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로새서

골로새서5강-그리스도 안에서 화평(골1:20)이근호110212

아빠와 함께 2014. 6. 8. 18:01

2011-02-12 12:50:38 조회 : 1159         
110211 그리스도 안에서 화평 이름 : 이근호 (IP:117.55.132.36)

110211 그리스도 안에서 화평 골로새서 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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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의존교회(그리스도 안에서 화평)-110211a-(이근호 목사)

오늘은 골로새서 1장19절부터 할 차례입니다.

골 1:19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골 1:20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방금 읽었던 19절에서 다른 것은 다 잘라 내고 중요한 주제를 둘로 이어 본다면 이것은 ‘십자가 피로 화평을 이루사’이 대목에서 발췌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십자가 피로 다음에 괄호를 해 놓고 여러분들이 넣고 싶은 것을 여러분들이 넣어보세요. ‘십자가 피로 (부자 되었다.)’ ‘십자가 피로 (건강하게 되었다.)’ ‘십자가 피로 (교회가 부흥되었다.)’이런 것을 넣고 싶어 할 거예요.

그런데 아이 돌잔치 할 때 아무 것도 모르는 애들을 앉혀놓고 상에 실타래, 책을 펴놓고, 현찰, 카드 아니고 현금을 놓고 어느 것을 짚겠느냐 라고 하는 건데 이것 실하고 책, 화폐……. 항목 정하는 것 아기에게 물어봤습니까? “얘야 어떤 것이 좋아?” 이렇게 물어보지 않고 엄마가 일방적으로 원, 투, 쓰리 정해 놓고 엄마가 정해 놓은 그것을 애보고 짚으라고 하겠지요. 그러면 앞에 진열되어 있는 것은 아이의 욕망이 아니고 애 엄마의 욕망입니다. 아이 엄마가 오죽 이런 것이 미흡했으면 애들까지 대를 이어서 “얘야 너는 이 세 가지가 다 좋은 거야” 이런 식으로 주입시킵니다. 돌 잔치할 때부터 계속해서 주입을 시키는 겁니다. 만약에 이것 말고 다른 것을 짚으려고 하면 손을 막 때리죠. 그쪽으로 가지 말라고 그쪽으로 가서는 안 된다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여기 아이의 배후에 십자가 피로 ( ), 십자가 피로 뭘 원하느냐? 이 십자가의 피로 뭘 원하십니까? 라는 것을 A4용지를 하장씩 나눠주고 한번 써보게 하자는 말이죠. 교회 오는 모든 사람, 목사 본인도 쓰고 십자가 피로 뭘 원할 것인가? 다른 말로 하면 십자가 피가 어디에 쓸모 있는가? 또는 십자가 피가 무엇을 지향하는가? 무엇을 경향 하는가에 대해서 아는 바에 대해서 주관식으로 쓰세요. 논술식으로 십자가 피로 인하여 여러분들이 기대하는 것이 뭡니까? “목사님, 저 십자가 피 믿어요.” 목사님이“그래서? 십자가 피로 뭘 얻겠다는 거야?”정답을 말씀 드릴게요. 십자가 피로 이제 몽땅 버려졌다. 십자가 피로 이제 우리 죽었다. 이게 정답이 되는 겁니다.
 
의존교회 교인으로 알고 있는데 이런 글을 썼어요. “내 인생은 구제역이다.” 제가 그 이야기에 감동받았습니다. 누구인지 모르겠지만 구제역의 특징을 4자로 하면 “매몰처리”입니다. 고기값도 안 나올 거고 돌아다니면 다른 소에게 오염될 소이고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어디에 쓸모 있나 차라리 그만 땅속에 묻히는 것이 낫겠다. 다른 소를 위해서 그리고 나아가서 대한민국을 위해서 땅속에 묻히는 것이 낫겠다. 십자가 피가 뭔가 하면 너는 좀 입 다물고 가만히 있어! 십자가 피, 내가 좀 설칠게 십자가 피로 우리는 드디어 입이 열 개라도 할 말 없게 되었습니다. 몽땅 다 버려지게 되었습니다. 몽땅 다 강탈당하고 박탈당했습니다. 십자가 피로 우리는 박탈당했습니다. 우리 것이 여백이 되고, 공백상태가 되고 빈자리가 될 때에 그 다음에 십자가 피로 채워지는 것은 우리가 기대했던 것이 아니고 십자가 피를 흘리면서 아버지하나님과 아들하나님과 창세전에 생각해 놓았던 그 모든 내용들이 우리가 죽이는 빈 공란에 차고 넘치는데 그것을 19절에서는 충만 이라고 하는 겁니다.

길거리에 보면 충만 교회가 참 많이 있어요. 충만 교회가 되려면 안에 교인이 한 사람도 없어야 돼요. 교인이 한 사람도 없어야 돼요. 왜? 충만 교회가 성경 복음에 따라 충만하려면 아무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없다는 것 그 자체가 그것이 가득이에요. 그것이 충만 이에요. 아무것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상관없어, 아무것도 없더라도 나는 상관없습니다. 내가 기대했던 것이 아무 것도 없다 할지라도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그것이 모든 것이 충만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모든 것이 충만했다고 되어 있거든요. 충만했으면 그 충만한 결과가 전 세계 모든 인민들이 중국의 14만 인민들이 다 복음 알게 되었습니까? 아니 전 세계 60억 인구가 다 복음을 알게 되었습니까? 그렇지 않죠. 그냥 그대로 있어도 하나님께서 그것을 예수 안에서 충만하다고 본거예요. 우리들 생각의 충만은 내가 기대했던 그릇에 내가 준비된 그릇에 내가 원하는 것을 가득 채워줄 때 그것을 충만 이라고 보는 겁니다. 충만 이라고 하는 것은 말 자체는 가득하다고 하지만 사실은 그것을 자세히 풀어보면 남이 원한 그것 가득한 것 말고 내가 원하는 것이 가득하다는 것이 앞에 그것이 들어 있는 거예요.

우리나라 축구 대표 팀하고 세계에서 축구 제일 잘한다는 스페인하고 친선게임을 했다 칩시다. 그런데 그 경기를 못 본 친구가 이야기합니다. “어젯밤에 축구 했는데 우리나라 어떻게 됐어?” 그 친구 하는 말이 “가득했어, 충만했어.” “충만했어? 그럼 아주 경기를 잘했어?” “잘했어 멋들어지게 잘했어. 스페인선수가 공 드리볼하면 다 비껴주고 스페인선수가 공차면 대한민국 골대로 친절하게 안내해 주고 충만했어. 그래서 우리는 10대 0으로 졌어 아주 충만했어.” 그렇게 하면 듣는 사람이 이해되겠습니까? 분명히 0대0이 아니고 10대0이에요. 뭔가 충만했지요. 충만했는데 어때요? 골 많이 넣는 걸 골 잔치라 하잖아요. 충만했지요. 충만했는데 거기에 내 것을 집어넣으면 그러면 “우리나라는 몇 골 넣었는데?” “없어.” “에이 그러면 그거 충만 아니네.” 결국 사람들은 경기가 10골이나 넣어도 무엇이 없으면 충만 아니라고 단정해 버려요? 내가 기대한 내 것이 없으면 천하에 예수님이 십자가지고 골로새서1장19절 아무리 주장을 해도 그 주장을 우리 인간은 못 받아 들이겠다하는 겁니다. 우리 성경 처음부터 지금 잘못보고 있을 가능성이 굉장히 높죠.

성경에서 지금 전 세계는 예수님 안에서 충만하다고 하는데 개척 교회하는 목사는 충만하면 서울 시내에 모든 사람들이 우리 교회 와서 우리교회 충만해야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충만한 것으로 저는 간주 하겠습니다 하고 일방적으로 우기는 거죠. 그것을 예수님의 피에 대한 대립, 또는 대치, 또는 원수라고 하는 겁니다.

21절 봅시다.
골 1:21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거기에 방금제가 언급한 말이 나오죠.
원수죠. 원수라는 것은 적입니다. 적이라고 하는 것은 이쪽 진영에 있지 않고 저쪽 진영에 있는 것을 적이라고 하고 그 두 진영 사이에는 치열한 대립, 성격적으로 성질이 대립되는 성질을 가지고 대치되어 있는 국면, 대치되어 있는 상황을 가지고 원수라고 해요. 적이라고 할지라도 이쪽 진영 ,나의 진영에 와 버리면 그것을 원수라고 하지 않고 그것을 포로라고 하지요. 여러분, 포로와 원수의 차이점을 아시겠습니까? 포로의 특징은 기가 죽어있다는 거예요. 이미 총이고 칼이고 다 빼앗겼으니까 기가 팍 죽어 있지요. 원수는 기가 죽습니까?
안 죽습니까? 원수는 기가 팔팔 살아서 큰소리 팍팍치는 거예요. 성경 구약에 있는 역대기와 열왕기상하는 무엇을 보여주느냐 하면 ‘이스라엘아!’ ‘예.’ ‘유다야!’ ‘예.’ ‘ 하나님의 원수를 너희들에게 보여줄게.’라고 보여준 그 원수들이 모압, 압몬, 저 멀리 있는 앗수르, 바벨론 그런 나라들 있잖아요. 그러면 우리가 역대기나 열왕기 보면서 무엇을 파악해야 됩니까? 하나님의 원수가 있군요. 일단 그것을 파악해야겠죠.

