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의존교회(그리스도 안에서 화평)-110211a-(이근호 목사)
오늘은 골로새서 1장19절부터 할 차례입니다.
골 1:19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골 1:20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방금 읽었던 19절에서 다른 것은 다 잘라 내고 중요한 주제를 둘로 이어 본다면 이것은 ‘십자가 피로 화평을 이루사’이 대목에서 발췌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십자가 피로 다음에 괄호를 해 놓고 여러분들이 넣고 싶은 것을 여러분들이 넣어보세요. ‘십자가 피로 (부자 되었다.)’ ‘십자가 피로 (건강하게 되었다.)’ ‘십자가 피로 (교회가 부흥되었다.)’이런 것을 넣고 싶어 할 거예요.
그런데 아이 돌잔치 할 때 아무 것도 모르는 애들을 앉혀놓고 상에 실타래, 책을 펴놓고, 현찰, 카드 아니고 현금을 놓고 어느 것을 짚겠느냐 라고 하는 건데 이것 실하고 책, 화폐……. 항목 정하는 것 아기에게 물어봤습니까? “얘야 어떤 것이 좋아?” 이렇게 물어보지 않고 엄마가 일방적으로 원, 투, 쓰리 정해 놓고 엄마가 정해 놓은 그것을 애보고 짚으라고 하겠지요. 그러면 앞에 진열되어 있는 것은 아이의 욕망이 아니고 애 엄마의 욕망입니다. 아이 엄마가 오죽 이런 것이 미흡했으면 애들까지 대를 이어서 “얘야 너는 이 세 가지가 다 좋은 거야” 이런 식으로 주입시킵니다. 돌 잔치할 때부터 계속해서 주입을 시키는 겁니다. 만약에 이것 말고 다른 것을 짚으려고 하면 손을 막 때리죠. 그쪽으로 가지 말라고 그쪽으로 가서는 안 된다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여기 아이의 배후에 십자가 피로 ( ), 십자가 피로 뭘 원하느냐? 이 십자가의 피로 뭘 원하십니까? 라는 것을 A4용지를 하장씩 나눠주고 한번 써보게 하자는 말이죠. 교회 오는 모든 사람, 목사 본인도 쓰고 십자가 피로 뭘 원할 것인가? 다른 말로 하면 십자가 피가 어디에 쓸모 있는가? 또는 십자가 피가 무엇을 지향하는가? 무엇을 경향 하는가에 대해서 아는 바에 대해서 주관식으로 쓰세요. 논술식으로 십자가 피로 인하여 여러분들이 기대하는 것이 뭡니까? “목사님, 저 십자가 피 믿어요.” 목사님이“그래서? 십자가 피로 뭘 얻겠다는 거야?”정답을 말씀 드릴게요. 십자가 피로 이제 몽땅 버려졌다. 십자가 피로 이제 우리 죽었다. 이게 정답이 되는 겁니다. 의존교회 교인으로 알고 있는데 이런 글을 썼어요. “내 인생은 구제역이다.” 제가 그 이야기에 감동받았습니다. 누구인지 모르겠지만 구제역의 특징을 4자로 하면 “매몰처리”입니다. 고기값도 안 나올 거고 돌아다니면 다른 소에게 오염될 소이고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어디에 쓸모 있나 차라리 그만 땅속에 묻히는 것이 낫겠다. 다른 소를 위해서 그리고 나아가서 대한민국을 위해서 땅속에 묻히는 것이 낫겠다. 십자가 피가 뭔가 하면 너는 좀 입 다물고 가만히 있어! 십자가 피, 내가 좀 설칠게 십자가 피로 우리는 드디어 입이 열 개라도 할 말 없게 되었습니다. 몽땅 다 버려지게 되었습니다. 몽땅 다 강탈당하고 박탈당했습니다. 십자가 피로 우리는 박탈당했습니다. 우리 것이 여백이 되고, 공백상태가 되고 빈자리가 될 때에 그 다음에 십자가 피로 채워지는 것은 우리가 기대했던 것이 아니고 십자가 피를 흘리면서 아버지하나님과 아들하나님과 창세전에 생각해 놓았던 그 모든 내용들이 우리가 죽이는 빈 공란에 차고 넘치는데 그것을 19절에서는 충만 이라고 하는 겁니다.
길거리에 보면 충만 교회가 참 많이 있어요. 충만 교회가 되려면 안에 교인이 한 사람도 없어야 돼요. 교인이 한 사람도 없어야 돼요. 왜? 충만 교회가 성경 복음에 따라 충만하려면 아무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없다는 것 그 자체가 그것이 가득이에요. 그것이 충만 이에요. 아무것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상관없어, 아무것도 없더라도 나는 상관없습니다. 내가 기대했던 것이 아무 것도 없다 할지라도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그것이 모든 것이 충만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모든 것이 충만했다고 되어 있거든요. 충만했으면 그 충만한 결과가 전 세계 모든 인민들이 중국의 14만 인민들이 다 복음 알게 되었습니까? 아니 전 세계 60억 인구가 다 복음을 알게 되었습니까? 그렇지 않죠. 그냥 그대로 있어도 하나님께서 그것을 예수 안에서 충만하다고 본거예요. 우리들 생각의 충만은 내가 기대했던 그릇에 내가 준비된 그릇에 내가 원하는 것을 가득 채워줄 때 그것을 충만 이라고 보는 겁니다. 충만 이라고 하는 것은 말 자체는 가득하다고 하지만 사실은 그것을 자세히 풀어보면 남이 원한 그것 가득한 것 말고 내가 원하는 것이 가득하다는 것이 앞에 그것이 들어 있는 거예요.
