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로새서

골로새서3강-흑암의 권세

아빠와 함께 2013. 12. 21. 08:28

2010-12-11 19:28:02 조회 : 1005         
12월10일흑암의 권세 이름 : 관리자 (IP:112.165.81.50)
101210 흑암의 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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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창길 (IP:222.♡.87.237) 10-12-21 17:06 
seoul101210a 흑암의 권세

골로새서1장11절부터 보시겠습니다.

골 1:11 그 영광의 힘을 좇아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
골 1:12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지금 누가 누구보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사도 바울 골로새 교인들 보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사람이 사람보고 이야기하는 거죠. 그런데 보통 현대인에 있어서 사람이 사람보고 이야기할 때는 미장원에 갔다 왔다면 “머리 잘나왔네.” “요새 주식이 좀 올라갔습니까?” “요새 국회의원들은 잘 안 싸우지요?” 이런 식으로 세상의 시사 경제라든지 또는 젊은 사람들끼리 어디 가면 물이 좋으니 나쁘니 하는 이런 누구 결혼 했니, 안했니 하는 그런 이야기하겠죠. 사람이 사람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그 내용이 이 세상에 대한 관심사입니다.

그런데 방금 읽었던 골로새서 11절과 12절의 말을 그대로 외워서 여러분 오랜만에 만난 동창생이나 아니면 일가친척 명절 때 모였을 때 그대로 한번 이야기해 보세요. 대화가 성사 될까요?  대화가 성사 안 되지요, 뭐라고 이야기하겠습니까? “우리 사람들끼리 통하는 이야기하자 너 천사 아니야 나 천사 아니야 우리 인간들 끼리 통하는 이야기하자” 라고 이야기할 겁니다.

지금 우리가 펼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말씀에 대해서는 지난 시간에도 했습니다만 이 말씀에 대해서 유일하게 관심을 보이고 그 말씀이 우리에게 적용이 된다고 다짐을 하고 장담을 하면서 나서는 사람을 가지고 성도라 또는 교회라 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성도나 교인들 경우에 방금 읽었던 골로새서 1장 11절, 12절 말씀이 우리에게는 편하게 다가와야죠. 부담으로 다가오는 게 아니고 “우리에게 해당되는 이야기를 하시네!”라고 편하게 다가와야 된다 이 말이죠. 그런데 방금 읽은 골로새서 1장 11절, 12절 말씀을 통해 보면 우리가 자주 대하고 흔히 대하는 내용이 아닙니다. 왜냐 하면 오늘 읽었던 본문에 보면 두 개의 무엇에 관하여 나오느냐 하면 두 개의 힘에 관한 이야기가 나와요

11절에 ‘영광의 힘을 좇아’하고 두 번째는‘모든 능력으로’ 나오죠. 이 두 개 다를 합치면 힘이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골로새서 1장을 가지고 편하게 우리친척이나 친구에게 교인에게 이야기하면 “집사님, 혹시 오늘도 힘 받았습니까?” 무슨 뜻이냐 하면 “집사님 오늘 어떻게 행동했습니까?”를 묻는 게 아니고 “오늘도 힘을 받았어요? 영광의 힘을 받고 모든 능력을 받고 사십니까?” 라고 묻고 “그러는 당신은 받았습니까?”라고 물으면서 우리에게 찾아드는 힘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야 된다 이 말입니다. 그럴 때 이 사람은 성도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일반인들이 이야기할 때는 주어진 힘이 아니고 자기가 만들어 낸 자기 노력으로 애써서 만들어 내는 힘을 가지고 이야기를 하지요

고 3학생들 수능치고 난 뒤에 선생님께서 “너 그동안 십몇 년 동안 애썼는데 점수가 얼마 나왔어?” 라고 네가 애써서 점수 몇 점 맞았어? 라고 보통 묻잖아요.  그런데 어떤 선생님이 “여러분들 하나님께 얼마나 많은 힘을 얻었습니까?”라고 그렇게 물으면 아이들은 “선생님 지금 무슨 이야기합니까?”라고 하면 선생님이“골로새서 1장 11절과 12절에 나오는 이야기야”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면 아이들이 “골로새서라는 거, 이런 거는 수능에 안 나옵니다.”이럽니다. 골로새서는 수능에 안 나온다는 거예요.

그러면 수능에 안 나오면 실지로 그런 힘이 없는 겁니까? 우리가 그런 교인들이에요?  세상 사람들은 자기가 만들어 낸 힘이 있을 때 힘나는데 우리는 그런 힘이 아니고 내가 만들어 내지 않는 힘을 가지고 받고 산다. “제가 받았는데 여러분 받았습니까?” “저도 받았어요.”라고 한다면 그 교회는 어떤 힘을 높이느냐 하면 자기가 만들어 낸 힘이 아니고 하나님께 받았던 힘을 내놓고 그 힘을 찬양하는 집단이 되고 모임인 것이다 이 말이죠. 그것을 가지고 교회라고 하는 겁니다.

21세기에 이런 소리 하는 내가 부끄럽습니다. 말 되지도 않는 소리를 계속해야 된다는 것이 내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 정도가 되는 겁니다. 방금 읽은 신약에서는 힘을 이야기했잖아요. 그런데 구약에서는 뭐냐 하면 땅을 두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구약에서는 애굽 땅과 그리고 약속의 땅입니다. 애굽 땅과 약속의 땅 가운데 무슨 지대가 있었지요? 그 가운데 광야지대가 있었죠. 그렇다면 애굽에서 히브리인들이 홍해를 건너와서 광야로 접어들 때 여기에 누구의 어떤 힘이 개입되어 있습니까? 첫째, 자기들의 힘이다. 둘째, 모세의 힘이다. 셋째 하나님의 힘이다. 하나님의 힘이죠.

그것을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믿었어요? 안 믿었어요? 안 믿었어요. 구약의 본인들은 구원받아 가고 있으면서도 구원의 힘을 받고 있으면서도 구원받는 본인들은 자기가 눈에 보이는 대로 자기 실력 것 구원을 성취하고자 애를 쓴 겁니다. 얼마나 모세가 답답증을 냈겠습니까? 아, 정말 사람들 못 쓰겠다, 하나님의 힘으로 이곳까지 와 놓고서는 막상 쳐서 물어보면 “누구 힘 입니까?” 하면 각자 “나의 끈질김입니다.” 이러고 있고 “내가 애써 참고 있는 중인데 건들지 마세요.”라고 하고 있고 자기 힘을 근거로 해서 자기 구원을 시도하려고 하니까 모세로서는 얼마나 답답했는지 모르겠어요.

왜 그럴까요? 그것은 힘의 두 종류가 있어서 그렇습니다. 첫 번째 종류의 힘은 자력, 자기 힘으로 자기가 살아가는 겁니다. 내 인생은 내가 책임진다는 거죠. 불신자들의 특징이 뭐냐 하면 모든 만사가 내가 노력하는 여하에 따라서 결정된다 생각해요. 지성이면 감천이다. 정성을 기울이면 하늘이 돕는다. 내가 정성을 기울이지 아니하면 어디에서도 힘을 얻을 수 없다고 하는 이런 버릇이 있습니다. 자기 힘이죠.

두 번째 힘은 여러분들이 들었을 거예요. 들었는데 실감이 안 나는 힘이 있어요. 그것이 ‘언약의 힘’입니다. 언약을 다른 말로 하면 ‘약속의 힘’이죠. 약속의 힘으로 천국에 가는 겁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이야기 하는 겁니다. 성경에서는 자기 힘으로는 안 됩니다. 약속의 힘으로 갑니다. 라고 이야기를 해 주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언약의 힘을 뭐로 바꾸느냐 하면 언약의 힘을 그냥 언약의 힘으로 받을 믿음이 없어서 언약의 힘을 자기 힘으로 바꾸어서 이 힘을 가지려고 합니다.

예를 들면, 제가 TV를 잘 안 보는데 개그콘서트라는 게 있어요. 거기 보면 차승원 비슷한 사람이 나와요. ‘선생 김봉투’라는 코너에 보면 이런 것이 나옵니다. 애가 선생님에게 관심 받기 위해서 하품을 하니까, 선생님이 “왜 수업시간에 하품해 하품 가지고와!” 그 애가 하품을 줍니다. “하~” “나중에 끝나고 찾아가” 이렇게 합니다. 여러분, 하품을 가질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그런데 하품 왜 일어나죠? 본인이 가질 수 없는 것이 왜 일어나죠? 이것은 자기 말고 자기가 원하는 대로 주신 힘이 아니고 갑자기 몸이 피곤하니까 하품이 났죠.

하품이 자기 소유가 아니고 자기 일어난 몸의 징후가 하품이다 말이죠. 그런데 선생님은 아이한테 그것이 자기가 만들어낸 줄 알고 “야, 어디 수업시간에 하품을 해! 하품 가져와!” 그러면 애들이 하품을 어떻게 가져옵니까? “방구 가져와, 방구” 방구를 어떻게 가져와요. 안 되지요. 그것은 상당히 재밌는 대목이지만 이것이 의미가 있는 거예요. 왜냐 하면 사람은 본의 아니게 하품을 하고 본의 아니게 방구를 뀌어도 그것이 외부에서 했다는 생각을 절대로 하지 않고 내가 하품했다. 내가 했다. 해서 자기 힘으로 전환시켜서 이것을 간증을 할 생각을 하고 있어요.

광야에서 하나님께 원망하니까 하나님께서 만나 주시고 물을 주셨잖아요. 그러면 그 만나와 물을 먹게 된 그 공로가 뭡니까? 그 원인은 뭡니까? 하나님께 원망하니까 만나와 물을 줬잖아요. 만나와 물을 받았죠. 고기 원할 때 메추라기 오고, 그러면 그것을 원인을 생각하지 않고 공로로 생각하는 거예요. ‘내가 이렇게 원망하니까 만나 왔잖아! 역시 나는 뭘 해도 나는 잘했어!’라고 하나님이 봐줘서 줬던 힘마저도 일단 내가 잘해서 확 가졌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이것이 신약성경에도 있어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릴 때 예수님을 팔아먹은 자가 누구죠? 가룟유다죠. 그런데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가룟유다가 없었으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지도 않았기 때문에 가룟유다는 결코 지옥에 가서는 안 된다. 왜? 예수님이 죽어야 부활되고 부활돼야 승천되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고 승천하는데 대단한 결정적 공로자가 누구냐 하면 가룟유다라는 거죠. 그래서 가룟유다를 아주 큰 공로자로 생각해서 천국 보내야 마땅하다고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그 말이 맞습니까? 가룟유다가 예수님을 팔아먹고 싶은 생각이 자기 생각이에요, 사탄의 생각이었습니까? 악마, 사탄의 생각이죠. 그런데 그 사탄의 생각을 자기 것으로 삼을 수 있어요? 없어요? 안 되지요. 그래서 그것을 알고 가룟유다가 죽을 때 어떻게 죽지요? 양심의 가책을 받아서 ‘이거는 내 뜻이 아닌데 인생 왜 이렇게 꼬이지’ 하고 자살했잖아요. 가룟유다만 그런 것이 아니고 나중에 오순절 후에 성령이 오게 되면 그 때부터 열두제자는 가는 길이 본인이 원하지 않는 길을 가야 됩니다. 성령으로 인도함을 받아서 천국에 들어 가셔야 될 분들이에요. 그 모델이 오늘날 이 의존교회에 있는 저와 여러분들의 모델이라고 성경은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 이야기 입니까?

