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강-롬 14장 22-23(믿음과 죄)140504-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로마서 14장 22절에서 23절까지 입니다. 신약성경 258페이지입니다.
로마서 14:22-23
“네게 있는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 자기의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책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 이는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한 연고라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
복이 있다고 해놓고 그 다음에 정죄라는 말을 하고 “믿음으로 하지 않는 것은 죄”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우리한테 복이 있다고 칭찬을 했으면 그 다음에는 부정적인 뒷말이 안 붙어야 우리가 기분이 좋을 텐데 이렇게 “자기를 책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우리가 듣고 싶은 복 이야기를 해 놓고는 뒤에서 정죄라든지 또는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라고 해버리면 복 받아놓고도 우리가 얼마나 심적으로 부담이 되겠습니까? 복을 유지를 계속 해야 되는지, 아니면 유지 못하면 복 받기 전의 상태로 되돌아간다는 공포심도 같이 유발되는 상황이거든요.
그렇게 될 때 그럼 우리는 처음부터 복을 주지를 말던지 복을 줘놓고 죄라고 갖다 붙여버리면 애초부터 복을 주지도 말고 그 뒤에 죄라는 말도 안했으면 차라리 좋겠다는 생각이 들 겁니다. 성경에서 이렇게 복이 있다고 복을 이야기하고 그 다음에 죄를 이야기하는 것은 ‘네가 중요하지 않다.’는 이야기입니다. 네가 보기에는 이 세상에서 네가 제일 중요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너한테 갖다 입히고 안겨주는 그것이 더 중요한 거예요. 우리는 성경을 보면서 일단 내가 중요하다고 여기고 성경에서 뭘 챙길 것인가, 그것부터 허겁지겁 챙기는 버릇이 있는데 막상 성경에서는 우리를 가지고 놉니다.
우리를 도화지로 여길 때 색칠을 뭘 로 할 것인가, 그것은 화가 마음이에요. 도화지가 이런 그림을 요구할 입장과 처지가 되지 못합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가지고 노시든지, 복을 줘도 안 받습니다, 할 권한이 없고 그 복을 도로 빼앗아가도 “왜 가져갔습니까?” 할 그런 입장에 우리가 있지 않습니다. 괜히 자기 이익 얻으려고 교회 오고 이익 얻으려고 성경 보게 되면 그것은 애초부터 오해한 거예요. 인간 쪽에서 오해한 거예요. 괜히 본인이 오해해 놓고 “왜 내가 원하는 것을 안 줍니까?” 이렇게 나오면 안 되지요.
여러분이 중국 음식 시키고 난 뒤에 배달부가 오토바이타고 옵니다. 우리는 지금 중국집 배달부가 보고 싶어서 온 게 아니에요. 우리가 기대하는 것은 그 통 안에 있는 짜장면입니다. 그게 중요한 거예요. 짜장면이 중요한데 배달부가 오면서 짜장면은 생각 안하고 오면서 머리나 매만지고 다듬고 와서 “저 어떻습니까?” 한다면 “나는 너 보려고 온 게 아니다.”는 말이지요. 그 짜장면이나 내 놓으라는 말이지요. 인간은 뭔가 실어 나르는 존재에요. 하나님의 복이 무엇인지 저주가 무엇인지, 실어 나르는 존재지 “저 어때요?”라고 자기자랑 하라고 교회 온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선 것이 아니에요.
십자가마을에 누가 질문한 것에 답변한 것이 있어요. 그 질문하신 분이 에스겔 23장에 나오는 내용을 보면서 딱 자기한테 해당이 된다고 생각하면서 질문했어요. 거기 보니 여자가 남자를 밝혔는데 나중에 남자한테 차였다는 내용이거든요. 그걸 보니 꼭 내 입장이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런 식으로 해석하면 안돼요. 성경은 요한복음 5장 39절의 말씀처럼 우리를 비켜갑니다. 성경은 예수님에 대해서 증거 하는 것이지 우리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준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성경이 기록된 겁니다.
그 이유가 있어요. 창세전에 하나님과 아들이 세상경영에 대해서 이미 이야기가 끝났습니다. 두 분이 의논해서 세상은 이렇게 시작하고 이렇게 끝난다고 창세전에 이미 결정을 해 놓았어요. 어떤 사람은 태어나기 전에 지옥가야 되고 어떤 인간은 태어나기 전에 천국 가도록 정해져 있습니다. 그 사람이 이 땅에서 어떤 행동을 했는가, 어떤 생활을 했는가, 일체 그것은 고려대상이 되지를 않아요. 그 사람이 교회를 다녔는가, 그 사람이 십일조를 했는가, 그런 것은 자기 구원의 고려대상도 안 되는 겁니다. 뭘 했다고 복을 받고, 그런 것도 고려 대상이 안돼요.
