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로새서

골로새서1강-성경말씀은 우리의 실체를 드러내는 거울

아빠와 함께 2013. 12. 20. 08:40
2010-10-10 11:19:18 조회 : 947         
서울 10월 8일 골로새서 1:3 이름 : 관리자 (IP:220.81.41.203)
 
101008 골로새서 1:3
 

 관리자 (IP:220.♡.41.203) 10-10-10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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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리자 (IP:220.♡.41.203) 10-10-20 18:33 
서울101008골1장3절a

오늘은 골로새서를 빌립보서에 연이어서 하겠습니다. 낮에 안산에서 공부를 했는데 요한일서 4장을 공부했어요. 거기 4장 18절에 ‘두려워하는 자는 형벌이 있음이라’ 이런 대목이 나와요.

요일 4: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제가 한번 적어 볼게요. ‘두려워하는 자는 형벌이 있음이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러면 요한일서 4장 18절, 성경말씀입니다. 여러분 성경 말씀대로 모든 것이 될 줄 믿지요? 믿는다면 이것이 실제라면 형벌은 누구한테 오는가 하면 두려워하는 자에게 형벌이 오는 거예요. 형벌이라는 것은 당하면 싫잖아요.  매 맞기 싫지요? 당하기 싫지요? 벌 받기 싫지요? ‘형벌’이니까 ‘형’을 생략하면 뒤에 따로 나오는 것이 벌을 받는 겁니다.

벌은 학교에서나 어디에서나 벌은 누가 받는가? 누가 맴매 하지요? 나쁜 짓 할 때 벌 받지요. 그런데 성경 요한일서 4장 18절에 보면 인간이 나쁜 짓했기 때문에 벌을 받는데 인간이 나쁜 짓했기 때문에 뭐가 따라오느냐 하면 두려움이 온다는 겁니다. 나쁜 짓 하니까 두려움이 오고 두려움이 오니까 두려워하는 자는 벌 받게 되어 있고, 누가 벌을 주시는 겁니까? 하나님이 벌을 주신데요. 그러면 벌을 안 받으려면 여기 두려움 앞에다 한 자를 넣으면 돼요. 두려워하는 사람이 벌을 받기 때문에 벌을 안 받으려면 ‘안’자를 넣으면 돼요. 안 두려워하면 벌 안 받겠지요.

그런데 세상에 살면서 아침에 눈만 뜨면, 코만 뜨면 세상이 뭐로 쫙 다가옵니까? 근심, 걱정, 두려움으로 쫙, 땅겨온다 이 말이죠. 두려움으로 이것을 할까? 말까? 그것도 두려움, 무단횡단 할까? 말까? 그것도 두려움, 과속을 할까? 말까? 그것도 두려움, 지금 김장김치를 사는 게 좋을까? 나중에 사는 게 좋을까? 그런 것을 결정하는 것도 두려움……. 계속해서 두려움이 오는 겁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이 두려움이 어디서 오는가를 소개해 놓았어요. 이것은 요한계시록 21:8절에 보니까 두려움이 어디서 오느냐 하면은 유황불에 벌 받는데, 하나님의 벌이 유황불에 들어가는 겁니다. 지옥 불 들어가는 거죠. 지옥 불에 들어가는, 벌 받는 사람이 두려워하는 사람인데 어떨 때 두려워하느냐 하면 21장 8절에 보니까 유황불에 들어가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 하면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 두려워하는 자들과 같은 말이 믿지 않는 자들…….

계 21:8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 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번지점프 하는데 발목에 밧줄이 잘 묶여져 있는데 ‘자, 밧줄 믿고 뛰세요!’ 하는데 안 뛰는 거예요. ‘밧줄이 풀리면 어떻게 됩니까?’ 밧줄이 풀리면 죽지요. 물에 빠져 죽고 땅에 바쳐 죽지요. 그런데 문제는 이 밧줄이 안 풀린다는 겁니다. 밧줄이 풀리면 죽는 거 맞는데 밧줄로 꽁꽁 묶어 놓았기 때문에 풀리지 않습니다. 따라서 안 죽습니다. 이 믿지 않는 자들, 두려워하는 자들과 똑같은 말이 뭐냐 하면 믿을 사람이 없으니까 어떻게 하느냐 하면 자기 마음대로 사니까 사람이 성질 받치면 사람이 흉악해지는 거예요. 또는 믿는 분이 없으니까 자기가 불리하다 싶으면 사람까지도 죽이는 거예요. 살인까지 하는 겁니다.

그 다음에 믿는 사람이 없으니까 행음까지 하고 그냥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고 그 다음에 또 믿는 사람이 없으니까 우상을 섬기기 때문에 마술을 하고 점을 치고 굿하고 그것과 같은 것으로 우상숭배하고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으니까 하는 모든 것이 거짓말이 되고 이 모든 것에 해당되는 사람은 바로 두려움을 보여주는 사람이고 벌벌 떨면서 산행하면서 떨고 죄지으면서 떠는 이런 것들이 믿지 않았기 때문에 믿을 구석은 자기밖에 없기 때문에 자기 마음대로 살다보니까 두려워하게 되고 이 두려워하는 자는 하나님께 벌을 받게 되어있어요. 벌 받기 위해서 유황불이, 지옥불이 있다는 겁니다. 형벌이 있다는 거예요. 이것이 제 말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면 제가 아까 이야기 했잖아요. 벌을 안 받으려면 두려움 앞에 무엇을 붙인다? 안 두려움이죠. 안 두려우면 믿지 않는 자가 되지 않고 반대로 하면 믿으면 돼요. 믿으면 안 두려워하게 되는 겁니다. 어렵죠?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보고 믿으라고 제시한 분의 특징이 어떤 특징이 있냐하면 믿으면 뭐가 생기지 않을 정도로 믿을만한 분이냐 하면 믿기만 하면 두 번 다시 두려워할 세상의 어떤 일을 일어나더라도 지진이 나더라도 IMF가 터지더라도 집안에 불이 나더라도……. 어떤 일이 나더라도 안 두려워할 분이 바로 우리가 믿어야 될 분이 되는 겁니다.

쉽게 이야기 하면 지금 우리 집에나, 우리 몸이 아프다던 지, 또는 교회나 직장에 어떤 일이 일어나도 ‘그까짓 거 아무것도 아니야’ 할 정도로 온 천하보다 더 훨씬 좋은 분이 되게 되어 있는 겁니다. 믿으라고……. ‘예수 믿는데도 두려움이 생기면 어떡합니까?’ 하고 물으신다면 그 사람은 예수님에 대해서 제대로 그 가치를 모르고 있기 때문에 약간만 믿는척하고 있을 뿐이지 진짜 믿는 사람이라면 깜작 놀래요. 야, 온 천하를 얻는 것 보다 더 훨씬 낫구나 하는 마음이 들게 하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겁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 예수님 믿고 난 뒤에 안 두렵습니까? 두렵습니까? 안 두렵습니까? 그래도 여전히 두렵습니까? 밥 먹고 사는데 두렵고, 뭐가 두렵습니까? 만약에 여러분들이 예수 믿는다고 하시면서 계속 두려워한다면 여기 뒤에 따라오는 것이 줄줄이 여러분들의 하나의 딸랑딸랑 방울처럼 소리 내면서 우리를 사는 게 힘들게 만들어 버립니다. 이런 것이 믿지 않는 자들은 이런 식으로 살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것이 다 두려움에서 나오는 겁니다. 두렵기 때문에 이런 현상들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 안 믿었다는 말과 같은 말이 뭐냐? ‘너는 세상 살면서 왜 이렇게 두려워 해? 너 자신과 너의 미래와 너의 6개월 뒤, 1년 뒤 그리고 취직시험, 결혼문제, 여러 가지 교회에 다니는 문제……. 왜 너는 사회의 문제에 대해서 두려움으로 다가서느냐?’ 그것이 지금 두렵기 때문에 살아갈 때도 힘들고 나중에 하나님의 약속대로 두려워하는 자들에게 벌이 있기 때문에 또 낭패고 몸이 아프다고 자살해 버리면 결국 그 사람은 뭡니까? 두려워하는 자이죠.

그러면 “일찍 오시는 분에게 보너스 드리겠습니다.” 일거의 안 두려워 할 수 있는 말을 해 드리겠습니다. 애들은 가지 말고 애들도 오세요. 날이면 날마다 듣는 것이 아닙니다. 인천 바다에 사이다가 떴으면 그거 보다 더 큰 컵을 드릴 테니까 …….(ㅎㅎ) 지금 여기에 두려워하는 형이 있는 이 구조, 체제가 근본사상이 무엇이기에 자꾸 두려움이 생기느냐 하면 제가 크게 쓰겠습니다.

‘나라는 존재는 내가 만든다.’ 바로 이것 때문에 두려움이 생기는 거예요. 그러면 일거에 이것을 날려버리는 것은 간단합니다. ‘나라는 존재는 하나님의 작품이다’ 나라는 존재는 하나님이 만들어요. 이것이 성경에 나오는 창세기 1장, 2장, 3장 ……. 그 이야기입니다.

제가 뭐 아주 기발한 것 이야기 한 게 아니에요. 침착하게 정신을 차리고 창세기 1장부터 다시 보세요. 다시 보게 되면 하나님이 누구신가부터 출발하면서 그 뒤에 누가 등장하느냐 하면 저와 여러분들이 등장합니다. 누가 누구를 만든다고요? 우리가 하늘을 만든다고요? 아니죠. 우리가 나를 만든다고요? 아니죠. 그러면 성경 창세기 1장을 대하면서 단박에 우리는 두려움이 날아가 버리는 좋은 기쁜 소식이 나오죠.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셨다.’ 그러면 하나님이 만들지 않은 인간은 인간도 아니죠. 하나님이 만들어야 되는데 하나님이 만들 때는 선악과를 따먹지 않는 식으로 만들어 놓았는데 하나님이 만든 재료가 아닌 선악과를 집어넣어 버리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만든 인간이 아니니까 도로 그 인간은 어디로 가야 합니까? 그 인간은 흙으로 돌아가야 되는 거예요.

어렵습니다. 학생들 잘 들어보세요. 하나님이 만든 인간은 선악과 없이 만들었는데 선악과를 따 먹으니까 도로 흙에서 사람 되었다가 다시 사람에서 흙이 되었죠. 그러면 사람이 흙이 되었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진짜로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셨구나가 그 글로 인해서 확인되지요? 그게 얼마나 즐거우냐 이 말입니다. 학급의 미술시간에 미술선생님이 사과하고 바나나를 놓고 “학생 여러분, 이것은 진짜 바나나와 진짜 사과입니다. 조화로 만든 딱딱한 사과, 바나나가 아닌 진짜입니다. 이것 보고 오늘 정물 그림을 잘 그려서 제출하면 잘 그린 사람에게 잘 그린 사람에게 점수 주겠습니다.” 하고 난 뒤에 보통 미술 선생님은 놀러가요. 음악선생님은 죽어라고 노래 부르지만 툭 던져놓고 밖으로 놀러 가요.

