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101008골1장3절b
전 시간 끝에 경주 이 씨 이야기를 했는데 이 씨가 혈육에 속한 것이 분명합니다. 옆집 할머니가 날 낳은 게 아니잖아요. 우리 어머니가 날 낳았어요. 분명합니다. 우리 집안은 분명히 이 씨 집안인데 우리는 태어 날 때부터 이 씨 집안이라는 혈육 안에 살고 있는데 어째서 우리가 예수 안에 있다고 성경에 그렇게 되어 있냐 이 말이죠.
‘에라 모르겠다. 무조건 믿자’ 그것은 믿는 게 아니고 믿는 척을 하고 있는 거고 이게 우리가 경주 이 씨 집인 것이 실제인 것처럼 그 이상으로 실제이어야 하는 것이 예수 안인 것입니다. 예수 안은 모호 흐리멍덩하기 이를 때 없고 내가 이 씨 집안인 것이 분명한 것 같으면 항상 사람은 교회 나와서 ‘예수 믿습니다.’ 하면서도 걸핏 하면 어디로 되돌아오겠어요? 역시 나는 이 씨 집안이야 하면서 돌아올 것이 뻔하다 이 말입니다.
개를 아무리 침대에 키워도 개는 개입니다. 아무리 예쁜 옷을 입혀놓아도 앙드레김 옷을 입혀놓아도 개는 개일뿐입니다. 사람 되는 법이 없습니다. 그런데 개한테 ‘너는 사람이다.’ 하면 개가 사료 더 주니까 개는 ‘응’ 할 겁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 예수 사람 맞습니다.’ 하면 개처럼 ‘예, 맞습니다.’ 해 놓고 여전히 진짜 현실은 예수 안은 추상이고 관념이고 여전히 나는 이 씨 집안 맞아 때려죽여도 맞아 이렇게 버틴다면 그것이 무슨 사도 바울의 편지를 이해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만화책 본다고 구원되는 것 아니거든요. 그러나 성경책 보면 구원이 되어야 하죠. 성경책 봐도 구원이 안 되면 그것은 만화책 보는 것과 다를 봐 없습니다. 교체가 일어나야 합니다. 이 씨 집안에서, 혈육의 집안에서 교체가 일어나야 하는데 혈육의 반대말은 뭐가 있냐? 분명히 우리 아버지 어머니가 나를 낳았다는 것, 어느 동, 논현동 순풍산부인과에서 15년 전에 분명히 날 낳았다는 분명한 이 현실, 혈육이라는 그것의 반대말이 뭐냐? 육에 속하면 구원이 안 되고 육에 속하면 육으로 끝나니까 하늘나라는 다시 태어난다고 할 때 니고데모가 분명히 현실, 실제를 예상한 거예요.
실제로 나는 엄마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에 다시 태어난다면 엄마 몸에서 태어 난 그것만이 실제다 이 말입니다. 다른 것은 가상이고 말장난에 불과 한 거예요. 다시 태어나야 하늘나라 볼 수 있다면 그 다시 태어 난 장소는 내가 태어 난 장소에서 두 번 다시 태어나면 그 외에는 비현실이 되는 거예요. 우리 말 똑바로 합시다. 맞잖아요. 니고데모 말이 맞다 이 말이죠. 분명히 맞는 말이란 말이죠. 어떻게 내가 엄마에서 다시 태어 날 수 있습니까? 한 말이 그게 정당한 말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육으로 난 것은 천번 만번 태어나도 육이고 다른 말로 하면 개는 백날 태어나도 개고 네가 영으로 태어나야 한다 하니까 니고데모가 헐~ 성경에는 안 나오지만 헐~ 이런 무슨 뚱딴지같은……. 그러니까 주님께서 눈치로 알고 네가 영으로 태어나는 것을 잘 모르는 모양인데 못 알아먹는 게 아니죠. 그것이 관념적이고 비현실적이라서 답답한 것이죠. 영으로 태어난다는 말은 누구나 내 뱉을 수 있어요. 점쟁이라도 그럴 수 있어요. “아하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구나!” 그런 말은 한두 번씩 할 수 있다 이 말이죠. 그게 문제가 아니고 육이 진짜로 내 육이, 손마디가 진짜 육이듯이 영도 육 이상으로 진짜 감이 실제로 감각으로 와 닿아야 된다는 말이죠. 그냥 모호하게 흐리멍덩하게 하면 안돼요. 그래서 둘 다 동일하게 실제이기 때문에 “나는 두 번 다시 내 육을 찬양하지 않겠다.” 이렇게 되어야 돼요.
실제 그렇게 된 사람이 오순절 날 열두제자가 성령 받고 난 뒤에 실제로 되었잖아요. 그러니까 스데반 집사가 성령 받고 실제로 자기의 흙에 속한 것은 돌에 맞아 흙으로 돌려보내 버리고 진짜 몸은 예수님을 영접해 하늘나라에 살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그런 것을 고려하지 않으면 성경은 소설이고 드라마에요. 이건 그냥 재미있으라고 위로삼아 보는 거고 무협지 보다 더 못해요. 무협지 보면 성경에 홍해 갈라지는 것 보다 많이 갈라졌어요. 혈육의 반대가 뭐냐 하면 이문제입니다.