이미 복 주기로 작정한 사람은 복이 오게 되어 있고 복이 안 오고 저주 주기로 작정해서 만들어낸 사람 따로 있어요. 그 사실은 사람은 아무도 몰랐고 오직 하나님과 아들 되시는 분만 그것을 아셨고 성령님은 그걸 우리한테 적용시킨 겁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자기들끼리 알아서 다 해버린 거예요. 그런데 그러한 사실을 사람들에게 알려줬더니만 사람들은 자꾸 거기에 자기를 끼워달라고 자꾸 오해를 하는 거예요.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 안하십니다. 그런데 사랑한다고 오해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그런 식으로 오해하는 것은 인간 자체가 이미 고장 났어요. 뭔가 인간자체에 문제성이 있는 거예요. 그런데 인간 자체는 자기에게 문제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문제 없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문제없는 나를 좀 더 잘 키워주고 유지시켜 주고 보호해달라고 하는 겁니다. 문제를 끄집어 낼 생각을 하지 않고 ‘나는 문제없어. 나는 지금 정상이야.’라고 하면서 하나님은 제 편 되어 달라고 그렇게 요청하는 거예요. 새벽기도 나와서 울면서 두드려 가면서 그렇게 요청하는 겁니다. 철야기도 해 가면서, 금식까지 해 가면서.
어느 성경도 거기에 호응해 주는 성경구절 한 구절도 없습니다. 그 이유는 뭐냐, 피조물은 피조물 자체를 위해서 만들어진 게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제가 지금 상식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특별한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닙니다. 피조물은 피조물 자체를 우해서 피조물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그 말이지요. 성경적으로 너무나 마땅하고 당연하고 상식적인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교회 오시는 여러분들을 위해서 하나님이 계신 것이 아닌 거예요. 하나님이 그런 분이 아닙니다. 나를 사랑해주고 나를 위해야 한다는 것은 인간 속에 문제점이 있는데 그 인간의 문제점이 있는 그것이 확대되어서 그러한 잘못된 결과를 낳은 거예요.
하나님이 나를 지켜 달라. 사실은 이렇게 해야 돼요.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니 날 지켜주세요, 라는 말이 문제성 많은 거 맞지요? 그렇지요?” 이렇게 나와야 된다니까요. “하나님이 저의 사업이 잘되고 가정이 화목하고 제가 복을 받게 하옵소서, 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엄청 못된 짓이지요?”라고 되물어야 된다 이 말이지요. 그게 이유가 뭐냐 하면, 제가 또 상식인 이야기를 또 해볼게요. 인간은 없는데서 있게 하고 죽은 데서 살렸습니다. 아주 상식적인 이야기에요. 없는데서. 만약에 김춘수라는 시인의 시 속에 나옵니다. 아내와 오랫동안 같이 살다가 아내가 먼저 죽었어요. 아내가 죽고 난 뒤에 그 시인이 가슴이 너무 허했어요. 그 시인 아십니까? <꽃>이라는 시를 지은 사람. 꽃이 내게 와서 의미가 되었다는 유명한 시가 있어요. 경북대학교 교수를 하신 분인데.
그 사람이 오래 같이 살았던 아내가 죽고 난 뒤에 나온 시가 뭐냐 하면, 매일 아침마다 저기 부엌에서 고등어를 구웠는데 왜 당신이 보이지를 않는가, 하는 거예요. 왜 저 자리에, 부엌 저 자리에 고등어를 굽던 당신이 안 보이는가, 하는 거예요. 아내의 빈자리가 허해서 그 시인이 미칠 지경입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 그 시인은 뭘 모르고 있느냐 하면, 원래 아내가 없다는 것이 정상이라는 것을 본인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사람이라 하는 것은 있는 것에서 있는 것부터 출발하기 때문에 어째서 있게 되었는가는 생각 못하고 있는 겁니다.
여러분, 아내가 없는 게 정상이에요. 아내뿐만 아니고 내가 없는 게 정상이에요. 내가 없어도 괜찮아요. 아내가 죽어도 괜찮아요. 내가 죽어도 상관없는 거예요. 왜, 나는 처음부터 없었던 존재기 때문에 없어지는 이것도 울 일도 아니고 가슴 칠 일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없었기에 본래의 자리로 되돌아가는 것뿐입니다. 무슨 호사를 누려서 갑자기 그렇게 욕심이 동했는지요. 죽었다고 우는 것은 산자의 횡포입니다. 말도 안 되는 횡포에요. 모든 인간 있음 존재는요 처음부터 있음이 아니었고 원래 없던 거예요.
있음이 집착케 하는 것은 마귀가 그렇게 한 겁니다. 마귀는 히브리서 2장 15절 말씀처럼 사람이 한 평생 살아갈 때 그냥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죽으면 안 돼. 죽으면 안 돼.” 죽는 것이 그냥 죽는 것이 아니고 죽는다는 그 자의식 자체가 지금 마귀한테 놀림 받고 마귀한테 예속된 상태를 이야기한다고 성경 히브리서 2장 15절에서 이야기했던 거예요. 죽기를 무서워하는 것은 종노릇 하는 거예요. 야구 타자가 열심히 치고 달리고 하는 것도 그 안에 뭐가 깔려 있느냐 하면, 죽기를 무서워하는 거예요.
타율 떨어져서 SK나 삼성라이온스에서 쫓겨나면 못 먹고 사니까, 죽으니까, 부지런히 치고 달리고 해야 ……, 그러니 산다는 자체가 마귀의 종노릇 하고 있는 거란 말이지요. 사람이 죽는 것은 자기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그게 자연스런 일입니다. 당연한 일이고. 사람이 자기가 있다고 생각하니 죽는 것도 공포스러운 거지요. 죽는 것이 공포스럽지 않은 경우도 살면서 우리가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그 순간이 어느 순간이냐 하면, 졸음 운전할 때. 졸음운전 하다가 죽었을 때 죽음 직전에 그 사람은 무서웠다, 안 무서웠다?