우리나라 축구 대표 팀하고 세계에서 축구 제일 잘한다는 스페인하고 친선게임을 했다 칩시다. 그런데 그 경기를 못 본 친구가 이야기합니다. “어젯밤에 축구 했는데 우리나라 어떻게 됐어?” 그 친구 하는 말이 “가득했어, 충만했어.” “충만했어? 그럼 아주 경기를 잘했어?” “잘했어 멋들어지게 잘했어. 스페인선수가 공 드리볼하면 다 비껴주고 스페인선수가 공차면 대한민국 골대로 친절하게 안내해 주고 충만했어. 그래서 우리는 10대 0으로 졌어 아주 충만했어.” 그렇게 하면 듣는 사람이 이해되겠습니까? 분명히 0대0이 아니고 10대0이에요. 뭔가 충만했지요. 충만했는데 어때요? 골 많이 넣는 걸 골 잔치라 하잖아요. 충만했지요. 충만했는데 거기에 내 것을 집어넣으면 그러면 “우리나라는 몇 골 넣었는데?” “없어.” “에이 그러면 그거 충만 아니네.” 결국 사람들은 경기가 10골이나 넣어도 무엇이 없으면 충만 아니라고 단정해 버려요? 내가 기대한 내 것이 없으면 천하에 예수님이 십자가지고 골로새서1장19절 아무리 주장을 해도 그 주장을 우리 인간은 못 받아 들이겠다하는 겁니다. 우리 성경 처음부터 지금 잘못보고 있을 가능성이 굉장히 높죠.
성경에서 지금 전 세계는 예수님 안에서 충만하다고 하는데 개척 교회하는 목사는 충만하면 서울 시내에 모든 사람들이 우리 교회 와서 우리교회 충만해야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충만한 것으로 저는 간주 하겠습니다 하고 일방적으로 우기는 거죠. 그것을 예수님의 피에 대한 대립, 또는 대치, 또는 원수라고 하는 겁니다.
21절 봅시다. 골 1:21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거기에 방금제가 언급한 말이 나오죠. 원수죠. 원수라는 것은 적입니다. 적이라고 하는 것은 이쪽 진영에 있지 않고 저쪽 진영에 있는 것을 적이라고 하고 그 두 진영 사이에는 치열한 대립, 성격적으로 성질이 대립되는 성질을 가지고 대치되어 있는 국면, 대치되어 있는 상황을 가지고 원수라고 해요. 적이라고 할지라도 이쪽 진영 ,나의 진영에 와 버리면 그것을 원수라고 하지 않고 그것을 포로라고 하지요. 여러분, 포로와 원수의 차이점을 아시겠습니까? 포로의 특징은 기가 죽어있다는 거예요. 이미 총이고 칼이고 다 빼앗겼으니까 기가 팍 죽어 있지요. 원수는 기가 죽습니까? 안 죽습니까? 원수는 기가 팔팔 살아서 큰소리 팍팍치는 거예요. 성경 구약에 있는 역대기와 열왕기상하는 무엇을 보여주느냐 하면 ‘이스라엘아!’ ‘예.’ ‘유다야!’ ‘예.’ ‘ 하나님의 원수를 너희들에게 보여줄게.’라고 보여준 그 원수들이 모압, 압몬, 저 멀리 있는 앗수르, 바벨론 그런 나라들 있잖아요. 그러면 우리가 역대기나 열왕기 보면서 무엇을 파악해야 됩니까? 하나님의 원수가 있군요. 일단 그것을 파악해야겠죠.
두 번째, 그 원수의 싸움에서 우리 이스라엘이 어떤 식으로 하나님께서 승리로 일구어 내는가를 봐야겠죠. 원수가 이스라엘에게 굴복된 상태를 오늘 본문에서는 그것을 화목 또는 화평이라고 하는 겁니다. 화평이라고 할 때는 전제조건이 원수가 존재해야 되고 그 원수의 원수가 여기에 항복할 때 까지는 우리 인간의 방법입니까? 하나님의 방법입니까? 하나님의 방법이죠. 그 하나님 방법에 나설 때 구약성경에 보면 칼과 마병과 창이나 군사력, 전차로 이기는 것이 아니라 원수를 이길 때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기죠. 그 하나님의 이름이 쓰는 무기가 뭡니까? 무기가 하나님의 약속, 언약이죠. 언약대신에 칼과 창과 병거를 들고 나오는 것은 누구 쪽의 무기입니까? 이스라엘 쪽의 무기가 아니고 원수 쪽, 이방인들의 무기이겠죠.
