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강-롬 14장 17-20(하나님나라)140427-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로마서 14장 17절에서 20절까지 입니다. 신약성경 258페이지입니다.
로마서 14:17-20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께 기뻐하심을 받으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나니 식물을 인하여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말라 만물이 다 정하되 거리낌으로 먹는 사람에게는 악하니라.”
먹는 문제와 하나님나라가 같이 섞일 수 있다는 것이 우리로서는 상당히 납득하기 곤란하지요? 먹는 문제라면 먹는 문제로서 깔끔하게 정리가 되어야 하는데, ‘이것을 먹지 말라.’ 하든지 아니면 다 먹으라는 명령으로 지시조로 규칙을 세우면 우리가 이해하는데 아주 어렵지 않고 쉽습니다. “다 먹으래. 뭐든지 다 먹으래.” 혹은 “이런 것은 먹지 말래.” 하면 “그래, 안 먹어야지. 그러면 하나님께서 구원하실 거야.” 이렇게 되면 우리가 생각하기가 상당히 편한데 여기다가 식물, 음식물 문제를 언급하면서 17절에 하나님나라에 대해서 언급해 버렸어요.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라고 했을 때 하나님나라는 것은 너희들이 먹는 것 입는 것 가지고 신경 쓸 때 그것은 하나님나라의 백성답지 않다, 그것은 하늘나라의 삶의 모습이 아니다, 그런 뜻이거든요. 하나님 나라의 삶을 지상에서의 먹는 것과 입는 것과 대조를 시킨다는 것이 상당히 낯설게 여겨집니다. 어떻게 하늘나라가 이 땅에 많은 일들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먹는 것과 입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해서 그 먹는 것 입는 것과 대조가 되는가?
그것은 우리가 가야 될 하나님 나라는 우리 인간 세계, 나의 세계하고 원리상 다릅니다. 나의 세계로부터 시작해서 하늘나라 들어간다? 이것은 안 되는 겁니다. 먹는 것 입는 것 가지고 우리가 어떤 규칙을 세우게 되면 그 규칙 자체가 허물어져야 됩니다. 나는 이 규칙 가지고 천국 들어갈래, 이러면 천국에서 받아주지를 않습니다. 나를 구원하는 일체의 규칙이나 법도 같은 것이 우리한테는 없어야 돼요. 오대양 사건이 있는데 거기서 32명이 집단자살 했고 그 소유주가 유 병언이라는 소리가 있는데 1987년도의 그 사건을 보면서 지금 십일조를 이야기하는 그 모든 교회가 오대양사건을 유발하는 같은 구원 파라는데 저는 확신을 갖고 있습니다. 갑자기 아멘이 여러 곳에서 나오는데요.
십일조를 언급한다는 자체가 이것은 천국을 안 가려고 환장을 한 거예요. 대전공부에서도 어떤 목사님이 참석해서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십일조가 없습니다, 라고 하니까 나중에 어떤 분을 통해서 “목사님끼리 이야기할 이야기를 왜 교인한테 하느냐?” 그런 이야기를 했답니다. 그래서 그 집사님이 “주님 앞에서 목사가 어디 있고 교인이 어디 있느냐? 진리가 중요한 것이지.” 그렇게 이야기를 했답니다. 세상과 교회가 다른 것이 아니고 하늘나라와 세상이 다른 거예요. 따라서 교회를 어디에 집어넣는가, 세상나라에 집어넣어버립시다.
거기는 구원파도 있고 교회도 있고 오대양사건도 있는 거예요. 이들이 원했던 것은 뭐냐, 어떤 규칙을 원하는 것이고 어떤 법을 원하는 겁니다. 그러나 하늘나라는 이것 먹고 이것 마시고, 이런 법이 없어요. 안식일 법도 없고 십일조 법도 없고, 그 무슨 법도 없어요. 십계명 지키는 법도 없어요. 그저 모든 것이 완성은 사랑입니다. 사랑을 받아 봐야 알지. 사랑을 받지를 못하니까 사랑 안 받은 것을 티낼까 싶어서 법을 내 밀고 있는 거예요. “그래도 이건 지켜야지요.” 뭘 지켜! 천국의 삶을 제가 분명히 말씀 드립니다. 천국의 삶은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 삶이에요. 본인이 본인한테 아무것도 요구하지 마세요. 남이 요구하는 것도 호응하지 마시고, 남이 뭐래도 호응하지 마시고 본인부터 본인이 본인한테 아무것도 요구하지 마세요. 본인이 본인한테 닦달내지 마시라 그 말입니다.
하나님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고, 다른 말로 어떤 규칙이 아니고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는 것은 세상말로 한다면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 분위기, 그런 상황을 두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 상황. 그러니까 네 안에 너라고 요구할 수 있는 상황들은 다 걷어내고 비워라. 그 채우는 것은 의와 평강과 희락으로 내가 채워줄게, 이게 하늘나라에요. 이래야만 천국 가는 겁니다. 사람들은 천국 갈 생각 안하고 교회 사람이 될 생각을 해요. 그걸로 마감이 되어 버려요.