안 무섭지요. 왜, 졸고 있으니까. 지금 잠 속에 있다 죽었기 때문에 전혀 무섭지 않은 거예요. 그런데 졸음 운전하다가 기분이 이상해서 눈 떠보니까 자기가 지금 막 낭떠러지로 갔다. 그때는 자의식이 있기 때문에 죽음이 무서운 거예요. ‘식은땀이 다 나네. 죽을 뻔 했네.’ 차라리 계속 잠을 잤으면 잠이 우선이기 때문에 자의식은 사라지거든요. 계속 잤으면 죽는 순간도 전혀 아프지도 않고. 자는 사람이 뭘 아파요. 그냥 떨어지지. 공포스럽지 않고 두렵지 않아요. 그래서 인간이 생각하는 죽음이라 하는 것은 가짜입니다.
진정한 죽음은 모르고 자신이 늘 깨어있고 자신이 늘 살아 있다는 의식을 갖고 있기 때문에 죽음이란 것이 우리에게 공포로서 강요받고 위협받고 있는 거예요. 마귀가 그렇게 위협을 준 겁니다. 인간이라 하는 것은 있음이 정상이 아니고 죽어 없어지는 것이 정상입니다. 따라서 이미 있게 된 우리 자신을 중심에 놓고 하나님이 복주세요, 잘 되게 해주세요, 한다는 것은 뭐냐 하면 마귀의 시험으로서 자기는 움직이지 않겠다고 버티는 겁니다.
그런데 제가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중국집 배달원처럼 우리는 뭘 이동해야 될 임무와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거든요. 이동한다는 것은 제자리에 있으면 안돼요. 뭔가 움직여야 되거든요. 움직일 때에 여기서 다툼이 생겨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집어넣고 자기가 집어넣은 그 현실을 고정화시키고 움직이지 않는 것으로 만들려고 하는 겁니다. 자기가 집어넣은 그것을 자기가 쳐다보면서 이것은 영원불멸의 상태로 영원한 존재로서 만들려고 하는 거예요. 거기서 자기의 왕국을 만들고자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늘 살아 있는 자기가 어떤 모습으로 살아 있는지를 관찰하게 되고 그걸 주시하게 되고 그것 가지고 옆집에 있는 그 사람의 자아하고 대조하고 경쟁하고 비교하면서 스트레스 받고 저 사람처럼 못되었다고 울고불고 난리친다 그 말이지요.
이게 무슨 신앙입니까? 이것은 아무 신앙도 아니거든요. 원래 나라는 것도 없어요. 내가 없는데 창세전에 어떤 계획 때문에 없어도 되는 내가 다시 있게 된 겁니다. 이것은 나뿐만이 아니고 천국이라든지 예수님이라는 그 분도 역시 인간은 나밖에 모르기에 우리한테는 그분도 사실은 없는 존재거든요. 쉽게 이야기해서 이렇습니다. 하나님만 있으면 우리는 없어도 괜찮아요. 이게 요한복음 1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매 모든 것을 말씀이 다 만들었다. 여러분이 알고 있는 요한복음 1장이 그렇게 시작합니다. 따라서 네가 없어도 말씀이 있으면 그게 오케이다, 그런 이야기라는 말이지요.
하나님만 있으면 인간은 없어도 괜찮아요. 상관없어요. 그 분이 필요한대로 또 만들어내면 되니까. 우리는 이런 여유 있는 마음을 못 가져요. 만약에 내가 있어버리면 하나님은 나의 쫄따구가 되는 겁니다. 내가 주인공이기 때문에. 내가 주인공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들러리에 불과한 거예요. 하나님은 내가 만든 것을 지켜주는 셰퍼드 역할 밖에 못하는 거예요. 이거 복주시고 저거 해주시고 저 인간은 죽게 해주시고 저 인간은 살게 해주시고 남의 자식은 어떻게 되어도 내 자식은 멀쩡해야 되고, 자꾸 우리는 내 것이 있기에 내 것을 하나님 앞에 요구하게 돼요.
그러니까 신을 하수인으로 부리는 겁니다. 그런 관점, 사실은 마귀가 이렇게 했거든요. 마귀가 인간을 이렇게 만들어놓으니까 그 다음에 그 안에서 예수님이 십자가 졌다고 한다면 “ 십자가까지 왔네. 그 십자가 피로 내 죄를 용서하세요.”명령이야, 완전히 명령. “천국이 있네. 난 죽어서 천국에 영원히 살게 해 주세요.” 완전히 지시 명령하고 있어요. 여러분, 그런 천국, 그런 십자가는 없습니다. 고만고만한 인간들이 머리 짜내서 만들어 낸 거예요. 옛날 이스라엘이 그래서 실패한 거예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법을 주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기가 이스라엘에 속해 있으니까 이스라엘 잘되기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한 거예요.
