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강-롬 15장 1-4(소망과 인내)140511-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로마서 15장 1절에서 4절까지 입니다. 신약성경 258페이지입니다.
로마서 15:1-4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찌니라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 기록된바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안위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
내가 곧 목적이 되는 구원은 없다는 이야기거든요. 내가 구원받기 위해서 교회 온다는 것은 말씀 안에서 바뀌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게 바뀌어 질까요?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할 때 이 행동의 주체, 행동하고 있는 나 자신을 위해서 하지는 않겠습니다, 라고 다짐하고 각오하면서 행동을 하겠습니까? 그럴 리는 없지요. 기도를 하나 교회를 나오나 “주님, 교회 나왔습니다. 그리고 기도합니다. 보이시지요? 교회도 안 나오고 기도도 안하는 저 사람에게 주지 마시고 나에게 복이 쏟아지게 하옵소서.”라는 생각을 스스로 철회할 수가 있느냐는 말입니다.
이게 불가능한 일입니다. 지금 성경은 우리에게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는 거예요. “하나님이여, 저 자신을 구원하지 마시옵소서.” 하는 그런 기도를 어떻게 할 수 있습니까? 사람으로는 이것이 가능치 않는 이야기지요. 예수님의 십자가 지심은 날 구원하려고 지신 십자가가 아닙니다, 라는 고백을 할 수 있는 위인이 누가 있겠어요? 아무도 없어요. 우리가 기도를 하든 뭘 하든 마지막 최종 회귀점, 마지막 돌아오는 도달지점에는 턱 하니 내가 버티고 있는 겁니다. 내가 현신하고 희생하고 고생한 이 모든 것이 마지막에는 나의 이익으로 돌아올 때 우리는 그 어떤 어려움도, 어떤 괴로움도 참아낼 각오와 다짐이 되어 있는 거예요.
그런데 그 마지막 최종 목적이 내가 아니고 내 구원이 아니라면 미쳤어요, 우리가 그런 수고를 할 필요가 뭐가 있습니까? 제가 로마서 9장을 하면서 성경에서 제일 어려운 대목이라고 언급을 한 적이 있습니다. 로마서 9장 3절에 보면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찌라도.” 하는 그 대목입니다. “내 자신이 저주를 받는다 할찌라도 주님이여 주님이 하시는 프로젝트를 그대로 진행시키시옵소서. 저한테 신경 쓰지 마시고 주께서 미리 정해놓은 그 계획이 있잖아요. 그 계획을 추진시키시되 심지어 그 계획 속에 내가 저주받아서 끊어진다는 계획이 있더라도 구애받지 마시고 그냥 밀고 나가시옵소서.”
이런 이야기는 정말 구원파와 정반대편에 있는 거예요. “저를 구원하지 않고 그냥 스쳐지나가더라도 주께서 하시는 일을 그냥 진행시키옵소서.”라는 기도를 과연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있느냐 하는 겁니다. 성경은 이렇게 합니다. “너를 위해서 십자가 진 것이 아니고 우리를 위하여 졌다.”는 겁니다. 너에서 우리로 바뀌는 것이 세상 적으로 봐서는 굉장히 간단한 문제에요. 왜냐하면 너, 나, 모이면 우리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집단, 집합이라고 해요. 집단, 집합이라는 것은 이미 있는 숫자를 헤아려서 하나, 하나, 모여서 둘, 셋, 넷이 모인 것을 집합이라고 하거든요.
그런데 주님은 그런 집합을 구원하시려고 십자가 지신 것이 아니고 연합을 하기 위함입니다. 이것은 뭐냐 하면, 우리가 될 때 나가 빠져야 된다는 겁니다. 우리라는 것을 뭔가 주께서 조성해주게 되면 거기서 나는 빠진 상태의 우리가 성립되어야 된다는 겁니다. 제가 하나의 예를 들면 안산에 어떤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 사람의 조국이 있는데 대한민국이라는 조국이 있었다. 대한민국은 우리에 해당되고 안산의 본 집은 하나가 되는 거지요. 그래서 그 사람은 생각했어요. 나와 대한민국이라는 우리 집단은 이렇게 같이 어울릴 수 있고 속할 수 있고 결합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안산에 있는 그 사람의 딸을 수학여행 간다고 보냈는데 가다가 물에 빠져 죽고 난 뒤에 다음부터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면, ‘내 딸을 지켜주지도 못하는 이 나라를 내가 계속 세금내고 있을 필요가 없지. 미국에 있는 동생아, 날 좀 불러다오. 난 한국에서 못살겠다. 믿을 만한 나라가 못되니 미국으로 이민 보내줘.’ 라고 해서 만약 그 사람이 이민 갔다면 그 사람은 하나와 대한민국이라는 우리가 연결이 된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연결된 적이 없어요. 자기 딸이 사고 일어나기 전까지는 하나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어떤 사태가 일어나고 보니까 ‘에이, 너는 너고 나는 나다.’ 분리가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진정한 우리가 아니지요. 이 땅에 살면서 하나님은 날 위해 구원했다. 나는 십자가 피를 믿어 구원받는다. 하나님은 나를 죽어서 좋은 데로 보내기 위해서 나를 교회 나가게 해주시고 천국 가게 해주신다. 해서 하나도 되고 주님도 되고 그래서 우리가 하나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그런 하나와 우리의 관계로서 천국가게 되면 그것은 천국을 갈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그 하나가 생생하게 살아 있는 이상은 그 천국은 주님의 천국이 아니고 나의 천국이 될 가능성이 많아요. ‘내가 천국가기 위해서 얼마나 애썼으며 주님을 얼마나 잘 믿었으며…….’ 이것이 천국에서 자기만의 부스가 만들어져서 천국가면서도 천국에서 따로 나만의 영역과 공간을 따로 챙긴다면 그 사람은 자기의 면류관을 절대로 주님 발 앞에 던질 사람이 아닙니다. 오해한 거예요. 날 위해서 구원한다는 자체가 있을 수가 없는데 오해한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구원한 겁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에게 나라는 것은 성립이 안돼요. 구약의 이스라엘은 전부 다 우리라는 하나의 아들이었지 나, 나, 나, 포함해서 집합으로 우리라는 그런 이스라엘 개념은 없습니다. 성경을 보면 아간이 사적인 행동을 했을 때 집단적으로 아이성에서 패배하는 것을 봤을 때 그렇습니다. 그래서 문제는 간단한 거예요. 사실은 인간은 나로 태어나서 나밖에 모르거든요. 나밖에 모르는 것이 나를 포기하고 자기를 부인해야 될 나라에 들어간다는 이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 불가능한 일이 어떻게 가능하냐를 보여주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실제적으로 제자들과 함께 했습니다. 제자들은 전부 다 하나, 하나, 하나에요. 그런데 그 제자들이 어떻게 주님의 나라에서 주님과 하나가 되고 하나님과 하나가 될 수 있는 불가능한 일이 성사가 될 수 있느냐 하는 그 문제입니다. 그 문제를 위해서 제자들은 충분하게 자신의 불가능성과 자기밖에 모른다는 이기주의적인 사고방식을 충분하게 다 노출시켜야 되고 드러내 줘야 되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뽑은 것은 바로 우리를 대표해서 죄인되게 하기 위해서 뽑은 겁니다.
