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oul101210b 흑암의 권세
지난시간에 한 것을 잠시 보게 되면 사람은 보이지 않는 것은 아예 없다고 생각하고 그 대신 보이는 세상에서 그냥 자기의 의견 나누고 소통하고 서로 돕고 서로 살피고 그게 사는 거다, 그게 전부라고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골로새서에 보면 보이지 않는 힘, 특히 보이지 않는 어둠의 권세라는 용어가 나오는 것을 봐서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을 한마디로 설명을 해 놓으면 그 다음에 이 세상 말고 보이지 않는 세상을 설명할 수가 있다는 쪽으로 지금 사도바울이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무슨 말이냐 하면 우리가 보고 있는 이 세상에 대해서 부정하거나 외면할 필요는 없는데 이 전체가 마치 옛날 애굽나라처럼 애굽나라 있을 때는 애굽나라에서 빠져나오는 것이 있을 수 없듯이 이 세상사는 사람이 이 세상을 부정하거나 이 세상을 버리고 나온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거예요. 그렇게 이 세상을 못 빠져 나오면 그냥 사시면 된다 이 말입니다.
그냥 이 세상 충실하게 살면 돼요. 그러면 하늘나라는? 이 세상에서 생각하는 하늘나라는 이 세상 살다가 너무 힘드니까 꾸며낸 거예요. 거짓말이에요. 다른 말로 이야기하면 조작이에요. 조작된 천국이에요. 조작된 천국이라는 것은 내가 들어가는 곳이거든요. 그런데 원래 성경에 나오는 어둠의 권세라는 것은 그 중에 단 한명이라도 이 세상에서 어둠의 권세가 얼마나 센지 어떤 인간도 여기서 빠져나와서 천국 간다는 것은 전부다 거짓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종교자체가 거짓말이에요. 아편이고, 마약이고 거짓말입니다.
여러분, 마르코스 이야기 했지만 그것 잘 봤어요. 신을 섬기고 영광 돌리고 그것은 옛날부터 모든 민족들, 모든 나라에 다 있었던 거예요. 그런데 그렇게 종교를 만드는 것은 얼마나 살기가 고달프고 힘들었으면 고생그만하고 죽어서는 좋은 나라 가고 싶어서 그런 상상의 나라를 꾸며내겠습니까? 성경에는 분명히 이야기 합니다. 어떤 한 사람도 인간을 살려내고 인간을 천국 보내는 그런 힘은 어둠의 권세 안에서는 성립될 수 없다, 있을 수 없다고 분명히 합니다. 살수가 없어요. 그래서 교회 재밌거든 교회 다니라고 하세요. 교회 다니고 지옥가나 안다니고 지옥가나 지옥가기는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마음껏 교회 다니라 하세요. 그래서 교회에서 장로도 하고 목사도 하고 집사도 하고 마음껏 하세요.
하지만 그것은 전혀 구원하고는 상관이 없는 그냥 노는 장소, 시간 때우는 것, 즐겁게 자기 관심 가져 달라고 요청하는 것 밖에 안돼요. 외로워서 다니고……. 외로워서 다닐 것 같으면 작은 교회 갈 필요 없죠. 어느 교회가면 덜 외롭습니까? 큰 교회. 그래서 큰 교회 짓는 거예요. 큰 교회에 사람들 모이는 곳입니다. 덜 외로우니까 거기다 돈도 생기고, 점심도 주고, 용돈도 주고 얼마나 좋아요. 그러나 거기에는 일체 골로새서에 나오는 내용이 있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골로새서에 분명히 어둠의 권세에서 빠져 나올 수가 없는데 그 사람은 모든 종교든 모든 윤리 도덕이던 다 어둠의 권세 아래서 움직이는 겁니다.
다음에 11절에 보면 “영광의 힘을 좇아”라는 말이 나오죠. 아까 이야기 했죠. ‘영광의 힘’ 그렇다면 우리로 하여금 영광의 힘 또는 빛, 만약에 이렇게 접근해 온다면 접근한 그 순간부터 이 전체가 무엇으로 변하느냐하면 ‘아하 이것이 어둠이었구나!’ 하는 것을 비로소 아는 겁니다. 어둠이었고 거기서 우리가 빠져나갈 수 없는 이유가 우리 자체가 어두움의 그러한 성격, 성질들로 꽉 차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물로 얼키설키 대충 허수아비를 만들었다 합시다. 보통 허수아비 안에는 뭐가 들어가지요? 짚도 들어가고 장롱에 안 입는 떨어진 옷들 내복들 끄집어내서 쑤셔 넣어서 짚으로 보풀게 해서 사람 형태를 갖추잖아요. 우리는 허수아비입니다. 우리 안에는 어두움의 권세가 구닥다리 권세가 꽉 들어 있어요.
그래서 군에서 나쁜 것을 시켜도 히죽히죽 웃으면서 따라 해요. 군에 안가면 절대로 그런 짓을 안 할 그러한 나쁜 짓도 군인이라는 이름 때문에 위에서 시키면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이 죽기가 무서워서 우리가 종노릇해요. 노예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옛날 히브리인들이 노예 생활 하는 거나 지금 우리가 노예 하는 거나 똑같은 겁니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했습니다. 섬기는 것은 누구의 몫이냐 하면 종이거든요. 섬김 받는 것은 신이 되고 사람들은 돈을 신이라고 여기고 우리는 돈의 노예가 되어 살아가고 돈 주면 좋아서 입이 벌어지고 하나님 주면 입을 삐죽거리면서 외면하고 꼭 동물원의 원숭이 키우듯이 어둠의 권세가 돈으로 재물로 그렇게 키우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 있을 때 세 가지 사료가 있었어요. 첫째 사료는 돌이 떡이 되는 것과 네가 뛰어내려 기적을 행하면 인기를 줄 것이라는 것과 세 번째 모든 세상권세 부럽지 아니하냐 하는 그 세 가지의 사료를 가지고 그동안 사람들을 가지고 길들여 왔다는 겁니다. 길들여 왔는데 그 길들임에서 자력으로 벗어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아무도 없어요. 자력으로 벗어나는 정도가 아니고 아예 거기서 벗어난다는 것조차도 발상을 안 하죠.