교회 사람은 되고 천국 못가면 교회 오나 안 오나 똑같은 것이거든요. 어떻게 하면 교회 사람이 되는가, 하지 말고 어떻게 하면 내가 천국에 들어갈 사람인가를 봐야 돼요. 교회라 하는 것은 타인이 나를 주시하는 세계입니다. 제대로 하느냐, 못하느냐, 자꾸 감시를 받고 그쪽 타인이 나를 주목하는 곳에 덩달아 나도 주목하게 되어 있어요. 남의 시선에 놀아나는 곳이 교회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주님이 어디를 주시하는가, 주님이 주시하는 곳은 신경을 못 쓰게 되는 거예요. 주님이 주시하는 곳은 어디냐 하면, 네 속이 지금 텅텅 비어있느냐를 보시는 거예요.
이것도 토하고 저것도 토하고 우리는 맨날 내 것이라고 여기는 것을 바깥으로 끄집어내는 생활을 해주는 것이 성령께서 그렇게 하시는 겁니다. 그 이유가 뭐냐, 성령께서는 요한복음 14장에 보면 아버지와 예수님과 우리가 하나가 되는 것이 목적이에요. 주님과 우리가 하나 되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에 그 하나 되기 위해서는 주님이 갖고 있는 그것만 우리한테 있어야 주님과 우리가 하나로 소통이 되고 연락이 되고 유지가 돼요. 그래야 그 안에서 함께 산다는 그 티가 나게 되어 있습니다. 주님이 좋아하지도 않고 원하지도 않는 것을 내가 갖고 있으면 주님께서는 그것을 빨리 게워내고 버리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은 내 것인데, 이것은 내 주특기고 내 자랑거리고 내 자존심인데.’ 다시 이야기할게요. 남들이 나를 주목하는 곳에 내가 주목하다 보니 남이 보는 체면을 귀한 것으로 여기고 내가 유지할 수밖에 없는 생활을 하는 거예요. 그게 안 되니까 한 맺히고 찌들린 생활을 하는 거예요. 인생이 스트레스 받고 힘든 이유가 남이 그걸 요구하기 때문에 내가 그 요구를 맞춰주려고 애쓰다 보니까 그게 힘든 거예요. 옷가게 하면서 제일 편하게 옷가게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손님이 오면 “내가 주는 옷 입고 가! 돈만 내고.” 이게 제일 편해요. 사람 죽은 집에 가서 “짬뽕 드시렵니까, 짜장면 드시렵니까?” 물어볼 필요도 없어요. “짬뽕이나 먹고 가. 돈만 내고. 빨리 먹고 가.” 이게 제일 편해요.
“뭘 원합니까?” “짬뽕” 남이 짬뽕을 원하니까 주방장은 더워도 짬뽕을 만들어내야 되는 거예요. 천국가도 그 노동하렵니까? 천국 가서는 좀 쉬어야 되지 않습니까? 천국가도 그 짓 할래요? 아무것도 주께서는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이렇게 사는 것이 힘든가? 남들이 나에게 같이 요구를 하기 때문에 그래요. 온 나라가 애도를 하라는 거예요. 애도가 자기 맘대로 됩니까? 전부 다 우울증 걸릴 일이 있습니까? 다 정신병 만들려고 하는 거예요, 마귀가? “너나 해, 너나. 너나 애도를 해.” 애도는 강요하는 것이 아닙니다.
먹는 것 마시는 것이 그 당시 로마교회의 문제로 있었던 것은 서로가 서로를 지켜보고 감시하는 모습이 교회의 모습이 되었다는 것에 대해서 사도바울이 지금 짜증을 내고 있는 겁니다. 이게 하늘나라냐 하는 겁니다, 서로 감시하는 게. 서로 감시하니까 형제를 업신여기고 있잖아요. 사람이 서로를 감시하게 되면 점점 더 채워지는 것은 자기에 대한 자존심과 체면만 가득 채워져요. 남이 하니까 나도 해야 된다는 부담과 강요 같은 것이 와서 나중에는 본인 스스로 정신병이 되어 가요. 광주 가니까 집사님이 이야기하대요. 온 천지가 다 미쳤다고.
지금 다 미쳤어요, 미쳤어. 심지어 대통령이 파란 옷을 입었다고 뭐라고 하고 있어요. 그걸 시비 거니까 그게 미친 거예요. 손님이 오는데 옷을 밝게 입어야 될 것이 아닙니까? 검은 옷을 입지 않았다고 그것 가지고 시비를 겁니까? 교회가 오대양처럼 얼마나 무서운 데인지 부흥회를 하게 되면 월요일부터 분위기를 잡아요. 헌금을 집단으로 강요하는 것이 목요일 저녁이거든요. 그 때 한 몫보고 떠야 되니까. 그래서 월, 화, 수, 분위기를 잡는 거예요. 특히 부흥회 하는 목적이 뭐냐, 교인들끼리 서로 싸우니까 그 반목을 하나로 만든다고 하는데 수요일 지나가면서 목요일 되면 노래 부르면서 “우리 서로 웃으면서 인사합시다. 형제님, 사랑합니다.” 이런 것을 하라고 하는데 우리교회도 오랜만에 이런 것 해 볼까요?