예수님과 가까이 했지만 절대로 예수님과 자기를 우리로 하지 않고 베드로를 비롯한 모든 제자들이 자기 생각을 고수하고 있었고 그걸 진행시키고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 가신다 할 때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 제가 따라가겠습니다.” 할 때 “네가 나 있는 곳에 오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목숨 바쳐도 가지 못하는 거예요. 그런 식으로는 안 된다는 겁니다. 베드로가 세 번씩 주님을 부인했잖아요. 바로 그거예요. 바로 그 지점이에요. 예수를 믿는다고 자부했지만 그것은 나를 위한 예수 믿음이지 예수님을 위해서 예수 믿음이 아니라는 것이 들통나는 그 순간이 우리에게 필요한 겁니다. 꼭 필요한 겁니다. 그게 필수요건이에요.
예수님을 이용할 생각을 하고 왔지 절대로 예수님을 위해서 본인이 이용당할 생각은 전혀 없다는 것, 우리에게는 그런 것이 있을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태생이 그러니까. 오늘 본문에서 인내라는 말이 나올 때 상당히 사람들은 이 대목을 곡해를 많이 합니다. ‘버티다. 힘들어도 버티면 구원받겠지.’ 아닙니다. 성경에서 인내란 그런 뜻이 아니에요. 버텨서 될 것 같으면 우리는 버티는 데는 한가락씩 다 솜씨가 있는 사람들이에요. 사람은 오기와 집착과 집념이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내가 나한테 이익이 된다면 우리는 어떤 것도 버티고 어떤 것도 참아낼 수 있는 각오들이 되어 있는 사람들이에요.
자기가 잘 된다는 데는 어떤 시련도 우리는 감당할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인내란 그 인내가 아닙니다. 이런 인내입니다. ‘나를 위해서 내가 참아야 돼.’라는 것을 버리고 ‘내가 여기 존재함은, 내가 여기 있음은 다 나를 위함이 아니고 주님을 위한 나였음’을 우리가 참아내야 되는 거예요. 그걸 참는 거예요. 주님의 그 목적을 위해서 내가 있지 나를 위해서 주님이 있지 않다는 그 사실, 현실에 직면해서 이것만이 진짜 현실인데 내가 살아가면서 꾸역꾸역 나에게서, 이 육체에서 나오는 것은 뭐냐 하면, 그 모든 것이 다 나의 이익으로 와야 한다는 나의 육신의 욕심, 이 둘 사이에서 ‘내 육신에서 나오는 이 현실은 가짜야.’ 하고 가짜라고 부정하고 주님만을 위한 현실뿐이라는 그것을 사수하고 붙잡는데 필요한 그 인내, 그 인내를 말하는 겁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랬다저랬다 하는 것처럼 보이는 대목이 굉장히 많아요. 로마서 10장 13절에 보면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할 때 우리한테는 굉장히 수월하게 구원 얻는 아이디어처럼 느껴집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기만 하면 됩니까?” “주의 이름을 부르기만 하면 돼.” “참 쉽다.” “쉽지? 그래 불러.” 이렇게 해놓고 오늘 본문에서는 인내하라고 나오거든요. 그리고 너 자신을 위해서는 구원은 애초부터 없다는 겁니다. 너는 너를 위함이 아니고 우리라는 이름의 타인, 남, 이웃, 여기서는 이웃을 기쁘게 하라고 하는데 그 이웃, 너 말고 다른 이, 그런 자를 위하여 너는 존재해야 된다고 나올 때, “주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 얻는다면서요? 수월하게 이야기를 해 놓고 왜 이제 와서 딴 이야기를 합니까? 어느 쪽이에요? 수월하게 예수 이름 불러서 구원 얻는 그 쪽이에요, 아니면 인내 못하고 남을 기쁘게 못하면 탈락하는 그 쪽입니까? 왔다 갔다 하지 말고 똑바로 이야기하세요. 어느 쪽이에요, 구원이? 주님, 이랬다저랬다 하지 말고 딱 한 가지만 이야기하라고요.”
