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사도행전15강 100729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4. 5. 21. 20:11

100729 사도행전 15강, 마태복음 6강


마태복음은 산상설교에 이어 6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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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100729a행8장32절

2010-11-15 00:28:16  녹취 : 이미아


대전 7월 29일 사도행전 15강

사도행전 8장 20절에 베드로하고 시몬이라는 사람하고 대화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로마서 10장에 나오는 원칙을 보게 되면 지상에서의 구원이란 믿으면 되는데 뭘 믿는가? 눈 앞에, 코 앞에 있는 주어진 하나님의 십자가와 부활. 예수님 하신 일인데 이것을 입으로 시인하면 구원을 받는다고 나와 있습니다. 로마서 10장에 나옵니다

여기서 십자가 부활을 전할 사람이 누구냐에 대해서 로마서 10장에 보면 사도가 전하고요. 사도가 전하면은 이것이 파생되죠. 퍼진다 이 말입니다. 사도가 전하면 사도한테 많이 들었던 사람들이 있을 것 아닙니까? 그러면 사도가 전했던 이 말을 그 사람들이 또 전하게 되면 파생되어서 여기서 일반인들의 구원이 일어난다.

그런데 조건이 있죠? 이 조건은 이 원칙, 예수님의 하신 십자가 부활을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이 원칙이 사도가 다른 사람에게 전할 때도 마찬가지고 이 사람들이 다른 사람에게 전할 때도 마찬가지고 똑같은, 여기에는 예외가 없어요. 그냥 나는 들었다. 이걸로 구원이 안 되고 누가 전하든 이 사실을 듣고 믿어야 되고 믿으면 구원받는 거예요.

이것이 바로 창세기 15장, 아브라함 언약입니다. 아브라함 특징이 뭐냐? 이것이 법이 없어요. 법이 없는 대신에 믿으면 되니까. 법하고 아브라함 언약하고 차이점은 뭐냐하면 법은 본 걸로 끝나면 안 되요. 본 것을 실천 해야 되요. 그것을 교회에서는 행함이라고 하죠. 보고 아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실천에 옮겨야 되죠.

안경을 쓰라 할 때 안경을 쓰라는 말을 들었다고 해서 안경 쓴 걸로 대체가 안 됩니다. 그걸로 대신해 줄께. 이런 것은 없습니다. 안경을 써야 되요. 그런데 아브라함 언약은 이 법이 없다는 말이죠. 내가 이것을 실천해서 내 바깥에 법이 이제는 착하고 내 눈의 법으로 옮길 수 있는 법이 아브라함 법엔 없습니다.

없는 것을 가지고 믿음이라고 합니다. 굉장히 쉬워 보이죠. 일단은 쉬워 보이죠. 그런데 의인은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 하박국에 나오는데 하박국에 나오는 그 믿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무화과 나무에 소출이 없다 할지라도 너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요새 양계장의 닭들이 다 죽어 나가잖아요. 양계장의 닭들이 다 죽어 나갈지라도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내가 구원받는다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이 쉽네요. 하는데 막상 닭들이 죽어 나가고 소들이 죽어 나가면 이게 쉬운 문제가 아니란 말이죠. 쉬운 문제가 아닌 거예요. 어쨌든간에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쉽게해서 구원해 준다. 어렵게해서 구원해 준다는 것 조차도 하나님은 관심 없어요. 구원은 어렵든 쉽든 내가 구원하는 것이지 너가 쉽게 구원받고 어렵게 구원받는 그 방법은 없습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언약대로 하는데 언약에 매달려 있는 이 분을 언약의 하나님이라 합니다. 지금 제가 이야기를 이것부터 시작할려고 합니다. 언약의 하나님은 구약에서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하는데, 특수한 하나님이예요. 여호와 하나님을 더 쉽게 이야기 하면 언약을 앞장 세우고 여호와 하나님은 뒤에 숨어 있다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하나님을 볼려고 하는데 보지 마세요. 하나님은 보고 믿는 것이 아니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제시한 것을 우리가 받아 들이면서 우리가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자꾸 천국을 보여 달라고 하는데. 뭐 자꾸 보여달라. 화끈하게 느끼게 해달라 하는데 아까 양장로님께서 차타고 오면서 어느 분이 교회에서 새벽에 기도를 하는 것을 아주 실감나게 재현을 해주었어요. "주여! 주여! 만나게 해주세요. 주님을 만나게 해주세요." "여호와 아버지, 아버지는 어디 계시나이까?" 장로님이 먼저 나서셔서 좀 만나게 해주시지요.(하하하)

아까 제가 했잖아요. 사도가 전한 것을 성도가 믿고 성도는 주여 만나게 해주세요. 보여주소서. 어떻게 해달라 어디 계십니까? 하는 사람들에게 십자가 복음을 전하면 됩니다. 장로님이 가만히 있으면 안 되요. "저를 불렀습니까?" 이렇게 하면 되요. "만나고 싶다면서." "당신 말고 하나님..." 그러면 하나님은 숨어 계셔서 반드시 뭘 제시한다? 언약을 제시한다.

모세가 하나님을 만났겠습니까? 안 만났겠습니까? 하나님을 등 뒤에서..온전한 만남을 볼 수 없죠. 정면으로 못보니까. 누구든지 하나님을 정면으로 볼 수 없습니다. 그냥 수구리고 뒤편에서 봐야 되죠. 자, 그런데 숨어 있는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이라서 언약을 이렇게 내미는 반면에 인간들은 하나님을, 헬라인들은 지식을 원하고 유대인들은 기적을 원하죠. 지식과 기적을 가지고 우회해서 내가 하나님을 만나서 내가 경험한 그 하나님을 나의 구원이 하나님으로 삼을려고 시도하는 것입니다.

그 와중에서 새언약의 하나님이까. 새언약의 증표가 뭐예요? 십자가와 부활이죠. 로마서 10장에 나오니까. "죽었다가 살아난 것을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 이것은 꼭 제가 지어낸 말 같아서 제가 얼마나 욕을 얻어 먹는지 몰라요. 아버지께서 자기 아들을 죽었다가 살린 것을 너가 입으로 시인하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 로마서 10장에 나오는 말씀을 가지고 마치 십자가마을 사람들이 독점해서 어디 사람들을 꼬시기 위해서 일부러 지어낸, 특허낸 것처럼 그렇게 욕을 많이 얻어 먹어요. 왜 성경에 그것만 있나? 딴건 없나? 이런 식으로 욕을 한다 이 말이죠.

다른 것은, 디모데전서 3장 해가지고는 구원이 안 된다니까요. 말세에 "돈을 사랑하는구나." 그러면 돈을 사랑하지 않으면 구원받습니까? 그게 아니잖아요. 우리는 안경이라. 안경아는 그 믿음, 구원받습니까? 안경 알면 구원 받아요? 안 된다니까요. 앞으로 어떤 사람이 그렇게 시비걸면 이렇게 이야기 하세요. 구원받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이고 이렇게 분명히 주었기 때문에, 뭐 예수님의 재림 믿는다고 구원받는게 아닙니다. 십자가 부활을 믿어야 되요. 왜냐하면 이것이 새언약이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1장에 보면 교회가 모일 때마다 떡을 뗐는데 뭘 기념했느냐면 예수님의 죽으심과 다시 오심을 기념한다 말입니다. 그래서 오용익 목사님이 하나 교회 강의하면서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교회와서 떡을 떼면 예수님의 죽으심과 살으심을 기념하라고 했는데 왜 자꾸 자기를 기념하느냐? 교회와서 자꾸 자기를 신경쓰고, 내 머리가 어때요? 내 옷은 어때요? 김집사님 어떻게 하겠어요? 박집사님 어떻게 하겠어요? 하면서 자기를 기념하느냐 말이죠. 어떻게 옷을 입든 주님을 기념하러 오는데.

다시 할께요. 사도가 십자가 복음을 전하면 이들이 믿으면, 전해도 안 믿으면 안 되요. 그들은 이것을 전해서 또 다른 사람이 믿게 되면 사도가 전한 복음을 그들이 믿어서 이 사도 배후에 누가 있겠습니까? 바로 새언약의 하나님, 주님이 계시겠죠. 그래서 이 역삼각형을 가지고 교회라고 하죠. 예수님과 사도의 틀이 세워지죠. 이 주춧돌, 머릿돌 되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 그 예수님은 건축자의 갖다 버린 돌이 주님이 되었고 버려진 돌을 사도가 믿었기 때문에 결국 이 사도도 예수님 믿었다는 이유 때문에 버림받게 되고 이 사도의 말을 믿는 사람들도 세상으로부터 버림받게 되고.

세상이라는 것을 조사해 보니까 바로 언약의 하나님을 외면하고 지식과 기적을 우회해서 가짜 하나님을 섬길려고 하는 이런 시도를 했던 사람들. 정리해 보면 아브라함의 특징은 행함을 할 필요가 없어요. 행함을 할 필요가 없는 이유가 아브라함 언약 속에는 우리가 지킬 법이 없어요. 오직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니. 의로 여긴 거예요. 의롭다는 것을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어떤 규칙을 지킬 경우에만 의가 되고 안 지키면 불의가 되는 그러한 기준이 있어야 되는데 여기 아브라함 언약은 믿으면 의가 된다는 말은 아, 이거 참 어려운데 제가 모션으로서 반드시 설명을 해야 되겠어요. 

여기 리모콘이 있는데 우리가 21세기 사람들이 아니고 고려시대 사람이라고 합시다. 제가 미래소년 코난이 되어서 21세기에 미리 왔어요. 여러분 리모콘이있는데 이것을 탁 켜면 벽 같은 데에서 사람 얼굴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고려시대 사람은 그 한국말, 고려말을 해도 말했다고 해서 알아 먹습니까? 못알아 듣죠. 예수님이 아람말을 해도 그 내용을 모르면 들을 귀 있는 사람 외에는 알 수가 없죠. 

인간은 과거의 경험에 의해서 모든 것을 해석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희한하게도 "아, 그런 귀가 있는 줄 저는 믿습니다." 이랬단 말이예요. 고려시대 이야기 다시 해봅시다. 고려시대이기 때문에 리모콘이 없는 시대에 "여러분 임금에게 충성합시다." 법이잖아요. 알아듣잖아요. "그래. 아, 그것은 해야지." "여러분 리모콘이 있는데 누르기만 하면 뭐가 나옵니다." 그것은 실천하고 안 하고의 여부를 이미 벗어나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이 주신 십자가 부활은 우리보고 실천하라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하고 말고 자시고 할 대상이 안 된다니까요.

고려시대 사람에게 리모콘을 누르셔야죠 하면 그 사람은 리모콘이 뭔데? 이렇게 나온다니까요.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게 준 이 모든 원리와 원칙은, 우리 머리 속에서 나온 것은 지키고 말고 하는 것이 결정적으로 있는데 이거는 생뚱맞는 거예요. 생뚱맞으니까 아브라함이 "그냥 믿습니다" 한 거예요. 하나님이 다 알아서 꾸민줄 믿습니다. 비록 지금 납득이 안되지만 믿습니다. 죽은 자가 살아나고 다 믿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 말고 고려시대 다른 사람 말은 아니 우리가 다른것을 하란 말이야.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하고 못하는 것은 못한다. 이렇게 되어야지 리모콘이라는 것을 고려시대 사람이 어떻게 이해하느냐 말이죠.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희한한 사람이예요. 인간쪽에서 생각지도 못한 리모콘이라는 것을 두드리면 화면에서 뭔가 뜬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하겠어요? 하지만 하나님의 약속이기 때문에 우리는 상상도 못하지만, 내막을 모르지만 "주께서 하실 겁니다" 하고 아브라함이 믿은 겁니다. 아브라함의 특징이 뭐냐하면 우리가 뭔가 부지런히 하고 지킬 수 있는 그런 자리를 다 철거시킨 겁니다. 평소에 하는 행세같으면 아, 이렇게 하면 되겠다 하지만 평소에 하는 행세가 전혀 없는거란 말이죠.

그 다음에 나오는 내용이 하나님이 그 고려시대 사람에게 갑자기 리모콘을 주었다. 리모콘이 등장하고 나니까 아브라함의 약속이 실체화 된 것을 갈라디아서에서는 예수님이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 당시에 이삭이 없는데서 태어났다 이 말이죠. 그리고 이삭은 아브라함이 바쳐서 죽이려고 했을 때 옆에 수풀에 수양이 있어서 살아 났잖아요. 하지만 이삭이 믿어서 구원 못받고 죽었던 이삭이 살아나고 염소 믿는다고 해서 구원 못받아요.

이것은 장차 올 리모콘 대신 나무 리모콘. 작동도 안 되는 이걸 들고 아브라함이 폼낸 거예요. 하지만 아브라함은 요한복음 8장에 보면 그것을 보면서 생각하며 예수님 오기를 기다렸다고 했습니다. 희한해요. 도대체 아브라함에게 주신 믿음과 복이 얼마나 대단한지. 세월이 몇 년 입니까? 2000년 세월을 뛰어 넘어요. 2000년 뒤에 이삭같은 분이 오실 것을 알고 그 오실 분을 기다리면서 드디어 예수님 만나고 기뻐했다고 했습니다.

성경이 도덕책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거 행하면 착하다. 착하고 자시고 할 근거 자체가 아예 없어요. 생뚱 맞아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단 말이죠. 그래서 아브라함 언약이라는 것은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 때문에 의지하고 믿을 뿐이지 우리가 실천에 옮길 수 있는 법은 아브라함 언약에 전혀 없습니다.

아브라함 언약에 의해서 오게 되는데 아브라함이 언약의 뭘 믿었느냐 하는 것이 갈라디아서에 나옵니다. 아브라함이 언약을 자기가 믿은 것이 아니예요. 아브라함이 언약을 믿은 것은 언약에 대해서 자기 자신의 인식이나 능력을 믿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뭘 믿었습니까? 얼른 다른 사람이 들으면 말도 안되는 소리지만 아브라함이 언약을 믿었는데 본인이 믿은 것을 믿은 것이 아닙니다. "이 언약의 실천자는 바로 언약을 주신 하나님이시다." 이것을 믿었습니다.

앞에 나옵니다. 여호와는 나의 방패요, 여호와는 나의 상급이다. 여호와가 주도권을 쥐고 나는 아브라함의 언약의, 하나님이 주신 언약을 이루는 재료로, 하나의 소모품으로 내가 부름받은 거예요. 언약을 이루는 것은 믿는 내가 언약을 이루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친히, 언약을 주신 그 분께서 친히 언약을 이루어 나가는 겁니다. 그것을 예수님에게 적용시켜 봅시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신 것이 다 누구 힘으로 되었습니까? 성령의 힘이죠. 예수님께서 성령의 힘으로 가셨죠. 기억나세요? 지난 번에 했는데.

예수님의 가신 길을 성령으로 했잖아요. 그 성령으로 했다는 말은 예수님이 성령이 없이는 아무일도 못하시는 거예요. 요단강에서 비둘기같이 성령이 왔잖아요.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성령받았을 때 아셨던 것이 뭐냐하면 이것은 아버지께서 성령을 주신 거예요.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태어날 때부터 모든 일이 아버지의 뜻에 복속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사도행전 8장 9절에 보면 시몬이라는 사람이 이 성령을 뚝 떼어 돈을 주고 살려고 했단 말입니다. 그렇다면 돈을 내는 자가 누구예요? 시몬 본인이죠. 성령을 돈 주고 저 시장에서 "한근에 얼마 입니까? " 하고 사게 되면 성령은 누구한테 복속됩니까? 나한테 복속되는 거예요. 이게 대표적인 것이 뭐냐하면 불신앙이예요. 아브라함의 언약하고는 전혀 거리가 먼 거예요.

아브라함이 언약을 하나님이 믿었다 하니까 "아, 저렇게 믿으면 언약도 내것이 되어서 내가 이제부터 언약을 실천할 수 있구나!" 라고 오해하는 것이 인간인 거예요. 하여튼 좋은 것은 다 가질려고 해요. 돈을 줘서라도 좋은 것은 다 쳐바르려고 한다 말이죠. 그런데 실제로 아브라함의 언약을 보면 아브라함이라는 예수님이 언약이 찾아오면 내가 뚝 잘라서 내것 만들려고 한 것이 아니고 오히려 내가 갖고 있던 모든 인생도 저분에게 마치 지남철에 달라붙는 쇠조각처럼 철거덕 해가지고 저쪽에서 인도하는대로 끌려가는 거예요.

그것을 가지고 친구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친구가 아니고 아브라함을 하나님께서 친구되게 하신 거예요. 이렇게나 저렇게나 마찬가지 아니냐? 마찬가지가 아니예요. 제 피라는 책에 보면 기호가 나와 있어요. 30=0이죠. 70=0이죠. 앞에 이것을 모르고 그냥 0만 있는 사람은 똑같다고 하는 거예요. 3곱한거고 7곱한거예요. 이 내막을 알아야 되요.

없는데서 있게하고 죽은데서 살렸으면 똑같은 것이 아니예요. 우리는 어떤 자리에 있다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는가? 이 자리에 오면서 우리의 행함을 삭제 당하는 우리에게 있는 모든 실천력을 부정당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온전히 하나님 앞에 철석붙게 된거예요. 아브라함도 이스마엘 낳았잖아요. 이스마엘은 저주받은 자식이예요. 첨부터 이스마엘을 낳지를 말지 그런데 왜? 낳게 해가지고 "낳았지? 그거 내 자식 아니거든." 왜? 그렇게 하시느냐?

그것은 아브라함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아브라함을 가지고 진짜 하나님의 자식은 약속의 자식이 아니면 나머지기는 저주의 자식이라는 것을 아브라함을 통해서 둘을 구분하기 위해서 아브라함을 용도로서 마음껏 그림을 그린 거예요. 자 그러면 이것은 더 깊이 나가면 딴 이야기가 되니까 접고 성령 이야기 해봅시다.