우리는 항상 번뜩하면 내 힘으로, 여기서부터 여기까지는 내 꺼, 항상 나의 구역을 동그라미 쳐 놓고 거기에 좋은 것, 괜찮은 것은 바구니에 담아서 내 힘으로 전환된 힘이 나를 구원한다고 하는데 우리 것으로 전환 될 수 있는 힘은 그것이 따로 있습니다. 그것은 골로새서 1장 13절 다 같이 읽어 봅시다.

골 1:13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흑암의 권세에서’ 이 권세가 뭐냐, 또 힘이에요. 눌러버리는 거. 여러분, 오징어라든지 쥐고기를 바짝 눌러 버리면 뭐가 됩니까? 포가 되죠. 쥐포가 되죠. 오징어포 바짝 눌렀을 때, 누를 때 손바닥으로 누릅니까? 막대기로 누릅니까? 무엇으로 누릅니까? 아주 강력한 쇠 힘으로 누르잖아요. 그러면 오징어가 힘이 세서 어디 감히 나를 눌러 하고 내려 누르는 그 압력기를 오징어가 팔딱거리면서 밀칠 수 있겠어요, 없겠어요? 없죠. 그것을 가지고 그냥 힘이 아니고 권세라 합니다.

누르면 눌리고 빠개면 빠개지는 겁니다. 뭉개면 뭉개지는 겁니다. 신약에서는 어둠의 권세가 우리를 쥐포마냥 꼼작 못하게 우리를 누르고 있다고 하지만 구약에서는 뭐라 하느냐 하면 애굽에서 그들이 못 빠져 나왔다고 하는 겁니다. 다시 이야기 합니다. 구약에서는 그들이 애굽에서 그들 힘으로 못 빠져 나왔다.

신약에서는 어떻게 합니까? 우리는 이 세상 어디를 가나 서울, 대전, 부산, 평양, 외국 어디를 가나 우리는 어둠의 권세에 빠개져서 완전히 주눅이 들어서 살아간다는 겁니다. 우리가 해외여행 간다고 한국 떠나서 외국 가면 유럽, 스웨덴 가잖아요. 뭐라 합니까? “나 스웨덴에서 한번 살아봤으면 좋겠다!” “나는 호주에 가서 살아보고 싶다!” 이렇게 하는데 거기 호주에 가면 어둠의 권세가 없습니까? 가까운 화장실에 가도 어둠의 권세가 있어요.

우리가 이 세상의 어디를 가도 어둠의 권세가 반기고 있습니다. 반기고 즐거워하기 때문에 ‘야, 여기 밥 왔다. 우리의 먹잇감 들어왔다!’ 하면서 반겨서 브라질을 가나 어디를 가나 마찬가지에요. 북한 사람들이 한국에 온 것을 탈북자라고 하지요. 구약 같으면 박수 칠만 합니다. 그런데 신약에 가면 북한 어두움의 권세에서 남쪽의 어둠의 권세로 바뀌었을 뿐이지 어둠의 권세 자체에서는 벗어날 수가 없는 겁니다.

어둠의 권세가 구약적 용어로 애굽의 힘, 강원도의 힘이 아니고 애굽의 힘입니다. 이것이 신약에서는 어두움의 권세, 구약에서는 애굽의 힘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애굽에 갇히게 하는 것은 애굽에 갇혀 있다는 것이 정당화 됩니다. 정당화 되는 것은 ‘사람 사는 거, 다 그렇지 뭐 우리가 이 애굽에서 나가야 돼? 그냥 살다 죽으면 그만이지’ 라는 자체가 무슨 세계를 거부하는 겁니까? 언약의 힘, 언약의 세계라는 것은 없다는 겁니다. 오늘 본문 15절을 봅시다.

골 1:15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여기 하나님을 뭐라고 표현 했지요? 보이지 않죠.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 것은 없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 골로새서가 수능에 안 나오는 겁니다. 만약에 이 골로새서의 내용대로 천국이 지상 한 3km지점에 어떤 UFO, 비행접시가 떠서 밑바닥에 "This is heaven" “여기가 하늘나라다.” 라고 적혀 있으면 그때부터 서울대 안가고 연고대 안가고 어디 가겠습니까? 천국에 들어가겠죠. 그러면 UFO의 외계인들이 “줄서라, 시험 친다. 수능 말고 이것은 천국 시험이다.” 하면 그때부터 서울 곳곳에 강남에 학원생깁니다. 무슨 학원이냐 하면 천국 학원이 생기는 거예요. 왜 그러느냐 하면 아무리 서울 연. 고대 가도 UFO로 못가고 오직 그 시험을 봐야 UFO 천국에 들어가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천국에 들어가고 싶어서 그때부터 사람들은 거기에 시험치고 시험 안 되면 돈 빽써서 들어가려 하고 우리 아버지 재벌인데, 삼성그룹 이번에 임원 됐네 하면서 밀어붙여서 들어가려 한다 이 말이죠.

문제는 UFO가 눈에 띄어서 그러는데 만약에 UFO 온 자리에 갑자기 잠시 있다가 한 2초, 3초 있다가 없어져 버렸다 말이죠. 없어져 놓고 저 달아나는 사람 말이 ‘내가 구름 타고 다시 올 테니까 나 있는 곳에 오라!’ 이렇게 하면 시험 누가 치겠습니까? 빈 하늘입니다. 예수님이 구름타고 제자들 앞에서 승천하고 올라갔잖아요. 그러면 그 하늘이 있을 거 아니에요. 우리나라는 아니지만 이스라엘에 있을 거 아닙니까? 그 하늘이 구름이 지금도 있습니까? 없어요. 지금은 그때 예수님 구름 타고 올라간 천사가 있습니까? 없지요. 옛날에는 있었지만 지금은 없으니까 없는 거다 이 말이죠. 없는 것을 위하여 목 매달필요가 뭐가 있어요. 있는 것도 다 못 챙겨서 그러는데 없는 세계까지 챙기려니 얼마나 분주해요. 있는 조상도 못 섬기는데 없는 조상, 죽은 조상을 못 섬기는데 살아 있는 하나님을 섬기려니까 얼마나 바쁩니까? 이것도 해야 하고 저것도 해야 하고 여러 가지로 힘들죠.

제가 이야기 합니다. 어둠의 권세에 눌려 있으면 제발 거기서 탈출이 안 된다는 것을 우리가 그냥 순하게 받아 줍시다. 이 말입니다. 어둠의 권세를 알고 ‘탈출해야지!’ 이렇게 나온다면 이 사람은 아직도 어둠의 권세의 맛을 못 본 겁니다. 젊은 청년이 취직한다고 주일 잘 지킬 수 있는 그런 직장을 구해서 교회 온다는 생각을 한다면 아직도 어둠의 권세를 너무 얕잡아 보는 겁니다. 주일 지키는 것이 어둠의 권세를 이길 수 있는 비장의 무기가 아니거든요.

주일 지키나 안 지키나 교회 나오나 안 나오나, 교회 나와도 어둠의 권세로 모이는 겁니다. 왜냐하면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뭔가 종교적인 것이 자기한테 주입되면 우리는 그것을 무엇으로 바꾸느냐 하면 언약의 힘이 아니고 갑자기 ‘나는 교회 20년 다녔다.’ '헌금했다.’ ‘봉사 했다.’ ‘성경공부 다 참석했다.’이것이 언약의 힘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무엇으로 바뀌느냐 하면 자기 힘으로 바뀌죠. 자기가 있으면 자기가 있는 그 순간, 무슨 권세가 작용을 하느냐 하면 어둠의 권세가 자기 힘을 눌러 버립니다.

‘그럼 목사님 자기 없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글쎄 그게 제 이야기라니까요.  어떤 사람이든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자기를 못 버리잖아요. 그러니까 어둠의 권세에 눌러 앉아, 뭉개져 그 안에서 박살나자는 거죠. 어둠의 권세한테 완전히 깨져 버리자 이 말입니다. 깨지면 되는 걸 자꾸 종교적 힘으로 자기 힘을 따로 구축하는 것, 자기가 레지당스입니까? 비밀 지하 단체입니까? 세상은 악해도 우리끼리 힘을 모으자! 비밀 결사대처럼 그렇게 하지 말고 아예 항복을 하시면 됩니다. 거기에 적절한 찬송가가 있어요.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그 모습이 꼭 베트콩 항복할 때 나오는 모습입니다.

우리는 어둠의 권세에서 항복하면 돼요. 항복하라고 어둠의 권세를 준겁니다. 나는 아브라함 자손이고, 아버지가 뭐 장로고 집사고 나는 모태 신앙이고 모태솔로고 모태 신앙이고 간에 백날해도 그것이 전혀 어둠의 권세는 콧방귀 낍니다. ‘이 어둠의 권세야! 물러가라! 내가 쏜다! 슈슈슈’하면 어둠의 세력이 ‘후후훗 놀고 있네!’ 일체 트러블이 없어요. 일체 그런 것은 통하지 않습니다. 어둠의 권세가 바보입니까 인간에게 지게요. 어둠의 권세는 애굽을 지고 있는 권세입니다. 애굽 권세를 누가 이깁니까? 애굽에 있는 종들이 히브리인들이 이깁니까? 못 이깁니다.

그냥 갇혀서 사세요. 갇혀서 사는데 어둠의 권세의 특징이 있어요. 어둠의 권세에 살고 있으면 전부다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죽기가 무서워서 매일같이 밥 먹고 살려고 애를 쓴다는 겁니다. 제가 지금 나의 이야기, 딴 사람 이야기 하는 것처럼 하는데 미안합니다만  다 우리들 이야기에요. 사람은 태어나면서 죽을 때까지 쌍둥이들 보세요. 엄마 젖 빨려고 자기들끼리 경쟁하잖아요. 하나는 에서 되고 하나는 야곱 돼서 서로 엄마 젖 빨려고 한쪽은 삐지고 울고 합니다. 사촌 간에 키워보세요. 그런 것을 제가 많이 봤어요. 사촌 간에 하나는 호빵주고 하나는 안주니까 호빵이 뭔지도 모르고 삐져 울고 있고 떼 주니까 또 떼어 준다고 울어요. 왜? 자기 것이 더 작아 보이거든요.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생긴 모습이 될 수 있는 대로 죽음을 지연시키고 그저 하루하루 밥 먹고 사는 거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먹을까? 이것이 사람 사는 인생의 전부에요. 아니면 아니라고 이야기 해 보세요. 히브리서 2장에 말씀처럼 죽기가 무서워 종노릇하는 것, 그것 외에 뭐가 있습니까? 사람이 사법고시 공부하고 공무원 시험공부하고 여러 가지 애쓰고 영업사원 자동차 하나 더 팔려고 애쓰는 거 그거 자동차 파는 것에 취미가 있어 그렇습니까? 다 집에 있는 자녀와 자기 아내 밥 먹이려고 하잖아요. 그 다음 문제 ‘당신 집안에 밥 먹여서 뭐 할 건데?’ 먹여서 뭐 할 건데 그 뒤에는 없어요. 그냥 밥 먹어야 하니까 밥 먹는 거지 밥 먹고 난 뒤에 인생은 왜 사느냐? 무슨 봉사 하냐? 그런 것은 묻는 게 예의가 아니에요. 그거는 물으면 안 됩니다. 알지도 못하는 것을 왜 물어요.