그러면 싸움과 싸움은 무엇과 무엇의 싸움일까요? 인간의 이름, 인간의 힘을 의지하는 인간과 누구의 힘과 싸움 입니까? 하나님의 이름에서 나오는 힘의 싸움이겠죠. 문제는 이스라엘사람이나 유다 사람들이 인간에서 나온 힘이라는 것은 그들은 납득이 돼요. 저쪽이나 이쪽이나 다 같이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으로서 쓸 수 있는 무기는 뻔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쓰시는 그 무기언약에 대해서는 그들은 모르고 있어요. 왜 모르느냐 하면 자기 상태가 공백, 비어있는 상태가 아니고 이스라엘백성들 안에 인간의 힘으로 얻을 수 있는 무기로 이미 장착되었기 때문에 이것이 비어 있지를 않아요.
이것이 꽉 차 있다 말이죠. 이것은 인간의 힘으로 충만 이죠. 하나님께서 인간의 힘으로 충만한 것을 저쪽에 같은 인간의 힘으로 충만한 것과 대결을 붙게 합니다. 대결을 붙게 되면 누가 깨지게 되어 있어요? 이쪽 이스라엘이 백만이고 저쪽 이방인 군사가 5천명이라면 인간적인 의미에서 누가 져야 됩니까? 백만 군사인 이스라엘이 이기고 5천명인 이방인이 져야 되는데 하나님께서는 백만 명, 5천명 해 놓고 거꾸로 누가 승리하게 합니까? 세상에 5천명이 우리 백만 이스라엘을 이기게 해요.
그래 놓고 하는 말이 이번 전쟁은 하나님이 붙이시는 전쟁이라고 해요. 본드 알죠? 붙이는 것, 붙이시는 전쟁, 하나님이 붙이시는 전쟁이에요. 인간 대 인간의 힘, 인간의 무기와 인간의 무기가 붙였을 때에 지는 쪽이 하나님이 있는 쪽이고 이기는 쪽이 여전히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하나님이 없는 쪽이 되는 겁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붙이시는 전쟁의 방식이에요.
처음에 약속의 땅에 들어 갈 때에 그때 쇠붙이 종류의 무기는 이스라엘에게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사람들은 무엇을 다 정복했습니까? 가나안땅 전부를 정복했지요. 그때 여호수아가 한 고백이 있습니다. 너희들이 이 땅을 차지한 것은 우리들이 힘이 세서가 아니라 모세에게 약속한 그 하나님의 맹세를 이루기 위해서 그렇게 했다 했습니다. 이것은 여리고성부터 가나안땅 전체 전쟁에 견본이 되는 겁니다. 여리고성 때에 그들이 무슨 힘으로 이겼습니까? 무슨 힘으로 여리고성을 무너뜨렸지요? 사람들이 둘러서서 “으싸, 으쌰 다하면 된다.” 해서 여리고성이 흔들흔들하다가 무너졌습니까? 인간의 완력, 손 힘으로 해서 무너뜨렸습니까? 그들은 믿었죠. 뭘 믿었습니까? 여리고성은 모세에 의하면 하나님이 접수하게 되어 있다 그 이유는 여리고성 사람들은 언약이 없기 때문이고 우리에게 는 하나님의 언약이 있다.
언약이 없는 쪽은 속되고 더럽고 불결한 민족인 반면에 언약이 있는 쪽은 그 언약 안에서 우리는 거룩한 민족이 된다. 그러면 하나님은 더러운 하나님이 아니고 거룩한 하나님이기 때문에 어느 편에 서겠습니까? 하나님은 거룩한 민족과 함께 한다. 거룩 이라는 증거가 뭐냐? “거룩”여기에 글자를 써서 전부 이마에 붙였습니까? 여리고성 때 거룩의 증거가 뭐였습니까? 언약궤를 앞장세웠죠.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을 돌았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더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 사람이 중요한 게 아니에요. 그러면 어떤 사람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여리고성 무너진 것은 자기들이 뱅뱅이 돌다보니까 사람들이 어지러워서 스스로 무너진 거라고 해요. 사람들이 돌은 게 아니에요. 사람이 돌아버리면 사람 대 사람의 힘이 돼요. 뭐가 앞장세워졌습니까? 언약궤가 앞장서서 돌았습니다. 그러면 언약궤는 누구 말 듣습니까? 언약궤는 사람의 말을 들어요? 언약의 주인 되시고 언약에 담겨있는 언약에 실려 있는 하나님의 이름말을 듣지요. 언약궤에 하나님의 이름이 있으니까 하나님의 이름이 하루에 한 번씩 일곱째 날은 7번 돌았죠. 그래서 총 합해서 13번이잖아요. 13번이라는 숫자는 의미가 없고 7번 돌았던 날이 언제냐? 제 7일째죠. 제 7일째는 뭐하는 날입니까? 천지창조를 하고 난 뒤에 제7일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안식하시고 영광을 받으시는 날이잖아요. 여리고성을 무너뜨린 힘은 인간의 힘이 아니고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의 힘에 의해서 여리고성이 무너진 겁니다. 학생들 있는데 어려운 질문해서 죄송합니다만 창조의 힘에 의해서 여리고성이 무너졌습니까? 아니면 창조대로 그게 무너져야 창조다운 겁니까? 창조의 힘이 저쪽은 무너뜨리면 여리고성에 그것도 창조에서, 항목에서 빠져있는 샘이 되잖아요. 그러면 창조의 힘으로 여리고성이 무너졌으면 애초부터 창조 계획 안에 이미 그 내용이 포함되어 있는 거예요. 그래서 지금도 불교신자가 많고 안 믿는 사람이 많지만 주님 보시기에 십자가에서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화평 되어 있고 이미 충만 되어 있는 거예요.