두 번째, 그 원수의 싸움에서 우리 이스라엘이 어떤 식으로 하나님께서 승리로 일구어 내는가를 봐야겠죠. 원수가 이스라엘에게 굴복된 상태를 오늘 본문에서는 그것을 화목 또는 화평이라고 하는 겁니다. 화평이라고 할 때는 전제조건이 원수가 존재해야 되고 그 원수의 원수가 여기에 항복할 때 까지는 우리 인간의 방법입니까? 하나님의 방법입니까? 하나님의 방법이죠. 그 하나님 방법에 나설 때 구약성경에 보면 칼과 마병과 창이나 군사력, 전차로 이기는 것이 아니라 원수를 이길 때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기죠. 그 하나님의 이름이 쓰는 무기가 뭡니까? 무기가 하나님의 약속, 언약이죠. 언약대신에 칼과 창과 병거를 들고 나오는 것은 누구 쪽의 무기입니까? 이스라엘 쪽의 무기가 아니고 원수 쪽, 이방인들의 무기이겠죠.

그러면 싸움과 싸움은 무엇과 무엇의 싸움일까요? 인간의 이름, 인간의 힘을 의지하는 인간과 누구의 힘과 싸움 입니까? 하나님의 이름에서 나오는 힘의 싸움이겠죠. 문제는 이스라엘사람이나 유다 사람들이 인간에서 나온 힘이라는 것은 그들은 납득이 돼요. 저쪽이나 이쪽이나 다 같이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으로서 쓸 수 있는 무기는 뻔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쓰시는 그 무기언약에 대해서는 그들은 모르고 있어요. 왜 모르느냐 하면 자기 상태가 공백, 비어있는 상태가 아니고 이스라엘백성들 안에 인간의 힘으로 얻을 수 있는 무기로 이미 장착되었기 때문에 이것이 비어 있지를 않아요.

이것이 꽉 차 있다 말이죠. 이것은 인간의 힘으로 충만 이죠. 하나님께서 인간의 힘으로 충만한 것을 저쪽에 같은 인간의 힘으로 충만한 것과 대결을 붙게 합니다. 대결을 붙게 되면 누가 깨지게 되어 있어요? 이쪽 이스라엘이 백만이고 저쪽 이방인 군사가 5천명이라면 인간적인 의미에서 누가 져야 됩니까? 백만 군사인 이스라엘이 이기고 5천명인 이방인이 져야 되는데 하나님께서는 백만 명, 5천명 해 놓고 거꾸로 누가 승리하게 합니까? 세상에 5천명이 우리 백만 이스라엘을 이기게 해요.

그래 놓고 하는 말이 이번 전쟁은 하나님이 붙이시는 전쟁이라고 해요. 본드 알죠? 붙이는 것, 붙이시는 전쟁, 하나님이 붙이시는 전쟁이에요. 인간 대 인간의 힘, 인간의 무기와 인간의 무기가 붙였을 때에 지는 쪽이 하나님이 있는 쪽이고 이기는 쪽이 여전히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하나님이 없는 쪽이 되는 겁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붙이시는 전쟁의 방식이에요.

처음에 약속의 땅에 들어 갈 때에 그때 쇠붙이 종류의 무기는 이스라엘에게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사람들은 무엇을 다 정복했습니까? 가나안땅 전부를 정복했지요. 그때 여호수아가 한 고백이 있습니다. 너희들이 이 땅을 차지한 것은 우리들이 힘이 세서가 아니라 모세에게 약속한 그 하나님의 맹세를 이루기 위해서 그렇게 했다 했습니다. 이것은 여리고성부터 가나안땅 전체 전쟁에 견본이 되는 겁니다. 여리고성 때에 그들이 무슨 힘으로 이겼습니까? 무슨 힘으로 여리고성을 무너뜨렸지요? 사람들이 둘러서서 “으싸, 으쌰 다하면 된다.” 해서 여리고성이 흔들흔들하다가 무너졌습니까? 인간의 완력, 손 힘으로 해서 무너뜨렸습니까? 그들은 믿었죠. 뭘 믿었습니까? 여리고성은 모세에 의하면 하나님이 접수하게 되어 있다 그 이유는 여리고성 사람들은 언약이 없기 때문이고 우리에게 는 하나님의 언약이 있다.

언약이 없는 쪽은 속되고 더럽고 불결한 민족인 반면에 언약이 있는 쪽은 그 언약 안에서 우리는 거룩한 민족이 된다. 그러면 하나님은 더러운 하나님이 아니고 거룩한 하나님이기 때문에 어느 편에 서겠습니까? 하나님은 거룩한 민족과 함께 한다. 거룩 이라는 증거가 뭐냐? “거룩”여기에 글자를 써서 전부 이마에 붙였습니까? 여리고성 때 거룩의 증거가 뭐였습니까? 언약궤를 앞장세웠죠.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을 돌았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더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 사람이 중요한 게 아니에요. 그러면 어떤 사람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여리고성 무너진 것은 자기들이 뱅뱅이 돌다보니까 사람들이 어지러워서 스스로 무너진 거라고 해요. 사람들이 돌은 게 아니에요. 사람이 돌아버리면 사람 대 사람의 힘이 돼요. 뭐가 앞장세워졌습니까? 언약궤가 앞장서서 돌았습니다. 그러면 언약궤는 누구 말 듣습니까?
언약궤는 사람의 말을 들어요? 언약의 주인 되시고 언약에 담겨있는 언약에 실려 있는 하나님의 이름말을 듣지요. 언약궤에 하나님의 이름이 있으니까 하나님의 이름이 하루에 한 번씩 일곱째 날은 7번 돌았죠. 그래서 총 합해서 13번이잖아요. 13번이라는 숫자는 의미가 없고 7번 돌았던 날이 언제냐? 제 7일째죠. 제 7일째는 뭐하는 날입니까? 천지창조를 하고 난 뒤에 제7일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안식하시고 영광을 받으시는 날이잖아요. 여리고성을 무너뜨린 힘은 인간의 힘이 아니고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의 힘에 의해서 여리고성이 무너진 겁니다.
 
학생들 있는데 어려운 질문해서 죄송합니다만 창조의 힘에 의해서 여리고성이 무너졌습니까? 아니면 창조대로 그게 무너져야 창조다운 겁니까? 창조의 힘이 저쪽은 무너뜨리면 여리고성에 그것도 창조에서, 항목에서 빠져있는 샘이 되잖아요. 그러면 창조의 힘으로 여리고성이 무너졌으면 애초부터 창조 계획 안에 이미 그 내용이 포함되어 있는 거예요. 그래서 지금도 불교신자가 많고 안 믿는 사람이 많지만 주님 보시기에 십자가에서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화평 되어 있고 이미 충만 되어 있는 거예요.

이제 오늘 본문의 취지를 아시겠습니까? 옆 가게 절에 다니고 앞 가게는 교회 욕하고 이렇게 되더라도 우리 주님 보시기에 그게 합당한 제자리에 박혀있는 거예요. 그리고 그렇게 박혀있을 때 전체를 볼 때에 그리스도로 인하여 통일되었고 그리스도로 인하여 화평 되었고 그리스도로 인하여 충만한 거예요. 옆집 가게 사람이 지옥 가 줘야 주님의 솜씨가 주되심이 맘껏 세상 속에 영광을 받습니다.

다시 설명할게요. 여리고성을 창조의 힘으로 무너뜨리고 없앤다고 한다면 처음부터 여리고성 자체는 창조밖에 있었는데 창조의 힘이 밖에 있는 것을 주저앉았다 이렇게 되거든요. 그게 창조의 힘이 아니고 ‘너는 원래 장차 이스라엘 백성이 쳐들어 와서 너는 무너뜨리게 될 수밖에 없던 그런 성을 지은 거야’라는 것이 여호수아장군에 의해서 이스라엘 대군을 만났을 때 비로소 그것이 확연하게 완전히 드러난 거예요. ‘그렇구나, 우리 여리고성이 무너지게 되어 있었어.’ 이것을 미리 안 사람은 누구였을까요? 두자인데 앞에 직업이 붙습니다. 누구입니까? 여리고성에 살던 주민 중에 한 사람입니다. 기생 라합 아닙니까? 기생 라합이 이스라엘 정탐꾼에게 뭐라 했습니까? 우리의 창조자이신 그 하나님이 지금 이스라엘과 함께 동행하고 있으니 어찌 그 창조의 위력을 우리가 당해낼 수 있습니까? ‘살려주세요!’ 영어로‘help me!’오늘 갑자기 영어 쓰는데 'help me!' '살려주세요!' 이거 믿음입니다. 그러니까 아이 돌 잔치할 때에 실과 책과 화폐도 있지만 이 뒤에 뭘 하나 더 써야 하느냐 하면 “살려주세요!”완전히 돌잔치가 미쳤어요. 태어나자마자 살려주세요! 라고 하니 그럼 뭘 짚어야 돼요? 실도 아니고 책도 아니고 돈도 아니고 "살려주세요!"를 잡아야 합니다.

이 아이의 엄마 이름이 기생라합입니다. 엄마는 무엇을 보고 있습니까? 언약을 보고 있죠. 그 언약의 내용은 거룩과 비거룩과의 전쟁을 유발시키는 언약의 하나님이다. 그런데 그 거룩이라는 것은 우리가 만들어 낼 수 없고 거룩은 하나님의 언약이 임해야 된다! 왜, 언약에는 하나님의 이름이 있는데 그 하나님의 이름이 유일하게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거룩한 존재이거든요. 거룩한 존재가 자기 사람을 모으고 달릴 때 그 집단은 거룩한 사람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으로 쉽게 말해서 예수의 이름으로 우리는 의롭다함을 얻는 새로운 집단이 발생되는 겁니다. 그런데 의롭다는 그것이 자기 백성에게만 해당되는 그런 기능을 하는 것이 아니고 원수가 있으면 가만 놔두면 되는데 기어이 갈아서 그 원수의 원수 됨을 드러나게 할 때
비로소 이 전체가 다 합쳐서 이쪽의 거룩한 민족 저쪽은 안 거룩한 민족 합쳐서 원래 창조할 때 의도 했던 하나님의 예수그리스도 안에 통일이 그렇게 구체화 되고 실현되는 겁니다.

