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로새서

골로새서6강-성도안의 그리스도(골1:24)이근호110312

아빠와 함께 2014. 6. 8. 18:05

2011-03-12 11:02:28 조회 : 1030         
110311 성도 안의 그리스도 이름 : 이근호 (IP:117.55.132.36)

110311 성도 안의 그리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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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창길 (IP:118.♡.97.74) 11-03-24 23:19 
서울 의존교회110311a (성도 안의 그리스도)-이 근호 목사

골로새서 1장24절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신약성경에 나오는 사도 바울의 편지는 단어 하나하나가 구약을 밑바탕에 깔고 나오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아시다시피 구약은 글 자체가 옛날 언약이죠. 옛날 언약을 여러분들이 아시지만 정리하자면 옛날 언약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사람보고 지키라고 준 것이 바로 옛날 언약입니다.

그래서 만약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 수준에 이르지 못하고 지키지 못하면 주어지는 것은 무서운 혹독한 저주가 주어지게 되겠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말씀이 담고 있는 적어도 이 정도는 되어야 지켰다고 할 수 있는 그 수준은 어떤 인간도 그 수준에 도달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옛날 언약 가운데서 특히, 요약을 한다면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는 그것인데 그렇게 되려면 거기서 사랑이라는 의미가 적어도 무엇을 포기해야 되느냐 하면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할 때는 우리 인간들이 자기 사랑하는 것을 접어야 되죠. 포기를 해야 됩니다.

그런데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 자신부터가 우선이기 때문에 자기를 포기하기까지 하나님을 사랑한다, 만약에 하나님을 사랑했는데 자기가 그 하나님 사랑 때문에 희생이 되었다 그럴 경우에 우리에게 돌아오는 게 뭐가 있겠어요?  없잖아요. 아무 것도 없잖아요. 뭔가 줄 것 주고, 받을 것 받아야 되는데 내 쪽, 인간 쪽에서 하나님을 위해서 포기하고 살았는데 하나님 쪽에서 아무 것도 주지 않으면 나만 손해 보잖아요. 나만 손해 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기보다는 하나님 앞에 사랑하는 척을 해서 자기 이익을 그대로 가지려고 애를 쓰지요. 그런 식으로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이뤘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율법을 구약에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는 경우가 어떤 경우냐, 방금 제가 사람의 힘으로 율법을 이루지 못한 다고 했는데 그래도 율법을 이룬 경우가 어떤 경우냐, 시편 51편에 나오죠. 나는 상한 심령입니다.  다른 말로 나는 죄인입니다. 이런 뜻이거든요.  ‘나는’에 집어넣을 것이 ‘나는 잘났습니다.’ ‘나는 최선을 다했습니다.’가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들어 가 버리면 사람이라 하는 것은 ‘나는 나다.’가 이것이 인간인데 나대신, 죄인이 들어 가 버리면 사람은 누구 앞에서 자기가 보기는 자기가 죄인이 아니에요? 누구 앞에 서니까 죄인으로 등장한 다는 겁니다. 누구 앞에 섰겠어요? 바로 이사야 6장에 보면 나오죠.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나는 망하게 되었다 나는 죄인이다.’ 결국 이것은 누구를 봤다는 말입니까? 창조주를 본거죠.

그렇다면 정리해 봅시다. 구약에서 하나님 말씀을 이룬 다는 것은 혼자서 열심히 도를 닦아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누구 앞에 설 때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설 때에 말씀이 이루어지는 거예요. 왜, 그 앞에 설 때 나는 죄인이 되고 나는 망하게 되었구나! 가 되니까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킨다는 것은 혼자서 아무리 지켜봐야 소용없고 내 자리에 누군가가 방문해야겠죠. 그것도 그냥 방문하는 것이 아니고 창조주로서 그 거룩함으로 무서움으로 다가와야 되겠죠. 다가올 때 ‘나는 죄인입니다.’ 하는 겁니다.

오늘 2시쯤 일본 동부 쪽에 지진이 일어나서 뉴질랜드 지진에 3천배 크기의 지진이 일어났답니다. 지진이 일어나면 사람들은 자기가 죄인인 것을 깨달을까요, 못 깨달을까요? 사람이 지진이 일어난다고 깨닫는 게 아니에요. 죄인이라고 수용하는 게 아닙니다. 살기 힘드니까 화가 더 나죠. ‘내 꺼 왜 부셨습니까?’ 하고 반발이 나오지, ‘나는 죄인입니다.’라는 말이 안 나오죠. 만약에 지진 앞에서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나온다면 그것은 지진 때문이 아니고 지진 일어나는 것과 상관없이 ‘나는 지진을 당해서 내 평생 모은 것, 나가진 것 다 날려 버려도 저는 처음부터 그런 인간임을 벌써 알았습니다.’라는 고백이 있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지진이 일어나기 전부터 이미 주님 앞에서 살아갔기 때문에 그 다음에 지진 일어나면 ‘내 그럴 줄 알았어. 내 꺼 다 날릴 줄 알았어. 나는 원래 죄인이니까 내가 내 노동을 의지 한다는 자체가 이것은 상한 심령의 입장에서는 이것은 말도 안 되는 거지, 상한 심령이면 상한 심령만 내 놓으면 되지 하나님 이것은 손 데면 안 됩니다.’ 하는 식은 안 되지 하고 스스럼없이 그런 고백이 막 나오죠. 이쪽에 지진이 만약에 대지진이라면 그러면 노아 홍수 때 지진은 규모가 얼마나 되겠어요?  8.8되는데 그쪽은 95되면 엄청나겠죠. 그러면 지진이 일어나면 그 사람들이 자기 죄를 회개할까요? 한번 두고 보자 하는 식으로 나오겠죠. 그래서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인간은 인간 속에 이미 구원될 수 없는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 이 말입니다.

아무리 화산 속에 있고 지진 속에 있다 할지라도 인간 자체가 지진 일어나서 구원되는 것은 아니고 인간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에 합당하게 바뀌어져야 합니다. ‘나는 죄인입니다.’하는 것을 다윗 언약이라고 하죠. 히스기야가 하나님을 찾을 때가 언제였습니까? 바로 앗수르의 편지를 받고 그 모든 것을 하나님께 다 내놨죠. 요아스왕 같은 경우 엘리사 목을 내 달라고 했죠. 요아스왕 같은 경우 앗수르가 포로 되었을 때 ‘엘리사 하나님 선지자 어디 있어 그 인간 만나면 내가 목을 칠거야’ 이 말은 엘리사의 목을 치겠다는 말은 장차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다면 그 하나님이라는 사람조차 목을 치겠다는 말과 똑같은 이야기가 됩니다.

그러면 요아스왕이 엘리야의 목을 치겠다는 말은 자기가 죄인이라는 뜻입니까?  왜 나를 힘들게 하냐! 그런 뜻입니까? 나는 상한 심령입니다. 라는 뜻입니까? 어디 감히 나를 힘들게 해 하고 공격적으로 나오는 거예요? 공격적으로 나오는 거죠. 그래서 지금에 우리가 사는 세상을 이렇게 지진이 일어나고 힘들게 하면 우리 속에는 거침없이 우리 자신도 내가 그렇게 독한 인간인가? 자기도 놀랄 정도로 내가 이렇게 하나님께 적대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었는지 내가 놀랍다 할 정도로 강하게 반발하겠죠.

다시 이야기해서 인간 속에는 인간은 스스로 구원이 안 되는 요소가 이미 들어 있는 거예요. 아무리 구원을 지켜 줘도 인간 자체가 하나님 말씀 자체에 대해서 반발하는 세력이 있어요. 그것을 바로 악마, 악령이라고 합니다. 악마 악령은 우리를 장악해서 조금이라도 뭔가 터지면 즉각적으로 하나님께 마음속으로 욕설을 해 대는 그런 모습으로 돌변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 것이 누구에게나 다 있죠. 그래서 인간은 구원이 안 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이 안 되는 그런 존재로 인간을 만든 거예요. 구원이 안 되는 스스로의 힘으로 아무리 좋은 말씀, 율법을 줘도 구원이 안 되는 그런 존재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거예요. 그러면 인간이 구원이 안 된다면 어떻게 하느냐, 구원이 안 되면 안 되는 거죠. 뭐 인간이 구원이 안 되면 구원을 요청하는 것도 그것도 무리한 요구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 땅에서는 천국 갈 사람도 없고 구원이 안 된다면 그러면 구원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오늘 본문 25절에 보면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인데’ 비밀이 있죠. 그림으로 그리면 이렇습니다. 이게 육지라면 육지 밑에 석유 원유가 흐르고 있어요. 사람들이 육지에 집을 짓고 살면서도 자기 집 밑에 석유가 흐르고 있는지 몰랐죠. 그런데 이 석유층이 쭉 올라갔다가 어떤 지점에서 영화 자이언트처럼 석유가 폭발한다면 집이 있는 이 지점에서는 석유가 있는지 몰랐죠. 감추어져 있으니까 몰랐는데 석유가 튀어나오는 이 지점에서  감추어져 있는 석유가 터져 나와 버렸습니다. 그렇다면 이 석유는 사람들이 모르기 때문에 비밀이라고 하고 감추어진 거죠. 여기 있는 사람들은 자신이 구원에 반대하고 하나님에 대해서 도전하고 대든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어요. 모르고 그냥 하나님께서 어떤 아이디어를 주시고 힌트를 주시면 그것에 따라서 자기가 구원되겠다는 그런 시도만 자꾸 생각하고 있는 겁니다.

이 사람들이 구원될 수가 없죠. 그런데 여기서 석유에서 뭔가 터져 나오면 나중에 석유가 터져 나올 건데 그 증상 중에 하나가 뭔가 잠시 터져 나오면 이게 다윗이 되어서 ‘나는 상한 심령입니다.’ 이사야 같은 경우에는 잠시 터져 나오면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구나!’ 그런데 그것뿐이에요. 재미있는 것은 이사야가 나는 화로다 망하게 되었도다! 했잖아요. 그런데  이 소식을 사람들에게 전하게 되면 사람들이 납득이 돼서 전한 것이 아니고 소식을 전하는 이유가 그냥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이 비밀들을 사용하는 겁니다. 그러면 이사야가 더욱더 구박을 받고 다윗도 마찬가지고 다른 사람들은 이해를 못하죠. 멀쩡한 사람이 자기가 죄인이라고 하니까 뭐 겸손인가? 너무 온유한가? 그런 쪽으로 생각했지 우리 인간 자체가 구원이 안 된다는 사실을 그리고 다윗이 그런 상한 심령이라 하고 이사야가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하는 이 자체도 이게 구원이 안돼요. 어떤 인간도 구원이 안 됩니다. ‘아,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이 소리 했다고 구원이 되는 것이 아니고 상한 심령이라고 말했다고 구원이 되는 것이 아니에요. 다만 구원의 힘을 느꼈을 뿐이에요. 그렇다면 구원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장차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석유가 터지듯이 예수님의 감추었던 비밀이 나타났어요. 제가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사도 바울의 이야기입니다.

