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사도행전14강-신을 바꿔라100624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4. 4. 28. 08:18


100624 행 8:26 신을 바꿔라 -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서영준 (IP:211.♡.133.126)10-08-13 13:49 
11, 12, 13강 전체 본문 내용을 확인할수가 없습니다. 예전 처럼 글을 올려 주시면 읽을 수 있겠습니다.
 관리자 (IP:220.♡.41.203)10-11-10 17:53 
http://media.woorich.net/신학강의/2010대전/대전100624a행8장26절a신을바꿔라a.mp3 
http://media.woorich.net/신학강의/2010대전/대전100624b마태복음산상설교b.mp3 

http://media.woorich.net/신학강의/2010대전/대전100624a행8장26절a신을바꿔라a.hwp 
http://media.woorich.net/신학강의/2010대전/대전100624b마태복음산상설교b.hwp 

http://media.woorich.net/신학강의/2010대전/대전100624a행8장26절a신을바꿔라a.pdf 
http://media.woorich.net/신학강의/2010대전/대전100624b마태복음산상설교b.pdf
 관리자 (IP:220.♡.41.203)10-11-12 13:00 
대전100624a행8장26절a신을바꿔라a 

2010-11-11 11:47:21  녹취 : 이미아 
  
사도행전 8장 26~40절까지의 내용이 신기한 내용이예요. 주의 사자가 빌립 집사 찾아와서 빌립 집사가 성령의 이끌림을 받아서 난데없는 지역에 가게 됩니다. 사막에 가게 되었는데 거기서 에디오피아의 고위직을 갖고 있는 간다게라는 내시를 만나게 되었는데 만나기 전에 하나님께서 조치을 다 했놨죠. 

이 간다게 라는 사람이 어디서 성경을 구했는지 모르겠지만 이사야를 보고 있었습니다. 보고 있는데 갑자기 빌립 집사가 나타나서 그 둘이 만나도록 성령께서 주선을 했죠. 그래서 이사야 내용을 보면서 간다게라는 사람이 뭐라고 물었느냐면 이 내용이 무엇이냐? 이사야 이 대목이 누구를 이야기하는 것이냐? 하니까 빌립이 이사야 53장 7~8절의 내용을 가지고 설명을 해주는데
그 설명을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설명이 끝나고 나니까 이 간다게라는 사람이 성질도 참 어지간이 급했나 봅니다. "까짓것 여기 물이 있는데 여기서 세례를 받을란다." 거리낌없이 세례를 받고 난 뒤에는 갑자기 빌립 집사가 홀연히 빌립 집사가 어디로 사라져 버려요. 

주의 영이 이끌어서 빌립을 데리고 가버렸어요. 간다게는 귀신 홀린듯이 "뭐야? 내가 지금 누구랑 이야기 한거야?" 그런 내용이거든요.  방금 이런 내용을 보게되면 뭔가 틀이 깨어진다고 볼 수 있어요. 이 틀이 뭐냐하면 공간과 시간의 틀이 깨어지죠. 저 그려시대 사람이나 고조선, 삼한시대, 가야사람이나 옛날 로마시대 사람들이 시간과 공간의 틀같은 것을 이 사람들이 생각이나 했겠어요? 그냥 살았어요. 칸트가 처음으로 시간과 공간 틀을 해가지고 인간이라는 것은 시간과 공간속에서만 모든 것을 새로 인식한다 라고 한 것입니다. 시간과 공간을 이야기 한 것은 그 뜻이 뭣 때문에 그러냐면 내가 누군가 이 문제를 추적하면서 칸트라는 철학자가 그렇게 이야기 한 것입니다. 

그러면 고조선시대 때나 단군시대 때나, 왕건이나, 조선시대 이순신 장군이 사람들은 내가 누군가를 물을 필요가 있었겠어요? 없었겠어요? 물을 필요가 없죠. 지금 대전에 중앙시장 있습니까? 대전 중앙시장에서 시금치 팔고 이런 사람에게 "아주머니 누구십니까?" 그런소리 말고 시금치나 팔아 주소" 하죠. 왜 내가 누구냐를 사람들이 평소에 묻지 않는 이유가 뭘까요? 그것은 이미 자기를 둘러싼 자기가 부딪치는 모든 사람들에 의해서 거거에 적응한다고 분주해서 내가 단독적으로 내가 누구냐를 물을 필요가 없는 거예요. 

그 대전 중앙시장에 장사치는 자식이 있고 자식을 위해서 땡볕에서 열심히 일해야 되는 거예요. 그러면 자기 생각할 시간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는 거예요. 이순신 장군도 마찬가지예요. 똑같은 지구라는 행성에 살면서 칸트시대에는 내가 누구냐에 라는 것에 관심 있어 가지고 이 때부터는 근대시대에 돌입하는 거예요. 근대시대에는요, 뭐가 날라가냐면은 왕이 날라가 버려요.  

왕이 없는 시대에서 성경을 볼려고 하니까 성경은 초반 약간만 지나도 중반 전체가 왕의 이야기잖아요. 이스라엘만 아니고 로마시대에도 왕이 있었잖아요. 왕 시대에 쓰여졌던 성경이라 이 말이죠. 지금 21세기에, 왕 자체가 없고 맨날같이 누구만 의식하면 되요? 그냥 나만 편하고 나만 밥 먹고 잘 살으면 그만이예요. 나라나 국가라는 것은 그저 나한테 해롭지 않은 범위내에서만 그냥 생각해 주고 월드컵 축구할 때만 애국가 불러 주면서 울고 그뿐이지 평소에는 대한민국 때문에 울고 그럴 필요는 없다 이 말이죠. 

내가 누구냐를 생각하는 그 때 시대에서 이런 틀이 다 깨어진 시대의 성경을 볼 때에 주의할 것이 뭐냐하면 지금 우리의 관점 가지고 들어가지를 못해요. 그럼 이 사람들, 내시라든지 이 사람들은 내가 누구냐를 생각해서 예수를 믿었겠습니까? 아니면 대자연 속에서 그냥 그대로 살아가다가 예수를 믿었겠습니까? 그냥 대자연 속에, 내가 누구냐를 묻지 않고 그냥 들어 오잖아요. 우리가 성경보는 것하고 지금 인식의 틀이 다르잖아요. 인식의 틀이....., 

그럼 대자연을 그들이 뭐라고 했느냐면 그들은 신이라고 한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서 기본적인 것이 뭐냐하면 신이 바뀌는 거예요. 신을 안 믿다가 신을 새롭게 받아 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21세기 저 근대시대에 사는, 현대 교육을 받은 학생들이나 근대 이후에 사는 사람들은 내가 누구냐부터 출발하기 때문에 신을 섬기더라도 신이 꼭 필요한 것이 아니예요. 신은 악세사리 같은 종류예요. 

그런데 우리 할머니 같으면 50젼 전만 해도 정한수 떠 놓고 누구한테 비는 것이 이것은 인간 본성에서 마땅히 나오는 것이지 그것을 누가 탓할 수 없는 겁니다. 예를 들면 제가 초등학교 다닐 때 우리 동네에 가게 되면 30~40대 아주머니들이 젖을 내놓고 다녔어요. 지금 아이들은 상상도 못하죠. 불과 50년 전인데, 아이구 그럴 일이 있습니까? 경찰들이 안 잡아 갔습니까? 안 잡아 갔어요. 왜 젖을 내놓았냐면 나는 아들낳았다는 이 말이거든요. 나를 무시하지 마라. 나는 아들 낳아 준 대단한 며느리야. 그래서 아기에게 젖을 물리면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젖을 못내놓는 것은 아직까지 처녀예요. 시집도 못간 자체가 부끄럽다 이 말이죠. 

그것은 이 이야기예요. 이미 그 사회가 요구하는 사람들이 따로 있어요. 내가 누구냐? 물을 필요 없어요. 시집을 왔으면 시집이 요구하는대로 그냥 살아가면 되요. 그리고 30년 전만 해도, 지금도 마찬가지겠지만. 촌에는 그렇습니다만 시집 간 며느리 자랑이 뭐냐하면 제사 많이 드리는 것을 우수한 며느리로 그것을 자랑했습니다. 나는 집안의 제사가 얼마나 많은지. 제사 많다는 것은 그 뼈대 가문이 든든하다는 뜻이고 그만큼 행세께나 한다는 뜻입니다. 요새 제사 드린다고 하면 시집도 안 갈꺼예요. 
  
내가 누구냐를 따로 물을 필요가 없다는 거예요. 그 시대가 너는 이러면 착한 며느리야. 너는 이러면 훌륭한 자식이야. 그 기준에 맞출려고 그렇게 애를 쓴 거예요. 그 기준이 있었다면 그 전의 시대는 뭐냐하면 성경에 기록된 이스라엘이나 옛날시대는 바로 신이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너가 알고 있는 신 말고 신 자체를 바꾸라는 거예요. 신을 바꾸라는 말은 지금 너를 둘러싼 인생관 자체를 바꾸라는 소리랑 똑같은 소리예요.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이것을 21세기에 교육받은 학생들 한테는 멍한 소리예요. 우리는 아예 신 자체를 인정하지 않겠다는데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이미 신을 갖고 있으면 너가 갖고 있는 God, 신을 바꾸라 하면 말이 되는데. 애초부터 과학시대에 신이 없는 마당에 뭐 신을 바꾸란 말이냐? 나이키로 바꾸라는 말이고? 무슨 말이냐?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이야기하고 사도행전을 이야기 하면서 성령께서 일하시고 이사야 말씀이 말하는 이 모든 것을 21세기에 우리에게 적합한 것으로 해버리면 어떤 오류가 생기느냐면 하나님 지금이라도 천사로 나타나서 이렇게 해달라 누가와서, 빌립같은 분이 등장해 가지고 5분만 이야기하다 다시 사라지는 그런 기적만 내려주시다면, 그런 기적만 내가 기도해서 이루어진다면 목회 따논당상인데 어떻게 그런 기적이 저한테는 일어나지 않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해석을 하고 싶은 유혹들이 많을 거예요. 

집에 있는데 갑자기 천사가 나타나서 예수 믿어라 한마디 하고 가버리고. 아, 이것이 사도행전 8장이네 그대로 시행되겠구나. 그런 기적으로 접근한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자기 자신을 위한 신, 내가 이미 기존의 세상에 포함이 되고 내가 누구냐를 물을 필요가 없는. 그런 분위기가 아니고 "나는 나를 위해서, 하나님은 무조건 내 좋은대로 내 이야기를 들어줘야 해." 라는 이런 21세기 사고방식가지고 성경에 바로 들어가면 그런 오류가 생기는 겁니다.  

지금도 이초석이나 이런 사람들은 사도행전대로 이루어져야 이게 성경이라고 해가지고 사도행전에 나온 기적들 있잖아요? 그걸 딴 교단은 못하지만 우리 교회는 할 수 있습니다 해가지고 생수에 안수하면, 그 생수를 마시기만 하면 모든 병, 중이염이 다 낫는 그런 식으로. 그렇게 해서 무지한 사람 다 끌어 모아서 부동산 투기하고 돈 관리하고...성경 자체가 이미 인간은 세계관이 따로 있습니다. 현재 나밖에 모르는 세계관하고는 달라요. 