여러분주위에 안 믿는 사람 있다고 해서 너무 슬퍼하거나 노하지 마세요. 때가 되면 그들이 다 원래부터 창조 안에 이미 그리스도 아래에서 움직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그때가 꼭 세상 멸망 때가 되는 게 아니에요. 그때는 바로 우리가 죽고 나게 되면 호출이 있습니다. 인자의 음성을 들을 때가 와요. 우리가 죽을 때 인자의 음성을 듣게 되면 우리는 거기서 학급 배치 받듯이 배치를 받게 되는데 너는 천국으로 이쪽은 지옥으로 배치, 배당이 돼요. 학급 배당이 돼요. 배당이 될 때 양쪽 다 예수님의 입장에서 배당이 되고 완전히 운명이 고정화 될 때 그것을 누가 진두지휘하시는가? 우리 예수님이 진두지휘했기 때문에 그것을 충만 이라고 하고 그것을 화평이라고 하는 겁니다.

지금 이 말에 여러분들이 머리로는 성경적으로 맞는다는 느낌을 줘도 마음으로 확 당기지 않을 거예요. 그 이유를 제가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제가 어제 뉴스를 봤는데 대학가 주변에 방이 모자란다는 그런 글을 봤어요. 대학가 주변에 방이 모자란다는 것이 여러분들이 이해되는데 그렇게 힘드십니까? 전혀 힘 안 들지요. 아 대학가 주위에 시골 학생들이 많이 와서 방이 모자라는 구나 전혀 이해하는데 어렵지 않죠.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해서 대신 돌아가셨다 이거 실감나십니까? 대학생들이 방구하기 힘들다 보다 덜 실감나죠. 그 이유가 뭘까요?  왜 그럴 까요? ‘우리나라 어선이 소말리아에서 나포되었다.’ 확 땅겨오죠. ‘이스라엘에 아사왕이 기도함으로서 적군을 물리쳤다.’ 영 안 땅겨오죠. 왜 그럴까요?  ‘예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십자가 안에서 온 우주로 화평하게 했다.’ 영 안 땅겨오죠. 대학가에 방 모자란다는 것이 훨씬 더 다가오지 않습니까? 그 이유가 뭘까요?  그것은 우리 몸 자체가 우리 힘으로 살아가는 그런 버릇이 흠뻑 젖어서 그래요.

이제부터 이야기가 어렵습니다. 지금 까지 하는 것은 성경 내용에 줄줄 나오니까 연결되는 구나 우리가 이해를 하지만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제가 방금한 것을 다시 써 볼게요. ‘우리는 우리 힘으로 살아남겠다.’가 철두철미할 때 이 문장에서 키워드라고 하지요. 두 가지의 중요한 단어를 뽑아내면 ‘우리 힘으로 ’와 ‘살아남겠다.’는 거예요. 그러면 창세기 3장에서 하나님께서 생명이 생명나무쪽에 있다 했습니까? 지상에 쫓겨난 아담과 하와에게 생명이 있습니까? 어느 쪽에 생명이 있어요? 생명나무쪽에 생명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인정한 생명이잖아요. 그런데도 땅으로 쫓겨난 인간주제에 감히 우리는 안 죽으려고 하는 거예요.

지난 오후설교 호세아 하면서 이야기한 건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땅을 주신 것은 그 땅에서 살라는 것이 아니라 그냥 곱게 죽으라고 주는 땅이에요. 우리는 버릇이 살던 버릇이지만 호락호락하게 땅이 그냥 우리를 살려두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좀 천박한 예를 들지만 어떤 밀가루의 소원이 자기의 소원은 국화빵이 되는 소원이에요. 밀가루로 태어나서 국화빵 되는 것, 국화빵이 되고 싶은데 자기 주인이 자기를 붕어빵 틀에 넣어요. 그러면 붕어빵이 나오는 거예요. 가인이 하나님께 제사 들이는 의도가 계속 이 땅에서 살게 해 달라는 겁니다. 그런데 아벨은 이 땅은 우리가 죽어야 할 땅인 것을 내가 시인하게 해 달라는 거죠. 그래서 아벨은 죽었잖아요. 형한테 얻어맞아서 원래 살아야 되지 않아야 할 땅에 왔기 때문에 일종의 틀이에요. 우리는 국화빵을 원해도 우리를 강제로 붕어빵을 만들어 내는 그 틀이 우리가 지금 눈에 보이는 하늘과 땅, 이 세상 틀이고 우리의 세상이라는 우리가 태어나서 경험했던 모든 것들이 우리를 죽이기 위한 그런 힘들이 가해지는 거예요. 거기서 이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힘은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살 수 있는 힘은 없습니다. 힘이 없으니까 어찌되었든 우리는 맞서야 되는데 거기서 우리는 무슨 단어를 원하느냐 하면 화평과 화목과 평화와 안식, 행복 이런 단어를 우리는 끄집어내면서 ‘우리가 원하는 소원 화평과 화목과 평안과 행복과 건강……. 이런 것을 신이시여 우리에게 허락하옵소서.’ 라고 부르짖는 거예요. 그러면 주님이 “그것을 허락했으면 아예 이 땅으로 내쫓지도 않았다. 정신 차려 성경 창세기부터 봐봐” 일부러 죽으라고 내보낸 거예요. 죽어야 사는 겁니다. 천사도 옆에서 끼어들지요. ‘김 집사님 그냥 곱게 죽으세요.’ 약 올리는 것도 아니고 ‘김 집사님 그냥 곱게 죽으세요.’라고 천사도 거드는 거예요. ‘그러면 목사님 베드로는 왜 감옥에서 왜 안 죽고 빼내십니까? 그럼 모순되잖아요. 다르잖아요.’ 베드로 빼낸 이유가 감옥소에서 썩어죽는 거 말고 이왕 죽이는데 복음전하면서 죽으라고 내 보낸 거예요. 복음을 위해서 하나님의 화평을 위해서 우리 소원 말고 우리 안식 말고 우리 행복 말고 베드로의 행복 말고 사도 바울의 행복 말고 창세전에 배치되어 있던 창조의 본래 원리와 원칙을 따르라고 원리에 대해서 증거하라고 너는 교도소에서 죽을 인간이 아니고 이쪽에서 죽을 인간이야 나와서 복음 전하다가 거꾸로 죽던지 어떻게 되던지 원치 않는 대로 와서 죽어야 된다고 하는 겁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에요 사도 바울이 자기 고향에서 재판받아 죽을 수도 있어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옆에 서서 “얘야 너는 여기서 죽을 팔자가 안 돼” “그러면?” “너는 로마에 가야 돼” 로마에 가면 천년만년 삽니까? 로마에 가는 목적이 뭐에요?  여러분이 사는 목적이 뭡니까? 지금 노트 필기하는 목적이 뭐에요?  검사 받으려고 해요?  여러분, 태어나자마자 인간은 짹깍짹각 죽어가고 있습니다.

목욕탕 사우나 안에 모래시계가 있어요. 모래시계를 거꾸로 딱 놓으면 그 순간부터 뜨겁던 말든 모래알은 똑똑 떨어지지요.  더불어 우리의 몸은 벌겋게 돼서 드디어 지옥체험이 되지요 저는 사우나 갈 때 마다 이게 지옥이다 싶어요. 이게 모래시계가 5분짜리라서 천만다행이지 그 뜨거운데서 밖에서 문 잠가 보세요. 5분이 어디 있습니까? 바짝 말라서 완전 쥐포 되어서 밖에서 문 안 열어주면 그걸로 끝나는 거예요. 그래서 지옥이라는 것은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빠져나올 수 없다는 것이 일단 고통스럽고 안에 들어앉는 그 환경이 마치 소금으로서 튀김하듯이 늘 물 한 방울 아쉬울 정도로 그렇게 계속해서 불로 튀기는 소금구이하는 거예요. 그것이 바로 지옥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이 이야기했습니다. ‘네 몸을 죽이는 그것은 겁낼 필요가 없어 몸과 영을 지옥에 멸하는 자가 진짜 무시무시한 거야’ 이 말을 제발 판사 검사가 들었으면 좋겠어요. 세상에서 대우 받는 그런 인간들, 그거 마귀가 본인을 속이는 거예요. 돈 잘 벌고 권세 쓰는 것에 뿅 가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에 그것에 도취되어 그게 전부 인줄 알고 있어요. 진짜 목사 같으면 몸과 영혼을 지옥에 멸한다는 그 말에 휴우- 하고 늘 안심의 한숨을 쉬어야 됩니다. ‘어이고 살았군요!’ 구제역 걸려서 땅에 한 번 묻혀 보시기 바랍니다. 어이고 답답해 이 세상에 그래도 있는 게 좋다 싶어서 숨 쉬고 싶어서 다시 땅위로 기어 올라오죠. 우리가 숨 쉬라고 우리에게 숨쉬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호흡 주는 게 아니고 복음을 위해서 이렇게 숨 쉬는 거예요. 전부다 자기 죽으라고 준 욕망 속에서 살아버리면 일종의 지옥인데 이 지옥 같은 세상을 살아가야 간다면 복음은 누가 전할 거예요.