이제 오늘 본문의 취지를 아시겠습니까? 옆 가게 절에 다니고 앞 가게는 교회 욕하고 이렇게 되더라도 우리 주님 보시기에 그게 합당한 제자리에 박혀있는 거예요. 그리고 그렇게 박혀있을 때 전체를 볼 때에 그리스도로 인하여 통일되었고 그리스도로 인하여 화평 되었고 그리스도로 인하여 충만한 거예요. 옆집 가게 사람이 지옥 가 줘야 주님의 솜씨가 주되심이 맘껏 세상 속에 영광을 받습니다.
다시 설명할게요. 여리고성을 창조의 힘으로 무너뜨리고 없앤다고 한다면 처음부터 여리고성 자체는 창조밖에 있었는데 창조의 힘이 밖에 있는 것을 주저앉았다 이렇게 되거든요. 그게 창조의 힘이 아니고 ‘너는 원래 장차 이스라엘 백성이 쳐들어 와서 너는 무너뜨리게 될 수밖에 없던 그런 성을 지은 거야’라는 것이 여호수아장군에 의해서 이스라엘 대군을 만났을 때 비로소 그것이 확연하게 완전히 드러난 거예요. ‘그렇구나, 우리 여리고성이 무너지게 되어 있었어.’ 이것을 미리 안 사람은 누구였을까요? 두자인데 앞에 직업이 붙습니다. 누구입니까? 여리고성에 살던 주민 중에 한 사람입니다. 기생 라합 아닙니까? 기생 라합이 이스라엘 정탐꾼에게 뭐라 했습니까? 우리의 창조자이신 그 하나님이 지금 이스라엘과 함께 동행하고 있으니 어찌 그 창조의 위력을 우리가 당해낼 수 있습니까? ‘살려주세요!’ 영어로‘help me!’오늘 갑자기 영어 쓰는데 'help me!' '살려주세요!' 이거 믿음입니다. 그러니까 아이 돌 잔치할 때에 실과 책과 화폐도 있지만 이 뒤에 뭘 하나 더 써야 하느냐 하면 “살려주세요!”완전히 돌잔치가 미쳤어요. 태어나자마자 살려주세요! 라고 하니 그럼 뭘 짚어야 돼요? 실도 아니고 책도 아니고 돈도 아니고 "살려주세요!"를 잡아야 합니다.
이 아이의 엄마 이름이 기생라합입니다. 엄마는 무엇을 보고 있습니까? 언약을 보고 있죠. 그 언약의 내용은 거룩과 비거룩과의 전쟁을 유발시키는 언약의 하나님이다. 그런데 그 거룩이라는 것은 우리가 만들어 낼 수 없고 거룩은 하나님의 언약이 임해야 된다! 왜, 언약에는 하나님의 이름이 있는데 그 하나님의 이름이 유일하게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거룩한 존재이거든요. 거룩한 존재가 자기 사람을 모으고 달릴 때 그 집단은 거룩한 사람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으로 쉽게 말해서 예수의 이름으로 우리는 의롭다함을 얻는 새로운 집단이 발생되는 겁니다. 그런데 의롭다는 그것이 자기 백성에게만 해당되는 그런 기능을 하는 것이 아니고 원수가 있으면 가만 놔두면 되는데 기어이 갈아서 그 원수의 원수 됨을 드러나게 할 때 비로소 이 전체가 다 합쳐서 이쪽의 거룩한 민족 저쪽은 안 거룩한 민족 합쳐서 원래 창조할 때 의도 했던 하나님의 예수그리스도 안에 통일이 그렇게 구체화 되고 실현되는 겁니다.
여러분주위에 안 믿는 사람 있다고 해서 너무 슬퍼하거나 노하지 마세요. 때가 되면 그들이 다 원래부터 창조 안에 이미 그리스도 아래에서 움직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그때가 꼭 세상 멸망 때가 되는 게 아니에요. 그때는 바로 우리가 죽고 나게 되면 호출이 있습니다. 인자의 음성을 들을 때가 와요. 우리가 죽을 때 인자의 음성을 듣게 되면 우리는 거기서 학급 배치 받듯이 배치를 받게 되는데 너는 천국으로 이쪽은 지옥으로 배치, 배당이 돼요. 학급 배당이 돼요. 배당이 될 때 양쪽 다 예수님의 입장에서 배당이 되고 완전히 운명이 고정화 될 때 그것을 누가 진두지휘하시는가? 우리 예수님이 진두지휘했기 때문에 그것을 충만 이라고 하고 그것을 화평이라고 하는 겁니다.