그러면 오늘 본문을 설명할 때 어떻게 설명해야 되느냐?  8장26절에 보면 "주의 사자가 빌립더러 일러 가라사대" 주의 사자가 나오죠. 지금은 과학시대죠. 현대 과학의 아버지는 누구를 말합니까? 뉴턴이죠. 아까 이야기한 칸트 이 사람도 사실은 뉴턴의 과학에 근거해서 철학으로 정리한건데 시간과 공간은 절대적이다. 따라서시간이 깨어지고 공간이 깨어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이렇게 본 것입니다. 학생들은 그런 식으로 교육을 받아 왔고. 시간이 깨어지고 공간이 깨어지고 홀연히라든지 또는 짧게 오고 이런 것이 없어요. 

시간이라는 것은 과거가 있고 현재가 있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고 이게 절대적인 인식의 틀입니다. 그러니까 미래가 먼저 온다는 것이 있을 수 있습니까? 아 그거 참 곤란하죠. 성경에서 하나님이 등장할 때 미래가 항상 우리에게 덮쳐 오는 식으로 오는 겁니다. 그것은 왜그래야 되냐면 사람들이 과거 현재 미래로 나가기 때문에 장래에 대해서 어떻게 될지를 모르고 있잖아요. 그런데 장래일이 이렇게 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먼저 줘버리면 믿는 사람들은 이 땅에서 주의 사명을 감당할 수가 있습니다. 

만약에 미래에, 어떤 보증수표처럼 미래가 보장되지 아니하면 어느 길이 옳은 길인지 주저주저하게 되요. 이리로 한번 가봤다가 저리로 한번 가봤다가 확실치 않은 것을 쑤셔보는 것 밖에 안 되요. 그런데 미래가 미리 와 버리면 스데반 집사처럼 목숨받쳐도 좋을 만한 일을 아주 과감하게, 추진있게 할 수가 있습니다. 겁내지 않고 쭉쭉 밀어 부치게 되죠. 그래서 사도 바울이 특징이 뭐냐면 확신있게 뭐든 하죠. 확신있게. 성경에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항상 자기를 돌아보라고 하잖아요(고후13:5). 
  
성경에 보니까, 재미있는 것은 미래라는 것은 과거에 우리가 몰랐던 거에요.그래서 미래와 과거가 일치되야 합니다. 성경에서. 미래에 온다는 것은 결국 뭐가 옵니까? 과거가 오는 거예요. 인간은 뿌리에서 시작되잖아요. 올라오잖아요. 그 뿌리가 미래라는 형식으로 우리에게 주어진다 이 말입니다. 에베소서 1장 4절에 보면 우리 뿌리는 뭡니까? 창세전에, 우리가 예수 안에서 선택 되었죠. 창세전에라는 것이 뭐예요? 과거, 현재, 미래에서 뭡니까? 창세전이니까 과거잖아요. 

요한복음 1장 1절이 뭡니까? 태초에 누가 계시니? 말씀이 계시니 그 말씀은 하나님이시다. 말씀이 없이는 아무것도 만들어진 것이 없고. 뭐예요? 우리의 과거가 대전에서 출생했다 광주에서 출생했다 그게 우리의 과거가 아니고 더 나아가자는 이야기예요. 더 나아가면 우리는 대한민국이 영역이고 아담보다 더 나아가는 거예요. 그러면 뭐가 나옵니까? 창세전에가 되요. 창세전에 간직했던 내용이 어디로 오느냐? 미래라는 형식으로 현재에 도달되요. 

그러면 이것이 약속인데, 약속이 오게 되면 순식간에 뭘  알 수 있습니까? 과거 현재 미래가 한꺼번에 몽땅 접수가 되죠. 제가 강의 처음하면서 21세기 인간들은 자기밖에 모르고 자기 중심으로 삶을 이어간다. 하지만 성경에 보니까 창세전에 이야기 해놓고 그것이 미래에 이미 확정된, 창세전에 약속이 미래에 확정된 약속으로 현재에 주어진다. 

이렇게 했을 때 제가 강의 처음에 나 밖에 모른다는 이야기를 왜 해야 되느냐면, 결국 이런 약속이 주어지게 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야 되느냐면 내가 누구냐? 나는 앞으로 무슨 선택을 해야하느냐? 나는 어떤 길 가야하느냐? 내가 누구며 내 유익을 위하여 성경보고 내 유익을 위하여 교회 다니는 그런 현상은 이제는 캇(cut)를 해주셔야만 합니다. 캇트를 해주셔야 합니다. 

영화를 찍는데 배우가 촬영에 감정 몰입을 해야 하는데 집안에 무슨 일이 있는지 자꾸 그것을 생각하는 거예요. 하다보니까 감독이 만족스런장면이 안 나오는 거예요. 울 때 울지도 않고 멍청하니... 그러면 감독이 "캇, 새로." "캇, 새로." 나중에 안되면 "아니, 남자배우 오늘 찰영 왜 그래? 당신 지금 무슨 생각하는 거야?" 하죠. 주님께서 오게 되면 "어, 당신 무슨 생각한 거야?" 이렇게 되는 거예요. 주님께서 영화를 만드는데 빌립하고 간다게라는 내시하고 만나는 장면을 영화찰영 들어가는 겁니다. 

왜 해야 되느냐? 둘 다 창세전에 예수 그리스도한테 구원받기로 작정된 사람이기 때문에 그걸 미래 확정된, 완성된 뜻에서 현재 둘이 만나는 장면을 찰영 들어가는 거예요. 빌리하고 내시하고는 지금 뭐 생각해야 합니까? 어? 지금 내가 왜 광야에 있지? 어? 지금 내가 왜 갑자기 성경 읽지? 내가 누구냐에 관심이 없이 이 성경 말씀이 무엇을 이야기 하느냐? 저 분은 성경 말씀을 위해서, 내가 내 미래 운명을 위해서 저 분을 보내셨구나를 인정하고 둘이 만나서 뭘 하느냐면 성경 공부를 해야 되요. 

이럴 때 제가 지금까지 이야기한 주의 사자, 성령. 모든 주의 사자 성령의 주의 일은 오직 하나님의 약속에 집중한다. 저도 경험상 교회를 평신도부터 다녀본 기억이 있잖아요. 교회문 가기전 까지는 오늘 예배 몇 시에 끝나고 끝나고 나면 아르바이트 해야되고 그런데 막상 교회문을 열고 하나님 말씀 복음을 듣고 십자가 이야기를 들어 보니까 뭐가 달아나나면 빨리 끝나고 집에가서 숙제할 생각이 없어지고 내가 남아서 교회에서 봉사할 것이 뭐가 있지? 라는 생각이 들더란 말입니다. 

내가 처음에 들어 올 때는 이거하고 난 뒤에 빨리 이거해야지 라는 것이 없어진 거예요. 왜 그러냐면 그 현장이 말씀이 해석되는 현장. 주의 사자가 임하고 성령이 임했다. 당신 주의 사작 봤어? 천사 키가 얼마야? 성령의 연기가 노란색이야? 빨간색이야? 그것을 물으면 안 되요. 주의 사자와 성령이 하는 일은 하나님의 복음과 창세전에 약속, 이미 다 이루어진 약속에 몰두하고 집중하도록 사람들을 그렇게 자기에게 관심두도록 하지 않고, 거기에 몰두하도록 하는 그 역사, 그 일, 그 자체가 성령이 함께 임하는 일이라는 것을 사도행전 8장에서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 하는데 이만큼 걸렸습니다. 20분 걸렸어요. 

지금은 사람들이 자꾸 보여 달라는 거예요. 아직도 자기에게 관심이 또 있어요. 주의 사자, 성령이 임하면 자기에게 관심이 없어요. 사도 바울이 로마로 가면서 주의 사자가 임했어요. 주의 사자가 당부한 것이 있습니다. 너는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해야 돼!! 딱 이 한마디 했어요. 그 과정에서 풍랑이 일었어요. 배가 뒤집어 졌습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이 뭐만 생각 했겠습니까? 풍랑이 일어나 배가 뒤집어지든 난데없는 섬에 가서 표류를 하든 상관없이 뭐는 남아 있어요? 나는 이렇든지 저렇든지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한다는 하나님의 현재 들어닥친 이 약속에 대해서 계속해서 자기는 의심치 않고 생각한 거예요. 

여러분 가정에 불화가 있습니까? 문제가 있습니까? 자식들 애먹입니까? 또 결혼식을 앞두고 걱정되는 것이 있습니까? 그런 모든 문제가 따지고 나면 어디서 나오느냐면 21세기 사고방식 있잖아요? 나는 뭘 챙길 것이며, 나는 얼마나 내 힘을 소유할 것이며, 나는 또 지금보다 얼마나 돈을 많이 모을 것이며, 내가 이번일 해서 내 명예가 높아지고 자존심이 세질 것인가? 

 이런 사적인 일에 몰두하다 보면 자꾸 그런 생각이 들겠지만 만약에 성령이 임해서 말씀에 푹 빠지게 되면 어느정도 되야 되느냐면 적어도 주여 그만 살랍니다. 죽어도 좋습니다. 하늘나라에 편히 사는 것이 이 대전에서 사는 것보다 훨씬 낫습니다. 내가 그동안 살아 가는 것 차체가 스트레스 였습니다. 우울증 징조였고 아무것도 아닌 이 일. 16강 그거 안 보고 우루과이 안봐도 괜찮습니다. 결혼식 안하고 지금 이 상태로 그냥 천당가도 저는 만족겠습니다. 할 정도로 자기 자신에게서 벗어나는 바로 그 순간이 바로 성령이 충만한 거예요. 

 그것을 사도행전에서 이야기 한 것입니다. 현실이 말씀 속에서 현실이지 내가 내 위주로 생각하는 것은 이것은 이순신 장군, 왕건 시대때 환경이 만들어준 내가 사는 환경에 의해서 내가 적응할려고 임으로 꾸며버린 가짜 나, 허구적인 나에 불과한 것입니다. 진짜 내 모습은 창세전에 어떻게 될 인간인지 그 말씀이 덮쳐야 진짜 내 모습이지 내가 이 대전바닥에서 대구바닥에서 살면서 어떻게 처신하면 남들이 날 어떻게 생각할까? 옛날 우리 아주머니들이 젖 내놓고 "나 아들 낳았다" 동네방네 자랑하고 "아이구 아들 이쁘네요" 하고. 

자기 현실에 푹 빠져 가지고 자기를 잊어 버렸던 그 세계관에서 완전히 바껴서 말씀이 주는 세계관 "너는 창세전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되었고 너는 천국에 가서 살 사람이다." 라는 새로운 미래의 계획이 밀려와 버리면 그것이 바로 성령의 충만을 받은 것입니다. 내시 간다게가 빌립 떠나고 난 뒤에 계속해서 빌립 찾았겠습니까? "가지 마세요. 가지 마세요." 이렇게 했어요? 