여러분들이 들판을 걸을 때 해가 집니다. 해가 지면 해가 지는 그 대목만 어둡습니까, 온 천지가 다 어둡습니까? 해질 부분은 약간 빨갛게 노을이 졌지만 주홍색으로 곧장 해가 져서 시간이 지나게 되면 온 천지가 다 어둡지요. 이상하지 않습니까? 해가 어디서 졌어요? 해가 여기서 졌다면 여기는 밝아야죠. 해 진 쪽만 어두워야 하는데 다 어두워요. 우리 인생이라는 것이 이렇습니다. 그리고 아침에 해 뜨면 밝지요.

다시 이야기 합니다. 사도바울이 골로새서를 이야기 할 때 우리가 인간 대 인간으로 보통 동창생들, 친구들끼리 대화 하는 내연 계약이 없어요. 없고 우리는 빛 가운데 산다고 진짜 해괴망측한 이야기를 한다 이 말이죠. 불신자들한테는 이게 무슨 소리냐 하지만 우리 신자한테는 우리에게 해당되는 사항입니다. 우리들 다 빛 가운데 살지요. 달리 이야기 하면 ‘우리는 다 하나님이 주신 힘 가지고 살지요.’ 라고 이야기 하는 것은 힘은 무슨 힘, 인간은 누구 힘으로 산다? 자기가 밥 먹고 살려는 자기 힘 이외에는 인간에게 무슨 힘이 있겠어요? 인간이 내가 만들어 낸 힘 말고 다른 힘이 뭐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골로새서는 그렇게 이야기 안 하더라 이 말이죠. 무슨 힘을 이야기 합니까? 영광의 힘을 이야기 하고 모든 능력으로란 말을 했잖아요. 그러면 힘대로 지금 가고 계십니까? 이 힘 받았어요?

사실은 성령 받은 사람은 이미 받았어요. 받았는데 밥 먹고 살기 바빠서 무슨 힘을 놓쳐버렸습니까? 이 영광의 빛이 있는지 없는지 조차도 모르는 거예요. 마치 가정생활에 소홀한 주부처럼 아, 분명히 냉장고에 고등어를 3일전에 샀는데 바쁘다 보니까 고등어를 또 사왔어요. 나중에 냉동실을 보니 고등어가 10마리씩 사놨는데 오랜만에 고등어 먹자고 또 사왔다고요. 살림 살다보면 그런 경험 없습니까? 분명히 우유를 샀는데 또 사오고 음식쓰레기 봉투 샀는데 또 사는 경우……. 지금 누구 이야기 하는지 모르겠어요. ㅎㅎ 냉장고에 뭐가 들었는지 그런 것도 모르고 어떤 때는 월말 지났는데 공과금 안내서 과태로 무는 경우 많이 있잖아요. 자기가 하는 일, 내 힘으로 어떻게든 아침 눈 뜨면 ‘오늘은 얼마나 돈 벌어서 나와 우리 가족 먹고 사느냐!’라고 하는 그 순간 우리는 이미 힘을 상징합니다. 힘을 예상합니다.

그 힘은 영광의 힘이 아니고 모든 능력도 아니에요. 이것은 바로 내 힘으로 살겠다는 거예요. 내 힘이니까 이것은 자기 힘입니다. 사람이 자기 힘으로 산다는 것은 그 당시 출애굽할 때 광야에서 살았던 이스라엘 백성들도 똑같은 사고방식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만나를 하루치만 줬는데 꼭 그런 인간들이 있어요. 하루치만 있는데 더 먹으려고 이틀 치 끌어 모았다가 남은 것 다 썩은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안식일 날 분명히 안 옵니다. 분명히 잠복반 이장님이 광고해서 ‘자, 내일은 안식일인데 절대로 안 옵니다.’했는데 꼭 그런 사람이 있어요. 다음날 와서 찾는 사람이 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틀 치 삼일 치를 안주느냐하면 이틀 치 삼일 치를 끌어 모아서 살겠다고 하는 것은 어디 쩍 사고방식이냐 하면 애굽에 있을 때 다시 말해서 애굽이 뭐라고요? 어둠의 권세 안에 있을 때 하는 행세거든요. 나름대로 자기 사는 습관이고 방식이고 이 방식이외에는 아는 게 없어요. 많이 모으면 유익하고 적게 모으면 아슬아슬하다. 이것은 누가 가르쳐 주지도 않았어요. 이것은 타고 난거예요.

제가 운전면허 시험 칠 때 필기를 100점 만점에 60점 이상 되어야 합격인데 62점 맞았습니다. 더도 덜도 필요 없어요. 딱 합격할 것만 했죠.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고 실력이 없어서 그랬어요. 그래도 62점 맞았다고 지금도 운전하는데 ‘잠깐 검문 있겠습니다. 당신은 62점 맞았지?’ 이렇게 따지는 사람 없어요.  일단 그 영역에 들어가면 62점이던 100점이던 상관없어요.  어떤 학원에서는 100점 맞고 실기 떨어지는 사람 있습니다. 그건 무효에요. 또 쳐야 돼요.

하나님께서 왜 하루치를 줬을까요? 인간 대 인간으로 경쟁하지 말라는 겁니다. 인간 대 인간이 경쟁하면 꼭 무슨 경쟁을 하느냐 하면 ‘너 얼마나 가졌어? 너 가진 힘 내봐!’ ‘내가 가진 힘은 이 힘이야!’ ‘야, 네가 더 오래 살겠네!’ 이렇게 서로를 경계하고 서로를 비교하고 경쟁하는 그것으로 살아가는 그 버릇을 이미 구약 때는 애굽, 신약에는 어둠의 권세에 눌린 사람들이 그렇게 하는 겁니다.

여기까지는 여러분 쉽지요. 이제 약간 어려운 거 해 보겠습니다. 구약 때 애굽에 있는 사람들에게 모세가 하는 말이 어디로 가자고 했습니까? 약속의 땅으로 가자고 했지요. 그 약속의 땅은 아브라함의 언약, 15장에 보면 약속의 땅이죠. 애굽이 실제로 있는 땅이었습니까? 아니었습니까? 땅이었죠. 그러면 애굽에서 본 약속의 땅도 실제의 땅입니까, 아닙니까? 역시 실제 땅이었죠. 구약에서는 땅에서 땅으로 가는 겁니다. 실제로 그렇게 갔어요, 안 갔어요? 갔지요. 땅에서 땅으로 갑니다.

‘우리 양천구 신월동에 있는 의존교회 있는 교인들, 여기서 하지 말고 우리 구원받읍시다.’하면 ‘어디로요?’ ‘강남에 압구정동으로 갑시다.’ ‘예’ 가면 그러면 여기 있는 사람이 거기 땅으로 옮겨가면 그게 구원이 되는 것이 구약적, 지평적 사고라 같은 평면에서 그렇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제가 아까 이야기 했죠. 이 신약시대에는 이태리를 가든 독일을 가든 핀란드를 가든 스웨덴을 가든 외국에 어디를 가도 어두움의 권세가 있다고 했죠.

왜, 골로새서가 어두움의 권세라고 하느냐 하면 옛날 구약처럼 이 땅에 있을 때는 애굽 권세이지만 여기 약속의 땅에는 하나님의 권세가 있다 이런 식의 언약의 힘이었다면 신약에는 아예 애굽이 어둠의 권세로 바뀌지요. 13절에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지금 사랑의 아들의 땅이 어디 있습니까? 지금 안 보이죠.

강남 압구정 같으면 멀리서 보면 보이는데 그런데 사랑의 아들의 땅은 안 보이잖아요. 애굽 땅은 보이죠. 보이는 애굽 땅에서 나중에 들어가면 보이는 가나안 땅에 가지만 신약에는 지금 어둠의 권세가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안보이죠. 안 보이는 이 세상을 어둠의 권세 아래에 있는 어둠의 세상이라고 볼 때 결국 어둠의 세계와 사랑의 아들의 세계의 차이점이 뭐냐 하면 어둠의 세상은 보인다는 것이고 결국 우리는 보이는 세상에서 어디로 간다? 보이지 않는 세계로 간다는 거예요. 이게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입니까? 보이지 않는 것은 없는 거라고 그렇게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보이지 않는 것은 없는 거예요.

말할 수 없는 것은 없다고 비트겐슈타인은 말했습니다. 말할 수 없는 것은 없는 겁니다. 보이지 않는 것도 없는 겁니다. 그래서 모든 논리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으로 구분해야 된다. 그 철학을 주장한 사람입니다. 망상을 깨 내자. 환상을 깨내자. 이 말이죠. 이 종교라는 망상을 깨 내자, 그만 속아 넘어가라 그만! 그만 속아 넘어가라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날 교회에서 안속아 넘어가서 땅에서 땅으로 이동하잖아요. 뭐냐 하면 우리교회라는 땅에 나오면 강남에 사논 땅값 오릅니다. ㅎㅎ 땅에서 땅으로 가지요. 예, 강남 땅값 오르면 보이니까 그래프로 보면 보이잖아요. 땅 팔면 돈으로 들어온다는 것이 보이잖아요. 우리 교회 와서 기도하시면 다른 교회 가면 안돼요. 지정된 장소에 땅이죠, 지정된 장소에 가셔서 기도하시면 여러분 자녀가 서울대학 갑니다. 서울대학 학생 뺏지가 있으니까 보이잖아요.

그러니까 오늘날 교회는 성경대로 안 하고 보이는데서 보이는 곳으로 이동하니까 보이는 것은 이 세상에 누구의 권세 아래 있다? 어둠의 권세 안에 있지요. 그럼 탈출했다, 안 했다? 탈출 못했죠. ‘우리 교회를 크게 집시다.’이게 뭐예요? 이것도 보이는 작은 교회를 보이는 큰 교회로 바꾸잖아요. 큰 교회지어도 구원 안 되는 거예요. 이렇게 되어야 돼요. ‘보이는 교회 믿지 말고 보이지 않는 주의 몸을 믿읍시다.’이렇게 한다면 그것은 되는데 그게 아니고 ‘보이는 교회를 돈 모아서 크게 지읍시다.’ 하게 되면 그것은 여전히 어둠의 권세죠.

다시 설명할게요. 어둠의 권세의 특징은 구약 때보면 실제 땅이었다. 이 땅에서 약속의 땅으로 탈출을 감행하는 것이죠. 이것을 사람들이 오해를 해서 성경을 보면서 무엇을 노리고 있느냐 하면 뭐로부터 탈출이다? 가난으로부터 탈출을 시도하는 겁니다. ‘주여, 가난합니다. 가난에서 탈출시켜 주세요.’그런데 성경 골로새서에서는 ‘가난에서의 탈출이 아니고 네가 탈출해야 될 장소도 분간 못해!’가난에서의 탈출이 아니라 흑암의 권세에서의 탈출이 구원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힘으로 흑암의 권세에서 탈출이 가능하다, 가능하지 않다? 가능하지 않지요. 가능하지 않으면 쑥 들어가서 철저하게 복종하세요. 괜히 나대지 말고 촐랑대지 말고 이기지도 못할걸! 괜히 나대서 자기가 열만 나고 화만 납니다. ‘목사님 기도 했는데도 응답이 안돼요.’ 응답 안 되면 응답 안 되는 대로 그대로 있으란 말이죠. ‘기도 응답도 안 되는데 무슨 구원이 되겠습니까?’라고 하신다면 기도 힘 가지고 안 되더라도 언약의 힘,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기도 힘은 돼요. 내 기도 힘으로는 구원이 안 되고 예수님의 기도 힘으로는 된다 이 말이죠. 그게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히브리서 7장 25절입니다.