“목사님, 그러면 천국은요?” 사람이 만드는 천국은 지상생활의 연장입니다. 지상에서 자기가 길들여 왔던 그 맛 좋았던 초콜릿, 사탕 먹는 것이 그대로 천국가면 또 “사탕, 초콜릿?” 이렇게 하고 있다 이 말입니다. 세상에서 맛 들여진 사료, 돌이 떡덩이 되고 남한테 인기 얻고 세상권력을 얻고 지배하는 이러한 품성을 살아서도 하고 죽어서도 하겠다고 내민 그 죽음의 세계를 사람들은 극락이라고 하고 천국이라고 하는 겁니다.
여러분, 회심곡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불교에서 하는 회심곡, 그 회심곡에 보면 부모에게 효도하면 극락 간다는 내용인데 그 내용이 뭔가 하면 그냥 평소에 우리가 돈 없어서 못 즐기던 것 거기 가면 다 즐길 수 있는 곳이에요. 그것을 가지고 미끼상품이라고 하는 거예요. 롯데마트 튀김 닭 5천 원 해서 미끼 하듯이 극락을 미끼로 해서 부모한테 효도로 돌리겠다는 주제 노래가 회심곡이라는 겁니다. ‘살아생전 부모에게 효도하고 ……. 뚱땅 뚱땅…….’ 그거 들으면서 눈물 흘리고 난리에요. 그렇게 효도하면 나중에 보상받는다. 성과급이에요.
효도해서 천국 못갑니다. 그러면 목사님 효도하지 말라는 겁니까? 이렇게 묻는데, 여러분들이 효도하려고 해보세요. 그게 효도인가? 효도 아닙니다. 우리는 어둠의 권세에 있기 때문에 그 효도해도 노림수가 다 있어요. 세 가지의 미끼 상품, 돌을 떡이 되게 하고 인기 얻고 세상권세를 노리고 효도하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부모에게 효도한다고 형제 여러 명 되는 집 있지요? 내가 부모한테 지사충성했는데 그 부모가 효도한 나한테 보상을 안 하고 칭찬을 안 하고 농띠(날라리의 경상도 사투리)같은 다른 형제한테 갑자기 유산을 남기고 사랑해 보세요. 사람 돌아버립니다. 진짜 칼 들고 부모에게 달려듭니다.
성경에 나와요. 누가복음 15장, 탕자가 재산을 다 탕진하고 탕자니까 탕진하는 거예요. 탕진하고 빈털터리로 집으로 들어올 때 그 때, 누가 화내는 줄 아세요? 그동안 평소에 한 번도 아버지의 뜻을 심지어 밤마실도 안 나가고 옆에서 아버지께 보약 달여 가면서 아버지에게 충성했던 그 형이 완전히 화가 나서 돌아버렸습니다. 평생 아버지한테 있어도 나한테 소고기국밥을 한번 사준 적 있나? 가락지를 해줬나? 동대문시장가서 옷 한 벌 해준 적 있나? 아들은 아버지한테 이용당한 거예요. 사람이 아무리 욕해도 기분 나쁘지 않지만 이용당하면 그거는 못 참습니다.
문제는 사람이 탕자가 되고 싶어도 탕자가 될 그런 재주가 없다는 겁니다. 탕자가 되고 싶어요.……. 왜? 사람은 전부다 노림수가 있어서 맏이가 되고 싶어요. 맏이 되어서 내가 열심히 한, 성실한 자기 힘으로 내가 원하는 이 성실을 60배, 100배, 1,000배로 보상받는 그 천국에 가고자 합니다. 그러다보니 탕자를 거저 넣어주는 그 천국과 성실하게 일해서 가는 천국과 대비 점을 세워요. 충돌됩니다.
여러분 둘 중에 어느 것이 천국입니까? 탕자라는 것이 천국입니까? 성실하게 일한 사람이 천국입니까? 어느 쪽이 성경에서 천국입니까? 탕자가 가는 것이 천국이잖아요. 왜? 탕자한테는 뭐가 있습니까? 탕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거저 넣어주는 아버지의 긍휼함과 자비가 있지요. 그게 바로 무슨 힘이냐 하면 자기 힘이 아니고 자기 힘을 무시하고 무엇의 힘이냐? 이것이 바로 ‘언약의 힘’이다. 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실함을 안보십니까? 이 힘은 어디에 종속되기 때문에? 이것이 바로 어둠의 권세에 눌려있는 눌려있으면서 안 눌린척하면서 발버둥 치면서 기껏 하는 게 ‘신이시여! 이만큼 애쓰고 노력하니까 나의 이 기도와 나의 성의와 나의 겸손과 나의 낮춤을 받아주시옵소서!’ 하는 그런 모든 것이 자기 힘으로 여기에 포함이 되어 버립니다. 이 힘 말짱 소용없는 힘입니다.