자기는 이제 말씀 속에 들어와 버리니까. 이제는 말씀이 가까이 있으니까. 그냥 빌립은 하나의 잠시 힌트를 준, 주의 사자에 의해서 주의 성령에 의해서 말씀이 어떻게 짜여져 있는가? 말씀의 주인공이 누구냐? 말씀의 내용이 뭐냐? 그것을 잠시 알려주기 위해서 잠시 왔다가 간 종에 불과한 거예요. 목사라는 것이 그런 거예요. 

성도가 본인이 말씀 속에 푹 빠져 버리면 목사라는 것은 자기 심부름꾼에 불과한 거예요. 목사 붙들고 있을 필요가 없는 거예요. "갈라면 가라 다른 사람이 또 오겠지." 이렇게 되야 됩니다. 그 사람을 내 사람 만들 생각 말고. "주의 사자가 함께 있구나." "성령이 함께 있구나." 이것이 현실 입니다. 그런 현실을 여러분들이 만끽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사야 53장부터 생각합니다. 이사야 53장 7~8절 내용을 가지고 끄집어 내어서 성령받은 빌립이. 그냥 빌립이라 하지 않습니다. 그냥 빌립이라고 하면 그것은 빌립의 의견이고 개인적인 해석이라고 하기 때문에 그것을 우려해서 성령받은 빌립께서 성경을 어떻게 해석했느냐? 신학교 나온 빌립이 성령 충만한 빌립이 성경을 어떻게 해석했기에 믿었던 내시 간다게가 세례를 받았는가? 

이사야 53장에서 예수님을 끄집어 내었습니다. 만약에 레위기 2장을 성령받은 빌립이 봤다면 뭘 끄집어 내야 되요? 예수님이죠.창세기 1장하면 뭐가 나와야 되요? 예수님이죠. 갈라디아서도 마찬가지죠. 예수님이죠. 얼마나 쉽습니까? 누가 하신 일을 믿어야 하냐면, 내가 한 일을 믿어야 하겠습니까? 내가 교회에서 봉사한 것을 믿어야 되겠어요? 성경을 그런 식으로 봐야 되겠습니까? 그러면 물세례, 성령세례 받을 필요 없습니다. 성령세례 받을 하등의 이유가 없어요. 

모든 성경은 교회가 나와서는 안 되고 헌금 이렇게 해라가 나와서는 안 되고  봉사 어떻게 해라가 나와서는 안 되고 모든 성경은 예수님이 나오는 성경 해석을 해야 합니다. 성령 받은 빌립이 그렇게 했습니다. 왜? 교회이야기 헌금이야기 봉사이야기가 나와서는 안 되느냐면 지금 과거 현재 미래에 하나님의 약속의 세계가 새로운 현실로 주어집니다.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라 말라 했단 말이죠.  

이것은여러분이 기억하시죠? 제가 강의 처음할 때 뭐라고 했습니까? 성경이 기록될 때 시대는 어떤 시대였다? 이미 신을 인정하는 시대였다. 우리 할머니도 조물주한테 정한수 떠놓고 빌었으니까. 뭔가 신에게 혜택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아는 시대죠. 로마서 1장에 나와요. 너희들은 신을 알되 그 신은 가짜 신이라고. 그런 신에게 그것은 가짜 현실이고 진짜 현실로 바뀔려면 주의 사자가 일을 해야 되고 성령이 일을 해야 되요. 

그러면 주의 사자, 성령이 일을 할 때 뭐를 중심으로 하느냐? 하나님의 약속, 성경책을 중심으로 일을 하는 겁니다. 성경책을 중심으로 해서 새로운 현실이 덮쳐버리면 나 중심의 현실을 잊어 버리게 되는 거예요. 내 교회가 나를 구원한 것이 아니거든요. 그럼 누가 구원 했습니까? 예수님. 너무나 간단한 이야기 아닙니까? 너무나 간단한 이야기를, 우리나라 소위 교회다니는 사람들이이 이야기를 아는 사람들이 몇 명 되겠습니까? 몇 십명도 아니고 몇 명입니다. 

교회 없어도 구원받는다는 이야기를 아는 사람들이 몇 명 되겠습니까? 왜 교회를 합니까? 거기는 자기가 다니기 때문에 예수님나가 있잖아요. 그래서 나가 없는 것을 믿어야ㅐ 되요. 나가 안 느껴지는 것 내가 사라져도 무관한 곳. 나는 죽어도 주님 살아 계시면 주님이 나늘 다시 만들면 되니까. 이게 어디 나와요? 요한복은 1장 4절에 나오죠. 그 분이 아니고서는 생명이 없었느니라. 다시 말하면 나 있게 하기 위해서 생명을 주신 분이다 이 말이거든요. 내가 믿는다는 것은 내가 여기 존재한다는 것을 믿으면 안 되고 내 존재를 믿지 말고 내 존재를 존재케 하신 분을 믿게 되면 그 분 위해서 왜 나는 이 땅에 태어나야 하는가? 왜 나는 이 땅에 살아야 하는가? 아울러 알게 되겠죠. 그것을 믿자는 말이예요. 

나 여기 있는데 주께서 해준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을 믿지 말고 나 없을 때 계신 그 주님을 믿자는 것입니다. 그럴려면 과거에, 창세전에 있었던 그 약속이 이미 미래에 그 약속대로 완성되게 하기 위해서 현재 누가 찾아 왔습니까? 나에게 찾아 왔잖아요. 인간의 이성이나 능력은 항상 나로 시작해서 나에게 돌아 오잖아요. 옛날 사람들이 신을 섬겨도 신을 섬긴 것이 아닙니다. 정한수 떠 놓고 항상 비는 것은 나 잘되라고 한 것입니다. 

어떤 분이 이야기 했는데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것을 아주 노골적으로 붙여논 교회가 있다면서요. 그것을 제가 20년 전부터 예언을 했거든요. 지금은 없지만 분명히 교회에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붙인다고. 계속해서 제가 수백번 이야기 했어요. 지금 교회이기때문에 절간 흉내 안 낼려고 참고는 있지만 가르치는 것은 전부다 정성이 지극하면 하늘도 감동한다고 그 이야기 밖에 안 나온다고 언젠가 그것을 걸것이라고 했는데 듣고 보니까 뭐 자리하나 펴야 겠어요. 

내가 있음에 모든 스트레스는 나한테 오는 거예요. 우울증 걸리고. 내가 없던 현실을 현실로 받아 들여야 해요.내가 없던 현실은 내가 태어나기 전이잖아요. 그러면 그것보다 더 나아가면 아예 모든 인간이 없던 시절이 있죠. 그것이 현실이거든요. 더 나아가면 창세전에 예수 안에서, 예수님만 계시고 아버지만 계시고 삼위일체 하나님만 계신 그 시절로 돌아가자. 그 시절의 이야기가 지금 나에게 반도체 칩처럼 나에게 박혀 버린 거예요. 그것을 믿자는 거예요. 

방금 이야기 한 것이 꾸며낸 이야기예요? 아니면 진짜 현실에 맞습니까? 라는 것은 뭘로 확인된다? 이 성경 말씀으로 확인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간다게 내시와 빌립이 만나기 전에 조치를 했습니다. 간다게가 마차타고 광야를 가면서 이사야 53장을 보도록 조치를 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간다게야 너는 몇 년 몇 월 몇 일에, 나이가 오십 몇 살 때 어느 광야를 마차 타고 가면서 이사야 53장을 보게될 거야? 하지만 그 때 누가 찾아 올거야." "그것도 그 사람이 똑똑한 것이 아니라 주의 사자가 와서 주의 성령이 와서 미팅하도록 내가 주선했어." 라는 이야기를 성령 안에 담아서 담아낸 것이 현실화 되도록 이 말씀이 체험화 되도록 그렇게 주선을 한 것입니다. 

참, 이런 이야기 하면 기존 목사들 귀신신나라까먹는다고 할 것입니다. 그 따위 소리 하지말고 교회나 키워라 돈이나 끌어 모아서 교육관 짓고 예배당이나 키워라 당신이 그 딴 소리하면 그사람들 교회 안나오면 어디 가느냐? 교회 안 나오면 예수 믿고 천당가죠. 교회 없어도 예수 믿고 천당 갈 수 있는데. 창세전에 스케쥴이 나한테 왔는데. 창세전에 설계도가 나한테 와버렸는데. 공부를 하자는 것이 아니잖아요. 공부를 하면 그 지식이 또 나한테 남아요. 나는 똑똑해져. 그러면 그 똑똑한 나를 믿어요. 이것은 예수 믿는 것이 아니고 자기 자신을 믿어 버려요. 내가 없이 나의 원인이 하늘에 있고 나는 단지 하늘 약속의 결과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사도행전 8장에서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사야 53장에서 예수님을 어떻게 끄집어 내느냐면 그동안 여러 방법이 있었습니다. 방법을 적어볼테니까 여러분이 어떤 것이 정답인지 한번 보세요. 1번. 문법적 방법이다. 2번 역사적 방법이다. 3번 사회적 해석(방법)디다. 4번 십자가 복음. (하하하) 4번이죠. 십자가 복음이죠. 문법적 해석을 누가 합니까? 내가 하죠. 역사적 해석을 누가 하죠? 내가 하죠. 사회적 해석을 누가 하죠? 사회적 해석이라는 것은 자유진영 쪽에서 하는 거예요. 고아와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고. 변혁. 개혁. 사회를 뒤집어 버리는. 북한에게 퍼주고. 소위 해방신학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네번째 보세요. 십자가 지신 분이 누구입니까? 내가 아니죠. 오늘 본문대로 하면 주의 사자가 임해야 뭐가 해석된다? 성경 전체가 해석되요. 주의 사자가 임할 때는 다 이루었다 해석하고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는 식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겁니다. 그 다룬 결과가 뭐냐면 에수님 부활하셨고 승천하셨죠. 마귀는 예수님이 부활하고 승천하는 것을 대중들에게 알리지 않도록 그렇게 조치를 할려고 했어요. 

예수님보고 그냥 포기하도록 예수여! 그냥 이 땅에 살자. 당신 배고프지? 당신 인기 원하잖아? 세상부귀 있잖아? 나한테 절하고 살자. 심지어 십자가 죽은 그 순간까지 계속해서 역사한 거예요. 니가 메시야냐? 옆에 있는 강도까지 놀렸습니다. 아이구 꼴 좋다 지 자신도 구원 못하면서 감히 남을 구원해. 끝까지 우리로 하여금 너는 아무것도 아니야. 너는 과대망상증 환자야. 그런 식으로 계속 이야기 하고 온 거예요. 

