지 않았다 이 말이죠.
그렇다면 지금 우리에게 성령이 주어진다면 예수님은 죄 없는 상태에서 성령이 왔지만 우리는 죄 있는 상태에서 만날 우리가 지어놓은 환상 속에 빠져서, 자아도취에 빠져서 시나리오 쓰고 소설 쓰고 오늘은 이런 기도 내일은 저런 기도 하면서 “주여, 이 뜻대로 해 달라고” 자기가 주인공이 되는 시나리오 쓰는 그런 죄짓는 가운데 성령이 와 버리면 이 성령은 예수님은 죄 없는 가운데 십자가로 가지만 우리에게는 뭐가 따라옵니까? 결국은 다 이루신 십자가가 항상 우리를 성령과 함께 와서 우리가 어떤 죄를 짓더라도 다 이루었다는 십자가로 우리를 인도하는 겁니다.
이것을 학생들에게 이야기를 하면 “학생들, 공부 못해도 되고 시험 못 쳐도 괜찮아, 대학 안 들어가도 괜찮아. 성령만 있으면 구원받아” 정답입니까? 아닙니까? 정답 맞잖아요. 성령의 말씀으로 구원받죠. 대학 들어간다고 구원받고 공부잘한다고 구원받는 거 아니잖습니까? 그러면 애들은 이런 이야기 들으면 자기 나이 때의 환상을 해요. “아하, 성령을 받으면 공부 안 해도 되고 대학 안가도 된다. 그러면 놀아야지” 하고 또 소설을 쓰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학생들도 그렇지만 어른들도 마찬가지에요. 여러분 모든 죄를 용서받았다 하니까 그러면 “일부로 죄를 지어봐? 용서되는지 안 되는지 확인해봐?” 또 환상 속에 있는 겁니다. 그것이 인간의 육이니까 그것을 이상스럽게 여기지 말고 자연스럽게 여겨야 되요. 그런 식으로 가는 거예요. 그러면 제가 이런 이야기 했다고 “앞으로 내가 예수 믿거나 하는 그런 환상을 안해야지”라고 하는데 그런 환상을 만들지 않겠다는 것도 자기가 각본대로 자기를 멋있게 꾸미는 거예요.
이제부터는 어려운데, 성령을 받게 될 때에 성령 받게 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본론에 들어갑니다. 여러분들이 이해 안 되도 할 수 없어요. 이것은 여러분들에게 강요할 수밖에 없는데 인간의 세계는 두 개가 있어요. 하나는 명제가 있고, 하나는 언표가 있어요. 이 두 개가 차이가 나요. 명제가 뭐고 언표가 뭐냐? 예를 들면 쉽습니다. 명제라는 것은 어떤 상황에든지 그것이 진리가 되는 것입니다. 성령 안에서 육적인 상태에서 육적은 어떤 식으로 환상을 만들어내는가? 그것을 설명합니다.
다시 이야기 합니다. 인간은 육이 어떤 식으로 환상을 만들어 내는가를 설명합니다. 명제라고 하는 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진리가 되는 것을 명제라고 생각해요. 누가? ‘성경이’ 아니요. ‘인간이’ 그것도 더러운 인간이, 우리같이 더러운 인간이 만들어 낸다 이 말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예를 들어서 장례식을 한다 합시다. 장례식을 하는데 손님이 왔어요. 손님이 처음에 스무 명 올 줄 알고 사이다를 스무 병을 준비했는데 손님이 더 왔어요. 그래서 사이다를 10병을 더 준비 했습니다. 20병 더하기 10병은 몇 병? 30병이죠. 이게 장례식이라는 것 때문에 20+10이 30됩니까? 장례식과 상관없이 30병이 되는 겁니까? 이것은 장례식과 상관없이 사이다 20병+10병은 총 30병이 되는 겁니다. 20+10=30은 어떤 상황에서도 다 통하는 명제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이것을 사람들은 육적으로 진리라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언표는 뭐냐 하면 상황 따라서 의미가 바뀌는 것을 언표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서 “밥을 먹었나?”라고 이야기 할 때 이것을 첫 번째, 병원에서 하는 이야기와 두 번째 춤 교습소에서 이야기와 야구장에서 하는 이야기를 해 봅시다.
병원에서 “밥 먹었나?” 하는 것은 “환자분 금식인줄 아시죠? 그런데 밥 먹었어요? 내가 먹지 말라고 했잖아요.” “밥 먹었어요? 금식 중인데 몰랐어요?” ‘그러면 안돼요. 밥 먹으면 안돼요.’ 이런 뜻에서 ‘밥 먹었나?’ 똑같은 뜻이에요. 금식중인데 밥 먹지 말란 뜻이죠.
두 번째, 춤 교습소에서 남자 파트너가 여자 파트너에게 “밥 먹었어요?” 이 말은 “갑자기 파트너가 왜 이렇게 몸무게 무겁지? 댄스 하는데 왜 잘 안 딸려오지” “밥 먹었어요?” “왜 갑자기 뚱뚱해 졌어요?” 이런 뜻이다 이 말이죠.