옆에 있는 사람 붙잡고 “이제부터 당신을 업신여기겠습니다. 나는 당신을 개똥으로 여기겠습니다.” 이렇게 한 번 해 보세요. 그쪽에서는 서로 사랑한다고 하는데 우리는 “이제부터 당신을 개똥으로 여기겠습니다. 형제님.” 한 번 해 보라고요. 체면상 못하겠지요. 해 보시면 속이 다 시원할 겁니다. ‘잘했어, 잘했어. 내 속이 다 시원해.’ 물론 이해타산 관계가 있어요. 명절날 장로님이 저한테 사과 한 궤짝 주시거든요. 그런데 장로님보고 “이제부터 당신을 개똥으로 여기겠습니다.” 하면 ‘이제부터 사과 없어.’
사람이 사는데 찌들리다 보니까 한이 맺혔어요. 한이 맺혔는데 이걸 풀 데가 없네요. 한이 맺혔는데 그 한의 내용이 뭐냐, ‘네가 무슨 자격으로 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주시하고 평가를 내리느냐’ 이것 때문에 한이 맺힌 거예요. 그럼 혼자서 살면 되지. 사람이 이미 한이 맺히고 남에게 평가를 받은 이상은 지리산 깊은데 혼자 살아도 나중에는 그 버릇이 남아서 ‘남들이 이 번 장날에 내 옷 입은 것 보고 잘 입었다가 할까?’ 슬슬 남의 평가가 그리워지기 시작하는 겁니다. 이 몸이 남을 기억해요. 남의 평가를 기억해요.
대체 남 없이는 못사는 인간으로 그렇게 조져놓아 버린 겁니다. 먹고 마시고가 왜 그렇게 문제가 되느냐 하면, 서로가 서로를 의식하면서 살아가기에 그런 거예요. 그게 무슨 하늘나라입니까? 꼴좋다. 그래서 하늘나라 가서 또 싸우려고? 하늘나라 주인 되시는 주님은 우리한테 아무것도 요구한 적이 없는데 우리가 이 세상 살아가면서 너무 남의 요구에 민감했고 이것이 버릇이 되다 보니까 남이 요구하기 전에 알아서 기는 그런 생활을 하는 거예요. 그래야 사회생활 잘한다는 이야기를 해요. 눈치껏 알아서 기라는 그 말이거든요.
참 우리가 이런 거지같은 생활을 그저 90평생만 한다는 것을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이게 100년까지 이어진다면, 어떤 분은 100년 이어지는 분도 있고 어떤 분은 85, 이렇게 가는 분도 있어요. 오래 산다는 것은 지저분한 인간을 그냥 질질 지연시키는 것뿐이에요.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께서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기 때문에 그냥 하나님만 바라보고 ‘그래, 난 남 생각 안 해. 난 하나님만 생각할거야.’ 이렇게 살 수 있는 바탕의 속성으로 태어났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이미 태어날 때부터 우린 죄 속에서 태어나기 때문에 하나님은 잊어버리고 그저 자기 잘남, 자기가 절대자 된다는 그 티만 내는 속성으로 살게 되어 있습니다.
자, 그래서 중요한 것은 뭐냐? 그러면 하나님의 조치가 필요한 거예요. 우리가 복음을 듣고 성경을 보고 교회 와서 말씀을 듣는 것은 ‘내가 어떤 조치를 하면 구원받습니까?’ 그것은 이제 잘라버리세요. 이제 잊으세요. 주님이 안 되고 안 되고 또 안 되고, 백날 해야 안 되는 우리에게 어떤 조치를 취하셨습니까, 그 소리 들으려고 우리는 와야 돼요. 그 조치가 뭔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이삭을 주지요. 귀한 아들 줍니다. 보세요. 아브라함이 여기 있고 하나님이 아들을 줍니다. 줄 때 아브라함은 기뻐해요.
늘그막에 사랑하는 아들을 얻었으니까 기쁘잖아요. 이러면 인간원리에 부합되는 거예요. 인간원리는 “네가 아들 있나, 없나?” “없어.” “그런데 나는 아들 있어.” “어, 드디어 하나님이 아들을 주셨어. 기도의 응답이라. 너만 아들 있어? 나도 아들이 있어.” 이게 아까 죽 이야기한 겁니다. 남이 원하는 것을 내가 맞춰줌으로서 그럭저럭 사람 사는 것처럼 그렇게 되는 사회 속에 우리가 놓여 있습니다. 일단 하나님이 주시니까 감사히 받았지요. 그런데 그 때부터 문제가 생겼습니다. 하나님의 그 다음 조치가 뭐냐 하면, 이걸 우리가 들어야 돼요.