“하나님, 적들을 물리쳐 주시고 저 앗수르처럼 잘 살게 하시고 바벨론처럼 잘 살게 해주시고 하나님께서 적들이 쳐들어오지 않게 해주시고 우리나라는 평화롭게 살게 하옵소서.” 이러다가 망했어요. 그러다가 망한 나라가 이스라엘이에요. 주객이 전도된 겁니다. 구약은 이스라엘 망함으로 구약이 끝나요. 여러분, 창세기부터 죽 이어본 적 있습니까?
콩나물 뽑듯이, 흰 머리 뽑듯이 뽑지 마시고 성경을 죽 이어보세요. 그 잘나갔던 이스라엘 망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스라엘 망했다는 이야기가 무슨 말이냐 하면 요즘 말로 하면 교회 망했다는 거예요. 교회가 이단이라는 뜻이에요. 교회 안에 들어가면 인간들의 욕심만 모여 있다는 그런 뜻이에요. 오늘 본문에서 복이 있다는 소리를 딱 들었을 때 “아하, 내가 원했던 그 복 이제 이야기하네. 그 복 나한테 주시옵소서.” 한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그 복이 있다는 말 뒤에 나오는 말을 우리는 안 들으려고 해요.
“믿음으로 좇아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 이렇게 되어버려요. 만약에 복이 있다고 해 놓고 “믿음으로 하지 아니하는 것은 죄니라.” 이렇게 한다면 사람들은 그 이야기를 어떻게 듣느냐 하면 “왜 목사님은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 이야기합니까?” 이렇게 나온다니까요? “왜 자꾸 우리 자신들을 신경 쓰게 만듭니까? 왜 갑자기 스트레스 받게 합니까?”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우리가 배달부라면 짜장면만 배달하기를 고집해서는 안돼요. 때로는 짬뽕도 배달합니다. 내가 배달해서 얼마나 잘 챙기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이 배달 가방 안에 지금 뭐가 담겨 있느냐가 내 존재보다 더 중요하다는 그 말입니다.
하나님이 나보고 배달하라고 주신 그 내용이, 짜장면 짬뽕이 나보다 더 중요하기 때문에 나는 배달하다 엎어지고 다쳐도 이 짜장면 짬뽕 국물은 흐르면 안돼요. “믿음이 없는 자는 단죄받는다.” 그걸 유지하라고 하나님께서 한 평생 보내게 하는 거예요. 지금 내가 구원받으라고 준 게 아니에요. 내가 구원받는 것은 유 병언에게, 구원 파에게 가라고 하세요. 내가 구원받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바로 나는 도대체 뭘 실어 나르는 배달부인가, 내게 주신 이것이 얼마나 귀한 것인가, 그것 유지하라고 인생을 준 거예요.
22절에 보면 “네게 있는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 자기의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책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복이 있도다, 하고 짧게 되어 있지만 이러이러한 자는 복이 있다고 할 때 이러이러한 그 글이 제가 봐도 너무 어려워요. 한 번 읽어볼게요. 얼마나 어려운지. “네게 있는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 자기의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책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무슨 말입니까, 이게? 여러분, 전화 걸어서 이야기해 볼까요? 상대방이 오케이 하고 알아듣는가? 못 알아듣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게 얼마나 어려운 말인지 제가 예를 들게요. 사도바울이 이렇게 해요. 음식물 자꾸 구분하는 사람보고 믿음 없다고, 낮은 믿음이라고 자꾸 지적하는데 그 지적 질 하지 말라, 남 음식 먹는 것 가지고 믿음 없다 지적해서 형제를 넘어뜨리면 안 된다, 업신여기지 말라, 그런 이야기를 죽 했잖아요. 그런데 한 번 생각해 보세요. 그런 지적을 하는 그 사도바울 본인이 뭔가 남 탓 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예를 들어서 제가 지난번에 했지만 “이 가운데 술 드시는 분이 좀 있거든 혹시 술 안 드시는 분이 술 드시는 분에게 ‘당신은 성령 안 받았어. 당신은 지옥 갈 거야.’라고 너무 탓하지 마세요.”라고 하게 되면 “목사님, 참 오랜만에 속 시원하게 해주신다.” 이런 사람도 있는 반면에 어떤 사람은 “목사님 너나 잘하세요.” 분명히 그런 사람이 나온다고요. 분명히 그런 사람이 나오거든요.
14절에 나오는 이런 이야기를 하는 그 사도 당사자도 자기가 언급한 그 원칙에 본인도 적용 되어야 된다는 겁니다, 본인도. 말을 쉽게 한다고 하면서 더 어렵게 되어 버렸는데. 그렇잖아요. 부모가 자식보고 훈계하면 준비된 자식의 반격이 뭡니까? 아빠 엄마는 그렇게 살지도 않으면서 왜 우리보고 닦달 내나, 그렇게 나온다 이 말이죠. 그 반격을 지금 사도바울이 일부러 유도하는 거예요. 내가, 이 사도가 전하는 이 주의 말씀을 백날 천 날 이야기해 봤자 나는 네 속에서 너의 잘남을 보여주는 하나의 핑계거리로 저장을 했다 그 말이지요.
“역시 난 잘났어.”가 신앙생활, 교회 20년, 30년 다녀도 소용없어요. 계속 자기 잘남을 누적했기 때문에. 자기 잘남이 계속 누적되어 있다는 말이지요. 그게 바로 이스라엘 멸망의 이유거든요. 다른 민족은 저런데 우리 민족은 하나님이 보호해주신다. 그래서 하나님이 자기 민족을 멸망시켜 버린 거예요. 다시 이야기합니다. 우리 속에 문제 있어요. 우리 속에 문제 있는데 문제를 끄집어내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마치 우리를 격려하는 것처럼 말씀을 줘서 우리로 하여금 들뜨게 만들고 나대게 만드는 거예요.