주님은 이야기합니다. 구원을 받는데, 천국을 받는데 이 천국에 대한 그 코스가 얼마나 우리의 태생과는 차이가 나는지, 얼마나 견디기 힘든 소식을 이야기했는데 사람들은 ‘주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얻는다.’는 말에서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말을 굉장히 쉬운 이야기로 오해를 한 거예요. ‘부르지 뭐.’ 이렇게 쉽게 생각한다 그 말이지요. 그런데 반드시 너희에게 찾아오는 것은 주님의 이름을 부르지 못하고 그 대신 나의 이름을 부를 수밖에 없는 상황들이 자꾸 들이닥치는 거예요. 영어로 해서 미안합니다만 “WY ME!” 왜 하필이면 저 입니까?
“분명히 주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 얻는다고 해놓고 막상 어떤 사태나 상황이 떨어지면 왜 다른 모든 사람 놔두고 하필 저에게 이런 시련을, 이런 아픔을, 남들은 멀쩡한데 왜 저에게 이렇게 합니까?” 거기다 주님께서 인내하라고 하니까 “제가 참을 만큼 참았습니다. 더 이상 어떻게 참으라는 말입니까? 제가 견딜 만큼 견뎠는데 더 이상 못 견디겠습니다.” 이렇게 또 자기 자신 위주로 인내를 해석하는 겁니다. 우리가 인간인 이상은 참을성도 있고, 인내심도 있고, 견딜 수도 있는데 왜 이 말들을 이해 못하느냐 하면, 세상에 미쳤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인내성이 모자라서가 아니고 참을성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온 세상이 미쳐 돌아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미친 가정에서 태어났고 미친 부모에게서 미친 자식으로 태어났고 미친 학교와 미친 사회와 미친 국가 속에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전부 다 정신 이상자가 되고 말았어요. 전부 다. 정신과 의사도 정신이상자요 환자도 정신이상자요, 목사도 미쳤고 교인도 미치고 다 미쳐버렸어요. 왜 미쳤냐 하면 뿌리가 어디에 박혀 있느냐 하면, 멸망과 심판에 뿌리가 박혀야 되는데……, 제 이야기는 마태복음 7장 24절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마태복음 7장 24절에, 모래위에 지은 집이 있고 반석위에 지은 집이 있다. 그런데 마지막 때에 다 싹 쓸려서 내려간다는 거예요. 그러면 나는 의사다, 나는 교사다, 나는 농부다, 이게 성경적으로 잘못된 말입니다. 나는 목사다, 집사다, 이게 다 잘 못된 말이에요. 왜 잘못된 말이냐 하면, 뿌리가 있는 위치를 이야기해야 될 텐데 뿌리 말고 그 위에 있는 잎사귀, 꽃, 이런 것을 가지고 “너의 직업은 뭔데 나의 직업은 이렇다.” 돼버리면 그것은 하나마나에요. 인간의 존재성이라 하는 것은 뿌리로 이야기해야지 거기 줄기와 잎사귀로 이야기하면 안 되거든요.
“내 뿌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리스도 성도입니다. 따라서 나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이야기해야 될 것을 나는 판사다, 의사다, 국회의원이다, 이렇게 돼버리면 그것은 나중에 멸망의 날에, 싹쓸이 할 날에, 의사다 판사다 한 그것도 다 싹쓸이해서 날라 가 버려요. 그러면 그 동안 ‘나는 누구입니다.’라고 한 그것이 무의미한 자기소개를 명함에 박아서 내놓은 것 밖에는 안돼요. 사람이 왜 미쳐 돌아가느냐 하면, 뿌리를 박아야 하는데 박을 데가 없는 거예요. 뭔가 안정적인 데다 뿌리를 박아야 하는데 뿌리가 없는 게 문제가 되는 거예요.
뿌리가 없으니까 오늘은 여기에 박았다가 내일은 저기에 박았다가, 그러다 보니 본인이 불안정하니까 본인이 미쳐버리는 겁니다. 뿌리를 내일 데가 없어요, 내릴 데가. 뿌리를 어디에 내려야 되느냐 하면, 지금 방법을 알려 드릴게요. 지금 모내기철이 되었는데 모내기 하는 방법을 알려 드릴게요. 모내기를 할 때 “하나님은 저의 구원을 위해서 온 게 아닙니다. 하나님, 저는 심판받아야 마땅하고 저주받아야 됩니다.” 하는 그 자리에 뿌리를 내리시기 바랍니다. 로마서 9장에서 사도바울이 내린 그 뿌리는 뭐냐 하면, “주여, 제가 주에게 저주를 받아서 주에게서 떨어진다 할지라도 주님이 하시는 일은 그대로 진행시키기 바랍니다.” 그 자리에 뿌리를 내리셔야 그 자리가 바로 주의 이름만, 나의 이름이 아니고, 맨날 자기 자랑, 자기 자존심, 그 자기 이름이 아니고 정말 주의 이름을 부르지 않을 수가 없는 그 주의 이름만 나오게 되는 겁니다.
안산의 어느 학부모의 딸이 그렇게 죽었을 때 “주께서 그렇게 죽이셨군요.”할 때 비로소 그 사람의 뿌리는 애가 죽든 말든 그 사람의 뿌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었다는 것이 표가 나버리는 겁니다. 이것은 자기 자신을 위함이 아니고 자기 주변에 있는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증거 하는 모습이라는 말이지요. 이게 하나님의 원래 계획이었습니다. 나 좋으라고 교회 오는 법이 없고 그런 교회가 있을 수가 없어요. 나 잘되기 위한 교회라는 것은 없습니다. 교회라는 것은 천국의 원리가 덮어져야 되는데 천국의 원리는 나를 인정하지 않는 원리거든요.