지금까지 나온 것 중에 제일 어려운 겁니다. 제가 예를 들겠습니다. 젓가락 반대가 뭐에요? 젓가락의 반대말은 1번 숟가락, 2번 연탄 몇 번입니까? 애가 밥을 먹는데 밥은 숟가락으로 먹어야 되는데 젓가락으로 하니까 엄마가 “얘야 젓가락으로 먹지 말아야지” “엄마, 젓가락으로 먹지 않으면 뭐로 먹어야 돼? 젓가락의 반대가 뭔데?” 보통은 젓가락 반대가 뭡니까? 젓가락의 반대는 숟가락이죠. 그러면 밥은 젓가락으로 먹어서는 안 되는 거예요. 그런데 연탄은 반대말이 되느냐? 안 되느냐? 밥은 숟가락으로 먹되 국수는 연탄가지고 먹습니까? 젓가락으로 먹잖아요. 그러니까 젓가락이 아닌 것은 숟가락도 젓가락이 아니고 연탄도 젓가락이 아니고 기차도 젓가락이 아니고 빌딩도 젓가락이 아니고 여기는 무수한 반대말은 아니지만 젓가락이 아닌 것은 여기 수두룩이 있지요? 제가 예를 든 게 더 어려워요. ㅎㅎ
혈육의 반대말이라고 할 때 우리는 혈육이 아닌 것들을 죽 나열했어요. 해바라기도 있고 참새도 있고 빌딩도, 자동차도 혈육이 아니잖아요. 혈육이 아닌 것들이 많이 있잖아요. “그래서 혈육은 지옥 가는 거야!”라고 고발 할 수 있는 혈육의 반대말은 뭐냐 이 말이죠. 그것은 혈육으로는 도저히 못 가는데 천국에 유일하게 갔던 것만이 혈육의 반대말이 됩니다.
이 감격! 성경을 볼 때 혈육의 반대를 보통 영이라 합니다. 이게 뭔가 틀렸어요. 혈육이라는 것은, 혈육이라는 존재가 있잖아요. 내가 있잖아요. 난 누구한테서 태어났어요? 부모에게서 태어났어요. 부모의 혈육에서 태어났어요. 부모의 DNA에서 내가 태어났다. 혈육은 존재다 이 말이죠. 그런데 혈육의 반대말이 영이라면 영은 뭐가 되느냐 영은 존재로서의 영이 되어야 된다 이 말이죠. 전기 있듯이 영이 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성경은 그렇게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혈육의 반대말은 사건이에요. 무슨 사건이냐 하면 십자가 사건입니다. 만약의 혈육의 반대가 영이 된다면 사람들이 혈육을 떠나서 영이 되려고 애쓸 거예요. 이렇게 되어 버리면 뭐가 문제가 되느냐 하면 혈육적인 존재는 영만 된다면 구원받을 수 있다는 희망을 혈육이 감히 먼저 갖게 돼요. 그런데 아까 제가 뭐라 했습니까? 우리는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우리는 구원 받을 자격도 없고 구원받아서도 안 되고, 왜? 혈육이니까 우리는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지옥 가는 것이 마땅해야 되죠.
지옥가야 할 마땅한 인간이 은근히 이렇게 생각해요. “나는 지옥가야 마땅합니다. 말을 함으로서 나를 천국 넣는데 봐주세요. 아이고, 좀 넣어 주세요. 나는 지옥가야 마땅하잖아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알잖아요. 그러니까 나같이 아는 사람은 천국 넣어주세요. 눈감고 넣어달라니까” 은근히 자기가 천국 가고 싶다는 속내를 욕망을 갖추고 있는 혈육이 되지요. 그런 혈육의 반대말이 영이 된다면 이 영은 욕심을 품고 있는, 구원 욕심을 가지고 있는 영이 되는 겁니다.
이 영은 혈육의 영이 되면 안 되고 십자가 사건에서 나온 예수님의 영이 돼야 되는 겁니다. 그래서 혈육의 반대말은 십자가 사건이 되는 겁니다. 제가 어린아이들이 안다고 기대 안 합니다. 이거는 종용이 집에 가서 아빠 엄마에게 배우세요. 혹시 관심 있거든……. “엄마, 아까 목사님이 숟가락의 반대말이 연탄 이게 뭔 말인지 모르겠다.” 하면서…….
숟가락을 젓가락에 의미를 주는 것은 연탄도 안 되고 오직 숟가락만 될 때 숟가락 아닌 젓가락이 되는 거예요. 그러나 숟가락의 반대말이 젓가락도 있을 것이고 바다도 있을 것이고 해초도 있을 것이고 오징어도 있을 거다 말이죠. 하지만 왜 숟가락의 반대가 젓가락이냐? 그것은 숟가락의 의미를 들어내기 위해서 젓가락이 못하는데 같은 수저지만 젓가락이 못하는데 숟가락이 한다. 숟가락이 못하는데 젓가락이 한다. 서로 같이 짝을 맞춰야 의미가 피어나는 겁니다.