성령이 오시게 되면 이 세상은 둘로 나누어 지죠. 성령이 오시기 전에는 모두 다 한통속입니다. 똑같은 인간인데. 성령이 오시게 되면 이것은 둘로 나누어 집니다. 하나는 약속이고 하나는 비약속. 하나님의 약속되지 않은, 저주받은 사람되고 이것은 구원받는 사람이되죠. 양과 염소. 좋은 고기 나쁜 고기. 이 모든 것이 성령이 오시므로 되었죠. 그러면 여기서 봅시다. 아까 예수님께 뭐가 왔다? 성령이 오셔서 아버지의 뜻을 이루도록 했잖아요.

그러면 아버지의 뜻이 뭐냐하면? 아브라함 언약은 우리가 뭔가 할 수 있는 것을 다 없애는. 리모콘이 있기 전에는 리모콘을 누르라는 말이 성립이 안되듯이. 우리가 할 수 있는 법같은 것이 성립이 안 되요. 일체 법은 없어요. 하나님의 약속을 주셨다는 그 자체로 인하여 이미 우리는 구원된 겁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이 왔다는 자체가 "너는 사랑하는 아들이요 기뻐하는 자라" 이미 이 세상에서 아들이 된 거예요. 성령이 왔다는 자체가 이미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하나님의 양자가 되었고 아들이 된 거예요.

로마서 8장에 보면 너는 종의 영을 받은 것이 아니고 아들의 영을 받았으니 이미 아버지라 부른다 이 말이죠. 아버지라 부른다는 것은 본격적으로 아버지의 뜻을, 아버지의 언약을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는 다루어진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구원 문제가 아닙니다. 성령 받았으니까 교회 안 다닌다 하는 내 구원을 챙기는 문제가 아니예요.

다시 이야기 할께요. 성령을 안 받게 되면 자꾸 챙길려고 해요. 시몬이 성령 받았다니까 돈 얼마 주면 성령을 받겠습니까? 라고 자꾸 성령을 제대로 모르면 자기는 살아 있고. 돈 주고 기도를 많이 하고. 나는 안 죽어 있고. 살아 있는 채. 거기다가 부풀려서 힘을 키우는 역할을 한다 말이죠. 그런데 성령을 받게 되면 그러한 시도조차도 의미가 없이 "이제부터는 주님께 붙잡힌바 되었구나!" 이미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 있는 거예요.

하나님의 아들이 되면, 그러면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까 하나님의 말씀대로 열심히 살아야지." 하는데 그런말 없어요. 성령이 예수님 십자가 부활하고 난 뒤에 성령이 뭐로 바꼈냐면 아들의 영으로 바꼈어요. 동방교회, 서방교회가 삼위일체 이 대목을 가지고 싸웠어요. 동방교회는 성령은 아들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께로서 온다. 서방교회는 아버지께도 오지만 아들에게도 온다 이것 가지고 싸우다가 교회가 둘로 갈라졌어요. 내가 볼때는 둘 다 이단인데 삼위일체 교회사에 나와요.

삼위일체 내용은 성경하고 달라요. 왜냐하면 삼위일체는 항상 성부 중심입니다. 서열상 성부, 성자, 성령 중에서 대표자가 성부가 대표자가 된다는 것이 전반적인 삼위일체 교리입니다. 이거 하나님께서 인정 안 해줍니다. 인간들은 이러고 싶은데 하나님께서 인간들이 지어낸 신학을 이야기 안 해요.

하나님은 예수님을 주라고 하는데 관심이 있지 서열 누가 높으냐에 하나님은 관심조차도 없는 거예요. 관심도 없는데 신학자들이 모여서 성부가 최고수가 되고 밑에 성자고 그 다음에 성령이라고 서열을 만든 자체가, 이것은 지금 성령을 안 받고 또 신학을 가지고 자기에게 끌어 모으려고 하는 시몬같은 작업을 하는 겁니다. 그게 개혁주의고 그런 거예요. 자꾸 끌어 모으는 거예요.

김성수 목사의 설교를 들어보면 구원의 서정이 나와요. 칭의, 믿음.. 그것을 설명하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예수 믿고 의로와 졌다고 그것이 다가 아니고 성화 과정이 있습니다. 그 다음에 영화 과정이 있습니다 이러는 거에요. 여러분 그 과정 없습니다. 그 과정은 자기가 안 죽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 구원의 서정을 해서 어떻게 해서든지 간에 성경해서 예수를 믿어서 내가 살고 싶어 하는 거예요. 성경은 예수님의 주되심 자체가 오게 되면 "아, 더이상 내가 나를 위해서 살 필요가 없구나!" 그것은 이미 성령께서 임한 사람이예요. 이미 하나님의 아들이 된 사람입니다.

성령이 아니면 아들이 안 됩니다. 이미 아들이 되어 버리면 그러한 내가 어떻게 구원의서정을 받아서 그런 것 신경 쓸 필요 자체가 없는 사람이예요. 아까 이야기 했잖아요. 하나님의 구원받은 사람은, 아브라함 언약에는 뭐가 없다? 내가 지킬 수 있는 법 자체가 없다는거에요. 법 자체가 없다니까요. 만약에 지킬 법이 있으면 또 내가 나한테 신경써야 되요. 하나님 내가 잘한 겁니까? 못한 겁니까? 아이구 못했어요. 못했으면 회개하고. 또 자기가 구원 신경써야 되잖아요. 그런 식으로 구원받은 사람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것은 믿는 것이 아니고 그냥 하나님의 성경책을 참고로. 하나의 윤리 도덕적으로 참고로 해서 자기 도 닦고 자기를 갈고 닦는, 여기에 필요한 재료로,  참고문헌으로 사용하는 거예요. 여전히 자기 자신이 자기 힘으로 구원받겠다는 겁니다. 성령이 아들의 영이 될려면 아까 예수님과 성령 사이에서 예수님은 아버지의 성령이 임하므로 말미암아, 이미 예수님이 어디에 당겨 들어가냐면은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는데 당겨 들어갔다 했죠. 그러면 성령께서 성도에게 임하게 되면, 이미 다 이룬 아들의 영을 그 세계에 그걸 증거하기 위해서 우리가 뽑히는 겁니다. 간택당한다. 채택당한다. 당첨되었다.

"너 이제부터는 아드님이 하셨던 그것 그것이 얼마나 놀랍고 대단한 것인지 보여주는 증인 돼" 라고해서 성령이 온 겁니다. 사도행전 1장 8절.  이것 모르면 한국에서 교인도 아니잖아요.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될 것이다." 증인이 필히 될 것이다. 그 이야기나 "이는 내 사랑하는 자요 내 기뻐하는 아들이라" 는 것과 똑같습니다.

성령께서 예수님에게 임할 때 예수님이 이미 하나님의 아들인 것이 확인된 것처럼 이미 성령이 임했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되었어요. 그러면 예수님이 그 다음부터 마음껏 놀았습니까? 아니예요. 아버지의 뜻이 무엇인가를 십자가를 지고 부활 때까지 과정을 통해서 아버지의 뜻이 이거다 하고 다 보여 줬잖아요. 새언약이 이런거야 다 보여줬잖아요. 그러면 우리는 새언약이 이런 겁니다. 라고 예수님의 공로로 구원 받았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의 모든 한평생이 주님의 공로에 의해서 다루어지는 겁니다. 어느 한 순간도 성령의 작용이 없이는 이루어지는 것이 없어요.

그래서 어떤 목사님은 강의들어 보면 성령충만 받지않은 상태가 없는데 무슨 성령 충만을 이야기 하냐? 그런 목사님이 계셔요. 그렇다면 성령의 소멸은 뭐예요? 취지는 이해하겠는데. 성령이 임재했다는 말을 그런 식으로 이야기하면 제가 이해하겠는데 늘 충만인데 무슨 성령충만이냐 하면 약간 오바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렇게 이야기하는 취지는 알겠어요. 하도 한국교회가 성령충만 받을려면 자꾸 해라해라 하니까 늘 성령 충만인데 뭘 또 성령충만이냐 했어요.

그런데 그 이야기는 뭐냐하면 성령이 창조의 영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놓치면 안 되요. 성령은 창세기 1장에 보면 하나님의 신이 수면에 운행하거든요. 창조한다 이 말이죠. 창조할 때, 창조의 영이 오게 되면, 스포트라이트가 막 비치잖아요. 조명등. 내가 스포트라이트를 조종하면 항상 내쪽에 훤하게 비치면 좋은데 해변가에 간첩오나 싶어서 왼쪽 한번 돌았다가 오른쪽 한번 돌았다가 돌면 나는 가끔씩 비췰 뿐이죠. 그렇다고 스포트라이트 비치는 사람한테 "왜 나만 비춰?" 라고 따지면 곤란하잖아요. 내가 간첩도 아니고 곤란하거든요.

그처럼 성령께서 창조의 영이 주어지게 되면 스포트라이트, 빛 같으면 주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하나님의 바람같이 움직이는 거기에 너가 같이 뛰어 들어야되는거에요. 그야말로 새가 바람을 탈때 무엇을 뭘 포기합니까? 자기가 스스로 난다는 개념이 없잖아요.  바람불면 그냥 날게 펼치면 날잖아요. 충분하게 날죠? 충분한 창조의 영 속에 충분하게 성령의 하신 일 주님의 영을 보여주잖아요.

날다가 맛있는게 있으면 강제로 날개를 접으면 자기가 목적한 저 땅 수직으로 내려가잖아요. 성령의 소멸이라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성령께서 하시는 일은 이렇게 우리로 하여금 모든 힘을 다 빼고 날개를 주에게 맡기는 이것입니다라는 것을 보여주기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는 항상 성령을 가로막는, 성령을 소멸시키는 그런 육적인 것을 갖고 있습니다 라는 표현을 하는 거예요.

성령은 어디서 온다고 했습니까? 예수님에게서 오죠. 주님께서 성령이 오게 되면 구원 받았죠? 로마서 10장에 보면 구원이라는 것은 믿는데,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입으로 네가 입으로 시인하면 너가 구원이 된다고 했죠 분명히? 그렇다면 예수님의 하신 일이 성령을 통해서 주어지잖아요. 그러면 우리는 현재 육 아닙니까? 자꾸 옛날에 육적인 요소가 있을 것 아닙니까? 육신이 되었으면 육신값을 하는 거예요.

고3인데 교회가지마라 이런 식으로 말이죠. 항상 우리는 그냥 공중을 날고 독수리 날개처럼 천국을 바라보면 되는데 우리 시민권은 하늘에 있느니라 참 좋잖아요. 하지만 그것은 성경에 쳐박아 놓고, 항상 우리는 우리의 시민권이 하늘에 있다하면 불만족스러워 해요. 왜냐하면 과거의 육신의 습관이, 썩어가는 육신이 우리로 하여금 맨날 창고문을 닫아서 도사처럼 살지 못하게 만들어요. 누가 건드리거든요. 우리를 누가 놀리고 까불고. 그러면 우리는 성질나잖아요. 그러면 날다가, 하나님 우선 저것 갈구고 날겠습니다 이러잖아요. 갈굴 때 바로 육신이 뭘 가로막느냐면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의 공로를 가로막아 버려요. 성령께서 탄식하고 근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령께서 왜 그것을 허락을 하느냐? 성령께서 그것을 허락하시는 이유가 우리의 타락과 우리의 방탕을 통해서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구원되지 너가 정신 차린다고 구원되는 것이 아니란 말이죠. 창공을 난다고 구원되는 것이 아니고 이미 창공을 나는 능력을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육신이 이러하기에 성령은 날마다 우리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느니라 라는 것을 통해서 성령의 자유함을 우리에게 또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게 성령의 소멸입니다.

그래서 어디에서 어디까지가 성령의 충만이냐, 소멸이냐를 우리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어느 것이 성령 충만이냐, 소멸이냐를 따질 때 이미 소멸이예요. 또 자기 생각하는 거예요. 예수님 고마운줄 알면 그 자체가 누가 뭐래도 충만인데 예수님 고마운줄 알다가 누가 뭐라고 시비걸면 에잇 갑자기 주님 바라보다가 내 몸의 자존심 신경쓰인다면 그게 바로 소멸이예요. 저는 그것을 바로 항상 바람같이 부는 창조의 영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계속 창조해 나가시는 겁니다. 기계처럼 찍어내는 것이 아니고요. 일본말로 유도리하고 하죠. 항상 올라갔다가 내려갔다가 이렇게 해서 주님의 어떤 경우라도 주님의 사랑은 효력이 있음을, 더 이상 내 행함을 의지하지 말것을 깨닫게 하시는 겁니다. 결국은 성령의 충만이라는 것은 성령이 우리 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고 반대로 생각하면 되죠. 우리는, 사운드 오브 뮤직이란 영화 보셨죠? 거기에 인형놀이 하는 것 있죠? 꼭두각시 인형을 실을 묶어서 막대기로 조종을 하죠?  우리가 맨날 "나는 난다. 나는 항상 관대하다. 나는 항상 성령충만하다" 이것이 아니고요. 항상 성령께서 나를 조종을 하게 되면 양이 되었다가 다투었다 싸웠다가 회개했다가 항상 주께서 인도하는대로 조종되죠? 그처럼 성령께서는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더욱더 우리로 하여금 증거되게 하기 위해서 주께서 이런 사탄도 허락하시고 세상의 육신의 맛도 보게 하시고 다시 울면서 회개하게 만들고. 좋다고 까불다가 자빠지게도 만들고 그런식으로 다루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주도권은 누구에게 있습니까? 주도권은 성령한테 있는 겁니다. 다시 한번 정리해 봅시다. 성령이라는 것은 우리보다 먼저 모델이 있다.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에 성령이 개입해서 아버지의 뜻을 이루었다. 아버지의 뜻은 언약을 앞장 세우는 분이다. 그런데 언약은 우리가 지켜나가는 것이 아니고 언약을 실천에 옮기시는 분도 아버지시고 언약을 자진해서 이루어 나가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다.

언약 바깥으로 우회하면 여기서 뭘 찾는다고 했습니까? 여기서 기적을 찾고 지식을 찾는 것은, 기적은 유대인이 원하고 지식은 헬라인이 원한다고 했죠. 이런식으로 우회하게 되면 여기는 하나님이 안 계시고 악마가 기다리고 있죠. 잘왔다 이놈아 잘걸렸다 악마가 오죠. 그렇다면 인간이 악마인줄 모르고 신인줄 알고 하게 되면 여기엔 기적과 지식에는 열심이 필요하고 열성이 필요하죠.

그래서 교회에서 그렇게 열심내고 열성을 내어서 악마만나라고 그렇게 열심내는는 거예요. 마귀 만나라고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성령만 주어도 이미 아들인데, 이미 구원받은 자이거든요. 논다는 것이 아닙니다. 앞으로 다룰 거예요. 뭘 털어 버려야 하고 뭘 포기해야 되고, 우리가 의라고 여기는 것이 전부다 사실은 의가 아니고 우리가 스스로 구원받고자 시도했던 하나의 죄에 불과했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피와 살을 피해서 나아가고자 했던 하나의 죄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종교적인 열심과 착함이 선행이 사실은 언약을 비켜가서 내가 원하는 자비로운 하나님을 내 식으로 만나겠다는 하나의 시도에 불과한 거예요. 그래서 오용익 목사님이 첫번째 강의에서 중요한 말씀을 했습니다. "여러분들이 성경을 볼 때에 하나님 피 보고 싶어요. 피 볼려고 성경을 볼려고 하는 사람이 어디있냐 말입니다. 피보고 싶으면 깡패한테 얻어 맞아서 피 보면 되요. 성경을 볼 때 하나님 저 피 봐야 됩니다. 이런 식으로 성경을 보는 사람이 어디있느냐 이 말이죠. 그런데 유일하게 성경을 보면서 피볼려고 성경을 보는 사람이 있었으니 그 분은 바로 예수님이다" 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성경을 통해서 자신이 피 흘려야 되는 이유를 설명했다 이 말이죠. 그렇다면 성경을 해석할려면 우리는 이것 봐가지고 내가 원하는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내식으로 찾아가겠다고 하는데 그것은 언약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것은 새 언약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기념하는 거예요. 내가 이만큼 기도 많이 하고 내가 이만큼 훌륭하다는 것을 자기 자신이 갈수록 더욱 돋보이게 하는 그러한 짓거리 밖에 안되는 거예요. 이것은 마귀와, 악마와 만날 거예요.

하나님은 예수님의 피를 통해서 다 이루었다 했으면 우리가 성경을 봐서 주여 어떤 대목에서 피 흘려야 합니까? 아 이 대목에서 피 흘려야 되는구나 이렇게 성경을 보는 안목은 성령 받아야 가능한 겁니다. 성령 받아서 그것도 그냥이 아니고 충만해야, 자기꺼 접고 탁 날아가야 되지 내가 뭐 하나 해보겠다 하고, 다시 창공에서 날다가 내가 이것 먹어야 야지 하면서 그러다 또 저거 먹어야지 하면서 포기하고 지상으로 내려서 싸우고 또 하나님에 의해서 후회하고 회개하고 다시 올라가고 이러죠.

하나님은 언약 안에만 계시고 언약 바깥에는 하나님이 없습니다. 그곳엔 마귀가 기다리고 있죠. 구원이라는 것은 십자가와 부활을 입으로 시인하고 믿으면 구원이 이른다 이 원리입니다. 이 믿음은 어디서 온다고 했습니까?  사도행전 8장 20절 누가 한번 읽어 보세요.

"베드로가 가로되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돈 주고 사버리면 돈 낸 사람의 소유가 되죠. 성령은 예수님의 소유가 되는데 돈 주고 사버리면 내 소유가 되잖아요. 돈 낸 나한테는 성령이 오고 돈 안 낸 옆사람한테는 성령이 안오게되면요. 뭐 그런 성령이 다 있습니까?

성령은 선물이기 때문에 누구든지 주시는 거예요. 성령을 받게 되면 어떤 현상이 있게 되는가요? 요한복음 3장 34~36절. "하나님의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없이 주심이니라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 손에 주셨으니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이것 올해 수능시험 한번 내볼까요? 아들을 믿는 자는 괄호 해놓고 다음 중 괄호에 해당하는 것은?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않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죠. 그렇다면 진노받고, 하나님의 진노를 안 받을 것 같으면 영생을 받고 영생이 없을 것 같으면 필히 뭐가 오고? 하나님의 진노가 오죠. 빼도박도 못하죠.