“아브라함아, 네가 사랑하는 아들을 네 손으로 죽이라.” 그렇게 돼요. 우리는 첫 번째만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귀한 아들을 주셨다, 끝. 이것만 좋아하는데 아들을 주셔서 좋아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사적으로 아들을 얻어서 너만 좋아한다는 것은 아니고 아브라함아, 네가 그렇게 좋아하는 것은 너 말고 네가 속해있는 모든 인간세상 자체가 그 원리에서 못 벗어난다는 것을 보여주는 거예요. “아브라함 너만 좋은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도 아들 낳으면 다 좋아. 그러니까 너나 다른 사람들이나 다 한통속이고 그 한통속은 결코 하나님이 원하는 하늘나라에 갈 수가 없어.” 그런 뜻이라는 말이지요.
그러면 우리가 배우고 익힌 것이 그저 관념으로서 좋아한다는 이런 성질 외에는 달리 보여줄 것이 없는데 이런 인간을 어떻게 하늘나라에 들어가게 합니까? 그 조치가 뭐냐? 네 손으로, 그 사랑하는 독자, 미운 독자가 아닙니다. 사랑하는 독자, 아들을 네 손으로 죽여 버리라는 거예요. 하나밖에 없지요. 그런데 그 하나를 사랑하지요. 그 하나 밖에 없으니까 죽으면 아예, 없음, 무가 돼요. 간당간당해요. 있음과 없음 사이는 이 첫 번째, 첫째 숫자가 1이거든요. 하나가 있다는 것은 그것마저 없으면 아무것도 없이 되니까. 의미가 없어지니까.
그 하나, 그 다음에 그걸 사랑한다. 사랑하니까 이미 그 하나에 아브라함은 매달려 있는 셈이지요. 거기에 딱 붙어 있는 셈이지요. 그런데 그 하나를 어떻게 하라? 하나님께서 죽이라, 했어요. 하나님이 죽이시는 것이 아니고 아브라함 네 손으로 사랑하는 독자를 죽이라. 천국에 우리가 가고 싶습니다. 누가 가고 싶으냐, 하면 내가 가고 싶어요. 왜, 가고 싶은 주인공이 나니까. 그런 생각을 갖고 있는 것은 나니까 내가 가고 싶어요. 나는 천국 가고 싶다고 해놓고 ‘네가 가라.’ 그런 것은 없거든요. 생각하는 내가 천국에 가고 싶은 당사자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천국에 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바로 그 생각이 천국에 못갈 생각이라는 겁니다. 그게 너뿐만이 아니고 네가 같이 사는 모든 인간들, 이 세상에 태어난 그 많은 다수, 그 모든 다수의 공통적인 생각이 뭐냐 하면, 나,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나, 그리고 세 번째가 절대로 나는 죽어서는 안 된다는 것, 남이야 물에 빠져 죽든 말든 절대로 내 자식은 죽어서는 안 된다는 것, 나는 끝까지 살아남아야 된다는 것, 이것 있으면 천국에 못 간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사고를 일으켜서 아들을 죽이는 것이 아니고, 아들이 어디 갔다 오니까 교통사고가 나서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죽이는 것이 아니고 멀쩡하게 조금 전까지 아 있는 아들을 칼로 잡아 죽여야 된다는 지시와 명령을 받을 때 아브라함은 뭘 생각했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아브라함의……, 이것은 제가 하는 이야기가 아니고 요한복음 8장의 이야기니까 듣고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브라함은 나의 세계 말고 이런 식으로 이 지상에 나타날 오실 메시아의 세계를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아브라함이 예수님을 보고자 했고 바로 그 세계에 소속되지 않으면 자신은 구원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겁니다. 전에는 출발점이 나로부터 해서 내가 인정받는 세계가 곧 천국이기를 원했던 거예요. 현재 나의 이 모든 것이 인정받는, 현재 내가 내 아들 사랑하는 이 관계가 고스란히 살아 있는 그 상태로 안 죽고 그대로 빛이 나고 광이 나면서 그대로 천국에 들어가기를 원했던 나의 세계의 연장이 천국인 양 그렇게 여겼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세계가 허물어져야 되고 깨져야 되고 그것이 죽음 속에 빠져버려야 돼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그 순간 믿었다는 말이 굉장히 난해하고 중요한 의미가 있는데요, 그냥 아들 죽여 버리면 아들 하나 그냥 사라진 게 돼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아들 잡을 때 무엇을 겸하여 생각하느냐 하면, 그냥 내 아들 이참에 죽었네, 라는 것만 생각하면 안 되고요, 그것은 그리 되면 자기라는 것이 아들이 있었는데 아들이 죽고 나서 아들이 없어졌다, 남아 있는 것은 내 세계, 이렇게 되는 거예요. 이렇게 되면 천국에 갈 수가 없어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아들 하나 없었는데 아들이 죽었다. 그런데 그 아들 죽음에 나도 같이 참여했다. 그런데 몽땅 그것을 무효로 돌리고 수풀에 있는 수양이 하나 등장했다. 그러면 장차 나의 세계를 대신할 세계는 내가 관여하지 못하고 아버지가 어떤 분, 자기 아들을 바치는 양상으로 새롭게 만들어지는 세계가 지금은 나의 세계를 대치할 세계라는 것을 믿고 그 세계를 기다린 거예요. 이 말은 오늘 가게 손님 올 때, 나는 물건 팔았다. 손님이 돈을 지불했다. 그래서 나는 살았다, 라는 이런 생활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천국 가는 것이 아니고 어떤 손님이 왔다. 손님이 왔는데 뭔가 살 것 같았는데 시간 보내다가 안사고 옆집 가서 나는 ‘너같은 것 또 오기만 해봐라.’ 하고 죽이고 싶었다. 그 순간 ‘내가 그 사람 언제 봤다고 갑자기 죽이고 싶은가? 아, 이런 나는 천국에 갈 수 없구나. 그런데 내가 이렇게 죄인인 것을 까발리는 사건을 유발하신 분이 손님과 함께 동행 하면서 내 가게에 쳐들어왔구나.’ 이걸 느낄 때, 복잡해라, 하여튼 간에 그렇게 느낄 때 우리는 바로 다른 세계가 내가 요구할 수 없고 내가 나한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 그 세계만이 천국인지의 이유를 안다, 왜 나의 것을 요구하지 않는지의 그 이유가 밝혀져요.