그래서 목적이 뭐냐? 십자가 사건을 위하여 우리는 왜 구원 되어서는 안 되는가? 또는 십자가 사건 때문에 왜 우리는 구원되기 싫더라도 천국 가기 싫더라도 왜 우리는 꼭 강제로 천국 가야만 하는가?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이 되는 거예요. 아까 모나리자 이야기 했죠. 모나리자가 어떤 설에 의하면 귀족 부인이라고 하는데 모나리자가 이렇게 미소 지으면서 앉아 있다 이 말이죠. 다빈치가 아줌마 오랜 시간 10시간 걸리니까 앉아 있어야 하니까 그렇게 있어요. 아줌마가 앉아서 미소 짓고 있는데 전화가 와서 전화를 받고 다시 앉으면 “아, 아니에요. 구도 다시” 이렇게 하잖아요. 그러면 짜증나잖아요. “에이, 치워버려라!”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그 모나리자를 누가 그린 거예요. 분명히 다빈치가 그렸지만 누가 협조했어요? 귀족부인 모나리자가 협조 안하면 그림이 안 되잖아요. 그렇죠?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를 천국 가는 작품을 만들 때 우리는 자꾸 내가 천국 가고자 하는 내 의지가 그 협조용으로 보탬이 된다고 오해를 하는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게 되면 예수님하고 우리하고 합작해서 천국 가는 데 도움 되는 게 되잖아요. 세상에 그런 법은 없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보고 지옥 간다. 너는 화로다 망하게 되었다. 왜 그렇게 했느냐 하면 모나리자는 생긋이 웃지만 주님께서는 우리를 죽여 버렸다 이 말이죠. 죽여 놓고 없는데서 있게 하시고 죽은데서 살려 낼 때 그 작품은 온전히 누구 사건의 공로만 높이겠습니까? 십자가의 사건만 용서와 사랑의 이름으로 온 몸, 온 조각조각 하나하나가 전부다 사랑이고 용서의 흔적들로 덥히게 될 때, 그 때만 하늘의 천사가 문 열어주고 “누구신지?” “예수 안에서” “오, 들어와 통과” 통과가 되어서 면류관도 주님 앞에 반환하는 겁니다.
그래서 종교 생활하는 사람들이 지옥 가는 이유가 거기 있습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이 지옥 가는 이유가 거기 있습니다. 예수를 믿어야 되는 데 예수는 안 믿고 내가 교회 다녔다는 것을 하나의 학원 다니듯이 여러 가지 일 하는 중에 교회 다니는 것도 보탬으로 말미암아 이거는 살아 있을 때 필요한 거고 죽을 때는 보험 들어 놓듯이 예수 믿었으니까 천국 간다. 여전히 예수 안에 있지 않고 자기 안에 예수를 끌어당김을 시도 하는 그러한 오류를 범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 육적인 인간의 반대말은 영적인 인간이 되는 것이 아니고 육적인 인간의 반대말은 영적인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의 행함은 부정당하고 예수님의 하신 일만 믿어야 되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요한복음 3장에서 “네가 영의 일을 모르느냐?” 라고 나온 뒤의 이야기가 누구 이야기 입니까? 모세의 지팡이가 들린 것 같이 내가 들려야 된다. 들려야 된다는 말은 주저앉았다 이 말입니다. 완전히 죽어 버렸다 이 말입니다. 죽었기 때문에 들려야 되는 거예요. 모세의 지팡이는 그냥 홍해 갈라질 때 잠깐 가져온 게 아닙니다. 놋뱀 따라온 게 아니고 반드시 무슨 사건 이후에 놋뱀이었습니까? 죽는 사건, 백성이 죽는 사건 이후에 놋뱀이죠. 죽음 사건 이후에 들림이 있습니다.
그 뒤에 나오는 유명한 말이 “하나님이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 말은 뭐냐,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자기 손으로 죽였으니” 하나님의 아들이 죽었다는 그것 때문에 우리가 작품으로 있어야 된다고 인정하는 사람은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리라 그 영생은 누구의 영생이었습니까? 우리 영생이 아니고 예수님의 영생이 예수 안에 있는 우리에게 주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은 세상을 심판하러 오셨다 이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요한복음이라면 이 요한복음을 사도바울에게 그대로 적용시켜 봅시다. 예수님과 니고데모의 대화를 사도바울에게 그대로 적용 시켜야 됩니다. 적용시켜야 하는 이유는 아까 제가 이야기 했죠. 사도바울을 죄 많은 스데반 집사를 죽일 때 동참했던 사울이라는 사람을 사도로 만들었던 그 방법이 그대로 오늘날 우리에게 나타나야 구원되는데 과연 나타나는지 안 나타나는지 우리가 어떻게 확인하느냐 하면 이 편지에 나타난 사도바울이 구원받는 방법에 동의 한다면 그 사람은 똑같은 성령을 받은 사람입니다.
성령을 받게 되면 성령 받은 사람이란 것에 의미를 두는 게 아니고 내가 영적 존재가 된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십자가 사건이 중요한 겁니다. 다시 이야기 합니다. 영혼의 반대말은 영적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고 영적 내가 되는 것이 아니고 나의 혈육의 반대말은 십자가 사건이다. 나는 십자가 사건 앞에서 나는 완전히 부정당해야 되기 때문에 영적 존재라는 것 역시 우리는 기대하지 말고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때문에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겁니다. 이 새로운 피조물은 예수님의 사건을 보여주기 위한 새로운 피조물이지 내가 살았다 하는 것을 자랑하는 새로운 피조물이 아닙니다.
사도바울은 어떻게 구원 받았는가? 3절 보겠습니다.
골 1:3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감사하노라 골 1: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너희의 믿음과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을 들음이요 골 1:5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둔 소망을 인함이니 곧 너희가 전에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들은 것이라
여기에 예수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나옵니다. 그것이 믿음과 사랑과 소망, 4절 5절 보면 그 세 가지가 나오지요. 예수 안에는 무엇이 풍성하게 장만되어 있다고 했어요? 믿음과 소망과 사랑 또는 사랑과 믿음과 소망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사랑과 믿음과 소망이 어디 안에 있습니까? 누구에게 편지 하는 겁니까?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 편지 한다고 했죠. 그런데 예수 안에 있다는 자는 방금 전에 제가 얘기 했죠. 예수 안에 있는 자는 무슨 사건 안에 있다 했죠. 십자가 사건에 의해서 예수 안이 벌어졌고 예수 안에서 믿음과 사랑과 소망이 일어나는 겁니다.
