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 7월 29일 사도행전 15강
사도행전 8장 20절에 베드로하고 시몬이라는 사람하고 대화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로마서 10장에 나오는 원칙을 보게 되면 지상에서의 구원이란 믿으면 되는데 뭘 믿는가? 눈 앞에, 코 앞에 있는 주어진 하나님의 십자가와 부활. 예수님 하신 일인데 이것을 입으로 시인하면 구원을 받는다고 나와 있습니다. 로마서 10장에 나옵니다
여기서 십자가 부활을 전할 사람이 누구냐에 대해서 로마서 10장에 보면 사도가 전하고요. 사도가 전하면은 이것이 파생되죠. 퍼진다 이 말입니다. 사도가 전하면 사도한테 많이 들었던 사람들이 있을 것 아닙니까? 그러면 사도가 전했던 이 말을 그 사람들이 또 전하게 되면 파생되어서 여기서 일반인들의 구원이 일어난다.
그런데 조건이 있죠? 이 조건은 이 원칙, 예수님의 하신 십자가 부활을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이 원칙이 사도가 다른 사람에게 전할 때도 마찬가지고 이 사람들이 다른 사람에게 전할 때도 마찬가지고 똑같은, 여기에는 예외가 없어요. 그냥 나는 들었다. 이걸로 구원이 안 되고 누가 전하든 이 사실을 듣고 믿어야 되고 믿으면 구원받는 거예요.
이것이 바로 창세기 15장, 아브라함 언약입니다. 아브라함 특징이 뭐냐? 이것이 법이 없어요. 법이 없는 대신에 믿으면 되니까. 법하고 아브라함 언약하고 차이점은 뭐냐하면 법은 본 걸로 끝나면 안 되요. 본 것을 실천 해야 되요. 그것을 교회에서는 행함이라고 하죠. 보고 아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실천에 옮겨야 되죠.
안경을 쓰라 할 때 안경을 쓰라는 말을 들었다고 해서 안경 쓴 걸로 대체가 안 됩니다. 그걸로 대신해 줄께. 이런 것은 없습니다. 안경을 써야 되요. 그런데 아브라함 언약은 이 법이 없다는 말이죠. 내가 이것을 실천해서 내 바깥에 법이 이제는 착하고 내 눈의 법으로 옮길 수 있는 법이 아브라함 법엔 없습니다.
없는 것을 가지고 믿음이라고 합니다. 굉장히 쉬워 보이죠. 일단은 쉬워 보이죠. 그런데 의인은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 하박국에 나오는데 하박국에 나오는 그 믿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무화과 나무에 소출이 없다 할지라도 너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요새 양계장의 닭들이 다 죽어 나가잖아요. 양계장의 닭들이 다 죽어 나갈지라도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내가 구원받는다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이 쉽네요. 하는데 막상 닭들이 죽어 나가고 소들이 죽어 나가면 이게 쉬운 문제가 아니란 말이죠. 쉬운 문제가 아닌 거예요. 어쨌든간에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쉽게해서 구원해 준다. 어렵게해서 구원해 준다는 것 조차도 하나님은 관심 없어요. 구원은 어렵든 쉽든 내가 구원하는 것이지 너가 쉽게 구원받고 어렵게 구원받는 그 방법은 없습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언약대로 하는데 언약에 매달려 있는 이 분을 언약의 하나님이라 합니다. 지금 제가 이야기를 이것부터 시작할려고 합니다. 언약의 하나님은 구약에서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하는데, 특수한 하나님이예요. 여호와 하나님을 더 쉽게 이야기 하면 언약을 앞장 세우고 여호와 하나님은 뒤에 숨어 있다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하나님을 볼려고 하는데 보지 마세요. 하나님은 보고 믿는 것이 아니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제시한 것을 우리가 받아 들이면서 우리가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자꾸 천국을 보여 달라고 하는데. 뭐 자꾸 보여달라. 화끈하게 느끼게 해달라 하는데 아까 양장로님께서 차타고 오면서 어느 분이 교회에서 새벽에 기도를 하는 것을 아주 실감나게 재현을 해주었어요. "주여! 주여! 만나게 해주세요. 주님을 만나게 해주세요." "여호와 아버지, 아버지는 어디 계시나이까?" 장로님이 먼저 나서셔서 좀 만나게 해주시지요.(하하하)
아까 제가 했잖아요. 사도가 전한 것을 성도가 믿고 성도는 주여 만나게 해주세요. 보여주소서. 어떻게 해달라 어디 계십니까? 하는 사람들에게 십자가 복음을 전하면 됩니다. 장로님이 가만히 있으면 안 되요. "저를 불렀습니까?" 이렇게 하면 되요. "만나고 싶다면서." "당신 말고 하나님..." 그러면 하나님은 숨어 계셔서 반드시 뭘 제시한다? 언약을 제시한다.
모세가 하나님을 만났겠습니까? 안 만났겠습니까? 하나님을 등 뒤에서..온전한 만남을 볼 수 없죠. 정면으로 못보니까. 누구든지 하나님을 정면으로 볼 수 없습니다. 그냥 수구리고 뒤편에서 봐야 되죠. 자, 그런데 숨어 있는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이라서 언약을 이렇게 내미는 반면에 인간들은 하나님을, 헬라인들은 지식을 원하고 유대인들은 기적을 원하죠. 지식과 기적을 가지고 우회해서 내가 하나님을 만나서 내가 경험한 그 하나님을 나의 구원이 하나님으로 삼을려고 시도하는 것입니다.