복음은 누가 전할 게예요?  십자가 마을에 그렇게 쑤셔 데고 헐뜯어 대도 계속 글을 쓰는 이유가 쑤셔 되는 것은 이런 와중 속에 너는 잘났다 못났다 그것을 논쟁하라는 거예요. 그런데 십자가 마을의  존재이유가 뭡니까? 누가 잘했다 못났다가 아니라 그 순간에도 복음전하라고 그런 일들이 일어난 거예요. 이야기가 간단한 이야기 아닙니까? 그래서 복음 아닌 것은 싹 다 지워버려야죠. 왜? 십자가 마을은 복음 아닌 것은 안 담기로 되어 있기 때문에  복음 아닌 것을 왜 증거 하는데 그래서 지우는 거예요. 그것을 사람들이 이해 못하는 거예요. 너 잘난체하느라 지우지, 너 회개하기 싫어 지우지, 온갖 말을 해도 확 지워버려요. 십자가 마을이라 하는 것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사람 손에 죽었다 끝.’ ‘누구도 구원 자격 없다 끝.’ ‘주께서 구원하신 것은 주님의 일방적인 자신의 선택이다. 끝.’  그거 증거하는 거예요.
 
구원의 힘은 말이나 병거나 칼이나 총에 있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힘에, 돈에 있는 것이 아니고 구원의 힘은 하나님의 이름에 있는데 그 이름이 마지막 남기신 최후의 언약의 완성은 세자로 새 언약, 다른 세자로 말하면 십자가, 한 자 덧붙인다면 십자가 피, 히브리서의 피언약이에요. 피 언약으로 화평을 이루었다, 모든 창조의 완성단계에 이르렀다 이 말입니다. 싸움 났어요. 동네 싸움 났어요. 구경났어요. 아주 불을 질러요, 왜? 뭘 노리고 그런 거예요?  관심사가 십자가 피에서 지상으로 내려오게 만드는 악마의 전략입니다.

다시 말씀 드립니다. 문제가 뭔가 하면 하나님께서 생명나무 있는 곳에서 우리가 꺼져야 하고 추방시켰어요. 그러면 간단하게 이야기해서 생명이 없는 겁니다. 생명이 없는데 살고 싶다 아 수상하죠. 뭔가 수상한 거예요. 생명이 없으면 이렇게 생각해야 돼요. 생명이 없을 만하네. 내가 이런 짓한 것 보니까 하나님의 생명 안 주신 것 잘했습니다. 만날 따지는 게 이게 선일까 이게 악일까? 바라봐야 되는 것은 주님만 바라봐야 될 걸 내가 선일까  악일까?

제가 하나교회에서 강의 했듯이 베드로가 물 위를 걸을 때 주님을 바라봤을 때는 이게 땅인지 물인지 분간이 없이 걷다가 풍랑이 이니까 내가 저 풍랑을 어떻게 대처하지 하고 자기 자신을 보는 순간 풍덩 빠졌잖아요. 그게 창세기에 우리가 추방된 이유입니다. 마귀가 자꾸 우리자신을 보게 만들어요.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 하면 그 소리가 어디서 나온 소리이지?  오, 하나님께 나온 소리구나 하고 남자나 여자나 뭘 봐야 해요? 아담이나 화와나 선악과 따먹지 말라고 한 그 분을 쳐다보면 아무 문제없는 것을 가지고 뱀이 그분을 쳐다보는 그분을 바라보는 그분의 소리를 듣는 이쪽에 있는 그 시선을 뱀은 아래쪽으로 내려서 선악과와 누구를 직통으로 만나게 했다? 선악과와 아담과 화와를 직통으로 먼저 대면케 했죠. 대면하니까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탐스럽게 됐죠. 그리고 “따 먹으라!" 누가 누구보고 명령한 거예요? 마귀가 사람보고 명령한 것이죠.

지금 만약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모든 것이 종결되었으면 그것을 흔들어 데는 말에는 그 말씀과 다르기 때문에 그것은 신경 쓸 필요가 없어요. 그런데 언제 인간이 자기 자신을 바라보게 마귀가 유혹하니까 그걸 따먹는 날에는 네가 신처럼 되리라 했잖아요. 그러면 그 때 부터는 하나님의 그 말씀은 날아가 버리고 어떻게 됩니까? 따먹을까 말까? 이렇게 되겠죠. 따먹을까 말까? 이 자체조차 잘못된 이유가 방향성 자체가 주님말씀에 어긋나 있는 거예요. 그래서 나쁜 짓 할까 말까?,  할까 말까? 라고 자기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 과신하는 자체가 가관입니다.

주께서 다 이루셨다 하면서 이미 눈꼬리가 사라진 거예요. ‘내가 목사님 어떻게 하면 착할 수 있습니까?’그 자체가 마귀생각이고 그 자체가 마귀유혹이라니까요 내가 착실히 교회 다니면 복주시겠습니까? 아까 내가 실을 잡을까요? 책을 잡을까요? 돈을 잡을까요? 라고 생각하는 자체가 내가 뭔가 하면 한다는 자체가 주님께서 만드신 창조의 원리에 어긋나는 거예요. 차라리 주님 바라보면서 “살려 주세요”라고 하는 것이 낫습니다. “주여 저는 개입니다. 살려 주세요” 베드로가 물에 빠지면서 “살려 주세요” 했죠. 주님께서는 베드로를 물에서 구원해 주잖아요. 그러면서 네가 믿음이 없다 하잖아요. 조금 전까지 주님만 바라보는 것이 믿음 있는 거죠. 믿음은 뭡니까? 자기 믿음을 바라보는 것은 믿음이 아니죠. 왜? ‘나’라는 것이 들어가니까 ‘나’가들어 가면 무조건 믿음이 아니에요. ‘나만 십자가 안다.’ ‘나도 안다.’ ‘나’가 들어가면 이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주께서 이렇게 하셨습니다.' 그렇게 끝나버려야 됩니다.

우리의 이름이 아니고 주의 이름이니까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명심해야 될 것은 이미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원수로 주님께서는 설정해 놓았어요. 왜, 이방인이니까 이방인은 뭐가 없습니까? 구약에는 이스라엘에는 언약이 있지만 이방인은 언약이 없어요. 언약이 없는 이방인을 언약이 있는 유대인이 봤을 때는 자기의 원수가 아니고 하나님의 원수가 돼서 개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자기의 원수 정도가 아니에요 그게 에베소서에 나옵니다.

에베소서 2장에 보면 그 이방인들은 외인이고 하나님이 없는 자라 그리스도 편에서 하나 되었다, 16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이렇게 되어 있죠. 유대인이 봤을 때 저들은 단순히 이스라엘의 원수가 아니고 하나님의 원수로 보는 것은 이방인에게는 언약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까 이야기 한 것 또 하는 겁니다. 언약이 없으면 거룩이 없다. 거룩이 없으면 왜 망한다? 거룩한 하나님이 심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거룩이 있는 이스라엘은 언약 때문에 있다, 그러면 이스라엘은 어떻게 되는가? 구원 받는다. 이것이 구약에서 주께서 주셨다고 그렇게 유대인들이 이스라엘을 오해 하고 있었던 겁니다.

이게 참, 어려운거예요. 방금 오해라는 말을 했죠. 실컷 지금까지 언약이 있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고 거룩한 민족이다. 따라서 실제로 여호수아에서 전쟁하니까 누가 꺼꾸러지더라? 우리는 별로 가지고 있는 것도 없는데 발달한 무기를 가지고 있어도 더러웠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저쪽을 이기게 해 주셨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때 여리고성 앞에 앞장세운 것이 뭐라 했습니까? 언약궤지요. 그 언약궤 가졌던 홉니와 비느하스가 약속의 땅에서 블레셋과 전쟁할 때 언약궤 가졌는데 패배했지요?

이것을 요새 말로 하면 “주여, 십자가 복음 믿었는데 왜 이렇게 못 삽니까?”라고 하는 말과 똑같습니다. 십자가 복음을 믿습니다. 주여, 그런데 왜 이렇게 못삽니까? 와 똑같은 소리에요. 언약이 있다는 것을 뭐라고 오인했느냐 하면 구원을 당했다고 생각하지 않고 구원을 내가 챙겼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자기는 언약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의 배치하는 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 협상에 들어가는 겁니다. 하나님 언약 믿어 줄 테니까 이거 내가 원하는 것도 조금 들어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래야 내가 교회 나오는 맛이 있지 않습니까? 남들은 응답받았다. 남들은 기도해서 축복 받았다 좋은 소리 하는데 지금 10년째 기도해도 건지는 거 하나 없는데 이래가지고 무슨 재미로 신앙생활 합니까? 안 믿는 사람들도 이정도보다 더 낫겠습니다. 소위 믿는 신자가 이 모양 이 꼴로 내가 봐도 참 웃깁니다.

십자가의 원수된 것을 소멸한다고 이야기 하는데 십자가가 결국은 이방인을 구원하는 용도로만 십자가가 아니라 무엇을 치는 십자가 입니까? 우리는 언약이 있고 우리의 혈통은 아브람의 혈통이고 우리는 누가 뭐래도 하나님께서 언약을 주셔서 복 주셨다는 유대인들을 치는 십자가가 되겠죠. 너희들이 언약에 대해서 잘 못 알고 있고 잘 못 해석했다는 겁니다. 이 이방인들을 구원한 십자가 들고 이스라엘을 치는 십자가 되는 거예요. 너희에게 언약이 있음은 인정한다, 줬다 이 말이죠. 시내 산에서 모세가 40일 동안 기도하면서 언약 받아와서 자기 백성에게 줬잖아요. 언약이 있는 것은 인정하는데 그들은 언약 있음으로서 자기는 복음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 말이 틀렸어요, 맞았어요? 맞아요. 맞는데 뭐로 바꾼다? 우리는 우리 힘으로 살아남겠다는 것으로 바꿔서 우리 힘으로 반드시 죽는다가 혹독하게 실감나게 겪게 되는 인생을 살게 하는 거예요.