이것은 평평했던 땅에서 마그마가 밑에서 올라옵니다. 멘탈에서 올라오는 마그마가 강력한 6천개 여러 가지가 올라옵니다. 올라오다가 드디어 약한 지반에서 균열이 우리말로 이야기 하면 틈이죠. 틈이 생겨서 폭발해 버리죠. 뻥 하고 구멍이 뚫리면서 밑에 있던 것이 퇴전 물로 쌓이겠죠. 용암이 흘러나오고 난리 났습니다. 큰 화산이 구멍이 있고 구멍 사이로 비오면 백두산 천지처럼 화산이 터졌다 이 말입니다. 화산이 터졌으니까 여기 밑에 예수 안이라는 영이 생겼는데 예수 안은 반드시 무슨 사건이 있어야 한다 했습니까? 십자가 폭발 사건이 있어야 합니다.
자, 이제부터 사건이 뭐냐 하는 겁니다. 사건이라고 하는 것은 사건 이전에 알았던 모든 것과 공통점이 없는 것을 사건이라고 합니다.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예상했던 것, 기대 했던 것이 전혀 포함이 안 되는 것이 사건입니다. 광주사건, 무슨 사건……. 이것은 사람이 어떤 물건이 있으면 이름을 붙여서 그것을 이미 자기가 알고 있는 세상 안으로 배치를 합니다.
여기에 포도가 있고 여기는 석수라는 물이 있고 아까 먹은 비타500이 있습니다. 제가 한눈 판 사이에 막걸리가 생겨 버렸다. 그것은 뭐가 됩니까? 그것을 가지고 사건이라고 합니다. 왜 사건이라고 하느냐 하면 내가 아까 봤을 때 이 자리에 막걸리가 없었는데 한눈 판 사이에 막걸리가 생겼으니까 이것을 가지고 전에 알고 있었던 것과 관계없이 돌출된 거예요. 전에 알고 있던 원인과 결과란 고리가 없이 ‘아마 이쯤 되면 막걸리가 생길 거야’ 하면 그것은 사건이 아니에요. 왜, 미리 예상했기 때문에 ‘남북이 통일 된다’ 이것은 사건입니까? 사건 아닙니까? 그것은 사건 아닙니다. 왜? 통일을 고대하고 있으니까…….
‘울릉도 옆에 새로운 화산이 터졌습니다.’ 이건 사건이에요? 사건 아니에요? 이것은 사건이죠. 왜? 아무 조짐이 없었으니까……. 그래서 ‘911사건’ 미국에 쌍둥이 빌딩에 아랍계통의 테러범이 자폭해서 와르르 무너진 사건, 그것이 왜 사건입니까? 그것을 미리 알았으면 미리 미국이 비행기를 차단하고 빌딩에서 사람들을 나가라 했을 거예요. 그런데 아무도 몰랐죠. 그런데 폭파 했잖아요. 그게 뭐가 돼요? 사건이 되죠. 사건의 특징은 쭉 나가다가 여기서 사건이 터져 버리면 이 사건부터 새로운 역사가 다른 노선으로 새로 시작됩니다. 이쪽 노선은 폐기처분 됩니다.
제 책 ‘피’에 보면 그런 글이 나왔다고 이준씨가 인용한 게 있어요. 1945년 8월 14일인가 아침 8시 15분에 히로시마에 있는 초등학교 여학생이 숙제해서 기분 좋게 등교하고 있는데 원자폭탄이 터져버렸죠. 그러면 초등학생이 숙제하면서 갈 때, 숙제 할 때 무엇을 기대 했겠어요? 초등학생이 숙제해서 갈 때, “나는 오늘 선생님께 칭찬받고 청소당번도 면제받고 집에 가서 오늘 아침에 엄마가 떡 해 놨으니까 빨리 가서 떡 먹어야지” 하는 이 소망, 이 믿음, 이 사랑……. 이게 어떻게 돼 버려요? 원자폭탄 터져버리니까 아이가 없어져요. 아이가 없어지니까 뭐도 없어져요? 믿음, 소망, 사랑도 이 노선도 없지요? 혈육의 노선이 없지요.
그러면 십자가 사건과 다른 게 뭡니까? 십자가 사건은 모든 인간으로 하여금 나름대로의 혈육적인 기대와 소망과 사랑을 전부다 무산 시키는 것이 십자가 사건입니다. “목사님 그 이유를 대세요.” 하면 이유를 대지요. 왜, 거기에 무엇이 박혀 있어요? 예수님이 택한 백성을 대신해서 우리 대신해서 어린양이 되시니까 유월절에 죽음의 사자왔을 때 우리가 죽어야 될 아들을 대신해서 양의 피가 발리듯이 예수님이 양의 피가 돼서 아버지의 심판 앞에 지옥불 앞에 주님이 먼저 막아섰어요. 우리가 예상 했습니까? 예상 안 했습니까? 예상 안 해 버리면 뭐가 됩니까? 십자가 사건이 되죠.
십자가 사건은 새로운 역사가 되면서 밑에 있는 믿음 소망, 사랑과 연결이 됩니까? 안 됩니까? 연결이 끊어지죠. 그래서 기도 할 때 이방인처럼 중언부언 하지 마라. 무엇을 입을까 먹을까 그런 거 기도하지 마라. 그것은 이방인들이 하는 기도다. 이방인들이 하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다. ‘주시옵소서!, 주시옵소서!’ ‘뭐? 뭐 달라 하는데?’ ‘빵 주시옵소서. 잘되게 하옵소서.’ ‘그거 왜 달라 하는데?’ ‘제가 평소의 소망이었습니다.’ 그런 것은 혈육에 속하는 거죠.