나의 십일조, 나의 안식일, 나의 교회 나오기, 이런 모든 것을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 “가만 있거라. 내가 찾아갈게. 내가 모든 죄를 들통 낼 거야.”라는 식으로만 찾아오시는 것. 손님에 대해서 짜증은 내도 설마 내 아들을 내 손으로 죽이는 그 정도는 아니잖아요. 그 정도는 아니라고요. 그러한 일들이 내 뜻대로 안되고 항상 주님의 뜻대로 되는데 주의 뜻이 그냥 오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내 뜻을 꺾으면서 주의 뜻이 나타난다는 것이 우리로서는 참 주님이 찾아올까 걱정이 될 정도입니다. 오셨다 하면 무조건 내 뜻은 잘라버리니까.
그것은 우리를 사랑해서, 네 뜻이라는 것이 네 뜻으로 된 것이 아니고 남들이 너를 주목하고 주시하는 그 뜻에 우리가 비위를 맞춰준 거예요. “너희들의 요구하는 바를 제가 들어드리겠습니다.” 하는 식으로 거지처럼 빌빌 기면서 인생을 살아오거든요. 그러니까 그 순간은 바로 우리가 결국 한만 맺히고 그에 대한 짜증은 결국 누구한테 내느냐 하면, 울면서 주님한테 짜증을 내는 거예요. 대들고 따지고 이러면서.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힘을 모은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에요.
성경에 하나님 뜻에 대해서 참 잘나오는 대목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4장에 이런 대목이 나와요. “그런즉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 하는 말이 옳도다 내가 너희로 노력지 아니한 것을 거두러 보내었노니.” 이 말은 뭐냐, 네가 심지도 않은 것을 네 손으로 거두게 한다는 뜻입니다. 심지도 않았는데 거둔다. 이것은 인간세상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입니다. 다시 말해서 천국 생각도 안했는데 천국 보내주더라, 그런 뜻입니다. 천국 갈 생각도 안했는데 천국에 왔더라, 하기 위해서는 우린 어떤 생각을 해야 하느냐 하면, 내가 내 식대로 천국 가려고 온 시도를 했는데 그게 다 실패로 끝났더라, 라는 과정을 다 거쳐 줘야 돼요.
천국 가려고 기도원에 가서 기도하고 모든 돈을 다 세모 유병언에게 다 갖다 바치고 온갖 시도 온갖 것을 다 했는데 그게 다 안 되더라고 깨닫게 하시는 방식으로, 내 뜻을 꺾음으로 말미암아 타인이, 같은 고만고만한 인간들이 주장하는 그런 주장에 놀아나지 말라는 거예요. 휘말리지 말라는 거예요. 너는 십자가 바라보면 다 되었는데 왜 자꾸 십자가 + 이것은 먹어야 되고 이것은 먹지 말아야 되고, 왜 그런 것에 자꾸 휘말리느냐는 말이지요. 헌금 할 때는 다리미질을 해야 되고 교회 올 때는 양복 입어야 되고, 자꾸 그런 법에 대해서 목사가 시키는 것도 있지만 교인들이 원하는 것도 많아요.
“목사님, 이럴 때는 어떻게 할까요?” 제가 하는 말은 “심지도 않는데서 거둡니다.” 그 외에는 다른 할 말이 없는 거예요. 당신이 시도하지도 않은 것을 당신은 그냥……, 로또 사지도 않았는데 그냥 일등 당첨된 거예요. 이게 말이 되는 소리입니까? 서울대학교 지원도 하지 않았는데 서울대학에서 오라는 거예요. 그게 말이 되는 거예요? 천국은 그런 식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뭐라고 합니까? 당연히 이렇게 해야지요. “누가 내 허락도 없이 그렇게 했어요?” 주께서 “내가 했다.” 이게 바로 그리스도와 우리의 관계입니다. “내가 했다, 왜.” 이겁니다. 사울이라는 사람이 예수 죽이는 일에 앞장서서 예수 죽였잖아요. 예수 잡아 죽이고 가두고 하는 일이 그 당시에 사울만 한 게 아니에요. 많은 열심 있는 유대인들이 했다고요.
