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의존교회110311a (성도 안의 그리스도)-이 근호 목사
골로새서 1장24절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신약성경에 나오는 사도 바울의 편지는 단어 하나하나가 구약을 밑바탕에 깔고 나오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아시다시피 구약은 글 자체가 옛날 언약이죠. 옛날 언약을 여러분들이 아시지만 정리하자면 옛날 언약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사람보고 지키라고 준 것이 바로 옛날 언약입니다.
그래서 만약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 수준에 이르지 못하고 지키지 못하면 주어지는 것은 무서운 혹독한 저주가 주어지게 되겠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말씀이 담고 있는 적어도 이 정도는 되어야 지켰다고 할 수 있는 그 수준은 어떤 인간도 그 수준에 도달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옛날 언약 가운데서 특히, 요약을 한다면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는 그것인데 그렇게 되려면 거기서 사랑이라는 의미가 적어도 무엇을 포기해야 되느냐 하면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할 때는 우리 인간들이 자기 사랑하는 것을 접어야 되죠. 포기를 해야 됩니다.
그런데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 자신부터가 우선이기 때문에 자기를 포기하기까지 하나님을 사랑한다, 만약에 하나님을 사랑했는데 자기가 그 하나님 사랑 때문에 희생이 되었다 그럴 경우에 우리에게 돌아오는 게 뭐가 있겠어요? 없잖아요. 아무 것도 없잖아요. 뭔가 줄 것 주고, 받을 것 받아야 되는데 내 쪽, 인간 쪽에서 하나님을 위해서 포기하고 살았는데 하나님 쪽에서 아무 것도 주지 않으면 나만 손해 보잖아요. 나만 손해 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기보다는 하나님 앞에 사랑하는 척을 해서 자기 이익을 그대로 가지려고 애를 쓰지요. 그런 식으로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이뤘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율법을 구약에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는 경우가 어떤 경우냐, 방금 제가 사람의 힘으로 율법을 이루지 못한 다고 했는데 그래도 율법을 이룬 경우가 어떤 경우냐, 시편 51편에 나오죠. 나는 상한 심령입니다. 다른 말로 나는 죄인입니다. 이런 뜻이거든요. ‘나는’에 집어넣을 것이 ‘나는 잘났습니다.’ ‘나는 최선을 다했습니다.’가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들어 가 버리면 사람이라 하는 것은 ‘나는 나다.’가 이것이 인간인데 나대신, 죄인이 들어 가 버리면 사람은 누구 앞에서 자기가 보기는 자기가 죄인이 아니에요? 누구 앞에 서니까 죄인으로 등장한 다는 겁니다. 누구 앞에 섰겠어요? 바로 이사야 6장에 보면 나오죠.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나는 망하게 되었다 나는 죄인이다.’ 결국 이것은 누구를 봤다는 말입니까? 창조주를 본거죠.
그렇다면 정리해 봅시다. 구약에서 하나님 말씀을 이룬 다는 것은 혼자서 열심히 도를 닦아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누구 앞에 설 때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설 때에 말씀이 이루어지는 거예요. 왜, 그 앞에 설 때 나는 죄인이 되고 나는 망하게 되었구나! 가 되니까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킨다는 것은 혼자서 아무리 지켜봐야 소용없고 내 자리에 누군가가 방문해야겠죠. 그것도 그냥 방문하는 것이 아니고 창조주로서 그 거룩함으로 무서움으로 다가와야 되겠죠. 다가올 때 ‘나는 죄인입니다.’ 하는 겁니다.
오늘 2시쯤 일본 동부 쪽에 지진이 일어나서 뉴질랜드 지진에 3천배 크기의 지진이 일어났답니다. 지진이 일어나면 사람들은 자기가 죄인인 것을 깨달을까요, 못 깨달을까요? 사람이 지진이 일어난다고 깨닫는 게 아니에요. 죄인이라고 수용하는 게 아닙니다. 살기 힘드니까 화가 더 나죠. ‘내 꺼 왜 부셨습니까?’ 하고 반발이 나오지, ‘나는 죄인입니다.’라는 말이 안 나오죠. 만약에 지진 앞에서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나온다면 그것은 지진 때문이 아니고 지진 일어나는 것과 상관없이 ‘나는 지진을 당해서 내 평생 모은 것, 나가진 것 다 날려 버려도 저는 처음부터 그런 인간임을 벌써 알았습니다.’라는 고백이 있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지진이 일어나기 전부터 이미 주님 앞에서 살아갔기 때문에 그 다음에 지진 일어나면 ‘내 그럴 줄 알았어. 내 꺼 다 날릴 줄 알았어. 나는 원래 죄인이니까 내가 내 노동을 의지 한다는 자체가 이것은 상한 심령의 입장에서는 이것은 말도 안 되는 거지, 상한 심령이면 상한 심령만 내 놓으면 되지 하나님 이것은 손 데면 안 됩니다.’ 하는 식은 안 되지 하고 스스럼없이 그런 고백이 막 나오죠. 이쪽에 지진이 만약에 대지진이라면 그러면 노아 홍수 때 지진은 규모가 얼마나 되겠어요? 8.8되는데 그쪽은 95되면 엄청나겠죠. 그러면 지진이 일어나면 그 사람들이 자기 죄를 회개할까요? 한번 두고 보자 하는 식으로 나오겠죠. 그래서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인간은 인간 속에 이미 구원될 수 없는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 이 말입니다.