놀러간 사이에 아이들이 “저거 진짜 바나나다” “아니야 플라스틱으로 만든 거야. 작년에도 만들었으니까 이건 가짜야” “아니야 진짜야” “아니야 가짜야” 이렇게 싸우다가 “좋다 그럼 한번 먹어보자” 이렇게 된 거예요. 먹어보니 진짜 바나나, 진짜 사과가 맞는 거예요. 선생님 어제 시장가서 돈으로 산 진짜 과일이 맞는 거예요. 그 때 선생님이 들어오는 거예요. “그림 다 그렸어?” 하니까 어떤 애는 이빨 자국 난 바나나 그리고 어떤 애는 반쪽 난 사과 그려놓고……. “사과 왜 이래?” “선생님 우리 반 어떤 아이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먹어봤습니다.” “먹어 보니까?” “먹어보니까 진짜 과일이 맞습니다.” “왜 그러는데?” “이빨 자국 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이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따먹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선악과 따먹으면 반드시 죽는다는 말이 틀린 말이겠어요? 진짜 맞는 말이겠어요? 맞는 말이겠죠. 선악과 따먹으면 진짜 죽어서 흙으로 가는 게 그게 맞으면 그게 맞는 말이라면 그 뒤에 나오는 모든 약속, 그것도 맞는 말이겠습니까? 틀린 말이겠습니까? 맞는 말이죠. 그래서 우리 주변에 죽어가는 사람들이 있거든요. 성경말씀이 맞는 줄 아시기 바랍니다.

로마서 6장에 나오는 겁니다. 사람이 죽는 것은 죗값으로 죽는 것이다. 이 말이 틀린 말이 아닙니다. 아, 저 사람 저렇게 죽는 것 보니까 이것은 원래 만든 인간이 아니고 하나님이 만들었다는 거예요. 그동안 착해도 내가 알아서 착하겠다고 우겼던 그 게 죄이구나! 뭐든지 지금까지 여러분들이 만들어 졌으면 다 하나님의 솜씨이고 하나님 앞에 작품입니다.

수정
이것은 원래 만든 인간이 아니고 하나님이 만들었다는 거예요.→원래 만든 인간이 아니로구나! 그런데 그것도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구나!


내가 만들었을 것 같으면 두려움이 발생돼요. 내가 만들면 두려움이 생깁니다. 왜? “잘 만들어야 될 텐데, 천국 가도록 만들어야 될 텐데……. 삐끗 실수하면 지옥 가는데 아니 큰일 나지, 나는 나를 잘 만들어야 돼…….”  모든 게 두려움입니다. “성경말씀을 지켜야 될 텐데, 오늘은 10개를 지키자, 아차 8개밖에 못 지켰네. 2개를 못 지켰으니까 아하 오늘 주님이 재림하시면 나는 또 지옥이다.” 모든 게 두려움이에요.

그런데 발상의 전환이라 하죠. 생각을 뒤집어 보세요. 오늘 내가 성경을 이렇게 보는 것도 하나님이 보게 하셨고, 내가 지금 살아 있는 것도 내가 살고 싶은 것이 아니고 주께서 다 작품 만들기 위해서 주님께서 나의 주인이 되어서 주인장께서 나를 알아서 이만큼 만들게 하셨다는 것을 아는 순간 뭐가 쫙~ 하고 빠져나가요. 설사하고 나면 속이 시원하죠? 소변을 보고 나면 시원하죠? 뭐가 빠져나가요? 더러운 것들이 빠져나가죠. 뭐가 두려운 거예요? 두려움도 빠져나가면 두려움과 더불어서 여러 가지 미네랄, 비타민도 빠져 나가죠.  흉악한 것들, 살인한 것들 행음한 것들, 점을 왜 칩니까? 두려워서 그렇잖아요. 왜 두려워합니까? 누가 누구를 만든다? 내가 나를 만들려고 하니까 점이라도 쳐야겠고 굿이라도 해야 되는 거예요. 집안에 우한이 있어서 애들이 실실 앓는다! 굿하자 이렇게 나올 때 우한이 있던 실실 앓던 그거 누구 작품입니까? 하나님 작품이잖아요. 그러면 굿을 왜 합니까? 두렵기 때문에 하는 거예요.

사람의 죄가 어떤 사람은 죄짓는 것도 있고 착한 것도 있다 하는데 저는 적극 반대 합니다. 사람은 죄짓는 것도 있고 착한 것도 있는 것이 아니고 사람은 태어나면 하는 모든 짓거리가 내가 선악과 따먹고 내가 나를 살게 하겠다는 이유 때문에 태어나면서 두려움, 두려움이 있다는 것 그 자체가 자기 딴에는 고아원방문해서 구제하고 착한일 해 봤자 그 밑바닥에는 뭐가 깔려 있어요? 두려움이 깔린 이상 그것은 ‘두려움이 있는 자리에는 형벌이 있으리라’ 벌이 있습니다. 두려워하는 자는 벌이 있어요. 나를 내가 주인이라고 하니까 자꾸 두려운데, 나는 나의 작품이 아닙니다. 나는 누구의 작품입니까? 나라는 존재는 하나님의 작품이에요. ‘일거의 두려움은 어디 갔나?’ 할 정도로 두려움이 싹하고 사라져요. 사라집니다.

다시 이야기 합니다. 내가 내 인생을 만들려고 하니까 돌아다니는 두려움이 사서 고생을 해요. 저 멀리 10키로 멀리 간 두려움까지 찾아와서 그 귀신들이 나에게 들어오지만 지금까지 만들어진 것도 이것도 놀라운 하나님의 솜씨, 하나님의 기적적인 솜씨인 것을 인정한다면 여러분들은 과거의 후회라든지 현재의 결핍이라든지 미래의 모호함이라든지 애매함이라든지 이런 것에 대해서 여러분 자신에게서 손을 떼세요. 부탁해요~ㅎㅎ

여러분 자신에서 손을 떼시고 구경하세요. ‘내일은 또 어떻게 나를 만들어 가시는가! 하나님의 멋진 솜씨, 저는 기대됩니다.’ 하고 우리 자신을 주님의 작품으로 만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아직도 계속 두려워요. 이것 가지고 만족스럽지 않아요. 완전히 두려움을 내좇으려면 만약에 나는 내가 노력해서 애써서 만든 작품이라면 우리는 이 작품이 잘됐는지 못됐는지 누구하고 비교를 합니까? 나는 누구하고 비교하겠습니까? 남하고 비교하겠죠. 그런데 내가 하나님의 작품이라면 나는 누구하고 비교하겠습니까? 나는 성경에 나와 있는 작품들하고 비교하겠죠. 그 작품들이 여러 가지 많습니다. 대표적인 사람은 12제자가 되겠죠.

12제자 전부가 예수님 배반하고 심지어 베드로는 세 번씩이나 부인한 인간들도 주님의 작품으로 어디 갔어요? 천국 갔지요. 엘리야가 자기가 쫓겨나게 되니까 뭐라고 장담했냐하면 '현재 이스라엘에서 나만 구원받았습니다.' 라고 했지만 착각이었습니다.  몇 명 있었어요? 남은 7천명이 있었어요. 그러면 엘리야가 맞는 거예요? 틀린 거예요? 틀렸죠. 그럼 엘리야 지옥 갔습니까? 아니죠. 변화산에서 누가 나타났습니까? 변화산에서 예수님 누구하고 이야기해요? 엘리야하고 이야기하잖아요. 보세요. 이렇게 실수하고 틀려도 지금 어디가 있어요? 천국 가 있잖아요. 그렇게 못난 엘리야도 천국 가는데 잘난 우리가 천국 왜 안가겠어요? 모세 같은 경우에는 가나안 땅, 약속의 땅에 못 들어갔어요. 그런데 변화산에 보니까 모세가 이야기 하고 있어요.

천국은 못난 사람 가는 거예요. 못나던 잘나던 자기가 스스로 따지지 않고 못나도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다면 하나님 보시기에 그게 예쁜 것이고 못나 보이는 작품도 훌륭한 작품이 되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현대작품전에 가보면 작품이 해괴망측합니다. 그런데 전부다 한 10억대, 50억대 되는 작품들이에요. 열심히 그려봐야 우리는 돈 그만큼 안 나옵니다. 그런데 유명한 작품들 우리는 저게 무슨 작품이야 하지만 다 비싼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만든 작품이라면 하나님께서 신경 써서 만들었기 때문에 다 비싸요. 온 우주보다 비쌉니다. 우리 몸이 온 우주보다 비쌉니다. 굉장히 비쌉니다. 하나님의 손때가 묻은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두려워하는 자에게는 벌이 있지만 이것이 바로 내가 스스로 인생을 살려고 하니까 두려움이 계속 찾아오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계속 얻어맞으려고 매를 벌어요. 이제는 생각을 바꿔서 하나님께서 만들어 나가신다고 한다면 이것은 형벌이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뭐로 만드느냐 하면 사랑과 용서로 만들죠.

사랑과 용서로 만들면 여기에 세리나 창녀나 강도도 사랑이 오면 훌륭한 하나님의 작품이 됩니다. 유럽 프랑스 파리에 루브르 박물관이 있어요. 제가 거기에 안 갔습니다. 못 갔죠. 돈이 없고 시간도 없어서…….ㅎㅎ 거기에 모나리자라는 작품이 있는데 파리에 갔다 오신 분이 말하는데 모나리자를 보려면 줄을 그렇게 뱅뱅 돌아가면서 많이 섰데요. 왜 그런가하면 딱 10분간만 보여주고 그 다음에 밖에 대기하고 있다가 10분하고 교체해서 들어간다는 거예요. 10분간 보여주면서도 그것이 삼중방탄유리로 되어서 어떤 미친 사람이 와서 총을 쏴도 총알이 튕겨 나오게 되어 있어요. 얼마나 비싸겠어요? 진짜 모나리자 작품은 나라 하나 다 팔아도 못 살 정도로 비싼 작품이 모나리자 작품이에요. 프랑스 보다 더 비싼 것이 모나리자 작품이에요. 그런데 그 작품이 무엇으로 만들어졌습니까?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유화로 그렸죠.

그런데 이 세리와 창녀, 강도는 하늘나라 들어가는데 무엇으로 만들었어요? 하나님께서 유화로 만들었습니까? 방금 뭐라 만들었다고 했습니까? 사랑과 용서로,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의 피로 값 주고 모나리자보다도 더 값진 작품을 만들었잖아요. 그런데 그 작품을 남들하고 비교해서 “내가 못났다. 인생 이렇게 사느니 죽는 게 낫지” 왜 남들하고 비교 하냐 말이죠. 모나리자라는 그 유명한 작품이 루브르 박물관 삼중방탄유리 안에 있지 않고 서울에 영등포 옆에 쓰레기장에 툭 던져 놨다 합시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보고 “아이고 눈썹도 없는 아주머니 그림이 왜 여기 있어? 어디서 쓰레기를 버려놨어?” 비교하면 “이거 고물 한 5천원 주면 가져가세요. 액자 값도 안 된다.”  이렇게 할 거다 이 말이죠. 삼중방탄유리가 아닙니다. 아이들 밟고 다닐 수도 있다는 말이죠. 왜 하나님께서 작품이라고 피 흘려 피 묻힌 모나리자보다 더 귀한 작품을 왜 그런 모나리자가 자진해서 악마가 만든 작품과 왜 영등포 쓰레기장에서 같이 비교를 해요. 나이트클럽에서 누가 더 춤 잘 추냐를 비교 하냐 말이죠. 예수 믿고 댄스 배틀하라고 예수 믿습니까?