지금 이 말에 여러분들이 머리로는 성경적으로 맞는다는 느낌을 줘도 마음으로 확 당기지 않을 거예요. 그 이유를 제가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제가 어제 뉴스를 봤는데 대학가 주변에 방이 모자란다는 그런 글을 봤어요. 대학가 주변에 방이 모자란다는 것이 여러분들이 이해되는데 그렇게 힘드십니까? 전혀 힘 안 들지요. 아 대학가 주위에 시골 학생들이 많이 와서 방이 모자라는 구나 전혀 이해하는데 어렵지 않죠.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해서 대신 돌아가셨다 이거 실감나십니까? 대학생들이 방구하기 힘들다 보다 덜 실감나죠. 그 이유가 뭘까요? 왜 그럴 까요? ‘우리나라 어선이 소말리아에서 나포되었다.’ 확 땅겨오죠. ‘이스라엘에 아사왕이 기도함으로서 적군을 물리쳤다.’ 영 안 땅겨오죠. 왜 그럴까요? ‘예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십자가 안에서 온 우주로 화평하게 했다.’ 영 안 땅겨오죠. 대학가에 방 모자란다는 것이 훨씬 더 다가오지 않습니까? 그 이유가 뭘까요? 그것은 우리 몸 자체가 우리 힘으로 살아가는 그런 버릇이 흠뻑 젖어서 그래요.
이제부터 이야기가 어렵습니다. 지금 까지 하는 것은 성경 내용에 줄줄 나오니까 연결되는 구나 우리가 이해를 하지만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제가 방금한 것을 다시 써 볼게요. ‘우리는 우리 힘으로 살아남겠다.’가 철두철미할 때 이 문장에서 키워드라고 하지요. 두 가지의 중요한 단어를 뽑아내면 ‘우리 힘으로 ’와 ‘살아남겠다.’는 거예요. 그러면 창세기 3장에서 하나님께서 생명이 생명나무쪽에 있다 했습니까? 지상에 쫓겨난 아담과 하와에게 생명이 있습니까? 어느 쪽에 생명이 있어요? 생명나무쪽에 생명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인정한 생명이잖아요. 그런데도 땅으로 쫓겨난 인간주제에 감히 우리는 안 죽으려고 하는 거예요.
지난 오후설교 호세아 하면서 이야기한 건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땅을 주신 것은 그 땅에서 살라는 것이 아니라 그냥 곱게 죽으라고 주는 땅이에요. 우리는 버릇이 살던 버릇이지만 호락호락하게 땅이 그냥 우리를 살려두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좀 천박한 예를 들지만 어떤 밀가루의 소원이 자기의 소원은 국화빵이 되는 소원이에요. 밀가루로 태어나서 국화빵 되는 것, 국화빵이 되고 싶은데 자기 주인이 자기를 붕어빵 틀에 넣어요. 그러면 붕어빵이 나오는 거예요. 가인이 하나님께 제사 들이는 의도가 계속 이 땅에서 살게 해 달라는 겁니다. 그런데 아벨은 이 땅은 우리가 죽어야 할 땅인 것을 내가 시인하게 해 달라는 거죠. 그래서 아벨은 죽었잖아요. 형한테 얻어맞아서 원래 살아야 되지 않아야 할 땅에 왔기 때문에 일종의 틀이에요. 우리는 국화빵을 원해도 우리를 강제로 붕어빵을 만들어 내는 그 틀이 우리가 지금 눈에 보이는 하늘과 땅, 이 세상 틀이고 우리의 세상이라는 우리가 태어나서 경험했던 모든 것들이 우리를 죽이기 위한 그런 힘들이 가해지는 거예요. 거기서 이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힘은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살 수 있는 힘은 없습니다. 힘이 없으니까 어찌되었든 우리는 맞서야 되는데 거기서 우리는 무슨 단어를 원하느냐 하면 화평과 화목과 평화와 안식, 행복 이런 단어를 우리는 끄집어내면서 ‘우리가 원하는 소원 화평과 화목과 평안과 행복과 건강……. 이런 것을 신이시여 우리에게 허락하옵소서.’ 라고 부르짖는 거예요. 그러면 주님이 “그것을 허락했으면 아예 이 땅으로 내쫓지도 않았다. 정신 차려 성경 창세기부터 봐봐” 일부러 죽으라고 내보낸 거예요. 죽어야 사는 겁니다. 천사도 옆에서 끼어들지요. ‘김 집사님 그냥 곱게 죽으세요.’ 약 올리는 것도 아니고 ‘김 집사님 그냥 곱게 죽으세요.’라고 천사도 거드는 거예요. ‘그러면 목사님 베드로는 왜 감옥에서 왜 안 죽고 빼내십니까? 그럼 모순되잖아요. 다르잖아요.’ 베드로 빼낸 이유가 감옥소에서 썩어죽는 거 말고 이왕 죽이는데 복음전하면서 죽으라고 내 보낸 거예요. 복음을 위해서 하나님의 화평을 위해서 우리 소원 말고 우리 안식 말고 우리 행복 말고 베드로의 행복 말고 사도 바울의 행복 말고 창세전에 배치되어 있던 창조의 본래 원리와 원칙을 따르라고 원리에 대해서 증거하라고 너는 교도소에서 죽을 인간이 아니고 이쪽에서 죽을 인간이야 나와서 복음 전하다가 거꾸로 죽던지 어떻게 되던지 원치 않는 대로 와서 죽어야 된다고 하는 겁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에요 사도 바울이 자기 고향에서 재판받아 죽을 수도 있어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옆에 서서 “얘야 너는 여기서 죽을 팔자가 안 돼” “그러면?” “너는 로마에 가야 돼” 로마에 가면 천년만년 삽니까? 로마에 가는 목적이 뭐에요? 여러분이 사는 목적이 뭡니까? 지금 노트 필기하는 목적이 뭐에요? 검사 받으려고 해요? 여러분, 태어나자마자 인간은 짹깍짹각 죽어가고 있습니다.