아무리 화산 속에 있고 지진 속에 있다 할지라도 인간 자체가 지진 일어나서 구원되는 것은 아니고 인간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에 합당하게 바뀌어져야 합니다. ‘나는 죄인입니다.’하는 것을 다윗 언약이라고 하죠. 히스기야가 하나님을 찾을 때가 언제였습니까? 바로 앗수르의 편지를 받고 그 모든 것을 하나님께 다 내놨죠. 요아스왕 같은 경우 엘리사 목을 내 달라고 했죠. 요아스왕 같은 경우 앗수르가 포로 되었을 때 ‘엘리사 하나님 선지자 어디 있어 그 인간 만나면 내가 목을 칠거야’ 이 말은 엘리사의 목을 치겠다는 말은 장차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다면 그 하나님이라는 사람조차 목을 치겠다는 말과 똑같은 이야기가 됩니다.
그러면 요아스왕이 엘리야의 목을 치겠다는 말은 자기가 죄인이라는 뜻입니까? 왜 나를 힘들게 하냐! 그런 뜻입니까? 나는 상한 심령입니다. 라는 뜻입니까? 어디 감히 나를 힘들게 해 하고 공격적으로 나오는 거예요? 공격적으로 나오는 거죠. 그래서 지금에 우리가 사는 세상을 이렇게 지진이 일어나고 힘들게 하면 우리 속에는 거침없이 우리 자신도 내가 그렇게 독한 인간인가? 자기도 놀랄 정도로 내가 이렇게 하나님께 적대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었는지 내가 놀랍다 할 정도로 강하게 반발하겠죠.
다시 이야기해서 인간 속에는 인간은 스스로 구원이 안 되는 요소가 이미 들어 있는 거예요. 아무리 구원을 지켜 줘도 인간 자체가 하나님 말씀 자체에 대해서 반발하는 세력이 있어요. 그것을 바로 악마, 악령이라고 합니다. 악마 악령은 우리를 장악해서 조금이라도 뭔가 터지면 즉각적으로 하나님께 마음속으로 욕설을 해 대는 그런 모습으로 돌변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 것이 누구에게나 다 있죠. 그래서 인간은 구원이 안 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이 안 되는 그런 존재로 인간을 만든 거예요. 구원이 안 되는 스스로의 힘으로 아무리 좋은 말씀, 율법을 줘도 구원이 안 되는 그런 존재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거예요. 그러면 인간이 구원이 안 된다면 어떻게 하느냐, 구원이 안 되면 안 되는 거죠. 뭐 인간이 구원이 안 되면 구원을 요청하는 것도 그것도 무리한 요구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 땅에서는 천국 갈 사람도 없고 구원이 안 된다면 그러면 구원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오늘 본문 25절에 보면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인데’ 비밀이 있죠. 그림으로 그리면 이렇습니다. 이게 육지라면 육지 밑에 석유 원유가 흐르고 있어요. 사람들이 육지에 집을 짓고 살면서도 자기 집 밑에 석유가 흐르고 있는지 몰랐죠. 그런데 이 석유층이 쭉 올라갔다가 어떤 지점에서 영화 자이언트처럼 석유가 폭발한다면 집이 있는 이 지점에서는 석유가 있는지 몰랐죠. 감추어져 있으니까 몰랐는데 석유가 튀어나오는 이 지점에서 감추어져 있는 석유가 터져 나와 버렸습니다. 그렇다면 이 석유는 사람들이 모르기 때문에 비밀이라고 하고 감추어진 거죠. 여기 있는 사람들은 자신이 구원에 반대하고 하나님에 대해서 도전하고 대든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어요. 모르고 그냥 하나님께서 어떤 아이디어를 주시고 힌트를 주시면 그것에 따라서 자기가 구원되겠다는 그런 시도만 자꾸 생각하고 있는 겁니다.
이 사람들이 구원될 수가 없죠. 그런데 여기서 석유에서 뭔가 터져 나오면 나중에 석유가 터져 나올 건데 그 증상 중에 하나가 뭔가 잠시 터져 나오면 이게 다윗이 되어서 ‘나는 상한 심령입니다.’ 이사야 같은 경우에는 잠시 터져 나오면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구나!’ 그런데 그것뿐이에요. 재미있는 것은 이사야가 나는 화로다 망하게 되었도다! 했잖아요. 그런데 이 소식을 사람들에게 전하게 되면 사람들이 납득이 돼서 전한 것이 아니고 소식을 전하는 이유가 그냥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이 비밀들을 사용하는 겁니다. 그러면 이사야가 더욱더 구박을 받고 다윗도 마찬가지고 다른 사람들은 이해를 못하죠. 멀쩡한 사람이 자기가 죄인이라고 하니까 뭐 겸손인가? 너무 온유한가? 그런 쪽으로 생각했지 우리 인간 자체가 구원이 안 된다는 사실을 그리고 다윗이 그런 상한 심령이라 하고 이사야가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하는 이 자체도 이게 구원이 안돼요. 어떤 인간도 구원이 안 됩니다. ‘아,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이 소리 했다고 구원이 되는 것이 아니고 상한 심령이라고 말했다고 구원이 되는 것이 아니에요. 다만 구원의 힘을 느꼈을 뿐이에요. 그렇다면 구원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장차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석유가 터지듯이 예수님의 감추었던 비밀이 나타났어요. 제가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사도 바울의 이야기입니다.