용서 받았다는 게 그 용서가 아무나 주는 용서가 아닙니다. 용서가 묻어 있으면 모나리자보다 더 비싼 작품이에요.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나니……. 모나리자 보다 더 귀한 작품이에요. 그것도 모르고 세상 사람을 이기려고 K2에 나가서 노래자랑하고 ……. 그것을 대단하게 생각하고 말이죠. 전화해서 투표 던지고……. 여러분들이 표를 던지려면 그런데 표 던지지 말고 예수 믿는 성도에게 표를 던져주세요. 예수님의 피만 자랑하는 자에게 표를 던져 주세요. 그리고 여자 분들이 결혼을 하려면 세상 적으로 성공한 사람하고 결혼하지 말고 어떤 사람은 물방울 넥타이 하고 결혼한다고 하는데 물방울 넥타이와 결혼하지 말고 주님의 사랑과 용서를 받은 사람하고 결혼하세요. 왜? 그 사람은 하나님의 귀한 작품입니다.

축복이 끊어질 날이 없어요. 저주는 벌써 날아가 버리고 축복이 그 자리를 대체합니다. 바로 이것이 성경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가 어떻습니까? 교회 안에 까지 학력 경쟁, 돈 경쟁, 헌금 경쟁, 전도 경쟁, 봉사 경쟁, 목사에게 인정받기 위한 경쟁, 윤리 도덕적인 경쟁……. 꼭 바리새인들처럼 집단으로 모아 놓은 것처럼 그런 식의 더러운 것 끄집어내고 선악과 끄집어내고 누가 선악과 많이 따 먹는가 자랑하듯이 개혁주의자들, 성화론 자들……. 선악과를 아예 한 트럭을 먹었어요. 선악과 한 트럭 먹어도 생명나무 요만큼 먹은 만큼 못합니다. 선악과 먹으면 지옥가요. 그냥 죽는 게 아니고 저주받아요.

그런데 생명나무는 요거 하나만 따먹어도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자기 작품을 위해서 생명나무를 못 따먹는 생명나무까지 예수님의 피를 통해서 일부로 그 사람 속에 집어 넣어주시잖아요. 집어 넣어줘서 너희가 보기에 션찮아 보이지만 내가 보기에는 온 천하보다 귀하다 이 말입니다. 양 99마리 있지만 하나님께서 찾는 양은 한 마리 양이에요. 어떤 양? 회개하고 돌아오는 양, 한 마리 양이에요. 99마리 양이 토실토실하게 자랑해도 주께서 인정하지 않습니다. 항상 성경에서 이야기 하는 하나님의 뜻은 여러분, 교회에서나 세상에서 말하는 상식적인 하나님하고 완전히 달라요. 달라도 너무 달라요. 너무 달라서 말을 못할 정도로 이런 말을 하면 내가 미친놈 취급받아서 말을 떼지 못하겠어요. 너무 달라서……. 그 정도로 이 세상은 아주 위험한 세상입니다. 그러려면 남들이 안 알아준다고 짜증부리지 말고 징징거리지 말고 본인부터 본인의 힘으로 내 힘으로 산 것이 아니고 주께서 나를 이만큼 살려 내고 있다는 주님의 솜씨에 감격하시고 탄복하시기 바랍니다. 골로새서를 하면서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은 골로새서가 상당히 꽤 어렵기 때문에 쉬운 쪽으로 해석을 해서 귀를 트이기 위해서 이렇게 출발하는 겁니다.

골로새서, 에베소서를 사도바울의 편지라고 합니다. 여기에 1장 1절에서 2절을 보면

골 1: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과 형제 디모데는
골 1:2 골로새에 있는 성도들 곧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형제들에게 편지하노니

이렇게 되어 있지요. 사도바울의 편지라 말이죠. 그런데 사도바울의 편지인데 사도바울의 편지는 자기가 지어 낸 거예요? 아니면 누구에게 받은 거예요? 사도바울은 누가 만듭니까? 사도바울 본인이 애써서 자기가 사도일 합니까? 아니죠. 만드신 분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이죠. 예수님이 만드신 사도바울에게 편지를 쓰게 했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이 편지는 누구만 이해되겠어요? 동일하게 예수님에 의해서 만들어진 성도에게만 이 편지가 이해되겠죠? 그렇죠? 같이 만들어진 사람이니까요 그러면 우리가 만들어진 사람이냐 아니냐를 알려면 어떻게 하면 되느냐하면 예수님이 사도바울 만들 때 방법이 있었지 않습니까! 그 같은 방법이 역시 우리에게도 똑같이 주어진다는 것을 확인할 때 우리가 이 편지를 제대로 이해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비타500, 다 먹었습니다. 석수가 있습니다. 사도바울에게 예수님이 석수를 줬다면 우리가 만약에 다 먹은 비타500을 받으면 이것은 뭔가 잘못된 거예요. 편지를 이해 못하는 겁니다. 다 같은 하나님의 작품인데 천국갈 수 있는 사람을 만들기 위해서는 생명나무를 얻기 위해서 사도바울에게 이 석수를 줬다면 우리도 석수를 받아야 사도바울이 갔던 천국에 우리가 함께 합류될 수 있잖아요. 그렇잖아요.

제가 초등학교 때 만약에 금요일에 소풍을 간다면 학교선생님이 화요일이나 목요일에 분명히 칠판에 크게 써놔요. ‘내일 소풍가는데 아침 10시까지 두루 공원에 모여라!’ 분명히 크게 써요. 두루 공원에 모이라고 하면 모이면 되는데 꼭 그 중에 댓 명은 달성공원에서 모여요. 거기 가서 선생님이 이렇게 저렇게 해서 학부모에게 연락해서 30분 늦어져서 먼저 온 사람 짜증내고 그러는 거예요. 소풍가면 두루 공원에 모여서 같이 가는 거예요.

사도바울이 사도바울 되게 했던 방법이 석수를 주는 방법이라면 그 방법에 다른 방법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에이 사도바울은 그런 식이고, 우리는 다른 방법이지” 다른 방법이 없다니까요 사도바울을 사도바울 되게 했던 그 방법 이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어요. 그렇다면 그 사도바울의 편지는 뭐냐 하면 예수님이 나에게 이런 식으로 너는 천국가게 되었다는 그 방법이 적힌 것이 편지의 내용입니다. 그 편지가 사도바울에게만 해당되는 내용이면 읽고 찢어버리면 그만이에요. 그런데 사도바울은 편지를 써서 너만 읽지 말고 누구도 다 읽게 해라? 모든 골로새에 있는 교회에게 편지를 줘라! 왜, 거기에도 너 같은 사람, 내가 만든 작품이 있다는 거예요. 그러면 그 다음 여러분들이 궁금한 것이 “그럼 목사님, 사도바울은 어떤 식으로 구원이 되었고 지옥 갈 인간이 어떻게 천국 가는 인간이 되었습니까? 아, 궁금합니다.” 이런 생각이 들겠지요.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제가 뭐라 했냐하면 처음 시작하기 전에 요한일서 4장 18절, 두려움에는 형벌이 온다고 했습니다. 두려움에는 벌이 온다. 성경을 떠나서 인간에게는 ‘두려움에는 형벌이 온다.’는 말 대신에 우리는 이러고 싶어요. ‘두려워하는 자는 두렵게 산다.’ 이 정도 됐으면 ‘우리가 감내 할게요.’ 하겠는데 성경에 그렇게 하는 게 아니고 두려워하는 자에게는 “많이 두렵나?” “많이 두렵습니다.” “고생 꽤나 해라.” 말로 이정도 끝나면 “에이 예수 믿느니 차라리 두렵게 살련다.” 이렇게 편하게 있으면 될 텐데 두려운 자에게 뭐가 온다고요? 하나님의 벌이 오는 거예요.

그러면 이것을 다 지워 버려봅시다. 두려움도 지우고 형자도 지우고 다 지우고 딱 한자 남겨둔다면 결국 무슨 자만 남습니까? “벌” 뒤에 뭐 하나 붙인다면 “벌 받는다.” 누가 개입되지 않으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개입하지 아니하면 사도바울이고 뭐고 간에 뭘 받는다? 벌 받는다. 벌은 무슨 벌인가? 회초리로 손바닥 맞는 겁니까? 아니죠. 성경에 보니까 지옥 불에 들어가죠. 그러니까 결국은 뭘 해도 지옥 간다. 지옥 유황불에 간다. 저주 받는다. 영원한 벌을 받는다. 성경의 출발점이 뭐냐 하면 “에라 이 영원한 벌 받을 인간아!” 그것부터 출발하는 거예요. “벌 받는다” 여러분, 제 말에 지금 속아 넘어가고 있는 겁니까? 속아 넘어가는 문제가 아니에요.

다시 할게요. 두려워하는 자에게는 ‘네가 많이 두려워 할 것이다.’ 라고 했으면 우리가 교회도 가끔 나오고 교회 안 나와도 돼요.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네가 교회 다니고 안 다니고 문제가 아니라 사업을 하나 자식을 키우나 장사를 하나 교회를 나오나 하여튼 뭔가 두려움에 떠는 자에게는 뭐가 찾아온다는 말입니까? 저주와 심판과 지옥불이 늘 기다린다는 거예요. 남녀노소 불문하고 지위 고하를 불문하고 지옥이 있다는 겁니다.