그러면 십자가 사건 이후에 기도의 내용은 어디에 나와 있습니까? 성경 전체에 나와 있습니다. ‘주여! 돈을 사랑하는 게 일만의 악의 뿌리라고 합니다. 돈을 사랑하지 않게 하옵소서. 입는 것, 먹는 것으로 족한 줄 알게 하옵소서.’ 입에 담기 힘든 기도이지만 ‘그 나라 의를 구하게 하옵소서. 자기를 부인하고 우리 십자가를 지고 가게 하옵소서.’ 그것 위해서 안수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늘나라가 이 땅에 증거 되게 하옵소서. 그리고 우리가 넓은 길로 가지 말게 하옵시고, 우리는 성경 말씀대로 좁은 길로 가게 하옵소서. 한번 죽는 것은 정한 거고 그 뒤에 심판이 있다는 것을 늘 느끼면서 살게 하옵소서.’
이거 기도하려면 3박 4일 가지고도 모자라요. 성경 창세기부터 다 해야 하니까……. 그런데 저의 강의 듣고 난 뒤에 공통적인 게 뭐냐 하면 ‘목사님, 기도할게 뚝 끊어졌어요.’ 기도할 게 없데요. 이쪽 혈육에서는 주인공이 누구죠? 내가 주인공이에요. 경주 이 씨 내가 주인공이에요. 그런데 십자가 사건의 주인공이 누굽니까? 나는 하나의 작품, 모델이 되니까 누가 주인공입니까? 십자가 사건을 일으킨 예수님이 주인공이 됩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십자가 사건을 여기 밑에 있는 혈육의 사건에 삽입시키고 개입시키고 관여한 사건이 벌여지는데 그 사건이 뭐냐 여기 십자가에 있던 하나님의 저주를 예수님께만 주어지는 게 아니고 이제부터는 모든 인간에게 다 저주가 주어지는 일들이 벌어집니다. 한 사람이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고린도후서 5장 14절 말씀에 나오죠.
고후 5: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살았냐? 그것은 너의 착각이다. 네가 걸어 다닌다고? 네가 죽은 채로 걸어 다닌다. 걸어 다니는 시체가 되는 겁니다. 네가 야구를 잘한다고? 박지성이가 축구를 잘한다고? 축구 잘하는 죽은 자, 박지성 …….
개그콘서트를 잘 안 보는데 왜 자주 안 보느냐 하면 그건 보고 싶어도 못 봐요. 제 아내가 이웃집 웬수 보다고 해서 보고 싶어도 못 보는데 잠시 화장실 갔을 때 얼른 딱 돌렸는데 눈치 안채게 보면 뭐가 나오냐 하면 신당동 한빛교회 권사님 찬송하는 거 나와요. 아, 죽은 자가 찬송 하는 거예요. 죽은 자의 찬송은 소용없습니다. 찬송은 하나밖에 없어요. 주님을 닮은 어린양이란 찬양 밖에 없어요. 내가 찬송하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찬송하게 만들 때 그게 유일한 찬송입니다. 소프라노 테너 관계없어요. 주께서 내 속에 들어와서 내가 이런 인간이라는 것을 우리 주님께서 아버지 앞에 자랑스러워 할 때 그 자랑스러움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 찬송하는 그 찬송 외에 다른 찬송은 없습니다.
주님이 나를 기뻐하는 것 같이 나에 대해서도 그런 관점에서 같이 기뻐하는 찬송 외에는 없습니다. 찬송한다고 구원 받는 것 아니거든요. 시와 찬미로 찬송하라는 말이 그런 뜻이에요. 반드시 성령 안에서 예수님의 영 안에서만 이루어 져야 된다. 그것은 바로 사건 안에서……. 그럼 믿음, 소망, 사랑은 뭡니까? 우리의 혈육적인 믿음, 소망, 사람은 완전 무효가 되지요. 이것은 일체 인정이 안돼요. 이것은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인정이 안 됩니다.
이방인들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이런 걱정으로 두려워하는 거죠. 왜냐 하면 이방인의 주인이 누구입니까? 자기가 주인이고 누가 자기를 키워요? 내가 키우는 거예요. 엄마들의 자식에 대한 집념은 남편들이 학을 띠어요. 무서워요. 무서울 정도에요. 제가 어느 날 강의 했잖아요. 여자들은 참 좋겠다. 왜 자식 낳고 난 뒤에 모든 자기의 명예와 자존심은 덜렁 보자기 싸서 택배회사에 보내 버리고 자기는 망가져도 괜찮다는 겁니다. 내 자식만 잘되면 나는 충분히 망가지겠다 이 말입니다. 애가 농땡이 부려도 십리밖에 나가서 돈 한 푼 벌어서 그저 애 유학 보내고 온갖 것을 다 합니다. 이미 자기 자존심 명예는 다 자식에게 부어 놨어요. ‘나는 죽어도 좋고 너는 나의 그림이 되어서 살아라.’ 이것이 바로 엄마가 자식에 해 주는 마음입니다.