이것도 저것도 아닌 경우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죠. 왜 그렇습니까? 이제 마지막 시대는 모든 것이 아드님의 성령께서 마지막 시대에 예수님이 하는 아브라함의 언약의 완성에 의해서 좌측인지 우측인지 둘중의 하나로 결단나게 해버렸어요. 제3의 회색지대가 없어요. 성령을 받아서 예수님을 믿으면 그것은 영생이고 안 믿으면 저주고 진노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뉴스에 나오는 서울지역 있잖아요. 서울 지역을 내가 장난끼가 있어서 상상을 해봐요. 강남과 강북을 나누지 말고 하나님의 영생이 있는 사람과 진노받은 사람으로 나누고 싶어요. 여기는 영생구, 저기는 진노구. 이렇게 둘로 나누고 싶어요. 네비게이션으로 나누어 집니까? 안 나누어 지는데 주님은 이미 둘로 나누었어요. 어떻게 나누는가? 이거 나누는 것을 목회 삼십년 만에 처음 공개합니다.

수직으로 나누어 버렸어요. 이게 서울시인데 이것이 공중에 붕 떴어요. 영생받은 사람은 강북에 있든 강남에 있든 대전에 있든 대구에 있든 관계없이 그 자리에서 붕 뜨게 되어 있어요. 뜬 사람이 하늘에 모이면 여기가 영생구이고 그 밑에 땅에 사는 사람은 하나님의 진노구. 이번에 진노구에서 국회의원이 몇 명 보궐되었잖아요. 우리의 시민권은 어디에 있는지라? 하늘에 있는지라. 그것을 다시 해석하면 우리의 시민권은 붕 뜨느니라. 붕 뜨느니라.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 했어요.

지난 낮 설교에서 했죠. 냉면집에서 냉면사리 자르는 가위 가지고 잘라 버려라. 우리가 기도하는 믿음 잘라 버리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다 잘라 버렸을 때 우리의 시민권이 하늘에 있다는 이 믿음을요. 이것은 잘라도 잘라도 주께서 위에서 주셨기 때문에 땅에서 아무리 가위 가지고 잘라도 잘라도 안 잘라지는 거예요. 잘라라 잘라라 해도 괜찮아요. 왜? 위에서 주었기 때문에. 이 어떻게 공간을 뛰어 넘을 수 있겠습니까? 무슨 재주로 높이뛰기 해서 올라갈 수 있겠습니까?

주님께서 성령을 주게되면 이미 그 속에는 믿음이 생기고, 아들을 믿는 자는 뭐가 있고? 영생이 있는 거예요. 인생 말아 먹어도 영생이 있는 거예요. 이걸 위에서 내다 보니까 이것이 강남구, 강북구 이렇게 나누어 지는 것이 아니고, 빵위에 초코렛처럼 은혜 밖에 있는 것처럼 되지만 이것을 옆에서 보면 붕 떠서 있다니까요. 그래서 이 사람들은 한 형제가 되고 한 몸이 되고 어디에 있더라도 외국에 있더라도 십자가 복음 안에서 교류가 되는 겁니다. 복음이야기 하면 예수님의 피 때문에 살았다는 거기에 다같이 꾸뻑 넘어가고. 듣고 싶은 것이 이거였습니다. 성화론 아니었습니다.

성화론은 이 밑에 진노구에서 나온 겁니다. 개혁주의에서. 성화론 아니고 우리는 예수님의 피를 갖고 온 성령 때문에 구원받았습니다. 이것을 8장 20절에서 한 것입니다. 그래서 8장21~23절에서 너는 성령을 못받은 사람이다. 성령 받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의 진노가 임한다고 하니까 시몬이 새파랗게 질려서 그러면 주여 저를 위해 기도해서 이 진노가 저에게 떨어지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해달라고 하죠.

그러면 기도해 가지고 진노가 떨어졌습니까? 안 떨어졌습니까? 다시 이야기 할께요. 너가 돈 주고 살라고 하니까 너가 마귀가 들었구나 너는 하나님의 진노가 임한다 그 소리 듣고 시몬이 겁나서 베드로님 제발 살려주세요. 정바지 바지가랑이 붙잡고 매달린 거예요. 제발 저를 위해서 기도해서 하나님의 진노가 떨어지지 않게 해달라고 했다 이 말이죠.

그럼 제가 내는 문제가 뭐냐? 그렇게 해서 베드로가 기도해 주면 진노가 떨어지는지 안 떨어지는지 그것을 묻는 겁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취소 됩니까? 그 위에 머물러 있습니까? 머물러 있죠. 왜냐하면 앞에 보면 성령 주고 안 주고는 베드로 마음대로가 아니예요. 이것은 성령 마음대로이기 때문에, 성령을 안 받은 사람에게는 아무리 좋게 이야기해도 그 사람한테는 하나님의 저주가 그대로 떨어져 있는 겁니다.

안 믿는 자식을 위해서 기도해도 소용 없어요. 중보기도 소용 없는 거예요. 생각해보세요. 우리의 보물이 어디에 있습니까? 니 마음에 있는 곳에 보물이 있죠. 우리의 마음이 있는 곳이 보물이라고 했잖아요. 그런데 보물을 어디에 쌓아 두라? 하늘에 쌓아두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제가 예를 들겠습니다. 만약에 집사님 사랑하는 자식이 성령을 못받아서 지옥가고 집사님 내외분만 천국갔다면 마음이 편하겠습니까? 안 편하겠습니까? 기분 더럽지요? 거기는 구더기도 소금치듯이 하는 고통스러운 곳이니까. 그러면 천국가도 마음이 안 편하죠.

그러면 우리의 마음이 어디에 가있습니까? 우리의 보물은 어디에 가있습니까? 자식인 거예요. 그러니까 챙길 것 다 챙겨달라고 하는 거예요. 그게 은연중에 우리가 공짜로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놓쳐 버렸다는 것입니다. 내가 자식을 위해서 아내를 위해서 남들을 위해서 기도했기 때문에 하나님 이것은 세트로 봐줘야 됩니다. 라고 생각하는 그 공로로 구원받은 것이 아니고요. 우리는 내 자식밖에 모르고 내 아내밖에 모르고 내 남편밖에 모르는데 난데없이 성령받은 거예요.

그러니까 내 보물은 나에게 난데없이 날라온 성령받은, 우리의 시민권이 이미 하늘에 가있어 버리면요. 저 자식이나 아내나 남편이나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거예요. 처음부터 내것이 아니었어요. 그래서 처나 자식이나 아내나 남편이나 나보다도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않다는 무시무시한 이야기가 나온 거예요. 그것은 우리의 실천력을 벌써 오바한 것입니다. 어떻게 실천할 수가 없어요.

이 말은 니가 실천해서 구원받은 것이 아니고 주께서 웬 은혜인지 너희에게 그냥 성령주고 싶어서 주었다는 거예요. 창세전에 예정되었다는 이유 때문에 그냥 준 거예요. 주었으니까 준 값을 하라는 거예요. "아내야 미안하다. 당신은 지옥가고 나는 천국가는데 미안한데 나를 탓하지 마라 나도 얼떨결에 받았다." 이렇게 하라는 말이죠. 그럼 아내가 "당신 보물은 내가 아니구나?" "아니야 내 보물은 하늘에 있어" 이럴 수 밖에 없단 말이죠. 상당히 냉정하고 비정하지만.

그러면 나는 아버지 바지가랑이 붙들고 가겠습니다. 자식이 그렇게 나올것이 아니냔 말이죠. 구원받은 아버지 바지가랑이 붙들고 구원받을 것 같으면 내가 성령 안 받고 우리교회 목사 붙들고 구원받겠다. 내가 우리교회 복음 아는 목산 붙들고 구원받는 것이 불가능한 것처럼 니가 이것 붙든다고 되는 문제가 아니다. 거지 나사로가 천국갔을 때 자랑 못합니다. 주여 거지되서 구원받았군요. 거지되서 구원받은 것이 아니예요. 그냥 구원받았어요.

그런데 아직도 부자는 저쪽에 거지가 거지인줄 알고 있어요. 아직도 세상에 있는 기준을 그냥 들어가는 줄 알고. 나사로의 마음은 이미 부자가 부럽지 않아요. 건강한 자가 부럽지 않고 아이구 거지라도 구원받았구나 주님의 은혜가 부러운 거예요. 그런데 부자는 아직도 그게 없기 때문에 저 거지 나사로를 나한테 보내서...아직도 자기 자리가 무슨 자리인지 번지수도 모르고 똥오줌 못가리고 있어요. 지옥가서 그따위 소리하고 있단 말이죠.

그래서 우리가 성령충만 받으면 항상 붕 떠야 됩니다. 육신이 연약하기 때문에 세상에 앉을라고 한번 또 놀아볼라고 푹 잠기지요. 잠겼다가 주께서 또 잡아 땡겨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주께서 항상 창조의 힘으로 합니다. 다음에 마태복음 하겠습니다.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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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마태복음 강의

1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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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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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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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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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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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5강 다음에 산상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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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산상설교에 이어 6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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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강의 1- 5강  뒤에 산상설교 그리고 6강 입니다.

  
 
대전 강의는 사도행전과 마태복음 입니다.
마태복음은 강남강의를 이어서 산상설교와 그 다음 6강 입니다.

참고로 만약 마태복음을 녹취하실 분은 앞의 5강까지도 염두하시고
자유롭게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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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리자 (IP:124.♡.87.52) 10-07-30 0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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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리자 (IP:124.♡.87.52) 10-07-30 00:30 
마태복음 강의 1- 5강

1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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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강

http://media.woorich.net/신학강의/2010대전/대전100218a마태복음2강a.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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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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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media.woorich.net/신학강의/2010대전/대전100304d마태복음3강d.mp3


4강

http://media.woorich.net/신학강의/2010대전/대전100401a마태복음4강a.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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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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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강의는 사도행전과 마태복음 입니다.
마태복음은 강남강의를 이어서 6강 입니다.

참고로 만약 마태복음을 녹취하실 분은 앞의 5강까지도 염두하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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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리자 (IP:220.♡.41.203) 10-11-07 10:53 
마태복음 강의 1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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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리자 (IP:220.♡.41.203) 10-11-07 10:54 
대전100204a마태복음1강a

2010-11-04 00:36:30   녹취 : 송재원
 

질문자: 교회에서 목사님들의 설교를 들어보니까, 전부다 돈을 더 끄집어내기 위한 장삿속으로 설교 하시는 것 같습니다. 분명히 그 사람은 자기입장으로는 복음을 전한다고 하지만,  제가 듣기에는 저것도 장삿속이 아닌가.. 교인들의 헌금을 유도해서 끄집어내려는 수법이 아닌가라고 의심이 들때가 있는데요. 순수한 목사님의 의도를 외곡하는 내가 잘못인지, 아니면 정말 큰교회 목사님들이 정말로 그런 방식으로 하시는지?

여기 말씀의 책, 성경이 있는데. 성경이 여기있으면 이 성경에서 두가지를 끄집어 낼 수 있어요. 하나는 생존의 차원. 하나는 생명의 차원을 끄집어 낼 수 있습니다. 생존의 차원을 끄집어 내는 것은 뭐냐하면, 이 땅이라하는 것은 창세기3장 이후에 에덴동산에서 쫒겨난 이후에 저주가 뿜어져 나오죠. '저주'. 저주가 뿜어져 올라온다는 것은 창세기 3장에 보면 남자들은 이마에서 물과 땀을 흘려야되고, 여자들은 애기 낳을때 고통을 수반해서 해산하게 된다는 하나님께서 심어놓은 원리 원칙이 있다는 말이죠. 그럼 이 저주가 올라오는 이 땅에서 사람들이 폴짝폴짝 뛰면서 살지는 못하지 않습니까? 산속에 들어가려고 해도 그것도 비정상적이고요. 어쨌든 땅과 더불어서 살아야되는데, 이것을 가지고 '생존'이라고 하는거에요. 그럼 이땅에선 저주가 올라오고 본인은 살고싶어하고요. 자연적으로 여기서 나오는 것이 뭐냐하면,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고생’이지요. '고생'. 고생이다 이말입니다.

자, 사는게 고생이지요. 사는게 고생스러우니까. 사람들은 자연적으로 무엇을 기대하고 있느냐하면, 은혜를 기대하겠지요. 사는 게 고생스러우니까요. 은혜라는 말은 사람들이 흔히 알고있는 뉘앙스가 뭐냐면, ‘공짜로 주시는 것’. ‘공짜’. 공짜로 주시는 것을 기대한다는 말입니다. "누가 은혜 받았더라" 이 말을 딱 들어보면 뭐냐하면, “야 이것은 공짜로 얻었데”. 또는 약간의 기도,약간의 간구,약간의 도고(다같은 기도의 다른 표현들을 말합니다. 간절히 하는 것을 간구, 다른 사람을 위해서 하는 것을 중보기도 즉 도고. 모두 기도의 일종입니다). 이런 "약간의 기도하는 수고, 금식하는 수고만 하게되면 하나님께서 내 노동한 것보다 더 분에 넘치도록 30배,60배,100배 공짜로 주시더라"라고 기대를 하고 교회 문을 열게 되지요.

방금 제가 이야기한 것들이 무슨 차원인가 하면, 이것이 ‘생존’의 차원이지요. 아쉬운 게 있어서 내힘으론 안되서 힘들때 교회 마룻바닥에 새볔마다 제단을 쌓고 빌면 생존차원에서의 혜택을 주는데, 이것을 교회에서 뭐라고 부르냐면 ‘축복’이라고 또는 ‘복’이라고 이렇게 이야기 하면서 준다는 겁니다. 이럴때 이 사람들은 교회를 가도 관심이 뭐냐하면 ‘고생스러운 나’를 가지고 교회 가지요. 고생스러운 내가 기도하고, 내가 두손 모아도 고생스럽게 타터버린 발과 손 가지고 기도한다고요. 그러면 교회를 가도 관심사가 누구냐하면은 주님이나 하나님이 관심사가 아니고, '고생스럽게 너무나 힘들게 살아가는 나'가 관심사가 되겠지요.

이런 사람들이 교회에 모일때 강대상위에서 설교하는 목사들은 이미 온 고객들 (고객들 하면 약간 어폐가 있습니다만 고객들 맞아요). 이미 온 손님들이 관심사가 이미 '자기 생존'에 관심이 있더라 이말이지요. 자기 생존에 관심이 있다보니까 어떤 현상이 생기느냐면 나는 잘사는데 옆사람 못살면 화가 더나요. 참 인간의 심리가 재밌는 것이요. 공짜를 주되 또 골고루 공짜로 주면 기분 나빠해요. 여기 아파트를 예를 들어보면, 고3학생이 10명 있다고 합시다. 그 학생 10명 다 서울대학가면 싫어해요. 다 떨어져야 하고 나만 되야해요. 그럴때 우리는 축복이 더욱더 축복값을 한다고 쳐주는 것입니다.

관심사가 고생스럽다는 것에 관심이 가있어요. 관심사가 두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육체적인 고생이 있습니다. 그렇게 하루 세끼 해결 못해서 고생스러운 것도 있지만, 또 상대적인 박탈감이란 것이 있습니다. 심리적인 것인데 ‘박탈감’. 남들은 공부 그렇게 잘하는데 왜 우리애는 공부 못냐하고하는. 항상 남하고 비교하는데서 오는 ‘박탈감’이지요. 그것이 여전히 생존의 차원에 포함이 되어있습니다.

그러니 목사님들이 강단에서 뭐라고 이야기 하시는가 하면, 기도하는 자에게만 특별하게 여러분들이 원하는 '박탈감 없는 혜택'이 주어집니다라고 말합니다. 단, 기도 열심히 하는 사람, 헌금 열심히 하는 사람, 교회 충성하는 사람에게만 줍니다 이렇게 말하는 거에요. 그렇다면 이것은 교회를 나올때 교회에 와도 사람들이 있으니까, 사람들 사이에서 상대적인 경쟁심이 유발되겠지요.

성경에서 공짜라고 나오는 것이 있는데. ‘만나’라는 겁니다. 그런데 만나를 먹고 사람들이 기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기도 한 사람이나 안한 사람이나, 교회 봉사 한 사람이나 안한 사람이나, 십일조 한 사람이나 안한 사람이나 매일 아침에 나가기만 하면 그대로 만나가 주어지니까요. 이것은 영 자기 심리를 충족시켜주지 못하는 거에요. 상대적으로 자기가 우세함을 얻어야 할텐데요.

그래서 교회에서의 은혜라 하는 것은 무엇이 되었느냐 하면, '그냥 주십니다'가 아니라 반드시 '조건'이 붙게 되었지요. "이렇게 이렇게 하신 사람에게만 이러한 혜택이 있었습니다"하는 간증거리가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이런 교회들의 특징이 무엇인가하면, 간증에서 시작해서 간증으로 끝나버립니다. 이 간증하는 와중에 사람들의 관심사는 하나님이나 예수님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고생스러운 나 자신’이 점점 더 부각되는 겁니다. 나도 저렇게 간증거리가 되어서 저 간증거리 될만한 그것에 합세하고 싶다는 것. 나도 그 노선에 참여하고 싶어, 남들이 부러워하는 대상이 되고 싶다는 것. 남들은 그렇게 못했는데 나는 그렇게 했다고 할때에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물어요. “신앙생활 어떻게 했기에 그런 축복을 받았습니까?”하고 줄줄이 와서 나에게 물을 수 있는 그런 정도의 존재가치가 의미가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하는 그것. 역시 다른 교회서는 안되는데 이 교회 와서 되었다는, 내 교회를 부각시키는 소속감. 이런 것.