사도 바울은 현재 어느 누구도 구원이 안 되는 이유가 구원 안 되는 그런 요소를 우리 인간이 이미 담고 있어서 인간이 아무리 노력해도 자기 힘으로 구원이 안 되는 그런 요소가 잠겨 있다, 묶여 있다 그렇게 보는 겁니다. 신약 때에 감춰진 비밀이 터져 버리면 이 비밀로 인하여 소급해서 다윗과 이사야가 구원이 되는 겁니다. 아브라함도 마찬가지이고 노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이삭을 바쳤잖아요. 아브라함이 믿음이 있다는 것을 하나님이 인정하셨죠. 그러면 아브라함이 구원된 거잖아요. 그런데 아브라함이 구원이 되었는데 왜 예수님 오시기를 기다렸을까요??  참 이상하지 않습니까? 자기가 이삭을 받쳐서 하나님께 너 믿음 있구나, 확정 받았으면 그것으로 구원이 끝이고 그 믿음으로 의로움을 받으면  됐지 뭣 때문에 요한복음 8장에서 아브라함이 예수님을 왜 또 기다립니까? 이미 끝났는데 지금 구원받았는데 여러분 성경 보면서 그런 의문점 없었어요? 이스라엘이 믿음으로 돌았더니 여리고성이 무너졌잖아요. 그러면 구원됐잖아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그게 구원이 아니라는 겁니다.

구원이 아니면 뭐냐, 그것은 구원의 증상, 구원의 징후라는 거죠. 땅이 흔들린다. 감기가 걸리면 기침, 콧물 나죠. 이게 증상이라 하지 않습니까? 땅이 흔들린다는 것은 지진이 일어나기 전에 조짐이죠. 노아가 방주를 만들었다, 그것을 믿었다, 그럼 구원받아야 되지 않습니까? 노아가 방주 만들어서 구원받았습니까? 에녹이 하나님이 동행해서 구원받았습니까? 아벨이 형에게 맞아 죽어서 구원된 겁니까? 그것은 밑에도 감추어져 있는 진짜 비밀이 진동하다 보니까 위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 말이죠. 노아가 방주 만든 것으로 왜 구원이 안 되느냐 그것은 노아 속에서도 구원이 안 되는 요소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모든 아담은 죄인이기 때문에 노아가 방주 만든 것으로 자기가 구원을 반대하는 것을 극복할 수가 없어요. 어떤 인간도 주님이 시키는 대로 했다고 해서 그 시킨 대로 행한 행함으로 구원을 너끈하게 차지할 수 있는 그런 이유가 될 수 없는 겁니다.

왜냐 하면 인간은 처음부터 구원이 안 되기 때문에 그래요.  직거래 있죠. 농산물 직거래, 하나님과 인간이 직거래가 안 되게 되어 있습니다.  아파트에서 중개하는 사람 없이 바로 산지 배추를 직접 소비자가 직접 직거래 하는 것처럼 직거래해서 구원이 안 된다 이 말이죠. 왜냐 하면 인간 속에는 그런 직거래 구원을 요구함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주신 비밀을 모독하는 요소가 각각 자기 안에 잠재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어떻게 해서, 내가 어떻게 했기 때문에, 어떻게 한 것으로 내가 구원을 챙기겠다는 그런 마음이 누구나 있는 거예요. 내가 어떻게 해도 그것으로 구원이 안 되더라 하는 그런 생각을 인간은 도저히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희망이 없어집니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알게 된 것은 오직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장차 예수그리스도가 와야 내가 구원이 되지 동행한다는 자체가 구원이 되지 않는 다는 것, 죽음을 보지 않고 간다고 해서 그것이 구원이 안 된다는 사실을 안거죠.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오심으로 말미암아 모든 구약 전체의 해석을 그렇게 해 버린 겁니다. 사도 바울이 낸 결론은 인간은 구원이 되지 않는데 구원이 있다면 그것은 인간들이 구원을 기대해서가 아니라 구원이라는 것은 하나님께 속한 하나님의 자기 문제이고 자기 업적 이고 자기 숙제이기 때문에 인간이 관여할 바가 못 된다 하는 겁니다. 그것을 가지고 감추어진 비밀이라 하는 겁니다. 감추어진 비밀은 구원이라는 것은, 인간은 배제하고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에 주가 주께서 한 직접 거래에 의해서 주님께서 모든 말씀을 이룸으로 말미암아 그래서 주어진 결과가 구원이기 때문에 사람은 거기에 개입할 자격과 위치가 되지 못한 다는 겁니다. 24절 봅시다.

골 1:24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여기 교회라는 말이 나오죠. 몸된 교회, 이 교회가 무슨 교회입니까? 의존 교회입니까? 우리 교회입니까? 무슨 교회입니까? 화평 교회인가?  무슨 교회입니까? 사도 바울이 무슨 교회가 있었어요?  사도 바울이 당회장으로 있는 교회 이름이 뭐죠? 성폴 성당입니까? 사도 바울은 교회를 어떻게 봤냐 하면 교회는 예수님에 의해서 발생된 것으로 봤어요. 예수님에 의해서 발생된 거예요. 불량 학생들이 점심 마치고 5교시 시작할 때 화장실에서 선생님 몰래 담배 피우고 교실에 들어오면 냄새가 나죠. 냄새가 나기 전에 조치를 취하겠죠. 페부리즈 뿌리고 하겠죠. 냄새나잖아요. 담배 냄새가 난다는 것은 화장실에 가서 담배를 피웠다는 뜻입니다.

교회가 있다는 것은 누가 있든지 있다 이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것을 다 이루었다는 그 냄새에요. 그것이 교회라는 말이죠. 그래서 사도 바울이 교회를 위해서 남은 고난을 키운다는 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하시는 그런 고난에 같이 동참한다는 그런 의미입니다. 고난이라는 말은 고생이라는 말인데 고생이라는 것은 뭔가 일이 껄끄럽다 일이 환영을 받지 못하고 거부를 당하는 그런 일이란 말입니다. 예수님의 복음, 예수님의 비밀을 전하는 일입니다.

그러면 이 고생을 누가 십니까? 바로 인간들이 복음을 거부하고 거역하잖아요. 인간들이 복음을 거역하는 가운데서 피어나는 장미, 피어나는 백합이 그것이 교회입니다. 교회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이 지상에서 사람들 때문에 시달렸던 그 시달림이 똑같이 그 예수님의 생애 이후에도 그 시달림 속에서만 피어나는 것이 그것이 진정한 교회가 된다는 말이죠.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인간들이 그 교회에 대해서 비밀에 대해서 왜 그렇게 반대하느냐?  그것은 인간들 나름대로의 교회, 나름대로의 구원관이 수립되었기 때문에 진짜 사도 바울이 생각하는 진짜 교회하고 충돌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럼 사람들이 생각하는 교회 관이라는 것은 교회가 교회를 만드는 방법이에요. 교회가 교회를 양산하고 만들고 키우고 하는 겁니다.

다시 강의를 정리하면 사람은 구원이 된다?  안 된다?  사람은 구원받을 자격도 없고 구원이 안 되죠. 왜냐 하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하나님의 구원에서 배제 시켜 놨으니까 구원이라는 것은 누구하고 누가 의논합니까? 성부와 성자끼리 하는 것이지 인간은 그때 태어나지도 않았어요. 인간은 생기지도 않을 때 이미 구원을 생각했다 이 말이죠. 그렇다면 그 구원에 대해서 인간은 관여할 바가 없는데 인간은 죄짓고 난 뒤에 세상이 고통스럽고 힘드니까 여기서 신에게 구원을 요청하죠. 가인 같은 사람은 ‘하나님 복 주세요. 구원해 주세요.’ 라고 하죠.

인간이 하나님과 직거래해서 바로 거래해서 구원을 요청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 교회입니다. 사람들이 살기 힘들고 어렵고 죽어서 지옥 갈 것 같으니까 천국 보내 달라고 사람들이 모여서 자기의 의사를 계련하고 거기서 응답을 받고자 모인 이것이 바로 교회가 되는 거죠. 그렇다면 출발은 뭡니까? ‘나는 구원받아야 되겠다.’라고 출발하는 겁니다. 나는 구원받아야 되는데 성경에 보니까 예수님 십자가 피 이야기 들어 있고 언약도 있으니까 이것을 다 집어넣는 거예요. 출발은 ‘나는 구원받아야겠다!’ 무엇으로? ‘나는 구원받아야겠다!’ ‘뭐로?’ ‘예수님의 피로’ ‘나는 구원받아야겠다!’ ‘뭐로?’  ‘하나님의 언약으로’  ‘나는 구원받아야겠다!’ ‘뭐로?’ ‘예수님을 믿음으로’....... 이 모든 것이 인간들이 만든 교회가 되는 거예요. 이 교회는 교회가 아니죠. 그 속에 시작점이 뭡니까? 나는 구원받아야 되겠다는 것을 출발점으로 하는 겁니다.

‘예수 믿어 주고 피 믿어 줄 거니까 저 구원시켜 줄 거죠?’ 라고 이미 자기 의사를 이야기한 거예요. 주님께서는 이런 인간의 의사를 일체 받지 않습니다. 왜냐 하면 노아 방주의 아이디어가 노아에서 나왔습니까? 하나님과 동행하면 구원받을 거라는 그 아이디어가 에녹에서 나왔어요?  삼손의 아버지, 마노아 가정에서 아기가 없어서 하나님께 기도해서 ‘하나님 멋진 아들 주시면 제가 바치겠습니다.’ 하는 아이디어를 인간이 먼저 창안한 거예요?  얍복강에서 야곱이 강가에서 이쯤 해서 천사가 와야 되는데 하고 기다렸습니까? 시간 다 됐는데  왜 안 오지?  하고 기다렸습니까? 아니죠. 항상 예상외로 항상 상상외로 도저히 히브리인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 홍해로 가게 되면 아마 바다가 갈라질 거야 하는 생각을 히브리 사람들이 그렇게 협의해서 결정했습니까? 다수결로 결정했습니까? 가하시면 예 하시기 바랍니다. 해서 홍해로 가기로 결정했습니까? 아니죠. 간다고 오히려 문제가 되었잖아요. 우리를 아주 죽이려고 작심을 했구나! 뒤에서는 따라 오고 앞에는 바다가 있는데 우리보고 어떻게 하란 말이냐? 광야의 구름 기둥과 불기둥이 인도한 것이 물과 양식이 없는 곳으로 인도했습니다. 물과 양식이 있는 곳에 인도한 것이 아니에요 그러면 그 아이디어는 누구 아이디어입니까? 사람들이 일부로 고생하자고 물 없는 곳으로 갔습니까? 아니죠. 그러면 왜 물 없는 곳에 가게 되었습니까? 그것은 이 구원이 아무리 히브리인들이 고생해도 구원은 히브리인들의 소망과 규정과 희망 사항이 뭉쳐져서 구원이 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여전히 사람들이 파악을 못해요 왜, 이 지하에 감춰졌기 때문에 그래요. 사람들은 불교의 생로병사, 태어나고 죽고 병들고 아프고 늙고 이 모든 것에서 어떻게 벗어나서 좀 이 몸이 편안하게 살 수 있는가! 이처럼 모든 것이 힘들고 어렵고 할 때 이 몸이 자연스러운 것이 주여 내 인생 힘들게 하지 말고 편안하게 세상 끝나게 해 달라고 그렇게 요청하잖아요. 그것은 어디 까지나 우리가 나도 이렇게 요청할 정도로 그 정도로 내가 이런 자격이 있습니다. 아직까지 이 정도로 망가질 정도의 죄인은 아닙니다. 하는 의식이 밑에 깔려 있다 이 말이죠. 나는 하나님께 요청해서 내 평안과 내 행복을 요청할 정도로 그 정도의 인간은 되지 그것조차도 하나님 앞에 호소할 지경이 안 될 정도로 내가 죄인이고 전적으로 망가진 인간이고 나는 저주받은 인간이라고? 나는 나를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는 그런 뜻이다 이 말이죠.