히 7:25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여러분 예수님을 거북이라고 생각하고 거북이 등위에 누가 탔다? 우리가 올라탔다고 생각하세요. ‘그러므로 거북이 등 위에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여기 그가 누구에요? 예수님이, 뭐 하십니까? 지금 노십니까? 지금 화투치십니까? TV보십니까? 뭐합니까?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뭐한다? 간구하시기 때문에, 기도하시기 때문에 자기를 힘입어 하시는 분은 반드시 구원에서 실패 될까요, 안될까요? 안되잖아요. 그러면 이 기도의 힘은 누구의 힘입니까? 우리 기도의 힘입니까? 예수님의 기도의 힘으로 구원이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의 기도의 힘이 된다는 말은 곧, 그 전에 무엇을 알아야 하느냐 하면 왜, 우리의 기도의 힘은 안 될까를 알아야 될 거 아닙니까? 왜, 자기 힘은 안 되고 왜, 언약의 힘, 예수님의 힘은 될까를 이유를 알아야 돼요. 그것은 우리가 구원에 대해서 신경 쓸 잽이 못되고 신경 쓸 자격자가 안 되기 때문에 그래요. 아, 이게 참 보통 어려운 이야기가 아닌데 제가 너무 소곤소곤 이야기를 하네요. 진짜 중요한 것을 …….

우리가 스스로 자기 자신을 향하여 ‘걱정마라, 주께서 데리러 오실 거야, 너 걱정 하지 마.’라고 자기 구원에 대해서 걱정할 수 있는 입장이 우리가 못 됩니다. 우리는 애굽에 있는 히브리인처럼 우리의 본성이 우리 본성이 아니고 흑암 권세의 본성이 우리의 모든 본성을 이미 장악하고 있어요.

제가 그런 것을 실제로 많이 보는데 경상도 청년이 군대를 갔습니다. 군대 가기 전에 대구 지방에서 화투를 많이 쳤어요. 그런데 군에 갔다가 휴가 와서 말씨가 많이 달라졌어요. ‘그런데 말입니다’ 뒤에 ‘말입니다.’를 많이 써요. 서울말도 아니고 경상도 말도 아니고 그게 군대식 말인데 그런 말을 해요. 휴가 나와서 이틀 지나면 친구들하고 어울리면 사투리 또 나와요. ‘그런데 말입니다, 아닙니다.’ 자꾸 이렇게 말을 해요. 왜 말투가 그렇게 달라졌을까요? 본인이 군대 말하고 싶어서 환장한 겁니까? 환장했으면 그 사람 말뚝 박아야 할 텐데 대부분 안 그렇고 무엇을 느끼느냐 하면 말씨까지 바꿔야 함을 은연중에 압력을 받는 뭐가 있습니까? 힘이 있죠. 그 힘이 있는 거예요. 그러면 그 어둠의 권세에서 부끄럽지 않으려면 어둠의 권세가 시키는 대로 해 줘야 다 같이 어둠의 권세 아래 있는 다른 사람들과 대화가 돼요.

군인이 여럿이 있으면 젊은 아가씨 지나가면 괜히 휘파람 불고 하잖아요. 혼자 있을 때는 그런 짓 못해요. 혼자 있다가 그러면 그 여자한테 혼나요. 여럿이 있으면 힘이 있어서 그럽니다. 왜 여럿이 있을 때는 그런 용기가, 용기가 아니라 객기죠. 객기를 왜 부릴까요? 평소에 집에 있을 때는 아내한테 꼼짝도 못하던 것이 시가 식구들이 집에 쭉 와서 앉아 있으면 ‘어이 물 가져 온나!’ ㅎㅎ ‘우리 어머니한테 잘 해야지!’ 왜 그런 허풍을 부리고 그럽니까? 그러면 아내가 가만히 툭 때리면서 ‘나중에 끝나고 보자!’ ㅎㅎ ‘나중에 시가 식구들 다 가고 보자!’ 그 다음부터 기가 팍 죽어 있지요. 응원군 오니까 갑자기 객기를 부리는 거예요.

이것이 인간 내부에 보면 ‘나’라는 게 있어도 ‘허약한 나’입니다. 허약한 나라서 내가 내 마음대로 안 되고 주위의 색깔에 따라서 동화되는 현상을 보여요. 동화란 말뜻은 일치된다는 말입니다. 거기에 어울린다 이 말입니다.  그 어울리는 것에 흡수 통합이 되어 버립니다.

부산에서 결혼식을 하는데 뭐 큰 소리 치지요. 우리 목사님 모시고 기독교식으로 하고 찬송가 뭐로 할까요? 쭉 이야기해요. 그래서 찬송가 이걸로 하시고 했는데 나중에 결혼식 당일에 와서 여자 쪽에서 기독교식으로 하면 결혼 안 하겠답니다. 그러면 왜 기독교식으로 원했냐하면 우리는 기독교식으로 한다고 밀어붙여 봤는데 저쪽에서 삐끗해서 ‘기독교식으로 하면 우리는 이 결혼 파토 냅니다. 무효입니다.’ 이렇게 나오니까 ‘예’ 하고 꽁지 확 내린 거예요. ‘목사님 주례 어떻게 합니까? 기독교식으로 안하겠다는데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결혼식이 결혼의 전부가 아닙니다. 결혼식은 후다닥 해 버리면 그만입니다. 기독교식이고 뭐고 제가 할 말 할 테니까 찬송가 다 빼고 그냥 내가 알아서 할게요.’ 제가 알아서 했어요. 찬송가 없이 얼마나 편한지 기도 순서도 없고 제가 결혼 주례한 것 중에 제일 신경 써서 다 들었어요. 한 200명 됐었는데 얼마나 잘 듣는지……. 거의 다 불교 신자, 교회도 안 나오는 사람들인데 얼마나 잘 듣는지 아주 은혜롭게 잘 보냈어요. 저의 일방적인 평가인지 모르겠지만 제가 보기에는 아주 은혜롭게 아주 집중해서 떠드는 사람도 없이 조용하게 전 그런 결혼식 주례 처음이었어요. 우리 이미아씨 결혼식 보다 더 집중을 많이 했어요.

지금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흑암의 권세가 너의 몸을 차지했으면 그게 말씀대로 했기 때문에 흑암의 권세에서 탈출하려고 나대지 말라 말이죠. 너는 원래 흑암의 권세에서 묶여서 저주 받는다 이렇게 생각하고 그냥 흑암의 권세에 복종하라는 거예요. 기독교식 안한다 하면 기독교식 안하면 되고 그냥 네 본성, 우리 본성이 뭡니까? 눈만 뜨면 어떻게 하면 돈 벌어서 밥 먹고 사느냐! 그냥 본성대로 사시라 이 말입니다.

그것을 주여 어떻게 합니까? 기도 한다고 될 일 아니고 봉사한다고 어둠의 권세가 물러날 것도 아니고 기독교 회사 들어가 봐야 돈벌이 하는 것은 마찬가지이고 기독교 회사라고 해서 자선 사업합니까? 돈 벌어야 돈 갈라 먹기 하는데 세상에 어느 회사 어느 장소에도 돈과 관련되지 않은 곳이 없고 그리고 사람을 볼 때 돈으로 안 보는 곳이 없어요. 믿음이 좋다고 봐주는 것 없어요. 돈 벌어오면 월급 주는 거예요. 돈 안 벌어오면 월급도 없는 거예요. 노동자들이 데모는 왜 하는지 몰라요. 그냥 일하고 돈 받으면 될 뿐이에요. 거기 사회 정의가 뭐 필요합니까? 그거 필요 없어요. 이 세상에 사회정의가 없어요. 어둠의 권세인데 뭐가 사회 정의가 있습니까!

우리가 주제 파악을 해야 해요. 우리는 어둠의 권세에 끽 소리도 못하고 아무소리도 못합니다. 아무소리 못하면 자존심 꺾고 아무소리 안하면 됩니다. 돈 주면 예~ 하면 된다 이 말입니다. ‘예, 고맙습니다.’ 이러면 된다 이 말입니다. 뭐 돈을 초월한 사람처럼 건방떨지 마라 이 말이죠. 왜 그렇게 하는가,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철저하게 이 ‘자기’를 어둠의 권세에 집어넣고 그 다음에 1인치든 1센티든 빼내는 모든 공로가 너의 힘이 아니고 구원받은 너희 공로가 아니고 언약의 힘이 개입될 때에만 가능하다는 것을 우리의 무능력을 통해서 발현하려고 그 영광을 완전히 들어내게 하기 위한 힘인데 그 힘을 가지고 영광의 힘이라고 해요.

우리 힘이 아니고 영광의 힘이에요. 자식들 잘해주면 잘해줄 거라고요? 여러분 자식들 잘해주면 자식들 망쳐버립니다. 자식들은 항상 자기 유리한 쪽으로 해석을 해요. 엄마, 아빠 이야기 하는 것 다 안 들어요. 편집을 해서 자기한테 유리한 것만 딱 뽑아서 기억을 하고 나머지는 다 버립니다. 그리고 나중에 “엄마, 그 때 이랬잖아! ‘네가 피곤하면 공부 안 해도 된다.’고 했잖아! 그래서 성적이 내려갔어. 엄마 약속대로 했는데 왜 이제 와서 닦달이야.” 이렇게 한다 이 말입니다. 이게 자식들이에요. 그리고 그런 자식들이 인간되기를 기대하지 마세요. 언제 인간됩니까? 인간 태어나봤자 인간 안됐어요.  괜히 꿈꾸지 마세요. 인간 같은 인간은 없습니다. 다만 환경이 좋으면 마치 사람처럼 느껴질 때가 있을 거예요. 하지만 환경이 달라지고 집에 부도나고 이혼해 보세요. 애가 어떻게 빗나갈지는 아무도 장담 못합니다. 그동안 좋은 환경 밑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아주 우수하고 건전한 행동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환경이 달라지면 소속이 달라지면 어디로 튈지 모릅니다. 대마초 피고 김성민처럼 뭘 할지 몰라요.

사람이 돈을 벌 때 내가 이 돈을 가지고 도박한다고 장담하는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그냥 마구잡이로 돈 10억 20억 들어오니까 갑자기 그것 가지고 도박하고 싶은 생각이 든 거예요. 사람이 어떤 환경에 들어가면 그 환경 때문에 그동안 내가 미처 발휘 못한 재능들이 나와요. 그 재능이 나와서 그것이 새로운 자아발견, 개성이라고 떠벌입니다. 집안이 어려울 때는 공부만 해요. 갑자기 집안이 펴게 되면 공부 안하고 나 기타 칠래! 하면서 기타리스트 할래, 뭐할래, 뭐할래!……. 나 체육 할래. 박태환처럼 나 수영할까, 갑자기 사람 태도가 달라져요.