사도 바울은 현재 어느 누구도 구원이 안 되는 이유가 구원 안 되는 그런 요소를 우리 인간이 이미 담고 있어서 인간이 아무리 노력해도 자기 힘으로 구원이 안 되는 그런 요소가 잠겨 있다, 묶여 있다 그렇게 보는 겁니다. 신약 때에 감춰진 비밀이 터져 버리면 이 비밀로 인하여 소급해서 다윗과 이사야가 구원이 되는 겁니다. 아브라함도 마찬가지이고 노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이삭을 바쳤잖아요. 아브라함이 믿음이 있다는 것을 하나님이 인정하셨죠. 그러면 아브라함이 구원된 거잖아요. 그런데 아브라함이 구원이 되었는데 왜 예수님 오시기를 기다렸을까요?? 참 이상하지 않습니까? 자기가 이삭을 받쳐서 하나님께 너 믿음 있구나, 확정 받았으면 그것으로 구원이 끝이고 그 믿음으로 의로움을 받으면 됐지 뭣 때문에 요한복음 8장에서 아브라함이 예수님을 왜 또 기다립니까? 이미 끝났는데 지금 구원받았는데 여러분 성경 보면서 그런 의문점 없었어요? 이스라엘이 믿음으로 돌았더니 여리고성이 무너졌잖아요. 그러면 구원됐잖아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그게 구원이 아니라는 겁니다.
구원이 아니면 뭐냐, 그것은 구원의 증상, 구원의 징후라는 거죠. 땅이 흔들린다. 감기가 걸리면 기침, 콧물 나죠. 이게 증상이라 하지 않습니까? 땅이 흔들린다는 것은 지진이 일어나기 전에 조짐이죠. 노아가 방주를 만들었다, 그것을 믿었다, 그럼 구원받아야 되지 않습니까? 노아가 방주 만들어서 구원받았습니까? 에녹이 하나님이 동행해서 구원받았습니까? 아벨이 형에게 맞아 죽어서 구원된 겁니까? 그것은 밑에도 감추어져 있는 진짜 비밀이 진동하다 보니까 위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 말이죠. 노아가 방주 만든 것으로 왜 구원이 안 되느냐 그것은 노아 속에서도 구원이 안 되는 요소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모든 아담은 죄인이기 때문에 노아가 방주 만든 것으로 자기가 구원을 반대하는 것을 극복할 수가 없어요. 어떤 인간도 주님이 시키는 대로 했다고 해서 그 시킨 대로 행한 행함으로 구원을 너끈하게 차지할 수 있는 그런 이유가 될 수 없는 겁니다.
왜냐 하면 인간은 처음부터 구원이 안 되기 때문에 그래요. 직거래 있죠. 농산물 직거래, 하나님과 인간이 직거래가 안 되게 되어 있습니다. 아파트에서 중개하는 사람 없이 바로 산지 배추를 직접 소비자가 직접 직거래 하는 것처럼 직거래해서 구원이 안 된다 이 말이죠. 왜냐 하면 인간 속에는 그런 직거래 구원을 요구함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주신 비밀을 모독하는 요소가 각각 자기 안에 잠재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어떻게 해서, 내가 어떻게 했기 때문에, 어떻게 한 것으로 내가 구원을 챙기겠다는 그런 마음이 누구나 있는 거예요. 내가 어떻게 해도 그것으로 구원이 안 되더라 하는 그런 생각을 인간은 도저히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희망이 없어집니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알게 된 것은 오직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장차 예수그리스도가 와야 내가 구원이 되지 동행한다는 자체가 구원이 되지 않는 다는 것, 죽음을 보지 않고 간다고 해서 그것이 구원이 안 된다는 사실을 안거죠.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오심으로 말미암아 모든 구약 전체의 해석을 그렇게 해 버린 겁니다. 사도 바울이 낸 결론은 인간은 구원이 되지 않는데 구원이 있다면 그것은 인간들이 구원을 기대해서가 아니라 구원이라는 것은 하나님께 속한 하나님의 자기 문제이고 자기 업적 이고 자기 숙제이기 때문에 인간이 관여할 바가 못 된다 하는 겁니다. 그것을 가지고 감추어진 비밀이라 하는 겁니다. 감추어진 비밀은 구원이라는 것은, 인간은 배제하고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에 주가 주께서 한 직접 거래에 의해서 주님께서 모든 말씀을 이룸으로 말미암아 그래서 주어진 결과가 구원이기 때문에 사람은 거기에 개입할 자격과 위치가 되지 못한 다는 겁니다. 24절 봅시다.
골 1:24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여기 교회라는 말이 나오죠. 몸된 교회, 이 교회가 무슨 교회입니까? 의존 교회입니까? 우리 교회입니까? 무슨 교회입니까? 화평 교회인가? 무슨 교회입니까? 사도 바울이 무슨 교회가 있었어요? 사도 바울이 당회장으로 있는 교회 이름이 뭐죠? 성폴 성당입니까? 사도 바울은 교회를 어떻게 봤냐 하면 교회는 예수님에 의해서 발생된 것으로 봤어요. 예수님에 의해서 발생된 거예요. 불량 학생들이 점심 마치고 5교시 시작할 때 화장실에서 선생님 몰래 담배 피우고 교실에 들어오면 냄새가 나죠. 냄새가 나기 전에 조치를 취하겠죠. 페부리즈 뿌리고 하겠죠. 냄새나잖아요. 담배 냄새가 난다는 것은 화장실에 가서 담배를 피웠다는 뜻입니다.