십자가 중심으로 볼 때만 마귀의 진짜 유혹이 무엇인가를 그 때 알아요. 우리가 십자가 생각하지 않으면 마귀의 유혹이라는 것도 없어요. 그냥 우리 하는대로 내버려둬요. 어차피 그 사람은 눈에 보이는 세상이 전부기 때문에. 같은 편끼리 왜 싸워요. 같은 편끼리 싸우면 16강 못올라 가죠. 마귀하고 세상하고 같은 편이기 때문에 그냥 세상일에 몰두하고 각자 자기가 하는 노동에만 몰두하면 되지 갑자기 십자가 이야기는 왜 끄집어 내요. 

그것 끄집어 내면 그러지마. 십자가 생각하지 말고 니가 교회 충성한 것만 생각하라고. 목사 잘 섬겨서 이만큼 복 받았잖아. 너가 안수 해서 병 나았잖아. 그런 것만 생각하라고.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 해석 하기 전에 1번 2번3 번을 다 해석할 줄 알아야 되요. 4번이 정답이니까 십자가 해석 바로 들어 갑시다. 안 됩니다. 우리 자신이 이미 육으로 된, 마귀에 묶여 사는 사람들이거든요. 에베소서 2장 1절에 나오잖아요. 우리가 공중 권세 잡은 자를 따랐고 이 세상의 악한 영을 따른 사람들이 아닙니까? 

그래서 이런 해석들을 일단 알고 그 다음에 이거 아니거든 이거 아니거든 이거 아니거든 해서 이 해석을 생각해야 되요. 이거 다 알아야 해요. 그러면 문법적 해석을 생각해 봅시다. 이사야 53장 4절~5절에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여기에 그가 나오고 우리가 나오죠. 우리가 누구고 그가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문법적 해석의 정답이 뭐냐하면 우리는 이사야 시대때 있었던 고난받는 유대나라 입니다. 그리고 그는 다윗계열에서 나온 왕, 인간의 왕입니다. 이사야 때는 아하스 왕 시대거든요. 우리는 고난 받는 유다 백성들이 되고 그는 장차 아하스 왕을 대신해서 찾아오는 다윗 계열에 속한 인간의 왕이 되는 겁니다. 이 해석을 누가 수용하느냐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수용하는 거예요. 그리고 이 해석 외에 다른 해석을 찾을래야 찾을 수 있습니까? 찾을수가 없어요. 

특히 우리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택함받은 이스라엘 사람들, 남은 자를 이야기 합니다. 그럼 이방인들 필리핀이나 태국 사람들은 됩니까? 안 됩니까? 안 되죠. 왜냐하면 그 사람들은 언약 바깥에 있는 이방인이기 때문에 해당이 안 됩니다. 그래서 지금도 이스라엘 유대인들은 기독교 신자보고 성경 그대로 대답하라고 합니다. 여기에 그가 어떻게 예수라고 하느냐. 예수라는 이야기가 어디 나오느냐 한번 보라는 거예요. 

유대 바리새인들이 주장하는 것은 이겁니다. 현재 이사야에 나오는 이야기가 자기 민족이야기인데 예수님 당시도 마찬가지이지만 사도 바울이라는 그런 배신자가 성경의 문법적 해석도 안되는 말도 안되는 해석을 가지고 일방적으로 여기 그가 예수님이고 우리는 예수 믿는 사람들이라고 편법을 써가지고 그렇게 우겼다는 거예요. 

그 의견을 누가 동의하느냐면 외국에 나가서 구약학을 연구하고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은 다 동의해요. 동의 안 하면 박사 학위를 안 줘요. 박사 학위라는 것은 문법적 해석이 먼저 되야 되요. 문법에서 안 나온 이야기를 하게 되면 논리에 비약이 되기 때문에 학위를 못줍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와가지고 기독교 신자인척 하느냐 그것은 취직하기 위해서 그러는 거예요. 

현재 신학교에 있는 구약 학자들은 예수를 안 믿습니다. 뭘 믿느냐면요? 유대인의 하나님을 믿어요. 하나님을 믿어요. 예수 믿는 것은 교회 부교역자로 취직할려고. 신햑교에 취직해서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것만 믿어요. 애초부터 유학갈 때부터 신앙 없이 간 거예요. 박사학위 받으면 신앙이 많이 있는 것 처럼 보이기 때문에 그렇게 위장하기 위해서 온 거예요. 그 사람들이. 

그래서 이거는 예수님이 아니고 그 당시 메시야라고. 이것은 멈춰야 한다고. 신나게 노골적으로 이야기 한 것이 자유주의 진영의 기장측에서 주장한 거예요. 하나님은 예수 믿는 사람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이 세상에 억눌린 자, 고난 받는 자의 메시야다는 거예요. 불교 신자도 괜찮고. 이 사람도 괜찮고. 어렵고 힘들게 자본주의 사회에서 억눌린 노동자 계급,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고난 받으면서 활동하는 편에 섰다. 그들이 누구냐? 자기들이라는 것입니다. 왜? 어려운 노동자와 빚 많은 농민들을 위하여 고난받는, 억울한 일을 당하는, 채찍에 맞는 그 사람들이 바로 자기 자신들이라고 하는 겁니다. 지금 그런 운동을 벌리고 있는 자기 자신이 메시야의 길을 가고 있다는 겁니다. 

이 말은 이 땅에서는 구원이 없고. 하늘 나라도 없고. 하늘 나라는 이 땅이 잘 사는 것이 하늘 나라지 죽어서 천국가는 이런 것은 사도바울이 조작해 놓은 것이지 사실은 성경적으로 없다는 것입니다. 죽은 마이클 잭슨 위아더 월드라는 노래 라는 것이 있잖아요. 가사 내용이 뭡니까? 주기도문을 실재로 옮기자는 것입니다. 우리 손으로 도와줘야 남들이 산다. 종교의 벽을 타파하고 신을 떠나서. 이 땅에 있는 것은 신이 있는 것이 아니고 신성이 있다. 신적인 요소만 있다고 보는 겁니다. 

그래서 이들은 맹렬하게 부르조아를 비판하죠. 너희들은 가진자의 돈을 탐내서 교회를 세워 가지고 너희끼리만 구원받는다고 하는데 이 4대강 사업은 어떻게 할 것이냐? 환경파괴는 어떻게 할 것이냐? 환경파괴하는 것이 어떻게 하나님의 뜻이냐? 환경을 회복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저 감리교 수련회 가보면 환경문제, 통일문제가 주테마가 됩니다. 성경을 보든 인간이  알고 있는 문법적 귀재를 가지고 보게 되면 예수님이 안 나타납니다. 

그 다음에 역사적 해석에 문법적 해석이라는 것은 그와 우리 사이에 문법적으로 따져 볼 때 이것은 그냥 빈자리. 유보되어 있고 나중에 그것이 드러날 사항이다. 이게 문법적인데 이 해석과 같이 결부되는 것이 역사적 해석입니다. 문법적으로 해석할려면 개념이 있잖아요. 그 개념은 역사적 상황에서 따오는 겁니다. 그 시대의 상황, 그 시대가 어떻게 되어 있는가? 문법적 해석은 지금 이것이 무슨 뜻이냐라면 역사적 해석은 앞으로 우리가 뭘 할 수 있느냐? 뭘 해야 되느냐? 이런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 해석을 할 때 어떤 대목을 해도 성도 여러분 이렇게 합시다 나오면 그것은 역사적 해석입니다.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난 거예요. 뭘 믿을 것인가가 아니고 뭘 하시면 여러분들은 사명을 감당한 것이 됩니다. 역사적 해석으로 신약을 해석하면 하나님 나라를 확장. 확장이라는 말을 합니다. 점포확장, 가게확장, 베란다 넓히는 아파트 확장 확장이 뭐냐면 지금 것은 좁다는 것입니다. 만족스럽지 못하고 이것을 넓히자는 겁니다. 그러면 하늘나라 확장하려면 어디부터 해야 됩니까? 예배당 부지부터 사들여야죠. 그게 눈에 보이는 확장 아닙니까? 교회가 하늘나라이니까.  

그러니까 목사들이 문법적 해석을 해서 자기들이 마치 이 시대를 담당할 고난받는 종이라고, 두번째 역사적 해석하면 우리들이 뭘 하거냐? 뭐하기는 돈만 내면 되지요. 돈 내라 이 말입니다. 돈이 있어야 자본주의 사회에서 영토확장이 되니까. 그래서 항상 설교 시간에 성경적으로 쭉 해석하고 어느 신학자가 어떻게 했고 어느 유명한 목사가 어떻게 했고.....하다가 마지막 나온 결론이 뭐냐면 우리는 하늘나라 확장하기 위해서 돈 내라 이뿐이예요. 이거 반대하는 사람은 악마의 종이다. 사도행전 1장에 보면 하늘나라가 임하는데, 확장 되는데 전도와 선교를 방해하는 자는 마귀 짓이다는 협박으로 그 설교가 끝납니다. 어지간히 성경 몰라서 그 협박에 다 넘어 갑니다. 

세번째 사회적 해석이라는 것이 뭐냐하면 성경은 보지 말고 성경을 떠나서 성경을 썼던 그 시대 사람들이 있는 반면에 지금은 그 유대인들만 성경이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나라 같으면 천부경, 단군신화 같은 우리나라 나름대로의 거룩한 경전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 자체가 이 시대가 신의 경전이 우리자신이라는 겁니다. 언제까지 성경을 보느냐 ? 언제까지...성경보지 말고. 

여러분들의 평소의 액션 자체가 성경에서 벗어나서 어떤 신문지상에 나오는 천안함 무너진 것, 북한 김정일, 그것을 알아야 생각의 폭을 넓혀서 더 많이 하나님의 정보를 파악해서 하나님 백성답게 바르게 사는 것이 사회적 해석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교회에서 신학자들이 이런 소리할 때 일반 아마추어들이 다 넘어 갑니다. 진짜 그럴듯하게 보이고 내가 교회와서 인간 한번 되보자 하는 자들에게는 적절한 거예요. 그렇다. 나는 사명을 받았어. 그렇지 성경만 볼게 아니고 내가 하는 모든 일이 성경이야. 그러니까 난 신의 자녀가 되는 거야. 이러한 자긍심을 갖는 자에게 얼마나 적절합니까? 

네번째 해석. 십자가는 결국 뭡니까? 십자가라는 것은 예수님이 등장하잖아요. 예수님이 등장한다는 것은 앞에 있는 해석을 하는 인간들 바로 죄인이 된다는 겁니다. 앞에 문법, 역사, 사회적 해석 이것이 바로 기존의 신 관념의 너 중심의 해석입니다. 우리는 십자가 피 앞에서, 멍청하게 있는 십자가가 아니고 거기서 뭐가 흘렀잖아요? 피가 나왔잖아요. 그 피는 어느 몸에서 나왔습니까? 예수님의 몸에서 피가 흘렀잖아요. 예수님 몸에서 피가 흘렀다는 말은 우리 몸에서는 그냥 죄만 흐르는 거예요. 죄만. 내 몸에서 평소에 애 놓고 살면서 맨날 죄만 흘러가니까 그 죄 앞에서 뭐가 필요하단 말입니까? 피가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그 피 없으면 우리는 하늘나라에 못간다는 말입니다. 이게 바로 이사야뿐만 아니라 레위기 사도행전 모든 성경 해석에 피가 뭉친채 나오는 것입니다. 그림 하나 그리고 이 시간 마치겠습니다. 무대가 하나 있고 우리는 앞을 보면서 각자 자기 일을해요. 뒤에 주님께서 우리는 앞, 세상을 보고 있는데 뒤에 주님께서 손을 내밀어서 잡아 당겨 버립니다. 