이런 것이 바로 고생스러운 내가 교회 가더라도 머리 되신 예수님이 어떻게 고생했느냐는 마음에 안들어오고, 스데반 집사님이 어떻게 돌아가셨는가 하는 그런 것은 생각도 안나고 다만 교회를 가도 여전히 최종 관심사는 '나' 밖에 없는 거에요. 그런데 이러한 사고방식이 옛날 한국에 기독교가 들어오기 전에 이미 불교가 들어왔을 때에도 똑같은 사고방식으로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무속신앙이란 바탕위에, 자기만 아는 신앙위에 불교가 들어오든 기독교가 들어오든 천주교가 들어오든 아무런 의미없는 거에요. 반드시 남은 손해보아도 자신과 자기 가족만큼은 손해 보아서는 안된다는 그런 투철한 자기방어. 이런 것을 가득 안고 교회를 찾아옵니다. 그런데 이것은 결국 무엇인가 하면, 아무리 교회에 사람들이 모여도 '군중속의 고독'. 군중속에 있다고 할지라도 항상 자기자신에 대한 노림수는 절대로 잊지 못하지요. 절대로 잊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이 생존의 차원에 목사가 같이 협상이 되고 거래가 되고 흥정이 되어 있어야, 장사가 되고 이익이 되요. 그런데 생존의 차원말고, 그 위에 무슨 차원이 있는가 하면은 '생명'의 차원이 있습니다. 그러면 생명의 차원이라는 것은 무엇이라고 하는지 봅시다. 창세기 3장에 보면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에 생명나무를 따 먹으라고 허락했을까요? 아니면 못 따먹게 했을까요?. 못따먹게 했지요. 우리 인간입장에서 생각해 봅시다. 고생을 그만큼 했으면 우리 '인간적으로'. 죽이지 말고. 인간적으로!

우리가 지금 땀흘리고 고생하는게 무슨 이유 때문입니까? 살자고 하는 일 아닙니까? 교회 가서 비는 것을 왜 하는 겁니까? 죽으려고 비는 것 아니잖아요. 사는데 좀 더 편하게 살고 싶잖아요. 편하게. 일단은 좀 편하게 살고 싶고. 더 나아가서 남의 부러움을 사면서 살고싶고. "아이고 저 집안 부러워 죽겠다" 이런 것. 뭔가 돌출되는 그 기쁨말입니다.

사법고시 만약에 200만명 뽑아버리면 사법고시가 의미 없죠. 고등학교만 졸업하면 다 판사된다고 한다면 판사라는 것이 의미가 없지요. 뭔가 수십대 일 수백대 일 이렇게 떨어져야 의미가 있다구요. 참 이렇게 인간의 심리가 못되요. 아주 못됬어요. 누가 울어줘야 내가 웃을수가 있어요. "누가 울어줘야". 준이 아빠가 삼성 라이온즈 좋아한답니다. 삼성 라이온즈가 맨날 지면 준이 아빠 집에 오면 기분 나빠요. 왜냐하면 삼성 라이온즈와 나가 하나가 되는 것 (이것을 철학적으로 하면 '주체의 확대'라고 해요). 내몸이 주체인데 삼성라이온즈를 좋아하면 삼성 라이온즈 팀의 움직임이 내 움직임과 똑같애. 2002년 월드컵때 꿈은 이루어진다 했잖아요. 한국 대표팀하고 한국 사람들하고 뭐가 되었습니까? '주체의 확대'가 되었어요. 홍명보가 골 넣으니까 자기가 넣은 것 같아요. 기분 좋지요. 이것이 주체의 확대 아닙니까? 그러니 이것은 하나가 모이든 둘이 모이든 인간은 자기 세포가 있고 육체가 있는한 생존에서 벗어날 수가 있겠습니까?못 벗어납니까? 못벗어나지요.

그러니까 살면 살수록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 부를 수록, 내심에 뭐가 누적이 되있느냐 하면은 하나님에 대한 원망과 불평이 누적이 되는 겁니다. "이렇게 기도하고 이렇게 애썼는데, 하나님 당신 나에게 해준 것이 뭐냐?" 이말이죠. 그러니 이렇게 자기 몸이 힘든 것때문에 그 다음부터 사람들은 오기를 부리는데, 그것이 뭐냐하면 '당신이 나를 버린다 할지라도 나는 당신을 버리지 않겠다'는 오기가 싹트기 시작합니다. 과도한 기도, 과도한 헌금과 과도한 봉사가 들어가지요. 그것을 목사들이 노렸던 겁니다. 아주 즐거워 하지요.

이제 부터 좀 어려운데요. 생명의 차원에 들어가버리면. 무엇을 알아야되느냐 하면은 "고생한다고 해서 천국에 넣어주지 않는 하나님의 이 심정을 니가 아느냐?"이 심정에 일치 되어야 합니다. 야 이거 어렵지요. 고생 했는데도 이 세상에서 죽도록 고생했다는 이유때문에 "너는 고생을 이렇게 심하게 했으니까 죽어서는 편하게 살게 해줄게"라고 거저 넣어줄만도 한데. 그걸 일체 안넣어주시는 하나님의 심정을 우리가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왜 없다고 하느냐 하면은 고생한 당사자가 누구입니까? 남이 아니고 내가 고생하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서 옆동의 아파트 406호 사람이 직싸게 고생했는데, 일이 잘 안되더라. 이때 기분 째집니다. 그리고 만약 406호가 교회 열심히 다녔는데 나중에 죽을때 보니까 지옥가더라, 역시 기분 좋아요. 역시 하나님 훌륭하십니다 이렇게 나오는데. 그런데 이야기가 406호가 아니고, 이 407호 바로 이 집이 당사자라면, 누가 누구한테 대들겠습니까? 내가! 누구에게 대들겠어요? 하나님께 대들지요. "하나님 저 그만큼 고생하고 교회 헌금하고 십일조 다하고 금식하고 다 했는데 왜 저의 열심 봐서라도 넣어 주시지. 우리 목사님은 간다고 분명히 장담했는데. 왜 하나님은 안 넣어주십니까?" 이렇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아주 말씀대로 이야기 하셔요. "선악과 따먹고 애기 낳으면서 해산하면서 고생하고 선악과 따먹고 이마에 땀 흘리면서 추운날에 시장에서 돗자리펴고 귤 하나팔아 애들키우는 그러한 모성의 세월을 보냈다는 이유때문에, 천국의 생명 나무 따먹게 하는 그런 식으로 창세기 3장에서 말씀으로 가르친 적이 없다" 이렇게 나오면 여러분들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아니 우리 목사님은 고생하면 들어간다고 하시던데?" 그것은 목사가 당신을 하나의 고객으로 생각해서 팬클럽 차원에서 그렇게 봉사한 것이고요. 실제로 성경에서는 고생한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그럼 목사님 고생안하고 자기 마음데로 살아도 구원받습니까?" 딩동!. 그렇습니다. 구원받습니다. 교회에서 이 이야기를 못해요. "여러분들이 교회에 1년에 한번 나왔어도 구원받습니다. 2년에 한번 나왔어도 구원받습니다. 십일조같은 거 안해도 됩니다. 전도 하나도 안 했어도 됩니다. 다만 그래도 예수님때문에 구원받습니다". 이 이야기를 교회에서 왜 못할까요? 그렇게 해버리면 무엇이 안될까요? '교회 장사'가 안되는 겁니다.

아까 제가 무슨 용어를 썼습니까? '거래'라고 했지요. '거래'. 장사, 거래라는 것은 어떤 용어인가 하면, 내가 상대방과 동등된 상태에서는 거래라는 말이 성립해요. 예를 들어 여기 콩나물을 살때 콩나물 파는 그 아줌마의 노예가 되려고 콩나물 사는 것입니까? 아닙니까?  아니잖아요. 내 돈 줄 것은 주고 콩나물을 사면, 이것은 거래고 흥정이잖아요. 이제부터 내가 아줌마의 식모이자 가정부가 되겠습니다. 이러면서 콩나물 사는것이 아니지요. 그러니까 하나님은 나에게 줄거 주고, 내가 당신에게 원하는것 줄게. 십일조를 줄테니까 줄거 주고 받을 것 받겠다 하는 이런것이 뭐에요? '거래'이고 '흥정'이 되지요. 사람들은 이것을 좋아하는 거에요. 왜 이것이 좋냐하면은 하나님을 그렇게 나와  동등되게 만들어버리면 내 주체와 내 자존심이 여전히 살아있잖아요. 그런데 만약에 내가 하나님께 내 몸을 헌신해버리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지금까지 내가 나를 키우기 위해 나 하나 훌륭하고 착한 사람 만들기 위해서 들였던 공들이 어떻게 됩니까? 무엇이 되버립니까? 하루아침에 무의미 하게 되버리죠. 목사님들이 맨날 하는 소리가 "젊은이여 국가와 민족과 교회를 위해서 빛과 소금이 되라"고 하잖아요. 그렇게 빛과 소금 되기위해서 열심히 했어요. 그런데 나중에 복음을 알고 보니까 빛과 소금이 안되도 구원 받는 거에요. 그렇다면 목사가 평소에 "빛과 소금이 되세요. 빛과 소금이 되려면 우리 교회 오셔서 훈련하셔야 합니다. 담배피고 술먹고 하는 인간을 국가와 사회와 교회를 위해 일하는 훌륭한 선교사로 만들어 내겠습니다"라고 하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이야기 하신적이 없다는 말이죠. 나중에 천국 가보니 빛과 소금이 안되도 천국 가더라 이말이지요. 그러면 그 목사님에게 따지기를 "빛과 소금 안되도 구원받는데 왜 당신은 빛과 소금 되라고 했느냐?"라고 하면, 그 목사는 뭐라고 대답 하느냐 하면 "내가 강단에서 당신들에게 빛과 소금되십시요라고 말할때에 당신들 기분 좋았잖아". 이 말이지요. 본인들 기분 좋아놓고 이제와서 왜 따지냐 이 말이지요. 무슨 뜻입니까? 빛과 소금되라 했을때 남들은 빛과 소금 안어되도 나는 이 훈련소에서 훈련받으며 저쪽과는 차별되는 빛과 소금같은 훌륭한 일꾼 되었다는 자기 자신을 바라보면서 스스로를 얼마나 대견해하겠어요?. "아~사람답게 사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구나". 얼마나 자긍심이 있겠습니까? 그것이 제가 지금까지 이야기했던 '거래'요 '흥정'이라 이말이지요.

예수님이 이런 말을 하셨습니다.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라고 하실때에. 새삼스럽게 죄를 지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미 창세기 3장에 보면 우리 조상이 선악과를 따먹었잖아요. 선악과를 따먹은 이상 죄라는 개념이 뭐냐하면, 생명나무가 없으면, 생명나무와 차단되어 있으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것이 '죄인'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저주'이기 때문에 그래요.하나님의 저주는 '죄를 지었기 때문에 저주가 오는 것'이 아니고 '죄 아래서 태어났기 때문에 저주하는 것'이에요. 방금 이문장은 줄을 그어야 될 정도로 중요한데요.

사람들이 생각하는 죄라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은요. 자기가 죄를 결정해요. "나는 먹지말라는 술을 마시는 죄를 지었으니, 다음주에 헌금을 두배로 해서 죄를 상쇄시켜 약간의 착한 이미지를 더해야겠다"라든지, 성가대를 일찍 참석한다든지, 주일학교 교사를 한번 더 지원한다던지하는, 내가 화요일날 야동 본 죄를 주일 날 예배 졸지않고 드림으로써 상쇄시킨 다던지 하는 그것으로, 자기 내부에서 '거래'가 형성 되지요. 차변 대변이란 말이 있어요. 차변에는 착한일 써놓고. 대변에는 나쁜일 써놓고 그럽니다. 착한일 51% 나쁜일 49% 착한일을 2퍼센트 더했기때문에 '부끄러운 구원(기존교회에서 이야기하는)'이지만 일단 커트라인 통과 됬잖아요. 그러니까 어릴때 착한 일을 많이 한 사람은 커서 나쁜 짓 해도 괜찮지요? 왜냐면 그만큼 저축을 많이 했기 때문에요. 정기적금같이. 어릴때 더군다나 부모말 잘 듣는 그런 착한일 많이 한 사람.

그런데 커서 취직해보세요. 취직하고 보니 상대방 라이벌 회사의 정보를 빼내야 하는 이런 것. 이번에 뉴스에 하이닉스 관련기사 나오지요? 삼성전자의 기밀을 저쪽에서 빼는 겁니다. 회사에 가보면 회사 자체가 경쟁이니까, 나의 물건 하나 팔기 위해서 상대방 회사를 폄하하고. 그것은 갈라디아서 5장에 보면 시기와 질투에 해당되지요. 차라리 갈라디아서와 에배소서를 몰랐으면 그것이 죄인줄 모르겠는데요. 괜히 교회 와가지고 성경하나 더 보니까. 취직하고 보니 말씀에 안 걸리는게 없어요. 집단적 구조적 범죄에 가담 안할수 없게 되는거에요. 성경에 다 걸리게 되니까. 그때 하는 말이 뭐냐하면은 "괜히 성경 봤어. 차라리 안볼껄".하는 거에요.

그때 '삐용~'하고 요술봉이 나타나야 하는겁니다. '피로 구원!'이라는 요술봉. 그렇게 되지요.

지금 여러분이 하신 질문에 대한 답변이 길어진 이유가 있어요. 먼저 기본 개념을 아셔야 합니다. 차원이 두개있다고 했지요? 하나는 무슨 차원입니까? '생존차원'. 또 하나는 '생명 차원'이 있습니다. 생명은 인간 힘으로 얻을 수 없습니다. 쉽게말해서 인간의 행함, 종교적인 행함으로 생명나무의 과실을 따 먹을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못 따먹는다는 겁니다. 그게 벌써 창세기 3장부터 이미 법으로 굳혀져 있습니다. 그래서 천국은 생명나무를 친히 '주어야' 먹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공짜'라고 해요. 진짜 공짜에요.

그런데 사람들이 기대하는 공짜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생존차원에서의 공짜를 원하는데, 진짜 복음에서의 공짜라는 것은 생명나무 과실을 공짜로 주겠다는 겁니다. 요한계시록 22장에 보면, 생명나무가 생명수 물이 흐르는 옆에 가로수처럼 쫙  놓여 있는데, 이것을 맘 놓고 따먹어라 이겁니다. 그런데 이 농사를 누가 지었습니까? 하늘나라의 생명나무 가로수. 그 농사 누가 지었어요? 바로 '어린양'이 지었습니다. 어린양의 보좌에서 나오는 물가. 그것이 강이 되고요. 어린양의 보좌에서 강물이 흐른다는 것은 창세기 2장에 에덴동산의 중앙에 강이 4가지 강이 흐릅니다. 그 네 강이 흘러서 에덴동산의 모든 동식물을 살리고, 또 누구를 살리느냐 하면은 에덴동산에 살고있는 아담과 하와를 살리지요.

또 에스겔 47장에 보면, 새로운 성전이 나오지요. 그 성전의 특징이 무엇이냐면, 물이 흘러나와요. 처음에는 물이 발목까지 오다가, 무릎까지 오다가, 나중에는 물이 차고 넘치지요. 물이 차고 넘치면서 새 성전 주변에 있는 모든 생물들을 살린다고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서에서는 이 이야기를 무엇이라고 하느냐 하면, 이것을 '그림자'라고 했습니다. 그림자라는 말이 어려우시면 얼마전에 서울에서 불났다는 뉴스 들으셨나요? 모델하우스에 불이 났어요. 모델하우스라 하는 것이 구약에서 나오는 새 성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걸가지고 '그림자'라고 해요. 그런데 우리는 그림자만 알면 찝찝하잖아요. 우리는 설계자가 만들어놓은 설계도만 아니라 실제 아파트를 봐야지요. 그런데 우리가 관심있는 것은 실제 천국이라고요. 근데 제가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은 천국에도 똑같은 구조로 물이 흘러나오고 물이 있어야 생명나무가 자랍니다. 그런데 그 물은 어린양(예수님)이 계신 보좌에서 나오고 생명나무가 자라면 거기는 어린양이 공짜로 주는 은혜로 말미암아 그 생명나무를 따먹고 영생. 영원히 사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를 종합해 봅시다. 종합해보면, 간단하게 나와요. 요한복음 11장에 나옵니다. "죽어도 살리라". 이겁니다. 한번 적어 볼게요. "죽.어.도.산.다.". 여기서 질문 들어갑니다. 죽어도 산다라는 말을 좋아하는 사람은 누굴까요? 그리고 싫어하는 사람은 누굴까요? 좋아하는 사람은 사도행전 7장에 나오는 스데반 집사가 있습니다. 아주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요. 돌에 맞아 죽으면서. 그 다음에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거지 나사로가 있죠. 평생 고생하다가 이제 제대 하잖아요. 여자들은 모릅니다. 남자들 군대 제대 하는게 얼마나 좋은지. 그래서 군이 얼마나 지독하고 힘들던지. 제대하고 나서 꿈에 군대가 계속 떠올라요. 그래서 군에 갔다온 아버지는 아들들이 "될수 있으면 군대 가지 않았으면 좋겠다" 속으른 이런 마음 가지고 있으면서 "아들아, 남자가 됬으면 한번 갔다와야지" 이렇,게 말하거든요. 이런게 아버지의 이중성이거든요. 남자가 되려면 갔다와야된다라고 말하면서도 부인이 "여보 우리 아들 군대 면제됬어" 이러면 남자들 이래요 "잘됬어!"

'죽어도 산다'라는 말을 좋아하는 사람은 스데반 집사나 거지나사로가 좋아하고, 그 다음에 세리와 창기가 좋아하고요. 그리고 예수님 십자가 달리실 때 옆에 있었던 강도 있지요? "주여 저 어떻게 됩니까?", "네가 오늘 나와 함께 천국에 가리라". 그 강도 좋아하고요. 또 누가복음 18장에 보면, 성전에서 세 사람이 나오지요. 바리새인,새리와 심판자. 십일조, 금식, 토색 간음 간통한적 없고, 불의나 거짓말 한 적 없는 바리새인 한사람하고. 그리고 또한 사람 새리입니다. 감히 얼굴을 못들고 자기를 죄인이라고 말하는 세리. 세금쟁이죠. 그당시 세금쟁이는 직업도 천한 직업에 속했습니다. 요새말하면 조폭 양아치같은 부류입니다. 그리고 또 한분이 등장하는데 그분이 누구냐하면 심판자입니다. 축구로 말하면 부심이 아니라, 주심이죠. 축구에서 주심이 옵사이드라고 하면 옵사이드가 됩니까 안됩니까? 옵사이드가 되죠? 여기 예수님이 이 주심인데, 뭐라고 하시느냐 하면은 쉽게 말하면 "바리새인 너는 지옥가고. 새리 너는 축하한다 천국간다" 이렇게 되는 거에요. 본인이 본인의 주심이 아니에요. 내가 내 주심이 아닙니다. 재밌는 것은요. 이쪽에 바리새인이 있고, 여기 새리가 있는데, 거기에 예수님이 주심으로 개입하셔서는, "세리는 천국에 간다 바리새인은 지옥에 간다" 이렇게 판정을 하시면, 그것이 번복이 됩니까 번복 안됩니까?. 그것이 중요합니다.