그런데 아빠는 뭡니까? 헐~ 자기 자존심을 갖다 바칠 때가 없어요. 한쪽이 들러리에요. 암사자가 새끼 보호하는 것처럼 수사자는 어슬렁어슬렁 한 잔 한 것처럼 어슬렁거리며 다니다 암사자가 ‘웩~’ 한번만 하면 ‘에고 뭐야, 낑~’하고 돌아가 버립니다. 특히 50 넘으면 나가라 하면 나갈 때가 있어야죠. 집에 기어 들어오면 “제발 좀 나가라, 나도 내 삶을 찾자! 나의 자아상을 찾자!” 하면서 내 보내면 다시 기어 들어오고……. 하여튼 남자가 50넘으면 여자가 벌고 남자는 여자가 버는 거 가지고 먹고 살아야 돼요. 최고의 사회복지가 그거에요. 돈 버는 여자 만나서 남자는 놀면서 행세하는 게 최고의 남자의 프라이드를 너무 매도하지 마세요. 그게 최고에요. 남자의 로망입니다. ㅎㅎ 무슨 이야기를 하다 희한한 이야기를 다 했네요. 엄마가 자식에 대한 집념은 예수님도 못 말릴 정도라고요. ‘차라리 내가 지옥가고 내 자식 천당 보내게 하옵소서.’ 이 정도로 강한 혈육 적이에요. 그러니까 완전히 십자가 모독 하는 거죠. 자식도 지옥가지만 너도 지옥 가……. 뭐 어머니 사랑 못 잊어? 세상에 그런 내용이 없습니다. 어머니 사랑 때문에 지옥 갈 사람이 천당 간다는 내용이 없어요. 어머니 피는 Rh+ 형이라서 안 된다니까요, 어머니 피는 지옥 갈피고 예수님 피는 천국 갈피예요. 교회는 뭐냐? 예수님의 피로 가는 것이지 엄마 피 모여서 교회 가는 것은 그것은 초등학교 어머니 모임이죠.
그래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라는 것은 새로 써야 합니다. 여기 예수님의 믿음과 예수님의 소망과 예수님의 사랑이 우리 혈육적인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차이점이 뭐냐 하면 예수님의 모든 믿음 소망 사랑은 항상 아버지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옵시고 이고 아버지의 영광이라 했어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을 영화롭게 하옵소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 나는 만들어 졌다는 것이 아버지의 뜻인데 우리는 나를 위해서 하나님이 계시고 나를 위해서 예수님이 계시고 우리 집안 잘되라고 성령님이 계십니다. 하는 쪽으로 나의 영광을 위해서 믿음 소망을 발휘하고 있어요. 이것이 어떻게 일치가 되겠어요. 안되지요.
제가 이렇게 이야기 하면 ‘목사님 말씀 다 맞습니다. 인정하는데 문제는 그렇게 해서 교인들이 교회에 오고 싶어 하겠습니까? 뭔가 복 받는 것, 건지는 것 때문에 교회에 왔는데 그런 식으로 하면 이건 뭐 건질 것도 없는데 두 번 다시 교회에 오겠어요?’안 오죠. ‘적용문제에서 크게 문제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라고 생각 할 거예요. 그것은 그 사람이 무엇을 공부한 거냐 하면 불교를 공부한 거예요. 왜 우리나라에 절이 많고 곳곳에 절이 있고 무당이 많고 굿이 있고 불교 사찰이 많은 이유가 뭐냐 하면 부처 예뻐서 간 게 아닙니다.
처음에 부처는 부처의 진리를 전하려 했지만 손님이 안 오니까 중들이 먹고 살기 위해서 부처고 뭐고 다 바꿨어요. 뭐냐 하면 옛날에 무속신앙, 다시 말해서 기도하면 복 받고 정성이면 하늘도 감동합니다. 라고 내용을 칠성님 섬기는 것으로 바꿨어요. 이거 안 바꾸면 교회 부흥 안 됩니다. 오랜만에 제가 옳은 소리해요. 교회가 칠성당으로 안 바뀌면 부흥 안돼요. 바치면 복 받고 기도하면 복 받고 목사님 설교 들으면 복 받고 ……. 이거 안 집어넣으면 교회 부흥 안 됩니다. 어떻게 목사 좋으라고, 예수 좋으라고? 아닙니다. 주고받고 하는 게 있어야 교회는 오는 거예요. 헌금한 만큼 30배 60배 남는 장사를 해야 오는 거예요. 또 그런 사람을 모셔다 간증 집회를 해야 복이 오는 거예요. 그래야 교회가 되는 겁니다.
목사가 복음 받아 들였다! 인생 끝난 거예요. 우리 김성환 목사를 만나지는 못했지만 걱정스럽습니다. 목사가 왜 복음을 받아들여요. 그것도 나이가 젊은데 나이가 60, 70 넘어서 받아들이면 재미있는 것, 해볼 것, 해 먹을 것 다 해 먹고 슬슬 천당 가면 되는데 이 젊은 때에 복음을 받아 버리니까 목회가 되지를 않잖아요. 우짤라꼬……. ㅎㅎ 주님께서 그렇게 만드신다는 겁니다. 그런데 구원받고자 복음을 받아 들였다면 그것은 아닙니다. 바른 목회하기 위해서 복음을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엉터리입니다. 그러나 다빈치가 모나리자 그리듯이 주께서 목사님을 그렇게 만들어 가신다면 그것은 그 귀한 주인공이 주님이고 그 작품 하나는 멋진 작품이죠. 스데반 집사 못지않은 멋진 작품 될 거에요. 바로 사도바울이 끝이 어떻게 되었는가! 여러분, 다 아시죠? 사도바울의 끝을……. 그래서 사도바울은 결혼해서 공주하고 잘 먹고 잘 살았다. 사도바울이 그렇게 끝납니까? 그냥 복음 전했데.……. 그렇게 끝났죠.
엘리사 같은 경우는 그냥 죽었어요. 엘리야는 폼 나게 불 수레 타고 올라갔잖아요. 여러분 천국 가는데 불 수레 타고 올라가서 폼 난다고 너무 부러워하지 마세요. 여기서 영등포역에 가는데 택시타고 가나 버스타고 가나 가면 마찬가지거든요. 천국 가는데 돌에 맞아서 가나 불 수레 타고 가나 도착하면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고 영원히 죽지 않는 산 자의 하나님이 되는데 뭐 타고 가는가는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타고 가는 그것이 두려워서 벌벌 떨지 마세요. 이래 죽으나 엎어져 죽으나 자빠져 죽으나 주님 안에서 이제 만들 만큼 만들었으니까 다 만들었으니까 이제 너는 편히 쉬어라 해서 불러줄 날이 올 거예요.