우리는 우리 힘으로 살다가는 죽어 마땅하고 이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혹독하게 체험 하게 하는 거예요. 체험하게 하고 우리는 우리 힘이 아니고 누구의 힘으로? 하나님의 준비된 예수님의 원래 창조의 자리를 만드시는 원래 통일되어야 되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예수님의 힘으로 우리는 예수님의 입장에서 영원히 우리가 가보지도 못한 생명나무를 팍팍 겪게 되었다고 하는거예요.

우리 힘으로 생각했던 그 삶, 생명이 여지없이 작살나야 돼요. 우리는 죽어도 좋다고 송재원씨가 말했는데 ‘우리는 죽어도 좋다.’ 우리 힘으로 생존이 아니라 우리가 죽도록 충성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얻지요. 우리의 죽음이 구원받는 게 아니에요. 우리를 죽게 하시는 그분이 우리를 살게 하시기 위해서 우리를 죽게 하시는 겁니다. 쓰레기 속에 보물이 있는 것이 아니고 쓰레기를 쓰레기로 드러내는 그 작업이 곧 우리를 구원하는 작업이 된다는 말입니다. 10분 쉽시다.
 김창길 (IP:222.♡.87.105) 11-03-04 11:51 
서울 의존교회(그리스도 안에서 화평)-110211b-(이근호 목사)

둘째 시간 시작 하겠습니다.
지옥을 누가 만들었습니까? 여러분들이 만들었어요? 지옥을 인간들이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인간들이 만들었으면 헌법을 만들어 지옥 없애 버립시다하면 없애면 끝나는 겁니다. 지옥은 우리가 만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천국도 우리가 만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천국에 못가는 거예요. 우리가 만들었으면 우리가 능히 들어 갈만한 조건과 천국이었을 거예요. ‘여러분 천국을 우리가 만들었습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만들면 무슨 소용 있습니까? 우리가 들어 갈 수 있어야죠.’ ‘걱정하지 마세요. 만들 때는 다 들어가라고 만든 거 아닙니까?’ 이렇게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 우리가 천국을 만들면 우리가 들어갈 수 있는 천국이에요. '우리가 지옥 만들었습니다.' 그럼 어떤 사람이 불평하지요. '지옥 만들어서 재수 없어 빠지면 안 되잖아요.' '걱정하지 마세요. 지옥 가더라도 피할 수 있는 그런 방법이 다 있습니다.'

지옥을 가더라도 정신만 차리면 도로 뒤로 돌아서 천국갈 수 있는 그런 지옥을 말하는데 하나님이 만든 지옥은 잡아당기면 어떤 누구도 지옥의 힘을 이길 수 없는 자만이 지옥에 가고 천국에서 잡아당기면 어떤 자라도 반드시 천국에서 못 빠져나오고 기어이 천국에 가야될 그런 식으로 주님께서는 천국과 지옥을 만들어 놨습니다. 그 만들어 놓은 천국과 지옥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천국과 지옥이 흐지부지한 줄 알았는데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므로 죽음을 이김으로 말미암아 다른 말로 하면 인간이 죽였던 그분이 인간의 죽이는 힘마저 이김으로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을 죽이는 것에 동의 했던 인간속의 악마가 예수님을 죽였지만 하나님은 사흘 만에 살아남으로 인간을 지배하고 있는 악마의 힘마저도 어찌할 수 없고 강한 힘으로 부활해서 천국을 이루었거든요. 그렇다면 그 가신 천국에서 잡아당기면 환란 핍박이나 어떤 죽음도 주님의 사랑에서 끊어 지지 않는 그런 힘으로 지키는 겁니다.

그 천국에서 잡아당기고 있다는 그 구체화가 “누가 너희를 정죄하리요”입니다. “누가 저희를 송사하리요” 그 다음에 택하신 자를 위하여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까지 파괴시키는데 누가 그 아들이 죽었다가 살아난 그 부활의 능력을 막으리오. 누가 막으리오.  마귀가 손 다 썼는데 누구, 누가 막으리오.  마귀가 손 다 썼는데 마귀가 최후의 죽음이라는 무기까지 동원해서 아들의 부활을 막았음에도 불구하고 주께서는 그 마귀의 힘마저 극복해서 구원해 냈다 이 말이죠.

마귀의 힘마저 극복했다는 말은 어떤 너를 정죄하는 힘도 주님의 용서함과 은혜 앞에서는 그게 무용지물이 된다는 말입니다. 결국은 우리의 관심사가 “주여, 수입이 없습니다. 살려 주세요.” 만날 우리는 이 험한 땅에서 어떻게 하루하루 연명하며 살아가느냐 그게 관심사임도 불구하고 성경을 펼쳐보면 성경은 우리 몸뚱이를 두고 마귀하고 주님하고 “내 놔라 내꺼다.”  마귀가 “가져보려면 가져보세요 얘는 세상에 푹 빠졌습니다. 안될걸요” 우리를 놔두고 잡아당기는 그런 영적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거예요.
 
다시 합니다. ‘대학가에 대학생들이 방이 없어서 힘들다.’ 현실로 확 다가오죠. 왜? 방이었어야 사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서 돌아가셨다.’ 확 안 땅겨 오죠. 결국 우리는 우리의 몸을 영적으로 보지 못하고 심지어 주께서 구원하는 과정에서도 우리는 만날 끌려가면서도 우리의 육을 육적 차원에서 밖에 볼 줄 모른다는 것, 그러니 끌려가면서 만날 불평하고 불만이 많죠. 한 달에 한 번 금요일에 의존교회 오게 되면 제가 여러분 첫 인상이 피곤에 절었다 하는 느낌, 시간돼서 참석했지 대충하고 끝내고 잘란다. 인상이 팍팍팍 와요 그런데 감사한 것은 끝날 때 보면 죽어가는 생명이 느낌으로 살리고 있구나 하는 것을 제가 제 느낌으로 제 오해, 오인?  오해 아니기를 바랍니다. 그거는 제 말씀이 좋아서가 아니라 중간에 떡 먹는 시간 때문에 안 그런가 싶네요. (ㅎㅎ) 그럴 가능성이 있다 이 말이죠.

구원되었기에 구원되는 겁니다. 우리가 구원받고자 해서 구원되는 것이 아니고 이미 구원받았기에 구원되는 것이고 이것은 버림받았기에 구원될 수가 없어요. 구원받지 말라고 밀어내는 겁니다. 너는 천국이 네 차례가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밀어내는데 그것이 영적으로 밀어낸다고 표현하지만 그것이 구체화가 실제적으로 교회 안에서 일어나게 되는 것은 사람이 예수의 피로 정죄함이 없다는 것을 나는 못 믿겠다, 왜 어떤 사람은 선택하고 어떤 사람은 선택하지 않느냐 이런 쪽으로의 불만의 표시가 그 뒤 쪽을 캐보면 영적으로 그는 천국에 애초부터 가지 말아야 할 사람이고 천국에 가 봐도 자기 자리가 없어요. 자기 좌석이 없다니까요 그럼 어디에 있느냐?  지옥가면 D열에 14번 있어요. 그 옆자리가 D열 15번, 동화사 주지 자리에요. 그 옆자리는 D열 16번, 천주교 김수환 추기경자리입니다. 그 옆에 보면 법정스님 앉아 있어요.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성경 내용이 예수님의 피를 빼놓고 예수님의 피를 중심으로 모아서 피에서 피로 모아지지 않고 하나님의 주권에서부터 주권으로 시작되면 그것은 이미 지옥에 좌석이 배치되어 있는 사람들의 특징이 그렇습니다. 이것을 주권 사상이라고 합니다. 이건 불교도 있어요. 불교도 주권사상입니다. 신의 주권사상, 하나님의 주권사상은 모든 종교에 타고 난거예요. 주권사상에는 예수님의 피가 빠져있지요. 그러면 예수님의 피를 집어넣으면 될 거 아니요?  이렇게 하죠. 예수님의 피를 넣어봐야 들어갔다 빠져나와요. 왜? 주권사상이 예수님의 피보다 더 넓은 사상처럼 그렇게 이해되기 때문입니다.

지금부터 하나님의 주권사상이 왜 지옥에 갈 사람들만이 주장하는 사상인지를 제가 설명하겠습니다. 그럼 주권사상이 뭐냐 그것부터 보겠습니다. 주권사상이란 세상에는 모든 변화에는 다 목적이 있고 이유가 있다는 겁니다.  어느 하나라도 그 목적과 이유에 대해서 어긋남이 없고 벗어남이 없다는 것이 주권사상입니다. 그러면 그 하나님의 목적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의 하나님 됨이에요. 그러면 우리 인간은 이 거대한 모든 변화를 조정하시고 변화를 일으키시는 그 하나님 앞에 우리가 서게 되면 우리는 왜소해 지죠. 작아지죠. 그대 앞에 서면 왜 나는 한 없이 작아지는가? 그런 시도 있지만 우리는 작아지죠. 우리는 작아지고 하나님은 되게 커지는 거예요. 그리고 우리는 무지하고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고 전지, 모든 것을 아는 것, 그리고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것을 전능이라 하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아는 것도 별로 없고 우리는 능력도 별로 없습니다. 이러한 종교적인 환경, 이것을 주권사상이라 합니다.