청소년 여러분들, 저는 길에서 젊은 사람들 보면 걱정이 돼요. 저거 인생 어두워서 어떻게 사나, 걱정됩니다. 자기들은 좋아서 껴안고 “우리 언제 결혼할래?”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결혼해도 마찬가지고 어둠의 권세 없는 데가 없어요. 아까 이야기 했죠. 어둠의 권세가 무엇을 장악한다 했습니까? 우리 속에 있는 욕심을 자극하잖아요. 연애할 때는 좋죠. 마음 비웠죠. 결혼해 보세요. 이 욕심이 어디가나? 욕심이 어디 가겠어요? 그대로 내장 되어 있죠. 본격적으로 다 끄집어내고 쏟아내죠. “너 결혼하고 나한테 해준 게 뭐가 있나?”에서부터 시작해서 쏟아져 나와요.
그러니까 이 언약의 힘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을 사람취급하지 않고 완전히 너는 마귀의 종이고 네 속이 시커멓다……. 온 전체가 연탄보다 더 시커멓게 있다. 따라서 그 시커먼 것에 페인트칠한다고 해서 그것으로 천국에 간다는 것은 아예 기대하지 말라는 겁니다. 제가 오늘 강의에서 제일 강조하고 싶은 것은 아예 우리 자신에 대해서 기대를 하지 마세요. 우리 자신이 더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 더 훌륭하다는 기대를 아예 접으세요. 아예 치워버리세요.
일기도 쓰지 마시고 일기 써 봤자 점점 거룩해 지고 ……. 일기는 자기 타령이에요. “아이고 오늘도 이렇게 열심히 살았는데 하나님이 안 받쳐주네 하나님이 나를 안도와 주네. 뭐 어쩌라고 내 인생을 꼬이게 만들지, 되는 일이 없어…….” 자기 탄식과 자기 타령, 하소연, 짜증 그런 것이 일기라면 결국은 우리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안에 하나님에 대한 원망과 불평으로 정철되어 있다. 겹으로 중첩이 되어서 계속 기차의 침목처럼 내일되면 내일의 원망을 퍼붓고 모레 되면 원망 또 품고 ‘뭐, 감사~ 어디 감사가 나옵니까?’ 우리는 불평을 쭉 하게 되어 있어요.
억지로 감사하는 것도 감사하면 내 원하는 것 줄줄 알고 감사하는 노림수가 있어요. 돈 놓고 돈 먹기 하는 식으로 주님하고 화투칩니까? 그런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습니다. 그냥 탄식하면서 그렇게 살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여기 사도바울이 복음이라는 것을 가지고 나옵니다. 13절을 다시 보시겠습니다.
골 1:13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옛날 애굽에 있을 구약 때는 애굽과 약속의 땅 사이에 거기에 중간 지대가 있었죠. 중간 지대가 뭐였습니까? 광야라는 중간 지대가 있었죠. 그 중간 지대가 뭐하는 곳이냐 하면 애굽에 홍해바다가 있었어요. 홍해바다 건너 광야 거쳐서 드디어 약속의 땅에 들어가죠. 그러면 묻습니다. 여기에 애굽에서 나온 사람 대부분의 사람이 약속의 땅에 들어갔습니까? 못 들어갔습니까? 두 사람 빼놓고 못 들어갔죠. 두 사람의 경우는 특이한 경우이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약속의 땅에 못 들어갔죠.
그러면 약속의 땅에 애굽에서 봐서는 이 사람들이 구원받은 것처럼 보이는데 약속의 땅에 못 들어간 사람, 심지어 모세까지 못 들어간 것을 봐서 결국 약속의 땅에 못 들어 간 사람들은 어디서 죽습니까? 광야에서 죽지요. 그러면 약속의 땅에서 보게 되면 이 전체가 구원 안 됨, 또는 구원 못되었음이죠. 구원 안됐다 이 말입니다. 왜냐, 땅에서 땅으로 이동하니까 어떤 사람은 세월이 40년이 걸려 늙어 죽었다고 하는데 이 40년은 의도적으로 다 죽이기 위해서 시간을 소모하다보니까 40년이 걸렸어요. 그러니까 광야라고 하는 것은 사람들을 죽이기 위한 곳입니다.
이 말은 너희는 죽어도 약속의 땅에 못 들어간다는 거예요. 애굽에 있을 때는 곧 들어갈 것 같은데 광야 지나가니까 대부분 사람들, 그들은 결국은 죽음으로 자기 인생을 끝냈습니다. 이것은 어떤 인간도 약속의 땅이 없어가 아니라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인간도 약속의 땅에 못 들어간다는 겁니다. 들어갈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리고 못 들어가는 것이 마땅하다는 겁니다. 못 들어가고 안 들어가는 게 마땅하다, 왜? 그들은 하나님의 언약 때문에 죽어야하고 그 다음에 이 광야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어디로 갑니까? 약속의 땅에 들어가죠.
죽어야 할 자는 죽고, 그 뒤에 언약 때문에 태어난 자는 산다. 그렇다면 그 뒤에 광야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애굽에 살던 사람들입니까? 애굽에서 나와서 태어난 사람입니까? 애굽에서 나와서 태어난 아이들이죠. 그렇다면 이 언약에 의해서 죽어야 될 자는 애굽에 살던 사람은 죽어야 하고 애굽에서 태어나지 않은 사람은 그 자체로서 언약에 의해서 반드시 살자가 되지요.
그러면 언약은 무엇을 보여줍니까? 첫째 죽을 자는 죽이고 살릴 자는 살리는 이 두 가지 내용을 다 보여준 그것이 바로 천국의 존재의 의미가 되는 거예요. 천국이라는 것이 있어야 될 이유가 되는 겁니다. 우리는 천국이라는 것이 롯데월드인 것처럼 알지만 천국은 왜 인간은 못 들어가느냐, 하지만 왜 인간은 들어가야 하는가 하는 그런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기 위해서 마련된 공간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오늘 본문에‘사랑의 아들의 나라’라고 했어요.