교회가 있다는 것은 누가 있든지 있다 이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것을 다 이루었다는 그 냄새에요. 그것이 교회라는 말이죠. 그래서 사도 바울이 교회를 위해서 남은 고난을 키운다는 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하시는 그런 고난에 같이 동참한다는 그런 의미입니다. 고난이라는 말은 고생이라는 말인데 고생이라는 것은 뭔가 일이 껄끄럽다 일이 환영을 받지 못하고 거부를 당하는 그런 일이란 말입니다. 예수님의 복음, 예수님의 비밀을 전하는 일입니다.
그러면 이 고생을 누가 십니까? 바로 인간들이 복음을 거부하고 거역하잖아요. 인간들이 복음을 거역하는 가운데서 피어나는 장미, 피어나는 백합이 그것이 교회입니다. 교회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이 지상에서 사람들 때문에 시달렸던 그 시달림이 똑같이 그 예수님의 생애 이후에도 그 시달림 속에서만 피어나는 것이 그것이 진정한 교회가 된다는 말이죠.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인간들이 그 교회에 대해서 비밀에 대해서 왜 그렇게 반대하느냐? 그것은 인간들 나름대로의 교회, 나름대로의 구원관이 수립되었기 때문에 진짜 사도 바울이 생각하는 진짜 교회하고 충돌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럼 사람들이 생각하는 교회 관이라는 것은 교회가 교회를 만드는 방법이에요. 교회가 교회를 양산하고 만들고 키우고 하는 겁니다.
다시 강의를 정리하면 사람은 구원이 된다? 안 된다? 사람은 구원받을 자격도 없고 구원이 안 되죠. 왜냐 하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하나님의 구원에서 배제 시켜 놨으니까 구원이라는 것은 누구하고 누가 의논합니까? 성부와 성자끼리 하는 것이지 인간은 그때 태어나지도 않았어요. 인간은 생기지도 않을 때 이미 구원을 생각했다 이 말이죠. 그렇다면 그 구원에 대해서 인간은 관여할 바가 없는데 인간은 죄짓고 난 뒤에 세상이 고통스럽고 힘드니까 여기서 신에게 구원을 요청하죠. 가인 같은 사람은 ‘하나님 복 주세요. 구원해 주세요.’ 라고 하죠.
인간이 하나님과 직거래해서 바로 거래해서 구원을 요청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 교회입니다. 사람들이 살기 힘들고 어렵고 죽어서 지옥 갈 것 같으니까 천국 보내 달라고 사람들이 모여서 자기의 의사를 계련하고 거기서 응답을 받고자 모인 이것이 바로 교회가 되는 거죠. 그렇다면 출발은 뭡니까? ‘나는 구원받아야 되겠다.’라고 출발하는 겁니다. 나는 구원받아야 되는데 성경에 보니까 예수님 십자가 피 이야기 들어 있고 언약도 있으니까 이것을 다 집어넣는 거예요. 출발은 ‘나는 구원받아야겠다!’ 무엇으로? ‘나는 구원받아야겠다!’ ‘뭐로?’ ‘예수님의 피로’ ‘나는 구원받아야겠다!’ ‘뭐로?’ ‘하나님의 언약으로’ ‘나는 구원받아야겠다!’ ‘뭐로?’ ‘예수님을 믿음으로’....... 이 모든 것이 인간들이 만든 교회가 되는 거예요. 이 교회는 교회가 아니죠. 그 속에 시작점이 뭡니까? 나는 구원받아야 되겠다는 것을 출발점으로 하는 겁니다.