어떤 영화에 귀신이 산다는 영화가 있는데 지옥이 있다는 거예요. 이사야가 하나님을 직접 만나고 나서 느낌이 뭐냐,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구나! 제가 연세 많으신 어머니를 며칠 동안 돌보면서 무엇을 느꼈느냐 하면 연세가 80이 넘었어요. 그러니까 많이 쇠약하죠. 정신적 육체적으로 쇠약하신 분을 옆에서 나름대로 모시면서 느낀 점이 내가 무너지는구나! 우리 어머니만 약해서 무너져 내려가는 것이 아니라 나도 같이 인생 망가지고 있구나 하는 것을 느꼈어요. 아, 처음부터, 날 때부터 인생은 망가지게 되어 있어요. 무너집니다. 화로다 나는 망해야 될 자가 망하는 거 맞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직 커가는 아이들은 “목사님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저는 매일 매일 자라나요. 쑥쑥 자라나요.” 하지요. 쑥쑥 자라나봐야 망가지게 되어 있습니다. 너무 크면 망가져요. 시간이 많이 걸려요. 주저앉는 것도 숨차게 앉고 키가 좀 작아야 덜 아픈데 꺽다리같이 크면 휙 넘어질 수가 있어요. 전부다 인간은 무너지고 있어요. 그것을 내가 왜 몰랐던가? 그래서 아직 팔팔하다고 조깅하면 건강 유지된다고 했는데 막상 그런 어머니를 가까이서 모시고 보니까 어머니나 저나 지금 무너지는 소리가 막 들리는 것 같아요. 밑에서 축대 흙이 주르륵 흘러내려 앉아요. 막 내려앉는 것 같아요. ‘참, 어머니는 좋겠다. 빨리 내려앉으니……. 나는 좀 더 있어야 내려앉는가!…….’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고 그 뒤에는 심판이 있습니다. 따라서 사도바울에게서 ‘하나님 저 사도 시켜주세요.’ 라는 문제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어쨌든 자기 자신을 제대로 알게 된 거예요. ‘나는 벌 받아야 되고 나는 지옥 가야 된다.’는 것을 알게 된 겁니다. 그것부터 출발해야 됩니다. ‘모든 인간은 지옥가도 싸다. 어떤 인간도 하나님 앞에 벌 받아 마땅하다.’ 왜? 우리 조상이 그러니까……. 조상 때문에 우리는 생명나무 못 따먹었으니까 선악과 저주를 우리는 받아야 됩니다.

다시 한 번 해 봅시다. 사도바울이 하나님의 작품이 됐다면 그 방법이 있을 것이다. 그 방법을 골로새서라는 편지로 우리에게 적었을 것이다. 따라서 그 편지를 이해 한다는 것은 우리가 사도바울이 어떻게 해서 어떻게 구원받았는가 하고 똑같은 위치에 있는 사람만 그 편지를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설사를 해 본 사람이 설사약의 효용이 좋다는 것을 알고, 배 아픈 사람이 약 먹으니까 낫는 것을 알듯이 우리가 똑같이 배를 아파봐야 그 약의 효과를 알 수 있잖아요. 하나님께서는 사도바울이 구원받는 식으로 다른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편지를 보낸 것입니다.

따라서 사도바울이 느낀 것과 동일하게 있는 그 자리에 우리가 있어야 됩니다. 그 있는 자리가 뭐였습니까? “나는 벌 받는다.” 라는 자리입니다. 이유를 묻지 마세요. “쟤는 2살인데?” “2살이고 1살이고…….” “아, 저는 연약한 여인인데…….” “연약한 여인이고 강한 여인고간에 그럼 강한 여인은 지옥가란 말입니까?” 그럼 이슬 먹는 사람은 천국가면 그럼 이슬 다 먹겠네요. 나중에 숲에 가면 이슬을 팔겠네요. 이슬 한 병에 만 오천 원……. 김장김치도 안 먹고 이슬만 먹고 살아요. ㅎㅎ  이 세상을 하나님이 그렇게 본 거예요. 하나님의 작품에게 왜 “착해라, 훌륭해라” 라고 이야기를 안 하느냐 착해도 지옥가고 훌륭해도 지옥가요. 소용이 없는 거예요. 그냥 태어난 것 자체가 처벌이고 태어난 것 자체가 지옥 가려고 태어났기 때문에 이것은 당연한건데 새삼 지옥 갔다고 너무 억울해 하고 애통해 하지 마라 말이에요. 당연히 네가 갈 곳이 거기니까 네 조상이 간 것처럼 가야 하니까…….

“벌 받는다.”가 되어야 비로소 사도바울의 편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럼 제가 문제를 낼 테니까 여러분 알아 맞춰보세요. 여러분 하나의 벌이 개인적으로 옵니까? 단체로 옵니까? 아, 이번 질문 어렵죠. 1번 단체벌이다. 아니면 2번 개인벌이다. 숙제를 안했을 때 단체로 벌 받습니까? 개인이 벌 받습니까? 개인이 벌 받는데 또 미친 교사가 기분 나쁘다고 단체로 벌 줄 수 있어요. “왜 네 친구가 숙제 안했는데 관심 안 뒀어!” 하면서 “숙제 한 너도 맞아라!” 하고 단체로 맞을 수가 있어요. 교사가 부부싸움해서 기분 나쁠 때 성질부릴 때 그렇게 합니다. 단체벌이냐 개인벌이냐를 어떻게 아느냐 하면 만약에 단체 벌 같으면 구원이 단체구원이 되겠죠. 만약에 개인 벌이라고 구원은 뭐냐 하면 개인용으로 구원이 주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뭐라 하냐면 “얘야, 너만 구원 받아! 다른 사람은 알려 주지 마! 내가 너의 맞춤구원이야” 라고 줬을 거란 말입니다.

그러면 골로새서 보기 전에 먼저 우리가 생각해 봅시다. 개인적으로 구원하는 겁니까? 단체로 구원하는 겁니까? 이것이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골로새서1장 2절 골로새에 있는 성도들 곧, 곧 그 다음에 뭐죠? 그리스도 안이죠. 그러니까 그리스도가 몇 명을 상대합니까? 달랑 한명입니까? 여러 명을 상대하는 겁니까? 여러 명이죠. 개인구원이 아니고 단체구원이죠. 단체구원이란 말은 벌하는 것도 개인적으로 나쁜 사람만 벌주는 것이 아니고 전체로 다 벌이 온다는 것이 여기서 밝혀졌잖아요.

골 1:2 골로새에 있는 성도들 곧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형제들에게 편지하노니 우리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찌어다

전체가 다 벌 받기 때문에 이 전체 중에서 ‘나는 예전보다 더 착해야지’ 하는 것이 성립된다? 성립 안 된다? 성립이 안 됩니다. 2학년 2반 단체로 벌 받으면 “선생님, 저는 2학년 2반이지만 반장이니까 저는 쟤들하고 달라요.” 라는 말이 통합니까? 안 통합니까? 안 통하죠. “저는 목사니까 빼주시고요, 제 말 안들은 교인들, 집사들이나 벌주세요.” 하는 것이 안 되죠. 제 말이 맞죠? 그렇다면 반대로 해 봅시다.

만약에 구원을 받았다 합시다. “하나님 제가 목사니까 구원 받았습니다.” 됩니까? 안 됩니까? 안 되지요. 왜냐, 다 같이 받을 벌을 다 같이 구원했기 때문에 나는 여자이기 때문에 구원받았다가 아니고 내가 잘나서 구원 받은 게 아니란 말이죠. 아닐 때 그것을 뭐라 하느냐 하면 “예수 안에서 구원 받았다.”라고 하는 겁니다. 예수 안에서라는 말 안에 그 구원에 있어서 개인의 우열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 안에서 개인적인 구별은 없습니다. 그래서 골로새서 편지를 볼 때 주의 깊게 보아야 하고 관찰해야 됩니다. 미술학파에서 인상주의 학파는 그 햇빛이 무채에 치는 것 까지 묘사하기 때문에 모호하고 흐릿하게 보이지만 실제로 더 관찰해 보면 햇빛이 비치는 게 보인다는 겁니다. 그처럼 우리가 성경을 볼 때에 아주 깊이 관찰 있게 보면 한자 한자가 무의미한 게 아무것도 없어요. 예수 안에서라고 하는 것이 바로 이렇게 연줄로 연결되어서 예수 안에서 구원 받는 겁니다. 예수 안에서 구원받는다고 하는 것은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더 이상 차별이 없다는 상급에도 차이가 없고 예수 안에서 차이가 없어요. 그러면 더 의로운 사람이 있고 덜 의로운 사람이 있지 않겠습니까? 하는 말도 잘못됐죠. 예수 안에 있을 때는 더 의로운 사람도 없고 덜 의로운 사람도 없이 다 같이 하나님의 의로 구원받아요.

그래서 개별적인 행함은 통합니까? 통하지 않습니까? 통하지 않죠. 개별적인 행함이 소용없는 것을 가지고 뭐라 합니까? 믿음이라합니다. 개인적인 행위가 내 구원에 전혀 보탬이 되지 않는 것을 가지고 나 말고 다른데서 구원의 근거가 있음을 믿을 때 그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그 믿음이 바로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 의를 만들어서 우리 대신 만들어진 의가 예수 안이라는 공간을 만들었고 그 공간 안에서 사도바울이나 우리나 다 같이 구원 받은 거예요.

그렇다면 우리 의존교회에서 방금 “편지요” 하고 받았다 합시다. 편지를 받자마자 1장 2절에 예수 안에서 형제들, 여러분에게 편지합니다. 예수 안의 의미를 모르는 사람은 편지를 보지도 말고 그냥 옆 사람에 넘겨주세요. 이런 뜻이에요. 예수 안에서를 모르는 사람은 반드시 누구 안에 있겠어요? 하나님께서는 예수 안에서 인간을 만드는데 만약에 내가 인간을 만들어 버리면 누가 필요 없어요. 예수 안에서는 필요 없고 내 안에서 나를 만들기 하는 사람들은 골로새서 편지가 무용지물이 됩니다. 이것은 아무 소용이 없고 그 사람에게는 통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성경은 어려운 거예요. 초장부터 입이 막혀 버려요. 문제가 풀리지 않아요. 우리 안경 낀 남학생, 목사님이 묻는 게 아니고 학교에 선생님이 “얘, 너 어느 집안 성씨야?” “이씨” “무슨 이씨?” 모를 때는 그냥 이 씨라고 하면 돼요. 그냥 이 씨라고 하면 이 씨라는 가문 핏줄 안에 있지요. 그럼 뭐 안에 있지 않습니까? 뭐와 관계가 없지요? 그리스도 안 하고 관계없지요. 10분 쉬고 다음 시간에 하는 것은 이렇게 어려운 거예요. 분명히 나는, 저도 이씨, 경주 이 씨예요. 경주 이 씨가 어떻게 그리스도 안이란 말을 변경할 수 있느냐, 분명한 이 씨 집안 안에서 태어나서 이 씨라는 혈족 안에서 태어났는데 왜 이 씨 안을 인정하지 않고 저기 먼 예수라는 유대인의 낫선 인물 안에 그것도 역사와 시간을 초월해서 왜 나사렛 예수란 청년 안으로 등기이전이 어떻게 그렇게 가능 하는가를 10분 쉬고 하겠습니다.
 

 관리자 (IP:220.♡.41.203) 10-10-20 18:34 
서울101008골1장3절b

전 시간 끝에 경주 이 씨 이야기를 했는데 이 씨가 혈육에 속한 것이 분명합니다. 옆집 할머니가 날 낳은 게 아니잖아요. 우리 어머니가 날 낳았어요. 분명합니다. 우리 집안은 분명히 이 씨 집안인데 우리는 태어 날 때부터 이 씨 집안이라는 혈육 안에 살고 있는데 어째서 우리가 예수 안에 있다고 성경에 그렇게 되어 있냐 이 말이죠.