그렇다면 주권사상 앞에서 이 주권사상을 아는 나는 죄가 될 수 있을까요?  죄가 안 될까요?  이것을 인정 하고 수용하고 아는데 1번, 죄가 된다. 2번, 죄 안 된다. 뭐가 됩니까? 주권사상을 아는 사람이 주권사상 안에서 자기를 죄라고 하겠어요? 죄라고 안 하겠어요? 나는 작고 나는 죄만 짓고 하나님은 의롭다는 것을 아는 나는 전적으로 죄인이 될까요, 안 될까요?  주권사상 안에서 죄가 안 되죠. 주권사상만 알면 더 이상 죄인이 아니라니까요 제가 좀 어렵게 이야기했습니까? 애가 성적이 떨어져 왔어요. 엄마가 닦달합니다. “왜 놀았어?”  할 때 애가 너 뭐 잘못됐는데 하면서 매를 맞지요. 그런데 “엄마, 놀았어. 엄마는 전지전능해 어떻게 놀은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엄마 나 놀았어요. 다음부터 공부 잘할게요.” 하면 걔는 매를 맞아요, 안 맞아요?  안 맞지요. 자기 죄를 아니까 안 맞잖아요. 그러니까 안 맞으니까 매를 안 때린다는 말은 더 이상 죄인이 아니고 완벽한 자는 아니지만 어쨌든 매 맞을 짓은 안했다 이 말이죠. 내 죄를 아는 만큼 매 맞을 짓을 안 한 거예요.

그러면 내 죄를 많이 알면 적 게 아는 사람보다 매를 적게 받겠죠. 이것이 주권사상입니다. 이게 성화론 입니다. 주권사상 안에서 내가 스스로 조절에 의해서 의로울 수도 있고 반성안하면 회개안하면 점점 더 악하고 사악할 수 있다는 여유, 그런 여지가 있는 거예요. 수위, 레벨을 조정할 수 있는 볼륨을 높였다가 낮춰다가 쫓아갈 수 있다 이 말이에요. 농땡이 부리면 나빠지고 교회 와서 은혜 받으면 다시 높아지고 그 레벨을 조정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이게 하나님의 주권사상입니다.

어떤 사람을 전적인 죄인이라고 봅시다. 자기가 전적인 죄인임을 알아도 죄인입니까? 의인입니까? 죄인이죠. 예를 들어서 “목사님 키가 얼마나 됩니까?” “저 172입니다.” “그런데 옷은 푸른색 입었네요.” “네 푸른색 입었어요.” 그러면 내 키가 172라는 것을 알면 옷이 노란색으로 변합니까? 안변하죠. 옷 입는 채로 키가 172잖아요. 변사또가 춘향이보고 뭐라 합니까? “춘향이는 고개를 들라, “죄인은 고개를 들라” 그다음에 “네 죄를 네가 알렸다” 그 다음에 “네가 죄를 알면 숙청을 들라”하잖아요 순서가 그렇죠. 만약에 춘향이가 죄인이 아니면 고개를 들면 안돼요. 죄인은 고개를 들라 그 다음에 네 죄를 네가 알렸다. 알았습니다. 그 다음에는 숙청을 들라 이것이 성화론 아닙니까? 개혁주의 구원론이잖아요. 개혁주의 구원론이 춘향전에 나와요 첫 번째, 우리는 죄인이다. 두 번째, 우리는 죄를 회개 한다 세 번째, 회개해서 새 사람 됐으면 수청을 들라 하나님께 수청 들면 되겠죠. 이게 지옥에 예약된 사람입니다. 어디가 잘못 되었을까요? 간단합니다. 하나님이 내 구원문제에 대해서 나보고 의논한다고 생각한 겁니다. 왜 그런 생각을 했을까요? 왜 구원문제에 대해서 하나님이 나하고 상대한다고 생각을 왜 가졌을까요?

아직도 나는 구원받을 가능성과 여지가 있는 존재라고 오인, 오해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주께서 쫓아내놓고 주께서 협상테이블에 앉힙니까? 과연 그런 겁니까? 로마서 3장 4절을 봅시다.

롬 3:4 그럴 수 없느니라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찌어다 기록된바 주께서 주의 말씀에 의롭다 함을 얻으시고 판단 받으실 때에 이기려 하심이라  함과 같으니라

인간은 거짓되잖아요. 거짓된 인간들이 하나님을 찾으면 그 하나님은 참되겠어요, 거짓된 하나님이겠어요?  거짓된 하나님이죠. 그러면 거짓된 하나님보고 구원해 달라고 할 때 그 구원은 거짓된 구원이에요, 참된 구원이에요? 거짓된 구원이에요. 그 거짓된 구원으로 회개해서 구원받아 천국가면 그 천국이 참된 천국입니까? 거짓된 천국입니까? 거짓된 천국이죠. 회개하는 거짓된 회개이고 천국 가는 그 천국도 거짓된 천국입니다. 회개하라고 모인 교회도 거짓된 교회이고 그렇게 주장하는 주권사상도 거짓된 사상이죠. 그러니까 지옥에 의자가 예매된 사람이라니까요 “그러면 목사님 천국은?” “그걸 왜 네가 궁금해 하느냐?  너는 가만히 있어” “그러면 천국은?” 라는 질문을 우리가 주님이나 하나님 앞에 할 자격이 없습니다. 우리는 그런 자격이 없습니다. 왜 자격이 없냐 하면 이미 우리는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추방된 존재는 무엇이 둘러쳐있냐 하면 “너는 추방돼야 마땅해”가 우리주변을 빙빙 둘러싸여 있잖아요. 추방되어야 할 마땅한 존재가, 우리가 구원을 요청한다는 것 자체가 “너는 맞아도 싸”하는 거예요. 아직도 네가 얼마나 교만을 떨었으면 추방된 시추도 모르고 추방된 것이 뭔가 억울한 듯 한 인상을 피운다는 자체가 이것은 매 맞아도 싸다 하는 느낌을 주는 겁니다. 이 소식을 의존교회 아니면 어디서 전하겠습니까? 물론 우리교회서도 하겠지만 그것은 내일 살아있어야 하는 보장이 있어야 하니까 오늘 까지는……. 

예수님께서는 거짓된 자와 협상테이블에 앉지를 않습니다. 우리가 구원 될 문제는 우리 손에서 이미 떠났어요. 왜 떠났느냐 하면 그 주님이 알고 있는 천국과 주님이 알고 있는 지옥을 우리는 자체가 거짓되기 때문에 우리가 눈치 채거나 알아낼 방도가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보고 교회 나오지 말라는 겁니까? 나와 봤자 목사님이 무슨 설교를 해도 우리는 거짓되게 왜곡되게 해석할 건데 집에 있으나 밖에 있으나 교회가도 소용없지 않느냐……. 진짜 성령을 받아서 구원받은 사람은 집에서나 교회에서 사나 죽으나 먹든지 마시던지 우리는 주님의 것인데 주님의 것인 이유가 뭐냐, 참된 천국, 참된 구원, 참된 지옥, 참된 구주를 증거하기 위한 용도로 부려먹기 위해서 우리에게 찾아오신 거예요. 우리 요청에 의해서 초청해서 오신 것이 아니고 그냥 찾아오신 거예요 그냥 덮친 거예요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너는 거짓되었다는 것을 알아라." "아멘” 그 다음에 “그 거짓된 것을 너의 의사도 물어보지 않고 너와 의논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너를 구원했단다.” “아멘” 그러면 “그때부터 너는 네 것이 아니니라” “알고 있습니다.”  “그럼 됐어.” 그럼 부려먹는 거예요. 사도 바울아 너는 로마에 가서 전도해야 된다. 그래서 로마에 가서 전도한 것이 로마서잖아요

오늘 본문의 화평과 그리스도 피, 왜 하나님으로 인하여 화평 한다는 말을 쓰지 못할 까요?  이 문제는 정말 어려운 데 이것은 목사시험에도 나올 문제에요. 왜 하나님이름으로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과 세상을 화평하지 못하느냐 하면 하나님이 한다면 이 세상에 지옥마저 없어 져야 진정한 모든 피조물들은 하나님과 화평한 자리에 있게  돼요. 이 주권사상에 의하면 지옥자체가 없어 져야 합니다.

인간과 인간들이 만남에서 화평 또는 화해 한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전에는 싸웠던 사이가 안 좋던 관계가 화해하고 난 뒤에는 ‘우리 친구 아니가?’ 하고 얼싸 안 은거죠. 김태원이라는 가수와 이승철이라는 가수가 앨범 판권을 두고 싸우다가 락락락이라는 드라마를 통해 얼싸 안았죠. “형님, 우리 화해합시다, 싸우지 맙시다.” 하고 화해했잖아요. 화해했으면 그 사람에 대한 비난은 일체 없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자기 피조물 전체와 화해했다면 예수님의 십자가 피 빼놓고 하나님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화평했다면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에 대해서 좋은 관계를 유지를 해 줘야 되죠. 예를 들면 아버지가 10자녀가 있는데 다 화목하다면 “얘야 내가 오늘 팔순이다.” 하면 다 불러야 되죠. “아버님 용돈” “그래 고맙다” “아버님 옷 한 벌” “고맙다.” “아버님, 제 조그만 선물” “가거라! 꼴도 보기 싫다” 하면 다른 형제들이 뭐라 합니까? “에이 아버지 전부다 화해했다 해놓고 막내아들은 화해 안했네?” 이렇게 되죠. 이게 우리네 마음이잖아요. 그러니까 인간들이 바라는 고통과 질고 속에서 하나님과 화해가 되면 뭐가 없어집니까? ‘고생 끝, 행복 시작’이 되는 겁니다.

여러분, 불교의 모든 원리들이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고뇌에서 나와요. 어린 학생들, 고뇌라는 말을 알겠어요? 고뇌는 고통스러워서 고민하는 것을 고뇌라고 하는 거예요. 생로병사, 태어나고 죽고 병들고 늙고 죽고 하는 이 모든 것이 우리에게 고통이 오는데 이 고통의 원인은 자연의 원리와 우리의 원리가 안 맞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연의 원리는 조사해 보니까 자연의 원리는 욕심이 없다는 거예요. 따라서 우리가 뭐만 버리면 이 모든 번뇌와 고통에서 해탈할 수 있다? 욕심을 버리면 된다는 거예요. 그게 욕심이에요. 이렇게 하면 우리 행복하게 살 수 있다가 창세기3장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이 땅에 보내신 그 원리와 하나님의 뜻과 달라요. 그게 욕심이에요.