사람들이 배부를 때는 하나님을 안 찾아요. 어려울 때 찾거든요. 어려울 때 찾는 다고해서 그것을 하나님이 알고 기특하다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어려울 때 찾을 때, 그때 인간은 자기가 자기 위주로 살았다는 것이 들통 나는 순간입니다. 배부를 때는 안 찾고 배고플 때는 찾는 구나 아무리 사람이 어렵다고 하지만 정작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알게 할 정도로 어떤 어려움이 와도 ‘나는 그래서 죄인입니다.’하는 것을 어려움을 통해서 깨닫지를 못해요. “그래 버티면 언젠가는 희망이 있겠지 의인은 7번 넘어져도 8번 일어날 거야” 그러면 8번째 자빠지면 어떻게 하려고? 9번째 할거야

베드로가 예수님이 용서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자기가 몇 번까지 용서 하냐고 하니까 다른 사람은 3번 정도 하는데 자기는 7번까지 되겠다는 거예요. 인간들은 보통 3번 정도는 용서가 돼요. 네 번째는 도저히 못 참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7번까지 가니까 대단한 사람이죠. 7번 용서하면 되겠습니까? 그게 용서이겠습니까? 하니까 주님께서 일곱 번에 일곱 번, 일곱에 일흔 번, 베드로가 일흔 번에 일곱을 다 용서하면 되겠습니까? 주께서 일곱 번에 일곱 번 칠백 번 하겠죠. 따라 올 테면 따라 오라는 거죠. 백날 해도 못 따라 가요. 주께서 원하는 것은 네가 남을 용서할 그런 자격이 안 될 정도로 내가 남을 용서한 다는 것은 내 본색에 어긋나는 겁니다. 남을 사랑한다는 것도 마찬가지이고 인간은 자기 사랑하기에 바쁜데 언제 남을 사랑해요? 자기 주제 파악도 못하는데 남을 사랑하고 용서 한다고요? 천사가 웃습니다. 남을 용서하고 나온다는 것은 배부르다 이 말이거든요. 배고파 보세요. 자기를 용서해 달라고 남에게 광고할걸요 사람이 자기가 어려우면 동정을 찾지 남을 용서할 수가 없어요. 남에게 사랑을 베풀 수가 없습니다. 자기 발등에 불이 떨어졌는데 남까지 챙깁니까? 좀 여유가 있으니까 이참에 참여해서 성과급을 얻을까?  이런 식으로 나오죠.

구약 전체 말씀이 인간은 아무리 고난과 어려움을 줘도 결국 인간은 나는 죄인이라 말이 입에서 툭 튀어나올 수 없게 되어 있다 이 말이죠. 오히려 죄인이라고 하는 것에 반대로 나오죠. 하나님 지금 실수하시는 겁니다. 하나님이 지금 뭔가 일을 잘못 처리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서러움을 받을 그런 입장이 아닌데 하나님이 일이 뭔가 잘못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교회라고 하는 것은 사람이 얼마나 괴로운가, 힘든가,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는가가 아니라 오직 한 몸, 예수님이 사람 사는 이 땅에 오셔서 얼마나 사람들에게 시달리고 힘들었고 얼마나 아팠는가를 만끽해서 발산하는 곳이 교회라는 거죠. 그래서 모든 교회의 교인, 성도는 모든 성도는 이 땅에서 예수님의 고난을 발산하게 되어 있어요. 이것은 사도 바울 뿐만이 아니에요. 모든 성도가 다 예수님의 고난을 발산하게 되어 있어요.  교회라는 것은 그 안에 예수님의 몸이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 몸이 이 땅에서 사람들에게 시달린 몸입니다. 이 시달린 몸이 교회가 되었다면 이 교회가 계속 교회답게 되기 위해서는 이 시달림에 계속해서 참여되는 사람 계속 동참하고  그 사람만이 그리스도의 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외는 아닙니다. 그런데 그 시달림이 예수님이 이 땅에서 모멸을 당하고 모욕을 당한 이유는 하나밖에 없어요. 사람에게 먹을 것을 안줘서 그런 것이 아니에요. 오병 이어에서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줘도 그 사람들은 얻어먹고 뒤돌아섰습니다. 먹을 것 챙겨 먹고 난 뒤에 예수님하고 두 번 다시 따라 다니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먹을 준 것은 너희 떡 좋아 하지?  옜다, 떡이나 먹고 꺼져라 이 말입니다. 떡을 안줘도 그 사람은 인간 안 되고 떡을 줘도 인간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이래도 인간 안 되고 저래도 인간 안 돼요. 어떻게 해도 인간은 구제불능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 고난 받는 다고 구원받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의 구원이 주어졌기 때문에 우리는 교회에서 남은 고난을 채우는 겁니다. 그러면 그 예수님의 고난이 뭐 때문에 왔느냐, 바로 인간들이 나름대로의 구원관과 나름대로의 메시야관 이런 것들이 나름대로 있어요. 자기들 나름대로 있는데 이 출발점은 아까 제가 이야기했는데 출발점은 우리도 구원받을 수 있다 하는 겁니다. 어떤 개그 프로에 보니까 건강한 신체 좋은 사람들이 완력으로 줄을 쫙쫙 잡아당기는 것을 보여줘요. 그런데 어떤 삐쩍 마른 개그맨이 와서 깡꽁치 같은 우리도 줄 당기기 할 수 있다고 하면서 무엇을 도전하느냐 하면 안전벨트 잡아당기기를 도전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힘들기 때문에 제일 먼저 하는 것이 줄자에서 줄잡아 빼는 것을 합니다.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이런 의식이 바로 이 구원받은 성도들을 힘들게 하죠. 괴롭게 하고 모욕하고 모독하는 겁니다.  이 교회가 무슨 교회냐 바로 행함의 교회입니다. 그런데 이런 행함의 교회가 있음으로 말미암아 주님께서는 참된 교회의 진수를 보여줍니다.
 
27절을 봅시다.

골 1:27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어떻게 풍성한 것을 알게 하려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다음에 뭡니까? “이방인 가운데 어떻게 풍성한 것을 알게 하려하심이라” 여러분 이방인과 유대인의 차이점은 유대인에게는 율법이 있고 이방인에게는 율법이 없죠. 율법은 뭡니까?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라, 하지 마라 하는 그런 법조항이잖아요. 법조항대로 행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유대인이고 이방인들은 법조항 자체가 없기 때문에 뭐가 없습니까? 율법을  지켰습니다, 못 지켰습니다. 하는 자체가 없지요. 율법을 지켰다는 행함이 없죠. 그런데 구원이 어디서 풍성해 졌다고 했죠? 유대인이에요?  이방인이에요?  이방인이죠. 하나님께서 하라 하지 마라 하는 아예 법조항을 받치지도 않는 십일조 해라 안식일 지켜라 십계명을 어떻게 해라 아예 그것도 없는 사람에게 덜렁 구원이 주어지면 그 이방인들이 뭐라 하겠습니까? 이 구원은 우리가 말씀대로 지켜서 했다  이런 소리가 나오겠어요?  안 나오겠어요 ?  안 나오죠. “어 우리는 행한 것도 없는데 구원이 주어졌지?” 이렇게 되겠지요. 이것을 가지고 사도 바울은 이방인에게 하나님의 이 비밀이 어떻게 된다?  뭐 짧게?  조금?  간절하게 ? 아니죠. 어떻게?  풍성하게 넉넉하게 모자람 없이 구원에 대해서 차질이 없도록 하나님께서 ‘모자라 더 채워 와’ 이렇게 명령하지 않을 정도로 넉넉하게 넘치도록 이방인에게 구원이 주어졌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구원이 뭐에요?  이방인들이 이렇습니까? “아 구원 받아야 돼 내가 힘든데 하나님이 주신 법 없나?  옳지 이스라엘에게 법이 있구나! 그 법을 내가 지켜서 구원받아야지” 이방인들이 이렇게 나온다면  그 이방인은 이방인이 아니고 유대인과 마찬가지에요. “어디 하나님의 말씀 없나? 말씀대로 지켜야지 지켜서 구원받아야지” 이렇게 나온다면 그 이방인은 더 이상 이방인이 아니고 유대인하고 똑같아요. 그런데 이방인에게 구원이 주어 졌다는 이 말은 구원받을 자격도 없고 구원될 수도 없고 구원은 아예 포기했고 너는 애초부터 율법에 의하면 구원이 안 되게 되어 있어.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의 과제도 아니고 예수님의 자기 업적 이고 작품이고 주님의 자기 성과입니다.

그럼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비밀이 뭡니까? 비밀에 무엇이 포함되어 있어야 돼요?  비밀이라는 것은 예수그리스도께서 원하는 자에게 자기의 구원을 이룬다는 그 내용까지가 포함 될 때 그것이 비밀이 되겠죠. 그 비밀을 맡은 사람은 뭐라 합니까? 내가 이렇게 해서 구원 받았어 하지 않고 예수님께서 자기 구원을 이루다 보니까 거기에 덜렁 누가 채택되었어요? 우리가 예수님이 누구 이신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의 실험자로서 해당자로서 뽑힌 거예요. 이제부터 너는 예수님의 구원이 임했다는 것을 증거하는 증인으로 너는 그렇게 만들어 졌어! 라고 통보가 온 거예요.  엉뚱하고 난처하죠. 그러면 그때부터 이방인들은 어떤 일을 해요?  비로소 그때부터 이방인들은 자기가  유대인이 되는 거예요.
 