세 번째는 “너는 왜 그렇게 힘이 없어? 밥 먹었어? 밥 먹었는데 왜 그렇게 홈런을 못 쳐” 같은 “밥 먹었나?”가 상황에 따라서 다 다르죠.
그러면 의미는 뭡니까? 의미는 어디서 결정하는 거예요? 진리라는 것은 내가 말한 진리가 아니고 그 말을 유발 시킨 상황에서 따라서 진리냐 진리 아니냐가 다 틀리게 나오죠. 이것을 ‘언표’라고 합니다. 언표라는 것은 진리를 찾는 것이 아니고 이런 말이 나오게 된 그 구조, 그 상황에서 언표라는 것이 나오는 겁니다. 그런데 명제는 장례식이던 결혼식이던 한국이던 교회이던 관계없이 사이다 20병 더하기 10병은 무조건 30병이다. 이 변함없는 것, 그게 진리라고 보는 겁니다.
사람들은 진리를 놓치지 아니하고 그리고 진리를 기본으로 깔고 난 뒤에 그 다음에 언표 쪽으로 나가는 거예요. 그러면 교회에서 진리가 뭡니까? 예수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것을 이것을 명제로서 진리로 받아들이고 나머지는 자기는 때에 따라서 그때그때 사는 겁니다. 이게 믿음입니까? 이것은 믿음이 아니거든요. 이거는 핑계죠. “목사님 믿습니다. 예수 믿으면 구원받는 거 믿습니다.” 해 놓고 실제 행동은 나는 명제를 알았기 때문에, 진리를 알았기 때문에, 챙겼기 때문에 나는 지금 죽어도 구원받고 그 다음 나머지 모든 행동은 “목사건 뭐건 간에 나에게 관섭하지 말라 말이야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산단 말이야.” 이렇게 나온다면 이게 바로 언표다, 육적인 태도가 된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이 언표에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상황과 구조가 나오죠. 상황과 구조를 언표라 할 때 “너 밥 먹었어? 너, 왜 이렇게 뚱뚱해?” 이런 말을 할 때 여기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주체”가 나와요. "주체", 내가 나오고 나는 뭐냐? 권력이 주름 잡힌 것, 권력의 표본, 권력이 뭉쳐져 있는 것, 힘이 뭉쳐져 있는 이것이 솟구쳐 올라오면 그것이 주체가 돼요. 여러분 바닷가에서 갑자가 백상어가 올라오면 옆에 물기둥이 올라오죠. 그 물기둥이 권력이라면 그 물기둥에 휩싸여 올라오면서 형성된 것이 “나, 이런 놈입니다.” 하는 주체가 형성됩니다. 그 주체라고 하는 것은 상황 따라서 다 달라요.
에너지를 개발한다고 10년 동안 해외에 나가서 죽도록 고생해서 우리나라 5천만 인구를 10년 동안 먹여 살릴 수 있는 에너지를 개발하고 방금 인천공항에 내렸습니다. 인천공항에 내려서 사진기자가 사진 찍고 훌륭하다, 큰일 했다 할 때에 그 사람이 거기서 담배를 피우면 됩니까? 안됩니까? 인천공항에서는 담배를 못 피우게 되어 있지요? 그런데 5천만 명 국민들을 10년 동안 먹여 살릴 에너지를 개발했는데? 거기서 담배를 피우면 돼요? 안돼요? 안되지요. 왜 안 됩니까? 에너지 개발을 할 때의 주체가 어디로 이동했습니까? 에너지 개발할 때 큰 주체가 이동했죠. 그 주체가 인천공항 실내에서는 담배를 피워서는 안 됩니다. 하는 새로운 상황에서 주체는 그 쪽 주체에 맞춰서 “어, 여기는 금연이네. 여기는 담배피면 안되네.” 하고 담배를 피우지 말았어야 된다 이 말이죠.
그러면 인간의 주체라고 하는 것은 그때그때 다른 행동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 육적이란 환상이 조작해 인간이 이렇게 만들어 냅니다. “내가 에너지를 개발했는데 담배 좀 피면 어때?” 이렇게 하게 되면 그거는 혼납니다. 벌금 5만원 물립니다. “나가서 피우세요. 나가서 피우고 훈장을 받던 상장을 받던 영웅이 되던 여기서는 담배 피면 안 됩니다.”
젊은 목사가 나이 많은 사람에게 설교하는 것은 좋아요. 그런데 젊은 목사가 나이 많은 사람에게 반말하고 찍찍 대고 “내 말 안 들으면 저주받아!” 이러면 돼요? 안 돼요? 이것은 상황 따라 주체가 달라진 것을 모르죠. 그러니까 다음 시간에 하는 것이 얼마나 우리가 신앙에만 핑계 데고 육적인 환상을 어떤 식으로 만들어 내는지를 10분 쉬고 이야기 합시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