그 와중에서 새언약의 하나님이까. 새언약의 증표가 뭐예요? 십자가와 부활이죠. 로마서 10장에 나오니까. "죽었다가 살아난 것을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 이것은 꼭 제가 지어낸 말 같아서 제가 얼마나 욕을 얻어 먹는지 몰라요. 아버지께서 자기 아들을 죽었다가 살린 것을 너가 입으로 시인하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 로마서 10장에 나오는 말씀을 가지고 마치 십자가마을 사람들이 독점해서 어디 사람들을 꼬시기 위해서 일부러 지어낸, 특허낸 것처럼 그렇게 욕을 많이 얻어 먹어요. 왜 성경에 그것만 있나? 딴건 없나? 이런 식으로 욕을 한다 이 말이죠.
다른 것은, 디모데전서 3장 해가지고는 구원이 안 된다니까요. 말세에 "돈을 사랑하는구나." 그러면 돈을 사랑하지 않으면 구원받습니까? 그게 아니잖아요. 우리는 안경이라. 안경아는 그 믿음, 구원받습니까? 안경 알면 구원 받아요? 안 된다니까요. 앞으로 어떤 사람이 그렇게 시비걸면 이렇게 이야기 하세요. 구원받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이고 이렇게 분명히 주었기 때문에, 뭐 예수님의 재림 믿는다고 구원받는게 아닙니다. 십자가 부활을 믿어야 되요. 왜냐하면 이것이 새언약이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1장에 보면 교회가 모일 때마다 떡을 뗐는데 뭘 기념했느냐면 예수님의 죽으심과 다시 오심을 기념한다 말입니다. 그래서 오용익 목사님이 하나 교회 강의하면서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교회와서 떡을 떼면 예수님의 죽으심과 살으심을 기념하라고 했는데 왜 자꾸 자기를 기념하느냐? 교회와서 자꾸 자기를 신경쓰고, 내 머리가 어때요? 내 옷은 어때요? 김집사님 어떻게 하겠어요? 박집사님 어떻게 하겠어요? 하면서 자기를 기념하느냐 말이죠. 어떻게 옷을 입든 주님을 기념하러 오는데.
다시 할께요. 사도가 십자가 복음을 전하면 이들이 믿으면, 전해도 안 믿으면 안 되요. 그들은 이것을 전해서 또 다른 사람이 믿게 되면 사도가 전한 복음을 그들이 믿어서 이 사도 배후에 누가 있겠습니까? 바로 새언약의 하나님, 주님이 계시겠죠. 그래서 이 역삼각형을 가지고 교회라고 하죠. 예수님과 사도의 틀이 세워지죠. 이 주춧돌, 머릿돌 되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 그 예수님은 건축자의 갖다 버린 돌이 주님이 되었고 버려진 돌을 사도가 믿었기 때문에 결국 이 사도도 예수님 믿었다는 이유 때문에 버림받게 되고 이 사도의 말을 믿는 사람들도 세상으로부터 버림받게 되고.
세상이라는 것을 조사해 보니까 바로 언약의 하나님을 외면하고 지식과 기적을 우회해서 가짜 하나님을 섬길려고 하는 이런 시도를 했던 사람들. 정리해 보면 아브라함의 특징은 행함을 할 필요가 없어요. 행함을 할 필요가 없는 이유가 아브라함 언약 속에는 우리가 지킬 법이 없어요. 오직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니. 의로 여긴 거예요. 의롭다는 것을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어떤 규칙을 지킬 경우에만 의가 되고 안 지키면 불의가 되는 그러한 기준이 있어야 되는데 여기 아브라함 언약은 믿으면 의가 된다는 말은 아, 이거 참 어려운데 제가 모션으로서 반드시 설명을 해야 되겠어요.
여기 리모콘이 있는데 우리가 21세기 사람들이 아니고 고려시대 사람이라고 합시다. 제가 미래소년 코난이 되어서 21세기에 미리 왔어요. 여러분 리모콘이있는데 이것을 탁 켜면 벽 같은 데에서 사람 얼굴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고려시대 사람은 그 한국말, 고려말을 해도 말했다고 해서 알아 먹습니까? 못알아 듣죠. 예수님이 아람말을 해도 그 내용을 모르면 들을 귀 있는 사람 외에는 알 수가 없죠.
인간은 과거의 경험에 의해서 모든 것을 해석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희한하게도 "아, 그런 귀가 있는 줄 저는 믿습니다." 이랬단 말이예요. 고려시대 이야기 다시 해봅시다. 고려시대이기 때문에 리모콘이 없는 시대에 "여러분 임금에게 충성합시다." 법이잖아요. 알아듣잖아요. "그래. 아, 그것은 해야지." "여러분 리모콘이 있는데 누르기만 하면 뭐가 나옵니다." 그것은 실천하고 안 하고의 여부를 이미 벗어나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이 주신 십자가 부활은 우리보고 실천하라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하고 말고 자시고 할 대상이 안 된다니까요.
고려시대 사람에게 리모콘을 누르셔야죠 하면 그 사람은 리모콘이 뭔데? 이렇게 나온다니까요.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게 준 이 모든 원리와 원칙은, 우리 머리 속에서 나온 것은 지키고 말고 하는 것이 결정적으로 있는데 이거는 생뚱맞는 거예요. 생뚱맞으니까 아브라함이 "그냥 믿습니다" 한 거예요. 하나님이 다 알아서 꾸민줄 믿습니다. 비록 지금 납득이 안되지만 믿습니다. 죽은 자가 살아나고 다 믿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 말고 고려시대 다른 사람 말은 아니 우리가 다른것을 하란 말이야.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하고 못하는 것은 못한다. 이렇게 되어야지 리모콘이라는 것을 고려시대 사람이 어떻게 이해하느냐 말이죠.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희한한 사람이예요. 인간쪽에서 생각지도 못한 리모콘이라는 것을 두드리면 화면에서 뭔가 뜬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하겠어요? 하지만 하나님의 약속이기 때문에 우리는 상상도 못하지만, 내막을 모르지만 "주께서 하실 겁니다" 하고 아브라함이 믿은 겁니다. 아브라함의 특징이 뭐냐하면 우리가 뭔가 부지런히 하고 지킬 수 있는 그런 자리를 다 철거시킨 겁니다. 평소에 하는 행세같으면 아, 이렇게 하면 되겠다 하지만 평소에 하는 행세가 전혀 없는거란 말이죠.