“야, 역시 나는 믿음이 있어.”라고 나대게 만들어서 자빠지게 만들어 버립니다. 하나님의 본 뜻은 모르고 내가 이만큼 잘난 존재인 것을 확인하고 싶어서 교회 다녔고 성경말씀 보았고 축복 받았노라고 자랑 질했음을 노출시키는 겁니다. 그러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해야 되는가? 22절의 말씀은 뭐냐 하면, 하나님과 네 사이에 있던 관계를 다시 한 번 쳐다보는 계기로 삼아라. 누가 너한테 어떤 이야기를 하고 지적 질을 할 때 그것을 뭐로 보느냐, 하나님과 나 사이에 어떤 관계로 맺어졌습니까, 를 다시 되돌아보는 기회로 삼으라는 그 말입니다.
그러면 기회로 삼지 뭐. 기회로 삼으면 믿음이 있는 자는 옳다, 다시 말해서 믿음 있는 자는 ‘내가 무슨 짓을 해도 하나님 앞에 이미 의롭다 인정함을 받았기에 내가 의로운 것 맞잖아.’라고 나오는 거예요. 그게 아니라는 겁니다. 그런 식으로 하나님과 너 사이의 관계를 정립해 버리면 이것은 악마적인 본성의 발휘지 성경에서 말한 뜻은 그것이 아니라는 거지요. 여기에 창세기 32장 24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야곱이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어요. 복 준다. 기분 좋지요.
복 받았는데 그 복 받은 결과가 뭐냐 하면, 열 한 아들과 많은 재산을 삼촌으로부터 강탈해서 부자가 되었습니다. 이게 하나님의 준비된 복이구나, 그렇게 해석을 한 거예요. 부자 되었으니 복 받았다, 그렇게 생각을 한 겁니다. 그런데 뒤에서 형이 죽이려고 따라온다는 소문을 듣고 그는 바짝 긴장을 하고 있었던 겁니다. 드디어 창세기 32장에서 얍복강가에서 어떤 사나이가 등장하는데 누군지는 명확하지 않고 뭔가 다른 점은 자기를 공격한다는 인상착의, 인상착의를 보니 자기를 공격하는 투다 그 말이지요.
그래서 야곱은 싸웠어요. 24절에 보면 야곱은 홀로 남았다고 되어 있습니다. 홀로 남은 거예요.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야곱에게 주시고자 했던 것, 원래 야곱에게 배달시키려고 했던 짜장면, 짬뽕, 야곱을 통해서 이동시켜야 될 그 내용은 야곱이 혼자 남았을 때 하나님이 직접 그에게 전달해 준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바로 야곱을 죽이는 겁니다. 야곱을 죽이는 것은 야곱의 숨이 끊어지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는 흔히 자기 숨이 끊어지는 것을 죽음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죽음 근처도 안 갔어요. 진짜 죽음은 뭐냐 하면, 나를 죽이는 자를 만나는 게 죽음이에요.
나를 죽이는 분을 내가 만날 때 그 때 비로소 우리는 살아야 되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 아니고 비로소 왜 나는 애초부터 단죄되어야 하는가, 왜 나는 죄인인가 하는 것을 아울러 거기서 부여받게 되는 겁니다. 왜 죄인인가? 한국교회치고 예수 안 믿는 사람 아무도 없거든요. 그런데 사람들이 이걸 잊어요. 예수님께서 죄인으로 나타난 것을 사람들은 잊어버립니다. 예수님께서 죄인으로 오셨거든요. 죄인으로 오신 분을 좋아라, 믿는다? 뭔가 앞뒤가 안 맞지요? “승객들 다 버리고 먼저 배에서 뛰쳐나왔던 그 배 선장을 나는 믿습니다. 나는 그 분 팬입니다. 나는 그분 무지 좋아합니다.” 하면 그 사람 미친 사람 아니에요? 천하 죄인을 왜 좋아하는가, 하고 그 사람보고 한 통속이라고 욕을 하겠지요.“너는 왜 안중근 의사를 좋아하지 않고, 강감찬과 이순신장군을 좋아하지 않고 모든 것을 버리고 자기만 살려고 한 그 나쁜 놈을 믿고 따르고 투자하는가? 너도 똑같은 인간이다.”라고.
여러분, 예수님은 죄인입니다. 따질 것도 없어요. 무조건 죄인이에요. 얼마나 죄인인지 아버지께 버림받을 정도로 죄인이에요. 사람에게 버림받은 것은 물론이고 아버지로부터도 버림받은 죄인입니다. 그런데 그 분을 믿는다고요? 무슨 그런 거짓말을 다 해요? 무슨 예수님한테서 훌륭한 요소를 발견해서 그 훌륭한 요소를 믿는 것이 아니에요? 그걸 골라잡아서 믿는 것이 아니에요? 사람들이 믿는다는 것은 그 속에서 자기한테 유리한 것만 뽑아내서 믿는 것, 그런 것은 믿는 것도 아니에요. 그것은 이용하는 거지.