어둠의 권세에서 제공하는 것이 있습니다. 어둠의 힘에서 제공하는 것이 우리의 잠재되어 있던 타고난 욕심을 자극하죠.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여 사망을 낳죠. 그래서 어둠의 권세에서는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을 죽이도록 권세가 그렇게 작용하고 있습니다. 죽이도록 권세가 작용을 하면 우리는 곱게 죽으시면 됩니다. 평소에 우리가 눈을 뜨고 나서 오늘도 뭐하다 죽지라고 하신다면 그게 말씀대로 그냥 죽어 가는 거예요. 그 뒤 이야기는 간식 먹고 하시겠습니다.
 김창길 (IP:222.♡.87.237) 10-12-21 17:07 
seoul101210b 흑암의 권세

지난시간에 한 것을 잠시 보게 되면 사람은 보이지 않는 것은 아예 없다고 생각하고 그 대신 보이는 세상에서 그냥 자기의 의견 나누고 소통하고 서로 돕고 서로 살피고 그게 사는 거다, 그게 전부라고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골로새서에 보면 보이지 않는 힘, 특히 보이지 않는 어둠의 권세라는 용어가 나오는 것을 봐서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을 한마디로 설명을 해 놓으면 그 다음에 이 세상 말고 보이지 않는 세상을 설명할 수가 있다는 쪽으로 지금 사도바울이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무슨 말이냐 하면 우리가 보고 있는 이 세상에 대해서 부정하거나 외면할 필요는 없는데 이 전체가 마치 옛날 애굽나라처럼 애굽나라 있을 때는 애굽나라에서 빠져나오는 것이 있을 수 없듯이 이 세상사는 사람이 이 세상을 부정하거나 이 세상을 버리고 나온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거예요. 그렇게 이 세상을 못 빠져 나오면 그냥 사시면 된다 이 말입니다.

그냥 이 세상 충실하게 살면 돼요. 그러면 하늘나라는? 세상에서 생각하는 하늘나라는 이 세상 살다가 너무 힘드니까 꾸며낸 거예요. 거짓말이에요. 다른 말로 이야기하면 조작이에요. 조작된 천국이에요. 조작된 천국이라는 것은 내가 들어가는 곳이거든요. 그런데 원래 성경에 나오는 어둠의 권세라는 것은 그 중에 단 한명이라도 이 세상에서 어둠의 권세가 얼마나 센지 어떤 인간도 여기서 빠져나와서 천국 간다는 것은 전부다 거짓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종교자체가 거짓말이에요. 아편이고, 마약이고 거짓말입니다.

여러분, 마르코스 이야기 했지만 그것 잘 봤어요. 신을 섬기고 영광 돌리고 그것은 옛날부터 모든 민족들, 모든 나라에 다 있었던 거예요. 그런데 그렇게 종교를 만드는 것은 얼마나 살기가 고달프고 힘들었으면 고생그만하고 죽어서는 좋은 나라 가고 싶어서 그런 상상의 나라를 꾸며내겠습니까? 성경에는 분명히 이야기 합니다. 어떤 한 사람도 인간을 살려내고 인간을 천국 보내는 그런 힘은 어둠의 권세 안에서는 성립될 수 없다, 있을 수 없다고 분명히 합니다. 살수가 없어요. 그래서 교회 재밌거든 교회 다니라고 하세요. 교회 다니고 지옥가나 안다니고 지옥가나 지옥가기는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마음껏 교회 다니라 하세요. 그래서 교회에서 장로도 하고 목사도 하고 집사도 하고 마음껏 하세요.

하지만 그것은 전혀 구원하고는 상관이 없는 그냥 노는 장소, 시간 때우는 것, 즐겁게 자기 관심 가져 달라고 요청하는 것 밖에 안돼요. 외로워서 다니고……. 외로워서 다닐 것 같으면 작은 교회 갈 필요 없죠. 어느 교회가면 덜 외롭습니까? 큰 교회. 그래서 큰 교회 짓는 거예요. 큰 교회에 사람들 모이는 곳입니다. 덜 외로우니까 거기다 돈도 생기고, 점심도 주고, 용돈도 주고 얼마나 좋아요. 그러나 거기에는 일체 골로새서에 나오는 내용이 있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골로새서에 분명히 어둠의 권세에서 빠져 나올 수가 없는데 그 사람은 모든 종교든 모든 윤리 도덕이던 다 어둠의 권세 아래서 움직이는 겁니다.

다음에 11절에 보면 “영광의 힘을 좇아”라는 말이 나오죠. 아까 이야기 했죠. ‘영광의 힘’ 그렇다면 우리로 하여금 영광의 힘 또는 빛,  만약에 이렇게 접근해 온다면 접근한 그 순간부터 이 전체가 무엇으로 변하느냐하면 ‘아하 이것이 어둠이었구나!’ 하는 것을 비로소 아는 겁니다. 어둠이었고 거기서 우리가 빠져나갈 수 없는 이유가 우리 자체가 어두움의 그러한 성격, 성질들로 꽉 차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물로 얼키설키 대충 허수아비를 만들었다 합시다. 보통 허수아비 안에는 뭐가 들어가지요? 짚도 들어가고 장롱에 안 입는 떨어진 옷들 내복들 끄집어내서 쑤셔 넣어서 짚으로 보풀게 해서 사람 형태를 갖추잖아요. 우리는 허수아비입니다. 우리 안에는 어두움의 권세가 구닥다리 권세가 꽉 들어 있어요.

그래서 군에서 나쁜 것을 시켜도 히죽히죽 웃으면서 따라 해요. 군에 안가면 절대로 그런 짓을 안 할 그러한 나쁜 짓도 군인이라는 이름 때문에 위에서 시키면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이 죽기가 무서워서 우리가 종노릇해요. 노예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옛날 히브리인들이 노예 생활 하는 거나 지금 우리가 노예 하는 거나 똑같은 겁니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했습니다. 섬기는 것은 누구의 몫이냐 하면 종이거든요. 섬김 받는 것은 신이 되고 사람들은 돈을 신이라고 여기고 우리는 돈의 노예가 되어 살아가고 돈 주면 좋아서 입이 벌어지고 하나님 주면 입을 삐죽거리면서 외면하고 꼭 동물원의 원숭이 키우듯이 어둠의 권세가 돈으로 재물로 그렇게 키우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 있을 때 세 가지 사료가 있었어요. 첫째 사료는 돌이 떡이 되는 것과 네가 뛰어내려 기적을 행하면 인기를 줄 것이라는 것과 세 번째 모든 세상권세 부럽지 아니하냐 하는 그 세 가지의 사료를 가지고 그동안 사람들을 가지고 길들여 왔다는 겁니다. 길들여 왔는데 그 길들임에서 자력으로 벗어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아무도 없어요. 자력으로 벗어나는 정도가 아니고 아예 거기서 벗어난다는 것조차도 발상을 안 하죠.

“목사님, 그러면 천국은요?” 사람이 만드는 천국은 지상생활의 연장입니다. 지상에서 자기가 길들여 왔던 그 맛 좋았던 초콜릿, 사탕 먹는 것이 그대로 천국가면 또 “사탕, 초콜릿?” 이렇게 하고 있다 이 말입니다. 세상에서 맛 들여진 사료, 돌이 떡덩이 되고 남한테 인기 얻고 세상권력을 얻고 지배하는 이러한 품성을 살아서도 하고 죽어서도 하겠다고 내민 그 죽음의 세계를 사람들은 극락이라고 하고 천국이라고 하는 겁니다.

여러분, 회심곡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불교에서 하는 회심곡, 그 회심곡에 보면 부모에게 효도하면 극락 간다는 내용인데 그 내용이 뭔가 하면 그냥 평소에 우리가 돈 없어서 못 즐기던 것 거기 가면 다 즐길 수 있는 곳이에요. 그것을 가지고 미끼상품이라고 하는 거예요. 롯데마트 튀김 닭 5천 원 해서 미끼 하듯이 극락을 미끼로 해서 부모한테 효도로 돌리겠다는 주제 노래가 회심곡이라는 겁니다. ‘살아생전 부모에게 효도하고 ……. 뚱땅 뚱땅…….’ 그거 들으면서 눈물 흘리고 난리에요. 그렇게 효도하면 나중에 보상받는다. 성과급이에요.

효도해서 천국 못갑니다. 그러면 목사님 효도하지 말라는 겁니까? 이렇게 묻는데, 여러분들이 효도하려고 해보세요. 그게 효도인가? 효도 아닙니다. 우리는 어둠의 권세에 있기 때문에 그 효도해도 노림수가 다 있어요. 세 가지의 미끼 상품, 돌을 떡이 되게 하고 인기 얻고 세상권세를 노리고 효도하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부모에게 효도한다고 형제 여러 명 되는 집 있지요? 내가 부모한테 지사충성했는데 그 부모가 효도한 나한테 보상을 안 하고 칭찬을 안 하고 농띠(날라리의 경상도 사투리)같은 다른 형제한테 갑자기 유산을 남기고 사랑해 보세요. 사람 돌아버립니다. 진짜 칼 들고 부모에게 달려듭니다.

성경에 나와요. 누가복음 15장, 탕자가 재산을 다 탕진하고 탕자니까 탕진하는 거예요. 탕진하고 빈털터리로 집으로 들어올 때 그 때, 누가 화내는 줄 아세요? 그동안 평소에 한 번도 아버지의 뜻을 심지어 밤마실도 안 나가고 옆에서 아버지께 보약 달여 가면서 아버지에게 충성했던 그 형이 완전히 화가 나서 돌아버렸습니다. 평생 아버지한테 있어도 나한테 소고기국밥을 한번 사준 적 있나? 가락지를 해줬나? 동대문시장가서 옷 한 벌 해준 적 있나? 아들은 아버지한테 이용당한 거예요. 사람이 아무리 욕해도 기분 나쁘지 않지만 이용당하면 그거는 못 참습니다.

문제는 사람이 탕자가 되고 싶어도 탕자가 될 그런 재주가 없다는 겁니다. 탕자가 되고 싶어요.……. 왜? 사람은 전부다 노림수가 있어서 맏이가 되고 싶어요. 맏이 되어서 내가 열심히 한, 성실한 자기 힘으로 내가 원하는 이 성실을 60배, 100배, 1,000배로 보상받는 그 천국에 가고자 합니다. 그러다보니 탕자를 거저 넣어주는 그 천국과 성실하게 일해서 가는 천국과 대비 점을 세워요. 충돌됩니다.

여러분 둘 중에 어느 것이 천국입니까? 탕자라는 것이 천국입니까? 성실하게 일한 사람이 천국입니까? 어느 쪽이 성경에서 천국입니까? 탕자가 가는 것이 천국이잖아요. 왜? 탕자한테는 뭐가 있습니까? 탕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거저 넣어주는 아버지의 긍휼함과 자비가 있지요. 그게 바로 무슨 힘이냐 하면 자기 힘이 아니고 자기 힘을 무시하고 무엇의 힘이냐? 이것이 바로 ‘언약의 힘’이다. 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실함을 안보십니까? 이 힘은 어디에 종속되기 때문에? 이것이 바로 어둠의 권세에 눌려있는 눌려있으면서 안 눌린척하면서 발버둥 치면서 기껏 하는 게 ‘신이시여! 이만큼 애쓰고 노력하니까 나의 이 기도와 나의 성의와 나의 겸손과 나의 낮춤을 받아주시옵소서!’ 하는 그런 모든 것이 자기 힘으로 여기에 포함이 되어 버립니다. 이 힘 말짱 소용없는 힘입니다.