했는데 그 많은 사람 다 놔두고 유독 사울에게만 주님이 다메섹에서 찾아와서 건져 냈습니다. 바울은 “이게 바로 복음이다.” 그게 바로 복음, 그게 복음이라는 거예요. 안 찾아오셔도 되는데 찾아왔다는 거예요. “왜 찾아오셨습니까?” 주님이 하는 말이 “내가 심었거든. 네가 네 천국 가기 위해서 시도하기도 전에, 그 생각도 하기 전에 내가 너를 건지고자 아버지하고 다 이야기가 되었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그 생각, 사도바울의 생각과 하나가 될 때 비로소 하나가 되는 거예요. 그 하나, 생각이 하나, 뜻이 하나, “아무것도 한 것도 없는데 제가 뭘 했다고 저를 이렇게 건지십니까?”
구원받았으니 돈 내라는 이것, 십일조 내라는 이것은 말도 안돼요. 어떤 목사는 말하기를 구약에는 십일조니까 신약에서는 몇 배나 더 내야 된다는 거예요. 돈에 미쳐 환장한 인간들이에요. 헌금 안 해도 구원 받아요. 우리교회 있다가 나간 사람들은 이 말 제일 무서워합니다. 제발 그런 말은 우리 목사들끼리만 이야기하자고? 왜 그걸 목사끼리만 이야기합니까? 목사 저는 구원 안 받겠다는 거예요? 목회는 성공하고 천국은 안가겠다는 이야기입니까? 하늘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요, 라는 것은 이것은 인간들이 기껏 생각하는 것은 규칙과 법만 앞장세울 뿐이라는 거예요.
왜 그런가? 17절에 보면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그 다음에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오직 성령 안에서” 성령 안에서를 설명하기 전에 주보에 보면 이번 주 설교 요약이 있습니다. 일찍 와서 좀 보라고 해도 보지도 않고……. 거기 보면 누가복음 17장 20절 21절이 나옵니다. “하늘나라를 설명하는데 기존의 사람들은 시간과 공간으로 설명해주기를 요청했습니다.” 사람들, 바리새인들이 이렇게 요청한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이 대목을 먼저 설명해 드리고 성령에 대해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인간이라 하는 것은 자꾸 과거의 산물이에요. 누적된 과거가 지금의 자신이라고 이해하는 겁니다. 그런데 하늘나라에서는 과거라는 이것은 이미 없는 거예요. 이 과거는 없는 거예요. 사람은 그냥 닥치는 대로 살 뿐입니다. 사람이 뭔가 과거를 생각하고 미래를 생각하는 것은 지금 할 일이 없다는 뜻이에요. 옛날 다방들, DJ 다방들 “오늘도 비가 촉촉이 내리는 밤입니다. 여러분에게 음악을 배달하는 환입니다.” 머리 기르고 박스 안에 앉아서 하는 그런 다방에 가는 것은 그만큼 할 일이 없다는 거예요. 거기 앉아서 팝송 듣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안 바쁘다는 이야기에요. 곧 닥치는 일이 없다는 이야기거든요.
내가 죽을까 겁난다는 말은 지금 할 일이 없다는 거예요. 사실 코앞에 닥친 일만 할 뿐인데 조금만 일이 생기면 ‘죽으면 어떻게 되지? 과거에 내가 얼마나 잘 나갔지?’ 이것은 그만큼 지금 태평하다는 뜻입니다. 자꾸 과거를 끄집어내는데 과거는 이미 사라진 과거를 현재가 자기 사라진 과거 속에서 체험된 것을 가지고 재편집한 지금의 일이에요. 과거는 없는 거예요. 하루 살면 어제는 날라 갔거든요. 제가 거짓말 하는 것이 아닙니다. 60을 살면 59년은 다 날라 가버렸어요. 날라 갔는데 없는 것을 왜 생각합니까? 40대, 20대, 이미 없는 이야기에요. 지금 있다 하는 것은 40대를 생각하는 지금 60대만 있을 뿐이에요. 좀 비정하게 이야기해서 그렇습니다. 제말 맞아요.
문제는 그러면 우리의 과거 없이는 현재도 없잖아요, 하잖아요. 그 과거는 미래가, 주님이 채워주는 거예요. 과거라 하는 것은 주님께서 발생시켜 주는 그것이 과거인 겁니다. 어렵지요. 이 말은 하나님 나라라는 것은 인간이 알고 있는 시간과 공간을 벗어나야 됩니다. 우리가 여기 있다, 하는 것은 떠나라는 거예요. “얘야, 처음에 엄마 아빠가 신혼 때 살던 봉화의 이 방이 일 년에 십만 원 주고 살던 곳이야.”라고 제가 딸한테도 이야기 했지만 그곳에 가니까 문이 잠겨 있어요. 그 공간은 사실은 떠나라는 것이거든요.