그냥 아들의 나라가 아니고 앞에 뭐가 붙습니까? ‘사랑의 아들의 나라’이죠. 사랑의 나라, 사랑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사랑을 누가 먼저 받았죠?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누구보고 이야기하는 겁니까? 예수님 보고 했죠. 예수님은 살아서 약속에 땅에 들어간 것이 아니고 죽음도 경험하고 삶도 경험하고 죽음은 십자가이고 삶은 부활이고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죽음과 삶이 하나님 앞에서 무엇이 죽음이며 하나님 앞에서 무엇이 사는 것인가를 다 경험하고 약속의 땅에서 사랑의 아들로 옮겼죠.
그래서 생긴 나라가 천국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천국은 하나님 나라가 아니에요. 누구 나라입니까? 천국은 예수님의 나라입니다. 아들의 나라에요. 우리가 생각하는 신의 나라, 그것은 없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조작해서 지어낸 겁니다.
우리가 하늘나라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 믿는 사람은 다 간다는데 그런 나라는 없습니다. 하나님 믿는 나라 간다고 하면 그것을 지옥이라고 해요. 안돼요. 왜, 가지도 못할 인간이 쓸데없이 종교, 기독교를 만들어서 천국이 있다고 구라를 쳤느냐 말이죠. 그런 사람은 지옥가라 말이죠. 진짜 천국은 사랑의 아들의 나라에요.
그러니까 이것은 예수님과 같은 경험을 하지 않은 사람은 추호도 들어올 수 없는 나라, 그 나라가 사랑의 아들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고, 예수님의 나라입니다. 그 예수님의 나라를 천국이라고 합니다. 베드로가 이 사실을 모르고 예수님이 가니까 “내가 너를 잠시 떠나갈게”하니까 베드로가 하는 말이 “주여, 어디로 가시든지 제가 따라 가겠습니다.” “너 죽는데?” “아이고 죽이면 더 좋죠. 저도 목숨을 내놓고, 목숨을 바쳐서라도 주를 따라가겠습니다.”그때 예수님이 뭐라 했습니까? “장하다 이놈아, 같이 가자!” 이랬습니까? 간다했습니까? 못 간다 했습니까? 베드로보고 “너는 못 온다.” 하죠. 그 이야기를 지금 두 시간 동안 하는 겁니다.
우리는 못갑니다. 진짜 말리고 싶어요. 우리는 못가요. ‘아, 간사람 있잖아요? 엘리야, 모세 있는데 자꾸 못 간다 하느냐?’엘리야, 모세는 간 것이 아니고 데리고 가죠. 그 처소를 마련한 예수님이 와서 데리고 가는 거예요. 아까 얘기했죠. 예수의 힘입어……. 예수님이 그 사람을 찾아와서 데려가는 겁니다. 왜, 자기 나라이기 때문에 열쇠를 자기만 가지고 있어요. 열쇠는 무슨 열쇠? 다윗의 열쇠입니다. 다윗의 열쇠는 예수님만 가지고 있어요. 예수님만이 자기 나라에 넣어 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엘리야와 모세가 간 곳이 사랑의 아들의 나라에 간 거예요. 그래서 모세 엘리야가 변화산에서 누구 이야기 합니까? 예수님의 별세 이야기 한거예요. 예수님의 죽으심에 대해서 이야기 합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우리는 안 되는데 주님께서는 된다는 것을 이야기 하는 겁니다. ‘내가 하나님 섬깁니다.’그 이야기 한 것이 아니고 엘리야가 ‘하나님 저 아시죠? 하나님 섬기죠?’ 이것은 자기 힘, 자기 종교 힘 가지고 버티는 게 아닙니다. 반대입니다. 내가 하나님 섬기는 거 알지만 아무리 하나님 섬기고 선지자 노릇을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내 힘인데 그 내 힘으로는 추호도 사랑의 아들의 나라를 밀어붙일 수가 없고 못 들어간다는 겁니다.
열쇠, 키가 안 맞아요. 들어갈 수가 없어요. 모세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광야에서 죽었어요. 너무 독이 올라서 반석 두 번 쳐서 죽었어요. ‘사람들이 왜 말을 안 들어!’지휘봉을 치지 말고 가리켜야 하는데 탕탕 쳐서 못 들어갔어요. 그러면 모세를 못 들어가게 만드신 분은 누구입니까? ➀백성이다. ➁하나님이다. 몇 번입니까? 하나님이죠. 백성을 화나게 만든 것도 하나님이에요. 모세의 기능은 결국은 어떤 인간도 못 들어간다는 거예요.
그러면‘갈렙과 여호수아는 들어갔잖아요?’ 그 사람은 언약의 힘으로 약속의 땅에 들어갔어요. 물론 천국 말하는 게 아니고 약속의 땅, 땅에서 땅으로 그 기능을 더 해야 해요. 어떤 입장에서는 모세가 편해요. 일찍 죽었으니까 괜히 갈렙과 여호수아는 오래 살아서……. 약속의 땅 들어간다고 오래 살았는데……. 물론 장단점이 있겠지만, 개인적으로서는 상당히 번거롭지요.
욥이 말했잖아요. ‘차라리 태어나자마자 죽는 자가 복되도다.’ 그런 말이 있어요. 욥에도 나오고 전도서에도 나와요. 차라리 엄마 자궁 속에 죽는 아이가 행복하다. 살아서 부귀영화 보는 것 보다 훨씬 낫다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해당 사항이 없어요. 이미 태어났기 때문에 소용없어요. 이미 취소도 안돼요. 그러면 우리는 “늙어서 가면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늙어서 가지도 못해요. 왜냐하면 육으로 난 것은 육이라고 했어요.