‘예수 믿어 주고 피 믿어 줄 거니까 저 구원시켜 줄 거죠?’ 라고 이미 자기 의사를 이야기한 거예요. 주님께서는 이런 인간의 의사를 일체 받지 않습니다. 왜냐 하면 노아 방주의 아이디어가 노아에서 나왔습니까? 하나님과 동행하면 구원받을 거라는 그 아이디어가 에녹에서 나왔어요? 삼손의 아버지, 마노아 가정에서 아기가 없어서 하나님께 기도해서 ‘하나님 멋진 아들 주시면 제가 바치겠습니다.’ 하는 아이디어를 인간이 먼저 창안한 거예요? 얍복강에서 야곱이 강가에서 이쯤 해서 천사가 와야 되는데 하고 기다렸습니까? 시간 다 됐는데 왜 안 오지? 하고 기다렸습니까? 아니죠. 항상 예상외로 항상 상상외로 도저히 히브리인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 홍해로 가게 되면 아마 바다가 갈라질 거야 하는 생각을 히브리 사람들이 그렇게 협의해서 결정했습니까? 다수결로 결정했습니까? 가하시면 예 하시기 바랍니다. 해서 홍해로 가기로 결정했습니까? 아니죠. 간다고 오히려 문제가 되었잖아요. 우리를 아주 죽이려고 작심을 했구나! 뒤에서는 따라 오고 앞에는 바다가 있는데 우리보고 어떻게 하란 말이냐? 광야의 구름 기둥과 불기둥이 인도한 것이 물과 양식이 없는 곳으로 인도했습니다. 물과 양식이 있는 곳에 인도한 것이 아니에요 그러면 그 아이디어는 누구 아이디어입니까? 사람들이 일부로 고생하자고 물 없는 곳으로 갔습니까? 아니죠. 그러면 왜 물 없는 곳에 가게 되었습니까? 그것은 이 구원이 아무리 히브리인들이 고생해도 구원은 히브리인들의 소망과 규정과 희망 사항이 뭉쳐져서 구원이 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여전히 사람들이 파악을 못해요 왜, 이 지하에 감춰졌기 때문에 그래요. 사람들은 불교의 생로병사, 태어나고 죽고 병들고 아프고 늙고 이 모든 것에서 어떻게 벗어나서 좀 이 몸이 편안하게 살 수 있는가! 이처럼 모든 것이 힘들고 어렵고 할 때 이 몸이 자연스러운 것이 주여 내 인생 힘들게 하지 말고 편안하게 세상 끝나게 해 달라고 그렇게 요청하잖아요. 그것은 어디 까지나 우리가 나도 이렇게 요청할 정도로 그 정도로 내가 이런 자격이 있습니다. 아직까지 이 정도로 망가질 정도의 죄인은 아닙니다. 하는 의식이 밑에 깔려 있다 이 말이죠. 나는 하나님께 요청해서 내 평안과 내 행복을 요청할 정도로 그 정도의 인간은 되지 그것조차도 하나님 앞에 호소할 지경이 안 될 정도로 내가 죄인이고 전적으로 망가진 인간이고 나는 저주받은 인간이라고? 나는 나를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는 그런 뜻이다 이 말이죠.
사람들이 배부를 때는 하나님을 안 찾아요. 어려울 때 찾거든요. 어려울 때 찾는 다고해서 그것을 하나님이 알고 기특하다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어려울 때 찾을 때, 그때 인간은 자기가 자기 위주로 살았다는 것이 들통 나는 순간입니다. 배부를 때는 안 찾고 배고플 때는 찾는 구나 아무리 사람이 어렵다고 하지만 정작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알게 할 정도로 어떤 어려움이 와도 ‘나는 그래서 죄인입니다.’하는 것을 어려움을 통해서 깨닫지를 못해요. “그래 버티면 언젠가는 희망이 있겠지 의인은 7번 넘어져도 8번 일어날 거야” 그러면 8번째 자빠지면 어떻게 하려고? 9번째 할거야
베드로가 예수님이 용서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자기가 몇 번까지 용서 하냐고 하니까 다른 사람은 3번 정도 하는데 자기는 7번까지 되겠다는 거예요. 인간들은 보통 3번 정도는 용서가 돼요. 네 번째는 도저히 못 참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7번까지 가니까 대단한 사람이죠. 7번 용서하면 되겠습니까? 그게 용서이겠습니까? 하니까 주님께서 일곱 번에 일곱 번, 일곱에 일흔 번, 베드로가 일흔 번에 일곱을 다 용서하면 되겠습니까? 주께서 일곱 번에 일곱 번 칠백 번 하겠죠. 따라 올 테면 따라 오라는 거죠. 백날 해도 못 따라 가요. 주께서 원하는 것은 네가 남을 용서할 그런 자격이 안 될 정도로 내가 남을 용서한 다는 것은 내 본색에 어긋나는 겁니다. 남을 사랑한다는 것도 마찬가지이고 인간은 자기 사랑하기에 바쁜데 언제 남을 사랑해요? 자기 주제 파악도 못하는데 남을 사랑하고 용서 한다고요? 천사가 웃습니다. 남을 용서하고 나온다는 것은 배부르다 이 말이거든요. 배고파 보세요. 자기를 용서해 달라고 남에게 광고할걸요 사람이 자기가 어려우면 동정을 찾지 남을 용서할 수가 없어요. 남에게 사랑을 베풀 수가 없습니다. 자기 발등에 불이 떨어졌는데 남까지 챙깁니까? 좀 여유가 있으니까 이참에 참여해서 성과급을 얻을까? 이런 식으로 나오죠.