‘에라 모르겠다. 무조건 믿자’ 그것은 믿는 게 아니고 믿는 척을 하고 있는 거고 이게 우리가 경주 이 씨 집인 것이 실제인 것처럼 그 이상으로 실제이어야 하는 것이 예수 안인 것입니다. 예수 안은 모호 흐리멍덩하기 이를 때 없고 내가 이 씨 집안인 것이 분명한 것 같으면 항상 사람은 교회 나와서 ‘예수 믿습니다.’ 하면서도 걸핏 하면  어디로 되돌아오겠어요? 역시 나는 이 씨 집안이야 하면서 돌아올 것이 뻔하다 이 말입니다.

개를 아무리 침대에 키워도 개는 개입니다. 아무리 예쁜 옷을 입혀놓아도 앙드레김 옷을 입혀놓아도 개는 개일뿐입니다. 사람 되는 법이 없습니다. 그런데 개한테 ‘너는 사람이다.’ 하면 개가 사료 더 주니까 개는 ‘응’ 할 겁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 예수 사람 맞습니다.’ 하면 개처럼 ‘예, 맞습니다.’ 해 놓고 여전히 진짜 현실은 예수 안은 추상이고 관념이고 여전히 나는 이 씨 집안 맞아 때려죽여도 맞아 이렇게 버틴다면 그것이 무슨 사도 바울의 편지를 이해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만화책 본다고 구원되는 것 아니거든요. 그러나 성경책 보면 구원이 되어야 하죠. 성경책 봐도 구원이 안 되면 그것은 만화책 보는 것과  다를 봐 없습니다. 교체가 일어나야 합니다. 이 씨 집안에서, 혈육의 집안에서 교체가 일어나야 하는데 혈육의 반대말은 뭐가 있냐? 분명히 우리 아버지 어머니가 나를 낳았다는 것, 어느 동, 논현동 순풍산부인과에서 15년 전에 분명히 날 낳았다는 분명한 이 현실, 혈육이라는 그것의 반대말이 뭐냐? 육에 속하면 구원이 안 되고 육에 속하면 육으로 끝나니까 하늘나라는 다시 태어난다고 할 때 니고데모가 분명히 현실, 실제를 예상한 거예요.

실제로 나는 엄마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에 다시 태어난다면 엄마 몸에서 태어 난 그것만이 실제다 이 말입니다. 다른 것은 가상이고 말장난에 불과 한 거예요. 다시 태어나야 하늘나라 볼 수 있다면 그 다시 태어 난 장소는 내가 태어 난 장소에서 두 번 다시 태어나면 그 외에는 비현실이 되는 거예요. 우리 말 똑바로 합시다. 맞잖아요. 니고데모 말이 맞다 이 말이죠. 분명히 맞는 말이란 말이죠. 어떻게 내가 엄마에서 다시 태어 날 수 있습니까? 한 말이 그게 정당한 말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육으로 난 것은 천번 만번 태어나도 육이고 다른 말로 하면 개는 백날 태어나도 개고 네가 영으로 태어나야 한다 하니까 니고데모가 헐~ 성경에는 안 나오지만 헐~ 이런 무슨 뚱딴지같은……. 그러니까 주님께서 눈치로 알고 네가 영으로 태어나는 것을 잘 모르는 모양인데 못 알아먹는 게 아니죠. 그것이 관념적이고 비현실적이라서 답답한 것이죠. 영으로 태어난다는 말은 누구나 내 뱉을 수 있어요. 점쟁이라도 그럴 수 있어요. “아하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구나!” 그런 말은 한두 번씩 할 수 있다 이 말이죠. 그게 문제가 아니고 육이 진짜로 내 육이, 손마디가 진짜 육이듯이 영도 육 이상으로 진짜 감이 실제로 감각으로 와 닿아야 된다는 말이죠. 그냥 모호하게 흐리멍덩하게 하면 안돼요. 그래서 둘 다 동일하게 실제이기 때문에 “나는 두 번 다시 내 육을 찬양하지 않겠다.” 이렇게 되어야 돼요.

실제 그렇게 된 사람이 오순절 날 열두제자가 성령 받고 난 뒤에 실제로 되었잖아요. 그러니까 스데반 집사가 성령 받고 실제로 자기의 흙에 속한 것은 돌에 맞아 흙으로 돌려보내 버리고 진짜 몸은 예수님을 영접해 하늘나라에 살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그런 것을 고려하지 않으면 성경은 소설이고 드라마에요. 이건 그냥 재미있으라고 위로삼아 보는 거고 무협지 보다 더 못해요. 무협지 보면 성경에 홍해 갈라지는 것 보다 많이 갈라졌어요. 혈육의 반대가 뭐냐 하면 이문제입니다.

지금까지 나온 것 중에 제일 어려운 겁니다. 제가 예를 들겠습니다. 젓가락 반대가 뭐에요? 젓가락의 반대말은 1번 숟가락, 2번 연탄 몇 번입니까? 애가 밥을 먹는데 밥은 숟가락으로 먹어야 되는데 젓가락으로 하니까 엄마가 “얘야 젓가락으로 먹지 말아야지” “엄마, 젓가락으로 먹지 않으면 뭐로 먹어야 돼? 젓가락의 반대가 뭔데?” 보통은 젓가락 반대가 뭡니까? 젓가락의 반대는 숟가락이죠. 그러면 밥은 젓가락으로 먹어서는 안 되는 거예요. 그런데 연탄은 반대말이 되느냐? 안 되느냐? 밥은 숟가락으로 먹되 국수는 연탄가지고 먹습니까? 젓가락으로 먹잖아요. 그러니까 젓가락이 아닌 것은 숟가락도 젓가락이 아니고 연탄도 젓가락이 아니고 기차도 젓가락이 아니고 빌딩도 젓가락이 아니고 여기는 무수한 반대말은 아니지만 젓가락이 아닌 것은 여기 수두룩이 있지요? 제가 예를 든 게 더 어려워요. ㅎㅎ

혈육의 반대말이라고 할 때 우리는 혈육이 아닌 것들을 죽 나열했어요. 해바라기도 있고 참새도 있고 빌딩도, 자동차도 혈육이 아니잖아요. 혈육이 아닌 것들이 많이 있잖아요. “그래서 혈육은 지옥 가는 거야!”라고 고발 할 수 있는 혈육의 반대말은 뭐냐 이 말이죠. 그것은 혈육으로는 도저히 못 가는데 천국에 유일하게 갔던 것만이 혈육의 반대말이 됩니다.

이 감격! 성경을 볼 때 혈육의 반대를 보통 영이라 합니다. 이게 뭔가 틀렸어요. 혈육이라는 것은, 혈육이라는 존재가 있잖아요. 내가 있잖아요. 난 누구한테서 태어났어요? 부모에게서 태어났어요. 부모의 혈육에서 태어났어요. 부모의 DNA에서 내가 태어났다. 혈육은 존재다 이 말이죠. 그런데 혈육의 반대말이 영이라면 영은 뭐가 되느냐 영은 존재로서의 영이 되어야 된다 이 말이죠. 전기 있듯이 영이 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성경은 그렇게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혈육의 반대말은 사건이에요. 무슨 사건이냐 하면 십자가 사건입니다. 만약의 혈육의 반대가 영이 된다면 사람들이 혈육을 떠나서 영이 되려고 애쓸 거예요. 이렇게 되어 버리면 뭐가 문제가 되느냐 하면 혈육적인 존재는 영만 된다면 구원받을 수 있다는 희망을 혈육이 감히 먼저 갖게 돼요. 그런데 아까 제가 뭐라 했습니까? 우리는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우리는 구원 받을 자격도 없고 구원받아서도 안 되고, 왜? 혈육이니까 우리는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지옥 가는 것이 마땅해야 되죠.

지옥가야 할 마땅한 인간이 은근히 이렇게 생각해요. “나는 지옥가야 마땅합니다. 말을 함으로서 나를 천국 넣는데 봐주세요. 아이고, 좀 넣어 주세요. 나는 지옥가야 마땅하잖아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알잖아요. 그러니까 나같이 아는 사람은 천국 넣어주세요. 눈감고 넣어달라니까” 은근히 자기가 천국 가고 싶다는 속내를 욕망을 갖추고 있는 혈육이 되지요. 그런 혈육의 반대말이 영이 된다면 이 영은 욕심을 품고 있는, 구원 욕심을 가지고 있는 영이 되는 겁니다.

이 영은 혈육의 영이 되면 안 되고 십자가 사건에서 나온 예수님의 영이 돼야 되는 겁니다. 그래서 혈육의 반대말은 십자가 사건이 되는 겁니다. 제가 어린아이들이 안다고 기대 안 합니다. 이거는 종용이 집에 가서 아빠 엄마에게 배우세요. 혹시 관심 있거든……. “엄마, 아까 목사님이 숟가락의 반대말이 연탄 이게 뭔 말인지 모르겠다.” 하면서…….

숟가락을 젓가락에 의미를 주는 것은 연탄도 안 되고 오직 숟가락만 될 때 숟가락 아닌 젓가락이 되는 거예요. 그러나 숟가락의 반대말이 젓가락도 있을 것이고 바다도 있을 것이고 해초도 있을 것이고 오징어도 있을 거다 말이죠. 하지만 왜 숟가락의 반대가 젓가락이냐? 그것은 숟가락의 의미를 들어내기 위해서 젓가락이 못하는데 같은 수저지만 젓가락이 못하는데 숟가락이 한다. 숟가락이 못하는데 젓가락이 한다. 서로 같이 짝을 맞춰야 의미가 피어나는 겁니다.

그래서 목적이 뭐냐? 십자가 사건을 위하여 우리는 왜 구원 되어서는 안 되는가? 또는 십자가 사건 때문에 왜 우리는 구원되기 싫더라도 천국 가기 싫더라도 왜 우리는 꼭 강제로 천국 가야만 하는가?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이 되는 거예요. 아까 모나리자 이야기 했죠. 모나리자가 어떤 설에 의하면 귀족 부인이라고 하는데 모나리자가 이렇게 미소 지으면서 앉아 있다 이 말이죠. 다빈치가 아줌마 오랜 시간 10시간 걸리니까 앉아 있어야 하니까 그렇게 있어요. 아줌마가 앉아서 미소 짓고 있는데 전화가 와서 전화를 받고 다시 앉으면 “아, 아니에요. 구도 다시” 이렇게 하잖아요. 그러면 짜증나잖아요. “에이, 치워버려라!”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그 모나리자를 누가 그린 거예요. 분명히 다빈치가 그렸지만 누가 협조했어요? 귀족부인 모나리자가 협조 안하면 그림이 안 되잖아요. 그렇죠?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를 천국 가는 작품을 만들 때 우리는 자꾸 내가 천국 가고자 하는 내 의지가 그 협조용으로 보탬이 된다고 오해를 하는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게 되면 예수님하고 우리하고 합작해서 천국 가는 데 도움 되는 게 되잖아요. 세상에 그런 법은 없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보고 지옥 간다. 너는 화로다 망하게 되었다. 왜 그렇게 했느냐 하면 모나리자는 생긋이 웃지만 주님께서는 우리를 죽여 버렸다 이 말이죠. 죽여 놓고 없는데서 있게 하시고 죽은데서 살려 낼 때 그 작품은 온전히 누구 사건의 공로만 높이겠습니까? 십자가의 사건만 용서와 사랑의 이름으로 온 몸, 온 조각조각 하나하나가 전부다 사랑이고 용서의 흔적들로 덥히게 될 때, 그 때만 하늘의 천사가 문 열어주고 “누구신지?” “예수 안에서” “오, 들어와 통과” 통과가 되어서 면류관도 주님 앞에 반환하는 겁니다.