내가 우선이고 신이고 예수고 성령이고 전부 다 내가 종으로 부리겠다는 심보, 악마적 심보에 불과한 거예요. 그러나 차 떼고 포 떼고 다 떼버리고 “나는 죄인으로 오신 예수를 믿습니다.”하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나도 저 예수님처럼 죄인 되어도 감당하겠습니다. 감수하겠습니다. 동의하겠습니다.” 그런 뜻에서만 예수를 믿는다고 말할 수 있는 거예요. 너무 거짓말들을 하니까 제가 내 말하는 것도 거짓말하는 것처럼 느껴져요. 다들 거짓말 하고 있으니까. 믿지도 않으면서 믿는다고 거짓말들 하니까, 믿지도 않으면서 이용만 해 처먹으면서 믿는다고 거짓말 하니까 제가 보기에는 화가 나는 거예요.
“예수님의 죄인 됨을 저는 좋아하고 믿습니다.”하는 경우는 어떤 경우냐 하면 “하나님이여, 왜 저에게 이런 일이 생깁니까?”라는 말을 안 하고 “이런 일이 생겨도 저는 토 달지 않겠습니다.” 하는 경우에만 “나는 예수님을 믿습니다.” 하는 말이 합치됩니다. 부합이 돼요. 애가 수학여행 갔다가 물에 빠졌습니다. “하나님, 참 조치 잘하셨습니다. 지옥 같은 안산에 오지 말고 먼저 천국 보냈으니까 너무 감사합니다. 그 정도로 주의 하신 일은 너무 너무 잘 되었습니다. 왜, 나는 죄인이기 때문에.”
내가 내 자랑거리나 나를 따로 챙길 어떤 나의 의로움은 아예 없기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로 오신 바로 그 모습이 바로 내가 아버지 앞에 노출된 나의 본래 위치기 때문에, 그걸 미리 십자가를 통해서 알려 줬기 때문에, 나는 내가 누군지를 몰랐었는데 십자가를 통해서 비로소 십자가에 죽어 달려야 할 그 모습이 내가 미처 몰랐던, 내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을 노출시킨 유일한 사건이 십자가 사건이기 때문에 따라서 나는 “이걸 저에게 이제야 알려주시니 감사합니다. 어떤 일이 일어나도 범사에, 모든 일에 제가 감사하겠습니다.” 데살로니가 3장 16절, 모든 일에 감사하고 모든 일에 기뻐하고 모든 일에 즐거워하겠습니다.
이게 믿음이에요. 이게 믿음이라고. 이게 짜장면 배달하는 사람입니다. 나는 배달부로 있다는 자체, 이 십자가라는 것, 단죄와 정죄가 어떤 차원에서 이루어진다는 것, 이것을 짜장면 짬뽕으로 여기고 배달하면서 그걸 전달할 수 있는 이런 일을 맡긴 하나님께 감사하죠. 내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내 안에 들어 있는, 이 철가방 안에 들어 있는 이 짜장면과 짬뽕이 더 중요하다는 말이지요. 그게 뭐냐 하면, 우리는 죽어 마땅하다는 사실을 왜 진작 모르는가, 그것을 그 안에 담은 거예요. 짬뽕과 짜장면을 담은 겁니다.
23절에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 이는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한 연고라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 죄만 있었던 거예요. 인간은 없었고 죄가 있었고 그 죄가 뭔지를 전달하기 위해서 인간은 이 땅에 태어나야 했고 우리 조상 아담은 선악과를 따먹어야 했고 그래서 죽어야 했고 죽으면서 인간들은 하나님께 반항하고 반발하면서, “만들어놓고 왜 죽이는가? 왜 이 땅에 살면서 여유롭게 살게 만들지 않고 왜 이렇게 이마에 땀 흘리면서 사는 것 자체를 고역으로 만들어 놓았는가?” 따지게 만들면서 그것이 바로 자기 있음으로부터 출발한 불신인 것을 깨닫게 하셔서 그래서 주께서 십자가에 달려서 죽는 그 모습이 사실은 내가 당할, 하나님께 버림받을 나의 팔자인 것을 발견하게 해서 이제는 모든 것이 내가 중심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주님의 복음을 전하는 그 행복이 진짜 진정한 복인 것을 알게 하는 겁니다.
옛날 고대 사람들은 지구를 표현할 때 둥근 원반으로 표현했어요. 고대 사람들이란 기원전 한 2천 500년 전 수메르 사람들, 지금의 이라크 사람들을 이야기하는 것인데 그들에게 지구상의 모습은 바닷물이 흘러서 낭떠러지로 막 떨어져요. 어떻습니까? 지구는 평탄한데 물이 있다. 애 보고 “물에서 너무 멀리 나가지 마라. 지구라 하는 것은 나중에 멀리가면 나중에는 폭포처럼 절벽으로 떨어지기 때문에 멀리 가면 못 돌아온다.” 어떻습니까? 어떻습니까? 이 지구관이 상당히 유치하고 무식하지요? 여러분, 이런 지구관으로 지구가 이렇게 생겼다고 한다면 무식한 사람이라고 욕을 할 거예요.