청소년 여러분들, 저는 길에서 젊은 사람들 보면 걱정이 돼요. 저거 인생 어두워서 어떻게 사나, 걱정됩니다. 자기들은 좋아서 껴안고 “우리 언제 결혼할래?”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결혼해도 마찬가지고 어둠의 권세 없는 데가 없어요. 아까 이야기 했죠. 어둠의 권세가 무엇을 장악한다 했습니까?  우리 속에 있는 욕심을 자극하잖아요. 연애할 때는 좋죠. 마음 비웠죠. 결혼해 보세요. 이 욕심이 어디가나? 욕심이 어디 가겠어요? 그대로 내장 되어 있죠. 본격적으로 다 끄집어내고 쏟아내죠. “너 결혼하고 나한테 해준 게 뭐가 있나?”에서부터 시작해서 쏟아져 나와요.

그러니까 이 언약의 힘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을 사람취급하지 않고 완전히 너는 마귀의 종이고 네 속이 시커멓다……. 온 전체가 연탄보다 더 시커멓게 있다. 따라서 그 시커먼 것에 페인트칠한다고 해서 그것으로 천국에 간다는 것은 아예 기대하지 말라는 겁니다. 제가 오늘 강의에서 제일 강조하고 싶은 것은 아예 우리 자신에 대해서 기대를 하지 마세요. 우리 자신이 더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 더 훌륭하다는 기대를 아예 접으세요. 아예 치워버리세요.

일기도 쓰지 마시고 일기 써 봤자 점점 거룩해 지고 ……. 일기는 자기 타령이에요. “아이고 오늘도 이렇게 열심히 살았는데 하나님이 안 받쳐주네 하나님이 나를 안도와 주네. 뭐 어쩌라고 내 인생을 꼬이게 만들지, 되는 일이 없어…….”  자기 탄식과 자기 타령, 하소연, 짜증 그런 것이 일기라면 결국은 우리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안에 하나님에 대한 원망과 불평으로 정철되어 있다. 겹으로 중첩이 되어서 계속 기차의 침목처럼 내일되면 내일의 원망을 퍼붓고 모레 되면 원망 또 품고 ‘뭐, 감사~ 어디 감사가 나옵니까?’ 우리는 불평을 쭉 하게 되어 있어요.

억지로 감사하는 것도 감사하면 내 원하는 것 줄줄 알고 감사하는 노림수가 있어요. 돈 놓고 돈 먹기 하는 식으로 주님하고 화투칩니까? 그런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습니다. 그냥 탄식하면서 그렇게 살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여기 사도바울이 복음이라는 것을 가지고 나옵니다. 13절을 다시 보시겠습니다.

골 1:13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옛날 애굽에 있을 구약 때는 애굽과 약속의 땅 사이에 거기에 중간 지대가 있었죠. 중간 지대가 뭐였습니까? 광야라는 중간 지대가 있었죠. 그 중간 지대가 뭐하는 곳이냐 하면 애굽에 홍해바다가 있었어요. 홍해바다 건너 광야 거쳐서 드디어 약속의 땅에 들어가죠. 그러면 묻습니다. 여기에 애굽에서 나온 사람 대부분의 사람이 약속의 땅에 들어갔습니까? 못 들어갔습니까? 두 사람 빼놓고 못 들어갔죠. 두 사람의 경우는 특이한 경우이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약속의 땅에 못 들어갔죠.

그러면 약속의 땅에 애굽에서 봐서는 이 사람들이 구원받은 것처럼 보이는데 약속의 땅에 못 들어간 사람, 심지어 모세까지 못 들어간 것을 봐서 결국 약속의 땅에 못 들어 간 사람들은 어디서 죽습니까? 광야에서 죽지요. 그러면 약속의 땅에서 보게 되면 이 전체가 구원 안 됨, 또는 구원 못되었음이죠. 구원 안됐다 이 말입니다. 왜냐, 땅에서 땅으로 이동하니까 어떤 사람은 세월이 40년이 걸려 늙어 죽었다고 하는데 이 40년은 의도적으로 다 죽이기 위해서 시간을 소모하다보니까 40년이 걸렸어요. 그러니까 광야라고 하는 것은 사람들을 죽이기 위한 곳입니다.

이 말은 너희는 죽어도 약속의 땅에 못 들어간다는 거예요. 애굽에 있을 때는 곧 들어갈 것 같은데 광야 지나가니까 대부분 사람들, 그들은 결국은 죽음으로 자기 인생을 끝냈습니다. 이것은 어떤 인간도 약속의 땅이 없어가 아니라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인간도 약속의 땅에 못 들어간다는 겁니다. 들어갈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리고 못 들어가는 것이 마땅하다는 겁니다. 못 들어가고 안 들어가는 게 마땅하다, 왜? 그들은 하나님의 언약 때문에 죽어야하고 그 다음에 이 광야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어디로 갑니까? 약속의 땅에 들어가죠.

죽어야 할 자는 죽고, 그 뒤에 언약 때문에 태어난 자는 산다. 그렇다면 그 뒤에 광야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애굽에 살던 사람들입니까? 애굽에서 나와서 태어난 사람입니까? 애굽에서 나와서 태어난 아이들이죠. 그렇다면 이 언약에 의해서 죽어야 될 자는 애굽에 살던 사람은 죽어야 하고 애굽에서 태어나지 않은 사람은 그 자체로서 언약에 의해서 반드시 살자가 되지요.

그러면 언약은 무엇을 보여줍니까? 첫째 죽을 자는 죽이고 살릴 자는 살리는 이 두 가지 내용을 다 보여준 그것이 바로 천국의 존재의 의미가 되는 거예요. 천국이라는 것이 있어야 될 이유가 되는 겁니다. 우리는 천국이라는 것이 롯데월드인 것처럼 알지만 천국은 왜 인간은 못 들어가느냐, 하지만 왜 인간은 들어가야 하는가 하는 그런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기 위해서 마련된 공간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오늘 본문에‘사랑의 아들의 나라’라고 했어요.

그냥 아들의 나라가 아니고 앞에 뭐가 붙습니까? ‘사랑의 아들의 나라’이죠. 사랑의 나라, 사랑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사랑을 누가 먼저 받았죠?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누구보고 이야기하는 겁니까? 예수님 보고 했죠. 예수님은 살아서 약속에 땅에 들어간 것이 아니고 죽음도 경험하고 삶도 경험하고 죽음은 십자가이고 삶은 부활이고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죽음과 삶이 하나님 앞에서 무엇이 죽음이며 하나님 앞에서 무엇이 사는 것인가를 다 경험하고 약속의 땅에서 사랑의 아들로 옮겼죠.

그래서 생긴 나라가 천국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천국은 하나님 나라가 아니에요. 누구 나라입니까?  천국은 예수님의 나라입니다. 아들의 나라에요. 우리가 생각하는 신의 나라, 그것은 없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조작해서 지어낸 겁니다.

우리가 하늘나라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 믿는 사람은 다 간다는데 그런 나라는 없습니다. 하나님 믿는 나라 간다고 하면 그것을 지옥이라고 해요. 안돼요. 왜, 가지도 못할 인간이 쓸데없이 종교, 기독교를 만들어서 천국이 있다고 구라를 쳤느냐 말이죠. 그런 사람은 지옥가라 말이죠. 진짜 천국은 사랑의 아들의 나라에요.

그러니까 이것은 예수님과 같은 경험을 하지 않은 사람은 추호도 들어올 수 없는 나라, 그 나라가 사랑의 아들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고, 예수님의 나라입니다. 그 예수님의 나라를 천국이라고 합니다. 베드로가 이 사실을 모르고 예수님이 가니까 “내가 너를 잠시 떠나갈게”하니까 베드로가 하는 말이 “주여, 어디로 가시든지 제가 따라 가겠습니다.” “너 죽는데?” “아이고 죽이면 더 좋죠. 저도 목숨을 내놓고, 목숨을 바쳐서라도 주를 따라가겠습니다.”그때 예수님이 뭐라 했습니까? “장하다 이놈아, 같이 가자!” 이랬습니까? 간다했습니까? 못 간다 했습니까? 베드로보고 “너는 못 온다.” 하죠. 그 이야기를 지금 두 시간 동안 하는 겁니다.

우리는 못갑니다. 진짜 말리고 싶어요. 우리는 못가요. ‘아, 간사람 있잖아요? 엘리야, 모세 있는데 자꾸 못 간다 하느냐?’엘리야, 모세는 간 것이 아니고 데리고 가죠. 그 처소를 마련한 예수님이 와서 데리고 가는 거예요.  아까 얘기했죠. 예수의 힘입어……. 예수님이 그 사람을 찾아와서 데려가는 겁니다. 왜, 자기 나라이기 때문에 열쇠를 자기만 가지고 있어요. 열쇠는 무슨 열쇠? 다윗의 열쇠입니다. 다윗의 열쇠는 예수님만 가지고 있어요. 예수님만이 자기 나라에 넣어 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엘리야와 모세가 간 곳이 사랑의 아들의 나라에 간 거예요. 그래서 모세 엘리야가 변화산에서 누구 이야기 합니까? 예수님의 별세 이야기 한거예요. 예수님의 죽으심에 대해서 이야기 합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우리는 안 되는데 주님께서는 된다는 것을 이야기 하는 겁니다. ‘내가 하나님 섬깁니다.’그 이야기 한 것이 아니고 엘리야가 ‘하나님 저 아시죠? 하나님 섬기죠?’ 이것은 자기 힘, 자기 종교 힘 가지고 버티는 게 아닙니다. 반대입니다. 내가 하나님 섬기는 거 알지만 아무리 하나님 섬기고 선지자 노릇을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내 힘인데 그 내 힘으로는 추호도 사랑의 아들의 나라를 밀어붙일 수가 없고 못 들어간다는 겁니다.

열쇠, 키가 안 맞아요. 들어갈 수가 없어요. 모세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광야에서 죽었어요.  너무 독이 올라서 반석 두 번 쳐서 죽었어요. ‘사람들이 왜 말을 안 들어!’지휘봉을 치지 말고 가리켜야 하는데 탕탕 쳐서 못 들어갔어요. 그러면 모세를 못 들어가게 만드신 분은 누구입니까? ➀백성이다. ➁하나님이다. 몇 번입니까? 하나님이죠. 백성을 화나게 만든 것도 하나님이에요. 모세의 기능은 결국은 어떤 인간도 못 들어간다는 거예요.

그러면‘갈렙과 여호수아는 들어갔잖아요?’ 그 사람은 언약의 힘으로 약속의 땅에 들어갔어요. 물론 천국 말하는 게 아니고 약속의 땅, 땅에서 땅으로 그 기능을 더 해야 해요. 어떤 입장에서는 모세가 편해요. 일찍 죽었으니까 괜히 갈렙과 여호수아는 오래 살아서……. 약속의 땅 들어간다고 오래 살았는데……. 물론 장단점이 있겠지만, 개인적으로서는 상당히 번거롭지요

욥이 말했잖아요. ‘차라리 태어나자마자 죽는 자가 복되도다.’ 그런 말이 있어요. 욥에도 나오고 전도서에도 나와요. 차라리 엄마 자궁 속에 죽는 아이가 행복하다. 살아서 부귀영화 보는 것 보다 훨씬 낫다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해당 사항이 없어요. 이미 태어났기 때문에 소용없어요. 이미 취소도 안돼요. 그러면 우리는 “늙어서 가면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늙어서 가지도 못해요. 왜냐하면 육으로 난 것은 육이라고 했어요.