그 다음에 나오는 내용이 하나님이 그 고려시대 사람에게 갑자기 리모콘을 주었다. 리모콘이 등장하고 나니까 아브라함의 약속이 실체화 된 것을 갈라디아서에서는 예수님이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 당시에 이삭이 없는데서 태어났다 이 말이죠. 그리고 이삭은 아브라함이 바쳐서 죽이려고 했을 때 옆에 수풀에 수양이 있어서 살아 났잖아요. 하지만 이삭이 믿어서 구원 못받고 죽었던 이삭이 살아나고 염소 믿는다고 해서 구원 못받아요.
이것은 장차 올 리모콘 대신 나무 리모콘. 작동도 안 되는 이걸 들고 아브라함이 폼낸 거예요. 하지만 아브라함은 요한복음 8장에 보면 그것을 보면서 생각하며 예수님 오기를 기다렸다고 했습니다. 희한해요. 도대체 아브라함에게 주신 믿음과 복이 얼마나 대단한지. 세월이 몇 년 입니까? 2000년 세월을 뛰어 넘어요. 2000년 뒤에 이삭같은 분이 오실 것을 알고 그 오실 분을 기다리면서 드디어 예수님 만나고 기뻐했다고 했습니다.
성경이 도덕책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거 행하면 착하다. 착하고 자시고 할 근거 자체가 아예 없어요. 생뚱 맞아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단 말이죠. 그래서 아브라함 언약이라는 것은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 때문에 의지하고 믿을 뿐이지 우리가 실천에 옮길 수 있는 법은 아브라함 언약에 전혀 없습니다.
아브라함 언약에 의해서 오게 되는데 아브라함이 언약의 뭘 믿었느냐 하는 것이 갈라디아서에 나옵니다. 아브라함이 언약을 자기가 믿은 것이 아니예요. 아브라함이 언약을 믿은 것은 언약에 대해서 자기 자신의 인식이나 능력을 믿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뭘 믿었습니까? 얼른 다른 사람이 들으면 말도 안되는 소리지만 아브라함이 언약을 믿었는데 본인이 믿은 것을 믿은 것이 아닙니다. "이 언약의 실천자는 바로 언약을 주신 하나님이시다." 이것을 믿었습니다.
앞에 나옵니다. 여호와는 나의 방패요, 여호와는 나의 상급이다. 여호와가 주도권을 쥐고 나는 아브라함의 언약의, 하나님이 주신 언약을 이루는 재료로, 하나의 소모품으로 내가 부름받은 거예요. 언약을 이루는 것은 믿는 내가 언약을 이루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친히, 언약을 주신 그 분께서 친히 언약을 이루어 나가는 겁니다. 그것을 예수님에게 적용시켜 봅시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신 것이 다 누구 힘으로 되었습니까? 성령의 힘이죠. 예수님께서 성령의 힘으로 가셨죠. 기억나세요? 지난 번에 했는데.
예수님의 가신 길을 성령으로 했잖아요. 그 성령으로 했다는 말은 예수님이 성령이 없이는 아무일도 못하시는 거예요. 요단강에서 비둘기같이 성령이 왔잖아요.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성령받았을 때 아셨던 것이 뭐냐하면 이것은 아버지께서 성령을 주신 거예요.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태어날 때부터 모든 일이 아버지의 뜻에 복속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사도행전 8장 9절에 보면 시몬이라는 사람이 이 성령을 뚝 떼어 돈을 주고 살려고 했단 말입니다. 그렇다면 돈을 내는 자가 누구예요? 시몬 본인이죠. 성령을 돈 주고 저 시장에서 "한근에 얼마 입니까? " 하고 사게 되면 성령은 누구한테 복속됩니까? 나한테 복속되는 거예요. 이게 대표적인 것이 뭐냐하면 불신앙이예요. 아브라함의 언약하고는 전혀 거리가 먼 거예요.
아브라함이 언약을 하나님이 믿었다 하니까 "아, 저렇게 믿으면 언약도 내것이 되어서 내가 이제부터 언약을 실천할 수 있구나!" 라고 오해하는 것이 인간인 거예요. 하여튼 좋은 것은 다 가질려고 해요. 돈을 줘서라도 좋은 것은 다 쳐바르려고 한다 말이죠. 그런데 실제로 아브라함의 언약을 보면 아브라함이라는 예수님이 언약이 찾아오면 내가 뚝 잘라서 내것 만들려고 한 것이 아니고 오히려 내가 갖고 있던 모든 인생도 저분에게 마치 지남철에 달라붙는 쇠조각처럼 철거덕 해가지고 저쪽에서 인도하는대로 끌려가는 거예요.
그것을 가지고 친구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친구가 아니고 아브라함을 하나님께서 친구되게 하신 거예요. 이렇게나 저렇게나 마찬가지 아니냐? 마찬가지가 아니예요. 제 피라는 책에 보면 기호가 나와 있어요. 30=0이죠. 70=0이죠. 앞에 이것을 모르고 그냥 0만 있는 사람은 똑같다고 하는 거예요. 3곱한거고 7곱한거예요. 이 내막을 알아야 되요.