떠났으면 거기 왜 가는가? 주께서 그 때부터 인도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미래의 주님께서 우리의 과거를 다 채우시고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주님께서 추수하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네가 심지도 않았는데, 태어나지도 말아야 했는데 태어나게 한 그 손길이 바로 주님의 손길이었다는 겁니다. 그걸 지금에 와서 고백하는 거예요. 어떤 장소가 있다는 것은 떠나라는 이야기고 어떤 시간이 있다는 것은 잊으라는 이야기입니다. 잊으라는 이야기고 떠나라는 이야기에요. “목사님, 그게 잘 안되잖아요.” 되게 해 주십니다. “어떻게 되게 해 주십니까?” 죽이면 다 돼요. 죽이면 있는 장소에서 떠나고, 장례식장으로 가고 내가 생각했던 시간도 다 떠나버립니다.
죽으면 되는데 아, 안 죽을 때는 자꾸 과거에 매이는 거예요. 이번에 배사고 난 뒤에 최고 유행되는 노래가 김범수의 ‘보고 싶다.’ 라는 노래랍니다. 그 가사 뭐냐, 광주 가서 물어보니까 우 집사님이 단박 이야기해요. “얼마나 보고 싶다고요?” 하니까 “죽을 만큼” 그러니 그게 얼마나 과거에 얽매이는 거예요? 제가 듣기에는 뭐냐 하면, 죽을 만큼 보고 싶다는 그 말은 “내가 하나님 만나면 죽일 거야.” 나한테는 그렇게 들려요. “내 자식 죽인 당신을 죽일 거야.” 그렇게 들린다는 말이지요.
세상이 이렇게 하나님을 죽이는 곳입니다. 왜, 내 것을 건드렸으니까 죽여 버리겠다는 거예요. 교인들은 점잖아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주님을 미워하고 싫어하는 대신 “오늘도 형제를 사랑합니다.” 이 짓 하면서 자기가 죽이고 싶은 것을 억누르고 감추고 있는 거예요. “형제여, 안녕하십니까? 오늘도 이렇게 보게 되어 감사합니다.” 십일조, 주일성수하면서 하나님 죽이고 싶은 것을 내 인간성이 하나님보다 훨씬 좋아서, 하나님 믿는 나, 인간성 좋은 착하고 대견한 존재라서 “하나님, 내가 참을게 내가. 성질 좋은 내가 참을게.” 이런 식으로 예수 믿어요. 희한해요, 희한해.
여러분, 죽을 만큼 보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까? 하나님은 이렇게 합니다. “네가 칼을 들고 죽을 만큼 보고 싶은 그 사람을 네가 죽여라. 게워내라. 비워라.” 나는 너한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데 네 것이 있기 때문에 자꾸 자기한테 있는 것 가지고 하나님, 이것 드릴 테니 복 주세요,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누가 요구했습니까, 주님께서. 누가 달라고 했습니까? 심지도 않은 것을 거두는데. 신앙생활 한다고 평생 공들이고 평생 애먹었다는 거예요. 그것은 자기가 자기한테 한 맺혀서 그래요. 남들이 요구하는 대로 받쳐주지 못하는 내가 미워. 그런 내가 미워.
신앙생활 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를 숭배하는 생활, 우상숭배자로서 교회 나오고 있습니다. 주의 조치는 그게 아니에요. 잊으라는 겁니다. 주께서 만들어주고 있으니까 네가 너 자신을 만들지 말라는 것. 멋있게, 그 ‘멋있게’의 기준은 뭐냐? 남들이 그렇게 요구했고 우리는 거기에 길들여져서 ‘저 어때요?’ 하고 남들 보라는 듯이 나서는 거예요. 이 버릇이 그대로 하나님 앞에도 등장하는 겁니다. 성령은 바로 아버지가 아들을 죽였다는 사건을 들이대는 사건이 바로 성령이 나타나야 가능한 십자가사건입니다.
성령은 우리의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책망하시면서 책망의 근거가 있어요. 아버지가 아들을 죽였잖아. 그 죽은 아들 속에, 그 죄 속에 바로 네 죄가 포함되어 있다는 말이지요. 하나님이 아들을 십자가에 죽인다는 것은 너 자신을 죽이지 아니하면 너는 구원 받을 수가 없는 거예요. 하나라 하는 것은 우리가 새롭게 출생되어야 얻을 수 있는 거예요. 주님과 하나 되는 것은 주님 안에서 새롭게 출생되어야 돼요. 성령은 뭐냐? 우리의 모태입니다. 하나님의 자궁이에요.