그러면 주님이 뭐라 하느냐 하면 사람은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늙어도 소용없다! 결국 다른 말로 해서 우리는 소용없어요. 우리는 하늘나라를 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신 거예요. 예수님이 와서 우리에게 알려주는 겁니다. “얘들아, 착각 좀 하지 마라! 너희가 어디를 간다고? 여화와를 믿어 어디를 간다고? 안 돼! 너희 번지수가 틀렸어! 누가 그런 거짓말을 유포했어? 내가 길이고 진리인데……. 분명히 하는데 베드로, 너도 죽어서도 못 와!” 그럼 베드로가 죽어서도 못가면 어떻게 할 수 있어요?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처소를 마련해 놓으면 주님이 다시 오셔서 베드로 데려가면 그 때 누구 힘으로? 베드로 자기 힘으로? NO! 누구 힘으로? 언약의 힘, 예수님의 힘으로 사랑의 아들의 나라에 가서 어린양 되시는 예수님을 영원토록 찬양하는 그 스케줄 외에 다른 스케줄은 하나님이 짜신 적이 없어요.

그러면 제가 이렇게 이야기 하면 여러분 생각하기를 ‘그 예수님 오시라고 우리가 요청하면 될 거 아닙니까?’이렇게 하겠죠? 우리가 요청하면 되는데 어둠의 권세가 예수님을 요청할 그 생각을 자꾸 자기 힘으로 빼돌려요. 예수님을 요청할 마음이 들지 않게 한다니까요.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예수님의 복음을 들어도 그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막습니다.

고후 4:3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고후 4:4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제가 처음에 고린도후서 4장 4절, 그 대목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사랑의 아들의 나라의 존재 자체를 누가 흐릿하게 만든다고요? 이 세상신이 그냥 놀고 있는 게 아닙니다. 이 세상신은 분주하게 지금 활동하고 있습니다. 마치 거대한 컴퓨터 같아요. 매트릭스에 나오는 거대한 컴퓨터 같아요. 거대한 컴퓨터가 있어서 인간의 모든 마음을 자극해서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하는데 누구에게만 그렇습니까? 망해야 될 사람에게 그렇습니다. 망해야 될 사람이 누구인지 아느냐 모르느냐는 우리가 복음을 전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저 아저씨, 영광의 복음…….” 이렇게 이야기 하면 “지금 무슨 소리 하고 있는 거야! 보이는 세상 이야기해라, 보이지 않는 이야기 하지 말자. 보이지 않는 것은 없는 거야!”대번 이렇게 나오죠. 그러면 그 사람이 그렇게 하고 싶어 그러는 게 아니라 그 사람 속에 이미 뭐가 장악되어 있습니까? 어둠의 권세가 있는 거예요. 그러면 나는 그 사람보고 이야기 한 것이 아니라 결국 그 사람 속에 있는 사탄보고 이야기 한 겁니다. “악마님, 저하고 같이 천국 갑시다!”악마가 “웃기지 마라. 나는 안 간다.” 하고 똑같은 거예요.

우리가 전도해야 그 속에 악마가 대화하는지 성령이 대화하는지 알게 아닙니까? 사람은 속에 허수아비 같아서 자기 것 없어요. 어둠의 권세가 조작된 것, 그런 것들이 가득 들어 있어요. 특히 저는 신학 교수들, 신학박사들 안에 어둠의 권세가 가득 들어 있어요. 복음 전하면 다 튕겨 나옵니다. 왜? 자기 힘이 들어 있거든요. 신학의 힘, 박사 학위의 힘……. 이런 힘들 외국 가서 고생하면서 따낸 학위들, 유학하면서 고생한 이야기들…….

큰 교회 장로님한테 복음 전해 보세요. 튕겨 나옵니다. 왜 그래요? 자기 힘이 들어 있어요. ‘여러분, 이 큰 교회 예배당 있고 교인 수 수천 명 되지만 이런 것 가지고 구원 못 받습니다. 오직 예수의 피입니다.’ 라고 이야기하는 목사가 있다면 그 사람은 그 사람에게 복음 이야기 하면 안 튕겨 나오겠죠. 그런데 그런 사람을 큰 교회에서 목사로서 그냥 두겠어요? 왜냐하면 거기서 여러분 이런 것 가지고 구원 못 받고 예수의 피로 받는다고 하면 그 교회에 지사충성하고 재산 바친 사람들이 뭐라고 항변하겠습니까? “그렇다면 저번 목사는 왜 돈 받치라고 왜 했습니까?” 그럼 목사가 “그거 다 사기입니다.” 하면 돈 바친 사람들이 좋아할까요? 싫어할까요? 싫어하죠. 그것 붙들고 주일날 왔는데 그런 공로를 바탕으로 해서 이 땅은 내가 바친 거고 내가 산거고, 저 피아노 내가 한거고 …….

자기가 한 것 그것이 유일한 기쁨이요, 보람이요, 그 교회가 곧 자기 자신이고, 자기의 자존심인데 그것을 구원받는데 소용없다고 해 보세요. 진짜 죽이고 싶죠. 그동안 십일조 낸 거 복리로 계산해 보세요. 돈이 얼마인데……. 먹을 거 안 먹으면서 과외비 아껴가면서 헌금했는데 그게 소용없다고 헌금해도 구원 못 받는다고 그 소리 들을 때 얼마나 화가 났을 거예요.

핑계는 전임 목사가 어떻고 하지만 사실은 그 속에 악마의 얼굴이 있어서 그 목사는 교인들보고 악마를 앉혀놓고 설교를 한 셈이 되죠. 예수의 피를 설교한 셈이 돼요. 그 정도입니다. 세상에 어둠의 권세가 있는 것을 어떻게 압니까? 하고 물으신다면 예수님이 어떻게 살아 왔는가 보세요. 예수님께서 귀신 쫓아내고 선한 일을 해도 결국 예수님은 살인강도보다 가치가 없었습니다.

살인강도는 왜 살려주는가 하면 자기하고 같은 사고방식이거든요. 그런데 예수님을 살려주면 사고방식이 다르잖아요. 베드로가 가로되 처소가 예비 되면 올게 라고 해요.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왜, 처음부터 올 때 처소가 마련 안 되었을까요? 왜 그 이야기를 나중에 이야기 하느냐 말입니다. 처음부터 베들레헴에서 태어날 때부터 ‘처소는 이미 마련되지 않았습니다. 죄송합니다. 나중에 할게요.’ 그런 소리 왜 안했어요?

메시야라면 처음부터 처소를 예비하고 와야 그게 메시야다운 것 아닙니까? ‘자, 여기 롯데마트에서 치킨 한 마리에 5천 원씩 팝니다.’5천원 주고 ‘주세요.’ 하니까 ‘다 팔렸습니다.’이게 무슨 장난이란 말이죠. 예수 믿으면 구원받는다 해놓고 ‘처소가 마련 안됐어, 미안해’이게 뭐냐, 사람 놀리는 것도 아니고 3년 동안 재산 바쳐서 예수 따라 다녔는데 ‘베드로야 미안하다. 처소가 아직 마련 안됐거든.’ 이게 뭡니까? 왜, 그런 이야기 하는 거예요? 우리가 그런 말하기 전에 처소가 마련되어서 쫙쫙 오면 넣어 줘야 하는데…….

왜, 처소가 마련되지 않았을까요?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생애는 죄인이 가야될 길을 가는 코스였습니다. 죄인이 가야 될 코스, 죄인, 제자 되는 우리들, 우리의 마지막 코스는 처소가 아니고 주님 앞에 저주 받아야 돼요. ‘아버지여, 아버지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버림받아야 됩니다. 지금 버림받아야 돼요. 예수님이 버림받았다는 말은 우리는 당연히 태어나기 전부터 버림받아도 너무나 당연하죠. 버림받아도 당연하니까 그냥 버림받읍시다.

제가 지금 말이 되는 이야기에요. 우리가 버림받을 수밖에 없다면 그냥 버림받으면 돼요. 구원해 달라는 것은 욕심이고, 버림받을 수밖에 없어요. 주님께서는 세례요한에게 세례 받고 죄인의 길을 가야됩니다. 십자가 지어야 돼요. 십자가 진다는 것은 예수님마저 죄의 권세 앞에서 열외가 안 됩니다.  남의 죄든 자기 죄든 아무튼 죄가 있으면 무조건 어둠의 권세가 심판받는 그 심판, 저주 받아야 됩니다. 

그림을 그리면 이렇습니다. 여기 어둠의 권세가 있죠. 이 어둠의 권세를 하나의 담요로 보고 이 담요 밑으로 누가 왔습니까? 예수님도 여기 계시고 12제자도 다 여기 있었죠. 그러면 어둠의 권세, 죄에 대해서 하나님이 행한 조치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뭐밖에 없습니까? 저주지요. 그 저주를 심지어 누가 받아요? 하나님의 아들마저 어둠의 권세에 있다는 이유 때문에 저주를 받아야 돼요. 여기서 예외 조항이 있으면 안돼요. 다 받아야 돼요.

예수님이 저주 받았다는 말은 어둠의 권세는 당연히 저주 받지요. 우리는 저주 받는 자의 진노의 자녀라고 해서 에베소서 2장 3절에 나오죠. 본질상 진노의 자녀인데 아닌 척 하지 말자는 거예요.

엡 2: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진노의 자녀의 마지막 결과는 뭡니까? 저주 받아야 되고 마땅히 예수님도 죽은 이 세상에서 우리는 죽어야 돼요. 왜냐 하면 어두움의 세력 자체가 저주 받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저주를 받는 가마솥 안에 있기 때문에 가마솥 안에 있는 감자탕도 저주 받는 겁니다. 그 수제비도 저주 받아야 돼요. 갑자기 수제비가 먹고 싶네요. ㅎ ㅎ

저주 받는 가운데 저주 받아야 됩니다. 그런데 저주가 끝났죠? 예수님의 공로로 성취되었습니다. 그 가운데서 주님께서 성령을 보냈죠. 중요 합니다. 성령을 보내니까 성령께서 누구를 먼저 구원했어요? 예수님을 사흘 만에 부활시켰죠? 예수님을 사흘 만에 부활시킨 이유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자는 남에게 성령 세례를 줄 수 있는 유일한 분이에요.

성령의 세례를 받는 다는 것은 마음을 분배 받는 거예요. 마음을 나누워 받는 거예요. 예수님의 마음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받게 되면 예수님의 마음이 뭡니까? 죄로 인하여 저주 받은 것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영생을 얻는 그 마음이잖아요. 그 마음을 받게 되면 예수님만이 빠져 나왔죠. 이것을 부활의 첫 열매라고 하죠. 12절을 봅시다.

골 1:12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기업의 부분을 얻게 하신’이라고 나왔죠. 그리고 10절에 보면 주께 합당한 열매를 맺게 한다 했죠. 어둠의 권세에 있는 사람은 몰라요. 주님은 알아요. 성령을 통해서 주께 합당한 열매를 맺고 우리가 하나님의 기업, 하나님의 상속을 공유하고 같이 분배받는 입장을 만들어 줄 수 있는 유일한 자격을 가진 자가 예수님 자신이죠.