여러 번 이야기 했습니다만 지난 주일날 설교하면서 풍랑일 때 제자들이 예수님을 흔들어 깨웠잖아요. 왜 깨웁니까? 그냥 잘 됐다 하고 주님도 있으니 주님과 함께 자살하자 해서 그냥 풍랑에 빠져 죽었으면 얼마나 좋았습니까? 주와 함께 죽는 그것이 로마서 6장이 그대로 실현 되잖아요. 그런데 아직 때가 안돼서 두려워하면서 또 아까 나왔죠. 두려워하는 자에게 뭐가 임한다? 벌이 임하죠. 두려워하면서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 주께서 “왜 깨웠어? 왜 깨웠냔 말이야!”제자들이 “괜히 깨웠어, 괜히 깨웠어! 같이 죽어야 될 걸 괜히 깨웠어.” “이 믿음 없는 자야! 왜 깨웠냐 말이다!” 나와 함께 있다면 죽어도 천국이고 살아도 천국인데 왜 자꾸 너와 나를 분리시키느냐 이 말이죠. 잠자고 있으나 깨어 있으나 다 아시는데 자고 있어도 깨어 있는 거고 깨어 있어도 깨어 있는 건데 주무시지도 않고 늘 졸지도 않는데 왜 성경 말씀을 그런 식으로 해석을 못하느냐 말입니다.
그 다음에 바다를 잔잔하게 해 놓으니까 제자들이 하는 말이 “실제지만 누구시죠?” 실존 같이 “그리스도 주여!” 해 놓고서는 풍랑이 일어나 잔잔케 하니까 “저분이 누구시지?” “대단한 분이다!”여러분, 대단한 분 섬기면 안 됩니다. 진짜 대단한 것은 우리를 죽여 버리는 분이 대단한 분이고 우리의 모든 것을 뺏어가는 분이 대단한 살아계신 주님의 십자가에 재현이고 반복입니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런 차이를 두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어려운 것, 이것은 진짜 어려운데 예수님의 십자가 이루실 때까지 그냥 십자가가 창세기 1장 십자가, 이런 법은 없지요? 십자가는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에 나오잖아요. 그러니까 십자가 이전에 뭐가 있었습니까? 이스라엘의 역사가 있었죠. 이것을 사도바울에게는 역사가 이렇게 되는 것이 아니고 이것을 탁 털어서 이 밑에다 놔요. 폭이 돼요. 하나의 깊이가 돼요. 창세기부터 멸망할 때까지, 더 나아가서 십자가에 예수님 못 박으라고 외칠 때까지의 그 과정을 이스라엘이 필요 없는 것이 아니고 이제는 잊어도 되는 사건이 아니라 이것이 하나의 십자가 사건이 되어 버리면 십자가 사건은 이 전체의 역사를 인간의 역사로 보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를 위한 있어야 될 예수님의 사건이 됩니다.
역사라는 것은 사건과 사건 사이를 가지고 역사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시작이요, 나중이니까 그 사이는 모든 것이 누구의 역사가 되느냐 예수님의 역사가 됩니다.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시 물을게요. 여기 안경 낀 학생, 몇 살 때 태어났어요? 답변 곤란하지요? 자, ‘태어났다’가 사건이죠. ‘몇 살’ 하는 것은 시간이죠. 시간이 우선이 아니고 뭐가 우선입니까? 사건이 일어나고 그 다음부터 뭐가 시작돼요? 째깍째깍 역사가 되지요.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시간이 나의 역사죠. 왜? 내가 태어났으니까. 인간이 알고 있는 역사라고 하는 것은 내가 태어난 역사밖에 안됩니다.
‘이순신 장군도 알고 있는데요?’이렇게 할 거예요. 이순신 장군은 네가 초등학교 1학년 때 배웠던 일이기 때문에 네가 알고 있는 이순신 장군은 너의 역사 속에 포함이 되어 버립니다. 그 때 이순신 장군 만나도 “아저씨 누구신데요?” 하고 몰라요. 내가 알고 있는, 내가 상상하는 이순신 장군은 내가 내 과거로 조작해 내는 거예요. 내 중심으로 조작해 낸 겁니다. 그래서 수학이라는 것이 어려운거예요. 다른 미술 같은 것은 자기 개성이 나오지만 수학은 모든 개성을 일체 인정하지 않아요. 3+8=11인데 자기는 12를 써 넣는 거예요. “너 왜 12 써 넣었냐?” “나의 개성이니까!” 이것은 개성이 아니고 틀렸다는 거죠.
그래서 수학이라든지 과학이 그렇게 냉정한 이유는 일체의 모든 역사와 모든 개성을 말살해 버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수학과 과학을 진리라고 해요. 진리라서 과학도 신앙도 과학적으로 맞을 때만 진리라고 간주 할 수 있기 때문에 고고학에서 맞는 것만 성경에서 맞고 고고학에서 증거가 없는 것은 성경을 엉터리로 보는 거예요. 홍해가 갈라지는 것이 고고학에 없기 때문에 홍해도 안 갈라졌고 예수님이 십자가 진적도 없고 여리고성 무너진 것도 없고, 왜? 고고학에서 증거가 없으니까……. 다윗 있었다는 것, 그것도 없다는 거예요. 다큐멘터리에 보면 다윗이 있었다는 것은 없다. 왜? 다윗이 있었다는 증거를 고고학자들의 발표가 안됐기 때문에 없는 거다. 그러면 고고학이 뭐냐? 고고학은 과학적이기 때문에 진리다. 왜? 인간의 모든 개성과 주장과 나름대로의 종교를 모두 말살하고 오직 수치만 수학적으로만 학생들이 과학적으로 이것을 배우고 있어요.