그래서 종교 생활하는 사람들이 지옥 가는 이유가 거기 있습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이 지옥 가는 이유가 거기 있습니다. 예수를 믿어야 되는 데 예수는 안 믿고 내가 교회 다녔다는 것을 하나의 학원 다니듯이 여러 가지 일 하는 중에 교회 다니는 것도 보탬으로 말미암아 이거는 살아 있을 때 필요한 거고 죽을 때는 보험 들어 놓듯이 예수 믿었으니까 천국 간다. 여전히 예수 안에 있지 않고 자기 안에 예수를 끌어당김을 시도 하는 그러한 오류를 범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 육적인 인간의 반대말은 영적인 인간이 되는 것이 아니고 육적인 인간의 반대말은 영적인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의 행함은 부정당하고 예수님의 하신 일만 믿어야 되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요한복음 3장에서 “네가 영의 일을 모르느냐?” 라고 나온 뒤의 이야기가 누구 이야기 입니까? 모세의 지팡이가 들린 것 같이 내가 들려야 된다. 들려야 된다는 말은 주저앉았다 이 말입니다. 완전히 죽어 버렸다 이 말입니다. 죽었기 때문에 들려야 되는 거예요. 모세의 지팡이는 그냥 홍해 갈라질 때 잠깐 가져온 게 아닙니다. 놋뱀 따라온 게 아니고 반드시 무슨 사건 이후에 놋뱀이었습니까? 죽는 사건, 백성이 죽는 사건 이후에 놋뱀이죠. 죽음 사건 이후에 들림이 있습니다.

그 뒤에 나오는 유명한 말이 “하나님이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 말은 뭐냐,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자기 손으로 죽였으니” 하나님의 아들이 죽었다는 그것 때문에 우리가 작품으로 있어야 된다고 인정하는 사람은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리라 그 영생은 누구의 영생이었습니까? 우리 영생이 아니고 예수님의 영생이 예수 안에 있는 우리에게 주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은 세상을 심판하러 오셨다 이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요한복음이라면 이 요한복음을 사도바울에게 그대로 적용시켜 봅시다. 예수님과 니고데모의 대화를 사도바울에게 그대로 적용 시켜야 됩니다. 적용시켜야 하는 이유는 아까 제가 이야기 했죠. 사도바울을 죄 많은 스데반 집사를 죽일 때 동참했던 사울이라는 사람을 사도로 만들었던 그 방법이 그대로 오늘날 우리에게 나타나야 구원되는데 과연 나타나는지 안 나타나는지 우리가 어떻게 확인하느냐 하면 이 편지에 나타난 사도바울이 구원받는 방법에 동의 한다면 그 사람은 똑같은 성령을 받은 사람입니다.

성령을 받게 되면 성령 받은 사람이란 것에 의미를 두는 게 아니고 내가 영적 존재가 된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십자가 사건이 중요한 겁니다. 다시 이야기 합니다. 영혼의 반대말은 영적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고 영적 내가 되는 것이 아니고 나의 혈육의 반대말은 십자가 사건이다. 나는 십자가 사건 앞에서 나는 완전히 부정당해야 되기 때문에 영적 존재라는 것 역시 우리는 기대하지 말고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때문에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겁니다. 이 새로운 피조물은 예수님의 사건을 보여주기 위한 새로운 피조물이지 내가 살았다 하는 것을 자랑하는 새로운 피조물이 아닙니다
.

사도바울은 어떻게 구원 받았는가? 3절 보겠습니다.

골 1:3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감사하노라
골 1: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너희의 믿음과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을 들음이요
골 1:5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둔 소망을 인함이니 곧 너희가 전에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들은 것이라

여기에 예수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나옵니다. 그것이 믿음과 사랑과 소망, 4절 5절 보면 그 세 가지가 나오지요. 예수 안에는 무엇이 풍성하게 장만되어 있다고 했어요? 믿음과 소망과 사랑 또는 사랑과 믿음과 소망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사랑과 믿음과 소망이 어디 안에 있습니까? 누구에게 편지 하는 겁니까?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 편지 한다고 했죠. 그런데 예수 안에 있다는 자는 방금 전에 제가 얘기 했죠. 예수 안에 있는 자는 무슨 사건 안에 있다 했죠. 십자가 사건에 의해서 예수 안이 벌어졌고 예수 안에서 믿음과 사랑과 소망이 일어나는 겁니다.

이것은 평평했던 땅에서 마그마가 밑에서 올라옵니다. 멘탈에서 올라오는 마그마가 강력한 6천개 여러 가지가 올라옵니다. 올라오다가 드디어 약한 지반에서 균열이 우리말로 이야기 하면 틈이죠. 틈이 생겨서 폭발해 버리죠. 뻥 하고 구멍이 뚫리면서 밑에 있던 것이 퇴전 물로 쌓이겠죠. 용암이 흘러나오고 난리 났습니다. 큰 화산이 구멍이 있고 구멍 사이로 비오면 백두산 천지처럼 화산이 터졌다 이 말입니다. 화산이 터졌으니까 여기 밑에 예수 안이라는 영이 생겼는데 예수 안은 반드시 무슨 사건이 있어야 한다 했습니까? 십자가 폭발 사건이 있어야 합니다.

자, 이제부터 사건이 뭐냐 하는 겁니다. 사건이라고 하는 것은 사건 이전에 알았던 모든 것과 공통점이 없는 것을 사건이라고 합니다.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예상했던 것, 기대 했던 것이 전혀 포함이 안 되는 것이 사건입니다. 광주사건, 무슨 사건……. 이것은 사람이 어떤 물건이 있으면 이름을 붙여서 그것을 이미 자기가 알고 있는 세상 안으로 배치를 합니다.

여기에 포도가 있고 여기는 석수라는 물이 있고 아까 먹은 비타500이 있습니다. 제가 한눈 판 사이에 막걸리가 생겨 버렸다. 그것은 뭐가 됩니까? 그것을 가지고 사건이라고 합니다. 왜 사건이라고 하느냐 하면 내가 아까 봤을 때 이 자리에 막걸리가 없었는데 한눈 판 사이에 막걸리가 생겼으니까 이것을 가지고 전에 알고 있었던 것과 관계없이 돌출된 거예요. 전에 알고 있던 원인과 결과란 고리가 없이 ‘아마 이쯤 되면 막걸리가 생길 거야’ 하면 그것은 사건이 아니에요. 왜, 미리 예상했기 때문에 ‘남북이 통일 된다’ 이것은 사건입니까? 사건 아닙니까? 그것은 사건 아닙니다. 왜? 통일을 고대하고 있으니까…….

‘울릉도 옆에 새로운 화산이 터졌습니다.’ 이건 사건이에요? 사건 아니에요? 이것은 사건이죠. 왜? 아무 조짐이 없었으니까……. 그래서 ‘911사건’ 미국에 쌍둥이 빌딩에 아랍계통의 테러범이 자폭해서 와르르 무너진 사건, 그것이 왜 사건입니까? 그것을 미리 알았으면 미리 미국이 비행기를 차단하고 빌딩에서 사람들을 나가라 했을 거예요. 그런데 아무도 몰랐죠. 그런데 폭파 했잖아요. 그게 뭐가 돼요? 사건이 되죠. 사건의 특징은 쭉 나가다가 여기서 사건이 터져 버리면 이 사건부터 새로운 역사가 다른 노선으로 새로 시작됩니다. 이쪽 노선은 폐기처분 됩니다.

제 책 ‘피’에 보면 그런 글이 나왔다고 이준씨가 인용한 게 있어요. 1945년 8월 14일인가 아침 8시 15분에 히로시마에 있는 초등학교 여학생이 숙제해서 기분 좋게 등교하고 있는데 원자폭탄이 터져버렸죠. 그러면 초등학생이 숙제하면서 갈 때, 숙제 할 때 무엇을 기대 했겠어요? 초등학생이 숙제해서 갈 때, “나는 오늘 선생님께 칭찬받고 청소당번도 면제받고 집에 가서 오늘 아침에 엄마가 떡 해 놨으니까 빨리 가서 떡 먹어야지” 하는 이 소망, 이 믿음, 이 사랑……. 이게 어떻게 돼 버려요? 원자폭탄 터져버리니까 아이가 없어져요. 아이가 없어지니까 뭐도 없어져요? 믿음, 소망, 사랑도 이 노선도 없지요? 혈육의 노선이 없지요.

그러면 십자가 사건과 다른 게 뭡니까? 십자가 사건은 모든 인간으로 하여금 나름대로의 혈육적인 기대와 소망과 사랑을 전부다 무산 시키는 것이 십자가 사건입니다. “목사님 그 이유를 대세요.” 하면 이유를 대지요. 왜, 거기에 무엇이 박혀 있어요? 예수님이 택한 백성을 대신해서 우리 대신해서 어린양이 되시니까 유월절에 죽음의 사자왔을 때 우리가 죽어야 될 아들을 대신해서 양의 피가 발리듯이 예수님이 양의 피가 돼서 아버지의 심판 앞에 지옥불 앞에 주님이 먼저 막아섰어요. 우리가 예상 했습니까? 예상 안 했습니까? 예상 안 해 버리면 뭐가 됩니까? 십자가 사건이 되죠.

십자가 사건은 새로운 역사가 되면서 밑에 있는 믿음 소망, 사랑과 연결이 됩니까? 안 됩니까? 연결이 끊어지죠. 그래서 기도 할 때 이방인처럼 중언부언 하지 마라. 무엇을 입을까 먹을까 그런 거 기도하지 마라. 그것은 이방인들이 하는 기도다. 이방인들이 하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다. ‘주시옵소서!, 주시옵소서!’ ‘뭐? 뭐 달라 하는데?’ ‘빵 주시옵소서. 잘되게 하옵소서.’ ‘그거 왜 달라 하는데?’ ‘제가 평소의 소망이었습니다.’ 그런 것은 혈육에 속하는 거죠.

그러면 십자가 사건 이후에 기도의 내용은 어디에 나와 있습니까? 성경 전체에 나와 있습니다. ‘주여! 돈을 사랑하는 게 일만의 악의 뿌리라고 합니다. 돈을 사랑하지 않게 하옵소서. 입는 것, 먹는 것으로 족한 줄 알게 하옵소서.’ 입에 담기 힘든 기도이지만 ‘그 나라 의를 구하게 하옵소서. 자기를 부인하고 우리 십자가를 지고 가게 하옵소서.’ 그것 위해서 안수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늘나라가 이 땅에 증거 되게 하옵소서. 그리고 우리가 넓은 길로 가지 말게 하옵시고, 우리는 성경 말씀대로 좁은 길로 가게 하옵소서. 한번 죽는 것은 정한 거고 그 뒤에 심판이 있다는 것을 늘 느끼면서 살게 하옵소서.’