없는데서 있게하고 죽은데서 살렸으면 똑같은 것이 아니예요. 우리는 어떤 자리에 있다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는가? 이 자리에 오면서 우리의 행함을 삭제 당하는 우리에게 있는 모든 실천력을 부정당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온전히 하나님 앞에 철석붙게 된거예요. 아브라함도 이스마엘 낳았잖아요. 이스마엘은 저주받은 자식이예요. 첨부터 이스마엘을 낳지를 말지 그런데 왜? 낳게 해가지고 "낳았지? 그거 내 자식 아니거든." 왜? 그렇게 하시느냐?
그것은 아브라함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아브라함을 가지고 진짜 하나님의 자식은 약속의 자식이 아니면 나머지기는 저주의 자식이라는 것을 아브라함을 통해서 둘을 구분하기 위해서 아브라함을 용도로서 마음껏 그림을 그린 거예요. 자 그러면 이것은 더 깊이 나가면 딴 이야기가 되니까 접고 성령 이야기 해봅시다.
성령이 오시게 되면 이 세상은 둘로 나누어 지죠. 성령이 오시기 전에는 모두 다 한통속입니다. 똑같은 인간인데. 성령이 오시게 되면 이것은 둘로 나누어 집니다. 하나는 약속이고 하나는 비약속. 하나님의 약속되지 않은, 저주받은 사람되고 이것은 구원받는 사람이되죠. 양과 염소. 좋은 고기 나쁜 고기. 이 모든 것이 성령이 오시므로 되었죠. 그러면 여기서 봅시다. 아까 예수님께 뭐가 왔다? 성령이 오셔서 아버지의 뜻을 이루도록 했잖아요.
그러면 아버지의 뜻이 뭐냐하면? 아브라함 언약은 우리가 뭔가 할 수 있는 것을 다 없애는. 리모콘이 있기 전에는 리모콘을 누르라는 말이 성립이 안되듯이. 우리가 할 수 있는 법같은 것이 성립이 안 되요. 일체 법은 없어요. 하나님의 약속을 주셨다는 그 자체로 인하여 이미 우리는 구원된 겁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이 왔다는 자체가 "너는 사랑하는 아들이요 기뻐하는 자라" 이미 이 세상에서 아들이 된 거예요. 성령이 왔다는 자체가 이미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하나님의 양자가 되었고 아들이 된 거예요.
로마서 8장에 보면 너는 종의 영을 받은 것이 아니고 아들의 영을 받았으니 이미 아버지라 부른다 이 말이죠. 아버지라 부른다는 것은 본격적으로 아버지의 뜻을, 아버지의 언약을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는 다루어진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구원 문제가 아닙니다. 성령 받았으니까 교회 안 다닌다 하는 내 구원을 챙기는 문제가 아니예요.
다시 이야기 할께요. 성령을 안 받게 되면 자꾸 챙길려고 해요. 시몬이 성령 받았다니까 돈 얼마 주면 성령을 받겠습니까? 라고 자꾸 성령을 제대로 모르면 자기는 살아 있고. 돈 주고 기도를 많이 하고. 나는 안 죽어 있고. 살아 있는 채. 거기다가 부풀려서 힘을 키우는 역할을 한다 말이죠. 그런데 성령을 받게 되면 그러한 시도조차도 의미가 없이 "이제부터는 주님께 붙잡힌바 되었구나!" 이미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 있는 거예요.
하나님의 아들이 되면, 그러면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까 하나님의 말씀대로 열심히 살아야지." 하는데 그런말 없어요. 성령이 예수님 십자가 부활하고 난 뒤에 성령이 뭐로 바꼈냐면 아들의 영으로 바꼈어요. 동방교회, 서방교회가 삼위일체 이 대목을 가지고 싸웠어요. 동방교회는 성령은 아들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께로서 온다. 서방교회는 아버지께도 오지만 아들에게도 온다 이것 가지고 싸우다가 교회가 둘로 갈라졌어요. 내가 볼때는 둘 다 이단인데 삼위일체 교회사에 나와요.
삼위일체 내용은 성경하고 달라요. 왜냐하면 삼위일체는 항상 성부 중심입니다. 서열상 성부, 성자, 성령 중에서 대표자가 성부가 대표자가 된다는 것이 전반적인 삼위일체 교리입니다. 이거 하나님께서 인정 안 해줍니다. 인간들은 이러고 싶은데 하나님께서 인간들이 지어낸 신학을 이야기 안 해요.
하나님은 예수님을 주라고 하는데 관심이 있지 서열 누가 높으냐에 하나님은 관심조차도 없는 거예요. 관심도 없는데 신학자들이 모여서 성부가 최고수가 되고 밑에 성자고 그 다음에 성령이라고 서열을 만든 자체가, 이것은 지금 성령을 안 받고 또 신학을 가지고 자기에게 끌어 모으려고 하는 시몬같은 작업을 하는 겁니다. 그게 개혁주의고 그런 거예요. 자꾸 끌어 모으는 거예요.
김성수 목사의 설교를 들어보면 구원의 서정이 나와요. 칭의, 믿음.. 그것을 설명하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예수 믿고 의로와 졌다고 그것이 다가 아니고 성화 과정이 있습니다. 그 다음에 영화 과정이 있습니다 이러는 거에요. 여러분 그 과정 없습니다. 그 과정은 자기가 안 죽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 구원의 서정을 해서 어떻게 해서든지 간에 성경해서 예수를 믿어서 내가 살고 싶어 하는 거예요. 성경은 예수님의 주되심 자체가 오게 되면 "아, 더이상 내가 나를 위해서 살 필요가 없구나!" 그것은 이미 성령께서 임한 사람이예요. 이미 하나님의 아들이 된 사람입니다.