그러면 주님이 뭐라 하느냐 하면 사람은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늙어도 소용없다! 결국 다른 말로 해서 우리는 소용없어요. 우리는 하늘나라를 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신 거예요. 예수님이 와서 우리에게 알려주는 겁니다. “얘들아, 착각 좀 하지 마라! 너희가 어디를 간다고? 여화와를 믿어 어디를 간다고? 안 돼! 너희 번지수가 틀렸어! 누가 그런 거짓말을 유포했어? 내가 길이고 진리인데……. 분명히 하는데 베드로, 너도 죽어서도 못 와!” 그럼 베드로가 죽어서도 못가면 어떻게 할 수 있어요?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처소를 마련해 놓으면 주님이 다시 오셔서 베드로 데려가면 그 때 누구 힘으로? 베드로 자기 힘으로? NO! 누구 힘으로? 언약의 힘, 예수님의 힘으로 사랑의 아들의 나라에 가서 어린양 되시는 예수님을 영원토록 찬양하는 그 스케줄 외에 다른 스케줄은 하나님이 짜신 적이 없어요.
그러면 제가 이렇게 이야기 하면 여러분 생각하기를 ‘그 예수님 오시라고 우리가 요청하면 될 거 아닙니까?’이렇게 하겠죠? 우리가 요청하면 되는데 어둠의 권세가 예수님을 요청할 그 생각을 자꾸 자기 힘으로 빼돌려요. 예수님을 요청할 마음이 들지 않게 한다니까요.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예수님의 복음을 들어도 그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막습니다.
고후 4:3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고후 4:4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제가 처음에 고린도후서 4장 4절, 그 대목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사랑의 아들의 나라의 존재 자체를 누가 흐릿하게 만든다고요? 이 세상신이 그냥 놀고 있는 게 아닙니다. 이 세상신은 분주하게 지금 활동하고 있습니다. 마치 거대한 컴퓨터 같아요. 매트릭스에 나오는 거대한 컴퓨터 같아요. 거대한 컴퓨터가 있어서 인간의 모든 마음을 자극해서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하는데 누구에게만 그렇습니까? 망해야 될 사람에게 그렇습니다. 망해야 될 사람이 누구인지 아느냐 모르느냐는 우리가 복음을 전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저 아저씨, 영광의 복음…….” 이렇게 이야기 하면 “지금 무슨 소리 하고 있는 거야! 보이는 세상 이야기해라, 보이지 않는 이야기 하지 말자. 보이지 않는 것은 없는 거야!”대번 이렇게 나오죠. 그러면 그 사람이 그렇게 하고 싶어 그러는 게 아니라 그 사람 속에 이미 뭐가 장악되어 있습니까? 어둠의 권세가 있는 거예요. 그러면 나는 그 사람보고 이야기 한 것이 아니라 결국 그 사람 속에 있는 사탄보고 이야기 한 겁니다. “악마님, 저하고 같이 천국 갑시다!”악마가 “웃기지 마라. 나는 안 간다.” 하고 똑같은 거예요.
우리가 전도해야 그 속에 악마가 대화하는지 성령이 대화하는지 알게 아닙니까? 사람은 속에 허수아비 같아서 자기 것 없어요. 어둠의 권세가 조작된 것, 그런 것들이 가득 들어 있어요. 특히 저는 신학 교수들, 신학박사들 안에 어둠의 권세가 가득 들어 있어요. 복음 전하면 다 튕겨 나옵니다. 왜? 자기 힘이 들어 있거든요. 신학의 힘, 박사 학위의 힘……. 이런 힘들 외국 가서 고생하면서 따낸 학위들, 유학하면서 고생한 이야기들…….
큰 교회 장로님한테 복음 전해 보세요. 튕겨 나옵니다. 왜 그래요? 자기 힘이 들어 있어요. ‘여러분, 이 큰 교회 예배당 있고 교인 수 수천 명 되지만 이런 것 가지고 구원 못 받습니다. 오직 예수의 피입니다.’ 라고 이야기하는 목사가 있다면 그 사람은 그 사람에게 복음 이야기 하면 안 튕겨 나오겠죠. 그런데 그런 사람을 큰 교회에서 목사로서 그냥 두겠어요? 왜냐하면 거기서 여러분 이런 것 가지고 구원 못 받고 예수의 피로 받는다고 하면 그 교회에 지사충성하고 재산 바친 사람들이 뭐라고 항변하겠습니까? “그렇다면 저번 목사는 왜 돈 받치라고 왜 했습니까?” 그럼 목사가 “그거 다 사기입니다.” 하면 돈 바친 사람들이 좋아할까요? 싫어할까요? 싫어하죠. 그것 붙들고 주일날 왔는데 그런 공로를 바탕으로 해서 이 땅은 내가 바친 거고 내가 산거고, 저 피아노 내가 한거고 …….
자기가 한 것 그것이 유일한 기쁨이요, 보람이요, 그 교회가 곧 자기 자신이고, 자기의 자존심인데 그것을 구원받는데 소용없다고 해 보세요. 진짜 죽이고 싶죠. 그동안 십일조 낸 거 복리로 계산해 보세요. 돈이 얼마인데……. 먹을 거 안 먹으면서 과외비 아껴가면서 헌금했는데 그게 소용없다고 헌금해도 구원 못 받는다고 그 소리 들을 때 얼마나 화가 났을 거예요.
핑계는 전임 목사가 어떻고 하지만 사실은 그 속에 악마의 얼굴이 있어서 그 목사는 교인들보고 악마를 앉혀놓고 설교를 한 셈이 되죠. 예수의 피를 설교한 셈이 돼요. 그 정도입니다. 세상에 어둠의 권세가 있는 것을 어떻게 압니까? 하고 물으신다면 예수님이 어떻게 살아 왔는가 보세요. 예수님께서 귀신 쫓아내고 선한 일을 해도 결국 예수님은 살인강도보다 가치가 없었습니다.