목욕탕 사우나 안에 모래시계가 있어요. 모래시계를 거꾸로 딱 놓으면 그 순간부터 뜨겁던 말든 모래알은 똑똑 떨어지지요. 더불어 우리의 몸은 벌겋게 돼서 드디어 지옥체험이 되지요 저는 사우나 갈 때 마다 이게 지옥이다 싶어요. 이게 모래시계가 5분짜리라서 천만다행이지 그 뜨거운데서 밖에서 문 잠가 보세요. 5분이 어디 있습니까? 바짝 말라서 완전 쥐포 되어서 밖에서 문 안 열어주면 그걸로 끝나는 거예요. 그래서 지옥이라는 것은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빠져나올 수 없다는 것이 일단 고통스럽고 안에 들어앉는 그 환경이 마치 소금으로서 튀김하듯이 늘 물 한 방울 아쉬울 정도로 그렇게 계속해서 불로 튀기는 소금구이하는 거예요. 그것이 바로 지옥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이 이야기했습니다. ‘네 몸을 죽이는 그것은 겁낼 필요가 없어 몸과 영을 지옥에 멸하는 자가 진짜 무시무시한 거야’ 이 말을 제발 판사 검사가 들었으면 좋겠어요. 세상에서 대우 받는 그런 인간들, 그거 마귀가 본인을 속이는 거예요. 돈 잘 벌고 권세 쓰는 것에 뿅 가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에 그것에 도취되어 그게 전부 인줄 알고 있어요. 진짜 목사 같으면 몸과 영혼을 지옥에 멸한다는 그 말에 휴우- 하고 늘 안심의 한숨을 쉬어야 됩니다. ‘어이고 살았군요!’ 구제역 걸려서 땅에 한 번 묻혀 보시기 바랍니다. 어이고 답답해 이 세상에 그래도 있는 게 좋다 싶어서 숨 쉬고 싶어서 다시 땅위로 기어 올라오죠. 우리가 숨 쉬라고 우리에게 숨쉬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호흡 주는 게 아니고 복음을 위해서 이렇게 숨 쉬는 거예요. 전부다 자기 죽으라고 준 욕망 속에서 살아버리면 일종의 지옥인데 이 지옥 같은 세상을 살아가야 간다면 복음은 누가 전할 거예요.
복음은 누가 전할 게예요? 십자가 마을에 그렇게 쑤셔 데고 헐뜯어 대도 계속 글을 쓰는 이유가 쑤셔 되는 것은 이런 와중 속에 너는 잘났다 못났다 그것을 논쟁하라는 거예요. 그런데 십자가 마을의 존재이유가 뭡니까? 누가 잘했다 못났다가 아니라 그 순간에도 복음전하라고 그런 일들이 일어난 거예요. 이야기가 간단한 이야기 아닙니까? 그래서 복음 아닌 것은 싹 다 지워버려야죠. 왜? 십자가 마을은 복음 아닌 것은 안 담기로 되어 있기 때문에 복음 아닌 것을 왜 증거 하는데 그래서 지우는 거예요. 그것을 사람들이 이해 못하는 거예요. 너 잘난체하느라 지우지, 너 회개하기 싫어 지우지, 온갖 말을 해도 확 지워버려요. 십자가 마을이라 하는 것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사람 손에 죽었다 끝.’ ‘누구도 구원 자격 없다 끝.’ ‘주께서 구원하신 것은 주님의 일방적인 자신의 선택이다. 끝.’ 그거 증거하는 거예요. 구원의 힘은 말이나 병거나 칼이나 총에 있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힘에, 돈에 있는 것이 아니고 구원의 힘은 하나님의 이름에 있는데 그 이름이 마지막 남기신 최후의 언약의 완성은 세자로 새 언약, 다른 세자로 말하면 십자가, 한 자 덧붙인다면 십자가 피, 히브리서의 피언약이에요. 피 언약으로 화평을 이루었다, 모든 창조의 완성단계에 이르렀다 이 말입니다. 싸움 났어요. 동네 싸움 났어요. 구경났어요. 아주 불을 질러요, 왜? 뭘 노리고 그런 거예요? 관심사가 십자가 피에서 지상으로 내려오게 만드는 악마의 전략입니다.