구약 전체 말씀이 인간은 아무리 고난과 어려움을 줘도 결국 인간은 나는 죄인이라 말이 입에서 툭 튀어나올 수 없게 되어 있다 이 말이죠. 오히려 죄인이라고 하는 것에 반대로 나오죠. 하나님 지금 실수하시는 겁니다. 하나님이 지금 뭔가 일을 잘못 처리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서러움을 받을 그런 입장이 아닌데 하나님이 일이 뭔가 잘못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교회라고 하는 것은 사람이 얼마나 괴로운가, 힘든가,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는가가 아니라 오직 한 몸, 예수님이 사람 사는 이 땅에 오셔서 얼마나 사람들에게 시달리고 힘들었고 얼마나 아팠는가를 만끽해서 발산하는 곳이 교회라는 거죠. 그래서 모든 교회의 교인, 성도는 모든 성도는 이 땅에서 예수님의 고난을 발산하게 되어 있어요. 이것은 사도 바울 뿐만이 아니에요. 모든 성도가 다 예수님의 고난을 발산하게 되어 있어요. 교회라는 것은 그 안에 예수님의 몸이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 몸이 이 땅에서 사람들에게 시달린 몸입니다. 이 시달린 몸이 교회가 되었다면 이 교회가 계속 교회답게 되기 위해서는 이 시달림에 계속해서 참여되는 사람 계속 동참하고 그 사람만이 그리스도의 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외는 아닙니다. 그런데 그 시달림이 예수님이 이 땅에서 모멸을 당하고 모욕을 당한 이유는 하나밖에 없어요. 사람에게 먹을 것을 안줘서 그런 것이 아니에요. 오병 이어에서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줘도 그 사람들은 얻어먹고 뒤돌아섰습니다. 먹을 것 챙겨 먹고 난 뒤에 예수님하고 두 번 다시 따라 다니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먹을 준 것은 너희 떡 좋아 하지? 옜다, 떡이나 먹고 꺼져라 이 말입니다. 떡을 안줘도 그 사람은 인간 안 되고 떡을 줘도 인간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이래도 인간 안 되고 저래도 인간 안 돼요. 어떻게 해도 인간은 구제불능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 고난 받는 다고 구원받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의 구원이 주어졌기 때문에 우리는 교회에서 남은 고난을 채우는 겁니다. 그러면 그 예수님의 고난이 뭐 때문에 왔느냐, 바로 인간들이 나름대로의 구원관과 나름대로의 메시야관 이런 것들이 나름대로 있어요. 자기들 나름대로 있는데 이 출발점은 아까 제가 이야기했는데 출발점은 우리도 구원받을 수 있다 하는 겁니다. 어떤 개그 프로에 보니까 건강한 신체 좋은 사람들이 완력으로 줄을 쫙쫙 잡아당기는 것을 보여줘요. 그런데 어떤 삐쩍 마른 개그맨이 와서 깡꽁치 같은 우리도 줄 당기기 할 수 있다고 하면서 무엇을 도전하느냐 하면 안전벨트 잡아당기기를 도전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힘들기 때문에 제일 먼저 하는 것이 줄자에서 줄잡아 빼는 것을 합니다.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이런 의식이 바로 이 구원받은 성도들을 힘들게 하죠. 괴롭게 하고 모욕하고 모독하는 겁니다. 이 교회가 무슨 교회냐 바로 행함의 교회입니다. 그런데 이런 행함의 교회가 있음으로 말미암아 주님께서는 참된 교회의 진수를 보여줍니다. 27절을 봅시다.
골 1:27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어떻게 풍성한 것을 알게 하려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다음에 뭡니까? “이방인 가운데 어떻게 풍성한 것을 알게 하려하심이라” 여러분 이방인과 유대인의 차이점은 유대인에게는 율법이 있고 이방인에게는 율법이 없죠. 율법은 뭡니까?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라, 하지 마라 하는 그런 법조항이잖아요. 법조항대로 행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유대인이고 이방인들은 법조항 자체가 없기 때문에 뭐가 없습니까? 율법을 지켰습니다, 못 지켰습니다. 하는 자체가 없지요. 율법을 지켰다는 행함이 없죠. 그런데 구원이 어디서 풍성해 졌다고 했죠? 유대인이에요? 이방인이에요? 이방인이죠. 하나님께서 하라 하지 마라 하는 아예 법조항을 받치지도 않는 십일조 해라 안식일 지켜라 십계명을 어떻게 해라 아예 그것도 없는 사람에게 덜렁 구원이 주어지면 그 이방인들이 뭐라 하겠습니까? 이 구원은 우리가 말씀대로 지켜서 했다 이런 소리가 나오겠어요? 안 나오겠어요 ? 안 나오죠. “어 우리는 행한 것도 없는데 구원이 주어졌지?” 이렇게 되겠지요. 이것을 가지고 사도 바울은 이방인에게 하나님의 이 비밀이 어떻게 된다? 뭐 짧게? 조금? 간절하게 ? 아니죠. 어떻게? 풍성하게 넉넉하게 모자람 없이 구원에 대해서 차질이 없도록 하나님께서 ‘모자라 더 채워 와’ 이렇게 명령하지 않을 정도로 넉넉하게 넘치도록 이방인에게 구원이 주어졌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구원이 뭐에요? 이방인들이 이렇습니까? “아 구원 받아야 돼 내가 힘든데 하나님이 주신 법 없나? 옳지 이스라엘에게 법이 있구나! 그 법을 내가 지켜서 구원받아야지” 이방인들이 이렇게 나온다면 그 이방인은 이방인이 아니고 유대인과 마찬가지에요. “어디 하나님의 말씀 없나? 말씀대로 지켜야지 지켜서 구원받아야지” 이렇게 나온다면 그 이방인은 더 이상 이방인이 아니고 유대인하고 똑같아요. 그런데 이방인에게 구원이 주어 졌다는 이 말은 구원받을 자격도 없고 구원될 수도 없고 구원은 아예 포기했고 너는 애초부터 율법에 의하면 구원이 안 되게 되어 있어.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의 과제도 아니고 예수님의 자기 업적 이고 작품이고 주님의 자기 성과입니다.