"너 이리와" 이게 주의 사자, 성령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뭐야? 뭐가 잡아당겨? 라고 하면서 뒤를 돌아볼 때 창세전부터 있었던 하나님의 약속 그리고 이미 확정된 미래가 이 안에 담겨서 우리를 잡아 당기는 거예요. 너는 내가 택했어. 너는 내가 뽑은 세운거야.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계속 앞을 보면서 이런 느낌을 가지면서 앞에 나와서 전진하게 하죠. 

이것을 보면서 왜 이것이 죄악된 것인가? 왜 여기서 활동하는 것으로 구원받지 못하는가? 왜 예수님한테 피가 필요한가? 여기서 죄가 발생되기 때문에 피 없이는 거룩한 사람이 모이는 천국에 갈 수 없는 겁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복음입니다. 이것을 알고 내시가 딱 돌아보면서 우리 이 경계선에서 세례받읍시다. 세례가 뭡니까? 나는 여기서 죽었고 이쪽 사람으로 새로 살았습니다 하는 것이 세례거든요. 

그래서 간다게가 즉시로 이것을 알고 모든 성경이 이쪽 문제 해결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하나의 약속된 이것이 성경에 담겼다는 것을 알고 세례받고 그 다음 빌립은 떠나고 간다게는 계속해서 세상에서 이 복음을 전파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사도행전입니다. 10분 쉬고 그 다음에는 마태복음 하겠습니다.
 관리자 (IP:124.♡.85.8)10-12-03 14:49 
대전100624b마태복음산상설교b 

2010-12-02 11:50:01  녹취 : 송재원 
  

마태복음 5장 해봅시다. 5장 38~39절. 

38절.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39절.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여기에
산상설교에 있어서 항상 구분되는 것이 기본적으로 저희와 너희. 재미있는 것은 너희에 해당될 때는 반드시 산상설교를 이해한 사람만 너희가 되지 그냥 산상설교를 듣는다고 해서 너희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보통 세상에서 너희라고 하는 것은 자기 말을 듣는 사람이 너희가 되죠. 너희들은 말야 똑바로 하란 말이야 너희들은 전부다 듣는 사람이잖아요. 

그러나 예수님께서 너희라 하는 것은 듣는 사람이 너희가 아니고 이 말씀대로 그대로 사는 사람만이 너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너희에 해당되는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죠. 결국은 주님께서 너희라고 기준을 제시하지 안 했으면 몰라도 너희에 해당되는 모든 사람은 저희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산상설교라는 기준을 제시한 것을 가만히 들어보면 너희에 해당되고 싶어도, 가만히 들어오면 저희에 해당되는 말만 골라서 했어요. 왜냐하면 바리새인을 상대로 하기 때문이예요. 

시편 109편 4절에 "나는 사랑하나 저희는 도리어 나를 대적하니 나는 기도할 뿐이라" 되어 있죠. 그러니까 오른뺨 왼뺨 할 때는 먼저, 참 산상설교 이런게 어려워요. 어렵기 때문에 천천히 하겠습니다. 저희와 너희의 구분은 누가 정한다? 예수님이 정하죠. 그러면 예수님이 나타나지 않았으면 너희와 저희가 없죠. 예수님이 나타나서 기준을 정하지 않으면 너희와 저희는 물에 물 탄듯 섞여 있죠. 예수님이 등장해서 산상설교 때려 버리니까 너희 따로 있고 저희 따로 있죠. 

따로 있다는 말은 너희에 해당되는 기준이 따로 있다는 말입니다. 누구누구 해당된다는 말이 아니고 있든지 없든지 너희라는 기준은 따로 있다는 말입니다. 저희라는 기준도 있겠죠. 이 기준을 예수님이 제시하지 않았습니까? 예수님이 기준을 제시할 때, 나는 저희를 사랑하나 저희는 도리어 대적하죠. 그러면 기준을 제시하는 것은 우리보고 지키라는 기준이 아니고 이 기준은 누구 품에 있어요? 예수님 품에 있다가 앞으로 이 기준대로 앞으로 예수님이 산다는 뜻에서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이 기준은 우리 보고 지키라는 기준이 아니고 이 기준을 제시한 예수님이 이 기준 따라 살아가면서 드러날 때 너희와 저희로 갈라진다 이 말입니다. 시편 109편 4절. "나는 사랑하나 저희는 도리어 나를 대적하나.." 되어 있죠. 사랑을 누가 먼저부터 했어요? 예수님부터 먼저 사랑하죠. 예수님부터 먼저 사랑하니까 사랑할 때 그들이 그 사랑에 대해서 갚았습니까? 대적했습니까? 오히려 대적하죠. 

그러면 그것이 너희에 해당되는 기준이니까 너희에 해당되는 사람은 누구밖에 없어요. 예수님밖에 없죠. 오른뺨 때리면 왼뺨 내놓라 이것 누구보고 한 이야기 입니까? 예수님 본인 보고 한 이야기죠. 다른 사람은 해당되지 않습니다. 너희에 해당되는 사람은 오직 예수님밖에 없어요. 현재 시점에, 산상설교 시점에는 예수님밖에 없어요. 그런데 앞으로 일을 해나가시면 너희에 해당되는 사람이 생긴다? 안 생긴다? 생기는 거예요. 생길 때 누구 능력으로? 예수님의 능력으로 생긴다는 거예요. 산상 설교가 그 이야기입니다. 

사람들 쭉 모아놓고 "똑바로 해. 똑바로 해 이게 천국가는 기준이야" 이렇게 묻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먼저 베풀어 줘도 너희는 아니고 전부 다 저희 될 수밖에 없는 거예요. 저희밖에 없는, 거기에 기차 관통하듯이 , 철로 깔아놓고 도시 한복판을 지나가듯이 예수님께서 산상설교를 가지고 관통합니다. 관통하게 되면 어떻게 되요? 예수님 기차를 타고 저희에서 너희로 올 수 있는 사람은 기차를 몰고 가는 예수님의 능력에 의해서만 저희에 있다가 내려 오겠죠. 

나는 옛날에는 저희였는데 예수님공로로 저희에서 너희가 되었습니다. 라는 말을 십자가 맞은 편 산에서 이 말씀 하신 거예요. 산상설교 하시고 내리막길 내려가서 다시 오르막길 올라가서 하겠죠. 십자가하고 맞은 편에 뭐가 보입니까? 산상설교 보이죠. 산상설교 앞에 뭐라고 되어 있느냐면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다 이룬다 하죠. 그러면 십자가 앞 맞은 편에 산상설교 보인다는 말은 이것을 두 자로 줄이면 뭐가 되죠? 율법이 되죠. 

십자가 앞에, 복음 앞에 율법 있다. 갈라디아서 주제 아닙니까? 사도 바울은 뭐로 정리했어요? 복음과 십자가로 정리했죠. 그래서 이것을 마태복음에서는 롤러코스트로 산에서 내려가서 다시 올라가는 이런 식으로 이해되십니까? 갈라디아서에서는 복음이 오기 전에 뭐부터 와야 한다고 했습니까? 복음이 오기 전에 율법부터 와서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입을 틀어 막고 저주아래 있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원수된 자요, 경건치 않은 자요, 죄인인 것을 깨닫게 하고 난 뒤에 그 다음에 뭘 이야기 합니까 십자가 복음 이야기 하죠. 

로마서 5장 초반에 보면 아담이 죄의 왕노릇한 뒤에 두번째 아담, 한분이 순종치 않음으로 말미암아 죄가 왕노릇한 것처럼 한분 예수님이 순종하므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은혜가, 의가 왕노릇한다 했다 이 말이죠. 사도 바울 보세요. 인간으로 봐서는 얼마나 똑똑한 사람이예요. 그런데 사도 바울은 지헤를 내가 배운 것이 아니고, 내가 아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로부터 직접받은 계시라고 하거든요. 사도 바울이 받은 모든 계시는요. 내가 전한 복음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는다고 했거든요. 

또 사도 바울이, 물론 예수님이지만 기차를 타고 저주받을 자와 복받을 자를 관통하기 위해서 기차를 타고 오는 거예요. 올 때 그 구조가 뭡니까? 복음과 율법, 율법과 복음을 마주보게 하는 거예요. 제가 이 강의를 어디 모임에서 15년전인가 했더니만 몇 명의 목사들이 화가 났었어요. 왜 화가 났느냐면 이 산상설교나 예수님이 주신 것은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알고 이제 다시 도로 산상설교 율법을 다 지켜야 구원받는다고 그들은 알고 있다는 겁니다. 우리가 율법을 지키고 싶어도 못지켰는데 우리가 복음을 알고 다시 도로 이렇게 간다는 거예요. 

그런데 이 율법 이야기할 때 율법을 누구보고 이야기 합니까? 너희, 저희란 인간보고 이야기 하잖아요. 율법은 결국은 대상이 인간을 지적하기 위해서 있잖아요. 그러면 십자가 복음도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보면 "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함께죠. 사도 바울은 함께라는 말도 했고, 대신이라는 말도 했어요. 이것은 8월달에 할건데 속죄라는 말을 해요. 미리 할까요? 

미리하면 이렇습니다. 속죄라는 말은 룻기라는 말에 보면 무른다는 말을 사람들이 몰라요. 물려준다는 말인지 손해봐서 물어준다는 말인지 그것이 아니고 기업을 무른다. 어떤 상속된 유산을 무른다는 뜻은 자기 땅인데 빚을 너무 많이 내어서 남한테 이미 넘어가 버렸어요. 저 땅 내 땅인데 누가 내 대신 돈 줘서 저 땅을 도로 내 땅으로 돌려주는 어떤 일가 친척이 없을까? 그게 무르는 것입니다. 그것을 고엘이라고 합니다. 내가 실수해서 날려버린 하나님이 주신 그 땅을 누가 대신 와서, 나는 무능력자이니까. 나는 못하니까 내 대신 갚을 치루어서 네 것으로 도로 돌려줄 수 있는 착하고 어질고 위대하신 그런 일가친척 없을까? 

그것을 가지고 고엘이라고 합니다. 대속자. 그게 속죄라는 것입니다. 값을 치루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땅에 온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것을 고스란히 그대로 은혜로 남아있게 하는 것입니다. 가난해서 고아와 과부라 어쩔 수 없이 빚을 많이 내가지고 먹고 살려고 하다 보니 빚낼 수밖에 없었어요. 남은 것은 담보가 땅 밖에 없어 가지고 하나님이 주신것도 팔아 먹었는데 그것을 어떤 분이 다시 오셔가지고 고맙게도 이 대신 치루어 줘서 하나님의 은혜속에 다시 살 수 있도록 한 조치를 가지고 구속자라고 합니다.그래서 신약 성경에 보면 예수님은 우리의 구속자라고 합니다. 