성령이 아니면 아들이 안 됩니다. 이미 아들이 되어 버리면 그러한 내가 어떻게 구원의서정을 받아서 그런 것 신경 쓸 필요 자체가 없는 사람이예요. 아까 이야기 했잖아요. 하나님의 구원받은 사람은, 아브라함 언약에는 뭐가 없다? 내가 지킬 수 있는 법 자체가 없다는거에요. 법 자체가 없다니까요. 만약에 지킬 법이 있으면 또 내가 나한테 신경써야 되요. 하나님 내가 잘한 겁니까? 못한 겁니까? 아이구 못했어요. 못했으면 회개하고. 또 자기가 구원 신경써야 되잖아요. 그런 식으로 구원받은 사람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것은 믿는 것이 아니고 그냥 하나님의 성경책을 참고로. 하나의 윤리 도덕적으로 참고로 해서 자기 도 닦고 자기를 갈고 닦는, 여기에 필요한 재료로, 참고문헌으로 사용하는 거예요. 여전히 자기 자신이 자기 힘으로 구원받겠다는 겁니다. 성령이 아들의 영이 될려면 아까 예수님과 성령 사이에서 예수님은 아버지의 성령이 임하므로 말미암아, 이미 예수님이 어디에 당겨 들어가냐면은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는데 당겨 들어갔다 했죠. 그러면 성령께서 성도에게 임하게 되면, 이미 다 이룬 아들의 영을 그 세계에 그걸 증거하기 위해서 우리가 뽑히는 겁니다. 간택당한다. 채택당한다. 당첨되었다.
"너 이제부터는 아드님이 하셨던 그것 그것이 얼마나 놀랍고 대단한 것인지 보여주는 증인 돼" 라고해서 성령이 온 겁니다. 사도행전 1장 8절. 이것 모르면 한국에서 교인도 아니잖아요.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될 것이다." 증인이 필히 될 것이다. 그 이야기나 "이는 내 사랑하는 자요 내 기뻐하는 아들이라" 는 것과 똑같습니다.
성령께서 예수님에게 임할 때 예수님이 이미 하나님의 아들인 것이 확인된 것처럼 이미 성령이 임했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되었어요. 그러면 예수님이 그 다음부터 마음껏 놀았습니까? 아니예요. 아버지의 뜻이 무엇인가를 십자가를 지고 부활 때까지 과정을 통해서 아버지의 뜻이 이거다 하고 다 보여 줬잖아요. 새언약이 이런거야 다 보여줬잖아요. 그러면 우리는 새언약이 이런 겁니다. 라고 예수님의 공로로 구원 받았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의 모든 한평생이 주님의 공로에 의해서 다루어지는 겁니다. 어느 한 순간도 성령의 작용이 없이는 이루어지는 것이 없어요.
그래서 어떤 목사님은 강의들어 보면 성령충만 받지않은 상태가 없는데 무슨 성령 충만을 이야기 하냐? 그런 목사님이 계셔요. 그렇다면 성령의 소멸은 뭐예요? 취지는 이해하겠는데. 성령이 임재했다는 말을 그런 식으로 이야기하면 제가 이해하겠는데 늘 충만인데 무슨 성령충만이냐 하면 약간 오바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렇게 이야기하는 취지는 알겠어요. 하도 한국교회가 성령충만 받을려면 자꾸 해라해라 하니까 늘 성령 충만인데 뭘 또 성령충만이냐 했어요.
그런데 그 이야기는 뭐냐하면 성령이 창조의 영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놓치면 안 되요. 성령은 창세기 1장에 보면 하나님의 신이 수면에 운행하거든요. 창조한다 이 말이죠. 창조할 때, 창조의 영이 오게 되면, 스포트라이트가 막 비치잖아요. 조명등. 내가 스포트라이트를 조종하면 항상 내쪽에 훤하게 비치면 좋은데 해변가에 간첩오나 싶어서 왼쪽 한번 돌았다가 오른쪽 한번 돌았다가 돌면 나는 가끔씩 비췰 뿐이죠. 그렇다고 스포트라이트 비치는 사람한테 "왜 나만 비춰?" 라고 따지면 곤란하잖아요. 내가 간첩도 아니고 곤란하거든요.
그처럼 성령께서 창조의 영이 주어지게 되면 스포트라이트, 빛 같으면 주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하나님의 바람같이 움직이는 거기에 너가 같이 뛰어 들어야되는거에요. 그야말로 새가 바람을 탈때 무엇을 뭘 포기합니까? 자기가 스스로 난다는 개념이 없잖아요. 바람불면 그냥 날게 펼치면 날잖아요. 충분하게 날죠? 충분한 창조의 영 속에 충분하게 성령의 하신 일 주님의 영을 보여주잖아요.
날다가 맛있는게 있으면 강제로 날개를 접으면 자기가 목적한 저 땅 수직으로 내려가잖아요. 성령의 소멸이라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성령께서 하시는 일은 이렇게 우리로 하여금 모든 힘을 다 빼고 날개를 주에게 맡기는 이것입니다라는 것을 보여주기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는 항상 성령을 가로막는, 성령을 소멸시키는 그런 육적인 것을 갖고 있습니다 라는 표현을 하는 거예요.
성령은 어디서 온다고 했습니까? 예수님에게서 오죠. 주님께서 성령이 오게 되면 구원 받았죠? 로마서 10장에 보면 구원이라는 것은 믿는데,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입으로 네가 입으로 시인하면 너가 구원이 된다고 했죠 분명히? 그렇다면 예수님의 하신 일이 성령을 통해서 주어지잖아요. 그러면 우리는 현재 육 아닙니까? 자꾸 옛날에 육적인 요소가 있을 것 아닙니까? 육신이 되었으면 육신값을 하는 거예요.