그럼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비밀이 뭡니까? 비밀에 무엇이 포함되어 있어야 돼요? 비밀이라는 것은 예수그리스도께서 원하는 자에게 자기의 구원을 이룬다는 그 내용까지가 포함 될 때 그것이 비밀이 되겠죠. 그 비밀을 맡은 사람은 뭐라 합니까? 내가 이렇게 해서 구원 받았어 하지 않고 예수님께서 자기 구원을 이루다 보니까 거기에 덜렁 누가 채택되었어요? 우리가 예수님이 누구 이신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의 실험자로서 해당자로서 뽑힌 거예요. 이제부터 너는 예수님의 구원이 임했다는 것을 증거하는 증인으로 너는 그렇게 만들어 졌어! 라고 통보가 온 거예요. 엉뚱하고 난처하죠. 그러면 그때부터 이방인들은 어떤 일을 해요? 비로소 그때부터 이방인들은 자기가 유대인이 되는 거예요. 이미 구원을 챙기고 난 뒤에 유대인이 된다는 말뜻은 이미 구원을 챙기고 난 뒤에 어떻게 해서 유대인들은 나한테 온 구원이 왜 저들한테는 구원이 안 갔지? 하고 구약성경을 다시 보게 되죠. 구약성경을 다시 보게 되면 하나님의 말씀을 채택된 그 인간들이 우리 인류의 대표자들이 그 말씀을 통해서 진짜 비유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이 할 수 있다는 쪽으로 그 말씀을 왜곡해서 그 말씀을 지키려고 애썼던 내막이 우리는 구약을 통해서 쭉 드디어 이방인들도 거기에 합세해서 보게 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방인이니까 우리가 유대인, 이스라엘 역사를 쭉 보면서 아하 노아가 방주 만든다고 구원이 아니나 아브라함이 이삭 받쳤다고 구원이 아니구나! 모세가 지팡이 들고 설쳤다고 그것이 구원이 되는 것이 아니구나! 다윗이 골리앗 이겼다고 그것이 구원이 아니구나! 그것을 쭉 전부다 보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의 공통점이 뭐냐 하면 바로 구원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지 우리한테 속한 것이 아니다 하는 것을 공통적으로 같이 공감을 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구약이나 신약이나 모두가 그리스도 몸 안에서 하나가 되는 거죠. 감추었던 그 비밀이 이렇게 하나의 사건처럼 순간순간 구약에서 이렇게 하나님의 고난 이름으로 들어 왔다면 이 신약도 마찬가지에요. 신약도 이방인 가운데 구원받았다, 이 사람들은 하나의 교회라는 이름으로 그 주변에 있는 이방인들이나 유대인에게 쓸데없는 오해와 모멸과 멸시를 당하는 그런 남은 아픔을 겪어야 됩니다. 다른 사람들은 교회 충성해서 복 받았는데 너는 복음 안 다음에 복 받은 게 뭐가 있어? 나 복 받은 거 있다! 뭐? 내가 지금 까지 살아 갈 이유도 없이 살려준 것도 하나님의 은혜로 아는 것, 내가 이만큼 사는 것도 주님의 특별한 복음을 위해서 살려줬다는 것을 그것을 아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내가 죄인인 것을 그리고 죄인에게 주어진 모든 환경이 이 죄인에게 너무나 과분한 혜택인 것을 나는 그것을 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감춰 둔 비밀이죠. 그러면 다른 사람이 말하죠. 그러면 당신 대단하냐? 내가 아무리 대단해도 예수님이 살아가신 것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인자는 머리 툴 곳도 없다 했는데 거기에 비하면 나는 아무 것도 아니야 앞으로 어떤 사태, 조취가 주어 진다할 지라도 그것마저 주께서 주신 남은 고난이기 때문에 나는 그것을 기꺼이 접수하고 그것을 통해서 예수님의 은혜의 비밀만 나는 증거하겠다고 나오죠.
사건, 갑자기 지진이 일어났다고 합시다. 의존 교회가 지금 무너진다고 합시다. 목사님 앞자리부터 무너지기 시작해서 저도 이참에 무너진다고 합시다. 신앙이 연조가 있는 집사님 같은 사람은 “주여!”하죠. 연조가 없는 사람은 “엄마야 ”할 거고요 이것이 과거의 습관이 나오죠. 평소에 다급할 때는 누구를 붙잡는지 나오죠. 주여 붙잡으면 ‘주여!’ 나올 거고 ‘엄마야!’ 하고 나올 거고 주를 말하던 엄마를 말하던지 이만큼 살아온 것도 어떤 사람은 10살, 20살, 30살 이 만큼 살아온 것도 다 하나님의 사용한 자기에서 살아 온 것이 아니고 복음을 위해서 이만큼 살아 온 것이 오늘이다 이 말이죠. 왜냐 하면 그 마지막 50살 때 지진 일어나서 무너져서 죽을 때 지금 내가 진작 죽어도 상관없는데 50년 동안에 복음 알게 하셔서 복음 때문에 살았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가운데서 지금 이 순간 지진이 일어나서 무너지는 거예요. 신월동에 진도 15점4의 지진이 나면 싹쓸이 하는 거예요. 지진이 일어나서 회개하는 것이 아니고 이미 구원받았기에 지진을 통해서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겁니다. 그러면 왜 사람들은 그게 안 되느냐 하면 사람들은 신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면 내가 지금 여기에 살아 있음을 확인하기 위해서, 살아 있음을 말하기 위해서 여기에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여기에 단단하게 묶어 달라는 겁니다.