이거 기도하려면 3박 4일 가지고도 모자라요. 성경 창세기부터 다 해야 하니까……. 그런데 저의 강의 듣고 난 뒤에 공통적인 게 뭐냐 하면 ‘목사님, 기도할게 뚝 끊어졌어요.’ 기도할 게 없데요. 이쪽 혈육에서는 주인공이 누구죠? 내가 주인공이에요. 경주 이 씨 내가 주인공이에요. 그런데 십자가 사건의 주인공이 누굽니까? 나는 하나의 작품, 모델이 되니까 누가 주인공입니까? 십자가 사건을 일으킨 예수님이 주인공이 됩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십자가 사건을 여기 밑에 있는 혈육의 사건에 삽입시키고 개입시키고 관여한 사건이 벌여지는데 그 사건이 뭐냐 여기 십자가에 있던 하나님의 저주를 예수님께만 주어지는 게 아니고 이제부터는 모든 인간에게 다 저주가 주어지는 일들이 벌어집니다. 한 사람이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고린도후서 5장 14절 말씀에 나오죠.

고후 5: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살았냐? 그것은 너의 착각이다. 네가 걸어 다닌다고? 네가 죽은 채로 걸어 다닌다. 걸어 다니는 시체가 되는 겁니다. 네가 야구를 잘한다고? 박지성이가 축구를 잘한다고? 축구 잘하는 죽은 자, 박지성 …….

개그콘서트를 잘 안 보는데 왜 자주 안 보느냐 하면 그건 보고 싶어도 못 봐요. 제 아내가 이웃집 웬수 보다고 해서 보고 싶어도 못 보는데 잠시 화장실 갔을 때 얼른 딱 돌렸는데 눈치 안채게 보면 뭐가 나오냐 하면 신당동 한빛교회 권사님 찬송하는 거 나와요. 아, 죽은 자가 찬송 하는 거예요. 죽은 자의 찬송은 소용없습니다. 찬송은 하나밖에 없어요. 주님을 닮은 어린양이란 찬양 밖에 없어요. 내가 찬송하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찬송하게 만들 때 그게 유일한 찬송입니다. 소프라노 테너 관계없어요. 주께서 내 속에 들어와서 내가 이런 인간이라는 것을 우리 주님께서 아버지 앞에 자랑스러워 할 때 그 자랑스러움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 찬송하는 그 찬송 외에 다른 찬송은 없습니다.

주님이 나를 기뻐하는 것 같이 나에 대해서도 그런 관점에서 같이 기뻐하는 찬송 외에는 없습니다. 찬송한다고 구원 받는 것 아니거든요. 시와 찬미로 찬송하라는 말이 그런 뜻이에요. 반드시 성령 안에서 예수님의 영 안에서만 이루어 져야 된다. 그것은 바로 사건 안에서……. 그럼 믿음, 소망, 사랑은 뭡니까? 우리의 혈육적인 믿음, 소망, 사람은 완전 무효가 되지요. 이것은 일체 인정이 안돼요. 이것은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인정이 안 됩니다.

이방인들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이런 걱정으로 두려워하는 거죠. 왜냐 하면 이방인의 주인이 누구입니까? 자기가 주인이고 누가 자기를 키워요? 내가 키우는 거예요. 엄마들의 자식에 대한 집념은 남편들이 학을 띠어요. 무서워요. 무서울 정도에요. 제가 어느 날 강의 했잖아요. 여자들은 참 좋겠다. 왜 자식 낳고 난 뒤에 모든 자기의 명예와 자존심은 덜렁 보자기 싸서 택배회사에 보내 버리고 자기는 망가져도 괜찮다는 겁니다. 내 자식만 잘되면 나는 충분히 망가지겠다 이 말입니다. 애가 농땡이 부려도 십리밖에 나가서 돈 한 푼 벌어서 그저 애 유학 보내고 온갖 것을 다 합니다. 이미 자기 자존심 명예는 다 자식에게 부어 놨어요. ‘나는 죽어도 좋고 너는 나의 그림이 되어서 살아라.’ 이것이 바로 엄마가 자식에 해 주는 마음입니다.

그런데 아빠는 뭡니까? 헐~ 자기 자존심을 갖다 바칠 때가 없어요. 한쪽이 들러리에요. 암사자가 새끼 보호하는 것처럼 수사자는 어슬렁어슬렁 한 잔 한 것처럼 어슬렁거리며 다니다 암사자가 ‘웩~’ 한번만 하면 ‘에고 뭐야, 낑~’하고 돌아가 버립니다. 특히 50 넘으면 나가라 하면 나갈 때가 있어야죠. 집에 기어 들어오면 “제발 좀 나가라, 나도 내 삶을 찾자! 나의 자아상을 찾자!” 하면서 내 보내면 다시 기어 들어오고……. 하여튼 남자가 50넘으면 여자가 벌고 남자는 여자가 버는 거 가지고 먹고 살아야 돼요. 최고의 사회복지가 그거에요. 돈 버는 여자 만나서 남자는 놀면서 행세하는 게 최고의 남자의 프라이드를 너무 매도하지 마세요. 그게 최고에요. 남자의 로망입니다. ㅎㅎ 무슨 이야기를 하다 희한한 이야기를 다 했네요. 엄마가 자식에 대한 집념은 예수님도 못 말릴 정도라고요. ‘차라리 내가 지옥가고 내 자식 천당 보내게 하옵소서.’ 이 정도로 강한 혈육 적이에요.  그러니까 완전히 십자가 모독 하는 거죠. 자식도 지옥가지만 너도 지옥 가……. 뭐 어머니 사랑 못 잊어? 세상에 그런 내용이 없습니다. 어머니 사랑 때문에 지옥 갈 사람이 천당 간다는 내용이 없어요. 어머니 피는 Rh+ 형이라서 안 된다니까요, 어머니 피는 지옥 갈피고 예수님 피는 천국 갈피예요. 교회는 뭐냐? 예수님의 피로 가는 것이지 엄마 피 모여서 교회 가는 것은 그것은 초등학교 어머니 모임이죠.

그래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라는 것은 새로 써야 합니다. 여기 예수님의 믿음과 예수님의 소망과 예수님의 사랑이 우리 혈육적인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차이점이 뭐냐 하면 예수님의 모든 믿음 소망 사랑은 항상 아버지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옵시고 이고 아버지의 영광이라 했어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을 영화롭게 하옵소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 나는 만들어 졌다는 것이 아버지의 뜻인데 우리는 나를 위해서 하나님이 계시고 나를 위해서 예수님이 계시고 우리 집안 잘되라고 성령님이 계십니다. 하는 쪽으로 나의 영광을 위해서 믿음 소망을 발휘하고 있어요. 이것이 어떻게 일치가 되겠어요. 안되지요.

제가 이렇게 이야기 하면 ‘목사님 말씀 다 맞습니다. 인정하는데 문제는 그렇게 해서 교인들이 교회에 오고 싶어 하겠습니까? 뭔가 복 받는 것, 건지는 것 때문에 교회에 왔는데 그런 식으로 하면 이건 뭐 건질 것도 없는데 두 번 다시 교회에 오겠어요?’안 오죠. ‘적용문제에서 크게 문제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라고 생각 할 거예요. 그것은 그 사람이 무엇을 공부한 거냐 하면 불교를 공부한 거예요. 왜 우리나라에 절이 많고 곳곳에 절이 있고 무당이 많고 굿이 있고 불교 사찰이 많은 이유가 뭐냐 하면 부처 예뻐서 간 게 아닙니다.

처음에 부처는 부처의 진리를 전하려 했지만 손님이 안 오니까 중들이 먹고 살기 위해서 부처고 뭐고 다 바꿨어요. 뭐냐 하면 옛날에 무속신앙, 다시 말해서 기도하면 복 받고 정성이면 하늘도 감동합니다. 라고 내용을 칠성님 섬기는 것으로 바꿨어요. 이거 안 바꾸면 교회 부흥 안 됩니다. 오랜만에 제가 옳은 소리해요. 교회가 칠성당으로 안 바뀌면 부흥 안돼요. 바치면 복 받고 기도하면 복 받고 목사님 설교 들으면 복 받고 ……. 이거 안 집어넣으면 교회 부흥 안 됩니다. 어떻게 목사 좋으라고, 예수 좋으라고? 아닙니다. 주고받고 하는 게 있어야 교회는 오는 거예요. 헌금한 만큼 30배 60배 남는 장사를 해야 오는 거예요. 또 그런 사람을 모셔다 간증 집회를 해야 복이 오는 거예요. 그래야 교회가 되는 겁니다.

목사가 복음 받아 들였다! 인생 끝난 거예요. 우리 김성환 목사를 만나지는 못했지만 걱정스럽습니다. 목사가 왜 복음을 받아들여요. 그것도 나이가 젊은데 나이가 60, 70 넘어서 받아들이면 재미있는 것, 해볼 것, 해 먹을 것 다 해 먹고 슬슬 천당 가면 되는데 이 젊은 때에 복음을 받아 버리니까 목회가 되지를 않잖아요. 우짤라꼬……. ㅎㅎ 주님께서 그렇게 만드신다는 겁니다. 그런데 구원받고자 복음을 받아 들였다면 그것은 아닙니다. 바른 목회하기 위해서 복음을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엉터리입니다. 그러나 다빈치가 모나리자 그리듯이 주께서 목사님을 그렇게 만들어 가신다면 그것은 그 귀한 주인공이 주님이고 그 작품 하나는 멋진 작품이죠. 스데반 집사 못지않은 멋진 작품 될 거에요. 바로 사도바울이 끝이 어떻게 되었는가! 여러분, 다 아시죠? 사도바울의 끝을……. 그래서 사도바울은 결혼해서 공주하고 잘 먹고 잘 살았다. 사도바울이 그렇게 끝납니까? 그냥 복음 전했데.……. 그렇게 끝났죠.

엘리사 같은 경우는 그냥 죽었어요. 엘리야는 폼 나게 불 수레 타고 올라갔잖아요. 여러분 천국 가는데 불 수레 타고 올라가서 폼 난다고 너무 부러워하지 마세요. 여기서 영등포역에 가는데 택시타고 가나 버스타고 가나 가면 마찬가지거든요. 천국 가는데 돌에 맞아서 가나 불 수레 타고 가나 도착하면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고 영원히 죽지 않는 산 자의 하나님이 되는데 뭐 타고 가는가는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타고 가는 그것이 두려워서 벌벌 떨지 마세요. 이래 죽으나 엎어져 죽으나 자빠져 죽으나 주님 안에서 이제 만들 만큼 만들었으니까 다 만들었으니까 이제 너는 편히 쉬어라 해서 불러줄 날이 올 거예요.