이미 구원을 챙기고 난 뒤에 유대인이 된다는 말뜻은 이미 구원을 챙기고 난 뒤에 어떻게 해서 유대인들은 나한테 온 구원이 왜 저들한테는 구원이 안 갔지?  하고 구약성경을 다시 보게 되죠. 구약성경을 다시 보게 되면 하나님의 말씀을 채택된 그 인간들이 우리 인류의 대표자들이 그 말씀을 통해서 진짜 비유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이 할 수 있다는 쪽으로 그 말씀을 왜곡해서 그 말씀을 지키려고 애썼던 내막이 우리는 구약을 통해서 쭉 드디어 이방인들도 거기에 합세해서 보게 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방인이니까 우리가 유대인, 이스라엘 역사를 쭉 보면서 아하 노아가 방주 만든다고 구원이 아니나 아브라함이 이삭 받쳤다고 구원이 아니구나! 모세가 지팡이 들고 설쳤다고 그것이 구원이 되는 것이 아니구나! 다윗이 골리앗 이겼다고 그것이 구원이 아니구나! 그것을 쭉 전부다 보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의 공통점이 뭐냐 하면 바로 구원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지 우리한테 속한 것이 아니다 하는 것을 공통적으로 같이 공감을 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구약이나 신약이나 모두가 그리스도 몸 안에서 하나가 되는 거죠. 감추었던 그 비밀이 이렇게 하나의 사건처럼 순간순간 구약에서 이렇게 하나님의 고난 이름으로 들어 왔다면 이 신약도 마찬가지에요. 신약도 이방인 가운데 구원받았다, 이 사람들은 하나의 교회라는 이름으로 그 주변에 있는 이방인들이나 유대인에게 쓸데없는 오해와 모멸과 멸시를 당하는 그런 남은 아픔을 겪어야 됩니다. 다른 사람들은 교회 충성해서 복 받았는데 너는 복음 안 다음에 복 받은 게 뭐가 있어?  나 복 받은 거 있다! 뭐?  내가 지금 까지 살아 갈 이유도 없이 살려준 것도 하나님의 은혜로 아는 것, 내가 이만큼 사는 것도 주님의 특별한 복음을 위해서 살려줬다는 것을 그것을 아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내가 죄인인 것을 그리고 죄인에게 주어진 모든 환경이 이 죄인에게 너무나 과분한 혜택인 것을 나는 그것을 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감춰 둔 비밀이죠. 그러면 다른 사람이 말하죠. 그러면 당신 대단하냐?  내가 아무리 대단해도 예수님이 살아가신 것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인자는 머리 툴 곳도 없다 했는데 거기에 비하면 나는 아무 것도 아니야 앞으로 어떤 사태, 조취가 주어 진다할 지라도 그것마저 주께서 주신 남은 고난이기 때문에 나는 그것을 기꺼이 접수하고 그것을 통해서 예수님의 은혜의 비밀만 나는 증거하겠다고 나오죠.

사건, 갑자기 지진이 일어났다고 합시다. 의존 교회가 지금 무너진다고 합시다. 목사님 앞자리부터 무너지기 시작해서 저도 이참에 무너진다고 합시다. 신앙이 연조가 있는 집사님 같은 사람은 “주여!”하죠. 연조가 없는 사람은 “엄마야 ”할 거고요 이것이 과거의 습관이 나오죠. 평소에 다급할 때는 누구를 붙잡는지 나오죠. 주여 붙잡으면 ‘주여!’ 나올 거고 ‘엄마야!’ 하고 나올 거고 주를 말하던 엄마를 말하던지 이만큼 살아온 것도 어떤 사람은 10살, 20살, 30살 이 만큼 살아온 것도 다 하나님의 사용한 자기에서 살아 온 것이 아니고 복음을 위해서 이만큼 살아 온 것이 오늘이다 이 말이죠. 왜냐 하면 그  마지막 50살 때 지진 일어나서 무너져서 죽을 때 지금 내가 진작 죽어도 상관없는데 50년 동안에 복음 알게 하셔서 복음 때문에 살았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가운데서 지금 이 순간 지진이 일어나서 무너지는 거예요. 신월동에 진도 15점4의 지진이 나면 싹쓸이 하는 거예요. 지진이 일어나서 회개하는 것이 아니고 이미 구원받았기에 지진을 통해서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겁니다. 그러면 왜 사람들은 그게 안 되느냐 하면 사람들은 신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면 내가 지금 여기에 살아 있음을 확인하기 위해서, 살아 있음을 말하기 위해서 여기에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여기에 단단하게 묶어 달라는 겁니다.

대학교 졸업해서 내가 회사 취직해서 제일 먼저 원하는 것이 내가 취직한 회사가 좀 단단해 지기를 원하죠. 그런데 회사 한 3년 다니고 밉상 받아서 쫓겨나 오면 그 다음부터는 제발 내가 다녔던 회사가 무너지기를 바라죠. “어디 감히 나같이 가치 있는 존재를 쫓아내! 그래 너희 후회할 날이 있을 거다.” 이러면서 무너지기를 기다리죠. 그러고 있는데 그 회사가 “미안하다. 내가 잘못했다” 하고 다시 부르면 어떻게 됩니까? 그 회사 오래 되기를 또 바라죠. 그러다가 3년 뒤에 또 다시 쫓겨나면 이제 진짜 망해라 하겠죠. 그러니까 사람들이 망해라 잘돼라 하는 것이 누구 중심입니까? 왜 나의 가치를 그렇게 무시 하냐 하는 거예요 그러나 사도 바울은 자기 가치가 없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고난 받으심을 증거하는 그런 고난을 받은 거예요 예수님 때문에 이미 구원받았다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환난이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거기다 집어넣으면 지진이나 백두산 화산 터지는 거나 뭐든지 관계없이 그리스도 사랑에서 내가 끊어지지 아니한다는 것을 주님의 성령에서 우리가 유지가 되면 그때부터 주변 사람으로부터 우리가 놀림감이 되는 겁니다. 미쳤구나! 돌았구나! 사람이 왜 저렇게 미쳤냐! 그런 식으로 많은 핍박을 받게 될 겁니다. 하지만 그런 환란이 올수록 역시 너희는 비밀을 몰라 나도 구원될 자격이 있어서 구원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 때문에 뽑혀서 예수님이 구원을 쥐고 있다는 것을 그것을 알리기 위해서 그냥 이 세상에서 무작위로 뽑힌 것뿐이죠. 그렇게 뽑혔으면 그 다음부터 이 세상에 살아가는 모든 것이 과분한 나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된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겁니다.

26절 봅시다.

골 1:26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옴으로 감추었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감추었던 비밀이 어디에 나타났다고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나죠. 성도 되라는 말이 아닙니다. 성도는 우리가 될 수 없어요. 다만 성도 되게 하신 분에 의해서 될 뿐 이지 우리가 성도되려고 애쓴다고 성도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이 비밀이 만세와 만대이죠. 오랜 세월과 모든 연대에 걸쳐서 왔죠. 그러면 인류의 역사라고 하는 것은 지구상에 역사가 있다 이 말이죠. 역사를 통해서 인간들은 무엇을 원합니까? 역사야 세상아 지진 일으키지 말고 가만히 좀 있어 다오! 왜? 세상이 안정을 취해야 그 사이에 우리가 역사를 이룰 수 있으니까 여러분들이 직업 구할 때 제일 힘든 직업이 저는 이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일 힘든 직업이 고기 잡는 직업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 하면 다른 어떤 직업, 용광로 옆에서 일하는 것, 저도 해 봤습니다만 실내 온도 50도 되는 데서도 해 봤고 실내 온도 40도 되는 염색 공장에서 실내 온도가 높아야 염색이 되니까 그렇게 힘들지만 그것도 다행스러운 것은 이게 두발 디딜 때 발판이 안 흔들리잖아요. 그런데 고기 잡는 것은 문제가 배가 흔들리니까 안정을 취할 수가 없는 거예요. 이 세상이 지진도 없고 전쟁이 없을 때 사람이 왜 기분이 좋으냐면 현재 내가 열심히 매진해서 몰두해서 일할 수 있는 그 바탕이 든든하기 때문에 거기서 나만의 역사 나만의 성과 나만의 문명 나만의 업적을 키울 수가 있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무엇을 믿고 싶어 하느냐 하면 하나님을 믿는 게 아니고 이 대지는 이 땅은 옛날부터 지금 까지 그냥 그대로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대로 간다는 것을 믿고 싶은 거예요.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고 나는 나이고 그대로 가고 싶어 하는 거예요.

그런데 요한 계시록에 보세요. 사람들이 그렇게 기대하는 든든한 자연 세계가 천사들을 통해서 흔들기를 해 버려요 흔들기를 해 보면 바로 우리가 믿고 의지 하고 기대했던 이 대자연이 엉망진창이 됩니다. 완전히 대 환란이 일어나요 환란이 일어나면서 지진도 일어나고 화산도 일어나고 물도 쓰고 해일도 일어나고 그러면 민심도 혼탁해 지고 그러면 사람들은 그때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이여 우리 사는 것을 왜 이렇게 힘들게 합니까? 하고 대듭니다. 여기 직장 되면 그 직장 부도나고 또  다른 직장 되면 그 직장 부도나고 제가 부산 갈 때 음식점 맛있다고 하고 가면 그 다음에는 문 닫아요 무슨 재수가 옴 붙는  것 같아요. 야, 이집 맛있다 하면 그다음에 가면 문 닫고 바뀌어 있어요. 가면 가는 족족 가게가 다 바뀌어요. 우리가 가는 직장이 전부다 문 닫고 다 망한 다면 우리가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그런데 변하지 않는 것이 있어요. 그것은 바로 구원은 너의 소망이 아니라 예수님의 소망이라는 것, 네가 구원돼야 한다는 것은 너의 소망이 아니고 이 예수님의 소망 때문에 네가 구원되었다는 이 사실을, 이 비밀을 우리가 이방인 우리를 통해서 풍성하게 느끼도록 그렇게 조치하시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김창길 (IP:118.♡.97.74) 11-03-24 23:20 
서울 의존교회110311b (성도 안의 그리스도)-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시작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비밀을 집단으로 알려줄까요, 개인적으로 알려줄까요? 단체로 알려줍니까? 개인적으로 찾아와 알려줍니까? 개인으로 찾아오죠. 식구가 네 명이라고 하면 네 명에게 다 주어지는 게 아닙니다. 열 명이다, 열 명이 있더라도 열 명을 보고 주는 것이 아니고 하나하나를 보고 주지요. 식구가 열 명이 다 구원받더라도 ‘아버지 혼자 받으세요. 우리는 뒤에 따라가 아버지 믿을게요.’하는 이런 구원은 없다는 말입니다. 열 명,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성령을 주어서 그래서 열 명이 구원받게 하지, 한 사람이 대표로 받고 나머지 그 사람 받은 거 그냥 식구라는 것 때문에 가족이라는 것 때문에 그냥 등 떠 밀어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비밀은 예수님의 개인적인 관계죠. 예수님과 그 사람에게 개인적인 관계이기 때문에 이 자리에 한 사람만 등장할 뿐이에요. 예수님께서 성령 주는 사람 여기 1인용이지 2인용이 아닙니다.