골 1:10 주께 합당히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

그러면 예수님이 성령주면 주님의 영역에 오게 되면 어둠의 권세에 있는 이 베드로에게 찾아오게 돼요. 이것을 처소, 주님의 아들의 나라가 성립되면 처소가 마련된 거고, 처소가 마련됐다는 그 확정적인 증거가 성령을 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성령 받은 자라는 이미 처소가 마련되어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것을 우리는 이미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 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성령 안에서 이미 예수의 나라에 포함이 되고 말았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는 구속함을, 죄 용서함을 받았다 이 말입니다. 바로 예수님 안에서, 사랑의 아들 안에서 용서를 받았다 이 말입니다.

이 이야기를 여러분들은 이해를 잘하실 것 같은데 만약에 그 당시에 여호와를 섬겼던 유대인들에게 이 말이 먹혀 들어간다는 것은 상상을 못해요. 오늘날도 마찬가지이지만 이 이야기가 유대인들에게 왜 먹혀 들어가지 않았을까요? 유대인들에게 무엇이 어두움의 권세가 어떤 형식으로 그들에게 꽉 차 있었습니까? 자기 안에 자기의, 자기가 하나님을 안다는 자기의가 차 있다 이 말이죠. 그러면 그것이 자기의인지 겸손인지, 신앙심인지 아는 것은 뭘 보고 압니까? 옆 사람하고 비교하면 안돼요. 누구하고 비교해야 합니까? 예수님과 비교를 해서 과연 그들이 예수님 앞에 자기 의를 다 포기할 수 있느냐의 여부입니다. 여러분들은 다 포기 할 수 있습니까? 묻는 제가 말이 안 되네요. ㅎㅎ

그래서 저는 여러분들이 제발 마음대로 사시라고 말하고 싶어요. 마음대로 살아야 나는 주님 앞에 내세울게 없음을 느낄 것이 아닙니까? 착하게 살면 착함이 자기 힘으로 저축이 돼요. 어디 펀드 열일이 있습니까? 저축이 돼서 자기는 저축한지 몰랐는데 갑자기 집안에 어려움이 생기면 대번 이렇게 나옵니다. 그만큼 공들여서 주님을 섬겼는데 왜 이런 환란이 주어집니까? 하고 본인도 저축한지 몰랐는데 저축한 것을 들 먹여요. 이만큼 애섰는데, 결혼식을 기독교식으로 했는데 왜 이럽니까? 기독교식으로 한 게 뭔데요? 기독교식으로 하면 손님들 술 안 먹는 사람 있습니까? 술 먹는 사람 있지요. 밖에서 담배도 피우던데요.

세상에 사람이 남을 관섭할 수 없고, 나도 내 마음대로 못 되는 것이 내 마음 속에 들어 있는 것이 어둠의 권세의 힘이기 때문에 내 힘도 그 어두움의 권세를 못 이깁니다. 내 마음 갈 곳을 잃어……. 최백호입니다. ㅎㅎ 내 마음 갈 곳을 잃어 내 마음도 어떻게 주체를 못해요. 술 끊은 지 10년 만에 또 술 먹고 담배 끊은 지 20년 만에 담배 또 피웁니다. 이것은 내 마음 갈 곳을 잃어 어떻게 주체를 못해요.

성도의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죽을 때까지 내 마음 어떻게 못해요. 그런데 성도는 무엇을 아느냐 하면 내 마음을 어두운 권세에 이렇게 내 팽겨 치게 하신 그 능력이 곧 사랑의 아들의 나라에서 온 능력이라는 것을 압니다. 그것이 성령의 능력입니다. 성령의 능력이 되게 되면 나는 내 마음도 주체를 못하는 허접스러운 존재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내가 믿을 분 내가 기댈 분은 오직 주 예수님 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런 나를, 나로 하여금 허접스런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하는 그 자체가 바로 성령이 왔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성령 안에 뭐가 담겨 있는가 하면 이미 죄 사함이 포함 되어 있습니다. 성령 따로 받고 죄 사함 따로 받지 않습니다. 그것은 기존 신학에서 이야기 하는 겁니다. 성령 받으면 그 안에 이미 모든 세트로 다 있습니다. TV 사는데 TV 받치는 것도 새로 사야하고 뒤에 있는 나사 찾고……. 이게 아니에요. TV사면 이것이 다 한 세트로 다 옵니다.

여기 비타500 사면 비타500 뚜껑 값 따로 계산하고 병 따로 치고, 병 안에 내용물 따로 계산 하지 않고 다 되어 있잖아요. 성령이 오게 되면 다 종합돼서 한 덩어리고 그냥 오게 되어 있어요. 그 오신 것과 허접스런 우리와 날마다 대비가 되지요. ‘아~, 내 몸도 내 마음대로 안 되는구나!내 속에 욕심을 나를 자꾸 자극 하는구나! 주여,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죄인이요? 제가 죄인입니다.’ 이것을 깊숙하게 알게 되지요.

옆에 친구가 말하죠. “네가 죄 지은 게 뭐가 있다고? 너는 그렇게 착실한데 뭐가 죄인이야?” “아니야 나는 모든 의를 내 힘으로 구원을 이루려고 하는 그런 본성이 아직도 내 속에서 마그마처럼 유황불처럼 들 끊고 계속해서 내 힘으로 복 받은 거야, 내 힘으로 사는 거야” 하면서 자꾸 나의 힘, 나의 의지, 나의 감정, 나의 이성, 나의 똑똑함…….

이런 것들이 어떻게 처리가 안돼요. 왜? 우리 자체가 쓰레기통이니까. 쓰레기 처리해 봤자 다 결국 우리한테 처리 되니까 결국 우리가 주님 앞에 나올 때는 그냥 80세 같으면 80년 동안 살았던 그 쓰레기 분리수거한 쓰레기, 분리수거도 안했어요. 그냥 막 음식쓰레기부터 다 집어넣었어요. 쓰레기 봉지를 그냥 그대로 놔둔 겁니다. 염치불구하고…….

15절 봅시다.

골 1:15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끝에 보면 창조물보다, 피조물보다 다음에 두자 있고 나신 자죠. 뭡니까? 먼저 나신 자죠. 먼저 나신자라는 것은 엄마와 아빠가 대화 할 때 애가 한 네 살 다섯 살 때 엄마 아빠 사이에 끼어서 “아빠 무슨 이야기인데?” “엄마 무슨 이야기인데?” 애들은 엄마 아빠 사이에 끼어들어서 자꾸 다 들으려고 해요. 그러면 “너는 네 방에 들어가 자야지?”아빠는 엄마한테 “애 자기 방에 보내고 그때 이야기 합시다.”하고 말합니다. 애를 보내고 엄마, 아빠가 이야기 하죠. 왜 이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먼저 나신자이기 때문에 애들은 끼면 안돼요. 먼저 나신 자이기 때문에…….

그러면 망해야 할 자와 구원될 자를 누가 결정합니까? 먼저 나신 자와 하나님 둘 사이만 의논 될 사항이지 다른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먼저 나신 예수님과 하나님 사이에 계획된 계획서가 16절에 나와 있습니다.

골 1:16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골 1:17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그를 위하여 그러니까 만물이 태어나기 전에 이미 있기도 전에 만물보다 먼저 있었던 것이 뭡니까? 바로 먼저 나신분과 하나님이 먼저 계셨죠. 먼저 계셨다는 것은 그냥 먼저 계심으로 끝난 것이 아니고 이미 계획서가 나와서 끝나버렸어요. 그 계획서의 내용은 모든 만물에 있어서 예수님의 뜻이 반영되지 않는 피조물은 있다? 없다? 없는 거예요. 악마든 사탄이던 뱀이던 지옥이던 어떤 것도 누구를 경위해서 한다? 예수님의 주되심을 사랑의 아들의 주인공이 예수님 되심을 장차 예수님께서 사랑의 아들의 주인공이라는 것을 설정을 해 놓고 이것을 주라 하는데 예수님이 주되심을 위하여 모든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보이는 것은 우리 인간들이고 보이지 않는 것은 천사들이죠. 보이지 않는 천사들 중에 뭐가 있습니까? 악마도 있지요. 악마가 천사이니까…….

악마들 인간들 모든 것은 바로 예수그리스도가 진짜 마지막 최종 목적됨을 보여 주기 위해서 그동안 분주하게 시행착오와 갖가지의 조합들, 갖가지 일들이 무수한 역사와 무수한 변동들이 있어서 변화들이 발생되도록 이미 사전에 먼저 나신 자와 하나님 사이에 이야기가 끝난 겁니다.

아까 올 때 비가 오데요. 비오는 거 하나까지……. “엄마, 비는 왜와?”너무 훌륭한 엄마는 “다 예수님을 위해서” “엄마, 논리가 너무 비약됐어. 중간에 뭐 걸치는 거 없어? 이해가 안 돼.” “너도 커서 어른 되면 알아. 성령 오시면 알아. 다 예수님을 위해서…….” “그게 무슨 뜻인지 몰라” 그러면 상세하게 알려주죠. 비가 왜 오느냐 물을 때 물음 자체 속에 뭐가 포함 되어 있습니까? ‘엄마, 저 오는 비는 나에게 어떤 이득을 갖다 줘?’거기에 예수님을 위해서라는 말을 듣기 전에 이미 인간은 누구를 위해서? 오직 모든 변화는 비오는 거, 눈 오는 거 바람 부는 거 다 나에게 이익일까? 아니면 오늘 나에게 이런 사태가 손해일까를 먼저 생각 하지요.

아까 심집사님이 운전하면서 가는 곳 마다 막힌다는 거예요. 운전하는데 힘들었었거든요. 그런데 가는데 마다 접촉사고 나서 막히니까 그런데 따지고 보면 다 누구를 위하여? 예수님을 위해서인데 그것을 집사님이 모를 리가 있습니까? 알지요. 알지만 본인이 힘들다는 말을 은연중에 쫙쫙 빠졌으면……. 내 앞에 교통순경이 있어서 가면 무조건 파랑불이에요. 훤하게 트였으면 좋겠다는 신체적인 본심이 있죠. 여러분 버스 정거장에서 기다릴 때, 제일 기대하는 게 뭡니까? 딱 버스정거장에 서자마자 원하는 버스가 오는 것을 기대하고 가는데 왔는데 막 떠났을 때 그것도 30분 만에 한 대씩 올 때 그것도 바람 불고 비바람 몰아칠 때 ‘주여, 어제 기도를 안 해서 이런 수모를 주느냐?’ 주님께서는 ‘원래 창세전에 이미 계획 되었어. 너는 오자마자 차가 떠나게 되어있어.’ 버스도 피조물입니다. 

그런 일을 통해서 우리는 평소에 얼마나 내 편의 위주로 살아가면서 자기는 자기위주로 안 살아온 것처럼, 주님을 위해서 산 것처럼 그렇게 얼마나 어쭙잖게 행실을 해 왔습니까?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모든 만사가 주님의 뜻대로 된다는 것을 주님만이 알고 있는 사실인데 성령을 통해서 이 마음을 저희에게 주시옵소서. 그래서 범사에 감사해서 항상 기뻐하면서 주님의 사랑의 아들에게 이미 앉히게 하신 예수님의 피의 공로를 마음껏 자랑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