그 실습을 어디서 하는가? 그 실습이 교회 안에서 돼야 된다 그 말이지요. 교회 다님으로서 사업이 망하고 교회 다님으로서 자녀를 잃고 교회 다니면서 건강을 잃어버리고 예수 믿고 난 뒤에 하는 일이 안 될 때 그 모든 것이 “왜 하필이면 저에게…….”라는 말이 나오다가 “이 주둥이를 쳐야 돼.” 할 때, 이것이 바로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했던 그 코스를 밟고 있는 거예요. ‘아 맞아. 이 코스가 되어야 되는구나.’ 주님과 함께 있다고 우리라는 말을 붙일 수가 없어요. 여전히 나를 위한 우리라는 것을 그냥 이용해 먹을 뿐이지 내가 죽지 않는 이상 우리가 아니었거든요.
그런데 주께서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신앙생활 하게 할 때 인내생활 하게 하면서 주어지는 상황 속에서 지금 나는 내 뿌리로 이야기해야 되지 그 줄기와 잎사귀로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다른 사람의 직업을 부러워해서는 안 되고 다른 사람의 인물도 부러워하지 마시고 다른 사람 머리 잘나왔다고 그 미장원에 가 봐야 자기머리 잘 나온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의 잎사귀고 그 뿌리의 진액이 각자 다양성 있게 보이는 것뿐이기에 우리는 뿌리로 항상 이야기를 해야 돼요. “주께서 나로 하여금 미장원 잘못 만나서 머리가 이상하게 나왔다.” 이 밑에 있는 미장원은 아닙니다. 제가 구태여 말하지는 않겠습니다. “주께서 하필이면 오늘 기분 나쁜 미용사 만나게 해서 아무렇게나 자르도록 해서는 머리가 엉망으로 나와 버렸다.”라는 사태와 상황을 겪게 하시는 이유가 평소에 우리가 도대체 누굴 위해서, 무슨 목적으로, 내 목적 말고, 내 목적이 아니라면 누굴 위해서 살아가는가, 그걸 항상 우리한테 묻고 있는 겁니다.
이러한 예수님이 주시는 소망과 인내라는 것은……, 한 번 정리해 보면 이렇습니다. 나는 나밖에 모른다. 그리고 내가 하는 모든 것은 내 자랑 질이다. 내가 이만큼 예수 믿고 잘 되었다는 그 자랑 질, 교회 와서 자랑 질 밖에 안 된다. 이런 식으로 가는 천국은 천국이 아니다. 이것을 바꿔야 된다. 어떻게 바꾸는가, 그 바꾸는 절차와 상황을 소급해서 우리는 인생이라는 것을 살게 하셨습니다. 살게 하시면서 그 과정 속에 하나님께서 투입시키고 우리에게 주신 것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봅시다.
3절에 보면,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 기록된바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리스도께서는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했다는 겁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만드신 분입니다. 사막에 마을이 없었는데 물이 새로 발견되게 되면 한 집, 두 집, 그 샘물 근처에 모여서 마을을 이루게 됩니다. 그러면 샘물이 그 집을 만들어냈다고 보면 되거든요.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셨다는 말은 아무도 천국가지 못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아시스, 샘물이 돼요.
그러면 예수님에 의해서, 샘물에 의해서, 그 물, 생수로 인하여 한 집, 두 집, 모여들면 그것이 바로 하나의 마을, 천국 가는 집단이 되는 겁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는 항상 예수님이라는 물이 있어요. 그래서 제가 이 말을 하는 이유가 예수님께서, 그 오아시스가 하는 말이 “나는 나를 기쁘게 하지 않았다.”고 이야기하십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물론 처음부터 하나님을 기쁘게 하셨지만 이 땅에 오셔서의 삶은 뭐냐 하면, 나를 기쁘게 하는 삶으로 이 땅에서 살지 않았다고 했거든요.
그러면 예수님 근처에 하나 둘 모여든 사람은 어떤 태도냐 하면, “저도 나 자신을 위해서 기쁘게 살지 않고 있습니다.”라는 고백이 나오도록 조치를 한 사람들만 주님 앞에 계속 모여들 수 있는 거예요. 예수님은 계속해서 이야기합니다. 로마서 14장 3절에 의해서 나는 나를 기쁘게 하지 않았다고 계속해서 이야기를 하거든요. 그러면 예수님 곁에 계속 있으려면 예수님과 똑같은 고백이 계속 나와야 된다는 논리가 성립이 돼요. “주님이여, 저도 저를 기쁘게 하지 않습니다.” 5월 12, 그 다음에 5월 13일, “주여, 오늘도 저는 저를 기쁘게 하지 않습니다.” 5월 14일, “주님이여, 저를 기쁘게 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될 때 그 사람만 그리스도옆에 붙어 있을수가 있는 겁니다.
그러면 이 말은 뭐냐 하면, 예수라는 분이 허상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그냥 이름만 부르고 갖다 집어 던질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지요. 오아시스가 없으면 그 마을은 물이 없어서 굶어죽어요. 정말 살고자 한다면 오아시스 근처에 가야 하는데 그 오아시스에서 나오는 음성이 뭐냐 하면, “나는 나를 기쁘게 하려고 살지 않았다.”라는 식으로 나온다면 우리는 오케이, 하고 동의가 되는 삶을 보여줘야 되거든요. 주님은 주님을 기쁘시기 하지 않는 삶이 되는데 우리는 기껏 주님을 이용해서 나 좋으라고 사는 삶, 이것은 주님 앞에 사기를 치고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은 반발하지요. “목사님, 사람치고 다 자기 좋으라고 하는 것이지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않는 인간은 없습니다. 너무 무리한 것을 우리한테 요구하지 마세요. 우린 그러면 나자빠지고 폭발해버립니다.”라고 하잖아요. 주님께서 나를 기쁘게 하지 않는다는 말은 바로 그런 이야기가 나오도록 유도하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네가 이제 나를 제대로 알아봤구나.”라는 말씀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아하, 나하고 주님하고는 전혀 성질이 전혀 다른 존재구나.” 하는 것을 충분히 파악을 해줘야 되는 거예요.