중국집에 가면 쟁반 자장은 혼자 시키면 안 나오죠. 12,000원짜리 쟁반 자장 꼭 2인용이죠. 춘천 닭갈비 혼자 있으면 안줍니다. 적어도 두 사람이 있어야 주죠. 불고기도 혼자 앉아 있으면 안주죠. 적어도 두 사람이 앉아서 4인분  시켜야 되죠. 이처럼 우리 사람들은 둘 셋을 하나로 묶는 버릇이 있어요. 아주 나쁜 버릇이 있습니다. 지금 의존 교회 교인 수가 얼마나 되는지 모르지만 교인 수가 한 80명이라 합시다.  80명을 한꺼번에 취급하지를 않아요. “너희 교회 성도가 몇 명이야?”모르죠. 교인은 80명인지 모르지만 성도가 몇 명인지는 그것은 모르죠. 그러면 80명 가운데서 성도를 찾는 방법은 예수님의 복음의 비밀을 전하면 되지요. 비밀을 전하면 그 비밀 전한 자체가 좋아서 기뻐한다면 그 사람 속에 그리스도의 영이 있는 사람이에요. 27절에 끝에 보면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골 1:27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어떻게 풍성한 것을 알게 하려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사람 안에 누가 들어 왔다는 게 사람 안에 개미가 들어 왔다 사람 안에 개미가 못 들어 와요 이런 게 좀 어려운 데 여기 위가 있잖아요. 사람 목 안에 개미가 들어 와서 위속으로 들어온다면 이것은 사람의 위벽을 타고 올라가죠. 그러면 사람의 위에 세포가 뜬다면 위안이 어디 입니까? 껍데기만 왔다 갔다 나중에 밖으로 나갈 뿐입니다. 사람 안에는 안이 없어요.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참, 이런 내용을 이야기하려니 어린 아이들에게 미안한 데 사람에게는 안이라는 게 성립이 안 됩니다. 껍데기뿐입니다.

여러분, 돼지 껍데기 먹잖아요. 껍데기 안이 어디 입니까? 이렇게 봐도 겉이고 저렇게 봐도 겉인데 무슨 속이 있어요. 속이 없어요. 껍데기 밖에 없어요. 인간을 검시하고 가위 가지고 잘라 보세요. 남는 것은 피부 껍데기, 위장 껍데기, 간 껍데기, 콩팥 껍데기, 껍데기 밖에 없지 사람 속, 안이 어디 있습니까? 그 껍데기로 둘러싼 그 공간을 안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빈 공간이지 그 안에 들어가서 뭐 할 거예요? 그래서 이것은 ‘우리 안에’, ‘너희 안에’하는 안은 우리가 우리를 바라볼 때 없는 곳입니다.

제가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하나님의 일은 우리가 생각 못한 것만 골라서 한다 이 말이죠. 하나님의 일이란, 예수님의 일이란 우리가 생각 못한 거예요. 요한복음 4장에서 어떤 여인이 물 길러 왔을 때 그때 그 여인은 어떤 것을 기대했겠습니까? 물을 길러서 샘물을 길러서 집에서 퍼먹는 것 생각했죠. 그때 예수님이 뭐라 했습니까? “지금 아줌마 뭐하세요?” “ 물 길러 왔어요.” “내가 주는 물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건데” 그 물은 어떤 물입니까?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그런 물이 있습니까? 프랑스제 생수 에비안 입니까? 도대체 무슨 물이 목마르지 않는 물이 어디 있어요? 나에게 물을 달라는 그이가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을 줄 건데 라고 한다면 그러면 그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을 받았어요?  받았습니까? 안 받았습니까? 몇 리터 받았습니까? 그 물이 그물이 아니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찾아올 때는 우리가 예수님을 기대한 것을 주시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무엇을 원하느냐 하면 우리가 죽어서 천국 가고 이 땅에서 복 받아서 돈 많이 벌고 건강하고 가정 화목하고, 몸 건강, 가정 화목하고, 부자 되는 것, 고생 없는 것 빼놓고 우리가 이 세상에서 원하는 게 뭐가 있어요. 없다 이 말이죠. 그것만 안 주시는 거예요. 그런 것을 안주고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것을 준다는 말이죠. 어떻게? 우리 안에 들어 와서 우리 안이 없는데 우리 안에 어디에 들어온단 말이에요. 배안에? 배 째면 예수님이 툭 튀어나오겠네요? 어디 근육 안에? 근육세포 안에? 주님이 어디 있어요? 주님이 어디 계시 다고요?  그만큼 인간은 예수님이 보는 나와 내가 보는 나와 이게 달라요. 우리가 보는 나는 과학적으로 보고 물리적으로 보고 생물적으로 봐서 내가 누구인지를 몰라요. 그냥 돼지 껍데기 세포 껍데기밖에 없어요.

우리는 우리 자신을 움직이는 유기체 이상으로 안 본다 이 말이죠. 하지만 우리가 그렇게 껍데기로 보는 그것도 주님은 자신이 그 안에 거하는 충분한 공간이 되는 겁니다. 내가 나를 제대로 알아서 “주님이시여 이 안에 들어오세요.” 라고 요청할 수 없어요. 우리는 우리 자신을 모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시면 아하 내안에 내 안주인이 내가 나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고 내안에 나를 지배하는 분이 들어 오셨구나! 옛날에는 그 자리를 누가 지배했어요? 마귀가 지배했던 그 자리에 주님이 그 자리를 차지해서 이제 나는 주의 것이 되었구나 하는 그것을 느끼게 되는 거예요. 그것을 알게 되는 겁니다. 그런 사람을 두자로 성도라고 해요 성도가 물었어요. 당신 성도입니까? 예 성도입니다. 본인을 어떻게 성도로 만들었습니까? 모르죠. 성도 만드는 방법도 모르고 설사 성도가 되고 싶어도 성도라는 그 자체가 우리가 생각하는 성도가 아니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가 천국 간다. 그 천국은 지옥입니다. 내가 끄집어낸 천국은 지옥이에요. 우리가 기껏 그것밖에 생각 못해요. 진짜 천국은 우리가 생각도 못한 천국입니다. 진짜 천국이 되면 우리가 지금 죽어도 살아 있는 거고 살아서 영원히 죽지 않는 것을 우리가 알게 돼요.

그런데 우리 몸이 심장 뛰는 것으로 살았다고 한다면 그런 식으로 생각한다면 그러면 너 예수 믿고 안 죽나? 하면 우리가 예수 믿고 독약 먹고 실험을 해 봐야죠. 예수 믿었다, 독약 마셨다, 안 죽어야 돼요. 총 쏴 봐라 해서 총 맞고 석선장 마냥 7방 맞아도 안 죽어야 돼요. 석선장이 성도 입니까? 그래서 총 맞아도 안 죽었어요? 성경에 나오는 모든 용어는 우리가 상상도 못한 거였습니다. 나라는 것을 성경을 통해서 새롭게 발견을 한 거예요. 아~, 나라는 것은 그리스도가 능히 들어 올 수 있고 지금 안 믿는 사람 속에 악마가 능히 들어 가 있잖아요. 그런데 그 안 믿는 사람보고 지금 당신 안에 악마 있다고 하면 그 사람은 바빠요. 악마가 어디 있어? 악마가 엉덩이에 있나? 악마가 어디 있어? 배 쨀까? 악마가 어디 있는데 아무리 살펴도 악마가 있는 것을 발견 못했지만 성경에 보면 너 안에 악마 있다 그 악마가 예수 못 믿게 했다고 하는 겁니다.

이런 이야기들이 세상 사람들에게 낯선 이야기가 되는 겁니다. 그런 질적인 성도를 끄집어내는 데서 숫자는 오히려 방해가 돼요. 우리 교회가 만약에 5천명이라 합시다. 5천명인데 여러분 안에 그리스도가 계신다고 얘기했을 때 그것을 못 알아듣는 사람이 5천명 같으면 그 안에 교회의 성도가 몇 명입니까? 단 한명도 없죠. 단 한 명도 없는 거예요. 5천명인데 한 명도 없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마세요. 오히려 거기서 단 한 명이라도 나타나면 그게 더 이상스러워요. 이상하다 저 사람 돌았나? 저 사람이 왜 성도지 당신 안에 누가 계십니까? 내안에 그리스도가 계세요. 언제부터 그랬습니까? 언제부터 알 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이교회에 당신 말고 성도 발견했어요? 제가 5천명 교회에 50년 다녔는데 아직도 한 명도 발견 못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죠. 자기 안에 그리스도 들어 온 것이 자기가 원해서 들어 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주여 제안에 예수님이 들어오게 하옵소서!” 이 기도 한다고 들어오는 게 아니거든요. 그러면 주께서 뭐라 하느냐 하면 ‘그 생각 버려라 이게 어디서 감히 구원되려고 해! 주제 파악도 못하면서 네가 구원될 자격이 있어?’ 그렇게 이야기하겠죠. 진짜 예수님이 들어 온 사람은 “주여 왜 저를 찾아오셨습니까? 왜 저를 성도 되게 했습니까?”라고 주님과 교제 하겠죠.

여러분 만약에 내일 조선일보에 어떤 여자가 처녀인데 임신했다고 나오면 그 여자가 사기를 쳤다고 하겠죠. 누가복음 1장에 보면 마리아 여자에게 처녀가 임신했죠. 그래서 기자가 찾아가서 ‘이 임신은 웬일인고?’ 하고 물어보니까 ‘주의 말씀이 응하게 하려하심입니다.’
이렇게 나온다면 조선일보가 뭐라 하겠습니까? 뭐라고 타이틀 걸겠어요? ‘점차 정신이상자가 증가하다’ 뭐 이렇게 하지 않겠어요? (ㅎㅎ) 왜 우리들이 알고 있는 다른 이야기 왜 하느냐? 우리가 과학적으로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다른 이야기를 왜 하느냐 하는 겁니다. 내안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21세기에 과학적으로 안 맞는 현실입니다. ‘내안에 그리스도가 있고 싶어’ 이거는 돼요. 왜? 성경에 나오니까 ‘주여 제 안에 성령이 계시면 얼마나 좋을까?’이거는 된다 이 말이죠. ‘홍해가 갈라지면 얼마나 좋을까?’ 이것은 되는데 내일 동아일보 신문에 ‘홍해가 갈라졌습니다. 그래서 지진 난 일본사람들이 건너 왔습니다.’ 이것은 말이 안 되지요. 그런데 ‘그 앞에 보니까 어떤 목사 아저씨가 지팡이 들고 서 있더니만 동해 바다가 갈라졌습니다.’이것은 말이 안 되잖아요. 지금 홍해가 갈라지는 것이 말이 안 되듯이 동아일보에 항의 들어 올 거예요. 말이 안 되듯이 그 이상으로 말이 안 되는 것이 내안에 그리스도 있다는 이 말입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가 있다는 것은 말이 안돼요. 만약에 이런 소리 하면 그 교회에서 쫓겨납니다. ‘내안에 그리스도 계셨으면 얼마나 좋을까?’ 이러면 칭찬받아요. 믿으면 좋다고 그게 아니고 내안에 그리스도 계시다 이러면 문제된다니까요 문제가 커요 문제가 큰 문제입니다. 내안에 그리스도가 있다는 말은 마리아가 내안에 아기 예수가 있다는 말과 똑같은 말이에요. 여자가 임신하면 그나마 다행이죠. 여자 이니까 남자가 임신하면 기가 찰 일 아닙니까? 마리아 같은 경우에는 십자가 전이기 때문에 세포 안에 자궁이 커졌지만 우리 같은 경우 자궁이 안 커져도 자궁이 없어도 내안에 그리스도가 생겨납니다. 지금 이 이야기를 처음 듣는 이야기 같은데 이 이야기가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잖아요. 여기 1장27절 끝에 나오는 거 아닙니까?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라, 그리스도가 어디에 있습니까? 어디에 있느냐고 묻는 자체가 우리가 평소에 얼마나 나 자신에 대해서 기존에 알고 있던 공간개념을 사수하고 그게 전부 인줄 알고 있었느냐 말이죠.