법정스님은 소유를 버리라고 했잖아요. 법정스님이 소유하고 싶은 게 있었어요. 그래서 법정스님의 별명이 무소유입니다. 웃어야 되는데 안 웃네요.  ㅎㅎ 법정은 ‘무’라는 세계가 갖고 싶은 거예요. 있음의 세계 말고 있음의 세계는 번뇌가 오기 때문에 아예 없는 세계를 갖고 싶다는 거예요. 그것을 가지고 “무소유”라는 겁니다. 나 여기 있음에 모든 것을 다 소유하고 싶은 거예요. 이런 노래있죠.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 굉장히 대단한 사랑 같잖아요. 받은 사람이 “네가 왜 주는데?” 이 말에 삐집니다. 어떤 여인이 있다 할 때 여기에 그 여인이 차지하려는 남자가 10명 있습니다. 첫 번째 남자가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 하면 옆에 사람들이 ‘니가 뭔데 모두 드려 내가 모두 드려야 돼’ 이게 뭡니까? 이게 모두 드리는 마음가짐입니까? 결국 여자에게 모두 드리는 마음은 드릴 수 있어요, 없어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여자 쪽에서 채택을 해 줘야 되죠. 여자 쪽에서 채택을 해 줄때 그 남자는 모두 드리고 할 필요가 없어요.  왜냐 하면 여자 쪽에서 선택을 하면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이 모두 자동적으로 전부 다 여자 것이 되겠죠.

제가 지금 이야기하는 것은 십자가 피가 빠진 상태에서 인간이 하나님 앞에 상대했을 때 인간이 비록 자기가 작다고 하고 비록 자기가 죄인이라고 하고 자기가 부족하다고 자기부인을 해 봤자 그 사람은 바로 자기가 꾸며낸 하나님 속에서 자기 자신의 자리를 절대로 포기하지 않죠. 주권사상이 나를 구원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주권사상을 안다는 그 지식이 자기를 구원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이게 바로 영지주의입니다. 그런데 그런 주권사상 속에 만약에 십자가 복음이라는 지식이 들어갔다고 합시다. 그러면 십자가 복음의 지식이 그 주권사상을 뒤엎어버릴까요 아니면 그대로 건재하게 만들까요?  어느 쪽입니까? 그런 사상이 십자가 들어가면 하나의 장식품 걸어 놓은 거에 불과해요. 절대로 주권사상을 뒤엎어버리지 않습니다.

십자가 아는데 주권사상은 허물어 지지 않아요. 그것도 지옥 갑니다. 오늘 지옥 갈 사람이 한 둘이 아닙니다. 이렇게 지옥 간다는 소리를 하니까 그렇게 욕을 하는 거예요. 십자가 마을사람들이 노리고 있는, 만화책에 나오는 시커먼 수풀 속에 있는 눈만 있는 사람들이에요. 십자가 언약 백날 이야기해 봐라 이 주권사상 앞에서 전적으로 죄인이라는 말의 의미를 모릅니다. 죄인이라는 의미를 “나 부족합니다.” 라고 하면서 부족한 자기 자신의 그 주체에 대해서 힘을 가지고 있어요. 나는 이렇게 부족하니까 나 아니면 누가 감히 구원받느냐 이렇게 나온단 말입니다. 그게 마태복음 9장에서 바리새인들이 금식할 때 주님께서 뭐라 했습니까? 같이 금식했습니까? 죄인들과 함께 밥먹으러갔죠.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자기를 죄인이라고 간주하는 의인을 부르러온 것이 아니고 나는 그냥 죄인을 부르러온 거예요. 죄인이 의인되기 위해서 방방 뛰지 말라 이 말이죠. 죄인은 그냥 죄인이라고 죄인값을 하라 이 말입니다.

죄인 값이 뭡니까? 나는 구원 안 됩니다. 나는 구원될 자격도 없습니다. 만약에 내가 구원된다면 이것은 내가 원해서가 아닙니다. 결단코 아닙니다. 주님이 원한 겁니다. 주님이 원한 구원이 나에게 덮쳐서 그때부터 졸지에 주님이 원하는 복음을 위한 사람이 될 뿐입니다. 주님이 날 구원하면 그때부터 내가 원했던 구원을 내가 챙길 수 있는 입장이 됩니까? 안됩니까? 그럴 입장이 안 되고 내가 원하는 구원을 내가 챙기는 것이 아니고 복음으로 구원받았기 때문에 복음을 위하여 내가 쓰여 질뿐 이죠. 고린도 후서 5장 15절에 보면 나오죠.

고후 5:15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여기서 강조점이 뭡니까? 예수님이 강조점이에요? 인간이 강조점이에요?  예수님이죠. 대신 죽으심이 너의 존재보다 더 세다는 말이죠. ‘내가 어떻게 할까요?’ 보다, ‘내가 어떻게 살까요?’ 보다 대신 죽으심이 너를 그렇게 만들었으니까 어디를 가더라도 대신 죽으셨다는 것이 강력하게 역사하게 마련이다, 일하게 마련이다 이 말입니다. 뭘 해도 그 대신 죽으심의 복음을 위하면 일이 되는 거예요. 복음을 위해서 일하는 것과 아닌 것이 구분이 되는 것이 아니고 뭘 해도 그것이 예수님을 위한 일이 되는 거예요.

지금 주권사상이 뭐가 문제인가 하면 십자가를 분명히 거기에 집어넣어도, 집어넣었다 퐁당 소리도 안나요. 십자가 건축물은 그대로 있고 그저 하나의 더 보태기 위해서 이런 사건 있었구나 하고 들어 갈 뿐이에요. 그렇게 되면 내가 여기 있으면 내가 여기에 무대를 장치했는데 나를 아주 작게 그려놓고 하나님은 크게 그려놔요 여기에 십자가 집어넣어도 하나 걸쳐놓는 거예요 언약도 하나 걸쳐놓고 그러나 자기는 여전히 이 구조에 그대로 있죠. 그런데 진짜 십자가가 만약에 들어가 버리면 이렇게 생각한 것이 거짓된 인간에서 나올 수 있는 죄 자체인거예요 그러면 이게 거짓되니까 주권사상이 안 통하겠죠. 안통하면 이것을 지워버리는 거예요 지워버리면 누구도 함께 지워졌습니까? ‘나는 작다, 왜소하다, 나는 죄인이다.’ 이것도 같이 지워버렸죠.

내가 죄인이라고 하는 것은 죄가 아니에요. 죄인이라고 하는 그것이 그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것만큼 마치 나의 마지막 남겨놓은 자존심처럼 쥘 수 있는 나의 의로움이라고 챙기는 거예요 그런데 십자가가 이렇게 이야기한 바리새인, 이렇게 이야기한 인간들을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를 져버리면 이렇게 마지막 남긴 자존심마저 무의미하게 부인당하죠. 이 자체가 정죄당하죠. 이 자체가 정죄 당한다는 말은 이것을 이렇게 지적 하는 분, 주권사상도 죄라고 주장하는 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었다는 말은 바로 이런 죄 때문에 십자가에 죽었으니까 사람 손에 의해서 사라진 분이 그냥 사라져주면 되는데 사라진 분이 사라졌다고 여겼는데 사흘 만에 도로 나타나 버리니까 그동안 예수님을 죽여서 사라지게 했던 그 손들이 그 얼굴들이 경악스럽죠.

그게 사도행전2장에 나옵니다. 어찌할꼬! 우리 손으로 처리했는데 그 처리한 귀신이 다시 살아나온다면 우리의 행동이 뭐가 잘못됐습니까? 우리가 죽였다는 것이 잘못된 거예요, 사도 바울이 다멕석에서 누구를 만났어요? 예수님을 만났잖아요. 그때 사도 바울은 사도가 아니였었요 그냥 사울이었어요. 사울이 누구를 공격했습니까? 예수 믿는 사람이 엉터리라고 공격했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이 거기에서 나타나 버리니까 지금 예수님을 공격하고 있는 자신의 모든 차상포대가 모조리 진짜 성경말씀대로 다 거짓되고 오직 예수님이 우리 손에 죽었던 그분만이 참되죠.