그래서 교회에서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6일 만에 창조하시고 7일째 쉬셨다고 하니까 쫓아와서 “엄마, 우리 학교에서는 그렇게 안 배웠는데, 지구의 역사는 4십 5억년인데 어떻게 7일 만에 만들지? 왜 그런데? 어떤 게 맞는데?”이렇게 되는 거예요. “너 역사다! 너 역사 자체가 잘못된 거야! 너 역사가 혈육적인 역사다!” 그 역사는 진리를 모르기 때문에 두려움이 오고 두려움은 형벌이 오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진짜 형벌이 없는 것은 사랑과 용서, 기껏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오류가 많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 죄를 인정할 때 그 죄 뒤에 쏟아지는 예수님의 새로운 용서와 사랑이 예수님의 새로운 역사가 되는데 그 역사는 주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죽었다가 다시 사시는 역사, 이것은 우리 역사 속에 이런 경험이 없어요. 죽었다가 살아난 역사가 없습니다. 우리가 태어났다가 죽어버리면 그 다음에는 역사가 생성이 안돼요.
그 옆에 있는 안경 낀 학생은 언제 죽었지요? 말이 안 되죠. 지금 살아있으니까, 그런데 우리는 그게 성립된단 말이죠. 우리가 언제 죽었습니까? 십자가 죽었을 때 같이 죽은 거예요. ‘에이고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마요. 그런 말이 어디 있어요?’어디 있습니까?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그것이 갈라디아 편지에 있지요. 그 편지를 우리가 읽어서 사도바울과 같은 공감을 할 때 우리는 사도바울과 같은 류, 종류가 된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사도바울은 혈육적인 것과 예수님 사건과 십자가 사건과 항상 대비하면서 골로새에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그럼 해석할 때는 두 가지 다를 끄집어내야 되죠. 십자가 사건 때문에 생긴 믿음과 소망과 사랑과 그리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혈육적인 믿음 소망 사랑과 어떠한 격차가 벌어졌는가를 항상 설명하게 되면 그것을 보고 “나도 이랬는데 지금은 이렇습니다.” 라고 동감하는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서 같은 형제가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문제가 옛날 이스라엘 역사가 어떤 역사였느냐 하면 바로 십자가 못 박는 역사입니다. 인간이 신을 이깁니다. 이기고 죽이는 역사, 인간의 역사는 구원자를 죽여 버리고 이긴 역사이기 때문에 이스라엘 역사는 죄의 역사가 되고 멸망의 역사가 됩니다. 그것이 이스라엘 나라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 밑에 존재의 기반으로 수평적으로 우리 앞에 있죠. 우리 앞에 있는데 주께서 이 머리를 십자가 머리를 잡아당긴단 이 말이죠. 제가 머리를 잡아당깁니다. 잡아당기면 오겠죠. 무를 뽑으면 끝에 뭐가 보이죠? 무 뿌리가 보이겠죠. 잡아당길 때 왜 잡아당깁니까? 밑에 뭐가 보이도록? 무 뿌리가 보이도록…….
하나님의 말씀은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란 말을 왜 줬냐 하면 지키란 말이 아닙니다. ‘보자, 너의 뿌리가 어떤 뿌리냐? 돈을 사랑하는 뿌리구나!’ ‘자 이번에는 좁은 길로 가나 보자, 옳지 너는 사람들이 넓은 길로 가는 것이 진리라고 생각하는구나!’ 쭉 뽑아 보는 거예요. 모든 말씀은 날카로운 칼 같아서 우리의 골수와 모든 것을 쪼개서 벌거벗은 것처럼 다 들어내는 겁니다. ‘한번 보자, 너는 형제가 죽으라고 약을 쓰는구나! 네가 바로 살인자다.’ IMF 터지면 ‘그렇지 네가 교회 다녀도 무엇을 입을까 먹을까 만날 벌벌 떨고 있구나! 네가 바로 이방인이구나! 이방인이 따로 없구나, 참새보다 더 못한 인간아! 주께서 친히 기르신다는 데 너는 왜 참새보다 잡초보다 못하냐. 네가 나훈아한테 배워야겠구나!’
모든 성경 말씀은 우리의 머리를 잡아당겨서 우리보고 뭐를 하라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실체를 공개하는 겁니다. 깨끗하게 들어내는 겁니다. 말씀은 거울입니다. ‘거울아, 거울아 누가 예쁘냐?’ 이렇게 하지 말고 ‘거울아, 거울아 나 죄인 맞지?’ 이렇게 나와야 합니다. ‘거울아 이래서 죄인 맞지?’ 라고 성경 읽어 보세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그 다음에 뭐죠? 나에게는 뭐가 없다? 부족함이 없다고? 뭐 부족함이 없다고?ㅎㅎ 세상에 부족을 안 느끼고 살아요? 돈 천만 원 벌어봐요. 부족을 느끼지……. 여러분 성경말씀 보면서 이런 나의 죄를 들추어내는 주님께 감사합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스라엘의 뿌리를 뽑듯이 날마다 말씀으로 뽑아서 육신으로 지옥갈 수밖에 없는 우리를 사도바울처럼 용서해 주셔서, 사랑해 주셔서, 불쌍히 여겨서, 피 흘려서 구원했다는 사실을 저희들의 영원한 생명으로 느끼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0-10-20 16:41:53 녹취 : 김창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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