우리 몸 자체가 우리식으로 알고 있는 그런 몸 가지고서는 예수님에 대해서 설명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진짜 오시게 되면 내안에 얼마든지 그리스도가 계실 수가 있고 또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계실 수도 있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세상에서 그렇게 힘이 된다는 그 숫자, 사람 수 그것이 오히려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계시다는 그 가치를 훼손시키죠. 너희 교회 안에 그리스도 계신 사람이 몇 명이 돼? 진짜 그리스도에 관심 있는 사람은 그렇게 묻는 게 아닙니다. 그게 몇 명이 된들 뭐가 힘이 되겠어요?  한 명이 있던 두 명이 있다고 힘이 더되는 것도 아니고 세 명 있다고 힘이 더되는 게 아니에요. 왜냐 하면 그리스도가 계셔 버리면 만약에 세 사람에게 그리스도가 계시면 각자 그리스도 분이 예수님이 세 번 나와서 우리 세 사람이니까 힘이 더되겠다. 그렇게 그리스도가 그리스도를 그렇게 이야기 안합니다. 그리스도가 만약 다섯 명 있다면 우리는 그리스도가 다섯 명 각자 있으니까 끄집어내서 독수리5형제처럼 지구를 지키자 변신 하면서 다섯 명의 그리스도가 나타나서 교회를 지키자고 이렇게 나옵니까? 예수님이 귀신입니까? 미아씨 그리스도 있고 재원씨 그리스도 있으면 그러면 집에 그리스도가 두 명 되는 거예요. 우리 몸이 한 몸 한 몸 따로 이렇게 계산하니까 그리스도 안에 계시다면 예수님도 두 분이 아니고 각자 한 분한 분 합치면 두 명 된다는 사고방식을 갖고 있다면 이것은 창세전부터 있는 비밀에 대해서 그만큼 모르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만큼 무식하다는 뜻이에요. 2장 5절 다 같이 봅시다.
 
골 2:5 이는 내가 육신으로는 떠나 있으나 심령으로는 너희와 함께 있어 너희의 규모와 그리스도를 믿는 너희 믿음의 굳은 것을 기쁘게 봄이라

여기에 몸, 육신으로는 떠나 있으나 심령으로는 함께 있잖아요. 그러면 거리가 몇 초입니까? 너무 멀면 주파수가 또 잘 안 잡히면 몰라요. 지금 왜 그리스도 안에 있다 또 몸은 떠나 있으나 영은 함께 라는 것이 어떤 구조 안에서 이 말이 성립되는가? 그것을 이제부터 제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천지 창조할 때 천지 창조한 뒤에 지구가 있었죠. 지구가 있어 버리면 이 지점과 이 지점에 있는 인간은 같을 수가 없어요. 떨어져 있어요. 그런데 노아 홍수 때 보니까 이 지구상에 홍수가 일어나서 모든 사람이 다 죽었죠. 여기 끝에 있는 지점도 죽고 여기도 죽었죠. 그러면 끝에 있다고 물이 적게 온 것도 아니고 얕게 온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노아 홍수는 여기 끝에 있으나 저기 끝에 있으나 다 같이 죽을 수밖에 없을 오직 방주 안에서만 살고 나머지는 다 죽도록 충분하게 비가 오잖아요. 이 둥근 것을 평평하게 펴 봅시다. 지구를 판 데기로 보면 여기서 살아 있는 것이 어디 입니까? 방주 안에만 살아 있죠. 다른 데는 지구가 아니고 뭐가 되느냐 하면 방주 밖이 되는 거예요. 방주밖에 어떤 사람이 있는데 갑자기 비가 오더라. 심지어 방주에도 비가 내리겠죠. 방주에는 비가 안 들어오니까 비가 오죠. 비가 올 때 여기 이 사람, 방주밖에 있는 사람은 구원이 어디 있습니까? 여기서 500미터가 떨어져 있다면 500미터 떨어진 방주 안에만 구원이 있고 이 사람에게는 구원이 없고 물의 심판이 주어지겠죠. 그렇죠? 제 말이 틀린 것이 아니죠. 여기 밖에 있는 사람을 볼 때 방주 안에서 볼 때는 500미터 떨어진 사람에게 심판이 내리는 것이 아니고 방주밖에는 전부 다 500미터건 5키로 건 500키로 건 방주 밖이라는 이유, 조건 때문에 다 같이 저주받죠.

이것을 언약 안과 언약 밖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언약이라 하는 것은 방주에게만 언약의 혜택이 적용되는 거죠. 방주밖에는 언약의 혜택, 구원의 혜택이 안주어 지죠. 노아 언약이니까 언약 안에서만 구원이 주어지고 밖으로 나오면 저주로 이어 지죠. 언약 밖은 저주로 이어지잖아요. 거리가 50미터건 1킬로냐 관계없이 다 저주가 주어진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방주를 통해서 이 세상을 우리가 보는 물리적인 방주, 참나무로 만든 덩어리하고 밖에 있는 산과 들, 이렇게 나누는 것이 아니고 언약의 관점에서 봤을 때는 산과 들 방주라는 나무로 만든 배로 보는 것이 아니고 언약 안과 언약 밖이라는 새로운 관점으로 본다는 말입니다.

이 새로운 관점이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이 지점에서는 안 나오고 저 멀리 장차 십자가에 새언약 관점에서 소급해서 미래 관점에서 소급해서 보니까 이것은 언약 안이 되고 이것은 언약 밖이 되는 겁니다. 또 하나의 예를 들면 아브라함이 갈대아우르, 자기 고향을 떠났잖아요. 창세기 12장에 보면 아브라함에게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 복이 오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저주가 온다고 했잖아요. 그것을 무슨 언약? 아브라함 언약이죠. 그러면 만약에 아브라함이 애굽에 내려갔다 애굽에 내려갔으면 그것은 갈대아우르가 아니고 먼 지방이기 때문에 저주가 옵니까? 안 옵니까? 우리 같으면 멀기 때문에 저주가 고향이 아니고 멀기 때문에 안와야 되잖아요. 아브라함 고향이 지중해이고 이라크 이란이고 이집트, 이스라엘 아닙니까? 아브라함은 갈대아 이 지역에서 이리로 왔잖아요. 그럼 하란에서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특히 남부 지방의 언약을 받았다면 일단 저 밑에 있잖아요. 그러면 여기서 너를 축복하는 자가 복을 받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 저주를 받으면 이것이 저 멀리 떨어진 이집트에서는 해당이 될까요, 안될까요? 우리 같으면 멀잖아요. 멀어서 해당이 안 될 것 같은데 아브라함이 이집트에 가서 바로 왕이 자기 마누라 건드리니까 어떻게 됐습니까? 저주가 왔잖아요. 그러면 언약의 하나님이 발생되면 언약 안만 축복하고 나머지는 무조건 거리가 멀던 세월이 가든 관계없이 모두가 저주가 되는 거예요. 그렇다면 노아 언약에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방주 안에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시간이 나와요.

무슨 시간이냐 하면 은혜의 시간이 나옵니다. 은혜의 시간에 의하면 너희들이 날 때부터 악하기 때문에 너희들이 아무리 악해도 봄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물로서는 심판을 안 하겠다는 겁니다. 이것이 어디서 나왔습니까? 그들이 언약 밖에서 회개해서 얻은 겁니까? 아니면 언약 안에서 나왔어요? 언약 안에서만 나오기를 내가 물로서 심판하지 않겠고 너희들이 악하기 때문에 자연의 햇빛과 공기를 무상으로 주겠다는 것이 언약 안에서만 나오는 거예요. 그러면 세상은 애초부터 무슨 세계입니까? 언약에 숨겨진 그리스도의 비밀을 보여주기 위한 외각 풍경 모습이 대자연 세계가 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질 때 하늘의 해가 깜깜해 졌죠. 그리고 지진이 일어났잖아요. 예수님께서 잠자고 있을 때 풍랑이 일었을 때 제자들이 배 뒤집어질까 봐 걱정할 때 예수님이 일어나서 먼저 뭐했습니까? 제자들 보고 믿음 없다고 나물하고 아무도 없는 바람과 바다보고 뭐라 했습니까? 나물했죠. 바람아 조용해라 바다야 조용해라 하고 나물하니까 갑자기 조용해 졌지요.

주님께서 어떤 조치를 했습니까? 이 대자연 세계는 새언약의 주인공 되시는 비밀 되시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바람도 있고 바다도 있고 홍해 바다도 있고 여리고 성도 있고 마귀도 있고 인간도 있는 거예요. 제가 지금 그리스도를 위해서 대자연이 있다, 천사도 있다 하지만 제가 마지막에 거론한 게 뭡니까? 그리스도를 위해서 누구도 있다? 인간이 있지요. 노아는 뭘 만들었죠? 방주를 만들었죠. 그런데 주님은 이 마지막 때에 성도를 만들었습니다. 교회를 만든 거예요. 그러면 성도 안에 뭐가 꽉 차 있습니까? 성도 안에 그리스도로 꽉 차 있고 성도밖에는 뭐가 있어요? 성도 밖에는 인간들은 그리스도가 없지요. 그래서 그리스도가 우리 성도에게 찾아온 것은 우리를 구원하러 찾아온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언약의 위력을 증거하기 위해서 우리를 맘껏 사용하기 위해서 들어 쓰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찾아온 거예요. 마치 방주처럼 마치 노아처럼…….

노아가 방주 만들고 배 타고 구원받았다 하지만 사실은 노아 사적인 입장에서는 홍수도 아예 없어서 방주도 안 만들었으면 사는 게 편하잖아요. 그냥 좀 나 건드리지 말고 가만히 놔두세요. 여러분 모세가 홍해 건너는 것도 좋지만 모세가 그냥 양이나 키우고 평생을 그렇게 살다 죽는 것도 모세 입장에서는 더 낫죠. 괜히 애굽 내려가서 고생하지 말고 싸우지 말고 그냥 가만히 있다가 가만히 죽으면 되잖아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를 그냥 두지를 않는다 이 말이죠. 원치 않는 길을 가게 해요. 우리가 원하는 것은 그냥 이 대 자연 속에 밖에 원이나 내 원이나 똑같이 세상에 기대고 사는 것, 남들처럼 이웃집과 싸우지 않고 윗동 아랫동, 아랫마을 윗마을 화개 장터처럼 그렇게 사는 게 편해요. 그런데 우리가 아브라함이 돼 가지고 언약이 돼 가지고 예상치도 못한 그리스도 안에 들어 가 버리면 그때부터 내 인생 없습니다.
 