다시 말씀 드립니다. 문제가 뭔가 하면 하나님께서 생명나무 있는 곳에서 우리가 꺼져야 하고 추방시켰어요. 그러면 간단하게 이야기해서 생명이 없는 겁니다. 생명이 없는데 살고 싶다 아 수상하죠. 뭔가 수상한 거예요. 생명이 없으면 이렇게 생각해야 돼요. 생명이 없을 만하네. 내가 이런 짓한 것 보니까 하나님의 생명 안 주신 것 잘했습니다. 만날 따지는 게 이게 선일까 이게 악일까? 바라봐야 되는 것은 주님만 바라봐야 될 걸 내가 선일까 악일까?
제가 하나교회에서 강의 했듯이 베드로가 물 위를 걸을 때 주님을 바라봤을 때는 이게 땅인지 물인지 분간이 없이 걷다가 풍랑이 이니까 내가 저 풍랑을 어떻게 대처하지 하고 자기 자신을 보는 순간 풍덩 빠졌잖아요. 그게 창세기에 우리가 추방된 이유입니다. 마귀가 자꾸 우리자신을 보게 만들어요.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 하면 그 소리가 어디서 나온 소리이지? 오, 하나님께 나온 소리구나 하고 남자나 여자나 뭘 봐야 해요? 아담이나 화와나 선악과 따먹지 말라고 한 그 분을 쳐다보면 아무 문제없는 것을 가지고 뱀이 그분을 쳐다보는 그분을 바라보는 그분의 소리를 듣는 이쪽에 있는 그 시선을 뱀은 아래쪽으로 내려서 선악과와 누구를 직통으로 만나게 했다? 선악과와 아담과 화와를 직통으로 먼저 대면케 했죠. 대면하니까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탐스럽게 됐죠. 그리고 “따 먹으라!" 누가 누구보고 명령한 거예요? 마귀가 사람보고 명령한 것이죠.
지금 만약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모든 것이 종결되었으면 그것을 흔들어 데는 말에는 그 말씀과 다르기 때문에 그것은 신경 쓸 필요가 없어요. 그런데 언제 인간이 자기 자신을 바라보게 마귀가 유혹하니까 그걸 따먹는 날에는 네가 신처럼 되리라 했잖아요. 그러면 그 때 부터는 하나님의 그 말씀은 날아가 버리고 어떻게 됩니까? 따먹을까 말까? 이렇게 되겠죠. 따먹을까 말까? 이 자체조차 잘못된 이유가 방향성 자체가 주님말씀에 어긋나 있는 거예요. 그래서 나쁜 짓 할까 말까?, 할까 말까? 라고 자기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 과신하는 자체가 가관입니다.
주께서 다 이루셨다 하면서 이미 눈꼬리가 사라진 거예요. ‘내가 목사님 어떻게 하면 착할 수 있습니까?’그 자체가 마귀생각이고 그 자체가 마귀유혹이라니까요 내가 착실히 교회 다니면 복주시겠습니까? 아까 내가 실을 잡을까요? 책을 잡을까요? 돈을 잡을까요? 라고 생각하는 자체가 내가 뭔가 하면 한다는 자체가 주님께서 만드신 창조의 원리에 어긋나는 거예요. 차라리 주님 바라보면서 “살려 주세요”라고 하는 것이 낫습니다. “주여 저는 개입니다. 살려 주세요” 베드로가 물에 빠지면서 “살려 주세요” 했죠. 주님께서는 베드로를 물에서 구원해 주잖아요. 그러면서 네가 믿음이 없다 하잖아요. 조금 전까지 주님만 바라보는 것이 믿음 있는 거죠. 믿음은 뭡니까? 자기 믿음을 바라보는 것은 믿음이 아니죠. 왜? ‘나’라는 것이 들어가니까 ‘나’가들어 가면 무조건 믿음이 아니에요. ‘나만 십자가 안다.’ ‘나도 안다.’ ‘나’가 들어가면 이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주께서 이렇게 하셨습니다.' 그렇게 끝나버려야 됩니다.
우리의 이름이 아니고 주의 이름이니까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명심해야 될 것은 이미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원수로 주님께서는 설정해 놓았어요. 왜, 이방인이니까 이방인은 뭐가 없습니까? 구약에는 이스라엘에는 언약이 있지만 이방인은 언약이 없어요. 언약이 없는 이방인을 언약이 있는 유대인이 봤을 때는 자기의 원수가 아니고 하나님의 원수가 돼서 개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자기의 원수 정도가 아니에요 그게 에베소서에 나옵니다.