살인강도는 왜 살려주는가 하면 자기하고 같은 사고방식이거든요. 그런데 예수님을 살려주면 사고방식이 다르잖아요. 베드로가 가로되 처소가 예비 되면 올게 라고 해요.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왜, 처음부터 올 때 처소가 마련 안 되었을까요? 왜 그 이야기를 나중에 이야기 하느냐 말입니다. 처음부터 베들레헴에서 태어날 때부터 ‘처소는 이미 마련되지 않았습니다. 죄송합니다. 나중에 할게요.’ 그런 소리 왜 안했어요?
메시야라면 처음부터 처소를 예비하고 와야 그게 메시야다운 것 아닙니까? ‘자, 여기 롯데마트에서 치킨 한 마리에 5천 원씩 팝니다.’5천원 주고 ‘주세요.’ 하니까 ‘다 팔렸습니다.’이게 무슨 장난이란 말이죠. 예수 믿으면 구원받는다 해놓고 ‘처소가 마련 안됐어, 미안해’이게 뭐냐, 사람 놀리는 것도 아니고 3년 동안 재산 바쳐서 예수 따라 다녔는데 ‘베드로야 미안하다. 처소가 아직 마련 안됐거든.’ 이게 뭡니까? 왜, 그런 이야기 하는 거예요? 우리가 그런 말하기 전에 처소가 마련되어서 쫙쫙 오면 넣어 줘야 하는데…….
왜, 처소가 마련되지 않았을까요?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생애는 죄인이 가야될 길을 가는 코스였습니다. 죄인이 가야 될 코스, 죄인, 제자 되는 우리들, 우리의 마지막 코스는 처소가 아니고 주님 앞에 저주 받아야 돼요. ‘아버지여, 아버지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버림받아야 됩니다. 지금 버림받아야 돼요. 예수님이 버림받았다는 말은 우리는 당연히 태어나기 전부터 버림받아도 너무나 당연하죠. 버림받아도 당연하니까 그냥 버림받읍시다.
제가 지금 말이 되는 이야기에요. 우리가 버림받을 수밖에 없다면 그냥 버림받으면 돼요. 구원해 달라는 것은 욕심이고, 버림받을 수밖에 없어요. 주님께서는 세례요한에게 세례 받고 죄인의 길을 가야됩니다. 십자가 지어야 돼요. 십자가 진다는 것은 예수님마저 죄의 권세 앞에서 열외가 안 됩니다. 남의 죄든 자기 죄든 아무튼 죄가 있으면 무조건 어둠의 권세가 심판받는 그 심판, 저주 받아야 됩니다.
그림을 그리면 이렇습니다. 여기 어둠의 권세가 있죠. 이 어둠의 권세를 하나의 담요로 보고 이 담요 밑으로 누가 왔습니까? 예수님도 여기 계시고 12제자도 다 여기 있었죠. 그러면 어둠의 권세, 죄에 대해서 하나님이 행한 조치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뭐밖에 없습니까? 저주지요. 그 저주를 심지어 누가 받아요? 하나님의 아들마저 어둠의 권세에 있다는 이유 때문에 저주를 받아야 돼요. 여기서 예외 조항이 있으면 안돼요. 다 받아야 돼요.
예수님이 저주 받았다는 말은 어둠의 권세는 당연히 저주 받지요. 우리는 저주 받는 자의 진노의 자녀라고 해서 에베소서 2장 3절에 나오죠. 본질상 진노의 자녀인데 아닌 척 하지 말자는 거예요.
엡 2: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진노의 자녀의 마지막 결과는 뭡니까? 저주 받아야 되고 마땅히 예수님도 죽은 이 세상에서 우리는 죽어야 돼요. 왜냐 하면 어두움의 세력 자체가 저주 받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저주를 받는 가마솥 안에 있기 때문에 가마솥 안에 있는 감자탕도 저주 받는 겁니다. 그 수제비도 저주 받아야 돼요. 갑자기 수제비가 먹고 싶네요. ㅎ ㅎ
저주 받는 가운데 저주 받아야 됩니다. 그런데 저주가 끝났죠? 예수님의 공로로 성취되었습니다. 그 가운데서 주님께서 성령을 보냈죠. 중요 합니다. 성령을 보내니까 성령께서 누구를 먼저 구원했어요? 예수님을 사흘 만에 부활시켰죠? 예수님을 사흘 만에 부활시킨 이유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자는 남에게 성령 세례를 줄 수 있는 유일한 분이에요.
성령의 세례를 받는 다는 것은 마음을 분배 받는 거예요. 마음을 나누워 받는 거예요. 예수님의 마음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받게 되면 예수님의 마음이 뭡니까? 죄로 인하여 저주 받은 것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영생을 얻는 그 마음이잖아요. 그 마음을 받게 되면 예수님만이 빠져 나왔죠. 이것을 부활의 첫 열매라고 하죠. 12절을 봅시다.
골 1:12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기업의 부분을 얻게 하신’이라고 나왔죠. 그리고 10절에 보면 주께 합당한 열매를 맺게 한다 했죠. 어둠의 권세에 있는 사람은 몰라요. 주님은 알아요. 성령을 통해서 주께 합당한 열매를 맺고 우리가 하나님의 기업, 하나님의 상속을 공유하고 같이 분배받는 입장을 만들어 줄 수 있는 유일한 자격을 가진 자가 예수님 자신이죠.