내 인생 없고 예수님의 인생만 살아야 돼요. 그리고 졸지에 그리스도가 없는 사람은 지옥 가게 되어 있고 우리는 천국 가게 되어 있고 천국과 지옥이 지금부터 벌써 갈라지는 겁니다. 그 작업을 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모든 말씀 이미 내 속에 들끓고 있고 내가 말씀을 지킨다는 것은 어림도 없어요. 무슨 말씀을 지켜서 말씀을 지킵니까? 무슨 말씀 지킬 재주가 있습니까? 뭐 알아야 말씀을 지키죠. 말씀의 성취도가 뭔지 모르는데 간음하지 마라 가 뭐며 살인하지 마라 가 뭔지 바리새인들은 몰랐어요. 형제를 미워하는 게 살인인지 꿈에도 생각 못했습니다. 칼들고 설치지 않으면 살인이 아닌 줄 알았죠. 너 오른손이 죄를 범하면 빼 버리라 전기톱, 갈고리 가지고 다녀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예상도 못한 겁니다.

그런 식으로 주님께서 우리를 일방적으로 부르셔서 의롭다 하시고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데 의롭다 함을 입은 게 황당무계한 일 아닙니까? 착한 일해야 의롭지 테레사 수녀처럼 돼야 의롭지 아무 것도 한 것도 없는데 내안에 계신 예수님 때문에 졸지에 의롭게 되고 그 의로움 때문에 영광스럽게 천사처럼 되고 아무리 좋은 거지만 너무 황당하게 받으니까 이상스럽지 않습니까? 그것을 우리는 즐거워하고 기뻐해야 된다 이 말이죠.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되는데 기뻐하고 즐거워야 된다면 쉽게 말하면 우리 자신이 이 시대에 언약의 중심이 되어 버려요 언약의 중심이 되어 버리면 그때부터 우리 주변의 사람들이 얼마나 우리를 놀리겠습니까?

시내산에서 모세가 계명을 받았어요. 이스라엘 사람들이 시내산 갈 이유가 없습니다. 홍해 건너왔으면 그냥 약속의 땅 들어가면 돼요. 그런데 하나님이 광야 시내산에 왜 들어가게 합니까? 그들은 구원받아 놓고 자기가 구원받을 만한 자격이 된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래서 모세가 시내산 올라갈 때 밑에서는 무슨 축제가 벌려 졌습니까? 우리를 구원해 주신 여호와 축제를 벌였죠. 아론이 주동이 되어 여호와 축제를 벌였잖아요. 그런데 막상 모세가 내려와 언약을 대하니까 이것은 완전히 우상숭배였죠. 우상 숭배자에게 무엇이 주어지느냐 모세 언약이 주어지는 거예요. 그들은 애굽에서 벗어나서 좋아했는데 좋은 게 아니에요. 그것은 본인이 생각했던 구원이고 주님의 구원은 그게 아닙니다. 그 사람 속에 모세율법이 담기는 그게 구원이에요. 십계명을 지켜야 됩니다. 모든 것을 다 지켜야 됩니다. 안 지키면 애굽인 들이 죽는 거나 광야에서 죽는 거나 똑같은 죽음이에요. 애굽인 들이 자기 나라에서 죽는 거나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죽는 거나 양쪽 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언약 중심적으로 되지 않는 이상은 다 같이 똑같은 죽음입니다. 그래서 광야에서 40년 동안 다 죽여 버리잖아요. 그중에서 여호수아와 갈랩 빼놓고 서는 심지어 모세마저 광야에서 다 죽여 버려요. 그렇게 죽음으로 말미암아 결국 들어 나는 것은 언약 안에서만 하나님의 계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언약 안에 하나님이 계시는 거예요. 하나님이 계신 자녀에게는 언약 안에만 계시는 겁니다.

‘그러면 목사님 우리는 죄인인데, 언약도 아닌데 우리는 왜 옵니까?’ 이 죄인 되게 하는 게 이게 언약에 포함이 돼요. 우리가 상한 심령이 되는 게 언약의 결과입니다. 하나님의 새 언약 십자가 피 앞에서는 우리는“주여, 피 보니까 우리는 태어난 자체가 죄인이군요?” 라고 깨닫게 되면 이미 그 사람은 하나님의 새 언약을 포함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새 언약을 포함하고 있는 사람이면 그 사람은 자기 인생은 이제 끝났어요. 없습니다. 이 새 언약의 위력과 효과를 본의 아니게 외부에 발산하게 되어 있습니다. 발산하게 되면 그 언약 빼놓고 그 나머지는 전부다 지옥이 돼요. 그래서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죠. 이것을 달리하면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사람이 아닌 거예요. 언약이 없이 보면 얼굴 곱고 키 160에 고현정같은 사람들은 나이 40이 다되는데 피부가 좋답니다. 히터도 안튼답니다. 피부 관리한다고요. 얼마나 예뻐요. 선덕여왕에서 카리스마 있잖아요. 자기가 카리스마 있다고 칼국수를 먹던지 간에 사람 아닙니다. 왜냐, 언약이 없으면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에요.

그리스도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 사람이 아니라 말입니다. 그러면 사람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아요? 복음을 이야기해 보세요. 언약을 이야기하면 언약으로 반응이 오게 되어 있어요. ‘십자가로 인하여 구원되었습니다.’하는 소리가 나오는데 그게 안 나오면 대통령이 되었던 누가 되었던 새삼스럽게 지진 안 일어나도 이미 죽은 거예요. 망대 무너져 18명 죽은 게 불쌍한 게 아닙니다. 망대 안 무너졌어도 하나님의 영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에요. 이렇게 이야기하면 어떤 사람은 “그러면 교회 안다니는 우리 엄마, 복음 거부하는 내 딸, 교회도 안 나오는 아들, 그것도 인간도 아닙니까?”그러면 제가 그러죠. “당신도 인간 아닙니다.” 당신도 인간이 아닌데…….  다 같이 인간이 아니었어요.

다만 언약이 임하니까 인간 아닌 게 인간되었을 뿐이지 괜히 자식들 남편 왜 신경 씁니까? 처음부터 인간 아닌데서 인간이 아닌 게 나왔는데 어쩌란 말입니까? 처음에 인간이었는데 죄지어서 인간 아닌 것 같으면 내가 한 탄이나 하지 그게 아니고 처음부터 인간 아닌 것 속에 나도 포함되었는데 주께서 그리스도의 영이 주어져 갑자기 내가 언약 사람으로 채택이 되었고 그때부터 내 인생 속에 예수님이 살아 계시고 감추어진 비밀이 움직이는데 그 비밀로 인해 일종의 노아의 방주가 되어서 밖에는 저주가 내리고 내안에는 축복이 되고 그런 식으로 가는 겁니다.

사도 바울의 이 한 마디 한 마디가 오늘날 교회 이야기하고 전혀 상관없는 오늘날 교회라는 이름의 친목 단체와 아무 상관도 없어요. 정말 결코 영어로 네버 결코 교회와 아무 상관없는 거예요. 5천명 나오면 뭐하나요? 그것은 성도가 아닙니다. 만약에 거기에 성도하나 있으면 거기는 그 사람 쫓아내고 말아요. 전부다 그리스도 없는데 혼자 그리스도 있어 보세요. 기가 찰 것 아닙니까? 우리 교회 5천명인데 그중에 내가 보니 성도 한사람 있고 4천999명은 다 지옥 갑니다. 그 소리 하고 돌아다닐 텐데 그 사람 가만히 두겠어요? 안 되지요.

28절 봅시다.

골 1:28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골 1:29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이제 사도 바울이 왜 자기 힘으로 산다는 말을 안 하는지 아시겠죠. 자기 힘으로 살 것 같으면 그것은 노아 방주가 아닙니다. 그것은 자기가 뗏목 만들어 자기가 홍수 났는데 노를 졌고 있는 사람이에요. 아시안 게임에서 카누 하는 것처럼 열심히 인상 쓰고 노 저어 봤자 소용없어요. 언약밖에는 백날 노를 저어도 그 속에는 동일하게 저주가 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이미 복이라는 방주 안에 확정되어 있으면 나머지는 무조건 그건 저주에요. 이미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오면 그리스도가 계신 그 사람이 구원받는다면 이유 없이 그 사람 밖은 전부다 저주가 주어지는 겁니다. 교회 목사님이 복음만 전하죠. 복음만 전하면 그 복음의 의미를 아는 사람이 만약에 의존 교회 교인이 바라기는 다이기를 바라는데 다라면 의존 교회가 집단적으로 구원받은 게 아니에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찾아간 겁니다. 의존 교회 교인이 80명 같으면 80명도 아닌데 80명이라고 하니까 미안하지만 80명이 다 구원받았는데 다음 주일날 78명이 떠났어요. 떠나도 그리스도는 안 떠난 거예요. 78명이 흩어진 거죠. 78명이 흩어진 거지 의존 교회가 둘로 나눠진 게 아닙니다. 언약에는 숫자가 해당이 안 돼요. 그리스도가 숫자를 초월합니다. 숫자의 적용을 안 받아요. 그리스도는 옛날에도 한 명이고 지금도 한 명이기 때문에 숫자에 적용을 안 받아요.

그러면 목사가 설교할 때 오늘 성도가 있는지 보자 이렇게 나오죠. 오늘 몇 명 오셨습니까?
이렇게 보는 게 아닙니다. 와 봤자 돼지 껍데기 와 봐야 무슨 소용 있습니까? 돼지 껍데기 안에 돼지 껍데기가 돼지 껍데기로 가는데 무슨 소용 있습니까? 그리스도가 포함되어 있는 분이 올 때 그 말을 수긍을 하고 아멘하고 동의를 하는 거예요. 지금 우리가 골로새서를 하고 있습니다.

골로새서 25절을 봅시다.

골 1:25 내가 교회 일군 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경륜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죠. 이 말씀은 사도 바울이 이루는 게 아니라 주님께 비밀이 주어진 사람은 사도 바울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다 여러분들이 서울에 계시다가 부산으로 전근 가셔도 거기서 무엇을 이룹니까? 부산으로 전근 가시면 여러분의 방주가 부산으로 간 거예요. 그러면 부산에 가게 하신 것도 그 동네에 언약과 비 언약을 구분시키기 위해서 여러분들을 파견 근무한 겁니다. 여러분이 자재과에 있다가 총무과로 옮기면 총무과가 완전히 방주 안에 들어 간 거예요. 시장에서 장사하다가 때려치우고 보험을 해도 마찬가지로 거기에 방주가 하나 생기는 겁니다. 이게 말씀을 이루게 함입니다. 꺼지지 않는 불씨가,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샘물이 사방으로 튀는 거예요. 이것이 사도행전에 나옵니다. 핍박을 하니까 불똥이 튀듯이 전 세계에 다 흩어져 버렸어요. 가는 곳마다 불길이 일어나요. 하나님께서 우리가 예상 못한 사람을 만들었다 그 이야기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서 안에 예수님이 들어 있는 희한한 상상도 못할 정도로 인간을 새로 만들었다는 그 소식을 전부다 전하는 거예요.