여러 번 이야기 했습니다만 지난 주일날 설교하면서 풍랑일 때 제자들이 예수님을 흔들어 깨웠잖아요. 왜 깨웁니까? 그냥 잘 됐다 하고 주님도 있으니 주님과 함께 자살하자 해서 그냥 풍랑에 빠져 죽었으면 얼마나 좋았습니까? 주와 함께 죽는 그것이 로마서 6장이 그대로 실현 되잖아요. 그런데 아직 때가 안돼서 두려워하면서 또 아까 나왔죠. 두려워하는 자에게 뭐가 임한다? 벌이 임하죠. 두려워하면서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 주께서 “왜 깨웠어? 왜 깨웠냔 말이야!”제자들이 “괜히 깨웠어, 괜히 깨웠어! 같이 죽어야 될 걸 괜히 깨웠어.” “이 믿음 없는 자야! 왜 깨웠냐 말이다!” 나와 함께 있다면 죽어도 천국이고 살아도 천국인데 왜 자꾸 너와 나를 분리시키느냐 이 말이죠. 잠자고 있으나 깨어 있으나 다 아시는데 자고 있어도 깨어 있는 거고 깨어 있어도 깨어 있는 건데 주무시지도 않고 늘 졸지도 않는데 왜 성경 말씀을 그런 식으로 해석을 못하느냐 말입니다.

그 다음에 바다를 잔잔하게 해 놓으니까 제자들이 하는 말이 “실제지만 누구시죠?” 실존 같이 “그리스도 주여!” 해 놓고서는 풍랑이 일어나 잔잔케 하니까 “저분이 누구시지?” “대단한 분이다!”여러분, 대단한 분 섬기면 안 됩니다. 진짜 대단한 것은 우리를 죽여 버리는 분이 대단한 분이고 우리의 모든 것을 뺏어가는 분이 대단한 살아계신 주님의 십자가에 재현이고 반복입니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런 차이를 두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어려운 것, 이것은 진짜 어려운데 예수님의 십자가 이루실 때까지 그냥 십자가가 창세기 1장 십자가, 이런 법은 없지요? 십자가는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에 나오잖아요. 그러니까 십자가 이전에 뭐가 있었습니까? 이스라엘의 역사가 있었죠. 이것을 사도바울에게는 역사가 이렇게 되는 것이 아니고 이것을 탁 털어서 이 밑에다 놔요. 폭이 돼요. 하나의 깊이가 돼요. 창세기부터 멸망할 때까지, 더 나아가서 십자가에 예수님 못 박으라고 외칠 때까지의 그 과정을 이스라엘이 필요 없는 것이 아니고 이제는 잊어도 되는 사건이 아니라 이것이 하나의 십자가 사건이 되어 버리면 십자가 사건은 이 전체의 역사를 인간의 역사로 보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를 위한 있어야 될 예수님의 사건이 됩니다.

역사라는 것은 사건과 사건 사이를 가지고 역사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시작이요, 나중이니까 그 사이는 모든 것이 누구의 역사가 되느냐 예수님의 역사가 됩니다.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시 물을게요. 여기 안경 낀 학생, 몇 살 때 태어났어요? 답변 곤란하지요? 자, ‘태어났다’가 사건이죠. ‘몇 살’ 하는 것은 시간이죠. 시간이 우선이 아니고 뭐가 우선입니까? 사건이 일어나고 그 다음부터 뭐가 시작돼요? 째깍째깍 역사가 되지요.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시간이 나의 역사죠. 왜? 내가 태어났으니까. 인간이 알고 있는 역사라고 하는 것은 내가 태어난 역사밖에 안됩니다.

‘이순신 장군도 알고 있는데요?’이렇게 할 거예요. 이순신 장군은 네가 초등학교 1학년 때 배웠던 일이기 때문에 네가 알고 있는 이순신 장군은 너의 역사 속에 포함이 되어 버립니다. 그 때 이순신 장군 만나도 “아저씨 누구신데요?” 하고 몰라요. 내가 알고 있는, 내가 상상하는 이순신 장군은 내가 내 과거로 조작해 내는 거예요. 내 중심으로 조작해 낸 겁니다. 그래서 수학이라는 것이 어려운거예요. 다른 미술 같은 것은 자기 개성이 나오지만 수학은 모든 개성을 일체 인정하지 않아요. 3+8=11인데 자기는 12를 써 넣는 거예요. “너 왜 12 써 넣었냐?” “나의 개성이니까!” 이것은 개성이 아니고 틀렸다는 거죠.

그래서 수학이라든지 과학이 그렇게 냉정한 이유는 일체의 모든 역사와 모든 개성을 말살해 버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수학과 과학을 진리라고 해요. 진리라서 과학도 신앙도 과학적으로 맞을 때만 진리라고 간주 할 수 있기 때문에 고고학에서 맞는 것만 성경에서 맞고 고고학에서 증거가 없는 것은 성경을 엉터리로 보는 거예요. 홍해가 갈라지는 것이 고고학에 없기 때문에 홍해도 안 갈라졌고 예수님이 십자가 진적도 없고 여리고성 무너진 것도 없고, 왜? 고고학에서 증거가 없으니까……. 다윗 있었다는 것, 그것도 없다는 거예요. 다큐멘터리에 보면 다윗이 있었다는 것은 없다. 왜? 다윗이 있었다는 증거를 고고학자들의 발표가 안됐기 때문에 없는 거다. 그러면 고고학이 뭐냐? 고고학은 과학적이기 때문에 진리다. 왜? 인간의 모든 개성과 주장과 나름대로의 종교를 모두 말살하고 오직 수치만 수학적으로만 학생들이 과학적으로 이것을 배우고 있어요.

그래서 교회에서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6일 만에 창조하시고 7일째 쉬셨다고 하니까 쫓아와서 “엄마, 우리 학교에서는 그렇게 안 배웠는데, 지구의 역사는 4십 5억년인데 어떻게 7일 만에 만들지? 왜 그런데? 어떤 게 맞는데?”이렇게 되는 거예요. “너 역사다! 너 역사 자체가 잘못된 거야! 너 역사가 혈육적인 역사다!” 그 역사는 진리를 모르기 때문에 두려움이 오고 두려움은 형벌이 오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진짜 형벌이 없는 것은 사랑과 용서, 기껏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오류가 많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 죄를 인정할 때 그 죄 뒤에 쏟아지는 예수님의 새로운 용서와 사랑이 예수님의 새로운 역사가 되는데 그 역사는 주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죽었다가 다시 사시는 역사, 이것은 우리 역사 속에 이런 경험이 없어요. 죽었다가 살아난 역사가 없습니다. 우리가 태어났다가 죽어버리면 그 다음에는 역사가 생성이 안돼요.

그 옆에 있는 안경 낀 학생은 언제 죽었지요? 말이 안 되죠. 지금 살아있으니까, 그런데 우리는 그게 성립된단 말이죠. 우리가 언제 죽었습니까? 십자가 죽었을 때 같이 죽은 거예요. ‘에이고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마요. 그런 말이 어디 있어요?’어디 있습니까?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그것이 갈라디아 편지에 있지요. 그 편지를 우리가 읽어서 사도바울과 같은 공감을 할 때 우리는 사도바울과 같은 류, 종류가 된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사도바울은 혈육적인 것과 예수님 사건과 십자가 사건과 항상 대비하면서 골로새에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그럼 해석할 때는 두 가지 다를 끄집어내야 되죠. 십자가 사건 때문에 생긴 믿음과 소망과 사랑과 그리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혈육적인 믿음 소망 사랑과 어떠한 격차가 벌어졌는가를 항상 설명하게 되면 그것을 보고 “나도 이랬는데 지금은 이렇습니다.”  라고 동감하는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서 같은 형제가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문제가 옛날 이스라엘 역사가 어떤 역사였느냐 하면 바로 십자가 못 박는 역사입니다. 인간이 신을 이깁니다. 이기고 죽이는 역사, 인간의 역사는 구원자를 죽여 버리고 이긴 역사이기 때문에 이스라엘 역사는 죄의 역사가 되고 멸망의 역사가 됩니다. 그것이 이스라엘 나라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 밑에 존재의 기반으로 수평적으로 우리 앞에 있죠. 우리 앞에 있는데 주께서 이 머리를 십자가 머리를 잡아당긴단 이 말이죠.  제가 머리를 잡아당깁니다. 잡아당기면 오겠죠. 무를 뽑으면 끝에 뭐가 보이죠? 무 뿌리가 보이겠죠. 잡아당길 때 왜 잡아당깁니까? 밑에 뭐가 보이도록? 무 뿌리가 보이도록…….

하나님의 말씀은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란 말을 왜 줬냐 하면 지키란 말이 아닙니다. ‘보자, 너의 뿌리가 어떤 뿌리냐? 돈을 사랑하는 뿌리구나!’ ‘자 이번에는 좁은 길로 가나 보자, 옳지 너는 사람들이 넓은 길로 가는 것이 진리라고 생각하는구나!’ 쭉 뽑아 보는 거예요. 모든 말씀은 날카로운 칼 같아서 우리의 골수와 모든 것을 쪼개서 벌거벗은 것처럼 다 들어내는 겁니다. ‘한번 보자, 너는 형제가 죽으라고 약을 쓰는구나! 네가 바로 살인자다.’ IMF 터지면 ‘그렇지 네가 교회 다녀도 무엇을 입을까 먹을까 만날 벌벌 떨고 있구나! 네가 바로 이방인이구나! 이방인이 따로 없구나, 참새보다 더 못한 인간아! 주께서 친히 기르신다는 데 너는 왜 참새보다 잡초보다 못하냐. 네가 나훈아한테 배워야겠구나!’

모든 성경 말씀은 우리의 머리를 잡아당겨서 우리보고 뭐를 하라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실체를 공개하는 겁니다. 깨끗하게 들어내는 겁니다. 말씀은 거울입니다. ‘거울아, 거울아 누가 예쁘냐?’ 이렇게 하지 말고 ‘거울아, 거울아 나 죄인 맞지?’ 이렇게 나와야 합니다. ‘거울아 이래서 죄인 맞지?’ 라고 성경 읽어 보세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그 다음에 뭐죠? 나에게는 뭐가 없다? 부족함이 없다고? 뭐 부족함이 없다고?ㅎㅎ 세상에 부족을 안 느끼고 살아요? 돈 천만 원 벌어봐요. 부족을 느끼지…….  여러분 성경말씀 보면서 이런 나의 죄를 들추어내는 주님께 감사합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스라엘의 뿌리를 뽑듯이 날마다 말씀으로 뽑아서 육신으로 지옥갈 수밖에 없는 우리를 사도바울처럼 용서해 주셔서, 사랑해 주셔서, 불쌍히 여겨서, 피 흘려서 구원했다는 사실을 저희들의 영원한 생명으로 느끼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0-10-20 16:41:53 녹취 : 김창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