그러면 우리에게 계속 참됨과 진리와 의가 나온다면 계속해서 이런 사상은 바로 이것이 죄라고 우리가 죽을 때까지 천국 갈 때까지 계속해서 이러한 사상체제가 우리게 덮쳐주겠죠 당신은 뭘 믿습니까? 누구를 믿습니까? 난 예수를 믿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의 예수 믿는다는 것이 주권사상 속에 하나의 정보로서 들어가는 예수인지 이것을 주권사상을 와장창 부셔 버린 이후에 나온 예수님인지 알 길이 없겠죠. 그러면 어떻게 이야기해야 합니까? 나는 나의 어떤 행함도 믿지 않고 어떤 사람도 다 거짓되고 오직 예수님만이 참되고 이것을 알게 하신 것이 예수님입니다 라고 하면 거기에 뭐가 포함됩니까? 뭐뭐은 아니고 할 때  아니고에 해당되는 것이 누구에요? 내 자신에 대해 생각했던 것이 모두 다  아니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내가 이런 사상을 나는 아니고 주님만 안다는 사상을 내가 자랑하는 것이 아니고 간단히 말해서 우리는 누구만 자랑한다?  예수님만을 자랑하는 거예요. 예수 믿는 그것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만을 자랑하는 거예요. 예수님 믿는 것을 자랑해 버리면 이 예수 믿는 자아를 이 주권사상에 또 이 자리에  파괴될 자리에다 또 짚어 넣게 되는 거예요. 집어넣게 되면 다른 사람과 또 비교되겠죠. 이 말은 우리가 이미 주님에 의해서 죄인 되었다고 한다면 더 이상 자기 자신에 대해서 죄인 되었다는 말이 의미가 없어요. 내가 죄인 중에 괴수라고 하는 것은 사도 바울이 예수님의 의로움 앞에서 이야기하는 거죠. 예수님 때문이고 십자가 때문이고 내가 내 자신 앞에서 죄라 하는 것은 이 주권사상처럼 하나님보시기에 내 죄입니다 하는 것은 의미가 없어요. 죄라고 하는 그 자체가 그 순간만큼은 하나님 앞에서도 잘난 것이 되기 때문에 문제가 된단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화평케 되었다는 이 말은 지금 예수님의 피 앞에서는 모든 인간이 다 죄인데 그 다음에 구원될 자 따로 있고 지옥 갈자 따로 있다는 것은 이것은 구원될 자의 소원이 아니고 지옥 갈 사람의 소망이 아니고 예수님 본인이 마음대로 결정한 사항입니다. 할 때 그리고 그 자체가 참 잘 하신 결정입니다. 라고 고백하는 거예요. 우리가 엄마가 지옥 간다면 그것은 참 잘하신 결정이십니다. 우리 엄마는 쉽게 하는데 더 못하는 게 있어요. 내 뱃속에서 태어난 자식이 지옥 간다면 ‘주께서 정말 참 잘하셨습니다.’ 라는 말을 할 수 있는 거예요. 감히 그러한 고백을 언제 하겠습니까? 아마 자식한테 사기당해 봐야 아하 자식도 믿을게 못되는 구나  그때서 알까요 자식이 반대하는 결혼할 때 아하 그래서 이제 너는 나한테 원수다 하죠.

우리에게 원수가 있다는 것은 그동안 우리식으로 화평과 화해를 생각해 둔 것이 있다 이 말입니다. 십자가가 들어온다는 말은 더 이상 우리가 우리자신에 대해서 물을 것이 없어요. 물을 것도 없이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에 새삼스럽게 우리에게 착하고 나쁜 짓할 것도 없어요. 이미 악하기 때문에 다만 우리가 자랑할 것은 주님밖에 없습니다. 그것을 하나님의 의다 하고 그런 고백을 하나님의 의인이라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의라는 것은 우리가 평소에 어떤 생각을 가졌는가를 꿰뚫어 보이고 속속들이 다 깨뜨려보시고 십자가의 피를 가지고 우리 손에 죽었던 그분이 되살아나서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럴 때 분명히 내가 미워했다고 밀쳤는데 다시 나타나서 너 때문에 죽었다고 이야기 할 때 비로소 그동안 내가 생각했던 자식도 이건 주님의 자식 아니고 다 내 자식이고 나한테 내 자존심을 키울 수 있는 모든 것은 내거라고 일방적으로 우겼기 때문에 잘못된 화평, 잘못된 화해를 우리는 내 중심으로 생각했다는 사실을 또 다시 죄를 깨닫게 되는 겁니다.

끝으로 골로새서의 나오는 화평에 대해서 22절 봅시다.

골 1:22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

예수님의 육체의 죽으심이 우리하고 관계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관계가 있죠. 우리가 어떤 변화를 주셨습니까? 너는 뭘 해도 죄가 되고 그 죄 된 것을 깨닫게 함으로서 우리관계가 이미 의로운 관계라는 것을 깨닫게 했죠. 우리의 모든 행동이 거룩하고 흠이 없고 책망할 것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죠. 왜, 우리는 자기가 어떤 것을 해도 죄가 됨을 하나님의 의의 능력이 와서 알게 하니까 어떤 것도 다 의를 드러내기 위한 다른 말로 복음을 위해서 이런 행동을 하도록 조치하신 거예요. 예를 들어서 그런 애들이 많이 있으면 좋겠지만 “엄마, 100점 맞았어.” 엄마가 “까불지 마 십자가가야” 애가 “100점 맞아서 내가 잘난 체 했는데 십자가가 앞에서 나는 죄인이야?” 라고 하잖아요. 100점 맞은 것이 죄입니까? 100점 맞았다고 까불고 교만에 떠는 것이 죄이겠어요? 까불고 교만에 떠는 것이 죄이죠. 100점 맞은 것은 죄가 아니죠. 아는 것이 나오는데 아는 대로 했는데 그게 무슨 죄입니까? 100점 맞으면 갑자기 자기가 괜찮은 존재인줄 알고 우쭐될 수밖에 없죠. 그게 바로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하는 거예요. 이 이야기가 무슨 뜻인지 알겠죠. 그럼 반대로 합시다.

“엄마 또 0점 맞았어!” 0점 맞아 왔어요. 그런데 “엄마가 야야 십자가” 그러면 죄인이 뭡니까? 0점 맞는 것이 죄지어서 벌 받았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0점 맞을 수밖에 없도록 교사가 내가 모르는 것만 출제해서 0점 맞을 수밖에 없게 되었고 커닝을 하려해도 그날 유난히도 애들이 무슨 원수가 졌는지 커닝을 안 시켜주네 커닝 페이퍼를 만들었는데 바람이 불어서 보통창문을 안 여는데 바람에 날려서 커닝 페이퍼가 후루루 날아가 버리고 하는 이 모든 환경이 누가 만든 겁니까? 우리로 0점 맞은 것을 인생실패라고 낙담하는 그 교만 그 좌절 자체가 죄라고 지적하기 위해서 주께서 만든 환경입니다. 그러니까 낙심도 하지 말고 우쭐되지도 말고 모든 것이 복음을 위하여 우리는 존재 한다. 제가 예드는 것이 너무 억지 같지 않아요?  너무 심하다 오버한다 생각 안 들어요? 제가 생각해도 제가 오버했습니다.

그러면 묻습니다. 100점 맞았습니다. 100점 맞고 가만히 오는데 100점 맞고 좋아하면 문 앞에서 엄마가 “야야 십자가야” 아하 교만하지 말라 하는 구나 그래서 걔가 100점 맞았지만 엄마 앞에서 좋은 척하지 않았습니다. 이거 죄입니다. 그러니까 성질대로 외치세요. “엄마 100점 맞아 좋아” 또는 “엄마 0점 맞아서 나는 망했어.” 그냥 성질대로 사세요. 사는데 주의 성령이 뭐라 합니까? 이미 십자가 피로 말미암아 화해했느니라 이제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이미 행동, 태도에 대해서 문제 삼지 않겠다는 거예요. 왜, 하나님께서 우리보고 문제 삼는 게 아니라 누구를 보고 문제 삼았어요? 우리를 대신하여 예수님께서 문제를 끝낸 상태이기 때문에 이건 나쁜 행동이고 이건 착한 행실이고 하는 스스로 조절을 해도 의미가 없는 거예요 다만 믿음으로 행하는 사람, 이것이 갈라디아서에 나오죠. 그 십자가 피를 믿음으로 내 일은 이미 예수님이 처리했다는 것을 믿음으로 하게 되면 그 사람이 성공하나 실패하나 까불거나 촐랑대나 주님만 증거하는 사랑으로 역사하는 거예요.

끝으로 주님께서 이렇게 모든 것이 사랑으로 역사 하는 하나님의 완벽하게 흠이 없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해서 어떻게 하느냐 사람은 자기 몸에 감정이 있어서 그때그때 만들어 내거든요 몸이 건강하면 기분도 좋아져요 자아가 멋있는 자아 같아요. 그런데 몸이 불편하고 불안정하면 아프면 찡그리게 됩니다. 힘들어요. 찡그리면서도 이래서는 안 돼 성령의 열매야 하고 위장하지 마시고 그냥 몸이 움직이는 대로 가세요. 그런데 그 몸이 이야기하는 것이 뭐냐 아담의 몸이기 때문에 자기를 지향한다 자기를 바라보게 되어 있어요. 예수님의 십자가가 주권사상을 뒤집어 버린 이유가 주권사상을 생각하는 자기 자아에 대해서 십자가가 증인으로 찔러버리죠. 사도바울이 사도되기 전에 무슨 사상 이었습니까? 여호와 주권사상이죠. 그러면 사도 바울이 십자가의 뭡니까? 주권사상에 포함되는 것이 아니라 주권사상을 생각한 나를 경향해서 누가 찌르고 들어와요?  그 십자가가 나를 찌르고 들어오죠.

그러면 내 안에 누가 살아요? 나라는 주체가 사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가 살죠. 그리스도가 사는데 그 몸은 어느 몸 안에서 살아요? 이 육적인 아담의 몸 안에서 그리스도가 살 때지요 그러면 아담의 죄에 의해서 이 몸은 누구를 지향한다? 누구를 바라봐요? 나를 바라보고 내안에 사시는 분은 누구를 바라보게 합니까?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고 그래서 여기서 어떻게 됩니까? 만날 원수가 되고 원수 됐는데 성령 알게 되면 주로 말미암아 화해했군요. 개입된 가운데서 죄인이 유지돼야 화목이 화목답게 내 중심의 화해, 화평이 아니고 예수님중심의 화평 됨을 날마다 고마워하고 감사하는 거죠.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몸이 원래 우리 몸이 아니고 이게 주님의 몸인데 우리가 오인하고 오해해서 내 것인지 알았습니다. 남과 비교했습니다. 남은 잘되는데 나는 못됐다 그러한 나 자신만 바라보는 그런 생각에서 그게 죄인지 깨닫게 해 주시고 어떤 몸이던 그리스도의 몸이 된다면 흠이 없고 티가 없음을 믿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