그러면 내가 조몰락거려서 헌금 좀 하고 예배참석 한다고 해서 주의 나라에 합류한다는 이것은 애초부터 있을 수도 없고 성사될 수도 없는 생각을 내가 혼자 상상했고 내가 오작동해서 그렇구나, 하는 것을 미리 짐작을 하고 각오를 하고 있어야 돼요. “그러면 구원이 안 되잖아요.” 구원이 안 되지요. 그런데 보세요. 예수님은 자기 제자들을 구원시켰잖아요. 거기에 비밀이 있는 거예요. 구원이 안 된다는 것을 명확히 합시다. 명확히 하고 난 뒤에 “안 되는데 되네?” 안되는데 된다 이 말이지요.
컴퓨터 나 혼자 아무리 고쳐도 안 고쳐져요. 그런데 기사를 부르니 되네요. 기사 불러놓고 “차 한 잔 드릴까요?” 하고 있는데 벌써 부팅되면서 잘 돌아가요. “어, 되네.” 그게 전문가잖아요. 전문가에게 맡깁시다. 내가 전문가 흉내 내지 말고 전문가에게 맡깁시다. 그 맡기는 인내를 요구하고 있는 거예요. 그 맡기는 인내. 네 인생 네가 관리하고 처리하지 말고 날마다 느끼는 것은 안 되네, 안 돼, 기사가 왔다 갔는데 가고 나서 두 시간 만에 또 안 돼, 안 되네, 자꾸 안 되는 것이 연발되고 안 되는 것이 연속됨으로 말미암아 계속해서 주님이 요청돼야 돼요. 주님이 계속 요청돼야 됩니다.
그러면 우리가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 안 될 그 때마다 전화를 걸어서……, 주님 부르는 전화번호가 몇 번이죠? 986에 그렇게 갑니까? 우리 집에 전화하는 사람이 있는데 우리 집 전화는 주님 전화 아닙니다. 그건 내 집 전화고. 주님한테 전화해서 “주님, 이 문제 어떻게 해야 됩니까?”라고 전화하는데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일괄적으로 벌써 안 된다는 것을 느끼는 자체가 이미 주님께서 시동을 걸어놓은 상황입니다. 새삼스레 주님 찾는 식의 기도를 하려고 들지 마시고 이미 살아가는 그 자체가 내 상황이 아니고 주님 상황 속에 주께서 안 됨을 통해서 안 됨 그 자리에 됨이 같이 섞여 있다는 말이지요.
이미 된 상태이기 때문에 안 됨이 나온다고 보시면 돼요. 이미 구원받은 상태에 해당되는 사람에게만 내 힘으로는 안 돼, 라는 아주 놀라운 기적적인 고백이 나오도록 조치를, 장치를 그렇게 해 놓으신 겁니다. 내 힘으로는 안 됩니다. “십일조를 했지만 십일조로 복 받는 것이 아닙니다. 전도 했지만 전도가 주의 일이 아니고 설교했지만 설교가 절대로 주의 일이 아닙니다.”라는 고백이 나온다는 자체가 이미 구원받은 사람에게서만 나올 수 있는 고백이에요. 그 안 됨이 계속 나와 줘야 계속 구원받은 사람이고 안 된다, 안 된다, 하다가 이제는 되네, 하면 그것은 아주 수상한 사람이에요. 이제 기사 필요 없습니다, 라는 뜻이 되거든요.
그러면 그 안 되는 상황이 뭐냐?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를 해드릴게요. 예수님 제자들과 예수님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느냐 하면 이런 약속, 계약이 있었어요. 어떤 계약이냐 하면, 마태복음 26장에 보면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고 되어 있습니다. 자 이 대목을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예수님의 살인데 왜 예수님이 혼자 잡숫지 않고 왜 제자들에게 줘야 됩니까?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예수님의 살을 마땅히 우리한테 준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여러분이 만약에 좋은 명품 가방이 있으면 “이것은 내 명품 가방이니 너희에게 주노니.” 그렇게 합니까? 미쳤습니까? 그걸 주게. “이것은 내 가방인데 부산 국제시장에서 2만원 주고 샀는데 나에게 가방이 따로 생겼기 때문에 너한테 줄게.” 이것은 잘 해요. 왜? 쓸데없는 고물 가방은 주는 것이 되지만 나한테 가장 귀한 것은 내가 간직하는 것이 우리의 본성에 합치됩니다. 내 속에는 내가 가장 귀하다는 것만 들어 있어야 된다는 것이 우리의 고집이고 우리는 그것을 인내라고 우기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을 못 받는 거예요.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지옥가도 마땅한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떻게 합니까? “이것은 나에게 가장 귀한 것이다. 그런데 내가 이것을 너에게 주겠다.”고 하는 겁니다. 그러면 제자들은 이렇게 해야 돼요. “주님 것을 왜 저에게 주셔야 됩니까?” 하는 질문을 반드시 해야 된다는 말이지요. 제자들이 그런 질문을 하지 못하는 것은 지금 주님과 자기가 한 편이라고 생각하니까 그런 질문이 안 나오는 거예요. ‘스승이니까, 스승이니까 제자에게 마땅히 주겠지.’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이러한 오해가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어요. 주님이니까, 주시는 분이니까, 사랑이 취미니까, 베푸는 게 취미니까, 어지신 분이 어지신 행동을 하는 것이 당연하니까, 그 어지신 분이 우리한테 왔겠지, 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게 얼마나 큰 오해인지를 우리는 상상도 못하고 있어요. 주님께서 주실 때 천국의 티켓을 준 것이 아닙니다. 천국의 생명수를 준 것이 아니고 내 살과 내 피를 준 거예요. 살과 피라는 것은 멀쩡한 육체에서는 생겨나지 않습니다. 반드시 하나님이 죽이시는 죽음이 있을 때나 생겨나는 것이 살과 피에요. 찢어져야 되고 쏟아져야 돼요. 창으로 찔러서.