에베소서 2장에 보면 그 이방인들은 외인이고 하나님이 없는 자라 그리스도 편에서 하나 되었다, 16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이렇게 되어 있죠. 유대인이 봤을 때 저들은 단순히 이스라엘의 원수가 아니고 하나님의 원수로 보는 것은 이방인에게는 언약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까 이야기 한 것 또 하는 겁니다. 언약이 없으면 거룩이 없다. 거룩이 없으면 왜 망한다? 거룩한 하나님이 심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거룩이 있는 이스라엘은 언약 때문에 있다, 그러면 이스라엘은 어떻게 되는가? 구원 받는다. 이것이 구약에서 주께서 주셨다고 그렇게 유대인들이 이스라엘을 오해 하고 있었던 겁니다.
이게 참, 어려운거예요. 방금 오해라는 말을 했죠. 실컷 지금까지 언약이 있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고 거룩한 민족이다. 따라서 실제로 여호수아에서 전쟁하니까 누가 꺼꾸러지더라? 우리는 별로 가지고 있는 것도 없는데 발달한 무기를 가지고 있어도 더러웠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저쪽을 이기게 해 주셨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때 여리고성 앞에 앞장세운 것이 뭐라 했습니까? 언약궤지요. 그 언약궤 가졌던 홉니와 비느하스가 약속의 땅에서 블레셋과 전쟁할 때 언약궤 가졌는데 패배했지요?
이것을 요새 말로 하면 “주여, 십자가 복음 믿었는데 왜 이렇게 못 삽니까?”라고 하는 말과 똑같습니다. 십자가 복음을 믿습니다. 주여, 그런데 왜 이렇게 못삽니까? 와 똑같은 소리에요. 언약이 있다는 것을 뭐라고 오인했느냐 하면 구원을 당했다고 생각하지 않고 구원을 내가 챙겼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자기는 언약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의 배치하는 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 협상에 들어가는 겁니다. 하나님 언약 믿어 줄 테니까 이거 내가 원하는 것도 조금 들어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래야 내가 교회 나오는 맛이 있지 않습니까? 남들은 응답받았다. 남들은 기도해서 축복 받았다 좋은 소리 하는데 지금 10년째 기도해도 건지는 거 하나 없는데 이래가지고 무슨 재미로 신앙생활 합니까? 안 믿는 사람들도 이정도보다 더 낫겠습니다. 소위 믿는 신자가 이 모양 이 꼴로 내가 봐도 참 웃깁니다.
십자가의 원수된 것을 소멸한다고 이야기 하는데 십자가가 결국은 이방인을 구원하는 용도로만 십자가가 아니라 무엇을 치는 십자가 입니까? 우리는 언약이 있고 우리의 혈통은 아브람의 혈통이고 우리는 누가 뭐래도 하나님께서 언약을 주셔서 복 주셨다는 유대인들을 치는 십자가가 되겠죠. 너희들이 언약에 대해서 잘 못 알고 있고 잘 못 해석했다는 겁니다. 이 이방인들을 구원한 십자가 들고 이스라엘을 치는 십자가 되는 거예요. 너희에게 언약이 있음은 인정한다, 줬다 이 말이죠. 시내 산에서 모세가 40일 동안 기도하면서 언약 받아와서 자기 백성에게 줬잖아요. 언약이 있는 것은 인정하는데 그들은 언약 있음으로서 자기는 복음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 말이 틀렸어요, 맞았어요? 맞아요. 맞는데 뭐로 바꾼다? 우리는 우리 힘으로 살아남겠다는 것으로 바꿔서 우리 힘으로 반드시 죽는다가 혹독하게 실감나게 겪게 되는 인생을 살게 하는 거예요.
우리는 우리 힘으로 살다가는 죽어 마땅하고 이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혹독하게 체험 하게 하는 거예요. 체험하게 하고 우리는 우리 힘이 아니고 누구의 힘으로? 하나님의 준비된 예수님의 원래 창조의 자리를 만드시는 원래 통일되어야 되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예수님의 힘으로 우리는 예수님의 입장에서 영원히 우리가 가보지도 못한 생명나무를 팍팍 겪게 되었다고 하는거예요.
우리 힘으로 생각했던 그 삶, 생명이 여지없이 작살나야 돼요. 우리는 죽어도 좋다고 송재원씨가 말했는데 ‘우리는 죽어도 좋다.’ 우리 힘으로 생존이 아니라 우리가 죽도록 충성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얻지요. 우리의 죽음이 구원받는 게 아니에요. 우리를 죽게 하시는 그분이 우리를 살게 하시기 위해서 우리를 죽게 하시는 겁니다. 쓰레기 속에 보물이 있는 것이 아니고 쓰레기를 쓰레기로 드러내는 그 작업이 곧 우리를 구원하는 작업이 된다는 말입니다. 10분 쉽시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