한국교회 어느 목사가 여러분 지적하고 이근호가 지적하고 그런 것 무시하세요. 의미없어요. 저나 그들이 심판자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여러분들을 합격이라 한다면 아무리 간음을, 간통을 하던, 거짓을 하든, 횡령을 하든, 그것을 생각하지 말고요. 착하게 살아도 소용없어요 착하게 살아도. 오늘 참 이상한 것 가르치는데. 빛과 소금되도 소용없어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나보고 "너는 합격" 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마지막 심판주가 합격이라고 선언했기때문에 어떻게 됩니까? 악마가 아무리 고소하고 정죄해도 합격이 되는 겁니다.

질문자: 그것을 어떻게 받습니까?

그 질문이 나올줄 알고 있었어요. 그 질문을 마르다와 마리아가 했거든요. 예수님은 이렇게 답변 하셨습니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 그 이야기를 제가 설명해 줘야해요. 마르다 마리아가 이 말씀을 생존차원에서 보았어요. 뭐냐하면, "우리 오빠가 죽었는데 우리는 어떻게 살아". 관심이 어딥니까? 관심이 주님을 보는게 아니고, 누구를 봅니까? 나를 보는 겁니다. 여기서 질문 하나 할께요. 여기 앉아계신 000씨는 지금 누구에게 관심 있으십니까? 질문이 어려웠나요? 쉽게 말할게요. 아침에 눈 뜨고 잘때까지 000씨는 누구 생각해요? 그야 당연히 나를 생각하지요? 그게 마르다 마리아에요. 그리고 그것이 오늘날 저와 여러분들입니다. 뭐 착한일을 했다? 해도 소용없어요. 부메랑 아시지요? 부메랑을 날리면 어디로 돌아 옵니까? 다 자기에게로 돌아 오는 거에요. 교회란 곳을 가도 마찬가지에요. 그냥 집이란 장소를 교회로 옮긴거에요. 여기 407호를 교회로 옮긴거에요. 교회 아닙니다. 그거 주님의 몸 아니에요. 407호가 그냥 이동한 것 뿐이에요. 인간은 교회 간다고 할지라도 주님 생각 하지 않습니다. 부메랑처럼 휙휙 돌아서 누구 생각합니까? 자기 생각해요. 그게 누구냐면? 마르다와 마리아에요. 그래서 마르다 마리아가 '예수 믿어서' 구원받았다고 생각하시면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마르다 마리아가 예수 믿어도 그것은 예수님이 생각하는 믿음이 아니고, 평소에 자기가 자기생각하는. 생존차원에서 잘되기 위해서 그냥 예수님을 이용하겠다는 차원일뿐이에요. 그저 자기 생각 포기 안한 겁니다.

강의 처음으로 돌아가 봅시다. 우리가 콩나물을 살때 아줌마에게 폭 빠집니까? 아니면 콩나물로 오늘 저녁에 맛있는 국을 끌여줄 자기 가정 생각합니까? 그것을 뭐라고 하죠? 믿음이라고 합니까? 아니죠. '거래'지요. 바로 우리는 교회 가서 '거래'하고 있는거에요. 우리 주님하고. 해줄 것 해줄테니까 내 성의를 봐서라도 내놓으라는 거에요. 그 거래의 매개자가 누굽니까? "자 오만원!오만원! 골라골라~" 이렇게 흥정을 매기는 사람이 누구에요? 두 글자로 뭡니까? 아까 질문한 그 질문의 답이 뭡니까? '목사'에요. 그래서 목사는 '상인'이에요. 목사는 주의 종이 아니고 상인입니다. 주의 종은 스데반집사나 사도바울이 주의 종이고 목사는 그냥 '상인이에요. 목사는 자기의 뒤에 자기 가족이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나이 많으면 노후 대책을 걱정해야되요. 그리고 그 교회를 키우면 자기 아들 신학교에 보내서 공부시켜서 목사자리 세습을 시키지요. 콩나물 파는 상인이 손님을 위해서 헌신하지 않습니다. 이거 팔고 돈 벌어서 자기 아들 공납금 대야하는데, 이걸 위해서 찬바람 맞아가면서 그동안 모정의 세월을 보낸 거에요. 그동안. 그 콩나물 파시는 어머니도 모정의 세월이고. 그 콩나물을 사서 아들 공부 잘 하라고 콩나물국 끓여주는 그 어머니도 모정의 세월이에요. 모정의 세월~♬. 전부 다 다 같이 똑같은 거에요.

그것을 '아담의 보편성'이라고 아주 철학적인 용어로 말해요. '아담의 보편성'. 모든 인간은 아담의 죄로 말미암아 잘난 체 하지만, 너나 나나 다 시시합니다. 교회 목사도 시시하고, 앉아서 목사에게 축복해 달라는 그 사람도 시시하고. 안수해주는 목사도 시시하고요. 시시하지 않으신 분은 한 분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변화산 상에서 구름속에서 누구 목소리를 듣느냐? 하나님의 음성이 나타나지요. 야고보와 베드로와 요한(그 사람을 임원진이라고 할수있죠). 세명의 회개총무와 부회장등. 이렇게 임원진이 올라갔을때, 그때 구름속에서 누구 음성이 들리지요? 그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이 옆에 계시고, 하나님의 음성이 따로 들리지요. 그때 들린 음성의 내용이 뭐냐하면요. "너희는 옆에 있는 예수의 말을 들어라. 예수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이다". 이 말은 뭐냐하면, 하나님이 예수님하고 이미 흥정과 거래가 끝났다는 겁니다. 끝났다는 거에요. "너가 아무리 해도 안되는 일이 있어". 아무리해도 생존차원에서 인간은 못 벗어납니다. 교회 십년 이십년 다니고, 장로 집사 권사 되어도 마찬가지에요. 인간은 몸이 있는 한, 200조개의 세포가 있고 못 먹어서 배가 꼬르륵거리는 한은, 지금 몸이 아픈게 중요하지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예수나 하나님이라는 이미지가 중요하지 않아요. 내 몸이 아프면 그것은 나중 이야기입니다. 내가 몸 건강해서 교회 갈때에야, 비로소 예수가 관심목록에 있지요. 몸 아프면 정말 만~사가 귀찮아요. 젊은 분들은 그것을 몰라요. 젊은분들이야 몸이 튼튼하니까요. 하지만 연세가 육십되고 칠십되고 팔십쯤 되어보면, 이제는 예수도 귀찮고, 목사가 심방오는 것도 귀찮습니다. 제가 직접 경험한 것니까 과장된 것이 아닌데, 어떤분과 이런 대화도 했어요. "권사님 제가 찬송가 불러줄까요?" "목사님 찬송가 평생 불렀습니다. 그거말고 나훈아에 청춘을 돌려다오 불러주세요." 나는 이제 교회도 징글징글해. 교회 심방, 찬송가, 성경책, 성경귀절, 이런거 모두 징그럽다는 거에요. 교회 권사까지 됬는데 설교 한두번 들었겠습니까? 병석에 가서, "제가 설교할게요"라고 하면, "아픈 내가 설교할께. 나 위로한 답시고 하는데. 그런 설교 내가 할께" 이래요. 아마 죽은 사람은 설교하면 벌떡 일어날 거에요. 내가 설교할 거라고요. "사도신경 내가 외울게. 주기도문 내가 외우고 죽을게" 이렇게요.
 
아무튼 인간은 생존차원에서 벗어나지 못 합니다. 아까 이야기 했지만, 그냥 생존 하는 사람은 생존만 유지하는 그것이 마음에 차지 않아요. 더 나아갑니다. 남은 죽고 누구만 잘되라고요? 나와 내 가족만. 나와 내 배아파서 낳은 새끼만 잘될때. 다른 사람은 다 대학 떨어지고 자기만 되야합니다. 형이 미우면 형 대학 떨어지라고 합니다. 형제간에 싸우니까 형 잘되는 꼴을 못봐요. 이것이 무슨 이유냐하면, 신이 누구의 신입니까?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누가 신이 되었습니까? 각자 각자 모두가 신이에요. 신과 신들의 앙투? 경쟁심? 이런 것뿐입니다.

마르다 마리아가 이야기합니다. "나는 예수님 믿습니다". 이렇게 말할때에, 예수님이 기가 차신거에요. 자기가 지금 믿는다고 한 말을 본인 스스로가 몰라요. "나는 예수님을 이용하길 원하고, 내가 좋아하는 예수님만 원합니다". 이렇게 솔직하게 말해야 할텐데요. 그렇지를 않고, 예수님께서 "날 믿는자는 죽어도 산다"라고 하시니까, 자꾸 "믿습니다!"라고 하는거에요. 그것이 처음엔 믿습니다라고 해봐도 안차니까 말을 격앙되게 하는거에요. "믿쒸미다!". 기도를 해도 조용히 하면 영 자기 성에 안차니까, "주여!주여!" 이렇게 삼창을 외치는거에요. "랄랄랄라#&%" 무슨 소리인지 자기도 모르는 이상한 말을 하고요. 이것이 바로 '바알과 아세라'의 기도잖아요. 성경에 나옵니다. 자학하는 기도. 아침부터 저녁까지 자기를 찔러 가면서 하는 기도. 이것이 바로 '집단 최면'이라는 것 입니다. '집단최면'. 이것을 할 때에 혼쭐 즉 '혼'이 나가지요. 그럴때에 '엑스터시'라는 상태에 들어 갑니다. 일단 신경 조직을 치면요. 신경조직은 일종의 에너지입니다. 신경조직은 세포로 되어있는데, 이 세포를 활성화 시키게되면 우리가 평소에 생각하지 않는 여분의 에너지가 발산되요. 그러면 여기서 평소에 생각했던 이성적인 상태에서 벗어나서 초이성적인, 무의식적인 것이 튀어나옵니다. 그래서 부흥사가 가르쳐준데로 눈감고 박수를 치면 엑스터시한 상태에 빠집니다. 그러면 그야말로 절정에서 오는 기쁨을 느끼면서, 왈칵 눈물이 쏟아지죠. 일분 이분 그 순간만큼은 그동안 아팠던 고통이 사라지는 겁니다. 치유의 은사를 받았다는 겁니다. '최면효과'죠. 이것은 모든 종교에 다 있는데, 특히 유명한 곳이 단양의 '구인사'라는 곳이 전문입니다. 구인사는 신도가 이만명이 넘어요. 거기는 방언과 병고침이 주특기에요. 사람들을 엑스터시한 상태로 몰아넣는 것. 그러니 이만명이라는 신도가 모인거에요. 이런 무속신앙을 기독교에든 불교에든 접목 시키는 거에요. 고객만족 시키면 장사가 잘 되는 거에요. 고객은 왕이니까. 목사는 상인이니까요. 생존 차원에서 사람들이 원하니까요.

또한 성경 귀절을 이용해서 간증 집회를 해서, 간증으로 시작해서 간증으로 끝납니다. 어떤 사람이 이렇게 행하니까 나도 되더라. 안 된다고 말하지 말고 해봐라. 네자로 "하!면!된!다!" 영어로 "I CAN DO IT". 나는 할수 있다. 이것을 계속 적극적인 사고방식으로 집어넣는 거에요. 그러면 자기는 관심사가 예수님과 하나님이 아니라, 예수와 하나님과 거래해서 '나는 뭔가 교회가서 챙겼다'는 자기 애착, 자기 집착을 강렬하게 키우게 되는 거지요. 이점을 누가 지적하게되면 설교 듣다가도 뛰쳐 나갑니다. 우리교회에서도 설교듣다가 뛰쳐나간 사람이 한 두명이 아닙니다. 벌써 설교를 하면 인상과 안색이 변하고 있어요. 그래서 안색이 변하는 사람이 보이면, 그 사람을 향해 계속 이야기합니다. 이래도 안 뛰어나갈겁니까? 이렇게 말해도 당신이 예수를 이용하러 온게 아닙니까? 분명히 그 정체를 드러내라 이 말이지요.

그렇다면, 생존차원에서 생명차원으로 바뀌는 이것이 문제인데요. 바뀌는 이것은 '우리 인간으로써는 불가능'합니다. "불가능하면 그럼 우리는 때려죽어도 천국 못가겠네?". 잘 들어보세요. 놀라운 것은, 생명차원에 계시는 주님께서(예수님은 생명나무라 하셨죠. 요한복음6장에 나옵니다. "나는 생명의 떡이다. 나를 먹는 자는 생명을 얻고"라고 되어있죠) 생존 차원에 섞이게 되면, 말씀이 육신이 되면, 이 둘은 같은 말입니다. 생명이 생존에 쫒기게 되면. 우리가 무시할 수밖에 없는 존재로만 다가와요. 흠모할 것이 없는 그런 모습. 이사야 54장에 보면, 주님께서 나타나시면 우리가 흠모할 것이 없고 부러워 할 것이 없는 모습으로 온다고 나옵니다. "아이구 저렇게 살바에야 차라리 죽는 게 낫지" 할 정도로, 아주 '낮아진 모습'으로 와요. 낮아진 모습으로. 그런데 기장측, 자유주의 진영쪽에서는 뭐라고 말하는가 하면. 예수님이 낮아졌기때문에 우리도 낮아져야한다라고 말해요. 그래서 "가난한 자를 도와라 아이티에 성금내라"라고 하는데, 그것도 잘못이에요. 주님이 낮아지지 우리가 같이 낮아 진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 아닙니다. 주님께서 낮아지셔서 오셨다고 해서 우리도 같이 낮아지는 흉내내면 꼴이 무슨 꼴이되나요.

주님께서 낮아지신 것은 다른게 아니라, 우리가 평소에 얼마나 '나는 나밖에 모르는 교만한 자'인가를 주께서 낮아지심으로 들추어 내신 거에요. 분명히 해야합니다. 주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습니다. 더 보탤까요? 병든자라야 의원이 필요하고,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필요없지요. 그래서 예수님이 낮아지셨으면 우리도 낮아져야 합니까? 그럴 필요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잘난척 하며 살아온 그대로 있으면 되요. 제가 이상한 논리를 말합니까? 그렇다면 기존 교회를 이야기 해봅시다. 기존교회는 예수님이 낮아졌기때문에 우리도 낮아져야 한다는 겁니다. 우리가 낮아져버리면 우리는 졸지에 뭐가 되버립니까? 우리는 의인이 되어버려요. 의인이 되는데, 그런데 우리는 생존차원에서 못 벗어나지요. 결국 생존차원에서 못벗어 나면서 의인인 척, 낮아진 척 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두자로. '위선'이지요. '위선'. 부족합니다 부족합니다 라고 하는 것. 교인들은 그냥 부족합니다라고 말해도 목사는 더합니다. "나는 쥬의 종입니다. 뷰~죡한 자입니다. 할~렐루야."

그게 진짜 목사 모습이 아닙니다.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여러분 제가 지금 설교하는 것은 우리 가족 밥먹고 살기 위해서 합니다". 이게 맞고 옳은 거에요. "하지만 이렇게 여러분을 고객으로 생각하고 여러분의 돈을 탐내는 나같은 인간도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구원받습니다. 여러분들도 돈 노리고 왔지요? 축복노리고 왔지요? 하지만 그런 죄도 예수님의 피로 구원받습니다."

주님 혼자 낮아 지시도록 좀 놔두세요. 우리가 흉내내서 낮아지려고 하지 마시고요.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말은 낮아지라는 말이 아니고요. 나는 죽어마땅한 인간입니다라는 그말입니다. 자기의 겸손이 우리의 십자가를 대신 하면 안되요. 이것은 또 하나의 위선을 우리에게 양산하는 것 밖에 안됩니다. 교회에서 겸손해 보세요. 그 다음부터 교회에서 무슨 콘테스트 벌어지는 줄 아십니까? 겸손 콘테스트 벌어져요. 새볔기도 다른 사람이 두시간 하면 오기가 나서 두시간 반동안 합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왜 목사들이 강단에서 헌금한 액수를 밝히고 이름을 밝히는데요. 못한 인간들 뭐하노 지금? 이쪽에서 헌금 잘 내서 서울대학교 가서 이렇게 감사헌금 냈잖아. 당신들 전문대학 가지말고 헌금내 그러면 벌써 서울대학 합격이야라는 것을 어느정도 압력을 가하는 거에요. 어떤 목사는 노골적으로 이렇게 말해요. "줘야 받지. 별미를 받쳐야 복을 받지. 헌금도 안하고 공짜로 복을 원하십니까" 이렇게 노골적으로 말한다구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내가 온것은 섬김을 받으려 온것이 아니다. 너희들 가만히 있거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대속물로 내몸을 몽땅 주려함이라. 하나님께서 너하고 계약한 것이 아니고, 내가 너희들 대신 아버지와 새 언약 맺을게". 아버지와 예수님 사이에 맺은 그 언약 때문에 아무것도 한것 없고, 그저 죄만 짓던 우리가 공짜로 오늘밤에 죽어도 낙원 간다는 것. 이것이 복음입니다. 바로 이것뿐이에요. 주님 바라 볼 때마다 "참 미안합니다" 라고 나오면 주께서 "니가 오늘밤 낙원에 있으리라". 그거에요. 그런데 아직 젊은 이들은 이걸 잘 몰라요. 평생 살아보면서, 얼마나 내 속에 위선적인 죄가 폭팔해 나오는지. 우리 준현이 아빠는 잘 알아요. 왜냐면 그만큼 많이 살았고, 직장 생활 하기때문에. 얼마나 말씀대로 산다는 것이 이 세상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아요. 여기 아가씨는 없지요? 아가씨가 여기 있다 한다면, 시집 가보세요. 시집가기 전까지는 성가대 봉사하고, 또 좋은데 시집보내 줄까싶어서 봉사 열심히 했지만, 막상 시집 가고 나서는 설교도 안들어요. 유아실에 가서 자기 애만 보지요. "김집사님, 애들 피아노학원 어디가 좋아요?" 이런 것에만 관심있지 설교 듣지도 않습니다. 축복이나 받고 집에 가는거에요. 정보교환이에요. 정보교환.