지금 주님이 우리한테 준 게 뭔지를 파악조차, 우리가 지금 감조차 못 잡고 있어요. “딸 있나?” “예” “바다에 빠져 죽어라.” 그 말입니다. 그걸 요구하신 거예요. “아브라함아” “예” “너 아들 있지.” “예, 아들 있습니다.” “잡아 죽이라.” 지금 그걸 요구하신 거예요. 살려고 교회 와요? 미쳤어요, 지금? 살아서는 천국 못갑니다. 교회는 올 수 있어도, 등록을 할 수 있어도, 서류쪼가리 하나 낼 수는 있어도 구원은 못 받아요. 도대체 주님이 주신 것이 뭔지도 모르고 그 안에 담긴 것이 뭔지도 모르면서 덜렁 받았다고 자부하기는 그렇게 잘 자부해요.
김치냉장고 주신 줄 알아요? (광고)김치 냉장고 새로 사놓았으니 취급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주께서 주신 것이 뭐냐 하면, 우리가 살아야 되겠다는 그 의지와 정 반대되는 것을 준 거예요. 다시 말해서 우리에게 지옥의 삶을 준 겁니다. 그게 창세기 3장에의 저주로서 인간에게 부합됩니다. 아담이 받은 저주를 경과하지 않고서는 너는 생명나무 가치는 어림도 없다는 이야기에요. 하나님께서 아담으로 하여금 죄 짓고 난 뒤에 이 땅에서 땀 흘리면서 살게 하고 그렇게 살아도 낙이 없어요. 그냥 땀 흘리면서 살다가 죽어버려요.
죽을 때 “아, 죽는 게 당연한 조치구나.” 왜 하필이면, 이라고 했는데 그 ‘왜 하필이면’ 이라는 말을 입에 달 이유가 없어요. 제가 지난 금요일에 안양에서 강의하면서 질문을 던졌어요. 그 질문을 여러분에게 던질 테니 여러분이 답변해 보세요. 마귀는 자꾸 우리를 보고 살라고 합니다. 사는 것이 남는 것이니까. “살아야만 네가 패배자가 아니고 낙오자가 아니다. 네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이 땅에서 살아남아야 한다. 살아남는 것이 네 행복이고 최고야. 무조건 남을 밟든 말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살아남아야 해.”라고 마귀가 하는 거예요.
왜, 히브리서 2장에 보니까 죽기를 무서워서 종노릇 한다고 되어 있으니까 무조건 살아남으라고 한다는 말이지요. 그렇게 해 놓고 제가 질문을 던졌어요. 마귀는 우리보고 살아남으라고 그렇게 하는데 그러면 주님은 우리보고 뭐라고 하겠습니까, 라고 질문을 던졌거든요. 답변을 못하대요. 수십 년 들어도 아무 소용이 없어요. 답변이 안돼요. “주님은 우리보고 죽으라고 합니다.” 그게 정답이 아니에요. 그게 정답이 아니고 사는 것 죽는 것에 대해서 신경 쓰지 않아야 된다는 것이 정답입니다. 마귀가 우리보고 살아남아야 된다고 할 때 우리는 이렇게 해야 돼요. “마귀야, 사는 것 죽는 것은 주님 손에 달렸지 내 손에 달린 것이 아니야.” 이게 정답이라니까요. 왜냐하면 죽으려고 하는 그것은 불교에서 찾으세요. 수도원에서, 도 닦는 신부들에게서 찾으세요.
낮추고, 낮추고, 자기를 치고 또 치고, 그런 단체는 많습니다. 교주 냄새가 펄펄 나요. 살고 죽는 것에 대해서 이제는 손을 놓으셔도 됩니다. 그 놓으시는 순간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 다 떨어져요. 수고하고 무거운 세상 짐이 살고 죽는 것에 손 놓아버리면 다 날라 가고 그 때부터는 내가 목적이 되지 않는 삶이 개시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내가 목적이 되지 않는 삶이 되면 그 다음부터는 편하십니까? 편한 게 아닙니다. 3절에 보니까 “기록된바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라고 한 거예요. 미쳤다는 말은 도달했다는 뜻 이지요.
설교를 정리해보겠습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굉장히 쉬워요. 쉽다고 생각했는데 오늘 본문에 이웃을 기쁘게 하고 인내하라고 하니까 우리는 헷갈리게 됩니다. “주의이름만 부르면 됩니까, 아니면 인내하는 것을 추가해야 됩니까? 추가 안하면 탈락입니까?” 복잡한 문제가 성립되는 겁니다. 그 모든 복잡한 문제가 성립되는 이유가 뭐냐 하면, 구원이 내 구원받는 것을 위하여 구원이 있다고 오해했기에 그런 오해들이 생긴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이미 천국에 가기 전부터 천국의 사람으로 모집하기 위해서 이 땅에 주님이 오아시스로 왔다고 했어요. 오아시스는 생명수가 있어요. 우리는 와, 생명수다, 해서 너도 나도 예수 믿으려고 달려드니까 주님이 거기서 하신 말씀이 “나는 나를 기쁘게 하지 않는다.”라고 나오더란 말이지요. 우리가 생명수를 얻겠다는 그 자체가 생명수를 얻어서 내가 죽어서 천당 간다는 나를 기쁘게 하려는 목적으로 왔는데 막상 예수님께 다가오니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나는 나를 기쁘게 하지 않는다. 너도 너를 기쁘게 하는 구원은 아예 없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네가 아니고 우리입니다, 우리.