골 1:10 주께 합당히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
그러면 예수님이 성령주면 주님의 영역에 오게 되면 어둠의 권세에 있는 이 베드로에게 찾아오게 돼요. 이것을 처소, 주님의 아들의 나라가 성립되면 처소가 마련된 거고, 처소가 마련됐다는 그 확정적인 증거가 성령을 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성령 받은 자라는 이미 처소가 마련되어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것을 우리는 이미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 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성령 안에서 이미 예수의 나라에 포함이 되고 말았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는 구속함을, 죄 용서함을 받았다 이 말입니다. 바로 예수님 안에서, 사랑의 아들 안에서 용서를 받았다 이 말입니다.
이 이야기를 여러분들은 이해를 잘하실 것 같은데 만약에 그 당시에 여호와를 섬겼던 유대인들에게 이 말이 먹혀 들어간다는 것은 상상을 못해요. 오늘날도 마찬가지이지만 이 이야기가 유대인들에게 왜 먹혀 들어가지 않았을까요? 유대인들에게 무엇이 어두움의 권세가 어떤 형식으로 그들에게 꽉 차 있었습니까? 자기 안에 자기의, 자기가 하나님을 안다는 자기의가 차 있다 이 말이죠. 그러면 그것이 자기의인지 겸손인지, 신앙심인지 아는 것은 뭘 보고 압니까? 옆 사람하고 비교하면 안돼요. 누구하고 비교해야 합니까? 예수님과 비교를 해서 과연 그들이 예수님 앞에 자기 의를 다 포기할 수 있느냐의 여부입니다. 여러분들은 다 포기 할 수 있습니까? 묻는 제가 말이 안 되네요. ㅎㅎ
그래서 저는 여러분들이 제발 마음대로 사시라고 말하고 싶어요. 마음대로 살아야 나는 주님 앞에 내세울게 없음을 느낄 것이 아닙니까? 착하게 살면 착함이 자기 힘으로 저축이 돼요. 어디 펀드 열일이 있습니까? 저축이 돼서 자기는 저축한지 몰랐는데 갑자기 집안에 어려움이 생기면 대번 이렇게 나옵니다. 그만큼 공들여서 주님을 섬겼는데 왜 이런 환란이 주어집니까? 하고 본인도 저축한지 몰랐는데 저축한 것을 들 먹여요. 이만큼 애섰는데, 결혼식을 기독교식으로 했는데 왜 이럽니까? 기독교식으로 한 게 뭔데요? 기독교식으로 하면 손님들 술 안 먹는 사람 있습니까? 술 먹는 사람 있지요. 밖에서 담배도 피우던데요.
세상에 사람이 남을 관섭할 수 없고, 나도 내 마음대로 못 되는 것이 내 마음 속에 들어 있는 것이 어둠의 권세의 힘이기 때문에 내 힘도 그 어두움의 권세를 못 이깁니다. 내 마음 갈 곳을 잃어……. 최백호입니다. ㅎㅎ 내 마음 갈 곳을 잃어 내 마음도 어떻게 주체를 못해요. 술 끊은 지 10년 만에 또 술 먹고 담배 끊은 지 20년 만에 담배 또 피웁니다. 이것은 내 마음 갈 곳을 잃어 어떻게 주체를 못해요.
성도의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죽을 때까지 내 마음 어떻게 못해요. 그런데 성도는 무엇을 아느냐 하면 내 마음을 어두운 권세에 이렇게 내 팽겨 치게 하신 그 능력이 곧 사랑의 아들의 나라에서 온 능력이라는 것을 압니다. 그것이 성령의 능력입니다. 성령의 능력이 되게 되면 나는 내 마음도 주체를 못하는 허접스러운 존재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내가 믿을 분 내가 기댈 분은 오직 주 예수님 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런 나를, 나로 하여금 허접스런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하는 그 자체가 바로 성령이 왔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성령 안에 뭐가 담겨 있는가 하면 이미 죄 사함이 포함 되어 있습니다. 성령 따로 받고 죄 사함 따로 받지 않습니다. 그것은 기존 신학에서 이야기 하는 겁니다. 성령 받으면 그 안에 이미 모든 세트로 다 있습니다. TV 사는데 TV 받치는 것도 새로 사야하고 뒤에 있는 나사 찾고……. 이게 아니에요. TV사면 이것이 다 한 세트로 다 옵니다.
여기 비타500 사면 비타500 뚜껑 값 따로 계산하고 병 따로 치고, 병 안에 내용물 따로 계산 하지 않고 다 되어 있잖아요. 성령이 오게 되면 다 종합돼서 한 덩어리고 그냥 오게 되어 있어요. 그 오신 것과 허접스런 우리와 날마다 대비가 되지요. ‘아~, 내 몸도 내 마음대로 안 되는구나!내 속에 욕심을 나를 자꾸 자극 하는구나! 주여,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죄인이요? 제가 죄인입니다.’ 이것을 깊숙하게 알게 되지요.
옆에 친구가 말하죠. “네가 죄 지은 게 뭐가 있다고? 너는 그렇게 착실한데 뭐가 죄인이야?” “아니야 나는 모든 의를 내 힘으로 구원을 이루려고 하는 그런 본성이 아직도 내 속에서 마그마처럼 유황불처럼 들 끊고 계속해서 내 힘으로 복 받은 거야, 내 힘으로 사는 거야” 하면서 자꾸 나의 힘, 나의 의지, 나의 감정, 나의 이성, 나의 똑똑함…….