그 안에서 우리는 누구를 만나냐? 십자가 지신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만나서 나 살기 위해서 남 죽이는 내 모습과 남 살리기 위해서 스스로 아버지 앞에 죽임을 당하는 주님의 모습과 극한 대조를 볼 수가 있어요. 그래서 우리는 어찌할꼬. 교회 10년, 20년, 30년, 인간 50, 60, 70, 80을 살아도 눈만 뜨면 나밖에 모르는……, 나밖에 모른다는 이것도 여러 번 이야기했지만 사실은 나밖에 모르는 내가 누군지도 몰라요. 남이 요구하는 나, 남의 말에 그냥 노예처럼 그냥 가는 거예요. 이번에는 노란 리본 달고 그 다음에는 까만 옷 입고, 이렇게 남 시키는 대로 다 놀아나는, 줏대도 없고, 그것을 저는 배회하는 인생이라고 하는데 배회하고 떠돌아다니고 방황하고, 몸을 정착할 곳이 없어요.
도대체 내가 누군지 정답이 없어요. 그저 오늘은 뭐할까, 내일은 뭐할까, 인터넷 찾아서 주변 사람들에게 묻는 거예요. 같이 울면 같이 울고 웃으면 같이 웃으면 되는 인생, 결국은 내 것은 하나도 없는 인생, 그러면서도 우리는 모릅니다. “왜 저를 죽이십니까?” 죽음까지는 너무 심하고 “왜 저를 늙게 하십니까?” 어제 토요일에 어머니 생신을 맞이해서 동생 가정하고 파계사 입구 한식집에 앉아서 식사하고 밖에 나와 보니까 건물은 하나도 안보이고 팔공산 전경이 다 들어왔어요. 갑자기 숲만 보이니까 초등학교 3학년 때 소풍갔던 게 생각났어요. 그 때로 되돌아간 느낌을 받았습니다.
문제는 뭐냐, 문제는 계속 늙어가고 있다는 사실이에요. 나만 그렇게 볼 뿐이지 실제로 그렇게 보는 내 모습은 지금 이미 60이 넘어 늙어버렸다는 말이지요. 초등학교 학생이 아닌 거예요. 거기서 느낀 것은 뭐냐, 내가 원하는 세상은 어디에도 허락된 적이 없다는 거예요. 그런데 무슨 고집이 아직도 나는 젊다, 안 죽는다, 버틸 수 있다, 이 고집은 분명히 마귀가 나에게 현혹시킨 겁니다. 진짜 현실 파악하지 못하고 네 꿈, 네 자아, 네 미래, 네 소망에 약 먹고 도취되라고. 죽을 때까지 환각 속에 있으라고 마약을 매일같이 먹이고 있는 것을 느꼈어요.
성경을 안 보게 되면 십자가를 안 보게 되면 우리는 매일같이 과다한 환각 속에 마약중독자가 되어서 너도 미치고 나도 미치고 다 같이 미치는 거예요. 그리고 서로에게 묻습니다. 오늘은 뭘 보면 되지? 오늘은 무엇을 이야기하면 되지? 서로가 서로에게 묻고 있어요. 사람이 성령 안에서 주님과 한 마음이 되면, 내가 아무것도 하지도 않았는데 구원받게 되면 우리 안에 모든 내용은 주께서 채우십니다. 채우시게 되면 “내가 당신을 업신여기고 개똥같이 여기는 이 마음으로 저는 태어났습니다.”라고 고백해요.
나는 배웠으니까, 나는 도사니까, 나는 진짜 천사니까, 이걸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나는 당신 평생 개떡같이 여겼어요. 나는 당신 인간취급도 안했어.” 그게 바로 건방지게 당신 앞에 선 나의 본 모습이다……, 말을 그렇게 하면 싸움이 일어나니 속으로, 그런 자세로 나타나게 되면 그 모습이 얼굴에 다 나타나게 돼요. 그게 뭐냐? 의와 화평과 희락입니다. 당신을 지적하지 않고, 자기부터 지적해야 할 판에 누굴 지적해, 당신을 감히 평가하거나 비판할 그런 자격도 안 되는 모습으로 타인 앞에 서는 거예요. 서게 되면 남 개똥이라 하기 전에 “나부터 너보다 더 개똥이다. 내가 어떻게 당신을 평할 수 있어?” 그 마음자세나 행동들이 결국 교회라는 것을 하나님 나라로 만들어 내는 겁니다.
그래서 교회 좋다는 말이 아니고 그런 식으로 저쪽 하늘나라에 가는 거예요. 지금부터 그런 생활이 되어야 갈 수 있지 지금 그런 생활 모르면 못갑니다. 성령께서 못난 인간들 깨우는 이유를 아시겠지요. 그 이유는 서로 못남을 자랑하라는 이야기에요. 그 못남을 자랑하고 그것이 이미 시작된 하늘나라고 성령안의 생활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남들 평가에 놀아났는데 도대체 너무 놀아나서 내가 누군지도 모르고 배회하고 방황하는, 남의 시선만 의식하는, 정말 마귀에 놀아나는 불쌍한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성령께서 찾아와 주셔서 십자가 앞에 세우시고 정말 아무것도 아니기에 모든 것을 이미 얻게 된 그런 사람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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