이것이 감춰진 비밀이었다. 심지어 구약에 있는 노아도 부러워하고 아브라함도 부러워하고 바로 이때를 예수님 오셔서 새 사람 만드는 그것을 그들도 그리워하며 살았는데 그것이 실제적으로 종말론적 현상으로서 마지막 때의 현상으로서 교회라는 것이 생겨서 교회가 사방으로 퍼져 나가더라. 그런데 그 속에 다 그리스도가 운전대를 잡고 있다 그리스도가 그 안에 주인공으로 잡아서 그리스도가 이루고자 하는 말씀을 그들은 그냥 주님의 껍데기로 쓰일 뿐 이라고 되어 있죠. 그런 사람들이 각처에 있다는 것을 보고 사도 바울이 놀라는 거예요. 어떻게 각처에서 성도가 일어나느냐 이 말이에요. 이것은 도저히 인간의 힘이 아닌데 주님이 각처에 작업을 하고 계시구나 하는 것을 자기가 듣고 얼마나 기뻐하는지 몰라요.

방주 안에서 시간이 나오고 새로운 공간이 나온다면 방주밖에는 저주지요. 그렇다면 사도 바울이 방주 안에 있는 새로운 시간과 공간을 이야기하면 특히 공간을 이야기 한다면 육은 떨어져 있으나 영은 어디 있더라도 같은 언약이기 때문에 이것은 시간과 공간의 접촉을 받지 않는 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만약에 영이라고 하는 것은 성도 받은 육을 말하겠죠. 같은 성도라고 하는 것은 얼마나 많이 떨어져 있더라도 그것은 언약이 같이 작용한다는 점에서 한 언약 안에, 한 방주 안에 놓여 있는 것이 된다는 말입니다. 미국에서나 영국에서나 거기서 그리스도가 하는 일이 감춰진 비밀이라면 여기 의존 교회에서 이루어진 것도 감춰진 비밀이고 같은 일을 하고 있는 거죠. 누가? 우리가 하는 게 아니에요. 우리가 하면 같은 일이 될 수가 없죠. 누가 합니까? 우리 안에 그리스도 하기 때문에 우리는 직업에 관계없이 나이와 관계없이 아이큐와 관계없이 건강상에 관계없이 어떤 일도 우리는 그리스도 십자가 복음에 대해서 같은 놀라운 기이한 현상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교인 수가 몇 명인가 하는 것은 신경 쓰지 마세요. 교인 수가 몇 명인가 하는 것은 영은 하나인데 둘로 셋으로 이야기할 수 없잖아요 “너희 교회 몇 명?” “하나”그리스도 몸이 하나, 이 교회도 하나, 합쳐도 하나, 1더하기 1은 1이 되는 겁니다. 물방울 더하기 물방울은 몇 개입니까? 하나이지요. 다 같은 성질이니까  물 성질에 물 성질을 합하면 물이 되는 겁니다. 서른 명 모였다고 하면 하나죠. 다 같은 그리스도죠. 30명이 아니고 하나죠. 괜히 30명 좋아하지 마세요. 또 힘으로 변질됩니다. 그래서 힘이 얼마나 모이냐 하는 것은 기능입니다. 무슨 기능을 하고 있느냐? 그리스도의 기능을 하는 것이 중요하지 그리스도의 힘을 내가 얼마나 끌어 모았느냐는 사적으로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계시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나를 어떻게 그리스도 일을 시키느냐가 중요합니다.

2장2절을 봅시다.
골 2:2 이는 저희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원만한 이해의 모든 부요에 이르러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라

그리스도가 있어야 그리스도에 관심 있지 그리스도가 없는 사람에게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라 하면 “저 목사는 지금 무슨 소리 하고 있나 복이나 주세요. 내가 그리스도에 관심 없어요. 나는 내가 얼마나 크느냐 얼마나 잘되느냐에 관심 있지 그리스도에 관심 없습니다.”라는 반응이 나오면 그 목사님 설교 참 잘 하신 거예요. 왜? 언약밖에 있구나!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이구나! 가 확연하게 드러냈잖아요. 그래서 계속해서 목사님들은 복음을 전할 이유가 바로 여기 있어요. 복음만 전해야 돼요.

어떤 사람이 저에게 이 근호 목사님은 복음만 전한다고요…….  그럼 복음 외에 무엇을 기대했는데요? 사랑? 동정? 친밀함? 뭘 기대했습니까? 당신 속에 있는 그리스도 내 놓아 봐라 말이죠. 그리스도가 없기 때문에 그리스도 말고 다른 것을 자꾸 요구하는 거예요. 왜 교인 수가 안 늘어나느냐?  왜 교회 안 커지느냐?  왜 헌금 적게 나오느냐? 이 동네 왜 재개발 안 되느냐? 뭐 이런 거……. 그리스도가 안 나오니까 그리스도 외의 것을 달라고 교회 와서 그리스도 달라고 철야기도 해 봐야 소용없지만…….

성경은 예수님의 성도는 분명히 규정되어 있는데 우리가 왜 이 성경이 눈에 안 보이느냐 하면 한국 교회가 지어낸 성도 있잖아요. 그게 너무 각인돼서 꽉 박혀 버렸어요. 한국 교회가 성도라는 것 그게 뭐냐 하면 코이노니아 교제하는 것, 교육하는 것, 예배하는 것 이런 일을 해야 성도이라고 교회 충성 봉사하라 이런 것이 너무 꽉 박혀 있어서 정작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계시 말고 한국 교회가 인간들이 조작해 낸 계시, 교인 하나 만들면 엉터리 계시 속에 성도, 그것을 행하고 강요하고 촉구하고 있는 거예요. 목사들이……. 그러니 목사가 복음을 방해하는 사람들이에요. 자기도 천국 못가고 천국 가는 사람을 방해하는 사람이에요. 성경에 성도는 분명히 그런 게 아니에요. 안에 그리스도가 있으면 끝이에요. 복음과 복음의 만남이에요.
 
어떤 분은 저를 이렇게 비난해요. 이 근호 목사는 나오면 왜 자꾸 복음이야 기하냐고 해요. 만나면 두 시간 세 시간 복음 이야기한다는 거예요. 이렇게 된 것도 저 때문이 아닙니다. 놀러 와서 복음 이야기 왜 하느냐는 거예요. 언약의 시공간을 몰라요. 어디 놀러 왔는데?  덕구온천 덕구온천이 언약밖에 있어요? 복음 강의는 예배당에서만 합니까? 그거에요? 결국 왜 자유 시간에 복음 이야기하고 왜, 결혼식장에서 복음 이야기 하냐? 결혼식장이 뭔데요?  결혼식장이 부조 받는 데인가? 왜 축구장에서 복음 이야기하고 TV 개콘 보고 왜 복음 이야기 하냐? 식당에서 콩자반 먹으면서 복음 이야기하고……. 이게 복음 이야기 안 되게 되면 아마 복음 이야기가 그리워 질 때가 올 겁니다. 항상 복음 이야기 나올 때가 그리워질 거예요. 복음이 안 나온다는 것은 차라리 목을 졸라 숨 막혀 죽으라고 하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연탄가스로 죽으라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목을 콱콱 쥐면 복음이 안 나올 거예요.

안에 그리스도가 없는 사람들은 복음 내라 하는 것이 힘이 더 들어요. 그리스도가 없는데 무슨 복음이 나옵니까? 아는 신학 이야기 몇 가지 주석하다 끝내 버려요. 강의 끝. 다른 이야기하자 이렇게 나옵니다.

인간의 힘으로 나오는 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이것은 신학이 나와요. 복음이라고 하는 것은 말릴 수가 없어요. 계속 나와요. 모든 것을 봐도, 비타 500을 봐도 복음이 다 나와요. 모든 현장이 언약이냐, 비 언약이냐? 새 언약이냐, 새 언약 아닌 게 뭐냐? 그것을 구분하기 위해서 우리를 사용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 아닌 게 어디 있습니까? 사도 바울이 복음 아닌 게 어떤 게 있을까요?  사도 바울의 편지 가운데서 복음 아닌 게 있었습니까? 사도 바울이 사도행전 보면서, 로마서 보면서 복음 아닌 게 있었습니까? 골로새서 전체를 보세요. 단어 한 단어도 한 문장도 복음 아닌 게 하나도 없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고린도 교회가, 교회가 안 될 때 비로소 교회다운 거예요. 고린도 교회가 교회 아니라고 지적 하는 그 힘이 바로 진짜 살아 있는 언약에서 나온 힘인데 그 언약이 교회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교회 아니야 라고 외치는 그 힘이 바로 진짜 교회에요. 고린도 교회는 자기들 교회 만들려고 삯꾼 악마의 사자를 목사, 당회장으로 섬겼습니다. 고린도후서에 보면 너희 당회장은 마귀라고 이야기하죠. 저희 당회장은 마귀라 라고 이야기한 그것이 교회, 언약입니다.

사도 바울은 어느 대목도 언약이 아닌 대목이 없습니다. 사도 바울 고린도 교회 당회장 다시 찾기 위해서 복귀하려고 그런 소리 했습니까? 아니에요. 당회장이 되나 안 되나 교회는 이미 있는 겁니다. 왜냐 하면 언약을 본인이 원해서 받은 것이 아니고 새 언약이 그냥 일방적으로 주어졌기 때문에 자기 자신이 모든 말 자체가 언약이 되어 버렸어요. 언약과 비 언약을 구분하는 그런 기준점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말릴 수가 없지요. 사도 바울은 인생 자체가 마지막에 내가 어서 죽어서 주와 함께 거하고 싶다. 인생 자체가 이미 자기 것은 없어요. 다 날아가 버렸어요. 주께서 끝까지 죽는 순간까지 일방적으로 다 가져가 버렸어요. 내 것입니다 하는 게 없어요. 기껏 소망해야 뭐냐, 빨리 죽어서 내 것이 주의 것으로 들통 나는 순간, 이 몸이 주와 함께 영원히 거하는 순간인데 그것도 자기 맘대로 안 돼요. 왜? 누구 때문에? 교회의 남은 고난을 채우기 위해서 성도들에게 복음 전하기 위해서 그 스케줄도 자기가 짜는 게 아닙니다. 죽는 것도 내 맘대로 못 죽어요. 그 정도로 철저하게 언약대로 사도 바울을 사용하신 겁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 뿐만 아니고 성령 받은 모든 사람에게 다 같이 해당되는 사항입니다.

기도 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성경에서 말하는 성도가 한국 교회에서 말하는 교회 다니는 사람을 두고 이야기하지 않는 것을 알았습니다. 내안에 그리스도가 계시고 그리스도가 언약을 다 이루었기에 이미 우리가 다 이룬 상태에서 그 이룬 상태가 얼마나 이 세상에서 복음을 전파할 수 있는지 더불어 사용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