또 이런 의미가 있어요. 어떤 집에 도둑이 들었는데 어떻게해서 우리 부모를 죽여 버렸어요. 너무 어려서 복수가 안 됩니다. 삼촌가운데 힘이 센사람이 있어서 살인자를 죽여서 아버지의 원수를 갚아 주는 것 이것도 고엘이라는 의미가 있어요. 대리자, 보복자. 대신해서 복수해주는 사람. 또 이것이 속죄니까 예수님은 뭐가 됩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갚아주는 사람도 되고, 우리의 억울함을 복수하는 사람도 되고. 복수하는 것은 요한계시록에 나오잖아요. 우리의 억울한 일, 향료를 올리면 이 땅에서 주님께서 복수하죠. 

성경에 이스라엘 구약이 왜 있는가를 아셔야 합니다. 구약은 우리 신약에 있는 복음을 이야기 하기 위해서 그들은 땅이라는 그런 환경을 가지고, 그냥 땅이 아니고 약속의 땅이라는 신약의 완성된 내막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구약을 버리면 안 돼요. 구약을 십자가 복음으로 해석을 해줘야 합니다. 십자가 가지고 율법을 해석할 때 "우리가 다 지켜야 돼" 라는 의미인지 "우리는 안 지켜도 되는" 것인지 둘 중의 하나거든요. 십자가 하고 율법하고 딱 마주 세우면, 함께 죽지 않고 예수님 혼자 잘나서 혼자 돌아가시면 이 율법은 우리가 다 지켜야 돼요. 

아, 저런 식으로 율법을 지키고 완성하셔서 부활하시고 승천했구나! 자, 우리 차례다. 나는 예수님 사랑을 알았으니까 예수님 사랑으로 율법을 지켜야지." 라고 나서야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라는 것은 예수님이 홀로 죽은 십자가가 아니고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히죠. 예수님 안에 들어있는 자기 백성들을 함께 품고 있다 이 말이죠. 여러분 통대구 알아요. 지명 말고 생선에 알 있잖아요. 옛날에 할아버지가 좋아 하셨는데 다른 사람은 별로 안 좋아했고. 배를 자르면 징그러울 정도로 들어 있거든요. 예수님 십자가 죽을 때 배갈라 보면 피 한방울마다 한명씩 구원받는 거예요. 이 말은 좀 어페가 있지만. 

그렇다면 율법을 대할 때 이 십자가 가지고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할 때는 우리 혼자 갑니까? 예수님하고 함께 갑니까? 예수님이 함께 율법을 보는 거예요. 율법이라는 것은 사랑인데 사랑이 될려면 정죄가 있어야 하고 용서가 있어야 합니다. 정죄와 용서를 합쳐서 사랑이라고 합니다. 보통 우리 남녀간의 사랑은 욕정이라고 하죠. 땡긴다. 뭐 안고 싶다. 도파민이 나오면 세로토닌이 나오면 뭐 그런 거 있죠. 그런데 성경의 사랑은 진짜 정죄해요. 두번째 용서하죠. 주기도문에 나오죠. 우리가 우리에게 죄를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주께서도 사하여 준다고 되어 있죠. 

항상 사랑은 정죄와 율법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정죄 기능은 누가 해요? 율법이 해야 돼요. 율법은 산상설교 뿐 아니라 사도 바울의 명령과 성경에 나오는 모든 하라 하지마라가 다 해당돼요. 돈을 사랑함이 일만악의 뿌리다. 먹는 것 입는 것 족한줄로 알라. 마지막 때에 부모를 배역하고 ...쭉 나오잖아요. 범사에 감사하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복음을 전파하라 모든게 율법이 우리에게 다가와 정죄 기능을 해요. 

두번째 정죄 기능만 있으면 사랑이 아니죠. 용서 기능이 있죠. 그래서 사랑안에는 정죄함이 없나니. 어느 것이 더 셉니까? 정죄보다 용서가 더 우세한 겁니다. 많이 용서받은 자가 많이 바깥에 튀어 나오면 사랑이 되는 거예요. 많이 용서받은 자가 많이 사랑하는 거예요. 세리와 창기가 하늘나라 먼저 가는 거예요. 왜? 자기가 많이 정죄 받았기 때문에. 그래서 제대로 신앙생활 하는 사람은 성경을 보면서 나 이것 지켰다 저것 지켰다가 아니라 성경을 보면서 상당히 사람들이 예민해 져요. 

한 말씀, 한 말씀이 용서 없이는 안 되는 그런 말씀이구나! 라는 것을 그냥 안 봐요. 내 피는 얼마나 아까운데 주님께서 귀한 피를 나밖에 모르는 인간을 위해서 흘렸구나! 그것을 더욱더 많이 알게 하시는 거예요. 이래서 사랑이 된다 이 말이죠. 그러면 제가 방금 강의한 내용 중에 교회가 어디 있습니까? 교회가 설 자리가 없죠. 교회의 머리는 인간이 아닙니다. 목사도 아니고. 교회하고 인간은 직접 연관이 없어요. 이것이 교회의 기본입니다. 인간이 돈 내서 세우는 것이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 짓는다고 돈 내라고 지가 세우면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는 인간이 못세웁니다. 제가 참다 참다 큰 소리 냅니다. 제가 많이 참았어요. 교회는 인간이 못세우는 것이 교회예요. 이유가 뭐냐하면 사도행전 1장 28절에 보면 교회는 하나님의 피로 세우는 거예요. 돈으로 달러로 황금으로 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피로 세우는데 그 피는 누구 피다? 예수님 피지 우리 피가 아니예요. 그래서 인간은 교회를 못세웁니다. "진짜 교회는 우리가 돈 내도 십일조 내도 못세우는 것이 교회입니다." 라고 말할 수 있는 교회가 진짜 교회입니다. 

그러면 못세우면 교회 어떻게 생겼습니까? 그냥 생겼어요. 주님이 그냥 만들었어요. 돈으로 십일조로 전도로 아니예요. 예수님의 피로 그냥 만들었어요. 교회는 예수님의 피로 사모하는 사람들끼리의 모임이 교회입니다. 돈 갖다 바치는 것이 아까워서 교회 다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피가 귀해서. 그걸 안 보면 한이 될 것 같아서 예수님의 피 외면하고는 용서받을 길이 없는 것을 알아서 속죄. 고엘, 누가 내 대신 값을 치루지 않으면 한평생 모든 죄는 해결할 길이 없는 줄 알아서 오직 죄인의 엎드러진 모습으로 문을 여는 다가서는.... 

그래서 제가 지난 주일날 불현듯이 생각나서 이야기 했잖아요. 큰 교회 출입구가 항문 같다고 이야기 했잖아요. 거기서 똥이 막 나와요. 많이 나올 때는 설사까지 나와요. 그 사람이 전부 욕심이 나오는 것이 그렇다. 진짜 교회는 뭐가 나와야 해요? 피가 나와야죠. 피가 쏟아져야 되는데 욕심이 차서 "아, 하면 되겠다." "아, 기도하면 복 받겠다." 더러워요. 교회만 더러운 것이 아니고 교회 바깥도 다 더럽게 만들고. 

다시 해봅시다. 출발이 예수님 십자가 졌다. 십자가 졌을 때 혼자만 진 것이 아니고 함께 졌다. 따라서 율법에 볼 때 혼자 가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과 함께 간다. 예수님의 사랑은 정죄하는 기능과 더불어서 용서하는 것 현장에서 정죄하고 현장에서 용서하고. 이 문제 풀어봐. 오른뺨 맞았는데 왼뺨 내놔 봤나? 아니요. 원수를 사랑해 봤나? 미쳤습니까? 내가 원수를 사랑하게. 봐라 문제 내주고 용서하고. 너 때문에 너가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나 때문에 너가 구원받는 것이다. 

이런 경험을 동행을 중요시 합니다. 동행하면 생각나는 것이 있어요. 최성수. 누가 나와 ,함께 하나~ 여성들이 결혼하는 것은 동행입니다. 혼자 살 수 있는데 같이 사는 것이, 혼자 사는 것보다 동행해서 사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남자들은 동행이 아니라 편리 때문에 사는 것 같아요. 여성은 결혼하면 자아를 바구니 안에 참외를 담으면, 여자들은 결혼할 때 자기 하는 일이 참외라면 참외를 바구니에 담아요. 여자의 의미가 뭐냐? 바구니 전체가 큰 바구니에 담기는 것. 이게 결혼의 의미입니다. 

그렇죠? 큰 바구니. 나를 포함해서, 나를 보호해 주는 큰 바구니. 그런데 남자는 여자가 참외나 바구니가 안 보이고 그것 버리고 그냥 내 바구니만 있으면 된다고 하거든요. 어쩔 수 없어요. 타고난 태생 때문에 그래요. 창세기 3장 때문에 그래요. 여자가 먼저 죄를 지어서 그래요. 알랭바디우라는 사람이 유명한 말을 했어요. 사랑은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고 둘로 그냥 가는 것이다. 자꾸 사랑이 하나가 된다고 생각하니까 여기서 정신적인 문제가 생긴다. 하나 아닌데 자꾸 하나가 될려고 하니까 억지가 되니까 자기가 힘들어 지는 거예요. 

그러면 사랑은 뭐냐 둘됨을 확인하는 것이 사랑이라는 겁니다. 세상적으로 맞는 이야기예요. 사랑하기 때문에 둘 사이에 다툼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다툼자체가 없는데 사랑하기 때문에 다툰다는 거예요. 일리가 있는 이야기 입니다. 남같으면 싸웁니까? 안 싸우죠. 그러니까 이 사람이 내린 결론이 뭐냐하면 하나 되는 것이 부부가 아니고 하나 될려고 애쓰는 것이 부부라 이 말입니다. 하나 될려고 애쓰면 둘이라는 구조를 버리면 안 된다. 죽을 때까지, 끝까지 둘이 가야 돼요. 이것이 새로운 사랑이, 그 사람의 윤리라는 책에서 나와요. 

지금까지 모든 사랑의 개념을 뒤엎는 것입니다. 둘임을 확인하는 것, 너는 우리는 결코 하나가 될 수 없음을 받아 들일 때, 산다는 것이 편하게 사는 것입니다. 안 되는 것을 억지로 할려고 하면 되지도 않을 뿐더러 힘들고 상대방에게 너무 기대했다가 실망만 주어지게 되면 마음에 상처만 될 뿐이라 말입니다. 차라리 우리 둘인데 서로 관계나 한번 좁혀볼까? 이런 식으로 사는게 차라리 편하게 행복하게 사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게 고린도전서 7장에 나와요. "아내 있는 자는 없는 자 같이 하라" 그런데 알랭바디우라는 사람이 뭘 모르느냐면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아내 있는 자는 없는 자 같이" 이미 누구와 함께 하나가 되었어요? 성도는 예수님과 하나가 되었기 때문에 아내 있든 없든 이 하나는 깨지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하는 거예요. 아무리 결혼하든 안 하든 예수님과 하나됨은 너희 힘으로 된 것이 아니고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알랭바디우는 이런 것이 없어요. 