지구는 둥글다. 인공위성에서 사진을 찍어보니까 지구가 둥글더라. 중력에 의해서 물을 잡아당기고 있기 때문에 물이 쏟아질 수가 없다. 그렇게 설명하지요. 백날 설명해도 그것은 지식에 불과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모든 행동은 뭔가 자기로부터 멀어지면 무서워하기 때문에. 과학적으로 뭐라고 해도 인간은 여전히 현재 나 있는 곳에서부터, 내가 자리 잡은 이곳에서부터 점점 더 멀어지면 무서움과 두려움을 느끼게 되어 있습니다. 과학이든 뭐든 지구를 사진 백날 찍어도 소용없어요. 내가 있는 곳에서 멀어지면 다 무서워요. 애들이 밤중에 안 돌아오면 무서워요.
왜? 집은, 우리가 있어야 할 곳은 이곳인데 지금 밤 12시가 넘었는데 밤중에 어디서 해매고 있느냐는 그 말입니다. 지금 시리아에 내전 일어났잖아요. 여러분, 무섭습니까? 안 무서워요. 왜, 멀리 떨어져 있잖아요. 그런데 만약 지금 북한이 전쟁한다. 무섭지요. 왜, 내가 있는 곳과 가까이 있기 때문에. 이 사고방식이 뭐냐 하면, 모든 것이 중심에 내가 있다는 거예요. 중심에 내가 있는 그것이 바로 자기를 믿기 때문에 그렇거든요. 내가 집어넣고 그 집어넣은 자리, 그 전체를 몽땅 내가 믿는 거예요.
거기에 보면 내가 있고 내가 예수를 믿는데 예수를 믿는 그 내 모습을 내가 쳐다보면서 믿는 거예요. 그런데 이것이 바로 불신이요 신앙이 아니고 이게 종교행위에 불과하고 이게 미신입니다, 결국은. 이게 가짜에요. 여러분, 교회가 신앙을 방해하는 것을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교회 있음 자체가 하나님의 신앙을 방해한다는 생각을 해 본적이 있습니까? 교회를 다니게 되면 평소에 집구석에서 자기만 생각하다가 자기가 그 교회 오게 되면 그 교회는 자기가 다니는 내 교회가 되어버리거든요.
내 교회가 되면 그 교회는 내 중심이 되어버리지 예수님 중심이 되지를 않습니다. 왜 이런 것을 생각을 못할까요? 왜 자기가 자기밖에 모릅니까? 자기밖에 모르기 때문에 복이라는 소리는 되게 좋아해요. 그런데 정죄한다, 단죄한다, 네가 죄인이다, 멸망한다, 지옥 간다, 하면 굉장히 싫어합니다. 그걸 싫어한다는 자체가 뭐냐, 내 철가방에는 내가 원하는 짜장면만 집어넣고 나는 탕수육은 안 좋아하니까 내가 안 좋아하는 탕수육은 빼버리자, 이렇게 자기 맘대로 결정하고 선택하기 때문에 이것은 자기가 저기를 섬기는 방식에 불과한 거예요.
이것은 하나님이 그 수작에 속아 넘어갈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합니다. 바로 우리로 하여금 우리 중심에서 그걸 피하게 만들고 우리로 하여금 단죄시키고 우리로 하여금 죽은 자로 간주해서 우리를 죽은 자로 간주한 그 지점에서 진짜 중심 되는 인물을 올려버려요. 내가 있던 이 자리가 내가 주인공인 자리였는데 내가 죄인으로 깨어지고 쪼개지면서 쪼개진 그 틈 사이에서 나를 죄인으로 규정하시고 너는 뭘 해도 죄인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피 묻은 모습으로 무대 중앙으로 솟구쳐 올라오게 되면 그것이 바로 내가 인생의 주인공이 아니고 나를 죽일 수 있는 분이 나의 주인공이 되면서 우리는 그 분이 하는 구원에 참여한 바가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 분 바라보면서 그 분 중심으로 살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야곱이 창세기 32장에서 하나님의 천사를 만나고 난 뒤에 그 결과였습니다. 나를 위해서 복이 온 것이 아니고 내 속에 있는 어떤 복 받을 분이 내 후손을 통해서 오는데 그 분이 나를 찢어버리고 쪼개고 거기서 그 분이 솟구쳐 올라오는데 그 분의 이름이 뭐냐, 이스라엘, 그 분 이름이 이스라엘입니다. 야곱은 찢어지고 이스라엘이 올라오는 거예요. 아브람이 죽고 아브라함이 올라오는 것처럼. 사래가 죽고 사라가 올라오는 것처럼. 내 이름이 죽고 그 안에서 주의 이름이 솟구쳐 올라올 때 그걸 가지고 믿음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 믿음이 있을 때 믿는 사람은 어떤 짓을 해도 그 사람은 의롭다 함을 얻습니다. 왜냐 하면, 자기의 행동을 근거로 의롭다고 나서지 않기 때문에. 나는 이미 찢어져야 마땅하기에 더 이상 내 행동 가지고 잘했습니다, 못했습니다, 를 되묻지를 않아요. 주님 계심에 주님을 증거 하는 그 관계가 하나님 보시기에 주 안에서 의롭다 함을 받는 그 관계가 되는 겁니다. 삼촌과 조카 사이에서 조카가 좀 나쁜 짓을 한다고 삼촌이 “이제부터 내 조카 아니다.” 라고 말은 그렇게 해도 조카가 아니겠어요? 나쁜 짓을 해도 조카인 것처럼 이미 확정된 신분은 그 사람이 행동을 어떻게 해도 변하지 않습니다. 창세전에 네 안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담겨야 해, 라는 뜻에 의해서 태어났다면 그 사람 본인은 죄인으로 드러나지만 그 안에 있는 주님으로 인하여 주 안에서 그 사람은 의인이 되는 겁니다. 바로 그 분 계신 곳이 천국이고. 이것이 바로 십자가 사건이 되는 겁니다. 반복적으로.