그러면 우리는 나가 떨어져요. “그러면 곤란합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우리는 그냥 나가버려요. 예수 안 믿지 뭐. 나를 위해서 축복 준다는 그 예수 믿고 이런 예수는 안 믿지 뭐, 이렇게 나오잖아요. 이것은 예수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였다는 말이지요.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수님과 한통속이라고 여겼는데 마지막에 어떤 세력이 오니까 “난 저 사람을 부인한다.” 세 번씩 부인했잖아요. 그러니까 베드로나 우리가 같은 입장이에요. 구원 안 되기는 같은 입장이라는 말이지요.
그런데 베드로가 구원이 안 되어야 되는데 베드로가 지금 천국 가 있다는 말이지요. 베드로가 지금 구원 받았다는 말이지요. 글쎄 무슨 일이 벌어졌습니까?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3절에 있는 그 기록된 말씀이 개입이 되어서 그렇습니다. 그 기록된 말씀이 뭐냐 하면, “주를 비방하는 자의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하는 그 내용입니다. 이게 뭐냐, 이런 거예요. 말씀을 쉽게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떡을 떼면서 하는 말이 “이 떡은 내 떡인데 네가 먹어라. 이것은 내피인데 네가 마셔라.”라고 한 거예요. 이것은 예수님이 죽어야만 효과를 보는 떡이고 살이에요. 그걸 약속으로 맺은 겁니다.
내가 보통 죽으면 끝인데 주님은 죽음으로서 오히려 본격적으로 사신 분이 되도록 하는 겁니다. 이순신 장군이 1592년에 내 죽음을 알리지 말라고 하고 죽었는데 이순신 장군이 살아 있습니까? 광화문에 동상은 있지요. 안살아 있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은 죽음으로서 본격적으로 살아 있어요. 마태복음 28장에 보면 세상 끝 날까지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 예수님이 죽음으로서 영원히 함께 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예수님의 죽음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찔리 죽일 때 살아 있는 내가 예수 당신을 죽였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그것은 주님이 쳐 놓은 하나의 미끼였고 덫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죽임으로써 죽인자가 죽은 자가 되고 죽임을 당한 분이 진정 산자가 된다는, 창세기 처음의 그 상황으로 모든 현실을 되돌려 놓은 겁니다. 우리는 유령이었어요. 이것은 대 반전, 식스센스입니다. 살았다고 여겼는데 나중에 영화 끝날 때는 자기가 유령으로서 정신과 의사 행세를 했다는 것이 영화 반전으로 나와요. 분명히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이것은 하나님 보시기에는 산 사람이 아니고 죽은 자로서 산 흉내를 낸 겁니다.
죽어 있으면서도 살았다고 여기는 사람에 의해서 영원히 살아 계시는 분이 잠시 그들에 의해서 죽음을 맞이했고 그 죽고 난 뒤에 그 실상을, 우리에게 성령을 이야기해 주니까 진짜 살아 있는 분은 주님밖에 없고 우리가 죽어 있기에 살아보려고 애쓰는 것은 그동안 마귀한테 놀림을 받고 마귀의 노리개 감으로 살았기 때문에 발상 자체가 왜곡된 발상에서부터 출생했기 때문에 자기가 죽은 것도 모르고 살아야지, 살아야지, 하면서 그동안 미친 짓 하고 살아온 거예요. 주님께서는 우리의 뿌리를 죽어도 다시 사는 그 십자가와 부활에다가 뿌리를 꽂게 합니다.
꽂아버리면 이제는 직업이 문제가 아니고 직업과 관계없이 우리는 영원히 산자가 되는 겁니다. 그 넘겨주는 증표가 뭐냐, 내 살과 내 피, “나는 차라리 너희에게 죽은 자가 될게. 너희는 산자라고 우겨라. 그래 산자 많이 해. 많이 해. 그래 너희는 산자 해라. 내가 죽은 자가 될게.” 이렇게 해놓고 하나님께서는 그 죽은 자를 살리심으로 말미암아 살았다고 여기는 모든 사람을 졸지에 죽은 자로 만들어버렸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14절,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인내가 뭐냐하면, 바로 인내라는 것은 자기 자신이 어떤 형편인 것을 지켜내는 거예요. 누구 앞에서. 예수님의 살과 피 앞에서. 그러면 제자들이 예수님을 부인했다 하는 그것이 주님 한테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왜, 당연한 조치니까. 죽은 자는 죽은 자 값을 해야 되거든요. “나는 주님을 싫어합니다.” “그래? 그게 네가 할 소리의 전부야. 네 마음속에 원래 그런 것이 있었어. 내가 그걸 탓하지 않을게.” “저는 주님을 버렸습니다.” “알았어. 버렸지.” “그러면 가룟유다는?” “그건 처음부터 원래 버림받도록 되어 있었으니 그 쪽으로 가고.”
주님 보시기에 사람들이 어떤 실수를 한다든지 어떤 죄를 짓는다든지 하는 것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오늘 제가 참 위험한 발언을 하는데 이게 위험한 발언이지만 저보다 먼저 이 위험한 발언을 한 사람이 있어요. 욥기에 보면 나옵니다. 욥이 하는 말이 “하나님이여, 인간이 죄짓는다고 해서 하나님에게 무슨 영향이 있습니까?” 그 말이 맞아요. 인간이 죄 지었다고 해서 하나님이 깜짝 놀라거나 그러지 않습니다. 원래 죄짓게 되어 있기 때문에.