고3인데 교회가지마라 이런 식으로 말이죠. 항상 우리는 그냥 공중을 날고 독수리 날개처럼 천국을 바라보면 되는데 우리 시민권은 하늘에 있느니라 참 좋잖아요. 하지만 그것은 성경에 쳐박아 놓고, 항상 우리는 우리의 시민권이 하늘에 있다하면 불만족스러워 해요. 왜냐하면 과거의 육신의 습관이, 썩어가는 육신이 우리로 하여금 맨날 창고문을 닫아서 도사처럼 살지 못하게 만들어요. 누가 건드리거든요. 우리를 누가 놀리고 까불고. 그러면 우리는 성질나잖아요. 그러면 날다가, 하나님 우선 저것 갈구고 날겠습니다 이러잖아요. 갈굴 때 바로 육신이 뭘 가로막느냐면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의 공로를 가로막아 버려요. 성령께서 탄식하고 근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령께서 왜 그것을 허락을 하느냐? 성령께서 그것을 허락하시는 이유가 우리의 타락과 우리의 방탕을 통해서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구원되지 너가 정신 차린다고 구원되는 것이 아니란 말이죠. 창공을 난다고 구원되는 것이 아니고 이미 창공을 나는 능력을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육신이 이러하기에 성령은 날마다 우리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느니라 라는 것을 통해서 성령의 자유함을 우리에게 또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게 성령의 소멸입니다.
그래서 어디에서 어디까지가 성령의 충만이냐, 소멸이냐를 우리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어느 것이 성령 충만이냐, 소멸이냐를 따질 때 이미 소멸이예요. 또 자기 생각하는 거예요. 예수님 고마운줄 알면 그 자체가 누가 뭐래도 충만인데 예수님 고마운줄 알다가 누가 뭐라고 시비걸면 에잇 갑자기 주님 바라보다가 내 몸의 자존심 신경쓰인다면 그게 바로 소멸이예요. 저는 그것을 바로 항상 바람같이 부는 창조의 영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계속 창조해 나가시는 겁니다. 기계처럼 찍어내는 것이 아니고요. 일본말로 유도리하고 하죠. 항상 올라갔다가 내려갔다가 이렇게 해서 주님의 어떤 경우라도 주님의 사랑은 효력이 있음을, 더 이상 내 행함을 의지하지 말것을 깨닫게 하시는 겁니다. 결국은 성령의 충만이라는 것은 성령이 우리 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고 반대로 생각하면 되죠. 우리는, 사운드 오브 뮤직이란 영화 보셨죠? 거기에 인형놀이 하는 것 있죠? 꼭두각시 인형을 실을 묶어서 막대기로 조종을 하죠? 우리가 맨날 "나는 난다. 나는 항상 관대하다. 나는 항상 성령충만하다" 이것이 아니고요. 항상 성령께서 나를 조종을 하게 되면 양이 되었다가 다투었다 싸웠다가 회개했다가 항상 주께서 인도하는대로 조종되죠? 그처럼 성령께서는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더욱더 우리로 하여금 증거되게 하기 위해서 주께서 이런 사탄도 허락하시고 세상의 육신의 맛도 보게 하시고 다시 울면서 회개하게 만들고. 좋다고 까불다가 자빠지게도 만들고 그런식으로 다루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주도권은 누구에게 있습니까? 주도권은 성령한테 있는 겁니다. 다시 한번 정리해 봅시다. 성령이라는 것은 우리보다 먼저 모델이 있다.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에 성령이 개입해서 아버지의 뜻을 이루었다. 아버지의 뜻은 언약을 앞장 세우는 분이다. 그런데 언약은 우리가 지켜나가는 것이 아니고 언약을 실천에 옮기시는 분도 아버지시고 언약을 자진해서 이루어 나가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다.
언약 바깥으로 우회하면 여기서 뭘 찾는다고 했습니까? 여기서 기적을 찾고 지식을 찾는 것은, 기적은 유대인이 원하고 지식은 헬라인이 원한다고 했죠. 이런식으로 우회하게 되면 여기는 하나님이 안 계시고 악마가 기다리고 있죠. 잘왔다 이놈아 잘걸렸다 악마가 오죠. 그렇다면 인간이 악마인줄 모르고 신인줄 알고 하게 되면 여기엔 기적과 지식에는 열심이 필요하고 열성이 필요하죠.
그래서 교회에서 그렇게 열심내고 열성을 내어서 악마만나라고 그렇게 열심내는는 거예요. 마귀 만나라고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성령만 주어도 이미 아들인데, 이미 구원받은 자이거든요. 논다는 것이 아닙니다. 앞으로 다룰 거예요. 뭘 털어 버려야 하고 뭘 포기해야 되고, 우리가 의라고 여기는 것이 전부다 사실은 의가 아니고 우리가 스스로 구원받고자 시도했던 하나의 죄에 불과했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피와 살을 피해서 나아가고자 했던 하나의 죄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종교적인 열심과 착함이 선행이 사실은 언약을 비켜가서 내가 원하는 자비로운 하나님을 내 식으로 만나겠다는 하나의 시도에 불과한 거예요. 그래서 오용익 목사님이 첫번째 강의에서 중요한 말씀을 했습니다. "여러분들이 성경을 볼 때에 하나님 피 보고 싶어요. 피 볼려고 성경을 볼려고 하는 사람이 어디있냐 말입니다. 피보고 싶으면 깡패한테 얻어 맞아서 피 보면 되요. 성경을 볼 때 하나님 저 피 봐야 됩니다. 이런 식으로 성경을 보는 사람이 어디있느냐 이 말이죠. 그런데 유일하게 성경을 보면서 피볼려고 성경을 보는 사람이 있었으니 그 분은 바로 예수님이다" 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성경을 통해서 자신이 피 흘려야 되는 이유를 설명했다 이 말이죠. 그렇다면 성경을 해석할려면 우리는 이것 봐가지고 내가 원하는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내식으로 찾아가겠다고 하는데 그것은 언약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것은 새 언약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기념하는 거예요. 내가 이만큼 기도 많이 하고 내가 이만큼 훌륭하다는 것을 자기 자신이 갈수록 더욱 돋보이게 하는 그러한 짓거리 밖에 안되는 거예요. 이것은 마귀와, 악마와 만날 거예요.