그리고 교회 앞에 가게 세워 보세요. 단골 모으기 위해서 교회에서 감사헌금 봉투에 ‘김약국 개업 감사’ 하면 “김약국, 우리교회 나온다면서…….” 죽 오게 하는 것을 노리고 정수기 하나 더 팔려고 보험 하나 더 넣으려고……. 제가 너무 노골적입니까?  그래서 다 큰 교회 가는 거예요. 시집 못 가는 사람들 아무래도 배필을 건질 수 있는 여지가 많잖아요. 작은 교회 총각 둘하고 큰 교회 총각 백 명하고 이미 2대 1일이고 하나는 100대 1인데 골라잡을 수 있는데 왜 큰 교회 안가겠어요? 만날 “교회 오빠, 교회 오빠” 하면서 행복해 떠들고 있잖아요. 그런데 그렇지 않은 교회가 없다는 거예요. 그냥 그것을 하나님이 허락하셨다는 겁니다. 왜, 어차피 완전한 교회는 없기 때문에 바로 그것을 통해서 얼마나 주께서는 죄인을 원하고 있는지를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10분 쉽시다
 관리자 (IP:220.♡.41.203) 10-11-10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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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10 13:40:31    녹취 : 송재원
 

아까 쉬는 시간에 질문 하신 것 있었지요? 질문이 이러한데요. 어떤 목사님께서 예언을 하시는데 과연 이 시대에 아직도 예언의 은사가 있습니까? 라는 질문입니다. 2011년도까지 예언하시는 분을 예언1이라하고, 2012년까지 예언하는 용한 사람을 예언2라고 합시다. 그런데 2100년까지 예언하는 사람있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대단한 예언가이겠지요? 그러면 역사 끝날때의 일을 미리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다면, 어떻겠습니까? 이 사람은 그야말로 예언가중의 예언가겠지요? 그런데 그분이 누구냐하면 바로 예수님입니다. 바로 이것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복음을 아는 목사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 끝날때를 예언하셨지요? 그러면, 끝날때를 예언하셨다. 세상의 모든 것이 멸망해도 너희들은 휴거되어서 주님이 재림 하실때에 천국간다. 이런 이야기를 미리 해버리면, 앞에 2011년 2012년도의 예언가들은 그 앞에서 빛을 잃어버리죠. 마치 촛불이 태양앞에서 의미가 없듯이 말입니다.

문제는 2011, 2012년도에 예언한 사람이, 예수님을 증거하면 괜찮은 일인데요. 그 예언이 생명 차원이 아니고, 생존 차원의 예언을 해서 사람을 꼬시기 때문에 문제가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적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예언을 가짜들이 앞에 등장해서 가려버리니 말입니다. 진짜 사람을 생명으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고, 그냥 인간의 욕심으로 인도하니까 이것은 은사라 할수 없죠. 진짜 성령받은 예언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아까 이야기 했던, "죽어도 살겠고". 이것보다 더 이상의 예언은 없습니다.

또 두번째 질문이 있었지요? 두번째 질문은 이렇습니다. "어린아이에게 어떻게 신앙교육을 하면됩니까?" 라고 물으셨습니다. 예수님도 어렸을적부터 어른이 되실때까지 키나 지혜가 자라나셨는데, 어린아이들도 자라나는 것이 있습니다. 어떤 것이 자라나느냐를 말씀 드리겠습니다. 처음에는 어린아이가 어머니의 자궁안에서 갓 나왔기때문에, 그 아이는 아직도 엄마의 자궁안에서의 생활이 유지가 됩니다. 다만 자궁안에서와 어떤 차이가 있느냐하면, 시각적인 것과 구강적인 것이 새로운 모빌을 달듯이 딸려나옵니다. 그 다음에 중요한 것이 있는데, 여기에는 자기 나름의 정신적인 것이 필요가 없어요. 왜냐하면 아직도 엄마와 한 몸체이기 때문에. 그런데 6개월이 되게 되면, 라캉은 거울단계라고 이야기 했는데요. "엄마 몸하고 내몸이 다르구나"하는 이걸 알아요.

자아,주체라 하는 것은 뭐냐하면, 떨어짐으로 생기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여자가 남자하고 결혼했습니다. 그런데 10년뒤에 결혼한 이 남편이 살해됐다 혹은 이혼됐다고 한다면 그 여자가 결혼 전으로 돌아갈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못 돌아가지요. 왜냐하면 남자의 빈자리가 생기거든요. 남편을 잊지 못해서 그 남편만 생각하면 막 웁니다. 그런데 10년동안 아직 결혼을 안한 친구가 옆에서 그러는 겁니다. "거 왜우노? 남자 많은데 왜울어?". 이 친구와 남편잃은 사람과의 차이가 뭘까요? 자기는 결혼을 안 해보았기 때문에, '빈자리'가 없는 거에요. '잃어버린 경험'이 없는거에요.

이것과 관련되는 이야기를 하나 더 해봅시다. 요셉하고 그 형제들 사이에 일입니다. 요셉이 애굽나라의 국무총리가 되었습니다. 그때에 가나안땅에 기근이 일어났잖아요. 그런데 형제들이 양식 사러 애굽으로 왔을때 요셉이 "형님! 오랫만입니다!"하면서 악수하며 반기면 될텐데, 왜 요셉이 자기 정체를 숨깁니까? 왜 숨길까요? 그것도 3번씩이나요. 처음에는 시므온을 볼모로 잡고, 두번째 베냐민도 잡고요. 이렇게 왜 세번씩이나 왔다 갔다하도록 합니까?

요셉이 국무총리가 된 것은, 잃어버린 긴 빈자리가 있어요. 옛날에 촐랑대면서 "나는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다"는 그 요셉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새로운 요셉 되었다는 잃어버린 경험. 탕자의 경험(완전히 초죽은 당했다가 살아난 경험)이 없으면 야곱과 형제들은 구원받지 못합니다. 그래서 야곱과 형제들은 자기세계를 포기해야 되요. 포기하기 위해서는, 야곱과 형제들은 요셉과 같은 경험을 해야되요. 무슨 경험을 당해야하냐 하면은, 자기가 진짜 중요하게 여기는 것을 몽땅 다 드러냄을 당해서, 다 잃어버리는 경험을 해줘야해요. 그래야 요셉의 세계에 합류 될 수가 있는 겁니다. 그럴때 하나님은 없는데서 있게하시는 분이고 죽은 자를 살리신다는, 그런 하나님의 구원의 원칙을 여기에서 알아챌 수가 있는 거에요.

이 이야기를 아까 질문에 적용시켜 봅시다. 아이가 자아가 생기는 것은, 무엇과의 분리입니까? 엄마 따로 나 따로가 되지요. 엄마 따로 나 따로지만, 아이에게는 여전히 빈자리가 있습니다. 그 빈자리를 프로이드라는 사람은 뭐라고 했느냐하면은,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이 사랑은 무슨 사랑이냐하면, 엄마하고 하나되었던 사랑이죠. 그래서 어른은 아무리 아이가 어른이 되어도, 그 빈자리가 무엇이냐하면요. 엄마같이 무조건적으로(일방적으로) 내가 무슨 짓을 해도 잘했다하고 칭찬하고 이뻐해주고 착하다해주는, 나에게 필요한 것을 다 공급해주는 엄마같은 그런 사람을 찾아나서게 됩니다. 바로 그때부터요. '엄마같은 사람'을요.

만약에 엄마에게 어릴때 상처를 받았다합시다. 이것을 정신적인 용어로 트라우마라고 하는데요. 이 엄마를 대신해서 자신을 사랑해줄 수 있는 '남자 애인'이나, 예수님이라든지, 신적이미지,성부성자하나님등을 집어 넣어요. 그래서 수녀들. 대부분이 정신병자입니다. 신부들 이런 사람들. 이 사람들 참으로 무서운 사람들이에요. 이 사람들은 자기방어가. 아주 자기에게 예민한 사람이에요. 그 빈자리가 없으니까, 자기 자아에 대해서 아주 집착을 하게 되요. 여러분 떡을 전자렌지에 구어보세요. 한 3분을 구으면 말랑말랑하지요? 그런데 한 서너번 그렇게 구어 보세요. 어떻게 되나요? 완전히 숯 되어버립니다. 이것을 수녀라고 보시면되요. 누가 옆에서 간섭하고, 잔소리 해주는 사람이 없거든요. 목사야 자연스럽게 부인이 있어서 잔소리를 받는거에요. "당신은 복음은 아는데, 집에 왜 생활비는 안가져다 주나?"라고 잔소리를 해주는 분이 있기때문에 참 다행인데요. 그런데 이런 독실하게 사는 사람들 보세요. 저는 완전히 전자레인지 안에 놓여있는 딱딱한 떡이라고 봅니다.

인간은 엄마같은 무조건적인 사랑을 원해요. 이 욕구를 가지고 교회에 오게되면 아가페 사랑이라는 소리를 듣게되요. 목사들이 뭐라고 말하느냐 하면, 사랑에는 세가지가 있다는 거에요. 첫번째. 아가페사랑, 두번째. 필로아 사랑, 세번째 에로스 사랑. 이렇게 세가지가 있다는 겁니다. 거짓말 입니다. 이 목사는 철학자들을 공부하지 않았어요. 에로스 사랑이라는 것이 요새 말하는 성화론을 말합니다. 필로스 사랑은 에로스 사랑에 합쳐지는 겁니다. 아가페 사랑은 신의 사랑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 신의 사랑이라는 것은 '주는 사랑'이 아니고, '빼앗는 사랑'을 말하는 거에요. 종속이지요. 폭군적인 사랑을 말합니다. 그래서 아가페라는 인간의 언어를 가지고, 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의 사랑을 표현하지를 못합니다. 목사들이 이런용어를 사용해서, 유식한 척을 하는데요. 이런데 속아넘어가면 안됩니다.

이 빈자리. 아기가 커가면서 이 인간의 빈자리를 채울때, 이 빈자리에 뭐가 들어오느냐 하면, '신앙'이 들어와요. 신앙이 들어온다고요. 그런데 이 신앙은 진짜 신앙이 아니고, 종교성입니다. 이 종교성이 그 빈자리에 들어갈때, 인간은 부모로부터 선악관을 받았기 때문에 선한 이미지와 악한 이미지를 분리하기 시작합니다. 이게 로마서 7장 이야기입니다. 나는 선하고 싶은데 내안에 뭐가있다? 악한 것이 있어서, 누가 우세했습니까? 선하고 싶어하는 나를 짓밟아 버리고, 악한 것이 우세하게 나온다. 악한 것이 우세하지만, 그 악한 것을 우리는 무시해버리고 선한 것을 안다는 이유때문에, "나를 선하다고 이야기 해줘" 이말을 합니다.

"악이 무엇이고, 선이 무엇인지 안다는 나 자체를 참 대견스러운 존재로 인정 해줘". 강도가 강도짓을 했습니다. 그런데 강도인 그 사람은 "나는 강도짓이 나쁜 짓인줄 알기 때문에, 판사님이여 나에게 선처를 부탁합니다" 이렇게 나오지요. 도둑질을 했다고 합시다. "어쩔수 없었습니다. 사회가 날 이렇게 만들었습니다. 부모가 날 버렸기에 내가 생존차원에서 살기위해 빵을 훔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선처해주세요" 이렇게 말하지요.

이 말이 뭐나하면, 내가 나쁘다는 것을 안 그것이 선하지 않느냐는 겁니다. 내가 나쁜 죄인인 것을 안다는 그 선한 이미지를 보셔서 구원 해달라고 하는 겁니다. 이게 진짜 어려운거에요. 왜냐하면 예수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말하시니까, 사람들은 어떻게 머리가 돌아가느냐 하면은, "맞습니다. 내가 죄인이라고 손들께요. 손을 든 그것을 근거로 해서 손 안든 인간보다도 나를 먼저 구원해주세요" 이런 계략을 끄집어 내지요.
 
그런데 성경에서는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그런 계략을 끄집어 내든 안 내든 관계없이,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택한 백성을 건져버려요. 그래서 진짜 택한 백성의 특징이 뭐냐하면은, 내속의 그런 계략. 하여튼 성경대로 모방하고, 성경에 일치되기위해서 그럴싸하게 행동하는, 촐랑대는 그런 모습을 하는 것. 촐랑댄다는 말을 할때 제가 생각하는 모습이 뭐냐하면요. 가게가 신장개업을 하면 커다란 키다리 풍선을 가게 앞에 놓잖아요. 그 풍선이 얼마나 까부는지 몰라요. 이리저리 흔들고 그러잖아요. 뒤에 스위치 한번 뽑아보세요. 무슨일 일어나는가요. 그 풍선인형이 인간입니다. 인간이 몸 건강하니까, 술먹고 담 타넘으면서 까불고 하잖아요. 그러나 나이 한 팔십 되어보세요. 담 타넘는가요? 밑의 플러그 뽑아버리면, 요양원 보내져서 누워만 있어야되요. 이게 인간이에요 인간. 기가 살아있으니까 촐랑대는 거지요.

근데 그 촐랑되는 것과 관계없이, '예수님 때문에' 구원받았다고 고백하지요. 진짜 구원받은 사람은요. 난 촐랑대지 않는다는게 아니고요. 나는 남들처럼 착하다는게 아니고요. 어찌됐든 구원은 내 행함과는 관계 있다 없다?. 없다 이말입니다. 내가 "죄인 여기 있습니다" 하면서 손든 그것때문에 구원받는 것은 아니다 이 말이지요. "예수님께서 저를 구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손 안든다고 구원받는 것도 아니고요. 그러니까 니 마음대로 하라니까요. 손 들고 안들고 하는 그것하고 구원은 관계없다는 말이지요. 아~ 정말 이것은 성령받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고백입니다. 이 고백은요. 정말 무엇을 받은 사람이 할 수 있는 거에요.

하루는 집에 감이 한박스가 와 있어요. 그래서 "여보, 감 누가 보낸다고 말했던가?"."몰라","나도 모르겠는데". 그전에 우리가 감 오라고 촐랑대지 않았습니다. 전에 우리 부부가 앉아서, "주여 저희에게 감을 주시옵소서" 철야기도 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그 다음날 오후에 보니까 우리가 없는 사이에 택배회사에서 감을 배달해놓고 갔더라 이말이지요. 그럼 감이 여기 존재함과, 우리의 행함과 어떤 연관이 있을까요? 없는 겁니다. 바로 그것을 설명하려고 하는 겁니다. 큰일났다. 오늘 마태복음 진도 다 못나겠네요.

여러분 밀수범이 '밀수' 할때를 생각해 봅시다. 전화번호부 같은 데에 홈을 파서 권총이라든지 야쿠자칼 같은 것을 숨겨오지요. 근데 그 전화번호부가 두껍지요. 두꺼운 거기에 밀수범들이 공간이 생기도록 홈을 파서 밀수품을 넣어서 가져온다고 합시다. 그러면 세관원들이 보면, 그것을 책으로 보지요? 그런데 통과하면 밀수품들은 속으로 쾌재를 부르지요? "책이 아니지롱~책이 아니지롱~"하면서 말입니다. 밀수범 자신은 그 안에 권총과 칼이 들어있는 것을 아는 거에요.

바로 성도가 이런 것입니다. 성도라는 우리 안에 누가 들어있느냐하면요. 예수님이 공짜로 주신 '어떤 인간이 되도, 교도소에 열번 갔다와도 구원할 수 있는 십자가 은혜'가 파인 홈안에 중앙지점을 차지하고 들어앉아 있습니다. 그런데 이 책의 두께는 무엇에 비유하냐하면은, 아까 촐랑대는 키다리 풍선인형이에요. 그러니 다른 교인들이 보기에, "너희들 그렇게 까불어대가지고 구원받을수 있겠냐? 그렇게 봉사 안하고 헌금 안해서 축복받겠느냐?" 이렇게 말하지요.

하지만 본인은 알지요. 자기안에 뭐가 들어 있습니까? 이것하고 행함하고 관계없다는 것을. 예수님의 행위로 말미암아, 십자가 행위가 내안의 중심에 홈을 파서 들어 앉아 있다는 말이지요. 그렇게 홈이 파여 있으니까, 내 행함과 상관없이 이 곳이 예수님의 자리가 되지요. 그래서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뭐라고 말합니까? "그런즉 내가 그리스도와 십자가에서 죽었나니,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예수님이 살아있다"고 말합니다. 내 중앙에 대신 죽으신 그분이 살아있다는 거에요.

나는 그러면 예수님이 살아있는 것을 옮기는 운반체가 되지요. 하나의 매게물이 됩니다. 그것을 로마서 9장에서는 그릇이라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자비의 그릇. 안 믿는 사람은 진노의 그릇이죠. 저주의 그릇입니다. 우리는 축복의 그릇이고요. 그리고 디모데 후서에 보면, 우리는 가정에 있는 부엌 그릇같은 존재라고 말합니다. 거기에 보면, 하나님께 사로잡힌 자는 이렇게 그릇이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릇이 되었으니, 그러면 이 사람은 자기 자랑하겠어요? 아니면 자기 안에 들어있는 것을 자랑하겠습니까? 쾌재를 부르지요. 무엇때문에? 자기가 선한 일을 해서 쾌재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나 이렇게 못나도, 내안에 누구 있지롱?" 이라며, 쾌재를 부르지요. 이것을 두고 자기를 증거하는 사람이 아니라, 누구를 증거한다? 바로 예수님을 증거하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 홈이 파여져야 하는데요.