대학교 졸업해서 내가 회사 취직해서 제일 먼저 원하는 것이 내가 취직한 회사가 좀 단단해 지기를 원하죠. 그런데 회사 한 3년 다니고 밉상 받아서 쫓겨나 오면 그 다음부터는 제발 내가 다녔던 회사가 무너지기를 바라죠. “어디 감히 나같이 가치 있는 존재를 쫓아내! 그래 너희 후회할 날이 있을 거다.” 이러면서 무너지기를 기다리죠. 그러고 있는데 그 회사가 “미안하다. 내가 잘못했다” 하고 다시 부르면 어떻게 됩니까? 그 회사 오래 되기를 또 바라죠. 그러다가 3년 뒤에 또 다시 쫓겨나면 이제 진짜 망해라 하겠죠. 그러니까 사람들이 망해라 잘돼라 하는 것이 누구 중심입니까? 왜 나의 가치를 그렇게 무시 하냐 하는 거예요 그러나 사도 바울은 자기 가치가 없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고난 받으심을 증거하는 그런 고난을 받은 거예요 예수님 때문에 이미 구원받았다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환난이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거기다 집어넣으면 지진이나 백두산 화산 터지는 거나 뭐든지 관계없이 그리스도 사랑에서 내가 끊어지지 아니한다는 것을 주님의 성령에서 우리가 유지가 되면 그때부터 주변 사람으로부터 우리가 놀림감이 되는 겁니다. 미쳤구나! 돌았구나! 사람이 왜 저렇게 미쳤냐! 그런 식으로 많은 핍박을 받게 될 겁니다. 하지만 그런 환란이 올수록 역시 너희는 비밀을 몰라 나도 구원될 자격이 있어서 구원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 때문에 뽑혀서 예수님이 구원을 쥐고 있다는 것을 그것을 알리기 위해서 그냥 이 세상에서 무작위로 뽑힌 것뿐이죠. 그렇게 뽑혔으면 그 다음부터 이 세상에 살아가는 모든 것이 과분한 나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된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겁니다.
26절 봅시다.
골 1:26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옴으로 감추었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감추었던 비밀이 어디에 나타났다고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나죠. 성도 되라는 말이 아닙니다. 성도는 우리가 될 수 없어요. 다만 성도 되게 하신 분에 의해서 될 뿐 이지 우리가 성도되려고 애쓴다고 성도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이 비밀이 만세와 만대이죠. 오랜 세월과 모든 연대에 걸쳐서 왔죠. 그러면 인류의 역사라고 하는 것은 지구상에 역사가 있다 이 말이죠. 역사를 통해서 인간들은 무엇을 원합니까? 역사야 세상아 지진 일으키지 말고 가만히 좀 있어 다오! 왜? 세상이 안정을 취해야 그 사이에 우리가 역사를 이룰 수 있으니까 여러분들이 직업 구할 때 제일 힘든 직업이 저는 이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일 힘든 직업이 고기 잡는 직업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 하면 다른 어떤 직업, 용광로 옆에서 일하는 것, 저도 해 봤습니다만 실내 온도 50도 되는 데서도 해 봤고 실내 온도 40도 되는 염색 공장에서 실내 온도가 높아야 염색이 되니까 그렇게 힘들지만 그것도 다행스러운 것은 이게 두발 디딜 때 발판이 안 흔들리잖아요. 그런데 고기 잡는 것은 문제가 배가 흔들리니까 안정을 취할 수가 없는 거예요. 이 세상이 지진도 없고 전쟁이 없을 때 사람이 왜 기분이 좋으냐면 현재 내가 열심히 매진해서 몰두해서 일할 수 있는 그 바탕이 든든하기 때문에 거기서 나만의 역사 나만의 성과 나만의 문명 나만의 업적을 키울 수가 있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무엇을 믿고 싶어 하느냐 하면 하나님을 믿는 게 아니고 이 대지는 이 땅은 옛날부터 지금 까지 그냥 그대로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대로 간다는 것을 믿고 싶은 거예요.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고 나는 나이고 그대로 가고 싶어 하는 거예요.
그런데 요한 계시록에 보세요. 사람들이 그렇게 기대하는 든든한 자연 세계가 천사들을 통해서 흔들기를 해 버려요 흔들기를 해 보면 바로 우리가 믿고 의지 하고 기대했던 이 대자연이 엉망진창이 됩니다. 완전히 대 환란이 일어나요 환란이 일어나면서 지진도 일어나고 화산도 일어나고 물도 쓰고 해일도 일어나고 그러면 민심도 혼탁해 지고 그러면 사람들은 그때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이여 우리 사는 것을 왜 이렇게 힘들게 합니까? 하고 대듭니다. 여기 직장 되면 그 직장 부도나고 또 다른 직장 되면 그 직장 부도나고 제가 부산 갈 때 음식점 맛있다고 하고 가면 그 다음에는 문 닫아요 무슨 재수가 옴 붙는 것 같아요. 야, 이집 맛있다 하면 그다음에 가면 문 닫고 바뀌어 있어요. 가면 가는 족족 가게가 다 바뀌어요. 우리가 가는 직장이 전부다 문 닫고 다 망한 다면 우리가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그런데 변하지 않는 것이 있어요. 그것은 바로 구원은 너의 소망이 아니라 예수님의 소망이라는 것, 네가 구원돼야 한다는 것은 너의 소망이 아니고 이 예수님의 소망 때문에 네가 구원되었다는 이 사실을, 이 비밀을 우리가 이방인 우리를 통해서 풍성하게 느끼도록 그렇게 조치하시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