하나님은 예수님의 피를 통해서 다 이루었다 했으면 우리가 성경을 봐서 주여 어떤 대목에서 피 흘려야 합니까? 아 이 대목에서 피 흘려야 되는구나 이렇게 성경을 보는 안목은 성령 받아야 가능한 겁니다. 성령 받아서 그것도 그냥이 아니고 충만해야, 자기꺼 접고 탁 날아가야 되지 내가 뭐 하나 해보겠다 하고, 다시 창공에서 날다가 내가 이것 먹어야 야지 하면서 그러다 또 저거 먹어야지 하면서 포기하고 지상으로 내려서 싸우고 또 하나님에 의해서 후회하고 회개하고 다시 올라가고 이러죠.
하나님은 언약 안에만 계시고 언약 바깥에는 하나님이 없습니다. 그곳엔 마귀가 기다리고 있죠. 구원이라는 것은 십자가와 부활을 입으로 시인하고 믿으면 구원이 이른다 이 원리입니다. 이 믿음은 어디서 온다고 했습니까? 사도행전 8장 20절 누가 한번 읽어 보세요.
"베드로가 가로되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돈 주고 사버리면 돈 낸 사람의 소유가 되죠. 성령은 예수님의 소유가 되는데 돈 주고 사버리면 내 소유가 되잖아요. 돈 낸 나한테는 성령이 오고 돈 안 낸 옆사람한테는 성령이 안오게되면요. 뭐 그런 성령이 다 있습니까?
성령은 선물이기 때문에 누구든지 주시는 거예요. 성령을 받게 되면 어떤 현상이 있게 되는가요? 요한복음 3장 34~36절. "하나님의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없이 주심이니라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 손에 주셨으니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이것 올해 수능시험 한번 내볼까요? 아들을 믿는 자는 괄호 해놓고 다음 중 괄호에 해당하는 것은?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않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죠. 그렇다면 진노받고, 하나님의 진노를 안 받을 것 같으면 영생을 받고 영생이 없을 것 같으면 필히 뭐가 오고? 하나님의 진노가 오죠. 빼도박도 못하죠.
이것도 저것도 아닌 경우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죠. 왜 그렇습니까? 이제 마지막 시대는 모든 것이 아드님의 성령께서 마지막 시대에 예수님이 하는 아브라함의 언약의 완성에 의해서 좌측인지 우측인지 둘중의 하나로 결단나게 해버렸어요. 제3의 회색지대가 없어요. 성령을 받아서 예수님을 믿으면 그것은 영생이고 안 믿으면 저주고 진노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뉴스에 나오는 서울지역 있잖아요. 서울 지역을 내가 장난끼가 있어서 상상을 해봐요. 강남과 강북을 나누지 말고 하나님의 영생이 있는 사람과 진노받은 사람으로 나누고 싶어요. 여기는 영생구, 저기는 진노구. 이렇게 둘로 나누고 싶어요. 네비게이션으로 나누어 집니까? 안 나누어 지는데 주님은 이미 둘로 나누었어요. 어떻게 나누는가? 이거 나누는 것을 목회 삼십년 만에 처음 공개합니다.
수직으로 나누어 버렸어요. 이게 서울시인데 이것이 공중에 붕 떴어요. 영생받은 사람은 강북에 있든 강남에 있든 대전에 있든 대구에 있든 관계없이 그 자리에서 붕 뜨게 되어 있어요. 뜬 사람이 하늘에 모이면 여기가 영생구이고 그 밑에 땅에 사는 사람은 하나님의 진노구. 이번에 진노구에서 국회의원이 몇 명 보궐되었잖아요. 우리의 시민권은 어디에 있는지라? 하늘에 있는지라. 그것을 다시 해석하면 우리의 시민권은 붕 뜨느니라. 붕 뜨느니라.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 했어요.
지난 낮 설교에서 했죠. 냉면집에서 냉면사리 자르는 가위 가지고 잘라 버려라. 우리가 기도하는 믿음 잘라 버리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다 잘라 버렸을 때 우리의 시민권이 하늘에 있다는 이 믿음을요. 이것은 잘라도 잘라도 주께서 위에서 주셨기 때문에 땅에서 아무리 가위 가지고 잘라도 잘라도 안 잘라지는 거예요. 잘라라 잘라라 해도 괜찮아요. 왜? 위에서 주었기 때문에. 이 어떻게 공간을 뛰어 넘을 수 있겠습니까? 무슨 재주로 높이뛰기 해서 올라갈 수 있겠습니까?
주님께서 성령을 주게되면 이미 그 속에는 믿음이 생기고, 아들을 믿는 자는 뭐가 있고? 영생이 있는 거예요. 인생 말아 먹어도 영생이 있는 거예요. 이걸 위에서 내다 보니까 이것이 강남구, 강북구 이렇게 나누어 지는 것이 아니고, 빵위에 초코렛처럼 은혜 밖에 있는 것처럼 되지만 이것을 옆에서 보면 붕 떠서 있다니까요. 그래서 이 사람들은 한 형제가 되고 한 몸이 되고 어디에 있더라도 외국에 있더라도 십자가 복음 안에서 교류가 되는 겁니다. 복음이야기 하면 예수님의 피 때문에 살았다는 거기에 다같이 꾸뻑 넘어가고. 듣고 싶은 것이 이거였습니다. 성화론 아니었습니다.