이런 것들이 어떻게 처리가 안돼요. 왜? 우리 자체가 쓰레기통이니까. 쓰레기 처리해 봤자 다 결국 우리한테 처리 되니까 결국 우리가 주님 앞에 나올 때는 그냥 80세 같으면 80년 동안 살았던 그 쓰레기 분리수거한 쓰레기, 분리수거도 안했어요. 그냥 막 음식쓰레기부터 다 집어넣었어요. 쓰레기 봉지를 그냥 그대로 놔둔 겁니다. 염치불구하고…….
15절 봅시다.
골 1:15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끝에 보면 창조물보다, 피조물보다 다음에 두자 있고 나신 자죠. 뭡니까? 먼저 나신 자죠. 먼저 나신자라는 것은 엄마와 아빠가 대화 할 때 애가 한 네 살 다섯 살 때 엄마 아빠 사이에 끼어서 “아빠 무슨 이야기인데?” “엄마 무슨 이야기인데?” 애들은 엄마 아빠 사이에 끼어들어서 자꾸 다 들으려고 해요. 그러면 “너는 네 방에 들어가 자야지?”아빠는 엄마한테 “애 자기 방에 보내고 그때 이야기 합시다.”하고 말합니다. 애를 보내고 엄마, 아빠가 이야기 하죠. 왜 이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먼저 나신자이기 때문에 애들은 끼면 안돼요. 먼저 나신 자이기 때문에…….
그러면 망해야 할 자와 구원될 자를 누가 결정합니까? 먼저 나신 자와 하나님 둘 사이만 의논 될 사항이지 다른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먼저 나신 예수님과 하나님 사이에 계획된 계획서가 16절에 나와 있습니다.
골 1:16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골 1:17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그를 위하여 그러니까 만물이 태어나기 전에 이미 있기도 전에 만물보다 먼저 있었던 것이 뭡니까? 바로 먼저 나신분과 하나님이 먼저 계셨죠. 먼저 계셨다는 것은 그냥 먼저 계심으로 끝난 것이 아니고 이미 계획서가 나와서 끝나버렸어요. 그 계획서의 내용은 모든 만물에 있어서 예수님의 뜻이 반영되지 않는 피조물은 있다? 없다? 없는 거예요. 악마든 사탄이던 뱀이던 지옥이던 어떤 것도 누구를 경위해서 한다? 예수님의 주되심을 사랑의 아들의 주인공이 예수님 되심을 장차 예수님께서 사랑의 아들의 주인공이라는 것을 설정을 해 놓고 이것을 주라 하는데 예수님이 주되심을 위하여 모든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보이는 것은 우리 인간들이고 보이지 않는 것은 천사들이죠. 보이지 않는 천사들 중에 뭐가 있습니까? 악마도 있지요. 악마가 천사이니까…….
악마들 인간들 모든 것은 바로 예수그리스도가 진짜 마지막 최종 목적됨을 보여 주기 위해서 그동안 분주하게 시행착오와 갖가지의 조합들, 갖가지 일들이 무수한 역사와 무수한 변동들이 있어서 변화들이 발생되도록 이미 사전에 먼저 나신 자와 하나님 사이에 이야기가 끝난 겁니다.
아까 올 때 비가 오데요. 비오는 거 하나까지……. “엄마, 비는 왜와?”너무 훌륭한 엄마는 “다 예수님을 위해서” “엄마, 논리가 너무 비약됐어. 중간에 뭐 걸치는 거 없어? 이해가 안 돼.” “너도 커서 어른 되면 알아. 성령 오시면 알아. 다 예수님을 위해서…….” “그게 무슨 뜻인지 몰라” 그러면 상세하게 알려주죠. 비가 왜 오느냐 물을 때 물음 자체 속에 뭐가 포함 되어 있습니까? ‘엄마, 저 오는 비는 나에게 어떤 이득을 갖다 줘?’거기에 예수님을 위해서라는 말을 듣기 전에 이미 인간은 누구를 위해서? 오직 모든 변화는 비오는 거, 눈 오는 거 바람 부는 거 다 나에게 이익일까? 아니면 오늘 나에게 이런 사태가 손해일까를 먼저 생각 하지요.
아까 심집사님이 운전하면서 가는 곳 마다 막힌다는 거예요. 운전하는데 힘들었었거든요. 그런데 가는데 마다 접촉사고 나서 막히니까 그런데 따지고 보면 다 누구를 위하여? 예수님을 위해서인데 그것을 집사님이 모를 리가 있습니까? 알지요. 알지만 본인이 힘들다는 말을 은연중에 쫙쫙 빠졌으면……. 내 앞에 교통순경이 있어서 가면 무조건 파랑불이에요. 훤하게 트였으면 좋겠다는 신체적인 본심이 있죠. 여러분 버스 정거장에서 기다릴 때, 제일 기대하는 게 뭡니까? 딱 버스정거장에 서자마자 원하는 버스가 오는 것을 기대하고 가는데 왔는데 막 떠났을 때 그것도 30분 만에 한 대씩 올 때 그것도 바람 불고 비바람 몰아칠 때 ‘주여, 어제 기도를 안 해서 이런 수모를 주느냐?’ 주님께서는 ‘원래 창세전에 이미 계획 되었어. 너는 오자마자 차가 떠나게 되어있어.’ 버스도 피조물입니다.
그런 일을 통해서 우리는 평소에 얼마나 내 편의 위주로 살아가면서 자기는 자기위주로 안 살아온 것처럼, 주님을 위해서 산 것처럼 그렇게 얼마나 어쭙잖게 행실을 해 왔습니까?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모든 만사가 주님의 뜻대로 된다는 것을 주님만이 알고 있는 사실인데 성령을 통해서 이 마음을 저희에게 주시옵소서. 그래서 범사에 감사해서 항상 기뻐하면서 주님의 사랑의 아들에게 이미 앉히게 하신 예수님의 피의 공로를 마음껏 자랑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