이제 본격적으로 합니다. 아이가 크면서 자아의식이 생기면서, 그 인간 속에 엄마의 사랑의 흔적이 있지요. 엄마의 사랑. 이 엄마는 어떤 엄마냐 하면요. 나에게 무조건 잘해주는 엄마죠. 그렇다면 나의 선한 이미지와 맞는 엄마가 되겠지요. 그럼 여기에 오는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예수님은 내가 무슨 행동을 해도 잘했다고 칭찬해 주는 그런 예수님을 원하죠. "너는 뭘해도 죄인이야"라고 말하시는 예수가 아니고요. 뭘해도 잘했다고 말해주는 예수. "헌금했습니다" "아이구 잘했구나" "기도했습니다" "아이구 이 추운데 새볔 기도도 나오고". 아무튼 뭐든지 잘해 주는 예수지요. 그러니까 이 예수는 가짜 예수고, 우상 예수입니다. 그런데 목사나 교인들은 무슨 예수를 원합니까? 내 마음에 맞는 예수를 원합니다. 그래서 교인들 백명이 오면, 그 백명마다 자신이 믿는 예수 이야기가 다 다릅니다. 각자 다 자아용 예수를 내어놓아요. 자아용 예수말입니다. 그 모든 예수들 앞에 보면, 전부 자기 이름이 붙어있어요. 차 번호판 붙이듯이. 그러니 이런 예수라는 것은 구약으로 말하면, 우상이 되는 거에요.

바리새인들은 뭡니까? 바리새인들이 왜 자꾸 착한 일을 그렇게 많이하나요? 새해에 두번씩 금식하고, 힘들고 하는 그런게 모두 뭡니까? 자기 행위에 대해서 긍정적인 반응을 보여주는 신을 진짜 신으로 보는 거지요. 그런데 그런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 누굴까요? 사도바울이지요? 사도바울이 옛날에 예수님 만나기 전에, 사울때에 그런 이야기 했지요. "나는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였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무엇을 경유했느냐 하면요. 바로 자기가 알고있는 자기의 빈자리를 채워주는 하나님의 이미지를 경유했어요. 그러고 보니 나온 결론이 뭐였냐 하면은, '예수 믿는 사람들은 무조건 죽여라'라는 결론이 나온 겁니다. 내가 믿는 하나님을 잘 섬기기 위해서는 누굴 죽여야 됩니까? 예수 믿는 사람을 닥치는데로 잡아다가 죽이는 것. 이것을 옳다고 본거에요.

그런데 사도행전 9장을 보면, 다메섹에서 사울이 누구를 만났습니까? 예수를 만났죠. 그런데 그 예수를 만나고 난 뒤에 한 질문이 있어요. 근데 그 질문이 아주 재밌어요. 그 질문을 한번 적어볼게요. 이것이 모순인데요. 적어보면.

"주여"

그 다음에,

"누구십니까?".

이게 말이 안되지요? 이 사람이 누구십니까라고 물었다는 것은요. 이미 주여라는 말은 "당신이 하나님인줄 아는데, 지금 전에 있던 하나님과는 다른 어떤 하나님이십니까?"라고 묻는 거에요. 주님께서 이 질문이 나오기를 노리고 기다리다가, 대답하시지요. 뭐냐하면은, 그냥 난 예수다가 아니에요. 이는 "니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다". 이말이지요.

니가 평소에 가져왔던 신적 이미지는 오히려 참 하나님을 구박하는 마귀가 지어놓은 가짜 이미지의 신이였다는 것이죠. 그래서 모든 인간의 신은 다 가짜입니다. 사도바울이 하나님을 알고 난 뒤, 그때부터 바리새인 적으로 알았던 구약해석을 다 뒤집습니다. 그래서 나사렛 예수님께서 이제는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에 모두 관여했다는 식으로 해석을 해버립니다. 구약 전체가 누구를 중심으로 해석한다? 이제는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이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깔아놓은 빨간 카펫트를 걸으신거에요. 영화제할때 뭐 밟지요? 레드카펫 밟잖아요? 구약 전체가 예수님이 밟아온 발자취라는 거에요. 그때 밟아오면서 주께서 먼저 던져 준 선지자들의 여러가지 공통점이 뭐냐하면요. '고난 받았다는 것'이에요. 고난이요.

예레미야 고난받고, 이사야 고난받고요. 왜 고난받는가? 사람들이 기존에 생각하는 어릴때부터 자라왔던 엄마의 빈자리. 무조건 나보고 "잘했다, 훌륭하다, 너 이러면 천국갈수 있어" 라고 무조건 나를 긍정해주고, 나 하는 것에 대해서는 무조건 협조적이였던 그 착한 하나님의 이미지. 저는 그걸 '산타크로스 할아버지'이미지라고 하는데요. 물론 산타크로스는 "울면 안돼"라고 하는 조건이 있지만.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같이 그냥 공짜로 주는 그 산타클로스가 뭐로 바뀌게 됩니까? "얼마나 내가 나쁜 인간인가, 이런 못난자였는가."하면서, 날때 부터 죄 중에서 태어난 이 인간때문에 내가 저주받아야 될 것을 대신 저주받는 그런 희생자가 있었는데. 이 피흘리는 나사렛 예수로 바뀌게 되는 거에요.

그게 바로 성령이 오게 되면, 십자가 지시고 난 뒤에 오신 영이기 성령이시기 때문에요. 그 전까지는 성령이 어디 가 계시지요? 예수님한테 가있지요. 성령님이 예수님에게 갑니다. 마태복음 4장에서 예수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지요? 예수님한테 성령이 가 계시다가, 성령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죽게 하십니다. 히브리서에 나와요. 벌하는 것도 성령께서 벌하게 하십니다라고 나와요. 또 고린도 후서 13장에 이게 나옵니다. 성령께서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부활한 그것을 그대로 우리에게 전함으로 말미암아, 아까 전화번호부 안에 팠던 홈처럼, 그 홈에 다가 예수님을 직접 성령을 통해서 담아버린다는 이야기가요. 그러면 그때부터 우리는 하나의 그릇으로 변하게 됩니다. 누구를 모시는 그릇이 되지요? 예수님을 모시는 그릇. 그러면 그 예수님은 의인이지만, 우리가 덩달아 의인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뭔가요? 우리는 날때부터 죄인이지요. 그러니 이 홈의 바깥 책은 죄인되고, 안에는 뭐가 됩니까? 의인되니까요. 하나님보시기에 우리의 안쪽에 계시는 예수님을 보시고, 우리를 의인이라 해주는 거에요. 그 관계때문에 의인이라는거에요.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보고 죄인인 걸 안다는 그 자체가, 이미 우리는 하나님앞에서 죄가 없는 의인이 되는 겁니다. 이게 고린도후서 5장 21절에 나옵니다. "화목제물이 너희 안에 있으면, 하나님은 너를 보는 것이 아니라, 너의 행동을 보는 것이 아니라. 너희 안의 화목제물을 보고 너희를 하나님의 의로 간주하겠다"고 말씀하셨어요.

로마서 5장같은 경우를 보면, 너희가 나에 대해 경건치 않은 자고, 나에게 원수된자고, 죄있는 자이지만, 너희 속에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그 피로 말미암아, 너로 하여금 의인 되게 했다. 이런 같은 얘기를 합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행위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아브라함 속에 있는 그 은혜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이 행한 것이 없이 의로움을 받는 의의 조상이 되었다. 믿음의 조상이 되었다는 하는 겁니다.

행위가 아니라는 점에서, 그냥 그릇에 의인되시는 분이 들어있다는 그 관계를 가지고, '믿음'이라고 하는데요. "믿는 것도 행위 맞잖아요"라고 하시는데요.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선에서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요. 예수님과 아버지 사이에서 무엇이 행함이며, 무엇이 믿음인가가 거기서 일단 케이스가 확정이 되요. 믿음이라는 개념이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에게 전적으로 순종하셨잖아요. '순종'하면 많이 보던 사람 있죠.사이트 '순종이'. 아무튼 예수님이 아버지께 순종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그 순종이 순종할 줄 모르는 우리에게 홈이 파여져서 들어옵니다. 나는 죄에 순종해야 될 사람이죠. 그런데 우리 홈 안에 있는 예수님이 주인 노릇을 하세요. 그래서 우리는 "내가 죄인 맞습니다"라고 주님이 하신 십자가에 순종함으로써 의의 순종함으로써 그 다음부터 의의종이 되는 겁니다. '자기 의'의 종이 아니고요. 내 안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점에서, 그 의에 종속되는 의의 종이 되는 거에요.

그래서 로마서 6장에 보면 뭐라고 나옵니까? "너희가 예수님과 함께". 그러니까 권총하고 전화번호부하고 함께 있는 것을 세례라고 하지요. 연합되는 것이에요. 떨어질 수 없어요. 세례가 되었으니, 너는 전에 '너 자신의 선악적인 것을 증거하는 죄의 종'이지만, 이제부터는 예수님이 거저 주시는 주님의 의를 증거하기때문에, 너는 의의 종이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사람들은 모릅니다. 그리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자기의 '선한이미지, 악한 이미지'를 가지고, 전에는 악한 이미지로 살았지만, 이제는 선한 이미지로 산다는 거에요. 그렇게 되면, 이것은 선악과 논리에 그대로 머물러 있잖아요. 오늘 강의 처음에 한 것처럼, 그 선악과 논리에 머물러 있는 그 자체가 뭐가 되느냐 하면, 하나님의 생명나무를 따먹을 수 없는 그런 조건에 그 사람은 머물러 있는 거에요.

"아니! 착하면 되잖아요! 착하면 되잖아요!" 하시는데요. 그게 문제에요. 착하면 되는 것이 아니에요. 로마서 7장에 의하면, 착할 수가 없어요! 그게 위선자가 되는 거지요. 착하면 되는 것이 아니고요. 이미 주께서 착한 일을 하셨습니다. 우리 안에 착한일을 시작하신분이 끝까지 우리 안에서 이루십니다. 빌립보서 2장에 나오지요. "내안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분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확신하노라".

그 본문을 가지고, 세상에! 자기가 착해질려고 하니까요! 점점 더 자기는 생존단계에서, 전자레인지에 들어있는 딱딱한 수녀처럼, 떡처럼 쌔까만 숯이 되지요. 누가 자기를 건드리면, 벌컥 화를 내지요. "내가 얼마나 착한데 나를 건드려!". 이것에서 나오는 것이 내신 성적입니다. 목사는 80점이고 장로 너는 70점이고, 너가 나를 따라오려면 멀었다는 것. 이게 내신성적입니다. 물론 최고 정점은 예수이고요. 예수를 따라 붙어야 구원받는다 이런 내신성적이 있어요. 이건 단계설이라고 불교에 나와요. 불교에는 무려 41단계가 있습니다. 아직 기독교가 불교 따라 갈려면 멀었어요. 41단계나 있어요. 기독교는 기껏해야 5단계, 6단계잖아요. 아무튼 불교에는 여러 단계가 있다는 것을 시간이 나면, 나중에 알려 드리기로 하겠습니다. 사람 다 똑같아요. 불교나 유교나 단계가 다 있습니다.

한번 정리해 봅시다. 어린아이가 어른될 때, 자아의식에 빈자리가 생깁니다. 근데 그 빈자리는 뭐다? 선악적인 것이 들어있어서, 자기에게 어떤 일이 있어도, 자기를 핑계대면서 자기를 악한 인간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선한인간으로 만들어가는 작업에 들어갔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자기 의'라고 하지요.

로마서 10장 2절에 나오지요.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쌓기 위해서, 누구한테 열심이 있습니까? 놀랍게도 하나님께 열심이 있습니다. 이것을 무엇을 경유하지 않는다고 했습니까? 이건 바로 나사렛 예수님의 십자가를 경유하지 않고, 어릴부터때 가지고 왔던 '엄마사랑'의 이미지를 그대로 유지해서 거기에다가 바로 예수고 하나님이고 성령이고 바로 집어 넣는겁니다. 그 때문에 자신이 죄인인 것이 드러나지 않고, 내가 예수 믿을 정도로 착한 사람이라는 것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거에요. 그러니까 교회는 이런 사람을 확보해서 고객 삼아서 이용하려고 할수 밖에 없죠.
 
결론적으로 말해서 뭐냐하면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다 해주신 거에요! 하이카가 알해서 다 해주듯이 말입니다. 차 사고가 나면 하이카라는 보험회사가 와서 알아서 다 해주는 거에요. 처음부터 알아서 다 해준거에요. 창세 전부터, 태어나기 전부터, 태어나야 될 이후까지 알아서 다 해주는 거에요. 이후에 있어서 예수님 세계 안에 예수님을 증거 하라고, 그릇이라고 알아서 정해 놓으시고, 어느 시기에 깨닳게 하시고, 거듭나서, 그리스도에게 영광을 돌리게 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이야기하면, 이런 걱정을 해요. "목사님 만약에 그렇게 살다가, 또 내 육체가 아직 남아있으니까요, 아까 전화번호부 안에 홀도 있지만, 바깥에 두꺼운 종이도 있잖아요. 그것처럼 까부는 풍선인형이라는 자기 잘난 체가 또 발동을 해서, 안에 있는 예수님을 다 잊어버리면 어떡케 합니까?"이렇게 걱정합니다.

여러분, 신랑은요. 신부가 설사 집을 가출한다 할지라도요. 신랑은 값을 주고, 그 신부를 놓치지 않습니다.

구약에 어디 나오는 이야기입니까? '호세아'에 나오지요. 그 사랑을 아세요? 사랑은 내쪽에서 신랑을 붙들었으면, 내가 힘빠지면 놓을 수 밖에 없어요. 그런데 아가서에 보면, 신랑이 자기 좋아하는 여자를 붙잡기 위해서 팔을 뻗어요. 그런데 이 여자가 수줍음이 어찌나 많은지 문을 콱 닫아 버린거에요. 문을 닫으니까 어떻게 되요? 신랑의 팔이 신부 집의 문에 끼어버려요. 팔이 문에 끼어서, 이 여자가 "어머나~어쩌나" 이렇게 막 당황하지요. 그런데 신랑 되는 솔로몬 왕이 하는 말이, 손만 넣고 "걱정하지 말고 이거나 받으세요"라고 하면서 몰약을 줘요. 동방 박사가 줬던 게 몰약이잖아요. 몰약, 생명의 약을 놓으니까, 그것이 이 여자의 온몸에 적시더라..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이 말은 무엇이냐 하면은, 사랑은 뭐보다 세냐는겁니다. '죽음보다 세다'입니다. 이것이 아가서의 마지막 결론입니다.

사랑은 너가 죽어도, 그 사랑은 너를 건져낸다 이겁니다. 그것을 가지고 고린도 후서 10장에 보면,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라고 했습니다. 여자는 남자의 조각품이에요. 남자가 그렇게 자기것을 다 빼주고, 자기 노력한 것을 다 퍼붓는 그것이 뭐 때문에 그런가요? 여자라는 동상하나 세우기 위해서! 그런 남편이 있다는 것을 지급 성급하게 말하는게 아닙니다. 성경이 그렇다는 거에요.

남편이 되었으면, 여자 하나 반듯하게 행복하다면, 그게 남편이 죽음을 다해도 그것으로 남자의 면류관이 되는 겁니다. 남자분들 잘 들어 놓으세요. 여자 하나와 결혼할 때요. 그냥 거래하듯이 하지마세요. "니가 나에게 잘해주면 잘해줄께" 그러지 말고요. '니만 잘되면 내 죽어도 여한이 없다'. 이렇게 해야 결혼이라는 걸 할 수 있어요. 여자들은 지금 그런 환상속에 기다리고 있습니다~ (모두들 하하하). 물론 시댁 쪽에서는 남자의 간을 빼먹으려고 한다고 하면서 달려들겠지만, 그것은 시댁쪽 이야기고요.

어쨋든간에, 성경적으로 보면 여자는 남자의 영광입니다. 남자가 정성을 들이는 그 초점이, 여자한테 모여집니다. 이것은 바로, 남자는 예수님이고, 신랑은 예수님이고, 누가 신부입니까? 교회가 신부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자기 몸 바쳐서 정성 받쳐서 사랑해주는 것은, 자기의 교회가 지옥가는 것을 그냥 방치하는 예수님이 아닙니다. 그게 성령이 오면 말씀대로 그대로 믿어지는 거에요.

그래서 진짜 교회. 진짜 그리스도의 몸이 된 사람은요. 맨날 누구 자랑하느냐 하면요, 맨날 지 신랑 자랑해요. 우리 송선생님하고 똑같애~. 맨날 자기 신랑 자랑 한다고요.(모두들 큭큭큭) "우리 신랑같은 사람 없다" 이거에요. 늘 말씀나누고요. 결혼 안한 사람 약 올라할만하죠.

"세상에 우리 신랑같은 사람없다!". 그게 우리 신부된 사람들이 하는 자랑이에요. 요한계시록 21장에 보면, 하늘에서 예루살렘에 신부가 내려오지요. 그 신부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저게 도대체 신부가 누구 솜씨인가?" 이렇게 물을 수 밖에 없어요. 그러니 이렇게 되요. 신랑이 아름답기 때문에 신부가 아름답다. 그러니 신부가 아름답게 단장한 것은 누구덕분이다? 신랑되신 주님이 하늘에서 영광스럽기때문에, 그 영광을 힘입고 신부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에요. 이 땅에서 올라가는 것이 아니고요. 하늘에서 이미 내려오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여러분 이것 하나만 생각하시면 됩니다. '전화번호부'하고 '밀수범'!

밀수범이 전화번호부에 홈을 파요. 그러니 전화번호부 없어지면 안됩니다. 어떤 교회에 가면 "여러분들은 예수믿었지요. 이제부터는 성화되세요. 여러분은 죄인 아닙니다" 이런 소리하면, 큰일납니다! 이거는 말도 안되요. 우리는 전화번호부에 그냥 홈이 파인 거에요. 근데 모든 주도권은 누가 쥐었습니까? 전화번호부가 아니죠. 중앙지점을 차지하고 있는 예수님이 그 영역에 발생되어서, 바깥에 있는 죄를 날마다, 안에 있는 주님의 피가 날마다 씻어내고 있는 거에요.