성화론은 이 밑에 진노구에서 나온 겁니다. 개혁주의에서. 성화론 아니고 우리는 예수님의 피를 갖고 온 성령 때문에 구원받았습니다. 이것을 8장 20절에서 한 것입니다. 그래서 8장21~23절에서 너는 성령을 못받은 사람이다. 성령 받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의 진노가 임한다고 하니까 시몬이 새파랗게 질려서 그러면 주여 저를 위해 기도해서 이 진노가 저에게 떨어지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해달라고 하죠.
그러면 기도해 가지고 진노가 떨어졌습니까? 안 떨어졌습니까? 다시 이야기 할께요. 너가 돈 주고 살라고 하니까 너가 마귀가 들었구나 너는 하나님의 진노가 임한다 그 소리 듣고 시몬이 겁나서 베드로님 제발 살려주세요. 정바지 바지가랑이 붙잡고 매달린 거예요. 제발 저를 위해서 기도해서 하나님의 진노가 떨어지지 않게 해달라고 했다 이 말이죠.
그럼 제가 내는 문제가 뭐냐? 그렇게 해서 베드로가 기도해 주면 진노가 떨어지는지 안 떨어지는지 그것을 묻는 겁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취소 됩니까? 그 위에 머물러 있습니까? 머물러 있죠. 왜냐하면 앞에 보면 성령 주고 안 주고는 베드로 마음대로가 아니예요. 이것은 성령 마음대로이기 때문에, 성령을 안 받은 사람에게는 아무리 좋게 이야기해도 그 사람한테는 하나님의 저주가 그대로 떨어져 있는 겁니다.
안 믿는 자식을 위해서 기도해도 소용 없어요. 중보기도 소용 없는 거예요. 생각해보세요. 우리의 보물이 어디에 있습니까? 니 마음에 있는 곳에 보물이 있죠. 우리의 마음이 있는 곳이 보물이라고 했잖아요. 그런데 보물을 어디에 쌓아 두라? 하늘에 쌓아두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제가 예를 들겠습니다. 만약에 집사님 사랑하는 자식이 성령을 못받아서 지옥가고 집사님 내외분만 천국갔다면 마음이 편하겠습니까? 안 편하겠습니까? 기분 더럽지요? 거기는 구더기도 소금치듯이 하는 고통스러운 곳이니까. 그러면 천국가도 마음이 안 편하죠.
그러면 우리의 마음이 어디에 가있습니까? 우리의 보물은 어디에 가있습니까? 자식인 거예요. 그러니까 챙길 것 다 챙겨달라고 하는 거예요. 그게 은연중에 우리가 공짜로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놓쳐 버렸다는 것입니다. 내가 자식을 위해서 아내를 위해서 남들을 위해서 기도했기 때문에 하나님 이것은 세트로 봐줘야 됩니다. 라고 생각하는 그 공로로 구원받은 것이 아니고요. 우리는 내 자식밖에 모르고 내 아내밖에 모르고 내 남편밖에 모르는데 난데없이 성령받은 거예요.
그러니까 내 보물은 나에게 난데없이 날라온 성령받은, 우리의 시민권이 이미 하늘에 가있어 버리면요. 저 자식이나 아내나 남편이나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거예요. 처음부터 내것이 아니었어요. 그래서 처나 자식이나 아내나 남편이나 나보다도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않다는 무시무시한 이야기가 나온 거예요. 그것은 우리의 실천력을 벌써 오바한 것입니다. 어떻게 실천할 수가 없어요.
이 말은 니가 실천해서 구원받은 것이 아니고 주께서 웬 은혜인지 너희에게 그냥 성령주고 싶어서 주었다는 거예요. 창세전에 예정되었다는 이유 때문에 그냥 준 거예요. 주었으니까 준 값을 하라는 거예요. "아내야 미안하다. 당신은 지옥가고 나는 천국가는데 미안한데 나를 탓하지 마라 나도 얼떨결에 받았다." 이렇게 하라는 말이죠. 그럼 아내가 "당신 보물은 내가 아니구나?" "아니야 내 보물은 하늘에 있어" 이럴 수 밖에 없단 말이죠. 상당히 냉정하고 비정하지만.
그러면 나는 아버지 바지가랑이 붙들고 가겠습니다. 자식이 그렇게 나올것이 아니냔 말이죠. 구원받은 아버지 바지가랑이 붙들고 구원받을 것 같으면 내가 성령 안 받고 우리교회 목사 붙들고 구원받겠다. 내가 우리교회 복음 아는 목산 붙들고 구원받는 것이 불가능한 것처럼 니가 이것 붙든다고 되는 문제가 아니다. 거지 나사로가 천국갔을 때 자랑 못합니다. 주여 거지되서 구원받았군요. 거지되서 구원받은 것이 아니예요. 그냥 구원받았어요.
그런데 아직도 부자는 저쪽에 거지가 거지인줄 알고 있어요. 아직도 세상에 있는 기준을 그냥 들어가는 줄 알고. 나사로의 마음은 이미 부자가 부럽지 않아요. 건강한 자가 부럽지 않고 아이구 거지라도 구원받았구나 주님의 은혜가 부러운 거예요. 그런데 부자는 아직도 그게 없기 때문에 저 거지 나사로를 나한테 보내서...아직도 자기 자리가 무슨 자리인지 번지수도 모르고 똥오줌 못가리고 있어요. 지옥가서 그따위 소리하고 있단 말이죠.
그래서 우리가 성령충만 받으면 항상 붕 떠야 됩니다. 육신이 연약하기 때문에 세상에 앉을라고 한번 또 놀아볼라고 푹 잠기지요. 잠겼다가 주께서 또 잡아 땡겨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주께서 항상 창조의 힘으로 합니다. 다음에 마태복음 하겠습니다.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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