이런 것이 없고 그저 행복, 결혼하는데 행복을 최대한으로 얻을 수 있는 방법은 차라리 하나됨을 포기하는 것이 낫다 이런 식이고 그냥 행복이 우선이고 사도 바울은 이미 현실, 창세전에 있었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하나되기 위해서 이 땅에 태어났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결혼생활하라 이 말입니다. 그래서 아내는 예수님 사랑하듯이 하라. 용서가 나와요. 사랑이란 정죄와 용서로 되어 있는데, 만약에 주님을 사랑한다고 해놓고 가짜 사랑은 뭐가 빠졌습니까? 용서와 정죄가 빠져 버리고 자기 잘남, 자기 의로움만 있어버리면 남을 비판하게 되고 판단하게 돼죠. 비판하게 되고 판단하게 되면 저 사람은 나의 원수가 되고 저 사람은 나의 동지가 되겠죠. 원수가 된다는 말은 이미 사랑하고는 물건너 간 것입니다. 

그러니까 산상설교에서의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이 우리한테 해당됩니까? 안 됩니까? 우리가 지킬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우리는 때려 죽여도 못지킵니다. 예수 십자가 알고 난 뒤에, 복음을 알고 난 뒤에는 산상설교 지킬 수 있지 않습니까? 지킬 수 있어요. 지킬 수 있을 때는 먼저 주님께서 우리 입을 막아 버립니다. 왜냐? 원수를 사랑하는 것을 누구만 지키게 했다? 예수님만 지키죠. 우리가 복음을 안다고 얼렁 내가 지킨다고 나서니까 얼렁 입을 막아 버려요. 그게 자기 부인입니다. "주여 나는 못합니다." 하는 것이 그게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됩니다. 

원수 사랑을 우리 눈으로 보게 해가지고 내 안에 주님이 계시다는 것을 우리가 증거케 하는 것입니다. 방금 한 이 문장이 모든 성경의 윤리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남이 못한 것을 주님이 하신 것을 보고 박수치고 찬양하고 영광 돌리면서 "아이구 내가 못한것을 그렇게 했구나!" 하는 거예요. 그걸 보고 옆에 불신자가 "니 지금 뭐하노? 니 지금 원수를 사랑해?" "미쳤나? 내가 왜 원수를 사랑해 죽일려고 하는데" "그런데 방금 그 원수를 보고 감격 했잖아?" "그것은 내가 한 것이 아니고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하신거야. 성령께서 하신 거야." 라는 말을 하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원수같은 사람들이 발생되게 하는 것입니다. 

주께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라. 입을 다무는 것입니다. 만약에 입을 안 막아 버리면 그 다음부터는 내가 원수를 사랑한다고 별짓을 다해요. 그게 모순이예요. 왜냐하면 원수를 사랑한다고 하면 이미 원수가 사라져 버려요. 사라진 원수를 사랑하면 원수를 사랑한 것이 아니고 내 좋아하는 사람 사랑한 것이 돼요. 그러면 원수 사랑한 것이 이루어지지 않아요. 원수를 사랑할려면 끝까지 원수가 되어야지. 북한을 사랑한 것은 원수 사랑한 것이 아니예요. 그거는 요한3서에 해당이 됩니다. 이단을 만나지도 말라고 했거든요. 

그래서 이 원수사랑하는 이 해석이 어떻게 해석되어야 하는지 굉장히 신학자들이 난처해 있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을 전했으면 원수를 사랑했으면 나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는다고 안 나와야지. 저주란 말을 다 해놓고 원수사랑한다고 하면 앞뒤가 모순된다는 거예요. 그쪽에서 주장하기를. 그렇잖아요? 여호와 증인들은 아예 뭐가 없다? 지옥은 없다는 거예요. 왜? 지옥을 만들어 놔버리면 원수사랑하는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에 지옥이 없어야 말이 맞는다는 거예요. 

참, 그 사람들 보면 평소에 더워도 넥타이 매고 점잖고 말하는 것도 온유하게 말하고 그저 지방교회하고 붙여 놓으면 누가 온유한지 상상해봐요. 여호와 증인하고 지방교회하고 누가 더 점잖은지. 둘이 한번 맞짱 떠봤으면 좋겠어요. '부족합니다' '부족합니다' 누가 더 점잖은지. 제가 지난 월요일에 강의한 것을 해보겠어요. 프랑스 빵을 뭐라고 하죠? 바게트라고 하죠. 빵이 길죠. 여기에 약간 흠집을 내어서 여기는 고기 다진것을 넣고 여기는 야채나 쨈이나 크림을 넣는다고 합시다. 이 위에 예수님께서 누워있다고 합시다. 

여기 창세전부터 해서 마지막 천국까지 간다고 할 때 이 바게트에 예수님께서 누워 있으면 두가지 속성이 나옵니다. 공의와 사랑이 나옵니다. 사랑은 바로 용서죠. 다른 말로 하면 긍휼. 불쌍히 여기는 것. 그렇다면 여기 인류라고 해도 되고 하나의 개인이라고 해도 괜찮아요. 여기에 주님이 공의와 사랑을 쏙쏙 집어 넣는다구요. 바게트에 예수님의 용서가, 피가 묻혀 있으면 예수님을 증거하게 되어 있죠. 

그러면 예수님의 공의, 공의가 뭐냐하면 엄중하심. 무서움이 오게 되면 반발하겠죠. 그러니까 공의와 사랑에 의해서 두 종류의 바게트가 생기는 거예요. 이게 성경입니다. 우리 위에 같이 엎어져 있는 거예요. 평소에 살아가면서 주님의 사랑을 받으면 평소에 그 사람이 뭐가 되겠습니까? 주님의 사랑으로 듬뿍 쨈 발린 바게트가 되겠죠. 이것이 예수님 증인이고. 이것은 긍휼의 그릇이고. 또 한사람은 뭡니까?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수 밖에 없는 진노의 그릇이 되겠죠. 

그래서 진노의 그릇은 예수님의 말만 나와도 십자가 나오기만 하면 반발해요.자꾸 반발하니까 주님의 공의는 저주를 낼 수 밖에 없는 거예요. 저는 인간을 하나의 빵으로 생각해서 이야기 한 겁니다. 이제는 여러분이 산상설교가 다 해결되었죠? 산상설교를 두 자로 줄이면 율법이었다. 율법은 지금 이 자리에서는 예수님이 혼자 이야기 하지만 나중에 십자가를 거치고 오게 되면 예수님과 더불어 우리와 함께 산상설교를 봐가지고, 어째서 우리가 이런 죄에서 십자가로 구원되었는가를 보면 볼수록 다시한번 깨닫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서도 우리를 사용하셔서 이 산상설교를 그대로 이루시는 겁니다. 우리를 사용해서. 내가 한 것은 아니고 내 안에 누가 했다?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서서 하신 거예요. 이제 내가 사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는 것이라. 그리스도께서 산상설교를 그대로 이루시는 겁니다. 그 다음에 41절 봅시다.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어디 다이어트 할 일 있습니까? 평소에 조깅못해서 할 일이 있습니까? 왜 오리를 가게 하는데 억지인데. 

그리고 40절에 보면 "속옷을 달라고 하는 사람에게 겉옷까지 주어라" 요새말로 하면 집에 강도가 들었는데 강도가 tv이 가져가면 김치냉장고까지 주라는 말입니다. 미쳤죠? 왜 줘야 하는데요? 누가 돈을 빌려 달라고 하면 빌려주지 말고 그냥 주어라. 그런 사채놀이 하는 사람 봤습니까? 이자도 안 받고. 교회가 산상설교 지키면, 그런 산상설교 지키는 교회 가면 좋습니다. "목사님 돈 좀 빌려주세요." =본인이 산상설교 지킨다면서. 교회 오야붕이니까." "언제든지 갚으세요." "갚기는 왜 갚아? 당신이 오늘 아침에 설교 했잖아? 산상설교처럼 살으라고. 돈 한 삼천만 땡겨주세요." 하면 "이게 미쳤나?" 하고 내쫓아 버립니다. 

바로 당신이 미친 겁니다. 자기도 천국 못가면서 천국 가는 사람을 막아 버리고. 삼천만원은 너무 심했습니까? 어떤 거지가 와서 이천원 빌려 달라고 하면 좋다고 빌려줘요. 왜? 그것을 빌려줄 때 자기는 마치 갚아 달라고 하지 않고 그냥 주었다는 것을 훈장처럼 달 절호의 찬스가 왔기 때문입니다. 이천원. 참, 제가 교회할 때 거지들 많이 옵니다. 그래서 어떤 교회는 아예 사찰한테 십만원 줘서 오는 사람들 한 만원씩 주라고 하는 교회도 있지만. 진짜 매일 싸우는 거예요. 항상 초인종 누르고. 그냥 들어와요. 거지들의 구역이 있어요. 이쪽은 내 구역 저쪽은 내 구역 하면서 한바퀴 돌고 걷힌 돈으로 술만 퍼마시고. 교회 참석하는데 얼마 줄거냐? 아마 만원 주면 교회 참석 할 겁니다. 

43절 봅시다.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고 했는데. 바로 이들이 고민이 되어서 물었어요. 여기서 이웃을 사랑하라고 했는데 이 이웃이 누구입니까? 물었죠. 정답은 이웃이 없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는데 이웃이 없어요. 왜 없냐면 인간은 지밖에 몰라요.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에게 이웃은 없어요. 그러면 이웃이 언제 생기는가? 주님이 만들어 주어야 이웃이 생겨요. 어떤 제사장. 어떤 레위인이 이웃이 없는데, 지금 바쁘게 성전에 제사드리려 가야 하는데 주님이 이웃을 만들었죠. 가는 길에 누가 피흘리고 있더란 말이죠. 누가 그 상황을 만들었습니까? 

하나님께서 만들었겠죠. 강도만난 사람이 피흘리고 있을 때, "아이구 미안합니다." 하면서 갔잖아요. 이웃이라고 하는 것은 옆에 산다고 이웃이 아니고. 참, 이런것이 어려워서 말하기가 힘든데요. 이웃이라는 것이 없어요. 이웃은 없는데 뭐만 있어요?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이 창세전부터 먼저 있었잖아요. 그러면 우리는 바게트 아닙니까? 바게트. 바게트이기 때문에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웃할 역할' 우리 앞에 등장하고 '이웃을 사랑해야할 우리 역할' 등장해서 빠방하고 만나는 겁니다. 

이웃을 주님께서 만나게 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할 우리를 만나게 해서 그 사이에서 이웃을 사랑하도록 그렇게 하는 겁니다. 사랑이 됩니까? 안 됩니까? 안 돼죠. 그 안에서 우리는 뭘 느낍니까? 아, 주께서 피흘릴 수 밖에 없는 정죄의 기능을 하는 거예요. 왜 이웃이 없다가 생겨나야 하냐면 만약에 있는 이웃을 사랑하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은 자아의 확장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카바하기 위해서 뭐라고 하시느냐면 너 한테 잘해주는 사람을 사랑하면 그것이 무슨 이웃사랑이냐고 했어요. 