그러니까 이런 것을 믿는 사람은 뭘해도 주님 영광이고, 뭘해도 주님 고맙습니다. 이걸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성령안에서 하나님의 뜻이니라"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절이지요. 범사에 모든지 감사해라. 로마서 8장.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 로마서 8장 30절에 나오지요. 미리 아신자를 부르시고, 부르신 자를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하는자를 영광스럽게! 영화라고 하면 또 오해하니까요. 그렇게 이미 "하였느니라"라고 하셔요. 이게 부동사이거든요. 부동사라는 것은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미래가 되더라도 그 미래가 이미 지금부터 시작되었다는 의미에서 관계없는 TO부정사에요. 시제와 관계없는겁니다. 미래가 아니고, 이미 여기 확정된 것이 지금 그대로 유지된 다는 의미에서 그렇게 하는 거에요.

그럼 이렇게 보면, 어린아이때에는 어떻게 신앙생활을 해야하는가요? 어린아이때는 바로 '선악'을 갖고 있기때문에, 애들은 이것밖에 몰라요. "엄마! 어떤 것을 하면 내가 매 안맞어?". 무엇이든, 사랑하는 엄마가 싫어하면 나쁜것이고, 내가 사랑하는 엄마가 좋아하면 좋은 거에요. 근데 엄마가 다른 남자 만나서 바람피웠다면 어떻게 됩니까?. 만약 새엄마가 들어온다면,새엄마에게는 엄마가 하라 그러면 안하고, 하지 말라고 하면 해버리지요. 그것은 누구한테 상처받았기 때문에 그런 겁니까? 자기의 본 엄마한테 상처 받았기 때문에 반대로 나가는 거에요. 그래놓고 책임을 누구에게 돌린다고요? 집나간 엄마에게 책임을 돌리지요. 그 정도로 인간은 자기밖에 모르지요.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하느냐 하면은, 미리 예언을 하는거에요.

"얘야 니가 나쁜 짓을 해도, 용서해 줄 사람이 있다. 하지만 네가 나쁜 짓 한 것이 나쁜 것이 아니고, 너를 용서해 줄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안믿는 것이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는 나쁜짓이야."

"엄마,그분이 누군데?".

"바로 예수님이 너를 용서해주려고 준비했는데, 너는 24시간 우리 상원이 자기밖에 생각 안하고, 예수님 생각 안할때. 그걸 예수님이 싫어한단다. 엄마도 니가 그런거 싫어해"

라고 하면서 엄마하고 예수님하고 한짝이 되세요. 그러면 애들은 엄마 아빠의 말을 듣고 믿는 것이 아니고요. 엄마 아빠의 행동을 보고, 바로 그것을 모방하게 되어있어요. 모방하지요. 엄마가 예수 안 믿으면서, 애들 보고는 믿으라고 하면 됩니까?

이제 마태복음 진도 나갑시다. 보통 예수 안 믿는 사람들보고 성경 읽으라고 하면, 창세기부터 보통 안 읽지요. 마태복음부터 읽습니다. 왜냐하면 그 목사님이나 전도하는 사람들이 성질이 급해서, 빨리 예수믿고 빨리 천국가라고 마태복음을 권하시는데요. 마태복음 밑에 뭐가 있느냐 하면은, 구약이 있습니다. 구약이 있고, 그 다음에 마태복음이 있는거죠. 마태복음부터 읽으라는 말 자체는 좋아요. 하지만 그 전에 구약은 이렇게 흘러 왔다는 것을 이야기 해주어야 되지요.

그러면 구약은 뭐냐? 문제에요. 그리고 신약은? 답입니다.

예를 들어볼께요. 수학시험을 치루는데, 학생들이 컨닝을 하는 거에요.

"선생님 오기전에 얘기해줘! 답이 얼마야?"
"8번이야!"
선생님이 오시죠.
"너 왜 8번 이라고 적었느냐"
"답은 그냥 8이잖아요"
"왜 8이라고 적었느냐 이말이야"
"아니 답이 틀립니까?맞잖아요"
"아니,답은 맞는데, 어떤 과정을 통해서 8이 나왔어?"

그렇게 물으시니 학생은 말문이 막혀서 막 지어내는거에요. 답이 8이라도 과정을 모르니까, 그 답은 틀린 답이 되는거에요.

구약을 모르고, 신약을 보고 무조건 예수라고 하니까. 구약을 모르고, 신약을 들이댑니다. 마치 남녀호랑교같아요. 그 종교에서 뭐하는 줄 아세요? 주술을 외우잖아요. 문장을 외우면 자연적으로 병이 낫는다는 종교에요. 원리가 아주 간단하죠. 우리나라의 원효대사가 창시한 불교가 뭐냐하면요. 나무아미타불하게 되면 어떤 서민이라도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종교입니다. 원효대사는 불교를 이야기한 것이 아니고요. 그 당시 신라시대 사람들안에 있는 무속신앙에 대해 감을 잡은 거에요. 이렇게 하면 이데올로기로 전국민을 불교에 가입시킬 수 있겠다는 거에요. 그러니 쉽게 하는거에요. 인간이 쉽게 하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어떤 특정한 문장에다가, 영적인 효과를 준다고 그렇게 하는거에요. 그러면 인간은 입술이 있고, 입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되풀이해서 반복할 수가 있습니다. 그게 왜 그러냐하면은, 인간의 자아의식때문인데요. 인간의 모든 교육은 모방으로부터 시작한다고 했지요. 그게 아리스토텔레스의 이야기에요. 아리스토텔레스라카는 사람 있어요.하여튼 엄마 이게 뭐야? 안경안경!하면 옳지옳지 합격! 빵하나더줄게. 이것은 개나 다람쥐나 고양이를 키울때도 마찬가지에요. 똑같은 것을 하게하고, 사랑하나 더 주는거에요. 어릴때는 그렇게 키워야지요.

특정한 문장을 반복해서 외워버리면, 그게 두뇌에 정보가 입력이 됩니다. 입력이 되어 버리면, 그것이 시냅스라고해서 두뇌세포가 있어요. 세포사이에 일단 정보가 3차원 이미지로 뜹니다. 이미지가 뜰때 일단 기초로 잡는 것이 주변에 있는 아빠,엄마지요. 주변에 있는 목사라든지요. 목사는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갖고 있던 이미지를 교인들에게 심어줘요. "예수님은 무조건 복주십니다"이런 것들. 그런 것들을 교인들에게 심어주면요. 교인들의 이미지에 복음이 들어오는 것이 아닙니다. 기존에 알던 신학적인 그것이 영상화-이미지화되지요.

일단 그것의 윤곽이 잡히면, 그것이 구조가 되고요. 거기에 맞춰서 다른 어떤 성경구절이든 집어넣게되요. "할수있거든이 무슨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않는 일이 없다"이런 것을 집어넣는다고요. 예를들어 큐티를 하면서, 그것을 집어 넣어버리면, 마치 내 소원을 들어주는 예수가 참 예수님이 되어버려요.

그런 사람에게 이 십자가 복음 이야기를 하면, 단번에 튕겨내지요. "너 사람이 왜 이렇게 부정적이야? 좀 긍정적으로 살면 활성화되는데 왜 자꾸 부정적으로 말해서 자꾸 쪼그라들게 하는거야, 그러면 아무것도 기도하지 말라는 말이야?" 이렇게 맨날 나오는 질문이 거기서 거기에요. 지금 이 강의 들으시면서 이런 질문이 나올지도 모르겠어요. "그럼 목사님 기도 할 필요 없네요" 이런 질문은 늘 나와요. 너무 태만하게 만든다던지, 방종하게 만든다던지. 그런식으로 막 들어와요.

그런데 아까 질문한 그 사람은 뭐가 없는 사람이다? 전화번호부안에 뭐가 없어요? 예수님이 안 계시기때문에, 예수도 아닌 나(이근호)한테 물어요. 그 질문을 기도하면서 물어야 될텐데요. 십자가 진 적도 없는 나한테 물어요. 그저 밥먹고 살려고 이짓하는 나한테 묻는거에요. 이게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소용 없지요. 본인에게 예수가 없는 사람에게, 아무리 좋은 복음을 들려주어도요. 결국은 "나는 예수님보다도 나의 즐거움으로 살겠다"고 그렇게 나와버리면 뭐 할수 없어요. 어쩔수 없어요.

어쨋든 간에, 이렇게 교육은 모방이고 이 모방이 들어오게되면, 이미 습성화된 상태에서 구약 신약을 보게되는겁니다. 물론 잘못된 것이지요. '가다머'라는 사람 이름 들어보셨어요? 이 사람이 말하는 게 뭐냐하면요. 모든 인간이 언어를 대할때는 그냥 대하지 않고, 선이해, 선견해, 선입관이라는 걸 가지고 본다는 거에요. 쉽게 말해서 '자기가 보고싶은 것만'본다는 겁니다. 그것을 심리학에서 게슈탈트 이론이라고 해요. 같은 그림을 보아도, 어떤 사람은 노파로 보이고, 어떤 사람은 아가씨로 보이는 그런 것. 이게 심리적으로 전경과 배경, 배경과 전경이 수시로 임의로 바뀌는 겁니다. 전경과 배경이 제일 혼동되는 것으로 유명한 사건이 뭐냐하면, 어떤 사람이 중국의 눈덮힌 대륙을 지나가다가, 예수님이 보고싶어서 기도를 열심히 하다가 마침 사진을 찍어놓았어요. 그런데 나중에 그 사진을 보니 안에 수염 난 예수 형상이 보이는 거에요. 수염 난 예수님은 AD 3세기 경에나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그 전에 예수님은 수염 없어요. 그런데 자기 마음대로 수염난 예수가 보인다고 떡하니 수염난 예수를 밥상 밑에 모셔놓지요. 그리고 그 사진 복사해서 온천지 교인들마다 다 붙여놓구요. 참 기가 차요. 그런 형상을 찾는 방법은 쉽습니다. 무늬 있는 벽지를 두시간동안 보세요. 여기에 예수님도 보이고, 사도바울도 보이고, 다 보입니다. 심지어 남편 얼굴도 보이고요. 군에 간 자식도 가만히 보면 보입니다.

인간은 자기가 보고싶은 것을 구성하면서, 그걸 자기가 되찾는 방식으로 하는 거에요. 목사가 설교를 20분해도, 자기가 원하는 것이 5분이라면, 5분만 챙기고 돌아오는 거에요. 그런데 성령이 있는 사람은 어때요? 전화번호부 안에 사도바울처럼 나사렛예수라는 해결자가 들어있는 사람은요? 이미 나를 의롭다하신 분, 아까 얘기한 '주심'이 그 안에 들어있는 사람은요. 그 사람은 항상 범사에 감사하는 태도를 가져요.

"회사 짤렸네 주께서 또 뭐 취직하라고 하시는구나"
삼성그룹에 취직하면
"또 주께서 일하라 하셨구나"
"또 구조적인 모순속에 있어봐라 하시는구나"
"주께선 또 요번에 의사되라 하시네 아~귀찮아 죽겟는데"
"아 또 신부가 혼수 5억 해오겠다는데 5억 어떻게 받지".

이런식으로 항상 아무리 받아 챙겨도, 중요한 것은 내안에 있는 예수님이 이 5억보다 더 중요한 거에요. 그런데 이 예수님이 안에 없는 사람은 뭐가 됩니까? "난 예수님덕분에 5억받았다!" 이러는 거에요. 그런데 이것은 남들은 몰라요. 그런데 본인은 알아요. 본인은~(전두환 흉내)알아요 그것을요. 본인은 안다고요.

본인 안에 예수가 없는 사람은, 구약을 통해서 이스라엘이 바로 예수님을 못박아 죽이는 가장 근접한 지점의 인간을 대표하는 겁니다. 바로 이것을 가지고, '보편적 단독성'이라고 합니다. 오늘 어려운 용어. 유식한 용어 막 나옵니다~

'보편적 단독성'. 무슨 뜻입니까? 재밌지요. 단독성이라는 것은 하나를 말하고, 보편성이라는 것은 그 뒤에 줄줄이 수천 수만이 따라오는 거지요. 이스라엘은 전 인류를 대표했다는 점에서, '언약 공동체'라고 해요. '언약 공동체'. 이것도 어려워요. 하나님께서 단군의 자손하고는 언약을 안 맺었고 누구하고 맺었다? 시내산에 모세가 올라갔지요? 모세가 속한 민족. 이스라엘이라는 언약공동체와 맺습니다. 그래서 진짜 하나님을 알려면 어디를 가라? 필리핀에 가지를 말고 어디를 가라? 이스라엘. 물론 지금 이스라엘 말고 옛날 이스라엘말입니다. 옛날 이스라엘 속에서 하나님은 그들과 동행하면서, 하나님의 모습을 다 드러낸 거에요. 그 이스라엘의 역사를 뭐라고 하느냐하면은, 두자로 '구약' 세자로 '새언약'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이요. 그 이스라엘 역사 중에서 그 이스라엘이, 포로된 시간이 무려 90%입니다. 놀랍게도. 제대로 한게 10%도 안되요. 진짜 하나님과 동행했던 그 민족은, 자기 딴에 열심히 말씀대로 살려고 애써보았지만요. 90%는 남의 종되는 세월이였습니다. 우리나라 일제시대때 몇년 종되었지요? 36년이잖아요. 이스라엘은 전 역사의 몇퍼센트입니까? 90%. 현재 단군의 역사가 몇년입니까? 4500년이라고 하면, 거기에서 90%면 얼마입니까? 거의 4000년이에요. 이 나라가 정상적인 나라가 아니지요. 맨날 남의 나라한테 얻어맞다가 볼일 다보지요.

그 나라가 바로 이스라엘이에요. 그런데 다른 나라들은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왜? 누가 안계시기때문에요? 하나님이 안계시기때문에 자기들은 무슨 짓을 해도, 그냥 내비둬요! 내비둬! 그런데 진짜 하나님을 만난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엇을 압니까? "아~ 하나님은 이처럼 무서운 분이구나" 하는 것을 아는거에요.

그래서 구약은 하나님과 가까히 있으면, "아 나는 화로다 망하게 되었도다"라고 해요. 이방인들은 하나님을 모르니까. 잘난체하면서, 춤추는 키다리 풍선인형처럼 까불지만요. 막상 하나님과 함께 있었던 그들은 압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무섭고, 얼마나 두렵고, 거룩한 분인지를요. 인간은 감히 그앞에서 구원받게 해달라고 요구할 권리도 없다는 것을 알지요. 그리고 그 유대인들이 바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음으로 말미암아, 완전히 그들은 하나님께 저주받은 자가 되지요. 그들이 보편적 단독성이기때문에요. 그런데 그들이 바로 저주받을 자라면, 우리 이방인들은 뭡니까? 성경에 나오는대로 말한다면 개죠, 개. 이런 개같은 이방인들이야 뭐 말할 것도 없지요.

그런데 이러한 죄인. 구약에 의하면 죄인된 우리를, 신약에 와서 예수님이 자기가 대신 구원하기로, 희생하기로 확정된 사람에게는 대신 대속의 피를 흘려주어서, 이 피를 보시고, 이 피를 먹고 마시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말하십니다. 이 새언약의 피를 보시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저주가 도리어 의가 되게하고 축복이 되게하셨습니다. 죄를 용서하시는 정도가 아닙니다! 아예 우리라는 박스에 의가 차고 넘치게 한다니까요! 죄를 용서해버리면 우리는 죄에서 뭐가되요? 무죄가 되잖아요. 이러면 죄를 다시 지으면 또 죄인되고, 또 더러워 지잖아요.

그러나 그게 아니에요. 아예 의인이 되게 한다니까요! 전화번호부안에 누가 들어있기 때문에요? 우리 예수님이 들어있기 때문에요. 아예 의인되게해요. 그런데 무슨 짓을 해도 하나님앞에 가면 뭐가된다? 의인되게 해요, 의인되게. 이것을 모르게되면, "아 전에 죄지어놓고, 또 개가 토한것을 먹는 것처럼 또 죄짓는구나" 이렇게 되어서,  "주님이여 이제는 주님 믿을 자격 못됩니다 이제는 바이바이 합시다"하고 낙담할 수가 있어요.

그게 아니고. 아예 우리가 의인되게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회개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은요. 내 안경으로 나를 보다가, 우리 상원이처럼 맨날 자기를 보다가, 가끔식은 2초 3초 이렇게. 성령께서 "나를 봐도 그만이고 안봐도 그만이다 이미 주께서 다 해결하셨다." 라는 것이 믿어지게 하지요. 믿어지게 된 그사람은 예수님만 증거할 것입니다.

"너희들이 성령이 임하면,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나의 증인이 되리라". 누구의 증인입니까? 내 잘난 것의 증인이 아니고요. 예수님의 증인이 됩니다. 이것이 성령받은 사람의 특징입니다.

자 구약이 먼저있는데, 구약은 문제였다. 어떤 문제였습니까? 모든 인간은 죄인이였다.

답은 신약이다. 마태복음의 마태 그 다음에 무슨 글자있습니까? "복음"입니다. 복음 아닙니까? 복음이 뭡니까? 기쁜 소식이잖아요. 죄인에게만 눈에 들어오는, 죄인이라는 것을 아는 자에게만 즐겁기 짝이없는 그것이 바로 복음이고, 그 복음이 마태복음 입니다. 그 주님은 십자가를 향하여 이제 달려갑니다. 주께서 태어나자마자, 십자가로 달려가요. 빨리 십자가로 달려가는거에요. 왜? 십자가를 통과해야 우리를 용서할 수 있는 피가 발생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저희들 이땅에 태어난 것이 우리들 생존하라고 태어난 줄 알았는데, 나중에 예수님의 성령받고 보니까. 예수님의 피를 담고 예수님의 용서를 담고 사랑을 담고 긍휼을 담고 자비를 담는 그릇이 되라고 태어나게 하신줄 압니다. 이제부터 우리 자랑 하지 말고, 주님의 십자가만 자랑하고, 주님만 증거하는 그런 성령받은 사람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