주님은 용서를 했는데 왜 내가 나를 용서 못하지요? 이것은 내 구원은 내 구원 법칙을 따로 챙겼기에 그렇습니다. 그걸 버리시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그것은 세상에서 온 거예요. 그것은 죽은 자에서 온 거예요. 세상에 가면 전부다 거울들입니다. 내 모습을 비추는 거울들, 타인들이지요. 타인이 내 모습을 다 반영해 주고 있습니다. 나는 타인을 통해서 내 모습을 발견하고 내 목적을 발견하고 내 모델이 되고, 그러다 보니 전부 다 고만고만한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거짓말을 유발시키는 겁니다.
우리는 그 거짓말에 하나의 이데올로기처럼 잠식되어 가지고 우리끼리 힘을 안 합치면 우리는 죽어, 라고 하는 겁니다. 지금 사고 난 지 한 달이 다 되어가요. 아직도 애도하고 있잖아요. 지금 이 상황이 제가 꾸며낸 상황이 아닙니다. 실제 상황을 이야기합니다. 아직도 애도하고 있어요. 이게 뭐냐, 아깝다는 겁니다. 뭐가, 목숨이. 그 말은 뭐냐, 남의 목숨이 아깝다는 그 말이 결국 무슨 뜻이냐 하면, 내 목숨은 나한테는 제일 귀하다는 거예요. 그걸 보고 주님께서 죽으라고 준 거예요. 내 죽음을 마시고, 내 피를 마시고 내 살을 먹으라는 말은 그게 죽어야 된다는 거예요.
이 본문 3절에 나오는 “기록된바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이 말이 뭐냐 하면, 그런 비방을 내가 조성해 줄 테니까 그런 비방이 너한테 오거든 너는 구원받은 줄로 확신해도 좋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을 비방했던 그 비방이 너희에게 도달되도록 내가 조성했기 때문에 이 죽어 있는 인간이, 산체 하면서 죽어가는 인간들이 만들어낸 그 사고방식과 뭔가 다르게 생각할 때 그쪽이 얼마나 너를 비방하겠느냐, 하지만 그 비방이 이미 내가 당했던 비방에 네가 우리라는 이름으로 합류가 된 상태라는 말입니다.
성경에 말은 있지요. “고난 받으라. 고난 받으면 영광을 얻으리라.” 로마서 8장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그런 말들은 나오지만 우리는 그것을 ‘개척교회 하면서 고생한다는 그거구나.’ 그렇게 생각하는데 그게 아니고 그냥 사세요. 그 이야기가 또 나오는데 그냥 사시면 알아서 주님께서 여러분들을 욕하게 하실 겁니다. 그런 어려움을 주실 거예요. 그렇게 욕하게 할 때 WY ME, 왜 하필이면, 이라고 하지 말고 “이런 혜택을 저한테 주시다니. 완전히 로마서 15장 3절의 말씀이네. 주님만 받았던 비방이 어찌 나한테 동일하게 오지? 아, 우리구나. 천국가기 전에 이미 한 통속이라는 것을 느끼게 하는구나.”
이것은 우리 쪽에서 유발하면 안돼요. 이것은 아주 간교한 겁니다. 내 쪽에서 고난과 순교를 유발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제가 언젠가 강의시간에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아줌마들이 맛사지 받으면서 “어이 시원하다.” 하는 것도 고난이 될 수 있다고 했지요. 제가 고난이라고 단정하면 욕을 얻어먹지만 그게 고난이 될 수 있습니다. 노래방에 가서 노래 부르는 그것도 고난이에요. 왜, 아무것도 나를 기쁘게 하는 일이 아니고 주께서 주신 노래방, 주께서 주신 맛사지 방이기에. 어떤 상황이든 나를 위한 것, 주를 위한 것, 이렇게 가려내지 마시고 있는 것 자체, 태어난 그 자체, 쌍 커플 수술이 잘 안되었다 하면 그것도 고난이고 잘 되었어도 그 것도 고난이고, 모든 것이 나를 위한 상황이 아니고 주께서 주신 상황임을 우리가 고집을 하게 되면 세상은 우리에게 “그것은 네가 열심히 해서 얻은 거야.” 혹은 “네가 주님 섬기지 않아서 벌 받은 거야.” 이런 식으로 비방이 올 거예요.
그 비방은 주님께서 미리 받았고 그 받은 비방이 살과 피로서 우리에게 집어넣었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이 받았던 그 고난에, 도피방에 동참함으로서 이제는 나의 인생이 아니고 주님이 몸을 만드는 인생에 우리가 참여된 겁니다. 끝으로 이 말씀하고 마치겠습니다. 우리가 소망을 만드는 것이 아니고 소망이 우리를 만들고요 우리가 인내함으로 구원 받는 것이 아니고 인내가 우리를 새롭게 제조합니다. 나에서 우리로, 나에서 우리로.
그렇게 인내로 만들게 되면 주변의 택한 백성들이 우리를 통해서 주님의 인내를 맛보게 될 것입니다. 바로 우리는 그러한 도구, 기능을 하기 위해서 아무것도 안 하는 자로 세워준 겁니다. 청와대에서 하는 촛불 집회에서 학생들이 붙인 것이 있어요. 출애굽기 14장 14절 말씀, 그들은 그게 뭔지 모르지요. 내가 보니 출애굽기 14장 14절 말씀을 적어 놓았어요. “가만히 있으라.” 다 죽었다 그 말이거든요. 홍해 앞에서 하나님이 명령하는 겁니다. 가만히 있으라. 올해 우리교회 목표는 끝났습니다. 끝! 탁, 끝!
“가만히 있으세요.”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주의 목적이 내 목적보다 앞선다는 것을 우리가 같은 죽어가는 인간들 속에 있다 보니까 우리는 놓쳤습니다. 우리는 몰랐습니다. 제자들과 다를 바 없는 존재였는데 주께서 살과 피로 우리에게 들어오니 내 인생이 없고 주의인생인 것을 이제 알게 되었사오니 내 자체의 무게를 느끼지 않는 남은여생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