그래서 사람들은 항상 이웃을 어떻게 이해하냐면 저 사람이 나한테 이웃값을 할 때 이웃이라고 여기잖아요. 이웃값을 할 때. 교회 처음 나온 사람한테 어떤 집사님이 "안녕하십니까? 오늘 처음 나오셨습니까?" 하고 다가선다는 것은 무슨 이유입니까? 저 사람이 이웃될 가망성 때문에 내가 찾아 간 거예요. 그랬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자기하고 10년 전에 원수였었다. 차마 말을 못하죠. 사람들은 이웃을 먼저 사랑하기 위해서 이웃을 누가 선택합니까? 자기가 선택하죠. 그것을 주님께서는 전면금지 시키는 겁니다. 

금지시키고 주님께서 만든 이웃을 제시하고 사랑할 수 있느냐 묻는 거예요. 그러면 최고 이웃은 누구입니까? 예수님밖에 없죠. 예수님이 최고 이웃이예요. 예수님께서 오신 이유가 너가 이웃을 사랑하는가 시험하기 위해서 왔습니다. 그리고 너가 말씀대로 사느냐 보자 이 바리새인들아. 그리고 자기가 이웃 역할을 하러 왔잖아요. 그런데 이웃은 커녕 원수로 취급했지요.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원수된 자들입니다. 

항상 모든 성경은 예수님의 십자가 중심으로서 예수님을 집어 넣어서 해석해야지. 성경말씀하고 나만 달랑 남아 있으면 이것은 바리새인적 해석입니다. 역사적 해석, 문법적 해석, 사회적 해석. 나올 것이 그것밖에 없어요. 전부다 지중심의 해석밖에는 안 나옵니다. 그 다음에 또 봅시다. 44절.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너희는 핍박을 하는 자를 위해서 기도하라. 너희는 누구를 위해서 기도하라. 이것을 들으면 할 것 같지요? 그래, 북한에 있는 김정일을 위해서 기도해야지. 할 수 있을 것 같죠? 그런데 막상 내 몸을 미워하는, 핍박하는 자를 위해서. 핍박입니다. 그냥 단순히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고 핍박하는 사람입니다. 

핍박이라는 것이 뭐예요? 핍박받는 사람이 있어야 될 거 아닙니까? 핍박받는 사람이 누구예요? 나이여야 되잖아요. 그래서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서 나는 무슨 역할을 한다? 핍박을 하는 사람이 등장해야 되고. 나는 그 사람에게 매일같이 핍박을 받아야 하고. 그 다음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사람들을 사랑해야 되고. 이거 누가 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만 할 수 있어요.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한 것은 그냥 구원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평소에 예수님을 미워한다는 것을 아시고 구원한 거예요. 

왜? 바로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의미에서, 율법 완성의 의미에서 우리에게 찾아오게 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까 그림에서 놓친것이 하나 있는데. 아까 십자가 산 있잖아요. 그 맞은편 산에 산상설교 있죠. 이 사이에 케이블카 있어요. 예수님의 십자가라는 것은 율법의 완성으로서 십자가 입니다. 그래서 핍박하는 자를 위해서 기도하라는 말을 누가 이룬다? 주님께서 이루셔서 우리와 함께 더불어서 왜 예수님만 할 수 있는가? 그 현장을 찾아 나서는 겁니다. 고고학자들처럼. 현장을 보니까 우리는 사랑할 수 없는, 오히려 핍박을 하는 자들임이 들통나죠. 

그것이 바로 용서하는 순간 핍박하는 자를 사랑한 것이 되는 겁니다. 우리가 용서를 아는 순간, 사랑을 아는 그 순간이 바로 핍박하는 자를 사랑할 수 있는 말씀이 이루어지는 순간이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이 말씀을 이루었기 때문에. 무슨 말이냐면 말씀은 예수님이 이루잖아요. 그런데 말씀이 이룬다는 것이 우리에게 증거가 되기 위해서 그 현장에 우리가 있어야 돼요. 우리가 있으면서 우리는 뭘 느껴야 되는냐면 주님께서 이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 나를 이용한 것을 느낍니다. 남들같으면 내가 이룬것처럼 되지만 사실은 주님께서 나를 이용해서 주님이 일했다는 식으로 진행되더라 이 말입니다. 

성전 미문에 있는 앉은뱅이르 낫게 한 것도 베드로와 요한이 낫게 한 것이 아니고, 베드로와 요한을 이용해서 주님이 직접 낫게 한 것처럼. 모든 매사가 다 그런 겁니다. 그것을 가지고 "말씀밀림." 우리가 현지 알든 모르든 아마존의 밀림속에 놓여 있어요. 우리는 어떤 것을 하면서도 우리가 성경을 몰라서 그렇지 설거지를 하든지 무엇을 하든지 선풍기를 쐬든지 적용해보면 말씀속에 다 들어 있어요. "범사에 감사하라" 다 들어 있어요. "숙제 안 하나?" 고함치다가 범사에 감사하라에 다 적용되게 되어 있어요. 

그 다음 45절에 "이같이 행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같이 한즉, 행함이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죠. 너희 아버지죠. 그러면 누구는 빠지죠? 저희는 빠지죠. 아까 너희와 저희가 계속 구분된다고 했죠? 여기 너희에 해당되는 사람은 창세전에 해당되는 사람만 너희에 해당되고, 저희는 아예 예정 안 된 사람이 해당되죠. 처음부터 사람을 둘로 나눈다 이 말입니다. 처음부터 지옥갈 사람과 천국갈 사람이 이미 갈라져 있다는 것을 계속 이야기 하는 겁니다. 그것도 율법으로 산상설교를 하고 있는 겁니다. 

십자가가 와서 재확인 되죠. "아, 그러니까 우리가 용서 받아야 할 이유가 있구나" 결국 이 말은 우리가 왜 용서를 받아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뭘 행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왜 용서받아야 하는지 이유를 아는 거예요. 그러면 목사님, 우리가 용서만 받고 이것을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라고 질문을 할 수 있겠죠. 용서는 받았는데 용서 받고 난 뒤에도 우리가 핍박을 한 자들을 위해 기도를 하지 않으면 우리가 하나님 아들이 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그 질문을 할 수 있잖아요. 

용서라는 것이 뭐가 있어야 용서가 되잖아요. 뭐가 있어야 됩니까? 죄가 있어야 용서값을 해요. 만약에 죄도 없는데 용서할려고 하면 용서할려는 사람이 뻘쭘하죠. "아, 니는 용서할 것도 없는데 내가 미안하다." 이렇게 돼요. 뭔가 용서가 될려면 죄가 계속 발생되줘야 용서하는 사람의 보람이 생깁니다. 용서하는 기분이 있을려면 우리가 계속해서 "주여 용서해 주세요" 라는 말이 계속 나와줘야 용서하는 분이 신바람이 나요. "아직도 나를 믿는구만. 아직도 나의 효력을 인정한다는 말이지" 신바람이 나거든요. 

그러면 우리가 어디를 근거로 해서 용서해 달라는 말을 할수가 있습니까? 이 말씀을 제대로 이해했을 때 용서해 달라는 말이 제대로 나와요. 이해 못하면 "주여 이제 제가 알아서 할께요." 이렇게 나오고. 제대로 이해하면 "주여 두 세가지는 하겠는데 다른것은 못하겠습니다." 라고 나온다 이 말이죠. 이것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서 그렇고 좀 어설프지만. 제대로 하게 되면 "아, 저 하나님 아들 못되겠습니다. 이런 식으로는 안 됩니다. 용서해 주옵소서" 라는 말을 항상 뒤에 탁탁 붙이게 되어 있습니다. 

피아노를 잘 쳤다. 갑자기 이상하게 잘 쳤다. "아! 나같이 잘 치는 사람 나와 보라고 해" 우쭐되는 거예요. 그런데 성경에 보니까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는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는 받으신다는 말씀이 생각이 나는 거예요. 그러면 그 뒤에 "앞으로는 겸손할께요." 이렇게 하면 안 돼요. 뭡니까? 이건 우발적으로 교만했기 때문에 앞으로 또 교만할 수 있는, 의당 생겨먹은 것이 그래요. 생겨먹은 것이 죄짓도록 생겨먹었기 때문에. 우리가 필요한 것이 뭐냐 순간 나오는 것을 용서해 달라는 겁니다. 

그런데 불신자는 그것이 안 돼요. 복음을 모르는 목사는 그것이 안 돼요. "주여 부흥케 달라는 욕심을 용서해 주세요." 라는 말을 못해요. 부흥해 달라는 말만 했지. 부흥시켜 달라는것이 용서받을, 저주받을 것이라는 것을 설교 시간에 넣지를 못하는 거예요. 지것 챙기면 그만이니까. 자기 과시만 하면 되니까. 교만해지면 그만큼 폼나니까. 설교 시간에 '하라' '하지마라'를 해야 됩니다. 마음껏 하시고 그 뒤에 용서의 근거에 대한 이야기. 피를 이야기 해주어야 합니다. 

마지막 이것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46절.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한번 물어보겠습니다. 부부가 사는 것이 사랑하기 때문에 삽니까? 미워하기 때문에 삽니까? 만약에 사랑하기 때문에 살면 그 가정에는 용서가 필요가 없습니다. 부부하면서 뭘 끄집어 내느냐면 나는 왜 아내를 미워하느냐? 그것을 발견할 수 있어야 돼요. 내가 아내를 미워할 수 밖에 없었는데, 이런 죄를 용서받았다는 것을 아는 순간, 여보 하고 아내가 퇴원하는 순간 아내의 얼굴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죠. 저 사람이 없었다면 내 죄를 알수가 있었다? 없었다? 몰랐습니다. 

혼자 살지 마시고 결혼하세요. 해야 내가 저 사람이 없었더라면, 나 빼놓고 남 다 미워한다는 사실을 느끼지를 못해요. 그래서 아내가 죽으면 화장실에 가서 웃는다 안 합니까? 기분이 좋아서. 또 결혼할 수 있으니까. 그게 평소에 얼마나 그런 마음이 들었겠어요. 인간은 죄인이다. 하나님은 선하시나 인간은 거짓죄다고 짧게 나와 있는데 그게 실감나고 체험되는 것은 파리바게트처럼 살아가면서 "주여, 저 세리고 창녀입니다." 이런 인간을 주께서 용서해 달라고 하면 주께서는 "아이구 탕자구나! 걱정하지마 내가 이렇게 오기를 기다렸어. 소고기 잡아줄께. 좋은 옷 입혀 줄께." 이게 바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라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잘난 맛에 살아 왔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하고 비교할 때는 잘났는데 십자가 앞에서는 못난 인간이고 죄인중에 괴수입니다. 항상 우리의 눈은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예수님 앞에 겸손한 사람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