주님 때문에 내가 이만큼 살았습니다, 를 말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믿음으로 하지 않는 것이고 믿음으로 하지 않는 것은 무슨 짓을 해도 그것은 죄니라, 하는 것이 23절의 말씀입니다.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 이는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한 연고라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 이 말은 너에게 믿음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심어준 그 분이 여전히 너를 주관하고 있고 너의 중심에 주인으로서 지금 작용하고 있다는 겁니다. 따라서 개고기를 먹으나 게 고기를 먹으나, 영덕 게를 먹으나 그냥 개고기를 먹으나 어떤 것을 먹는다 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의, 구원에 지장을 주거나 변동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그 말입니다.
주님을 모시고 주님과 더불어서 살아가는 이 생활 속에 예수님을 경유해서 모든 것을 바라보기에 어느 것 하나 기쁘고 감사하지 않을 일이 하나도 없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고 마치겠습니다. 남편과 아내 사이에서 아내가 결혼생활 오래 살다보니 지루해서 남편 봐도 별 정도 없고 보는 둥 마는 둥 그냥 동거인으로 그냥 바라보고 밥이나 해주고 벗어놓은 빨래나 해주고, 그렇게 살아갈 때 남편이 이야기합니다. “너는 교회 다닌다면서 남편을 이렇게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네가 교회 다니는 값을 하고 있나? 신앙인이 맞나?” 하고 나올 때 어떻게 할까요?
23절에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응용문제로 풀어보자는 겁니다. 이걸 하나의 방정식이고 원리로 본다면 이걸 실천에 실제로 응용해 보자는 말이지요. 그러면 남편 사랑 안 한다고 지적 질이 들어왔을 때 그러면 남편을 사랑하게 되면 신앙인답고 계속 남편에 대해서 별 관심도 없으면 신앙인이 아닌가요? 여기서 에스겔 47장의 예가 아주 적절합니다. 에스겔 47장에 보면 이런 말이 있어요. 성전이 하나 나오는데 그 성전은 장차 올 성전인데 그 성전이 아주 특이해서 성전 문지방에서 물이 계속 나오는데 동쪽에서부터 남쪽에서 북쪽으로 물이 계속 흘러서 넘치는데 물이 좀 적시고 마나 싶었더니 물이 얼마나 흘러서 넘치는지 에스겔 47장 5절에 보니까 “물이 내가 건너지 못할 강이 된지라 그 물이 창일하여 헤엄할 물이요 사람이 능히 건너지 못할 강이더라.” 그렇게 되어 있어요.
이 말씀은 뭐냐 하면, 성령의 시대가 오게 되면 성령 안에 모든 것이 푹 잠긴 상태가 돼요. 잠긴 상태가 되기 때문에 남편이 그러한 잔소리나 이 모든 것도 우리에게 뭘 주느냐 하면, 우리로 하여금 거기에 구애받을 필요 없이 성령 안에서 자유를 만끽하라고 우리에게 성령을 주신 거예요. 제가 이야기합니다. 구애받을 필요가 없다는 말이지요. 잔소리를 듣는 것은 짜증스럽지만 그 짜증에 민감하게 대처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지요. 만약에 거기에 대해서 민감하게 대처해서 ‘내가 바르게 살아야지.’ 이렇게 나온다면 갑자기 자기가 중심이 돼 버려요. 자기가 딱딱하게 살아요.
풀장 안에서 성령을 누리면서 사는 것이 아니고 자기 법을 만들어서 자기굳히기에 아주 얽매인 생활을 해 버립니다. 그게 뭐가 되냐, 그게 바로 죄가 되는 거예요. 내 안에는 짜장면이나 짬뽕만 있는 것이 아니고 성령도 함께 들어 있거든요. 그 성령이 나로 하여금 이 세상에 살면서 내 중심으로 살지 않도록 유도하는 사태와 사건들이 계속 우리한테 일어나게 되는 겁니다. 그 모든 사건을 보면서 “네가 지금 진짜 믿는 것 맞니?” 그걸 자꾸 되묻는 하나의 주님의 질문형식이고 실험방식이라는 것을 우리가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마음 놓고 사시되 그냥 배달부로, 주님의 십자가를 전달하는 배달부로 사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음식가지고 하나님 뜻인지 아닌지 따질 수밖에 없는 여전히 우리 중심의 사고방식을 성령을 통해서 이제는 깊은 물속에 다 빠트리게 하여 주시고 지금은 주님의 용서의 바다, 사랑의 바다에 헤엄치며 사는 것을 저희들이 늘 깨달으면서 우리가 주인공이 아니고 주님이 이미 주인공이 되었음을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인 삶을 저희들이 증거 하는 삶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